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루미 슌스케, 『전향』.

사진은 도쿄대 신인회로 훗날 일본 좌익의 주역들이 되지만, 전시기에 또 일제히 전향했던 바로 그들.

쓰루미 슌스케鶴見俊輔, 『전향: 쓰루미 슌스케의 전시기 일본정신사 강의 1931-1945 戦時期日本の精神史 1931〜1945年』, 최영호 역, 논형, 2005.

‘전향轉(転)向’이라는 말은 흔하지만 그 뜻은 분명하지 않다. 한국에 알려지기는 ‘비전향장기수’로. 일반 대중들에게 알려진 건 이인모 노인 송환 사건이고, 80년대 후반부터 소설이나 드라마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전향공작이 결부되는 경우가 많고, 고문이나 회유를 견뎌낸 비전향장기수는 존중받아왔다. 전향의 사전적 정의는 좌익 사상을 포기시키는 일로 되어있다. 그래서 흔히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생겨난 걸로 생각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사회주의 계열은 물론이고 우파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에게도 전향공작이 실시되었다. 근현대 한국에 있는 수많은 일들이 그렇듯이. 전향 역시 그 기원은 일본이다. 1930년대 초 일본의 수많은 좌파들이 강요에 의해서든 자발적으로든 공산주의와 폭넓은 좌익사상을 버리고, 그냥 버리는 것만이 아니라 군국주의로 사상을 바꾸고, 파시즘에 편승해서 활동했다. 그것도 아주 큰 규모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 쓰루미 슌스케는 이 ‘전향’ 전반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오늘날에도 충분히 음미할 만하며, 특히 1979년 캐나다 맥길 대학에서 교환교수로 있으면서 한 강의록이기 때문에 읽기도 수월한 편. [저자인 쓰루미 슌스케는 일본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자 사상비평가로 1922년 생. 미국으로 유학하여 하버드 대 철학과에서 공부하던 중, 1942년 FBI에 의해 체포, 전쟁포로로 수용소에 갇히고, 이 기간 동안 졸업논문을 써서 특별졸업이 인정된다. 같은해 미일교환선을 타고 돌아와 해군 군속으로 전쟁을 마친 후, 평생 아카데미즘에 소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사상비평가로 일관한다. 맥길 대학에서 뒤이어한, 『전후 일본의 대중문화 1945~1980』역시 번역되어 있다. 2012년 90세의 나이로 헌법 9조 개정에 반대하며 단식하기도 한다. 2015년 타계.]

어떤 의미에서 번역이 선택한 제목 『전향』은 그리 잘 어울리지 않는다. 책 전체의 주제가 ‘전향’을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지만, 그 핵심은 1931~1945년에 이르는 전시기 일본정신사 그 자체다. 전시기간의 일본 정신이 전향을 둘러싸고, 전향이라는 형태로 드러나고 또 영향을 주고 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전향이 이 책의 주제인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전향은 보다 큰 여러 개의 맥락 속에서 진행되는 데, 그 중 하나는 물론 전쟁이라는 맥락이다. ‘전향’은 이 전쟁이 도대체 어떻게 어떤 식으로 움직였는지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게다가 1920~30년대 일본 사회의 여러가지 특징이 이런 대규모 전향을 특징짓게 된다. 거기에는 메이지 유신에서 형성된 엘리트 들의 특징, 메이지 유신이 형성한 사회적 특징, 그리고 무엇보다 일본 사회 자체의 특징이 있다. 이를 쓰루미 슌스케는 쇄국성이라고 지칭한다. 그리고 다시 전시기간 동안 사람들은 어떻게 저항했는가? 전향에 대한 저항에 성공한 사람들과 실패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마지막에 매우 충격적인 주장을 담고 있는데. 그것은 패전 확정된 후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천황을 따라서 일제히 전향했다는 점이다.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하자.

적어도 일본 입장에서 이 일련의 전쟁을 가장 잘 설명하는 표현은 ’15년전쟁’이고 그렇게 써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나로선 꼭 마음에 들진 않지만. 흥미롭게도 ’15년전쟁’이라는 표현을 쓰자고 초창기부터 앞장선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쓰루미 슌스케였다. (최초 사용자는 1956년 家永三郞, 16) 나는 바깥에서 이 전쟁을 파악하기 위해 상대가 있는 표현인 아시아태평양전쟁이 좀 더 낫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중국아시아태평양-일본 전쟁이라고 부르든지. 제2차세계대전은 어디까지나 미국-일본의 전쟁만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이 전쟁 이해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이런 관점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반영되어 있다. 그 반쪽짜리 조약 말이다. 쓰루미는 일본 내에서 만주사변, 상해사변, 일지사변 또는 지나사변, 그리고 대동아전쟁 등으로 십여년간 순차적으로 이어진 별개의 전쟁으로 인식하는 것이 큰 문제라고 말하면서 실상 이들 전쟁은 15년간 연속적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전쟁이기 때문에 ’15년 전쟁’이라 불러야 한다는 점을 책을 통해 여러번 반복한다. 특히 그는 이렇게 불러야 하는 이유가 중국과의 전쟁과 미영과의 전쟁을 구별하지 않기 위해서 이며, 이를 나누어 부르는 명칭은 중국에서의 패배를 감추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16, 145-147) 쓰루미는 이 전쟁을 일본이 중국에 패한 전쟁으로 보아야 한다고 극구 강조한다. 나는 이 ’15년 전쟁’ 이라는 표현을 미야타 세쓰코에 의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일본이 벌인 전쟁 식민지인 조선은 어쩔 도리없이 휘말려간 전쟁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 전쟁의 중요한 특징은 태평양 전쟁의 미국, 영국, 네덜란드에 대한 선전포고를 제외하면, 나머지 중요한 전쟁들은 선전포고 없이 진행된 전쟁들로, 주로 일본의 중국 파견군이(관동군)이 단독으로 벌인 일에 본국이 말려든 일이었고(145-146), 마지막 미국과 영국과의 전쟁은 비축 석유가 떨어져 간다면서 안되는 줄 알면서도 뛰어든 전쟁이기도 하다. 일본이 믿은 건 일본인의 정신과 국체에 대한 신념 뿐이었다.(151-152) 이 전쟁의 목록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소위 노몬한 사건이라고 소련과의 전쟁을 시작하려고 했던 일도 파견군이 단독으로 벌인 일이었다. 무엇보다 사실상 중국에 대한 패배로 이어진 이 전쟁을 일본이 지속한 이유를 일본 정부가 막을 능력이 없어서라고(76) 하는데, 이건 사실이다. 통수권은 천황의 위임을 받아 육군 참모본부와 해군 군령부가 독단적으로 행사한다는 통수권 사상이 군의 문민통제를 막았고, 육군대신 현역무관제는 군이 내각을 불신임하면 붕괴시킬 수도 있는 비정상적 권력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15년’간 계속해서 일본은 전쟁을 지속했고, 국민들은 성공과 과실에 환호했으며, 마침내 그들의 대동아라는 이상이 펼쳐진다고 함성을 질렀고, 마침내 일본이 신의 나라로 성공하는 듯 보였다. 바로 이 전쟁 그 자체가 대규모 전향의 가장 큰 배경이었다.

