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트리샤 스테인호프, 『적군파』.


적군파로 연합적군의 구성원이던 우에가키 야스히로가 가루이자와 역에서 체포될 때의 모습. 그는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후, 지금은 시즈오카 현에서 『バロン』이라는 주점을 운영하고 있다. 반항적이면서도 당당한 그의 눈은 한 시대를 상징한다. 이들이 체포되고 마지막 다섯 명이 아사마 산장에서 농성하는 동안 일본 열도의 대학가는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이들마저 진압되어 체포된 후, 내부숙청의 실상이 밝혀지자 좌파는 결정적인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퍼트리샤 스테인호프Patricia Steinhoff, 『적군파: 내부 폭력의 사회심리학死へのイデオロギーー日本赤軍派ー』, 임정은 역, 교양인, 2013 (2003).

일본 소설이나 드라마를 종종 보는 사람이라면 일본에 유달리 형사물이 많다는 것과 과격파의 파괴활동이나 테러를 그린 작품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이다. 이런 작품에 흔히 여성성을 탈각한 냉혹한 여성 테러리스트가 주인공이나 조연으로 꼭 나온다. 목표를 위해서라면 동료도 과감하게 죽이고, 때론 압박감을 이겨내기 위해 쾌락에 탐닉하기도 하는. 극적인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일종의 모델을 만든 것이겠지만, 그 원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적군파가 바로 그렇다. 60년대말에 일본에서 생겨나 여객기 요도호를 납치해서 북한으로 가고, 레바논으로 가서 PFLP에 가담해서 텔아비브 공항에서 테러를 일으키고, 일본 국내에서도 파괴활동을 시도하다가 자기 파괴를 통한 자멸로 빠져들어갔던. 낭만적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잔혹했던. 서독의 RAF Rote Armee Fraktion과 함께 선진국에서 나타난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테러리스트 그룹. 그리고 그들의 과격한 일본에서 진보 세력의 능력을 봉쇄하는 데 일조했다. 아니 이들은 이미 무력했었는지도 모른다.

미국인 사회학자 퍼트리샤 스테인호프는 1970년대부터 적군파와 연합적군을 연구한다. 일본에서도 단연 주목받는 ‘적군파’ 연구는 외국인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저자 퍼트리샤 스테인호프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1941년생의 그는 현역 하와이 대학 마노아 캠퍼스의 70대 후반의 사회학과 학과장이다. 박사학위 논문으로 일본의 전쟁 시기에 이루어진 좌파들의 전향을 연구했고, 적군파 출신으로 텔아비브에서 테러를 일으킨 오카모토 고조를 이스라엘 감옥에서 인터뷰한 후 20년간 적군파를 연구하고, 그 결과를 일본에서 1991년 출판한다. 제목은 『日本赤軍派ーその社会学的物語(일본적군파: 그 사회학적 이야기)』. 일본에서도 크게 주목받았다고 한다. 이 책은 2003년에 절판된 이 책을 이와나미에서 재출간한 것을 번역했다. 당시 이미 영어판을 출간하려 하고 있었고 원고도 다 준비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영어판 제목 Deadly Ideology: The Lod Airport Attack and The Rengo Sekigun Purge’도 지어서 판권란에 써 두었다. 한국어판도 판권란에도 이 제목이 Attack만 Masscare로 바뀌어 쓰여져 있다. 그러나 영어판은 출간되지 않는다. 중동에서 활동한 일본 적군파에 대한 기록이 미국과 서방의 시각이라는 감옥에서 책을 읽고 독후감을 보낸 중동 적군파 초기 멤버 고 마루오카 오사무丸岡修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중동의 일본적군에 관련된 모든 정보를 습득할 때까지 영어판 출간을 미루었기 때문이다.(한국어판 서문) 영어판을 포기한 건 아니다, 아직 출간되지 않았을 뿐. 그는 자신의 연구를 두 권으로 나누어, The Japanese Red Army: Reality behind the Myths라는 중동의 일본 적군파에 대한 연구와 Deadly Ideology: The Red Army Faction in Japan and its Impact라는 이 책의 개정판을 준비하고 있다고, 9월에 업데이트한 CV를 통해 소개하고 있다. 연구에 대한 집중력과 평생을 이어가는 연구가 경이로웠다. 공부란 그런 것이리라.

