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루클린 이글Brooklyn Eagle, 1904년 2월 17일.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러일전쟁: 기원과 개전1,2日露戦争‐開戦と起源上・下』, 이웅현 역, 한길사岩波書店, 2019(2009, 2010).
요즘은 사람들의 생각이 참 간단하고 편리하여서 와다 하루키 같은 학자도 아시아여성기금이나 한일관계에서 일본 리버럴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간단히 몇 마디로 치부해 버린다. 얼마전, 일본연구자인 모씨가 쓴 칼럼 내용을 비판하는 말에 와다 하루키 제자라서 그렇다는 식의 이야기가 떠도는 걸 보고 마음이 씁쓸했다. 물론 일본 리버럴 들의 한계라는 것도 있고, 아시아여성기금 문제는 그의 실책이라고 생각하지만, 평생을 일구어 온 그의 업적이 현하의 정세에 대한 몇 마디 이야기와 함께 폄하되는 걸 보는 건 보통 씁쓸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일본 리버럴의 한계 운운도 그리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대표적인 한계가 1930년 중국동북침략(만주사변) 이후 만을 문제삼는 것이라고 한다면, 다시 말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그리고 영광스러운 메이지 유신 시대를 인정하고 찬사를 보내면서, 중국동북침략에서 중일전쟁(중국전면침략),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2차대전의 실패만을 반성하려는 태도라고 한다면, 와다 하루키는 그런 지적을 뛰어넘은 것이 분명하다. 와다 하루키가 이 책에서 싸우려는 논적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의 견해 또는 시바 료타로 사관이 그것. 시바 료타로는 일본에서 국민작가로 불렸던 역사소설가로 한국에도 『료마가 간다竜馬がゆく』, 『언덕 위의 구름坂の上の雲』 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 『메이지(명치)라는 국가明治という国家』라는 에세이도 번역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그의 소설들이 일본의 최근 우경화의 밑바탕을 형성하는데, 기여했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시바 료타로는 1923년생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만주와 일본에서 소위로 군복무를 했다. 그는 당시의 일본을 멍청한 전쟁을 벌였다고 생각했던, 전후의 여러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는 옛날의 일본인들은 좀 더 나았을 거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을 그려나가기 시작한다. 그 대표작 중 하나가 와다 하루키가 논적으로 삼은 『언덕 위의 구름』이다. 이요 마츠야마에서 태어나 러일전쟁에서 기병 사령관으로 활약한 아키야마 요시후루秋山好古, 그의 동생으로 해군에 들어가 연합함대사령장관인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 밑에서 쓰시마해전 작전을 입안하고 성공시킨 아키야마 사네유키秋山真之, 같은 마을에서 자랐고, 일본의 단가, 하이쿠의 부흥을 선도한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 이 세 사람이 주인공이다. 이 세사람과 더불어 메이지 시대인들의 특징을 낙천주의 이들을 낙천가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영광스러운 메이지 유신과 두 차례의 전쟁, 그러나 이 전쟁이 끝날 때부터 일본은 굴러떨어지기 시작한다. “요컨대 러시아는 스스로에게 패한 점이 많았고, 일본은 그 훌륭한 계획성 그리고 적군의 그런 사정 때문에 어찌 보면 떨어져 있는 승리를 아슬아슬하게 계속 주워가는 식이 러일전쟁이었을 것이다. 전후 일본은이 냉엄한 상대적인 관계를 국민에게 가르치려 하지 않았고, 일본 국민들도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승리를 절대화하고 일본군의 신비스런 강함을 신봉함으로써 그 부분에서 민족적으로 치매화되었다.”(1:55) 와다가 인용하는 시바의 러일전쟁에 대한 평가다. 그래서 인지 사네유키는 연합함대 사열에도 참가하지 않았고, 특히 와다가 지적하는 것처럼 강화[포츠머드 조약] 결과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일으킨 히비야 방화폭동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는다고 와다는 지적한다.(1: 55) 와다 하루키의 요약에 의하면, 시바 료타로가 말하는 러일전쟁의 원인은 대략 다음과 같다. 러시아가 침략의 야욕을 드러냈고, 일본인들은 러시아 팽창 위협을 강하게 인식했다. 조선반도라는 지리적 원인이 문제다. 조선을 장악하지 않고는 일본의 안보가 위협받고, 만주를 제압하지 않고서는 조선이 불안하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태도는 소극적이었다. 러시아의 침략 열의와 마주하게 된 일본이 조선을 확보하기 위해서 나선 것이며, 이 시대의 국가는 식민지가 되든지 제국주의 국가의 대열에 끼든지 선택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 자체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으며, 러시아 내부에 대해서도 상세한 언급이 없다. 다만 그 무능함이나 오만함, 외교에서의 무자비함을 지적한다. 일본은 만한교환론으로 타결을 원했으나, 러시아는 조선의 북반부를 차지하기를 원했다. 러시아는 의식적으로 일본을 죽음으로 몰아넣어 궁지에 몰린 쥐로 만들었기에 일본으로서는 고양이를 무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다. 그러니 일본으로서는 궁지에 몰린 자가 혼신의 힘을 거의 극한까지 짜내 살아남고자 했던 방위전이었다는 점 또한 틀림없다. 이런 러일전쟁사관은 1960년대의 시각이자, 그 시대 일본인들의 러시아관이며, 지금까지도 러일전쟁에 관한 많은 일본인들의 공통적인 견해다.(1:56-60) 와다 하루키는 이런 통념에 대해서 역사적 사실을 조목조목 제기하면서, 논박해 나간다. 이런 대작을 도쿄대학을 은퇴한 후, 10년간 그것도 아시아여성기금 등의 활동을 하면서, 저술한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경의를 표한다. 여담이지만, 『언덕 위의 구름』은 2009년부터 2011년까지 NHK에서 13부작으로 드라마화되기도 했다. 시작할 때마다 흑백영화 필름 같은 장면이 지나가면서, 자막이 나온다. まことに小さな国が、開化期を迎えようとしている。(정말로 작은 나라가 개화기를 맞이하려 하고 있다.) 일본식 국뽕이 넘치는 게 좀 흠이기는 하지만, 소설을 그림으로 보는 건 커다란 매력이다. 꽤나 잘 만들었다.
