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真男, 『일본정치사상사연구日本政治思想史研究』, 김석근 역, 한국사상사연구소, 통나무(東京大学出版会), 1995(1952).
해제-영어판 저자서문-저자 후기-번역을 마치고.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真男의 『일본정치사상사연구』를 처음 손에 넣은 것은 이 책의 번역본이 처음 나온 지 얼마되지 않아서 였다. 1995년 말 무렵일까. 그렇지만 이 책을 끝까지 다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책에 남겨진 낙서의 흔적을 보니 대략 4번 정도 시도했던 것 같다. 매번 300쪽 정도까지 한 번은 400쪽 까지 읽었지만, 마지막 100쪽을 읽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이유는 당연하게도 책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였다. 이번이 마지막 도전이라 생각하고 일어판 『日本政治思想史研究』과 대조하면서 읽었다. 그 결과를 간략하게 정리해 두려한다.
마루야마 마사오에 대한 연구는 물론 이 책에 대한 논의도 무수하게 많지만, 그런 논의들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실은 맥락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도 그런 논의의 맥락을 모두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것은 와타나베 히로시의 『일본정치사상사 17~19세기』(고려대학교 출판문화원)와 『주자학과 근세일본사회』(예문서원)를 읽고 나서였다. 전자는 2010년에 일본에서 그동안의 강의를 모아 출간한 것이고, 후자는 1985년 일본에서 마루야마 마사오를 충분히 의식하면서 출간한 것이다. 여기 실린 논문은 1979년과 1980년에 『国家学会雑誌』에 실렸던 글. 따라서 이 두 책을 비교해서 읽다보면, 어디에 차이가 있고 어디에 논점이 있는지를 비교적 분명하게 알게 된다. 그러나 비교하면서 읽으면서 알아내야지, 마루야마 마사오의 어느 책 어느 부분을 거명하면서 논쟁을 전개하지는 않는다. 여튼 이 두 책과 마루야마 마사오를 함께 읽으면서, 저간의 논쟁이 가지는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번역서의 목사를 보면, 김용옥의 해제, 영어판 저자 서문, 저자 후기, 번역자 후기, 1, 2, 3장의 순서로 되어 있다. 참고로 일본어판의 순서를 보면 1, 2, 3장, 저자 후기, 영어판 서문의 순서로 되어 있다. 1983년 신장판의 순서다. 일본어판은 이 글이 쓰여진 혹은 게재된 순서대로다. 1장은 1940년 『国家学会雑誌』에 4차례에 걸쳐서 게재되었고, 2장은 같은 『国家学会雑誌』에 41년 하반기에 3차례, 42년 8월에 한 차례 나누어 게재되었다. 그리고 징집되어 평양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쓴 3장은 같은 『国家学会雑誌』에 44년 3, 4월에 두 차례로 나누어 게재되었다. 1장은 마루야마 마사오의 조수助手논문이다. 당시 제국대학 졸업생은 조수에 지원할 수 있다. 조수는 2년에서 3년간 연구실에서 공부하며, 『国家学会雑誌』의 편집 등의 일도 한다. 한국으로 치면 조교 또는 연구생 비슷하다고 할까. 물론 교수의 지도도 받는다. 그의 경우는 난바라 시게루南原繫였다. 그리고 임기 내에 이 조수논문에 통과하면 조교수가 된다. 그의 경우 1장의 논문으로 조교수가 되었고, 2장은 그 후 1장을 보완하기 위해 쓴 보론이다. 조수논문이란 박사학위논문 또는 교수자격논문 비슷하다고 할까. 80년 전의 제도다. 물론 그래서 마루야마 마사오는 박사학위가 없다. 그리고 저자후기あとがき는 1952년 이 책을 처음 출간하면서, 영어판 저자 서문은 1974년에 이 책의 영어판을 간행하면서 쓰여졌다. 이 모든 글들이 쓰여진 시대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역자도 그 중요성을 알기에 목차에 여러 서문들의 발표시기를 기록해 두었다. 이 책을 맥락을 따라 읽으려면 일본어판의 순서가 가장 좋지만, 그래서는 외국인과 일본정치사상사의 논쟁의 맥락을 모르는 사람은 잘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이해하려면 영어판 서문을 읽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어판 이 순서를 완전히 뒤집으면서 그 사이사이에 김용옥의 해제와 번역자 후기를 넣어두었다. 