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중・우치다 타츠루, 『위험하지 않은 몰락』.

우치다 타츠루와 강상중이 어느 토론회에서 대담 중이다. 둘은 1950년 생으로 동갑이다. 둘 모두 공부가 다소 늦었다, 우치다는 합기도 수련으로. 강상중은 정체성 고민으로. 69이라곤 믿어지지 않는 두 사람이다.

강상중・우치다 타츠루内田樹・姜尚中, 『위험하지 않은 몰락世界「最終」戦争論: 近代の終焉を超えて』, 노수경 역, 사계절, 2018(2016).

원제인 세계최종전쟁론이란 말을 듣고 식겁했다. 세계최종전쟁이란 만주국을 설계하고 만주사변을 일으킨 관동군 참모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의 지론이다. 니치렌 사상에 심취했고, 기타 잇키北一輝에게서도 영향을 받은 그는 전 세계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연합과 일본으로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연맹으로 나뉘어져 최종전쟁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과연 일본스러운 책의 작명이지만, 『위험하지 않은 몰락』이라는 한글 제목이 훨씬 더 내용에 잘 들어맞는다. 대중서를 출판하는 슈에이사集英社에서 출판해서 그런건지. 내용은 세계정세의 변화에 대한 것이 주를 이룬다. 흥미로운 지점 몇 가지만 언급해 본다.

프랑스 지식인이 깔끔하고 논리적으로 군더더기 없는 글을 쓸 수 없게 된 이유는 ‘패전 부인’의 후유증이었던 셈이지요. 자기 생각을 숨김없이 다른 이에게 드러내는 투명한 언어를 사용하여 시국을 논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 의미를 이중 삼중으로 겹쳐 쓰고 독자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끄는 기술만 숙달되어,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숨겨놓은 채 비비 꼬인 글만 쓰고 있습니다.(55)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의 글을 좋아하는 나로선 좀 당혹스럽기도 하다. 내가 푸코를 좋아하는 건 그래도 푸코는 명확하기 때문이다. 여튼. 우치다 타츠루는 프랑스 문학과 철학이 전공이고, 레비나스 연구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얼핏 듣기에는 이건 일본 이야기처럼 들린다. 실제 우치다 타츠루는 시라이 사토시와 함께 패전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에 대해 논한 적이 있으니 일관성이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기서 패전을 인정하지 않는 프랑스란 비시 프랑스를 말한다. 프랑스의 나치 협력, 유대인 색출과 군수품 생산 지원, 레지스탕스 박해 등. 비시 프랑스 협력자들이 단죄를 받긴 했느나, 말하자면 시범 케이스로 처단하는 정도에 그쳤고, 패전에 대한 책임을 프랑스 국민들이 지고 있지 않다는 주장이다. 지나친 말일 수도 있지만, 비시 프랑스는 프랑스에서는 엄청나게 뜨거운 주장이다. 