역자의 인용에 의하면, 와다 하루키는 중국어판 서문에서 “(러일)전쟁은 일본이 조선을 통치하려는 욕망에서 비롯한 것이며, 따라서 조선에 대한 침략으로 시작되었다. 러일전쟁은 조선전쟁에서 시작된 것이며, 최종적으로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발전해간 것”이라고 이 전쟁의 성격을 규정했다.(1:51) 「한국과 북한의 독자들에게」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한국어판 서문 또한 그렇다. 이 책의 결론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러일전쟁은 조선전쟁으로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전시 중립을 선언한 대한제국의 영내에 침입해 진해만, 부산, 마산, 인천, 서울, 평양을 점령하고, 대한제국 황제에게 사실상의 보호국화를 강요하는 의정서에 조인하게 했다. 인천과 뤼순에서 러시아 함선에 대한 공격이 동시에 시작되었는데, 이 공격은 무엇보다도 대한제국 황제에게 러시아의 보호는 없을 것이라는 의미의 결정타를 날려 황제를 체념시키는 역할을 했다. 조선 장악이 끝나자 전쟁은 압록강을 넘어 만주에서 본격적인 러일전쟁으로 진화해 간다. 일본은 선전포고에서 ‘한국의 보호’를 위해서 러시아와 싸운다고 선언했지만, 사실은 일본이 조선을 자국의 지배하에 두고 보호국으로 삼고 나서, 러시아에게 그것을 인정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전쟁을 추진했던 것이다. 러시아는 일본 해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항의의 선전포고를 발한 모양새였으므로 완전히 수동적인 자세였다. 러시아가 전쟁을 원하지 않았던 것은 확실하다.”(2:1187) 청일전쟁도 1894년 7월 25일 풍도해전이 있기 이틀전인 7월 23일에 일본군이 경성의 궁전을 습격하여, 고종을 손에 넣고 난 후에, 시작되었다. 이를 7월 23일 전쟁 또는 조일전쟁 등으로 부르지만, 전쟁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청과 일본의 공식 선전포고는 8월 3일이었다. 무쓰陸奥宗光 외상과 가와카미 육군 참모차장이 비밀리에 개전을 결정한 것은 그 두 달전인 6월 2일. 러일전쟁 역시 마찬가지로 조선전쟁을 먼저 치른 후 러시아와 전쟁에 돌입했다. 역시 선전포고는 기습으로 전쟁을 시작한 며칠 후에 있었다. 그래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1차 조선전쟁, 2차 조선전쟁, 그리고 한국전쟁을 3차 조선전쟁으로 부르기도 한다. 한반도의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청일, 러일전쟁에 대해 훨씬 더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주도면밀하게 준비하고 결정했다. 일본이 언젠가 러시아와 전쟁으로 조선반도의 지배권을 결정지어야 겠다고 생각한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다. 상황에 대한 상세한 논의에 빠져들면, 숲이 잘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1885년 일본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임오군란을 처리하기 위해 조선으로 갔을 때, 청국 공사 수정쭈徐承祖와 회담하면서 조선국왕, 군신 관계, 정치의 체가 어린아이와 같다고 평가하면서, 조선 왕의 임정을 구속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사실상 속국 또는 보호국화해야겠다는 입장으로서, 고종에 대해 격앙했고, 불신하고 있으며, 러시아와 손잡으려는 그를 눌러놓아야 하며, 그는 교정 불능, 개량 불능이라고 단언하고 있었다. 와다 하루키는 이것이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고 평가한다.(1:137) 일본이 조선에 대한 입장을 변화시킨 출발점이 되었다는 것.
이런 일본의 입장을 간파한 사람이 러시아에도 있었다. 청국 주재 무관과 일본 주재 무관을 지낸 콘스탄틴 보가크Konstantin Bogak 중령이다. 러일전쟁 개전 직전에 베조브라조프Mikhail Bezobrazov, 알렉세예프Yevgeni Ivanovich Alekseyev 등과 함께 맹활약하게 된다. 1894년 7월 6일(6월 24일)의 보고서에서 “일본은 조선에 대해서 일본의 보호국이 되는 것을 인정하라고 직접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바야흐로 일본의 전쟁준비는 진행되고 있고, 중국에 대한 강한 분노가 지배하고 있으며, 불과 사반세기 전에 진보의 길에 들어섰을 뿐인 일본이 어떤 나라가 되었는지 전 세계에 보여주라고 국민이 정부에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은 아무래도 타협적이 될 수는 없을 것이며 극동의 우리 대표의 입장에서는 사태를 원만한 결말에 이르도록 하라는 임무는 극도로 곤란하다”(1:209)고 말하고 있다. 보가크는 청국과 일본 주재 무관으로 활동하면서, 일본의 의도와 일본군의 입장을 가장 분명하게 파악했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의 여러 가지 생각들에 뒤덮혀 그의 생각은 주목받지 못했다. 와다 하루키는 이 책에서 보가크의 보고서와 의견서들을 발굴해서 제시하고 있다.
청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가 주도하고, 프랑스, 독일이 동참한 삼국간섭의 결과 랴오둥반도(뤼순, 다롄)을 반환하게 된다. 그리고 조선의 내정이 러시아 쪽으로 기울자 이를 반전시키고자, 민비를 살해하고 대원군을 활용하려고 계획했다. 이른바 을미사변이다. 와다 하루키는 이 사건의 실행부대로 모집된 사람들의 면면을 제시한다. “미우라三浦梧虜楼 공사와 스기무라杉村濬 그리고 시바柴四郎는 우선 일본이 조선의 궁내부 고문관으로 들여보내 놓은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와 『한성신보 漢城新報』 사장 아다치 겐조安達謙蔵를 음모에 끌여들였다. 아다치는 『한성신보』주필인 구니토모 시게아키国友重章, 같은 회사 사원 히라야마 이와히코平山岩彦,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 『고쿠민신문国民新聞』 특파원 기쿠치 겐조菊池謙譲 등을 끌여들였다. 이 가운데 아다치, 구니토모, 히라야마, 고바야카와, 기쿠치는 모두 구마모토 현 출신인데, 서울에는 구마모토현 출신자 그룹이 있었다. …… 영사관원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万一를 동원한 것은 스기무라였을 것이다. 수비대와 훈련대 쪽은 구스노세楠瀬幸彦가 준비했다.”1:290) 스기무라 후카시도 원래는 『요코하마마이치니신문横浜毎日新聞』의 기자였다.(1:287) 시바 시로는 민족주의 정치소설 『가인의 기우佳人之奇遇』의 저자 도카이 산시東海 散士로, 1880년대부터 김옥균, 박영효의 친우였다.(1:283) 중의원 의원으로도 활약했다. 민비 살해사건은 대륙낭인이나 군사적 모험주의자들이 주도한 것으로, 무뢰배의 행동으로 한국에는 보통 알려져 있지만, 실상 그 주역들은 언론인들이었다. 조선에서 활동하던 일본계 신문 관련 언론인과 특파원, 전 언론인 출신 외교관, 그리고 정치가들이 주도한 일이었다. 결국 조선에서 일본 세력이 물러나고, 청일전쟁의 성과가 사라지는 실패로 끝났지만, 언론인들의 역할에 대해서 의미심장한 시사점이 있다. 오늘날에도 지어지는.
