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이 사토시, 『영속패전론』.

시라이 사토시白井聡, 『영속패전론: 전후 일본의 핵심永続敗戦論』, 정선태 외 역, 이숲, 2017(2013).

시라이 사토시라는 이름을 알게 된 건 우치다 다쓰루의 책에서 였다. 흥미를 갖고, 일본국제교류기금 도서관에서 책을 들추어 보다가, 냉큼 일본에 책을 주문했는데. 한국어판이 나온다는 말에 꼼꼼한 읽기는 조금 미루어두고 있었다. 책을 받아들고는 깜짝 놀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1977년생의 신진 정치학자이자 사상연구자. 내 손에 들어온 책은 출간 1년 만에 12쇄를 찍었는데. 뭐 많이 팔린게 전부는 아니지만,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서른 여섯살에 책 한권으로 사상계를 평정했다면 과찬일까. 막상 한국어판으로 읽어보니 그 격렬함이 느껴진다. 마치 대자보를 읽는 기분이 든다. 심지어 이 책은 일본에서 역사를 모르는 젊은 세대를 위해 만화로도 나와있다.

「한국 독자들에게」라는 서문은 일본이라는 맥락을 잘 모르는 한국인 독자들에게 이해의 실마리를 하나 제공한다. 나를 포함해서 한국인들은 일본이라는 맥락을 잘 모른다. 시라이 사토시는 ‘혼네’와 ‘다테마에’를 이용해서 말한다. 가끔 실언으로 나오던 일본 제국주의 시절의 잘못을 부인하는 보수 정치인들의 발언은 ‘혼네’인 반면, 대일본제국이 벌인 침략행위를 ‘악’으로 인식하는 역사관을 상식으로 여기는 태도를 ‘다테마에’라고 말한다. 최근 일본에서 다테마에에 해당하는 상식이 무너지고 있다고 말한다.(6) 그는 이런 현상의 원인으로 유산상속 개념을 들고 나온다. 전후 일본의 평화와 번영을 이룩한 멋진 시대에는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에 대해 패전국의 입장에서서 사죄해야 한다는 논리를 부채의 상속으로 이해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잃어버린 20년과 빈곤 문재와 국가 채무가 나날이 늘어가는 일본에서 ‘그런 유산은 필요없으니 상속을 포기하겠다’는 목소리가 생겨나고 있다. 그러면서 전후의 다테마에 였던 ‘대일본제국의 부정’이 긍정의 욕망으로 대체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패배한 사실을 부정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패전의 극복을 미국과 전쟁을 치러서 다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우산 아래서 일본 내셔널리즘을 주장하는 대미 종속 체제라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대미관계로 인해 좌절된 내셔널리즘의 스트레스를 아시아에서 패전을 부정하면서 이 스트레스를 아시아를 향해 분출하는 행동이라고 말한다. 일본은 전후 제2차 세게대전의 ‘패전’이라는 정치적 귀결을 되도록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일본 지배체제의 핵심적 본질이라고 말한다.(7-9) 중대한 전쟁에서의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기 땜누에 미국에게는 무한 종속의 형태로 대가를 치르면서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패전을 부인하는 태도로서, 패전을 부인하면 패배는 계속된다, 이것을 영속패전이라고 말한다.(9) 특히 아베 신조 정권 하에서 그 전의 보수 정치인들이 말해 온 전후 탈각이란 ‘전후 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것인 동시에 패전의 부인을 달성하는 것이라고 것이라고 일갈한다.(10-11) 이 전후의 종결 즉 마침표를 찍은 것이 3.11(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폭발)이고, 일본 사회는 여기서 전후의 다테마에를 포기하는 즉 전후 민주주의 규칙과 가치관을 존중하는 태도를 버리고 대일본제국의 긍정 곧 패전의 부인이라는 욕망을 지지하고 있다.(12) 이것을 시라이 사토시는 전후는 끝나가고 있으되, 한편으로는 전후의 다테마에 뒤에 숨어있던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내면서 영속패전으로서의 전후는 무한 연장을 도모하고 있다고 비판한다.(13)

여기까지 말하면 일부의 한국인들은 그런 건 너무 당연하지 않느냐고 생각할런지 모르지만, 실은 아니다. 전전의 일본 정치구조도 전후의 일본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인들의 일본 인식은 대부분 악마적인 일본인상, 선의의 일본인상 등 스테레오 타입화된 일본인 상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식민지배 40년의 역사를 거쳤고,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 였고, 지금도 그런데도 말이다. 이 책이 출간된지 3주가 되어가는 데, 화제가 되지 않는 이유도 실은 이 책이 이해하기 어려워서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차분하게 따라가다 보면 그 논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일본인의 설명이 아니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소위 ‘재특회’에 대한 부분이다. 재일 한인에 대한 혐오 발언의 논리를 시라이 사토시는 이렇게 말한다.