우치다는 참 대담하게 이야기를 하는데. 새겨둘 대목이 없지 않다. 드레퓌스 사건 때, 에밀 졸라나 빅토르 위고, 2차 대전 후 사르트르나 알베르 카뮈처럼 명료하게 말하던 사람들이 없어진 것이 패전 문제에 대한 성찰이 없기 때문이라는 말. 실제 프랑스는 승전국 행세를 했고, 모두들 안그러는 데도 죽자사자 옛 식민지로 기어들어가 군사적 패배를 당하고서야 독립을 인정하고 물러났다. 베트남과 알제리 말이다. 그리고 시리아에는 아직도 폭격하면서 병력을 보내고 있고. 그러니 완전히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는 파시즘의 발상지이기도 합니다. 르 펜이 ‘라 프랑스 오 프랑세즈La France aux Français’ 즉, ‘프랑스를 프랑스인 손에’라고 말했다고 하셨죠. 이는 반유대주의자들이 애용한 슬로건입니다. 19세기 말에 ‘반유대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두아르 드뤼몽Edouard Drumont이라는 정치사상가가 있었습니다. ‘프랑스를 프랑스인 손에’는 그가 발행하던 「라 리브레 빠롤La Libre Parole(자유공론)」이라는 신문의 머릿글이었습니다. 20세기에는 샤를 모라스Charles Maurras가 이끄는 극우단체 악시옹 프랑세즈 L’Action Française도 이 말을 슬로건으로 사용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오늘날 극우단체의 시위에 ‘프랑스를 프랑스인 손에’라는 플래카드가 등장했습니다. 샤를 모라스는 프랑스가 실은 2개의 나라로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을 일으키고 드레퓌스파를 형성한 ‘표층 프랑스’는 파리 주변에 살면서 한껏 멋을 부리는 도시생활을 하는 은행가, 저널리스트, 대학교수들이라고 봐요. 보다 더 깊은 곳에 왕당파, 가톨릭, 농경생활을 중심으로 하는 ‘심층 프랑스’가 있다고 말합니다. ‘심층 프랑스’야 말로 진정한 프랑스라는 주장이 모라스의 ‘일국이층론’입니다. 일국이층론은 오늘날 프랑스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국민 정체성과 관련된 사건이 터질 때면 이것이 무덤에서 깨어나는 듯 합니다.(63-64) 흥미로운 이야기다. 샤를 모라스와 일국이층론. 얼마전 「그린북」이란 미국 영화를 보는데, deep south를 더 깊이 정도로 번역한 것을 보았다. 어떤 책에선 심남부라고 번역하고 한자를 병기했었지. deep south, deep state, 심층 프랑스를 La France profonde라고 쓴다. 그리고 찾아보니 deep England도 있다. 충격. 이게 없는게 없구나. 그러고 보니 한국엔 한국적인 생활방식 그런게 없다. 일본에는 차라리 있지만. 프랑스에서 다시 반유대주의가 고개를 들고 있다. 나쁜 징후다. 아주 나쁜 징후. 이어지는 글에서 우치다 타츠루가 미국 남부를 이야기는 내용은 거의 인종차별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 여기서도 내전에서 패배한 사람들에 대해 100년째 이어지는 조롱이야기가 나온다.(73) 미국 남부 그 중에서도 deep south가 트럼프의 가장 강력한 지지층이지.