놀랍게도 한국인들에게는 식민지 주민으로서의 자신들의 처지와 온갖 수탈 때로운 침략자의 하수인으로서 누리는 약간의 열매의 과실 그리고 마침내 한국의 독립과 한국의 운명이 결정되다시피한 이 전쟁이 왜 생겼고,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잘 모른다. 사실 이 지점이 가장 큰 문제인데. 한국의 국사교과서는 ’15년전쟁’을 종합적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왜 그러는지도 모르지만, 일본이 만들어낸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이 전쟁에 대한 무지가 꽤 큰 문제이며, 미래지향적 한일관계의 궁극적 걸림돌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일련의 전쟁의 진행과정 때문에, 결국 그래서 일본은 오직 미국에만 패배를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중국에는 사실상 패했고, 전쟁을 이끌어갈 동력을 상실했지만, 실제 패배한 것은 오직 미군에 대해서 그리고 소련군에 대해서이기 때문에.

쓰루미는 전향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이야기를 메이지 유신을 이끈 탈번 사무라이들의 동지애까지 끌어올린다. 소위 메이지 유신의 지사들은 성공하자 곧 특권계급으로 변했다. 동지애는 곧 사라졌고, 화족華族이라는 지금은 사라진 귀족제도로 남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1945년 패전 직후 후회의 시대가 잠깐 있다가 사라진 후, 옛 제도가 돌아오기 시작했다.(22-24) 이 후회의 시대가 사라지는 지점이 실은 역사적으로 분기점이 된다. 그러면서 메이지 유신이 만들어낸 여러가지 제도가 다시 돌아와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것이 메이지 중엽부터 만들어진 학교 입학시험 제도에 의한 신분제도. 시험제도가 학교 교육과 결부되고 사회의 모든 계층에 개방된 것은 오늘에 이른다고 지적한다.(24-25) 이건 사실 일본과 한국이 동일하다. 결국 일본에서 들여온 제도다. 사람들이 보통 가지고 있는 환상과 달리 형식상 양인에게 개방된 것으로 알려진 과거라는 제도는 실상 경화사족京華士族이라는 매우 패쇄된 그룹이 특권을 독점했고, 30여개 가문이 고위직을 독점하다 시피했다. 그 폭이 넓어져서 시험을 칠 자유가 주어진 것은 일제 강점기의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관료가 되기 위한 문관시험이 면제되는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입학으로 그 자체로 경쟁이 끝나는 일이고, 여기에 들어가기 위한 지역별로 설치된 1고부터 5고에 이르는 흔히 구제 넘버 스쿨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에 들어가면 일단 경쟁이 끝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시험제도는 이와 완전히 똑같은 것이라서 경기고-서울대라는 KS구조가 바로 이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이 시스템이 유능한 엘리트 형성을 보장하느냐 하면, 얼마전 청문회에서 변 모의 미디어워치가 권위 있는 논문판정기관이라고 말했던 이 모 전직 장관이자 국회의원이 경기고, 서울대 법대, 사법고시에 판사 출신 이니까. 이런 사례는 너무 많아서 이젠 사법고시에 합격했다고 똑똑하다는 말을 쓰기가 망설여 진다. 사리판단 능력이 없는 경우가 너무 많으니, 그것 만으로는 원래 믿을게 못되는 거다. 애초에 한 사람의 능력이 고등학교 입학시험 성적으로 판별된다는 방식 자체가 한심스러운 발상이니까. 여튼 관립고등학교에 입학한 18세 일본 소년들중 몇몇이 도쿄대 법학부에서 신인회新人会를 만드는데. 이것이 일본의 좌익 운동의 시작이다.(27) 쓰루미 슌스케는 이들 운동이 기본적으로 엘리트주의의 산물임을 지적하고 싶은 셈이다. 그리고 이들은 창립 초기의 사회주의 운동에서 벗어나 국가사회주의 즉, 군국주의로 향하게 된다.(29) 그러면서 일본의 문화적 가치를 존경하면서 일국사회주의를 추진하겠다고 한다.(30) 심지어 이들은 이 과정에서 일본공산당의 당적도 이탈하지 않는데, 한 번 지도자가 된 사람은 어떻게 정치상의 의견이 바뀌어도 계속 지도자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게 된다.(30-31) 소년등과했다는 우 모 전 민정수석이 가진 엘리트주의 따위가 이런 식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사노와 나베야마라는 대표적 공산당 지도자들의 전향 선언이 있던 1933년 6월 7일 후 한 달 안에 공산당 관계자 미결수 30%, 기결수 34%가 입장을 바꾸었고, 3년 만에 기결수 중 74%가 전향을 발표했고, 비전향을 고수한 사람은 26%에 지나지 않게 된다.(30) 전향이라는 말의 기원은 야마카와 히토시와 후쿠모토 가즈오가 말한 방향전환의 축어라고 한다.(31) 여기에 1928년 치안유지법에 의한 사상경찰은 전향유도술 안내서를 펴낸다.(32) 게다가 일본의 인민 대중이 만주사변을 열렬히 환영한 점이 영향을 미쳐, 인민으로의 고립감이 그들로 하여금 전향을 결심하게 한다.(33) 쓰루미 슌스케는 ‘전향’을국가 권력 아래에서 일어난 사상의 변화하고 말하며 국가가 강제력을 사용한다는 것, 그러나 동시에 개인의 선택과 결단에 의한 사상 변화 및 이데올로기 변화, 이데올로기 변화, 온건한 자유주의로부터 열렬한 파시즘으로 입장을 바꾸는 경우 까지 포함해야 하며, 단순히 배반이라고 악이라고 불러서는 곤란하다고 말한다.(33-35)