러시아 지식인들도 일본의 행보에 대한 평가도 염두에 둘만 하다. 나로드니키 계열의 종합잡지 『러시아의 부』에 기고하는 평론가 세르게이 유자코프Sergey Yuzakov는 일본의 행동을 경제적 지배국을 타도해 그 지위를 점하고, 후진적 세계를 경제적으로 종속시켜서 다른 국가 국민들의 노동 위에 자국의 부를 쌓아올리는 일이라고 보고, 서구 선진국의 경제 진화를 경제정책의 규준으로 삼는다면, 경제적으로 가장 약한 이웃나라를 경제적으로 종속시키는 그 종속의 틀 안에서 경제적 자립성의 쇠퇴와 세계시장의 조건에의 종속 때문에 창출된 국내 위기의 해결을 추구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면, 조선과 중국에 대한 일본의 공격은 일본의 국내경제상태의 자연스런 귀결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일본형 경제정책의 옹호자들이라고 규정했다.(1:317) 조선을 두고 벌어진 청국과 일본의 충돌은 경제적 측면에서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평가다. 물론 제국주의적 경제정책을 사용하는 한에서.
1896년의 2월의 아관파천은 일본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일본은 러시아와의 협상을 생각하게 된다. 1896년 5월 모스크바의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일본의 원로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는 러시아 외상 로바노프-로스토프스키Aleksey Lobanov-Rostovsky와 협의하고, 6월 9일(5월 28일) 조선문제에 관한 모스크바 의정서(야마가타-로바노프 협정)에 조인했다. 조선의 독립을 필두로 조선에서 러시아와 일본의 영향력을 모두 인정하고, 양국 정부의 파병과 완충지대를 설정하기로 한 협정이다.(1:365) 이 즈음 러시아와 청나라(리훙장李鴻章)는 ‘카시니 밀약’이라 불리는 러청비밀동맹조약과 동청철도협정에 합의하고 조인했다. 6월 3일(5월 22일)의 일이다. 동청철도협정은 9월 8일(8월 27일).(1:356, 357) 당시 러시아 주재 일본 공사 니시 도쿠지로西徳二郎는 1896년 7월의 의견서에서 이 시기를 되돌아보면서 이 교섭의 결과로, 첫째, 러시아에게는 일본과 공동이든 단독이든 조선을 보호국으로 삼으려는 의사가 없다는 것, 그리고 둘째 러시아에게는 현재의 상태에서 일본과 함께 조선을 남북으로 분할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게되었다고 기록했다. 저들도 충돌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고 간단히 양보하지 말고, 해군의 확장을 서둘러서, 러・불 함대에 대항할 실력을 축적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1:365-366) 와다 하루키가 제시하는 이런 자료들은 러일전쟁이 러시아의 야욕과 침략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대응한 방어전쟁이라는 시종일관한 일본의 논리에 대한 차분한 반론이다. 일본은 1896년에 이미 러시아가 생각만큼 공격적이지 않다는 점, 조선을 노리고 있지 않다는 점을 간파했던 것이다.
1897년 12월 15일(3일) 러시아의 함대는 뤼순에 입항한다. 이어서 다롄에도 입항한다. 사실상의 점령이다.(1:396) 이는 같은해 11월 1일 산둥반도의 독일 가톨릭 교회가 중국인의 습격을 받은 것을 핑계로 독일이 11월 13일 자오저우만膠州灣을 점령한데 자극받은 것이다. 자오저우만에 기항할 권리는 1895-1896년 러시아에 있었다.(1:389) 일본의 여론은 러시아에 반발했다. 니시 외상은 냉정했지만,(1:404) 삼국간섭의 결과로 일본이 내놓은 랴오둥반도遼東半島를 러시아가 취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일본은 이를 조선에서 보상받으려고 러일신협정을 추진하려 했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러시아해군은 뤼순을 선호하지 않았다. 항구를 방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블라디보스톡과는 조선반도로 나뉘어져 있다. 조선을 일본이 장악하면, 위험해진다. 겨울에 동결되는 블라디보스톡을 대체할 항구는 필요했고, 러시아 해군이 선호한 것은 마산항과 거제도의 점령이었다. 물론 뤼순 점령 이상의 모험주의 였지만.(1:396) 뤼순과 다롄, 곧 랴오둥반도를 점령하고 만주로 세력을 뻗으려는 이상, 조선의 위치는 급소여서, 일본이 조선반도 전체를 장악하면, 러시아의 만주경영 전체가 위험해 진다. 러일전쟁으로 가는 길목에서 끊임없이 등장했던 만한교환론과 중립지대론의 근원이었다. 만주와 한반도를 러시아와 일본이 분할점령하려면, 양국이 동맹국이거나 우호국일 때만 가능했다. 이런 구조적 모순이 러시아의 행보를 줄곧 어렵게 한다.
