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3).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真男, 『일본정치사상사연구日本政治思想史研究』, 김석근 역, 한국사상사연구소, 통나무(東京大学出版会), 1995(1952).

2장 근세 일본정치사상에 있어서의 자연自然과 작위作為: 제도관의 대립으로서의

2장 1절 이 글의 과제
도쿠가와 시대에는 학문이 종교에 대한 의존을 벗어나 어쨌거나 자립적인 것이 되면서 현실성과 사회성을 현저하게 드러내긴 했으나 특수한 예외를 제외하곤 다양한 입장 내지 학파들이 거의 모두 봉건적 사회질서를 무조건적으로 긍정하고 불가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논의를 전개함으로 정치적・사회적 측면을 평면적이고 단순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의 학문은 치자 세계의 학문으로, 학자들은 정부라는 새장에 갇혀있다고 말했고, 근세사상을 지배하던 유학이 정부의 전제專制를 돕고 윤색시켰다고 평가한다. 존황론도 도쿠가와 막부가 조정으로부터 정권을 위임받았다는 형태로 막부를 인정하고 있었고, 정세가 급박해져 존황론이 토막討幕 이데올로기로 나간 상황에도 봉건 사회질서 그 자체의 변혁은 고려하지 않았다. 막말에서 메이지 초기의 사상 문헌을 시대순으로 훑어보면, 1871~2년의 일련의 개혁들, 페번치현, 신분제 정리, 직업선택의 자유, 토지매매 금지 해제 등을 전후하여 근대적 입장에서 봉건제를 비판하는 주장이 갑작스럽게 잇달아 쏟아져 나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319-320)
일본에서 실제 근대적 입장의 사상은 메이지 4~5년(1871~2)을 전후해 급속하게 쏟아져 나온다는 점. 그렇다면, 봉건사회를 비판하는 사상은 미리 생성되지 않았다는 점이 마루야마가 주목하는 지점이지만, 여기서 거꾸로 생각해 볼 때, 사상의 밑바탕을 살펴보려는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하게 된다. 주목할 점은 거꾸로 근대 사상이 갑작스럽게 쏟아져 나왔다는 점이다. 물론 와타나베 히로시는 그렇지 않다고, 개국과 문명도 일본에 그 나름의 사상적 기반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근세 일본의 사상이 정치적 귀결점을 같이한다고 해서 그런 학파적 다양성을 섹트적인 대립으로만 보고 사상적인 정체성停滯性만 본다면 정당한 견해라 볼 수 없다. 현상적으로는 갑작스러워 보여도 내부 깊은 곳에서 낡은 것의 점차적 해제가 먼저 이루어지고 있다. 이른바 개화사상이 외래의 것이라 해도, 재래의 안의 것이 변질되어 있었기 때문에 거부감 없이 수용할 수 있었다. 시민 사회력의 미성장이나 산업자본의 미성숙이 근세 일본 사상이 명백한 반봉건의식에 이르지 못했다해도, 봉건적 관념 형태의 내면적 부식을 부정할 수는 없다. 체계적 구성에 한걸음 들어서 본다면, 메이지유신 이후의 근대사상의 논리적 광맥을 찾아낼 수 있다. 1장에서 유교사상의 구조의 자기 분해를 사유양식의 전체로서 내재적 추이에 중점을 두었다면, 여기서는 근데 일본 유교사상의 전개가 봉건적 사회질서를 보는 시각 내지 기초지워주는 방식에 있어 어떤 차이점으로 나타났는가, 그런 차이점의 보편적 의의는 무엇인가를 살펴본다. 주자학도 소라이학도 봉건적 지배관계 자체를 절대시하지만 그 논리적 과정은 정반대이다. 마루야마는 그런 대립을 자연自然과 작위作為라는 두 개념을 지표로 설정하고, 그런 개념의 대립이 봉건 사회의 틀 내에서의 Wie의 문제에 머물지 않고, 중세적 사회=국가제도관과 근대적・시민적인 그것과의 대립이라는 세계사적인 과제를 내포하는 이유를 밝히고, 나아가 메이지 초기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양상을 검토한다.(321-322)
새로운 사상이 없다고 일본이 사상적으로 정체했다고는 볼 수 없다. 내부에서 변질했기 때문에,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근대 사상은 외래적인 것으로 본다. 이 장에서 마루야마가 주목하려는 것은 ‘봉건적 사회질서를 보는 시각 내지 기초지워주는 방식’이라는 말로 표현되어있지만, 이것을 근대정치사상의 말로 하면, 당연하게도 주권이론 또는 사회계약론이다. 구체적으로 이론화되지 않았다면, 그는 어떤 사회적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기초에 대해 탐색하겠다는 이야기이다. 구체적으로 개인 간의 사회계약에 기초한 자유로운 사회상을 꿈꾸지는 못했을 지라도 그런 논리가 성립할 수 있는 기반, 다시 말하면 사회계약에 의해 성립된 주권이론 같은 것을 발견할 수는 없는지. 그것을 그는 유명한 자연과 작위의 대립에서 찾으려 한다. 다시 헤겔로 돌아가서 대립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근세 일본의 사상가들은 봉건적 사회질서를 보는 시각이나 기초지움이라는 점에서 자신이 처해 잇는 정치적 사회적 환경에 대한 경험적 관찰에 기초하여 그 질서의 타당한 근거를 논하거나 하지 않았다. 사회적 현실 그자체에 대한 고찰보다 고전에 대한 지식을 오로지 학문적 사색으로 생각하는 전통이 있었고, 당시 학자들 대부분은 경서로부터의 지식을 통해 현실사회도 해석하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유교의 제 범주를 시좌視座Aspektstruktur로 받아들였고, 그 시좌를 통해 봉건적 사회질서를 보았다. 천자, 제후, 경대부, 사, 서인, 사농공상 등이 그렇다. 유교의 제후와 근세 일본 봉건제의 다이묘, 사와 무사의 내용적 차이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륜은 그들이 알고 있는 사회관계를 모두 포괄하는 것이고, 군신의 의君臣の義라는 구절을 접할 때, 중국 주대의 군신관계가 아닌 봉건적 주종관계를 연상했다. 그 시대의 학자들이 모두 정치적 사회적 현실을 벗어나 경서에 대한 논의에만 몰수한 것은 아니고, 다만 인식지향과 사회관계는 오륜이라는 매개를 수반해야 했다. 따라서 오륜의 기초지움을 살펴봄으로써 봉건사회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322-324)
그러나 그 방식은 구체적인 사회이론이나 사회적 상상을 통해서는 볼 수 없다. 당시의 사상가들은 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 경서의 해석을 통해서 그런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것이 시좌구조다. 다라서 경서해석을 어떻게 하는지. 경서 해석의 기초를 어디에서 가져오는지 살펴야 한다. 아니 살피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런 경서를 아주 일본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324쪽의 긴 주에서 그는 중국에 비교했을 때, 도쿠가와 일본의 사회상황이나 신분구조가 어떻게 다른지 제법 상세히 말하고 있다. 훗날 와타나베 히로시의 『일본정치사상사』 전반부분에 나오는 일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의 요소들이 대부분 나와있다. 두 사람을 꼼꼼히 읽다보면, 같은 레고로 만들어낸 다른 작품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와타나베 히로시의 관점이 일본적 특성에 따라 유교가 이미 재해석되어 있었으니, 그런 차이점과 해석상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라면, 마루야마 마사오는 유교 경전을 통해서 말하지만, 일본 사회에 대해서 경서를 통해 진단한다고 평가하는데. 이점은 실은 유사하면서 아주 다르다. 와타나베의 관점은 차이점을 알고, 사상적 대응을 했다는 것이 초점이라면, 마루야마의 관점은 사회상의 상황이 녹아들어간 경서해석이 보편의 논리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미묘하지만, 출발점의 차이, 도착점의 차이가 있다. 그래서 비교적으로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조교수로 임명되기 위한 조수논문이었던 1장을 쓴 후, 다음해와 그 다음해에 걸쳐, 정치사상적인 논점을 보완하기 위해 2장을 썼다. 2장은 1장에 비해 간결하면서, 자연과 작위라는 논점에 집중되어서 논의를 전개한다.

2장 2절 주자학과 자연적 질서사상
근세 일본 초기 사상계를 독점한 주자학의 사회질서관은 근세 초기 봉건적 사회질서, 계통적 지배관계의 시각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하야시 라잔林羅山은 오륜을 보편적인 도達道(일반적인 도덕)이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천天의 지地에 대한 지배, 양의 음에 대한 지배, 자연계의 원리에 의해 기초지워져 있다. 사회관계를 자연현상의 관찰에서 연역해 내고 거꾸로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자연계로 투영시키는 태도는 인간 사유의 초기 단계에서 언제나 보이는 것으로, 고대 중국사상의 특색이자, 원시 유교에도 내재된 경향이다. 그러나 진한秦漢대 음양설이 유교윤리와 결합된 후이다. 계통적 질서를 자연에서 연역해내는 사상은 『역경』, 『예기』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다만 주자학자 라잔에게는 보다 명백한 방법적 근거가 있다, 송학은 진한 경학에 있어서 원시유교 사상과 『역』이나 음양설의 복잡한 교착을 방대한 형이상학으로 통합시켜, 천인상관天人相關에 확실한 이론적 기초를 부여했다. 천지와 모든 사물은 리와 기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진다. 리는 우주의 궁극적 근거로 모든 사물에 통하는 보편적 성격을 가지며, 기의 작용에 의해 사물에 특수성이 부여된다. 이는 일리一理가 다른 모습分殊을 취한 것에 다름 아니다. 천리天理가 사람에 깃들여 본연의 성이 되고, 사회관계五倫를 규율하는 근본규범 五常이기도 하며, 그 궁극적 리는 태극이며, 성誠으로도 불린다. 오륜에 있어서 당위는 자연적 필연성과 같은 진정한 리実理에 의해 기초지워진다. 오륜을 행하는 근거인 오상은 마음一心에 있으며 그 마음에 갖추어지는 바의 이치理가 성性이다. 유교의 윤리적 규범은 주자학적 사유의 이중적인 의미에 있어서 자연화된다. 하나는 규범이 우주적 질서天理에 근거를 두는 의미에서 다른 하나는 규범이 인간성에 선천적으로 내재하는 것本然の性으로 간주됨으로써 자연법 사상이 거의 전형적인 형태로 내포되어 있다. 근세 초기 유명한 키리시단 문헌인 『妙貞問答』으로 유명한 파비안은 유학자들이 나투라ナツウラ의 가르침이라고 하면서 본성을 가진 사람의 마음에 오상이 있다고 하는데, 그런 것은 기독교의 가르침에서도 높이 평가된다고 말한 바 있다.(325-328)
마루야마의 논법처럼 봉건사회의 위기 속에서 주자학 세계가 붕괴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먼저 일단 주자학적 체계가 수립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주자학적 체계의 모델은 자연법 체계에 있다. 그래서 그는 우선 서양 중세에 성립했던 자연법 사상과 유사한 체계가 일본 근세 초기 주자학 체계를 통해서 형성되었다고 설명한다. 이런 자연법적 사상체계는 근세 이전 사회에서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근세 이후의 소라이학과 노리나가학의 변이 속에서 근대적 요소를 찾는 것 보다, 그 이전의 중세적 사유를 서양과 등치시키려는 이 시도가 더 대담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는 원시유교에서 송학까지의 전개 상황을 간결하게 정리하면서 송학의 형이상학적 체계에서 윤리적 규범은 우주적 질서에 근거를 두는 동시에 인간성에 내재하는 것으로 이중적 자연화라고 설명한다. 그는 토미즘을 마음에 두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속내를 1장 말미에서 슬쩍 비친 것과 달리 구체적으로 사상을 논의할 때는 근거없는 일반화된 논의를 가져오지 않는다. 대신 선승이었으나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파비안(ハビアン)의 입을 빌어서 유학자들의 말한 것과 그리스도교의 나투라 즉, 자연법 사상의 유사점이 있다고 슬쩍 걸쳐 놓고 넘어간다.
이런 자연법은 순수한 이념성을 고수함으로써 실정적 질서에 대한 변혁적 원리가 되거나 아니면 자기를 전적으로 사실적 사회적 관계와 합일시킴으로서 그것의 영원함을 보증해주는 이데올로기가 될 것이다. 주자학적 자연법 사상에서도 현실적 소여에 대해 변혁적 귀결을 이끌어 낼 수는 있다. 군주와 신하의 의義에 반하는 현실의 군주와 신하 관계는 변혁되어야 한다. 그러나 주자학의 이론 구성에 깊이 침투해 있는 자연주의는 이런 리, 자연법의 순수한 초월적 이념성을 희박하게 만든다. 도道와 물物 그리고 규범과 현실적 상황의 틈새를 규범이라는 측면에서 끊임없이 매몰시켜가려는 충동이 있다. 그런데 이 주자학은 도쿠가와 막부가 하극상을 진정시키고, 쇼군에서 무가 고용인武家奉公人에 이르는 무사단 내부의 서열을 편성하고 봉건적 주종관계를 피지배계급 내부까지 확장시켜 위아래를 관통하는 계층제적 원리 위에 철저한 통제력을 발휘한 근세 초기 (일본의) 주자학이다. 자연에 질서가 있는 것처럼 인간의 윤리가 바르게 서면 국가가 다스려지고 왕도를 이루며, 예가 번성할 것이라고 말한 라잔에게 자연법의 궁극적 의미는 현실의 봉건적 계층제를 자연적 질서로 승인하는 데 있다. 주자학에 내재하는 이런 자연적 질서의 논리는 발흥기 봉건사회에 주자학을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 사회적 사유양식으로 만들어준 계기였다. 물론 사회적 질서를 자연적 선천적인 것에 기초를 두는 방식은 학자마다 같지 않다. 라잔도 사람과 사물 그리고 사람의 빈부귀천을 이일분수라는 동태적 자연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나카에 도주中江藤樹는 형태가 있는 것은 정교함과 거침精粗가 있는데, 거친 것을 받은 아둔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정교한 성현・군주의 신하로서 성현이 명령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 천명의 본연이라고 하여 기품의 精粗를 근거로 삼는다. 이런 방식은 오륜의 이중적 자연화라는 송학적 자연법 사상에서 그 궁극적 논리를 찾고 있어, 근세 봉건사회가 성립된 후 이를 뒷받침하는 사유양식은 자연적 질서의 입장이다.(329-331)
주자학으로서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사회변혁적 이데올로기가 되는가 아니면 사회안정적 이데올로기가 되는가. 그리고 일본에서는 마침 봉건사회가 안정화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회안정의 이데올로기 즉 현존하는 봉건적 상하관계 질서를 자연질서로 정당화했다는 것이다. 라잔과 도주의 방식이 조금씩 달랐다고 해도 관변학자의 이데올로기로서는 다를 바가 없고, 그래서 주자학이 사상계의 주류였다는 것이다. 물론 주자학이 사상계를 장악했다는 주장은 훗날 사상누각임이 드러나 바람처럼 무너지지만.
근세 초기 주자학 일색이었던 사상계도 나카에 도주가 만년에 양명학을 창도한 후 그 학파는 후치 고잔淵岡山이나 쿠마자와 반잔熊澤蕃山으로 발전했고, 야마가 소코山鹿素行와 이토 진사이伊藤仁斎는 에도와 교토에서 거의 동시에 고학을 창시하는 등 붕화의 조짐을 보여주었다. 반잔과 소코는 초기 주자학자에게 결여된 정치적・사회적 현실의 경험적 고찰에 성과를 올렸으나 사회관계가 자연에 기초지워지고 있다는 점에서 주자학 사유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반잔의 경우 치국평천하의 원리는 오륜・오상에 의해 이는 다시 자연의 음양오행에 의해 기초지워진다. 다만 반잔은 도道와 법法을 구별하여 법=제도를 성인이 만든 역사적 존재로 규정한다. 소코는 백성을 다스리는 근본인 오륜과 예악이라는 규범의 타당한 근거를 모두 자연에서 구한다. 위아래의 계층제는 천지의 언제나 그런 것常經이다. 이토 진사이는 천도와 인도를 분리하고 음양오행을 인의예지로부터 구별했으며, 후자를 도덕이지 성이 아니라고 하여 송학이 사회규범을 자연법칙 및 인간 본성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을 부정함으로써 주자학적 자연법칙의 이론적 기초를 부정했다. 그러나 진사이의 논의는 순수 철학에 한정되어 그 변혁이 정치=사회사상의 수면까지 떠오르지 못했다. 게다가 도=규범은 그 자체 안에 타당한 근거를 가짐으로 자연계로부터는 단절되었으나 인간 존재에 대해서는 선천적 타당성을 보유하여, 자연히 그러한 결국 존재형태는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봉건사회의 근본규범이 반드시 실체적 자연질서는 아니지만, 그 자체가 자연적 질서라는 점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다.(332-334)
마루야마의 논의는 1장에서 상세하게 전개되었던 주자학 붕괴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양명학파 고잔이나 반잔, 그리고 고학파를 각각 형성한 소코와 진사이. 반잔과 소코의 경우 정치사회 현실의 경험적 고찰에 성과가 있다고 말하지만, 이를 상세히 논증하지는 않는다. 반잔의 경우는 각주에서 도와 법의 구별이 나타났다는 것을 말하는 정도. 그리고 교토의 고학파인 진사이는 천도와 인도의 분리 즉, 자연법칙과 사회규범의 연속성을 분리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규범이 자연계와의 연속성은 분리되었으되, 그 자체로 자연적인 선험성까지 포기된 것은 아닌 한계를 지녔다고 말한다. 여기서 사회규범이 선험성이 포기되고, 사람이 만들 가능성이 생기면, 그것은 홉스적이든 루소적이든 사회계약의 근거가 될 수 있다. 마루야마의 논의는 정말 일관성이 있다. 그에게 근대란 서유럽 근대이고 그것은 바로 사회계약론에 입각한 자유주의 정치사상이다. 이걸 밑에 깔고서는 정말 일관성있게 논의를 전개한다.

2장 3절 소라이학에 있어서의 선회: “자연적 질서” 논리의 파괴공작-그 실천적・정치적 지향
특정 정치사회질서는 자연법에 의해 기초지우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하게 보증하는 것이지만, 정치적 안정성이 현저하게 손상되고 사회변동이 나타나면 사회의 근본규범이 자연법이라는 기초지움은 수용성을 상실한다. 사회관계가 평형성을 상실하고 예측가능성이 감퇴하면 규범 내지 법칙의 지배는 무너진다. 질서의 평형을 되돌려 사회적 안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주체적 인격이 등장한다. 겐로쿠 시대에 근세 봉건사회에 내재하는 모순이 격화되고, 요시무네에 의해 교호의 개혁으로 불리는 도쿠가와 최초의 봉건제 보완작업을 시행하게 되었을 때, 근세 초기 이래 견고하던 자연적 질서관이 전면적으로 뒤집히게 되었고, 오규 소라이는 도道란 사물의 이치도 자연의 도도 아닌 성인이 세우고 만든 도라며 누가wer라는 문제를 근세 일본에서 가장 먼저 제기한 사람이 되었다.(335-336) 마루야마의 이 주장이 타당성을 얻으려면, 요시무네의 개혁의 내용을 보아야 한다. 요시무네의 교호의 개혁은 원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수립한 봉건체제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봉건체제가 붕괴하는데, 봉건체제로 어떻게 돌아가는가? 그것은 도쿠가와 막부의 유교적 색채를 탈색하는 것이었다. 이에야스 이후 유교적 색채가 조금씩 도쿠가와 체제에 가미되었고, 그 가장 활발했던 때가 주자학자 아라이 하쿠세키에 의한 문치였다. 바로 겐로쿠와 교호 사이의 쇼토쿠와 호에이 기간 동안 6, 7대 쇼군 이에노부와 이에쓰구 시절의 일이다. 중요한 건 가장 유교의 영향이 컸을 때 조차 주변적인 것에 불과했다는 사실. 마루야마 마사오의 논리가 성립하려면, 무가의 억압적 통치가 유교적 문치로 인해 붕괴하던 것을 요시무네가 다시 무가적 통치로 되돌린 일을 교호의 개혁이라고 말하는 것인데. 여기에 모순이 있다. 주자학은 봉건적 세계를 지탱하는 것인가 아니면 붕괴시킨 것인가. 또는 붕괴된 것을 회복하는 데 실패한 것인 것. 어떤 경우에도 주자학이 지배사상이라는 타당성을 얻기 어렵게 된다. 이 책에서 아라이 하쿠세키에 대한 논의가 상세하지 않은 이유가 그것이 아닐까.
