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노 지즈코上野千鶴子,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女ぎらいーニッポンのミソジニー』, 나일등 역, 은행나무, 2016(2010).
얼마전 주간지 「시사IN」에서 20대 남성집단에 대한 조사를 발표해서 큰 관심을 끌었다. 페미니즘을 혐오하는 20대 남성집단이 견고하게 등장했다는 내용으로, 그 기사는 이들을 마이너리티 정체성으로 그리고 이들의 주장이 납작해진 공정성 또는 맥락이 제거된 공정성으로 해석했다. 아마도 관심의 시작은 20대 남성의 유독 낮은 대통령 지지율에서 시작된 것일 테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젠더 이슈에 대해 주목하는 기사가 늘고 있고, 여성 소방관이나 여성 경찰에 대해 비난 하는 댓글에 대한 기사들도 눈에 띈다. 정말 젠더 이슈가 심각해진 걸까? 정말 PC는 모든 문제를 가져온 것일까?
나는 아직 개인적으로 어떤 답변도 내리지 못하겠다. 눈에 보이는 너무 쉬운 답변에 안주한다는 생각이 든다. 젠더 갈등이 없는 것도 아니고. PC에 지쳐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도 아니고. 전투적인 페미니스트들에 지쳐서 푸념하는 이야기를 한두번 들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사석에서 주고받은 이야기들을 분석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떠도는 팟캐스트나 동영상과 다를게 뭔가. 우에노 지즈코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를 읽으면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질문 하나가 제기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그 질문은 이것이다. ‘다시 태어난다면 여자로 태어나고 싶은가?’ 제기된 질문들로는 남성 마이너리티 정체성이 확립되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비슷한 질문이 하나 있는데, ‘지금 아이를 낳는다면 딸이 더 살아가기 좋은 것이다’라는 질문인데. 기사는 이것을 정체성의 근거로 생각했지만, 나는 이 질문이 오히려 전략적으로 답하기 좋은 질문으로 보인다. 이들은 대부분은 아직 자식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태어나면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고, 이를 악물거나 푸념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면 말이다. 이들의 말에 자기부정, 자기혐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남성 혐오, 남성 부정, 남성 멸시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남성이 되고 싶은 혹은 남성으로 인정받고 싶은 또는 남성 사회에서 성원권을 획득하고 싶은 열망 또는 분노의 표출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어느 쪽으로든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지만, 정체성이 형성되었다는 식의 주장은 일종의 자기 충족적 예언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정체성이 있다고 반복해서 말하면, 사람들은 그런 정체성을 자기 안에 만들어 낸다. 정체성이란 그런 것이다. 그래서 자기 동일성이라고 말한다. 그런 기준에 자기를 가져다 맞추기 때문에.
한국어로도 여성 혐오라고는 하고 있지만, 미소지니misogyny의 정확한 번역어는 되기 어렵다는데. 이 여성 혐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남녀에게 비대칭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남성에게는 ‘여성 멸시’, 여성에게는 ‘자기 혐오’이기 때문이다. ‘여자로 태어나지 않아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남자는 과연 얼마나 있을까. 반대로 ‘여자로 태어나 손해’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는 여자는 얼마나 있을까.(15) 남자들이 ‘남성됨’이라는 성적 주체화를 이루기 위해 ‘여성’이라는 타자에게 의존할 수 없는 모순을 그들이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성적으로 ‘남성’인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여자라는 시시하고 불결하며 이해 불가능한 생물에게 욕망의 충족을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한 남자들의 분노와 원한이 바로 여성 혐오의 내용이라는 것.