최종원, 『종교개혁』.

최종원, 『종교개혁: 중세에서 근대로의 역사적 대전환』, 도서출판 길, 2026.

전반적으로 괜찮은, 꽤 훌륭한 한국어로 된 종교개혁사다. 한국인 저자의 저서와 번역서를 통틀어서 이 정도로 충실한 저서는 없는 것 같다.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기본 교과서로 사용하기에 매우 적합하다. 현실적으로 채택되지는 않을 것 같지만.

이 책의 가장 훌륭한 점은 연구사다. 여러 지역과 나라 및 교파에서 전개된 각각의 종교개혁사 및 자신들의 입장에서 기술된 수정주의와 연구방향이 매번 정리되어 있다. 중요한 저자와 저술이 정리되고,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어, 종교개혁사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이 출발점으로 삼을 만하다. 안타까운 점이라면, 독일이든 잉글랜드든 저자가 소개하는 수정주의나 연구방향의 전환을 가져온 중요한 저서들이 한국어로 번역된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 이 점은 저자가 지적하는 종파적 구속복의 문제이기도 하다.

저자가 지적하는 한국에서 종교개혁사 연구의 종파적 한계(60)에 대해 약간만 이야기해 보자. 애초에 한국에서는 서양사 연구자 수 자체가 많지 않은데다, 대학에 자리잡지 않고서는 연구를 지속하기도 어렵다. 국교로서의 그리스도교의 경험을 가진 유럽국가들은 일반대학에 신학부를 두거나 역사학부에서 종교개혁이나 교회사를 연구하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한국에서 종교개혁 연구자의 대다수 혹은 거의 전부는 신학교 내지 신학대학에 소속되어 있다. 이런 신학교들은 거의 전부가 교파 내지는 교단 소속이다. 통상 신학교seminary(원래, 못자리 또는 온상이라는 뜻)는 DNA라 불린다. 교단 소속의 신학자는 호교론을 넘어서 호교파론 내지 호교단론적 성향을 띄고 있다. 이 자체를 잘못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역사학자로서의 객관을 지향하는 자세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 더욱이 이 분야를 흔히 교회사라고 칭하지만, 상당수 신학교에서는 이를 스스로 역사신학이라 부른다. 단순히 말의 선후를 바꾸어 놓은 것 같지만, 역사를 통해서 신학을 지향한다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더욱이 주요 교파들은 종교개혁기를 공통으로 하면서도, 자신들의 신학적 영웅을 가지고 있다. 이를 중심으로 종교개혁사를 서술하는 것은 어찌 보면, 팔이 안으로 굽는 것 같은 당연지사. 그 안에서 감동적이며 은혜로운 종교개혁자들의 영웅적 이야기에 들이대는 냉정한 시선과 역사적 평가가 설 자리는 찾기 어렵다. 그 결과인지, 다른 이유에서 인지는 모르지만, 이 책에서 소개하는 수많은 종교개혁에 대한 책들은 한국어로 찾아보기 어렵다.

꼭 이 책과 저자의 문제라기 보다 종교개혁을 바라보는 관점에 몇 가지 문제를 짚고 싶다. 널리 통용되는 종교개혁 내지 루터나 칼뱅에 대한 전형적인 견해, 종교개혁이 근대의 문을 열었고, 국민국가와 내셔널리즘으로 향하는 초석을 놓았으며, 오늘날 서유럽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길로 이어진다는 견해는 19세기에 형성된 것이다. 다시 말해, 이미 구축된 국민국가 또는 이제 구축해야 하는 과업으로서의 국민국가라는 목표를 두고, 과거를 회고적으로 반추하면서 쓰여진 역사다. 그 과정에서 루터와 칼뱅은 비단 신앙 뿐 아니라 민족과 문명의 영웅으로 떠오르게 된다. 저자도 이점을 여러 곳에서 특히 8장에서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19세기 말에 새롭게 국민국가로서의 독일을 그것도 카톨릭인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 등을 배제하고 프로이센 중심으로 구축하고자 했던 비스마르크와 당대의 지도층은 독일 민족 형성의 중심에 루터를 두고 신화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이미 14세기부터 수십 종의 독일어 성서가 번역되어 있었고, 루터도 이를 참고했지만, 루터가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처음 번역한 것 같은 신화가 퍼져서 오늘날 한국에서까지 반복되고 있다. 루터의 기여와 한계는 책에 잘 정리되어 있으니 반복할 필요가 없겠다. 이 책에서 주목해서 읽어야 하는 것은 해석사다.

