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모토 요시타카, 『나의 1960년대』.

아사히소노라마, 1969년 7월.

야마모토 요시타카山本義隆, 『나의 1960년대: 도쿄대 전공투 운동의 나날과 근대 일본과학사의 민낯私の1960年代』, 임경화 역, 돌베개金曜日, 2018(2015).

책을 펼쳐든 순간 눈에 띈 것은 그의 이력이었다. 도쿄대 전공투 의장으로 야스다 강당 점거농성을 이끌었던 그는 체포와 수감생활을 거친 후 물리학계의 촉망받던 소장이었던 그는 학계로 돌아가지도 않았고, 정치계에 진출하지도 않았다. 언론의 인터뷰에 응하면서 젊은날의 치기와 싸구려 감성을 팔지도 않았다. 그는 입시학원 강사로 일하면서, 과학사가로 활동했다. 한국어로도 몇 권의 책이 번역되어 있을 정도다. 그리고 놀랍게도 1992년 『도쿄대 투쟁 자료집東大闘争資料集』전23권으로 발간해서 국회도서관에 기증하고, 마이크로필름으로도 만들어서 활용할 수 있게 한다.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기는 했으나 몇 년간은 혼자 매달려 데이터베이스를 입력했고(286), 대부분의 작업을 혼자 해냈으며, 소요된 경비도 전부 지불했다.(127) 그러고 보니 하세가와 히로시長谷川宏가 생각난다. 『정신현상학』의 유려한 일본어 번역으로 헤겔 번역의 혁명을 가져왔다는 그도 도쿄대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1968년 학원 분쟁에 참가한 후, 매듭을 짓기 위해 학계를 떠났다고 알려져 있다. 그 역시 집에 학원을 차려놓고, 생계를 유지하면서, 공부와 번역에 몰두했다. 한국에도 논술강사를 하면서 공부를 이어가고, 대가의 논저를 홀로 번역한 사람이 있다. 모두가 그래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런 걸 본받으라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고. 그러니까 참고 견디라는 이야기도 아니다. 다만, 그일이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되면, 어떻게든 하는 방법도 있다는 거다. 그러나 그 역시 선택이다. 그렇게 하지 않기로 한 것이 선택이듯이. 그래서 인가 책 말미에 철학자 히로마쓰 와타루廣松涉의 말이 눈에 띄었다. 보석으로 나온 그에게 앞으로 힘들겠지만, 딱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게 있는데. 평론가는 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그 지점에서는 자신은 평론의 역량은 없다고 생각했으나, 지금 보면 그 충고는 제대로 학문을 하라는 의미였을거라고 생각하고 있다.(284) 나는 뭐라도 제대로 뛰어들어 보라는 말로 읽혔지만. 여하튼 그는 도쿄대 투쟁을 거쳐 생각하기 시작한 과학 비판의 연장으로 근대 과학의 성립근거를 밝히는 과학사상사 공부에 몰두하고, 대학과 인연을 끊고, 학회와 학계라는 폐쇄적인 전문가 조직에 굳이 등을 돌려왔다고 말하고 있다.(284-285) 그리고 물론 평론가도 되지 않았다.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전공투’에 대한 기억은 투쟁의 현장을 떠나지 않지만, 투쟁의 현장에 머물러 있지만도 않다. 그에 따르면 전공투란 1960년 안보투쟁의 연장선에서 이어진 것이고, 과학과 기술이 군대 및 전쟁과 결탁하는데 고민이 있었고, 의대생과 연수의들의 의료영리화에 대한 투쟁으로부터 시작해서 대학원생들과 이공계가 이끌었으며, 자신들이 살아가는 선 자리에 고민이 있었고, 야스다 강당을 점거하고 해방강당으로 이끌었던 시기 열린 공간 속에서 연대와 민주주의가 있었다. 몇몇 가지 점에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의 핵심이었던 학생운동과는 다소 차이가 난다. 무엇보다 이공계의 주도여부가 그렇다. 문과와 이과를 가리지 않고, 참여했지만, 투쟁을 주도한 것은 대부분 문과계통이었다. 그리고 학생운동 지도자들이 실제 대학생들로 일본보다 젊었다. 일본에서는 끝내 자기자리를 찾아 지킨 소수를 제외하고 전공투의 전사들은 대기업에 뛰어들어서 경제전선의 전사들이 되었고, 의사와 변호사 등 전문직이 되었고, 혁신정당이나 사회운동에도 참여했다. 한국에서도 대기업에 뛰어들어 경제성장의 과실을 만끽했고, 의사와 변호사 등 전문직이 되었고, 정치에 뛰어들어 결국 정권을 잡고 새롭게 주류가 되었다. 어떤 점에서 매우 비슷하지만, 그 결말이 비슷하면서도 기묘하게 다르다. 더 정확히는는 원래 주류였는데. 자리를 되찾은 거라고 해야겠지만.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대학 입학 직후 1960년의 안보투쟁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면서 1960년 10월 안보투쟁 직후에 출판된 과학사가 히로시게 데쓰廣重徹의 책 『전후 일본의 과학운동』에서 히로시게가 1956년 과학기술청의 설치가 부활한 일본 독점자본이 이후 과학기술에 대한 수요증대를 내다 본 움직임이라고 평한다. “당시의 논의를 회고해 보면, 현실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대신에 무엇이든 곧바로 미미국에 대한 일본의 종속과 식민지화라는 상투어로 정리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경향은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그러한 안이함이 그 이후 사태의 진행을 전망하는 것을 방해했다”고 평가하는 구절을 의미심장하게 인용하고 있다. 그는 히로시게를 인용하면서 안보투쟁의 논쟁이었던 분트-사학동과 민청(공산당)의 노선 차이를 평가하고 있다. 실은 민청을 비판하는 것이지만.(23-24) 대미종속강화라는 상투어로 말하는 것에 대한 비판. 과학기술 문제의 중요성, 실은 그 아래 깔린 자본과 국가의 논리. 그렇다고 대미종속이 해결된 문제인 것은 물론 아니다. 일본은 지금도 대미종속과 자체의 제국주의화 사이에서 줄타기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니까.