그리고 맨 앞에 둔 역자 해제가 시선을 사로잡으면서 이 책의 독해를 어지럽게 하는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순서로 읽었기 때문에 내용을 가다듬기 쉽지 않았는데. 이번에 간략하게 나마 정리해 두려고 한다. 참고로 이 책의 논문들은 물론 반박하는 논문도 모두 실린 『国家学会雑誌』는 1882년에 창간된 국가학회国家学会의 잡지로 본래는 제국대학 법학부 학생, 졸업생, 교수들이 회원으로 된 조직이다. 한국식으로 이해한다면 도쿄대 정치학과 대학원에 뿌리를 둔 학회이고, 그 확회가 발간하는 잡지라고 할까. 신기하게도 한국에서 이 잡지를 가장 많이 보유한 곳은 영남대 도서관이다.
김용옥의 해제
일단 김석근이 번역한 마치 일장기를 보는 듯한 빨간색 표지의 이 책을 펼치면, 김용옥의 장황한 해제가 일단 눈을 빼앗아 간다. 지금에야 말하지만, 이 해제는 도움이 전혀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다지 도움이 된다고 말할 수도 없다. 올바른 해제라면 이 책이 놓인 논쟁사의 맥락을 짚어주는 글이어야 한다. 이 책으로 말미암은 일본에서 전개된 일본정치사상 논쟁의 맥락과 한국에서의 이해와 소개의 논란의 맥락을 짚어주는 글이어야 한다. 마루야마 자신도 문제사라고 말하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도올도 알고 있고.(31) 그러나 장장 사십쪽에 걸친 도올의 장광설은 예의 자기자랑과 경험담에 더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그럼에도 완전히 젖혀버리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 집고 넘어가야 한다. 우선, 눈에 뜨이는 것은 메이지의 작위作為를 근대적인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의 탄생과 관료제로 이해한 점.(25) 새로운 법과 제도를 만든 것에 이렇게 크고 복잡한 사상적 문제가 제기되거나 논쟁이 있을 필요가 없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마루야마가 소라이에 착목한 것은 법과 제도를 만드는 작위 그 자체가 아니라, ‘권위’의 창출 가능성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의 성공여부에 대한 판단은 실은 유보하고 있다는 점. 그러나 김용옥의 눈에는 이 책을 읽는 많은 사람의 눈에든 실로 메이지의 성공이 크게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마루야마의 다소간 회의적 시선을 간과하게 된다. 그 자신도 분명하게 서술하지 않고 있지만. 그는 다시 한번 이 작위란 일본의 작위이며, 국민국가의 작위이고, 이를 주자학의 해체과정에서 나타난 소라이荻生徂徠의 선왕의 도先王の道의 작위에서 발견하고 있다고 평가하며, ‘공’과 ‘사’의 분열, 정치적 사유의 우위, 마키아벨리적 근대성 등이 발견되고, 이러한 마루야마의 소라이 발견이야 말로, 일본정치의 발견이라고 격찬하고 있다.(32-33) 이들 하나하나의 구체적인 평가에 대해서는 뒤로 미루자. 그러나 내 눈에는 이때의 이 ‘작위’가 둘 또는 셋 이상의 다양한 차원을 넘나든다는 점이다. 근대정치사상의 사회계약이론이란 구체적인 법과 제도의 구성을 넘어서서 그런 법과 제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권위의 가상적 혹은 인위적fictional한 구성, 그리고 그 구성에 대한 동의로부터 출발한다. 어떤 의미에서 메이지 유신이 이를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만들어냈다면 그것은 근대국가의 법과 제도가 아니라 실은 ‘천황제’ 즉 국체国体를 만들어냈다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논의가 전개되면, 일본은 근대적인 즉 인위적이고 가상적인 권위의 무한한 근거로서 가장 봉건적인 ‘국체’를 만들었다는 논리가 성립하는 데, 실은 마루야마의 논의에서 이 부분은 명료하지 않다. 그래서 이러한 상찬은 완전히 틀렸다고는 할 수 없으되, 오해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이다. 김용옥의 말처럼 소라이가 서구 근대성 논의로 축소된 것인지는 알수 없지만, 마루야마가 헤겔 류의 발전론과 진보사관에 함몰되어 이 책을 쓴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점은 본문에서 충분히 논하기로 하자.