(18) 나는 내가 개인적으로 여성을 혐오하거나 멸시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내가 살아온 사회는 구조적으로 여성을 차별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내가 개인적으로 여성을 혐오하거나 멸시하지 않아도,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는 자리나 나의 윗사람 중에 여자는 없거나 드물었고, 내 또래의 여자들은 대부분 주변화되어 있었다. 나는 어렸을 때는 그들이 스스로 주변화된다고 생각했는데, 훗날 보면 그것은 강요에 의한 것이거나 생존전략이었다. 가부장적 구조가 강고하게 자리잡은 곳에서는 페미니스트가 되기 쉽다. 조금의 공정성과 동정만 내밀면 되는 것이다. 나는 지금의 기성세대가 말하는 페미니즘이 이 정도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도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대가 변화하면서 가부장적 구조는 강고하지만, 그럼에도 균열이 생겼고, 곳곳에서 부스러지며 무너지고 있다. 그러니 이젠 진짜가 아니라면 페미니스트연 하면서 여유롭게 손 한쪽을 내밀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마초라서 뭐 어쩔 도리가 없기도 하고. 그래서일까. 나는 전반부는 이해해도 후반부의 프로이드적 해석에는 동의가 안된다. 나는 나 자신이 남성으로 인정받기 위해 여성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자각 따윈 없었다. 나의 고민은 왜 한 사람은 자기 혼자 만으로 스스로 자족적이고 독립적일 수 없는가에 있었기 때문에. 모두 젊은 날의 치기어린 생각에 불과하다만. 그래서 나는 남성은 이렇다, 저렇다는 규정에 늘 반발심이 생긴다. 일단 나는 남자지만, 내가 그럴 때도 있지만, 나는 안 그런 일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우에노 지즈코는 이브 세즈윅의 논의에 의존한다. 세즈윅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여자들의 사상』에 대략 나온다. 남자는 남자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면 여자는 전리품 처럼 따라온다. 성적이지 않는 남성 간 유대를 호모소셜이라고 하고 그래서 호모섹슈얼은 금기가 된다.(31-33) 호모소셜리티는 호모포비아에 의해 유지된다. 남자가 자신의 성적 주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이용하는 장치가 여성을 성적 객체화하는 것으로 이를 서로 승인함으로써 성적 주체 간의 상호 승인과 연대가 성립한다.(38-39) 남성됨을 인정해 주는 것은 이성인 여성이 아니라 동성인 남성이다. 남성의 성적 주체화에 필요한 것은 자신을 남성으로 인정해주는 남성 집단이다.(45) 우에노 지즈코는 세즈윅, 푸코, 라캉을 넘나들면서 논의를 전개한다. 그의 논의는 잘 흐르다가 푸코에서 턱하고 걸리는데, 그건 내가 푸코를 아주 조금 알기 때문이다. 푸코가 말하는 삽입당하는 자의 수동성 논의를 우에노 지즈코는 거꾸로 읽었다. 그래서 그리스의 소년애는 지금 생각하는 동성애와는 달랐다. 장래에 시민이 될 자를 수동적인 자로 만들면 안되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내가 이런 페미니즘적 주제에 대해 거슬리는 것 없이 읽을 정도의 자기객관화는 되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의 경험으로는 이 문제를 객관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나는 때로 인정에 목말랐지만, 때론 인정받는 집단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남자로서의 인정에 내가 연연했는지 아닌지, 그런게 있었는지 조차 지금으로선 잘 모르겠다. 게다가 젊은 날의 기억은 취사선택되는 법. 우에노 지즈코의 눈으로 보면 남성들은 단순해 보이겠지만, 그게 또 한 사람 한 사람은 그게 아니다. 그렇지만, 이런 주장이 전혀 무관하다는 것은 아니다. 이걸 20대의 눈으로 보면 다른 생각을 하게 될 것 같다. 나의 20대를 기억해 보면, 욕망의 대상인 여성을 혐오했다기 보다, 열정과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는 자기 혐오가 더 컸던 것 같은데. 거추장스러울 뿐인 그런 욕망을.