1960년은 안보 투쟁의 해인 동시에 이른바 이공계 붐이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근대 일본은 세 차례 이공계 붐을 경험했는데, 첫 번째는 메이지 유신 직후이며, 두번째는 1935년 이후, 제2차 대전이 한창일 때, 그리고 세 번째는 1960년대로, 일본인이 완전히 귀신에 홀리지 않게 된 건 1960년대라고 한다.(33) 일단 세 번의 이공계 붐이라는 말 자체가 낯설다. 역시 이럴 때 나는 한국사를 짚어볼 수밖에 없는데. 카이스트의 설립을 필두로 공업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1970년대가 한국의 첫번째 이공계 붐이고, 아직도 그 여파 중에 있는것인가? 아니면, 2000년 경에 시작된 IT붐을 두번째로 보아야 하는 걸까. 뭐랄까. 참 한국은 역사가 짧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우선 세번의 붐이 있었다는 말 자체에서 놀라게 되었다. 보주 1(292-301)에서 메이지 일본의 궁리열과 그것이 결국 식산흥업과 부국강병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간략히 설명한다. 2번째는 나중에 좀더 상세히 나온다. 한국전쟁 특수로 돈을 벌어들이던 일본은 대대적으로 이공계에 투자를 하게되고, 그것은 대학 이공계 정원의 확대로 등장한다. 이때 국가와 재벌의 요구에 따라 원자력공학과와 전자공학과가 설치된다.(33-35) 일본의 1960년대는 과학기술의 진보로 상징된다.(37) 이 모든 이야기가 낯설었다.

1962년 봄 물리학과에 진학하자 대학관리법(대관법) 투쟁에 마주하게 된다. 학생운동과 이념성향을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말은 자주규제가 된다.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대학 자치 관행은 메이지 이후 대학 강좌제 아래, 강좌의 독립과 강좌 교수의 독재적 권위를 보장하고, 섹셔널리즘을 유지, 교수들이 대학의 자치를 수호하라고 했을 때, 그것은 기득권 옹호를 의미했으며, 대학의 자치는 대학의 전근대성에 대한 방패막이었다.(48) 이해 11월 30일의 집회를 이를 주도한 대학자치회 의장이 퇴학을 당하게 된다. 이때 학내의 큰 반발을 불러온 이유가 도쿄대 안에 도쿄대 학생이 아닌 도쿄의 다른 학교의 학생이 와서 괘씸했다는 거였다.(50) 결국은 자주규제로 결말이 나는데. 이때 이후 대학자치와 학문의 자유란 학문에 독점에 대한 복무를 변호한는 슬로건이 되었다고 히로시게를 인용하여 말한다.(53) 요즘의 한국도 아니 꽤나 오래 전부터 대학 자치나 학문의 자유라는 말이 아무런 감동을 가져오지 않게 되었다. 학내에 사복경찰이 주둔하는 시대도 아니고, 그런 시대에도 학생이나 학문의 자유는 보호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실상은 그 결과 자리를 나누어먹고는 지루한 기득권 싸움에 골몰하는 것 뿐이다. 그 안에서 썩어가고 곪아가고 있다. 그저 무지한 너희들은 돈이나 내라는 건지.