흥미롭게도 김용옥은 1989년에 있었던 마루야마 마사오와의 만남을 기록해 두고 있다. 거기서 마루야마는 동양東洋이란 픽션이라고 나이토 고난内藤湖南을 인용했다고 한다.(36) 그렇다. 동양이란 단순히 서양의 잔여가 아니다. 동양이란 일본이 화이華夷로 설명하는 동아시아의 질서관을 대체하는 새로운 개념으로 만들어낸 것이고, 거기서는 어디까지나 일본이 중심이다. 이 일본 중심으로 그려낸 동양을 가져다가 그게 한국 중심이라고 말하는게 무슨 실체적 의미가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나는 이제사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왜 이렇게 근대에 고집하는가?(38)라는 김용옥의 질문을 나도 숱하게 들었다. 그리고 그는 마루야마의 근대성에는 형식만 있을 뿐 내용은 없다고 비판한다.(39) 그러면서 그는 중세에서 근대로 가야한다고 주장하는 사상사의 패턴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40) 문제는 결국 근대modernity가 무엇인가의 문제이다. 근대는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실재다. 그것은 18세기와 19세기에 서유럽의 몇몇 국가에서 시작된 국가형성 및 국가관리 방식 그리고 경제 운영방식을 통해 만들어진 문명이자 일종의 거대한 힘이다. 서세동점의 시기에 동아시아의 국가들은 그 힘에 압도당했고, 그 힘에 침략당했고, 그 힘을 받아들였고, 그 힘을 따라가려 노력했다. 그것이 동아시아의 19세기에서 20세기까지의 역사다. 어느 만큼 따라가고 나서 이제 비로소 한숨 돌리면서 지금까지 죽도록 따라갔던 것은 과연 무엇인지 사상적으로 고민하는 것이다. 그래서 단순한 이식인지, 아니면 변용인지, 그도 아니면 맹아가 있었는지 끊임없이 따지는 것이다. 모든 사상은 현재적 의미를 추구할 수밖에 없으니까. 동아시아만 그러는 것이 아니다. 푸코가 늘 하던 작업이 결국은 모더니티의 어떤 모습이 고대에 있다 또는 그리스도교적 통치술에 있다는 주장이다. 지금 여기 근대라는 삶의 현실이자 실재가 있다. 이 사실이 사상사 연구를 압도하는 것이다. 그러니 근대에 신화적으로 매달리는 일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왜 매달리는지, 그것이 가치있는 일인지는 별개의 문제지만. 그러니 동양을 쉽게 추상화시켜서 가능했을런지 않았을런지도 모르는 다른 길을 입에서 놀리는 것은 호사가들의 일이기는 하되 참으로 무용한 일이다. 그러면서 그는 실학의 허구성을 비판하다. 마루야마 식의 논의를 조선에 그대로 적용한 것이라는 비판.(41) 나는 오랫동안 이런 주장에 동의해 왔지만, 최근에 실학에 대한 관심이 이미 일제 강점기 일본학자들과 당시 마르크시스트들 그리고 민족주의자들 모두의 주목을 받았다는 주장을 보면서(정종현, 『다산의 초상: 한국 근대 실학 담론의 형성과 전개』) 이 문제에 대한 평가가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마루야마의 작위관이 문제이고, 소라이의 작위론이 메이지 근대국가를 낳았기 때문에 작위에 대한 도덕적 반성이 필요하다는 식의 논리의 비약은 따라가기 조차 버겁다.(43) 그는 마루야마 식의 근대의 긍정이 폭력의 긍정으로 비약한다고 말하지만,(43) 근대국가란 폭력의 독점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여기서 마루야마 보다 김용옥의 근대관이 훨씬 낭만적인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그러면서 일본역사의 근대적 작위성이란 타문명의 능률적인 흡수(44) 즉 모방이라는 전통적인 일본인론으로 후퇴하고 만다. 다시 여기서 작위란 사회적인 제도나 활동양식의 차원에서 논의가 전개된다. 혼란스럽다. 