세계의 여러 곳에서 자기네 나라가 어떤 원리와 원칙에 의해 세워졌는지 제대로 언어화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나라건 건국의 기초에는 단단한 이념이 아니라 무르고 질퍽한 환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 격한 정념이나 르상티망ressentiment없이 나라를 세우기는 불가능하니까요. 하지만 이 질퍽한 부분은 은폐하고, 오로지 멋진 이념 위에 나라가 세워졌다고 말하지요. 제 나라가 취하는 행동이 어떤 동기에서 나왔는지를 국민도, 지도자도 자각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상상도 못했던 문제가 점점 더 발생하는 거에요.(81-81) 무르고 질퍽한 환상. 그러고 보니 한국은 아직도 건국절 관련 논쟁이 생겨나고, 친일파 논쟁이 있고, 이번엔 반민특위를 부정하는 이야기가 나와서 소위 ‘토착왜구’라는 격한 단어까지 등장했다. 건국의 기초에 놓여있는 이념이나 환상을 끊임없이 재검토하고 다시 쓰는 한국이란 나라는 젊은 건가 아니면, 신화를 쓰다가 몰락하는 것인가.

자민당의 개헌안은 일본국 헌법이 정해 놓은 모든 기본권을 제약하려 듭니다. 이미 알고 계신 것처럼 ‘공공의 복지에 반하지 않는 한’이라는 기존 헌법의 규정을 ‘공익 및 공공질서에 반하지 않는 한’으로 바꿔 썼어요. 구민의 사적 권리를 때에 따라 정부가 제약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사적 권리를 제약하지 않은 부분이 딱 한 군데 있습니다. 바로 22조입니다. 22조는 ‘거주 이전의 자유와 직업의 자유’에 관한 조항입니다. 현행 헌법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든 공공의 복지에 반하지 않는 한, 거주, 이전 및 직업 선택의 자유를 가진다’, 제2항은 ‘누구든 이국으로 이주하거나 혹은 국적을 이탈할 자유를 침해받지 않는다’라고요. ‘공공의 복지에 반하지 않는 한’이라고 시민적 자유를 한정하고 있어요. 하지만 자민당의 개헌안 초안에는 이 제한이 지워졌습니다. 이상하지요? ‘공공의 복지’를 ‘공익 및 공공의 질서’로 모두 바꿔 쓴 사람들이 이 부분만 그렇게 하지 않았아요. 오히려 아무런 제약도 하고 싶지 않은지, ‘누구든 거주 이전 및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다’라고 적어놓았습니다.(89-90) 이런 건 역시 내부에 있는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 돈을 위해서라면 뭐든 해도 좋다라는 정말 솔직한 개헌안이다. 우치다 타츠루는 극우정권이 일본국 헌법이정하는 입헌민주주의의 공화제적 속박을 벗어버리고, 행정부에 완전한 자유재량권을 부여하고, 세계 자본주의에 최적화된 ‘비즈니스하기 좋은 나라’로 만들고 싶어한다고 평가한다. 한국에서도 몇 년 전까지 듣던 이야기다. 요즘 한국의 화두는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한을 분산하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분산의 방식이지만. 새로운 악을 창출하는 방식으로는 곤란하다.

전쟁은 아마도 어떤 시점이 되면 ‘제어 불능’의 상태에 빠지는 모양입니다. 그 시점까지는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의 말처럼 ‘외교의 연장’으로 제어가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는 횟수가 늘면 어떤 시점에 이르러 전쟁 지도부가 이성을 잃게 됩니다. 더 이상 조직적 반격이 불가능해지고 전쟁을 하면 할수록 사상자만 늘어날 뿐인 상황이 되어도 결코 전쟁을 멈출 수 없게 됩니다. 전쟁의 비참함은 이렇게 ‘교전국 중 한쪽이 일방적으로 지고 있는데도 전쟁을 제어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자국민을 학살하는 데 동의한다’는 점에 있지 않을까요. 누군가 64명과 300만 명이라는 사망자 수의 차이를 놓고 그 원리는 동일하다. ‘그래 봤자 정도의 문제’에 불과하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쟁을 어떻게 억지할까’라는 논의는 나카타 선생의 말처럼 ‘전쟁을 어떻게 없앨까’라는 ‘원리의 문제’가 아니라, 좀 더 냉정하고 실용적으로 ‘전쟁을 없앨 수는 없지만 어떻게 하면 사망자 수를 줄일 수 있을지 궁리해보자’는 ‘정도의 문제’로 관점을 옮겨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은 근절시킬 수 없습니다. 테러도 근절시킬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허무주의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전쟁에서 희생되는 군인과 민간인의 수, 테러로 살해당하는 시민의 수를 어떻게 줄여갈지 기술적으로 또 계량적으로 고민하는 일이 합리적이지 않느냐는 거지요. 이 세상에서 테러를 없애려고 한다면 반드시 ‘이 세상에서 전쟁을 없애기 위한 최종전쟁’을 기안하게 됩니다.(104-105) 우치다 타츠루 이야기 치곤 평범한 말이지만, 그래서 인가 애틋하다. 차라리 희생자를 줄이는 데 목표를 경주하자. 전쟁이고, 테러고 이미 근절할 수 없다. 멀리 있는 것 같아 보이는 이야기지만, 북핵 협상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더 이상 늘리지 않고, 개량시키지도 않고, 일단 차차 줄여나가는 방법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지금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환상에 빠져 있다. 세계의 패권국가로서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애써 부인하면서, 개미 한 마리 억누르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북한과 협상이 안되어서 걱정이 아니고, 미국이 책임자들이 망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걱정이다.