1964년 물리학과 대학원에 진학한 후, 박사과정에 있던 1967년 물리학회의 미군 자금 반대 운동에 나서 1966년 반도체물리국제회의에 미군 육군 극동연구개발국의 자금이 흘러들어온 것이 유감이며, 앞으로 내외를 불문하고 군대로부터의 원조, 기타의 협력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결의를 이끌어 낸다. 그러나 책임자들에 대한 처분에는 동의를 이끌어 내지 못한다.(68-69)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이라 일본 물리학계가 베트남 전쟁을 지지한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학계라는 곳이 어떤 곳이지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지리하게 겪은 것 같다. 얼마전 카이스트가 자율 무기 로봇 개발관련해서 떠들썩 했던 걸 보면 격세지감이 든다. 지금은 뭐랄까.

그는 여기서 과학자의 피해자 의식을 지적한다. 공산당계에서 주장한 미군으로부터 돈을 받는 것은 잘못이지만, 일본의 빈곤한 문교정책이 초대한 것으로 일본 정부에 대한 연구비 증액을 요구하는 운동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야기다. 그는 이것을 변함없이 피해자 의식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그 배경에는 과학이 항상 사회의 진보에 기여한다는 순진한 과학 절대긍정과 과학자는 항상 민주적이고 진보적이라는 과학자의 자만이 깔려있다고 비판한다.(74) 2차대전은 과학에서 졌다는 비판 속에서 생겨난 과학에 대한 맹신이 그 밑에 깔려있다.(79) 그 속에서 과학자만이 합리적·근대적이고 장래를 내다보며 무지하고 주관이 없는 정치가나 시야가 좁은 재야나 자기보신적 관료는 모두 보수적이고 과학기술에 몰이해하고 아무런 전략이 없다는 자만심, 반대로 연구자와 연구 활동에 대해선 본래 상응하는 만큼의 평와 지원이 부여되지 않는다는 식의 피해자 의식(82)이 자리를 잡았다. 자연과학 연구를 절대선으로 보고, 만사 제쳐 놓고 연구는 중요하든 연구지상주의, 과학의 진보와 사회의 진보가 손을 잡고 나아간다는 계몽주의적 과학관도 실은 고도성장의 이데올로기였다. 진보적 과학자의 합리주의는 과학기술 진흥을 향한 체제 쪽 테크노크라트의 합리주의에 휩쓸려 버렸다.(83) 실제 당시 일본은 풍요로웠고, 미군자금을 중계한 이들은 더욱 그런 사람들이었다.(84) 이런 상황에서 과학자가 주체성을 유지할 수 있기 위해서는 연구를 포기할 권리, 연구를 사보타지할 필요가 있다.(84) 어떤 연구를 포기하고 어떤 연구를 사보타지할런지에 대해서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논의에서 눈에 들어오는 것은 과학자의 피해자 의식이다. 자신은 옳고, 자신은 알고 있으며, 남들은 모르고 전략도 없고, 올바른 대우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은 오늘날 너무나 흔한 주장이다. 거의 모든 사람이 이런 주장을 일상적으로 펼치고 있다. 모두가 피해자라고 말하면서, 자신들의 피해자로서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물론 피해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피해에 대한 책임 추궁과 그에 대한 대책마련을 넘어서서, 구체성을 확인하기 어려운 피해자 정서에 빠져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나는 정말 모르겠다. ‘징징댄다’는 표현이 지나칠런지도 모른다. 모두들 서로의 피해자 의식에 상호동조하는 현상은 때론 한심하기 그지 없다.