덧붙여서 생각해 볼만한 점이 하나 더 있다. 흔히 루터로 말미암아 시작된 종교개혁을 일컬어 독일 종교개혁이라 칭한다. 대부분 스스럼없이 받아들이지만, 때로 곱씹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때 독일이라는 나라가 있었는가? 무엇을 독일이라 불러야 할까? 우선, 독일이라는 명칭과 독일왕이라는 칭호는 여러가지 형태로 꽤 오래 전부터 사용되었다. [11세기부터 사용된 튜턴인의 왕Rex Teutonicorum, 슈바벤(호엔슈타우펜 왕가의 영지였던 독일 남부의 역사적 명칭)의 왕Rex Alemanniae, 독일의 왕Rex Germaniae는 한국어로는 모두 편의상 독일왕으로 번역한다. 이들 모두는 동프랑크 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선출자 내지 후계자 또는 계승권자를 가리키는 말로, 독일왕으로서 귀족들과 신종서약을 맺었다기 보다 황제위에 부속되는 칭호들이었다.] 15세기에 신성로마제국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부르고뉴를 영구적으로 상실하자 독일 민족의Nationis Germanicae라는 수식어를 국호에 덧붙였다. 토착어로서의 독일어가 나타난 것도 꽤 오래전이다. 독일이라는 말이 오래전부터 등장한다고 해서, 독일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 로마-독일 왕 처럼 모든 명칭을 뭉뚱그리는 표현을 사용해서, 이 지역의 역사를 독일이라는 이름으로 전유할 수 있는 것일까? 여러가지 이유로 독일이라는 명칭을 스스럼없이 사용하고 있지만, 훗날에 그들의 일부가 독일이 된 지역에서 있었던 종교개혁, 이 종교개혁은 신성로마제국의 종교개혁이라고 불려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신성로마제국의 독특한 국가형태, 황제를 주권자로 인정하는 수많은 수백에 이르는 영방국가, 자유도시, 직할령(제국관구)으로 이루어져, 각기 자신들이 획득한 특권을 보유하는 한에서 신성로마제국을 구성하지만, 실상은 수많은 지방들로 구성된 다민족, 다언어, 다종교[다교파]의 집합체. 주권자인 황제가 왕, 대공 등의 직위를 겸한다고 해서, 영토적, 정치적 통일을 이루지도 않았으며, 결국 훗날에 여러 나라가 독립하여 국민국가들을 이루게 된 제국. 중세적이라고 폄하해 버리기에는 너무나 오랫동안 존속했던 제국[프랑스 대혁명 이후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으로 비로소 해체]. 나폴레옹이 구축한 라인동맹을 무너뜨리고 오스트리아 주도로 1815년에 형성된 독일연방을 전쟁으로 무너뜨리며 오스트리아를 축출하고 1866년 프로이센 중심으로 형성된 북독일연방을 기반으로 탄생한 오늘날의 독일과 가까우면서도 멀어보이는 그 간격. 독일연방은 사실상 국가연합conferation으로 다민족, 다언어 국가로 구성되어 사실상 신성로마제국의 유적에 가까웠던 반면,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북독일연방은 진정한 연방국가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후 남부 4개국을 통합하여 1871년 비로소 오늘날의 독일에 가까운 독일제국을 형성하게 된다. 볼테르에 의하면, 신성하지도, 로마도, 제국도 아니었던 신성로마제국. 바로 이러한 정치적 특성 속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나름의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의 후원과 보호 없이는 성공할 수 없었으며, 그랬기에 그는 때로 초창기의 과격했던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권력의 편에서 농민을 비난하기에 이르기도 했다. 신성로마제국의 정치적 분열, 정치적 복잡성, 카톨릭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황제의 권력이 영방으로 침투할 수 없도록 하는 그 환경 자체가 루터의 종교개혁을 성공시킨 가장 중요한 요건이다. 사후에 루터의 종교개혁이 독일의 토대 또는 초석을 놓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신성로마제국의 정치적 특성 안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남는 것은 영웅 루터에 대한 칭송뿐.