소라이에게 있어 사회관계를 ‘자연’에 의해 기초지우는 주자학적 사유는 봉건적 지배관계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너무나 현실과 괴리된 낙관주의였고, 이미 이완, 붕괴의 조짐을 보이는 현재의 계층적 질서도 자연적이라 간주함으로서 안정성을 회복하기 위핸 제도의 재건을 저해하는 것으로 비쳤다. 예를 들면 격식이란 시대의 풍속인데, 예를 천리로 보는 주자학의 영향으로 좋은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봉건사회를 난국에서 구해내고 재건하기 위해서는 봉건사회의 관념적 기초를 이루는 유교 이론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혁시켜, 자연적 질서天理의 논리를 주체적 작위의 그것으로 전환시켜야 한다.(336-337) 자연적 질서의 논리는 유교 규범이 천도나 천리로 불리는 우주적 자연과, 본연의 성으로 불리는 인성적 자연이 연속되어 있다는 점에 있는데, 소라이는 먼저 우주적 자연을 성인의 도의 대상에서 배제해 버린다. 天道나 地道란 인간적 질서를 자연계에 유추한 것으로 음양이라는 자연계의 범주를 사회관계로 끌어들이는 것을 거부한다. 성인이 이를 人道로 삼지 않았다. 오상의 기초를 이루는 오행 역시 성인이 편의상 만든 상징적 기호로 필연적 근거는 없다. 천의 경天の経이나 지의 의地の義 같은 말도 예를 예찬하는 말일 뿐이라면서 천지天地의 실체적 성격을 박탈하고, 비유적 의미로 떨어 뜨렸다. 그는 우주적 자연에 의한 도의 근거지음을 부정하고, 유교 자연철학의 제 범주를 치국평천하의 수단으로 성인의 도에 예속시켰다. 원시유교의 천의 양의성 즉, 법칙적 의미에서의 하늘天道와 인격적 의미에서의 하늘天命에 주목하여, 천도를 부정하고 천명을 전면적으로 강조했다. 천도로부터 천명에서의 전환은 주체적 인격을 기저로 하는 그의 전체 사유방식을 표현한 한 형태이다.(337-339)
마루야마에 따르면 봉건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주자학적 사유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려고 나선 소라이는 우선 주자학의 연속적 세계관 중에서 가장 먼저 자연질서, 즉 우주관이 사회규범과 연장선에 놓이지 않도록 이를 분리한다. 그 구체적인 형태가 천명과 천도의 분리라고 할 수 있다. 한때, 유교의 종교성에 대한 논의가 한국 사회과학계에 있었다. 유교가 종교가 아니냐가 왜 중요할까 싶다마는, 그 배경에도 실은 막스 베버가 놓여있었다. 1980년대까지의 동아시아 경제의 비약적인 성장을 설명하기 위한 방법으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에 비견하기 위해 유교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실은 이런 이야기는 로버트 벨라나 그 위로까지 올라가는 고색창연한 이야기다. 유교윤리가 가져오는 노동규율과 검소함 등에 주목한 학자들이 유교 이야기를 꺼냈을 때, 유교가 종교인가의 여부가 논쟁이 되었고. 원시유교는 종교였다는 주장에서부터 기다 아니다 논란이 있다가 어느새 그런 논쟁 자체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이때 유교의 종교성을 주장하는 논의의 근거 중 하나가 천명이라고 하는 천의 인격신적인 경향이었다. 이런 종교사회학적으로 근대화를 설명하는 논의들은 대부분 기독교라는 종교형태를 자본주의 발전 및 근대성과 결부시켜 보기 때문에, 인격신에 대한 관심이었던 것. 그러나 기독교는 자연질서의 사회규범에로의 연장과 인격신의 존재가 양립했었다. 이 두 가지가 양립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하고 하나를 취사선택하려는 것은 자연질서와 사회질서의 분리가 가장 중요한 기반이 되며, 그런 상황에서 어떤 종교를 가져올 것인지라는 개념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마루야마는 일관성있게 주권이론으로서의 사회계약론을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척도로서 준비하고, 그 논리가 성립하도록 이론을 재단하고 있다.
둘째 소라이는 도(규범)을 오로지 예악이라는 외부적 객관적 제도에 한정시켜 도를 인성적 자연을 넘어서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도는 예악형정을 떠나 달리 있지 않다. 예악은 송학에서 말하는 天理의 節文이나 人事의 儀則이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성의 개혁을 문제삼지 않고 오로지 정치적 지배의 도구로 본다. 인성에 대해 외재적이다.(339)
그리고 두번째로는 인간본성과 사회규범의 분리. 인간본성과 사회규범의 분리는 단순히 주자학적 연속성을 해체하는 데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자유주의 경제사상의 핵심은 바로 인간의 개별적 욕망추구를 허용하고, 인간본성에 대한 도덕적 제약을 해제하는 것이 자본주의 발전의 기반이라는 것이다. 사회규범은 인간본성을 고려하지 않고, 행위에 대해 처벌하는 것. 인간본성과 사회규범의 분리는 마루야마에 절실했던 것이다.
이 정도로는 소코나 진사이의 모멘트를 밀고나간데 지나지 않는다. 자연적 질서의 논리를 완전히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배후에 어떤 규범도 전제하지 않고, 규범을 만들어내고 그것에 타당성을 부여하는 인격을 사유의 출발점에 두는 수밖에 없다. 소라이가 도는 선왕이 만든 것이라고 했을때, 선왕은 도를 절대적으로 만든作爲 자라는 의미였다. (339-340) 선왕은 복희, 신농, 요순우탕문무주공 등 고대 중국의 정치적 지배자이며, 도=예악은 그들이 만든制作 것이다. 성인 개념을 선왕이라는 역사적 실재에 한정시킨 것은 소라이학을 종래의 어떤 유교 사상으로부터도 결정적으로 구별지워주는 모멘트였다. 그때까지 성인은 도덕을 완전무결하게 갖춘 사람이며, 그가 성인인 까닭은 내재하는 이데아 성에 있었다. 이데아 성이 강조되면 성인 개념은 비인격적 궁극이념 속에 쉽사리 해소된다. 예를 들어, 성인은 태극의 전체이다. 순자가 예의법도를 성인이 만들었다고 해서 소라이학의 사상적 연원으로 간주되지만, 그에게 성인은 도道의 극極이며 수양의 목표로서 이데아적 의미도 지닌다. 성인 개념에 보편적・이데아적 의미가 담겨있는 한, 예의법도를 제작한 구체적인 성인도 결국 그 가치를 배후의 이데아로부터 부여받는다. 이런 선왕은 절대적 주체가 아니다. 소라이가 성인을 구체적 역사적 존재인 선왕에 한정시키고, 성인은 배워서 이를 수 없다며, 비인격적 이념화를 막았던 것은 선왕에게 도의 절대적 작위자의 논리적 자격을 부여하기 위한 전제였다.(340-341) 성인(=선왕)이 도를 절대적으로 만든 사람이란 성인이 모든 정치적 사회적 제도에 선행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적 질서의 논리에서 성인이 질서 속에 있다면, 당연히 그 성인을 그런 내재성에서 구해내고 거꾸로 무질서로부터 질서를 만들어낸 사람으로서의 지위를 부여해주어야 한다. 성인의 작위 이전에는 無이지만, 만든 이후에는 全이다. 이런 입장은 성인이 출현하기 이전의 사회를 아무런 규범이 없는 홉스적 자연상태로 간주하게 된다. 소라이에 의하면 오륜 중에 자연스레 존재하는 것은 부자 간의 사랑 뿐이며, 부부의 윤리도 복희에 의해 만들어졌고, 오곡의 경작은 신농, 궁실을 들고 의복을 짖는 것은 황제가 고안한 것이다. 이런 규범, 생산양식이 원초적, 자연발생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성인이 人生에 상응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복희나 신농에 대한 생각은 당시 유학자의 일반 상식이었다. 그런 생각의 방법적 의의를 추구하여 이를 자연적 질서의 논리에 대한 명료한 대립으로 끌어올린데 그의 독자성이 있다. 마침내 근세 일본사회의 가장 근본적 신분질서인 사농공상도 선왕이 만든 것으로, 오륜도 성인이 만든 도라고 말하게 되었다. 이를 구마자와 반잔은 농업으로부터 탁월한 사람이 계속 탁월성을 보여 천자가 되었다고 말하고, 야마가 소코도 농업에서부터 출발하여, 필요에 따라 농공상이 생기고 결국 군주를 세워 교화와 풍속의 바탕이 되었다고 말한다. 반잔도 소코도 사농공상의 발생을 인류가 생활하기 위한 필요에서 점차적으로 생성한 것으로 설명한다. 이를 고대의 성인이 만들었다고 하는 소라이보다 반잔과 소코가 더 역사적 설명으로 진리에 가깝다. 그러나 사회적・인간적 존재가 자연적 존재와 연속되어 있다는 생각에 있어서 역사적 발생을 말하면 동시에 자연적 발생을 말하는 것이며, 역사를 만드는 주체는 물을 수 없게 된다. 선왕의 작위의 절대적 시원성을 밀고나간 소라이의 오류는 사상사적으로 본다면, 자연적 질서 사상의 전면적 전환 과정의 이른바 희생타였다.(341-345)
제도의 작위자인 성인에 집중한다. 그는 정치적 행위자이자, 제도의 창시자이며, 결코 도덕적으로 완벽하지 않다. 동시에 재현불가능한 일회적인 존재이다. 그는 바로 역사적 주체이다. 마루야마에 따르면 소라이는 이런 정치적 행위자 내지 입법자lawgiver로서의 성인을 만들어 내기 위해 수많은 대립을 창출해 낸다. 특히 제도에 있어서 자연과 작위의 대립. 제도는 자연의 연장이 아니다, 만들어낸 것이다. 성인 또는 선왕의 인격에 있어서 인간본성과 제도의 대립. 성인이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일 필요는 없고, 꼭맞는 적합한 제도를 만들어 내면 된다. 성인 전후의 대립, 성인 이전의 상태는 무질서의 상태이며, 이후는 질서잡힌 제도의 상태이다. 마루야마는 이 부분에서 소라이가 성인이전의 상태를 홉스적 자연상태로 상정했다고 보고 있다. 자연의 연속성을 해체한 소라이에게 자연이란 안온하고 편안하고 조화로운 것이 아니라 제도가 필요한 부족한 상태인 것이다. 마루야마가 소라이에게서 하나의 대립, 또 하나의 대립을 발견할 때마다 소라이는 점점 더 역사발전의 계기를 발견한 인물이 된다. 결국 성인(선왕)이란 역사발전의 주체로까지 등장한다. 소라의 선왕(성인)이 역사적 주체가 되기 위해서 그는 시대정신을 체현한 절대정신의 구현자일 수밖에 없다. 마루야마가 발견하고 싶었던 것 그것은 바로 이 주체가 아니었던가. 이것은 어디까지나 헤겔적 주체이다. 어떤 의미에서 마루야마가 대립항으로 설정하고 있는 반잔과 소코의 논의가 자연스럽게 전개된다. 그러므로 그들의 논의에는 한계가 있다. 반잔과 소코의 논의에는 사회가 창출되는 단절의 순간이 없다. 그리고 소라이는 그런 정치적 단절의 순간, 분열의 순간을 구성해내는데, 마루야마는 여기에 착목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사고들이 사회변혁의 가능성으로 전개되지 않고, 사그러들었다는데 있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그런 한계 속에서 밑바닥이 변했던 것을 사유의 이중구조 논리로 변명하고는 있지만.
천지자연에 존재하는 선험적 리에서 도의 본질을 찾는 주자학과 선왕이라는 실재적 인격이 무에서 도를 작위했다는 소라이학은 같은 유교이면서도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사유방식 위에 서 있다. 이는 이데아가 인격에 선행하며 인격은 이데아를 체현한 존재인가, 아니면 인격이 현실재로서 존재하고 이데아는 인격에 의해 비로소 실재성을 부여받는가 하는 철학의 근본문제와 연결된다. 유교가 봉건사회의 시좌구조인 한 유교의 도를 보는 시각은 사회제도로 옮겨진다. 주자학적 사유에서는 봉건사회의 자연적 질서관이 도출된되며, 사회규범은 그 자체에 내재하는 이념성 때문에 스스로 타당성을 지니게 된다. 소라이학의 논리가 제도관에 나타날 때, 이미 이념의 선험적 절대성은 허용되지 않으며, 인격적 실재 속에 종속되어 비로소 존립한다. 따라서 사회규범도 그것을 작위한 당우삼대의 선왕들인 정치적 인격에 의해 타당한 것이 된다. 소라이는 선왕=성인을 깊이 믿는다고 하여, 종교적인 절대자로 끌어올려 봉건사회의 근본규범을 절대화하려 했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출현한 개국군주이다. 따라서 성인과 도의 논리적 관계는 모든 시대에서 제도와 정치적 지배자의 관계로 유추된다. 소라이는 주자학의 합리주의가 역사적 개성을 간과했음을 지적하고, 각 시대별로 제도의 특수성을 인식할 필요가 있고, 제도란 모두 그 시대를 열게 된 시조가 스스로 헤아려서 전체 세계의 구조를 바꾸었기 때문에, 제도와 법률 역시 바뀌는 것으로, 모든 시대의 창업 군주의 자유로운 작위에 타당성의 근거를 돌리는 것이 소라이학의 사유방법에 내포된 가장 중대한 정치적・사회적 의미였다. 소라이 앞에 놓인 정치적 과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봉건사회가 의거하고 있는 근본 규범에 대해 새로운 기초를 마련하는 것, 다른 하나는 현실의 사회적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강력한 정치적 조치를 제시하는 것. 전자를 위해서는 근본 규범의 타당성을 절대화된 성인의 작위에 귀속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작위 논리가 고대 성인에 한정되면, 후자를 해결할 수 없다. 일단 성인이 도를 만든 후, 작위 주체로부터 벗어나 객관화된 이데아로서 스스로 타당하다면 자연적 질서관으로 되돌아가 그로부터 현실에 대한 어떤 정치적 결단도 나오지 않는다. 선왕의 작위의 논리를 모든 시대에 유추analogy함으로써 비로서 이데에 대한 인격의 우위가 철저해지고, 그래서 정치적 지배자의 위기 극복을 위한 미래를 향한 작위가 가능해진다. 소라이의 성인의 도는 시대와 장소를 넘어선 보편타당성을 지니고 있고, 스스로 실현되는 이데아가 아닌 각 시대의 개국 군주에 의한 그때 그때의 작위를 매개로 한다. 여기서 이데아의 실현은 시대가 변할 때마다 새로운 주체화를 경험한다는 의미에서 비연속적이다. 소라이는 『政談』, 『太平策』, 『鈐録』 등에서 제시한 위로부터의 대규모의 제도적 변혁은 이런 논리 위에 있다. 겐로쿠에서 교호에 이르는 사회적 변동으로 현실의 봉건사회는 신분적 질서가 무너진 혼란의 시대로 비쳤다. 혼란은 제도가 없는데서 생겨났다. 지금의 격格은 작위가 아니라 세상의 풍속으로 스스로 생겨난 것에 지나지 않고, 도쿠가와 개국 시조 이에야스가 성인의 도에 따라 제도를 세워야 하는 본래의 임무를 띄고 있었는데, 시대가 멀어 옛날 제도를 다시 세우기도 어렵고, 큰 혼란 후라 제도들이 모두 없어져서 당시의 풍속을 그대로 내버려 두어 제도가 없는 상태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소라이는 이에야스가 했어야 할 제도의 작위를 8대 쇼군 요시무네가 대신하도록 하려 했다. 유교에서 규범의 자연적 타상성이라는 사상을 배척하기 위한 그의 사색은 정치적=실천적 의도가 그 동기를 이루고 있었다.(345-348)
마루야마의 소라이 해석은 일단 그 논의만은 아주 수려하다. 주자학과 다른 소라이학의 사회관・제도관은 주자학과 다른 소라이의 사유방식에서 나온다. 소라이는 인격이 이데아를 앞선다. 일종의 초월종교나 개국신화 같은 성격을 띈다. 소라이는 선왕=성인을 절대적 종교적 신앙의 존재로 까지 끌어올린다. 마루야마의 소라이 해석은 여기서 결을 달리한다. 소라이의 성인이 중국 고대에만 나타났다고 보지 않고, 소라이의 성인은 모든 개국 군주에서 나타나야 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고, 역사적으로 등장한 군주들의 사례를 들지는 않는다. 그러면서도 정치적 지배자는 위기극복을 위한 제도 만들기가 필요하고, 특히 제도가 무너진 현재의 모습은 어떤 작위의 결과도 아닌 현상일 뿐이라고 새로운 작위의 실천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새로올 성인 즉 요시무네에게 요구한다. 이는 마치 체자레 보르지아를 기다리는 마키아벨리 같다. 놀랍게도, 소라이는 계속 기다리는 게 아니라, 요시무네가 못하면 그냥 끝이라는 식의 태도를 펼친다. 그는 소라이학이 저항의 학, 새로운 제도 수립의 학이 되기를 원치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마루야마 식으로 소라이는 개국 군주를 성인=선왕으로 보았다고 해석하기에 탐탁치 않은 부분도 있다. 소라이에게 선왕은 당우삼대 뿐이다. 복희, 신농, 황제 만이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일본의 진무천황이나 또는 가마쿠라 막부나 무로마치 시대나 어떤 시대에도 제도로서의 도인 예악형정이 수립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이에야스까지도. 그런 그를 현실의 정치가 정치적=실천적 의도가 유교 사상 변화를 이끌었다고 해석할 수 있을까? 보편적인 제도 수립의 기회가 특수한 경우에만 인정되는 이런 모순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묵시적 종말론도 아니고.