1972년 5월 31일 세 명의 일본인 테러티스트가 이스라엘 텔아비브 공항에서 일반 시민을 습격한다. 26명 사망, 80여명 부상. 테러리스트들은 자살을 기도했지만, 한 사람은 그러지 못해 체포되었다.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라는 이름으로 행동한 그는 일본인이었다. 여권에는 난바 다이스케難波大助. 이 이름은 1923년 황태자의 차를 겨눠 총을 쏘았던 일본 급진파 청년의 이름이다. 그는 구마모토 출신의 학생이었고, 본명은 오카모토 고조岡本公三.(18-19) 퍼트리샤 스테인호프는 이스라엘의 골다 메이어 총리에게 편지를 쓰고, 감옥에서의 인터뷰가 허락되자, 우선 일본으로 향해 그의 부모를 만난다. 부모는 교육자들로 은퇴 후 사회복지에 헌신하고 있었다. 케네스 케니스턴Kenneth Keniston과 리처드 플랙스Richard Flacks의 연구를 들어 1960년대 미국의 학생 활동가 중에도 진보적이고 사회에 관심이 많은 중류층 가정 출신이 적지 않았음을 지적한다.(31) 그리고 그의 형 오카모토 다케시岡本武는 적군파로 1970년 요도호를 납치해 북한으로 간 인물이었다.(33)

오카모토 고조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야기가 시작된다. 오카모토 고조는 적군파는 세계 동시 혁명을 꿈꾸며, 부르주아 권력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무장 혁명밖에 방법이 없다. 그리고 자신이 PFLP에 가담한 것은 게릴라가 되고 싶기 때문이었다고 이야기한다. 특히 그는 베평련(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ベトナムに平和を!市民連合 줄여서 ベ平連, 일본식으로 베헤렌으로도 읽는다)의 반전시위에 몰두하다가 비폭력적인 베평련 활동이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고 실망해서 군인이 되려고 PFLP에 갔다고 말한다.(47) 여기까지 읽으면서 이미 큰 충격을 받았다. 중간 계급에 사회 의식을 가진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해서, 평화적인 사회변혁 운동에 가담하여 헌신적으로 활동했으나, 그 한계에 실망하고 게릴라에 가담하기 위해 레바논으로 날아가서 2개월 간의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고 테러를 저지른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지. 단순한 운동 성과가 안나오는 조바심 때문인가. 물론 한국에서도 운동을 급진화하려는 사람들이 언제고 있었다. 그러나 급진화된 운동은 성공적이지 못했고, 오히려 평화적으로 단일 의제를 내세웠을 때, 운동은 성공할 수 있었다. 1987년의 6월 항쟁도 2016년 겨울의 촛불집회도. 그것으로 궁극적인 변화는 가져오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그런데 오카모토의 인터뷰에서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한 가지 주제가 등장한다. 그건 실은 일본이다. 예를 들면 그는 평화 운동과 폭력 혁명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면서, 불교와 혁명 사이에 모순이 없다고 말한다. 불교는 온 세상의 모든 생명이 전체의 일부분이기 때문에.(50) 알다시피 일본인의 기본적 종교의식에는 불교가 깊이 뿌리밖고 있다. 그는 자신이 매우 일본인 답다고 일본 특유의 죽음에 대한 관념을 가졌다고 말하면서(53) 놀랍게도 극우파인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죽음 그러니까 자위대를 점거하다가 할복자살한 사건을 평가하고, 파시즘 이론가였던 기타 잇키北一輝와 메이지 유신의 지사였지만 세이난 전쟁을 일으켜 반동을 꾀했던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를 존경한다고까지 말한다. 이 세 사람은 신념에 따라 목숨을 내던진 일본의 영웅이고 가망없는 목적을 위한 충격적인 행동으로 자기 삶을 희생한 인물이다.(57) 게다가 그는 자신의 행동을 ‘옥쇄’라는 말로 표현하다.(75) 저자인 퍼트리샤 스테인호프는 오카모토의 행동을 왕양명의 지행합일설을 구현한 것이라고도 말하면서, 현대 서유럽의 정치적 우파, 좌파라는 식의 개념은 일본에 적용하기 어렵고, 일본에서는 실제로 취하는 정치적 입장이 쉽게 바뀔 수 있는데, 메이지 유신이든 2·26이든 그 본질은 썩을 대로 썩은 정치 상황을 사심 없이 한결같은 개인의 행동을 통해 순수하게 도덕적인 비전으로 변화시키는 ‘타오르는 정열’이라고 설명한다.(57)

