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판 다나카, 『일본 동양학의 구조』

식민사관에 대한 한 설명 – 스테판 다나카, 『일본 동양학의 구조』. Stefan Tanaka, Japan’s Orient.

Japan's OrientJapan’s Orient의 표지 사진 사용된 이미지는 1872년 9월 28일 Harper’s Weekly, 756면에 실린 Joshep Swain의 작품. 그림 제목은 Jeddo and Belfast, or a Puzzle for Japan. 일본 대사가 성공회의 캔터베리 대주교에게 이렇게 말한다. “대주교님, 저들은 이교도들인 것 같습니다.” 대주교는 대답했다. “그 반대입니다. 대사님. 저들은 우리의 가장 열성적인 신도들입니다.” (16) 일본이 만난 서양과 서양이 만난 일본.

 식민사관의 영향력에 대한 비판, 식민사관의 극복, 식민사관을 명목으로 한 상대에 대한 비난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반대에서도 식민사관이 등장한다. 일단 식민사관이란 낙인을 찍고, 논쟁이 아닌 비난을 시작하기도 한다. 이럴때, 식민사관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로 흔히 이런 것들이 등장한다. 조선의 민족성과 후진성에 대한 비판, 조선사 정체론, 조선상고사의 배제, 고대사에서 한반도 고대왕국이 일본에 끼친 영향에 대한 부인, 임나일본부 등 한반도 고대국가에 대한 일본 지배 혹은 영향설, 조선왕조의 한계와 몰락 등.

스테판 다나카,『일본 동양학의 구조』, 박영재, 함동주 역, 문학과 지성사, 2005. Stefan Tanaka, Japan’s Orient: Rendering Pasts into History, 1995.

해방 이후 한국사학자 중에 식민사관을 극복하려고 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이기백은 식민사관 극복의 방향을 실증주의와 민족주의 두 방향으로 나누어서 말하고 있는데. 실증주의적 극복이란 고대사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와 문헌상의 증거를 통해 한반도 고대국가들이 일본으로 문화를 전수하는 측면과 구석기부터 이어지는 오래된 문명임을 증명하고, 고려와 조선을 거쳐 그 안에서 이룬 상당한 발전을 입증하는 일이고, 민족주의적 극복이란, 한민족이 원래 위대한 민족이라는 점을 고대사에서는 논란이 있는 문헌을 증거로 들어서라도 주장하고, 근대사에서는 제국주의 침탈을 당하지 않았으면, 일본 처럼 혹은 그 이상 자생적 발전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방향이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는 실증주의의 소극성을 비판하면서, 이들 조차 식민사관, 식민사학의 한계 속에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일단 상대방의 입장을 식민사관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도덕적 비난을 퍼부을 근거가 생긴다.이런 혼란 속에서 다시금 질문이 생긴다. 그런데 도대체 식민사관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식민사관은 극복되었는가? 식민사관은 도대체 어떻게 극복하는 것인가? 나중의 두 질문에 대한 대답은 첫번째 질문에 대해서 먼저 대답에서 출발하게 된다. 식민사관이란 무엇인가? 식민사관은 정말 그런 것들인가.

스테판 다나카의 『일본 동양학의 구조』는 우리가 입버릇 처럼 말하는 식민사관의 극복을 위한 식민사관이 무엇인가 생각해 볼 수 있는 하나의 출발점을 제공한다. 말하자면, 조선을 식민지화하고 이를 정당화하는 역사학 자체가 일본의 목적은 아니었다. 물론 이런 활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보다 큰 그림 속에서 움직였다. 그 큰 그림이란, 근대 독립 국민국가인 일본의 정체성과 권위 그리고 권리를 확립할 수 있는 주체의 수립이고, 이를 위해 ‘일본사’와 ‘동양사(東洋史)’를 수립했다. 스테판 다나카는 홉스봄, 베네딕트 앤더슨, 그리고 미셸 푸코를 따라서 근대국가의 역사학이란 근대 국민국가를 정당화하고 근대 국민국가의 국민을 창출하고, 국민에게 정당성과 목표를 부과하는 과정이라고 본다.

메이지 유신 후 근대국가로 변모하고 있는 일본에게는 일본 자신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일본사와 동양사가 필요했다. 근대국가 일본의 발전을 설명하기 위한 일본사가 필요하다는 점은 쉽사리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동양사’가 필요한 것일까. 거기에는 동양 즉, 오리엔트의 문제가 있었다. 동양사가 없다면, 일본사는 세계사의 일부분으로 편입되게 된다. 세계사는 곧 서양사이다. 서양사의 출발점은 오리엔트, 즉 동방문명에서 시작한다.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등의 문명에서 출발한다. 오리엔트란, 근대화에 성공하여 발달한 서양의 고대이고, 그 이후 이들 지역은 정체되었고, 문명은 서구로 옮겨져서 서구에서 발전해서 오늘의 근대화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고대에 문명이 발달했으나 지금은 정체되거나 낙후된 지역(인도, 중동 등)을 서구가 식민지로 지배하여, 약탈적 근대화를 통해서라도 근대 문명을 전파할 정당성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오리엔트에서 출발하여 서구 근대화의 문명이 일본으로 전해져서 일본이 다시금 근대 문명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것이 메이지 초기의 계몽주의 역사관이다. 이때 일본은 오리엔트 즉, 동방에 속하며, 서구의 영향으로 나중에 근대화되게 된 것이다. 이런 발전사관에 일본사를 위치시키면, 일본은 계속해서 서구의 영향을 받고, 서구에서 배워야 하는 후발주자로서 서구보다 뒤늦은, 서구보다 저발전된 상황을 극복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이런 사관을 계속 수용할 수 없었다.