다이쇼, 메이지 시대를 거쳐서 형성된 좌파나 좌익 운동 세력이 서 있는 기반이 노동자 혹은 농민 등 기층을 형성하는 대중이 아니며, 이 대중 속에서 형성된 지도자들이 아니다. 이 지도자들 공산당을 형성한 주류는 제국대학과 관립고등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는 과정을 통해서 형성된 새로운 신분제의 상위신분을 차지한 이들 중 일부가 좌익 운동을 주도했다는 점이다. 쓰루미 슌스케가 지적하는 점이 이 점이다. 천황을 머리로 하는 새로운 형태의 신분제, 비록 시험으로 형성되는 것이기는 해도 그 본질은 신분제다. 상위신분에 속한 이들 중 일부가 정부에 혹은 체제에 반하는 엘리트를 형성되었다가, 다시 체제에 의해 순치되는 과정에서 소수 엘리트 정확하게는 상위신분이 전향을 하면, 하위신분에 속하는 추종자들이 대규모로 따라서 전향하는 현상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시험 신분제도 그 자체로 하나의 신분제다. 이 시험이 사실상 고등학교 입학시험에서 결정되는 한 엘리트주의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랬기에 상위 엘리트 혹은 신분의 일부가 모험적인 선택을 하기에 더 주저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여기에 전쟁 승리에 대한 대중의 열광이 덧입혀지자 이들은 속절없이 전향하고 만다. 이 시험에 의한 신분제든 부모의 능력에 의한 신분제든 이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한가. 고교평준화 이후 사라진 줄 알았더니. 8학군으로, 외고와 자사고를 통해서 다시 한 번 구현되려고 하는데. 이걸 없애기가 그렇게 어렵다. 지금 사법시험 합격자 중 최대 출신교는 모모외고라고 하지 않던가. 학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보다 확실하고 안전한 기반을 마련해 주려는게 무엇이 잘못이야고 이야기 하는데. 실은 그게 잘못이다. 그들이 만들려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신분이기 때문이다. 능력에 기반한 신분제도를 엘리트주의라 부른다. 신분제의 달콤함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며, 외고, 자사고와 서울대 집중 등 능력에 의한 신분제 해체를 추구하는 정책에 보수 세력이나 언론이 그렇게 격렬하게 반대하는 이유는 특정 사안에 대한 대중의 신분상승의 막연한 기대에 방패막이를 하고 있지만, 실상 내적으로 은근히 유지되고 있는 다양한 신분제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막으려고 애쓰고 있을 따름이다. 이러나 저러나 신분제는 무너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전쟁과 메이지 유신 보다 더 큰 배경이 있다. 그것은 일본 그 자체다. 쓰루미 슌스케가 전향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내는 이유는 결국 일본이라는 이야기다. 이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쇄국’이다. 쓰루미는 일본 문화의 사례를 들면서 논리의 일관성을 가지고 타인을 설득하려는 사람은 수입문화의 맥락에서 나오고 상대의 감정과 기분에 호소하려는 사람은 토착문화의 맥락에서 나온다고 말한다.(40) 천년 이상 자리잡은 일본 문화의 열등감은 국가로서의 고립 즉, 쇄국이라는 문제에 들이닥치게 된다. 1639년에 완성된 쇄국은 일본의 자기완결성을 200년 동안 한층 강화시켰다.(42-43) 일본 문화에 늘 등장한는 47인의 사무라이 이야기 즉 ‘추신구라忠臣蔵’에 일본인들이 환호하는 추신구라 증후군 역시 쇄국성에서 기인하고, 전향과정 자체가 쇄국성이라는 문화의 한 특징에서 유래한다고 말한다.(45) 사상전향을 시도하는 검사나 소추 당하는 사람이 한 솥밥을 먹던 사이였고, 형벌도 심하지 않았으며, 일본의 촌락생활은 별난 신념을 가진 사람에 대해 육체까지 파괴하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전향한 후에도 소극적으로 이의제기를 계속하는 여지도 있었다.(46-48) 근원적으로 수입된 용어, 곧 공산주의가 사람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기엔 너무 짧은 세월이었다.(50) 쓰루미 슌스케는 일본 문화가 가진 쇄국성이 단기간에 소멸되지 않을 것이며, 새로이 직면하는 문제들에 앞으로도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울 것이라 말한다.(51)

여기서 나는 다시 한 번 한국의 전신인 조선이 가진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실제로 조선은 거의 전기간에 걸쳐 쇄국을 했다. 외국과의 교류는 철저하게 제한되어 있었다. 중국을 오가는 사신단 이외에는, 일본과의 교류도 제한적이었고, 그밖의 외국인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초중등 역사 교과서에는 약간의 국경교류나 외교활동을 마치 국제교류인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실상 그렇지 않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두 번의 침략전쟁을 겪으면서 조선 후기 쇄국은 한층 심해졌다. 일본 조차 쇄국을 하며서도 나카사키가 개방되어서 문물이 교류하는 통로 역할을 했는데. 조선은 그 정도도 허용되지 않았다. 강화도 정도는 열어도 좋았을 텐데. 물론 프랑스 선교사도 오가고 표류민도 있었지만, 이런 사람들이 일정기간 활동했던 일도 국가의 행정력이 취약해서 발생한 일이지, 쇄국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흔히 대원군 집권시기를 ‘쇄국정책’이라고 해서, 대원군 집권기에만 쇄국을 했다고 오해하는 경향이 있고, 요즘즘 사람들이 대부분 역사지식을 얻는 드라마가 워낙 판타지를 그리고 있어서 흔히 오해한다. 그러나 조선이라는 사회를 형성한 또 하나의 본질은 ‘쇄국’이었다. 극소수를 제외하면, 해외문물에 너무나 어두웠다. 19세기 조선 정부의 무능과 무기력의 근원이었다.