“물론 그들은 극단적이고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추악한 행동을 하면서 스스로 그것을 ‘국민운동’이라고 부르는 데는 안타깝게도 근거가 없지 않습니다. 왜냐면 대일본제국 시절 조선인은 2등 시민으로 다뤄졌으므로 공공연히 차별하기 좋은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패전 후 일본인은 재일 한인을 기본적 인권이 있는 존재로 존중하게 됐습니다. 다시 말해서 전후 재일 한인이 일본인과 대등한 존재가 된 상황은 대일본제국이 무너지면서 발생한 결과이자 패전의 ‘살아 있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봤을 때 극우 집단이 벌이는 짓은 증오를 표현함으로써 재일 한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패전의 부인’을 실천하는 일이나 다름없습니다. 따라서 극우 집단은 소수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이 사회의 주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패전의 부인’이야말로 일본인의 역사 인식에 깊게 뿌리박힌, 전후 일본을 이루는 근간이기 때문입니다.”(13)

이 책 전체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부분이었다. 왜 재특회라는 이름을 가졌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재특회’란 재일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의 모임(在日特権を許さない市民の会)의 모임인데. 이들은 재일 한인이 특권이 있다고 말하지만, 일본이 징병제라 병역이 면제되는 것도 아니고 세금도 다 내는데 도대체 무슨 특권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명목상 소수자 보호정책을 특권이라고 했는데. 시라이 사토시의 말을 듣고 그들이 일본에서 기본권을 인정받고 사는 것 자체를 특권이라고 본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재일 한인은 존재 자체가 특권이라니. 이해하는 동시에 정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면서 얼마전까지 조선학교에 대한 보조금을 요구하는 재판 소식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한국에 살고 있는 외국 출신의 사람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태도에도 나타나고 있겠지라고 생각하니 씁쓸하기 그지 없었지만.

이쯤 읽으시고, 흥미롭다 생각하시면, 이 글은 그만 접고, 책을 사서 읽으시길 권한다. 이런 책 소개도 처음이네.

“우리는 모욕 속에 살고 있다.” 2013년 요요기 공원에서 열린 집회에서 오에 겐자부로가 나카노 시게하루를 인용해서 3.11 동일본 대지진 이래 일본이 놓인 상황이다. 실제 모욕 속에 살고 있으며, 모욕의 삶을 강요당하고 있다고 말한다.(21) 데이터가 공개 되지 않고, 상정외(想定外)라는 거짓말로 책임을 외면하고, 2011년 수습선언 자체가 속임수였는데, 이 선언으로 원전 노동자들은 무료 건강진단을 받을 권리도 빼앗기고, 그럼에도 이런 미증유의 사고에도, 피폭을 은폐하고 산재를 감추며, 급여를 착복하는 다단계 하청구조는 유지되고. 정부는 보호와 보상도 사고수습의 의지고 없다고 비판하면서, 마루야마 마사오가 말한 무책임의 체계가 추제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다중 하청구조의 현장 작업이라는 것이다.(22-26) 도교전력도 유지되고 있고, 부흥예산 마저 유용되고 있다. 게다가 일본 정부는 사고 발생 당시 회의록이 없다고 발뺌하고 있는데, 이를 전후도 전전이나 전중을 빼닮은 무책임의 체계라고 비판한다.(27-28) 이 지점에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박근혜의 7시간을 떠올릴 것이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두 나라의 모습이 어쩌면 이렇게 똑같은지. 여기에 지식인의 어용적인 태도를 지적하면서, “따르게 하되, 알게 해서는 안 된다”라는 태도를 지적한다.(29) 원자력 대한 모든 비판을 봉쇄하는 공학 계열 학부와 원자력 관계 기업과 조직의 이해관계로 얽힌 동맹(30)은 한국의 원자력 마피아고, 게다가 기레기를 연상시키는 ‘마스고미(매스 미디어와 쓰레기의 합성어)’라는 비판까지.(31) 그러면서 ‘일본의 정치는 이류, 경제를 일류’라는 정설이 실은 케케묵은 신화가 아니냐고 지적한다.(32) 앗, 한국 정치는 삼류라는 말도 일본을 베낀 거였구나. 그러면서 이런 자들 밑에서 우리는 일하면서 일용할 양식을 얻지 않으면 안되는 현실을 중대한 모욕이라고 지적한다.(32) 무책임 구조에 대한 설명은 ‘체제, 그 자체의 퇴폐’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 파시즘 분석으로 돌아간다. 가사이 기요시를 인용해서, 망상에 사로잡힌 전쟁 책임자의 자기 과신과 공상적 판단, 근거 없는 의망, 무책임한 우유부단과 혼미, 임기응변식 대처 방침의 남발 등으로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에 재현됨을 지적한다.(34) 전 후쿠시마 현지사 사토 에이사쿠의 말을 들어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서로 얼굴만 보는 일본 사회, 레밍 같은 사회를 비판한다.(35) 그러나 후쿠시마에 원전이 설치된 것도 지방차별임도 지적한다. 정유산업단지 유치가 좌절되면서, 원전을 유치할 수밖에 없었던.(36)