일본적이라는 의식이 이들의 행동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얼마나 보편적인가가 이 책 전체의 주제이다. 막말과 유신 전후사를 읽다보면, 아무리 주의깊게 이야기의 맥락을 따라가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어제까지 도쿠가와 막부를 추종하던 개인이 천황을 옹립하려고 운동하고 그러다가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기대를 걸고 다시 천황으로 돌아가고 어제의 동지가 적이 되어서는 서로 암살을 기도하면서도 그저 처지가 달랐을 뿐이라는 식의 변명으로 일관한다. 그 복잡성을 이해하는 고리가 목숨을 건 멸사봉공의 사심없는 열정적인 행동 그 자체이다. 어느 편인지보다 사심 없음 자체가 훨씬 더 중요하다. 여기서 퍼트리샤 스테인호프는 자세하게 근거를 설명하지는 않지만, 왕양명의 지행합일, 즉 양명학을 슬쩍 언급하고 지나가는데, 실제 일본 유학은 한국과는 달리 양명학이 크게 유행한다. 특히 메이지 유신에 크게 영향을 미쳐 나중에는 중국에 거꾸로 수입될 정도가 된다. 성리학을 추구하던 조선과 그의 후손들이 여전히 고수하는 그 사고방식과 일본의 양명학의 비교가 구체적인 설명을 제공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인상을 주기에는 충분한 것 같다.

그런데 이 텔아비브 공항 테러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일본 정부가 습격 사건에 대한 사과의 뜻을 표명하면서, 희생자에게 배상금 100만 달러를 지불한다.(67) 게다가 특이하게도 이스라엘의 친구를 자처하며 키부츠를 가지고 있고, 구약성경 공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성막幕屋’라는 작은 일본인 기독교 단체가 이스라엘에 사과하는 뜻으로 텔아비브 공항에는 구급차를 일본에 유학 온 이스라엘 학생을 돕는 장학금을 시행하고, 람레 교도소로 오카모토 고조를 방문하기도 한다.(70-71) 오카모토는 전전의 공산주의자들이 전향했던 것 같이 한때 기독교 신앙으로 기울기도 했다.(80) 그러나 PFLP와 시게노부 후사코가 이끄는 레바논의 적군파 그룹은 그를 잊지 않았고, 1976년 검은구월단 사건에서도 오카모토 고조의 석방을 요구했고, 1985년 체포된 이스라엘 병사와의 포로 교환을 통해 풀려나 레바논으로 돌아갔다.(82-85) 일본 정부가 자국 정부를 반대하여서 일어난 테러리스트를 대신해서 사과하고, 일본의 기독교인 그룹이 이스라엘을 향해 사죄행위를 지속한 부분은 또 하나 이 사건의 일본적인 특성을 아주 잘 보여준다. 그러고 보니 조승희가 미국 버지니아에서 총기난사 사건을 일으켰을 때, 한국 정부와 한국인들도 사과를 했고, 미국인들이 오히려 당황했었지. 1970년대 일본의 사과에 대해서도 서구 외교관들은 일본이 잘못된 선례를 남겼다고 보았다.(67)

퍼트리샤 스테인호프는 본격적으로 적군파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인상적인 부분들만 기록해 둔다. 오카모토 고조는 평범했을 뿐 아니라 하나의 전형이었다.(89) 일본의 급진 학생 운동 중 공산당 지도 아래 남은 이들은 온건해졌다. 일본은 공산당이 제도권 안에 존재한다. 반면 당을 떠난 사람들에게 공산당의 지도가 사라졌다는 것은 이론과 방침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최후의 심판에서 해방된 것이다.(94-95) 이데올로기 분열이 이어지면서 복잡하고 관념적인 섹트들이 등장하는 데, 미국식으로 말하면 보수적이고 비정치적인 프래터니티(fraternity)의 조직과 닮았다.