작금의 현상은 글로벌화가 아니라 ‘제국화’입니다. 언어도 다르고 종교도 다르며 가치관이나 미의식, 코스몰로지(우주론)도 다른 몇 개의 제국권이 각각 제 문화의 탁월성과 보편성을 요구하지 않으며 공존하게 되겠지요.(122) 오늘날의 글로벌화는 현실적으로 미국이 주도하잖아요. 공영어는 영어고 국교는 기독교이며, 돈을 가진 사람이 가장 훌륭하다는 가치관을 공유합니다. 이 문화권의 규모는 크지만 미국이라는 지역의 민족지적 편견을 양적으로 확대한 현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역사의 종말’은 오지 않았습니다. ‘로컬’ 미국의 민족지적 편견으로는 세상을 장악할 수 없었습니다. 미국의 글로벌리즘이 이슬람 공동체와 충돌했기 때문입니다. 글로벌 공동체라는 점에서 보면 이슬람 공동체의 역사가 훨씬 더 깊습니다. 그들은 7세기부터 존재했으니까요. 모로코에서 인도네시아에 이르는 인구 16억명의 거대한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는 종교와 언어, 식문화, 복식 규정 등을 공유합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자카트Zakat의 문화’라는 고유의 경제 감각을 공유합니다.(123-124) 역사적으로 이슬람권은 오랫동안 자본주의의 수탈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도 근본적으로 종교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희사의 문화’와 ‘환대의 문화’는 유목민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도덕이니까요.(124-125) 결국 이슬람이 도전하고 있다. 앵글로 색슨을 필두로 한 서구 세력이 폭탄과 무기를 쏟아부어도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면서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 트럼프 정부는 결국 철수를 선언했다. 아니라고 말하면서 떠나는 식이다. 뉴멕시코 사막에 있는 공군부대에서 드론을 운용하면서. 결국 이슬람의 독자적 방식으로 존속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흥미로운 건 이슬람의 교리나 도덕은 유목민 문화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에 개신교와는 다르다고 한 점이다. 그런데 실은 개신교가 기반한 성서 그 중에서도 구약성서는 명확하게 유목 문화에 기반하고 있다. 물론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농경 문화와도 결합되어 있지만. 이것만으로 차이를 말하는 건 무리다. 물론 개신교 윤리는 산업 자본주의와 긴밀하게 연결된 것이 또 사실이지만. 종교 만은 아닌 그 무엇인가가 문제일터다.

미국이 주도하는 글로벌리즘이 세계를 장악하려는, 역사상 최초의 기획이 시작되고서야 이슬람권이 글로벌리즘에 비타협적인 저항 세력으로 등장했습니다. 이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던’ 정치적 현실, 즉 모로코에서 인도네시아에 이르는 이슬람권이 실재하며 그들은 다른 역사를 살면서 ‘플랫화’[획일화, 평준화]를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이 비로소 가시화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슬람 공동체의 리얼리티도 미국 주도의 글로벌리즘이 쇠퇴하면 다시 무대 뒤로 모습을 감출지도 모릅니다.(140-141) 그렇지 않을 것이다. 미국 주도의 글로벌리즘의 공격과 전쟁으로 새롭게 형성된 혹은 역사적으로 형성되고 있는 이슬람 공동체, 이슬람 정체성, 이슬람 코스몰로지는 새로운 정치경제적 운명을 맞고 있다. 이것의 폭력적인 전회는 그냥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역사적 변화는 되돌리기 어렵다.