외국인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본만의 특징인 국체国体 역시 쇄국성이라는 문화상 특징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국체의 기원은 요시다 쇼인과 아마가타 다이카의 왕복서한에서 였다고 한다.(53) 나는 쓰루미에게서 국체를 이해할 하난의 실마리를 겨우 얻었는데, 영어로 national structure라는 점이다. 국체는 천황을 중심으로 모든 구조가 구성되는 일본 정치의 현질서를 그 자체로 신적인 것과 연결된 찬란한 것으로 만들고 이를 태고 이후 변하지 않고 계속되는 고대 신화적 세계의 과거와 직접 연결한다.(54) 당시 일본의 교육 체계는 소학교 교육과 군사교육에서는 일본의 신화에 중심을 두고, 대학과 고등교육에서는 유럽을 모범으로 하는 세계관을 가진 전문가로 양성했다고 한다. 메이지 설계자들은 이 국체의 신화의 허구성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으로는 세계와 대화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노동자, 농민, 군인이될 계층에게는 신화를 주입하고, 엘리트들에게는 교양을 주입하여, 피지배와 지배층으로 국민을 이원화하여 안정적 통치기반을 마련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일본은 하나의 국가 종교로서 사실상의 엘리트 교양인 밀교密敎와 대중을 현혹하는 신화인 현교顯敎에서 따로따로 훈련을 받아야 했다. 국제적 정치 권력의 거친 파도 속에서도 메이지 이전과 이후의 가족 제도와 촌락 제도의 강한 결합력을 깨뜨리지 않는 가운데 이를 수행하려 했다. 이들은 가족국가를 구상하고, 미래의 지도자들이 국가종교의 밀교 부분을 충분히 이해한 뒤에 현교 부분을 지배할 것을 기대했다.(55-56) 어디까지나 이 두 계층을 분리해 둘 수 있다는 것은 착각이었다. 메이지 시스템은 설계오류가 있었던 셈이다. 원로 또는 중신들이 감추는 병풍 역할을 해왔으나, 주로 가난한 농민계층 출신의 청년 장교들이 대거 등장 이후 사실상 밀교와 현교의 분리는 유효성을 잃었다. 그럼에도 패전을 인정하고 항복을 이행하는 마지막 수상 역할을 한 스즈키 긴타로는 처음에는 국체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성명을 내고,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여 무조건 항복을 할 결단을 하고 국체가 수호되었다고 발표한다.(56-57) 그는 여전히 익숙한 단어와 문구들을 사용해 대중을 속이고 있었다. 그 방법 외에 없었으리라. 쓰루미는 밀교와 현교의 이중 지배신앙의 등장은 메이지 정부의 해외사절단이 서양 국가의 효율적 통치조직을 가진 종교를 본따서 사실상 다신교였던 신도를 새로운 국가종교로 기독교와 아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일신교로 만들었고, 오류를 범하지 않는 천황이라는 이미지를 심었으며, 이를 군인칙유와 교육칙어 및 각종 칙어를 전파하는 형태로 수행되었다고 설명한다.(58-59) 천황은 15년전쟁이 끝날 때까지 종교, 도덕, 정치의 근원이 되었고, 누구든 칙어 속 단어의 일정한 편성과 변형의 규칙을 이용하면 모두 같은 내용이 전파하고 주고 받았다고 지적한다. 사실상의 신앙고백문의 반복이나 주문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런 일은 신정정치가 행해지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있으며, 1931년의 중국침략의 시기가 되자 거의 80년에 걸친 동일한 조건반사에 익숙해여 온 탓에 남성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로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고 평한다.(60) 마루야마 마사오를 인용하여 일본인의 정치활동은 권위를 대표하는 신위 가마, 권력을 대표하는 관료, 폭력을 대표하는 무법자로 분류하면서, 국민들 안에 쌓인 불만이 무법자 곧 청년장교들을 통해 표현되고, 관료들에게 메이지 국가에 의해 채용된 정치사상을 비유가 아닌 문자 그대로 곧 현교를 실행하라고 강요했으며, 이는 모든 종교, 도덕, 정치의 가치가 천황에서 발원한다는 방침으로 곧 현인신現人神 사상으로 일본을 최강의 국가로 만들어 인류를 위해 봉사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62) 천황을 위해 천황의 명령에 따라 죽는 일은 국가신앙인 동시에 개인신앙이 되어 발현된 것이다. 일본이 승산이라고는 없는 미국과의 태평양전쟁 개전을 단행한 것은 일본의 국가종교에서 현교의 부분이 오랜 세월 동안 밀교의 부분을 삼켜버렸기 때문이다.(65) 일본은 실상 중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일본인들이 이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66) 마침내 일본이 미국에게 패배하여 모든 패배가 눈앞에 드러나게 되자, 국체관념 또한 사라지고 육체만 남았다. 여기서 전후 문학은 육체의 요구에 충실한 것이 최고의 가치라고 하게 된다. 1960년대의 경제동물 경향도 전쟁 중에 뿌려진 씨앗에서 발아하고 성숙한 것이다. 그러므로 패전 후의 조건 변화를 받아들여도, 다시 쇄국성의 형태에 귀착하게 된다.(67)

최근에 가장 관심을 불러일으킨 일본인 학자인 시라이 사토시 역시 밀교와 현교 중 현교가 밀교를 삼킨 것이 일본이라는 주장이며, 그는 이를 3.11 이후의 일본에까지 확장시킨다. 그의 ‘영속패전’의 주장 역시 일본은 미국에게만 패전을 인정하고, 다른 아시아 국가에게는 패전을 인정하지 않아 실상 패전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던가. 요새 주목하는 일본의 종교학자 이소마에 준이치 역시 메이지 천황제의 종교성과 서구 종교관념의 정교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쓰루미 슌스케에서 출발해서 그 논리를 정교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쇄국하는 일본은 일본 만의 정치종교 상의 제도적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국체라는 곧 나라 혹은 민족의 구조라는 거대한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그 머리는 천황으로 하는 거대한 하나의 신비한 몸 일종의 corpus mysticum을 이루고 있다. 마치 성경을 근거로 기독교가 오랫동안 말해온, 예수를 머리로 하는 거대한 몸인 교회,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모든 신자가 잠재적이면서 현재적인 모든 신자가 포함된 그 신비체로서의 교회 말이다. 소름끼치는 이야기다. 그래서 일본에는 기독교가 전파되지 않는지도 모른다. 이미 유일신이 있으니까. 지금도 구조적으로 형태론적으로 누군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까. 천황제와 그리스도교는 공존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니면 그리스도교가 어용이 되던가. 만약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면, 현재 평화헌법의 상징천황 역시도 이런 국체론을 해체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지금 문제가되는 전쟁포기 조항이 헌법 9조인데. 일본 헌법 1조부터 8조까지는 모두 천황에 대한 규정이다. 한국 헌법 1조의 민주공화국과 국민주권과 대비가 된다. 요즘은 거의 들어갔지만, 한국에서도 한 동안 국체 운운하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박 모가 대통령을 하던 간혹 그런 말을 했다. 이 역시 생각해 볼수록 소름끼치는 일이다. 또 다른 방식으로 이런 논의를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의 한국에 비추어 보면, 한국에도 현교로서의 민주주의와 밀교로서의 권위주의 엘리트주의가 나름 존재했었다. 적어도 박정희 말기 까지는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양두구육을 팔아제겼다. 이걸 잘 조작하는 것이 소위 정치라는 정치권 엘리트의 주장이었다. 그들은 지금도 여의도에서 그들만의 게임을 하면서 이런 주장을 한다. 여의도에는 여의도의 논리가 있다고. 민주화 운동은 현교 중심으로 밀교를 일치시키자는 주장이고, 박근혜 정권은 밀교로 아예 현교를 뒤집겠다는 발상이었다. 지금은 또 어떻게 말해야 할까. 지난 촛불은 현교가 밀교를 통합하려고 한 시도이고, 현교가 밀교를 바꾸려는 시도였을까? 현교가 밀교를 삼켰을까. 문재인 정부는 이 구분을 잘 활용해서 마키아벨리스트의 통치성을 발휘하려고 하는 걸까. 밀교와 현교의 갈등이 있는 것인지. 정치종교라는 이 기본 인식틀은 왜 이렇게 유용한 것인지.