성적 약자론에 대한 부분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젊은 남성론자 사이에 성적 약자론이 등장했다. 성의 자유 시장화가 진행되면서 연애 자원의 독점 현상과 함께 성적 강자와 성적 약자가 태어난다고. 우에노 지즈코는 이런 논의에 여성 성적 약자는 등장하지 않는다고 일침한다.(69) 이 논리를 대단히 단순한 형태로 제시한 것이 「마루야마 마사오의 뺨을 때리고 싶다-31세, 프리터, 희망은 전쟁」으로 기성 논단에 충격을 던진 아카기 도모히로다. 나 ‘일본인 31세 남성’은 재일 조선인과 여성, 그리고 최근 경기 회복기의 취직시장에서 쉽게 일자리를 얻는 어린 친구보다 더 존경받아야 한다든가. 자신과 같은 성적 약자를 커리어 우먼이 주부主夫로 먹여 살릴 의무가 있다 따위의 주장을 했다.(70) 성의 자유 시장에서 매력 자원이 없는 사람들에겐 커뮤니케이션 스킬이 필요하지만, 이들 성의 자유 시장을 저주하는 사람들은 ‘규제 완화’ 이전의 결혼 시장에 향수를 느낀다. 거의 모든 남녀가 결혼 상대를 찾아 짝을 맺는 ‘전원 결혼 사회’에 향수를 느낀다. 이것은 고도 성장기 일본에서 처음으로 생겨난 현상이다.(73) 이를 ‘재생산 평등주의’라고도 말한다. 결혼이 강제였던 사회, 결혼은 여성의 ‘평생 직장’이었다.(74) 그리고 비인기남 K가 벌인 아키하바라의 무차별 살상 사건을 언급한다. 여자친구만 있었으면 되뇌인 K.(78) 이런 문제를 우에노 지즈코는 세즈윅을 빌어 설명한다. 자신을 남성으로 만들어주는 독선적인 여성 소유 욕망 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면서, 관계를 원한다면 자아를 판돈으로 내건 필사의 줄다리기를 해야 한다고 꼰대 같은 설명을 한다.(88-89) 앞에서 나온 아카기 도모히로의 주장은 10년 정도 전에 신문에서 보았다. 언제인지가 정확하지 않지만, 본 것은 사실이다. 그 글은 단카이 세대가 모든 것을 가져가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이것은 마치 86세대가 모든 것을 독점한다는 비난하고 똑같았다. 그리고 성적 약자론은 20대 남성의 약자론과 묘하게 통하는 구석이 있다. 완전 결혼 사회도 마찬가지다. 한국도 그런 사회는 전무후무하게 딱 한 번 있는 것이다. 설명도 여자들과의 짝짖기의 어려움을 언급한다. 성적 약자론의 재판이다. 그런 성적 강자에 대한 비난이 아닌 페미니즘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는 건, 한국와 일본의 불평등 지수의 차이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들이 완전히 마이너리티 정체성이 아니라고 추측하는 건, 그들 자신은 (아무런 근거없이) 남자가 더 일을 잘한다고 막연하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연애나 결혼이 여자에게 이롭다는 해석에서도 엿보이고,.
천황제 비판과 황실의 여성 혐오와 남아선호 사상의 영향, 여아 선별 낙태 등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를 끌었다. 그리고 여성과 재일조선인을 비교하는 대목도, 앞에서 아카기 도모히로도 그랬지만. 범주 폭력이 이루어지는 집단을 언급하면서 고마쓰가와 사건의 범인인 이진우에 대한 프루스트 연구자 스즈키 미치히코의 표현을 인용한다. 소년이 “나는 조선인이다”라고 절망적인 한 마디를 내뱉었을 때, 이 ‘조선인’이란 말은 정확하게 말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말이란 그 자체로 역사와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멸시의 의미를 지닌 ‘조선인’이라는 단어는 그저 인종적 사실을 나타내는 의미로 이해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우리는 ‘나는 일본인이다’와 같은 사실확인적 의미로 ‘나는 조선인이다’라는 말을 일본어로 말할 수 없다. 일본어밖에 말할 수 없는 소년은 일본인에 의해 일본어 속에서 만들어진 이 ‘조선인’이라고 하는 말이 의미하는 바를 어쩔 수 없이 내면화할 수밖에 없다.(163) 그리고 이를 우치다 다쓰루가 『유대 문화론』에서 유태인을 뒤늦게 등장한 사람들로 표현한 것을 언급하며, 여성도 조선인도 뒤늦게 등장했다고 말한다.(164) 일단 유대인을 뒤늦게 등장했다고 한 것은 우치다가 아니라 그가 인용하는 레비나스이고, 그것은 유대인을 규정하는 말이 아니고, 유대인의 자기 설명이다. 푸코 때처럼 내용을 뒤집었다. 그렇지만, 일본어로 만들어진 ‘조선인’이, 남성의 언어로 만들어진 ‘여성’을 지칭하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오히려 스즈키 미치히코鈴木道彦의 『越境の時―一九六〇と在日』에 흥미가 생겼지만. 그는 김희로를 위해서도 노력했다고 한다.