1880년대 이후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어 마침내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게 된 일본은 자신의 역사적 발전과 근대화, 아시아에서의 선도적 위치, 조선, 만주 및 에 지나(중국)에 대한 우선권과 지도력, 그리고 청일전쟁에서의 삼국간섭과 같은 서구 개입을 거부할 수 있는 새로운 역사적 관점의 필요를 느끼게 된다. 이런 배경에서 ‘동양사(東洋史)’가 등장하게 된다. 서구에서 메소포타미아 등 중근동, 인도와 인접 영역 정도를 포함하던 오리엔트의 개념을 확장하여, 중국과 일본을 포함하는 서양이 아닌 동양을 규정하고, 그 곳에서 가장 발달된 고대 문명인 중국의 문명을 상정한 후, 중국 문명은 당대 후기에 쇠퇴하기 시작하고, 그 문명의 방향은 일본으로 이어져 일본에서 근대 문명으로 번영을 이루게 되었으므로, 이제 일본은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를 지도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주장을 펴게 된다. 여러 학파간의 갈등과 시대를 변화하며 나아가는 논쟁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바라보는 ‘동양사’라는 관점이 설명하려는 목표는 분명했다.

동양사의 핵심은 일본특수론이다. 북방세력과 남방세력의 충돌로 동양사를 이해하려는 남북이원론에서 보면, 일본은 외부의 침략을 받지 않았지만, 일본에는 고유하게 남방 문화와 북방 군사 성향이 공존하고 있었으며, 이들 성향이 조화를 이루어 일본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 핵심은 일본은 고유하게, 계속해서 진보해왔다는 주장이다. 일본은 계속해서 진보해 왔다. 일본 민족은 계속해서 진보하고 있다. 일본은 서구에 뒤지지 않고, 서구와 비교되지 않는 독자적인 발전경로를 걸어가고 있다는 주장들로 이어진다. (사실 이런 담론의 현대적 흔적을 일본 드라마나 만화 등에서 아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일본 드라마나 만화에는 성장기가 매우 흔하며, 젊든 나이가 들었든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자기의 목표를 이루어야 한다. 사람은 끝없이, 대를 이어서 진보한다는 그런 담론이 아주 흔하게 발견된다.)

이런 ‘동양사’를 추구하는 방법론으로 세 가지 이상이 시도되었다. 그중 하나는 실증주의다. 예를 들어 중국의 고전인 『서경』에 대한 고등비평을 통해, 요·순·우는 실존인물이 아니고, 공자가 제시한 중국의 이상적인 통치자의 모델로서, 구체적으로는 전국시대에 만들어졌다고 말하고, 또 이 실증주의를 한국 고대사에 들이대면서, 5세기 이전에 국가가 없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실증주의적 방법을 통해 『일본서기』와 『고사기』의 내용을 진수의 『삼국지』, 「위지」, 「왜인전」과 『후한서』를 통해 입증하려고 시도한다. 마치 우리가 늘 한국 고대사에 대해 이야기할 때, 늘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출발하는 것처럼. 또 하나는 보다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일본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일본은 고유하게 왕조교체 없이, 천황가가 종교와 정치의 일체를 통해서 일본을 통치해 왔다는 주장이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신화는 일본의 역사가 된다. 하늘(天)의 명령(命)을 받아 통치하는 지나의 천자와 달리, 일본 천황은 신의 현현 그 자체이므로, 자유롭게 역사를 해석하고, 현실에 개입하여, 일본의 진보를 이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다소 비판적인 마르크스주의의 사회경제사적 방법이다.

20세기 초의 일본은 중국이라는 명칭을 거부하고, 지나(支那)라고 부르기를 고집하는데, 이런 명칭은 중국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동양의 중심성을 박탈하고, 동양의 한 지역으로서 존재할 뿐임을 부각시키는 명칭이다. 당연히 중국인들은 이를 싫어한다. 일본은 중국 뿐 아니라 조선, 만주도 국민국가임을 거부하고, 단순히 지리적인 지역과 문화에 불과하다고 봄으로써 국민국가의 자격을 박탈하여, 이들 지역에 대한 일본의 지도권을 강화한다. 물론 중국에 대한 이런 이해는 중국인의 반발을 사게 되지만.

