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다 타츠루가 합기도를 가르치는 가이후칸凱風館 전경. 사진은 인터넷.
우치다 타츠루內田樹, 『하류지향下流志向』, 김경옥 역, 민들레, 2013(2007).
“체험교육이라고 할까 수련이라고 할까, 이런 전통적인 교육 기술을 통해 지금은 잃어버린 능력을 계발하는 방법을 어떻게 교육 시스템 안에 다시 한 번 프로그램화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지역사회에 합기도 도장을 연 지 15년이 되었습니다. …… 대학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대충 다한 것 같아서 이제 대학교수직에서는 은퇴하고, 여생을 지역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도장에서 보내려고 합니다. 에도 시대 작은 동네 도장 같은 것을 세워서 거기서 무예를 배우고 싶은 아이들을 가르친다. 무예로 성공하고 싶은 젊은이가 있으면 자립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집에서 지내기 어려운 아이들이 있으면 도장에서 재우고 먹이는 대신에 청소와 가사 일을 하게 한다. 학문을 하고 싶어 하는 아이가 있으면 원서강독을 하고, 철학과 문학도 가르친다. 주말이 되면 친구들과 모여서 파티를 열고 마작을 하는 이런 열린 학교 같은, 서당이나 도장 같은 커뮤니티의 거점을 만들고 싶습니다. …… 제가 구상하는 ‘도장 공동체’도 일종의 친밀권을 만드는 시도라고 생각갑니다. …… 21세기는 전 세계적인 경향으로 매우 종교적인 시대가 되리라고 봅니다(226-227).”
우치다 타츠루를 소개받았을 때, 가장 끌렸던 이유는 무엇보다 그가 몸을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몸을 움직이는 사람에게는 신뢰가 간다. 나는 평생을 뇌의 주름만 움직이면서 살아왔는데. 사람은 역시 몸을 움직이면서 살아야 한다. 노동이든 운동이든 근육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역시 정직한 부분이 있다. 청문회장에서도 보면 평생 뇌의 주름만 움직이면서 살아왔던 지식 기술자들이 가장 사특하더군. 그래서인지 나도 슬슬 몸의 근육을 움직여 보려하는데, 역시 난 뇌의 주름을 좀 더 오래, 좀 더 잘 움직여보려는 의도에서다. 우치다 타츠루의 책에서는 역시나 몸을 움직이는 사람의 견고함 같은 것이 느껴진다. 현실에 깊이 뿌리박은 견실한 느낌. 때문애 다소 보수적인 한계 같은 것도 적지 않아 답답했지만. 어쩌면 스스로 사회수선주의자라는 자신의 말에 답이 있으리라.
그는 일본의 젊은이들이, 공부로부터, 노동으로부터 도피하고 있다고 말한다. 예전 중학생 수준의 영어, 한자를 모르는 대학생. 일본은 우리와 달라, 한자를 모르면 글을 읽거나 쓸 수가 없다. 무엇보다 이들은 모르느 것이 있어도 개의치 않는다(37). 이들이 보는 세계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40). 특히 잘못을 지적당한 학생들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인다. 잘못을 지적하는 데도, 아니라고 우긴다. 학교에서 담배 피운 걸 적발당하면, 발로 비벼끄면서 아니라고 우기는 식인데. 기업이 잘못을 지적당해도 비슷하다는 것(43-44). 원래 이런 일을 많이 보긴했지만 2016년 겨울에 한국에서 사는 우리는 너무나 익숙하다. 가장 똑똑하고,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가장 뻔뻔하다. 완전히 들통나도, 꼭 그것만 인정하다. 김기춘, 우병우 그들은 역시 시대를 앞서간 사람들이다.
스와 테츠지諏訪哲二는 이를 ‘등가교환’으로 설명한다고 한다. 자기가 인정하는 마이너스와 교사가 내릴 처분의 등가교환(43). 그는 우리가 엄청 많이 들어 본 질문을 끄집어 낸다. 이걸 배우면 뭐가 좋아요(44). 아이들은 자신들이 지불하는 고역에 대한 등가교환으로 제공되는 서비스에 대해 묻는다.(45) 대부분은 경제성과 합리성을 근거로 대답하는데(46). 이것이 잘못이라는 지적. 실제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늨 건 역사적으로 예외상태라는 지적이다(47).
왜 이런 아이들이 생겨 나는가. 전통사회에서 가사노동을 도우면서 노동하는 주체로 자기를 성장시켰던 아이들은 가사노동이 거의 필요없어진 상황에서 “됐으니까 너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줄래” 따위의 말을 들으며 인정 즉, 주체로 형성될 기회를 얻지 못한다(48-50). 반면 돈은 이 아이들을 차별하지 않아, 사는 사람, 즉 소비하는 주체로 자기를 세우게 된다(51).