이어지는 어머니와 딸의 여성 혐오, 아버지와 딸의 여성 혐오, 여학교 문화와 여성 혐오에서는 한국에도 잘 알려진 작가들을 다룬다. 노부타 사요코, 사노 요코, 사쿠라바 가즈키, 사카이 준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지만, 굳이 옮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역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어머니와 딸의 관계다. 그리고 이어진 두 장은 도쿄 전력OL 사건을 다룬다. 한국어로도 번역된 사노 신이치의 『도쿄 전력 OL 살인』(글항아리)에서 느꼈던 답답함이 아주 조금 풀렸다. 왜 그랬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사키구치 안고의 『타락론』을 읽게 된 것이 수확이라고나 할까. 사노 신이치가 말한 상대 남자의 가격을 매기고 있었다는 설명을 확장시켜, 성욕의 충족을 여성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남자에 대한 비웃음이 있다고 말한다.(252) 그리고 나카무라 우사기를 인용해 몸파는 여자 중에도 우사기처럼 남자들의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되더라도 자기 주체성은 확보하고 싶다는 동기를 가졌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은 남성을 단순히 성기로 환원시키는 것이라고 우에노는 결론짓는다. 남성은 여성에 대한 증오를 배우고, 여성은 남성에 대한 경멸을 배우는 매매춘.(265) 누구의 해석이든 당사자는 죽었고, 해명할 만한 근거는 없으며, 정답 역시 없기 때문에.
우에노는 마지막에서 모리오카 마사히로를 인용하는데, 많은 페미니스트는 남성의 자기 혐오라는 문제를 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모리오카는 남성으로서 저 자신이 연애와 성애, 섹슈얼리티 면에서 상처투성이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도 아프지 않다, 나는 전혀 상처받지 않은 가해자다 이런 식으로 나 자신을 속여왔다며, 남성의 자기 혐오에 ‘자기 부정’과 ‘신체 멸시’가 있다고 말한다. 주체와 객체의 이원론, 정신과 신체의 이항대립은 남성에게서 신체를 타자화하고, 신체의 주인으로 주체=자기를 과시할 필요를 요구받는다고 말한다. 남성 신체에 대한 자기 혐오는 탈신체와, 즉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이탈 소망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남성 혐오는 자신이 남성이라는 사실과 자신이 충분히 남성이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것이라고 평한다.(314-316) 이 문제야 말로 탐구해야 할 주제다. 이는 실은 인간의 자기 혐오가 남성과 여성, 양성제도에 의해 젠더의 틀을 통해서 투영되는 것이다. 우에노는 마지막에서 여성의 호모소셜 즉 자매애를 인정하지 않는데. 이 부분에 대해 할 말이 많은 사람도 많을 것이다.
우에노 지즈코를 좀 읽었지만, 그가 어떤 문제에 대한 해답을 준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게다가 내가 좀 자세히 읽어본 저자들에 대한 그의 인용은 늘 불만스러우니, 그가 다른 사람을 인용하는 데도 신뢰가 가지 않는다. 다만 일본의 페미니즘 1세대 답게, 일본의 현장 문제에 대한 관심과 이론적 자원의 소개 그 자체는 충분한 가치를 가진다. 당분간 우에노 지즈코를 읽지는 않을 것 같다. 다만, 우에노의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의 전향에 대해서는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일본 학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특히 한국에 부족한 것은 흑인 연구라는 생각이 든다. 일본의 마이너리티 연구는 미국의 인종 차별 연구에 어느 부분 기대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에서는 흑인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다. 다른 포스트콜로니얼 주제에는 모두 관심을 가지면서도, 유독 흑인 문제는 외면하는데. 이것이 스스르를 피부색에 따른 위계질서에서 더 짙은 피부색보다 우월하다고 규정하는 그릇된 인종적 사고의 반영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더불어 20대 남성의 반페미니즘이나 젠더 이슈에 대한 분석이 성의 자유시장에서의 약자 문제와 남성의 자기 혐오와의 관련성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늘 그렇듯 한 눈에 범인 같아 보이는 자는 범인이 아닌 경우가 많다.
2019. 5. 21.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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