한국 정세가 급변한다. 1898년 3월 독립협회의 활동으로 서울의 가두는 반러시아 열기가 점령한다. 러시아 공사 슈페이에르Alexey Nikolayevich Shpeyer는 배신당했다는 생각으로 뒤덮였다. 고종은 여전히 러시아에 의존하려 했음에도, 두번째 아관파천은 무리였다. 3월 7일 슈페이에르는 한국의 외부대신에게 귀국의 대황제 폐하와 귀 정부는 러시아의 원조를 받을 뜻이 있는가 없는가를 24시간 내에 회답하라고 요구했다. 당시 러시아는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파견한 상태였고, 일본은 어떻게든 둘 중 하나라고 일본이 받아내고 싶어했다. 그리고 3월 10일의 만민공동회의 결과 3월 12일 내각회의에서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를 희망한다고 결정하게 된다. 러시아 정부는 재정고문 알렉세예프에게는 귀국을 명하고, 군사교관은 잠시 더 머물라는 지령을 내린다. 슈페이에르의 이 통보는 러・한 관계의 결정적 전기였다. 러시아는 한국 정부와 특별한 원조관계는 멈추되, 일본에 넘길 생각은 없었다.(1:415-417) 와다 하루키는 명확히 지적하고 있지 않지만, 러시아의 결정적인 실수였다. 러시아가 거의 자발적인 통보로 재정고문과 군사교관을 철수하게 된 후, 러시아는 조선에서의 권익을 상실하게 되고, 보호할 방법을 잃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러일전쟁 시기까지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러시아는 조선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그랬기에 1945년 북한을 점령할 때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일본 정부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외상 니시와 러시아 공사 로젠Roman Rosen이 외상 무라비요프Muraviyov의 훈령으로 1898년 4월 25일 니시-로젠 의정서라 불리는 제3의 협정을 조인하게 된다. 야마가타-로바노프 협정, 1896년 5월 고무라小村寿太郎-베베르Karl Weber 협정과 함께 3개의 협정이다. 이 협정의 내용은 러시아가 재정고문과 군사교관을 보낼 독점권을 상실했음을 확인한 것이다.(1:418-420) 야마가타-로바노프 협정과 마찬가지로 니시-로젠 의정서도 합의에 이른 것보다 포기한 것이 더 중요하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조선을 남북으로 분할하자고 주장했었다. 대동강 부근 북위 39도 정도로 서로의 세력권을 나누자고 말했었다.(1:363) 2년이 채 못되어서, 이번에는 일본이 한국을 일본의 이익범위로 만주를 러시아의 이익범위로 서로 인정하자는 만한교환을 제시하게 된다.(1:417) 그러나 이번에도 러시아는 동의하지 않았고, 조선에서의 발언권의 여지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1:418) 결국 일본은 이때의 만한교환론 이후 두 번 다시 만환교환을 꺼내들고 제안하지 않았다. 그래서 1896년과 1898년이 러일전쟁을 회피할 수 있었던 두 번의 기회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애초에 러시아와 일본의 이해관계는 양립불가능한 것이었지만. 1900년 6월 의화단 사건(북청사변)이 발생했을 때, 야마가타 수상은 8월 20일자로 ‘북청사변[의화단사건] 선후책’이라는 의견서를 작성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다시 만한교환론을 언급하면서, 대동강-원산항을 경계로 조선을 점령하면 일・러의 다툼을 피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가 ‘교활’하게도 ‘겉으로는 분할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도 대군을 보내 나중에 ‘단독으로 커다란 이익을 점하려는 야심’을 보이고 있다. 만주의 문제에 대해서도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있기 때문에 러시아와 교섭하는 것은 어렵다. 따라서 “남방경영” 즉 푸젠福建과 저장浙江을 세력권에 추가하는 것을 먼저 진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짓고 있다.(1:519) 야마가타의 생각은 1896년부터 이때까지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었다.
러시아의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인 재무장관 비테Sergei Yulyevich Witte는 1902년 9월부터 극동여행을 한 후 황제에게 보고서를 제출한다. 비테는 다양한 관청의 현지 대표자들 사이에 러시아군의 만주철수 문제, 청국이나 일본과의 관계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의견이 일치되어 있지 않은 것이 큰 문제라고 지적했고, 육군은 중국인 폭동을 해군을 일본과의 전쟁을 우려하며, 철도기사는 철도 일에 집중하고, 견해가 일치하지 않아, “행동양식의 통일 결여”로 이어지고 있다고 보았다. 객관적으로, 러시아가 뤼순을 점령하고 남만주철도를 부설함으로써 남만주의 정세가 불안정해졌다, 때문에 끊임없이 극동에서의 사건 발생 가능성을 걱정해야 하게 되었고, 비테는 자신이 추진한 다롄과 남만주철도의 건설이 위태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비테의 재무성이 쌓아올린 남만주철도 왕국이 표류하고 있었다.(1:629) 비테의 입장은 일본과의 전쟁은 회피해야 하는 것이고, 필요하면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테가 지적한 문제, 의견의 불일치, 행동양식의 통일 결여는 계속해서 러시아의 발목을 잡았다. 황제가 모든 의사결정에 간섭하는 전제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1903년에 러시아에 신노선이 등장한다 베조브라조프와 보가크 등이 주역이다. 보가크는 아바자Alexey Abaza의 권고로 ‘만주문제의 발전에 있어서 1902년 3월 26일 조약의 의의’라는 보고서를 작성하고, 5월 8일(4월 25일) 황제 앞에서 낭독했다.(2:753) 1902년 3월 26일의 조약이란, 1902년 4월 8일에 러시아와 청국 사이에 체결된 만주철군협정을 말한다. 러시아는 의화단사건으로 청나라와 충돌이 발생하자 이를 빌미로 만주로 대규모로 출병하여 북만주에 주둔하게 된다. 이를 러청전쟁이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철군을 대가로 여러 차례 청나라에 조건을 제시하지만, 청나라에 협박도 불사하는 일본의 강력한 반대로 말미암아 결국 조건을 포기하고, 향후 18개월 동안에 걸쳐 철군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1:610-611) 일본의 반러주의자들에게 승리했다는 인상을 심어준 이 만주철군협정은 삼국간섭에 대한 일본의 응징일 것이다. 청나라는 여러 차례 러시아에게 양보하여 조건을 받아들이려 했지만, 일본은 이를 혼자서 또 영국 등 열강과 연합하여 막았다. 영일동맹의 체결 후였다. 일본이 러시아의 승리로 획득할 권리의 확보를 막은 것은 결국 러일전쟁으로 가는 발걸음이었다. 일본은 러시아의 침략야욕을 강조했고, 군비증강의 이유로 삼았다. 러시아는 전쟁과 투자에도 불구하고 이익을 얻지 못했다. 빈손으로 철군하기로 조약은 맺었으나, 그 조약은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일본은 러시아의 출구를 막고 있었다. 보가크는 이 상황을 이렇게 결론짓는다. “극동에서의 전쟁 방지는 제1급의 국가적 대사”이지만, “이를 달성할 제1의 수단은 양보정책을 중지하는 것”이라고 언명한다. 양보정책이 위험한 이유는, 우리에게 가장 바람직하지 않을 때 전쟁에 말려들어가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자국의 장소를 무기를 가지고 지킬 각오를 확립하고, 러시아에서 전투준비를 굳건히 해야 한다고 언명했다.”