1966년 9월 조직된 베트남반전회의는 이학부·공학부·경제학부 대학원생과 조수가 중심이었다.(88)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란 군정하의 오키나와 미군기지를 떠맡고 극동에서 냉전체제 유지에 관련하면서 존립하는 것이고,(96) 일본의 고도성장을 뒷받침한 것이 한국전쟁에 의한 한반도 특수와 베트남 특수였다. 베트남 반전 투쟁은 ‘가해자’로서의 자각이다.(99) 피해자로부터 가해자로의 의식의 전환이 야마모토 등의 전공투 투쟁의 핵심 중 하나였던 거다. 이런 글을 읽으면서 문득 떠오르는 비디오 클립이 있다. 베트남의 한 중견 언론인이 아시아의 BBC에 출연해 인터뷰를 하는 동영상이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한국군 학살 문제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반응에 대해서, 우선 한국군의 학살이 심각했던 점을 지적하면서도 한국 정부의 사과에 대해서 탐탁치 않아하는 베트남의 정서에 대해 말한다. 그 중 한 가지는 우리가 익히 잘아는 베트남 전쟁은 승전이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또 하나는 지금 베트남의 가장 큰 투자국이 한국이라서 조심스러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나가면서 슬쩍 흘리는 한 마디가 있었다. 베트남에서는 그 전쟁으로 경제발전의 기회를 놓쳤다고 비판하는 입장이 있다는 것이다. 공식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대충 짐작이 되었다. 미국의 힘으로 분단된 나라들은 모두 번영을 누렸다. 대만과 남한 모두, 그러니 남베트남이 남아 있었으면 지금쯤 부유한 나라가 되었을꺼라는 속내를 슬쩍 비치는 말이기도 했다. 그게 또 하나의 자부심일수도 있고. 사람들의 생각은 정말 복잡하기 그지없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면서, 여러가지 생각의 맴돌이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 말을 전한 것이 베트남의 언론인이라서 더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모른다. 남한과 북한이 다르듯,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은 의외로 다를 수 있겠구나. 이 책과는 상관없지만, 정말 별생각이 다들었다. 피해사실을 직시하면서도 피해자 정서에 매물되지 않고, 가해자로서의 자각을 하면서, 비판적으로 산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리고 과연 대중은 호응해 줄지.

베트남반전회의의 활동 중에 오지야전병원 설립 반대 투쟁을 하게 된다. 이 시기 투쟁에서 야마모토가 경험한 것은 투쟁은 3파 전학련, 반전청년위원회와 베평련 등 큰 조직 많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그 주변에 있었고, 자신 같은 소집단이나 1인 참가 반전 운동이 우글대고 있었다. 그리고 이때 지역 사람들이 참가했다. 언론에선 이를 난동이라고 말했지만, 펜치로 철사를 자르고 장대로 서치라이트를 부수고, 깜깜핸 진 후 돌을 던진 것은 지역주민들과 군중이었다.(106) 당시 『마이니치신문』은 헬멧도 각목도 없고, 점퍼나 양복, 카디건 방한잠옷, 나이트가운, 샌들에 조리라고 표현하고 있다.(335) 야마모토의 이때의 경험이 야스다 강당 점거 시절 해방강당을 이끌도록 했을지도 모르겠다.

1968년의 도쿄대 투쟁의 시발점은 의대생과 연수의(인턴, 레지던트)의 투쟁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정부는 등록의사제도를 만들기 위해 의사법 개정을 시도했는데, 오랜 기간의 의학도들의 투쟁에 의해 파탄난 기존의 1년간 무급인턴제도를 대신해 의학부 졸업 후 국가시험을 칠 수 있도록 하게는 되었으나 연수기간은 유급이되 2년간 연장되었고, 연수장소가 대학병원이 아닌 시중의 병원으로까지 확대되어, 연수의사를 흩어서, 수년간 힘을 발휘한 청의련의 약화를 노리고, 연수의의 보수는 진료협력 사례금으로 해서, 의료노동 종사자를 저임금으로 확보하려는 것이었다.(111) 의학부와 청의련의 투쟁이 도쿄대 투쟁을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흥미로웠다. 야마모토 요시카타는 이를 의학부와 후생성의 의료 영리사업화에 대한 의대생과 청의련의 투쟁이었다고 평가하며, 그 뒤에는 복지국가welfare-state는 전쟁국가warfare-stater가 등호로 연결되어 후생성이 전시하 총력전 체제 형성의 일환이라고 평가한다.(112) 복지국가=전쟁국가라는 등식은 생소할지 모르나, 복지국가의 여러 제도들은 국민의식이 없는 노동자와 농민들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생겨난 것도 분명하다. 이제 와서 복지제도를 없애자는 것은 아니지만, 복지제도가 없이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 사람들에게 희생을 요구할 방법이 없는 말이다.

