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올리는 지금 일본 궁내청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나오는 첫번째 사진. 천황이 황궁내 논에서 모내기를 하고 있다. 나는 지금 천황 개인에 대해서 호불호가 전혀 없다. 평가할 만한 자료도 없고. 그러나 그는 역시 상징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천황제의 중심이자 그 자체다. 아무리 퇴위한다고 해도.
우치다 다쓰루內田樹, 『반지성주의를 말하다日本の反知性主義』, 김경원 역, 이마(晶文社), 2016(2015). 흔히 우치다 타츠루라고 하지만, 올바른 표기법은 다쓰루임.
이 책은 우치다 다쓰루의 주도로 열 명의 기고자가 각기 글을 한 편씩 보태서,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일본의 반지성주의에 대한 견해를 담고 있다. 책의 구성상 일관성도 부족하고, 내용의 비중도 격차가 있지만, 읽어볼 만하다. 자세히 살펴보면 일본의 반지성주의도 일본 나름의 역사적 배경에서, 특히 천황제와 전쟁 책임 문제와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대 일본의 어떤 문제가 그렇지 않겠는가. 미국의 반지성주의도 역사적 발전과정을 겪고 있는데. 한국에서 최근 두드러지는 반지성적 경향도 역사적 형성과 기독교 양측면을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반지성주의화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역사적 현상은 반공주의 일까 아니면 내셔널리즘일까. 둘 중 어느편이 더 격렬하다고 판정하기 어려워 보이는데. 이 둘이 결합한다면 정말 끔찍한데.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미국과 일본에서 나타난 두 개의 반지성주의는 정치와 종교의 결합에서 이루어졌다. 호프스태터의 견해를 따르면 미국 기독교의 발전 역사가 그 자체로 ‘반지성주의’의 형성 역사이다. 그리고 이것이 정치와 결합할 때, 매카시즘으로 트럼프 현상으로 나타난다. 일본의 반지성주의는 ‘천황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천황제’란 국가 신토라는 유사종교와 정치체제의 극적인 결합을 통해 형성된 것이며, 패전 이후에도 상징 천황이라는 모습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천황’에 대한 종교적 유사종교적 신앙이 정치와 결탁될 때, 전쟁이라는 참혹한 실패는 물론 아베 정권의 새로운 노선이 이해된다. 그리고 유럽에선 이것이 파시즘 특히, 나치즘의 형태로 나타났는데. 이때 독일 기독교는 신구교 전체가 히틀러를 찬양하고 지지했지만, 히틀러와 나치당 자체가 하나의 종교 세력이자 정치 세력의 결합된 형태로서 지배를 이어나갔다.
그렇다면 한국의 반지성주의는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 그 하나는 분명히 기독교 명백하게 개신교다. 개신교의 반지성주의 성향은 창조과학은 물론이거니와 철지난 신학 우위론이나 세상 학문 무용론들의 형태로도 나타나고 사람들을 종교 집회의 체험으로 집중시키면서 유사 지식을 양산하고 비판적 사유를 금지한다. 또 하나는 박정희와 근대 그리고 성장과 성공이라는 새로운 신을 섬기는 하나의 정치종교다. 비록 박근혜의 파면과 재판으로 일단 숨이 가라앉은 듯 보이지만, 언제고 다시 살아날 조짐을 보이는 숭배현상이다. 또 하나 여기에 자양분을 끊임없이 제공하고 있는 것이 민족주의에 경도된 역사학계다. 요즘은 점차 고대사에 대한 평가가 시도되고 있지만, 이름도 언급하기 구차한 ‘환빠’로부터 시작해서, 근세 조선에 대한 해석 과정에서 흔히 등장하는 무슨 르네상스기라도 한 것처럼 영정조 시대에 대한 찬양이나 내재적 발전론 내지는 자본주의 맹아론 등의 우리도 있었어, 우리도 가능했어 식의 자위적 역사해석, 친일파 고발과 친일파 나빠에서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며 동시대성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 역사인식, 비교사적 관점은 물론 통시적 관점도 결여한 소소한 사료 분석에만 침잠해서 거시적 관점과 내러티브를 끌어내지 못하는 연구태도에 이르기까지. 이 책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반지성주의의 또 하나의 토대이자 반지성적 태도는 지식인과 연구자들의 태도였다. 일본의 연구자들에게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한국의 연구자들은 예전에도 고민하지 않았다. 전에는 외국에서 배워다가 풀면 그뿐이었고, 그게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이제는 근본 문제를 고민하지 않고, 전문 분야에만 매달리고 있다.