여기서도 알 수 있지만, 영국은 원리주의의 나라가 아닙니다. 사물을 볼 때 ‘원리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로 생각합니다. 실용적이고 계량적이며 경험적인 방식으로 궁리합니다. ‘절대적으로 옳은 답’이 아니라 ‘좀 더 나은 답’을 구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습니다.’ 영국은 유럽의 다른 나라와 달리 반유대주의의 사회적 영향력이 크지 않았습니다. 이탈리아 역시 이런 의미에서는 ‘비교적 상식적인 나라’입니다. 전범국이긴 하지만 유대인 박해가 그리 심하지 않았습니다.(146-147) 다소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담이니까. 여기서 두 사람은 추축국에 협력했던 패전국들의 위선을 지적하고 있다. 자신들은 그런 적이 없다는 듯이 입을 씻고 있다. 그럼에도 영국은 2차대전 후에 스스로 제국에서 물러나 국민국가로 돌아갔다. 이런 영국적인 실용주의, 프랑스나 미국처럼 원리주의에 치우치지 않는 점을 평가하고 있다. 요즘처럼 브렉시트로 헤매는 영국을 보면, 그런가 싶기도 하지만. 그리고 여기서 생각나는 건 한국인데. 한국은 의외로 실용적인 나라다. 주장이나 말은 엄청나게 원리주의적이어서, 원리주의 그 자체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실용주의 그 자체다. 그게 유교가 원래 그런 것 같다. 윤치호 일기에 보면, 조선의 지배계층인 양반들이 실용적이어서 일본의 지배에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였다는 내용도 있다. 조선의 유교를 원리주의적인 것으로 보면, 한쪽 면 밖에 안보인다.

미이케에는 미이케공업고등학교가 있는데, 거기가 옛날에 미이케슈지칸 형무소가 있던 자리입니다. 1883년에 지어진 이 형무소에 서일본의 여러 현의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형기 12년 이상의 재소자를 모았다고 해요. 수감자 수가 많을 때는 2,000명에 달했는데, 이들이 미이케 탄광에 강제 동원되었습니다. 탄광은 미쓰이 그룹에 불하되기 전부터, 그러니까 국가가 운영하던 시절부터 재소자를 작업에 투입해 혹사시켰어요. 갱에서 낙반 사고가 일어나도 ‘어차피 재소자니까’라며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았습니다. 쓰고 버린 거에요. 미이케 탄광 지하에 상당한 수의 유골이 묻혀 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지금은 한 단체가 그곳에서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영령을 공양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광부의 목숨 값이 한없이 0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당시 채굴 작업을 하던 노동자들 가운데 재소자 다음으로 많은 이들이 요론지마 출신이었다는 점입니다. 요론지마에서 돈을 벌기 위해 온 사람들은 처음에는 탄부가 아니라 배에 석탄을 싣는 일을 담당했습니다. ‘곤조ゴンゾウ’라고 불렀다고 하지요. 곤조가 점차 광부로 바뀌어갔다고 합니다. 석탄 채굴을 담당했던 노동자의 서열을 아래에서보면, 최하층에 재소자가 있습니다. 그다음이 일본에 병합된 류쿠 출신입니다. 이 두 집단이 가장 밑바닥에 있었지요. 요론지마에서 온 사람들은 조선이나 중국에서 데려온 사람들 보다 못한 대우를 받았어요. 그리고 가장 위에는 당연히 일본 사람이 있었습니다.(163-165) 모처럼 강상중의 이야기. 생각해 보면 정말 끔찍한 이야기다. 석유 대신 석탄으로 산업화를 해야하는 일본은 값싼 비용으로 위험한 탄광에서 탄을 캐야했고, 죄수와 류쿠 그러니까 오키나와 사람을 가장 헐하게 써먹었다. 요론지마는 가고시마현 최남단의 섬으로 남쪽으로 오키나와의 헤도곶이 보일 정도로 오키나와현과 가까운 곳이라고 한다. 그리고 조선과 중국인. 7층짜리 아파트를 지어놓고, 인종 순서대로 배치했다고 한다. 일본은 어떤 점에서 보면 참 솔직한 나라다.