(2:755) 결과적으로 보면 보가크의 정세판단은 옳았지만, 러시아는 실행력이 없었다. 그러니 반대로 실행력이 없는 결론을 내린 보가크의 정책제언은 오류라고 보아야 한다. 뒷날 보게되지만, 러시아는 지킬 수 없는 것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보가크의 제안은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때 이미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결정한 후였다. 변화의 계기는 1901년 6월 가쓰라 타로桂太郎를 총리대신으로 하는 내각의 수립이었다. 외상은 고무라 주타로였다. 가쓰라 내각의 성립은 일본에서 세대교체를 의미한다. 유신 원훈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원로들이 정치의 제1선에서 물러나고 정책 결정의 주도권을 가쓰라와 고무라 등 유신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한 신세대가 담당한다는 신호였다.(1:568) 물론 그후에도 이토는 러시아로 가서 러일동맹을 추진하기도 하지만. 서구 세력의 강력함을 경험한 메이지 유신의 원로들은 온건했지만, 이들은 대외 강경책을 주장했다. 그리고 1903년 4월 21일 무린암無鄰菴 회의에서 원로 이토, 야마가타, 가쓰라 수상, 고무라 외상 이 네 사람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사실상 결정한다. 무린암은 야마가타의 별장이었다. 가쓰라와 고무라는 사전에 합의한 바가 있는데, 한국에서의 충분한 권리를 요구하고, 만주에서는 경영이 본 궤도에 오르는 범위 안에서 저들에게 우세한 양보를 해 여러 해 동안의 어려운 문제를 일시에 해결하되, 전쟁으로 이를 강요하겠다는 것이다.(2:738-741) 일본의 대러시아 전쟁 결정은 실로 이른 시기에 내려졌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착실하게 전쟁 준비를 해 나가게 된다.
반면 러시아의 현실인식은 안일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데, 1903년 6월 러시아의 육군상 쿠로파트킨Aleksey Nikolaevich Kuropatkin은 일본을 방문했고, 체류가 끝날 즈음 일본인의 종교심 결여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 이것이 일본군의 커다란 약점이라고 일기에 쓴다. “종교 없이는, 신의 위업에 대한 믿음 없이는, 전쟁의 혹독한 시련을 견뎌내는 일은…… 개인적으로는 가능하겠지만 대중에게는 불가능하다. 학교에서 종교 대신 최고 도덕, 조국, 천황에 대한 사랑, 가족에 대한 경의를 가르치고 있다”고 기록했다.(2:791) 와다 하루키는 많은 러시아의 군인과 정치인이 그러했듯이, 쿠로파트킨이 일본군을 얕보고 있다고 말했지만, 쿠로파트킨은 실은 무엇이 일본에서 종교를 대체했는지 정확히 본 것이다. 조국과 천황에 대한 사랑과 가족애가 그들의 종교이자 신앙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큰 힘이었는지는 전쟁이 끝난 후 일본군 승리의 요건으로 누구나 정신력의 승리를 꼽은 데서도 드러난다. 그것이 훗날의 비극으로 이어지고.
1903년 6월 23일 어전회의에서 일본의 방침이 정해졌다. 2달 전 무린암 회의에서 결정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때 참모총장 오야마 이와오大山巌의 의견서는 지금이 전쟁의 호기이며, 3, 4년 후에는 러시아의 결점이 없어질 것이라고 전쟁을 서두르고 있었다.(2:794-795) 일본은 서두르고 있었다. 러시아의 해군은 계속 증강되고 있었고,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개통도 눈앞에 와 있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러일전쟁이 한창인 1904년 9월에 완전개통되었다. 일본은 과중한 세금을 통한 재정운영으로 군비증강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극동에서의 러시아의 세력, 무장력이 완성되기 전에 전쟁으로 결착을 보아야 했다. 반면 하루 전인 6월 22일(9일)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일본의 조선영유를 인정하자는 양보하자는 결정을 한다.(2:800) 그러나 이 둘은 타협불가능한 것이다. 일본의 조선 지배 요구는 압록강을 러시아가 제압하는 것과 양립할 수 없으며, 또 뤼순과 다롄을 러시아가 영유하는 것과도 모순된다. 러시아 황제는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하더라도 압록강 만큼은 제압해 일본의 북상을 막고 싶었고, 그렇게 하여 뤼순과 다롄을 포함한 지역의 안전을 보장받고 싶었다. 조선을 취하겠다면 그 이상의 야망은 품지않겠다는 서약을 요구하는 것이었으니, 이 양자의 주장은 화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순간에 전쟁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2:802)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을 목전에 둔 한국은 전시 중립을 추진했다. 1903년 8월의 일이다. 러시아 황제에게 보내는 밀서를 바탕에 깔고 있는 중립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9월 26일 고무라가 지금 일본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노력하고 있어, 전시 중립을 말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고 답신을 보냈다. 그러면서 구두로 덧붙였다. “일본도 종래 타국의 교전 시에 국외중립을 선언한 일”이 있었지만, 그 선언을 교전국이 유린했을 경우에 “스스로 이를 단연코 배척할 결의를 지니고 있었다.” 한국도 “중립국이고자 하는 이상 스스로 이를 보존유지할 결심과 실력을 요하는 것이 우선이다. 한국의 급선무는 국력의 충실, 국가의 부강을 도모하는 데 있다.”(2:883) 일본이 돕겠다는 교묘한 협박과 거짓 약속을 담고 있지만, 한 가지 만은 진실이다. 중립은 스스로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다. 멀게는 임오군란 시기부터 이때까지, 혹은 지금까지도 종종 중립이라는 주제는 한국 정치에서 등장했다. 당시 일본은 한국은 중립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비아냥거렸는데. 실제로 그렇다. 중립을 지키려는 힘과 의지가 있는 무장중립만이 중립을 지킬 수 있는 법이다. 1945년에서 48년에 이르는 해방정국에도, 또 여러 번의 국가적 변혁기에 중립안이 종종 제시되고, 주목도 받았지만, 허울만 좋은 몽상이라는 점을 대한제국의 역사는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1903년부터 일본과 러시아는 마지막 교섭에 돌입했고, 그 중 일본의 마지막 대답은 12월 18일 각의를 거쳐 천황에 상주된 것이었다. 한국에게 조언 및 원조를 제공할 권리를 주장하면서, 러시아가 반복적으로 요구한 전략목적으로 조선 영토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라는 조항과 조선 북부 39도선 이북에 중립지대를 설정한다는 조항은 끝내 거부하는 것이었다. 극동주 태수인 알렉세예프의 말대로 조선에 대한 일본의 보호국 제도를 정식으로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이었다.(2:947-948) 일본은 전쟁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일본은 교섭이 타결되어 전쟁이 지연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전쟁이 지연되면, 러시아의 군비가 강화되어 일본의 패배로 끝날 것이라는 조바심으로 가득했다. 일본은 타협할 생각이 없었다. 교섭은 요식행위였다.