문제는 교육이 가진 역설 “당사자가 교육이 제공하는 이익을 교육이 어느 정도 진행될 때까지, 경우에 따라서는 교육과정이 끝날 때까지 알 수 없다는 데 있다”(56).
그런데 흥미롭게 아이들이 교사에게 제공하는 서비스의 댓가란 불쾌함이다(57). 예를 들어 일부러 느릿느릿 움직이는 경례동작은 게으름이 아닌 노력의 표현이다(60). 그러니 학비가 비싼 학교의 수업태도는 진지하다. 이미 부모가 고액의 수업료를 지불했기 때문.(61) 이 불쾌함이란 어려서부터 아버지나 어머니가 표현하던 불쾌함에서 배운 것이다. 이들이 보여주는 불쾌함은 자부심을 표현하는 방법(64). 스와 테츠지는 1989년대 이후 학교교육의 조직적 파탄을 가져 온 것이 불쾌함을 기호적으로 표시하면서 교환을 유리하게 이끌려던 것이라 진단한다(67). 우치다 타츠루는 여기에 하나 더해, 소비 즉, 등가교환은 무시간적인 즉, 동시적인 일이나, 배움은 시간적이라 말한다(73). 아이들은 전력을 다해 노력해서 변화, 즉 흐름과 성장에 저항하면서, 동시간적 소비의 질서를 지켜내려 하고 있다(74-75). 누구는 이런 불쾌감을 교회에서도 표출한다든데.
여기서 일본 교육의 한 가지 목표인 자기찾기 문제를 지적한다. 자신이 어떤지 잘알기 위해서는 주변에 묻는 것이 가장 좋지만, 자기를 찾는다는 명목하에 먼 곳으로 떠나고, 자기 내부에만 시선을 집중한다는 것. 이는 카리야 타케히코苅谷剛彦의 견해 (80). 배움이 어디에 쓸모가 있는지 알려면 미래의 나가 아닌 현재의 나가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하는데, 이는 미래의 나에게 불리할 수 있다. 자기결정, 자기책임, 자기 찾기 이데올로기는 미래를 헐값에 팔아치우는 아이들을 대량으로 배출하고 있다(83).
너무나 설득력있는 주장에 여기까지 단숨에 읽고 당황스런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어쩌지. 확실히 소비하는 주체가 되어있는 아이들과 나 자신. 그리고 이걸 빨리 깨달을 수록 똑똑하다고 여기는 사회. 자기 찾기로 점철된 내 인생. 나를 들여다보는 듯해서 부끄러운 책 읽기.
야마다 마사히로山田昌弘의 말처럼. 일본도 한국도 리스크 사회, 양극화 사회가 되어있다. 파이프가 없어졌다(89). 학력은 아무 것도 보장해 주지 못하고, 노력과 성과의 차이가 엄청나게 된다. 부유층의 학력이 빈곤층 보다 높다. 학습시간이나 투자 보다 더 내밀한 이유를 우치다 타츠루는 지적한다. 부유층 자녀는 높은 학력으로 더 많은 이익을 회수할 수 있다고 믿지만 빈곤층 자녀는 학력의 효용을 믿을 수 없다. ‘학력의 차이’가 아닌 ‘학력에 대한 신뢰의 차이’, ‘노력의 차이’가 아닌 노력에 대한 신뢰의 차이’. 여기서 노력에 대한 동기부여의 차이가 생긴다(91). 리스크 사회의 현실을 거슬르고 노력해라(92).
사실 여기서부터 쯤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우치다 타츠루가 지적하는 ‘신뢰의 차이’는 원인이라기 보다 결과가 아닐까. 물론 원인일 수 있지만 결과가 돌아가서 원인이 돤 것이 아닌가? 이런 담론은 다시 ‘노오력’ 담론의 보수성으로 빠져들지 않을까?
그의 보수성에 대한 의심은 리스크 헤지에서 전통사회로 담론이 넘어가면서 심해졌다. 모두가 조금씩 손해본다는 ‘삼방일량손三方一兩損'(98). 그런데, 정말 흥미로운 지적은 ‘금테를 두르고 태어난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무수한 후원자의 네트워크 속에 속해 있다는 거였다(109). 수디르 벤카테시는 부자는 항상 두번째 기회second chance가 있다고 했지. 이번 사태도 여러 사람이 ‘고령향우회’라는 하나의 이너 써클로 모아진다. 두 박 대통령도 고령 박씨이고. 박정희가 창씨개명한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의 高木이 바로 고령 박씨란 뜻이다. 고령에서 高, 박朴에서 木이다.