(95) 단순한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사상의 특정한 형태이며, 특수한 사회적·감정적 상황 아래 놓인 사람 하나하나의 가슴을 울림으로써 강력한 효과를 낳는 변혁의 수단인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97) 분트(공산주의자 동맹)의 이데올로기에 들어 있던 주요 방침 두 가지가 적군파에 영향을 미쳤다. 혁명에 다다르는 참된 길은 혁명적 투쟁의 실천으로만 개척할 수 있다. 단체든 개인든, 분트라는 ‘당파’의 멤버든 아니든 상관없이 혁명으로 가는 추진력이 될 수 있다.(99) 사토 에이사쿠 총리의 방미 저지를 위해 행동하기 위해 다이보사쓰 고개에 모여서 군사훈련을 하려던 이들이 체포되는 데, 이 조직도는 흡사 일본 재계의 조직도와 같아서 맨 위에 이름이 적힌 지도부는 교토 대학 같은 일류 대학 출신이고, 부지도자들은 이류 대학 출신, 맨밑바닥은 청년 노동자와 무명 대학 학생들이었다. 국가권력을 타도하려는 적군파의 기반에도 학벌주의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114) 이 점만은 한국의 학생운동도 완전히 똑같다. 특히 일본공산당과 전후 좌파 단체에는 무엇이 올바른 노선인지 판단을 내려줄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적군파는 교조적 엄격함을 멀리하는 분트 이후의 긴 전통으로 ‘당’이라는 관념이 약했고, 초창기 적군파는 이데올로기 투쟁을 하는 자유로운 전통 속에 있었던 반면, 내부 숙청을 일으킨 모리의 지하 군대는 나이 어린 사람이 많고 자유로운 토론 전통을 이어받지 못했다.(131-132) 대규모 체포로 인한 리더십 단절이 뜻밖의 비극을 초래했던 것이다. 병사로서 그들은 명령에 따랐다.(133)

나는 한국 학생운동의 지하조직을 경험해 본 적이 없으므로, 일본의 지하조직과 한국의 지하조직이 어떤 유사점과 차이점을 지녔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외견상 꽤나 유사한 점들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적군파 조직의 특수성은 일본 좌파 운동의 역사 그 자체에 기인하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일본 특유의 조직방식이 깊이 침투해 있다. 그리고 그들은 경험있고, 유연한 리더십과 단절되고, 상실했다. 이제 그들은 그들 자신의 논리를 향해 치달아 가게 된다. 명목상 적군이지만, 실제 공산주의 이념이 이들의 추동력인지 아닌지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일본의 학생 운동에 만연해 있던 ‘우치게바内ゲバ’문제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치는 내부를 뜻하고, 게바는 독일어로 폭력을 뜻하는 Gewalt의 합성어라고 한다. 좌익 당파 내부의 파벌 간의 폭력 항쟁을 말하는 데, 적군파 결성에 앞서 10년간 학생 세 명이 직접 항의 행동을 하다 죽음을 맞았지만, 그 열 배에 달하는 학생들이 섹트 간의 ‘우치게바’에 의해 살해 당했다. 적군파의 첫 사망자도 우치게바로 죽은 사람이었다. 이 사건으로 적군파는 분트와 결별했다. 1969년 7월 분트 소수파인 적군파가 150명을 동원해 도쿄의 분트 주류파의 회의 자리에서 충돌하여 난투극을 벌이다 경찰 까지 개입했다. 분트 의장이 체포되자 분트 주류파는 2, 3일 뒤 보복행동에 나섰다. 29명을 납치해서 감금했다가 탈출하던 한 명이 추락하여 중상을 입고 2개월 뒤 사망했다.(103-104) 다이보싸쓰 고개 사건도 선도적으로 투쟁하려는 적군파의 공적 다툼이 원인 중 하나였다.(110) 1970년 8월 호세이 대학에서 중핵파(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전국위원회)에게 살해당한 혁마르파(일본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동맹 혁명적마르크스주의파) 멤버의 시체의 발견이 시작이었다. 1971년 10월 중핵파가 요코하마 국립대에서 혁마르파 학생을 살해. 1972년 11월 중핵파 지지자였던 와세다 대학 학생이 혁마르파에게 살해되었다.(책말 연표) 한국의 학생 운동도 1980년대 중반에 격렬한 내부투쟁을 하기는 했다. 