이즈음 한국이나 한국인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만한 기록은 많지 않다. 이때 서울에 체재한 폴란드인 세로셰프스키Wacław Sieroszewski가 남긴 관찰기록이 있다. 왕궁에서 일하던 관리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당시 왕궁에서는 간혹 정전이 일어났는데, 황제 정부가 미국 전력회사에 전기요금을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국고가 텅비었던 것이다. 돈이 없는 이유는 봉급이 작은 관리들이 도둑질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외국인들은 약탈하는 것만 생각한다고. 일본인은 아주 나쁘다. 산 채로 목을 조르고 있다. 은행을 열어서 돈을 빌려주지만, 곧 모두 노예가 될 것이다. 폴란드인인 그는 러시아 제국의 적이었기에 일본인들은 개혁을 실시하고, 통치를 개선하고, 교육을 향상시키고 노예제를 없애고, 경제를 튼튼하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느냐며 거들었지만, 조선인의 답은 간단했다. “저들은 우리를 외견상으로만 만족시키고, 우리의 겉가죽만을 바꾸려 하는 거요. 우리의 내면은 파괴해 우리 껍데기만 남기고, 우리의 혼은 목 졸라 죽이려 하고 있는 거요.”(2:970-971) 조선인 들이 모두 바보인 것만은 아니었다, 나름의 판단과 지각은 하고 있었다. 사태는 해결하지 못했지만.
1904년 2월 4일 오전 10시 30분부터 각의가 개최되어 개전이 결정되었다. 통지문에는 여전히 일본 정부는 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내세웠다. 자국의 강녕과 안전을 위해 긴요불가결하다고. 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에 상처를 입히는 건 일본이었지만.(2:1069) 여기서 다시 한 번 일본은 서둘렀다. 러시아의 양보로 개전을 못하면 곤란하다는 입장이었다. 어전회의가 끝나자마자 동원령이 내려졌다.(2:1070) 일본은 중재를 막으려 했다. 1904년 1월 러시아는 프랑스, 영국에 중재를 요청하려 했고, 미국도 중재 의지를 표명했다. 고무라 외상은 미 국무장관 헤이John Hey에게 조정이 효력이 없을 것이라고 미리 알렸다. 영국의 스코트Charles Scott 공사에게도 조정이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크다면서 국외중립을 요청했다. 프랑스 정부의 델카세Theohpile Delcasse 외상도 13일 중재 움직임을 시작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러시아와 1892년부터 동맹국이었다. 1차 대전의 폭탄이 되는 그 동맹이다. 영국의 란스다운Lansdowne 외상에게도 그런 움직임이 있었지만, 하야시林 공사를 통해 일본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일본은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너고 있었으며, 영일동맹으로 인해 일・러 교섭은 처음부터 영국과 상의해 온 것인 만큼 반대할 수는 없었다.(2:1044-1046) 일본은 중재 역시 주의 깊게 회피했다. 러청협상도 배후에서 결렬시켰고, 러시아와의 협상도 상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고집하면서 결렬시켰다. 다른 열강의 중재 의사도 물리쳤다. 여론은 이미 전쟁을 향하고 있었고, 전쟁을 결의한 것은 반년도 더 되었다. 일본의 준비는 전쟁을 향해서만 달려가고 있었다.