마루야마 마사오에 대한 야마모토의 비판은 정말 눈에 띄는 대목이었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전공투에 대한 태도는 알려져 있다. 야마모토는 마루야마 마사오의 초국가주의나 파시즘 그리고 무의식의 지배 같은 구호가 자기 자신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더블 스탠다드라고 말하고 있다. 마루야마도 도쿄대 안에서는 법학부장과의 개인적인 관계, 동료와의 관계, 오코치 가즈오나 문학부 교수와의 교우관계, 그러한 것을 고려해 결국 그러한 굴레 속에서 사는구나, 쉽게 말해 도쿄대는 편한 곳이고, 그는 보통사람이었다고 평가한다.(120) 그는 마루야마의 여러 주장에는 동조하지만, 1947년의 「일본 파시즘의 사상과 운동」에서 도시의 샐러리맨 계급과, 문화인 내지 저널리스트, 그외 자유 지식업(교수나 변호사)와 학생을 인텔리겐치아로 분류한 것을 비판한다. 는 파시즘을 옹호하고, 파시스트이고, 파시즘을 입에 담지 않아 파시즘을 뒷받침한 교수나 학자 등 인텔리겐치아을 너무나 많이 보았던 것이다.(123) 마루야마 마사오가 더블 스탠다드를 취한다는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이런 기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이 몇이나 될런지 모르겠다. 남을 평가하는 동일한 시선으로 자신을 평가하는 사람이 자기 몸을 자리잡을 곳을 마련할 수 있을까. 그러나 마루야마 마사오는 도쿄대 안에서 마루야마 마사오라는 비판은 너무나 타당하다. 그리고 자료실에서 자겠다고 한 마루야마에 대한 비판과 자료접근성에 대한 이야기는 곱씹어 볼 만한다. 내 경우에도 자료 입수에는 항상 곤란을 겪으니까. 그러나 동시에 그런 어려움과 발품팔이가 어떤 면에서는 도움이 되는 것도 같다. 모든 자료가 전산화된 요즘 전통 사회에 대한 연구가 외려 통찰력이 없이, 자료 검색 결과로만 뒤덮이는 것 같으니.

7월에 야스다 강당을 재점거 하면서, 학생들은 본부를 봉쇄한다. 그러나 그 과정이 묘하다. 선봉대가 자기 책임과 결의로 실력투쟁을 전개하고, 그 투쟁이 돌파한 상황에 기초를 둔 대중적인 토론에 따라 그 상황을 공유하여 투쟁의 승인을 따내는 운동스타일을 탄생시켰다(133)고 평가한다. 도대체 뭘 탄생시켰다는 것인가. 이 일련니 과정은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한 바로 그 과정이다. 관동군의 일부가 노몬한 사건을 일으켜 소련군에 패배한 그 과정이다. 중일전쟁도 지나사변이라는 이름으로 주둔군의 일부가 독단적으로 일으켰다. 애초에 일본이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고 총의를 모아 전쟁을 시작한 것은 미국과의 전쟁 뿐이었다. 군의 일부가 독단적으로 움직여서 점령과 전쟁을 기정사실화하는 일련의 과정은 1930년부터 15년전쟁을 이끌어가는 일본의 주특기였다. 나는 여기서 파시즘의 본질을 본 것인가, 아니면 인간사의 본질을 본 것인가. 언젠가 야마모토 요시타카를 만나게 되면 꼭 알려주고 싶다.

그리고 이들은 야스다 강당을 해방강당으로 만드는데. 텐트촌이 생겨낙나고, 화요강좌라고 다양한 활동의 장이 열리고, 고등학생 집회의 장으로도 해방하고, 산리즈카공항건설반대동맹도 오게하고, 대학을 폐쇄당한 니혼대 전공투가 집회를 하는 일련의 일이 일어난다. 그는 이것을 근대 일본 사회에서 획기적인 일이며, 자유코뮌의 이미지라고 선언한다.(136) 해방공간의 경험은 독특할 것이다. 특히 이렇게 긴 기간 해방공간이 열리는 경우는 흔치 않다. 통상 해방공간은 무장 투쟁의 과정에서 열리는 것이다. 한국 근대의 가장 선명한 자국을 남긴 5월 광주의 해방은 불과 며칠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일부 식자는 절대공동체라고 부르며 신성화할 정도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결과는 무참한 진압이었다. 파리코뮌도 다르지 않았다. 봉기에는 처참한 댓가가 따랐다. 세월호 이후 광화문이 때로 그런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그 절박함과 종말론적 위태로움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야마모토 요시타카가 말하는 그 해방공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죽음을 댓가로 하지 않을 수 있는 해방공간이란 무엇인가. 무장투쟁 없이 열렸던 그 수개월의 기간. 그것은 역시 도쿄대라서가 아니었을까? 니혼대는 폐쇄되었는데 말이다. 야마모토 요시타카가 말하는 더블 스탠다드는 자신들에게도 적용된 것이 아니었을까.

