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루미 슌스케鶴見俊輔, 『다케우치 요시미: 어느 방법의 전기竹内好―ある方法の伝記』, 윤여일 역, 에디투스岩波書店, 2019(1995).
일생을 반전주의로 일관했던 츠루미 슌스케가 쓴 다케우치 요시미의 전기. 그래서 더 읽어볼만. 후기로 붙은 쑨거孫歌의 글도 좋고. 역자 후기도.
일본의 전후 사상은 대학과 논단, 저널리즘을 두고 말하자면, 전쟁 중에 가장 과오가 적은 자들의 사상을 고른 뒤 씻어내서 계승하기를 업으로 삼았습니다. 누가 잘못하지 않았는지를 탐정처럼 캐는 셈이군요. 그 위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수놓는 방향을 취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올바른 길을 택한 자들은 상당수 죽었습니다. 따라서 잘못을 범하지 않았죠. 그밖에 감옥으로 잡혀간 사람, 외국으로 나갔던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그들은 위대합니다. 하지만 그들을 좇는 길만이 아니라 우리의 과실을 과실로서 드러내고 그것을 끊임없이 음미하며 미래를 생각하는 길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올바른 사상이란 것을 가려내고, 이게 올바르다고 고정해 두고, 그걸 받아들이는 식이라면 우리는 살아가며 그때마다의 상황에서 유리된 명분이나 원칙만을 언제까지나 쥐고 있게 됩니다. 나는 그것은 그것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하지만 상황 속에서 뭔가를 하려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흔히 죽은 사상만을 찬미하는 식이 됩니다. …… 그처럼 위대한 선인의 과실로부터 배운다는 것이 우리의 과제야야 합니다. 그러나 위대한 선인을 계승한다면서 과실은 덮어 둡니다. 그것이 컴퓨터식 논의죠. 그런 식이라면 대학에 들어갈 수 있고 졸업도 하겠지만, 사회로 나오고 나서는 지속하기 어렵습니다. …… 마찬가지로 우리는 다케우치 요시미의 과실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게 오늘의 문제를 세우는 방식입니다.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말한다면, 대동아전쟁을 제대로 싸워낸 자로서 다케우치 요시미는 내게 교사이자 반면교사입니다.(25-26)
츠루미(쓰루미) 슌스케의 서문 격인 「전중 사상 재고」라는 글의 한 대목이지만, 음미할 부분이 많다. 가장 과오가 적은 자들의 사상, 일찍 죽은 자들의 사상에 관심을 가진다. 오래 살면서 부침을 겪은 사람들, 소위 변절 또는 훼절한 사람들의 행적은 쉽사리 폄하되고, 그들의 사상조차 낮게 평가된다. 그러면서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때로는 구차한 변명과 설명이 이어진다. 그리고 때로는 이런 행적마저 미화된다. 삶에는 각자 복잡한 사정이 있는 법. 다케우치 요시미는 과거를 직면한, 과실을 직면한 자이다. 대동아전쟁을 긍정한 자신의 과실을 감추거나 지워버리지 않고, 이를 일관되게 이야기해 나간다. 거기서 일본의 해소까지. 다케우치 요시미의 흥미로움은 여기에 있고, 츠루미 슌스케도 이를 주목한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중국’이라 부르기로 결정한 후 다시금 ‘지나’로 돌아왔죠. 그 흔들림이 중요합니다. 전전과 전중의 여러 일본인이 모색한 행동과 사상을 ‘침략-연대’의 착종 관계로 파악하려 한 그의 방법은 과거를 향해 새로운 시선을 보냅니다. 그것은 침략이 곧 연대였으니 과거의 침략은 모두 올발랐다는 견해 같은 게 아닙니다. 다루이 도키치든 기타 잇키든 그들의 사상과 행동 가운데 어느 부분이 침략이었고 연대였는지를 가려내려는 시도입니다. 어느 부분이 침략이고 연대였는지, 혹은 양자가 뒤섞여 구분할 수 없는지를 생각해 가려는 것입니다. 글을 쓴 자들만 그런 게 아니었죠. 