『노보예 브레미야Novoye Vremiya』의 사주 겸 주필 수보린Aleksey Suvorin이 2월 5일(1월 23일)자 칼럼에서 쓴 문장은 러시아의 분위기를 잘 나타내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모두가 러시아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백 번이나 되풀이해 말했다. 외국의 신문들이, 러시아는 할 수 있는 만큼의 양보를 했다. 그러니까 일본이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면 일본은 전쟁을 위한 전쟁을 바라고 있는 것이라고 써준 것에 대해 우리는 기뻐하고 있다. 이 일본이라는 나라는 이상한 놈이다. 결국 러시아가 평화를 원한다고 아무리 열심히 말해도 헛수고라고 생각한다. …… 러시아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관없이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전쟁은 싫다고 생각하면서, 적국도 싫은 놈이라고 생각하면서 싸워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자기 목숨이든 적의 목숨이든 소중히 여기지 않고 싸워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극이다 공포와 유혈로 가득 찬 특별한 힘의 고양과 특별한 열광으로 가득 찬 비극이다. …… 적국으로서서는 우리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 즉 전쟁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말을 듣는 게 기쁜 것이다.”(2:1081-1082) 러시아가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는 점은 아주 분명하다. 황제 니콜라이 2세, 외상 람스도르프, 육군상 쿠로파트킨, 극동태수 알렉세예프, 베조브라조프, 보가크에 이르기까지. 방식은 다소 달랐다. 람스도르프Vladimir Lamsdorf와 쿠로파트킨은 어디까지나 양보를 통해서 알렉세예프와 베조브라조프, 보가크는 양보는 일본의 침략욕, 영토욕을 달랠 수 없으니 힘으로 억눌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전쟁을 할 생각은 아니었다. 황제는 오락가락했지만, 전쟁을 피하려 했다. 판단착오, 의사소통의 곤란, 현실성 없는 자신감 그리고 무능력이 문제였을 뿐이다. 와다 하루키는 일기, 보고서, 외교전문, 의견서, 상주문 등을 통해서 이를 충분히 입증했다. 탁월한 업적이다. 그렇다고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한 모든 걸 다한 것은 아니다. 일본이 원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진 않았으니까.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양보를 했으나, 그럼에도 만주에서 확보한 이권을 지키려했고, 일본의 조선 경략이 거기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하려고 했다. 뤼순과 다롄은 그 점에서 지리적으로 너무나 취약했다. 게다가 러시아가 언제까지나 평화주의적이라거나 전쟁을 회피하는 것도 아니다. 만주와 조선을 탐내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일본의 군사력을 압도할 수 없는 이 기간 동안은 전쟁을 피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일본에 질 수 있는 전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전쟁이 오래 지속되면, 결국 러시아가 이길 거라고 믿었으며, 포츠머드 강화조약에서도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고, 배상금도 지불하지 않았다. 러시아도 할 수만 있다면 조선을 경략하려고 했었다. 할 수 없었을 뿐이지.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와다 하루키의 전공이 러시아사라는 점을 알게 되었는데, 러시아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도 엿보였다. 그러나 러일전쟁의 개전시점에서 러시아가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는 점에는 분명한 의미가 있다. 다른 상황에서의 가정은 큰 의미가 없고. 호전적이고 탐욕스러운 러시아의 위협에 맞선 어쩔 수 없는 방어전이라는 일본의 거짓말, 특히 대중의 통념을 깨트릴 필요가 분명히 있다.
1904년 2월 5일(1월 23일) 일본은 러시아에 외교관계 단절을 통고했다. 선전포고는 아니지만 사실상 효력은 같았다. 러시아와의 전쟁을 결정한 것은 전날인 2월 4일의 어전회의 였는데, 일본은 그날 밤부터 총동원령을 실시하고, 사실상의 군사행동에 돌입했다.(2:1079-1080) 2월 6일에 이 소식이 일본의 언론을 통해 알려졌고, 일본 주재 러시아 무관이 이날 보낸 “총 동원, 루신”이 마지막 전문이었다.(2:1095-1096) 일본은 외국으로의 암호전문을을 금지하는 등, 용의주도하게 외부로의 정보 유출을 통제했다. 1904년 2월 6일(1월 24일) 오후의 진해만 점령과 부산 및 마산의 전신국 제압이 러일전쟁의 최초의 군사행동이었고, 이는 한국의 주권과 영토에 대한 침략행위였다.(2:1099) 와다 하루키가 이 책에서 새로이 발굴한 사실이나 사료가 적지 않지만, 진해만 점령과 부산 및 마산에서의 군사행동에 대한 언급이 단연 돋보인다. 러일전쟁은 어떤 전쟁이며 무슨 전쟁인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곧이어 서울을 장악한다. 사실상의 식민지화가 이 순간 시작된 것이다. 전신을 단절함으로써 일본에 있던 러시아 무관이나 외교관들은 본국에 어떤 소식도 전할 수 없었다. 같은 시간일본 해군의 연합함대는 전속력으로 뤼순으로 달려가고 있던 이 며칠 동안 러시아는 전신의 두절과 안일한 상황판단으로 초전에서의 실패를 자초했다. 그러나 러시아 군인 모두가 판단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크론슈타트 군항 사령관 마카로프 중장은 뤼순 함의 러시아 함대를 내항으로 옮기라고 건의했다. 마카로프는 1898년 지중해함대 사령관으로 극동에 왔을 때 제출한 보고서에서, “일본인들은 영국인들의 제자인데, 영국인들은 그 전례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선전포고 전에 적대행위를 개시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고 경고한 적이 있었다.(2:1123) 이미 너무 늦은 일이 되고 말았지만. 과연 영국인의 제자라서 그러했을까. 그렇게 전쟁을 많이 해 본 나라가. 뤼순에서 일본의 기습공격을 받은 2월 9일(1월 27일)에야 러시아는 일본과의 전쟁을 결단했다. 2월 10일(1월 28일) 낮, 일본에서 뤼순대첩의 승전보를 알리는 호외가 나왔던 그날, 러시아의 관보는 1월 27일자의 선전포고문을 발표했다. 아직 일반신문에는 실리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이날 저녁 일본 정부도 선전의 조칙을 공표했고, 심야에 『관보』의 호외로 시중에 배포되었다.(2:1137, 1139, 1141) 일본이 시작한 전쟁은 지금까지 모두 선전포고 이전에 군사행동을 시작하는 것으로, 의표를 찌르는 기습으로 전쟁을 시작하고 상대방에게 타격을 준 후, 필요한 경우에만 선전포고를 하는 행동을 반복해 왔다.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은 경우에는 뒤늦은 선전포고도 하지 않았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중국동북침략(만주사변), 중일전쟁(지나사변, 중국전면침략), 태평양전쟁까지 모두 마찬가지다. 그 중에서 그나마 기습공격 전에 선전포고문 아니 최후통첩을 전달하려고 노력한 것은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공격했을 때 뿐이었다. 