모두에서 지적한 소위 말하는 식민사관의 특징들이란 실제는 목표나 방법론이 아니고 결과일 뿐이다. 일본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아시아에서 유일한 국민국가이자, 근대국가로서의 일본의 위치를 정당화하고, 일본국민들에게 목표를 제시하며, 일본의 통일성과 정체성을 부여하고, 아시아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일본사와 동양사를 만들어서 확산시켰고, 일본이 주체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일본을 제외한 한국(조선), 만주, 지나(중국)은 비주체화하고 타자화되었다. 이들은 국민국가가 아니었고, 그렇게 될 자격도 없었다. 그런 일본사와 동양사를 추구하는 방법론에는 실증주의도, 일본 민족주의도 있었고, 사회경제사적인 비판도 있었다. 즉, 방법은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전후에 일본은 전전의 역사 문제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실증주의를 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제시하는 역사적 지식이 과학적이고 객관적이라는 권위를 주장한다. (일본사와 동양사가 객관적 지식이라는 객관성의 집착은 레오폴드 폰 랑케의 사학을 도입한 것이다. 실제 랑케의 제자 리스가 젊은 나이에 교수로 와서 도쿄제국대학에서 수많은 일본 사학자들을 키워낸다.) 저자의 말대로 이것은 일본의 독백이었다.

다시 식민사관 극복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고대에 한국이 일본에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 식민사관의 극복이 될까? 보다 상고로 올라가서 전설적이거나 신화적인 내용이지만, 한반도 고대가 아시아를 호령했다는 가슴벅찬 판타지를 그려내면 식민사관이 극복이 될까? 그럴리 없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과거에 일본이 한국, 중국, 만주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타자화할 때 쓰던 방법들이다. 이런 식으로 쓰여진 역사는 그 결과 한국의 독백이 된다. 한국, 중국, 일본은 서로 각자 역사적으로 독백을 내뱉는 중이다. 먼저 독백을 시작한 일본은 보다 나직하게 사람들을 조용하게 설득하면서 세련된 독백을 하는 반면, 나중에 이 독백에 참여한 한국과 중국은 목소리가 크고 시끄럽다. 그래야만, 저 독백을 안들리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오랫동안 한국의 거의 모든 역사학자들이 달라붙었던, 식민사관 극복에 대해서, 한 두 마디로 말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식민사관이 근대 국민국가 일본에 대한 역사적 해명 과정에서 등장한 조선에 대한 타자화 및 탈주체화의 결과였음을 인지할 수 있다면, 식민사관의 극복은 근대 국민국가로서의 한국의 수립을 명확하게 설명해 내는 길뿐이다. 근대적인 국립국가 수립은 지난 백여년간 한국과 한국인이 여러가지 방법으로 가장 오래 바라던 길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근현대사를 국민국가 형성이라는 관점에서 냉정하게 기술하는 길이다. 그런 관점에서 식민지 시기를 다시 기술해야 한다. 동시에 한 나라만의 역사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다른 나라를 타자화시키는 일본의 ‘동양사’ 수립과정을 우리식으로 반복하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아시아 국가들과 대화하면서, 아시아 각국의 국민국가 성립과정을 아시아사의 이름으로 기술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관점을 용인하면서.

동양사나 식민사관이란 결국 근대 국민국가를 성취하고, 산업발전, 군사력, 정치적 성취, 식민지 획득에서 모두 성공한 일본의 자기 정당화과정이고, 정치경제군사적으로 힘을 가졌으니, 타자(다른 나라, 지역, 문화)를 지배하고 지도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난 20여년간 어느 정도의 경제발전의 열매를 누리게 된 한국인들이 자신들보다 경제적으로 저발전한 나라들에 가서, 돈이 더 많으니, 문화적으로 우월하다는 식의 접근을 하면서, 천박한 돈자랑을 하는 것 자체가 바로 동양사, 식민사관의 영향력 아래 놓여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일이다. 아직도 많은 선교가 일종의 복음전파를 포함한 문명전파 활동으로 수렴되는 것처럼.

사족. 근세라는 기묘한 명칭도 일본의 동양사학자들의 작품이었다. 영어로는 ‘early modern’ 혹은 ‘pre modern’으로 번역되는 이 기묘한 시대구분은 동양은 서구와 다른 발전 경로를 겪으며, 국민국가나 자생적 근대문명이 지나에서는 당-송 시대에 일본에서는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 생겨났다고 말하면서 이 시대를 가리킨다. 또 이 명칭은 중국 문명이 이 시점을 기준으로 보수적인 문명으로 전환되어 쇠퇴와 퇴락을 경험하고 있고, 일본은 동양 문명의 횃불을 이어 계속해서 진보해 나갔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우리 역사 구분에서는 흔히 조선을 근세(近世)로 구분한다. 기묘한 울림이 있다.

* 필요한 경우 번역서의 쪽수를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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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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