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 진무천황 2600년 식년제에서 참배하는 천황과 친왕의 모습. 진무천황제가 매년 실시된 것은 1871년부터이다. 천황과 황후가 참여하여 제사를 지낸다. 이때 다마구시玉串를 바친다. 다마구시는 신체神体로 흔히 사용되는 비쭈기나무의 가지에 오린 종이를 달아둔 것. 제사는 생각보다 소박하다. 천황의 공무의 상당수는 이런 식으로 각종 신사에서 제사를 지내는 일이다. 일본의 신도는 현재형이다.
야스마루 요시오安丸良夫, 『천황제 국가의 성립과 종교변혁神々の明治維新』, 이원범 역, 소화岩波書店, 2002(1979).
일본의 사상가들을 평가하는 아주 개인적인 기준이 하나 있다. 그것은 천황제를 어떻게 보는가이다. 메이지, 다이쇼, 쇼와 전기 등 아시아태평양 전쟁 이전의 천황제는 물론이고, 패전 이후 소위 상징천황제에 대한 평가가 어떠한가? 그 평가는 얼마나 섬세하고 얼마나 엄정한가가 한 사상가의 성향을 판단하는 나의 중요한 기준이다. 그만큼 천황제를 비판하는 사람은 드물며, 그 비판의 근거가 명확하고 한결같은 사람도 드물다. 그런 점에서 야스마루 요시오(1934-2016)는 아주 드문 사람 중 하나다. 이 점이 중요한 이유는 내가 한국인이라서가 아니라 천황제를 대상화하고 객관화할 수 있는 사람은, 일본을 대상화하고 객관화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태어나서 형성되고 살아가는 사회 안에 있으면서 그것을 벗어나 대상화하고 객관화하는 관점이 얼마나 소중하고, 필요한 것인지는.
더욱이 한국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천황제에 대한 이해나 평가가 한국 근대사회의 형성과 구축 과정에 대한 이해로 바로 이어지기에 더욱 중요하다. 일본의 근대 국가 형성과정이 일본을 한 번 왜곡시키고 뒤틀리게 만들었다면, 한국의 근대화와 식민지 과정을 통해서 그 왜곡되고 뒤틀린 구조가 한반도를 다시 한 번 왜곡시키고 뒤틀리게 만들었기에 더욱 그렇다. 어쩌면,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한국정치에서 대통령의 정치행위가 정치적 과제 외부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더 높은 평가를 받던 때가 있었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도 있다. 유체이탈화법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행위에 대한 비판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긴 했지만, 아직도 사람들의 마음이나 정서를 모두 바꾸진 못했는데. 이런 행위를 왕조나 군주제의 유산으로도 볼 수 있지만, 일본 천황제가 발달시킨 초연주의超然主義라는 태도에서 훨씬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일본의 통치 엘리트들은 천황을 보호함으로써 자신들의 통치행위를 보호하기 위해 ‘초연주의’를 발전시켰다. 게다가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의원내각제는 폐지하면서도 정작 국무총리라는 자리는 그냥 두었는데. 이는 자기 스스로를 천황의 자리에 앉힌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는 국가의 발전과 국민의 행복을 앞세우는 ‘초연주의’적 태도로 일관했다. 겉으로만 그랬다는 말이다. 겉으로만. 초연주의는 원래 겉으로만 그러는 것이니까.
