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일본만세. 평양성 함락 후의 감격을 그린 그림이다. 승리의 만세를 부르는 일본군과 그에 깔려있는 패전한 청군. 과연 조선은 배경을 제공하기만 한 걸까.
오타니 다다시小谷正, 『청일전쟁: 국민의 탄생日清戦争‐近代日本初の対外戦争の実像』, 이재우 역, 오월의봄(中央公論), 2018(2014).
결론적으로 소감을 말하면 실망스러웠다. 책이 내게 흥미를 끈 건 ‘국민의 탄생’이라는 부제였지만, 실제 내용은 원래의 부제인 ‘근대 일본의 첫 대외전쟁의 실상’이 더 가까웠다. 나중에 보니 책 표지 한쪽 구석에 쓰여져 있긴 하다. 그렇다고 배운 점이 전혀 없다는 건 아니다. 전쟁의 디테일에 대해서는 자세하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전사에 가깝다. 그래서 전쟁 부분에 대해 이와나미 일본근현대사 시리즈의 하라다 게이이치原田敬一의 간략한 서술보단 채워주는 내용이 많았다. 책은 전반적으로 청일전쟁에 대한 어떤 디테일에 관심이 있다. 전쟁과 관련된 여러 지도를 보여주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진행된 이 전쟁의 모습에 대해 보다 잘 이해하게 도움을 준다. 그런 점은 실은 ‘신서’라는 이 책의 포맷에는 잘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폭넓게 보기에는 하라다 게이이치의 『청일·러일전쟁』(어문학사) 이와나미 일본 근현대사 3권이 훨씬 나아 보인다. 아니면 하라 아키라原朗의 『청일 러일전쟁 어떻게 볼 것인가』(살림)도 중요한 주제는 모두 다루고 있다. 후지무라 미치오藤村道生의 책은 나온지도 오래되었고, 번역판은 절판이 된지 오래다. 그럼에도 후지무라 미치오의 『청일전쟁』(소화)은 첫 장에서 이 전쟁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다루고 있다. 실제 개항장에서 일본 상인들의 불법행위를 치외법권을 통해 보호받고 군사적 위협을 통해 억지로 배상을 받는 등 침략행위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하다. 당시 후쿠자와 유키치의 과격한 전쟁과 조선 점령을 촉구하는 논설도 설명되어 있고, 무급이 널리퍼진 당시 일본의 방직공장 여공들의 상황과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저가의 식량이 필요했던 상황 등이 상세하진 않지만, 기본적인 정도는 언급되어 있다. 이 책이 쓰여진 1973년과 오타니 다다시의 책이 쓰여진 2014년의 간격이 느껴진다. 오타니 다다시는 전쟁과 전쟁을 둘러싼 여론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을 뿐, 도대체 왜 대외강경파 여론이 형성되었고, 그런 여론은 왜 퍼졌고,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해 피상적인 설명에 그치고 있다. 그런 점은 아쉽다기 보다 2010년대의 일본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절감한 것은 청일·러일 전쟁을 한국의 관점에서 기술한 역사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한반도를 배경으로 한 열강들의 전쟁이었다는 인식이 강하다. 전쟁의 명분이었던 조선의 독립이나 문명은 핑계일 뿐이라는 그런 인식이다. 이 전쟁에서 조선은 그냥 피해자였다는. 과연 그럴까. 이 전쟁들이 근대 한국의 형성에 근대 한국 국민의 형성에 미친 영향은 없을까. 신미·병인 양요부터, 일본제국주의 식민지로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좀 다른 관점에서 일관성있게 볼 필요는 없을까. 이 책은 나를 그런 의문으로 이끈다. 이 책에는 그런 해답은 없지만.
전쟁 전야의 동아시아를 다루는 첫째 장은 당시의 국제정세를 간략하게 요약하지만, 눈에 띄는 것은 중국과 일본의 군비강화 및 근대화 과정이었다. 상대적으로 청의 군대 제도에 대한 기술은 처음 보았다.(47-51) 역시 눈에 띄는 것은 일본의 군비 증강과정이지만, 잘 알려진 내용들이기도 하다. 가장 눈에 띈 것은 일본 군부가 대청 전쟁 작전 계획을 1880년 경부터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직예 즉, 지금의 화북지역에서 대규모 결전을 벌인다는 계획으로 준비하고 있었다.(65) 물론 이런 것은 군비 증강, 즉 예산을 위한 명분이기도 했겠지만.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가 결국 전쟁을 벌인 것이다.
