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2).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真男, 『일본정치사상사연구日本政治思想史研究』, 김석근 역, 한국사상사연구소, 통나무(東京大学出版会), 1995(1952).

1장 근세일본유교의 발전에 있어서 소라이학의 특질 및 국학과의 관련성
1장 1절 머리말-근세 일본유교의 성립: 중국역사의 정체성과 유교-일본에 있어서의 유교-근세 일본 유교의 성립과 객관적 조건-그 주관적 조건-근세 일본 유교의 전개를 더듬어 보는 것의 의미.

중국은 가부장제에 근거한 신정적 전제정의 제국이며, 개인은 도덕적으로 자기가 없는 것과 같다는 헤겔의 『역사철학강의』의 한구절로 시작한다. 중국에서는 역사의 한 특이성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거기에 중국역사의 정체성이 있다는 것. 헤겔의 비판은 신랄하다. 역사의 유년시대. 가족관계 위에 구축된 국가. 훈계와 예의범절의 가르침에 의한 국가. 산문적 제국. 지속의 제국. 동요조차 비역사적인 역사. 주체가 자신의 권리에 이르지 못하고 대립을 자기속에 잉태하지 못한 즉자적인 결합체. 대립은 고정적 국가질서 바깥에서 발생한다. 반면 외부에서 파괴하는 방종하기 짝이 없는 자의성.(105-107) 마루야마는 이를 중국역사에 있어서 유교의 지위와 연관시킨다, 왕조가 변하면서 다소간의 성쇠가 있어도, 유교는 새왕조의 국교적 지위를 보증받았고, 중국적인 사회관계는 재생산되며, 유교에 대항할만한 사상체계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즉 사상적 대립을 경험하지 못했고, 최근세에 국제적 압력이 중국사에 근대적=시민적인 것을 침투시켰을 때, 비로소 삼민주의와 같은 계통을 달리하는 사상과 만나게 되었다.(108-109) 마루야마가 두고두고 헤겔리안과 중국 정체론이라면서 비판을 받게 되는 1장의 서두이다. 대립 다시 말하면 모순을 동력원으로해서 세계정신에 의한 역사발전이 이루어진다는 헤겔 역사철학에 비추어 본다면 지극히 타당한 이야기다. 지금에 와서 이런 주장을 반복하는 사람도 없겠지만, 1940년으로 돌아가 중국이 정체되어 있었다, 적어도 그래 보였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을 그저 지속의 왕국이라고 단순하게 평가한 헤겔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했다는 사실은 결국 두고두고 오점이 된다. 일단 그는 여기서 역사적 현실과 사상의 연속성과 반복성을 끌어내지만, 지나치게 단순한 주장이기 때문에 합당한 근거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남겨진 사진 중에 학생들과 헤겔을 독일어로 강독수업을 하는 모습도 있다.
일본 유교의 도래는 4세기 오진 천황 때 왕인으로부터 라고 할만큼 오래되었다. 중국제국의 특성에서 분리할 수 없지만 자체속에 보편화로의 계기를 가지고 있어 일본에 수용될 수 있었다. 도쿠가와 시대는 유교의 전성기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도쿠가와 봉건사회의 사회적 내지 정치적 구성이 유교의 전제가 되는 중국제국의 구성에 유형상으로 대비되기 때문에, 근세 초기에 유교가 그 이전의 유교에 비해 사상적으로 혁신되었기 때문이다.(109-110) 전국시대를 통해 형성된 근세 봉건사회는 중세 봉건사회에 비해 철포의 전래로 인한 전술의 변화, 검지検地와 도수령刀狩令에 의한 병농분리, 무사와 토지의 관련성 상실, 조카마치城下町에서 위계적인 가신단 형성 및 세분화, 쇼군, 다이묘, 무가 고용인武家奉公人을 순서로 하는 무가의 신분적 구성, 무가의 서민에 대한 우월은 주의 봉건제의 천자, 제후, 경, 대부, 사, 서민의 구성과 유형적으로 비슷하기에 그 사회관계를 유교윤리의 이데올로기로 기초짓기에 적절했다.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는 무사를 유교 경전을 들어 정당화시켰다. 무사계급 내부에서도 은혜를 기초로 한정된 수로 맺어지는 주종관계의 심리적 지주인 나사케なさけ나 서약ちぎり은 조카마치의 방대한 봉건가신단과 영주 사이에서 찾아보기 어렵고, 객관적 윤리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는 때로 법률이나 제도로 표현되어, 신분에 따라 의상, 경칭, 수레 등에 번잡한 등급을 마련하여 구별하고, 새로운 것을 꺼리고 생활을 고정화하는 봉건적 정치양식은 유교가 예로 합리화한 중국의 지속적이고 장려한 제도를 방불케했다. 이에家가 봉록이라는 정치적=경제적 관계를 기초로 하했기에 당주의 가족구성원에 대한 통제권은 매우 강했고, 가족구성원의 인격적 독립성은 매우 약했다. 여기서도 유교의 가족윤리는 적응성을 보인다. 또한 신분사회에 있어서 사회관계는 최상층의 그것을 전형으로 하여, 하층신분의 사회관계가 형성되고, 의식형태도 이에 따라 위로부터 아래로 침윤이 이루어지는 신분사회의 일반적 법칙이 타당하며, 유교윤리는 다소간의 변용을 거치기는 했으나 서민들간의 사회관계에도 적용되었다. 이런 근세 봉건사회의 사회구성과 유교윤리의 사상구조와의 유형적인 조응이야말로 근세에 있어서 유교가 가장 강력한 사회윤리로서 사상계에 지도적인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객관적인 조건이었다.(111-116) 중국이 신분제 사회가 지속 순환되고 유교가 지배이데올로기였고, 일본도 도쿠가와시대는 그랬다는 주장이다. 문제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다. 사회가 신분제인 것은 분명하나, 그 지배 이데올로기는 위에서도 아래에서도 유교가 아니었다. 그리고 일본의 신분제도 중국과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마루야마는 근세에 있어 유교가 융성하는 주관적 조건으로 유교 그 자체의 사상적 혁신을 들고 있다. 근세유학은 교학教学으로서의 의미를 가지며 그 연구도 독립된 유학자들에 의해 다소간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전환의 사상적 계기는 송학宋学의 전래였다. 가마쿠라 시대 선승들에 의해 일본에 전래되어 불교 교리 특히 선종 교리와 통합되었던 송학을 불교로부터 독립시키고 근세에 있어 유학이 발전할 수 있도록 기초를 마련한 사람은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와 하야시 라잔林羅山이었다. 둘 모두 승문에서 태어나 환속하여 송학에 귀의하고 유학의 입장에서 출세간교로서의 불교를 배격하게 된 경력은 일본에 있어서 유교의 독립과정을 말해주고 있다.(116-118) 공개적 교학으로서 정주학의 확립은 유학 계통으로부터의 이탈이라 조정을 배경으로 한 진신박사縉紳博士 가문으로부터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을 것이다. 신흥유학은 공가公家에 대항할 만한 정치세력을 지주로 필요로 했고, 그 지주가 에도 막부의 창시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였다. 이에야스는 막부 창업 전에 유교에 대해 깊은 관심이 있었고, 후지와라 세이카를 방문해 정관정요貞観政要 강의를 들었고, 라잔은 세이카의 추천으로 1607년 막부의 정치고문이 되어, 중용되었고, 하야시 가문이 관학官学의 종가宗家가 되는 기틀이 되었다. 『도쿠가와 실기徳川実紀』는 “성현의 도를 존경하고, 학문과 배움의 길을 장려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루야마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 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할 정도로 유학을 시정 방심의 수단으로 삼았는지는 의심스러우며, 막부 초기 정책은 무단적이었지만, 이미 장악한 정권의 기초를 확보하기 위해 사람들의 살벌한 마음을 바꾸어야 하고 교학을 진흥시켜야 한다고 느꼈을 거라고 본다. 이에야스는 『맹자』를 애독했고, 라잔과 맹자의 탕우의 폭군 방벌에 대해 동의했다. 이에야스는 유교에서 장래의 교화수단만이 아니라 에도 막부의 정통성의 거점을 모색했을지도 모른다. 이에야스는 유학에서 문학적이거나 주석적인 연구가 아니라 윤리강령이나 명분론을 찾았다. 근세 유교는 주자학에서 시작되었으나, 중국에서의 전개와는 달랐다. 그것은 유교의 내부발전을 통해 유교사상 자체가 분해해 가서, 바로 완전히 이질적인 요소를 자기속으로 잉태해가는 과정이다. 일본 유교의 좁은 의미의 정치사상은 근세를 통해 봉건적 제약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는 국학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변혁은 표면적인 정치론의 아주 깊은 곳 사유방법 그 자체 내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이를 소라이학까지 더듬고, 소라이학의 사유방법을 이어받으면서 그것을 완전히 전환시킨 노리나가학의 사유방법의 성립을 준비하고 있었다.(118-122) 이 마지막 문장이 원래 초고에서는 “노리나가학에 있어서 소라이학의 사유양식은 거꾸로 서 있는逆立 진리였고, 노리나가는 그런 거꾸로 서 있는 진리를 다시 뒤집음再 転倒으로써 소라이학을 이어받았다”고 썼지만 지도교수였던 난바라의 충고로 마르크스를 연상시키는 구절을 바꾸어야 했었다. 그는 일고시절 경찰에 체포되어 특고의 수사를 받은 후 사상경찰의 감시하에 있었다.(영어판 저자 서문, 52-53) 훗날 자유주의자에 근대주의자라는 온갖 비난을 받은 그도 정작 사상경찰의 감시를 받았고, 미군정 시절의 일로 미국 비자가 대사관에서 거절되기도 했다. 이런 구절 하나하나에서 마루야마는 자신이 습득한 서양사상을 일본 정치사상 연구에 얼마나 철저히 적용하려 애썼는지 알 수 있다. 과연 그런 점에서 그는 철저했고, 그런 관점은 이 연구 전체에서 관철된다. 그런 점이 여러 부분에서 한계로도 지적되지만, 적어도 어떤 방법을 가져오려면 어느 정도까지 철저해야 할런지를 보여준다. 동시에 마루야마가 평생 그런 관점을 고수하기만 한것도 아니고. 실상 훗날 많은 사람에게 비판받고 특히 와타나베 히로시가 결정적으로 비판하면서 극복해냈으며, 본인도 영어판 서문에서 오류를 인정한 도쿠가와 초기에 주자학이 관학이고, 교학이었다는 주장은 비전문가의 눈으로 보아도 쉽사리 한계가 드러난다. 그는 『도쿠가와실기徳川実紀』에 주로 의존한다. 간혹 인용출처로 나오는 『동조궁어실기東照宮御実紀』는 이 실기의 이에야스 부분을 가리킨다. 문제는 이 실기가 19세기 전반의 문서라는 점이다. 전517권으로 구성되어 1809년부터 1844년까지 집필되었다. 19세기 전반의 시각으로 17세기 전반을 보았을 수밖에 없다. 해당 국왕의 치세가 끝나면 편찬한 조선의 실록과는 다르다. 조선의 실록도 고쳐지고, 또 집권자의 입맛에 맞게 쓰여진 게 태반이고. 이것은 물론 1940년대 일본의 도쿠가와 시대에 대한 역사연구, 사회사 연구의 한계가 원인이지만. 마루야마에게 주어진 비판 중 가장 큰 비판은 주자학이 도쿠가와 막부의 관학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조선에서는 관학이었다. 그것도 무려 500년간 이나. 이점이 마루야마를 읽는 우리의 심경을 복잡하게 만들며, 마루야마의 논의에 빠져들게도 하고, 판단을 흐리게도 하는 지점이 아닌가 한다. 주자학이 관학이 아닌 사회에서 관학인 주자학의 해체과정을 탐색한 마루야마 그리고 그걸 읽는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500년간 주자학이 관학이었던 조선의 뒤를 이은 한국의 독자라는 그 미묘함이 있다. 그래서 주자학의 해체나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근대성에 그토록 관심을 가지고 마음을 빼앗기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1장 2절 주자학적 사유양식과 그 해체. 주자학의 구조-주자학적 사유의 특성-도쿠가와 초기의 사상계에 있어서 그 특성과 반영-주자학적 사유양식의 전성기-간분寛文으로부터 교호享保에 걸친 사조의 급격한 추이-주자학적 사유양식의 분해과정[야마가 소코山鹿素行-이토 진사이伊藤仁斎-가이바라 엣켄貝原益軒]
주자학은 주렴계에 의해 개척되고 정자 형제에 의해 발전된 송학의 흐름으로 첫째, 도통의 이음을 주창하고 오경 중심주의에 대해 사서에 의해 근본정신을 파악하는 의리의 학문, 둘째, 우주와 인간을 관통하는 형이상학의 수립이 특색이다. 작게는 일상생활의 수양방법에서 크게는 세계실체론에 이르는 방대한 사상체계가 완성되었다. 여기는 치밀한 정합성이 있고, 주자학의 폐쇄성은 주자학자들이 이론적 창조성을 발휘하지 못한 원인이기도 하다.(123-124) 주렴계의 ‘태극도설’이 주자학의 형이상학의 기초로 우주의 법칙理法과 인간도덕이 하나의 원리로 꿰어져 있고, 천인합일 사싱이다. 주희는 정자의 견해를 받아들여 태극은 곧 ‘천지만물의 리’라고 말하며 발출론적 색채를 희석시키고 일종의 합리주의 철학을 만들어냈다. 주자학의 리는 개개의 만물에 내재하면서도 만물을 넘어서는 일원적인 성격을 잃지 않고 있다. 합해서 말하면 만물의 근원이 태극이고, 나누어서 말하면 사물 모두 각각의 태극을 가진다는 식으로 주자학에는 원래 양자택일entweder-oder적인 범주가 갖추어져 있지 않다. 또한 리는 기와 함께 사물物로 불려 실체적 성격을 가지면서도 단순히 기의 그러한 까닭然の所以의 근거가 된다. 이점에서 주자학을 근대적으로, 이노우에 데쓰지로 처럼 독일 이상주의 철학과 대비시켜 생각하는 데, 상당히 문제가 있으며, 오히려 초월성과 내재성, 실체성과 원리성이 즉자적으로an sich 무매개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 주자 철학의 특징이다.(125-126) 마루야마가 꽤나 길게 주자학을 정리하고 있지만, 그걸 모두 옮기는 건 좀 무의미한 것 같다. 전체적인 골격을 따라 마루야마의 이해만을 들여다보는 쪽으로 정리하려고 한다. 여기서 원래 주자학이 어떠하다는 식의 논의는 뭐랄까 좀 산으로 가는 느낌이다. 그러나 마루야마는 곳곳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 예를 들면 여기서 이노우에 데쓰지로는 주자학을 독일 이상주의 그러니까 독일 관념론 철학과 대비하여 근대적인 것으로 본다는 데 있다. 그것은 바로 연구사에서 본 국민도덕론의 대표자이고, 또 그 후예가 파시즘과 국체론으로 빠져드는 그 이노우에다. 말하자면, 이노우에는 주자학을 근대적인 것으로 보았고, 당연히 그 이후에 나오는 국학은 근대의 극복(초월)으로 보았을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이건 마루야마의 이 논문을 읽다보면 구석구석에 빵부스러기처럼 던져져 있는데, 마루야마는 일본사상을 근대의 맹아가 있다고 평가했다고 그게 근대냐고 비판받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 마루야마는 그 당시의 해석보다 덜 근대적인 것으로 전반적으로 서구 역사의 더 과거로 옮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그가 헤겔의 역사철학에 영향하에 있다는 점도 분명하고.
천지만물은 모두 형이상의 리와 형이하의 기의 결합으로, 본성은 같지만 차별적이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며, 인간 대 자연 사물 사이에서도, 인간 상호간에서도 그렇다. 주자학의 우주론은 그대로 인성론으로 이어진다.(127) 태극=리가 사람에 깃들어 본연의 성이 되고, 기가 인간에 부여되어 기질의 성이 된다. 어둡고 탁한 기질에서 욕망이 생겨나고, 욕망이 본연의 성을 뒤덮어 가릴 때, 인간의 악惡이 발생한다. 선은 악보다 근원적이다. 어떤 사람도 기질의 성의 어둡고 탁함을 씻어내면 본연의 성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그래서 어떻게 기질을 개선할 것인가, 주자학의 실천윤리가 전개된다.(127-128) 주자학의 실천윤리에서 중시하는 것은 『중용』으로 군자의 덕성을 높이고 학문에 의거한다는 말에 따라, 욕망을 제거하고 천리에 돌아가는, 수양과 지적탐구, 주관적 그리고 객관적 방법을 선택한다. 주관적인 것은 존심存心으로 순수하게 주관적인 내성內省으로, 욕망이 소멸되는 경지에 이른다. 객관적인 것은 격물치지格物致知, 사물에 나아가 앎을 다한다. 사물에 나아가 하나하나 리를 궁구하면 내 마음에 본연의 성을 밝게 한다. 궁리에 힘쓰면 활연관통豁然貫通하게 되고, 전체全體와 대용大用이 밝게 된다. 주체의 자기반성에 의해 성의 본질을 직관하는 것과, 객체를 매개로 개념적으로 주체의 리에 이르려고 하는 것이다.(128-129) 존심과 궁리로 안으로로 욕망을 없애 본연의 성으로 돌아가고, 밖으로 세계의 법칙理法과 하나가 되면合一 그는 성인이 된다. 개인의 이런 도덕적 정진이 모든 정치적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전제조건이다. 격물格物, 지치至治, 의성意誠, 심정心正, 신수身修, 가제家齊, 국치國治, 천하평天下平. 주희 철학의 귀결점. (129-130)
개괄적으로 주자철학을 정리한 후 거기서 특성을 읽어낸다. 그러면서 주에서 일본 근세 초기 고학파의 비판을 받은 주자학은 직수입된 주자학으로 주희 철학의 본래적 특성에서 보아도 동일하다고 간주한다.(130) 바로 이 부분이 훗날 수많은 비판을 받은 부분으로, 본인도 인정한 것이다. 일본 주자학은 처음부터 일본화되었다는 부분. 주희 철학의 근본개념인 리理 사물에 내재하는 자연법칙物理이지만, 인간에 내재하는 규범道理이고 자연自然이자 당연當然이다. 자연법칙은 도덕규범과 이어져 있다. 이 연속은 대등하지 않고 종속적인 것으로 사물의 이치는 인간의 도리에 자연법칙은 도덕규범에 종속되어 있다. 따라서 주자학의 형이상학에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제1철학의 영예를 부여할 수 없고, 주자학의 우주론 내지 존재론은 인성론의 반사적인 지위만 차지하고 있다. 주렴계는 발출론이기는 하나 존재론에서 인성론을 끌어내고 있는데, 주의의 ‘태극도설’은 우주론에서 성誠이라는 계기를 끌어들인다. 태극(리)는 본래 윤리적 범주에서 파악되고 있다. 자연만이 아니라 역사 역시 도덕에 종속된다. 주자학적 합리주의는 규준인 리가 도덕성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그 역사는 『통감강목通鑑綱目』에서 표현되는 것처럼, 무엇보다 교훈이며, 거울이고, 명분名分(이름과 직분)을 바로 하는 수단이다. 역사적 현실의 독자적 가치는 인정되지 않으며, 자연, 역사, 문화 모든 것이 도덕적 지상명령 아래 놓여 있다는 점이 주자학의 합리주의 내지 주지주의의 기본성격이다. 이런 도학道學적 제약은 주자학의 합리주의가 소라이학과 노리나가학의 비합리주의를 불러일으켜 합리주의에서 비합리주의에로의 진전이 실은 근대적 합리주의의 성립을 위한 기반이었음을 보여준다.(130-132) 자연법칙과 도덕규범의 연속성과 도덕의 우위. 역사에 대한 도덕의 우위 등이 주자학의 특징이라고 정의한다.
인간의 도리道理는 동시에 사물의 이치物理라는 점에서 윤리가 자연에 이어져 있음으로 해서 주자학의 인성론은 당위적=이상주의적 구성을 취하지 않고, 자연주의적인 낙관주의가 지배하게 된다. 누구나 본연의 성을 가린 어둡고 탁한 기품을 제거하면 착한 본성이 드러난다. 이는 덕행의 목표를 초월적 이념으로 하지 않고, 인간성에 완전히 내재시키는 일종의 낙관주의다. 사람은 모두 성인이 될 수 있다. 이는 동시에 준엄한 엄격주의도 내포한다. 실현되어야 할 규범은 본연이며, 보통 인간의 감성적 경험이나 정감은 기질의 제약을 받고 있으므로, 천리天理는 구체적 실천적으로 자연적 기초를 잃고, 절대적 당위로서 인간의 욕망人欲에 대립하기 때문이다. 자연주의적 낙관주의와 극기적인 엄격주의는 주자학적 사유양식의 분해과정에서 두 개의 방향으로 분열하게 된다. 하나는 유교의 규범주의를 자연주의적 제약으로부터 순화純化시키는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욕망人欲의 자연성을 용인하는 방향이다.(133) 낙관주의와 엄격주의로서의 주자학이라는 평가는 냉정하면서도 놀라운 발견이다.