일본의 천황제 연구서가 한국에도 약간 번역되어 있지만, 그 수가 그렇게 많지 않다. 그 중에서도 야스마루 요시오의 『근대 천황상의 형성』과 이 책 『천황제 국가의 성립과 종교변혁』은 아주 중요한 징검다리이다. 이 책의 일본어 제목은 『神々の明治維新』이다. 직역하면 ‘신들의 메이지 유신’ 정도가 될터인데.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아주 거창한 제목을 달았다. 부제는 神仏分離と廃仏毀釈, 즉 신불분리와 폐불훼석. 신불분리란, 신불습합神仏習合이라고, 신도와 불교가 뒤섞여 있던 것을 나누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불교를 억누를 것을 말한다. 더 알기 쉽게 말하면 이렇다. 근대 국민국가로 전환하기로 한 일본은 근대 국민국가의 종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불교도 문제였고, 기독교도 문제였다. 그래서 메이지 유신의 기반이 된 사상 중 하나였던 국학国学을 신봉하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신도를 키워 국교로 하여(神道国教化) 근대 국민국가의 종교로서 즉, 근대국가 일본을 지탱하는 근대적 종교로 만들려고 시도했다. 그 시도 자체는 얼마 가지 않아 실패했으나, 완전히 실패한 것은 아니고, 그 사상적 기초가 근대 국가 일본의 천황제로 성장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한 가지만 괄호에 넣고 나아가자. 많은 사람이 근대는 탈종교화, 탈주술화, 탈신화화라는 주장에 함몰되어 있다. 근대가 종교를 벗어나는 것이라는 주장을 단선론적으로 받아들이면, 한국의 근대화도 일본의 근대화도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근대 사회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종교가 필요하다. 그래서 한국도 일본도 넓게 보면 독일도 종교에 몰두했다. 물론 그것은 근대 사회와 국가를 형성하는데, 필요하고 도움을 주는 형태로서의 기능으로서의 종교다. 근대 이전의 어떤 형태로서의 종교에서 근대 사회의 어떤 형태로서의 종교로 전환되는 과정을 탈주술화로 본 것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20세말에서 21세기초를 넘어가는 이 시기에 근대 사회의 어떤 한계를 보이는 지역에서는 근대 사회와 결합했던 근대의 종교들이 쇠퇴하고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한국도 그런 영향권으로 들어가고 있다. 문제는 이것이 종교의 쇠퇴를 가져올 것이냐 아니면, 종교가 살아남기 위해서 모습을 바꾸어서 다른 형태의 사회를 만들어내는 다른 형태의 종교로 전환될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여기서 종말론과 신비주의에 대한 관심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종말론과 신비주의는 모든 종교운동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지만, 전환기에 특히 두드러진다. 예를 들면 중세말의 천년왕국운동 특히 카타리 파와 같은 섹트의 등장이 그런 것인데. 20세기말과 21세기초에 다시금 세계 곳곳에서 종교운동인 재흥하고 있는데. 신비주의 적인 분파들이 활성화된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물론 이야기는 인과론이 아니라 일종의 징후들에 불과하다. 다만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근대에는 근대의 종교가 있고, 필요하다는 것이고, 근대 국민국가를 형성하면서 근대 사회를 만들어가려던 나라들은 어떤 식으로든 이런 종교를 만들어가려했고, 이런 분위기를 틈타 종교들은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 여기에 올라탔다.
야스마루 요시오는 신불분리와 폐불훼석은 일시적으로 맹위를 떨쳤다가 배척당하고는 신앙의 자유가 실현되었으며, 불교는 근대사회의 요청에 부응하도록 재생되었다는 외면적 형태 뿐 아니라 이를 통해 일본인의 정신사적 전통 전체에 생겨난 전환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19-20) 그리고 이 전환은 일본이 국제 사회의 약육강식의 싸움터에 나가려고 했을 때, 자신의 내적인 연약함과 불안에 대응하여, 이를 보상할 정신적 내연장치가 필요했고, 내재된 연약함과 불안 때문에 신경증처럼 지속되는 긴장감과 활동성을 산출하는 정신적 장치가 필요했다고 지적한다.(21) 조금은 통속적인 현대어로 말하면 일종의 ‘국뽕 뽐뿌질’이 필요했다는 이야기다. 사람들의 정신을 고양시키고, 무리와 희생을 감내하도록 충동하는 종교.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가. 모습을 달리했지만, 한국에도 있다. 그러고 보니 ‘뽕’도 ‘뽐뿌’도 일본식 발음이기도 하네.