이렇게 종교개혁을 파악하다 보면, 16세기 유럽의 여러 곳에서 벌어진 종교개혁이란 그 자체로 정치적 행위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비단 잉글랜드에서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종교개혁은 프로테스탄트에서든 카톨릭에서든 신앙이 개인의 삶 속으로 깊이 침투하는 과정이며, 삶을 더 강하게 규율하는 과정이었다. 그렇기에 재그리스도교화라고 부르기도 했다. 왕국 단위로 이루어지든, 제후의 통치 영역 단위로 이루어지든, 아니면 스위스에서처럼 도시 단위로 이루어지든. 사람들에게 종교적 의례의 변화든, 생활 습관에 대한 변화든, 강제하려면 그것은 각각의 단위에서 통치권력과 결합되어야만 가능했다. 왕국의 의회 또는 왕을 움직이든지, 시의회를 움직이든지. 거의 모든 종교개혁은 권력과 결탁했다. 권력을 통해서만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침투시킬 수 있었다. 반대로 정치권력 역시도 종교와 결탁했다. 종교를 기반으로 합스부르크와 싸우는 동맹을 구성했으며, 심지어 여기에는 카톨릭인 프랑스도 결합했다. 스페인과 중앙유럽 양쪽에서의 포위가 원인이었다. 종교는 권력을 사람들에게 침투시키는 수단이기도 했다. 종교개혁의 결과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해당 지역에서 정치와 종교가 일치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이 왕국 단위이든, 제후와 영방 단위이든, 도시 단위이든 잉글랜드, 스페인, 프랑스, 스코틀랜드, 제네바, 취리히 등 모두가 마찬가지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의 화의 내용인 군주 및 제후의 종교가 영방의 종교를 결정한다는 것은 제국 안에서의 공존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영방을 정치적 단위로 본다면 이는 간명하다. 정치권력과 종교의 일치인 것. 이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확정되기에 이른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는 18세기 이후 계몽의 시대에 혁명의 시대에 비로소 이루어진 일이다. 어떤 지역에서 어떤 단위에서 종교개혁이 이루어졌는지는 16세기 해당 지역의 정치적 통합성의 정도를 보여준다.

저자도 종교개혁이 정치권력과 종교와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과정이자 행위였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책의 곳곳에 그러한 기술이 반복되고 있어 인용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럼에도 책의 구성이나 전개방식은 보다 전통적인 종교개혁에 대한 서술을 따라가고 있다. 스스로 내린 결론이 자신의 저술에 관철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전통적인 종교개혁에 대한 관점과 그와는 다른 해석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달까, 망설이고 있달까.