대화 중에 요시자와 씨가 ‘기민棄民’이란 단어를 꺼내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국가가 후쿠시마 지역의 주민을 짐승처럼 다루고 버린 국민 취급을 한다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어보니 앞 세대의 경험이 겹쳐지더군요. 요시자와 씨의 부모님은 만주 개척민이었습니다. 패전 후 관동군에 의해 버려지고, 국가로부터도 버림받아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로 일본으로 돌아오셨다고 했습니다. 부모님은 정말로 ‘기민’을 경험하셨고, 자식도 재난 이후 생활의 근원을 나라에 빼앗길 처지가 된 것입니다. 요시자와 씨는 자신의 처지도 기민과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생각해보면 오염된 후쿠시마에서 도망쳐 나와 여기저기로 흩어진 사람들 역시 고향을 빼앗긴 기민입니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으니까요. 근대의 성장의 그늘에는 항상 기민이 있었습니다. 난민과 이민을 포함해서요. 탄광이 문을 닫기 시작하면서 이곳저곳으로 흘러간 탄광 노동자도 쓰고 버려진 기민입니다. 독일에서 알게 된 일입니다만, 미쓰이 기업의 미이케 탄광에서 독일 탄광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도 고생이 심했더군요. 이 또한 기민의 한 예입니다.(172-173) 강상중의 후쿠시마 방문과 에너지 점검의 이야기는 ‘기민’으로 이어진, 후쿠시마로 돌아가 오염된 소를 키우는 요시자와 씨는 기민의 후손으로 자신도 기민이 되었다. 그리고 탄광 노동자들도 기민이 된다. 놀랍게도, 독일의 탄광까지 흘러들어간다. 그렇겠지, 독일이 탄광 광부를 구한 아시아 국가가 한국 뿐이었을리가 없지. 한국과 일본의 차이는 탄광에서 버려진 광부가 독일의 탄광을 찾은 것과 때론 학력이 높은 사람도 일자리를 찾아 독일 탄광으로 간 것 사이의 차이려나. 그게 무슨 상관이겠냐.

미국이란 나라의 성공이 인류의 불행이었다고도 할 수 있어요. 미국이 그런 방식으로 성공하지 않았다면 근대 세계의 형태는 달라졌을 게 분명합니다. 주인 없는 땅, 노예노동, 석유라는 유례가 없는 장점을 가졌을 뿐 아니라 제 나라를 전쟁터로 삼지 않으면서도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 승전국이 되었으며, 유럽의 산업이 괴멸하던 시기에 전 세계의 부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습니다. 이건 거의 기적에 가깝지요. 이런 성공을 거둔 나라를 ‘세계표준’으로 삼고 따라가려 한다면 어떤 나라든 절망적인 자괴감에 빠지리라는 건 뻔한 이치입니다.(185) 미국의 아주 특별한 성공. 그 뒤에 깔려 있는 이천만에 달하던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이나, 가혹한 노예노동의 공급. 거기다 갑자기 쏟아진 석유라는 선물까지. 그런 나라를 따라가기만 해도 벅찬데. 아니 따라갈 수가 없는데. 그 나라는 자기 식으로 따라오지 않으면, 안된다고 회초리까지 들어대니. 뜻하지 않게 속국의 신민된 처지로서 하루하루가 버거운 심정이다.