도쿄대 전공투 의장이었던 야마모토는 자신의 업무를 잡무 담당이라고 말한다.(141) 투쟁의 실제는 좋게 말하면 계속해서 발생하는 기술적 문제의 해결, 혹은 사무적인 안건 처리, 요컨대 수많은 잡무의 축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런 잡무는 우리 전투련과 청의련과 무당파 활동가가 담당했다. 학부의 당파 활동가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142) 가을 이후의 대표자 회의는 200명도 넘게 참여해서, 누구나 토론하는 대중적 토론이었다.(143) 도쿄대 투쟁은 실제로 각 학부와 대학원의 동맹휴학실행위원회나 투쟁위원회의 모임으로 전개되어 이를 공투회의라고 불렀고, 그것이 하나의 체계있는 운동체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야스다 강당을 점거·해방하고, 거기에 지금까지 없었던 대학생과 대학원생, 그리고 일부 조수와 의사들 사이의 결집축과 교류의 장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라(148)고 평가한다. 지금까지와는 달랐다고 말하기에는 애초에 나는 ‘전공투’라는 말의 의미를 잘몰랐으니까. 全学共闘会議란 학교 안의 수많은 조직이 공동으로 투쟁한다는 뜻이다. 총학생회 중심의 중앙집권화된 조직에만 익숙한 한국에는 좀 생소한 개념이 아닐까. 그리고 이런 조직화는 처음부터 ‘꿘’의 배제를 시도하고 있었다. 공산당은 보수화했고, 분트 사학동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많았던 것. 다만 ‘꿘’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반면 한국에도 정파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총학생회를 장악하기 위한 정파들간의 갈등은 얼마나 컸으며 전국조직인 전대협과 한총련은 얼마나 지독한 권력 투쟁의 장이었나. 그러다가 2016년의 이대투쟁이나 2018년의 불편한 용기는 처음부터 소위 ‘꿘’이나 조직 세력을 배제하고, 심지어 발언까지 막은 사례가 있다. 개인적 참여까지 막지는 않았으나. 전공투의 투쟁 방식이 한 시대의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곱씹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2017년의 촛불집회도 그렇고, 주장의 순수성을 입증하기 위해 조직화된 세력의 개입을 차단하거나 통제해야 한다는 의식이 내면화되기에 이른 것 같다. 노조나 조직에 대한 공격을 방어하면서, 종북좌빨이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순수성을 강조하다 늪에 바져버린 것 같다.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일본의 과학기술 발전에 대해 꽤 상세히 이야기한다. 이 부분은 아주 흥미롭지만, 간략하게만 옮긴다. 일본의 근대화, 즉 산업적 근대화가 ‘성공’한 하나의 요인은 서구에서 과학이 과학기술을 낳은 바로 그 절묘한 타이밍에 서구의 과학·기술과 조우했던 점에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군대였다. 1855년 나가사키해군전습소. 같은 해 양학소는 결국는 도쿄대 이학부의 전신이 된다. 과학(물리 연구)과 기술(기계 제조)는 일체로서 교육되었다.(165) 과학 연구과 기술이 서로 다르게 취급받았던 서구의 발전경로와 아주 달랐다는 이야기다. 공부에서 세운(공부경은 이토 히로부미) 공부료가 공부대학교가 되고, 도쿄대 공학부의 전신이다.(172) 국가에 의한 서양 과학 기술의 습득, 특히 군사 기술의 확보와 산업 역량의 확보가 그 출발점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양에서 과학은 원래 철학의 영역이자, 귀족들의 도락이었다. 이와 동시에 일본은 처음부터 군학협동이었고, 메이지 초기 기존 의사들의 양학과 다른 사족(사무라이) 양학이 탄생했는데, 군사과학이 그 중요한 측면을 이루고 있었다.(176)