인성론에 있어서 낙관주의적 구성은 규범이 자연과 이어져 있다는 사실에 배태되어 있다. 이런 연속적 사유가 주자철학의 특색이다. 리의 초월즉내재超越卽內在, 실체즉원리實體卽原理의 관계가 역시 연속적 사유의 표현이다. 모두 직선적으로 이어지며, 도덕성의 우위 하에 일사분란한 배열을 보여준다. 낙관주의는 인성론만이 아닌 주자학 전체의 체계적 특성이며, 낙관주의가 유지되기 어려우면, 근대적인 헤겔이 말한 분열된 의식이 다가선다.(134) 대립 즉 모순이야말로 역사발전의 원동력이라는 헤겔 역사철학을 일본주자학, 고학파, 소라이학, 노리나가학(국학)의 연쇄에서 발견하고 관철하기 위해 철저한 전제를 깔고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주자학 체계를 장식하는 정적-관조적 경향. 주렴계의 태극도설 보이는 절대정絶對靜은 주자학에서 전면적으로 전개된다. 성인은 고요함에 근본을 둔다. 본연의 성은 적연부동寂然不動하다. 인의예지는 아프리오리한 성에 속하지만, 측은, 수오, 사양, 시비의 사단四端은 이발已發한 정情에 속한다. 인은 사랑과 구별되는 사랑의 이치라 된다. 이는 주자학의 실천도덕에서 수정지경守靜持敬이나 거경정좌居敬靜坐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다. 격물궁리格物窮理에 아무리 실천적 의미를 부여해도 이토 진사이에 비긴다면 관조적 색채가 남아 있다. 움직임에 대한 고요함의 우위, 행동성에 대한 관조성의 우위도 연속적 사유방식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주자학 체계의 낙관주의의 한 표현이다.(134-136)
마루야마는 방대한 주자학 체계를 증류하여 도학적 합리주의, 엄격주의rigorism을 내포한 자연주의, 연속적 사유, 정적=관조적 경향이라는 특징을 찾아내고, 그런 특징을 꿰뚫고 있는 성격으로 낙관주의를 집어냈다. 이는 주자학이 근세 초기 사상계에서 지녔던 독점적 지위를 설명해 준다. 낙관주의는 안정된 사회에 부응하는 정신자세이며, 사회를 안정시키는데 기여한다. 전국시대를 완전히 바꿔 고정화된 질서와 사람들의 마음 위에 성립한 근세봉건사회에 있어 그런 정적 낙관주의는 보편적 정신 자세가 될 소지가 있다. 그러나 도쿠가와 막번제 사회가 지속의 왕국이 아닌 한, 국민생활이 영원토록 정지된=고정적인 것일 수 없어, 낙관주의의 보편성도 얼마 후에는 한계에 부딪힌다. 사람들은 점점 주자학적인 연속적 사유 위에 안주할 수 없게 되었고, 정합성을 자랑하던 주자학의 고리는 하나씩 떨어져 나가게 된다.(137) 나는 주자학과 한국철학에 대해 잘 모르기때문에 함부로 평할 자격이 없다. 조금 들여다 보았다고 할 정도도 못된다. 다만, 마루야마의 작업은 그것이 주자학이든 소라이학이든 노리나가학이든 대화가능한 언어, 비교가능하고 설명가능한 언어, 논쟁가능한 언어로 이끌어냈다는 데서 탁월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마루야마는 주자학을 서구 역사에 가져다 비추어 볼 때, 중세적으로 볼 것이냐, 근대적으로 볼 것이냐의 문제에서 중세적으로 보면서 그 이유를 설명해냈다고 할 수 있다. 1장의 말미에서 보이듯, 주자학은 스콜라, 소라이학과 노리나가학은 후기-스콜라에 비견한다. 그는 당시 일본의 국민도덕론자들이나 국체론자들 보다 주자학에 대한 해석을 더 과거로 끌어올렸다. 특히 주자학을 근대적이라고 볼 때, 나타나는 맹점, 사회경제적 구성과 조응하지 않으며, 정치-신학적 상상 역시 원시적이라는 점을 인식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말하자면 당대의 사람들보다 전통 일본사상이 더 퇴행적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의 논의는 일본의 주자학자들에게 향한다. 그들은 주자의 언설의 충실한 소개 이상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마루야마는 이노우에 데쓰지로에서 시작한다. 이노우에는 주자학파는 단조롭고, 동질적이며, 충실하게 주자의 학설을 받드는 주자의 정신적 노예라 천편일률적이라고 평가한다. 마루야마는 도쿠가와 중기 이후 주자학이 고학파古学派와 국학자国学者들의 반격을 받으면서 타협적이고 절충적인 요소가 끼어들었지만, 초기는 순수했다고 평한다.(138)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는 전국시대 보편적 통속 도덕으로 유행했던 천도天道라는 관념을 주자학의 리에 결합시킨다. (번역자는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면 道를 모두 길이라고 풀어서 번역하는데, 그게 틀렸다기 보다는 이해하는데 좀 번거로워서 여기서는 모두 도道로 쓰려 한다.) 이는 근세 초기 주자학의 독립과 일반화라는 객관적 사태에 의해 가능했다. 주자학의 리가 가진 연속성을 천도는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또한 인욕은 거울의 때와 같은 것이라 떨쳐버리면 된다. 이것은 일종의 낙관주의이며, 성인과 보통 사람이 이어진 실천도덕으로 연결되다. 동시에 인욕을 적으로 증오하는 엄격주의도 내포하고 있다.(139-140) 후지와라의 인용구를 보면, 천도는 천지간天地間의 주인이라고 되어 있다. 일종의 인격신 적인 모습을 띤다. 일본에서는 전국시대에 이미 천도가 다양한 종교와 민간신앙의 혼합으로 존재하고 있는데. 후지와라는 일본의 천도를 주자학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이 주자학화되었을까? 아니면 주자학이 일본화되었을까? 현대 일본어에서는 아니 꽤나 오래전부터 お(御)天道様(오텐도사마)란 태양 또는 태양신을 가리키는 말이고, 때로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지칭하기도 한다. 당연히 천황제와도 이어지겠지. 이미 후지와라 세이카에서부터 주자학은 일본적인 것이 아닐까. 마루야마도 그래서 그런 점들을 간과했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게다가 그가 나중에 인정하듯, 후지와라 세이카와 필담으로 주자학에 대해 논의한 인물이 바로 임진왜란에서 포로로 잡혀온 조선의 주자학자 강항이다. 퇴계학과의 관련성이 여기에 있다.
하야시 라잔林羅山에 이르게 되면, 그의 말은 주자의 충실한 소개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는다. 태극은 리이고, 천명인 성이 도리이며, 천리와 인욕은 대립투쟁성을 보여준다. 명명덕으로 교화도 가능하다. 개인의 도덕과 정치가 이어지는 낙관적인 사유방식을 보여준다.(141-143) 세이카・라잔의 경사파京師派와 나란히 근세일본 주자학의 원류를 이루는 해남파海南派의 집대성자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斎는 너무나 경건한 주자학자 였고, 자신의 고유한 성격도 작용하여, 주자의 엄격주의를 여지없이 보여준다. 그는 지경, 존양을 극도로 강조하고, 도움이 되지 않는 책 읽지 못하게 했다. 안사이가 자기 학파의 수양강령으로 중시한 주자의 경재잠敬齋箴은 완전히 전형적인 엄숙주의이다. 그의 집이 감옥이나 호랑이굴 같다고 말한 제자도 있다. 인간의 자연성을 용인하는 쪽으로 주자학에 대한 반발이 생겨날 때, 구체적인 (잘못된) 사례로 언제나 안사이학파가 내세워졌다.(143-145) 그러나 하야시 라잔이 이에야스에게 벼슬한 것은 이에야스가 쇼군이 된지 2년 후인 1605년이며, 후지와라 세이카는 1619년에 세상을 떠나고, 이에미쓰家光 쇼군 때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가 개정되고, 참근교대参勤交代가 확립된 것은 1635년으로 다이묘들 앞에서 이 법을 읽어내려간 사람이 라잔이었다. 야마자키 안사이는 1618년에 태어나 1645년을 전후해, 유자로서 두각을 드러냈고, 그가 요시카와 고레타루吉川惟足의 신도 학설을 잇는 것은 1665년으로 주자학자로 20년간 활동했다. 히데타다秀忠의 아들로 쇼군을 보좌함 막부 정치에 권위를 가졌던 호시나 마사유키保科正之(1611~1672)도 안사이를 존경한 주자학자였다. 그러나 그와 비슷한 시기에 야마가 소코(1622~1685)와 이토 진사이(1627~1705)에 의해 거의 동시에 송학으로부터 고학으로의 일대전환이 시도되었다. 그리고 오규 소라이가 1666년에 태어났다. 따라서 주자학적 사유방식이 보편성을 자랑하던 시대를 17세기 초반부터 중반을 약간 넘은 때, 막부 권력이 확립되어 전국의 소요 사태가 고정화되어가는 과정과 병행하고 있다. 소라이가 고문사학古文辞学을 제창한 것은 교호 연간(1716~1736)으로 소코와 진사이의 고학 전환으로부터 거의 반세기를 지나서였다. 이는 긴 기간은 아니지만, 간분(寛文1661~1673)에서 교호에 이르는 반세기 동안에 이르는 사회와 사상의 변용은 그 사이의 겐로쿠(元禄, 1688~1704)가 보여준다. 주자학적 사유의 보편성도 급속한 추이를 보여 1666년 야마가 소코가 『聖敎要錄』을 간행하여 주자학을 비판하자, 아코赤穂에 유배되는데, 이때 그들은 사상계에서 고립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호 연간의 소라이가 주자학을 철저하게 비판했지만, 문하에 인재들이 모여들고, 명성을 얻었으며, 쇼군 요시무네의 신임을 얻었다. 이 반세기 동안 사조가 급템포로 변천되었다.(145-149) 마루야마의 논의는 17세기 전반기는 주자학의 시대, 17세기 후반에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 18세기 초에는 완전히 분위기가 바뀌었고, 그 사이에 커다란 사회적 사상적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비판하는 와타나베 히로시는 일본의 학계는 주자학이 관학이 아니고, 유자도 권위가 없어서 오히려 다양한 견해가 발표될 수 있었고, 이미 도쿠가와 초창기부터 다양한 사조의 싹이 텄고, 실은 거의 동시에 다양한 흐름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토록 촘촘하게 붙어있는 변화의 흐름에서 주자학이 관학이 되어 권위를 가졌고, 주자학적 사유양식이 지배적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주장에 내심 매력을 느끼는 것은 주자학이 관학으로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한국에 지금도 살고 있기 때문이고, 그래서 동시에 그 정도로는 지배적이라고 말히기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야마가 소코(山鹿素行, 1622~1685)는 자신이 고학古学을 제창하게 된 사상적 계기를 『배소잔필配所殘筆』에서 성인의 학은 실천에 옮겨야 하며, 공부, 지경, 정좌는 잡학이라고 말한다. 소코가 송학에 가진 불만은 실천도덕의 방법이었다. 그는 리의 초월적・형이상학적 측면을 부정하고, 사물 그 자체에 가까이 갈 것을 주장한다. 지경을 근본으로 삼아 조용히 앉아 있기만 하면, 눌리고 막힐 뿐 아니라 좁고 얕게 된다.迫塞狹淺. 고요함과 함께 움직임에 나아가 공부해야 한다. 이것이 격물이다. 주자학 격물의 정적=관조적 성격을 밀어내고 즉물성Sachlichkeit를 밀고나가려 했다. 그는 성선을 미혹이라하며, 선악은 선의 동태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선악은 본연이 아닌 기질의 성의 작용이다. 도덕적 수련은 밑바탕下地에 지나지 않으니 이로서 성인이나 천지에 비교하는 것은 잘못이라하여, 송학의 낙관주의의 안이함을 경계하고, 배움과 가르치는 동적인 실천과 역행을 강조한다. 여기서 주자학적 인성론의 규범성과 자연성의 연속이 단절되어 규범주의는 스스로를 순화純化시키려 한다. 소코에게 이는 무사도의 기초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본래의 유교의 윤리적 순화純化는 진사이. 규범성의 족쇄를 풀게 된 자연주의도 독자화된다. 이점이 소라이와 연관되어 주목해야 할 점이다. 그의 사회적 정치적 관심은 송학의 도학적 합리주의 비판을 밀고나가 성과를 얻게 되었다.(150-154) 먼저 인간의 情欲은 적이 아니다. 엄격주의적인 태도는 거부되고, 동적=실천적 입장에서 욕망은 모든 행위의, 선한 행위의 기초이다. 거부해야 할 것은 욕망이 아니라 미혹됨惑이며 이는 지나침과 미치지 못함過不及이다. 인욕은 선악과 모든 행위의 기초이며, 인욕을 떠난 천리는 부정된다. 기준은 인간의 본성 바깥, 즉 예악에서 구해야 한다. 성인의 가르침은 예악이라하여, 소라이를 연상시킨다. 물론 아직 예가 자연과 연속성을 완전히 끊어버린 인위적-사회적 제도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의 정의 과불급을 제어하는 것이 예라고 하여 인간의 성에 대해 외부적=객관적인 것이라 생각하여, 소라이에 있어 규범의 외면화를 향한 결정적인 한 걸음이었다. 규범과 인간의 성性의 연속성이 분해되기 시작하자 개인의 수양과 정치의 고리도 느슨해 진다. 수신 만으로 천하를 논하는 것에 충분하지 않다고 하여 정치적 계기의 독자화를 향한 빛이 보인다. 수신은 근본, 기틀, 시작에 불과하다. 이적의 재앙으로 남송는 쇠약해졌다. 백성의 교화는 예악형정의 객관적인 제도를 매개로 하고, 율령격식을 중시하고 있다. 이미 소라이에 가깝다. 천하는 일체이기는 하나 많은 등급으로 나뉘어 일심으로 다스릴 수 없고, 정치적 통일은 대립을 통해 만들어져야할 통합이기에 수신과는 원리가 다르다. 정치의 고유법칙성에 대해 어느 정도의 통찰을 하면서 정치의 비합리적인 모멘트를 인식한다. 즉 세, 시세 같은 것인데. 예를 들면 술이나 담배의 금지는 실패한다는 것처럼. 풍속의 교화에서 엄숙주의를 택하는 것은 인간의 정을 모르는 속된 유학자의 견해로, 송유의 신민 新民같은 도학적 합리주의를 비판한다.(154-159) 마루야마는 야마가 소코에게서 실천도덕론의 변화를 규범성과 자연성의 연속의 분리에서 파악한다. 아직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제도는 외부적인 것으로 파악되는 등, 주자학적 연속성은 해체의 길로 나아가고 있으며, 그 해체의 과정에서 정치적인 것이 발견되기 시작한다고 평가한다. 이 과정에서 낙관주의와 엄격주의의 연계 역시 무너진다고 본다.
야마가 소코가 주자학의 규범-자연의 연속적 구상의 분해과정에서 자연의 독자화에 의해 인욕의 소극성을 적극적인 것으로 바꾸고 그런 방향에서 송학의 합리주의를 비판했다면, 이토 진사이(伊藤仁斎, 1627~1705)는 규범성을 밀고나가 유교 윤리사상에서 순화純化를 시도하고, 원시유교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교토의 재목상 가문에서 태어나 일생 민간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 도를 주장했던 순수한 선비로, 소코의 송학 비판이 사회적・정치적 면에서 성과가 있었다면, 철학적 입장의 해부에는 진사이였다.(159-160) 진사이는 천도天道, 인도人道, 천명天命, 리理, 인의예지仁義禮智, 성性과 같은 범주를 명확하게 구분했다. 그는 유교를 관조성에로의 타락에서 구제하여 실천윤리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으로 주자학의 연속적 사유의 분해를 촉진시키고, 자신과 대척적인 소라이학의 성립을 직전까지 준비하게 된다. 천도와 인도는 섞어서는 안된다. 음양은 천도이고, 인의는 인도라 하며, 우주론을 인성론으로부터 분리시킨다. 진사이의 우주론은 바이탈리즘적인 원기론이며, 동태적 자연관으로 리의 우위를 부정하며, 리는 기 안의 조리條理라고 한다. 진사이의 리는 천인天人의 연쇄가 절단되고, 물리物理에 한정되어 있다. 리는 사물, 성은 사람, 명은 하늘에 속하는 것이라하여, 리의 무제한적 확장에 반대한다. 리의 논리적 우위를 시간적 우위로 혼동하지 않고, 가치적 우위를 초래할까 염려했다. 원기의 더 궁극적 근원을 더 비합리적인 천명 天命에서 구하게 된다. 송학의 천명은 천리, 천도와 등치되고, 인성人性과 이어져 있으며, 범신론적이다. 진사이의 천명은 천도와도 인성과도 완전히 구분된다. 진사이는 천天을 인격적으로 사유하며, 천명을 주재主宰라는 측면에서 말한다. 실질은 일리一理이다. 진사이의 천명 사상은 충분하지 않다. 진사이의 천명사상은 사물의 시종, 과거 현재, 끝, 형상, 성정의 그러한 바의 까닭然る所以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으로 나아가며, 소라이학은 이를 발전시켜 주자학의 기초적 지반을 무너뜨렸다.(160-163) 그러나 진사이가 가장 중시한 것은 우주론, 천명론이 아닌 도덕론, 인도人道에 관한 주장이었다. 그의 실천적 의욕은 유교 윤리의 이론 구성 내부로 들어가 이상주의적으로 순화純化시키려 했다. 인성도 넘어서는 것이다. 진사이에게 인의예지란 본연의 성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실현해야 할 것으로 부과된 이데아적 성격을 띄고 있다. 성은 사람이 없으면 없지만, 도道란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본래 있는 것이다. 도는 자연계로부터 분리되고 인간의 성으로부터도 초월적이다.(164-165) 성선을 말하는 맹자를 존숭하는 진사이는 사단四端을 인성에 속하게 했고, 이는 객관적=자립적 존재인 인간이 도를 실현해야할 바탕으로 인성에 부여되어 있다. 인성이 선하기에 인의예지를 이룰 수 있다. 도는 당위적이고 초월적이며, 성선은 방편적일 뿐이다. 마루야마는 차이만을 지적하는 이노우에와 달리 주자학의 분해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165-166) 진사이는 소코와 같이 정욕情欲에 대한 관용도 엿보인다. 유교의 규범성을 순화純化시킨 진사이에게 이상해 보여도, 주자학적 사유의 분해과정에서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주자학 인성론에서 낙관주의 부정(규범의 자연주의적 제약으로부터의 순화)은 엄격주의의 파괴도 수반하기 때문이다. 진사이는 부귀를 하찮게 보는 유학자들의 태도를 도를 모르는 것이라고 비판하는데, 이는 노리나가 부귀와 영예를 바라지 않는 듯한 모습은 거짓이고, 실제 그렇다고 해도 정상이 아니라고 말한 것과 비슷하다. 유학자인 진사이와 반유교주의자 노리나가도 주자학 사유의 분해과정에서 본다면 양자간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다.(167-168) 우주론에 있어서 불가지론적 견지에서 전개된 비합리주의가 반엄격주의적 입장에서 전면에 나선다. 모든 일을 리에 의해 판단하면 잔인하고 각박해진다. 송학적 합리주의에 대한 비판은 결여되어 있던 역사의식의 대두를 촉진시킨다. 삼대 이전은 천리이나 삼대 이후로는 인욕이라는 주자의 말을 비판한다. 물론 『통감강목』 사관에 의존하고 있지만, 성인이 지금 태어나면 지금의 법今の法을 쓸 것이라며, 극단을 버리고, 시세를 따를 것이라며, 예악의 역사적 변천을 중시했다. 진사이는 정적=고정적 합리주의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있었다. 도학자 진사이는 의외로 도학적이 아니며, 고학파 진사이가 반드시 묵시론적 말세론자는 아니었다.(168-169) 진사이는 정치론에 대해 많이 말하지 않았지만, 도덕과 정치의 연속성은 여기서도 분명하게 분해의 징후를 보여준다. 주자와 효종의 사례를 들어 정심성의正心誠意는 학자에게는 괜찮겠으나 백성과 호오好惡를 함께 해야하는 군주의 치도治道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인자로서 사심이 없다는 동기보다 민중의 복지 혜택이라는 사회적 성과를 더 중시한다. 이의 풍요로운 전개도 소라이학을 기다려야만 했지만, 연속적 사유구성의 분해가 막을 수 없는 흐림이 되었다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다고 말한다.(169-171) 마루야마 마사오의 논지 전개는 철저하게 주자학의 연속적 사유구성의 분해라는 입장이다. 여기서 주자학이 관학으로서 권위를 갖지 못했다는 비판이 꼭 유효한 것만은 아니다. 하나의 체계로서의 주자학이 중세적 봉건사회의 특징이라면, 그것의 해체라는 일관된 방향은 그 자체로 사상적 발전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가이바라 엣켄(貝原益軒, 1630~1714)은 1714년 『대의록大疑錄』으로 주자학에 대한 근본적 의혹을 표명했다. 그는 진사이와 안사이학파를 싸잡아 교토 학자의 분위기가 좋지 않고, 개인적 견해만을 내세운다고 말했고, 다른 한편 고학파의 송학 비판에 끌려가는 자신을 어찌할 수 없었다. 우주론에서 엣켄은 주자의 리가 먼저가 기가 나중이라는 주장을 비판하면서, 리기는 하나의 사물이라 주장하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일원론으로 나가려 했다. 진사이와 마찬가지로 리의 실체성을 부정하게 된다. 전지(본연)의 성과 기질의 성을 구별하지 않고, 성을 기질로 일원화하며, 선악의 고정적=절대적 대립은 동적인 관계로 상대화된다. 좋은 것은 성의 본래 모습이며, 나쁜 것은 성이 바뀌어 변한 모습이다. 엣켄은 크게 의심하는데 머물러 있지만, 사유방법은 고학파에 의존하고 있다.(171-174) 성이 부정되고, 선악이 동태적으로 파악되면, 엣켄을 엄격주의적 실천도덕에 대한 비판으로 이끌어 간다. 지경에만 몰두하면서, 완고하고, 욕심많고, 속좁으며, 억압적이고, 엄격하고, 각박하다고 평한다. 엣켄은 지경대신 충신忠信을 내세운다. 동시에 이익추구를 무시하는 것을 위선이라고 평한다. 또한 지경이나 정좌를 비판하면서 도를 아는 것은 리를 궁구하여 일事에 이르는 것이라며 궁리를 중시한다. 이점은 고학파와 다르지만, 자연현상에 대한 폭넓은 관심으로 경험적=실증적이다.(일본 본초학의 시조) 고례古禮에 사로잡혀서는 그때그때의 적절함을 유지할 수 없다. 진사이의 역사의식과 통하는 무엇이 있다. 그는 또 한당 유학자들의 것이 아닌 고주소古註疏를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소라이학처럼 설設보다 문장의 참된 의미를 중시하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그는 성인에 대해 신앙적인 태도를 보이고, 현인에 대해 비판적인데, 고학파의 모든 학자에게도 공통적이었다. 현대적=평면적으로 보면 모순적이지만, 역사적=입체적으로 보면 주자학적 사유의 붕괴과정이 필연적으로 통과해야 하는 그런 단계였다. 일반인-현인-성인이라는 계층적 연속의 분해는 한편으로는 성인의 절대화, 다른 한편으로는 중간층의 전락으로 나타났다.(174-178) 엣켄이 『대의록』을 간행하고 죽은 1714년, 오규 소라이는 『겐엔수필蘐園隨筆』을 간행한다. 소라이가 송학의 입장에서 1705년에 죽은 이토 진사이를 공격한 것이다. 이무렵 소라이는 진사이의 고학에 기울어져 있었다고도 한다. 3년 후인 1717년 소라이학의 기초를 구성한 『변도弁道』와 『변명弁名』이 완성된다. 엣켄은 주자학적 사유방식이 전면적으로 붕괴되는 시점 바로 그 앞에 서있었다.(178) 마루야마는 자신의 목표가 불쑥 솟아난 것처럼 보이는 소라이학의 성립도 맥락을 보면 그 기초가 근세 전기의 사상계 내에서 준비되어 왔다는 점을 사유구조의 내부로부터 가능한ㅎ 한 명쾌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자신한다. 주자학의 낙관주의적 연속적 사유는 도쿠가와 봉건사회 백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보편성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고학파와 엣켄 그리고 소라이 사이에 결정적 비약이 있다. 이는 겐로쿠로부터 교호의 사회적 변동을 고려해야 한다.(179) 어떤 의미에서 마루야마의 논리는 따라가다 보면 그 정치함에서 빠져나오기가 어렵다. 연속과 단절을 논하는 그의 솜씨가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반대로 당시의 유학자들의 좌절감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주자학의 붕괴와 의심이란 학자들의 좌절감의 반영이기도 하다. 통치에 대한 학문을 습득하고서도 통치에 참여할 수 없는.