실제 당시 내각을 맡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는 전쟁을 향해 달려가지 않았다. 한국인들에겐 이토 히로부미가 침략의 원흉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그는 그렇게 단순하게 폭주한 인물은 아니다. 청일전쟁에서도 러일전쟁에서도 그는 끝까지 전쟁을 막으려고 했다.(87) 그렇다고 모든 것을 양보할 생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제국주의를 포기한 것도 아니지만, 단지 그가 보기에 일본의 힘이 전쟁을 치르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말하자면 신중파였고, 그래서 늘 최선을 다해 협상하려고 했다. 단지 흥분하기만 하는 인물도 그렇다고 간교하기만 한 인물도 아니다. 러일전쟁을 회피하려고 러시아와 협상에 몰두할 때는 일본 국내에서 ‘공로병’이 있다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이토와 달리 당시 외상이었던 무쓰 무네미쓰는 개전파였는데, 오타니는 오이시 가즈오大石一男의 견해를 들어 무쓰가 조약 개정 교섭에서 실수를 거듭해 국내외의 위기를 초래했고, 이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청일 협조가 아닌 개전을 원했다는 해석이다.(90) 전쟁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한 두 사람의 어떤 특이점이 큰 사건의 변화로 이어진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타니가 인용하듯 다카하시 히데나오高橋秀直의 견해 처럼 일본 국내에 철군을 반대하는 강력한 다수 의견이 있었다. 정권 내의 가와카미 참모차장이나 무쓰 외상은 물론, 정당의 대외 강경파들과 자유당 내에서의 대청·대조선 강경론 그리고 언론의 역할도 크게 작용했다.(91) 한 마디로 여론에 떠밀려서 전쟁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인데. 전형적인 일본식 책임회피론이기는 하지만, 대외강격책을 원하는 여론을 무시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전쟁은 아시다시피 공식적인 전사에 기록되지 않은 7월 23일의 조선의 수도 한성의 왕궁을 공격하고 점령한 데서 시작된다. 단 하루 만에 끝났기 때문에 이를 빼고 풍도해전에서부터 전쟁이 시작된 것으로 말하고 있지만. 나카츠카 아키라中塚明의 『歴史の偽造をただす』가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는 제목으로 나와있다. 우연히 벌어진 사건인 것처럼 말해 왔지만, 실은 사전에 꼼꼼하게 계획을 세워서 치른 사건이다.(102-106) 조선이 너무 무력해서 반나절만에 무너져서 그렇지.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한국에서는 이 전쟁은 조청일전쟁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름을 넣으면 더 부끄러운 역사가 될런지 모르지만. 그리고 이 전쟁의 결과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운명이 정해진 것이다. 그 실행이 러일전쟁 이후로 10년 미루어졌을 뿐. 이 전쟁의 이름을 이렇게 부르는 것은 유일하게 일본 외무성이다. 그들은 일청한 사건 또는 일청한교섭사건이라고 부른다고 한다.(6) 이 역시 입맛이 씁쓸해지는 대목. 일본에서는 이 전쟁의 마지막 부분인 대만정복 과정을 ‘일대만전쟁’이라고 부르자는 견해도 있다. 일시적이긴 하지만 대만민주국이 수립되었기 때문이다.(359)
역시 흥미로운 대목 중 하나는 메이지 천황의 태도이다. 그는 선전조서의 공포 후, 하지카타 하시모토 궁내대신에게 전쟁은 자신의 본의가 아니었다며, 각료대신들이 전쟁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해서 허락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고 한다.(118) 이런 구절을 들어서 메이지 천황의 평화주의 운운하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지만, 실제 그는 매우 적극적으로 전쟁을 지휘했다. 히로시마의 대본영에서 화로로 난방도 하지 않으면서.(154) 물론 심적부담이야 있었겠지만.(121) 그는 자국 병사들의 충성심은 인정하면서도 꽤 다루기 어렵다고 말해서, 전장에서의 폭주와 명령계통의 혼란에 대해 토로하기도 했다.(224)
전쟁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병참이었다. 조선인 인부와 우마를 동원하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군부軍夫였다. 군인도 아니고 군속도 아니지만, 군에 소속되어서 물자를 수송하는 이들이다.(131-135) 실제 이들의 어려움이 심했고, 죽은 사람도 많았다. 대부분 병이 원인이었다. 하라다 게이이치는 이들의 죽음은 누구도 기억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수송능력은 전선의 한계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전쟁에서 낙동강 전선이 무너진 것도 결국은 병참이 뒤따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압록강 가까이에서 돌아선 것도 병참이 확보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공권으로로 뒤가 끊기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다시 38선을 넘었지만, 이번엔 자신들의 병참선이 끊겨서 되돌아가야 했다. 38선이 다시 휴전선으로 마무리 된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호치민 루트를 끊기 위해 끊임없이 북폭에 몰두한 것도 마찬가지다. 2차대전에서도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한 후, 연합군의 폭격과 레지스탕스에 의해 파괴된 철도 수송편을 사용하지 못해 흑인이나 유색인 혼혈 운전병으로 편성된 레드볼 익스프레스라는 트럭 수송대를 운영했다. 정말 인종차별적 발상이지만, 이때만해도 유색인의 피를 백인에게 수혈하는게 금지되었던 시절이니까.