이것을 ‘전후’의 종말이라고 말하는데, ‘전후’라는 평화와 번영의 시대가 끝나고 ‘전쟁과 쇠퇴’가 시작되었다.(37) 이를 동일본 대지진과 우너전하고 이후, 권력과 사회가 급속히 ‘혼네 모드’로 들어섰다고 말한다.(38) 예를 들면 원자력규제위원회 설치법에 안전보장에 이바지 문구를 넣은 것은 전후 최대의 금기를 돌파하려는 시도라는 지적이다.(38-39) 오키나와 핵 밀약을 부인해 오다 2010년에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이런 식으로 ‘혼네 모드’로 들어선 상황은 ‘부인의 구조’가 급속히 무너지는 것이다.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에.(41) 전후 일본은 주일 미군의 압도적 존재감에 기대는 동양의 고아로 아시아를 전혀 개의치 않는 응석받이 의식을 깊이 새길수록 미국의 요구는 들어줄 수밖에 없는 대미 종속구조로서, 타국의 힘으로 내셔널리즘의 바탕을 이루는 기괴한 구조이며, 2008년 이후 세계 경제 위기는 일미간 종속구조를 재편해서 호혜적 관계가 수탈 구조로 바뀐다고 말한다.(43) 물론 여기서 그 근거로 제시한 TPP를 트럼프가 접어버렸지만. 캐럴 글럭은 전후에 매달리는 일본은 현재에 만족한다는 뜻이라고 93년에 말했는데, 시라이 사토시는 3.11 이후 유사전제(관료 전횡) 같은 부패한 정치권력 구조가 확연히 모습을 드러냈다고 지적한다.(45) 그는 ‘전후’를 인식한 뒤에 끝내자고 말한다. 전후 라는 개념의 밑바닥의 밑바닥까지 들여다보고 끝내야 하는 역사적 순간이라고 지적한다.(46) 전후라는 역사의 감옥을 바꿔야한다는 분위기가 고조되는 것은 현 체제가 장악해온 역사 지배력이 약해지고 있기 때문이며, 현실 지배력까지 상실될 것이다.(49-50)

일본의 전후는 패전의 은폐에서 시작된다. 패전을 종전으로 바꿔부른 것.(52) 하토야마 민주당 정권이 미군기지 현외 이전 분제로 인해 곧 무너지고, 간 나오토와 노다 요시히코의 민주당 정권의 연이은 퇴진을 일본 전후 민주주의는 실질적인 정권 교체가 아닌 범위에서만 허용된다고 비판한다.(53) 그나마 한국과 대만 같은 반공 독재 정권의 장기집권이 아닌 민주주의의 외피를 두를 수 있었던 것은 냉전의 최전선이 아니어서다. 오키나와가 모든 부담을 짊어지고.(54) 브루스 커밍스를 인용한다. 한국과 대만이 각각 60만 명 병력의 군사조직을 떠않고, 외부 방위대 기능을 맡고 강력한 치안유지와 탄압 기능을 발휘하는 것은 미국의 비호 아래 폭력 장치가 없는 불완전한 일본을 동북아시아 지역 틀에서 완전한 국가로 만드는 기능이라고 말했던. 대만과 한국의 억압성은 일본의 민주주의 흉내를 위한 조건이었다.(55-56)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패전국이라는 단순한 사실의 은폐에서 시작한다.(56) 에토 준의 논의를 일부 인용해 전후 문학이 구가한 ‘자유’가 GHQ(연합군 총사령부)의 거대한 검열로 지탱된 것임을 당시 지식인은 자각하지 못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59) 그리고 이제 이런 영속패전의 전후 구조가 물질적인 생활을 파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63)