어떻게 보면, 정치종교의 결합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원래 정치와 종교는 한 몸이었고, 그 두 가지는 서로 배우고 닮으면서 자라왔다. 정치권력과 교회권력은 서로가 서로에게 거울이 되면서, 통치술을 익히고 길러왔다. 오히려 정교분리의 세속화된 시간이 눈에 띄게 짧았다. 고작 백년에서 백오십년. 2차대전을 전후하여 종교는 다시 정치의 전면에 섰다. 아니 등장한 것은 ‘신없는 신정정치’였다. 반지성주의는 이 ‘신없는 신정정치’ 통치의 훌륭한 토양이었다.
‘반지성주의’를 이해하는 첫걸음, 미국의 기독교 형성과정, 일본의 천황제와 그 전개, 독일의 나치즘의 형성과 파멸. 이 세 가지 과정을 이해해야 한다. 거기서 한국의 반지성주의에 대한 이해가 모색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한국에선 일본 천황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시라이 사토시의 『영속패전론』번역이 곧 나온다고 하는데. 더욱 기대된다.
아래는 책 내용에 대한 간략한 요약이다.
우치다 다쓰루, 「반지성주의자들의 초상」.
우치다는 리처드 호프스태터로부터 자기 논의를 시작한다. “반지성주의는 사상에 대해 무조건 적의를 품은 자들이 창작해 낸 것이 아니다. 실은 정반대다. 교육을 받은 자의 가장 유력한 적은 어정쩡한 교육을 받은 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반지성주의자는 통상 사상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사람일 뿐 아니라 종종 진부한 사상이나 알려지지 않은 사랑에 홀려 있다. 반지성주의에 빠질 위험이 없는 지식인은 거의 없다. 한편, 한결같은 지적 정열을 결여한 반지식인도 거의 없다.”(일역본 『アメリカの反反知性主義』, 19) 반지성주의를 움직이는 것은 ‘외곬의 지적 정열’이다(15). 반대로 지성이란 집단적인 현상이다(17). 또 반유대주의 처럼 이상주의에 기반하고(19), 따라서 무력감, 무능하다는 의식에서 ‘음모 사관’이 싹튼다(21). 한 마디로 반지성의 원인은 그들이 자기들 수준의 지적 능력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을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다(25). 우치다는 반대로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선험적이고 직감적으로 아는 것이 지성의 발동이라고 말한다(26). 그렇기에 자신이 기나긴 시간의 흐흠 속에 있으면서 ‘있어야 할 때, 있어야 할 곳에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실감을 느낄 때, 이미 존재하지 않는 자, 아직 존재하지 않는 자의 협동 관계라는 이미지를 생생하게 감지하는 인간에게 지성의 떨림이 있다(29). 그는 포퍼를 따라 과학적 방법이 사회적 또는 공공적 성격의 산물인 것처럼, 지성이 지성적일 수 있는 것은 사회적 또는 공공적일 때라 말한다(31). 지성은 시간 속에서 진리성이 익어가는 것이고(34), 반지성주의자들에게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지금, 여기, 나’ 밖에 없으며, 그들은 ‘최종 소비자’이다(35). 반지성적 행동의 특징은 편협함으로 ‘지금, 여기,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압도하는 것’, 즉 ‘당면’의 목표만을 가진다. ‘반反시간’이라는 태도 안에 반지성주의가 응집되어 있다(38). 매카시 같은 선동가의 진실도 시간이 가면 드러나듯, 그들의 진정한 적은 시간이다(46). 시간이 경과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같은 말과 똑같은 행동을 강도를 높여서 반복한다. 이는 반생명적이며, 반시간적이다(47). 국민국가가 주식회사화 되어 가지만, 정치에는 비즈니스의 ‘시장’에 대응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단기간에 평가할 수 없다(48-49). 국민국가는 시간 속에서 정책의 옳고 그름을 검증하게 된다. 그러나 정치가들은 당면의 정국과 다음 선거 외에는 관심이 없다(52). 반지성주의자는 ‘여기가 아닌 장소’, ‘지금이 아닌 시간’이라는 말을 모르기 때문이다(53).
시라이 사토시白井聡, 「반지성주의, 그 세계적 문맥과 일본적 특성」.
