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4).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真男, 『일본정치사상사연구日本政治思想史研究』, 김석근 역, 한국사상사연구소, 통나무(東京大学出版会), 1995(1952).

3장 일본 국민주의国民主義의 전기적前期的 형성

3장 1절 머리말 – 국민 및 국민주의
국민이란 스스로 국민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집합체다. 단순히 하나의 국가 공동체에 소속되어 공통의 정치적 제도 하에 놓여 있다면 그것은 인민에 불과하다. 국민이 되기 위해서는 그런 귀속감을 적극적으로 원하거나 바람직한 것으로 의식해야 한다. 일정한 집단의 구성원이 다른 국민과 구별되는 특정한 국민으로 상호간 공통된 특성을 의식하고 일체성을 수립해가려는 의욕을 가지는 한 비로소 국민의 존재를 말할 수 있다. 언어・종교・풍속・습관・다른 문화적 전통의 공통성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문화적 일체성에 대해 명확한 자각을 보유하면서도 정치적 국민의식을 결여한 경우, 19세기 초까지 독일 국민이나 이탈리아 국민을 국가국민과 구별해 문화국민이라 하더라도 문화적 일체성을 옹호하려면 자기 존재를 정치적로 고양시켜 국가 공동체를 형성할 필요에 부딪힌다. 국민의식은 자각적인 한 정치적 일체의식으로 응집하며, 국민국가를 떠받쳐주는 국민의식을 배경으로 성장하는 국민적 통일과 국가적 독립의 주장을 폭넓게 국민주의nationalism, the principle of nationality라고 부른다면, 국민주의야 말로 근대국가가 근대국가로 존립해가기 위해 없어서는 안될 정치적 추진력이다. 각 국민의 세계사적 위상의 차이에 따라 국민국가의 형성 내지 발전의 양태도 다양하며, 국민주의 자체의 발전도 개성적 형태를 띈다. 유일한 국민주의 따위는 없으며, 여러 개의 국민주의들이 있을 뿐이다. 국민주의란 개성적이며, 국민주의의 발현형태 속에 국민국가의 형성과정의 특질이 명료하게 각인된다.(465-466)
교과서를 읽는 느낌이 든다. 한국에서는 내셔널리즘을 오랫동안 민족주의로 번역해 왔다. 마루야마는 주에서 소수민족이나 식민지의 독립, 다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형성할 때에 민족주의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일본 같은 경우 국민주의라는 번역이 더 정당하고 내셔널리즘이 내부적 문제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고 말한다. 실상 1940년대까지 일본에서 민족의 구분이란 호적에 표기되는 구분으로 내지와 조선 등으로 분류했다. 마루야마의 일본정치사상사는 암묵적으로 일본 열도만을 일본으로 간주한다. 그는 식민지 문제에 대해 침묵하는 것으로 제국주의 비판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1945년 패전 후 일본은 순식간에 일본 열도의 단일민족국가로 전환되면서, 그 국민 내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또 외면하게 된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이런 변화 속에서 어떤 전환도 필요하지 않았다. 마루야마의 식민지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일본중심주의나 일본우월론과는 또 다른 문제다. 그 자신의 연구범위에 포함되지 않았을 뿐이다. 포함시키는 것을 온당하지 않다고 본 것 같고. 내셔널리즘의 번역어로 국가주의도 적당치 않다. 네이션과 내셔널리즘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최근 일본 문서에서는 国民主義 보다 ナショナリズム라는 가타가나 표기가 더 자주 보이는 듯한데, 사회과학자들의 문제의식이 있을 것이다.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전된 후 이제야 비로소 민족주의라는 단어를 벗어던지나 했더니, 다시 남북관계에 있어서 민족이라는 단어가 등장해서 사람들의 피를 뜨겁게 하는 장면을 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한다. 정치적 주체로서의 국민의 호명과 국민주의는 필연적으로 분단을 기본으로 삼게 된다. 그렇다고 자연적이고 생래적이거나 문화적인 민족을 다시 호명하자니, 수많은 약자와 소수자 문제가 더 심각하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남북한 관계가 진전된다면, 그것은 민족이라는 이름하에 실제로 새로운 네이션을 형성해야 하는 문제가 된다. 남북한이 각기 국민 또는 네이션을 형성하는 과정보다 훨씬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네이션 형성과제가 또는 네이션 간의 관계 유지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안정성은 해소되지 않을 것이고, 반대로 네이션이 형성되면, 필연적으로 정치지형의 변동을 아래에서 추동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문제도 1945년 강제적인 남북한의 분할과 더 길게는 근대화와 국민국가 형성에 실패하고 식민지가 된데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친일이 문제가 아니라 식민지 자체가 문제다, 식민지에 대한 어떤 형태로든 정리 또는 탈식민이란, 두 개의 국민국가냐 아니면 하나의 국민국가냐는 정리를 필요로 한다. 어떤 정리를 향해 가고 있는지 현재로선 가늠하기 어렵지만.
정치적 범주로서의 국민 및 그 자기주장으로서의 국민주의는 일정한 역사적 단계의 산물이다. 국민이 스스로 정치적 통일체로서 의식하거나 의욕하기까지 자연적 식물적 존재로 생존을 계속해온 오랜 시대가 있다. 토지나 향토애는 국민의식 배양의 원천이기는 하나 정치적 국민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되지는 않는다. 향토애 즉 환경에 대한 사랑은 전통적이나 국민의 국가에로의 결집은 하나의 결단적 행위로 표현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환경에 대한 사랑의 농도는 거이레 반비례하기에 추상성을 띈 국가적 환경은 친근함이 옅고, 향토애는 국민의식 배양의 질곡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때 근대적 국민주의는 전통적 향토애의 지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다른 한편 전 국민을 포괄하는 국가적 질서가 이미 존재한다 해도, 자연적・필연적으로 국민들 사이에 정치적 일체의식을 발효시킨다고 할 수 없다. 그런 질서의 내적 기구가 국민의 국가에로의 응집을 저지하는 경우 국가적 질서는 국민을 내면으로 장악할 수 없고, 국민 대다수는 자연적・비인격적 생존을 계속한다. 국민주의는 국가적 질서와 국민 사이에 낀 직접적인 결합을 방해하는 세력과 기구를 배제하려고 한다. 국민주의는 국민의 전통적인 생존형태와의 모순・충돌을 감수하고 스스로 형성한다. 정치적 국민의식은 자연적・자생적 존재가 아니라 일정한 역사적 조건과 얽혀있다. 국민은 적 자극을 계기로 종래의 환경적 의존보다 많건적건 자각적인 전환에 의해 자신을 정치적 국민으로 고양시킨다.(467-468)
국민은 역사적으로 형성된다. 그리고 그것은 정치적 국민 의식의 형성이라는 주장을 이렇게 명료하게 1944년에 이미 밝히고 있다. 일면으로는 일군만민一君万民 사상 즉 국가와 국민 사이에 낀 봉건제도나 신분사회의 존재는 국민 형성을 방해하기에 이를 정치적 결단에 의해 타도해야 한다는 주장은 일견 메이지유신을 평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메이지유신 이전과 단절의 의도도 명백하다. 그러나 그가 끊이없이 말하는 자연적이라는 단어는 실은 메이지 천황제의 근거 논리이다. 조상신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온 일본의 천황제를 대상으로 놓고 볼 때, 천황제 전복의 논리가 깔려 있다. 마루야마 자신을 마루야마의 소라이 분석과 같은 방법으로 연구한다면 그렇다. 게다가 주에서 손문의 삼민주의를 언급하며, 중국의 국족주의를 민국혁명과 함께 언급한다.