1장 3절 소라이학의 특질: 두개의 사례-소라이학의 정치성-방법론-천天의 개념-도道의 본질-도의 내용-도의 근거-소라이학에 있어서 공・사의 분열-겐로쿠에서 교호에 이르는 사회정세-정치조직개혁론
소라이가 5대 쇼군 쓰나요시綱吉의 소바요닌側用人야나기자와 요시야스柳澤吉保의 가신으로 관여한 두 사건을 살펴보자. 첫째 생활고에 시달린 농민이 집과 논밭을 버리고 어머니를 모시고 유랑길에 나섰다가 도중에 병이든 어머니를 버린 사건에 대해, 소라이는 다이칸代官과 군부교君奉行의 책임이며, 가로家老의 책임이고, 그 윗사람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다른 유학자들이 송학적인 입장에서 농민의 주관적 동기만 왈가왈부하고 있을 때, 소라이는 이를 객관적인 유형으로, 사회적 반복 가능성에 착안하여 그의 무죄를 이끌어내고, 문제를 위정자의 정치적 책임으로 옮겼다.(180-183) 1702년 아코로시赤穂浪士의 사건, 봉건적 주종관계와 막부 통일 정권의 정치적 입장이 맞부딪힌 사건으로, 유학자들은 의사義士들의 목숨을 살려주자는 견해였다. 물론 하야시가라고 해서 막부의 견해를 추인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마음과 법률을 나누어 주자학적 사유의 붕괴를 보여주었다. 소라이는 시종일관 의사들의 할복을 주장했다. 그들의 의는 사적인 것으로 공의公儀(막부)의 허락을 받지 않은 것이나 그들의 충의도 가벼이 여겨서는 안되므로 참수에는 반대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사론私論으로 공론公論을 해친다면 법도가 서지 않을 것, 즉 개인도덕을 정치적 결정까지 확장하는 것을 단호하게 부인하는 입장이었다. 실제 그의 주장처럼 처분되었다.(183-188) 두 사건에서 일관된 것은 정치적 사유의 우위이며, 모두 겐로쿠 시기(1688~1704)에 일어난 것이다. 정치성의 우위는 소라이학의 일관된 특질이고, 『변도』와 『변명』에서 붕괴도리 지경에 처해 있는 유교를 정치화함으로써 근본적으로 재건하려 하였다.(188)
마루야마는 아코로시 사건으로 소라이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소라이는 처음부터 할복을 주장했다고 하는데. 결국 그렇게 되었다. 물론 그것이 소라이의 의견을 따른 것은 아니지만. 나는 오히려 주자학자들이 다른 견해를 내놓았다는 것이 잘 이해가 안된다. 이런 경우 할복시키는 것이 가장 일본적이다. 도쿠가와 초기였다면, 아마 전원 참수했을 것이다. 뒤에서 말하는 공과 사 구분과 맞추어서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지만. 큰 것에 대해 작은 것을 사로 여기고, 작은 것에 대해 큰 것을 공으로 여기는 전형적으로 일본적인 논리에 가깝다. 과연 이렇게 의미를 부여할 만한 것일까.
고문사학古文辞学은 소라이학의 출발점이자 방법론이다. 성인의 도를 이해할면 옛날의 말古文辞을 알아야 한다. 말은 역사적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진사이가 원시유교로 되돌아가려는 의도는 옳았으나 언어의 변천을 몰랐기에 주관적 왜곡에 빠지고 말았다. 도의 깊은 곳에 있는 말辞(ことば)과 말을 통해 표현되는 일事(こと)가 중요한 것이다. sollen을 말하기 전에 sein을 알아야 한다. 학문의 요체는 말과 일의 차원에서 구해야 한다. sein이란 당우 삼대에 있었던 것das Gewesen이다. 소라이에게는 제도와 문물을 서술한 ‘육경’이 고전으로서 중심이다. 육경은 곧 物(사물・사실)이고, 『예기』, 『논어』는 義(의미)이다. 의는 물에 속하고, 그 후에 도가 정해진다. 물을 버리고 의를 취하는데서 혼란이 생겨났다. 육경을 세밀하게 읽어 말의 용법을 익히고, 고대의 제도에 대한 지식을 얻은 후 논어로 나가야 공자의 참뜻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소라이는 『맹자』 이하의 경전은 상대적 가치만 인정했다. 다른 제자백가와의 논쟁 즉, 시대를 구하기 위한 것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런 개념은 역사적=구체적 연관성과 떼어놓을 수 없다. 종래의 무비판적으로 절대시되던 주장과 개념의 역사적 배경을 지적하고 가치를 상대화한 소라이의 사고방식은 이데올로기론이라 할 수 있다. 정치화적인 입장이 방법론 차원에서 표현된 것이다.(189-191) 송학의 『대학』, 『중용』 중심주의는 진사이학의 『논어』, 『맹자』 중심주의를 거쳐 소라이학의 육경중심주의로 옮아갔다. 근본경전이 시대적으로 소급되는 것은 한편으로 성인과 일반인의 연속성이 단절되고 절대화하는 과정과 다른 한편 리학理学에서 고의학古義学으고 다시 고문사학古文辞学으로 라는 주관성 즉 소라이의 사지私智의 배제과정과 상응하고 있다.(192)
고문사학이란 방법론이다. 진사이가 고의 즉, 경전의 원래 뜻을 찾겠다고 했다면, 소라이는 언어가 변했기에 원래 언어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야기인 즉은 둘다 방법론적으로 매우 올바른 주장이지만, 그것을 방법론적으로 관철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또 문제다. 진사이는 옛날 식으로 글을 지었지만, 그것을 훗날 와타나베 히로시는 조닌들이 사용하는 일상언어의 뜻이라고 말했다. 소라이의 이 독법이야 말로, 훗날 노리나가의 『고사기』 독법에 가까운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일단 이런 접근을 시도했다는 점을 기록해 두자. 그러나 원시유교 즉, 원형에서 답을 찾으려는 방식은 그렇게 새로운 것이 아니다. 어디서든 누구든 시도하는 방식이다.
소라이의 도란 오로지 인간의 규범이지 자연법칙은 아니다. 천도天道나 지도地道는 어디까지나 성인의 도聖人の道에서 유추해낸 것이다. 진사이는 천도와 인도의 연속성을 분해하여 우주론과 윤리학을 독자적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소라이는 천도는 인도를 단순하게 유추한 것으로 천도론은 그 모습을 감추고, 천天은 알 수 없고, 신비한 것이라는 점이다. 천은 앎의 대상이 아닌 공경의 대상이다. 인격적인 의미에서 천天개념 즉 천명론이 소라이학에 만연하게 된다. 천즉리天卽理라고 말한 것은 후대 학자들의 주관적 생각이다. 천天이 마음을 가지는 지 여부는 인간 이성에서 논의대상이 될 수 없다. 천天과 인人 사이에 깊은 단절이 있다. 천의 인격성은 종교적 신앙의 대상이다. 송유의 리선기후설이나 소코・진사이의 기일원설은 모두 사지私智를 남용한 결과이며, 인륜人倫으로 천륜天倫을 헤아리는 불손함이다. 송학의 합리주의는 유교 내부에서 비합리주의로 바뀐다.(192-195) 소라이의 도는 성인의 도이며, 나라와 천하를 다스리는 도로, 선왕의 도先王の道이며, 천하를 평온하게 하는 도, 천명을 공경하는 것이다. 성인의 도, 선왕의 도의 본질은 정치성이다. 소라이학에서는 개인도덕과 정치의 연속적 사유를 통열하게 부인한다. 지경, 주경, 수신 등 유학자들의 논의는 중에게나 어울리는 것이고, 성인의 도는 정도政道와 완전히 다른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성인의 도라고 하여 자기의 몸과 마음을 다스리면 된다는 주장은 아무것도 모르는 단순한 주장이며, 국가를 다스리는 도를 알아야 한다. 소라이는 개인도덕과 정치가 연결되지 않는 예들을 들고 있으며, 나아가 개인도덕을 정치의 수단으로 삼는다. 나아가 군주는 안민安民이란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는 도리에 어긋나도 무방하다. 이는 유교도덕의 ‘가치의 전환’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떠올릴 수 있다. 소라이학에 있어 정치적 사유의 도학적 제약이 배제된 이상, 소라이학을 일본 도쿠가와 봉건제하에서 정치의 발견이라 할 수 있다.(195-198) 도가 치국평천하를 본질로 하고 있다면 도의 내용은 예악형정을 포함하여 선왕이 만든 것을 모두 합하여 말한다. 도란 첫째 보편적=포괄적인 존재이다. 도는 알기 어렵다. 성인의 도는 절대적이기 때문에 다른 사상과 대립하지 않으며, 일체를 포괄하고 있다. (소라이는 늘 자신의 이론을 다른 주장에서 엄격하게 구별하면서도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둘째, 도란 객관적=구체적인 것이다. 예악형정이란 일事과 말辞인 당우삼대의 제도와 문물의 총칭이다. 역사의 산물이지만, 초시대적 의미를 가진다. 객관적이므로 내재성이 없다. 마음을 따지지 않고, 요堯의 옷을 입고, 요의 말을 하고, 요의 행동을 하면 요堯다. 소코에서 진사이로 진행되어 온 도의 객관화과정은 소라이학에서 절정에 다다른다. 도는 객관적이면서 구체적인 존재이므로 진사이처럼 당위나 초월적인 이데아일 수 없다. 소라이는 진사이의 도덕의 공허함을 지적한다. 진사이가 주자와 다른 것은 기른 후에 완전해 지는가 아니면 성은 처음부터 완전한 것인가일 뿐이다. 진사이의 덕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소라이가 추구했던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도 따위와 같은 추상적인 이념 이른바 Moralitätrk 아니라 예악형정으로 구체적으로 현존하는 Sittlichkeit였다.(198-201) 소라이에 따르면 맹자의 성선도 순자의 성악도 모두 논쟁적 개념이다. 이를 절대화하면 안된다. 문제는 성의 선악이 아닌 선왕의 도을 믿느냐의 여부이다. 성의 선악에 대한 논의는 모두 쓸모없는 주장들로 일축되었고, 소라이는 인간의 성은 변화하지 않는다는 테제를 내세웠다. 송학에서는 본연지성은 숙연부동이라 기질을 변화시켜 성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고, 소코・진사이・엣켄은 성의 존재를 부정하고 기질의 변화만을 주장했다. 소라이는 기질의 성은 아프리오리한 것으로 변화하지 않는다고 말하여 송학의 낙관주의가 전복되어 정반대인 비관주의가 되었다. 성인은 배워서는 이를 수 없다. 송학과 성악론은 이론적으로 대립하나 실천적으로(예악) 모두 엄격주의이다. 이는 성인이 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소라이의 비관주의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천명에 대해 무력하고, 도의 포괄성=보편성에 대해 부분성=특수성의 한계에 있다. 여기서 오히려 인간의 자연성에 대한 관용적 태도가 생겨난다. 소라이의 도는 사회적인 것이라 개인이 실현할 수 없고, 억만인이 전체로 실현하는 것이며, 예악형정으로 구체화된 존재이다. 따라서 기질변화는 불필요 아니 해롭다. 쌀과 콩은 쌀과 콩으로써 쓸모가 있다. 소라이는 세계라는 전체성에서 문제를 고찰한다. 송유와 진사이의 현실과 목표의 관계는 소라이에 있어서 부분과 전체로 바뀌었다. 부분은 특수성을 지킴으로 전체의 부분이 된다. 각자는 천성적으로 다른 기질 그대로 개성을 발휘하는데 노력하는 것이 좋다. 특수성을 함양하는 것을 移(옮긴다)라고 표현한다. 성은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옮겨야 한다. 소라이는 양적인 변화를 주장한다. 길러져서養 재목材이 된다. 사람이 천성의 기질을 옮겨서 얻을 수 있는 장점을 소라이는 덕이라고 불렀다. 진사이에서 도와 같았던 덕은 소라이에게서 도에서 분리되었다. 덕은 특수적=부분적인 개인으로 하여금 보편적=전체적 도에 참여하는 매개체가 된다. 도는 큰 것이다. 각각 그 성이 가까운 곳에 따라 잘 길러서 그 덕을 이루게 해야 한다. 소라이는 인의예지를 분리하여 예와 의는 도로 인과 지를 덕의 이름名으로 삼았다. 인의 본질은 안민安民이며 지의 본질은 지인知人이다. 이것은 정치적 지배자의 덕이다. 소라이의 덕이란 좁은 의미의 덕이 아니라 재목材이라 불리는 것처럼 특수한 기능도 포괄하여 모든 사람이 자신의 성에 가까운 기능을 함양하는 자기 방식으로 보편적인 도에 참여하는 것이다. 군주는 특수한 기능을 기른 자를 관료로 발탁한다. 사, 농, 공, 상은 맡은 일을 하여서 서로 돕는다. 세상에 가득찬 사람은 모두 군주가 백성의 부모가 되도록 돕는 관리役人, 모든 인민은 관리이다. (202~207)
마루야마가 소라이에게서 일관되게 발견하는 것은 분리 혹은 연속의 해체이다. 그는 먼저 우주론과 인간론 사이의 해체가 시도되었다고 본다. 주자학에서 우주와 자연을 뜻하는 천도와 지도를 인도에서 분리한다. 소라이는 그런 것들은 인도에서 유추된 것이라고 주장했고, 천은 천명이라는 이름으로 숭배와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인도 즉 인간에게서 규범이 등장할 때 둘로 나눠진다. 하나는 개인도덕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 또는 통치이론이다. 물론 주자학에서는 이 둘이 같은 원리로 이루어진다. 몸과 마음에서 출발해서 평천하로 간다고 말한다. 소라이에게서는 이 둘의 연계가 끊겨있다. 도란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것이며, 정치의 원칙이다. 개인과 사회의 원리가 분리되면서, 정치의 발견 즉 정치의 독립이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개인의 성은 그것은 자질을 기르는 일이고, 사회와 국가 전체로 보았을 때, 어딘가에서 쓰임새를 찾는 일이다. 모두가 통치에 참여한다. 그러나 정치는 성인의 도인 동시에 구체적인 제도의 총체이다. 즉, 제도란 각자에게 부여된 자리를 만드는 것이고, 각자는 거기서 역할을 하는 일이다. 이를 마키아벨리에게 비추어서 정치의 발견이라고 정의한다. 거기까지는 좋지만, 여기에 문제가 있다. 천명은 신앙의 대상이다. 그렇게 해결해 버린다. 자연에 대해서는 더욱 말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 성인 조차 신앙 또는 믿음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신앙 또는 믿음에 가까운 존재로 처리된 후 논리적 설명을 포기한다. 이것은 지나친 편의주의가 아닐까? 천명도 신앙의 대상이고, 성인도 신앙의 대상이라면, 과연 정치는 독립한 것인가? 그저 현실 긍정적인 것은 아닌가? 아니면 현실을 만들겠다는 의도인가?
이 도를 도답게 만드는 근거는 당우삼대의 문물제도이다. 역사적, 지역적으로 한정된 도가 시공간을 초월한 초월한 절대적 보편타상을 지니게 되는가. 송학이 근거를 태극=리는 배제되었다. 소라이는 리를 인식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곳에 둔다. 진사이는 도를 자족적인 가치로 생각했다. 진사이에게 인의예지는 선험적인 절대성을 지니며, 진사이의 도는 송학에 있어서 천도와의 연속성이 부정되고, 인륜성이 강조된 점에서 비자연적인 것이지만, 경험적 인간행위에 대해 아프리오리한 자족적 존재라는 의미에서 오히려 자연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도란 자연히 그런 것이다. 소라이는 진사이의 이런 이상주의(관념론)을 실질이 없다고 비판하고, 도의 구체적인 실증으로 당우삼대의 제도문울에 이르렀다. 이름에서 실질로 주관적 도덕에서 갠관적 인륜으로라는 소라이의 공작을 위해, 도의 배후에 그 도를 창조한 절대적 인격을 두고, 그 인격적 실재에 도의 가치성을 의거하게 해야 한다. 소라이학의 선왕 도는 성인은 이런 궁극적인 실재이다.(209-211) 도는 성인聖人이 창조한 것이고 성인은 도를 창조한 것이다. 복희伏羲는 윤리, 신농神農은 경작, 황제黃帝는 건축과 길쌈, 요순우탕문무주공堯舜禹湯文武周公은 예악형정을 체계화한 당우삼대唐虞三代의 군주로 성인이다. 고대의 정치적 군주로 선왕先王이다. 성인은 도덕의 구현자가 아니라 예악을 만든 사람이다. 소라이 성인 개념의 정치적 우위를 볼 수 있다. 도道란 성인 내지 선왕의 작위作為라는 데 궁극적인 근거가 있다. 송유의 도가 천지자연 또는 사물의 리라는 주장은 선왕을 믿지 않고, 자신을 믿기에 자신의 생각을 성인의 길이라 억지주장하는 것이다. 학자들의 선왕의 길을 평가해서는 안되며, 선왕의 길을 따르는 것이 바름正이고 따르지 않는 것이 사악함邪이다. 성인을 이해가 되지 않아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 믿어야 한다. 일종의 종교적 절대자로 천天이 피안적 신앙의 대상이듯이, 오제五帝를 천天으로 간주한다. 즉 성인은 인격적 천으로 이어지는데, 성인의 이런 피안성Jenseitigkeit은 소라이학에서 도의 보편타당성을 최후로 보증하는 것이다.(211-214) 당우삼대라는 시공간적으로 제약된 제도에서 도를 구한 소라이학이 어째서 비역사적 독단주의에 빠지지 않고, 역사의식이 고양되었는가. 당우삼대라는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제약된 제도는 피안적인 성격을 가진 성인이 만들었기 때문에 절대적이라는 기본명제가 역사의식을 불러 일으킨다. 첫째, 소극적으로 피안성을 상실한 후에 있어서의 모든 제도 예악의 상대성, 그 시대적=지역적인 제약성에 대한 인식으로 나타난다. 소라이는 명율을 강의할 때, 다른 시대 다른 나라의 법이므로 현재의 법률을 훼손시키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았다고 한다. 둘째 도는 피안성에 있어서 절대적이기에 구체적=경험적 구속력은 역사적으로 특수한 형태로만 드러난다. 고문사학은 sollen보다 sein이다. 당우삼대의 제도・문물은 sein 그 자체로 피안적 성인에 의해 부여된 것이지 규범적 의미로 절대화된 것은 아니다. 도가 sollen으로 작용할 때, 구체적 상황에 맞는 형태를 취할 수 있다. 소라이는 예를 만드는 사람은 삼대의 성인이며, 전해 주는 사람은 공자이고, 예를 실천하는 사람은 후세 사람이 선왕의 예에 비추어 짐작하여 인정에 들어맞는 것을 구해야 한다. 일본의 신도도 당우삼대의 고도古道라고, 일본에 태어나 일본의 신을 공경하는 것이 성인의 길의 뜻이라 말한다. 소라이학은 역사적 현실에 맹목적인 공식주의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214-217) 아직까지 도를 천지자연 즉 비인격적 이데아에 근거를 두고, 『통감강목』을 역사책의 전형으로 보는 진사이와 엣켄과 달리 소라이는 도 자체의 궁극성을 부정하고, 고대 중국에 각기 단 한번 출현한 인격에 의거하고, 그 인격을 피안적 존재로 끌어올림으로써 차안적diessetig 역사는 고정적 기준의 속박을 벗어나 자유롭게 전개하게 된다. 소라이는 모든 제도를 만든 사람과 특수성을 말하면서, 『통감강목』 류의 권선징악 사관을 폐기한다. 천지는 살아있는 것活物이다. 그래서 사실만을 다루는 『자치통감』 쪽이 훨씬 더 낫다고 말한다. 그가 역사에서 추구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소라이는 유교의 고전으로 육경에 대해 주관적 요소가 끼어드는 것을 배격했다. 성인과 성인의 도를 종교적 신앙으로 절대화한 후, 다른 한편 실증적인 정신은 유교 고전의 범위를 넘어 모든 역사적 사상으로 확대되었다. 무엇보다 역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문장도 정치도 경학도, 시대가 바뀌면 언어와 제도도 바뀐다. 육경에 대해 辞언어와 事제도를 추구하는 고문사학을 적용시킨다. 소라이에게 학문은 시서예악을 배우는 것이므로, 권형權衡이나 도리道理라는 속박에서 벗어나 역사에 대해 자세히 연구하고, 넓게 무엇이든 받아들여 지식을 넓히는 것이다. 소라이의 저작 목록은 백과사전 같다. 성인을 피안적 존재로 고양시켜 막고 있는 둑이 무너지게 된 개체성에 대한 관심은 성난 파도처럼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성인의 도를 모든 대립으로부터 넘어서게 한 것은 그의 학문적 대상을 직접 치국평천하를 추구하는 경학 방면과, 견문이 넓고 사실을 행하며 넓게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나누게 되었다. 마루야마는 이를 공적인 측면과 사적인 측면으로 나누어 본다.(217-221) 마루야마의 소라이 분석은 이렇다. 도란 절대적으로 보편타당해야 한다. 그렇다면 만일 도가 현실에 시행되거나 현실 해석에 실패한다면 도가 아니다. 그러니 도를 보편타당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도를 차안 혹은 내세에 두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한 근거는 성인이 도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도가 특별한 것인 만큼 이 성인도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거의 신적 존재 또는 신앙의 대상이다. 그들은 특별한 사람들고, 두번 다시 존재할 수 없으며 신적 존재이다. 그렇게 분리시키고 나서 소라이는 이 세계에 속한 문제들은 이런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통감강목 류의 역사관을 배격한다. 여기서 자인과 졸렌이 등장한다. 성인이 만든 당우삼대의 도가 특별한 것은 그것이 그 시대의 sein에 따라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가장 적절한 것은 이 시대의 sein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것이 일본의 신을 섬기는 신도다. 소라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가장 절대적인 기준을 만들어 놓고, 그 기준으로 평가하거나 해결방안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은 절대적이니 만큼 있는 그대로 둔다. 그런 절대는 재현불가능하다. 현실에서는 현실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것은 절대적인 기준을 가진 성인의 도를 폐기해가는 절차다. 성인의 도를 배우지만, 현실을 알지 못하면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한다. 그러니 현실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 현실을 알아야 하는 부분에서 현실의 정치와 제도를 논하지 않고, 백과사전적으로 넓은 지식으로 빠져나간다. 다음 절에서 더 명료해 질 것이지만, 이런 식의 분해과정 또는 변환이 왜 필요했는지는 실은 분명하다. 현실정치에 개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실정치에 개입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현실을 외면하면, 초월의 영역으로 넘어가 탐구하거나 개인의 내면으로 후퇴하게 된다. 헬레니즘 로마의 스토아철학은 공적 장에서 후퇴하여 철저하게 개인의 내면으로 들어갔다. 마루야마가 소라이에게서 발견한 것은 치국평천하에 대한 외면이 아닐까? 그것을 이렇게 복잡하고 정교하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직면하지 못했다. 당시의 유자들이 정치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는 그 사실. 그 사실을 직면하면, 도쿠가와 일본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주자학이라는 전제가 무너지게 되기 때문이다. 앙시아 레짐을 해체하기 위해 앙시앙 레짐을 구축해야 했다.