또 하나 지적하자면, 이것 역시도 저자 만의 문제는 아니고 종교개혁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 대부분의 문제인데, 중세에 대한 정형화된 인식이 있다. 종교개혁이나 근대에 대한 연구자들은 가끔 중세를 무대 배경 그림 쯤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나무 한 그루 세워놓고 집 하나, 성 하나 세워둔 연극이나 인형극의 무대 그림 말이다. 극도로 단순화되어 세계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 책에서도 곳곳에 그런 표현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면, 중세는 보편제국과 보편교회가 존재했다는 식의 언급이 그렇다. 보편제국이 언제 있었나? 로마제국의 붕괴 이후에 보편제국과 보편교회가 계속해서 존립했던 것은 15세기에 붕괴한 동로마 즉 비잔티움 제국 뿐이다. 서로마 지역, 오늘날의 서유럽과 중앙유럽 및 북부 아프리카를 아우르는 지역에서 보편제국은 존재한 적이 없었고, 유럽 대륙에서만 부분적으로 카롤루스 왕조의 카롤루스 마그누스(샤를마뉴)를 전후해서 9세기 전반을 포함해 불과 수십년간이다. 그의 손자 카롤루스 칼부스(대머리왕)은 끝내 동프랑크를 통합하지 못했다. 다시 수십년간 황제는 이름 뿐이었으며, 10세기 중엽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오토 1세가 독일과 이탈리아를 통치했으나, 이탈리아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황제는 있었지만, 이제 황제는 독일 지역과 이탈리아의 일부를 봉건적으로 관할하는 데 그쳤다. 그나마도 간헐적이었다. 여기저기서 왕국이 자리잡고, 몇몇은 신성로마제국의 일부로, 나머지는 그와 무관한 왕국으로 유지된다. 보편제국이라는 신화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보편제국은 없었다. 무질서가 있었다면 모르지만. 있는 것은 이름 뿐이었다.