도한 이 절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이 책의 3장 1944년 国家学会雑誌에 国民主義理論の形成란 제목으로 발표된 이 글이 훗날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에 수록된 논문과 평설의 서론이라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마루야마의 작품들은 하나도 빼놓을 수 없게 연결되어 있다. 그 출발점이 여기에 있다.

3장 2절 도쿠가와 봉건제 하에 있어서 국민의식
일본에서 국민의식과 국민주의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메이지유신이 필요햇다. 신국 관념 내지 민족적 자긍심은 국민의 정치적 일체의식으로 승화되지 못했으며 그것이 곧바로 국민적 통일로 이끌어간 것도 아니다. 국내적 사회적 조건도 성숙되지 못했고, 국제적 교역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막부 말기 외국세력의 도래가 우발적 일시적 사건이 아닌 세계시장 형성의 마지막 고리를 꿰어야할 역사적 필연으로 일본에 닥쳐왔을 때, 국가독립과 국민통일이라는 문제가 등장했고, 국민의 국가에로의 정치적 응집을 방해하던 도쿠가와 봉건제라는 기구 내지 정신에 직면해야 했다.(469) 일본의 국민주의가 극복해야만 했던 도쿠가와 봉건제 및 그 밑에서 사회의식은 어떠한 것이었나? 첫째 병농분리를 철저하게 밀고나가 성립한 도쿠가와 봉건제에서 치자와 피치자의 세계가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무사는 정치적 권리를 독점하고, 사회적 문화적으로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구별했다. 농공상의 서민들은 무사에게 봉사하고 봉양하기 위해 생존이 허용되고 있었다. 농민은 공조를 바치는 존재였다. 농민의 사회적 의무는 납세에서 끝난다. 그해의 세금만. 납세의무도 정치적 의무라기 보다는 필연적 운명으로 일종의 재난으로 받아들이며, 복종하는 것은 못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든 잇키를 일으키려고 했다.(469-471) 도시의 상인들은 피치자 중에서 최하위 가치질서에 자리매겨져 있어, 개인적 영리만을 추구하는 윤리 외적인 존재로 간주되었고, 정치적으로는 무rien화되었다. 그들은 어쩔 수 없는 악이거나 말살의 대상이었다. 조닌 측에서도 윤리 바깥으로 추방된 존재이기에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천민 근성이 몸에 배어 부를 통해 사회적 세력을 정치적 차원으로 고양시키려 하지 않고, 관능적인 향락의 세계로 도피하고 유곽悪所의 어두운 구석에서 덧없는 사적인 자유로 숨쉬거나 현실의 정치적 지배에 대해 왜곡된 조소를 날리는데 머물렀다. 정치질서를 자신의 것으로 짋어진다는 자각적 의사는 없었다. 도쿠가와 봉건사회는 두 부분으로 분명히 나위어 한편에서 사무라이 계급은 오로지 정치적 주체로서의 모든 정치적 책임을 졌고, 인구의 90% 이상인 서민들은 오로지 정치적 통제의 객체로서 주어진 질서에 수동적으로 따르게 되어 있었다. 치자와 피치자가 사회적으로 고정되어 일체의 국민의 존재를 말할 수 없었다. 한 사회나 계급이 다른 한 사회나 계급을 제어하는 나라는 어디까지나 사회일 뿐 국민일 수 없다. 사람들이 만든 계급을 없애고 인민과 정부라는 양대 요소에 의해 한 나라를 조직할 때, 비로소 하나의 국민이라 부를 수 있다.(471-473)
도쿠가와 봉건제 하에서 국민의식이 형성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신분격차였다. 더 정확히는 정치를 전담하는 무사계급과 정치에서 철저하게 배제된 농공상 계급을 말한다. 그 중에서도 마루야마를 비롯한 일본의 학자들에게 어려운 문제는 상인계급이었다. 도쿠가와 후기가 되면, 상품경제는 발달하고, 상인들의 지위는 오르며 무사들의 지위는 하락한다. 그러나 상인계급은 정치적 성숙하지도 못하고, 향락적인데. 머문다. 이 점은 마루야마의 반복적인 숙제였다. 마루야마의 해결책은 두 가지다. 하나는 조닌 층을 포함한 상업계층이 봉건사회의 한계 속에서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그들은 기생하는 존재였다. 봉건사회의 생산구조를 바꿀 만큼 성장하지도 못하고 그 한계에 있었다. 이 책 전체를 통해서 대략 3~4회 반복적으로 제기된 주장이다. 두 번째는 윤리 문제다. 막스 베버의 영향은 일본사회에서 프로테스탄트 윤리 문제를 제기했다. 그것은 자본가의 윤리 따라서 상인계급의 윤리이다. 마루야마는 일관되게 일본의 상인계급은 윤리를 형성하지 못하고 향락으로 흘렀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가 형성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가 글을 쓰던 이 시대에 윤리란 늘 국민도덕을 상징하는 강압적인 것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막스 베버가 말하는 윤리란 자발적인 금욕과 자본축적의 윤리가 아니던가. 스스로 내재화해서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마루야마는 국민도덕학파에 반발해서 자발적인 것만을 윤리라고 부르고자 하지 않았나 싶다. “전전 일본에서의 베버 연구”라는 마루야마의 논문(유불란 역,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16권 1호)를 보면, 자신의 이런 심경의 일단을 드러낸다. 베버에 입각해서 동양 정체성을 주장했다고 마루야마를 평가하기 전에, 마루야마의 베버 이해의 시대적 성격을 먼저 들여다 보아야 한다. 그래서 동시에 바로 그 지점에서 나는 늘 세키몬 심학을 생각하게 된다. 마루야마는 이시다 바이간을 좀 더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물론 그러면 또 다시 한 번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상인계급이 성숙되지 못했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어려움이 더해지겠지만.