그렇다고 해서 수십, 수백명을 동원해서 폭력을 행사하고 주도권을 장악하려 하고, 중핵파와 혁마르파가 상대방 조직원을 번갈아 살해하는 일은 들어본 적도 없다. 연합적군 숙청사건은 우치게바와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지만, 연합적군은 일본의 진보적 학생운동의 토양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그 자장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연합적군 숙청사건은 문자 그대로의 비극이다. 퍼트리샤 스테인호프는 이 사건을 이렇게 설명한다. 지극히 일반적인 사회 상황이 뜻밖의 이변을 낳았다.(154) 시작은 기이했다. 혁명좌파와 적군파의 연합으로 결성된 연합적군의 리더는 적군파의 모리 쓰네오森恒夫였다. 구 혁명좌파의 나가타 히로코永田洋子가 사실상의 2인자 였다. 이 두 사람의 회담에서 이탈자 이야기가 나왔고, 모리는 이들을 처형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가타의 혁명좌파는 2명의 이탈자를 처형했다. 모리는 전투성에 감명을 받았지만 주눅이 들었고, 나가타는 반성 없이 모리를 따랐다. 그리고 모리는 이 조직을 독재적으로 지도했다.(166) 두 집단 사이의 알력은 이들의 비극을 가져오는 데 크게 기여한다.(184) 공동군사훈련을 하면서 모리는 일본 좌파의 자기비판과 총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데, 각 멤버는 조직 전체의 상호 비판을 통해 사고방식과 행동을 수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공산주의화’라고 불렀는데. 저자는 세 가지 요소가 공산주의화를 죽음에 이르는 이데올로기로 변모시켰다고 말한다. 첫째, 집단적인 의식고양법을 사용했다. 둘째, 공산주의화를 달성한 상태와 개인이 변혁을 성취한 상태의 정의가 모호했다. 셋째, 공산주의화를 완전히 달성할 때까지 아무도 산을 내려가면 안된다고 선언했다.(172-173)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없이 집단적인 심리 치료의 기법을 사용한데다, 목표는 불분명하고 출구는 없이 폭주하고 있었다. 모리는 공산주의화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을 온갖 고생을 극복할 강한 정신력이라고 주장했다.(181) 이때의 정신력이란 정신력으로 소총과 죽창으로 들고 미군의 탱크로 돌격하던 2차대전의 일본군의 바로 그 정신력을 말한다. 그리고 가혹행위와 구타 속에 죽는 사람이 등장하자 모리는 이를 ‘패배사敗北死’라고 사람들에게 알렸다.(191) 모리의 가장 큰 장기이자 모든 것을 몰락으로 이끌게 된 그의 능력은 이론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었다. 하나의 이론을 제시하고 실천한다. 새로운 문제가 생기면 새로운 이론을 꺼내 든다. 모리가 제시한 이 ‘패배사’라는 이론 또는 이데올로기는 모두를 죄책감에서 구하는 것이었다.(193) 그들은 다시 한 번 돌아설 기회를 잃었다. 모리의 권력의 근원은 시시각각 바뀌는 상황에 따라 이론적인 의미를 고안해서 부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진부한 이론이라고 해도 모리의 이론은 연합적군 멤버 하나하나의 마음 속에 도사린 필요를 채워주는 힘이 있었다.(197) 책임을 전가하는 모리의 이론이 가진 강한 설득력은 다른 멤버도 공유하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자기 기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태를 즉시 정당화할 수 있는 창조적인 힘이 있었다.(200) 지도부는 판단 능력에 자신감을 가질 수 없었고, 전개되는 상황 앞에서 망설임을 보이면 신체적인 위험이 따라왔다.(202) 혁명에 대한 희망과 자신이 저지른 폭력 행위에 대한 공포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나는 가장 손쉬운 길은 모리의 해석을 받아들이고 그 이론으로 내심 싹트는 의심을 억누르는 것이었다.