마루야마는 소라이에게서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분을 사용한다. 그 출발점은 아코의사赤穂義士 사건에서 소라이의 『의율서擬律書』이다. 의사들이 죽은 군주의 원수를 갚은 ‘부끄러움을 아는’ 태도가 ‘사’이며, 국가적 견지에서 그들을 처벌하는 것이 ‘공’이라 했다. 또 하나 『정담政談』에서 막부公儀에 대한 충절로 행해진 고발은 포상해야 한다고 말한다. 고발을 겁쟁이라고 하는 것은 사私의 의리이고, 공公적인 일에 해를 끼치면 안된다. 두 사례는 ‘공’이란 정치적=사회적=대외적인 것이고, ‘사’란 개인적=내면적인 것을 가리키고 있으며, 오늘날의 공・사의 구별과 거의 같다. 이념형적인 견지에서 비근대적인, 전근대적인 사유는 이런 의미의 공・사의 대립을 모른다. 이는 전근대적 사회구성이 공・사분열을 가지지 못한 것과 상응한다. 정치적인 지배관계가 사적인 경제관계와 서로 얽혀있다. 통치자의 재정 지출과 개인 소비가 뒤섞여 있고, 행정 사무는 주종관계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다. 공법은 공법이자 사법이며, 사법은 사법이자 공법이다. 문화적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의 독립, 사적인 영역의 해방이야 말로 근대적인 것의 중요한 징표다. 이와는 다른 의미로 전근대적 사유에서 공・사의 구별이 있기는 하다. 공・사의 구별은 영역에서 구하지 않고, 윤리적 가치로서 추구하는 것이다. 공이란 선이며, 사란 악과 같은 의미다. 소라이에게 있어 공적인 것은 사적인 것보다 앞서 있다. 정치성의 우위가 있다. 사적인 것 자체를 배격하지는 않는다. 아코 의사들의 참수를 반대하고 할복하도록 해야한 것은 사적인 의가 본래의 영역을 넘어서 공적인 법을 침범하기 이전까지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사이의 의무의 충돌Pflichtkonflikt이 일어났을 때, 후자를 우위에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두 영역의 접촉이다. 그는 『변명』에서 공은 사의 반대로 많은 사람이 더불어 하는 것이 공이고, 자기 혼자 오로지 하는 것을 사라고 한다. 공과 사가 각각 그 자리所가 있다. 공적인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윗사람이 되는 도이기 때문이다. 공의 예로 ‘왕도’와 ‘평천하’를 사의 예로 부자상은父子相隱을 들고 있다. 주자학의 공은 천리天理이며 사는 인욕人欲과 같아 사私는 부정되어야 할 악惡이다. 도쿠가와 초기 주자학자, 하야시 라잔은 천리天理는 공公이고 공은 의義이며 사私는 인욕人欲이라고 이런 논의를 반복한다.(221-224)
마루야마의 주장을 따라가면 이런 것이다. 서양 근대에는 공사의 구별이 있고, 전근대 또는 비근대에는 공사가 뒤섞여 있다. 그런데 소라이는 공과 사를 구별한다. 공이란 정치적=사회적=대외적인 것이고 사란 개인적=내면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이 충돌할 때, 공 즉 정치적이 우위에 서야 한다. 그렇다면 주자학은 주자학의 경우는 공과 사의 구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는 부정되어야 할 악으로 공은 천리로 해석된다. 이것은 내 해석이지만, 그렇다면 정치에도 공・사가 있을 수 있고, 개인적인 것에도 공・사가 있을 수 있다. 주자학이나 유학이 전근대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공・사의 구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른 축으로 가로지른다. 이때 이 구별은 정치성을 분리해애는 구별이 아니라. 도덕적인 분기선이자, 선악의 분기선이다. 동양까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인의 정치적 성향 속에서 도덕적 선과 정치적 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가장 큰 지지 내지 환호를 이끌어내는 점을 상기해 보라. 마루야마가 발견한 것은 실제로 이렇게 가로지르는 지점이 다르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때 일본에서 말하는 공과 사 특히 おおやけ로서의 공公은 한국인이 생각하는 공과는 또 다르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무사의 집안에서 다이묘의 가문으로 그리고 쇼군의 막부로 작은 상자가 들어있는 더 큰 상자가 공 즉 おおやけ다.(와타나베 히로시, 『일본정치사상사』, 70-71) 이렇게 보면, 아코로시 사건 등 마루야마가 들고 있는 소라이의 사례가 쉽게 이해된다. 마루야마의 해석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소라이학에 있어서 공・사의 분기는 소라이의 사유방식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성인의 도는 주로 공적인 측면에 있고, 치국평천하를 본질로 하는 도가 무리와 함께 하는 공적인 영역에 속한다. 선왕의 도는 외재적이고 대사회적이다. 반면, 군자도 가지는 사적인 것에 신독愼獨이나 사私의 의리義理가 속한다. 그러나 소라이는 개인도덕을 거의 논의하지 않는다. 예악이 개인적 내면성을 규제할 때는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나 국가적으로는 중요한 일이다. 오로지 정치적인 성격을 띤 것이다. 도의 외재화에 의해 빈 공간이 되어버린 개인적=내면적 영역은 주자학의 도학적 합리주의에 의해 억압된 인간의 자연적 성정이 채우게 된다. 규범과 자연의 연속적 과정의 분해과정은 소라이학에 이르러 규범道의 공적=정치적인 것으로까지 승화됨으로써 사적=내면적 생활의 모든 엄격주의로부터 해방이 되어 나타나게 되었다. 소라이는 제자백가 류의 기예를 갖춘 유학자가 될지언정 도학선생이 되지는 말라 말했다. 『통감강목』은 엄격주의적 실천적 영향 때문에 거부당하고 있다. 사람의 됨됨이가 나쁘게 된다. 송학의 나쁜 영향의 예는 야마자키 안사이와 그의 학파였다. 아사미 같은 경우도 자신의 허물이 아닌 학파의 편협함이다. 인간의 성은 바꿀 수 없다고, 개성德을 키워줄 을 주장한 그의 인성론은 그대로 실천에 옮겨져 겐엔蘐園 문하에는 다양한 준재들이 모여들어 백화요란의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고, 소라이학에 있어서 엄격주의로부터 해방된 자연적인 성정은 풍아문재風雅文才로 흘러 겐엔학풍은 문예제일주의로 불리기도 했다. 정치와 역사에서 도학적 제약을 배격한 것과 마찬가지로 문예도 윤리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소라이는 시를 권선징악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며, 시경에는 음란한 시도 많다, 시는 단순히 시라고 보는 것이 좋다. 시는 일본의 노래歌와 같은 것이다. 무릇 성인의 도라는 궁극적 제약은 벗어날 수 없다. 인정은 선왕의 도로 가는데 반드시 거쳐야 한다. 일본의 와카和歌가 중국의 시와 분위기가 다른 것은 일본은 성인이 없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런 마지막 제약까지 배제하는 것은 국학에 이르러서로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입장이 확립되었다. 중국의 시나 일본의 와카는 모두 정情이 내부에서 일어나 말로 나타나고 소리를 내는 것으로 수기치인이나 치국평천화와 무관하다. 그는 유교적 예술관의 한계선에 서있다 할 수 있고, 문예를 사적인 영역에 귀속시키고 있다.(225-229)
마루야마가 발견한 소라이의 공・사의 분기는 소라이의 사유양식에 있다. 왜 이런 전제를 내걸었을까? 그것은 서구 근대의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나누는 것은 영역, 즉 공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사적인 공간 그것은 집 또는 가정 즉 부르주아적 사생활이다. 그러나 소라이가 분리해낸 것은 사적 공간이나 사생활이 아니다. 그것은 사유에서 사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개인도덕 즉 내면적 사유의 영역이다. 우선 그는 내면적 사유와 외부의 정치를 분리한다. 이것을 분리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는 앞에서도 보였지만, 당시에 유자(유학자)가 막부든 다이묘든 특별히 윗사람의 허락에 의하지 않고서는 정치에 개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혹은 개입한다고 해도 그가 타고난 무사 가문의 위치에 의해서이지, 유학자여서는 아니기 때문이다. 사유와 정치가 연결되는 순간, 목숨을 잃게 된다. 또는 위험인물이 된다. 정치와 사유를 분리시켜야 한다. 그런데 주자학은 둘을 연결해서 정치를 위해서 내면의 도덕을 강제했다. 그러나 정치는 유학자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사적인 내면적 도덕을 닦아야 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내면의 도덕이 아무런 쓸모도 없는 이상, 자유롭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면 된다. 훗날 소라이의 문인들 중 상당수가 탐미적으로 변해간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소라이의 공・사의 분리란 공에 대한 포기에 해당한다. 공을 포기하고 사를 살려내는 것이다. 소라이에게는 공에 개입할 장치나 방법이 없다. 그것은 오직 윗사람의 호의에 힘입어서만 가능하다. 자신이 쇼군 요시무네의 이야기상대가 되었듯이. 그러나 윗사람이 이를 정책에 반영하지 않는다고 해도 윗사람을 강제할 방법은 없다. 오직 한탄만이 가능할 따름이다. 소라이학파가 시문에 빠져드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유학자가 현실 정치에 영향을 끼칠 수 없었던 것은 소라이학 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소라이는 발언권마저 빼앗아 버린다. 그 자세한 이유는 다음에 나올 것이다.
본래의 경학과 견문이 넓고 사실을 행하는 학문이 나뉘어지는 것은 소라이학을 꿰뚫고 있는 공・사의 양면성이 그의 학문론에서 표현된 것이며, 학문의 공적 영역은 오로지 육경에 나타난 이른바 좁은 의미의 성인의 도에 독점되고 있다. 여기에 주자, 양명, 진사이, 노장, 불교 등 비非치국평천하적인 사상의 혼입이 엄밀히 배제되고 있다. 공적인 영역에서 따돌림받은 다른 모든 사상들은 사적인 영역에서 모두 그 존립이 허용되고 있다. 석가의 도는 자신의 심신에 대한 것이지 천하국가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불법은 성인의 도와 얽히지 않기에 개인적 영역에서 허용된다. 따라서 불법을 믿는 것과 성인의 도를 믿는 것은 동시에 허용된다. 각기 그 영역을 달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라이학은 이단의 학문 송학과 철저한 대립을 천명하고 있지만, 송유의 주장은 노장이나 불교의 주장 같이 귀한 생각이다.(229-230)
그런데 이 공적인 영역은 다시 성인의 도에 국한되게 된다. 정치적으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성인의 도뿐이다. 치국평천하의 도 뿐이다. 그렇게 때문에 거꾸로 치국평천하에 해당하지 않는 심신에 대한 모든 주장은 허용되고, 또 유용성이 인정되는 것이다. 심지어 이때 주자학마저 인정된다. 주자학이 심신 수양에 집착하는 한 이것은 유용한 것이다. 성인의 도에 나서지만 않으면 된다. 다시 말하면 학자가 정치를 하겠다고 나서지 않고, 현실 정치를 성인의 도를 들어서 왈가왈부만 하지 않는다면, 어떤 학문에서도 유용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소라이를 정치의 발견자라고 할 때, 그는 어떤 정치를 발견한 것인가? 정치를 회피하기 위해서 발견한 것인가? 게다가 주자학도 유용하게 쓸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미 주자학이 정치 영역에 영향력이 없음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소라이가 말하듯이 주자학 체계는 그렇게 빨리 수립되었다가 그렇게 빨리 해체된 것인가? 마르티나 도이힐러는 유일하게 주자학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았던 한국 사회도 유교화되는데, 최소 200년에서 그 이상 걸렸다고 평가하는데.(『한국사회의 유교적 변환』)
공・사의 분열은 학문적 대상에 머물지 않고, 나아가 학문 그 자체의 성격에 스며든다. 성학聖学은 치국평천하의 학이며, 정치적 지배자가 알아야 할 지식이다. 소라이는 무사의 무학을 탄식하고 있다. 장관奉行이나 관리役人는 경대부卿大夫가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무사는 왕후경대부王侯卿大夫의 직에 나가면서도 자신이 군자임을 모르고, 학문으로 재지才智를 넓히고, 국가는 문치文治함을 알지 못한다. 형벌의 위세로 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소라이는 『政談』에서 유자儒者를 에도에 거주하게 하고 하타모토旗本에게 강의를 하고 추천을 받아 관직에 나가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학문은 치국평천하를 할 때 공적이며, 학문을 하는 것은 사적이다. 학문은 막부公儀에서 일하는 것과 다르며, 어디까지나 내면의 깨달음内証이다. 학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유자들은 모든 인민이 관리라는 의미에서 학문을 통해 치국평천하에 참여하지만, 본래의 직무는 사적=비실천적 영역에 귀속된다. 유자의 일은 문헌을 지키는 것이고 도는 훗날의 성인을 기다려야 한다. 유교와 유자의 관계는 주자학과 소라이학에서 서로 반대이다. 궁리, 덕행,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를 직선적으로 연속시키는 주자학은 그 이론적 성격이 비정치적이기 때문에 유자의 임무는 정치적이 되지만, 사적도덕과 정치의 연속성을 끊어버린 소라이학에서 유교의 본질은 치국평천하이기 때문에 유자의 지위는 비정치적이 된다. 도를 인식하고 서술하는 것은 학자의 일이고, 도를 실천하고 작위하는 것은 정치적 지배자의 임무이다. sollen 보다 sein이라는 소라이학의 방법론古文辞学은 실로 이런 입장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고, 사지私智의 개입을 배제하고 경전의 글文辞에 충실할 것을 주장하는 태도는 성인을 신격화하는 것과 다른 한면이다. 그는 성인을 정치적 가치에 있어서 절대화하고 학문의 요체를 낮게 말辞과 일事에서 추구함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비정치화 시켰다.(230-232)
마루야마에 따른 소라이의 공・사에서 처음에는 공은 매우 협소한 것이었다. 그리고 공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에 속한다. 처음에 정치의 발견자로 칭송받을 때, 막부 정치가 바로 공이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학문적인 논의를 할때는 철저하게 선왕의 길로 축소되는데, 이때 선왕의 도는 육경으로 제한되게 된다. 즉, 원시유교에서 언급된 것이다. 그러나 현실 정치에서 말할 때는 정치적 지배자들로 확대된다. 심지어 하타모토까지도 공을 행하는 자들이 된다. 막부의 정치가들이니 당연할 것이다. 이 두 가지의 모순을 해소하려면, 막부의 정치적 지배자들에게 성인의 도를 강요하면 된다. 선왕의 도를 강요하면 된다. 그게 조선의 주자학자들 도학자들이 했던 방법이다. 왕을 주자학자로 만들고 신하도 주자학자들 즉 도학자들이 담당한 것이다. 모든 사람은 교육을 통해 심신수련을 통해 성인이 될 수 있다. 마루야마가 말하는 낙관주의다. 그렇게 하면 개인의 내면도덕에서 현실정치까지의 연속이 확보된다. 그러나 소라이로서는 현실정치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아니 언급할 수 없다. 혹은 칭송만 하거나 칭송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성인 또는 선왕의 도를 축소한다. 아주 좁은 특정한 것만 치국평천하의 도라고 그것은 특수하고 특별한 것이며 믿음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치국평천하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유학자들에게 숨통을 틔워주는 것이다. 이것이 아주 특별한 것이라고 말하는 이상, 즉 현실 정치에 대해 일일이 간섭하거나 트집잡지 않는 이상, 막부나 무사들도 간섭하지 않을 터였다. 치국평천하를 언급해야만 하는 유자의 자존심 또는 명분을 지키는 방법은 성인의 도, 선왕의 도를 특수화시키고 아주 특별한 사례로만 말하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근본주의적면서 이중적인 기독교 신학자들에게 흔히 발견된다.) 그렇다고 현실정치에 대해서 완전히 언급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런데 그것은 윗사람 즉 정치적 지배자의 일이라면서 평가하지 않는다. 그리고 학문적으로도 논하지 않는다. 학문은 그런 것을 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문은 사적이고 비실천적이면서, 훗날의 성인을 위해 성인의 도, 선왕의 도를 보전하는 것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치적 지배자에게는 선왕의 도를 배우는 것이 권장되지만, 혹 그렇지 않더라도 탄식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실천과 작위는 오직 정치적 지배자의 일이다. 그것은 신분과 가문으로 확정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소라이의 논의에서 왠지 공・사는 둘이 아닌 셋으로 나뉜 것처럼 보인다. 정확히 말하면 두개의 공과 하나의 사다. 신앙의 대상인 고대 선왕의 도로서의 공과 현실의 정치적 지배자들의 공 그리고 유학자의 내면 영역으로서의 사. 그리고 소라이가 끊어버린 연속성이란 두 개의 공 사이의 연속성이다. 공과 사의 연속성은 주자학자도 이미 끊어버린 것이니까. 그걸 다른 방식으로 적용했을 뿐이다. 그리고 공에도 사에도 속하지 않는 수많은 영역이 있다. 상업이나 공업의 영역이 그런 것이다. 그런데 대해서는 아예 언급이 없다. 모든 사람이 관리인 차원에선 억지로 그것도 공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고, 또 이런 영역에서도 크고 작은 관계 속에서 공・사가 발견될 가능성 마저 존재한다. 그런데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다. 마루야마가 발견한 소라이의 근대란 무엇인가. 내면 세계의 발견이라면, 그 공은 미셸 푸코가 말하듯, 고대 그리스와 헬레니즘 스토아에서 벌어진 반전,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형성된 내면 탐고와 고백에 돌려져야 하지 않나. 나의 주장이 지나친 것일수도 있다. 그렇지만, 마루야마의 분석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넘어가기에는 생각할수록 걸리는 것이 너무나 많다.
`소라이학에서 발견한 것은 모든 의미에 있어서 주자학의 안티테제였다. 합리적인 천도天道는 비합리적인 천명天命으로 대체되었다. 궁리하는 능력에는 일단정지 명령이 내렸고, 성인聖人은 일반인과 구별되는 이질적인 존재가 되었다. 규범과 자연의 연속성은 끊어졌으며 엄격주의는 폐기되었다. 치국평천하는 수신제가로부터 독립했다. 주자학의 연속적 사유는 완전히 분해되어 독자적 길을 걷게 되었다. 소코, 진사이, 엣켄에 있었던 여러 모멘트가 궁극적으로 발전한 형태였다. 근세 초기 주자학적 사유의 보편성은 도쿠가와 봉건사회의 안정성이라는 기반 위에서 가능했다. 이런 낙관주의적 사유방식의 분해 배후에는 근세사회의 어떤 역사적 전개가 존재했던 것일까. 소라이는 어떤 계기로 이처럼 철저하게 유교를 정치화시켰던 것일까.(232-234)
분명히 마루야마의 말대로 소라이학은 주자학에 대한 안티테제다. 주자학과 관련성으로부터 보건대 이것은 분명하다. 유학자들은 정치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정치에 참여해야만 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정치를 변혁해야만 하는 의무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학문은 정치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적 의무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학문이 정치에 대해 비판하고 간섭하는 것을 껄끄러워하는 권력으로부터 얻어낸 학문의 자유가 아니다. 정치권력을 승인하고, 정치권력에 간섭해야만 하는 도덕적 의무로부터 얻어낸 자유이다. 이런 자유는 도대체 어떤 자유인 것인가? 마치 순수문학과 민족문학의 논쟁 같은 이 기묘한 논리구조는. 법은 이념이기 때문에 독재권력에 대해 순응해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이 자유는. 어떤 의미에서 사고가 나도 매뉴얼만 찾는 기술적 합리성으로의 도피와는 어떤 연결이 있는가. 매뉴얼에 있는 대로만 했으면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합리성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실로 근대성modernity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이다. 소라이가 근대적인 것은 가치를 의무나 도덕으로부터 자유롭게 한 것 그 자체에 있는 것인가? 비록 새로운 가치를 발견해내지는 못했지만. 그렇다면 마루야마의 이런 논의는 모두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
겐로쿠元禄, 호에이宝永, 세이토쿠正徳, 교호享保에 걸친 즉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에 이르는 반세기. 도쿠가와 막부 정권이 확립된지 약 80여년. 국내적 무질서, 국제적 교통, 무역 등의 분위기를 타고 정치적・사회적 영역에서 현저한 활동을 보인 전국戦国시대 정신은 국내질서의 안정화 및 쇄국에 의한 대외발전의 차단 때문에 일시 완전히 침체되었다. 그러자 바깥으로의 출구를 봉쇄당한 국민적 에너지는 오로지 내면을 향하게 되었고, 거기서 눈부시고 품위있는 그림 같은 겐로쿠 문화를 펼치게 되었다. 5대 쇼군 쓰나요시綱吉는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의 첫머리를 문무충효文武忠孝를 장려하고 예의禮儀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하여 문치주의 색채를 드러냈고, 유시마성당湯島聖堂을 세우고 대성전大成殿 판액을 걸었으며, 하야시 노부아쓰林信篤에게 속발을 명하고 다이가쿠노카미大学頭로 임명했다. 다이묘, 하타모토, 유자를 모아놓고 경서를 강의하고, 토론을 벌이며, 학문과 교육을 융성하게 하는데 힘을 쏟았다. 소라이는 쇼군이 강의듣기를 좋아해서, 유학자들이 공부를 하지 않게 되었다고 비판했지만, 교학진흥책은 겐로쿠의 학문과 교육에 기여했다.(234-236) 자주성은 겐로쿠 학예의 특징이다. 진사이의 호리카와堀河학파나 소라이의 겐엔蘐園학파의 흥기도 이런 기운이 유학계에 반영된 것이고, 가학歌学에서 토다 모스이戸田茂睡, 승려 게이츄契沖(1640-1701)에 의해 귀족측 지향의 가학은 비판당했다. 순문학純文学에서는 하이카이俳諧의 마쓰오 바쇼松尾芭蕉가 단린談林학파에 대항하여 쇼후正風학파를 열었다. 단린학파 출신의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1642~93)는 얼마 후 우키요조시浮世草子를 창시하여 정치적으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된 조닌町人들이 물욕과 성욕을 추구하는 모습을 리얼하게 그렸다. 유곽과 더불어 조닌의 도피장소로 급속히 발전한 연극부문에서 조루리浄瑠璃 작가 지카마쓰 몬자에몬近松門左衛門(1653-1725), 가부키 배우로 간사이関西에서 사카다 도주로坂田藤十郎(1645-1709), 간토関東에서 이치카와 단주로市川團十郎(1660-1704)가 나왔다. 그림은 화단의 아카데미 가노파狩野派로부터 하나부사 잇초英一蝶(1652-1724) 같은 반항아가 출현하여 스승의 스타일이 갖는 질곡에서 벗어나 쇄탈한 풍속화를 그렸다. 풍속화를 조닌 예술로 확립시킨 우키요에浮世絵 판화의 시조 히시카와 모로노부菱川師宣(1618~94)와 고아미幸阿弥(1599~1651), 고마古満(?~1663) 등의 어용 마키에蒔絵 작가들과 경쟁하면서 조켄인常憲院시대 마키에의 명성을 높이 쌓은 오가타 고린尾形光林(1658~1716)도 모두 이 시대에 속한다. 모든 문화영역이 창조성이 흐르는 겐로쿠 디자인元禄模様에 표현된 화려하면서 섬세한 색채가 그 기본정신이었고, 문화적 제작의 융성은 생활에 대한 욕망의 향상을 전제로 하며, 그것을 가져다 주기도 했다. 이것이 에도・교토・오사카 대도시에 집중된 것은 조닌의 경제적 증대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겐로쿠적인 정신은 조닌사회의 화려함과 사치로 실천했다. 무사도 이런 풍속에 동화되었다. 소라이는 하타모토는 다이묘와 다름없고, 하타모토의 부하家来는 다이묘의 가신과 같은 격이라 젋은 하급무사도 그렇게 산다고 말했다. 겐로쿠(1688~1704), 호에이(1704~11) 무렵 유곽悪所은 번영해 마치 극락, 용궁 같았다. 위아래 환락의 소리가 저택邸과 거리에 가득차, 전국시대의 살벌한 분위기는 사라졌고, 막부 초기의 엄격하고 교묘한 다이묘 통치정책은 성공해서, 변경의 다이묘들도 정치적 야심을 에도의 향락생활에 녹여버렸다. 어정밀御精謐을 누리는 겐로쿠 시대는 문화적, 정치적 도쿠가와 막부의 최전성기였다.  (236-240)