보편교회라는 이름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아리우스파와 다른 이단들이 제압된 후, 옛 서로마제국의 영토에는 그리스도교는 하나만 존재했다. 이를 보편적이라는 이름으로 카톨릭이라 불렀다. 보편교회라는 말은 다른 교회가 없었다는 것 뿐이다. 광활한 서로마 영토의 교회를 로마의 교황청이 관할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교회는 왕국 따라 지역에 따라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보편교회는 있었다. 모두가 카톨릭 교회였다. 그러나 각자 자기 나름의 카톨릭 교회였다. 이름 뿐인 보편이었다. 보편제국와 보편교회가 중세적 의미에서 다른 제국이나 다른 교회가 없었다는 의미에서 보편이라면, 나름의 의미가 있지만, 보편교회와 보편제국이라는 말에서 연상되는 근대적인 중앙집권 내지는 일관성있는 사상과 명령체계를 가진 통일된 교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교황권에 대한 과장도 끊이지 않는다. 종교개혁에 대한 언급 과정에서 교황은 거의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전능한 존재처럼 그려지기도 한다. 개혁의 정당성을 강변하려는 뜻은 잘 알겠다. 교황은 전 유럽 신자의 삶을 좌지우지하고, 파문을 고리로 왕과 제후를 굴복시키며, 그리스도교 세계 전체의 주교 임명권을 행사하는 등 막강한 권한과 함께 부를 누리며 타락했던 것처럼 말한다. 만약 그럴 수 있었다면, 십자군 전쟁에 제발 나서달라고 그렇게 호소할 필요가 있었을까? 면벌부는 왜 팔아야 했을까? 프랑크 왕국에서 주교는 줄곧 왕이 임명했다. 많은 주교는 병력을 이끌고 전쟁에 나가는 무장이기도 했다. 잉글랜드를 정복한 노르만 왕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077년의 그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 사건, 눈 속에서 무릎 꿇었다고 과장된 사건,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하인리히 4세의 갈등은 황제가 밀라노 주교에 대한 서임권을 행사한 데서 비롯되었다. 밀라노는 북부이기는 하나 어디까지나 이탈리아다. 교황과 황제가 다툰 것은 이탈리아의 주교 서임권을 두고 일어난 분쟁이었다. 파문에서 벗어난 황제는 내전에서 승리한 후, 1084년 교황을 폐위시켰다. 1122년 하인리히 5세와 교황 갈리스토 2세 사이의 보름스 협약으로 교황권이 신장되었다고 말하지만, 주교의 반지와 지팡이를 수여하는 성직서임권을 교황에게 넘긴 것이지, 홀笏로 표시되는 주교의 정치적 권리는 여전히 황제가 수여하는 것이었다. 주교후[주교-제후bishop-baron]에 한 발 걸치게 된 것이다. 누구를 주교로 임명할 것인가는 어디까지나 권력과 상황의 문제였다. 반대로 그 이전에는 종교적 권리까지 왕이 행사했다는 뜻이다. 막시밀리안 황제는 저지대의 주권자로서 위트레히트의 주교를 선정할 때, 자신의 사생아를 주교에 임명하는 과정에서, 자기편이 될 것이 확실한 교황에 기대는 대신, 지역에서 추대한 경쟁자에게 뇌물을 주어서 해결했다. 왕이나 귀족의 상속권이 없는 아들, 사생아인 아들을 주교로 임명하는 것은 제국 전체, 유럽 전체의 관행이었다. 성직서임권 분쟁은 중요한 문제이기는 하나 과장되었거나 잘못 이해되었다. 이탈리아 바깥에서 때론 이탈리아에서 조차, 교황이 주교 임명에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을 때는 분쟁 상황에서였다. 잉글랜드 종교개혁을 촉발한 헨리 7세와 아라곤의 캐서린의 이혼이 교황의 허락이 필요했던 이유는 아라곤의 캐서린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의 왕인 카를 5세의 고모였기 때문이었다. 프랑스는 이미 갈리아주의의 영향 하에서 독자적인 카톨릭 교회를 추진하고 있었고, 잉글랜드가 떨어져 나간 후, 교황은 더 이상의 분열을 두려워해서, 스코틀랜드, 스페인 등 곳곳의 주교 임명권(그가 행사하고 있었는지도 불분명한)을 그 나라의 주권자에게 부여했다. 군사력이 제한된 교황은 생각보다 허약한 존재였다. 더욱이 16세기 이후 요한 바오로 2세 전까지, 약 500년간 교황은 이탈리아인이었다. 사실상 근대의 카톨릭 교회는 이탈리아를 관할하는 교회였다. 교황은 상징적 종교적 권위로 어느 정도의 통제력과 권한을 행사했으나, 그뿐, 정치권력을 좌우하는 데는 이를 수 없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루터나 칼뱅의 글을 읽으면, 교황은 전지전능한 악마처럼 묘사된다. 독일 지방에서 프로테스탄트 제후들과 결탁한 루터나, 프랑스 왕을 개종시켜 프랑스를 프로테스탄트 국가로 만들려던 칼뱅에게는 각자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저자가 바르게 지적하는 대로, 독일은 국민국가를 지향하던 19세기에 이에 호응해서, 카톨릭을 비난하며, 프로테스탄트 프로이센 중심의 제국이자 국민국가를 구성하려했다. 이 둘은 결국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카톨릭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식민지 개척에 대항하여 뒤늦게 뛰어든 프로테스탄트 네덜란드와 잉글랜드가 자신들의 정당성을, 미개하고 뒤떨어진 카톨릭에 대응하는 합리적이면서 경건한 프로테스탄트의 대결로 묘사한 것도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16세기부터 19 및 20세기에 이르는 긴 기간 동안 여러가지 정치경제적 문화적 필요에 의해 형성된 이미지를 과거로 투영해서, 종교개혁을 정당화하는 논의의 기반으로 삼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해석이자 이데올로기이며, 사후적 해석이다. 카톨릭에 문제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측면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항상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다른 요인이 필요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신성로마제국의 독일지방, 스위스의 도시국가들, 카톨릭 종교개혁이라 불렸던 스페인 그리고 프랑스에 이르기까지, 모든 형태의 종교개혁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해당 지역의 정치적 단위에서, 왕국, 영방, 도시에서 정치권력과 교회의 결합이다. 교회는 국가교회화, 도시교회화 되기에 이른다. 훗날 이들 국가들에서 상당 기간 동안 국교회가 형성되었다. 그 이전에는 국가교회가 아닌 보편교회였다는 식의 이분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중세 전기의 보편교회는 서로마제국을 형성한 프랑크 왕국의 교회이기도 했다. 바다나 산맥 등으로 지리적으로 나뉘어진 곳을 필두로 해서, 지역별로 왕국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형성되었으며, 영토에 고착되어 영토국가의 형태를 띄기 시작했을 때, 이들 나라에서 각자 교회를 국가기구에 통합해서 통치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종교개혁이 활용된 것이다. 그게 프로테스탄트이든 카톨릭 개혁이든. 각 지역의 국가와 정치권력의 특징이 그 지방의 종교개혁의 특징을 규정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의 구성에서 한 가지 불만족스러운 지점은, 갈리아주의[책에서는 갈리칸주의]와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이 분리되어 기술되어 있는 점이다. 갈리아주의Gallicanism는 14세기 초, 교회의 아비뇽 유수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아비뇽 유수 70년 동안 교황청은 사실상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었다. 아비뇽 유수의 한복판에서 잉글랜드와의 프랑스 왕위 계승 전쟁인 백년전쟁이 시작되었고, 프랑스가 영토국가로서 자리를 잡아가는 동안 프랑스에서 교권에 대한 속권의 우위를 주장하는 갈리아주의가 확산되어 15세기 말에 확정되기에 이른다. 그 이후에 칼뱅이 이끄는 개혁파가 위그노 전쟁을 일으키고, 낭트 칙령으로 화해와 공존이 이루어졌지만, 정치권력이 충분히 강화된 루이 14세 시대에 이르러, 낭트 칙령의 폐지와 함께 카톨릭화가 완성되기에 이른다. 프랑스가 프로테스탄트를 선택하지 않고, 카톨릭 국가로 남기 위해서는, 프랑스에서 속권의 우위, 즉 교황의 간섭을 원천적으로 배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갈리아주의였다. 이 과정은 프로테스탄트 입장에서 보면 패배지만, 프랑스라는 국가 차원에서 보면, 교회를 국가가 통제하려는 수백년에 걸친 일관된 정책이다. 이 과정에서 카톨릭 개혁도 이루어진다. 갈리아주의는 프랑스 대혁명에 이은 1790년의 성직자 공민헌장에서 한 정점을 이루게 된다. 반복되는 혁명과 정변의 19세기를 거치면서, 프랑스에서 정교분리가 이루어지자, 갈리아주의도 날이 저물게 된다. 더 이상 교회가 정치에 중요하지 않게 되었을 때, 교황지상주의는 다시 득세하게 된다. 현재의 교황권은 계몽주의와 정교분리의 결과다. 정치가 종교를 필요로 할 때, 종교는 정치권력에 귀속된다.