(211) 게다가 ‘동지적 원조’라는 이름으로 폭력에 참가할 것을 강요당하면서, 이들의 짜증과 분노는 폭력을 휘두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희생자들에게로 향했다. 왜 올바른 태도를 갖추지 않는 건가? 희생자들은 인간성을 빼앗겼다.(217) 사카구치 히로시는 침묵이나 탈퇴를 반대한다는 의사표현으로 사용했지만, 설득에 성공하지 못했다.(219-220) 연합적군은 희생양 만들기의 극단적 사례이며, 외부의 적과 싸울 기회를 얻지 못하자, 내부의 약자를 향한 참혹한 폭력 행위가 분출했다. 희생양을 선택하는 기준은 없었기에 누구나 희생양이 될 수 있었으며, 아무도 희생양의 필요를 자극하는 갈등에 맞서지 못했기에 이 흐름을 내부에서 멈출 수 없었다.(233) 그리고 실제로 벌어진 아사마 산장 사건은 해프닝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렇게 외부의 적을 향해 쏟아져야 할 폭력이 내부에서 자멸에 가까운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은 일본 정치가 가진 특징, 일본 경찰이 택한 진압 수단에도 있다고 생각한다. 55년 체제의 보수 합동으로 성립된 자민당 정권은 안보 투쟁이 격화될 때도 미일안보조약을 강행 성립 시켰으니 기시 노부스케 총리가 사퇴한다는 식으로 진보적인 운동의 힘을 빼가면서 보수적인 정책을 관철시켰다. 일본 경찰도 무력행사를 최대로 줄이고 여유로운 포위 작전을 택했다.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거나 전차로 뭉개죽이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반체제 투쟁은 살아남고 공감도 얻었지만, 그것은 동시에 끊임없는 패배와 그에 따른 좌절감 그리고 내부 분열 탓에 추쟁이 힘이 약해지는 결과를 낳았다.(343) 가장 무기력해 보이는 듯한 전술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던 셈이다. 비폭력을 앞세운 시위로 직선제를 쟁취하고, 대통령을 탄핵시킨 두 번의 경험을 가진 한국의 경험에서 보면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그런 비폭력의 강력한 시위를 가져온 건 광주학살과 그 이후 이어진 폭압적인 국가권력이었고, 세월호의 무기력과 백남기씨에 대한 경찰의 폭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의 보수 정권들은 조급했던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가진 자기 파괴적 성격은 과연 정치적 과격파에만 한정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사람이 모인 어떤 조직이나 모임에도 이런 형태의 자기 파괴가 가능하다. 아니 어느 정도는 일어나고 있다. 내가 가장 큰 두려움을 느낀 것은 어떻게든 설명해 내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모리의 능력이었다. 나는 모리 만큼은 아니지만, 순발력있게 상황을 해석하고, 그 상황에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이 있다. 그게 항상 성공적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현장에서는 설명해 낸다. 나는 내가 만들어낸 설명이 가지는 그 해석의 자기증식이 무서워져서 요즘에는 가급적 설명을 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냥 모르는 채 묵혀두려고 하는데. 어떤 의미에서 이런 행위는 모순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때로는 일부러 자기 모순을 발견하거나 자기 해석을 뒤집어 버리기도 한다. 나는 내가 파괴적이지 않아서 너무나 다행스럽지만, 말은 언제든 사람의 정신을 파괴할 수 있다. 그리고 연합적군이 빠져든 희생양 만들기 게임을 실상 나는 교회 조직에서 너무나 많이 보았기 때문에 연합적군이 벌인 숙청극이 그렇게 낯설지 않았다.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 파괴적 본성이 두려울 뿐.