소라이가 요시무네를 통해 확립하려한 사회조직 개혁론은 한 마디로 복고적이다. 그는 화폐경제, 상업자본의 발달, 무사의 토지와의 연계 사실 등을 여숙의 경계(여관방의 문턱)라며 비판해 왔다. 무사는 영지에 토착시키고, 호적을 만들어 인구이동을 제한하고, 신분적 차별을 엄중하게 하고, 이에 따라 욕망을 제한하는 것이다. 그는 원초적 봉건제의 찬미자다. 그는 옛날의 무사를 동경하고, 사치스러운 조닌을 미워했다. 법도가 소략하고 상하의 은혜외 의리로 이어진 주종관계를 이상으로 여겼으며, 조카마치의 이익에 따라 살고, 게으르고 나태한 풍속은 그의 기호에 맞지 않는 생활환경이다. 상업 고리대자본의 분방한 활동은 날이갈수록 순수한 신분제를 급격하게 침윤했다. 그는 순수 봉건적 후다이譜代奉行人이 자유계약적 데가와리出替奉行人로 대체되는 과정을 묘사하면서 평생을 책임져야 하는 후다이들이 해고되면 무사 가문에 남는 사람이 없다고 평했다. 이런 사회관계의 실체적 변화는 주종관계를 떠받쳐주는 정신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계약관계에서는 서로의 마음이 길가는 사람을 대하는 것 같고, 후다이가 어린아이를 키울 때처럼 가풍도 전해지지 않고, 당분가 지내기 위해 일하는 것일 뿐이다. 결국 게마인샤프트적인 의식이 쇠퇴하고 게젤샤프트적인 그것이 만연하게 되었다. 자연경제를 기반으로 한 봉건적 주종관계가 상품경제의 한 가운데서 맺어지게 된 것의 귀결이었다. 소라이는 봉건사회의 태내에 그것을 해체하고 부식시키는 독소가 급격하게 성장하는 시대에서 그런 독소를 제거하려 했지만, 그런 독소의 성장이 역사적 필연인 한 반동적 사상가였다. 그런 제도의 내용을 이루는 것이 원시 봉건제의 자연적 요소(전원생활, 자연경제, 가족적 주종관계)에 있다면, 소라이학의 체계는 작위作為에 의해 자연自然을 만들어내려고 한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반동가로 하여금 적의 무기를 빌어 자신을 이론적으로 무장하는 역할을 맡긴다. 소라이는 게젤샤프트적 사회관계를 저주하면서도 자신의 작위의 입장에는 게젤샤프트적 논리가 내포되어 있었다.(349-352)
소라이가 마루야마를 곤란하게 만든 점이 바로 소라이 개혁의 구체적 내용이 복고적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사실 그것이 문제일까. 혁신적 사상가들이 복고적 비전을 내세운 경우는 적지 않았다. 루소 만큼 복고적이었던 사람도 없다. 그러나 루소와 다른 점은 루소는 원천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소라이는 원천에 대한 의식이 모자랐다는 점이다. 그가 생각했던 복고적 과거가 그렇게 먼 과거가 아니었을 수도 있고, 일본에만 있는 특수한 상황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소라이는 변화가 어느 한계를 넘어가면 되돌릴 수 없다면서 자포자기 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여기서 마루야마는 소라이에게 게젤샤프트적인 인식이 있었다. 그리고 사회계약은 아니더라도 제도형성의 기반은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제도형성의 기반으로 주권을 긍정한다는 것과 그 주권의 형성을 사회계약에 근거짓는 것과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사실 이 지점에 마루야마의 논리적 비약이 있다. 그리고 그 제도를 통해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은 ‘자연’이라는 것이다. 마루야마의 이런 지적은 일견 단지 말장난 처럼 보이지만, 실은 말장난은 아니다. 작위로 자연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마루야마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인식했든 그러지 못했든, 메이지 유신을 통찰한 것이다. 메이지 유신은 천황제를 만들어냈다. 이 천황제는 서구적이면서 입헌적이면서 일본적이면서 신화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의 이데올로기 저작들(교육칙어, 군인칙유, 메이지헌법 등)은 이런 천황제는 일본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평가한다. 일본인들은 근대 일본이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천황제를 국가주의의 한 형태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천황제의 가장 큰 힘은 그 자연스러움에서 나온다. 마루야마가 패전 이후 초국가주의를 비판할 때, 천황제에 대해 착목했던 중요한 지점이 바로 자연스럽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루야마나 얼마나 인식했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철두철미하게 만들어지고 기획되고 강제되었으며 동시에 자발적으로 수용된 것이었다. 소라이에 대해서는 1장에 충분히 말해서인지. 여기서는 간략하게만 언급한다.

2장 4절 자연自然으로부터 작위作為에로의 추이와 그 역사적 의의: 작위 논리의 근대성-주체적인격의 절대화 문제

주체적 작위의 입장이 게젤샤프트의 논리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사회적 결합의 두 이념형은 그런 결합이 개인에 있어서 필연적인 소여所与로 먼저 존재하는 경우로 결합양식은 고정적・객관적인 형태를 지니며, 사람들은 이른바 운명으로 주어져 있는 것(예를 들면, 가족)과 개인이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결합을 만들어 내는 경우로 개인은 의도를 가지고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사회관계를 맺고, 결합양식에 고정적・객관적 정형이 존재하지 않으며, 목적의 다양성에 따라 임의적 형태를 취하는 것(정당이나 학회와 같은 결사)으로 나뉜다. 유럽 근대사회의 성립을 법률적 측면과 사회학적 측면에서 본 학자들은 근대 시민사회가 형성되는 역사적 전환과정에서 두번째 유형이 첫번째 유형을 압도하는 현상의 추이를 밝혔다. ‘신분에서 계약으로’나 ‘게마인샤프트에서 게젤샤프트로’(퇴니스) 같은 도식이다. 퇴니스의 문제는 게마인샤프트에 근대 시민사회 이전의 모든 시대를 막연하게 포괄하고 있다는 것. 원시공동체가 붕괴되고 지배형태Herrschaftsgeblide가 성립하는 역사적 변화를 무시한다. 프레이어Freyer는 Gemeinschaft-Ständegesellschaft-Klassengesellschaft의 셋으로 나누는데, 이 경우 봉건사회는 신분사회로서 게젤샤프트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사회관계를 물질적 기구적 측면에서만이 아닌 침투해 있는 의식(객관적 정신)에 중점을 두어 고찰하면 퇴니스의 도식은 여전히 생생한 의미를 가진다. 봉건사회의 다양한 사회적 결합(봉건 주종, 교회, 길드, 일본의 座, 株仲間, 五人組)은 성립과정이나 구조 형태는 시민 사회관계에 가까워도, 결합을 유지하는 정신적 지주, 구성원이 결합에 품고 있는 표상은 혈연공동체와는 양적인 거리가 있어도, 주식회사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봉건적 주종관계의 의식은 쌍무계약 보다는 친자관계가 더 적합하다. 사회관계의 표상 내용은 봉건사회까지의 모든 변화보다 근대사회 형성기의 변화가 더 크다. 중세말 근세초기에 두번째 유형이 첫번째 유형을 압도하게 된 현상은 사회적 사실 보다 사회적 의식에서 더 현저하다. 중세의 인간이 모든 사회적 결합의 원형을 가족처럼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단체로(societas necessariae) 이해하고 있다면, 근세의 인간은 사회관계를 가능한 한 인간의 자유의사에 의해 만든 것으로(societas voluntariae, Gierke) 파악하려 했다. 이것이 근세에 있어 인간의 발견이다. 중세에 인간은 개인의 직분에 대해 논읳지만, 인간의 발견은 주체성을 자각했다는 의미다. 사회질서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여온 인간은 질서의 성립과 개폐가 자신의 사유와 의사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의식하게 된다. 질서에 따라 행위하다가 질서에 대해 행위하게 된 것이다. 퇴니스가 본질의사Wesenwille와 형성의사Kürwille를 설명하면서, 본질의사는 인간 육체의 심리적 대응물이며, 형성의사를 사유 자체의 구성물이자 오로지 사유의 주체와의 관계에서만 실재성이 부여되는 것으로 본다. 본질의사는 지나간 것에 의존하고, 형성의사는 그것이 관계된 앞으로 올 것에 의해서만 이해된다. 본질의사는 앞으로 올 것을 맹아Keim 속에 가지고 있는데, 형성의사는 그것을 심상Bild 속에 가지고 있다고 한 것도 중세와 근세에 있어 질서와 인간의 뒤바뀐 관계를 나타내 준다. 생성과 맹아가 포함되며, 자연적이며 자족적인 것은 유기체로 중세 사상은 유기체관에 가까우며, 수단과 목적에 종속되는 것은 기계관으로인간이 질서에 대해 주체성을 확보하는 것은 유기체관의 붕괴와 기계관의 수립에 있다. 토마스 홉스가 인간의 기술the Art of man은 자연, 즉 신이 세계를 만들고 지배하는 기술을 모방하여 인위적인 동물을 만들 수 있다며, 자동기계의 인위적 생명을 언급하고, 기술은 이성적 존재이자 자연의 가장 훌륭한 작품인 인간을 모방하며, Commonwealth, state(civitas)로 불리는 Leviathan을 기술에 의해 만들어냈는데, 인위적 인간이라고 근대적 제도관의 첫머리를 밝혔다.(353-358)
다시 한 번 마루야마의 솜씨좋은 논리 전개를 보여준다. 우선 기반이 되는 사상을 유럽의 보편적 사유에서 가져온다. 마루야마나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그때 보편적으로 생각했다는 뜻에서. 그러나 있는 그대로 적용하려 하기보다 훗날의 분석을 위해 솜씨 좋게 재료를 손질한다. 게젤샤프트와 게마인샤프트의 논리를 퇴니스의 논리를 가져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한 지점에 착목하는데, 그것은 사회관계를 결합하는 외형보다 정신적 형태에 주목하려는 것이다. 물론 자연스럽게 사회계약이론으로 연결시킨다. Societas voluntariae나 Kürwille가 모두 그렇다. 이는 당연히 일본의 봉건사회를 평가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다. 상품경제와 봉건적 인간관계가 혼효된 일본에서 어디서 진보의 계기를 찾을 것인가가 예고 되어 있다. 사회관계를 구성하는 정신적 요소이다. 질서를 인간이 만든다는 사고만 있으면 근대적이라고 이 주장을 이끌어 나간다. 그리고 그런 사회관은 유기체관과 기계관으로 나누어서 계열을 만든다. 그리고 이 기계관의 끝에 토마스 홉스의 Leviathan이 있다. 의도와 목적을 위해 인간을 모방하여 만들어진 국가라는. 사실 여기에 비약이 숨어 있다. 퇴니스와 기에르케와 홉스의 논의들을 이런 식으로 이분법적인 계열로 분류해서 줄을 세울 수 있는지 솔직하게 의문이다. 사회관계를 만든다 즉 구성한다에서 그것을 기계적인 것으로 연결한다. 실은 모든 사회는 구성해낸 것일 수 있다. 그 모델이 유기체일 수 있고, 기계적일 수도 있다. 이런 개념들은 교차할 수도 있고, 뒤섞일 수도 있다. 이런 실마리를 함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교하고 우아한 마루야마의 논리전개에 그냥 휩쓸려 가게 된다. 마루야마는 실은 소라이와 홉스 사이에 있는 결정적 차이 하나를 슬쩍 건너뛴다. 무엇을 건너뛴 것일까. 홉스의 Leviathan이 사회계약에 속할 수 있는 이유는 권리의 포기를 통한 주권 인정이라는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권리의 위임을 통한 주권 형성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소라이의 성인은 이 권위를 어떻게 확보하는가? 그는 그냥 확보한다. 그가 개국군주이기 때문이다. 그 권력은 원초적으로 정복에서 오는 것이다. 마루야마는 이 지점을 간과한다.
정치적=사회적 질서가 천지자연에 존재한다는 주자학적 사유로부터 주체적 인간에 의한 작위여야 한다는 소라이학의 논리에로의 전개가 위에서 말한 중세적 사회의식의 전환 과정에 거의 대응되고 있다. 예를 들어 사농공상을 자연적 점차적인 발생과정으로 이해하지만, 소라이는 안민安民이라는 목적을 위해 선왕이 작위한 질서로 생각했다. 퇴니스의 Genossenschaft(Gemeinschaft적 결합)는 자연적 산물이자 생성된 것으로 기원과 발전의 제 조건을 통해서만 이해되고, Verein(Gesellschaft적 결합)은 머리 속에서 구성한 존재로, 공통된 형성의사를 어떤 관계 속에서 표현하려 한다. 중요한 것은 본래의 목적이 무엇인가하는 점이다. 도쿠가와 초기 자연적 질서사상은 주관적으로도 객관적으로도 Gemeinschaft에 대응되지만, 소라이의 작위는 의도적으로는 Gemeinschaft적이되, Gesellschaft의 논리 궁극적으로 社団Verein의 논리가 스며들어 있다. 앞에서 자연적 질서의 발흥기 내지 안정기에는 이데아에 의한 기초지움을, 동요기 내지 위기에는 주체적 인격에 의해 기초지움을 대응시킨 것은 주자학과 소라이학을 하나의 형식적 법칙하에서 다루는 것이다. 주자학이 봉건사회의 정치적=사회적 사유양식이란 지위를 차지한 것은 발흥기 봉건사회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퇴니스가 말한 분배를 규정하는 신성화된 전통, 정당하고 필연적 생활질서라는 이념은 여기에 딱 들어맞는다. 오륜을 인간의 선천적 본성과 우주적 질서라는 이중적 의미에서 실체적 자연과 같은 것으로 보는 주자학은 봉건적 질서관을 잘 표현하며 이론화한다. 주자학의 형이상학적 근저는 유기체적 사유organishes Denken였다. 근본원리인 태극은 세계의 통일적 근원이자 개개 사물에 내재하며 궁극적 가치에 참여한다. 도쿠가와 시대에 말한 ‘논마다 비치는 달田每の月’은 바로 리일분수理一分殊다. 천지天地라는 가장 포괄적 유기적 존재의 활동이 모든 사물을 거쳐 압축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의 윤리적 행위로 반복된다. 기에르케가 말한 신이 원하는 질서에 따라 특수한 존재는 하나의 단위全一体Ganzes인한 세계라는 macrocosmos의 압축적 모사로서 microcosmos 혹은 minor mundus로 나타난다는 중세 사회관의 신이 원하는 질서란 라잔의 천지의 생의天地の生意로 바꾸면 주자학의 해설로 타당하다. 게다가 주자학은 천지라는 세계 바깥에 초월한 인격신이라는 관념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어, 본질적으로 내재적인 유기체적 사유는 스콜라 철학보다 더 철저하다.(358-362)
마루야마는 다시 한 번 유럽 사상가들과 일본의 결합을 시도한다. 그에 따르면 소라이의 작위란 의도적으로는 Gemeinschaft적이되, Gesellschaft 즉 Verein의 논리가 스며들어 있다. 작위로 자연을 만든다는 이야기의 반복이자 변주이다. 그러면서 주자학의 사유양식이 기에르케가 말하는 유기체적 사유, 중세사회관과 얼마나 잘 들어맞는지도 설명한다. 신의 존재가 없이도, 아니 인격신의 존재가 없어 훨씬 더 유기체적이다. 주자학과 스콜라 철학을 연결하는 그의 논의는 아름답게까지 여겨진다. 그러나 여기에는 동어반복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중의 논리가 숨어있다. 통상적으로 독자는 마루야마가 소라이라는 일본의 정치사상을 퇴니스를 통해서 해석해 낸다고 생각하면서 읽게 된다. 그러나 실은 소라이를 분석하는 퇴니스는 이미 소라이적으로 해석된 퇴니스다. 마루야마는 소라이가 일부분 Gesellschaft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Gesellschaft적인 근거로 머리 속에서 구성된 즉, fictional하다고 말한다. 그렇다. Gesellschaft란 fiction이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의 fiction인가? Gesellschaft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적어도 동의 내지는 암묵적으로 묵인하는 fiction이다. 그러나 마루야마의 소라이는 퇴니스의 Gesellschaft에서 이 구성원들이라는 요소를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묵살한다. 물론 동의한다. fictional한 것이야 말로 중요한 요소다. 그렇다. 근대는 fiction이다. 그러나 누구의 fiction인지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다수의 fiction이기 때문에 변경과 재해석의 여지가 남는 것이다. 정치적 주권자의 일방적 fiction이라면, 그것은 고대의 입법자의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에 정복에 의한 강제라는 사고가 암묵적으로 깔려있다면, 그것을 Gesellschaft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동요기의 인격에 다수의 인격이냐 단일한 인격이냐의 문제는 생각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그것이 다수의 포기라 해도 그렇다. 여기에 마루야마의 소라이 해석의 맹점이 있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문득문득 마루야마는 정말 서양정치사상을 잘 알고 분석도구 삼아 일본사회를 다루고 있다고 실감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분석도구를 섬세하게 마련했고, 이를 통해 주자학과 일본 봉건사회를 분석해 냈다. 물론 일본의 주자학이었다.