정치가든 한국에 간 장사치든, 공장을 돌린 자든 마찬가집니다. 악명 높은 신문의 경영자도, 한국에 가서 포교한 극성의 기독교신자도 이면이 있습니다. 그 양면 모두를 보지 않는다면, 과거 일본인은 모두 나빴다는 뻔한 참회가 되고 맙니다. 그런 식이라면 인간이 살아갈 장을 생각해 내가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의 어느 부분이 침략이며, 어느 부분이 연대를 향한 노력인지를 구분하고 기록해 가는 방법, 이것이 지금까지의 일본인의 행동과 사상의 유산을 우리 것으로 되찾는 길입니다. 민족주의가 부추기는 군국화에 맞서 그걸 막아낼 민족적 단결도 이렇게 다져딜 것입니다.(29-30)
일본이라는 국가와 일본인들이라는 사람들에 의해 식민지 지배를 당한 한국과 한국인의 입장에서 침략과 연대란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처럼 보이고, 변명처럼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복잡한 것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들을 받아들인 협력자들과 저항자들의 행동 역시도 복잡한 것이었다. 그 복잡성을 지우고, 가리고, 설명하지 않고, 직시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침략자이고, 우리는 피해자라는 서사에 집착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침략자요, 우리는 피해자였지만, 그 침략에는 양면성을 넘어서는 다면성이 있었고, 그와 마찬가지로 협력자들이 모두 강요에 의해서건 악의에 의해서건 영화에서 그려지는 악당들처럼 단순하게 행동한 것이 아니었고, 저항했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런 복잡성들을 인식하는 것이 씻어지지 않을 죄악을 가리우는 것이 되어서도 안된다. 선악이분의 양자택일에서도 벗어나야 하지만, 그러니까 다 회색으로 덮어버리려는 음흉한 시도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한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의 과거를 직면하는 것은 불가능한 주제 같아 보이지만, 그럼에도 눈을 뜨고 직면하려 노력해야 한다.
중일전쟁으로부터 대동아전쟁에 이르는 긴 세월, 일본인은 국가(실은 당시 정부)에 따르는 게 도덕이라고 믿었기에 싸우고 있는 상대가 지닌 도덕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 중국 항일 민족전선의 토대가 된 국민윤리의 높은 수준과 비교하자면, 일본에서는 그런 윤리가 거의 결여되어 있다. 전쟁을 윤리적 측면에서만 보는 것도 잘못이지만 윤리적 측면을 보지 않아도 글러먹은 이야기가 된다. …… 사람은 이익에 따라 움직이지만 이익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 침략 전쟁은 국민의 가치판단에 혼란을 안기고, 린위탕이 고발했듯이 도덕적 불감증을 낳았지만, 동시에 국민의 낮은 도덕의식이 침략을 가능케 했다. 그리고 그 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자각되지 않고 있다. 인도에 대한 죄를 평화에 대한 죄로 해소하면 어깨야 가벼워지겠지만 문제를 정리할 수는 없다. 바로 그 의미에서 인도에 대한 죄를 추궁하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야만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직시해 그 밑바닥에서 자기 힘으로 기사회생의 계기를 움켜쥐지 못한다면, 그 고통을 견뎌 내지 않는다면, 우리의 자손이 세계시민으로 참가할 것을 희망하기만 불가능한 노릇이다.(43)
다케우치 요시미는 전쟁이 끝난 후 짧은 기간 중국에 머무른다. 그리고 돌아와 몇 편의 글을 쓰는 네 그 중에서 「중국인의 항전 의식과 일본인의 도덕의식」을 비롯한 몇 편이 잘 알려져 있다. 이 부분은 그 글을 출판했을 때 쓴 추기, 즉 덧붙임.