개인적인 이야기인데, 1945년을 지적하면서 일본에 대해 논할 때, 나는 굳이 전후라는 표현을 피하면서 패전 이후라고 늘 기록해 왔는데. 일본의 패전을 잊고 있는 것은 일본 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문제의 모순은 한국과 대만에서 중국은 우리와 사정이 다를 수 있다. 해방 또는 광복이라는 결과가 승전이 아니었다는 데 있다. 원근 각처에서 목숨을 걸로 투쟁한 독립운동가들의 공로를 폄훼하지 않고서도 이 점을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이 사실이 『영속패전론』을 한국인의 입장에서 거꾸로 읽는데 실은 큰 장애물이 된다. 사실 이 부분엔 크게 덧붙일 말이 없다. 패전 이후의 일본 역사에 대한 이해가 피상적인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서 오해의 늪에 깊이 빠지지 않을까 적잖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일본 이라는 맥락 속에서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라이 사토시도 그 점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라이 사토시는 영토 문제도 회피하지 않는데. 센카쿠 열도, 다케시마=독도, 그리고 북방영토를 언급하면서, 고문서 증거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는 ‘낡은 종이쪼가리를 향한 열광’이 의미가 없다고 지적한다.(68) 전적으로 동의한다. 국가의 영토를 결정하는 최종심판은 폭력이므로,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 문제, 포츠담 선언과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모든 문제가 있고, 패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본의 지배권력과 중국, 한국, 소련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참여하지 않았거나 할 수 없어던 사실에서 문제가 발생했다고 말한다.(68) 일단 중국과의 센카쿠 열도 문제는 중일국교정상화 과정에서 보류하게 된 것을 일본이 다시 꺼내든 데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74) 1895년 1월 청일전쟁 중에 센카쿠 열도가 일본 영토에 편입되었다.(83) 이 문제에 중립을 지키는 미국은 센카쿠 열도를 구성하는 두 개의 섬에 미군 사격장을 설치하고 배타적으로 관리하고 있다.(84) 일본은 분쟁시 미국이 개입할 거라는 평화망상에 빠져있다.(86) 센카쿠 열도에서 미국과 중국에 대한 서로 다른 태도가 패배의 부인을 지속하기 위해 미국의 졸개가 되어야 하는 노예와 같은 복종상태가 드러나는 것이라는 지적이다.(88) 시라이 사토시의 입장은 포스담 선언의 원칙에 따라 청일전쟁 이후 획득한 영토는 포기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한다. 그게 싫으면 전쟁을 하든지.(76) 소련과의 분쟁이 있는 북방영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덜레스의 협박’을 지적한다. 하토야마 이치로 정권은 1956년 영토면에서 희생을 치르더라도 소련과 관계 개선을 지향했지만, 미국 국무장관 덜레스는 일본이 소련에 두 섬을 양보하면, 오키나와를 영구히 반환하지 않겠다고 협박했다는 것이다.(93) 결국 지금도 북방도서 반환문제로 일소 아니 일러평화조약은 체결되지 않고 있다. 이 문제를 가져온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개념이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분쟁꺼리를 남겨두려는 미국의 협박에 굴복한 미국을 따르는 종속 외교의 영속화를 위한 개념이라는 사실이라 지적한다.(96) 이것 역시 패전의 부인이다.(98)

한국인의 관심이 집중되는 다케시마(독도)문제에 대한 시라이 사토시의 이해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다케시마가 일본 영토로 편입된 시기가 1905년 1월의 각의이고, 러일전쟁이 진행 중이었으며, 1905년 11월에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었기 때문에 시기상 미묘한 문제가 있다고 말하면서, 박모의 책을 근거로 현재의 영토관은 근대 국민 국가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지적한다.(102) 그러면서 센카쿠가 아닌 다케시마(독도)만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려는 일본의 이중적 태도를 비판하며, 이런 이중 잣대가 사라지는 순간 ‘일본 고유 영토’ 개념이 붕괴하고, 포츠담 선언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받아들이고 패전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103-104) 다만 「한국 독자들에게」라는 글에서 전후 일본 영토는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의 취지 즉 일청전쟁 이후 무력으로 차지한 영토는 박탈한다는 원칙에 따라 본다면 한국 정부 입장이 맞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역시 일한 양쪽의 내셔널리스트의 분투에는 관심이 없다고 지적한다.(15)