일본이 아시아 전체를 참화로 몰아넣으면서 내세운 것이 동아협동체 또는 대동아라는 사상이었다. 대동아라는 이름으로 전쟁을 진행하면서, 일본은 실상 현지인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현지를 파괴했다. 그러다가 전쟁이 끝날 무렵 더 이상 승리를 바랄 수 없게 되었을 때, 필리핀, 버마, 자유 인도, 인도네시아 등을 독립시키거나 독립을 돕는다.(81) 조선은 단단히 가지고 있었지만. 쓰루미는 마쓰모토 겐이치를 인용해 현재 동남아시아와 일본의 경제관계가 일본정부가 폭력적으로 주장했던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전쟁목적을 효과적이고 안정된 형태로 실현하고 있다면서 일본중심의 일방주의가 유지되고 있다고 말한다.(82-83) 일본의 대아시아관은 패전 후에도 변한 점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 논의 중 인상적인 구절 하나가 있다. 이런 일본의 대아시아 주의에 협력했던 아시아 지도자들이 있다. 그 중 버마의 독립을 쟁취하려 했던 바 모우Ba Maw는 이렇게 말한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에 대해 말하자면, 이 사람들만큼 인종에 의해 속박되고, 또한 그 사고방식에 있어서 완전히 일방적이며, 또한 그런 까닭에 결과적으로 타국인을 이해한다거나 타국인에게 자신들의 생각을 이해시킨다거나 하는 능력이 이 만큼 결여된 사람들은 없다. 그들이 동남아시아에 있어서 전쟁 기간을 통하여 일에 좋고 나쁨에 관계없이 항상 그 나라 사람들에게 나쁜 짓만 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렇기 때문이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일본인의 시야에서 밖에 보지 못했고, 더욱 큰 문제는 모든 타국민이 그들과 함께 무엇인가를 할 때 자신들과 똑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에게 어떤 일을 하는데 오로지 하나의 길 밖에 없었다. 그것은 ‘일본식으로’라는 것이었다. 또한 단 하나의 목적과 관심 밖에 없었다. 일본국민의 이해, 이익이 바로 그것이다. 동아시아의 나라에는 오로지 하나의 목적밖에 없었다. 그것은 일본과 영원히 연결된 만주국과 조선같이 되는 것이다. 일본 인종의 입장을 강요하고 그들이 한 일은 그런 것이었다. 그것이 읿노 군국주의자들과 우리 지역 주민과의 사시에 진정한 이해가 생기는 것을 결과적으로 불가능하게 했다.”(『버마의 활로” 1939년~1946년 혁명의 회상』, 『전향』 77에서 재인용)

요즘에도 일본이 한 좋은 일도 있었다는 류의 주장이 그들이 세운 학교의 숫자나 넓힌 도로나 철도의 길이와 함께 제시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런 주장이 소수 일본과 친화적인 지식층에서만 맴돌 뿐 대중적 호응을 얻지 못하는 데. 바 모우는 여기서 아주 핵심적인 주장을 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식으로 일본만 보고 했기 때문이라는 점이고. 그 기원은 바로 그들의 인종주의라는 주장이다. 그것을 쓰루미 슌스케의 표현으로 하면, ‘쇄국성’이 될 것이다. 일본에는 아직도 조선에서의 식민통치는 실패했고, 대만에서의 식민통치는 성공했다는 식의 대중적 논의가 흔하다. 한국에선 위안부와 끊임없는 반일논의가 있고, 대만은 친일본적이라는 주장이다. 실제 일본어를 하는 대만인의 숫자는 상당하며, 일본과 일본 문화를 좋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 뿐인가. 그것이 식민통치의 성공인가.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대만인의 대중적 정서에는 일본 보다 가까이에 있는 또 하나의 적 또는 원수가 있다. 대륙에서 공산당과의 전쟁에서 패해 넘어온 사람들. 이 사람들은 대만인들의 가슴과 육체에 쉽사리 지워지지 않은 오래된 상흔을 남겼다. 가까이 있는 원수에 비해 먼데 있는 옛날의 적이 친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게다가 나는 바 모우의 이 비판이 어딘가 매우 낯익은데. 오늘날 동남아시아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하고 돌아와 선교보고를 하는 선교사들이 말하는 내용을 들여다 보면 꼭 이런 식이었기 때문이다. 읽다가 화들짝 놀랐다. 선교 대상을 미개한 계몽과 개발의 대상으로 보고 대상화한 후, 한국이 간 길을 가도록,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리고는 선교보고 랍시고, 한국의 이익을 위한 활동이라면서 지원을 요청하는 이 천박한 행태에 돈이 몰리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가장 큰 실패 사례는 문자가 없는 찌아찌아족에게 한글을 사용하게 한 일이라고 본다. 열등감에서 기원한 독특한 우월감이 자해 수준의 정책을 실행한 셈이다. 지금은 어찌 되었으려는지.