8・15는 내게 굴욕의 사건이다. 민족의 굴욕이며 나 자신의 굴욕이다. 떠올리기 쓰라린 사건이다. 포츠담혁명이 진행되는 참담한 과정을 보며 통절하게 느낀 것은 8・15의 시기에 공화제를 실현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는가였다. 가능성이 있었는 데도 가능성을 현실로 바꾸려는 노력에 게을렀다면 우리 세대는 자손에게 남긴 무거운 짐에 대해 연대의 책임을 져야 한다. 기록을 보면 정치범을 석방하라는 요구조차 8・15 직후에 자주적으로 터져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민족으로서도 개인으로서도 천치마냥 얼빠진 채 8・15를 맞이했다. 조선이나 중국과 비교하건대 견딜 수 없이 수치스러운 일이다. 메이지의 우리 조부들과 비교해서조차 수치스럽다. 사회과학자들이 일본의 천황제나 파시즘을 분석했지만, 우리 내부에서 골격을 이루고 있는 천황제의 묵중함을 고통스런 실감으로 걷어 올리는 일에 우리는 아직도 성실하지 않다. 노예의 피를 한 방울 한 방울 짜내, 어느 아침 정신을 차려 보니 자유로운 인간이 되었다는, 그러한 방향에서의 노력이 부족하다. 그것이 8・15의 의미를 역사 속에서 정착시키는 데 방해가 되고 있다. 파시즘이 맹위를 떨쳐 우리는 무력했지만 조선이나 중국에서는 파시즘의 맹위가 거꾸로 저항의 힘을 길렀다. 따라서 파시즘 탓에 어쩔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떠돌지만 그로써 우리의 도덕적 책임이 면제될 수는 없다. 8・15 시기에 인민정부를 수립한다는 선언이라도 있었다면, 설령 미약한 소리였고 성사되지 못했을망정 오늘날의 굴욕감으로부터 얼마간 구제되었으련만, 그런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고귀한 독립의 마음을 이미 8・15에 잃지는 않았던가. 지배 민족으로 설쳐 독립의 마음을 잃고, 독립의 마음을 잃은 채 지배당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지 않은가.(135-136)
츠루미 슌스케는 다케우치의 낭만 또는 낭만주의라고 말하지만, 나도 술 한잔에 취하면, 공화국의 시민이 되고 싶다고 읊조리는 일본인을 알고 있다. 「굴욕의 사건」이라는 다케우치 요시미의 글의 일부다. 패전은 굴욕이지만, 다른 의미에서 굴욕이다. 천황의 신민으로서 패전을 맞고, 패전 이후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아가는 것이 굴욕이라는 말.
자신은 올바른 사상을 갖고 있다. 그걸 모르는 자들을 자신의 올바른 사상으로 이끌어 가자. 그런 스타일은 사람의 자발적인 감수 방식과 사고를 가로막는다. 정부 관료들만이 아니라 인민 해방의 활동가조차 그런 스타일에 절어 있다는 경고.(152-153) 다케우치 요시미의 「지도자 의식에 대하여」라는 글에 대한 짧은 해석이다. 메이지 이래 일본 문화의 굳어진 지도자 의식을 비판한 것.
일본 민족 고유의 사명이라며 대동아전쟁에 뛰어든 국가의 결단을 일본 국민은 지지했다. 일본 국민은 지도자에게 속은 게 아니었다. 자진해서 총력전에 임했다. 다케우치는 자신의 실감을 가지고서 이를 입증한다. 그것은 다케우치 개인의 실패이며, 일본 국민의 실패이다. 적은 수의 병력을 데리고서 일본에 들어온 맥아더 원수가 군사적 사정으로 “일본 국민에게 책임은 없다. 지도자에게만 책임이 있다”고 말했더라도, 또한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 진보적 지식인이 그 판단을 받아들이더다도 다케우치 요시미는 그럴 수 없었다.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전후를 살아가며 자신의 전쟁 책임과 씨름하고자 했다.(155) 책임회피와 자기정당화 그리고 통치를 위한 수사에 스스로를 내맡기지 않는 것.