숙청으로 이어진 연합적군의 자기 비판 과정은 적과의 대결에 대비해 멤버의 힘을 키운다는 목적과 근본적으로 어긋나는 것이었다. 가차 없는 심문과 총괄을 재촉당한 멤버들은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을 넘어 깊은 자기 반성과 자기 비판을 보여주어야 했고, 압력에 짓눌린 결과 자백을 강요당하는 데 저항하기보다 자백을 장려하는 방법으로 멤버들을 훈련하고 말았다.(287) 그리고 사건이 모두 끝나고 모두들 수감되고 그 이후까지도 자기비판은 계속되고 있다. 왜 어디서부터 잘못을 저질러 부정적인 결과가 생겼는지, 그렇다면 어떻게 수정할 것인지. 이것은 일본 좌파의 전통적인 실천 과정에 속한다.(308) 숙청 기간 내내 연합적군의 지도자로 숙청을 이끌었던 모리가 첫 사망자가 나온 지 꼭 1년만에 도쿄 구치소의 독방에서 자살했다.(313) 그리고 이어진 재판과정에서 피고들의 일부분은 직접적 책임이 모리에게 있다면서 자신은 모리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한 한편 어떤 측면에서는 참가를 강요당한 희생자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마치 전쟁을 이끈 지도 체제에 대한 마루야마 마사오의 지적을 연상시킨다. 그들은 책임 소재가 흩어진 시스템에 참여했고 전원에게 책임이 있다고도 아무에게도 책임이 없다고도 할 수 있었다.(319-320) 이 글이 쓰여지던 때까지도 연합적군 멤버들과 책임감을 공유하는 후원자들이 여전히 검증하고 비판하며 분석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연합적군 멤버 중 한 사람인 우에가키 야스히로植垣康博가 출소 후 시즈오카에서 『バロン』이라는 주점을 운영하면서 연합적군에 관한 발언과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는데. 시즈오카에 가게되면 들러보고 싶은 생각도 든다.(323) 다만 저자는 이들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자학적 비극에서 벗어나기 어려우리라고 본다. 연합적군 숙청 사건이라는 생명의 공포는 개인적인 책임에서 해방시켜줄 수 있는 사상이라는 힘이 밀실을 유지해 준다면 사람은 그런 공포를 안고서라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사상이 무너졌고, 다시 구축하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들이 죽어간 동지들을 대신해 혁명에 계속 몸담고 있는 것은 그들 나름의 책임지는 모습일런지는 모르지만.(324)

연합적군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이데올로기다. 그러나 분명한 형태를 지닌 고정된 개념으로서의 그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새롭게 고안되고, 갈등이 발생하고 정당화하고 타인에게 지도했다. 집단이 스스로 멈출 수 없는 갈등 집단적 갈등의 동기이자 도덕적 정당화로서의 이데올로기가 가지는 위험한 역할. 숙청은 다른 아님 사회적 힘의 산물이다. 그 힘은 어쩌다 보니 그 곳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커다란 위력을 발휘했고, 방향을 바꿀 조정자가 될 만한 사람은 없었다. 숙청을 일으킨 것은 예측 가능한 사회적 경로와 예측하기 어려운 개인 사이에 벌어진 미묘하고 불안정한 상호작용이었다.(325-327) 어떤 사람이 헤엄을 치다 너무 멀리까지 가버렸는데, 경계는 실상 명확하지 않으며, 현명한 줄 알았던 판단은 우연에 의한 결과이고, 선견지명 따위는 없는 법이다.(328) 모두가 연합적군 사건 같은 비극의 피해자도 가해자도 될 수 있으며, 그런 비극은 혁명 이후에도 이전에도 일어난다. 이데올로기적 신념이 우리의 눈과 귀와 마음으로 인식한 것보다 더욱 진실에 가깝다고 여겨지는 한, 그리고 조직의 결속과 지도자의 권위가 개개인이 ‘아니오’라고 말할 가능성을 짓밟는 한 몇 번이고 거듭 일어날 것이다.(329)

숨가쁘게 책을 일고나서 결론까지 도달해서 비로소 숨을 고르기 시작하면, 잠시잠깐 혼란에 빠진다. 어떤 의미에서 이토록 극단적 폭력은 수많은 우연이 겹친 결과다. 그러나 그 우연들은 발생할 수 있는 경로들에 있었고, 중간에 멈추지 못하자 끝을 보게 되었다. 거기서 빠져나온 사람들도 모두 우연이다. 그런데 이런 조직 운영 방식은 일본에서는 대기업에서 좌파조직까지 아주 흔한 형태이고 기본적인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 한국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덧붙여진 ‘공산주의화’라는 이데올로기가 있었지만, 어떤 사회 조직이든 단체든 자기 나름의 내부적 설명논리를 가지고 있다. 바깥에서 보면 명백한 범법행위이고 잘못임이 분명해도 내부에는 늘 설명논리가 있고, 정당화의 논리가 있다. 심지어 교회도 그렇다. 그리고 그 정당화의 논리가 사람들을 구속할 때, 피해자는 생기게 마련이다.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2017. 11. 20.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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