김용옥의 전체적인 평가 일본 근대가 가진 여러가지 한계에 대한 지적들(43-44)에 대해서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지만, 그런 한계가 도출되는 과정에는 쉽사리 동의하기 어렵다. 이 글을 쓰기위해서 이제 이 해제는 대여섯번은 더 들여다본 것 같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글은 혼란스럽다. 그러니 이 글에서 혼란을 느끼는 것은 꼭 내 책임만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접어버리라고 말하기도 곤란하다. 이 글은 마루야마 수용의 한계, 또는 근대정치사상에 대한 이해의 어떤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그 과정에서 느꼈던 수많은 혼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내가 대학원을 막다니던 1995년이라는 배경을 생각한다면, 김용옥을 마냥 비난할수만도 없다. 그 시절의 나의 사고를 다시 돌아본다면 혼돈과 무지 이외에 다른 것은 발견하기 어려우니까. 말하자면, 마루야마의 글은 좀더 섬세하게 봐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영어판 저자 서문 (1974)
이 글은 이 책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글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주 섬세하고 꼼꼼하게 읽어야 한다. 이 글은 일본에서의 논쟁의 전개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쓰여졌고, 그래서 상황에 대한 약간의 묘사를 하고 있다. 우선 서두에서부터 자신의 생각이 이 글을 쓸 때와 적잖게 달라졌으며, 이글의 내용에 많은 비판과 도전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49-50) 그런데도 구체적으로 어떤 도전을 중요하게 여기는지는 또 말하지 않아 그 속뜻을 더듬어 가기 어렵게 한다. 그럼에도 이 책의 글들이 쓰여진 상황과 환경에 비추어 볼 때, 여전히 이 책이 의미가 있다고 강조한다.(50) ‘闇の谷間’, 일본 역사의 어두운 골짜기, 1930~40년대에 이르는 군국주의와 파시즘의 사상통제가 극심하던 시대에 자기검열과 변명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마르크스를 연상시키는 어떤 표현도 피했다.(51-53) 그는 일고一高 재학시절인 19세 때 유물론 강연회에 참여했다가 경찰서에 구류되어 특고의 수사를 받은 적이 있다. 법학부 재학시절 강좌파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도 받았다. 이 책에도 그런 흔적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요즘의 글보다 훨씬 유물론적이다. 그는 이어서 이 책이 쓰여지게 된 연구사를 간략하게 밝히고 있다. 일본 상황을 모르는 영어권 독자를 위해 친절하게 쓰여진 연구사다. 덕분에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이 쓰여지던 당시의 일본사상사 연구를 세 유형으로 나눈다. 첫째, 국민도덕론을 기초로 하는 연구로, 1910년대까지 보수적 계층 사이에 깊숙이 뿌리내린 일종의 이데올로기로서,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서구화의 급격한 파도를 맞이해 자기 국가 및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추구하려는 노력으로 유교・불교・신도에 서구 윤리중 전통에 결여된 도덕을 적당히 섞어 제국 신민의 새로운 도덕을 수립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도쿄대 이노우에 데쓰지로井上鉄次郎가 대표적이며, 그의 도쿠가와 3부작(『日本陽明学派之哲学』(1900), 『日本古学派之哲学』(1902), 『日本朱子学之哲学』(1905))』은 일본의 유교사를 역사로 다룬 최초의 역작이다.