일본 사회에 반지성주의가 날뛰는 원인으로 하나는 후기 포드주의 또는 신자유주의, 그리고 그 결과 새로운 계급정치 상황. 다른 하나는 제도적 학문이 상앗대질하고 있는 ‘인간의 사멸’이라는 상황이다(57). 인간은 ‘죽은’ 것이다(58). 시라이도 호프스태터의 반지성주의를 인용하여 ‘지적인 삶 및 그것을 대표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의혹’이며 ‘그러한 삶의 가치를 극소화하려는 경향’이라 정의한다. 그러면서 반지성주의는 적극적인 공격의 원리이고, 지성의 작용에 대해 모멸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는데 있다. 기본적으로 학력과 무관하다(58-59). 대중 민주주의 시대에 반지성주의는 대중의 에토스가 될 가능성이 생겼다. 이 세상에는 ‘지성의 불평등’이 존재하고, ‘실제적인 부와 권력의 불평등’과 연관된다(60). 여기에 원한ressentiment의 정념이 맹위를 떨치는 세계가 얼굴을 들이민다(60). 지적으로 보이는 것은 지적인 체하기 때문이고, 쓸데 없는 것이라는 발상, 반지성주의는 사회에 잠재적인 ‘통주저음’이 되고, 대중 민주주의는 진화하면 진화할수록 반지성주의 위험성이 높아진다(61). 현대 일본은 반지성주의 에토스가 권력층 자체까지 침투하고 있다(62). 신자유주의로 중류 사회가 붕괴하고, 하류사회, B층, 양키 등으로 불리는 재편성된 사회에 출현한 아비투스에 입각한 존재들이 나타난다(62-63). 데키나 오사무適菜収가 착안한 B층이란 ‘구조 개혁에 긍정적이고 IQ가 낮은 층으로 매스컴 보도에 휘둘리기 쉽고, 고이즈미 준이치로를 지지하는 층이다(64). 고이즈미 정권은 중산층 사회의 붕괴 후 가장 다수를 점하는 계층을 B층이라 규정하고 표적으로 삼았다. 권력 기반을 반지성주의에 둔 것이다. 그 의미는 첫째 자민당이 계급 정당으로 변모했다. 둘째 심각한 냉소주의이다. 아베 정권 지지자들의 태도는 합리적 신뢰가 아니라 맹신과 경솔한 믿음이며, 당연히 숭배에 가깝다(66-67). 이 지지의 보답으로 값싼 내셔널리즘을 얻는다(68). 오늘날은 국가와 계몽주의의 근본적 분리 현상이 나타난다. 보편적 계몽이라는 근대 ‘미완의 프로젝트'(하버마스)를 내버린다. 글로벌 인재를 수입하면 그만이다(69). 미국의 반지성주의는 반테러전쟁의 문맥 속에서 기독교 원리주의와 내셔널리즘의 결합으로 나타났다(70). 스티브 잡스의 “Stay hungry, Stay foolish”는 1%의 글로벌 엘리트에게 제한 없이 탐욕스럽게 부를 추구하고, 미치광이 같은 아이디어가 솟아나게 하라는 의미인 반면 나머지 99%에게는 ‘바보 벗님들, 쫄쫄 굶으시게’라는 뜻이 된다(71). 또 인간성이라는 측면에서 ‘도구적 이성에 의한 자연 지배의 진행 = 근대적 야만’이라는 사태가 제재 없이 활보하고 있다. 학문은 계몽주의를 포기하고, 인간성의 완성이라는 이념은 추방되었다(72). ‘인간의 죽음’이란 현상의 출현은 뇌생리학의 발전과 약의 진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73). 인지행동 요법의 패권 확립과 투약을 만사형통으로 여기는 태도는 쓰이키 고스케立木康介에 따르면 ‘정신요법계의 패스트푸드이다. 뇌세포들 사이의 전기 신호 뿐, ‘정신’, ‘마음’, ‘인간성’ 개념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74-75). 이는 종합적이고 전체적인 인간관 없이 기능한다(76). 