무사 대 서민이란 봉건사회의 기본적 신분 분열과 더불어 무사계급과 서민계급 내부의 계층적 신분적 구별과 고정성이 국민적 통일의식의 생장을 방해했다. 신분적 계층은 지역적 분포도 지녀 수직적인 신분적 격리는 수평적 지역적 할거와 얽혀 특유의 섹셔널리즘sectinalism을 낳는다. 근세 일본의 봉건제는 집권적 봉건제로도 불리는데, 도쿠가와 막부는 전국의 주요 도시와 광산을 통할하고, 화폐주조권을 독점하고, 전국의 다이묘를 갈아치울 수 있는 등 강한 중앙권력적 색채가 있었으나, 실질은 여전히 하나의 봉건 영주로 직할영지天領 이외의 지역은어디까지나 쇼군에 예속된 다이묘를 통한 간접지배양식을 유지했다. 다이묘는 독자적 입법권・재판권을 행사했고, 번 사이의 교통은 어려웠으며, 번 내부의 무사藩士들도 수십개 계층으로 나뉘어져 있다. 각각의 신분도 대체로 고정적이다. 신분 내지 격식에 의한 사회적 결합상태는 서민에까지 확산되어,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국 내 수천만 인구는 수천개의 상자 속에 갖히거나 수천개의 장벽으로 구획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런 환경에 처한 의식이 고루하고 협애하여 공공성・개방성이 결여된 것은 자연스럽다.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도 일본인들은 눈앞만 본다고 말했으나 자신도 외환에 경종을 울린 하야시 시헤이林子平를 처벌하는 인물이었다. 정치적 책임의 독점적 담당자인 무사 계급 조차 그 책임의식은 오로지 직접적 주군만을 대상으로 하며, 『葉隠』에서 공公이란 부처, 공자, 신겐도 나베시마鍋島 가풍을 모른다며, 봉록에 의해 맺어진 관계만을 말한다. 번의 상호 격리와 대립의식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한덩어리가 되었던 삿쵸薩長도 제휴 직전까지 갈등이 극심해서 메이지유신의 지사들은 정치적 활동을 다소 자유롭게 수행하기 위해 탈번脱藩이란 비상수단에 호소해야 했다.(473-475)
다음으로 지적되는 것은 단순히 무사와 서민의 이분법 만이 아닌 일본 전체의 분할 구도였다. 마루야마는 이를 섹셔널리즘이라고 말하면서, 일본은 상자구조라는 후쿠자와 유키지의 주장을 여러 곳에서 반복한다. 마루야마는 여기서 일본에서의 공公의 문제를 살짝 언급한다. 대중적으로 무사도를 전파하는 대표적인 책인 『하가쿠레葉隠』는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있다. 거기서 공자, 부처는 물론 심지어 전국시대의 명장 신겐이라도 자신이 속한 특정 다이묘의 가풍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실로 강력했던 일본의 분열. 일본 지방자치의 전통이기도 하고, 현대에서는 온갖 흥미로운 관광자원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메이지유신 이후에는 또 놀라운 통일을 이루어낸다. 일본 해석의 열쇠가 되면서도 동시에 어려움으로도 다가온다.
근세 봉건제의 사회기구 자체는 국민적 통일의식 형성의 결정적 질곡이었고, 도쿠가와 막부의 현실 정책은 그런 기구를 최대로 이용하여 통일의식의 아래로부터의 성숙을 저지시키려 했다. 쇄국은 이를 위한 최대의 정책이었다. 막부가 국내적 통제를 위해 채택한 정책은 모두 분할지배divide et impera의 목적에 기여했다. 한편으로 막부정치 윗분의 뜻御上意의 절대성을 관철시키고, 정치비판은 불경으로 국민의 자발적 정치지향을 억압하며, 봉건적 할거에서 생기는 시기심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서로 감시・견제하게 했다. 위로는 다이묘의 통어統御에서 아래로는 고닌구미五人組까지. 막부의 관직인 메쓰케目付(감찰)란 막부의 통제원리를 압축적으로 표현하며, 각 번 내부의 통제원리로 정교한 스파이 체제를 만들었다. 막부권력은 쇄국체제가 붕괴할 때까지 정치적 반대파로 성장할 우려가 있는 사회적・사상적 동향은 잘라냈다. 260년의 이런 통치가 만들어낸 국민정신을 후쿠자와 유키치는 인민들은 아무 일도 없기만을 바라는 마음뿐이라 표현했다. 도당徒党과 집의集議의 구별을 논할 기력도 없고, 정부에 의지하고, 국가에 관여하지 않으며, 모두가 자기 집안에 틀어박혀 있다고 개탄했듯이, 국민 상호간의 불신과 의심이 만연했고, 보신주의와 오불관언 식의 자기 이익만을 챙기는 근성이었다.(476-477)
분할통치를 가능하게하고 완성시킨 감시체제 또는 감찰제도는 막부권력의 강한 힘이었다. 사회전체를 분할하는 것 자체가 막부권력의 목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 반대파는 성장하지 못했으며, 국민 상호간의 불심과 의심은 컸다. 마루야마는 막부가 외세에 대항하지 못하고, 개항 후에 몰락한 것은 자업자득이라고 말한다.