어쩌면 아주 간단한 내용이다. 겐로쿠기 도쿠가와 시대가 시작한지 80년에서 100년으로 넘어가는 17세기말에서 18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일본 문화계는 다채롭고 자유로운 분위기로 가득찼다. 그리고 진사이학이나 소라이학은 모두 그런 자유스런 분위기에서 녹아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시대의 전체적인 분위기라는 것. 그런데 눈길을 끄는 점은 전국시대의 정신이 쇠퇴했다고 하는 지점이다. 도쿠가와 봉건체제는 외부로의 발전 가능성이나 다양한 시도가 봉쇄되었다는 지적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특히 일본사의 사학적 전개에 무지하기 때문에 이해에 한계를 느꼈다. 도쿠가와 봉건체제를 사회경제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하느냐가 이 부분이고, 이 부분의 논의가 소라이학의 탄생가능성을 평가하고, 뒷받침한다. 그런데 만일 이 부분에 대한 1940년대 역사해석에 대한통설이 틀렸다면.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사학자들의 견해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도쿠가와 사회는 사농공상의 신분적 분리와 계층관계의 고착화로 일본 봉건제도가 완성된 형태이나 동시에 무로마치室町(1336~1573) 말기 이래의 영주들의 분국 현상의 확대와 사무라이들의 조카마치城下町 집중에 의해 정치적 지배가 토지의 사실적 사용-수익 관계로부터 유리되어, 봉건제의 중요한 특질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봉토知行所를 갖는 무사는 봉토와 공조를 통해 관계를 유지했으나, 대다수의 하급 사무라이는 토지와의 연관성은 겐마이現米에 겨우 상징적으로 표현되었고, 막부가 성립된 후 화폐주조권의 독점을 필요로 만들었던 화폐경제는 방대한 봉건가신단이 조카마치에 집중됨으로 한층 더 진전되었고, 참근교대 제도의 확립으로 에도와 모든 번이 상품경제를 매개로 긴밀하게 얽히게 되었다. 무사들은 예전의 물권 중심적 생활에서 채권 중심적 생활, 이른바 소라이가 말하는 ‘여숙의 경계(旅宿の境界, 여관방의 문턱)’에 접어들었다. 생활이 물권에 기초하다면 정태적이나, 채권이 기초가 되면 동태적이다. 무사계급은 정태적 수입으로 동태적 지출에 대응해야 했다.(240-241)
일본 봉건제도의 완성기였던 도쿠가와 시대는 실상 봉건제의 근본이 무너지기 시작한 시기라는 지적이다. 상품경제의 등장을 오규 소라이는 ‘여숙의 경계’라고 표현했다고 하는데. 정태적 수입으로 동태적 지출에 대응해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건 실은 한쪽 면만 본 것이다. 중세 유럽의 봉건제가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를 띄었다고 평가해야 할는지 모르겠지만. 마루야마는 여기서 봉건제라고 하는 것은 토지와 봉건 가신인 무사의 연계를 기반으로 한 사회경제적 체제라고 하는 하나의 이상적인 체제 즉 이념형을 마음 속에 수립해 놓고서, 그런 체제가 수립되었다가 붕괴되었다는 식의 논의를 펴나가고 있지만. 일단 그런 형태의 체제가 중세 서유럽에 존재했는지 부터가 의문이며, 도시경제의 변화 등에 따라 어떻게 변모했는지도 의문이고. 실제 그런 체제가 존재하든지 없었든지 평가도 어려운 데다가. 과연 그런 이념형을 일본에 적용할 수 있는지도 문제가 된다. 일본 중세 봉건제의 가신단은 서유럽과는 다르다. 다를 수밖에 없다. 일단 그 숫자와 크기에서 차이가 난다. 일본의 가신단은 수가 많았고, 계층이 복잡했으며, 하급무사는 처음부터 땅이 분배되지 않았다. 봉건 가신단이라고 모두 토지와 연계된다는 생각 자체가 일본 경제발전이나 사회발전을 서유럽에 끼워맞춘 것이다. 실제로 신분제화된 거대한 상비군 조직이 일본의 가신단이었는데. 어디가 완성이고, 어디가 정점이며, 어디가 붕괴인지 평가하기 어렵다. 물론 화폐경제의 등장과 ‘여숙의 경계’가 탄생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유는 전시조식을 평시화 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면 모든 전시조직은 평시화하게 마련이다. 어떤 식으로 평시화하는지가 문제가 된다. 일본도 그 한 방식이다. 봉건 가신단의 규모를 줄이면서 관료화하는 방법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다. 화폐경제가 결국은 그 과정을 진행시킨 것이다. 이것 자체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전쟁을 통해서 거대하게 성장한 군사조직을 어떻게 평시화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막부의 재정 자체가 파탄났다. 이에쓰나家綱 말기 심각한 재정궁핍은 어쩔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1695년 하기와라 시게히데萩原重秀의 건의로 금은화를 다시 주조학는데, 화폐를 개악하여 조정의 기금을 늘리려는 것이다. 이는 막부말기까지 이용하던 미봉책의 첫시도로 도쿠가와 봉건제 해체과정에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이로 얻은 수익은 방만한 재정과 천재지변으로 날려버리고 계속해서 은화를 다시 주조해, 열악한 화폐가 시장에 넘쳤고, 물가는 뛰어오르고 막부 지출에는 역작용을 안겨주며, 무사 계급을 고달프게 만들고, 금화와 은화를 주조하는 어용상인과 그들과 결탁한 시게히데 등 재정담당 관리들만 부유해졌다. 금은화의 하락으로 동전 가치가 올랐는데, 이는 무사가 녹미를 금으로 이것을 다시 동전으로 바꾸어 사용했는데, 동전 가격이 오르는 만큼 일용품 가격이 하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708년 막부는 종래의 동전 10개에 해당하는 대전大錢을 주조했으나, 백성들은 강요해도 사용하지 않아, 다자이 슌다이太宰春台의 지적처럼 막부 권력의 한계만 보여주었다. 전례 없던 경제생활의 혼란 속에 5대 쓰나요시는 죽었고, 6대 이에노부家宣(1663~1725)는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1657~1725)를 기용하여 하기와라 시데히게를 배척하고 화폐의 품위 복구에 힘섰다. 하쿠세키는 재정감사관勘定吟味役을 부활하고, 나가사키 무역량 제한 등에 힘썼지만, 그의 공경적 예치주의는 막부 지출을 철저히 삭감하지 못하게 했다. 이에노부, 이에쓰구家継(1709~1716) 잇달아 갑작스럽게 죽으면서 8대 요시무네吉宗(1684~1751)는 교호享保의 개혁이라 불리는 도쿠가와 최초의 대규모 봉건제 보강 공작을 단행하여 재정을 긴축하고, 게이초慶長 시대(1596~1615) 금은화의 가치를 지닌 화폐를 새로 주조하고, 막부 지출을 삭감하고 검약령을 내렸지만, 이미 파탄난 막부 재정을 되살릴 수 없었다. 막부는 쇼군 직속의 하급무사御家人의 봉록 지불도 어렵자, 1722년 1만석이상의 다이묘들에게 수입의 100분의 1에 해당하는 아게마이上ゲ米를 부과하고, 막부의 기본정책인 참근교대에 따른 에도 체류기간을 반년으로 줄였다. 이는 ‘치욕을 돌아보지 않고 내놓은 것’으로 1730년 막부의 형편이 나아지지 않았는데도 상당한 기간 동안 시행되었다는 이유로 폐지되었다. 교호 초기의 풍년으로 쌀값은 폭락했지만 일반 물가는 올라 막부를 비롯한 일반 무사계급은 곤궁해졌다. 여러 대책이 소용없어지자, 1736년 막부는 겐로쿠의 악화를 주조하는 정책으로 돌아서, 건전한 재정 정책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시게家重(1711~61), 이에하루家治(1737~86)에 이르게 되면 타누마田沼 시대라는 겐로쿠보다 방만한 시기에 들어섰다. 이후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에 의한 간세이寛政(1788~1801) 개혁, 다시 분카文化(1804~18), 분세이文政(1818~30)의 교만하고 사치스런 시기 그리고 미즈노 다다쿠니水野忠邦(1793~1851)의 덴포天保 개혁으로 막부 정치는 시소처럼 방만한 시대와 긴축시대를 오가면서 막부 말기의 동란기로 접어든다. 겐로쿠와 교호는 우연히 근세 봉건사회의 하강기를 서로 번갈아 얽어가는 두개의 시대적 유형을 제시했다.(241-245)
결론적으로 말해서 막부의 재정정책 특히 화폐정책이 실패해서, 긴축과 방만한 재정을 반복해가면서 왔다갔다 했다는 것. 요약하면 그렇다. 악화의 발행을 거듭하면서, 그 과정에서 부를 축적하는 세력이 등장했다는 것. 하지만 악화의 발행은 그가 말했든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무사계급이 가난해진 것도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며, 원인은 거대한 경제적 변화로 보아야 한다. 막부가 악화를 발행하는 잘못된 재정정책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을까? 막부가 사치했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원래 막부의 재정기반이 튼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봉건 영주에 대한 토지분배 등으로 전국적인 과세, 즉 중앙집권화에 실패했거나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악화의 거듭된 발행은 임기응변 식으로 그런 현상에 적응해 나갔던 것 뿐이다. 이에야스라면 금리를 타도하거나 금리와 무가의 일원화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겠지만, 그 후에 누구라도 그런 시도도 하기 어려웠다.
막부의 재정적 궁핍 하타모토, 고케닌御家人의 궁핍은 막부와 경제적 기초를 같이하는 제후와 번사藩士들의 궁핍도 의미한다. 무사계급의 금융을 담당하던 쿠라모토蔵元, 가케야掛屋, 후다사시札差 등의 대한 의존성도 점점 강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 고리대자본은 화폐변동과 물가 등귀를 이용해 자기증식해 나갔으며, 쓰나요시의 토목사업과 재해복구 정책은 어용상인을 살찌웠다. 무가는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상인은 크게 이익을 얻어 무사와 조닌의 사회적 지위는 교호 무렵부터 뒤집히는 형세를 보였다. 다이묘 조차 부유한 상인이나 고리대자본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서로 도노殿라고 불러 구분하기 어려우니 무사의 위엄이 유지될 수 없었고, 조닌의 자의식은 향상되고 있었다.(245-247) 반면 조닌의 발흥이 가진 역사적 성격은 과대평가되면 안된다. 그들은 모두 봉건권력에 기생하는 사람들이었다. 새로운 생산방법을 만들어낼 힘을 결여한 상업=고리대자본이며, 폭리 자본주의wucherischer Kapitalismus의 성격이 농후했다. 그들은 봉건적 권력에 기생하면서 봉건적 권력이 수취하는 공조貢租를 직간접으로 빨아들이면서 생존할 수 있었고, 권력의 노여움을 사면 맥없이 무너지는 존재였다. 부유한 조닌들은 사치스럽고 호탕한 생활을 했고, 철저한 금욕생활도 훗날의 쾌락적 소비를 위한 것이었다. 조닌 들이 아직 중산계급中産階級(middle class)을 형성할 수 없었듯이, 조닌의 근성도 막스 베버가 말하는 자본주의 정신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영리추구란 불쾌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불가피한 것 정도로 취급되었다.(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김덕영 역, 80-82)(247-250)
일련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고리대자본이 등장한다. 그러나 마루야마가 보기에 이 자본주의란 산업 자본주의로 성장한다기 본다는 막스 베버가 말하는 후진적인 폭리 자본주의 형태라는 점이다. 이들의 정신은 중산계급을 형성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막스 베버가 남유럽이나 아시아를 비판하는 부분을 가져다 인용한다. 이 과정에서 신분제가 내부적으로 붕괴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도노殿라고 부르게 된다. 돈을 가진 신흥부르주아들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권력도 기반이 충분하지 않아, 언제든 누명을 뒤집어 씌우면 빼앗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였을까 조닌들, 부유한 조닌들은 자본을 축적하지 않고, 쾌락적 소비와 향락으로 탕진한다. 일반적으로 중산계급의 도덕 문제가 있었겠지만. 조금 의문이 든다. 실은 일본 자본주의 성숙 과정에서 서구 학자들이 주목한 것 중 하나가 통속도덕의 존재였다. 이시다 바이간石田梅岩과 세키몬 심학石門心学 같은 것. 이런 존재를 무시하고, 조닌의 쾌락과 타락만을 묘사하는 것 자체가 어떤 형태의 발전론의 특정 단계에 일본사를 끼워맞추는 해석은 아닐까. 예를 들면 이 부분에 대한 기술은 중세의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를 연상시킨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같은. 사실 여기서 내 눈길을 끈 건 중산계급이라는 표현이었다. Middle class를 1940년대 일본에서는 중산계급으로 말한 것인가. 현대일본에서는 흔히 중류라고 표현한다. 일억총중류 같은 표현이 그렇다. 중산이라는 번역어 자체가 강좌파의 영향인 걸까.
겐로쿠에서 교호로 이어지는 이 시대에 밑바닥에 봉건사회의 궁극적 지주인 농민들이 묵묵히 그들의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막부를 비롯한 봉건 영주들은 공조를 확보하기 위해 농민들의 일상에 개입하여, 의식주는 물론, 재배작물, 부부윤리에까지 간섭했다. 이런 규제의 목적은 연공年貢을 내기만 하면 백성들만큼 마음 편한 사람도 없다는 게이안慶安시대의 말이 있다. 연공만 다 내면 지토地頭나 다이칸代官의 간섭없이 이웃마을로 옮겨갈 수도 있다. 그러나 상품경제의 발전은 농민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우선 무사계급을 궁핍으로 몰아감으로써 공조 수취를 양적으로, 질적으로 강화시켰고, 농민의 자연경제를 분해하게 되었다. 소라이가 시골에도 돈으로 물건을 사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겐로쿠 이후 농촌이 상품경제에 말려들어, 겐로쿠 문화가 농촌에도 보급되고, 농민들의 생활 욕구가 상승하게 되었다. 강화되는 세금과 향상되려는 생활 사이의 마찰은 소라이에 의하면 지토와 백성이 서로 원수라고 할 정도로 영주와 농민 관계는 악화되었고, 상업자본의 농촌 침투로 토지도 화폐경제로 들어가, 매매금지인 논밭도 탈법행위에 무너지고, 토지겸병과 영세화가 진행되었다. 내몰린 농민들은 잇키一揆를 통해 타결하려 시도했다. 농촌 상태가 치명적으로 악화된 것은 호레키宝暦 무렵이지만, 겐로쿠-교호는 분수령으로 교호 년간의 잇키 증가는 비약적이었고, 농민들 사이에 마비키間引き(영아살해)도 널리 행해졌고, 인구도 감소했다.(250-253)
마루야마를 비판할 수 있을 정도로 현대의 일본 역사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여기서는 단지 봉건사회의 붕괴만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일본 경제는 17세기 초부터 계속해서 붕괴해야 한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 도쿠가와 성립기에 비해 100년이 지난 바로 이 겐로쿠 기에 일본의 인구는 두 배가까이로 성장한다. 그 배경에는 농업생산의 비약적인 증가가 있다. 그런 농업생산의 비약적인 증가가 겐로쿠 문화나 이런 자본주의적 성장, 특히 상공업의 성장을 뒷받침해 온 것이다. 상품경제의 성장은 원인이 아닌 결과로 그 배경에는 농업생산의 비약적 성장과 장기간의 평화의 지속이라는 배경이 있었다. 상품경제의 성장으로 봉건 사회 시스템에 금이 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게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시에 문화가 꽃피게 된 것 자체가 경제적 성장에 배경을 두고 있다. 그러나 겐로쿠 이후에는 또 여러가지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는데. 좀 더 섬세하게 나누어서 평가할 필요가 있다.
겐로쿠에서 교호의 사회적 상황은 전환기적 현상이다. 화려한 겐로쿠 문화의그늘에서 소극적인 부식과 적극적인 반항에 의해 봉건적 권력을 위협하는 모멘트들도 아직 강력하게 자라지 않았다. 도쿠가와 봉건사회는 최초의 커다란 동요를 경험하면서 전체로서는 건전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소라이로 하여금 유교를 정치화시킨 사회적 계기는 거기에 있었다. 지배층의 정치적 사유의 우위는 일단 안정된 사회, 사회적 질서에 대한 낙관주의로 일어날 수 없다. 사회적 변동에 의해 지배적 사회계층의 생활 기초가 흔들릴 때, 정치적인 것das Politische이 사유의 전면에 나타난다. 다른 한편 사회가 혼란하고 부패하면 정치적 사유는 모습을 감추고, 도피, 퇴폐, 은폐가 만연해 진다. 이 두 중간의 한계상황Grenzsituation에서만 현실을 바로보는 진지한 정치적 사유는 존립할 수 있다. 소라이는 바로 그런 상황에서 성인의 도가 이 세상 정치와 전혀 별개의 것처럼 사람들에게 생각하게 한 주자학의 낙관주의를 부정하고, 유교의 정치화를 통해 이 세상 정치의 철학적 기초로 삼으려했다. 소라이학 자체가 봉건사회를 동요시킨 문화적 요소[겐로쿠 문화]를 그 사적 측면에 강하게 새겨놓지 않을 수 없었다.(253-254)
마루야마 마사오를 평할 때 흔히 강좌파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 부분을 읽다보면, 분명히 그런 느낌이 든다. 그렇다고 독일의 국민경제학파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 또한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일종의 위기이지만, 아직 붕괴는 아닌 특정한 시점에서 정치적으로 꽃핀다는 생각인데. 이건 분명히 서유럽의 르네상스 시기를 상정해 놓고, 그와 비슷한 발상을 한 것이다. 일부 과도기적 상황에 대한 평가에 대해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혼란하고 부패하면 정치적 사유가 모습을 감춘다는 식의 작위적인 한계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럴때 오히려 정치적이고 새로운 사조가 싹튼다. 일본의 경우 19세기가 18세기보다 훨씬 다양했다. 마루야마가 이런 식의 해석에 매달린 것은 그가 도식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혔기 때문이고, 특히 토대에 의한 상부구조의 결정이라는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제약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영어판 서문에서 그런 부분을 비판하고 있지만. 그는 사회경제적 토대와 정치적 사유의 일종의 조응관계를 정교하게 조율하면서 산출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산출이 옳다고는 말할 수 없겠다. 일종의 소라이를 위한 변명처럼 들리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이런 사회적 상황을 눈앞에 둔 소라이가 그린 치국평천하에 학문을 적용한 정치사회조직의 개조론을 살펴보자. 우선 자신의 방법론을 현실사회에 적용하여 봉건사회가 처한 난국을 이론적으로 분석했다. 그래서 무사계급이 곤궁한 연원과 원인에 도달했다. 근본적 원인은 첫째, 위아래를 막론하고 모든 무사가 ‘여숙의 경계’에 접어들었다. 젖가락 하나도 구입. 둘째, 모든 일에 제도가 없다. 즉 수요가 무제한. 원인으로 첫째, 가격이 너부 비싸다. 둘째, 금은의 양이 줄었다. 셋째, 빚이 길을 막고 있다. 그 대책으로 우선 긴급한 원인을 제거하고 근본적인 개혁으로 간다. 먼저 풍족하게 해주는 것이 근본으로 동전을 주조하는 일종의 통화팽창정책이다. 한편, 무사에게 봉토를 주어 토착시키고, 호적을 만들어 인구이동을 통제하고, 제도를 확립하여 신분에 따라 욕망을 구제하고 자연경제로 되돌아감으로 상업자본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려 한다. 무사와 농민의 대립도 완화될 것이다. 제도의 확립은 예악에서 도를 찾은 소라이의 철학이다. 법가적인 입장은 아니며 어디까지나 인정에 의한 것이다. 풍속에 맞지 않는 일을 강제해서는 안된다. 제도의 변혁도 사람에 달려있다. 법보다 사람이 중요하며, 기질이 바뀌지 않기에 개성을 발휘할 수 있게 등용해야 한다. 이런 정치사회개혁론은 복고적이다. 그러나 그가 유교적이라고 할 수 없는 방향으로 원시 유교를 기초지우려고 한 것처럼, 원시 봉건제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정치사상 속에 정치적 집중의 요소가 잠재되어 있다. 절대주의적 관념의 맹아가 나타난다. 막부의 여숙성, 쇼군도 여숙에 있으나 온천하가 그의 영지이니 그는 일본 전체의 소유자라고 하여, 각 번에 강력한 통제력을 지니되 가장 거대한 봉건영주라는 도쿠가와 막부의 정치형태와는 모순적으로 평가한다. 막부에서 필요하면 징수하면 될 일이로 아게마이도 정당화한다. 다이묘는 30만석을 한정시킬 것도 주장한다. 막부 절대주의 아래에서 평균화 지향이었다. 소라이는 제도적 변혁에는 겐로쿠 무렵이 가장 적당하다고 교호는 늦었다고 보았다. 소라이가 본 교호 시대는 위기의 시대였다. 사람들이 교호의 중흥을 노래할 때, 소라이는 황혼의 그림자를 읽어낼 수 있었다. 그는 봉건사회가 낳은 최초의 위대한 위기의 사상가였다.(255-259)
마루야마의 소라이론이 봉착하게 되는 곤란은 소라이의 해결책이나 대안이 원시 봉건제에 가까운 자연경제론에 봉착한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논의는 꽤나 소극적으로 변해 버린다. 그러면서 이런 형태의 방식이 보다 인정론에 가까운 법가적이지 않고 유교적인 해석이라고 하는데. 애초에 인정이라면 실은 상업주의 쪽이나 상품경제 쪽이 훨씬 더 인간의 본성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제도라고 해서 제시하는 것이 외려 고대 원시유교적인 발상이 나오는 것은 소라이 유교적 한계 안에서 아직 머물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제도로 강제력을 동원해서 돌아갈 수 있다는 해석을 절대주의라고 본 것에는 많은 사람이 동의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장 자크 루소의 코르시카 헌법론에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루소가 혁명적으로 제안해서 동의한 헌법은 결국 모든 농민이 자기 토지를 가지는 경작자들의 민주정이었다. 아마도 마루야마가 여기까지 이해하고 있었더라면 소라이를 훨씬 더 적극적으로 해석했었을런지도 모른다. 실제 혁명가들의 사상이 자연법을 되살리거나 상품경제를 부정하고 고대적인 농업사회로 돌아가자는 식으로 전개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런 사람들이 근대적이라고하는 것은 그런 사회를 만들어내는 사회적 합의의 형성방식이 근대적이어서 그렇다. 그런 사회를 만들어낼수 있다는 상상. 그렇기 때문에 마루야마는 소라이에게 집착했을 것이다. 정치적인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상상이 소라이에게 있었다고 마루야마가 평가한 점이다. 마루야마는 소라이가 성인을 상상하거나 상정하고 있다고 믿었다고나 할까. 무엇보다 마루야마에게 소라이가 두드러진 것은 근대 일본의 천황제가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일본의 지배구조는 자연스러움에 뿌리밖고 있다. 근대초극론도 그 뿌리가 자연스러운 것이다. 태양신의 자손이 천황이 되어 3000년간 그 후손이 계속해서 다스리는 그 나라의 통치의 자연스러움을 깨트릴 수 있는 인위적인 정치가의 도래를 꿈꾸었을 수 있다. 그가 만들어낸 세상이 그저 자연적 농업경제일지라도. 그러나 농업이 자연스러운 만큼 상품경제도 자연스러운 것인데.
소라이가 여러가지 주장을 했지만,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뜨이는 것 중 하나가 ‘아게마이’를 변호한 것이다. 애초 쇼군 요시무네는 ‘아게마이’를 징수하면서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하고, 참근교대를 완화해 주었다. 그러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게 된다. 도쿠가와 막부가 여러가지 측면에서 국가로서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결정적으로 이 과세권이 봉건제의 연공 제도에 의해 제한되어 있었다. 초기에는 다이묘를 이리저리 옮기기도 하고, 감봉을 해서 영지를 빼앗기도 했다. 나중에는 이런 일들이 어려워지긴 했지만. 소라이는 여기에 덧붙여 다이묘를 소규모화해서 중앙에 대항할 수 없도록 해야한다고 했는데. 이 역시 중요한 주장이다. 소라이는 쇼군이 중앙집권화를 시도할 수 있다고 평가한 것이다. 아마도 이런 주장들에서 das Politische의 가능성을 본 것이겠지. 문제는 전환의 논리나 전환과정의 정당화를 선왕의 도로 내세운 것이지만. 그것을 어쩌면 알기 어렵게 조심스러운 방식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훗날 그 정당화의 논리는 존왕론에서 나오게 된다. 대정봉환大政奉還이나 판적봉환版籍奉還을 통해, 중앙집권화를 이룸과 거의 동시에 무사계급은 몰락하게 된다. 그들은 자기의 손으로 자신의 목을 조를 것인데. 그 전환의 논리가 존왕론이었다. 금리의 권위를 내세우는 이 사상은 유교의 영향은 물론 수많은 학설의 집합인 동시에 무능한 도쿠가와 정권에 대한 미움의 표출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군주는 근대적인 군주라기 보다는 일본 신화의 정통성에 근거한 군주였다. 이 기묘한 자연스러움의 연결과 정치란.