나는 여기서 시라이 사토시의 다케시마=독도 문제에 대한 인식 부족을 탓할 생각이 없다. 나도 실은 독도 문제에 대한 책, 특히 정병준의 『독도 1947: 전후 독도 문제와 한, 미, 일 관계』라는 책을 지루하게 읽으면서, 그가 제시해 둔 외교문서와 발굴자료를 보고 이 문제의 복잡함을 비로소 이해했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는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 임하는 미국의 태도와 전쟁 중인 한국 정부의 역량 부족, 그리고 일본의 치밀함에서 생긴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것으로 영토 문제를 덮을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오히려 시라이 사토시의 이 문제에 대한 입장에서 그가 인용한 박모에 대한 일본 진보 지식인의 태도의 근거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으로써 나의 시라이 사토시에 대한 나의 신뢰는 추락했지만. 일본의 진보와 자유주의는 우익 곧 내셔널리즘을 공격하는 것이다. 이것이 일본에서는 전쟁을 가져온 내셔널리즘과 군국주의는 물론, 미국의 비호아래 유지되는 내셔널리즘과 일맥상통하며, 현재의 아베 신조 정권에 대한 비판으로도 이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가지 논거의 허술함과 비약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에 입각해서 내셔널리즘을 비판하는 박모가 일본의 리버럴 진보에게 인정받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친일이 아니라 논리의 구조이다. 반면, 한국에서 내셔널리즘은 일본 제국주의와의 투쟁과정에서 좌파 민족주의와 우파 민족주의가 모두 등장했고, 독재정권과의 투쟁과정에서도 민족주의(내셔널리즘)과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은 두 날개였다.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내셔널리즘은 과잉을 경계하고 냉철한 비판을 통해 관리해야할 대상일 수는 있으나 그 자체로 투쟁의 대상은 되지 않는다. 내셔널리즘과 민주주의라는 이항대립을 설정하고 투쟁해 온 일본 지식인의 입장에서 내셔널리즘과 투쟁하는 한국인은 자신에게 동지로 여겨질 수 있지만, 그는 한국에서 진보를 견인하는 투쟁의 한 축이었던 내셔널리즘과 적대함으로써, 이와 연결된 진보 진영 전체와 적대하기에 이른다. 물론 우파도 이를 돌보지 않는다. 이것은 일본과 한국의 맥락 차이에서 발생하는 일이고, 그 씨앗을 뿌린 것은 물론 일본이다. 이런 점에서 그가 「한국 독자들에게」라는 글의 끝에서 말한 “자유로운 인간들끼리의 국경을 넘은 연대”라는 발상에는 아직 역사적 이해의 지평을 넓혀야만 할 부분이 많다고 지적할 수밖에 없다.(16) 물론 한국에서 내셔널리즘의 과잉 현상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늘 경계하고 있지만.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이 북한 문제였다. 알다시피 북일국교정상화는 납치 문제에 걸려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물론 납치는 용납할 수 없는 문제다 그런데 왜 일본은 납치는 핵이나 ICBM보다 더 중시하는 것일까? 왜 국제적 기준과 다른 우선순위를 설정한 것인가?(106-107) 2002년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 후 나온 북일 평양 선언 이후 북한이 사죄하고 5명을 귀국시켰지만, 요코타 메구미의 유골 DNA 불일치 문제 등으로 상황은 계속 꼬여만 가고 있고, 북한은 해결되었다는 견해를 바꾸지 않고 있다.(108-110) 당시 고이즈미 정부에서 납치 문제를 강력히 주장했던 현 총리 아베 신조는 이 논의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5인 생존, 8인 사망이라는 북한의 통보 후 일본의 여론이 들끓고 국교정상화는 멀어져 가게 된다.(116) 시라이 사토시는 일본이 패전을 부인하기 때문에, 식민지배를 사죄하고, 청구권 대신 경제원조를 하겠다는 평양선언도 바꾸지 않고, 납치 문제도 최우선하는 모순적 태도에 놓인다고 말한다.(118) 시라이 사토시에 따르면 고이즈미 정권의 북일국교정상화 시도는 일본이 전후 최초로 시도한 자주 외교로 후나바시 요이치는 미국과 상의 없는 방북이지만, 불거진 납치 문제는 ‘우리도 피해자’라는 의식이 배어나와 국민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 효과를 주었다고 말한다.(122-123) 고이즈미 외교가 지향한 포스트 전후는 일본인에게 전후란 스스로 피해자의 처지가 될 기회를 얻고서야 비로소 빠져나갈 수 있는 것으로, 일본이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변신하면서 패전을 부인하게 해 준 계기라고 말한다.(123) 따라서 아베 신조의 납치 문제 해결의지란 납치 문제의 정치적 이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126) 전후를 사실상 끝내는 시점에서 전후의 본질이 계속되기를 강렬히 원하고 실현하려는 인물과 세력이 권력을 유지하고 있어서 전후는 영속하고 있다.(127)