1853년 페리가 우라가浦賀에 도착해 개항을 요구하자, 막부는 사태를 조정에 알리고 에도의 다이묘들에게 자문을 구하며 거국적 협력을 요청함과 동시에 조선과 대포주조를 허용하녀서 군비강화를 촉구했다. 그러나 생산력과 낮은 기술수준은 감출 수 없었다. 막부는 그동안 근대적 생산과 기술을 막고, 난학자는 체포하고, 사전 간행 요구는 끝내 기각하는 등 국민들을 외국사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게 만들려 했다. 그러니 막부의 페리대책자문에 응한 다이묘나 번사들의 상소문이 대부분 우물안 개구리 같은 좁은 소견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미토의 영주 나리아키斉昭 조차 전함 대포에 대해 칼과 창으로 맞서자고 했을 정도다. 다카시마 슈한高島秋帆은 조선침공(임진왜란)을 언급하며, 훈련된 베테랑 병사도 조선의 진흙탕에 빠져 중국 국경을 넘지 못했는데, 중국을 항복시킨 영국과 맞서 싸울 수 없다고 비판했다. 막부는 개항이 불가피함을 깨달았을 때, 국내의 맹목적 양이론을 억누르고 추스르는데 부심하게 된다. 우물안 개구리 같은 소견이라도 일치단결했으면 나았을 테지만, 국내에 서로 믿지 못하고 시기하는 풍조가 심각했다. 센다이仙台 번사 오츠키 헤이지大槻平次도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도 요코이 쇼난横井小楠도 사람들의 마음을 화합해야 한다고 말했다. 막부와 이에 가까운 영주들이 개항요구에 응하면서 염려한 것은 막부의 통제력이 느슨해지는 틈을 타 일어날 제후 내지 일반 백성들의 반역이었다. 봉건세력은 외부를 두려워하기 보다 내부를 경계했다. 순수 피치자인 서민에 대해 막부와 각번의 봉건지배자들의 깊은 의구심이 집중되었다. 서민들이 오랑캐와 접촉하고 회유당하거나 계책에 빠질 수 있었다. 우민관에 기초한 서민에 대한 불신, 외국세력과의 결탁에 대한 의혹이 대외관계가 밀접하게 됨에 따라 어떻게 지배층에 뿌리를 깊게 내기게 되었는지 하는 점은 당시 문헌에 흔하다. 일부 상인들은 준엄한 단속망을 뚫고 외국 선박과 활발한 밀무역을 전개했다. 그렇다고 우민관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파렴치함이야말로 상인들을 가치질서의 최하위에 위치하게 한 봉건체제 및 도덕에 의해 반사적으로 생겨난 부산물이다. 일반 서민은 모든 정치적 능동성을 부정당하고 통치의 객체로서 사생활의 좁은 부분으로 내몰려온 그들에게 갑작스레 국민적 책임의식 같은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1864년 솔선해서 양이를 한 쵸슈가 서양연합함대의 공격으로 시모노세키의 포대를 점령당했을때, 일본인들은 서양부대에 우호적 태도를 보였다. 위에서의 국민에 대한 불신과 아래로부터의 정치적 무관심은 서로 맞물려 있었다. 이것이 봉건적 지배관계가 가져온 현실이다. 요코이 쇼난은 1860년에 일본은 분열되어 있다며, 페리가 일본을 무정부 국가라고 본 것은 뛰어난 직관이라 평가했다. 막부가 제후에 대한 제도는 병력을 소모시키려는 것으로, 온갖 사역을 시키면서 부담은 각 번의 피폐한 백성드에겍 넘어갔고, 권부의 막강한 권력에 의해 도쿠가와 가문 만의 편리를 도모하는 사적인 운영으로 결코 천하를 편안하게 만들지 못했고 서민들을 자식처럼 여기는 정치・교육을 시행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477-484)
막상 페리가 도착하여 개국을 요구하자, 다이묘들은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소견을 발할 뿐이었다. 오늘날은 당시 사료가 더 알려져서, 나가사키에서 무역을 허락하는 대가로 요구했던 풍설서에는 반년전부터 페리 제독의 함대가 대서양을 돌아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다이묘들도 이를 회람한 바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국론의 분열은 한데 뭉쳐서 양이를 주장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특히 막부는 대외 개항보다 국내 제후나 서민들의 반역을 더 우려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서세동점의 시기에 강제적으로 개국을 하는 나라들의 일반적인 현상이다. 막부 지배층은 제후들을 믿지 않았으며, 막부와 제후는 모두 서민을 믿지 않았다. 그들 역시 갑작스레 정치적 책임을 담당하려고 하지 않았다. 지난 가을 꽤 유행한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드라마가 그려낸 구한말의 모습에서 가장 큰 허구가 국민의식을 가진 수많은 장삼이사들의 등장이다. 의병이라는 이름으로. 의병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너무 시대를 끌어올렸고, 과장되어 있다. 그들의 활약은 훗날의 의열단을 연상시켰다. 마루야마는 일본의 국민형성에 대해 솔직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메이지 정부는 국민형성을 위해 노력했지만, 실제 국민이 형성된 것은 러일전쟁에 가서였다. 전장에 대한 동시적 체험과 언론 매체의 영향 등으로.

3장 3절 전기적 국민주의의 제 형태: 해방론-부국강병론-존황양이론-이들의 역사적 한계
봉건체제와 그 밑에서 양육된 의식형태가 국민적 통일의식에 기초한 국민의 국가적 질서에로의 응집을 강인하게 저지했다. 메이지 유신은 일군만민一君万民의 이념에 의해 국민과 국가적 정치질서 사이에 끼어있는 장애물을 제거하여 국민주의가 나갈 길을 열게 된 획기적 변혁이었다. 메이지유신이 문제해결의 전제로 국민주의는 바로 그 지점부터 전진하기 시작했으며, 물론 그 전제 자체는 봉건제의 태내에서 준비되어 가고 있었다. 이는 도쿠가와 사회구성의 해체과정이며, 이데올로기측면에서 보면 봉건적 관념형태를 많건넘건 넘어서는 사건의 성숙과정이다. 국민주의의 전단계로서 전기적 국민주의 사조를 보자. 모든 반 내지 초봉건적 사유형태는 그 자체에 있어 근대적 국민주의를 위한 자리를 만들어 준 셈이다.(485-486)
왜 굳이 메이지유신을 국민주의의 시작이라고 단언할까. 이 점은 앞에서도 반복되어 왔지만, 멘이지유신 이전으로 유구하게 거슬러 올라가는 일본 국민의 전통사상이라는 국학과 근대초극론을 단절시키기 위해서이다. 또한 국민주의 전기적 형성, 다시 말해 국민주의의 준비로서의 전통사상의 해체과정을 보는 것은 순수 일본의 전통사상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일본 국민이 형성되었다는 점을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다.