물론 우치다는 과거로 돌아가자고 하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자립은 실제로는 고립이다. 사림들 특히 약자들은, 실제 네트워크에서 고립된 사람들로 살아가는 데. 이것이 이데올로기의 결과라는 뜻. 공부로부터의 도피도 그 결과의 하나이다(115). 카리야에 따르면 학교에서의 나쁜 성적이 사람의 가치를 높인다는 반학교적 사고방식에 학생들이 동의하고, 낮은 계층 출신들이 미래를 생각하기 보다 지금을 즐기려 한다고 지적한다(117). 이런 전환은 계층 이데올로기 농축의 결과다(119). 학력저하는 노력의 결과라는 지적(120).
이런 일이 사회에서는 노동으로부터의 도피로 이루어진다. 흥미롭게도 일본은 집단지향적이기 때문에, 자율마저도 집단적이다. “다른 사람이 뭐라 해도 나는 내가 결정한 대로 하겠다는 것을 ‘모두의 규칙’으로 삼자는 것”이라 이상하다고 말한다(127). 정부주도의 국가정책에 의한 자기결정론(128).
유럽의 니트Not in Education Employment and Training는 계층화의 한 현상이지만 일본의 니트는 상승의 기회가 열려 있어도 아이들이 스스로 기회를 포기한다. 일본에서는 사회적 약자가 자진해서 사회구조를 강화하는 데 가담하는 방법으로 계층화가 진행되고 있다. 약자가 자신의 사회적 입장을 더욱 취약하게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이야기(130).
옳은 지적이지만 역시 옳지 않은 부분도 있다. 일본과 한국의 차이같은 것은 예외로 두자. 사회적 약자가 더 이상 노력하지 않고, 투쟁하지 않고, 순응하면서, 자기 능력을 제한한 채, 약자로 살아간다는 말이다. 가난한 자들이 부자와 자기동일시하면서, 보수적 정당에 투표한다. 이 모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원인인가? 아니면 결과인가? 우치다 타츠루는 줄곧 이것이 원인인 것처럼 말하지만 결과일 수도 있다. 아니, 다시 말하지만 이는 결과다.
그럼에도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니트의 형성은 유아기에 자기형성을 완료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133). 전직이나 이직을 통해 점점 사회적으로 낮은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은 노동에서의 파랑새 증후군이다(138-139)라는 지적엔 답답함이 느껴지지만, 부분적으로 옳다. 니트족은 어렸을 때부터 경제적 합리성을 가지고 가치판단을 해서 무직자의 길을 선택한 영리한 소비주체 들이기 때문에 문제해결이 어렵다(148)는 건 매우 타당한 지적이다. 그렇다고, 현재 직장에서 문제를 해결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관계를 계속해서 형성하면서 문제를 풀어가야 성장이 있다는 말인데. 옳기는 하지만 구조를 바꾸어 낼 수 있을까? 구조와 다툴 수 있을까?
이들은 환금성이 빠른 학문을 지향한다. 즉, ‘실제로 도움이 될 것이라고 고등학생도 알고 있는 기술과 지식’을 선택한다(150). 이런 일은 고등교육 자살의 징후로. 무엇을 배울 것인지 알고 있을 것을 전제로 배움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배움이란 자기가 배운 것의 의미와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주체를 구축해가는 과정이며, 공부를 끝낼 시점이 되어야 비로소 무엇을 배웠는지를 이해하는 수준에 도달한다. 공부는 이런 역동적인 과정이다. 배우기 전과 후에 다른 사람이 되어 있지 않으면 공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152-153). 자신의 가치판단을 ‘보류한다’는 것이야말로 배움의 본질이다(154). 지성이란 요컨대 나 자신을 시간의 흐름 속에 놓고 나의 변화를 고려하는 것이다. 공부로부터의 도피, 노동으로부터의 도피는 자신의 무지에 고착하는 욕망이다(156).
우치다 타츠루는 2014년 한국어판 서문에서 국민국가와 글로벌 기업 사이에서 글로벌 기업이 힘을 가지게 되었고, 문제는 기업의 수명은 5~7년, 국민국가는 적어도 100년 단위로 사유하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기업은 판단하는 기간이 짧다. 아무리 장기적 전망을 가져도 다음 4분기 즉, 1년 이상을 생각하지 않는다. 글로벌 자본주의에서는 그게 합리적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글로벌 자본주의의 시계, 즉 수명을 내면화해서, 자기 수명보다 훨씬 짧은 시간 단위로 사유하는 것이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15-18).