반면, 소라이의 정치론은 실천을 전제로 하지 않았고, 특히 학자의 정치 참여를 전제로 하지 않았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제도의 실천은 훗날의 성인에게 맡겨야 하며 직접적인 실천을 회피했고, 어디까지나 조언하는 형태로 막부에 제출되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런 조언을 받아들이도록 여론을 모으지도 않고 어디까지나 탄식할 뿐이다. 상소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소라이 자신은 요시무네의 이야기상대였다고는 하나 정치적 영향력은 평가하기 어렵다. 하쿠세키와는 완전히 달랐다. 이런 상황에서 성인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부여한다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일본 정치의 정당성이 점차 금리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일종의 반발인 것인가. 쇼군이 나서기만 하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인가. 소라이가 금리에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재미있다. 실제 권력이 없는 금리는. 마루야마가 주목한 것은 소라이가 제도 만들기에 대해 언급했다는 것이다. 예악이라는 형태로 이 제도가 주대의 봉건제나 고대의 선왕의 예법이 아니라, 일본의 전통적인 농업사회로의 복귀라서 이를 선왕의 도라고 이름붙이기는 했으나 실은 꽤나 일본적이다. 따져볼수록 여러가지 의문점이 남는다.
밑바닥에 깔린 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궁금증은 실상 이런 것이다. 소라이는 왜 학문론과 정치론을 주장했는가? 소라이는 선왕의 도를 왜 주장했는가? 실상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기 위해서 주장한 것은 아닌가. 이미 지난 교호에 했어야 했다는 탄식은 지금은 이제 시대가 지났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는 의미는 아닌가? 훗날의 성인을 기대한다는 주장 말이다. 말하자면 내가 가지고 있는 의심은 소라이의 시대 그것도 하쿠세키의 의한 유교적 개혁이 요시무네의 등장으로 완전히 뒤집어진 그때, 물론 그는 하쿠세키 식의 주자학적인 개혁에는 반대였다. 키슈 도쿠가와가 출신인 요시무네의 등장은 유학자들에 의한 개혁 또는 그 입김을 제거하고, 무가의 방식으로 돌아가겠다는 시도였다. 그때 유학자들은 현실 참여를 하지 않을 핑계가 필요했던 것이 아닌가. 소라이학이란 학자의 자세를 유지하면서 현실 참여를 하지 않는, 유학과 정반대의 방식으로, 자신의 현재를 교묘하게 옹호하는 학문의 자세이고, 학문은 유지하되, 현실에는 참여하지 않아서, 자신의 명성과 목숨을 보존할 수 있는 바로 그런 방법과 길을 소라이가 연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궁금증이 소라이에 대한 글을 읽을수록 계속해서 생겨난다.
이 글을 쓰는 오늘 일본에서 2025년 오사카만박을 유치했다는 소식이다. 2020년 도쿄 올림픽에 오사카만박이라니. 대규모 이벤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아베 정권이 얼마나 퇴행적 사고를 반복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1964년 도쿄 올림픽과 1970년 오사카 만박의 재현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지만 그것은 그저 쇼와 시대 고도성장에 대한 옛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일 이상이 될는지 모르겠다. 그것보다는 소라이가 더 근대적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 읽어나갈수록 마루야마의 소라이론이 어떤 아슬아슬한 경계를 걷고 있는지 조금씩 이해할 수 있다. 아주 잠깐 짧게만 존속할 수 있는 변곡점 그 변곡점에서 소라이학이 탄생했다는 것은 실상 마루야마가 헤겔 류의 진화론적 사관과 역사발전론에 얼마나 함몰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만일 조금이라도 더 봉건사회가 붕괴했다면, 소라이학의 자연주의와 농촌경제론은 퇴행이라고 비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억지로 아직 덜 붕괴된 상태였다고 강변하는지도 모른다. 그가 이런 발전론에 사로잡히지 않았더라면, 소라이를 훨씬 더 적극적으로 해석했을 수 있다. 자연주의 경제로의 회귀에 얽매이지 않은 채로. 왠지 요즘은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이 남아 있는 사회경제적 원인을 중시하는 글을 보면 반갑다. 2010년대에 쓰여진 책들은 경제적인 문제 역사적인 문제를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정치일면적인 글들이 적지 않다. 일본은 아마도 1970년대가 변곡점인 것 같다. 전쟁 체험 세대에서 전후 세대로 사회 주축이 변화하던 그래서 요즘은 그 이전의 역사서들이 훨씬 솔직하게 한계를 인정하는 점을 매력적으로 보고 있다.

1장 4절 국학 특히 노리나가학과의 관련성: 소라이학의 보급과 거기에 대한 반발-겐엔학파의 분열-소라이학 이후의 유학계의 쇠퇴-국학과 소라이학의 부정적 관련-그 사유양식의 공통성-적극적 관련의 다양한 모습-관련의 총괄 및 국학의 사상사적 위치
소라이학은 당시 사상계에 큰 공명을 가져왔다. 그 흡인력은 수백명을 포용하는 겐엔蘐園학파를 성립시켰다. 다자이 슌다이太宰春台(1680~1747), 야마가타 슈난山県周南(1688~1732), 핫토리 난카쿠服部南郭(1683~1759), 히라노 긴카平野金華(1688~1732), 안도 토야安藤東野(1683~1719), 우사미 신스이宇佐美伈灊水(1710~66) 등 일류 재사들이 포함되어 사회적인 면에서 소라이학의 황금기는 오히려 그가 죽은 후였다. 교토에서 성행한 것은 소라이가 죽은 후 겐분元文(1736~41) 초기부터 엔쿄延享(1744~48), 간엔寛延(1748~51) 무렵까지 십이삼년간 절정에 이르러 朱注에 『논어징論語徵』을 섞어서 가르치는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260-261) 소라이가 살아있는 동안은 소라이학에 대한 공격이 크지 않았는데, 이는 반대파와도 교류했던 소라이의 태도 덕분이다. 18세기 중반이후 소라이학을 공격한 저서만 30여종이 넘었다. 그러나 이런 비판서들도 구태의연하거나 소라이학을 공격하면서 소라이적인 사유방식에 의거하고 있었다. 소라이학을 포함한 모든 유학을 비판했던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1776~1843)는 소라이를 비판하는 유학자등은 소라이의 영향을 받았기에 소라이의 잘못을 찾아낼 수 있으며, 소라이는 오늘날 대부분 유자의 시조라고 평가한다.((262-263) 겐엔학파의 유성기에 이미 분열이 진행되고 있었다. 소라이가 유교를 정치화함으로써 도리어 비정치적 계기가 내부에 도입되는데 이를 공・사의 분기로 설명했다. 경학과 견문을 넓히고 사실을 행하는 행하는 것인데. 詩文이나 歷史는 모두 사적인 측면을 형성하게 되었다. 고문사학은 원래 선왕의 도의 방법론이라는 임무를 담당하고 있으며서도, 어느새 문사文辞의 고증적 연구 자체가 목적이 되어 있었는데, 이는 소라이학의 역사의식이 촉발시켰다. 성인과 성인의 도가 절대적이기에 이런 공・사의 분기는 도의 나뉘어짐으로서 체계적 통일성을 지니게 되었다. 이런 체계적 통일성은 소라이의 박학다식을 통해 인격적 통일성을 가지게 되었다. 소라이학의 분열은 인격적 분열로 표면화되었다. 소라이의 공적인 측면을 담당하는 사람은 다자이 슌다이와 야마가타 슈난 등이며, 핫토리 난카쿠, 안도 토야, 히라노 긴카는 사적인 측면을 계승하게 된다. 치국평천하의 학문과 시와 문학・역사・고증학이 별개의 인격에서 추구된 결과 소라이학의 이론적 통일성도 파괴되었다. 그들은 각자 자기 영역을 절대화하고 다른 영역을 무시했는데, 슌다이는 고문사를 즐기는 것을 더러운 것이라 매도했고, 난카쿠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한 관심을 헛된 논의라고 일축했다. 겐엔의 대다수는 경학이 아닌 난카쿠 경향을 따라가고 있었다. 소라이학에서 보이던 진지한 위기의식은 사라지고 부박한 문인취미만 남았다. 난카쿠가 가지고 있던 발랄한 창조성은 후대에 사라지고, 이우린李于鱗, 왕원미王元美의 문사를 맹목적으로 모방하는 등 학문적으로 예술적으로 하강세를 보여, 분세이文政 연간(1818~30)에는 서예와 그림 따위 잡기를 즐기며 방탕하게 노는 무리라 불리게 되었다. 이미 겐엔 초기의 문예 취미와는 달라져 분카, 분세이의 말기적 퇴폐 정신과 통했고, 이는 소라이에게 직접 배운 제자들은 이미 떠난 후였다. 겐엔학파도 덴메이天明(1781~89) 무렵을 경계로 사상계의 헤게모니를 급속하게 상실했다. 소라이학은 반소라이학이나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의 간세이 이학의 금寛政異学の禁이 아니라 겐엔학파 스스로에 의해 무너졌다.(263-266).
소라이학의 분열과 몰락의 원인은 소라이 자체에 있었다는 것이 마루야마의 주장이다. 소라이 학파가 둘로 분열하고, 그 중에서 사에 관심을 가진 난카쿠 류가 가장 크게 성장했고, 그 결과 어떤 전망도 제시하지 못하고 몰락했다는 것인데. 그게 과연 공・사의 구별에서 생긴 문제인지는 정말 의문이 든다. 거듭 말하지만 공・사의 구별이 생긴 이유는 학자들이 생존하기 위해서다. 사적 영역이야말로 그들이 존립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었다. 거꾸로 이들의 정치적 제안이 사라진 이유는 위기가 오지 않아서다. 소라이학은 위기학문이라고 마루야마 마사오는 끊임없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도쿠가와의 평화와 번영은 소라이 이후로도 백수십년을 이어졌다. 연속되는 태평성대에 학자들이 시문으로 흐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위기의 학문이 위기가 없을 때 어떻게 존속할 수 있겠는가.
소라이학이 분열・퇴폐해가고 송학이 고학파에서 입은 상처회복에 고심할 때, 유학계에 이노우에 긴카井上金峨, 야마모토 호쿠잔山本北山, 가메다 보사이亀田鵬斎, 호소이 헤이슈細井平洲, 가타야마 겐잔片山兼山, 요시다 고오톤吉田篁暾, 미나가와 기엔皆川淇園, 오타 긴죠太田金城 등 절충학파가 등장했다. 이들은 학파라 하기에도 잡다하나 공통적으로 당파적 편견을 배척하고 자기 학설의 장점을 취해 단점을 보완함으로써 중정의 도를 추구하고, 광범한 고증적=문헌적 섭렵을 통해 이를 뒷받침하려는 자세에 있다. 이들은 반소라이학적 색채가 깊었으며 동시에 소라이학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절충은 어디까지나 절충이지 창조를 의미하지 않았다. 이런 절충성은 소라이학 이후 유학계의 공통되는 경향이다. 주자학도 그 사유방식이 사회적 적합성을 잃어버리고 있는 이상 순수한 주자학에 머물수 없었다. 당시 부진하던 주자학파의 하나인 카이토쿠도懐徳堂 일파의 학풍은 1대 학주 미야케 세키안三宅石菴의 경우 그 학설의 절충성 때문에 야학문鵺學文이란 평가를 받았다. 이런 절충 경향은 교호 후반 서민층에 보급된 세키몬 심학石門心学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심학의 기반은 송학이지만, 송학의 배타성은 사라지고, 신도와 타협하고, 불법과 유도가 서로 다르지 않다고 말하면서, 인정을 행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어떤 법도 버리지 않고, 어떤 법에도 사로잡히지 않으며, 개인수양에 도움이 된다면 모두 받아들이는 태도로 밀고 나갔다. 소라이학은 성인의 도의 순수성을 유지하면서 어떤 영역에서 다른 사상을 용인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심학의 내용 그 자체에 잡다한 사상계통이 흘러들어 단순하게 뒤섞인다. 심학은 통속도덕으로 널리 대중화되었지만, 이론적 가치는 절충 고증학파에 미치지 못했다.(267-269) 이런 절충성은 근세 일본의 유교가 이미 독창적 발전을 멈추었다는 것으로 후지와사 세이카에서 시작된 근세 일본 유교 사상은 소라이에게서 절정과 마침표를 찍었다.(269)
그리고 절충학파가 등장한다. 학파라기 보다는 절충적인 경향이 대세를 띄게 된다. 그런 경향들 속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세키몬 심학이다. 일본의 여러 사상적 경향 중에서 전문가인 학자들에게서 가장 홀대를 받은 것이 바로 이 세키몬 심학이다. 확실히 정통사상적 측면에서 그 가치를 평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반면, 마루야마도 지적했듯이 개인수양과 통속도덕이라는 두 개의 주제는 오늘날 일본을 자기개발서의 대국이라고 부를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다. 서구의 그리스도교가 상층부의 교의와 하층부의 통속 신앙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일본 사상의 하층부나 종교적 심성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이 통속도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의 통속도덕에 지금보다 훨씬 더 큰 관심이 주어져야 한다.

국학国学the National Learning이란 참 흥미로운 이름이다. 토다 모스이, 승려 게이츄, 카다노 아즈마마로荷田春満, 카모 마부치加茂真淵(1697~1769). 이 글에서 과제인 국학이란 카모 마부치에 의해 발전되고,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1730~1801)에 의해 완성된 일련의 사상 계열을 말한다. 이 국학의 형성에 소라이학 역시 기여했다. 여기서 마루야마는 개개의 국학자에게서 그 영향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주자학적 사유양식의 분해과정이 국학이라는 하나의 정리된 사상의 형성을 어떻게 내재적으로 준비했는가 그리고 그 결과 양자는 어떠한 구조적 연관성을 가지는가 하는 점이다.(269-270) 이런 영향 내지 관련성은 의식적인 그것에 한정시켜서는 안된다. 발흥기 국학은 유교에 대한 철저한 대립자로서 자신을 자리매김했고, 국학의 계보에서 어떤 유학파로부터의 영향도 준엄하게 거부했다. 국학이 스스로 고학古学이라고 했기에 유교 고학파에서 유래한다는 비평이 제기되기도 했으니 국학자들은 고학파와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고 강조해야만 했다. 노리나가는 『ある人のいへること』에서 고학은 고문사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게이츄가 열었다고 말했다. 국학자들은 적극적으로 겐엔학파를 유교 공격의 목표로 삼았으며, 다자이 슌다이가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마부치가 고도古道를 천명한 『国意考』의 주제는 슌다이의 『弁道書』에 대한 반박이며,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1776~1843)도 『弁道書』를 공박하는 『呵妄書』로 사상계에 등장했다. 노리나가는 특별히 슌다이나 소라이를 겨냥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중화 숭배 사상에 대한 공격은 소라이학을 염두에 둔 것으로 그가 『くずばな』에서 논쟁 상대로 삼은 이치카와 가쿠메이市川鶴鳴는 겐엔학파 유학자였다. 이런 점은 국학과 소라이학의 관련성을 부정하기는커녕 유사성을 보여준다. 마루야마는 헤겔을 인용해서 소라이학은 유대인들이 구원의 문 바로 앞에 서 있기 때문에 거꾸로 가장 배척받는 존재가 된 것과 같다고 말한다.(271-272) 카모 마부치는 다자이 슌다이의 제자 와타나베 게이안渡辺蒙菴에게 한학을 배웠고, 핫토리 난카쿠와 가까웠다.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겐엔과 직접적 인적 교류는 없었지만, 그가 유교적 소양을 배운 호리 게이잔堀景山은 소라이와 편지를 주고 받던 사이였고 리가 비어있다거나 문자의 원래의 뜻이 중요하다거나 성인과 예악을 천자 즉 정치적 성격을 강조하는 그의 사상은 소라이에 가까웠다. 그는 욕欲을 인정人情이라하며 엄격주의를 비판했다. 주주朱注 시를 보는데 정확하지 않다면, 주자학적 예술관에 반대했다. 시란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표현한 것, 와카는 사람의 마음에서 싹트는 것이라며, 예술을 윤리로부터 해방시킬 것을 주장했다. 소라이학과 국학의 직간접적 인적교류는 양자의 실질적 연관성을 강화시켜주는 계기였다.((272-275) 주자학의 도는 천지자연의 리에 기초를 두고, 천지를 관통하고 사회와 자연을 포섭하며, 규범이자 법칙이고 당위이자 존재인 포괄적인 도였으나, 소코・진사이・엣켄 등에게서 연속적 사유의 분해과정을 통해 그 속의 계기들이 독자화하고, 인도는 천도로부터, 규범은 본성으로부터, 당위는 자연적 존재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분리를 가장 정밀하게 이론화한 진사이에게서도 도는 이데아로서 여전히 선험성을 띠고 있다, 소라이에서 비로소 도 자체의 궁극성이 부정되고, 성인이라는 인격, 피안적인 존재에 의존하게 되었고, 도는 절대적인 보편타당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도는 천지자연도 이데아도 아닌 성인이 만든制作 것이기 때문이고, 도로 하여근 도이게 채주는 것은 리가 아닌 권위였다., 홉스는 권위가 법을 만든다고 말했다. Autoritas, non veritas, facit legem. 권위를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도의 진리성을 설득할 수 있다. 성인을 제거하면 성인의 도가 무너진다. 고대 중국이라는 역사적 지역적으로 제약된 인격이 창조한 도가 존중할 가치가 있는가. 국학자들이 그 점을 예리하게 지적했다. 마부치는 중국 땅唐國의 유학자들이 사람이 만든 보잘 것 없는 그런 것을 만들었다고 비판하는데, 성인의 역사적・일회적인 제작이라는 소라이학의 입장이 유교비판의 출발점이다. 노리나가는 성인이란 위력과 지략으로 다른 나라를 빼앗아 빼앗기지 않도록 다스리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만든 것이 도이다. 정치적 목적에서 도의 본질을 찾으면서 그 내용에 있어서 소라이학을 완전히 뒤집는다. 성인의 만든 것作爲이기 때문에 절대적이던 것이, 같은 이유로 배격당한다. 그들은 게이츄 이래에 일본의 고전에 대한 연구를 통해 유교도덕과 고대정신 사이의 괴리를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유교 비판의 방향성을 결정해 준 것은 소라이학이다. 이것이 소라이학과 국학의 부정적 관련성이다.(275-278) 여기서 소라이학의 사상적 순수함이 중요하다. 근세 추기 유교의 배불론은 신불습합에서 신도를 해방시켜 유교와 연결시키려 시도했다.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그런 시도의 싹이 있고, 하야시 라잔은 신도와 유교의 합일을 기도했다. 그는 주자 철학에 입각한 리당심지理黨心地 신도를 수립했다. 야마자키 안자이의 스이카 신도垂加神道는 송학적 범주에 의해 『일본서기』를 해석 또는 왜곡한 것이다. 종래의 신도 중 하나로 이세 신도를 중흥시킨 와타라이 노부요시度会延佳는 신도와 유가를 일치시키는 태도를 취했다. 막부 신도의 담당자 요시카와 고레타루吉川惟足도 理學의 신도라는 이름의 타협성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소라이학의 출현은 신도와 유교의 결합을 차단시켰다. 고문사에서 드러난 성인의 도를 절대시하고 후세의 왜곡과 혼입을 엄밀하게 배제한 소라이는 신도의 존재 그 자체를 완전히 부정했다. 그럼에도 성인의 도의 역사적・특수적 발현을 승인해서 신도는 존재하지 않으나 귀신은 숭상해야 하며, 일본의 신을 존경하는 것이 성인의 도라고 말했다. 공적인 측면을 받아들인 다자이 슌다이는 소라이의 신도 부정을 철저하게 밀고 나갔고, 슌다이는 신도를 칸나기巫祝의 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유교의 지배적 흐름을 이루던 겐엔에게 내몰린 신도는 독자적 입장을 구축해야 했고, 국학자들은 구신도旧神道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고, 국학자들의 고신도古神道와 소라이학은 신도와 유교의 결합에 대해 공동전선을 펴게 되었다. 노리나가는 후세에 신도라는 부류가 주장하는 것은 모두 유불이 만들어낸 것으로, 소라이가 신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지적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말했다. 다자이의 신도자들이 말하는 신도는 유불이 말하는 것을 부러워해서 만든 것이라는 주장도 옳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소라이와 슌다이는 진정한 신도가 있다는 사실은 모른다고 비판한다. 그들은 중국漢国만을 존숭하고 일본皇国을 천박하게 여긴다며, 일본의 신전神典을 보면서 그 신도가 외국의 도보다 뛰어나고 참되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비판한다. 물론 소라이 중국을 가장 훌륭한 곳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소라이학의 사상적 순수함이 신도론神道論을 통해 소라이학과 국학을 부정적으로 매개하고 있음은 분명하다.(278-281)
마루야마에 따르면 국학 여기서는 노리나가학은 소라이학을 부정적으로 매개한 사상적 발전을 통해 등장한 것이다. 즉 국학, 노리나가학이란 소라이학까지의 모든 사상적 발전에 근거하고 있다. 물론 이들은 개인적으로 소라이학과 완전히 무관하지 않다. 주자학에서 소라이학에 이르기까지 그 연속성은 철저하게 해체된다. 그런 해체 속에서 소라이학은 성인이라는 개인적 인격에 의존하고 있지만, 마부치와 노리나가는 그런 성인 마저 중국인이고 정치적 변동과정에 있었던 사람이라면서 부정한다. 이들은 소라이에 근거해서 소라이까지의 모든 유교를 비판한 후, 다시 소라이까지 비판했다는 것이다. 이를 부정적 관련성이라 한다. 신도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앞서의 유학자들은 신불을 분리해서 신도와 유교를 연결하려 시도했다. 주자학의 해체과정과 비교하자. 그러나 소라이학은 당시의 신도를 모두 부정한다. 그러면서도 소라이는 일본의 귀신을 존경하는 것은 성인의 도라고 말한다. 이것 역시 성인이라는 개인적 인격의 절대화와 비교하자. 소라이나 슌다이 모두 신도는 유불의 영향을 받은 것, 유불의 흉내를 낸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므로 신도를 배격한다. 그리고 노리나가는 여기서 출발해서 지금까지 신도旧神道를 모두 배격한 후, 새로운 신도古神道를 주장한다. 그것은 일본의 고대 전적인 신전神典에 근거하는 것이다. 마루야마의 노리나가 해석은 노리나가와 당시의 일본의 다른 사상가들을 수평적으로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소라이까지의 일본 근세 정치사상의 발전의 연속성 상에서 그 결정적인 전복으로 노리나가를 평가하는 것이다. 자신이 헤겔에 대한 마르크스와 같은 심정이라고 말한 것이 그와 같았다. 항상 문제는 마루야마아 서양 정치사상의 발전을 정교하게 개념화하고 일본 정치사상을 그에 끼워맞추는 데 있다. 물론 그가 직접적으로 노리나가를 마르크스에 비견한 적은 없지만. 부정적 매개의 계기가 바로 헤겔의 언어라 더 그렇다. 지금에와서는 노리나가를 차라리 유럽의 낭만주의와 비교하는 것이 낳을 듯 싶은데. 어떨지 모르겠다. 헤르더라던가.