일본은 지금 ‘지방창생’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습니다. 저는 이 정책의 실체가 사람을 산에 못 살게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방창생의 핵심은 ‘압축도시compact city 구상’인데요. 이는 지방도시의 전철역 앞에 집합주택을 만들고 그곳에 주민들을 모아 압축 경제권을 구성하려는 시도입니다. 그렇게 하면 한계취락이나 준한계취락을 없앨 수 있습니다. 지금은 인구가 적은 지역에도 도로를 깔고 버스 노선을 운영하고 라이프라인 설비를 구축해야 하지만 모든 이가 압축도시로 이주한다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205-206) 문재인 정부 개헌안의 핵심 중 하나가 지방분권이다. 계속되는 지역균형발전 정책에도 지방의 인구는 줄고, 지방은 사라져가기만 하는데에 대한 회의도 있다. 급기야 한국 전체의 인구가 줄려는 조짐을 보이자, 지방분권정책, 지역균형발전 정책 그 자체의 재검토와 폐기를 외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진보개혁 쪽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집중을 원하고, 집중하지 않으면, 경제가 성장할 수 없다는 논리가 핵심이다. 수십년 지역균형발전하려고 했지만, 헛수고라는 것이며, 새롭게 철도나 도로를 놓아도 사람을 빨아들일 뿐이라는 논리다. 일본은 한국과 달리 지역에 정착하는 정도가 훨씬 크다. 지역을 国구니라고 부른다. 고향이 나라라는 오랜 지방사회의 관습이 남아있다. 그러니 지역 중심도시에 사람들을 모아서 유사 도쿄를 만들고, 흩어진 취락은 포기하게 해서 궁극적으로는 버리려는 전략을 쓰고 있다. 심지어 후쿠시마가 사실상 버려졌지만,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전 사고가 몇 번 더 나서 지역을 버리게 되어도 신경 쓰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사람들을 모아서 압축해서, 사람을 짜내서 성장의 동력을 돌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절박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지방에 사는 사람들도, 한국 식으로 말하면, 아파트에 살고 싶어하며, 가까운데 쇼핑몰을 원한다. 이해관계는 의외로 쉽게 맞아 떨어질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산에서는 사람이 살 수 없게 된다. 아무런 인프라도 없어지니까.

‘리버럴’이 무력한 이유는 좌익이 전통적으로 성장론자이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 이래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 의해 혁명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형태의 이야기가 채용되었습니다. 경제성장이 계급투쟁의 전제조건인 셈이지요. 혁명가들은 기계화나 공업화를 정말 좋아합니다. 구소련의 ‘국영농장’, ‘집단농장’이나 ‘대약진’ 같은 말도 그래요. 좌익 ‘리버럴’의 약점은 ‘성장하지 않으면 행복해지지 않는다. 성장이 지속되지 않으면 계급투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라고 믿는 데 있습니다.그러니 세계화를 주장하는 이들로부터 다른 대안적 성장 전략이 있는지 질문을 받으면 그들은 머뭇거리며 대답을 못합니다. ‘그럴 게 아니라 좀 더 지속적으로 성장가능한, 그리고 좀 더 인도적이고 부드러운 방식의 성장 전략은 어떨까요?’ 같은 말을 하면 ‘꽃밭에 앉아서 헛소리하고 있네. 눈 감으면 코 베어 가는 세상에서 태평한 소리나 하면서 어떻게 살아남으려고?’라는 핀잔을 듣지요. 인구가 줄고 있는 일본에 더 이상 성장의 여지는 없습니다. 성장 전략에 관해 말해 봤자 소용없어요. 그보다는 성장하지 않아도 유쾌하게 생활할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합니다.(217-218) 어쩌면 전형적인 리버럴 정권인 한국의 문재인 정부가 지금 직면한 문제이기도 하다. 리버럴도 성장을 벗어난 이야기를 상상도 하지 못하지만, 그 이면에는 실제 대중의 성장 중독증이 있다. 대중이 성장하지 않는 것을 견뎌하지 못하면서, 성장하지 못하면 그것을 실패라고 보기 때문이다. 고도성장은 못한다는 점만을 겨우 납득한 정도다. 설탕 중독 같은 중독이다.