주자학은 Gemeinschaft적이지만, 소라이학과 Gesellschaft의 대응에는 역사적 한계가 있다. 봉건주의자가 전면적으로 근대적=시민적 사유양식에 입각해 있을 수는 없다. 소라이학의 주체적 작위 입장에 내포된 근대성의 정도를 측정해야 한다. 소라이학에 있어서 질서와 작위하는 인격의 한정성. 완전히 근대화된 Gesellschaft적 사유양식은 자유로운 의사의 주체인 모든 개인이 사회질서를 만든다는 사회계약설로 귀결된다. 그러나 소라이학에서 질서를 만드는 인격은 성인이자, 여기서 유추한 정치적 지배자다. 동시에 종교적 절대자까지 높여져 있다. 소라이는 주자학이 성인에 대해 규범적으로 미리 정해놓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성인의 신비화 도는 성인이란 주체적 인격은 자연적 질서가 주체적 작위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객관적 필연성이 있는가?(362-363) 유럽에서도 자연적 질서 사상 내지 유기체설이 일거에 작위적 질서 사상의 완성형태인 사회계약설 내지 기계관으로 대체되지 않았다. 개인의 발견이란 주체성이 개인 일반에게 처음부터 부여된 것이 아나라 근세 통일국가의 대표자로서의 절대 군주가 먼저 이런 자각자로 출현한다. 절대군주는 배후에 아무런 규범적 구속도 받지 않고, 모든 규범에 주체적 작위자의 입장에 선 인물로 중세의 군주에게 그런 위치는 부여되지 않았다. 중세에는 신적 이성에 의해 관철된 유기적 공동체 그 자체가 최고 주권성을 가졌고, 군주는 그런 공동체 질서 내의 특수한 목적을 부여받은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교황권과 국가권력의 투쟁도 트뢸취가 말했듯 국가와 교회의 갈등이 아니라 양자에 의해 같이 전제되어 있던 국가적=교회적 생활통일체의 지도에 관여하는 정도를 둘러싼 갈등이라고 본다. 생활공동체의 자기 표현이 법 규범으로, 어떤 의미로 중세는 법이 지배하던 시대로 법lex는 왕rex이었으며, 계시된 한 신의 목소리가 낳은 엄한 딸이었고, 자연인 한 신의 마음이 깃든 인간 이성의 산물이다. 법은 보편적이면서 영구적인 것으로, 모든 인간의 행위는 미리 존재하면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법의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Barker) 자연적 질서사상의 논리적 귀결로 lex naturalis는 인간에 선행하고, 군주의 지배권에는 제약이 부과되어 있으며, 정치적 지배는 의무이자 직분이다. 이를 벗어난 지배는 정당성을 상실한 단순한 폭력이 되고, 여기서 중세사상은 폭군에 대한 인민의 저항권, 지배자의 암살권까지 이끌어 낸다. 중세의 다원적・계층적 지배관계가 붕괴되던 시기에 봉건귀족 및 교회는 저항권 이론을 민족국가에 대한 항쟁의 무기로 삼았고, 봉건적・신분적 기득권과의 항쟁을 통해 중앙집권적 통일국가 수립에 성공한 절대군주는 필연적으로 모든 규범 질서의 내재성에서 해방되어 자신의 자유의사에 따라 제정하여 타당성을 부여해주는 인격으로 등장했다. 군주가 만들고 지배하는 질서의 모범적인인 이미지는 신과 세계의 관계였다. 근대국가론의 중요한 개념은 모두 신학적 개념을 세속화된 것이라는 칼 슈미트의 명제는 타당성을 얻는다.(363-365)
마루야마는 사회계약에 의한 주권성립이라고는 해석할 수 없다는 반론에 대응하기 위해, 소라이학의 주체가 가진 이중적 위치에 주목한다. 이 주체는 아직 개인들이 아니다. 따라서 개인들의 결합으로서의 사회계약에는 이르지 못한다. 소라이학에서 주체는 성인 또는 정치적 지배자에게 제한된다. 마루야마는 다시금 유럽사에서 그 사례를 찾는다. 그리고 절대군주에서 그 사실을 발견한다. 다음에는 중세의 군주와 절대군주를 구별한다. 중세의 군주는 규범의 제약을 받는 존재이다. 중세는 법이 지배하는 사회였고, 이런 규범 체계와 투쟁해서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를 구축한 절대군주는 칼 슈미트가 말하는 주권적 존재였다. 말할 필요도 없이 시대적 한계 속에 있지만, 역사적 전개와 사상적 전개가 서로 상응하는 것으로 보고, 일방적 진보의 사다리를 구성한 것에 불과하다. 중세사회(중세적 군주)-절대군주-민주주의(사회계약)이라는 식의 도식을 형성한다. 이런 도식에는 절대군주는 왕권신수설에 기반한다는 전제가 서 있다. 뒤에서 말하지만, 소라이의 성인은 심지어 신도 필요없는 절대적 존재다. 그러나 사회계약은 반드시 자유주의나 민주주의를 정당화하는 논리 만은 아니다. 홉스의 사회계약은 절대군주의 사상적 기반이기도 하다. 그럼 이를 다시 중세적 군주-절대군주(신수설)-절대군주(홉스적 계약설)-민주주의(로크적 또는 루소적 계약설)의 역사발전론으로 해석할 것인가. 마루야마의 논의를 긍정하려면, 그의 주장 안에 이런 도식으로 절대정신이 자기를 구현한다는 식의 헤겔 역사철학이 깔려 있다고 보고, 이를 긍정해야만 가능하다. 마루야마는 절대군주와 이에 상응하는 중세적 군주를 너무나 단순하게 보고, 이념형으로 만들었다. 중세의 군주도 나름의 정치적 행위자이면서, 반드시 규범의 한계 속에 제약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 중세 초기 중기와 말기를 걸쳐 왕권이론이 유럽 각국에서 얼마나 다양하게 전개되었는지 몰랐던 것도 당연하지만, 무엇보다 영국, 프랑스, 스페인의 역사에서 찾는 절대왕정이란 존재도 이념형이자 신화다. 중세 군주들보다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제약도 많았고, 불안한 세력균형 상황에서 잠시 존재했을 뿐이었다. 그나마 서유럽의 절대군주는 존재했던 적이라도 있지만, 마루야마의 소라이 이해에서 등장하는 성인은 사상적으로 유추해서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그런 존재였다. 그가 기대했지만 나타난 적은 없었던. 마루야마의 교묘한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이런 절대적인 불일치에 둔감해 진다. 사상사의 전개가 정치사회사적 부재를 보완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흥미로운 것은 중세군주제와 왕권에 대해 꽤 장황한 설명을 하고 있다. 나는 여기서 천황기관설天皇機関説과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에 대한 공격을 연상하게 된다. 거칠게 말하면 천황기관설은 중세군주제와 왕권사상이다. 그리고 이를 공격하고 나온 이 글을 쓰던 시대를 지배하는 국체명징国体明徴사상은 아직 근대도 아닌 근세사상이라는 비판이다. 그러니 근대초극이란 애초에 성립하지 않는다는 그런 주장이다. 마루야마는 아주 일관성이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전성기 스콜라철학에서 근세철학을 최초로 수립했다는 데카르트에 이르기까지 철학사는 신의 절대성=초월성을 강화해간 역사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의거하는 중세신학에서 자연과 초자연이 연속적이고, 세계질서는 구석구석까지 신적 이성에 의해 각인되어 그 자체에 선한 품성을 내재하고 있는 유기체이며, 모든 인간은 그 이성적 행위를 통해 신의 은총 행위에 협력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요컨대 피안적 신과 차안적 세계는 필연적・내면적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후기 스콜라철학내지 종교개혁은 신과 세계의 내면적 연관성을 풀어내고, 신에게 주권적 자유를 부여해주는 길을 걸었다. 둔스 스코투스는 사물의 가치질서라는 개념을 배격하고, 세계는 신의 절대적 자의의 산물이자 창조적 결단의 결과라고 말했고, 후기 유명론자인 윌리엄 오캄은 스코투스적인 의사우위설을 발전시켜, 신을 모든 이데아적 구속으로부터 해방시켜 신의 의사와 도덕율의 내용을 완전히 우연적=자의적 관계에 두었다. 카롤릭주의와의 명백한 대립에 있어 신의 주권성을 강조한 사람은 칼뱅이다. 칼뱅주의는 심원한 의미에서 신중심적 신학이며, 신의 교리는 교리 중의 교링자 유일한 교리였다. 신의 영광, 신의 주권, 절대적인 신으로서의 신. 칼뱅은 오캄처럼 도덕율과 신의 관계를 자의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신의 선성善性은 신의 본질과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다. 신의 절대적 자유의사에 따라 만든 것은 그 자체로 선하다. 그러나 규범적 구속하에 놓여있지는 않다. 신은 세계에 선물恩賜을 내려주지만 본체나 실지에 있어 세계와 공통된 어떤 것도 없다. 칼뱅에게 창조주의 본체를 분해하여 피조물에 일부를 주었단느 것은 미친 짓이다.(화체설 비판) 예정구원설도 신의 절대주권성을 확보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신의 초월화 경향은 데카르트에서 그 논리적 귀결에 이르렀다. 데카르트의 신은 무한히 독립하여 최고의 예지와 힘을 가진 실체로 만물의 창조주에 머물지 않고, 모든 도덕규범, 자연법칙의 원천이다. 보든 선악, 진위는 신의 결단에 의해 정해지며, 신은 그런 가치의 실질적 내용에 대해 완전히 무차별적이다. 신은 선, 정의, 진리를 그 반대로도 만들 수 있다. 신은 자기 내부에 어떤 가능성도 품고 있지 않은 현실적 실재다. 그런 현실재로서의 신이 전지전능한 주권자로서 아무 것도 없는 데서 가치질서를 만들어냈다. 신은 국왕이 영토에 법률을 제정하듯 자연계에 법칙을 정해두었다. 자연발생적 도시보다 계획도시가 낫듯이, 뛰어난 입법자가 제정한 법률을 지키는 민족이 더 훌륭하다. 데카르트의 신에 비견할 배후에 어떤 규범적 이념도 가지지 않은 절대적 주체로 모든 규범질서를 자유자재로 제정하고, 법・불법을 구별하는 정치적 결단을 독점하는 정치적 지배자란 근세 초기 절대군주의 이념형이다. 세계에 대해 절대 무차별로 초월한 신의 영상이 질서에 대해 완전한 주체성을 가진 정치적 인격의 표상을 가능하게 했다.(365-368)
1장의 끝부분에서 마루야마 마사오는 주자학에 대한 소라이학과 노리나가학의 관계를 전기 스콜라와 후기스콜라의 관계, 즉 아퀴나스에 대한 스코투스와 오캄의 관계로 비교한 바 있다. 마루야마는 이 절에서 그 주장을 좀더 밀고 나간다. 스코투스에서 시작된 신의 절대성과 초월성은 오캄을 거쳐 칼뱅의 종교개혁 사상에서 극대화되어 모든 도덕규범에서 자유로워지고, 데카르트에게서 마침내 모든 도덕규범과 자연법칙의 원천이 된다. 데카르트에게서 신은 가치에 대해서 무차별적이다. 신은 전지전능한 주권자로 무엇이든 만들어낸다. 그리고 마루야마는 이를 절대군주라는 주권자에 대한 신학적 표상이라고 설명한다. 앞에서 말한 칼 슈미트에 기대어서 그렇다. 데카르트를 정치사상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실상 생소하다. 칼 슈미트에게만 근거한 것도 편협한지 모른다. 이 모두를 단계로 설명할 없다는 점을명시하지 않는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초기 중세 이래로 유럽 군주제에 대한 해석에서 로마법과 지역법 그리고 각종의 신학사상이 변주하면서 신학-정치적 해석이 다양하게 변주해왔다는 점을 몰랐을 수도 있다. 흥미로운 해석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데카르트와 절대군주제를 연결시키는 부분만은 쉽게 고개를 끄덕여 주기 어렵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이렇게 사상사적 발전과 사회사 혹은 정치사적 발전이 때로 교차하거나 역진할 수 있다는 점 또는 무관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다. 그것은 물론 헤겔의 영향일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 한계이기도 하고.
자연적 질서 사상의 전환에서 서양에서 신이 맡았던 역할을 일본에서는 소라이학의 성인의 역할에 다름아니었다. 질서에 내재하며, 질서를 전제하고 있던 인간에게 질서에 대한 주체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비인격적 이데아의 우위를 배제하고, 모든 가치판단에서 자유로운 인격, 그의 현실재 그 자체가 궁극적인 근거이며, 그 이상의 가치적 소급을 허용하지 않는 그런 인격을 사유의 출발점에 두어야 한다. 최초의 인격의 절대화는 작위적 질서사상의 확립에서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주자학의 자연적 질서사상이 철저했던 만큼 이데아의 우위는 강했고, 그것을 쓰러뜨릴 인격은 절대화될 필연성이 있었다. 기독교적 창조신 관념이 유기적 사유, 자연적 질서사상의 철저화를 제한하던 유럽에 비해 소라이가 수행해야 할 사상사적 사명은 훨씬 더 어려웠다. (유럽에서 Verein의 성립은 자연적 생성이라기 보다 신의 창조행위를 모사하는 인간의 독립행위였다.) 소라이가 성인관념에 모든 이데아적 성격을 떨쳐버리고, 현실화한 것, 성인의 도를 리로 설명하는 것을 거부한 것, 정사正邪의 존재를 부정하고, 선왕의 도를 따르는 것을 정이라고 한 것, 반대는 사라는 것은 홉스의 Autoritas, non veritas, facit legem(진리가 아닌 권위가 법을 만든다)를 연상케 하는 명제였다. 서양에 비교할 때, 이런 논리적 공작이 갖는 객관적 의의가 생생한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한다. 이런 성인의 위치가 도쿠가와 쇼군에 유추되자, 모두 윗분의 뜻대로 윗분의 손아귀에 있어야 한다는 정치적 절대주의로 나타난다. 스코투스적=데카르트적 신의 세속화로서의 유럽 절대군주와 소라이의 성인에 대한 유추로서 도쿠가와 쇼군의 역사적 환경의 차이는 도쿠가와 쇼군의 절대주의의 내용에 있어 봉건성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소라이의 제도에 있어서 봉건성은 그 자체에 내재하는 가치 때무이 아니라 현재의 정치적 지배자의 생각, 마음대로에 의해 작위된 결과로서의 봉건성에 지나지 않아 시대가 바뀌면 새로운 지배자는 자신의 생각에 기초하여 세계 전체의 구도를 다시 바꾸게 된다. 이것이 작위 논리의 귀결이다. 소라이는 봉건사회의 위기극복을 위해 자연적 질서사상을 배제함으로써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괴물을 불러냈다.(368-370)
여기까지 읽고 나면, 정말 스콜라의 서양사상과 주자학 세계가 그리 똑같은 것이고, 동양사상과 서양사상이 그토록 유사한 궤도를 지나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마루야마의 집요함에 설득되어 버린다. 마루야마는 스코투스에서 데카르트의 발전까지를 절대군주의 사상적 배경과 연결지은 다음 이제 소라이의 성인을 데카르트의 신과 비교하고, 유럽의 절대군주를 도쿠가와 쇼군과 비교한다. (이렇게 해결하려는데 왜 홉스나 퇴니스가 필요했던 걸까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일단 서양에서 신의 절대화가 필요했듯이 소라이에게서도 성인의 절대화가 필요했다. (니체와는 어떻게 관련지을 수 있을까 문득 생각한다.) 그리고 소라이의 성인이 더 혁명적이다. 인격신이 없는 주자학의 자연적 질서사상이 더 철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쿠가와 쇼군으로 넘어오면서 문제가 생긴다. 도쿠가와 쇼군은 실제 그런 권력을 행사하지도 않았고, 봉건적 정치사회질서의 해체로 나가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도쿠가와 쇼군은 모든 것을 가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지만, 실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를 역사적 환경의 차이로 얼버무린다. 그러면서 소라이에게 또 한 번 무기를 쥐어준다. 성인의 작위는 소라이가 말한 봉건질서로의 복고가 아니라도 무방하고 어떤 새로운 질서라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상의 빈공간, 무한한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런 가능성의 공간이 열렸다고 할 수 있을까? 마루야마는 소라이가 괴물魔物을 풀어놓았다고 까지 말하지만.

2장 5절 쇼에키와 노리나가에 의한 ‘작위’ 논리의 계승: ‘작위’ 논리의 정치적 귀결-안도 쇼에키에 있어서 ‘자연’과 ‘작위’-모토오리 노리나가에 있어서 ‘자연’과 ‘작위’
봉건사회의 위기 해결의 방안으로 도를 성인이라는 인격적 실재의 작위로 돌리고, 도쿠가와 쇼군의 절대주의에 의해 자연경제에 기초한 신분질서를 건립하려는 소라이의 기도에는 모순이 내재되어 있다. 그가 기초한 주체적 작위의 논리는 Gesellschaft적 질서사상으로 봉건적 사회관계를 이질적 논의에 의해 포장한 것이다. 봉건적 사회질서 내지 근본규범이 작위 논리에 기초지워진다면 그 정치적 귀결이란. 가장 래디컬한 귀결로 소라이학이 인간의 질서에 대한 우위를 보여줌으로 모든 질서는 인간의 의사에 의해 자의적으로 개변될 수 있다는 점을 가르쳐 준다. 자연과 작위의 대립은 메이지 초년의 계몽잡지 『万国叢話』에서도 정치에는 ‘천조天造설’과 ‘인작人作설’ 있다고 명쾌하게 드러난다. 이런 귀결은 소라이는 단연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한편으로 왕조를 연 개조는 세계전체의 구조를 변화시켰다고 하면서도, 성인을 종교적 절대로 끌어올겨 성인이 작위한 도[예악형정]에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오륜이라는 규범과 사농공상의 신분질서는 쇼군의 작위에 기초한 제도임을 넘어 절대화된 길 그 자체에 편입되어 있다. 어떤 제도적 변혁도 봉건사회의 틀 안에 머물러야 한다. 그러나 그 내부에는 취약성이 있다. 소라이가 궁극적 가치를 이데아로부터 인격으로 옮기는 순간, 그는 모든 영원한 것을 시간의 파도에 맡겨버렸다. 이데아의 우위에 기초한 사상에서 역사는 이데아 실현의 장이며, 어떤 역사적 변화도 이데아 양상의 변화에 머문다. 그러나 내재적 가치의 인격에로의 주체적 초월은 필연적으로 역사의 연속성의 파괴를 초래한다. 소라이에게도 百世를 오로지 주자의 『통감강목』처럼 논하는 태도에 반역이 일어나 각각의 시대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시대의 변화는 언어와 제도의 변화를 의미한다는 역사적 개성에 대한 인식이 눈에 띈다. 한번 연속에서 단절로, 보편성에서 특수성으로 향해진 의식은 멈춰서야 할 한계를 모르게된다. 성인과 작위한 도를 이성적 인식과 가치판단의 다른 편에 두는 것은 주자학의 정적 합리주의의 극복 및 그에 따른 역사의식 출현의 논리적 전제인데, 절대화된 성인의 도가 어느새 역사적 상대성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수백년이 흐르면 성인이 만든 것에도 폐단이 생기고, 세상이 어지러워진다. 이런 소라이의 후퇴는 『弁名』에서 삼대의 예가 이미 각각 다르다며 자연의 동일성에 대해 역사의 변화성이란 무기를 들고 주자학에 다가섰을 때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결국 성인이 만든 예악과 다른 개국 군주가 만든 제도는 소라이의 엄격한 구별에도 불구하고 질적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륜 이나 사농공상이란 봉건사회 기본질서도 천지자연의 리가 아닌 한, 선왕의 작위에 기초지우려 해도, 다른 모든 제도와 마찬가지로 시간의 흐름 아래 놓이게 된다. 인간이 만든 것은 인간이 파괴할 수 있다. 봉건사회를 위한 변혁이 봉건사회에 대한 변혁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절대적 보증은 소라이학의 논리에는 없다.(371-375)
소라이의 작위 논리가 봉건사회에 가져오는 외부로부터의 첫번째 충격이란, 일단 제도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드는 것인한, 아무리 소라이처럼 봉건적인 제도를 재건한다고 해도, 봉건제도의 한계 아래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봉건제도가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은 자연질서와 연관되어 있다는 상대화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인데. 다시 말해 다른 대안이 없는. 그가 어떤 사람이든 사람이 일단 한 번 제도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하기 시작하면, 모든 제도는 상대화가 되고, 그런 논리에 의해 봉건사회를 구하기 위한 작위 사상이 봉건사회를 무너뜨리는 작위사상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점이다. 마루야마의 소라이의 작위사상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매우 적극적인 평가인 동시에 봉건사회에 대한 근본주의적 해석을 담고 있는 것이다. 마루야마의 이런 모든 논리가 성립하려면 거기에는 봉건사회의 순환성이라는 전제가 성립해야 한다. 봉건사회는 자연질서의 자연스러운 연장이라는 사상 속에서 모든 사회질서가 강력하게 자리잡고 있는 데다 사상과 사회현상이 상호순환적으로 보완하고 있고, 이런 사상이나 사회제도 모두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을 때만 이런 논리가 성립한다. 즉, 봉건사회를 이념형으로 보지 않고, 현실 그대로 들여다보는 순간 무너질 수밖에 없다. 여하튼 마루야마처럼 소라이를 이런 식으로 해석하게 되면, 그리고 소라이학의 후계자들이 소라이의 이점에 근거해서 사상을 발전시켜갔다면, 그때는 소라이에 근대성의 맹아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한국의 독자들은 마루야마의 이런 주장을 읽을 때, 그래서 일본의 전통에는 근대성의 맹아가 있었다는 자랑이냐라는 심정으로 읽지만, 마루야마는 실은 그런 맹아가 있었다고 해도 꽃피우는데 실패했다는 점을 말하는 데다가, 그런 맹아의 존재란 실은 일본 전통사상 순수성을 부정하는 논리로 사용된다. 순수한 일본사상 따윈 없다는 그런 주장으로 파시즘을 공격하려는 것이다. 한일관계의 오묘함은 서로 같은 것을 보면서 전혀 다른 것을 읽어낸다. 한국과 일본의 학자들이 가진 열등감의 정체가 무엇인지가 그 원인일 것이다.
소라이학의 논리에 잠복한 괴물은 봉건적 사회관계를 바깥에서부터 뒤흔들었지만, 내면적 가치를 빨아들여서 안으로부터 공허한 것으로 만들기도 했다. 봉건사회는 폐쇄적・완결적 사회적이 계층적으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통일성이 유지되는 사회로, 정치적으로 간접지배의 원칙으로 나타난다.(쇼군과 다른 영주와의 차이는 쇼군직할영지天領의 양적 우월에 있을 뿐, 질적 차이는 없다.) 지배의 간접성에 대응해 정치의 물적 기초가 각 사회권에 내재적으로 나뉘어져 있다. 인적 행정직der persönliche Verwaltungsstab과 물적 행정수단das sachliche Verwaltungsmittel의 결합은 전형적인 모습이며, 법을 제정하고 집행하는 권한도 신분에 따라 광범하게 분산되어 있다. 사회권의 폐쇄성의 원칙은 무사 만이 아니라 서민들 사이의 사회관계에도 적용되었다. 봉건사회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내재적 가치의 계층적 체계이다. 전체 사회질서의 가치가 개개의 폐쇄적 사회권에 개별적으로 내재 분산되어 있고, 각각의 사회권은 전체질서의 불가결한 담당자이므로 그런 가치의 신분적=지역적 내재성을 유지하고 사회권의 폐쇄성을 유지하는 것은 봉건사회 질서 유지에 중요하다. 이런 폐쇄성이 파괴되고 분산되어 있던 가치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응집되는 순간 봉건체제는 붕괴된다. 지배의 간접성이 사라지고 중간권력이 최고권력에 습수되며, 행정의 물적수단(건물, 마필, 무기 등)이 행정직의 사적 소유로부터 분리되어 국가에 집중될 때, 입법권이나 재판권의 다양한 분포가 중앙에 통일될 때, 근대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소라이학은 봉건적 질서를 형해화한다. 주자학의 대우주・소우주의 유기체적 도식은 봉건사회의 내재적 가치의 계통적 체계에 들어맞는다. 소라이학은 이데아를 성인에 종속시키고, 사물에 분산된 가치를 성인이라는 절대화된 인격에 흡수한 결과, 사회규범은 천지자연의 리가 아니라 절대적 인격의 작위 때문에 타당한 것이 된다. 데카르트적 신의 개념에서 도덕율을 결정하는 자의성으로 귀착하고 권위가 법을 만든다는 홉스의 명제에서 법실증주의가 생기는 것처럼, 작위는 봉건적 사회질서에서 실질적 가치를 박탈하고 단순한 형식적 실정성에 근거지우는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소라이의 정치적 절대주의가 순수한 자연경제와 그에 기초한 순전한 계층적 질서의 수립이라 해도 유럽의 절대주의에 비해 봉건사회에 대한 위험성이 덜하지 않았다. 실질적 내용에 무관심하다는 점은 주체적 작위의 입장에 공통적이다. 규범은 소라이에 있어 형식화될 뿐 아니라 외면화되기도 한다. 도가 천지자연이 아니라 성인이 만든 것이라면, 오륜・오상과 같은 사회규범은 인간성 속에 뿌리내리지 못한다. 소라이는 도가 인정人情에 입각한 것이라 역설하는데, 이는 규범이 완전히 공적・정치적인 것으로 승화되고 있어 개인적・내면적 영역과 부딪히지 않기 때문인데, 이는 그럼 규범이 인간을 내면에서 의무지워주는 힘을 잃어버렸음을 말해준다. 다자이 슌다이도 규범의 외면화라는 문제에서 스승의 논리적 귀결을 충실하게 끝까지 밀고 나가, 외면적으로 군자의 면모를 갖춘 사람이 군자이며, 내심이 어떤지는 묻지 않는다고 했다. 나쁜 마음이 드는 것은 인정이지만, 행동에 옮기면 소인이다. 여기에 이르면 유교 규범은 인간의 내면성과 어떤 관련성도 가질 수 없다.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분리는 규범 준수를 용이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여도, 규범의 구속력을 약화시키며, 인간의 감정에 기반을 둔 자연성을 전능한 것으로 만들어주게 된다.(375-380) 소라이학이 도입했던 주체적 작위사상이 봉건사회에 미친 정치적 기능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적극적인 것으로 봉건적 질서의 변혁, 새로운 질서수립의 논리적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소극적인 것으로 봉건적 사회관계 및 그 관념적 유대로부터 실질적 타당성의 근거를 박탈하고 형해화했다는 것. 도쿠가와 후반기 사상사에서 대체로 소극적인 것으로 현실에 작용했다. 작위적 질서관이 인작설로 적극적 의의를 갖게 된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이다. 소라이가 불러들인 괴물은 봉건적 지배 태내로 파고들어가 내면에서 부식시키고 있었다.(380)
둘째로 봉건사회란 폐쇄적이고 자기완결적이며, 분권화된 지배구조이기 때문에, 중앙집권적으로 제도를 수립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것이 아무리 봉건사회의 구축을 향한 방향이라고 해도 봉건사회를 안에서부터 부식시킨다는 것이다. 특히 내면 도덕을 강제할 방법이 사라지게 되면, 규범적 구속을 무너뜨리고 만다. 내면 도덕의 윤리도 무너지고, 이를 제도적으로 강제할 외적인 근대 국가도 형성되지 못한 상황에서 등장하는 것은 감정과 자연에 기반을 둔 낭만주의다. 규범만 자연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도 규범으로부터 해방된다는 주장이다. 한 마디로 소라이학은 새로운 사회를 구축하는 방향으로는 전개되지 못했으나, 기존 사회를 안에서부터 부식시키는데는 충분했다는 것이다.