근세 초기 송학적 사유가 신도의 밑바닥에 깔리게 될 때, 신도는 범신론적 아니 오히려 범심론적Panpsychismus 구성을 가지게 되었다. 라잔의 理當心地 신도, 와타라이 노부요시의 신, 작은 먼지에도 혼이 깃들어 있다는 구니노토코타치노미코토国常立尊로서 요시카와 고레타루의 신 모두 범신론적 성격을 띄며, 인격신을 말하고 있다해도, 비인격적 리와 연속적으로 파악되고 있다. 가장 비합리적・종교적 색채가 짙은 스이카 신도까지 마찬가지다. 이에 대해 고신도古神道의 이론구성을 보자. 마부치가 유교의 좁은 고토와리理를 배제하자 자연이 세계의 가치 기준에 놓이고, 도의 근거를 비인격적인 것에서 찾는다. 노리나가에서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는 『古事記』의 용례를 통한 귀납에 근거하여, 고전에 나타난 인격신은 물론 무엇이든 평범하지 않고 뛰어난 덕이 있어 두려워할 만한 것을 모두 가미迦微(신)라고 이해하고, 모든 신들에 대한 합리적 해석이나 윤리적 평가를 배제했을 뿐 아니라 그런 신들 및 세계의 최고의 근원을 다카미무스비노카미高皇産霊神와 카미미무스비노카미神皇産霊神 두 신에서 찾았다. 고도古道의 도 역시 천지의 길도 사람이 만든 길도 아니라, 외경스러운 타카미무스비노카미高御産巣日神의 미타마御霊에 의해, 이자나기노오카미伊邪那岐大神, 이자나미노오카미가伊邪那美大神 시작했고,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御神가 이어받아 지키고 물려준 도, 이를 신의 도神の道라 했다. 도는 조상신皇祖神이 만든 것이다. 중국에서 신은 공허한 리일 뿐이라 확실히 존재하지도 않지만, 일본皇国의 신은 현존하는 아메노시타시로시메스御宇 천황天皇의 미오야皇祖라고 하여, 추상적・관념적 신 개념과 철저한 대립을 천명한다. 구신도旧神道의 범신론적 구성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주자학적 합리주의는 분해과정을 겪는다. 천인天人의 분리, 이어서 천도天道의 후퇴, 천명天命이 전면에 나타났으나, 진사이가 도 자체를 자연으로 인정했으므로 천명은 멈춰버렸고, 소라이에 의해 도의 가치성이 그것을 작위作爲한 인격 에 귀속되고, 그 인격이 피안성을 띠어, 비인격적 리는 인격적인 천에 의해 구축되었다. 여기에 소라이학과 노리나가학의 사유방법이 딱들어맞는다. 소라이학은 신도神道 부정을 통해 외면적으로 노리나가학으로 이어지며, 근세 신도가 의거했던 유교사상의 범신론적 구성을 파괴함으로서 노리나가학에 의한 구신도의 혁신을 내면적으로 원조했다. 노리나가는 성인을 땅위로 끌어내렸고, 그의 의식에서 소라이학의 사유구성은 사람이 만들 수 있는 도가 아니라 조상신이 창시한 길이라는 사유구성과 범주적으로 구별된다. 노리나가학에서 인격성을 하늘天에까지 인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하늘은 신들이 사는 공간이다. 그러나 소라이학을 내재적으로 이해하면 성인은 천에 이어져 피안성을 띠고, 천은 성인에 이어져 도를 근거짓는 인격적 존재가 되므로, 소라이학의 성인 내지 하늘天의 지위와 노리나가학의 신과의 공통성은 부인할 수 없다. 노리나가학과 소라이학의 도의 내용은 완전히 다르되 그 근거짓는 방식은 동일하다. 주자학적 합리주의에 대한 소라이학의 비판은 노리나가학에 이어져, 유교 내지 모든 유교적 사유를 배제하는 무기가 되었다. 노리나가에 의마면, 천지, 자연, 인사人事 모든 것의 근원은 신이 하는 바로 사람은 알 수 없다. 성인들이 자신들의 사사로운 지혜私智를 가지고 사물의 이치를 주장하지만, 천도든 리든 모두 암암리에 추측해서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이는 소라이의 송유, 천즉리天卽理에 대한 비판을 거꾸로 이용한 것이다. 노리나가가 료부신도両部神道를 비판할 때, 유불선 삼교 중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린다는 주장을 사사로운 도라고 말하면서, 소라이학의 입장을 원용했다.(282-286)
국학 즉 노리나가학은 일본의 조상신을 숭배한다. 도 역시 조상신이 만든 것이다. 소라이학에서 말하는 성인의 도 역시 중국의 시공간적 제약하에 있는 사람이 만든 것이라고 배격하고, 구신도 역시 유불신 삼교가 뒤섞여 있다고 배격한다. 그런데 구신도를 배격하는 것은 소리이학도 마찬가지다. 마루야마는 이 점을 지적하는데 그치지 않고, 노리나가학의 사유구성이 소라이학의 사유구성과 이어져 있다고 말한다. 노리나가학이 소라이학을 배격하고 전복하지만, 소라이학이 성인의 피안성과 초월적 인격을 인정하는 방식과 노리나가학이 일본의 조상신을 인정하는 방식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둘은 같은 방식에 근거하여 사고를 전개하지만 결론을 뒤집는다. 이것이 마루야마가 소라이와 노리나가를 이해하는 일관된 방식이다.
소라이학과 노리나가학이 피안적 인격에 궁극적 근거를 두고 비인격적 리理의 가치규준성을 부정하는데 공통된 입장을 취한다. 주자학적 합리주의의 해체과정을 통해 점차 육성되고, 소라이학에서 유교의 한계 내에서 최대로 개화한 모든 성과는 노리나가학에서 소라이학의 마지막 제약인 유학이 제거됨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도학적 합리주의의 비판은 다른 한편 모스이茂睡, 게이츄契沖 이래 국학이 독자적으로 소라이학의 부분적 영향 하에서 아즈마마로春満, 마부치真淵로 이어졌으며, 소라이학과 노리나가학은 사유구조의 본질적 유사성이라는 기반 위에서 그런 성과를 확보 발전시켰다. 먼저 문헌학적=실증적 방법의 계수 내지 발전을 들 수 있다. 소라이의 고문사학古文辞学의 그 자체의 영향은 아즈마마로, 마부치에서 찾아볼 수 있고, 특히 노리나가와의 관련에 있어서 문헌해석에 있어서 모든 주관적인 자의를 배제하려는 지향이 소라이학 및 노리나가학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인격적 실재에 대한 절대적 존신의 태도와 서로 표리를 이루고 있다. 소라이는 고인古人의 도는 책과 글에 있으니 이를 자신의 생각을 조금도 섞지 않고 이해하게 되면 뜻이 분명해질 것이다. 글도 뜻도 세월이 지남에 따라 바뀌며, 후세의 유학자들은 자신들의 지식과 견해를 바탕으로 성인의 길을 이해하려 하기에 모두 자기 식으로 해석한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은 성인을 깊이 믿기에 어떤 것이 적절하지 못해 보여도 성인의 도라면 나쁠 수 없을 것이라 말한다. 노리나가학은 신대神代의 일을 기록한 책을 중국식으로 해석해서는 안되며, 전해지지 않은 것은 알 수 없고, 기기記紀해석에 있어서 아프리오리한 범주를 버리고 이치에 어긋나거나 부도덕해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조상신에 대한 비합리적 신앙과 연결되어 있다. 도의 선험성을 부정하고 성인에게 의존하게 한 소라이학이 진사이의 고의학의 도학적 왜곡을 배제하여 유학적 문헌학을 구축했다면, 유교의 사카시라さかしら에 대해 자연을 대치시킨 마부치를 뛰어넘어 자연을 포함한 모든 이데아의 우위를 배격한 노리나가에 의해 국학 본래의 문헌학은 확립되었다. 소라이에게 의義보다 물物이, 논의의 정밀함 보다 일事와 말辞이이 근저에 놓였던 것처럼, 노리나가에게도 이 세상의 일에 대해 알려주는 신대神代의 사적事跡을 연구하는 것이 고학古学의 가장 중요한 목표다. 소라이학에서 고문사학을 통해 밝혀진 도는 선왕의 가르침 또는 술이지만, 노리나가학에서 사적 자체가 도라 가르침으로 규범화되어야 할 것은 아니다. 고도란 사물에 이르는 길일 뿐이다. 가르침이 없다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가르침을 배제하고 사실物을 향해 나가려는 태도에서 전통적인 학문의 개념은 중대한 전회를 겪게 된다. 가르침은 스승에 전수에 기반하고 있다. 문헌학=귀납적 방법의 발흥은 그런 전통을 파괴하게 된다. 국학자들은 가학의 사승전수를 비판했고, 소라이는 강석중심주의를 배격했다. 노리나가에 의해 사실에서 벗어나는 규범은 모조리 부정되자 이런 전회는 방법론적 자각으로 고양되었다. 학문은 진리에 대한 것이지 가르침에 대한 것이 아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학문과 대상 사이로 옮겨가게 되었다. 마부치는 스승에도 자신의 학설에도 얽매이지 말라고 말했다. 가르치는 이유는 도를 분명하게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287-290)
마루야마의 논리 전개는 일견 간단하면서도 촘촘하기 때문에 더듬어가는 일이 여간 성가시지 않다. 여기서 마루야마는 소라이학과 노리나가학의 같은 특징으로 문헌학적=실증적 방법을 들고 있다. 그것은 이 두 사람 모두 도덕적인 가르침의 전승을 배격하고, 문헌과 사실도 돌아가는 태도를 가리킨다. 현대적인 용어로 말하면 그것은 해석사에 대한 부정이다. 고문헌에 대한 이해는 해석사를 따라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소라이도 노리나가도 모두 이런 해석사적 전개를 부정하고, 고대 문헌을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소라이는 유교적 문헌학이고, 노리나라는 이것을 훌쩍 뛰어넘어, 일본적 신화의 문헌학을 택한다. (이것은 마치 성서를 문자 그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해석사를 무시한 채 원문으로 돌아가는 태도는 실상 자기자신의 해석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을 진심으로 믿고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런 입장이 방법론적 전회이자 자각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시대적으로 또 사회사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사상사적으로만 평가할 때, 문헌학적이고 귀납적 또 실증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은 그들의 학문적 방법과 태도를 가리키는 것에 불과하다. 실증을 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이데올로기이고, 문헌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도 평가하지 않은채 문헌을 존숭하는 태도가 실증적=문헌학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렇게 보일 수는 있다. 말하자면 문헌학적인 것을 곧바로 실증적으로 본데 문제점이 놓여 있다. 문헌을 무엇에 대해 실증할 때, 실증적이라고 할 것인가. 마루야마는 이들이 문헌을 문헌 내에서 귀납하고 실증하며, 소라이나 노리나가 한 말이 실증 또는 귀납적이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이들이 실증하거나 귀납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문헌 안에서 돌고 있을 뿐이다.
비인격적 이데아의 우위성에 대한 부정에 수반되는 두번째 관련성은 역사의식이다. 주자학의 합리주의는 삼대이전은 천리, 이후는 인욕이라는 규범적 복고주의였다. 고학파의 흥기는 규범의 역사적 변용이라는 인식을 가져왔다. 도를 성인의 역사적 행위로 이해한 소라이학에 의해 도학적 해석은 배제되었고, 노리나가학은 도의 규범적 해석을 철저히 배척했다. 노리나가학은 소라이학의 역사의식을 철저히 밀고 나갔다. 노리나가는 인간적 규준에 의한 권선징악적 역사관을 배격하며, 천명・천도・신 같은 초인적 규준에 의한 역사의 합리화도 반대했다. 좋은 사람이 망하고 나쁜 사람이 잘되기도 하는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고, 세상의 모든 일을 신의 지배로 돌리는 신앙이 연결되어 신의 윤리화를 거부했다. 신은 단지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더 나을 뿐이다. 소라이가 성인도 역시 사람일 뿐이라고 말한 것이 성인의 절대화와 모순되지 않듯이, 노리나가의 신의 윤리화의 거부는 신을 인간적 가치판단의 저쪽 너머에 두려는 그의 지향의 당연한 결과다. 노리나가의 신과 소라이의 성인은 적극적인 규정에 있어 완전히 상반되면서 도학적 합리주의로부터 해방이 양자의 사유방식을 이렇게 가깝게 만들었다.(291-292) 역사 관찰에 대한 어떤 이데아의 도입도 배제하는 노리나가는 그의 고신도古神道에도 불구하고 묵시론적 말세론자일 수 없었다. 고대로의 지향이라고 역사적 진보를 외면하지 않았다. 옛날보다 후세가 뛰어난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예를 들면 가론에서 만요슈만 내세우는 견해를 비판한다. 당시 국학자들이 분명한 근거도 없이 옛날 것은 좋고 오늘날은 나쁘다는 식으로 억지로 소리 높이는 복고주의는 유교와 대립된다해도 가라고코로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소라이를 거치면서 유교적 합리주의를 부수고 한걸음씩 성장해가는 역사의식의 발전과정이 선명하게 드러난다.(293-294)
마루야마는 다시 한 번 노리나가와 소라이의 사유방식을 비교한다. 이번에는 역사의식이다. 소라이도 노리나가도 모두 도학적 역사관 즉 규범적 역사관을 배격하고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각자 기준을 내세우는데, 소라이는 성인, 노리나가는 신이다. 이 둘은 모두 있는 그대로의 존재이며, 때로 잘못이나 한계가 있을지라도 믿어야 하는 신앙의 대상이자 존재이다. (이런 신앙은 어떤 종류의 근본주의에서도 모두 발견되는 형태다) 물론 노리나가는 소라이의 성인을 부정한다. 그는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중국의 한 시대의 정복자에 불과하다. 소라이는 그때까지의 신은 배격한다. 그러나 노리나가의 일본 신에 대한 존중까지 금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노리나가와 같은 신앙은 부여하지 않는다. 이 둘의 사고방식은 도학적 합리주의 즉 규범적 역사관을 배척하는 데서 다시 한 번 일치한다. 그런데 노리나가는 복고적이지 않다. 실은 이 점에서 소라이도 살짝 모호하지만, 미래의 성인을 부정하지 않는다. 마루야마는 다시 한 번 솜씨좋게, 소라이를 거쳐 소라이를 극복해 나가는 노리나가의 모습을 그려낸다.
의문점은 다시 한 번 이렇게 만들어낸 소라이와 노리나가 역사적으로 얼마나 진보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느냐에 있다. 이것이 진보적인지 아닌지를 평가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마루야마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마루야마에 의하면, 이들은 모두 역사를 규범적으로 평가하는 척도로부터 역사 또는 현실을 구해낸 것처럼 보인다. 마치 랑케의 역사주의를 연상시키는 것처럼. 그러나 실상 이들이 해체한 것은 척도에 불과하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묘사도 냉정한 평가도 내리지 않는다. 노리나가가 다소 진보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과거 특정의 어느 시점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이를 기준으로 그 이후의 모든 것을 평가하는 복고적 합리주의가 가장 손쉬운 수단이며, 비판받아야 하는 견해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복고적 합리주의의 만능의 잣대를 깨트리는 것은 현실을 구해내기 위해서이다. 소라이와 노리나가는 여기서 현실을 구해내는 데 까지 나갔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이들은 자기 스스로를 구해내었다. 척도를 부수고, 척도를 믿음의 대상으로 돌린 후에 이들은 말하지 않을 수 있는 평가하지 않을 수 있는 도덕적 자유를 얻었다고 하면, 지나친 판단이 될까.
도학적 합리주의의 분해는 인간 자연성의 해방으로 나타나는데, 여기에 세번째 연관성이 나타난다. 노리나가학의 반엄격주의는 너무나 분명하다. 주자학에 있어서 규범과 자연의 연속성의 분열은 한편으로 규범성의 순화, 다른 한편으로 자연성의 해방이라는 양면적 발전을 이루었다. 물론 중점은 규범성의 순화. 이런 분열을 밀고나가 규범을 순전히 정치적인 것으로 고양시켜 모든 엄격주의를 배제했던 소라이학에 있어서 성인의 도의 본질은 공적인 측면에 있다. 노리나가는 소라이적인 도 역시 배척하고 일체의 규범이 없는 곳에서 그의 도를 찾아냄으로써 비로소 인간자연성은 적극적 기초를 확보하게 되었다. 도란 학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좋건 나쁘건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던 마고코로真心다. 후세 사람들은 모두 가라고코로漢心에 관심을 기울여 마고코로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른바 지나치게 영악한 마음이 생겨났다. 마고코로를 본연의 성으로 가라고코로를 기질의 성으로 보면, 주자학의 인성론과 흡사하다. 천리天理의 자연성에서 도를 찾았던 주자학의 자연주의는 소라이학에 의해 기질은 바뀌지 않는다는 비관주의로 다시 한 번 인욕人欲의 자연성에서 도를 찾아내는 노리나가학에 이르렀다. 노리나가는 인욕이 천리라고 말했다. 도학적 낙관주의에 대한 부정의 부정으로 감성적인 낙관주의가 탄생했다. 유불이 전래되기 이전의 상대上代를 찬미하고 있다. 각자 주어진 바를 다하면 평온하고 즐겁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던 시대였다. 노리나가는 마고코로를 통해 당시의 지배적 도덕의식의 형식성과 위선을 폭로했고, 이런 낙관주의는 메이지 초기 계몽사상가 쓰다 마미치津田真道에 의해 인욕 중에 정욕은 진보를 도와주는 것이라고 전개되었다.(294-296) 반엄격주의에 있어서 문예관도 소라이학과 노리나가학의 관련성을 보여주며, 여기서도 노리나가학은 소라이학의 사유를 이어받아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노리나가의 초기 문학론에는 윤리 및 정치로부터 문학의 해방이라는 측면이 나타난다. 여기서 시문의 도학적 해석을 배척하며 사적인 영역에 귀속시킨 소라이학과 현저한 유사성이 나타난다. 노래란 정치를 돕는 것도 수양을 위한 것도 아닌 마음으로 생각한 것을 말할 따름이다. 시는 권선징악을 위해서가 아닌 기쁘거나 슬플 때 노래한 말일 뿐이라고 하여 소라이와 일치하고 있다. 소라이가 시를 윤리・정치로부터 해방시키면서 시의 효용을 인정을 이해하고, 도리를 드러내게 되어 다스리는 자에게 도움이 된다고 말한 것처럼, 노리나가도 와카가 정치를 돕기 위한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군주된 자가 아랫사람의 정서를 아는 것, 모든 것의 의도나 느낌을 아는 것이 노래의 쓰임새다. 중점은 문예의 윤리・정치로부터의 해방에 있으며, 부차적으로 정치적=사회적 효용이 언급되고 있는 점이 양자의 사유방식에서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소라이가 와카를 시(시경)와 같지만 여성스럽다고 한데 대해, 노리나가는 시와 와카가 본질적으로 같다며 오히려 시는 어린 여자아이女童(여자와 어린이)가 말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이고 후세의 남성적 시가 오히려 본질에서 벗어났다고 말했다. 감동을 받는 것이 마고코로에 들어맞는다는 노리나가의 주정주의다. 중고학中古学으로부터 얻은 입장을 밀고나간 노리나가는 소라이 문예관의 마지막 제약을 벗어던지고, 마부치마저 극복했다. 마부치도 타오야메부리たをやめぶり에 대해 마스라오부리ますらをぶり를 찬양하여, 여성스러움을 멸시하는 소라이에 가까웠다. 반면 노리나가의 문학론은 전장의 용사라도 죽기 싫어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으로 마스라오부리의 한층 더 깊은 곳에 있는 우타모노가타리歌物語의 본질로서 모노노아와레もののあわれ를 찾아냈다. 문학의 독립은 여기서 확보되었다. 노리나가에서 고유한 가치를 자각한 문학은 마부치로부터 이어받은 고대주의와 융합하여 고도古道의 핵심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신의 도는 선악시비 같은 것은 없고, 풍요롭고 유유하며 세련된, 노래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모노노아와레는 신도 그 자체의 본질이다. 수신이나 치국에서 해방된 문학은 다시 정치적=사회적 성격을 띄게 된다. 노리나가에 있어 문학의 정치화란 변질도, 정치적 효용도 아닌 문학적 정신(모노노아와레)이 정치 원리처럼 되어 버린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상대上代를 이상으로 하는 노리나가의 낙관주의의 방법적 밑바탕이다. 문학이 문학이면서 정치화되는 것, 정치가 문학화한다는 것은 정치가 비정치화entpolitisieren된다는 것이다.(296-301)
마루야마가 발견한 소라이와 노리나가의 세번째 공통점은 반엄격주의이다. 이 반엄격주의는 자연의 해방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서도 소라이는 소극적인 형태이자 비관주의의 형태를 띄고 있는 반면, 노리나가에게서 자연성에서 도를 찾아내는 감성적 낙관주의가 나타났다. 이것은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소라이는 문학을 윤리로부터 자유롭게 하면서도 정치에 효용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노리나가는 정치의 효용도 아닌 문학 자체가 정치원리가 되는 극단적인 주정주의이자 정치의 비정치화로까지 나아가게 된다. 반엄격주의에 있어서도 소라이와 노리나가는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지만, 소라이는 어디까지나 소극적인 형태로서 반엄격주의의 자리를 확보하는데 그치는 반면 노리나가는 이를 극한까지 밀고나가 감성적 낙관주의이자 주정주의, 정치의 비정치화에 이르게 된다. 마루야마는 사유양식의 이 세 가지 점 모두에서 소라이와 노리나가의 공통점을 발견하되 노리나가가 소라이에 입각해서 그를 궁극적으로 극복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니 여기서도 마찬가지의 의문점이 다시 제기된다. 다시 소라이와 노리나가를 서양 사상의 발전사 위에 놓아보자. 자유의 발견, 엄격주의의 해소는 분명히 발전적이다. 문제는 자연의 해방, 즉 자유의 발견이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한 전체적인 이미지 즉 세계상을 결여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들은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되는 것에 어떤 정당성도 부여하고 있지 않다. 즉 현재 사회적으로 또는 경제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기 때문에 자연의 해방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그런 방식이 아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 하면 태평하고 잘된다는 것이 결국 노리나가의 주장이 아니던가. 소라이의 위기의식이나 비관주의가 어떤 궁극적 행동을 낳기는커녕, 자신을 정치적 의무에서 해방시킨 결과가 아니던가. 자연의 해방은 어떤 의미에서는 부차적 결과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어떤 사상적 발전의 단초나 계기들을 마루야마 처럼 어떤 거대한 발전의 한 단계나 문턱으로 볼 수 있느냐에 있다. 그것이 발전이나 극복의 계기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많은 사회적 조건과 결부되어야 한다. 역사적 계기들과 결부되어야 한다. 그런 것들로부터 떼어낸 발전이나 극복의 계기가 과연 서양사 또는 서양사상사에서 발견된 그것과 같은 기능을 하는지, 그렇지는 않더라도 역할을 하는지는 다시 역사 안에서 역사적 맥락을 비교하면서 평가할 수밖에 없다. 사상사는 사회사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마루야마는 이렇게 사상사의 계기를 잘 벼려내어 멋지게 드러내는데 그친다. 이것은 한계라기 보다 그의 암묵적 의도라고 할 수 있겠다. 원래의 맥락으로 되돌아갔을 때. 정반대로 기능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암묵적으로 모순을 알아서 깨달을 수도 있겠지.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가 섬세하게 세공한 이 사상사의 건축물은 그 자체로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학은 소라이학의 뒤를 이어 모든 유교적 작위를 부정하는 존재로 등장했고, 소라이학에서 사적 영역으로 소극적 자유를 향유하고 있던 내면적 심정 자체에서 둥지栖家를 발견하게 되었다. 국학은 소라이학의 공적인 측면을 완전히 배제하면서 사적・비정치적인 그것을 전반적으로 이어받게 되었다. 고문사학의 고증적 입장이나 역사 의식은 소라이학 전체의 기초적 성격인데, 구체적으로 견문이 넓고 사실이 행해지는 비정치적인 대상에 보다 많이 발현되었다. 소라이학의 유학자는 글을 지키고 전하는 것이고, 노리나가학의 학자는 길을 연구해서 밝히는 것뿐으로 실천해서는 안된다고 하여 학자의 지위가 비정치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노리나가와 소라이는 사적인 측면을 통해 이어지는데, 소라이학의 사적인 영역이 유교를 정치화함으로서 생겨난 부산물이었던데 반해, 국학은 모든 규범성을 소탕한 내면적 심정 그 자체를 도로 형상화했다. 