오히려 오늘날 사회 구조 안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주체’가 인지행동 요법이 상정하는 인간상, 정확히 속류 유물론적으로 물질로 환원되는 비 인간상에 합치하기 때문이다(77). 이 새로운 주체 양상의 핵심에는 ‘억압’이 아닌 ‘부인’이 있다. 현실의 인정이 환기시키는 불안흘 회피하기 위해 현실의 일부 또는 전부를 현실로 인지할 것을 거부하며, 오직 모자 일체의 단계에서 경험한 (그리고 결국에는 상실할) 유아적 만능감을 계속 붙들고 있다(78). 여기서 역사 수정주의, 애국, 내셔널리즘이 나온다(79). ‘부인’의 대상은 ‘부정적인 것’ 즉 ‘만능감의 상실’이나 ‘향락의 단념’, 즉 ‘억압’적인 것을 거부하고 있다. 교양주의적 주체, 변증법적 주체, 부정성을 통한 생성을 거부한다(80). 부정성을 부인하는 ‘새로운 주체’가 학문의 전제로 도입되고 있다. 종종 자각을 결여한 상태로. 이는 틀림없이 에피스테메와 연관된 커다란 변화다(81). 2008년 리먼 쇼크를 예상하지 못한 것도 ‘부인의 심리’라고 말한다. 제도로서 정립된 학문 분야가 전체적으로 ‘부인’으로 일관했다, 경제학의 상당한 부분이 ‘부인의 체계’로 넘어갔다(82-83). 여기에 일본적 상황으로 국정을 담당하는 정치가의 지적 열등화와 그 온상인 사회 상황이 있다(84). 일본 반지성주의의 특질은 일종의 알레르기 반응, 즉 ‘부인’이다(86). 이는 천황제국가의 폭력이다(87). 가족국가관에 입각해서 천황제를 비판하는 즉 국체 변혁을 기도하는 대상을 선도해야 할 존재로 보고 대응했는데, 이는 적대성의 부인이었다(89-90). 부정적인 것의 존재를 부인하고 사랑의 공동체로 복귀한다는, 사랑에 의한 지배다(92). 이 천황제 국가의 악한 본질이 청산되지 않았다(95). 적대성의 부인이란 정치 투쟁의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인식에서부터 정치 투쟁에 참여하는(적대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인식으로 이행함을 뜻한다(97). 이는 일본 국가가 아직 충분히 계약국가(사회계약에 기초한)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이 나라에는 사회가 없다. 사회란 이해와 가치관의 대립 관계의 존재가 전제 된다. 회사는 있지만 사회는 없고, 이권은 있지만 권리는 없다(99). 일본은 부인 선진국이며, 세계는 일본화하고 있다. 반지성주의의 반전은 ‘부인의 심리’를 떨쳐 내는 것을 말한다(101). 부정적인 것의 부인이 만연하는 상황 자체를 세계사의 ‘부정적인 것’으로 다시 파악해야 반전을 이루어낼 수 있다(102).
시라이 사토시白井聡는 이 책을 읽고 가장 주목하게 된 77년생의 젊은 사회학자다. 그의 『영속패전론永続敗戦論』은 꼭 구해서 읽어보고 싶다. 전후 일본이 패전을 부인하여 패전을 지속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일본 국내와 아시아에 대해 패전을 부인하고 신주神州불멸, 즉 신의 나라 일본의 불멸을 주장하며, 반대로 미국에 대한 맹종을 계속하는 패전부인 상태라는 주장이다. 놀랍게도 아사히신문사에서 일본어판 만화로도 나와있다.
다카하시 겐이치로高橋源一郎, 「’반지성주의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이 어쩐지 ‘반지성주의’ 같아서 꺼림칙했기 때문에 ‘자, 그럼 무엇에 대해 글을 쓸까’를 생각하고 써 본 글」.