이 책의 제목 『종교개혁: 중세에서 근대로의 역사적 대전환』은 책의 서술방향을 명확하게 가리키고 있다. 종교개혁은 근대로 가는 길목에서 일어난 초기의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저자가 보는 근대성이란 국민국가nation-state와 내셔널리즘nationalism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결과와 영향을 설명하려는 순간, 저자는 16세기에서 19세기로 급격하게 도약한다. 물론 16세기에서 19세기의 단초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 단서들로부터 논의를 시작하여, 국민국가와 민족이라는 역사적 귀결로 이끌려 했던 것이 19세기말에서부터 20세기 중후반까지 이어진 흐름이었다. 저자는 연구사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민족주의적 귀결로 이끄는 해석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며, 수정주의를 소개하면서도, 자신이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때는 19세기로의 비약을 서슴지 않는다. 때론 포스트모던한 20세기 말의 해석으로도 넘어가기도 하는데, 다소 지나친 면들이 없지 않다. 저자 스스로 입장이 분명하게 정리되지 않은 듯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16세기적 현상으로서의 종교개혁을 시대적 정치적 맥락 속에서 해석하고, 그 나름의 의미를 고정한 후에, 역사적 의미를 간략하게 덧붙이는 쪽을 선호하지만, 그것은 나의 입장일 뿐.

종교개혁사 교과서로서, 참고서적으로서 충분하고 또 넘치는 책이다. 적어도 이 책은 읽고, 이해한 후에 그 다음 이야기를 해보는 것이 좋을 듯한데, 교파와 교단에 종속된 한국 신학계에 구속되어 있는 소수의 종교개혁사 연구에서 그런 전망이 열리기를 기대할 수는 없겠지. 교회가 하도 내리막길이라 비판하기에도 맥이 빠진다.

2026. 7. 7.

* 괄호 안의 숫자는 책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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