겐로쿠 시대 표면화된 봉건제의 동요는 화폐 주조를 계기로 한 상업자본 내지 고리대자본의 급격한 대두에 의해 배태되었지만, 상업자본이 상업자본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그 점에 봉건사회에 대한 변혁의 힘으로서 역사적 한계가 있었다. 지배적인 생산은 농업이고, 공업은 농촌의 가내공업, 동업조합 수공업, 問屋制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순수한 산업자본은 도쿠가와 시대를 통해 성장을 거두지 못했고, 쇄국에 의한 해외시장의 차단은 생산방법의 변혁에 대한 자극을 안겨주지 못했다. 구라모토蔵元, 가케야掛屋, 후다사시札差 등 거대한 조닌은 무사계급의 경제적 운명을 손아귀에 쥐고 있었다. 무사계급에 대한 대부를 통해 높은 이자를 챙기고, 상업자본가의 자격으로 봉건적 소유형태를 침식하고 있었으나 이미 존재하는 생산방법으로 수입을 올리고 생산방법에는 외부적으로 접촉하는 한 봉건적 지배자에 의존하는 기생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빌린 돈을 갚지 않거나, 강제적인 차용, 강제 기부금 등 적법 불법한 지배층의 공세에 대해 순수 경제적인 방어 밖에 강구할 수 없었고, 권력에 의한 몰수 같은 마지막 수단 앞에는 침묵하는 수밖에 없었다. 상품경제의 농촌팀투는 농민층의 분화를 촉진했으나 자본가적 생산의 미성숙으로 농촌 생활은 내부적으로 침식되면서 중간 착취계층이 생겨나고 농민들의 생활은 비참해졌다. 한편으로 봉건적 지배체계는 상업・고리대자본의 침식에 의해 경제적으로 쇠약해지고, 도시의 우치코와시打毀し나 농촌의 잇키一揆에 의해 정치적으로 해체과정을 걸으며, 다른 한편 새로운 생산양식을 담당할 세력은 도쿠가와시대를 통해 충분히 사회적으로 성숙하는데 이르지 못했다. 이점이 작위논리의 발전방향이 봉건사회의 침식 쪽으로 달려가게 한 역사적 근거였다. 하강기에 들어선 봉건사회에 반대파적 사상적 동향은 소라이학을 근대적인 인작설로 끌어올릴 힘을 결여하고, 봉건적 사회관계가 작위의 산물이 되며, 거기서 필연적으로 소외된 자연을 자신의 의지처로 삼아, 그런 질서 내지 관념적 유대에 대한 사상적 저항을 시도하게 된다. 안도 쇼에키와 모토오리 노리나가(380-383).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봉건사회가 무너지게 된 데 대해 사회경제적 배경을 설명한다. 마루야마는 이런 설명을 절대 빠트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 내용은 지극히 도식적이다. 한 마디로 봉건사회의 자연경제와 농업생산에 의존한 구조는 붕괴했고, 상업자본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산업자본으로 발전하지는 못해 생산양식을 바꾸지 못했고, 정치적 지배자들의 공격에는 무력했다. 이 과정에서 피지배 생산자인 농민들은 비참해졌다. 봉건사회를 떠받치는 사회경제적 토대가 침식되고 붕괴한 이상 봉건사회를 재건하는 쪽으로 작위사상이 전개되지 않고, 봉건사회를 침식하는 쪽으로 전개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사상가들은 소외된 자연을 도피처로 삼는다는 것. 토대와 상부구조가 너무나 완벽하게 조응하는 도식적인 주장이라 더는 설명을 못하겠다. 마루야마의 설명이 때로 혼란스러운 것 또는 혼란을 일으키는 이유는 봉건사회와 이를 설명하는 사상의 선후문제와 상관관계 문제에 있다. 사회 변화에 사상이 반드시 필요한가? 특정한 사상 없이 사회는 형성되거나 돌아갈 수 없는가? 사상이 붕괴는 사회의 붕괴의 전조인가? 아니면 사회가 붕괴해서 사상이 무너지는가? 마루야마는 꽤나 자신감 있게 이 둘 사이가 상응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 하나하나 파고들어 가면 이런 문제에 있어서 구체적인 인과성이나 상관성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크게 크게 말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지만.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다 어려움에 빠지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안도 쇼에키安藤昌益는 비교적 최근에 주목을 받은 사상가다. 그는 호레키 연간(1751~64)에 활동한 의사출신이라는 점 외에 알려진 바가 별로 없는 고립된 인물이지만 도쿠가와 시대를 통해 봉건적 사회질서 및 관념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부정한 유일한 사회사상이며, 그 관념이 자연과 작위 대립의 발전적 적용 위에 구축되어 있다.(383-384) 쇼에키의 사상체계는 기초인 자연철학이 광범하며 상세한데, 현실사회에 대한 깊은 시대적 관심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추상적인 형이상학적 사색도 정치적=사회적 귀결로 이끌어가기 위한 단계이다. 소라이보다 한 세대 늦게 봉건사회의 위기를 도호쿠東北의 외딴 곳에서 농민들 한가운데서 보게 된다. 봉건사회는 모든 사회적 모순의 탈출구를 농민에게서 찾고, 재정 건전화 사업은 결국 농민들에게 무거운 공조를 부과하고 엄중하게 징수하게 된다. 토지의 유질처분이 잇따르고 기근과 재해가 겹치자, 농민들은 잇키로 대항했고, 법은 엄해졌다. 잇다른 기근으로 간토에서 도호쿠 일대에 영아살해間引き가 널리 행해지게 된다. 교호까지 상승세를 타온 인구 증가가 멈추고 감소하기 시작한다. 쇼에키가 보기에 농민들의 궁핍의 원인은 직경直耕하지 않고, 노동생산물을 수취하는 불경탐식不耕貪食하는 무리들, 무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에 저항하는 자를 포박하는 것은 군주가 자연천하를 훔치기 때문이다. 무사가 없다해도 농민은 농민이다. 농민이 무사를 기르는 부모인데, 무사는 부모를 멸시한다. 이는 인정仁政이 아니라 망악忘惡이다. 유학자나 종교인도 불경탐식자이기에 이런 모순을 지적하지 않는다. 유불・노장・신도 모두 노동하는 피치자와 노동에 기생하는 치자의 관계를 대전제로 하고 있다. 수백년 이상 이런 교설의 홍수 속에서 명백한 도착을 보고도 모순을 의식하지 못하게 되었다. 성인聖人이 모든사람이 스스로 일하는 일상적 상태(自然の世)를 다른 사람이 농사지은 것을 빼앗고 종속시키는 특수한 상태(法世)로 전환시켰다. 성인이 상하 지배관계를 만들었다. 군주는 성인이 천하를 훔친 후에 생긴 이름이다. 오륜과 사농공상도 성인이 사사로이 만든 것이다. 성왕을 세우는 것은 사치의 시작이자 악의 근원으로 사회악의 궁극적 책임은 성인에게 있다. 쇼에키는 복희에서 공자까지 모두 11명을 지목하여 자연의 참된 도를 잃어버리고 천하 국가를 훔치기 위해 병란兵亂의 세상을 만들었다. 성인이 자연을 모르고 사법私法을 만든 것이 문제이며, 쇼에키는 소라이가 모든 가치의 근원으로 본 성인의 작위에서 모든 타락이 시작되었다고 보고 작위 이전의 자연세로 돌아가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며, 자연 상태를 잊어버린 세상사람들의 의식 개조가 전제이다. 이를 위해 성인들의 가르침이 도둑들의 변명임을 증명하는 이데올로기 비판을 해야 한다. 쇼에키가 복희, 신농, 황제, 요순우탕문무주공, 성현, 학자, 석가, 쇼토쿠 태자, 하야시 라잔에서 소라이에 이르기까지 모두 농사짓는 첮도를 훔치고, 여분의 식량을 먹어치우면서, 서로의 본성이 더불어 충분함互性具足을 알지 못한다고 과거의 모든 사상과 대결했을 때 부정해야할 이데올로기의 마지막 단계는 소라이학이었다.(384-390)
쇼에키의 사상은 당시 일본이라는 상황에서 보면 놀랍지만, 또 없을 법하지도 않다. 이런 식의 자연주의적이고 자연회귀적 사상은 어떤 시대에도 존재하는 법이다. 간디도 영국인 앞에서 물레를 돌렸고, 농촌으로 돌아가려는 이들은 지금도 존재한다. 마루야마가 주목한 것은 쇼에키가 소라이를 지목했다는 점일 것이다. 모두가 사작私作이고 사법私法이란 비판은 일견 소라이의 작위론에 근거해서 그들 모두를 뒤집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복희에서 시작해서 소라이까지 비판한 것도 그렇고. 그렇게 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쇼에키의 과제가 불경탐식의 타파라면 그의 지도동기leitmotiv는 직경直耕이다. 작위를 배제하고 드러낸 자연은 직경이다. 이 의미를 파고들며 소라이학의 주체적 작위와 주자학적 자연을 아울려 지양하는 그의 논리를 구축한다. 직경이란 인간이 스스로 노동함으로써 생명을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우주적 자연이 모든 사물을 생산하는 것도 천지의 직경이다.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자기운동活眞自行 뿐이다. 이런 운동의 배후에서 운동의 근원을 이루는 인격적 비인격적 실체란 추상적 사유에 불과하다. 천명, 태극, 음양, 오행 같은 것은 불경탐식하는 자들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모든 사물은 추상적=고정적 실체를 상정하지 말고, 구체적인 활동으로 이해해야 한다. 무시무종無始無終하며, 무상무하無上無下하고, 무천무존無賤無尊한 천지에는 선후가 없다. 오로지 자연뿐이다. 천지의 위치를 덧붙이는 것은 그르침의 시작이며 큰 혼란의 근본일 뿐이다. 오행은 실은 하나이며, 오륜과 사민을 나눈 이유는 뭇사람의 위에서 불경탐식하기 위해서이다. 노자도 자연을 고정시키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으며, 불교의 임제도 실체와 그림자를 나눈 잘못을범한다고 비판한다. 쇼에키의 불경탐식에 대해 직경을 추구하는 것은 기능주의로 철학적 표현을 실체 개념에 대한 기능 개념의 투쟁애서 구하는 것이다.(390-393) 호성互性이란 사물 사이에 존재하는 상관적성질을 가리킨다. 活眞自行이라는 자기 운동으로 모든 사물이 파악된다면, 모든 절대적・고정적 대립은 상대화된다. 삶은 죽음을, 죽음은 삶을 포함하고 있다. 삶과 죽음은 互性의 상징이다. 천지, 남녀, 선악, 리비理非, 상하, 치란 등 대립은 모두 互性을 갖는다. 천지는 시작도 끝도 없는 일체이다. 남녀, 선악, 밤낮 등의 대립은 대립하면서 동시에 통일되어 있는 것으로, 혼동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추상적으로 분리하여 고정시키는 것도 일방적인 것偏惑이다. 두 개로 나누어 서로 다른 것으로 보지도 말고, 섞어 하나로 혼동하지도 말아야 하는데 사물을 구체적 작용으로부터 분리시켜 이해하는 종래의 사상(석가, 노자, 장자, 성덕태자 등)은 필연적으로 偏惑에 빠진다. 互性를 알지 못해, 直耕의 오묘함을 드러내지 못하고, 천지, 일월, 남녀, 군민, 상하, 귀천, 선악 등 二別을 가르쳐, 둘이면서 하나의 一眞氣인 眞道를 훔치고 천하를 미혹하기에 이른다. 자연세가 법세로 바뀐 것은 互性의 원칙이 상실되고 구체적 통일이 分別知의 추상적 대립으로 변한데서 시작되었다. 음양의 차별이 생겨 일부일처가 무너지고, 유불의 일부다처나 독신이 생겼고, 성인이 윗자리에 서자 亂이 일어난 후 治이 생겼다. 자연에는 治도 亂도 없고 眞道으로 편안히 먹고 살 뿐이다. 쇼에키는 자신의 이상사회를 서술하면서도 성인의 작위에 대해 추상적인 二別을 부정하는 형태로 그린다.(393-395) 곡식, 땔감, 생선은 각자 생산하여 바꾸니 빈부도 상하도 없고, 책망도 아첨도 싸움도 군대도, 형벌도 근심도, 오상, 오륜, 사민의 가르침이 없으니, 성현도 어리석은 사람도 사무라이도 없는 자연과 오행에 의해 생겨나는 세상이다. 천하는 하나이지 둘이 아니므로 누구나 농사를 지어 자식을 기르고 부모를 봉양한다.(396) 만민평등한 직경에 기초를 둔 물물교환 사회로, 소라이의 이상사회에서 지배자인 무사를 배제한 형태이다. 더욱이 가공의 몽상이 아닌 법세 이전에 어디서나 존재했던 것으로 에조(북해도)와 네덜란드에는 지금도 존재하는 사회다. 그는 나가사키에서 네덜란드 문화를 접하고, 모두가 일하는 사회라고 생각했다. 일본에서도 그런 세상이 다시 실현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에도 막부 개창 후 150년 만에 도쿠가와 시대에 철저히 적대적인 목소리가 등장했다. 근세 초기에 주자학 내지 주자학적 사유에 있어서 봉건적 계통제는 고금천지의 자연적 질서였다. 그것이 소라이학에 있어 성인의 작위에 의해 근거지워짐에 따라 자연적 질서는 봉건사회로부터 소외되었다. 안도 쇼에키는 소외된 자연으로 성인의 작위로서의 봉건사회를 부정한 것이다. 소라이와 슌다이는 성인이 출현하기 이전 상태는 짐승과도 같은 세상이었는데, 성인이 예악제도를 만들어作為 비로소 인륜이 있는 세상이 되었다. 쇼에키에 있어 사람은 치우치지 않고 모두 통하는 기에 의해 만들어졌고, 모두 평등하게 직접 일해서 대소 상하의 이원적 구분이 없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성인이 나온 후 크고 작음의 순서가 생겼고, 사람의 세상을 짐승의 세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자연에서 작위로의 전개는 인간에서 짐승으로의 타락이다. 주자학적 자연은 그 부정으로 소라이학적 작위를 낳았고, 다시 부정의 부정으로 쇼에키적 자연에 이르렀다. 쇼에키는 자신이 처한 사회적 환경을 응시하여 그런 정치적 결론을 이끌어 냈지만, 그런 논리적 과정은 그때까지의 사상적 발전 속에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397-398) 그러나 봉건사회의 철저한 적대자가 작위의 논리적 가치의 단순한 부정자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역시 그 반봉건성은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법세를 자연세로 전환시켜야 할 주체적 계기는 그의 이론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쇼에키의 이론에는 직경이란 자연세의 논리는 있어도, 자연세를 만들어내는 원리는 나오지 않는다. 법세의 타도에 의한 자연세의 회복에 대해 논하는 대신, 법세에 있으면서 자연세와 같은 효과를 내는 방법이었다. 그는 평화주의를 취하고 그의 이론의 실현에 대해 백년 후를 기약했으며, 그의 자연세는 네덜란드에 주목했는데도, 봉건사회 이후 보다 이전의 사회적 특징을 더 많이 지니고 있다는 점도 역사적・사회적 조건을 말해준다.(398-399)
쇼에키는 흥미로운 사상가다. 마루야마는 쇼에키의 사상을 실체에 대한 기능주의라고 평가한다. 고세이互性란 아주 전통적인 이해방법의 하나이다. 양극적 특성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으면서, 그것이 하나로 기능하는 세계관인데. 아주 통속적이면서도 현대 일본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처세술이다. 모든일에는 플라스가 있으면 마이나스가 있다는 식의 일본인의 상투어에서 흔히 발견된다. 그러면서도 만민평등의 모두가 농사짓는 사회는 사농공상의 단순한 구별 이전의 원시공동체적 사회를 지향한다. 무사계급도 군주도 없으면, 연공도 없고, 노역도 없으니 모두가 태평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네덜란드가 그런 사회라고 말한다. 쇼에키는 나가사키에도 왕래했다고 하는데, 쇼에키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모두가 일을 한다는 것이다. 쇼에키 뿐 아니라 많은 수의 일본사상가의 저작에서 네덜란드에서는 국왕도 상업을 한다면서, 왕도 일을 한다는 주장이 자주 나온다. 왕실의 이름으로 무역하는 것이 그렇게 비친 모양이다. 쇼에키나 당시 농민들의 눈에는 무위도식하는 것으로 보였던 당시 지배층을 불경탐식으로 보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네덜란드가 그런 사회일리가 없지 않은가. 자연의 부정인 작위를 재차 부정한 자연으로의 회귀 사상에서, 쇼에키는 구체적으로 자연세를 되살릴 방안은 제시하지 않는다. 그런 주장을 했다가는 당장 참수를 당했을런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기근이 심한 도호쿠 지방에서 사실상 농민들 사이에서 상당히 자유롭게 살았던 것 같다. 그가 말한 법세에 있으면서도 자연세와 같은 효과를 내는 것이 그런 것인지. 그러면서 백년 후에는 그런 사회가 올 것으로 생각했고, 네덜란드 같은 사회를 그렇게 보았다는 대목이 흥미롭다. 아주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마루야마 식으로 사유양식의 구조를 보면, 쇼에키의 자연주의에서 자유주의, 중농주의적 자유주의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를 완성자로 하는 근세 일본의 국학国学과 정치적・사회적 질서와의 접촉이라는 측면, 바꾸어 말하면 국학적 사유구성을 통해 봉건사회는 어떻게 비춰지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다룬다.(399) 국학의 내용 중 현실적 정치・사회사상은 취약한 고리 하나를 이루고 있다. 국학이 가학의 영역에 머물러 있던 초기 단계는 물론 고도라는 사상적 입장을 자각하게 된 마부치, 노리나가에 있어 그들이 살았던 현실의 정치적・사회적 환경을 직접적 대상으로 한 고찰은 이렇다 할 지위가 없고, 당시의 상식적 정치론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는 국학의 본질을 심층적으로 규정하는 비정치적 성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마부치는 유학자의 치국평천하를 비웃었고, 노리나가는 아랫사람은 윗사람이 정한 규정대로 행하기만 하면 되며, 사사로이 도를 행하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이론과 실천을 구별했다. 모토오리 오히라本居大平는 일본皇国은 중국 조선漢国과 달라, 마나비学問은 마츠리코토政事의 요체가 아니며, 세상의 다스려짐 여부는 마나비고토学問事와 관계없다고 말했다. 국학의 이런 비정치적 성격은 존황尊皇 사상으로 하여금 끝까지 막부 정치와 융화하게 해주고, 완전한 반대 이데올로기로 전화를 억제하던 모멘트였다. 봉건적 지배관계와 관련하여 국학의 주요한 사상가들로부터 들을 수 있는 직접적인 말은 모두 현존하는 질서의 무조건적 긍정 내지 예찬으로 끝난다. 마부치는 상대를 찬미하고, 마츠리고토 유교의 침윤을 통탄하여, 도쿠가와의 세상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찬양했다. 노리나가도 오늘의 이 시대는 아마테라스오미카미가 구상하고, 조정의 위임에 의해 이에야스로부터 대를 이어 위대한 쇼군 가문이 천하의 정치를 펴는 시대로 이에야스의 법률, 쇼군 가문의 규정,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법률규정이라며 봉건적 계통제를 정통화한다. 홍수・가문・기근이 비참해도, 평화로운 시대라고 거리낌 없이 읊는다. 고학古学에서 하나의 적극적 신학神学을 구성하고, 그 학통에서 메이지 유신의 지사들을 배출한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 조차 텐노-막부-다이묘라는 위임관계御手代를 다함이 없는 정치형태라고 했으며, 다자이의 성인의 도는 모두 도쇼구東照宮의 무덕御武徳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리얼리스틱하게 현존 질서를 긍정하는 사람이었다. 표면의 정치적 사유를 그대로 맏아들이면, 국학은 시종일관 봉건사회로부터 한걸음도 내딪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국학 사상의 혁신적 의의가 순수 학문적 영역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며, 역설적이긴 하나 국학은 본질적 성격이 비정치적이기 때문에, 봉건사회에 대한 긍정이 비정치적 입장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도리어 하나의 정치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국학의 변혁적 이데올로기를 억제했던 비정치성은 보수적인 기능도 상대화시켰다.(400-403)
문제적 사상가 노리나가의 정치적 측면은 이렇다할 고찰이 없는 당시의 상식적 정치론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비정치적 성격을 지녔다. 흥미롭게도 이런 비정치적 성격은 존황사상과 막부 정치의 융화를 가능하게 했다. 현존 정치질서에 대한 무조건적 찬양. 일본의 조상신으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통치에 대한 순수한 긍정은 신학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마루야마는 반복적으로이런 비정치성이 가지는 다른 측면, 변혁에 대한 순응에 주목한다. 어떤 다스림도 긍정하는 사상은 현존 질서의 가치에 대한 평가가 없기 때문에, 현존 질서의 유지를 위한 노력도 하지 않는다. 세상이 뒤바뀌면 또 찬양할 뿐이다. 딱히 친일이 문제랄 것이 없이, 독재정권이건 뭐건 상관없이 찬양시를 읊어대는 어떤 시인의 아름다운 말들이 떠오를 정도다.