국체신학国体神学(천황 통치의 관념을 절대시하는 신도의 교리)과 신도국교화가 등장한 것은 메이지 유신의 시작과 거의 동시적이었다. 신기관神祇官을 제정한 1868년 3월 13일의 포고(24) 등의 배경에는 기독교 영향력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있었다(25). 이 과정에서 새로운 신들의 체계가 나오는 데, 이때까지의 민중신앙에는 없었던 천황의 조상신 숭배이다. 천황의 신권적 절대성을 내세우고, 의례적 차원의 신들을 숭배하며 이데올로기적 내실을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각 종교가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다. 근대 일본의 천황제 국가를 위한 국민교화의 역할을 각 종교가 떠맡고, 상호 경쟁을 통해 스스로의 가치적 우위를 증명하여 보이는 것이다.(31) 그리고 여기에 일본 특유의 근대적 민족국가의 형성 과정이 사람들의 생활양식이나 의식 형태를 과잉 동조형으로 바꾸어 버린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33) 별 신앙심 없는 종교적 의례가 관습화되어 있고, 거기서 벗어남녀 안심할 수 없고, 신경증적인 불안에 싸이는 것이 일본 사회라는 점이다.(34)
근대 일본의 천황제 국가를 위한 국민교화를 한국으로 단어만 몇 개 바꾸면 고스란히 가져다 쓸 수 있다. 개신교든 천주교든 그리고 불교든 무속이든 간에 한국 근대사회에서 종교들은 모두 이 국민교화라는 목표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니 거기서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찾았다. 그게 한편에서는 반공과 북한에 대한 적개심으로 드러나기도 했고, 극심한 노동에 대한 근면과 인내, 순응주의적 태도의 양산, 스트레스에 대한 완화, 부에 대한 숭배와 목적의식의 부여 등이다. 게다가 과잉 동조형 사회란 일본만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한국에선 그걸 획일적이라고 한다. 오늘날 한국에서 사람들이 종교를 외면하기 시작한 이유는 실은 크게 보아 종교가 구축하고 지탱해 오던 그것 자체에 대한 외면의 결과에 다름아니다. 국민교화를 통한 노예화에 사람들이 진저리를 낼때, 그 수단과 통로가 가장 먼저 외면 받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외면 받는 것은 종교 뿐만은 아니지만.
일본에서 폐불훼석이나 신불분리 같은 불교 배척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전통적 형태의 종교 배척이 일어난 건 메이지 유신이 처음 아니었다. 불교와 기독교를 통제하려던 오다 노부나가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마찬가지 였다. 그 방식들이 다르고 때론 필요에 따라 타협했을 뿐.(39-43) 이 과정에서 유교의 중요성이 16세기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철학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오륜을 통해 사회를 통제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성공적이지도 못했다.(47) 근세 후기에 들어서면서 배불론이 등장하는데. 오규 소라이荻生徂徠와 다자이 슌다이太宰春台를 거쳐서(57-58) 아이자와 야스시会沢安의 『신론新論』으로 나타난다. 존왕양이 사상의 선구로 훗날 「교육칙어」나 수신교육의 근원이 되었다고 말하는 이런 사상은 유럽 열강의 동양 진출 상황이나 민심의 동양에 대한 현실 인식에 의해 구축되었다기 보다, 기독교의 마력과 민심의 동향이라는 측량하기도 제어하기도 어려운 두 가지 힘을 관련시켜 타성에 빠진 동시대 사람들 속에 위기의식을 조장하려는 이데올로기적 발상이었다. 불안감에 불을 붙여 위기의식으로 끌어올리고 상황을 돌파하는 에너지를 창출해 내려는 것.(64-67) 그러고 보니 이런 일은 지난 수십년간 보수언론과 세력들이 사람들 마음 속에 있는 북한과 공산주의에 대한 불안감에 불을 붙여서 사회 전체의 흐름과 권력의 향배를 통제하려던 행동과 너무나 똑같다. 그리고 메이지 신 정부의 종교정책 이전에, 그 전사前史로서 1840년대에 미토번, 조슈 번, 사쓰마 번, 쓰와노 번의 사원 정리와 폐불 훼석이 있었다.(70) 이는 소라이 학파의 생각이 미토학이나 히라타 아쓰타네의 국학으로 이어진 결과로 민중의 종교의식 세계에 권력이 개입하여 제사해야 될 신과 제사해서는 안 될 신을 명확히 구분함으로써 인심을 통합하려는 시도였다.(78) 누가나 막연히 느끼던 불안감과 위기감이 명료한 위기의식으로 구성되어, 상황을 돌파할 활동성도 생겨난다.(79)
1868년 신정부의 수립과 함께 신기사무과라는 모습으로 신기관이 등장하고(80) 신불분리에 대한 포고령도 내린다.(90) 그러나 초창기에는 신도가의 세력이 우위에 있는 경우에만 움직임이 생겼다.(102) 신사창건은 곳곳에서 생겨나는데 『고사기』와 『일본서기』 등의 신화에 기록된 신들과 천황의 혈동에 관계되는 사람들과 국가에 공적이 있는 사람들을 국가적으로 제사지내서 이러한 신들의 앙화를 피하고 보호를 얻으려는 사상에 기반한 것이었다.(104) 1869년 초혼사가 생겨나 1876년 야스쿠니 신사가 되고, 궁중의 제사의식도 신도식으로 변화된다.(111) 이러한 신도 고양은 기독교에 대한 대응책인 경우가 많았으며,(123) 불교가 폐멸한다는 소문도 무성했다.(142) 신도가 전통사회에서 기원을 가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메이지 신정부에 의해 의도적으로 활용된 사실 역시 부인할 수 없다. 특히 오늘날 사람들이 신도라고 생각하는 모습은 대부분 메이지 신정부기에 형성된 것들이다.