이 과정에서 한국과 일본 사이에 아주 중요한 협약 하나가 조인된다. ‘대일본대조선양국맹약’ 1894년 26일에 김윤식 오토리 공사 사이에 맺어진 이 조약은 일본인 고문, 군사 교관, 일본통화 유통, 방곡령 금지는 물론 식량과 군사 물자 운반을 위한 협력을 요구한 것이다. 그후 이토는 내무대신인 정계의 거물 이노우에 가오루를 조선 공사로 보내 조선의 내정개혁을 강요하면서 사실상의 보호국화를 시도한다.(163-165) 물론 이 시도는 삼국간섭과 그 이후 러시아의 활동이 확대되면서, 무력화되지만, 10년 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고스란히 실현되게 된다. 이 때문에라도 청일전쟁이 가지는 의미를 좀더 꼼꼼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청일전쟁의 진행과정에서 보여주는 일본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대량 인명학살을 감행하는 데 있어 주저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 첫번째는 물론 동학농민군에 대한 학살이다.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라며 무참하게 학살하라, 모조리 살육하라는 등의 명령이 곧잘 등장한다. 최소한 3만에서 6만 사이일 것으로 추정된다.(171-172) 두번째 제노사이드는 뤼순에서 일어났다. 현대 중국에서 뤼순대도살 또는 Port Arthur Massacre로 불린다. 오타니는 숫자가 과장되기도 했고, 군인과 민간인을 구별할 수 없었다는 등의 변명을 하고 있지만, 무분별한 살인, 민간인 살해, 약탈, 포로살해 등이 일어난 것만은 분명하다.(197-202) 특히 오타니가 인용하는 병사들의 수기나 일기 등을 보면 단순히 하급 지휘관이나 병사가 동료의 죽음에 분개하여 충동적으로 일으킨 사건이라기 보다 일본군의 조직 자체에서 유래한 구조적인 사건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고급지휘관의 발언에서 그런 것이 드러난다.(203-206) 일본은 애초부터 이 전쟁을 야만과 문명의 전쟁이라고 말해왔으므로, 이를 덮기 위해서 현대적인 로비를 아끼지 않았다.(208-210) 세번째 대량학살은 대만점령과정에서 행해진다. 대만 점령도 쉽지 않아서 현지인들의 저항이 끊이지 않았고, 예방적인 살육과 촌락을 불태우는 일 등은 점점 더 많은 사람의 저항을 불러왔다.(335-339) 조선의 의병들도 초토화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훗날 중국의 난징에서 대규모로 그리고 곳곳에서 벌어진 전쟁수행과정에서 제도사이드를 서슴지 않았던 일본군의 태도는 특정한 사건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다. 이것이 야만에 대한 문명의 오만인지 아니면, 부족한 능력으로 힘에 부치는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인지는 단면적으로 평가하기 어렵지만. 아 그리고 물론 제노사이드는 일본군만 벌인 것이 아니다. 20세기의 전쟁에서 제노사이드는 일상화되어 있다. 너무나도 슬픈 현실이지만.