강상중. 전후 민주주의의 유산은 어느 정도 계승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왜 지금 이토록 ‘반지성적’ 정치가들이 득세하는 걸까요. 전후 민주주의가 약해진 이유는 시민의 생활이 점점 향상된다는 환상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 아닐까요. 그동안에는 평화, 성장, 풍요가 삼위일체된 세계에서 평화란 좋구나, 돈도 많이 벌고 풍요로우니라고 말하며 민주주의를 예찬해왔습니다. 이 도식이 성립하지 않게 된 상황에서도 똑 같은 결과를 기대하면서, ‘역시 성장이 최고야’라고 억지로 그 방향으로 몰고 가는 이들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정말 전후 민주주의가 있었는지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226) 우치다. 민주주의라는 제도는 분명 존재했습니다. 전후에 생겼어요. 하지만 그 제도를 운용할 사람들이 전부 ‘민주주의를 모르는 어른들’이었습니다. 군국주의 시대에 대일본제국의 신민이었던 사람들이 그냥 그대로 전후 민주주의 시대로 수평 이동한 거지요. 게다가 민주주의는 그들이 원해서 손에 넣은 것도 아니고 자기 돈을 치르고 획득한 것도 아니에요. 일본의 민주주의란 어떠해야 할지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어느날 갑자기 잘 만들어진 민주주의제도라는 패키지를 손에 넣었습니다. 사용법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했는데, 자신들도 사용법을 모르니 호기롭게 아이들 세대로 권한을 이양했습니다.(227) 전후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이 강상중과 우치다 사이에서 확 나뉜다. 강상중은 전후 민주주의는 있었지만, 그것이 경제적 번영과 결합되어서, 이해되는 한계가 있었다고 평가하지만, 우치다는 일본은 패전 후에 민주주의가 주어졌을 뿐, 쟁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냉정하게 평가한다. 이점은 정말 일본의 문제다. 일본은 헌법도 주어졌고, 민주주의도 주어졌다. 천황에 의해 주어지고, 미군에 의해 주어졌다. 싸워서 얻어낸 민주주의가 아니면, 어떻게 운용해야 하는지도 모르기 싶상이다.

지금까지 미국은 국제사회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은 아주 특수한 역사적 조건 아래에서 성립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그 로컬한 성공 사례가 전 세계에 표준으로 강요되었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믿을 정도로 미국은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그 광채가 서서히 희미해지기 시작했어요. 미국의 정체는 제국의 와해라는 극단적 형태가 아니라 전 세계가 ‘미국 모델’이라는 환상에서 깨어나는 형태로 단계적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미국의 성공 모델을 복사해야 한다는 ‘광기’에서 벗어나, 이제는 각국이 각자의 사정에 맞춰 최적화된 모델을 고민해나가면 된다는 당연한 생각을 하게 되겠지요.(250) 강상중과 우치다 타츠루는 국민국가의 액상화라는 말을 그럴 듯하지만, 내용은 없는 주장을 하면서, 국민국가 체제가 와해되고, 19세기 체제가 재현될 것으로 말한다. 일종의 제국 체제, 관용 속에서 느슨하게 연합하는 체제다. 과연 그런 체제는 존재할까. 국민국가는 정말 해체되는 걸까? 강화는 것처럼도 보이는데. 이런 설명하기 어려운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그러나 미국이 쇠퇴하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미국이 쇠퇴하지 않았으면 트럼프가 그런 북미협상에 나서지도 않았다. 북미핵협상이 전개되느냐 멈추느냐는 미국의 상황변화와 그에 대한 인식에 달린 문제다. 제국 체제가 돌아올지는 모르겠으나, 느슨한 연방제 또는 지역연합 수준의 관용 하에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하는 시스템이 모색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성공여부는 차치하고 라도. 책을 읽으면서, 여기 언급된 일본의 이슬람 학자 하산 나카타 고中田考에 관심이 생겼다. 그의 책들을 좀 찾아봐야겠다. 논란이 있는 인물이기는 하다만.

2019. 3. 15.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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