재특회 문제도 그렇고, 납치 문제도 그렇고 일본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는 역시 일본인의 눈으로 보아야 이해할 수 있는 모양이다. 나는 시라이 사토시에게 크게 공감했다. 일본이 전쟁 책임을 회피하는 즉 패전을 부인하는 논리구조의 핵심에는 가해자인 자신들의 피해자화가 놓여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피해자화의 출발점은 원자폭탄 피해자론이었고. 일본의 이런 태도가 반면교사가 되지 못하면 한국은 더 깊은 함정에 빠져 허우적댈 것이다. 식민지배의 피해자라는 사실이 너무나 명료하기 때문에.

영속패전 구조를 구성하는 핵심은 일미관계이고, 문제는 친미-반미의 대립이 아니다. 문제는 도덕적 언어로 논의가 이루어진 점이다. 미국의 행위가 선의인가 아닌가의 논의로, 그러나 국가란 애초부터 도덕적일 수 없다.(132-133) 예를 들면 천황의 소추나 퇴위 없는 면죄는 미국의 사정에 따른 결정이다.(135) 따라서 신헌법 즉 평화헌법에 관한 미국의 정책에서 전후 일본이 도의의 근본을 발견하든(좌파), 혹은 그 반대로 퇴폐의 근본을 발견하든(우파) 이런 시각은 모두 기만적이다.(137) 문제는 영속패전의 구조를 재생산해 온 일본 사회에 있다.(138) 센카쿠 열도 문제는 중일간 갈등의 불씨를 남겨두는 역외 밸런싱 전략이다.(144) 문제는 일미동맹 강화를 주문처럼 읊어대며 대미 종속의 영속화를 기꺼이 추진하는 세력이 이 사회를 지배한다는 점이다.(144) 그 결과는 동등한 동반자라는 환상이 아닌 사실상 속국이기 때문에, 아시아 다른 나라와의 관계라면 ‘우리나라에 대한 주권 침해’라는 관념으로 과도하게 흥분하는 이유가, 무의식 영역에 누적된 불만을 아시아에 쏟아내기, 이른바 ‘주권의 욕구불만’ 해소이다.(147) 일본에서도 미국을 피할 수 없다면 먼저 치고나가 미국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전략적 친미’ 논리가 있는데, 이는 대미 종속이 깊어질수록 그만큼 쉽게 미국으로 부터 자립할 수 있다는 허구라고 한다.(149-150) 일미관계를 벗어난 세계는 상상력 밖에 존재하는 듯하다.(151) 전후 일본의 친미보수세력이 가진 근본적인 뒤틀림은 ‘보수적인 것’, 즉 ‘일본 고유의 것’이 미국, 즉 ‘고유의 것이 아닌 것’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상태라고 지적한다.(154) 자민당의 미국 비판을 허용한다고 해도, 전후의 본질을 흔드는 일은 허용하지 않는다.(155) 그리고 마침내 미국의 보호 없이 주변국과 마주하는 날이 올 것이다.(158)