외국 군함의 도래는 국민적 통일 관념을 싹트게 했고, 신국 일본과 존황 관념은 근세를 통해 계속되고 있었고, 교통과 시장의 통일은 통일국가의 내적 조건은 준비되고 있었다. 종교적 윤리적 정서로서 존황 관념에 정치적 성격을 부여한 던서는 외세와의 대면이다. 외국이라는 사상은 일본국이라는 관념을 자극했다. 국외의 경보가 국민적 정신의 집중적 표현인 존황론을 봉건사회 전복의 지도이념으로 끌어올리는 데 몇 단계가 있었따. 외세의 위협은 페리 내항 7, 80년전, 메이와明和 안에이安永 무렵부터 북쪽에서 왔다. 북방에 대한 군사적 대비 문제와 관련해 대외적 위협에 대한 거국적 관심이 요청되었고, 이런 해방론海防論이 전기적 국민주의의 1단계이다. 하야시 시헤이林子平는 일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국방과 관계가 있는 조선・유구・에조의 지리를 알아야 하며, 해양국가 일본의 지위를 논했다. 오하라 고킨고大原小金吾는 외국 오랑캐는 천하의 사람과 힘을 합해 방어해야 한다며, 비밀주의를 버리고 군비기술을 균등하게 할 것을 역설한다. 간세이寛政, 분카文化, 분세이文政에 이르자 러시아와 영국이 침략과 폭행을 저질렀고, 해방론도 첨예해져서 고가 세이리古賀精理의 국내체제 강화론은 국방에 대한 관심의 결여에 분개하고, 위아래가 멀어져서 변고라도 있으면 무너질 것이라며, 언론을 열어 막히고 가린 것을 막는 것을 국방대책으로 들고 있다.(486-489) 당시 근세사회의 기구적 모순이 격화되어 사다노부의 간세이의 개혁을 실시할 정도로 격심한 재정적 곤궁은 농민들의 세금 부담은 잇키와 우치고와시가 만연되게 되었다. 현실적인 재정상태로 군비강화가 장벽에 부딪히게 되자, 그 전제조건으로 국내 경제적 앉어을 도모하자는 부국강병론으로 옮아가게 되었다. 해방론자들도 토착론이나 에조치개발론을 거론하기는 했으나, 기술적으로 어떻게 국방을 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국내의 경제적 궁핍의 타개가 대외적 위기를 극복하는 중심과제로 발전했다. 궁핍함이 근세 사회에 깊이 구조적으로 뿌리를 내린 것이라는 점을 알아차렸고, 그 대책으로 제도적 변혁의 의미도 지니게 되었다. 그런 변혁의 수행은 정치적 집중을 필요로 하는 만큼 다이묘 체제를 벗어나 중앙집권적・절대주의적 색채를 띈 국가체제의 구상을 성숙시키게 된다.(489-490)
전기적 국민주의 즉, 국민주의 이전의 봉건제 해체를 위한 사전 준비로 먼저 해방론이 등장한다. 처음은 러시아 그 다음은 영국이라는 외국세력을 막아야 한다. 처음에는 군사적 기술에 대한 관심이 다음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한데 모아야하는 국내 개혁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해야한다는 정책으로 전개되어 나간다. 체제에 들이닥친 위험을 해결하기 위한 데서 개혁안이 제기되면서 봉건체제가 내부로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집권적・절대주의적 부국강병론을 가장 조직적으로 제시한 사상가는 혼다 도시아키本田利明와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를 들 수 있다. 그 밑바탕에는 대일본국大日本国 내지 황국皇国 관념이 흘렀고, 이는 난학을 통해 양성된 세계 의식과 보오나되고 있으며, 중화 관념에서 해방되어 있다. 그들은 모두 동양이 서양에 대해 뒤떨어졌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그들의 국방론은 소극적인 쇄국이 아닌 외국과의 무역을 통해, 해외 경략에 의한 적극적 방위체제로 노부히로는 宇内混同 즉 세계통일을 언급한다. 쇄국정책의 시기에 해외 운송과 교역을 주장하고, 공업생산과 상업을 국가가 관리하는 식산흥업을 도모하고, 일본을 세계에서 가장 풍요롭고 좋은 나라를 만들려고 했던 근본사상은 비약적이며, 유토피아적이며, 제도는 절대주의 성격을 띈다. 근대 국민국가에 선행하는 절대주의의 역사적 역할은 봉건제의 다원적 권력을 중앙으로 일원화하고 정치적 정통성을 최고 군주가 독점함으로서 중개세력을 해소하고, 국법의 지배에 복종하는 동질적이고 균등한 국민을 만드는 것, 나아가 박스 베버가 말하는 행정직의 행정수단으로부터의 분리를 통한 근대적 관료층과 군대가 형성되는 것이다. 도시아키와 노부히로의 부국강병론에도 불철저하기는 하나 다원적인 정치력을 가급적 통합하여 한편으로 국군国君 내지 군주와 다른 한편으로 만민万民으로 중간세력을 분해시키려는 경향이 드러난다. 도시아키가 사대급무를 제시할 때, 무력, 산업, 에조, 에도, 오사카를 수도로 하면 풍요롭고 강한 나라가 될 것이며, 천하의 만민은 모두 국군에게 충성과 절개를 다할 것이며, 믿음이 천하로 퍼질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국민이 한덩어리가 되어 새로운 질서에 내면적으로 복종하는 상태이다. 해외 운송과 교역을 상인 맡아, 무사와 농민이 곤궁하니 부유한 상인을 억누르라는 것은 부유한 상인이 중간세력으로 성장함으로 국민들이 균등성이 파괴되고 국가 통치자에 의한 국민적 통일을 위태롭게 만든다는데 대한 경고였다. 국가 통치자는 무사, 농민, 상인 모두에게서 초연한 존재로 그려진다. 노부히로가 세계를 일본의 군현郡県으로 하고, 삼대三台, 육부六府, 팔민八民의 수통垂統 조직은 사농공상의 전통계급을 해체한 후 팔민으로 나누어 육부에 배속시킨다. 무사 계급은 군주 앞에서 다른 사회계층과 만민을 구성한다. 다이묘의 석고는 20만에 한정되고, 군주가 임명한 관리에게 복종하며, 상인도 부교까지는 등용될 수 있다. 주구너자가 일본전국을 손발처럼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것, 국내에서 절대적 지배를 확립하는 것이 해외경략의 전제조건이다. 수통국가에 있어 황거를 에도에 두고, 군주 직속 관리와 병사 조직이 지키도록 하고, 도시아키도 인재등용과 관료조직을 구상하는 등 근대국가 구조를 부분적으로 묘사한다.(491-495) 도시아키나 노부히로의 절대주의적 식민제국의 국군国君은 황거皇居라는 이름에서 보이듯 정치적 패자와 전통적 신성함을 지닐 것이 요청되었고, 자국의 역사적 전통 속에서 존립의 정신적 지주를 찾아내려 한다.(495)
부국강병론은 봉건사회의 해체기에 등장한 절대주의 사고방식이다. 여기서 마루야마는 앞에서 제기한 이들 사상의 한계나 차이는 언급하지 않는다. 이 부국강병론은 사농공상의 해체나 일군만민의 사고방식의 단서를 가지고 있다고만 말한다. 해외진출과 제국주의적 식민지 국가를 내세우는 이들의 유토피아적 사상에는 정치적 지배자의 종교적 권위, 전통적 신성함, 즉 존황론의 가능성을 밑에 깔고 있다.