다카하시는 쓰루시 슌스케鶴見俊輔의 아들의 자살해도 되는 지에 대한 물음에 대한 빠른 대답에 주목한다. 그는 자살해도 되느냐는 6학년 아들에게 “응, 자살해도 돼,. 단, 두 가지 경우에만! 전쟁에 끌려가서 적군을 죽이라고 명령받았을 때 적을 죽이고 싶지 않으면 자살해도 돼. 또, 너는 남자니까 여자를 강간하고 싶어지면 그 전에 목을 매고 죽는 게 좋아”라고 대답했다고 한다(108). 쓰루미는 반면 미국의 프래그머티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노예해방이라는 정의 이데올로기가 남부 사람들에 대한 살육을 정당화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남부 출신의 철학자들은 ‘정의’라는 논의 자체를 무효화하고자 했다. 이것이 프래그머티즘이다. 프래그머티즘이야말로 온갖 ‘원리주의'(어딘가에 정의가 있고 그 정의에는 누구나 따라야 한다는 생각)를 반대하기 위해 가족과 친지의 핏속에서 태어난 사상이다(109). 쓰루미는 언제나 자신의 심신에 깊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생각이 빠르고, 대답도 빠르다. 필요한 것은 그 대답을 받아들이는 인간이 자기 힘으로 어딘가 먼 곳으로 갈 수도 있는 대답이다. 이른 대답을 위해 필요한 것이 ‘지성’이다(110). 로버트 크럼은 『샤를리 에브도Charlie Hebdo』테러 후 이틀 뒤에 ‘무함마드의 엉덩이’라는 풍자만화를 그렸다. 사람들이 모두 ‘나는 샤를리다’라는 슬로건을 외칠 때, 그는 만화라는 자신의 표현을 택했다(112). 로버트 크럼은 구약성서의 창세기도 만화로 그렸다는데,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한 글자도 바꾸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렸다(114). 로버트 크럼에서 보이듯 비뚤어짐을 찾아내는 것, 그리고 비뚤어짐을 그려내는 것, 그것이 ‘지성’이다. 로버트 크럼에게는 지성이 있었다. 지성은 생각하기 전에 존재한다. 그것은 ‘시력’인 것이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누구보다도 ‘빠르다’고 하는 것이다(115). ‘빠름’의 또 다른 특징은 ‘고립’이다(115). 911테러 후 수전 손택이 『뉴요커』에 미국이 해온 동맹 관계와 행동의 결과라며, 보복당할 염려 없이 고도 상공에서 살육을 자행하는 미국이 비겁자라고 하여, 격분을 일으켰다(116). 아래로 향하는 시선이야말로 수전 손택이나 어슐러 르 귄이 지닌 특징이다(118).
다카하시 겐이치로高橋源一郎.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일본 소설 중 하나인,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의 저자.
아카사카 마리赤坂真理, 「어떤 무기보다 파괴적인 것」.
반지성적인 태도는 우리가 정말 잘 알지도 못하는데 아는 것으로 치부하고 무언가를 소통해 버릴 때, 정말 기분 나쁜 것인데도 사소하다는 이유로 마무말도 하지 않을 때(123). 헌법 개정이야기만 나오면 헌법 9조(평화헌법의 핵심인 부전조항)가 전부인 것 처럼 말하는데, 그렇다면 일본은 타자와의 관계성이 전부인가(124). 게다가 집단적 자위권 논의에 나오는 ‘친밀한 타국’이란 무엇인가? 미국인가? ‘친밀’이란 남녀가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뜻도 있다(125). 아카사카는 아베 신조 내각이 2012년 제출한 헌법개정안에서 9조와 집단적 자위권 보다, 천황을 다루는 방식에 집중한다.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 ‘천황은 일본국의 원수이며, 일본국 및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바뀐다. 이는 대일본제국헌법(메이지헌법) 제4조를 현행 헌법 1조와 섞어 버린 것. 이는 살아 있는 인간이면서 신성한 신이라는 천황제의 패러독스에 메이지 시대에 육이면서 영이자 통치 제도라는 패러독스가 겹쳐지고, 실권이 없다는 상징을 다시 원수元首로 삼지만 상징이라는 패러독스가 겹쳐진다. 실현불가능한 안이다(127). 근대 일본은 천황의 용처用處에 의해 수립된 국가이다. 맨 꼭대기를 텅비게 만든, 천황의 용처를 자신의 용처로 활용한 덕에 군부는 독재 상태가 될 수 있었고, 이는 맨꼭대기가 먼저 면책 받는 시스템이며, 동시에 관계자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 마법적인 틀이다(128). 이런 틀을 만든 이유는 천황을 경애했거나 아니면 자신들이 실권을 쥐기 위해서(128). 