사실 사드 문제를 이해하는 또 한 가지 방법이 역외 밸런싱이다. 사드를 싫어하는 건 북한이 아니라 중국이고 보면, 미국 입장에서 사드는 중국을 견제해서, 북한을 압박하도록 강요할 수 있는 아주 효과적인 무기이고, 한중관계에 적당히 벌려놓는 데도 아주 효과적이다. 중국이 반발하면 할 수록 사드 배치를 진전시키는 미국의 태도에서 잘드러난다. 역시 한국에서 뼈속까지 대미종속이 파고들어서, 한미동맹의 강화만을 외치는 세력이 오늘까지 한국을 지배해 왔고, 지금도 지배하고 있다. 엊그제 백악관의 스티브 배넌이 주한미군 철수를 언급했다고, 또 우파들은 대통령 뭐하냐고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는 걸 보면 패턴이 완전히 똑같다. 스티브 배넌이야 어디로 튈지 모르고, 미국의 아시아 정책을 결정하지는 못할테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언젠가는 미군이 떠날 것이고, 그건 전적으로 미국의 사정에 달렸다는 점이다. 그걸 고려하지 않은 대미정책이나 안보정책에 어떤 장기적 관점이 있다는 건지.

일본은 드디어 밀려서 밀려서 앞선 전쟁을 검증해야 하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161) 문제의 핵심은 일본의 보수 정치 세력 주류파가 일미동맹의 필요성, 기지존치의 필요성, 핵우산의 필용성을 국민에게 납득시키는 일을 포기하고 거젓과 기만의 공중누각(비핵3원칙, 절대평화주의) 쌓아온 점에 있다.(167) 패전 끝에 핵공격을 받았다는 사실에 직면해야 한다.(168) 여러번 이야기한 메이지 헌법의 밀교,현교의 통치술은 미노베 다쓰키치의 천황기관설로 해명되었으나 다이쇼, 쇼와 시대에 붕괴의 길을 걷는다. 천황제의 현교적 부분이 밀교적 부분을 잠식했다. 전후 체제의 영속 패전의 현교란 일본은 전쟁에서 진 것이 아니라 전쟁이 끝난 것이라고 패전의 의미를 희석하는 것이며, 밀교는 대미관계에서 영속패전과 항구적 대미종속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오늘날 현교와 밀교의 모순이 아시아와의 관계에서 분출하고 있는데. 현교 차원에서 아시아에는 패전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제 전전 체제의 붕괴드라마를 다시 목격하고 있다. 우리는 패배하지 않았다는 심리적 각인이 봉인을 풀고 거만한 내셔널리즘 형태로 밀교를 침식하면서 집어삼키고 있다. 영속패전 체제의 주역들이 ‘우리는 패배하지 않았다’는 심리를 대중에게 심어주고 전쟁 책임을 회피한 장본인들이기 때문에, 이들은 이를 막을 능력이 없다.(169-172) 그러면서 이 논의를 천황제와 연결시킨다. 쇼와 천황이 미군 주둔을 희망했다는 도요시타 나라히코의 지론.(175) 가타야마 모리히데가 정리한 사토미 기시오의 희생을 강요하는 시스템으로서의 국체론을 언급하면서, 전후 희생의 시스템으로서의 국체는 죽었다, 영속패전 체제에서 누구의 희생을 요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177-180) 일본이 본토결전을 포기한 이유는 원자폭탄이 아니라 ‘국체 호지’를 위태롭게 했기 때문이다. 가사이 기요시는 혁명을 잃었다고 말하는데, 당시 고노에 후미히로의 상주문도 공산혁명을 두려워하고 있다.(183-184) 이 상주문에 고노에는 좌익분자에게 조종당한 국내혁신파 군인들이 패배할 전쟁으로 일본을 몰아넣은, 대동아전쟁은 국체를 파괴하려는 의도적인 계획이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이 상주문을 가와하라 히로시는 천황제 지배층의 공통된 발상이라고 말한다. 뭐가 우익이고 좌익인건지. 그들은 그것도 몰랐다.(186-187) 가와하라 히로시는 종전 결단의 본질을 혁명보다는 패전이 낫다는 선택으로 파악했다. 당시 대본영은 본토결전에 대비해 군대를 둘로 나누기로 했는데, 통신이 끊어질 경우 혁명으로 이어질까봐 두려워 했다고 한다.(188) 따라서 국체 호지를 실현한 패전은 혁명을 제치고 얻어낸 승리다.(189) 국체란 이토 히로부미의 발명품에 지나지 않으므로 3.11 이후 정말 지켜야 할 것을 찾아낸다면, 이 괴물 같은 기계는 작동을 멈출 것이다.(191) 전후 일본은 야스퍼스의 분류에 따르면 형법상의 죄와 정치상의 죄를 극히 부분적으로 추궁했을 뿐, 도덕상의 죄와 형이상학적 죄라는 나머지는 그냥 지나갔다. 여러 복잡한 문제가 남아있지만, 패전 인정이 우선이라는 주장이다.(202)