이제 반대로 전향을 거부하고 비전향을 고수한 사람들을 살펴보자. 그는 먼저 그 기원으로 ‘은둔 신자’ 곧 ‘가쿠레 기리시탄隠れキリシタン’ 이야기를 꺼낸다. 도쿠가와 막부 시절 숨어서 신앙을 보존한 사람들, 엔도 슈사쿠가 『침묵』에서 묘사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다. 엔도 슈사쿠도 자료로 사용한 구로자키 지방과 고토 열도에서 전승되는 『태초의 일天地始之事』의 한 구절을 길게 인용한다. 중요하다 생각하여 옮겨본다.

“제왕 요로테츠는 거룩하신 분을 찾아 온 땅을 다 뒤지며 사방을 찾아 다녔지만 찾아내지 못하자 토착주민 아이들 속에 뒤섞여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갓 태어난 갓난아이에서 7세까지의 아이들을 죽이겠다고 하여 총 44,444명을 모두 죽여 버렸다. 너무 안타깝고 가련한 일이라 뭐라고 형용할 수 없다. 그 숫자 44,444명에 관하여 거룩한 분이 전해 듣자 “이렇게 수많은 아이들이 생명을 잃은 것은 모두 나의 탓이다”라고 하며 이 아이들의 영혼 구원을 위하여 제제마루야 숲 속에서 기도를 하셨다. 그때 데우스로부터 “수만 명의 어린 아이의 생명을 잃은 것은 모두 너의 탓이다. 이렇게 해서는 천국의 기쁨을 잃을까 염려스섭다. 따라서 죽은 아이들의 후세를 위하여 너는 비난을 당하거나 생명의 고통을 당하며 너의 몸을 바쳐야 한다”라는 계시를 받았다. 거룩하신 분은 곧 엎드려 피와 같은 땀을 흘리셨으니, 로사리오 기도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거룩하신 몸은 로마국의 산타 에키렌자 사원으로 돌아가셨다. 오로지 악인들에게 고통당하고 생명을 바치려는 생각이셨다.”(88)

쓰루미는 ‘은둔 신자’들이 포르투칼 신부들에게 받은 성서에 대한 약간의 구전을 바탕으로 발전시킨 이 나름의 에수전, 헤롯의 영아살해와 결합된 십자가라는에서 보여주는 이 고통의 방식이 일본인의 방식이며 이 섬나라에서 대대로 함께 살아 온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난 동포의 감각이라고 평한다. 그리고 이 느낌을 1931년부터 15년 전쟁 기간 동안 일본인을 밀어붙이고 일본인을 젖어버리게 한 느낌과 닮았으며, 15년 전쟁 기간 동안 괴로워하며 자기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기독교 신자들의 감정이 이 도쿠카와 시대 200년에 걸친 쇄국기간의 은둔 기독교의 감정에 가깝다고 말한다.(90) 개인적으로 기타모리의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을 검토해 볼 또 하나의 포인트다. 일본에 있던 여러 기독교 종파 중에 15년 전쟁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한 곳은 나중에 해산되는 홀리네스파(성결교)나 제칠안식일교회, 파수대(Watch Tower Society)를 들고 있다.(93) 일부는 한국 기독교 기준으로는 이단인. 특히 파수대 즉, 여호와의 증인인 아카시 쥰조는 전향을 거부한 대표적인 인물로 파수대를 이끈다. 그는 감옥에서 전토진종과 불교의 법화경 그리고 『고사기』의 영향도 받아, 보다 보편종교적 경향으로 발전한다. 반면, 불교와 신토의 영향은 장남과 차남을 군국주의로 전향시킨다. 마지막 까지 남은 사람은 고작 다섯 이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조선인으로 나중에 귀국했다고 한다. 누군지 엄청나게 궁금하다. 아카시 쥰조는 패전 후 석방된 다음 미국의 파수대가 국가를 숭배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미국 파수대를 공개적으로 비난했고, 이로 인해 파수대 공적 역사에서 지워진다. 정말 흥미진진한 이이기인데. 이런 소수 종파가 중일 전쟁을 비판한 것은 하층 사회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95-99) 이를 제외한 큰 교단은 모두 정부에 협력했고, 불교도 소수를 제외하고는 마찬가지였다.(100) 그런데 흥미롭게도 전향을 거부한 소수의 공산주의자들은 전후에 영웅취급을 받았지만, 1920년 좌익 지식인의 언어를 그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는 패전 직후 일본의 일반 사람들의 생활감정으로부터는 매우 동떨어진 것이었다.(102-103) 게다가 전향을 거부한 자들이 30년 후에는 천황 거소에 가서 만세를 외칠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103)

해설을 쓴 가토 노리히로의 말에 따르면 이런 비전향 역시 일종의 쇄국이다.(236) 막부의 쇄국 시기 동안 숨어서 자신만의 신앙을 지킨 가쿠레 키리시탄들은 정부에 대해서는 불교를 신앙하는 듯한 외양을 보이면서, 자신들의 작은 쇄국을 통해 전향을 거부했다. 일부 소수 종파의 사람들 중 감옥 안에서 끝까지 신앙을 지킨 사람들은 당시 일본 전체의 입장을 거부하고, 자신들 만의 쇄국을 감옥에서 단행했다. 마지막까지 전향하지 않은 10여명의 공산주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전향한 이들도 일본 전체에 내재하는 쇄국성 때문이고, 전향하지 않은 이들도 자신만의 쇄국을 지켰다. 아래에서 보이지만 조선인들이 자기 정체성을 지키면서 일본에 대해 비판적 혹은 거리를 둔 입장을 취할 수 있었던 것 역시도 일본 사회 안에서 나름의 쇄국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향이란 혹은 비전향이란 모두 일본적 특성 속에 있는 문제이고, 문제는 일본 그 자체이며, 문제는 쇄국 그 자체가 된다. 다만 하층계급과의 연결을 어떻게 가져가는지는 중요한 포인트다.