또 하나 이 전쟁에서 보여주는 일본군의 특징 중 하나가 현장 지휘관의 독주이다. 현장 지휘관에게는 과연 어디까지 전쟁을 수행할 권한이 주어지는 것인지. 당시의 통신 상황에 비추어볼 때, 전선 사령관의 독단이 어느 정도 인정되기는 했지만,(179) 여단장과 사단장이 각기 공을 차지하기 위해 본국에서 세운 전략을 뒤흔드는 경우가 곧잘 발생했다.(179-180) 반복되는 전선사령관의 독단과 폭주는 결국 제1군 사령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를 경질하는 데 이르게 된다. 물론 그가 고령에 기관지 질환으로 건강이 안좋기도 했지만.(216-219) 그렇다고 해도 본인이 원하지 않는 전선사령관의 경질은 흔치 않은 일이다. 한국전쟁 때 만주에 핵무기 사용을 요구했던 맥아더의 경질 같은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때는 이토 등 내각이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경질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만주와 중국 그리고 아시아 전역과 태평양에서 반복되는 전선지휘관들의 도발과 이로 인한 개전 그리고 정치가들의 사후 승인과 추인이라는 패턴은 이미 청일전쟁에서 부터 엿보인 것이다. 이런 과정을 승인하고 또 추인하게 만드는 통수권 사상이라는게 보통 위험한 게 아니다. 왜 한국에선 아직도 통수권이란 말을 헌법에 넣어두고 쓰는지 모르겠다. 그러니 범죄자들이 통수권 보위 차원에서 일을 했다는 시대착오적인 변명을 하는 걸 다 듣게 된다. 개헌을 할 때, 통수권 이란 말을 없애고, 간결하게 최고사령관, 최고 지휘관 등으로 바꿔야 한다. 심지어 일본은 자위대법에 최고지휘감독권으로 바꿔서 표현하는 현실인데.
오타니 다다시 본인이 가장 쓰고 싶었다는 전쟁에서의 미디어사 부분인 5장이 역시 이 책에서는 가장 흥미로웠다. 일단 이 전쟁에서는 종국 기자의 수가 많았다.(236) 정부는 처음에는 언론을 통제하려고 했었다. 특히 언론사들이 이토 내각의 연약 외교를 비판했기 때문이다.(238) 심지어 막대한 노력을 들여 초고검열을 하기도 했다.(241) 그러나 평양 점령의 소식 이후 사태가 완전히 바뀌었다. 평양과 황해의 승리가 전해지자 전쟁 정보를 적극적으로 전했고, 신문들도 호외를 발행해서 대응했다.(242-423) 가장 두드러진 것이 「아사히신문」으로 도쿄와 오사카에 모두 윤전기를 갖추고 있었던 이 신문은 처음에는 도판으로 나중에는 상세한 기사를 호외로 전달했다. 「오사카아사히」가 1894년에 발행한 호외는 66회, 1895년에는 80회에 달했다. 이들 호외는 본지와 함께 배달되었다.(245-247) 고급지 「시사신보」는 도판과 화상으로 대응했다. 서양화가들을 동원했고, 풍자화와 만화 등 도판을 중시하는 편집을 했다.(253-254) 도쿠토미 소호의 「국민신문」은 전장 스케치와 일본화를 실었다.(259-261) 가와사키 사부로川崎三郎의 전7권의 『일청전사日新戦史』는 물론 다양한 전사가 발간되었고,(267) 특히 이 책은 이토 내각의 대조선 정책과 외교 정책에 살벌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270)
이 전쟁은 각 지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전쟁을 매개로 해서 각 지역의 지역민들이 국민의식을 가지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전형적인 베네딕트 앤더슨의 인쇄자본주의 영향을 말한다. 처음에 사람들은 의용병을 조직하려 했으나 정부가 막았다. 구 사족 출신에 협객, 국수주의 검객 집단 등 다양했다.(272) 그러자 이번에는 군부 모집에 응하게 된다. 수천명 단위의 군부 모집이 이루어져 천인장, 백인장이라 불리기도 했다. 지역민들이 전쟁을 가까이에서 느끼기 시작한 것은 군부의 동원이 시작된 이후부터였다.(275-276) 병사들의 동원과 환송행사가 곳곳에서 열렸고, 군부도 참석했다.(279) 특히 흥미로운 것은 지방지였는데, 특파원을 보낼 수 없었던 지방지는 종군자가 보내는 편지를 신문사로 보내주면, 우편요금을 내주는 방식으로 전장 소식을 실었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생생한 목소리를 들었다. 특히 당시 부대는 지역단위로 편성되어 있었다.(282-284) 종군자들에 의한 전황보고회도 곳곳에서 열려서 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과장과 거짓이 뒤섞이긴 했을지라도.(289) 개선과 전몰자에 대한 위령행사가 전국적으로 열렸으며, 불교와 신도식으로 다양하게 거행되었다.(292-294) 특히 도호쿠 지역의 경우는 초혼제에서 막부 말기와 보신전쟁에 참여한 자를 빼기도 했다. 메이지 정부의 정통성에 관한 문제였지만, 지역정서를 무시할 수 없었다.(297-298) 후쿠시마 현청과 각 정촌의 기록을 보면, 당시 일본의 지방 하위 행정기관의 동원능력을 보여준다. 이런 말단 행정의 능력이 없이는 전쟁 수행이 어려웠을 것이다.(302) 또한 청일전쟁에서 청의 패배는 오키나와의 일본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307)
역시 신문의 성장은 전쟁이었다. 그리고 신문과 보도, 삽화, 지원, 전쟁 환송과 개선 그리고 추도까지. 이런 일련의 일들이 ‘nation’을 형성하는 전형적인 과정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책에서 충분히 설명해냈는지는 별도로 하고. 실제 일본에서 일본 국민이 언제 형성되었는지는 중요한 논제이기도 하다. 메이지 이후 형성되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청일전쟁은 너무 이른 것도 같고, 반면에 늦은 것도 같고. 그리고 덧붙여 설명하는 지방과 전장을 연결하는 국민공동체의 구성은 충분한 설명력을 가질 것으로 보이지만, 논증을 하기 위해서는 어쩐지 좀 모자라는 느낌이다.