일단 가타야마 모리히데나 가와하라 히로시의 글 등을 읽어봐야 겠지만, 고노에 상주문에 대한 해석이나, 도요시타 나라히코의 글을 보면, 대략 수긍이 된다.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지배체제의 변혁이었다는 점. 어떤 의미에서 영속패전이란 전후 체제만 지속시키는 것이 아니고, 전전과 전중 체제가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는 이야기. 무엇보다 쓰루미 슌스케 등의 밀교, 현교 이야기를 패전 체제에 응용한 뒤, 다시 한 번 현교가 밀교를 잠식하고 있다는 해석에는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무엇보다 다가온 것은 3.11을 대하는 일본 지식인들의 태도였다. 사상가도 사회과학자들도 문학하는 이들도, 심지어 신학자들도 이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나는 구라바야시 데루오가 쓴 3.11과 원폭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소마에 준이치도 쓰루미 슌스케도 이 문제를 언급하는데. 3.11을 다루고 있는 책들을 좀 꾸준히 읽어봐야 겠다. 사소한 이야기지만 리처드 아미티지와 마이클 그린에 대한 해석도 재밌었다. 요즘 한국에서는 친일적이면서, 사사카와 재단의 지원과도 관련이 있고, 미국에서 일본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비판하지만,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이들을 지일파 ‘재팬 핸들러'(158)로 일본이 군비 증강을 하도록 부추기는 미국의 군산복합체의 대리인으로 보고 있다. 누구 말이 맞는 건지.

옮긴이의 글에서도 말하듯 이 책의 번역에는 곡절이 많았다. 정선태는 한국 현대사도 평화와 번영을 미끼로 대미 종속 구조를 심화해 온 영속식민지의 구조라고 표현한다. 일견 수긍이 가긴 하지만, 한국은 실은 더 복잡하다. 일본는 미국과의 이항대립 구조에 불과하지만, 한국은 미국과 일본을 축으로 한 세 극의 중첩성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40년간의 식민통치 기간의 지배 주체와 지배 동력을 친일파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빈약하다. 내가 늘 식민통치의 구조적 특징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20세기 한국사의 재구성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이유다. 주류파 해석에 따르면, 그 40년간에는 사람은 없었고, 소수의 일본에 대한 협력자인 악마와 다수의 선량하고 무지한 백성만 살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일제 40년이라는 말을 흔히 썼는데. 어느새 일제 36년이라고 말한다. 한 해라도 줄이고 싶은 것은 물론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일본의 보호국이 된 것은 이미 1905년 부터 이고, 그래서 을사5적이라고 하지 경술 5적이라고 하지 않지 않나. 사실 그 연원은 18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4년 7월 23일 단 하루만에 경복궁이 점령당하고 고종이 사실상 포로가 되어서, 시작하자마자 끝난 조일전쟁의 패전에서부터 일본의 영향력은 조선에서 확고해 지게 된다. 일제 50년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정선태의 지적처럼 대외 종속성 만은 아주 분명한 터이다.

중간에 말했지만, 한국사와 한국정치에서 또 하나 어려운 점은 바로 이 내셔널리즘의 이중성이다. 저항의 아이콘이면서 동력이었던 동시에 지배의 광기로 작용했던 이 이데올로기는 역사의 고비마다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갔다. 지난 겨울 촛불에서 그 안정화된 모습을 보이는 가 싶더니. 이 뜨거운 여름에도 어디가 경계인지 모르고 넘실거린다. 한국에서 내셔널리즘이란 끊임없이 경계하고 때려잡아야 하는 대상인 동시에, 적당히 풀어주고 생명력을 가지도록 키워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런 한국사의 모순성을 일본의 비판적 지식인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들이 원하는 연대 역시 한 없이 멀어져만 갈 것이다. 상호이해의 필요성을 다시금 급박하게 느낀다. 마지막으로 후기에서 언급한 간디의 말을 첨언해 둔다. 오래 가슴에 남을 것 같다.

“당신이 하는 일은 대부분 무의미하지만, 그래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일을 하는 이유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당신을 바꾸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간디, 205)

2017. 8. 18.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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