막말의 거대한 하나의 정치적 사회적 흐름을 형성한 존황양이론尊皇攘夷論을 훗날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는 국가가 봉건으로 분열되어 있으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만세일계의 제실이 드러나게 되었고, 국가가 어려움에 처하자 국가의 분열을 통일시키겠다는 생각이 양이당이 되고 근왕당이 되어 결합한 것이 존왕양이였다고고 말한다. 이 국민주의 대운동은 존황양이라 해도 현저하게 다른 흐름들이 병존하고 있다. 양이론자는 쇄국론이 아니라서 열렬한 양이론자인 동시에 적극적 개국론자도 있었고, 개국론이라고는 하나 보수적인 쇄국론인 사람도 있었다. 존황론이 막말에 정치적 표어가 되었어도, 반드시 반막反幕론이나 도막倒幕론을 의미하지는 않았고, 반봉건도 아니었으며, 존황경막론尊皇敬幕論이나 공무합체론公武合体論을 거쳐 도막론까지 변혁의 정도를 달리하는 주장이 스펙트럼처럼 형성되어 있었다. 양이인가 존황인가하는 주관적 용어가 아닌 복잡한 정세 속에서 어떤 사회계층의 어떤 사회적 입지에서 주장되는가 하는 점이 구체적을 분석될 때 존황양이론의 흐름은 역사적 전모를 드러낼 것이다. 존황양이를 단순하게 국민적 통일과 국민적 독립이란 근대적 국민주의 명제로 직접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없다. 제후의 양이론에도 막부의 무사안일주의적 개항론에도 지배적 특권의 동요를 두려워하는 이해가 작용하고 있었다. 알코크가 지배자들은 인민 대중이 지적, 도덕적 계몽된다면 근본적 변혁이 초래될 것을 우려하기에 상업적 이익에도 불구하고 외교관계의 수립과 통상의 진전에 적의를 보내고 있다고 말했고,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도 교역이 허락되면, 상인은 이익을 얻고 무사는 망할 것이라고 말했다.(495-498) 알코크는 지배층의 특권유지를 위한 양이론의 취약성을 꿰뚫어보고 열국의 강격조치를 주장하면서도, 일본인의 애국적 감정의 열광성에 불을 붙여 대중운동으로 전화될 것을 우려했다. 막말의 존황론이 일본을 식민지화, 반식민지화의 운명에서 구해내는데 일조한 힘이라면, 이는 서생들의 존황양이론이었다. 제후들의 양이론은 존황경막론 내지 공무합체론과 결부되어 있엇지만, 서생들의 존황양이론은 얼마 후 반막부 내지 토막론討幕에 합류했다. 막말의 존황양이사상은 전자의 우월함이 후자로 이행해가는 과정이었다.(497-498)
얼마전 BTS의 일본 공연장 앞에서 누군가 양이攘夷라고 크게 쓰여진 깃발을 보았다. 일본의 과거의 인물들이 보면 어떤 생각을 할는지. 반면 일에서 양이라고 하는 사상적 흐름이 현대로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도 흥미로운 관심사라고 하겠다. 막말의 존황양이론의 구조는 복잡하기 그지 없다. 존황론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처음에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서 존속하다 서생들의 이데올로기 즉 전복의 이데올로기로 전환되게 된다. 며칠 전에도 천황의 탄생 축하연이 한국에서도 개최되었다. 군주국가 일본의 경축행사라 이해가 안가는 바는 아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실은 일본이 군주국인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천황제는 그 뿌리가 아주 깊고, 실로 근대 일본 전체을 형성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니까 존황론을 볼때도 그것을 천황제와 연결지어 이해해야 한다. 근대 천황제는 존황론의 바탕 위에서 피어난 꽃이니까.
후기 미토학에 있어서 존황양이론을 가장 명확하게 제시한 것은 아이자와 세이시사이会沢正志斎의 『新論』이다. 이 책은 먼저 국체의 위엄을 밝히고, 세계 정세와 구미 열강의 동아시아 침략 방책을 서술하며 방위체제를 긴급조치와 근본대책으로 논한 조직적 저작으로 막말 사상계에 놀랄만한 영향을 미쳐, 막말 지사들의 성전聖典으로 간주될 정도였다. 여기에 존양론의 국민주의 사상으로서의 전기적 성격이 뒤섞여서 나타났다. 존양론의 밑바닥에 피지배층에 대한 근본적 불신, 서민층이 외세의 지원을 믿고 봉건적 지배관계를 뒤흔드는 데 대한 공포심이 흐르고 있었다. 이런 불신과 공포심은 우민愚民 사상을 발상지로 하고 있다. 또 부국강병론자들에게 백성의 마음이 한번 떠나면 부유하고 강한 것이 오랑캐에게 넘어갈 것이라며, 난학에 대해서도 오랑캐들이 이를 이용해서 우민을 미혹시킨다면, 그들이 짐승처럼 변해서 덤벼들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야스의 봉건적 통치는 현명한 계산과 위대한 계략이지만, 현제의 국제적 위기에서는 약점이 되고 있다며, 백성을 어리석게 만들고 군사력을 약하게 만든 것은 통치를 위한 계책이지만, 폐단을 바로잡아야 한다며 우민정책의 한계를 지적하고, 권력의 분산(농병제)을 통해 나라의 온힘을 통해 외적에 대응할 것을 주장한다. 여기에 국민주의의 내재적 논리가 있다. 그러나 그가 전개한 국방 국가체제, 무너지지 않는 체제不抜ノ業를 시행하려면 백성들로 하여금 따르게 해야지 알려고 하면 안된다고 한다. 이러한 우민관 후기 미토학 전체에 얽혀 있다. 후지타 토코藤田東湖는 고대의 무력을 높이는 기상이 귀족에서 사라지고 무사계급에 옮겨갔으며, 평화로운 날이 오래 지속되어 간악한 백성과 교활한 오락캐들이 일어날까 염려한다고 말했다. 영웅이 천하를 고무할 때는 백성이 움직이지 않을까 염려하지만, 용렬한 사람이 한 시대를 호도할 때 백성이 움직일까 걱정한다는 것은 『新論』의 유명한 명제이다. 후기 미토학의 양이론 널리 국민과 더불어 대외방위에 임하려는 근대적 국민주의와 반대로 행여 백성들이 움직일까봐 걱정했던 것은 아닐까. 치자와 피치자라는 고정 관념 위에서 국가적 위기를 책임지고 떠맡아야 할 사람은 고정된 치자들에서만 찾았다. 이런 입장에서 양이론과 결합된 존황론은 봉건적・신분적 계통제에 저촉되기는커녕 후자의 기초를 다지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499-502) 아이자와의 존황론이 경막론을 수반하듯히 후지타 유코쿠藤田幽谷도 후지타 토코도 황실은 봉건제의 계층적 군신관계의 맨 윗자리에 있고, 자신이 소속된 주군에 복종하는 것이 존황의 구체적 실천이다. 막부가 황실을 존경하면 위아래가 서로 떠받쳐 모두 화목하게 될 것이다. 명분을 바로하는 것은 계층적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지 일군만민이 아니다. 미토학은 제후의 입장에서 나온 존양론의 이론적 정식화이다. 미토학의 실천적 영향은 넓은 범위로 침투해, 모든 존황양이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이루는 모습을 보였는데, 한편으로는 국체론이 시무론과 결부되어 존황론과 부국강병론이 떼어놓을 수 없는 한덩어리로 강력하게 주장되었다는 점과 존황론이나 부국강병론이 구체적인 내용을 묻기 전에 정치적 슬로건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미토학의 핵심인물인 나리아키斉昭와 막부 각료들의 대립이 미토번이 친번親藩이라는 사실 때문에 강조되어, 막부말기의 막연한 현상을 타파하려는 제 동향이 표현된 것처럼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미토학적 의미에서 존황론 내지 양이론이 존양론 전체를 대표할 수 있었던 것은 안세이安政, 만엔万延 시대까지며, 나리아키나 세이시사이가 만년에 개국론으로 바뀌었을 무렵 존양론의 분화가 분명하게 되어 미토학적 입장은 사쓰마薩摩의 시마즈 히사미쓰島津久光의 주장과 행동에 계승되어 과격파 존양론과 예리하게 대립했다.(503-504)
후기 미토학은 제후 쪽에서 본 존양론으로 아이자와의 주장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를 국민형성의 관점에서 보면, 농병제를 통해 권력을 분산해야 한다는 국민주의 전기적 논리가 보이기는 하나, 전체적으로 우민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우민에 대한 불신과 공포를 벗어나지 못했다.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고정관념을 벗어나지 못했고, 일군만민 사상이 아닌 천황을 내세우면서 봉건적 계통제를 다시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존황론이 존양론의 대표인 것으로 알려진 이유이다. 하나는 국체론과 시무론의 결합으로 구체적인 대안으로 여겨졌다는 점, 둘째는 무엇보다 정치적 슬로건으로 강력했다는 점이다. 그러니 존양론을 추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오해가 발생하고, 개국론으로 전화되기에 이른다. 위로부터의 존양론은 어디까지나 구체제 유지에 방점을 찍고 있었지만, 해체로의 방향도 막을 수 없었다.