신불분리 초창기에 정부가 가장 강조한 것은 신도식 상제 즉 장례식이었다. 궁중에서도 불교식으로 하던 장례가 신도식으로 변화한다. 그러나 이 신도식 장례가 유야무야된 것은 번제가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민중은 불교로 돌아가고 사족은 신도식을 유지하게 된다.(145) 1871년의 폐번치현은 중앙집권을 강화한 것으로 알려져있지만, 신불분리의 개혁을 거꾸로 되돌리게 된다. 막번제 구조하에서 신분에 대한 촘촘한 통제를 통해 민중의 습속까지 규제할 수 있었던 번 제도가 폐지되자, 신불분리도 유야무야되고 만다. 폐불훼석도 여러 곳에서 전개되었지만 성공적이었다고는 볼 수 없다. 우선 이는 조정이라는 새로운 권력의 권위와 위력을 들먹이면서 진행되었고, 비교적 외진 곳에 국학자나 신도가의 수용기반이나 담당자가 있는 경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불교 특히 진종의 저항은 1871년까지 폐불정책을 결국 실패로 몰아넣는다.(184-185) 폐불훼석은 민중의 종교 생활을 장례와 조상령 제사로 일원화시켜서 총괄하려는 것인데, 이런 단순화는 사람들의 신앙심 자체의 쇠퇴나 도의심의 쇠퇴를 불러 일으켰다. 메이지 정부의 지도자가 확보하려는 것은 천황을 중심으로 새로 성립된 민족국가에 대한 국민적 충성심이고, 국학자나 신도가의 제정일치 사상이나 복고 신도적 가르침은 이를 위한 이데올로기 수단이었기 때문에 불교도 국민적 충성심의 확보라는 위급한 과제에 대해 스스로 유효성을 증명해 보임으로써 재생의 길이 열릴 수 있었다.(186-187)
일본 문화를 설명할 때, 가장 특이한 것 중 하나가 일본인들은 종교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태어나면 신사에 가고, 결혼식은 교회식으로 하는 경우가 많고, 장례식은 불교식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물론 결혼식을 신도식으로 하는 경우도 적지 않고, 장례도 신도식으로 하기도 한다. 현대의 문화적 관습이 이토록 뒤섞인 계기 중 하나가 메이지 유신의 결과였다. 애초에 천황이 신도식으로 결혼식을 한 첫번째 사례가 다이쇼 천황이라고 하고, 그 이후에 신도식 결혼식이 퍼졌다고 하는 걸 보면 그 역사가 일본에서도 100년이 갓넘었다는 이야기다.
천신, 지기 및 역대 천황의 영혼이 신기관에 의한 제사의 대상이었다.(188) 이를 통해 신들의 국가적 체계화를 이루어나가려 했다.(190) 이 과정에서 이세 신궁의 개혁이 이루어진다,(196) 이른바 궁중삼전과 이세신궁의 개혁이다. 이세 맞추어 지방신사를 개혁해 마을마다 촌사를 두었고, 요배식을 하게 된다.(206-207) 이는 국가적 제사의 대척점에 있던 토속적인 신이나 부처의 억압과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들을 미신이나 주술로 억압한 것이다.(215) 국가가 문명이나 합리성이나 위력을 대표하여 민중의 생활에 접근하면, 그 반대에는 미신 같은 불안이 조성될 수밖에 없다. 새로운 제사 체계는 외견상 제정일치라는 고대적 양상을 띠고 있으나, 실은 근대적 국가 체제의 담당자를 찾아 국민의 내면성을 국가가 묶어 두고 국가가 설정하는 규범과 질서를 향해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힘을 조달하려는 장대한 기도였으며, 민중의 정신세계를 이해하지 않고, 억지로 새로운 종교 체계를 강요한 것이다.(222)
야스마루 요시오는 신불분리 과정에서 중요한 사건들을 섭렵하여서 말하고 있는데. 그 분파나 종파의 다양성을 일본인이 아닌 사람이 이해하기가 보통 복잡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지금 일본에 가서 흔히 보는 도리이, 신사 건물, 신체(거울), 예배양식은 이 시대 국가정책을 배경으로 설립된 것이라는 점이다.(255) 빨간 두 개의 기둥으로 세워진 거대한 문들은 새로운 시대에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특히 중요한 것이 신체神体다. 사찰이든 사원이든 구체적인 대상물을 놓고 거기에 종교 의례를 행하게 된다. 주로 불상이나 불교적인 신체가 있던 곳에 그런 유물을 없애버리고, 주로 거울을 가져다 놓는다. 아니면 비쭈기나무로 만든 신체를 예배한다. 일본의 3종신기가 거울, 검, 곡옥이라는 점을 기억하면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는 합장하던 의식에서 절하고 손뼉을 두 번 치고, 다시 절하는 신도식으로 바뀌게 된다. 이 모든 걸 국학자들이 주도했다고 하는데는 기묘한 느낌이 든다. 이 과정에서 독특한 것 중 하나가 거지 단속이다.(267) 노동하지 않고 방랑하는 자들을 근대사회가 통제하려고 드는 건 동서양의 차이가 없는 모양이다. 난잡, 나태, 낭비, 미신으로 상징되는 민속 신앙의 세계는 부정적인 차원으로 남게되며, 정부 정책에 대한 불안, 불만, 공포등이 생겨났다고 해도 표출되지 못하고 일종의 울적한 의식으로 만역하게 남게된다.(271)