국학은 본래 上代 문학의 문헌학적 연구에서 시작되었다. 거기서 후세의 이지적 반성이나 논리적 강제를 수반하지 않는 인간 심정의 적나라한 모습을 찾아내고, 자연적 성정의 자유로운 발로를 즐겼던 상대 생활에 대한 동경을 낳았다. 국학은 먼저 모든 인간적인 작위에 대항하는 노장적인 자연의 주창자로서 출현했다. 여기서 유교 규범을 성인의 작위로 돌리는 소라이적인 사유가 부정적 계기로 개입하게 된다. 소라이와 슌다이는 유교 규범을 외면화・형식화했고, 국학자들은 그런 규범의 인간성으로부터의 소외를 이용하여 내면적, 심정 세계의 불가침성을 선언했다. 소외된 규범은 공적・정치적 제도를 의미한다. 이런 외적 규범에 대한 내적 자연의 반항을 밀고 나가면 쇼에키, 노자, 루소 같은 봉건적・신분적 구속 그 자체의 부정에까지 이르는 자연주의로 흐른다. 그러나 국학적 자연주의는 움직이는 것은 사람의 타고난 마음이라는 인간 성정의 본래적 자세에 입각하려는 와카적 정신을 핵심으로 삼고 있다. 자연이 하나의 이즘이 되면 내적 심정에 대해 새로운 당위로 다가가고, 유동하는 심정은 다시 고정적 규제에 따르게 된다. 노리나가는 노장은 인간의 사카시라를 싫어하여 자연의 도를 억지로 세우려 세기에, 사카시라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은 도리어 자연을 어기는 억지強事라 말했다. 인간적 작위에 대해 내적 자연성을 우위에 두고, 자연 그 자체의 관념적 절대화를 피하기 위해서는 내적 자연 그 자체의 배후에서 그것을 근거지워주는, 초인간적 절대적 인격을 두어야 했다. 신의 작위로서의 자연이 노리나가의 입장이다. 어떤 규범적 구속도 없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真心에 따라 평온하고 즐겁게 세상을 살았던 上代 일본의 국민생활은 그냥 그대로 신의 도神の道이다. 조상신이 만들어 전해준 도이다. 후대에 真心가 漢心에 의해 가리워지고, 신의 도가 성인의 私智로 만들어낸 규범에 방해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추이도 신께서 하시는 일神の御所為인데, 타락은 나쁜 신의 일이지만, 이 또한 조상신의 령이다. 고도를 따른다고 억지로 上古와 같이 만들려면 신께서 하신 바를 거스르는 일이다. 오늘날의 국가정치는 윗자리에 계신분이 정하신 대로 하는 것이 상고의 신의 다스린 취지에 들어맞는 일이다. 노리나가는 고도조차 당위로 작용하지 못하게 했다. 인간정신의 자연적 활동에 대한 어떤 강제가 되고, 신의 도를 따르는 생활태에 모순된다. 역사적으로 주어진 것을 주어진 대로 긍정하는 것이 풍요롭고, 넉넉하며, 세련된 노래의 정신을 본질로 하는 국학 정신의 귀결이다. 그 사상의 근저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신을 신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신의 작위에 대한 절대적 귀의였다. 봉건적 계통제는 그들이 처해 있는 역사적・현실적 여건이며, 그렇게 되어 있는 것 역시 신의 작위에 의한 것이다. 그 시대의 법령도 신의 명령이니, 그 시대의 법령을 지키는 것이 신의 도이다. 거기서 현질서에 대한 방항이 부정됨과 동시에 절대성의 보증 역시 거부한다. 시대가 바뀌면 새로운 지배형태는 역시 그 시대의 신의 명령이다. 중요한 것은 신께서 하시는 일 그 자체이지, 내용이 아니다. 내용으로서의 봉건제는 긍정되는 동시에 부정된다. 인간이 만든 작위 규범에 대한 자연의 주창자인 국학은 자연 자체의 규범화를 방지하기 위해, 신의 작위에 의거하게 만들었고, 결국 소라이의 주체적 작위의 논리적 귀결과 같았다. 노리나가가 신의 도와 성인의 도를 아무리 구별했어도, 노리나가의 신과 소라이의 성인의 체계적 지위의 유사성은 가릴 수 없을 것이다. 양자 모두 이 세상 모든 제도와 문물의 궁극적 근거다. 양자 모두 통상적 윤리적 가치판단을 넘어서 있는 절대적 인격이다. 소라이가 리로 성인을 헤아리는 것을 모독으로 여기듯 노리나가도 신을 이치로 따져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신 내지 성인은 양자 모두 이데아의 우위를 배제하며, 인격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다만 이런 사유구성을 취한 동기는 정반대인데, 소라이의 주체적 작위는 처음부터 봉건사회의 보필이라는 공적=정치적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정치적 지배라는 관점에서 논의되었고, 노리나가는 국학의 전통을 이어받아 내면적 심정의 真心와 모노노아와레의 세계가 일차적 관심사였고, 그 순수성을 밀고나간 결과로 이르게 된 논리가 신께서 하시는 일이란 구성이다. 그런 논의가 정치적 사회를 새상으로 할 때는 정치적 복종이라는 관점에서 논의되었다. 노리나가에 있어 주체적 작위의 논리는 선악을 넘어서 있으며 자신이 하고 싶은 그대로 지배하는 소라이적 절대주의의 드러나지 않는 측면을 지배받는 입장에서 올려다본 것이다. 작위의 논리는 제도의 내재적 가치를 공허하게 만들었고, 노리나가는 비정치적 내면적 자연을 디딤돌 삼아 모든 정치적 제도를 괄호 안에 집어넣었다. 아랫사람은 좋건 싫건 어떤 지배관계에도 복종하라는 것은 질서의 타당성이 순수하게 주권자의 형식적 실정성에서 유래하며, 내재적 가치(정의, 진리)와 전혀 상관없다는 홉스적 실증주의가 드러난다. 아랫사람은 좋건싫건 간에 윗사람이 하고자 하는 바에 따르면 된다. 소라이학에 있어서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결과인 규범의 가치적 소외는 그와 정반대 입장에 섰던 노리나가학에 있어서 분명히 모습을 드러냈다. 국학의 비정치적 낙관주의의 사유구성을 통해 작위 논리는 불길하게 이미 발효했다.(403-410)
마루야마는 다시 한 번 소라이와 노리나가의 논리구조를 분석한다. 노리나가는 모든 작위에 반대하는 자연을 내세웠지만, 그런 자연이 다시 규범이 되면, 가학歌学에 입각한 자유로운 심정의 변화와 흐름을 다시 억제할 수 있다. 노장사상 같은 자연의 관념적 절대화를 피하기 위해 그 배우에 초인간적 절대적 인격이 필요했다. 실상 이것은 꽤나 예리한 분석이다. 자연의 절대화로 인해 운동이나 사상이 산으로 가는 경우는 현대에도 늘상 발견되기 때문이다. 자연이 목적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너무나 흔하다. 그래서 노리나가는 일본의 조상신을 중시하고, 모든 일은 신께서 하시는 일이 된다. 심지어 상대에 비해 타락한 오늘날의 타락 조차 나쁜 신의 하시는 일로 억지로 고도를 살리는 일조차 신에게 거스르는 것이 된다. 그러니 모든 사람은 그저 그때의 지배자와 법령에 따라야만 한다. 그것이 신의 도고 신의 명령이다. 봉건제도 신의 명령이고, 또 다른 체제도 신의 명령이다. 정말 놀랍게도 노리나가를 읽을 때마다, 현대 한국의 통속 기독교에서 흔히 등장하는 지배자에게 절대 충성의 논리가 떠오른다. 독재자도 무능하고 불의한 대통령도 모두 신의 뜻으로 신이 세운 것이니 그에게 복종해야하며, 평가해서는 안되고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주장을 아직도 하고 있다. 물론 노리나가는 변화를 받아들이지만, 이들은 그만도 못해서 변화를 되돌리려고까지한다. 일본 국학과 신도의 정치사상적 해석이 식민지 시대를 통해 스며든 것은 아닐까 으심이 생기기도 한다.
마루야마는 노리나가에게서도 신의 작위가 필요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소라이의 성인의 작위와 마찬가지이다. 마루야마는 다시 한번 사유구조의 동질성과 방향의 차이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나 나는 방향에서 한 가지 동질성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현실 통치 구조에 대한 절대적 긍정이다. 마루야마에 의하면 소라이는 봉건사회를 보필하기 위해서 엿지만, 노리나가는 그저 정치적 복종의 측면에서만 논의한 것이다. 마루야마가 보기에 노리나가는 소라이의 절대적 지배를 아래에서 올려다본 것이다. 두 사람 모두에게서 중요한 것은 질서의 타당성을 주권자의 형식적 실정성에서만 찾는다는 점이다. 현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유사한 입장으로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식의 준법주의적 사고방식을 말한다. 소라이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봉건사회를 재건하려고 했지만, 그 사유구조는 결국 규범을 분리시키는 구조였다. 노리나가는 아예 규범을 배제하고 있다. 전통적 규범의 내적 가치에서 자유로워진 정치는 새로운 구조와 기능 및 제도를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까. 메이지 유신을 전후한 일련의 활동을 보면, 그런 해석도 가능하다. 놀랍게도 어느 누구도 정도전이 설계했다는 조선 왕조 식의 해법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왕을 유학자로 만들려고 했다. 엄격하게 가르쳐서 따르게 하거나 주눅들게 만들었다. 어쩌다 왕이 천재적인 경우도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왕은 규범을 따라야 했다. 그러나 도쿠가와 일본은 그런 사회가 아니었다. 무력에 의해 정복된 국가, 무력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사회가 규범 없이 유지 존속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철학의 나라 조선 만큼 형식적으로든 외면적으로든 규범에 종속되지 않았다. 소라이든 노리나가든 규범에서 자유로운 사상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본래 그 사회가 규범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은 아닌가. 칼을 든 통치자를 규범에 얽어맬 능력이 없었던 탓은 아닌가.

2장 6절 막부 말기에 있어서 전개와 정체停滯: 근세 후반기의 정치・사회정세와 사상계-다양한 제도 변혁론-작위 입장의 이론적 한계-메이지 유신 후에 있어서 두 제도관의 대립

바램願望이 사상의 아버지라면 이익은 이념의 어머니다. …… 이념은 자신의 고유한 법칙에 따라 발전하며, 봉사해야 할 이익에 반하기도 한다.(Radbruch) 소라이학이 도입한 ‘주체적 작위’라는 이념도 그렇다. 봉건사회를 흔들리지 않는 기초 위에 세우기 위한 논리였다. 이를 계승한 안도 쇼에키와 모토오리 노리나가라는 봉건사회의 명백한 부정과 소극적 긍정으로 나타났다. 양쪽 모두 봉건사회가 천지와 더불어 변하지 않고, 인간성과 더불어 영원하다는 사상적 근거는 잃어버리고 있었다. 절대적 가치로서의 자연은 봉건적 계통제로부터 떨어져 나와, 정치적 유토피아의 세계를 향해 달려가거나 인간 내부의 깊은 심정에 틀어박혔다.(411-412) 봉건사회의 관념적 약체화 경향과 더불어 안정성을 위협하는 현실적 요인도 늘어가고 있었다. 호레키 연간에 늘어났던 잇키와 우치코와시는 1787년에 전국화되었다. 노리나가는 기슈紀州 영주의 하문에 대해 세금貢租의 과중함이 원인이라며 가렴주구가 노동력의 생산성을 저해하여 윗사람의 손실이 된다고 경고했다. (412-413) 바깥으로부터의 세력도 다가왔다. 러시아 절대왕정은 점차 시베리아로 확장해 겐로쿠 연간에는 사할린, 쿠릴千島, 훗카이도에 이르게 되었다. 계속 접근하고 통상을 요구하더니, 1792년 러시아황제 카테리나 2세의 사절 락스만이 마쓰마에松前에 와서 정식으로 통상을 요구했다. 막부는 안팍의 정세에 직면해 정치적 통제를 강화했다. 단속규정이 연속적으로 1788년엔 집중적으로 발표되었다.(413) 호레키宝歴(1751~64)와 메이와明和(1764~72)에 걸쳐 일어난 다케노우치 시키부竹内式部, 후지이 우몬藤井右門, 야마가타 다이니山県大弐 사건은 존황론尊皇論이 봉건권력이 꺼리는 부분을 건드린 최초의 사건이다. 이들은 성숙한 반막부 운동이라기 보다 막부의 신경과민이 일을 크게 벌려, 막말 근황勤皇 운동의 근원이 되었다. 다케노우치가 말한 위기의식, 조정의 쇠미와 무가 번창에 대한 비판, 야마가타 다이니는 정치가 간토로 넘어가 예악이 무너지고 형벌만 행해지고 있다고 말하게 된다. 이는 도쿠가와 막부 부정에서 한걸음 떨어졌을 정도이고, 사유방식은 소라이학과 공통적이다. 다이니의 자연상태는 인간이 동물이나 짐승과 다를바 없는 원시적 상태에 있을 때, 특출한 사람이 나타나고, 오륜과 사민이 생겨나고, 만든 사람을 성인이라고 하며, 제도를 만들어서 성립한다. 곧 소라이의 질서작위론이다. 일본의 역사를 찬양하여 신황神皇이 기틀을 마련하고, 이용후생의 길을 열고, 의관의 제도를 만들고 예악의 가르침을 세웠다고 사회발생론을 구체적으로 적용했다. 그 시대 사회의 퇴폐와 곤궁은 조상皇祖이 만든 예악이 무너지고 새로운 제도가 만들어지지 않은데서 생겨났다. 오늘날 정치하는 자는 대책을 내놓지도 못하고 예전에 그렇게 했다古事고 할 뿐이다. 그러나 만든지 천년도 지나고 그 사이에 전란도 있어서, 의거해야 할 예도 없고, 따라야할 법도 없는 상황이다. 예전에 그렇게 했다古事는 것은 군웅이 할거하던 시대로부터 내려온 풍속이며, 야만적인 시대가 물려준 유물이다. 마치 소라이가 오늘날 세상의 격은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으로 참된 제도는 존재해본 적이 없고, 上古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며, 큰 혼란이 있었다고 말한 것과 사유방식이 매우 비슷하다. 현대의 위정자들이 자신의 행위준칙을 전제된 규범질서에서 받아들이고 있어 질서에 대한 자유로운 작용을 결여하고 있음을 개탄하고 있는데, 여기서 주체적 작위의 본래의 면목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쇼에키와 노리나가에 있어 작위의 논리는 부정적 가치로 내재하는 퇴폐라는 측면에서 작용하고 있었는데, 다이니에 이르러 다시 소라이와 같이 적극적인 의미를 띠고 정치적, 능동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막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막부에 대한 비판이었다. 다이니는 소라이와 마찬가지로 현실의 사회적 모순의 궁극적 해결로서 제도의 확립을 주장했고, 제도의 내용도 소라이를 거의 답습한다. 그러면서 제도를 만들어야 할 최고 주체로 쇼군이 아닌 서쪽(조정, 천황)에 기대한다. 작위 논리의 목적이 변질된 현저한 사례이다. 1676년 시키부는 유배, 다이니는 사형 우몬은 처형되었다.(413-418)
도쿠가와 봉건사회는 안팍으로 위기에 봉착한다. 농민의 삶의 어려움으로 잇키와 우치코와시가 끊이지 않고, 시베리아를 넘어 세력을 확장해왔던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서양 세력으로 일본 앞에 나타난다. 이런 위기의식 속에서 존황론의 싹이 생겨난다. 대표적인 존재가 시키부, 우몬, 다이니이다. 그중 다이니는 소라이의 질서작위론과 사유방식이 비슷하다. 옛 제도가 효용성을 잃은 데 대한 설명도 유사하다. 그러나 새로운 제도의 수립자로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서쪽, 다시 말해 천황(조정)에 기대한다. 이런 작위로 생겨난 사회는 봉건사회일 수 없다. 작위 논리의 목적이 현저하게 변화했다.