시라이 사토시는 『영속패전론』에서 메이지 국가의 밀교密敎는 천황기관설이었고, 현교顯敎는 천황주권설(현인신론)이었다(128). 천황 친정을 겉으로 내세우면서 실권을 부여하지 않고 입헌군주제적 국가로 메이지 국가를 운용했다. 그러나 다이쇼와 쇼와 시대에 들어 대중의 정치 참여 기회가 증대함에 따라 현교와 밀교를 구별하여 사용하는 통치술은 붕괴국면으로 들어서고, 천황제의 현교적 부분이 밀교적 부분을 침식하여 이윽고 멸망시키는 과정이었다. 그 결과 군부가 ‘천황 친정’을 체현할 수 있는 세력으로 국민의 기대를 모으면서 정치가들은 스스로 무덤을 팠다(129). 현교가 밀교를 삼켜서 어전회의 때 대 미영개전결단이나 포츠담선언 수락의 성단으로 천황친정이 실현된다(130). 잘 운용하려면 이중성을 냉철하게 파악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빈자리를 차지한 것이 자동적으로 실현되어, 시스템이 굴러간다(130). 지금 일본의 정치 가운데 정치와 민의의 괴리가 벌어진 것도, 도쿄전력이 책임을 회피하는 것도, 거품경제와 붕괴의 책임을 아무도 추궁하지 않는 것도, 사람들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시스템이 시스템 대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인으로 움직이는 기관만큼 저지하기 힘든 것은 없다(131). 평화헌법인 9조는 2장에 배치되어 있고, 1조부터 8조까지 1장은 천황에 대한 것이다. 국체는 호지護持되고 있다(131). 국제 정세 속에서 요행으로 온존했다. 때문에 우리는 지지 않았다는 궤변이 가능했고, 확신범적 착각의 온상이 되었다(132). 메이지 헌법에서 천황이 맨 앞자리에 있었던 것은 쿠데타로 이룩한 정부였기 때문에 정당성의 증표, 일종의 누름돌로 필요했다(133). 이전 시스템과 똑같이 남겨 놓지 않으면 존재 의식이 사라지고, 시스템을 이전대로 놓아두려는 노력은 시스템 자체의 목도 졸라 죽인다. 다시 묻는 일 없이 ‘좋았다(고 자기가 생각하는 시대)’만 고집한다. 그리고 모든 상황을 질식시킨다. 반지성주의란 그런 것이 아닐까. 어떤 무기보다 파괴적이며, 우리 스스로가 준비한 측면이 있다(137).
아카사카 마리赤坂真理. 천황의 전쟁 책임을 다룬 소설『도쿄 프리즌東京プリゾン』의 작가. 시라이 사토시를 인용하는 ‘현교’와 ‘밀교’란 국민국가의 주권 이해의 핵심 명제다.
히라카와 가쓰미平川克美, 「전후 70년의 자학과 자만」.
전후 70년 체험으로 전쟁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졌고, 그 시대의 구성원이며 일부를 나누고 있다는 동시대성을 상실하고 있다(140). 전전의 일본에 대해 실은 모르고 있다. 사건과 사물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역사의 문맥과 토대라고 할 문맥을 알지 못하면 사상 누각이다(141). 반지성주의란 지적인 활동이나 상상력이 낳은 합리성보다 현장 체험의 축적이나 생활의 지혜로 얻은 판단력을 더 신뢰할 만하다고 여기는 보수 이데올로기이다(144). 다나카 가쿠에이 정도에게나 어울릴까, 아베는 늘 자신을 공격하는 지성을 두려워하지만, 지성이 무엇이며 어떻게 사용할지는 관심이 없고, 지성이 지난 영향력에만 관심을 보이고 자기주장을 보강하기 위해서 지식인을 활용한다(144). 아베 신조는 권위주의적이며, 전체주의적이고, 지성의 사용법을 모른다.. 오사카 시장인 하시모토 도오루는 지성을 철저히 경멸하는 태도를 취한다(147). 지식인을 공격하고 오사카 사람을 피해자의 자리에 앉히는 반지성주의가 대중 선동의 도구로 강력한 파괴력을 발휘한다는 점을 이용할 뿐이다(149). 자학사관이라고 하지만, 자기 행위의 검증과 반성은 그 자체가 두드러지게 지성적인 작업이다(150). 전쟁에는 가해자가 있다. 독일은 모든 전쟁 책임을 나치에게 뒤집어씌우는 허구를 지어냄으로써 독일 국민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일본의 전후 지도자는 군국주의자들도 나라를 위해 싸운 영령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모셨다. 그 결과 허구에 대한 속죄 의식을 공유할 필요가 없었고, 책임을 자기 것으로 생각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전쟁은 천재지변이나 불길한 재앙이라고 생각했다(153). 일본인은 가해자 국민이라는 의식이 없는 채 재해를 딛고 일어선 피해자라는 위상을 선택했다(154). 어른정치가가 없기 때문이다(158). 과거를 직시하지 않는 역사적 책임 회피의 자세가 있을 뿐이다(160).