쓰루미는 ‘일본 속의 조선인’이라는 강의에서 일본의 우익이나 좌익 모두 조선에 문명을 강요하는 사고방식이었다고 말하며,(105) 조선 탈취, 일본으로의 노동자 이동, 조선인 경시 등에 대해 말하고, 박경식을 인용해 조선인 강제연행 등을 언급한다.(109-110) 비교적 담담하게 말하면서, 다나카 히데미츠의 소설 「주정꾼 배」나 김시종의 장편시집 『니이가타』등을 흥미롭게 언급한다.(112, 117) 하나 주목할 만한 지점은 김달수의 1958년 소설 『박달의 재판』에 대한 언급이다. 이 소설은 몇 번이고 죄를 후회하면서 반복하는 주인공을 통해 전향이라는 것에 대한 일본 지식인의 견해가 가진 사무라이 식의 자세, 경직된 스타일을 비판하는 것인데. 쓰루미는 김달수가 소설를 통해 경직된 일본지식인의 전향관은 메이지 이전의 무사계급 문화의 불행한 유산일 뿐, 메이지 이후의 문화는 예전 무사계급의 덕목을 일본국민 전체에 보급함으로써 일본 인민으로부터 탄력성 있는 활력을 빼앗아왔다고 주장했다고 본다.(118-119) 쓰루미 슌스케는 재일 조선노동자들의 상황이 계급과 민족에 뿌리박은 비전향의 실례라고 본다.(120) 일본 공산당에 대해서 전개하는 논의도 흡사하다. 좌익운동 지도자들은 전향 후 쇼와 천황에 대한 신앙으로 옮겨갔다. 비전향한 소수는 강력한 영향력이 있었다. 그런데 하니야 같은 표면적으로 전향함녀서 내면적으로 천황제를 밟고 나와 일종의 허무에 도달하는 경우가 있었다. 야마카와 히토시는 상인으로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128-130) 민속학자 야나기타 구니오는 일본인이 메이지유신 이후 그때까지 일본 전체에서 아주 조금 밖에 차지 하지 않았던 사무라이 계급의 생활방식의 이상을 국민 전체가 채용했다고 말한다.(131) 지식인 오코우치도 사무라이화를 거부하는 색다른 생활을 관철했다고 말한다.(133) 앞서의 조선인들의 사례 처럼 사무라이적 태도를 가지지 않은 감각을 높이 산다. 바람직한 것은 위장전향의 길이다.(134)

메이지 이후 사무라이 문화와 이들의 덕목이 일본 국민 전체에 보급되어 경직되었다는 주장의 경중을 나는 쓰루미 슌스케 이상으로 입증할 능력이 안되지만, 나는 동일한 것을 한국 사회에서 보고 있기 때문에 매우 관심이 간다. 실제 1945년 이후의 현대 한국은 전 인민의 양반화 같은 것이 이루어져서, 실제 내면으로 침투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성리학적 사고방식에 기반한 양반들의 덕목이 그 껍데기 뿐인 형태로 개인들에게 표출되고 있어서, 사회 전체의 위선의 근간이 되고 있다. 동시에 그 말 그대로 활력을 잃고 있다. 아직도 언제 만들어졌는지 모르는 본관이나 족보에 연연해 하거나. 해마다 명절만 되면 나타나는 부부와 가족갈등의 원인인 제사와 제수 준비가 실상 전국민의 70% 혹은 그 이상에게는 70년대에 혹은 60년대에 시작된 것에 불과한데. 무슨 대단한 전통인양. 움켜쥐고 있다. 이 모두가 한국 근대화 과정이 전국민의 양반화로 이루어진 때문인데. 실상 청문회에서 일단 신상부터 털고 보는 방식이야말로 성리학적이다. 그의 성품이 어떤 사람인지가 그의 능력과 결과를 결정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대중들에게 그렇게 설득력을 가지고 장관 후보자들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전근대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대중의 정서를 건드려 호응과 동조를 이끌어내는 것은 대중이 스스로 양반이라 자처하기 때문이다. 성리학은 그렇게 왕을 만들어 내려다가 결국 실패했지만. 호주만 폐지할 게 아니라 본관을 폐지해야 한다. 진짜 오래된 양반들은 자신들끼리 족보를 만들어 보관하라 하고.

패전이 역력하여, 모두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데도. ‘옥쇄’를 택하도록 이끌어 낸 도조 히데키의 전진훈 즉 살아서 포로로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규율. 폐하의 충성된 신민은 국체를 수호하기 위해 옥쇄를 두려워하지 않는 각오를 해야 한다는 주장.(153-154) 그러나 와타나베 기요시가 실제로 본 것은 죽음의 공포로 절규하는 병사들이었다. 이런 다른 목소리들이 조금씩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것인 와다쓰미海神회의 노력으로 기록으로 남아있다.(156) 반면 전시의 일반인들의 삶은 주부들에 의해 유지되었고, 그 결과 전후 총선에서 466명 중 39명이 여성이었다.(165) 반면 정부는 ‘도나리구미隣組’를 조직했는데, 이들은 이국적인 스타일에 압력을 가해 희생자를 삼기도 했다.(170) 그 중에서 흥미롭지만 씁쓰레한 것이 어린 쇼와 천황이 어딘가 우울해 하는 걸 보고 싸구려 과자를 주었다가 불경사건의 주인공이 된 오코우치가 전쟁이 끝날 무렵 고초를 겪은 사건이다. 쓰루미는 여기서 전시 파시즘에 일종의 특권계급에 대한 원한이 있었다고 본다.(177) 쓰루미는 원폭 문제에 대해 허버트 페이스의 견해를 들어 원폭 없이도 1945년 12월 31일까지는 항복했을 것으로 보면서, 원폭 투하는 정치적 필요에 의한 것이라 말한다. 한 가지는 소련의 참전을 막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2억 달러라는 비용이었다는 이야기다.(180-183) 유색인종이 아닌 사람들에게 원폭을 투하했을리 없다는 로베르 길랑의 말도 인용한다.(185) 사실이지. 원폭 반대 운동이 전개되는 중에 소련과 중국의 핵실험 후 좌파가 이탈하는 것을 보면서 사회주의는 국가주의의 아류라는 특징도 지적한다.(190) 쓰루미는 지역에서 생겨난 공해 반대 운동이 쇄국성과 싸우는 힘이라고 지적한다.(191)

쓰루미 슌스케가 이 부분에서 다소 산만하게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으나 요지는 분명하다. 어떻게 국체로 대표되는 쇄국성과 싸울 것인가. 일본 전체를 둘러싼 쇄국성을 가리킨다. 요지는 지역성과 동료라는 이야기다. 사람들은 지역사회와의 연계를 통해 살아남았다. 전후의 비판적인 목소리도 혼자서는 힘이 없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모여 가미카제 류의 자폭공격을 비판하니 소리가 되어 나왔다. 원폭에 대한 반대 운동 역시도 지역에 기반한 것이었다. 이것 역시 일종의 쇄국이기도 했다. 즉 국체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각자 자신의 이웃과 지역과 동료와 함께 하는 나름의 작은 쇄국이자 진지를 형성하지 못하면 일본인은 일본 자체의 쇄국성에 기인하는 국체와 그 신앙으로부터 자유롭지도 비판적이기도 어렵다는 주장. 이 강연이 1979년 가을 학기에 실시되었지만 지금도 그 연속선상에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흔히 일본천황의 항복선언이라고 알려진 그러나 실상은 애매한 표현으로 다 듣고서 또는 이것이 항복선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어야만 이해할 수 있다는 그 종전조서이다. 한국에 독립을 가져다 준 항복이 어떤 것이었는지 정도는 알아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일본인들이 히로히토의 목소리를 들은 건 이때가 처음이라고 한다. 궁금하시면 클릭. 쇼와 천황 히로히토의 종전조서 옥음방송.]