두번째 이공계 붐은 1935년 이후로, 1940년부터 1945년사이 대학 이학부 수의 대폭적 증가가 이미 시작되었다.(183) 태평양 전쟁 기간에는 과학은 조국 일본의 수호신이라는 말까지 나왔으며, 수많은 잡지를 통해 대중화되고 있다.(186)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 연구자의 경우 전시하에 학문연구의 자유를 억압당한 사람이 있었지만, 공학부나 이학부에겐 제 세상이었다. 군복무는 면제받고 생활은 윤택했다. 군의 촉탁이 되면 특권계급처럼 대우 받았다.(189-193) 거기서 결국 일본주의 과학 또는 일본 과학이라는 거것이 탄생하게 된다. 천황의 방패가 되어 죽는 일본주의의 도덕적 원리에 따라 일본인으로서의 인격을 완성하고 그에 입각하여 구축하는 일본주의 과학을 주장한다. 그것은 물론 만주에서 시작된 고도국방국가의 완성을 향해 가려는 것이다.(194-195) 한심스런 이야기이면서도 왠지 어디서 들어본 듯한 울림이 있다. 도쿄대도 제2공학부를 설립해서, 각종 병기개발을 위해 수많은 학과가 등장하고, 화학병기강좌라고 독가스를 개발하는 곳까지 있었다.(202-204) 이들은 전후 산업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데, 워크맨을 만든 소니의 모태는 모조리 해군이었다.(208) 게다가 패전으로 전쟁책임이 제기되었을 때 전의고양 담론을 발했던 문과계 지식인이나 작가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침묵하거나 규탄받았으며, 양심적이면 양심적일수록 부담을 느꼈지만, 파시즘에 협력하고 국책에 올라타 의기양양하게 과학 진흥을 외쳤던 이과계 학자들은 전후에도 여전히 자신이야말로 근대 문화 국가, 민주주의 국가 건설의 담당자라면서 똑같이 가슴을 펴고 계속해서 과학찬가를 부를를 수 있었다.(214)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도 벌을 면제 받은 것은 731부대의 이시이 만이 아니었다. 과학자는 모두 그랬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다가온 전후의 고도성장과 과학기술 붐의 이면에는 수익자 공간의 외부로 벗어나, 생존자체를 위협받을 정도로 가혹한 처지에 놓이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국익의 이름으로 그 모순이 은폐되어 왔다.(218) 공해산업과 공해문제는 311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문제로 이어져있는 것이다 야마모토가 제기하는 신일본질소비료가 유발한 미나마타병(219)은 실제로는 흥남의 조선질소비료공장에서 시작된 것이다. 일본질소의 자회사였던 조선질소의 흥남공장에서는 공해병이 문제가 될 정도까지 사업이 진행되지 않았고, 패전으로 공장을 미나마타로 옮겼다. 그리고 이 공장에서 조선인들의 생활여건을 돌보고, 패전 후 공장을 인수할 생각을 가지고 김교신이 들어갔다가 발진티푸스로 죽은 것이다. 식민지와 제국주의란 이토록 기기묘묘하게 연결되어있다.

일련의 과학붐에서 눈에 띈 것이 과학대중화였다. 한국도 과학잡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느새 유명무실해졌다. 대중적인 과학잡지의 몰락은 잡지 자체의 몰락과 궤를 같이한다. 유례없는 출판불황을 겪고 있긴 하나, 대중 과학도서의 확산이 두드러진다. 과학책이 이제 읽어볼 만큼 출판되고, 관심있는 사람들이 손을 대기 시작한 것도 과학대중화의 한 현상이 아닐까. 이제사.

물리학이나 화학의 기술적 응용과 실용화란 원리론의 요소적 대상을 복잡하게 조합하여 인간 생활의 규모로 확대하는 동시에 인간과 장치의 인터페페이스를 고고려하여 장기간에 걸쳐 계속해서 드러내지 않으면 안되며, 그때 물질·에너지와 환경 간의 교류, 상호작용, 마찰, 사고, 실수 같은 문제가 부상한다. 그리고 이는 사후적으로 경험적으로만 밝혀진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과 기술은 본래 다른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기술에는 고유한 영역이 있다.(232) 그는 이 문제를 꽤나 집요하게 말한다. 그래서 위험성 관리도 보다 철저해야 한다고. 그래서 꼭 ‘과학과 기술’이라고 불러야 하는데. 과학기술이라고 섞어서 말한 다는 것. 거기에는 국가주도형 과학기술 개발이라는 의도가 깔려있다는 주장. 일본의 국가과학기술 입론을 고스란히 들여온 한국도 마찬가지일것이다. 과학기술부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니.