이렇게 해서 국학은 소라이학에 있어서 비정치적인 것을 거꾸로 정치에 이어지게 했다. 마부치는 노래하는 마음이 세상이 잘 다스려지고 사람들은 평온하게 지내는 기초라고 하였다. 노리나가는 모노노아와레를 알면 몸, 집안,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고 하여, 윤리・종교・정치 기타 모든 가치기준에서 완전히 독립된 문학적 정신을 그대로 정치적인 것까지 밀어 올려, 정치의 비정치화가 완성되었고, 규범주의적 사유에 대한 안티테제가 철저해졌다. 모노노아와레적 정신의 규범화 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모노노아와레가 비모노노아와레적인 것에 대한 규제 원리가 될 때 순수성은 상실된다. 규범에 대해 자연을 주장하면 이미 자연이 아니다. 노리나가는 마부치가 예찬한 노자의 자연을 비판하며, 옛날의 자연을 강요하는 것도 억지라며, 노자의 오류는 그의 약삭빠른 꾀智慮로, 사변의 산물이라, 자신의 사카시라(영악함)을 조금도 섞지 않고, 카미노미후미神典에 보이는 그대로인 그의 고도古道와 구별된다. 노리나가가 심정의 순수성을 존중하는 것과 학문론의 객관적=실증적 태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는 이지理智적 의미와 의지意志적 의미에서 사카시라를 배제하고, 세상의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모두 신의 마음이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그는 학문적 타협을 거부했다. 그의 고도古道란 옛날처럼 사는 것도 아니고, 옛날의 신도를 행하는 거도 아니다. 이런 일들은 신을 넘어서는 것이라며 정치적 복고주의를 거부했고, 오늘날의 세상에서는 오늘날의 법령, 오늘날의 상식을 따라야 한다고 말하면서, 도쿠가와 막부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나타냈다. 이는 주어진 것을 주어진 것으로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의 입장의 귀결이었다. 그러나 이는 도쿠가와 막부의 정당화도 아닌 그 시대의 법은 그 시대의 신의 뜻이라 말하는 것으로 정치 형태가 변화하면 그것을 새로운 신의 뜻으로 긍정하게 되는 철저한 비정치적태도unpolitische Haltung이며, 그 때문에 모든 정치원리를 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보수적인 심정이라기 보다 모든 낭만적 심정에 공통되는 기회주의적 상대주의이다. 모든 것은 신의 뜻이라고 말하는 노리나가는 막부 형태의 역사적 신의神意적 필연성을 인정함으로써 아프리오리한 절대적 기초지움의 가능성을 박탈한다.(301-305) 노리나가학의 도는 결과적으로 자기모순이다. 노리나가의 도는 모든 규범의 부정이며, 소라이의 일事과 말辞도 아닌 일의 흔적事の跡이었고, 가르침으로 규범화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규범성의 부정이 부정으로 철저화되자 그것은 긍정으로 바뀌게 된다. 노리나가의 도가 유불의 도와 구별되는 한 일의 흔적의 관념적 상승을 수반한다. 긍정의 자기발전. 고도는 하나의 적극적인 규범이 되었다. 이는 노리나가 사후 히라타 아쓰타네에 의해 한층 더 발전되었다. 역사적인 소여는 단순한 소여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하나의 정치적 이즘인 고도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히라타파 국학자들의 메이지 유신의 정치적 실천의 논리적 근거가 되었다. 이는 동시에 노리나가학의 학문성도 파괴하게 되었다. 유교의 정치화의 뒤를 이어 이를 부정하면서 등장한 국학의 사상사적 딜레마는 실증적=객관적 정신이 비정치적 태도와 떼놓을 수 없게 얽혀 있다는 점이다. 국학은 그 자신을 배타적 정치원리로 끌어올리지 않고 학문적 방법의 순수성을 관철시키면서, 정치적 부문에서는 모든 이데올로기를 포용하는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에서 생존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305-306)
마루야마의 노리나가에 대한 해석은 이해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앞부분에서 코멘트한 것처럼 노리나가학이란 실은 비정치적인 정치참여에 대한 포기와 현실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노리나가를 비롯한 국학자들은 심지어 자기자신이 주장하는 모노노아와레까지 일종의 가르침이나 이념이 되는 것을 거부하려고 한다. 그렇게해서 형성된 비정치적 태도란 모든 정치형태를 포괄할 수 있는 기회적의적 상대주의라는 지적은 적절하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형태를 고수하려는 보수주의가 아니다. 노리나가가 보수적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마루야마는 당대의 근대초극론자들에게 국학에 근거할 수 없고, 당신들의 논의는 국학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여기서 마루야마의 논의는 살짝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으로 나타난다. 노리나가의 도쿠가와 정권에 대한 지지는 그것이 어떤 정권이라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프리오리한 절대적 기초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막부에 대한 지지가 토막에 대한 지지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어떤 형태의 원리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 현실 정치의 권력에 대한 지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노리나가는 지독한 현실주의 아니 현실긍정의 장으로 들어간다. 이런 해석은 막말에 있었던 모든 주의와 사상이 막부와 황실을 오가면서 양이와 개국을 오가면서 전개되었던 혼란상에 대한 어떤 복선을 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루야마의 주장을 따라가기가 성가실 뿐 아니라 따라가서 동의하고 나면 그것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마루야마는 노리나가의 도가 자기모순이라고 말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노리나가학에는 고도의 일종의 규범화 가능성이 깔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히라타파로 그리고 메이지 유신 즉 존황론으로 이어졌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고도 즉 일본이 태양신의 후계자인 천황일맥이 다스린다는 신화가 규범이 되어서 그것이 메이지 유신 국가를 정당화하는 기반이 되었다는 평가다. 역사적 소여가 단순한 소여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정치적 이즘인 고도의 비판을 받았다는 말은 장래의 논거를 위한 일종의 밑자락이다. 그러나 그 전개를 학인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노리나가의 후계자들의 활동은 노리나가학의 파괴였다. 노리나가의 비정치와 달리 그 후예들은 고도를 근거로 내세우면서 적극적으로 정치에 몰두했다. 그러나 그 이데올로기의 내용은 유교, 불교, 신도에 서양의 개국과 양이 사상이 뒤얽힌 이데올로기의 혼종성이었다. 마루야마의 논리를 따라가기 어렵게 만드는 지점이 실증적=객관적 정신과 비정치적 태도를 연결하는 지점이다. 여기서 실증과 객관이라는 두 단어에서 혼란을 가져오게 만든다. 노리나가가 말하는 실증과 객관이란 고도 즉 일본의 옛 정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에 대한 어떤 유교적 또는 불교적 해석을 배격하는 태도이고, 비정치적이란 현실정치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상대주의를 말한다. 마루야마는 이를 실증적=객관적 정신이라고 말했다. 노리나가의 입자에서 보면 그것은 나름의 실증이고, 유불이라는 주관적 해석의 개입을 막는 객관일 수 있다. 그러나 실증이나 객관이라는 개념이 떠올리는 그런 타당한 근거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실은 그것은 노리나가 자신의 기기해석에 불과하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그 자체도 하나의 해석론에 불과하다. 당대에서 실증이나 객관이 아닌 순수주관적인 이데올로기가 있을 수 있는가. 마루야마가 지나치게 비교가능한 개념적 틀을 가져와 견강부회에 이르게 된 것이다. 비정치적 태도에 대한 사상사적 의미 부여가 정치화의 극복이라는 것은 지나친 해석인데. 왜 이런 인위적인 논리구조를 가져오는가 하면, 마루야마가 헤겔의 사상사적 방법론에 근거해서, 대립 즉 모순을 역사발전의 원동력으로 상정했기 때문에 정치화와 비정치화라는 대립과 모순에 집착한 것이다. 이것이 대립으로 성립하기 위해서 비정치화가 의미를 가져야 한다. 정치현실을 외면하는 태도가 비정치화로 적극적 의미를 부여받게 되고, 후예들에 의해 극복되었다는 논리는 이렇게 성립한다. 이것은 정교하고 공들인 억측이다. 차라리 연속성을 보려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1장 5절 맺음말
근세 초기 사상계를 독점했던 주자학이 어떻게 사회적 적합성을 상실해 갔으며, 그 적합성을 회복하기 위해 유교를 정치화시킨 소라이학이 도리어 비정치적 계기를 자기 내부로 도입함으로써 어덯게 국학의 대두를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그 과정을 통해 근대의식이 어떻게 싹을 틔워갔는가를 사유양식의 미묘한 변용 속에서 구체적으로 읽어내는 것이 목적이다.(307)
그는 이 맺음말에서 비로소 자신이 이 글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속내를 드러낸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는 현재를 향해 발언하고 있다. 이것이야 말로 미셸 푸코가 고고학과 계보학을 통해서 현재의 역사를 서술한 바로 그것이다. 그가 주자학의 해체과정을 통해서 말하는 것, 정치적인 것의 발견이라는 의미에서의 근대라면, 일본에는 이미 소라이에 있었고,(이 지점이 한국인에게 열등감을 가져와 눈을 가리지만,) 그렇기에 그를 수용하고, 대립적으로 극복해서 발전시킨 노리나가도 근대성의 맹아가 있다는 것. 그러니까, 일본의 전통 속으로 소박한 과거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근대초극론자들의 주장이란 근거가 없다는 주장이다. 현대적 용어로 말하면 그 조차 만들어진 전통일 수 있다는 것이다.
첫째 근대의식을 내면적인 사유양식 속에서 찾고, 반드시 정치사상에 있어서 반대자적 요소 속에서 찾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막부 절대주의를 주장한 소라이나 막부정치는 신의 뜻神意性이라고 주장한 노리나가 사상은 같은 시대 유학자들보다 더 봉건적이다. 그러나 밑바닥의 사유양식의 변혁이 그 위에 정치사상의 변혁과 나란히 진행된 유럽근대사상과 달리, 일본은 도쿠가와 시대에 시민사회의 힘이 봉건사회의 안에서 성장하는데 방해를 받았고, 도쿠가와 시대에 우연적인 조건의 지배를 받아 바탕을 이루는 사유와의 연관성을 결여한 정치론에 대해 근대의식을 엿보면 자의적인 결과에 빠지게 된다.(마루야마가 고심했던 지점은 여기일 것)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이런 저런 사상의 단편적 근대성이 아니라 사상의 계통적 맥락 속에서 일관된 근대의식의 성장을 찾아보는 것이다. 둘째 근대적 의식을 주로 유교의 자기분해 과정을 통해서 살펴보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글에서는 아무리 풍부한 근대성을 가지고 있어서 고립된 학자는 제외하였다. 아라이 하쿠세키나 미우라 바이엔. 난학과 난학자들의 근대의식도 고려하지 않았다. 오로지 유교사상의 주류를 이루는 학파와 순수한 유학자만을 다루었다. 이는 유교가 봉건사회의 가장 강력한 의식형태인 한, 바깥으로부터의 파괴가 아니라 안으로부터의 생각지도 않았던 성과로서의 해체과정의 분석이 근세 일본 사상이 단순히 공간적으로 지속되지 않았던 까닭 그 발전성을 가장 잘 증명해 보여줄 것으로 생각했다. 일본에 있어서 근대적이 갖는 양면성 즉, 그 후진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정체성非停滯性이 이런 방법론을 규정한 것이다.(308-309)
외부자가 동아시아의 사상가들을 볼 때 가장 파악하기 어려운 지점은 이런 것들이다. 현상적으로 근대적이거나 진보적인 견해를 가지지만, 그 바탕은 아주 봉건적일 수 있다는 것. 예를 들면, 고대적 자연주의 사상에 근거해서 만민평등이나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라 토지분배를 주장하는 것이 그런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아주 진보적이고 근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결과를 낳는 배경에 깔린 사상은 가장 전통주의적인 것이다. 아마도 이 부분이 그의 가장 고민이었을 것이다. 근대적으로 보이는 몇몇의 돌출된 학자들의 견해를 다룬다고 근대성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것. 오히려 봉건사상의 연장에 불과한 주류 사상의 전개에서 근대성을 찾으려는 그는 이런 근대의식에 대한 고민을 사건적이나 단편적인 데서 찾지 않고, 비정체성이라는 측면 곧 헤겔이 말하는 대립의 발견에서 찾아내려 한 것이다. 사상에서 내면적으로 대립과 모순이 발견될 때, 그는 여기에 주목하고, 그런 사상가가 아직 현실정치적으로 제도적인 근대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을 때, 이를 인정했던 것이다. 후진성과 비정체성이란 이런 현실에 대한 설명에 다름아니다.
그럼에도 흥미롭고 또 놀라운 것은 사유양식을 둘로 분해한 것이다. 사유의 내적 구조와 그 결과로 나타나는 사유의 외면화. 이것은 마치 마르크스의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유물론적 구조를 사상 안으로 가져온 것 같다. 사유의 내적 구조란 사유의 토대이다. 물론 마르크스는 사유의 유물론을 전개한 적은 없다. 이것은 또 그람시의 진지전과 헤게모니를 말하는 것도 같고. 미셸 푸코가 말하는 에피스테메와도 유사하다. 마루야마 자신이 훗날 정치의식의 집요저음執拗低音basso ostinato라는 일본적 형태의 연속성에 몰두했던 것과 어떤 형태로든 이어지고 있다.
근대적 정신은 합리주의를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삼는다. 그런데 주자학에서 소라이학을 거쳐 국학에 이르는 과정은 합리주의 보다는 비합리주의적 경향에로의 전개를 보여준다. 이는 두 가지 측면 세계사적 과정과 주자학의 특수성의 양측면에서 고찰해야 한다. 첫째, 근대적 이성은 비합리적인 것의 점차적 구축에 의해 직선적으로 성장한 것이 아니었다. 근대적 합리주의는 자연과학을 기반으로 한 경험론과 상호 제약 관계에 있는데, 인식 지향이 경험적=감각적인 것으로 향하기 전에 형이상학적인 것에 대한 지향이 일단 차단되지 않으면 안되며, 그 과정에 이성적 인식이 가능하게 되는 범위가 현저하게 축소되어 비합리적인 것이 우위를 차지한다. 이는 유럽의 중세에서 근세에 걸치는 철학사에서 후기 스콜라 철학의 역할이다.(여기서 마루야마의 속내가 드러난다) 둔스 스코투스의 프란시스코 학파 오캄의 윌리엄 등 유명론자는 전성기 스콜라철학의 주지주의와의 투쟁에 있어 인간의 인식능력에 제한을 부여해 종래 이성적 인식의 대상이었던 많은 사항을 신앙의 영역에 할양하여, 한편으로 종교개혁을 준비하고, 다른 한편 자연과학이 발흥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소라이학이나 노리나가학의 비합리주의가 바로 그런 단계에 있었다. 고학파나 국학이 유명론과 같지 않은 것처럼, 주자학적 합리주의와 스콜라적 합리주의 사이에 결정적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후기 스콜라철학이 토미즘에 대해 자겼던 사상사적 의미와 유교 고학파 내지 국학이 주자학에 대해 가졌던 의미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마루야마는 각주에서 종래 고학파와 국학의 흥기를 르네상스에 비견한 것을 비판하며, 사상의 계몽성에서 그런 비교는 무리라며, 비교할 시기를 1, 2세기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평한다) 주자학의 궁리의 제한적 성격은 진사이에 있어서 천도로부터 인도의 분리 소라이에 있어서 정치의 경험적 관찰을 낳게 했다. 그리고 성인에 대한 비합리적 신앙의 강화는 다른 한편으로 고전에 대한 문헌학적=실증적 입장의 흥기를 수반했으며, 그것은 성인에 대해 조상신을 대치한 노리나가에게 그대로 이어져 발전하게 되었다. 궁리를 철저하게 방기했던 노리나가에 대해서 논란이 분분하나,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리가 형이상학적 범주였던 한 자연과학적 인식을 손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가짐을 길러준다. 예를 들면 그는 천문과 우주에 대한 추상적 설명에 대해 해달물불 등 눈에 보이고, 귀, 코, 몸에 닿는 것만을 알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아마테라스오미카미는 지금도 사람들 눈에 보인다고 말한다. 『고사기』에 따르면 이는 태양이다. 노리나가의 사카시라(영악함) 배격은 감각적 세계에 대해서만 확실한 지식을 용인하려는 입장과 연결되어 있다. 유불노장 사상의 견강부회가 강했던 만큼 소라이나 노리나라가의 반동도 강했고, 그들의 실증적 태도를 손상시킬 정도로 신비화 경향도 강했다. 풍운뇌우를 음양오행 같은 단어를 빌어 피상적인 설명을 한다고 해서 안다고 할 수 없다. 태극이나 괘를 통한 설명은 중국의 성인들이 망령되이 만든 것이다. 이렇게 말한 노리나가는 ‘궁리’의 당시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진보적 파괴작업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근대적인 궁리는 비근대적인 그것(음양오행 등)을 쓸어버린 후에야 개화할 수 있다. 한편 신도를 배타적 이데올로기로 끌어올려 복고復古를 강행하려 했던 히라타파 국학자들은 얼마후 메이지 유신 당시의 지도력을 상실하고, 서구화에 비분강개하는 일군의 반동주의자로 바뀌어 갔지만, 국학의 실증적 정신은 유럽의 시민문화 보급을 위해 활약한 계몽적인 신관神官들에게서 근대적 합리주의와 결합하게 된다.(309-313)
서양 근대에서도 합리주의로 한 번에 나간 것이 아니다. 합리주의로 향해 가기 전에 비합리주의로 보이는 역행이 있었다. 그건 원래 서양도 그랬다. 그것은 언제인가? 스코투스와 오캄으로 대표되는 후기 스콜라였다. 그는 일본의 소라이와 노리나가학의 위치를 서양 근대사 및 근대사상사에서 후기 스콜라에 위치시키려고 한다. 이를 일컬어서 서양사에 억지로 끼워맞춘다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각주에서 그는 자신의 속내를 비춘다. 지금 사람들은 소라이와 노리나가를 르네상스에 비견하고 있다. 그러면서 결과적으로 그들의 사상은 국민도덕으로 근대초극으로 흘러간다. 마루야마 생각에 일본의 도쿠가와 사회는 그보다 훨씬 뒤쳐졌다. 거기서 1~2세기 더 위로 올려잡아, 후기 스콜라로 가야 한다. 그러니 근대가 너무 심해서 근대를 초극해야 한다는 주장은 터무니 없는 말이다. 그리고 소라이는 물론 노리나가에게도 감각기관을 중시하는 실증적 태도와 신화적 태양에 대한 신앙이 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사상을 추구한 후기 스콜라처럼 그렇다. (와타나베 히로시가 서양 그리스도교를 대중적 종교와 스콜라적 사상으로 나누어 평가하는 것은 아마도 이 지점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는 종교에 착목한다.) 마루야마가 보기에 노리나가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그것은 파괴적인 측면과 신화를 중시하는 수구적 측면이다. 그리고 히라타파는 후자를 이어서 신도 복고를 감행했기 때문에, 메이지 유신 이후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러니 현대의 근대의 초극론과 국체론자들이 그들의 후예이다. 진정한 노리나가의 후계자는 그 파괴적 분열적 측면을 제시하는 계몽적인 신관들이다. 일본의 전통사상의 흥기를 후기 스콜라에 비견하는 그 철저함에는 경탄을 금할 수 없다. 실학자들의 저술의 파편에서 혹은 문인들의 일기의 파편에서 근대적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요소 하나를 발견하고 희희낙락하는 견해와 비교하면 참담한 기분이 든다.
둘째 주자학의 특수한 성격에서 기인하는 점이다. 주자학의 합리주의가 강한 도학道学성을 띠고 있기에 그런 합리주의의 분해는 다양한 종류의 문화가치의 독립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주자학의 연속적 사유에 의해 윤리에 완전히 얽매여 있던 정치・역사・문학 등의 제 영역이 각각 그 고리를 끊고 문화적 시민권을 요구하게 되었다. 정치는 수신제가의 연장에서 안민이라는 가치를, 역사는 교훈의 거울이라는 지위에서 실증이라는 가치를, 문학은 권선징악의 수단이라는 지위에서 모노노아와레라는 고유한 가치기준이 부여되었다. 이 같은 문화 가치의 자율성 이야말로 분화된 의식으로 근대의식의 가장 상징적인 표현이다.(314)
주자학의 합리주의가 도학적이기 때문에 주자학의 분해과정은 다양한 문화적인 가치가 등장하게 된다는 점, 그러니 문화적 가치의 자율성 자체를 근대의식의 상징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이 두번째 평가다. 그러니 합리주의의 성장으로 보이지 않고, 일견 비합리적이고 무질서하며, 혼란스러워보이는 데 오히려 근대의 맹아가 숨겨져 있다는 주장이다. 강력한 구조의 해체라는.
이처럼 유교사상의 자기분해 속에서 근대의식을 찾아내는 것에 어떤 현대적 가치가 있는가. 현재 근대적 사유야말로 분명하게 위기를 외쳐대고 있다. 현대 정신의 혼란과 무질서도 원천을 찾아낼 수 있다. 근대적 사유의 곤란함이 전근대적인 것으로 되돌아감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가? 이미 내면적 분열을 겪은 의식은 전근대적 소박한 연속성을 받아들일 수 없다. 자율성을 자각한 문화가치도 다른 것과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다. 예술은 다시 윤리와 연계될 수 없다. 역사도 과거 사실의 서술에 머물 수 없다. 역사가 도학적 규준의 노비가 되어 있는 동안은 본래의 역사를 말할 수 없다. 헤겔의 실용적 역사서술을 철저하게 초극한 후에 참된 역사서술은 시작된다. 정치적인 것의 복잡함은 이미 소라이의 시대에 단순한 연속적 사유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현재에는 모든 규범적 제약을 배제한 역사적 사실 그 자체가 갖는 독자적 의미를 인정하면서 어떻게 그런 실증성을 잃지 않고 그것을 가치와 관련지을 것인가, 정치의 고유법칙성을 자각하면서 윤리와의 새로운 결합을 구성할 것인가의 문제만이 남아 있다. 그리스적 사유의 단순함과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돌아갈 수 없다.(313-316)
맨 마지막 문단에서 그의 속내가 드러난다. 현대 근대적 사유의 위기를 외쳐대고 있다. 1940년 일본에서 성행했던 근대초극론과 국체론 일본의 소박한 전통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말한다. 마루야마는 그들이 말하는 전통으로의 회귀가 문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돌아가려는 전통은 이미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돌아가자고 말하는 천황으로부터 모든 황국신민에 이어지는 소박한 연속성은 이미 오래전에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주자학적 체계의 연속성이 해체되었다는 마루야마의 주장은 근대초극론은 이미 해체된 사상을 주술적으로 불러오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상황이 변했기에 돌아갈 수 없다고. 일본의 전통을 말한 노리나가는 이미 해체한 그 위에서 불어낸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문장을 얼마나 긴장하면서 썼을지. 그 긴장감이 느껴진다.

2018. 12. 10.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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