쓰루미는 전쟁의 끝 즉, 종전 마저도 전향이라고 말한다. 천황의 사실상의 항복선언 이른바, 옥음방송玉音放送이 있고 나서 다음날부터 일본인들이 천황과 함께 방향전환을 했다고 말한다. 길랑을 비롯한 백인들에게 밝은 미소를 보이며 인사를 했다는 점이다.(196) 종전을 전향이라고 보는 견해에 깊은 통찰이 있다. 본토결전이 이루어진 건 오히려 오키나와.(196) 야나기 무네요시는 지역 문화의 힘을 지적하면서, 지역이 세계문화를 창조하는 곳이라고 말한다.(201-202) 동시에 패전 당시 6세부터 15세 사이의 연령에 있었던 사람들이 가졌던 윗세대에 대한 불신 역시도 지적한다.(206) 이는 미야타 세쓰코도 하는 이야기. 쓰루미는 매카시즘으로 고통을 받은 릴리아 헬먼과 노먼의 불행을 다루면서 전후 일본에서 보이는 전향의 경향이 1930년대 독일 공산당원보다 프랑스나 이탈리아 공산당의 모습을 보인다고도 말한다.(220)

전향이란 국가의 강제력 행사의 결과로 개인 혹은 집단에서 발생하는 사랑의 변화이다. 전쟁을 정당화하는 지식인의 전향 과정에서 투옥보다 유효했던 것은 일본인의 쇄국성이었다. 동시에 새로운 신분제 안에서 지도자적 지위와 자유를 누린 도쿄대학 ‘신인회’ 스타일은 너무 쉽게 굴복했다. 15년 전쟁 기간의 항의와 저항에도 쇄국상태의 전통이 이용되었다. 저항하는 사람들은 토지에 밀착하고, 이용한 수단은 비폭력적인 사보타주, 특정한 쟁점에 대한 실증적 접근, 정치 이데올로기 전반에 대한 포기 등이었다.(222-225) 중요한 것은 시대 상황에 유효하기를 바라는 욕망이 다이쇼 시대의 대표적인 자유주의 혹은 사회주의 논객 대부분을 15년 전쟁 기간에 군국주의 혹은 초국가주의 지도자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유효하지 않은 항의와 저항의 방법은 메이지 이전 쇄국시대의 문화적 전통을 살린 시도였고, 그래서 전시의 쇄국상태 내부에서 또 하나의 쇄국상태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226) 일본의 전통은 보편적 단정을 회피하는 특징이 있고 이런 소극적 특징이 일본사상의 강점이며, 정상적인 감각이 이데올로기보다 소중하다(227)고 끝맺는다. 저항 역시 일본사상의 특징에서 가능해 진다는 말이다.

종전마저 전향이라 말하는 쓰루미 슌스케의 주장은 1931~1945에 이르는 15년 전쟁의 전 기간 동안 일본적이라는 것이 가진 힘에 대해서 깊이 통찰하면서 말하고 있다. 전쟁이 그들의 결정이 아니듯, 패전 역시 그들의 결정이 아니었다. 국체가 유지되는 한 대중은 나름 안심했고, 그래서 후회의 시기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 모든 문제의 핵심에는 일본이 섬나라라는 특징 쇄국성을이 있다. 모든 것을 일본 중심으로 여기는 태도에서 발생한 문제들이다. 무엇보다 패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고가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일본 전체의 방향 전환에 따른 개별적이자 집단적인 방향전환이라는 이야기다. 반면 제시되는 저항의 방식은 너무나 소극적이다. 지역으로 돌아가서, 구체적이고 소박한 문제들 속에서 정상감각을 잃지 말 것. 반면 지식인을 파멸에 이르게 한 것은 시대에서 유효성이 있으려는 욕망 때문이었다.

학계와 지성계에서 전에 없는 일본 붐이 일고 있다. 60~70년대 일본어를 식민지 시대에 배운 엘리트들이 일본책 몰래 숨겨놓고 베껴서 교과서 출판하면서 가르치던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다. 80~90년대 좌파 사회주의 이론의 공급처로 선택되어, 3일만에 밤새워서 야매로 문법을 배워서 읽던 시절이 아니다. 대중 문화의 시대를 거쳐서 일본이 가진 저력, 일본 학문이 가진 힘이 본격적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실제 철학 등 학술서 번역에서 일본어 번역본을 참조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책이 매우 많다. 일본 학자들의 책도 번역되고, 일본이 가진 서양사상 소화능력과 근대를 헤쳐나가는 힘 역시도 다시금 주목하고 있다. 식민지 시대를 바라보는 눈도 과거보다 훨씬 넓어졌고, 제국사를 바라보는 관점도 예전과는 달라졌다. 일본의 탁월함과 위대함에 경도된 나머지 새로운 추종을 하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다. 이 모든 사람들이 항상 주목해야 하는 점을 나는 천황제로 대표되는 일본의 ‘국체사상’이라고 생각한다. 상징천황의 시대에도 대중 속에 또 지식인 속에 면면히 깔려 사라지고 있지 않은 이 사상의 역사적 배경과 전파 경로에 여전히 주목해야 한다. 그래야만 일본 사상과 일본 학문이 가진 저력과 진면모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2017. 6. 20.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 이 글의 저작권은 ⓒFELIVIEW.COM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FELIVIEW
FELIVIEW
felixwon.lee@gmail.com

Must Read

에른스트 H. 칸토로비치, 『왕의 두 신체』(7-1).

0
튜더 왕가의 가계도. 앞쪽에서는 아담과 이브로부터의 기원과 노아의 방주도 등장한다. 중간에 리처드 3세에서 단절이 있고, 그 아래로 헨리 8세가 이어진다. British Library, Kings MS 395, fols. 32v-33r. Ernst 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