간세이 이학의 금寛政異学の禁은 이런 정치적・사회적 동요에 수반되는 사상 통제 강화에 획을 그렀다. 직접적으로 하야시 가문에 정학正学을 유지할 것을 지시했지만, 막부의 정책은 여러 번에 미치게 되고, 실질적으로 일반적 사상통제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런 금지가 고학파에 의해 야기된 일찍이 없던 논쟁과 사상적 혼란을 직접적 동기로 한다는 점도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로 하여금 그런 조치를 하게 한 시바노 리츠잔柴野栗山, 라이 슌스이頼春水, 니시야마 셋사이西山拙斎등의 의견에 나타난다. 여기에 이르러 주자학이 강제적으로 부활하게 되었다는 점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주자학의 낙관주의적 사유방법은 발흥기 내지 안정기에 대응되는 사상체계였다. 봉건사회가 동요하자 실천적으로 강력한 소라이학에 헤게모니를 넘겨주었고, 소라이학은 그 위기적 성격 때문에 한정된 사용가치 밖에 지니지 못했다. 가차없는 리얼리즘과 이것이냐 저것이냐Entweder-oder의 철저함은 강력한 봉건권력이 현실의 모순을 인정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는 한에 환영받았지만, 동요가 너무 심해져서 지배층이 이를 은폐하고 미봉이라도 하기 위해 부심하는 단계에 있어서 오히려 감당하기 어렵게 된다. 소라이학의 의도와 효과의 이반, 사유방식이 내포하는 반역성이 감지되는 데 있어서는. 본래 정태적 구조를 갖는 주자학이 그 사회적 조응성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수행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 때문에 민심을 안정시키는데 골몰하는 봉건지배자에 의해 다시 등장하라는 명을 받게 되었다. 노리나가는 잘 다스려지는 세상의 주자학의 안정적 기능을 소라이학의 극약적 성격을 지적한 바 있다. 셋사이는 그런 노리나가도 유가의 도를 비판한다며 규탄했다.(418-420)
와타나베 히로시는 마루야마는 물론 주자학이 일본 봉건사회의 사상적 기반이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간세이 이학의 금 때문에 주자학의 주도적 성격에 대해 오해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한 바 있다. 와타나베는 간세이 이학의 금에 이르러서 주자학이 더 앞으로 나온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 와타나베의 주장은 조선의 유교화에 대한 마르티나 도이힐러의 주장과 흡사한 측면이 있다. 조선의 유교화에서 2~3세기가 걸렸다. 그러나 마루야마의 솜씨 좋은 주장은 명료하다. 도쿠가와 초기 안정기에 주자학이 지배 이데올로기였고, 위기가 찾아오자 소라이학과 노리나가학이 등장했고, 존황론 마저 등장하게 되자, 다시 주자학을 내세우는데, 이번에는 지배 이데올로기라기 보다 정치적 안정을 강조하는 실천적 효용성 때문이었다는 것. 마루야마의 주장은 정말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 전형적인 이념형에 입각한 주장을 입증하기 어렵다는 사실 한 가지만 빼고 나면.
이학의 금異学の禁은 자연적 질서사상을 강제적으로 부흥시킨 것이며, 자연법으로서 일차적인 타당성을 잃어버린 봉건사 사회규범을 억지로 자연법으로 통용시키려는 시도라는 것이 된다. 작위적 질서관의 발흥에 대한 전통적 학자들은 수수방관하고 있지 않았고, 자연적 질서사상의 정당방위로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다카이즈미 메이高泉溟는 밝은 사람과 성인의 덕이 있고 난 후에야 비로소 서술하고 만든다고 말했다. 이시카와 린슈石川麟州는 성인이란 덕을 기리는 것이지 제작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들은 모두 소라이의 궁극 실재로서의 성인 개념을 배격하고, 인격에 대한 이데아의 우위를 강조한다. 헤이유平瑜는 소라이의 말은 천하 사람을 이끌고 도에 적대하는 것으로 위아래가 서로 편안함과 이익을 다투게 되어 국가가 위태로워진다고 단정했다. 소라이는 덕을 바깥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고 규범의 외면화를 지적했다. 이들 모두 자연과 작위라는 두 질서관과 그 대립에 대해 말하고 있다. 소라이학을 둘러싼 사상계의 논쟁의 결정적 쟁점은 미우라 아쓰오三浦淳夫가 말하는 대로 도란 송유가 말하는 천지자연인가, 소라이가 말하는 선왕제작인가였다. 간세이 이학의 금은 송유의 주장을 공권력을 빌어 지지한 것으로 사상계의 다원적 분열에 결단을 내리고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봉건사회의 관념적 통일을 회복하려는 기도였다. 그러나 간세이 이학의 금을 실행한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도 그 2년 전 도는 성인이 만들었고, 신농과 황제가 만들었다고 말했다. 역사적 이성의 간지로는 막을 수 없는 작위관의 침윤을 읽어낼 수 있다.(420-423)
간세이 이학의 금 이전에 다른 사상가들이 자연적 질서사상을 수수방관하고 포기했던 것이 아니며, 자연과 작위관은 사상계에 대립하고 있었다. 간세이 이학의 금은 송유의 주장을 공권력으로 주장한 것이지만, 그 책임자 조차 작위관에 침윤되어 있었다. 즉 막을 수 없는 흐름이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간세이 이학의 금이 하야시가에만 적용된 것일 뿐이며, 사상계의 다양한 흐름을 실제로 막지 못했다는 데 있다. 도쿠가와 일본은 과거로 관료를 선출하지도 않고, 학자가 통치하는 정치사회도 아니었다. 주자학도 소라이학도 지배적이었다고 보기 어려운 사회였다.

그 무렵 소라이에 의해 시도된 제도의 근본적 다치카에立替え(개혁)의 새로운 주창이 난학蘭学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 사이에서 계속 출현했다. 유아사 겐조湯浅源蔵(1793)는 도쿠가와 시조 이래 확고한 제도가 수립되지 못한데 국가의 질병国疾의 원인이 있다며, 소라이의 개혁론이 실시되지 않은 것을 통탄했다. 이미 봉건사회로 복귀할 수 잇는 시대가 아니었다. 상업자본의 파괴적 침식과 러시아 영국 세력의 위협은 교호와는 비교되지 않는 것이었다. 시대를 예민하게 감지한 지식인들의 제도 개혁론은 모두 시야가 세계적으로 확대되어 있으며 내용도 많건 적건 봉건사회의 틀을 뛰어넘었다.(423-424) 혼다 도시아키本田利明(1744~1821)는 세키 코와関孝和의 정통을 이은 수학자다. 그는 천하의 보화는 상인에게 있고, 무사와 농민이 어렵고 곤궁한 것은 처음 있는 일로, 근본 원인은 무역 운송과 교역을 상인에게만 맡겨둔 잘못이라며, 해운 국영화, 지방 상품 가격 통일, 해외무역과 식민지 경영에 의한 경제적 진흥을 주장한다. 상업자본의 무통제적 발호 수립해야 할 제도, 즉 상업자본의 국가적 운영을 수립하지 못한 데서 시대의 병폐를 찾아냈다. 그는 반잔과 소라이가 경제에 뛰어나다고 예찬하면서도 그들은 같은 토지의 이용만 고민하여, 인구증가에 대응할 수 없다는 맬더스적 인식을 보여주고, 해외로 눈을 돌리는 밝은 법을 내세운다. 에조를 살펴본 체험과 난학 특히 지리학을 통해 얻은 세계에 대한 지식에 영향을 받았고, 특히 영국의 부강함에 놀랐다. 나라의 빈부강약은 모두 제도・교육에 달린 것이지 토지의 선악에 달린 것이 아니다. 유럽의 부강함도 국가를 풍요롭게 만드는 도리를 연구하여 제도를 세웠기 때문이다. 모든 원인을 해외팽창 海洋渡涉, 산업장려와 자원개발勸業開物, 제도의 유무에 돌리게 되었다. 제도의 작위가 없어 1783년 이후 3년간 흉년과 기근으로 오슈奥州에서 아사한 자만 이백만명이며, 모스크바에 굴복하는 국제적 치욕도 당할 것이고, 제도를 세우면 서양에 영국 동양에 일본이란 부유하고 강대한 두 국가가 존재할 것이라 말했다. 토시아키의 입장에 논리적 기초는 없었지만, 제도를 세우기 이전과 이후의 차이에서 가치의 질적 전환을 찾아내는 사유방식이 자연적 연속관의 그것이 아니라는 점은 알 수 있다. 자연질서는 현재의 봉건사회에 내재된 것이 아니다, 선정과 자연치도의 제도를 만들면 된다고 보았다.(424-427)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1769~1850)의 놀랄만한 조직적이고 대규모의 이상 사회의 구상 역시 국내적 궁핍과 국제적 위협의 절실한 체험을 그 동기로 한다. 그는 농업의 황폐함과 영아살해에는 신의 뜻을 이어받아 백성을 구제해야 할 위정자들이 경제도経済道를 알지 못하고 천공개물天工開物의 법도를 게을리했기 때문이다. 경제란 세상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이고, 개물은 국토를 경영하고, 산물을 개발하여 국가를 풍요롭게 하고 인민을 번식하게 하는 일이다. 선왕의 도는 경제도이다. 상의 탕왕은 교환과 유통의 법을 시행했다. 노부히로에게도 국가의 부강과 곤궁은 토지의 자연적 기초가 아니라 이를 운용할 제도의 수립 여하에 달려 있었다. 아이즈会津 지역은 제도가 잘 정비되어 강하고, 휴가日向의 노베오카延岡의 영주가 할 수 있는 것은 세금을 거두는 것뿐이다. 일본에는 제도가 없었지만, 군주가 겸손하고 절약해서 국가가 부강하고 내실이 있었다. 그런 상고시대의 자연적 질서는 장원의 발생으로 붕괴했고, 무사계급도 정권을 장악했을 뿐 좋은 제도가 없었으므로 재화는 상인들에게 집중되고, 무사는 빈궁해졌다. 시대가 내려올수록 자연적 방임은 어려워지고 점점 더 대규모의 제도를 만들어야 할 필요가 생겼다. 이제 일찍이 예가 없던 내우외환은 일본 전체를 두드려 한 덩어리로 만드는 통일적인 제도의 수립이 필요하며, 내용도 선왕의 제도를 복제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삼대三台, 육부六府, 오관五館이라는 전국적 정치조직에 의해 생산, 분배, 유통의 기능을 모조리 중앙정부에 집중시키고 국가로 하여금 빈민구제, 국민교육을 담당하게한 수통법垂統法은 종종 국가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노부히로도 쉽게 시행할 수 없다며 유토피아적 성격을 인정했다. 이는 도쿠가와 시대에 소라이 이래의 일련의 제도적 개혁론에 마침표를 찍는 가장 규모가 큰 관념 체계였다. 그런데 그의 사상의 철학적 기초는 히라타 아쓰타네의 국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조화삼신으로 시작하는 그의 논의에서 경제는 사람을 사랑하고 보호하기 위해 신이 만든 것으로 보았으며, 정치적 군주는 실로 이 세상에 있어서 창조신의 대리인으로 모든 사물을 총괄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그의 사상적 근저의 인격 우위가 이상국가에 있어 최고지배자에게 일본전국을 손발처럼 움직인다는 절대주의적 성격을 부여해 준다. 소라이와 달리 노부히로는 유럽 절대주의에 가까이 가 있다. 서양 국가의 교역은 국왕의 업무인 만큼, 그의 구상으로 천하의 물건은 바삐 움직이고, 이익은 군주에게 돌아간다고 말해, 수통 국가와 중상주의적 국가의 유사성을 암시한다. 또한 절대주의 국가가 대외팽창을 하듯 수통법을 실시한 일본은 전세계를 군현으로 삼게 된다.(427-432) 가이호 세이료海保青陵의 마키아게まきあげ 제도는 목적이 무사 계급의 구제에 있으며, 범위는 일개 번에 한정되어 있으나 일종의 상업국가 경영을 주장한 점에서 같은 방향을 걷고 있으며, 현실의 모든 사회관계를 상품교환うりかい의 원리로부터 연역해내고 있다. 세이료는 소라이의 제자 우사미 센스이에게 배웠고, 소라이의 리얼리즘을 이어받아 유학자를 무위도식꾼이자 사악한 무리라 말하며, 하쿠세키와 소라이만 경험적=귀납적 관찰 때문에 높이 평가한다. 그의 사무라이 구제책도 현실직시에서 출발한다. 무사도 쌀을 파는 상업행위를 한다. 무사의 곤궁함은 상품경제의 한 가운데 있으면서 그런 현실에 눈을 돌리는 데서 생긴다. 상품교환에서 이익을 보는 것은 당연하며, 조닌에게 빌려서 갚지 못하는 것이 치욕이다. 네덜란드 국왕이 장사하는 것처럼 세상의 공통된 이치를 비웃는 것이 잘못이다. 무사 계급의 곤궁함을 구제하려면 이윤을 올려야 한다. 화폐는 그냥 두면 모두 민간에 떨어지므로 지배계급은 이윤올리기로 그것을 감아올려야まきあげ 한다. 강제는 서투른 것이고, 무사가 장사를 해서 상품경제 기구를 통해 화폐를 얻는 것은 능숙한 이윤올리기다. 집안에서 일하고 대가를 받거나, 교역을 위한 개항장을 열거나 상호 융통조직인 代物無盡을 들고 있다. 관직을 팔거나 돈으로 형벌을 대신해서도 정부가 화폐를 축적할 수 있다. 백성들이 언제 감아올렸는지 알아차릴 수 없도록 하는 것이 훌륭한 방법이다. 마키아벨리즘적인 냄새마저 맡을 수 있다. 치세라면 사치스럽고 간교해진다며, 서로 이익을 다투는 세상에 왕도란 무의미하고 패도를 잘해야 한다고 말한다. 태평스러운 시대에 임시방편에 익숙해지고 편의적이 된다. 모든 것을 미루어 버려 지지부진함으로 병은 큰 병이 된다. 강한 마음과 용기를 가지고 결단을 내려서 개혁에 착수할 필요성을 주장하는데, 주체적 작위의 지향이 노골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세이료가 우리카이라는 상품교환의 논리를 사회관계의 근저에 설치한 의의믄 큰 것이다. 상하가 모두 상인이며, 군신관계도 노동력의 매매로 市道이다. 예전에 인간이 속해야 할 자연적=선천적 질서인 군신관계는 명백하게 당사자의 자유의사에 기초한 결합과 같은 것으로 보게 되어, 퇴니스를 연상시킨다.(432-436)
마루야마는 세 사람의 본격적인 개혁가를 제시한다. 세 사람 모두에게 공통된 것은 경제에 기반한 사고방식이다. 이를 위한 제도개혁을 제시한다. 도시아키와 노부히로 두 사람은 공히 제도를 개혁하고 교역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루고 세계로 진출해야 한다고 말한다. 노부히로는 히라타의 사상에 기반하면서도 수통법으로 국가사회주의(나치즘)적인 주장을 하면서 전면적인 개혁을 말하고 세계정복의 야심을 보인다. 세이료는 상품교환을 모든 것의 기초로 삼고, 적극적으로 이윤추구에 나서며, 군신관계도 노동력의 매매라는 이익사회의 본질을 예시한다. 세 사람 모두 작위관에 입각한 본격적인 사회개혁 사상을 제시하면서, 경제 즉 부국강병의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개혁제안은 과감하며, 범위가 넓고, 근본적이다. 이런 사상이 등장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흥미롭다.

근세 봉건사회의 내면적 부식 과정과 대외적 위기 증대는 다양한 제도 개혁론을 낳았고, 내용은 단순히 봉건적 범주 속에 머물 수 없는 것이었지만, 어느 것도 봉건적 지배관계 그 자체의 변혁에는 손가락 하나 대지 못했다. 가이호 세이료도 결국 무사계급을 위해 서민들의 돈을 감아올리는 장치이다. 무사가 상인의 기능을 한다는 것이지, 모두 상인이 되라는 것도 아니었고, 백성들은 어리석다고 말했다. 무역・식민・산업장려의 수립을 말한 도시아키도 그런 제도를 작위하는 주체는 무사계급에서 찾으며 사농공상을 엄격히 구분하고 유민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그는 자기사상의 위험성을 알고 책을 간행하지 않고, 몇몇에게 보여주기만 했다. 사토 노부히로는 가장 래디컬하다. 사민이 아닌 팔민으로 나누고 육부에 배속시켜 중앙집권적 색채를 띄지만 다이묘의 영지는 존속된다. 육부의 지배적 지윈느 무사가 차지한다. 군주, 경, 대부 등 현재의 계통적 질서를 존중하게 하는 등 반봉건성의 한계는 분명하다. 슨세 말기 제도개혁론의 변혁성을 제약했던 것은 모두 위로부터 수립되어야 하는 제도로 서민은 어떤 능동적 지위도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즉, 소라이의 제도 정비 요청은 이들 사상가에게 받아들여져 내용은 풍요롭고, 근대적인 것도 혼입되어 작위 입장의 구체적 발전이기는 했으되, 그들을 통해 작위 입장 그 자체의 이론적 전개는 대부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작위의 주체가 성인이나 쇼군이라는 특정한 인격에 한정되었다는 소라이학적 작위의 이론적 제약 역시 있었다. 인작설 즉 사회계약론으로 진전할 수 있는 계기가 완전히 결여되어 있었다. 그래서 제도개혁의 추진력은 종래의 지배층, 절세의 영명한 군주, 천하의 영웅 등에서 찾았다. 작위 논리는 질적으로 정체되고 양적인 보급도 일정한 한계 안에 있었다. 대다수 사람들의 현실의 정치적・사회적 질서는 실제 운명적으로 자연적 질서관의 기반이 남아 있다. 자연적 질서관과 가장 잘 들어맞는 경제행위는 농업이다. (예외적으로 보덕교의 니노미야 손토쿠二宮尊徳는 농업에서 주체적 작위를 말하지만.) 반면 공업생산은 본래적으로 인간의 주체적 작위의 표상과 무리없이 결합되며, 매뉴팩처의 사회적 발흥은 도구를 만드는 동물로서 인간에 대한 자각을 수반하게 되었다. 농업이 지배적 생산이고 공업은 취미적 공예품 단계에 머물러 있는 곳에서 인간적 작위의 가치인식은 자연히 낮다. 예를 들면 분세文政(1827~30), 덴포天保(1830~44) 무렵의 『知命記』는 서양사람들은 아무런 쓸모도 없는 기구와 물건을 만들어내고, 마음을 상하고 뜻을 잃게 만드는 잡스러운 기술을 만들어내는作為 것을 경멸해야 한다. 동시에 전형적 자연적 질서관은 사회정치질서(일부일처제)를 옹호한다. 혼다 도시아키의 자기 나라를 풍요롭고 부유한 나라로 만드는 근본은 신기한 기구와 특이한 물품을 만들어내는 제도, 즉 서양에는 산업을 장려하는 제도가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과 비교하면 양자의 제도관의 대립과 공업생산에 대해 완전히 대척적 평가의 상관관계가 드러난다. 그런 도시아키도 공업생산물은 신기한 기구일 뿐 일상적 생활수단으로 끌어올리지 못한 상황에 작위 논리의 순조로운 진전을 저지시킨 역사적 비밀이 숨겨져 있다.(437-443)
소라이나 노리나가가 그렇듯 이 개혁가들 역시도 봉건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결국 작위의 주체는 무사계급이고 지배자들이었다. 개인들의 결합을 통한 사회계약론으로 진전될 수 없었다. 마루야마에 따르면 그 이유는 농업경제와 공예품 생산에 한정된 자본주의 발전의 한계 때문이다. 이런 개혁가들조차 아직 신기한 기구 일뿐, 일상적인 생활수단이 되지 못한 상황에서 개인이 작위의 주체로 설 수 없었던 것이다. 산업 자본주의 성장을 이토록 섬세하게 구별하다니. 그런데 서유럽에서 사회계약사상이 산업 자본주의가 생겨난 이후였던가. 그보다 훨씬 이전에 매뉴팩처를 하던 시절이었던지. 이런 식으로 사상의 전개와 성장을 경제적 생산양식의 전개와 조응시켜서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정도의 마르크스적 사유라니.