아이자와나 후지타 부자의 존양론이 분세이文政, 고카弘化 연간에 결정적으로 형성되었다면,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존양론이 사상적으로 성숙한 것은 페리가 내항한 이후다. 그는 봉건적=지방적 할거 근성을 타파하고 대외적으로 다가올 중대한 위기에 대한 방위를 황실天朝에 대한 거국적인 의무임을 부각시켰다. 천하는 황실의 천하이자 천하의 천하이지 막부의 사적인 천하가 아니라며 막부는 제후를 이끌고 천하의 치욕을 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언로를 열고 논의가 모여야 한다며 수평적인 지방적 폐쇄성과 수직적 신분적 폐쇄성에 거국일치의 가장 큰 장애물을 보고 있다. 서로 협력해서 당연히 교활한 오랑캐를 물리쳐야 한다. 가장 염려스러운 것은 좋은 의견들이 가리고 막히는 것이다. 조정에서 정치를 논하던 것이 사라졌다며, 정치・외교에 대한 찬반의 자유로운 토론을 역설한다. 한편 막부를 존경할 줄 모른다면서 미토학적인 존황경막론에 머물러 있기도 하다. 그러나 막부가 페리와 화친조약을 체결했을 때, 그는 격분했다. 그는 본래 친구인 승려 게쇼月性의 토막론에 반대하며, 공무합체적 거국일치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가 칙허를 기다리지 않고 1858년 통상가조약의 조인을 단행하자 그의 입장은 일변하여, 천자의 조칙을 받들지 않은 쇼군의 죄를 토벌하여 주륙해야 한다고 말하며, 마침내 그의 존황양이론은 토막론에 이르렀다. 얼마후 안세이安政의 대옥이 시작되어 쇼인도 로쥬老中 마나베 아키카쓰間部詮勝를 공격하다 체포되고 이 때를 전후 그의 사상은 급진화하여 제후들도 사치스러운 생활에 젖어 자신과 자기 가문만 생각하여 시세의 흐름에 아첨하고 있을 뿐이라며, 초모草莽의 지사 내지 천하의 로닌浪人에게 구하게 되었다. 우메다 운핀梅田雲浜도 이 시기 제후들은 영지를 잃을까 걱정할 뿐이라며, 황실 권위는 빛을 더한다고 말했다. 존황양이론은 미토학적인 단계로부터 결정적으로 비약하고 있다. 쇼인은 도쿠가와 정부가 존재하는 한 결국 미러영프의 통제를 받을 것이고, 천자가 계시지만, 조정 귀족은 막부 보다 더 문제가 심하다며, 이대로는 3천년 독립을 유지한 대일본이 하루 아침에 속박을 받을 것이니 나폴레옹 같은 사람이 나와 자유를 외쳐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의 대외적 자유독립을 양 어깨에 짊어질 사람은 막부, 제후, 공경 등 어느 봉건 지배층에도 없으니 존양은 세상을 완전히 바꾸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며, 세상을 완전히 바꾸는 것今の世界の一変으로 과제를 실현하려 했다. 물론 그 구체성은 없지만, 일군만민에로의 방향을 막연하게 예감하며 처형장으로 떠났다.(504-510)
마루야마의 존양론에 대한 추적 혹은 전기적 국민주의에 대한 추적은 요시다 쇼인에게서 끝난다. 요시다 쇼인은 일본인에게는 영웅이지만, 다른 한편 일본 제국주의의 문을 연 사람이기도 하다. 요시다 쇼인도 처음에는 봉건제후 등 봉건지배층에게 의존했으나 마침내 봉건지배층을 포기하고, 그러나 그 자신도 새로운 세계상에 구체적인 모습은 없었고, 막연히 일군만민을 향했던 것이다. 존양론은 국민주의 이전에 국민주의에 문을 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일본의 국민주의는 어떤 국민주의냐는 질문이고, 그런 질문은 존양론의 성격에 있다. 결국 일군만민의 사상으로 전환되지 못했던 존양론이 가진 한계가 오히려 명확해 보인다. 그래서 그는 메이지가 근대적=시민적 이지 못했다고 말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살펴본 전기적 국민주의 사조를 전체적으로 훑어보면 그 사상의 내용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내면적 경향이 굵은 선을 이루면서 전체를 꿰뚫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봉건 사회의 다원적 분열이 외세에 직면하여 무력함을 드러냈을 때, 국가적 독립을 위한 국민적 통일의 요청은 대내적 정책에 있어 다음의 두 방향을 나타내게 되었다. 하나는 정치력의 국가적 응집에 대한 요구였으며, 다른 하나는 국민적 침투에 대한 요구였다. 초기 해방론은 한편으로 횡적인 지방적 할거의 부정과 거국적 관심의 요청이 다른 한편 종적인 신분적 격리의 완화(언로를 열어달라) 요청과 결합되어 있다. 중개 세력의 자립적 존재가 국가와 국민의 내면적 결합의 질곡을 이루는 이상, 이를 극복한 국민주의 이념은 집중화와 확대화라는 두 계기를 동시적으로 내포하면서, 변증법적으로 통일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구체화한다. 그런 정치적 집중의 방향이 부국강병론에서 절대주의적 체제로 결정적으로 강화되었고, 그런 집중이 최종적으로 귀속되어야 할 주체를 찾아 존황론을 표면에, 존황양이론은 그 사회적 담당자들을 봉건적 지배자로부터 초모굴기의 백성들로 옮겨갔다. 이는 막부 말기 사상의 공의여론公儀与論 사조의 대두 같은 역사적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페리가 내항했을 때, 로쥬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가 모든 사람의 견해를 물은 것은 중간세력 해체의 두 방향 최고 주체로의 응집과 국민층으로의 확대를 암시적으로 보여주며, 당사자의 의도를 넘어서는 국민주의 역학을 역사적으로 상징해 주는 것이다. 시종일관 압도적인 역할을 떠맡았던 것은 누구든지 쉽게 알 수 있듯이 정치적 집중이란 계기였다. 대외적 위기에서 우선적으로 요망된 것은 봉건적・할거적 정치세력을 일원화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만들어 국방력을 충실하게 하는 것이며, 이를 위한 전제로서 국민생활의 안정과 식산흥업의 진전을 주장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 정치적 관심을 더 넓은 사회계층으로 침투시키고 그것을 통해 국민을 종전의 국가 질서에 대해 책임없는 수동적인 의존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그들의 힘을 정치적으로 동원한다는 과제는 막연하게 제기되면서도, 전자의 움직임을 허덕이며 따라갈 뿐이다. 언로 요청, 신분장벽 완화, 하층 계급 인재 등용, 공의여론 등으로 구체화하면서도 정치적 권리를 아래로 침투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넘을 수 없는 선에 의해 한계지워져 있었다. 국가적 독립의 책임자는 봉건적 지배층 이외의 국민대중은 금새 문제의 바깥으로 내몰리고 만다. 현실적으로 국민들의 정치적 총동원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는 사회적 요인까지 파고드는 견해는 보이지 않는다. 쇼인이 마지막으로 찾아간 것은 초모의 지사였으며, 전기적 국민주의 사상에 있어 이같은 확대 계기의 취약성은 봉건적 중간세력이 강인하게 존속할 수 있게 해줌으로 오히려 집중는 계기 그 자체도 불철저한 것으로 만들었다.(511-513)