청일전쟁의 전쟁 책임에는 물론 전쟁을 결단한 이토가 이끄는 번벌정부와 군부가 가장 큰 책임이 있지만, 오타니가 지적하는 것처럼, 대외강경파 의원들과 그들을 뽑은 국민, 그리고 강경론을 고무한 저널리즘에도 책임이 적지 않다.(384) 과연 일본이 얼마나 민주적이었는지는 평가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그런 압력들은 일본으로 하여금 전쟁으로 달려가도록 만들었다. 그게 일본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대외 강경론을 주장하는 것은 언제나 대중과 대중을 선동하는 데 가장 손쉬운 길이다. 21세기 한국에서도 대외 강경론은 언제나 시원시원하다. 온건하게 협상하려는 노력은 왠지 모자라보이고, 실패할 가능성을 항상 안고 있지만, 대외강경론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야 말로 참된 용기다.
그러나 청일전쟁은 일본에서는 외교적으로 실패했다고 평가한다. 일본을 지지하는 강국도 없고, 영국과 러시아의 제지를 뿌리치고 전쟁을 한데다, 육군·해군·민간의 도를 넘은 영토 할양 요구는 삼국간섭을 불러왔고, 그 대응도 졸렬했다. 결국 조선에서 농민학살과 민비살해 등은 반일 감정을 불러왔고, 친러파 정권이 탄생하게 되었다. 청일전쟁 후 청은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러시아에 접근, 러시아는 동청철도 부설권과 뤼순과 다롄의 조차 그리고 남만주철도의 부설권을 얻었다.(366-367) 결국 이 전쟁의 목표는 러일전쟁의 승리로 달성되는데, 일본은 19900년부터 다각적인 동맹과 협상망의 구축을 위해 노력하며, 1902년 영일동맹을 통해 서구 국가와의 동맹을 맺게 된다. 이 점이 두 전쟁의 결정적 차이였다.(367) 전쟁배상금으로 받은 2억냥, 삼국간섭에 의해 2억 3천만냥은 일본군의 군비증강에 대부분 쓰이게 된다.(371-372) 그러나 이때의 영토할양과 배상금 획득은 러일전쟁 후 협상실패라면서 히비야폭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청일전쟁 후 후방의 전쟁체험과 전몰자 추도, 군인천황 상 등은 근대 일본의 국민 형성에 기여했다고 평한다.(374)
외교적으로 실패했다는 건 어디까지나 일본의 입장에서 평가하는 것일뿐, 한국은 외세에 10년간 시달리다가 결국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만다. 청일전쟁의 외교적 실패는 한국에겐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그릴 여유를 주었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북한 문제 해결을 위해 사방으로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서, 나는 문득 19세기말 20세기초 메이지 시대 일본의 분주하던 외교행적을 떠올렸다. 고무라 주타로도 이토 히로부미도 참 부지런하게도 돌아다녔다. 그들도 냉대를 받았고, 무한정 기다려가면서 동의와 협상을 얻어내려 애썼고, 참으로 부단하게 실패를 거듭했다. 그리고는 결국 영일동맹을 성공시켜서 아시아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고 만다. 구한말을 반면교사로 삼으려면, 무능했던 조선정부를 연구할 일이 아니라 정세를 이용해서 어떻게든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켰던 일본의 외교를 연구할 일이다. 한국과 한국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시련의 시기이면서,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는 시기가 찾아오는 것 같다.
2018. 11. 10.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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