불교에 대한 억압이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신앙의 자유 운동이 일어난다. 그 중 하나가 이와쿠라 사절단 등 구미 경험의 영향이다. 어느 곳에 가거나 신앙의 자유 때문에 압박을 받게 되었고, 시마지 모쿠라이는 지종이야 말로 서구의 일신교에 버금가는 것이라고 주장하게 된다.(296) 그러나 이런 신앙의 자유론은 내면화된 국가 지상주의가 자명한 전제가 되어 근대국가 건설이라는 과제에 맟추어 종파를 개혁하고 신도 대중을 교도하는 데 과제의식이 있었다.(300) 메이로쿠샤明六社의 니시 아마네西周나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 등도 계몽주의의 입장에서 정교의 분리나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지만, 이것은 인간 정신의 자유에 대한 근원적인 표현이라기 보다 정교 분리의 원칙에 선 근대국가 제도의 모방에 불과했다.(304) 결국 1873년 이래 3조 교칙(경신 애국의 뜻을 실천, 천리와 인도를 밝힘, 황상을 받들고 조정의 뜻을 준수)을 받아들이는 한도 내에서 독자적 포교활동을 하게 되었고, 국가적 이데올로기의 요청에 따라 각 종파가 스스로 유효성을 입증해 보이는 자유 경쟁이 시작되었다.(305) 결국 신앙의 자유는 국가가 요구하는 질서, 원리에 기꺼이 동조하는 것과 같은 뜻이 될 우려가 있었다. 신불분리 등의 정책은 실패했다고 할 수 있지만, 국체신학의 신봉자들과 그들의 정책은 국가적 과제에 맞추어서 사람들의 의식을 재편한다는 과제를 강렬하게 제시했다. 사람들이 폭력적 재편성을 거부하려고 할 때, 거기에 제시된 국가적 과제는 보다 내면화되어 주체적으로 담당될 수밖에 없었다. 국가가 국민의식을 직접적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로서 시작된 정책과 운동은 사람들의 자유를 매개로 한 통합으로 계승되었다.(307)
메이지 유신 초기 신도국교화는 실패한 정책으로 알려져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사비종교론이 나오고 신도는 장례에서 손을 떼게 된다. 그러나 야스마루 요시오가 지적하는 일본형 정교분리나 신앙의 자유는 초기 신도국교화와 국체신학이 그 영향을 얼마나 깊이 남기고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신도국교화는 실패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실패한 것이 아니다. 신도를 종교로 수립하는 것 자체를 목표로 삼았던 일부 국학자나 신도가들의 눈으로 보면 실패했겠지만, 종교를 체제 유지의 이데올로기 전환시키는 데는 극적으로 성공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런 일련의 과정이 자유의 신장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지적하는 부분에는 놀라운 설득력이 있다. 국가의 요구를 자유의 형태로 스스로 내면화했다는 이야기 주체화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만들어서 주체화를 시도한다는 미셸 푸코의 주장을 새삼 떠올리지 않는다고 해도.
그리고 내가 항상 멈추어서서 생각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이런 식의 일본의 종교 형성은 식민지 조선을 통해 어떤 굴절을 일으키면서 착종되었는가.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한국 기독교에 오늘날 어떤 영향을 남기고 있는 것인가. 현대 한국의 기독교는 도대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인가. 좀 더 열심히 읽고 그리고.
2018. 6. 4.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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