가장 눈에 띄는 주장은 중간 세력의 해체가 절실하다는 통치자와 국민을 적접 연결해야한다는 주장이다. 국가와 개인의 직접적 연결이다. 국가권력의 집중에는 성공했지만, 국민대중은 주체가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한계라는 주장. 그레고리 핸더슨 같은 사람이 소용돌이vortex이야기를 할 때, 한국정치의 중앙집중화 경향, 한국사회의 중앙집중화 경향을 이야기하면서 늘 문제 삼는 것이 중간집단이나 기구이다. 지역이나 정당 같은 중간 집단이 성장하지 못해서, 중앙권력을 위한 상승작용 외에 다른 생산적인 방향으로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일본 사회에서 마루야마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국민의 성장은 외려 이런 것인지 모른다. 조선시대에는 경화사족에게만 허용되던 중앙권력의 집중화가 바로 마루야마가 말하는 중간세력 증 삼남과 서북의 향반 즉 재지사족, 중앙의 무인귀족과 중인명문가 등 다양한 중간 세력이 식민지와 전쟁으로 몰락해 버리자, 국가와 국민의 직접적 연결 속에서 모두가 중앙권력을 지향하는 상승의 소용돌이를 만들었다면, 그것은 오해일까. 외세에 의한 구 지배층의 몰락이라는 우연적 계기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면.
식산흥업의 수행과 군비의 충실을 위해 많건적건 간에 요망된 정치력의 집중은 어느 것이나 다이묘 영지의 정치적・경제적 자족성을 넘어서는 것이긴 했지만, 그것을 타파하는 것까지는 구상하지 못했다. 이는 중심적 정치력의 귀착지를 조정에서 찾든 막부 중심으로 생각하든 차이가 없었다. 존황론이 토막론에 이르렀을 때도, 존양론자들의 대세는 번의 독자적 권력에 손가락 하나 댈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쇼인의 말기 사상 등에 일본의 대외적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전체 체제를 전환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을 예감할 정도이다. 이들은 부국강병론이나 존황양이론이 국민적 침투의 계기에 있어서는 물론이고 집권적 정치력의 확립이라는 방향에서도 봉건 기구의 마지막 철벽 앞에서 맥없이 주저앉았다. 이것이 국민주의 이론의 전기적 성격의 궁극적인 근거에 다름 아니었다. 이런 사상적 전개는 막부 말기 일본이 현실적으로 걸었던 정치적 통일과정과 기본적 흐름에 완전히 대응되고 있다. 외국배의 도래를 계기로 막부 권력이 이완됨으로써 초래된 국내적 분열과 무정부적 혼란을 극복해야 할 정치력은 서민들 사이에서 성장하지 못했다. 왕정복고의 정치적 변혁은 봉건적 지배층의 자기분해 과정에서 과격파 공・경・하급무사들과 기껏해야 서민들의 상층부를 주요한 담당자로 해서 이루어졌다. 막부가 소멸한 후 제일 먼저 출현한 정치형태는 조정의 리더십 하에 웅번들이 서로 연합한 것이다. 공의여론 사상이 거둔 결실은 이것이다. 애초부터 그것을 봉건적・다원적 통치형태의 단순한 계속 내지 변형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구미열강의 중합을 느끼면서 국가의 독립을 온전히 하기 위해서 정령의 귀일에 의한 부국강병 정책이 초미의 과제로 다가왔다. 군비의 근대화와 식산흥업은 막부 말기 막부 자신에 의해서 시도되고 있었고, 유신 정부를 구성한 서남웅번들은 그 점에서 가장 앞서 있었다. 봉건적 권력은 말기 단계에서 자기보존을 위해 이질적 근대 산업 및 기술에 의거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절대주의적 체제의 수립은 조정과 막부 거의 모두의 보편적 과제였다. 문제는 단지 그 지도력을 둘러싼 투쟁이었다. 그런 한 순수하게 봉건적・계통적 분권 조직은 이미 존립의 여지가 없었다. 그럼에도 중개 세력의 배제가 서민층의 능동적 참여 없이 중개 세력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수행되었다는 점이 근대적 국민국가를 형성하기 위한 유신의 제 변혁의 성격을 결정짓는 요인이었다. 전국 인민들의 뇌리 속에 국가라는 생각을 갖도록 만든다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말은 새로운 메이지 사상가들의 과제가 되었다.(514-516)
마루야마는 반복적으로 메이지유신의 한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결국 메이지유신으로 성립한 정부형태란 막부의 소멸 후 조정을 중심으로 서남웅번의 연합이었다. 물론 봉건적・다원적 통치형태의 계속이나 변형은 아니다. 막부 자신과 중요한 번들이 이미 부국강병, 식산흥업, 군비강화에 앞장서고 있었다. 막부를 제외한다면, 그것에 가장 앞장섰던 이들이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중개 세력의 배제는 중개 세력을 구성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물론 그렇다 어떤 혁명에서도 대항 엘리트들의 존재와 향방이 혁명의 성패를 결정짓는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는 대중동원조차 없이 이루어졌다. 그 점이 이루의 메이지 국가의 성격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마루야마의 주장은 국민국가야말로 이제부터 사상가들이 이룩해야할 과제라는 것이다. 아쉬운 것은 이 마지막 장에서 천황제에 대한 평가가 빠진 것이다. 존황론으로 모든 논의를 몰고 간 이상 그 결론은 천황제에 대한 평가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천황제에 대한 논의는 전쟁이 끝난 이후에야 비로소 마루야마에게도 가능했던 것이다. 단순히 현실적 제약을 넘어서서도 그렇다.

2018. 12. 10.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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