법 절차만 지킨다면 의회 다수당은 뭐든 할 수 있으며, 국회 바깥의 많은 개인이 반대해도 국가권력을 쥔 집단의 결정을 밀어붙인다. 기정사실 추인의 역사는 겹겹이 쌓인다. 권력을 비판하는 운동은 언제나 깨지고 결국 기정사실을 받아들일 것이다. 이러한 체념은 메이지 국가 일본이 일청전쟁에서 승리한 뒤 확립되었고, 전쟁과 패배를 경과하고 또한 점령과 점령해제를 거치는 동안 일본 국민을 늘 따라다녔다.(163-164) 정치권력에 대한 일본인들의 무기력. 기정사실의 수용. 끊임없는 기정사실의 축적과 불의의 재생산.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라는 표현. 다케우치 요시미는 생애에 걸쳐 스스로 문제를 만들고 또 풀어 내려고 노력하길 거듭했다. 자신을 둔재라 부르며 수재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두는 것은 이 까닭이다. 수재는 선생이 문제를 내면 교실 안의 대중이 보는 앞에서 선생의 의도대로 답을 맞춘다. 수재는 이렇게 유치원, 소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친다. 일본 바깥의, 특히 구미의 선생들이 만든 문제를 모범 답안이라 여기고는, 어렵잖게 익힌 외국어로써 답안을 가져와 뒤쳐진 무리들에게 자기 것인 양 내보인다. 여기서 이들의 자세만큼이나 일관되는 상황은 문제가 언제나 바깥에서 주어진다는 점이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루쉰을 읽어 나가며 자신의 생활 속에서 자신의 문제를 찾아냈다. 물음에 대해 더욱 새로운 물음을 보태 계속 물어간다. 다케우치 요시미의 저작은 그가 만들어낸 문제의 계열이라고 말할 수 있다.(185)
푸코를 읽다보면 문제틀problématique이라는 말에 부딪힌다. 문제제기나 문제 설정 등 일상적으로 써왔던 용어에 비하면 다소 묘한 느낌을 준다. 문제틀이란 문제들이면서, 연결되고, 심화되는 문제다. 다케우치 요시미가 구미에서 제기한 문제가 아닌가 자신의 문제를 풀겠다고 나섰을 때, 바로 문제틀을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다. 구미의 문제가 아닌 일본의 문제를 제기하는 순간의 일본의 문화, 역사, 언어, 전통에 휘말렸던 이들은 대부분 군국주의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다케우치 요시미의 문제 그리고 일본의 문제에서 문제를 발견해 내려면 그것은 일본의 실패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케우치 요시미가 이런 말을 끌어내는 배경과 체험이 우리에게서 그다지 먼 것은 아니다. 그는 다른 글에서 마르크스주의자를 포함한 근대주의자들은 패전 후 자신을 피해자와 동일시애 “피 묻은 민족주의를 피해 갔다”고도 주장했다. 나는 이 말을 대중의 전쟁 책임을 무화해 전후에 멈춰서 있으려는 자는 누구든지 선험적으로 자기가 불구임을 각오한 위에서 살아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물론 동시에 구태의 천황제와 구태의 지배자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자손을 늘이며 전후를 버젓이 지나려 한다면, 그것들을 영속적인 빚으로 삼을 각오 없이 전후에 멈춰서는 안 된다는 자기 윤리의 제언도 포괄한다고 받아들였다.(187-188) 요시모토 다카아키의 추도사의 일부이다. 자신을 피해자와 동일시한다는 것. 너무나 익숙한 태도다.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책임을 지는 자리에 있으려고 하는 것. 그렇지 않으면 선험적으로 불구일 수밖에. 선천적으로 외면하는 영역이 있으면, 고개를 돌릴 수 없는 법.
만년의 평론집에 『예견과 착오』라는 제목을 단 것은 자신의 예측이 대동아전쟁에 대해서도, 중국혁명 이후에 대해서도 불충분했다는 자기 인정을 포함한다. 그러나 빗나가더라도 이제부터 새롭게 예측하여 반대 방향을 향하거나 하지 않는다. 자신의 예측이 얼마나 빗나갔는지를, 매번 현재 위치에서 측정하고 인식하기를 거듭한다. 나아가 착오의 인식을 포함해 자신의 예측 속에서 얼마간의 진실이 함유된 부분을 골라내 그것을 지킨다. 이를 일러 나는 ‘실수의 힘’ 혹은 ‘실패의 힘’이라 부르고자 한다. 그 판단을 떠받치는 냉정과 용기의 조합에 나는 감동한다.(195) 츠루미 슌스케의 마지막 말이다. 그는 이 원고를 작성하던 중에 뇌경색으로 쓰러졌다가 회복된 후, 나머지 절반 이상은 구술로 원고를 완성했다. 앞부분과 뒷부분의 밀도가 다르다. 그 대신 그 통찰 역시 다르다. 착오를 포함해 진실을 지키는 실수의 힘, 실패의 힘은 곱씹을 구석이 많다.
책을 덮으며 루쉰에게서 다케우치 요시미가 가져 온 ‘쩡짜掙扎’를 생각한다. 한국어로 옮기면 몸부림이다. 문제를 붙들고 몸부림치는 것, 그것만이 사람에게 허락된 것인지 모른다.
2020. 1. 11.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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