우치다 타츠루는 자기자신을 사회수선론자라고 말하는데, 파랑새가 되기 보다는 골목에 쌓인 눈을 치우겠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는 실제 도장을 차려놓고, 철학을 가르친다. 공부와 배움을 실현시키겠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왜 나는 그의 이야기를 꼼꼼하게 읽으면 읽어갈 수록 가슴을 그물로 죄어오는 듯한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일까? 가난하기 때문에, 공부의 효과도 없고, 그래서 하기도 싫고, 안하기로 선택하고 그래서 안하기 때문에 빈곤한 삶을 살아간다는 이야기와 무엇이 다를까?
근대와 전근대에 대한 옳고 그름이나 가치 판단을 떠나 근대사회에서 전근대적 방식으로 이익을 향유하는 것은 상층 지배계급 뿐이다. 이 지배계급은 피지배 집단과 하층을 고립화시켜 보다 지배와 착취에 효율적인 형태로 만들어내게 되는데. 실제로 이를 순응하고 내면화시켰다는 말이다. 소비하는 주체의 합리성이란 단순한 퇴행이 아니고 자본주의 사회의 일상적 작동방식 그 자체다. 우치다 타츠루가 지적하는 건 물론 이런 소비하는 주체의 각인이 유아기에 이루어지고 거기서 성장이나 흐름이 멈춘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인데. 타당하지만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일본과는 또 다른 한국 입장에서는 제도 개혁이 꼭 필요하다. 비정규직 임금과 최저임금을 끌어올리고, 여러가지 사회안전망을 강화해야 한다. 고등교육을 보다 공공성을 높여야 한다. 그리 크지 않아보이는 이런 일들을 해내기 위해서도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230만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가도, 국회에서 탄핵소추안 의결하는게 고작이다. 아직 헌재에서 탄핵이 인용되지도 않았다. 이런 최종적인 결론을 헌재 같은 기관에 맡겨 놓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탄핵은 완성하기 위해서도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때까지 계속해서 압박하는 길밖에 없다. 연인원 천만, 이천만이 거리에 나가야 그나마 될지 안될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그런 최소한의 사회개혁을 하기 위해서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데.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
더 큰 문제는 이것이다. 제도를 바꾼다고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 점. 제도적 보완이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배움으로 이끌어 낼 수 없다는 점. 특히 이런 제도적인 보완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사상적 기반이 매우 중요한데. 소비사회적, 개인주의적, 개체주의적, 자기결정론을 기반으로한 제도개혁에는 근본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자기결정, 강요되는 자기결정, 자기 스스로 결정했다고 생각하는 자기선택. 그러나 자기선택이나 자기결정이 아닌 무엇에 기반해서 시작할 수 있을까? 앞으로 시도해 보려는 것 말고, 지금 우리가 수립할 수 있는 어떤 근거.
우치다 타츠루는 공부와 배움의 의미를 되살려서 공부와 배움을 시도하고, 지역에서 나름의 네트워크를 형성해서 공부하도록 도와야 한다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어떤 영역이든 문제를 해결하고 싶으면, 공부하는 길 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문제를 타파하는 상상력을 만들어내는. 이런 과정에서 각자의 시간 감각을 바꿔야 한다. 적어도 자기 수명만큼은 혹은 그 이상. 적어도 백년 단위로 사고하는 힘을 키워야 한다. 우치다 타츠루는 끊임없이 시간감각을 지적한다. 소비하는 주체의 등가교환의 핵심은 동시성이다. 반면 공부는 오랜 시간에 걸쳐서 사람을 바꾸어 간다.
그러나 공부의 영역으로 사람들을 이끌든. 공부하려는 의지를 만들어내는 일. 실제로 다른 사람이 공부할 수 있도록 공부를 포기해가는 학생들을 돕는 일. 빈곤층을 위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일. 이런 일이 개인의 자발성으로 가능한 일일까? 이미 공부로부터 노동으로부터 도피한 상황에서 다시 사회로 돌아온다고해서 리스크 사회에서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 이들의 손을 도닥이면서 그래도 한 번 노력해보자고 말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나에게 다른 대안이 있는가? 내가 여전히 마음 속으로 답답함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럼에도 몇몇이 모여서 공부하면서, 어떻게든 네트워크를 만들어가는 것외에 다른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 자신으로서도 할 수 있는 건 그것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것을 시도하려고 한다. 체제 전체가 우리 삶 전체를 덮쳐오고 있는데. 이걸 가지곤 너무 미약한 것 아닌가? 정말 이런 근대도 전근대도 아닌 고대적이라고 해도 좋을 방법 외엔 아무 방법도 없는 것인가?
어쨌건 계속 공부를 하려한다.
2016. 12. 25.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 이 글의 저작권은 ⓒFELIVIEW.COM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