동시에 산학협동과 관학협동 문제를 제기한다. 갤브레이스를 인용해 대학의 개개 학문분야가 직접 국가 내지 기업의 보조를 받아 자금원과의 계약관계를 갖거나 확대하면, 결국 정부나 기업의 목표에 공명하게 될 것이라고 비판하는 것을 인용한다. 일본의 원자력은 바로 그렇게 시작되었다.(256) 그러나 이것은 원자력 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국가와 기업은 연구비를 명목으로 대학과 연구기관의 연구를 통제하고 있다. 받는 쪽도 그것을 통제라고 생각하지 않을 정도이다. 많이 받아오면 인센티브가 주어진다. 이미 대학의 얼마안되는 자금으로는 연구를 진행할 수 없게 된 이공계 학과에 이런 비판은 어이없이 낡은 이야긱 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연구자의 중립성이 아닐까. 어떤 연구를 어떻게 할 것인지는 실상 연구자에게 주어져 있다. 연구비를 쓸지 말지는 결국 연구자에게 맡겨져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양심에 맡기기에는 제도가 너무나 무기력하고 어처구니 없이 돌아가고 있다.

게다가 산학협동이나 관학협동이 문제를 일으키는 영역은 사회과학이나 인문학 쪽이 훨씬 더 심각하다. 데이터가 나오지 않아도, 그래프가 없이도, 말할 수 있는 영역이 허다하다. 곡학아세를 하려고만 하면 마음먹고 할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의 생존이란. 게다가 삶이라는 이름으로 너무나 많은 일이 용인되고 있다. 돈이 안되고, 없는데다. 삶은 고달프고, 할일은 많으며. 그럼에도 해야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일은 가려야 하며, 해야만 하는 일은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걸 결정할 수 있는 건 애초에 자기자신 뿐이다. 이제는 이공계 뿐 아니라 사회과학이나 인문학도 관학연, 산학연에 의존하는 정도가 아니고 종속되어 가는 것 같다. 이런 저런 문제를 둘러싸고 비명이 들려온다. 구구하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애초에 그런 양적 평가에 의존하는 제도가 생겨난 것은 스스로 평가를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금을 투여하고 십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자기자신과 동료에 대한 평가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앞으로도 그런 날이 올 것 같지는 않고. 마치 조선시대 관료 고과를 모두 ‘중’으로 매기고 몇몇은 ‘하’로 매기다가 문제가 생겼던 것 비슷하다. 어찌되었든 망하게 할 수는 없으므로 또 새로운 자금과 사업이 시작되고, 또 다른 평가기준이 도입되겠지만, 연구자가 자기부정을 통해 연구자의 주체성을 확립하지 않으면 어려울 것 같다.

자기부정은 전공투에서 등장했던 중요한 주제 중 하나다. 그것은 제국대학체제의 해체를 담은 말이었다. 그래서 투쟁은 연구실 운영의 민주화나, 대학운영에 대한 대학원생의 참가 권리를 인정하는 차원의 문제에서 타협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대학의 연구와 교육에 대한 근본적 재고의 요구였다.(265) 그리고 그것은 마루야마 마사오가 지적했던 책임을 인정않는 사회의 특징이다. 잘못을 인정하면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에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265) 그것이 3/11로 이어졌지만, 도대체 한국이 일본을 비판할 수 있을만큼 얼마나 다를까 싶다.

책을 뒤적이다 뒷날개에서 반가운 소식을 보았다. 오구마 에이지의 『’민주’와 ‘애국’: 전후 일본의 내셔널리즘의 공공성』을 돌베개에서 번역출간한다는 소식이다. 어서 나오면 좋겠다. 이것 말고도 『일본인의 경계』와 상하 2권으로 된『1968』도 번역되었으면 좋겠다. 어떤 점에서 이 책은 68 전공투의 주체로서 대학원생, 젊은 의사, 고학년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야스다 강당 농성으로 회고는 끝난다. 그후엔 본인이 수감되기 했지만. 그러나 전공투에는 또 다른 한 면도 있다. 이때 저학년으로 고등학생으로 참여했던 이들이다. 이들 중 몇몇은 적군파 등 70년대의 과격파로 흐르기도 한다. 그가 의장으로 선출되기로 되어있다가 체포된 69년 9월의 전국전공투연헙 결성대회장에서 적군파가 본격적으로 등장했고. 훗날 연합적군에 가담했던 이들은 안보투쟁의 무기력함이 자신들을 과격파로 이끌었다고 하지 않던가. 반면 전공투의 주체들은 나름 제도권이나 그 주변에서 살아갔다. 무엇이 이들을 가른 것일까. 이 책은 거기까지 말하고 있지 않다. 자신과 자신을 따라온 이들을 구분한 바로 그 지점에 그들의 한계가 있을 것이다.

2018. 8. 12.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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