오다지마 다카시小田嶋隆, 「지금 일본의 계급적 분열에 대하여」.
양키론이 지나치게 확산되기는 했으나 일본을 읽는 도구로 유용한 관점이다. 저학력층, 불량자, 야쿠자 출신, 현장주의, 체육회 계통, 마초 성향 남성 동맹, 반리버럴, 반관료, 반인텔리 등으로 보이며, 반지성주의의 핵이다. 그러나 방만하게 팽창해 있다(167-168). 성적경쟁에서 내려온 양키와 달리 탈락하지 않은 데키스기도 양키 이상으로 틀에 같혀 있는 로봇이다(173). 전후 민주주의적 가치도 학력과 동일시되고, 일종의 체제 처럼 여겨져서 모범생 냄새를 풍기는 놈, 착한애 노릇하는 놈으로 변모했다(175). 전후 민주주의가 초래한 리버럴한 질서도 ‘시험을 패스한 인간’이 대우받는 꼴이며, 시험은 체제로 인정된다. 시험에 합격한 자는 결국에는 기득권층, 도쿄 놈으로 규정된다(176). 반지성주의는 지성 같은 것을 축으로 대립한다기 보다는 ‘분열’의 서사이다(177). 젊은 층을 중심으로 인간을 두 계층으로 분열하는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다(178). 분열은 중학생이 고등학생으로 진학할 때, 중학교 진학할 때 사립학교를 택하면 3년 앞당겨진다. 15세에 학력적으로 재분배 된다(179).
니코시 야스후미名越康文 X 우치다 다쓰루, 「신체를 통한 직감지」.
지성의 추구는 초조감에서 비롯하며, 앙버티기, ‘지기 싫어하는 근성’ 같은 것이다.(188) 지성의 활성화와 고도화는 사고방식의 구조 자체를 다시 만들어 사고의 시스템을 재조직화하는 일이다.(204) 지성의 운동은 반드시 집단적이고 공동체적으로 움직인다. 단독의 지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지성은 반드시 다른 지성과 맺고 있는 상호 연관 속에서 활동한다. 본질적으로 공동적, 집합적이다.(206-207)) 자기 나름대로 신체를 추구하는 사람은 다르다. 정말로 신체를 통과한 것이 직감지로 이어지고 지식에 생명을 불어넣는 길이다. 몸을 쓴느 것이 지성이자 지성의 운용이다.(212) 책을 통해 죽은 자와 공감한다.(214) 죽은 자의 신체에 들어간다는 건 실로 시간과 공간을 접는 일이다.(217)
소다 가즈히로想田和弘, 「체험적 반지성주의론」.
반지성주의적 태도는 본인이 자각하지도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은근슬쩍 다가온다. 반지성주의적 태도는 효율주의나 성과주의와 궁합이 잘 맞는다.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 사람은 반지성주의에 빠지기 쉬우며, 반지성주의적 해결법은 목표에 닿는 지름길처럼 착각하기 쉽다. 나 자신이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작을 떠나, ‘관찰영화’의 수법으로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기 시작한 까닭이 다큐멘터리 제작 현장에 둥지를 튼 반지성주의, 즉 ‘대본 지상주의’와 결별하기 위함이었다.(222-223) 감독이 용기를 내어 대본을 파기하고 애매모호하고 복잡한 현실과 정면으로 맞붙어 제로에서 다시 출발한다면 지성적 태도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조직인’의 금기이며, 애초에 감독이 자기가 쓴 대본에 갇힌 고정적인 관점으로 인해 지성이 발동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게 되고, 예상과 모순되는 현실에는 눈길을 돌리지 않는 경우도 많다.(225) 이는 효율을 중시하기 때문이다.(227) 대본 지상주의라는 안전책이 다큐멘터리의 숨통을 조인다.(228) 일본 사회에 둥지를 튼 대본지상주의라는 반지성주의는 일단 유죄, 일단 점수, 일단 이전, 일단 개정, 일단 비용 삭감, 일단 가결 등 대본을 파기하지 않기 위해 지성 자체의 발동을 억제하는 본말전도를 무릅쓰는 것이다.(230-231) 후쿠시마 원자력발전 사고의 경우 일본 정부는 ‘안전 신화’라는 강력한 대본을 갖고 있었다.(231) 반지성주의에는 거대한 ‘질병 이득’이 있다. 기존에 해온 막대한 투자와 앞으로 손에 넣을 이득이라는. 일부러 ‘바보 흉내’를 내는 반지성주의적 태도의 배후에는 그 나름의 동기가 있다. 반지성주의는 흔하디 흔한 병이다.(233) 지성을 쉼 없이 활발하게 발휘할 수 있으려면 고생해서 도달한 지점에 매달리지 말고, 언제나 그곳을 박차고 일어나 경신하는 용기와 기력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가능하다면 선입견과 예단과 예정조화를 멀리하고 자신을 포함한 ‘세계’를 잘 보고 거기에 귀를 기울이는 일, 일단 목적과 도달점은 잊어버리고 눈앞의 현실을 허심탄회하게 관찰하는 일, 이러한 자세야말로 반지성주의의 해독제일 수 있다.(235)
나카노 도오루仲野徹, 「과학의 진보에 따른 반지성주의」.