작위 논리를 정체시키면서 자연적 질서 사상을 부활시키려 했던 다른 현실적 사정은 외국 세력의 위협에 대해 국내적으로 일치단결해야 한다는 요청이었다. 내부의 사회적 모순의 해결 없이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배제할 수 없다는 생각은 양학洋学의 세례를 받은 사상가들의 입장이었다. 그런 인식이 결정적으로 고양된 것은 막부 붕괴 직전으로 그때까지 대세는 국내 질서의 무조건적 인정을 이적夷狄에 대항한 사상적 무기로 생각했다. 유럽 시민사회의 구조를 감지하고, 이적들은 세상사람을 모두 친구라 하는 나쁜 풍속이 있어 난학의 무리도 그 말을 믿는다며, 평등사상의 침투에 대한 공포가 지배층인 무사계급 사이에서 첨자 높아졌고, 이적의 나라에서 무사와 상인 사이의 차별이 없어 의리도 부끄러움도 모르고 이윤만을 추구한다며, 일본이 그렇게 되면 타락할 것이라 말했다. 즉 봉건적 계통제를 일본 고유한 길로 간주하고 이를 유지하는 것이 일본은 외적에서 보호하는 길이라는 양이론攘夷論으로 나갔다. 한편 국내적 일치단결의 정신적 지주로 급속하게 대두괸 존황론은 양이론과 결합되어 봉건적 질서의 변혁보다 그에 앞서 그것을 재인식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이런 경향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후기 미토학水戸学이다. 이론적 대표자인 아이자와 세이시사이会沢正志斎는 신하가 다이묘의 명령에 따르는 것은 막부와 조정과 조상에게 보답하는 길이라며, 막부의 호령을 두려워하고, 다이묘가 정한 제도와 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여, 그의 존황론이 봉건적 계통제와 모순되지 않으며 오륜에 의해 기초지워지고 있다. 그것은 천연天然의 대도大道이다. 사민과 군신은 천지자연이다. 황실과 신민 관계를 봉건적 군신관계와 연장선 위에 두는 것이 자연적 질서관의 재생이 지닌 객관적 의의가 있다. 이런 이론적 의미에서 공무합체론公武合体論은 미토학이나 국수론자의 독점물은 아니었다. 오대륙의 지식이 필요하고, 컬럼버스, 코페르니쿠스, 뉴튼, 증기선, 자기력, 전신 등을 말하는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도 귀천존비는 천지자연의 법칙이라며 외국과 다른 일본의 국체御国体가 있다고, 다이묘의 간소화에 반대했다. 동양의 도덕, 서양의 예술이란 말은 근대 유럽문화가 봉건말기의 일본에 침투했을 때 봉착한 한계를 나타낸다. 끓어오르는 국제관계는 양학洋学에 용인되어 있던 적은 영역도 삼켜버리는 열광적인 양이론을 낳았다. 오하시 토츠안大橋訥庵은 서양의 과학과 기술을 용납하는 것은 근원에 독이 있는데, 지류에는 독이 없다고 하는 것이라고 일축하고, 해부학을 보면 잔인함을 알 수 있다고 하며, 사진이나 전기를 환술로 보는 등 서양의 모든 것을 증오했고, 무사와 상인의 차별이 엄격한 제도를 옹호하고 절대적 쇄국론을 주장했다. 그 배경에는 사물의 규칙은 작위가 아니라 천리이고 도라는 자연적 질서의 논리가 걸쳐있었다.(443-448)
외부로부터의 압력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양학이 있을 여지는 없어졌고, 자연질서관에 기반한 봉건적 계통제를 지키자는 즉, 사농공상의 구별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강해지면서, 존황론과 양이론이 합쳐져서, 존황양이론으로 그리고 공무합체론으로 전개된다. 바야흐로 일본은 자연질서를 중심으로, 천자-조정-막부-다이묘-무사-백성의 순으로 완전한 질서관에 함몰되어 갔다. 위기가 강해질수록 자연적 질서관은 또 그 나름 강해졌다. 대립과 모순은 통일될 수 없을 정도로 균열을 크게 내포하고 있었다. 다만 여기에 내포되어 있는 미묘함은 바로 후기 미토학과 국수론도 메이지 유신의 한 동력이었다는 점이다. 순수한 일본전통사상은 없다는 그의 생각이 여기도 깔려있다. 게다가 샤쿠마 쇼잔 같은 다소 복잡하지만 개국론자들도 자연질서론에 입각한 신분차별을 고수하였던 것들 보면, 두 가지 사상적 흐름이 뚜렷한 줄기를 가지고 분화되었다기 보다 혼재되어 있다고 보는 편이 더 명확할 것 같다..
역사는 쇼헤이코昌平黌의 주자학자들의 절망적 반항을 짓밟으면서 앞으로 나갔다. 영주와 농민, 무사와 조닌, 상급 무사와 하급 무사, 공가와 막부, 막부와 웅번 등 봉건체제에 내재하는 대립과 모순은 그것을 은폐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막말에 격화되었다. 더불어 전통적 지배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국제적 중압에서 일본을 구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도 퍼지고 있었다. 히로세 교쿠소廣瀬旭荘는 지금은 모든 사람이 각기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어 도저히 적을 이길 수 없다며 외국이 큰 근심거리라고 말했다. 봉건적 신분제가 국민의 외환에 대한 정신적 일치단결의 질곡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말한다. 이런 객관적 인식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시민사회적 질서는 더 이상 헛된 공포나 혐오의 대상일 수 없다. 옛날 일본에는 농민-병사가 있었고, 서양에는 상인-병사가 있다. 일본도 이를 활용해야 한다.(448-449) 이 같은 내우와 외환의 필연적 관련의 인식에서 교쿠소의 친구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역시 같은 입장이었다. 사람들은 카이보海防을 외치지만 민세이民政를 말하는 사람은 없다며, 내우와 외환은 관련되어 있으니 카이보와 민세이를 같이 주장해야 한다. 양이론은 자기 역량도 모르면서 으스대는 배외주의일 수 없고, 환과고독을 보호하는 서양 오랑캐의 빈민구젯, 병원, 유아원이 일본에 없는 것을 반성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쇼인으로 하여금 봉건적 지배관계에 안주할 수 없게 했고, 지금의 무사는 백성의 고혈과 군주의 봉록을 탐하는 하늘에 적대하는 백성이다. 그는 모든 백성은 천하를 자기 관심사로 삼아 천자를 섬겨야 하며 귀천존비로 구분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외국에 대해 일본을 지키는데 자주독립의 기풍을 충만하게 하고 차별없이 모두가 나라를 자신보다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의 독립 자존의 요청 직전이었다. 국민들이 자신이 구성하는 질서에 대한 주체적 자각 없이 단순히 주어진 질서에 운명적으로 따르는 곳에서 외적에 대한 강인한 방어를 기대할 수 없다는 자각은 존황양이론으로 하여금 계통제적인 형태로 일군만민一君万民적인 것으로 전화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1859년 쇼인은 현재의 막부와 제후들이 근왕양이勤王攘夷할 수 없다며, 나폴레옹 같은 사람이 나와 자유를 외치지 않으면 내부의 질병을 고칠 수 없고, 일반 민중 속에서 지도자가 나오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고 섰다. 그가 처형된지 7년 후 왕정복고의 대호령이 발해졌고, 메이지의 새로운 질서가 쇼인이 갈망했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출현했다.(449-452)
다른 한편 전통적 지배관계가 일본을 구해줄 수 없다는 점도 명백해졌다. 봉건적 신분제 자체에 대한 고민이 점점 커져갔다. 드디어 샤쿠마 쇼잔의 제자인 요시다 쇼인에게서 신분차별을 철폐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고, 그것은 일군만민이라는 인작론, 사회계약 사상의 기반이 되는 모든 사람이 역사의 주체가 되는 바로 그 사상에서 딱 한발짝 떨어져 있는 것이었다. 후쿠자와 유키치 보다 딱 한 발자국 앞서 있었다. 존황양이론의 그림자가 깊어질수록 자유를 갈구하는 사상도 그 깊이를 더하면서 표출되려하고 있었다.

메이지 유신과 더불어 판적봉환版籍奉還, 질록처분秩禄処分, 폐번치현廃藩置県, 징병령 발표, 대도帯刀기리스테고멘切捨御免 등 신분적 특권 철폐, 하층 신분의 해방, 직업선택의 자유, 지조개정地租改正 등 일련의 변혁을 통해 일본의 국가체계는 눈부신 속도로 근대화되었다. 봉건적 계통제가 자연질서가 아니라는 점은 현실의 사태에 의해 증명되었고, 이런 정세 속에서 성난 파도처럼 문명개화 사조가 구 사회의 차별관을 예리하게 겨향했다. 사람은 신체적으로 누구나 같다는 자연적 평등론이 발흥하고, 귀천, 빈부, 가문, 격식, 화족, 사족, 호가, 빈민 등은 모두 사람들이 사사로이 정한 인간세계의 모습이라며, 작위적 질서관에 길을 열었다. 쓰다 마미치津田真道는 자연현상, 지리, 인사의 규율은 자연의 것이지만, 국가의 성립과 질서 치안 유지란 사람이 만든 법를로, 국법国法 또는 민법民法이다. 메이지유신 이후 작위관의 우위를 결정적으로 만들어 준 것은 자유민권론의 대두로, 작위 입장은 이론적 귀결을 밀고나가 인작설人作説에 이르렀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西洋事情』에서 문명이 발달하며 약하고 힘없는 자들이 모여 권리를 확보하고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취한 조치가 국가 제도이고, 정부가 생겨난 근원이라고 소개했다. 우에키 에모리植木枝盛의 『自由民権論』에서 자유가 존귀하기에 누리고 지키려고, 국가를 만들어 정부라는 것을 두고 법률을 만들었고, 관리를 고용하여 인민의 자유권리를 더욱 옹호하여 인민의 행복과 안락을 누리게 하는 것이라 말하며, 모든 사람은 동등하니, 권리를 주장하고, 정부는 인민民이 세운 것이며, 법도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라 말했다. 이런 자유민권론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것이 계몽적 자연법으로 인간의 권리는 하늘이 부여해 준 것이라는 자연적 질서사상의 계열에 속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와는 정반대로, 거기서 인권이라 불리고 있는 것은 어떤 실증적 질서 속에서의 권리가 아니라 거꾸로 실정적 질서를 형성해야 할 인간의 주체성을 구상화한 것이다. 자연법의 선천성을 주장하는 것은 거꾸로 실정법은 인간이 제정함으로 비로소 타당하다는 이론을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의 『人権新説』를 둘러싼 논쟁은 그런 사정을 말해준다. 히로유키는 권리가 인간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주권자에 의해 제정된 것이며 천부인권론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을 때, 바바 다쓰이馬場辰猪는 그것은 법률상의 권리일 뿐, 저자가 말하는 권리가 아니라며, 오히려 법률이 주권자가 있고 난 후 비로소 생기는 것이라고 말해 실정법의 타당성이 형식적 실정성에 근거를 둔다는 홉스와 오스틴Austin 류의 작위의 입장의 답습이다. 야노 후미오矢野文雄도 가토의 권리가 도덕적 권리인지 법률 상의 권리인지 먼저 결정해야 하며, 법률상의 권리, 즉 오스틴의 사람이 만든 법에 있어서의 권리라면, 정부 존립 이후의 것이니 하늘이 부여해 준 것이 아님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실정법의 인위성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한다. 논쟁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규범이 인간의 작위에 의해 비로소 타당하게 된다는 명제는 어떤 논의에서도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압도적인 작위논리도 봉건제 하에서 은근한 진전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코지마 쇼지兒島彰二가 자유권에서 신앙의 자유, 사상의 자유, 마음 속에 묻어두고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내지 않는는 의사意思 자유의 권리를 주장했을 때, 이는 소라이적・슌다이적 규범의 외면화(안과 밖, 사적인 내면성과 공적인 제도의 분리)의 근대적 발전형태에 다름아니다. 후쿠자와 유키치도 『文明論之概略』에서 오륜 중 가장 먼저 생긴것이 군신관계인데, 이는 약속에 의해 우연히 생긴 것이라며, 봉건적 군주와 신하의 윤리의 선험성을 부정한다. 폐번치현廃藩置県으로 군주와 신하가 자리를 같이하고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설명한다. 이런 논의의 밑바닥에는 송유가 말하는 천지자연에 대해 소리아가 말하는 선왕이 만들었다는 입자에서 하는 비판과 공통의 논리가 흐르고 있다. 노리가가가 경계한 소라이학의 숙명적 귀결이다.(452-457)
마루야마의 주장 중에 흥미로운 것은 천부인권설 등 계몽적 자연법 사상은 자연적 질서 사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토 히로유키를 둘러싼 논쟁을 소개하면서, 한 마디로 권리라고 말한 이상 그것은 어디까지나 법률 상의 권리이기 때문에, 주권자가 만들어 낸 이후 생긴다며, 천부인권설은 실정법의 인위성을 전제하고 이를 정당화하는 논리라는 주장이다. 이 논리는 간단히 배척해 버리기에 곤란한 지점이 없지 않다. 권리의 형성과 발전사를 보면, 천부적 인권론이 주장되는 것 같지만, 실제 권리가 보장되는 과정은 실정법에 의해서 이거나 오래 전에 성립되었던 옛 법률 조항을 원용하거나 확대 적용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권에 대한 주장과는 달리 실정법이 없으면 보호되지 못한다. 그러나 천부적 인권이라는 자연법적 주장은 단순한 사후적 정당화는 아니고, 실정법이나 오래된 법률을 재해석하는 사상적 추동력이 된다. 물론 일본과 같이 권리사상이 위로부터 허용에 의해 열린 공간에서 비로소 전개된 경우, 발전된 권리사상을 선진 외국에서 배워 가져온 경우에 더욱 정당화의 논리로 보일 수 있다. 이점에 마루야마의 해석의 오묘함이 있다. 적어도 일본에서 그의 주장이 완전히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런 사상의 형성 과정에서 내면의 분리와 규범의 외면화를 시도했고, 제도가 선왕의 작위라고 말한 소라이의 영향이 있다는 점도 부인하기 어렵다. 작위론에서 무한한 변법론이 생겨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 아직까지 마루야마에 에게 보이는 한계 또는 미적지근함도 있다. 그것은 폐번치현으로 군신이 한 자리에 앉았다는 후쿠자와를 인용한 부분이다. 여기서의 군이란 도쿠가와 쇼군이고, 신은 다이묘와 그 신하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금 새로운 메이지 천황 앞에서 신하들 사이의 평등을 가진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천황제가 드리우는 어두움은 이렇게 깊고 또 자연스러운 것이다.
주체적 작위사상의 범람에도 자연 질서 사상이 모습을 감춘 것은 아니다. 판적봉환이나 폐번치현은 자연적 질서사상을 논리적 무기로 하는 봉건세력의 격렬한 저항을 수반하게 된다. 쿠모이 타쓰오雲井龍雄는 봉건군현은 자연스럽게 점차적으로 생겨난 것이라며, 사람의 힘으로 바꿀 수 없다고 이에야스도 바꿀 수 없어 봉건을 한 것이라 말했다. 이런 순수한 봉건 반동세력이 후퇴한 후, 자유민권론 반대파, 요시오카 노리아키吉岡徳明는 개화론자들은 자유를 방해하는 것은 모두 인위라고 하지만, 법률이나 정부를 사람이 만든 일시적인 것으로 간주하게 되면, 군주와 인민 마저 사람이 만든 것이 되는데, 그럴 수 없다고 반대한다. 여기에 자연적 질서사상에 새로이 부여된 사회적 역할이 보인다. 1881년 국회 설치 운동이 전개될 시절 에드문드 버크Edmund Burke 저, 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郎 역으로 간행된 『政治論略』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와 An Appeal from the New to the Old Whigs를 편역한 것, 정부당국의 환영)에서 한 나라의 헌법과 정체를 만드는 정략은 천지자연의 기상을 따르면서 점차적으로 바꾸는 것으로 정치의 운용은 천지자연의 도리에 따르는 것이라며, 관습을 낡은 것이라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책자는 元老院에서 간행되었는데, 민권운동에 의구심을 품은 메이지 정부가 자연적 질서사상의 기능에 착안한 사태를 이해할 수 있고, 반민권 이데올로기로서 자연적 질서 사상은 자유당自由党, 개진당改進党을 반대하는 도리오 고야타鳥尾小弥太 등의 보수당保守党 중정파中正派는 기관지 『保守新聞』에서 개인주의 정치가들은 국가를 인간이 만들 발명품, 인간이 통제할 수 있고, 의지에 따라 바꿀 수 잇는 것으로 보지만, 국가란 인류의 자연스런 본성에 기초해 발달했지만, 이상적 결과는 아니었고, 이해득실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인류가 이상을 덧붙이기 이전에 국가는 의연하게 존재하고 있다. 사람은 국가의 태내에서 자라서 이어가는 것이라며, 국가는 인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국가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메이지유신의 신분적 구속을 배제하여 새로운 질서에 대한 주체적 자유를 확보하는 것처럼 보였던 인간은 다시 거대한 국가 속에 매몰되게 된다. 작위 논리가 인고의 여행을 맟고 청춘을 구가하려 했을 때, 곧바로 가시밭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일본에서 전반적으로 근대적인 것들이 걷지 않으면 안되는 운명이었다. 도쿠가와시대 사상이 완전히 봉건적인 것이 아니었듯이, 메이지 시대는 완전한 시민적=근대적 순간을 조금도 갖지 못했다.(457-462)
자연적 질서관은 자유민권사상을 억제하기 위해 되돌아온다. 봉건사회 말기 간세이 이학의 금으로 현존질서를 보존하려고 하듯이. 그 와중에서 보수파들은 에드문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대한 성찰』을 편역하여 활용한다. 솔직하게 다른 무엇보다 그냥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1881년에 버크라니 하긴 토크빌을 소개한 건 후쿠자와 유키치니까. 사상을 공부하려면 일본어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적어도 한국에선. 그러나 한편 버크가 제대로 번역된 것이 2008년이고,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이 1990년대니까 어떤 의미에서 환경이 무르익었을 때,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도 같다. 자연질서론의 복귀. 여기서 마루야마 마사오는 그 속내를 다시 한 번 펼쳐낸다. 도쿠가와의 봉건이 완전한 봉건이 아니듯. 메이지의 근대는 시민적=근대적인 순간 따윈 없었으니. 근대의 초극 따윈 집어치우라고. 보수사상의 원조 격인 마부치와 특히 노리나가를 분해해서 그가 말하는 일본의 조상신 사상은 자연적이라기 보다 작위사상을 전복적으로 소화한 것임을 밝히며, 히라타 등의 사상도 당대의 개혁사상과 어떤 갈등없이 소화될 수 있었음을 보여준 후, 자연적 질서관이 다시 도래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에드문드 버크에 대한 소개까지. 일본에는 순수하게 보수적이면서, 일본적인 전통 사상 따위는 없고, 통치자에 의해 활용되고 있을 뿐이라는 점과 동시에 메이지 그리고 다이쇼와 쇼와의 근대에는 시민적 근대란 꽃핀적도 없다는 사실을 역사를 통해 주장한다. 근대란 지금부터 추구해야 할 과제라는 선언이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현재의 사상가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모든 사상사 연구자는 현재의 사상가다. 미셸 푸코가 그 점을 다시 한 번 놀랍게 보여주고 있다. 마루야마의 사상은 적어도 『日本政治思想史研究』는 이 글들이 쓰여진 1940년, 1941~2년, 그리고 1944년의 맥락에서 읽지 않으면 안된다. 이점에서 마루야마 자신은 소라이이고 노리나가이다. 표면과 심층의 분석을 통해 그는 소라이와 노리나가 처럼 당시대를 향해 말하고 있다. 그는 당대를 향해 목이터져라 말하고 있으니까. 당대적 이해와 당대와의 투쟁이 선결된 이후에야, 이 책의 주장에 대한 여러가지 비평이 가능하겠지만, 당대적 이해는 수많은 비평을 무의미하게 만들 것이다. 여기까지 읽고 정리하면서 비로소 마루야마 마사오가 이 책의 개정판을 내지 않고, 계속 출판한 이유를 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덧붙여 한국인이 마루야마를 이해하려면, 꼭 와타나베 히로시를 병행해서 읽어야 한다. 그래야 비교의 준거점이 생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마루야마 마사오가 일본정치사상사의 출발점이란 말은 아무리 반복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책의 나오는 거의 모든 주제는 끊임없이 반복되고 변주되고 있다.

2018. 12. 10.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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