진주만의 경우도 사전에 준비된 공격시간 한 시간 전에 미국 국무장관에게 국교단절을 통보하려고 했던 것에 불과하다. 선전포고나 최후통첩이라고 보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복잡하고 애매한 문장들이었지만, 그래도 미국과 싸우는 것인 만큼 격식을 갖추려고 했다. 하지만 실상 1941년 12월 7일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한 연합함대는 11월 26일에 이미 일본을 출발했고, 전쟁을 결정하고 준비를 해 온 것은 그 훨씬 이전이다.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도쿄의 외무성에서 전문을 마지막 순간에 타전하고, 대사관에서는 비밀전문해독 등의 어려움으로 결국은 진주만 공격 한 시간 후에 노무라野村吉三郞 일본대사가 미 국무장관 헐Cordell Hull에게 국교단절을 통보한 것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든 않았든 기습으로 최대의 효과를 보려는 일본의 의지가 관철된 것에 불과하다.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배상판결을 이유로 지난 7월 1일 한국에 대한 반도체 부품과 소재의 수출규제를 통보하고 전격 실시한 것도 여전히 기습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자국의 수출통제 시스템을 재정비한다는 핑계를 달았지만. 그리고 계속되는 교섭의 거부와 부인은 일본의 일관된 외교 수단과 행태를 보여준다. 한번 의사를 결정하기 어렵지만, 일단 결정하면, 거두어 들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고, 목표를 관철하기 위해 어떤 수단도 불사한다는 것. 일본의 이웃으로 사는 한 익숙해지고, 늘 신경쓰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다. 물론 선전宣戰포고 또는 선전의 조칙은 전쟁을 선포한다는 뜻으로 선전先戰이 아니다. 더욱이 공격 이전에 특정한 조건을 갖추어서 해야한다는 규약이 생긴 것도 러일전쟁이 끝난 1907년의 일이다. 기독교국가들 사이의 관습이라고 무시되기도 했고, 선전포고 없이 시작된 전쟁도 매우 많으니 무조건 일본만 옳지 않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다만, 와다 하루키가 전해주는 1904년 1월말에서 2월초 개전시기까지 일본의 모습은 차라리 러시아의 양보를 염려하는 것처럼 보였다. 러시아가 일본이 전쟁을 개시하는 것을 다른 열강이 인정할 수 없을 정도의 양보를 해서, 전쟁을 시작하지 못할까 조바심내는 것처럼 비춰진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일본은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싸우려 했을 뿐이다. 먼저, 자신이 원하는 싸움의 시간을 정해놓고, 외교교섭이든 전쟁준비든 해 나갔던 것이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외교가 수단화되었을 뿐이라고나 할까. 외교는 일본의 시간표를 둘러싼 장식이라고 할까. 지금도 말끝마다 내세우는 국제법을 위반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한 자기정당화라고 할까. 그러니 일본이 최후통첩을 보내는 방식은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다. 언제 급소를 찔러올런지 몰라서다.
2월 13일(1월 31일) 일본의 하야시 공사는 외부대신 서리 이지용을 통해 의정서 안을 제시한다. 한국을 보호국화하겠다는 내용의 의정서다. 제1조가 눈에 띈다. 일・한 양 제국 사이에 항구불역恒久不易의 친교를 보지保持하고 동양의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서, 대한 제국 정부는… (2:1149) 1904년부터 조선은 사실상의 식민지가 된다. 그래서 예전에는 식민지배 40년이라고 가르쳤다. 그게 어느새 36년이 되더니, 이제는 35년이라고 한다. 8월 27일부터 8월 15일까지라는 뜻이리라. 그걸 줄인다고 부끄러움이 좀 줄어들기는 하는 건가. 무엇보다 눈에 뜨이는 건 항구불역이라는 네 글자였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이라는 아름다운 뜻을 가진 이 네 글자를 현대용어로 바꾸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이 된다. 역사를 조금만 알아도 그런 문구를 어떤 협정에도 넣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텐데.
오랜만에 와다 하루키를 읽으면서 다시 여러 차례 감탄했다. 지난 광복절 경축사에 인상적인 구절이 몇 있었다. 그중 하나는 아무르강가에서 남북과 러시아가 함께 콩농사를 짓자는 구절이었다. 이 아무르 강변에서 러청전쟁의 비극인 블라고베셴스크의 학살이 일어난다. 아무르강 왼쪽의 청국의 고립영토 이른바 강동64둔江東六十四屯인데. 여기 살던 수천명의 중국인들이 강제로 맨몸으로 아무르강을 건널 것을 요구받고 학살당한다.(1:498-499) 이 사건을 일본에서는 아무르강의 유혈アムル川の流血이라고 이라고 지칭했는데, 러시아를 비난하고, 동양평화의 주인공을 자처하는 수사로 늘 등장하곤 했다. 도쿄대 기숙사가로 알려진 창가로 불려지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일본은 자신들과 상관없는, 아니 자신들도 그 침략의 일환인 아무르강의 유혈을 무자비한 학살이라고 되새기면서, 스스로 동양평화의 주역을 다짐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모두가 아는 바다. “광복은 우리에게만 기쁜 날이 아니었습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태평양전쟁까지 60여 년간의 기나긴 전쟁이 끝난 날이며, 동아시아 광복의 날이었습니다. 일본 국민들 역시 군국주의의 억압에서 벗어나 침략전쟁에서 해방되었습니다”라는 구절은 유독 눈에 띄었다. 일본 리버럴 들이 말하는 15년 전쟁 사관도 실은 만주사변 이전은 문제삼지 않는다는 것이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그리고 뒤이은 한일병합은 정당하다는 역사적 인식이 일본에서는 지극히 보편적 상식에 속한다. 와다 하루키는 그런 통념에 근본적으로 도전하고 있다. 그리고 전쟁에 대한 이런 인식이 35년간의 식민지배를 당한 한국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1894년에 일어난 청일전쟁으로부터 시작하면, 50년간 이어진 전쟁이다. 『청일전쟁日清戦争―東アジア近代史の転換点』(岩波書店, 1973; 소화, 1997)의 후지무라 미치오藤村道生도 청일전쟁은 1차 중일전쟁으로 50년에 걸친 중일전쟁의 시작이라고 말한 바 있다.(하라 아키라原朗는 동아시아 50년 전쟁.) 한국에서 60여년에 걸친 전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실수가 아니라면, 1882년 임오군란의 처리과정에서 일본은 조선에 군대를 둘 수 있는 권리, 즉 주둔권을 얻었고, 1884년 갑신정변에서는 무력으로 개화파의 쿠데타를 지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전쟁은 1894년부터니 50년 전쟁 정도가 더 낫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날 어느 언론도 이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래서 너무나 아쉬웠다. 이런 정도의 역사 인식을 보통의 한국인이라면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일관계의 긴 역사에 관심을 가진 분이라면 그 누구에게라도 권하고 싶다.
2019. 10. 22.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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