꿈같은 연구 기술과 환경이 정비되었기 때문에 정형적인 연구가 주류가 되었고, 정보와 지식이 방대해진 결과, 별반 지성적인 단련을 거치지 않고도 연구가 가능해졌다.(238) 내가 연구를 시작할 때면 실험은 목가적이고 태평스러운 것이었고, 각자의 창의적인 궁리가 넘쳐났다.(238) 많은 실험이 조립 용품 세트처럼 되어 있고, 최적화되어 있다. 옛날에는 시행착오로 최적화 조건을 정했다. 생각이 작용했다. 표준화와 정형화는 창의적 고안이 들어설 여지가 없고, 틀만 중요할 뿐 개인의 ‘지성’은 별로 필요가 없어진다.(240) 옛날에는 낚시 같았지만 지금은 거대한 어선을 몰고 나가 저인망으로 밑바닥까지 훑어 잡아버리는 트롤 어업과 비슷하다.(241) 해석 작업에는 아웃소싱도 이루어진다. 지성의 외주이다.(242) 포괄적인 해석이나 연구 수법의 선진화에 따라 전체적으로 진보의 가속화가 두드러지는 반면, 개인의 공헌도가 상대적으로 저하한다.(245) 거액의 연구비가 들어가고, 돈이 되는 성과를 기대한다. 동시에 대한의 종신 고용직이 감소하고 계약직이 증가한다.(248-249) 연구와 지성이 병행하지 않는다면 지성의 육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253) 연구 행위에 나타나는 지성적인 측면의 퇴행 현상이 혹시 반지성주의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254) 과학자들은 과학이 내포하는 반지성주의에 대한 경계심을 높이는 동시에 일반인을 반지성주의로 이끌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 고도로 복잡하고 전문적인 과학에 의한 반지성주의는 결코 의도한 것이 아니라 내재적인 것이다.(256)
와시다 기요카즈鷲田清一, 「’마찰’의 의미-지성적이라는 것에 대하여」.
조정 불가능할 정도로 의견의 대립이 격해진 것, 그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대립을 대립으로 인정하는 장소 자체가 훼손되고 무너져 버렸다는 것, 그것이 문제다.(259) 의미로서는 이해할 수 있어도 의미 있는 것으로서 들으려 하지 않을 때, 하나의 사회, 하나의 문화는 무너지고 만다. 이런 붕괴와 무너짐은 두 가지 형태이다. 하나는 외부 권력에 의한 침습, 또는 내부 권력의 압제로 사회의 구성원을 ‘난민’으로 이산시키는 형태이고, 또 하나는 사회 안에서 격차와 분열이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지는 형태다.(260) 한 사회의 중대한 생명은 ‘마찰’에 의해서 길러진다.(263) 마찰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마찰을 견딤으로써 압제와 퇴폐를 피하기 위해서는 번잡함에 대한 내성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이 동반하는 복잡함의 증대, 그것을 견뎌내는 내성을 몸에 익히는 것이 지성적이라는 말의 뜻이다.(265)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대중의 반역’이라 말한 것은 1930년대 유럽에서 ‘자기 사상에 갇힌 레퍼토리 안에 철저하게 정착해 버리는’ 성향, ‘이유를 제시하면서 상대를 설득하지도 않고,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것도 바라지 않고, 단지 자신의 의견을 확고하게 강요하려고 하는’ 성향을 피부로 느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이외의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정도에 따라 그만큼 미개하고 야만적이다.(268)
2017. 6. 5.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 이 글의 저작권은 ⓒFELIVIEW.COM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