(54-55) 여기서 비로소 당연하지만, 마루야마 이전 연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노우에 데쓰지로의 연구 내용을 살필 여유까진 없지만, 마루야마의 말처럼 유럽 철학의 범주나 학파에 넣어서 해석한(55) 이전 연구가 있었기에 새로운 문제사의 도전이 가능한 것이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정치사상사 독해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연구사적 맥락 파악이 어렵기 때문이다. 둘째, 문화사Kulturgeschichte로서의 사상사로 메이지 말년부터 국민도덕론에 대한 반동으로 등한한 것으로 아우구스트 뵈크August Boeckh의 문헌학Philologie이나 빌헬름 딜타이Wilhelm Dilthey의 정신사Geistesgeschichte를 포괄하는 접근이다. 무라오카 쓰네쓰구村岡典嗣의 『本居宣長』는 뵈크의 ‘인식된 것의 재인식’이라는 문헌학적 방법이 노리나가의 고도古道・고학古学의 밑바탕에 있다고 상정한 것이다. 또 한 사람 와쓰지 데쓰로和辻哲郎의 『日本精神史研究』(1926)는 딜타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정치사상이나 사회사상 보다 문학, 조형, 미술, 연극(가부키)을 일본 전통의 핵으로 강조했고, 그는 다이쇼 초기 지식인의 전형적인 비정치적, 반정치적 문화 개념에 중심이 있다.(56) 다만 이 정신사가 일본정신을 고금을 관통하는 하나의 실체라는 의미로 보는 생각은 1930~1940 군국주의 시대에 전성기를 구가했고, 국민도덕론의 흐름에 속한다.(57)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의 입장은 이들 모두와 달라 『文学に現はれた我が国民思想の研究』(1916~1921)에서 일본의 사상을 국민의 실제 생활, 그것도 시대의 문화에 주요한 역할을 수해한 계급 즉, 궁정귀족, 무사, 평민 등의 일상적 생활태도와 관련하여 각 시대의 사조를 자연관, 인생관, 연애관, 정치관 등으로 파악한 것이다. 그는 유학자나 불교사상가의 책은 낮게 평가하고, 서민들이 좋아하던 이야기나 풍자시 그리고 노래를 광범위하게 연구하여, 민중들의 의식의 다양한 표현 형태, 발상 양식에 주의를 기울였다.(57-58) 셋째, 1920년대 후반부터 일본을 습격한 마르크스주의 유물사관에 입각한 일본사상사연구이다. 마루야마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토대의 제약을 강조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연구가 사회의 경제적 구조, 계급구성, 계급투쟁 등 구체적 상황에 관심을 두어야 하지만, 일본에서는 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애미니즘적 우주상을 의식의 밑바닥에 깊숙이 침전시켜둔 채, 유럽에서 직수입한 고등교육제도의 훈련을 받은 일본 지식인들에게 마르크스주의의 방법은 종합적・체계적 지식으로 모든 과학을 통합하는 세계관으로 받아들여졌다. 말하자면 유물론이라는 이름의 장대한 근대관념론으로 유럽에서 주관주의 철학 인식론이 수행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말한다.(58-59) 유물론 사상이 하나의 관념론 체계로 일본에 수용되었다는 주장은 흥미로우면서도 거울을 보는 느낌이 든다. 루카치Georg Lukács나 코르쉬 등 독일관념론의 영향이 강한 마르크스주의자자의 인식론 저작이 1930내에 지식인에게 읽혔고, 일본의 청년・학생들은 경제결정론을 나이브한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마루야마는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지만 세계상의 변용과정을 그려낸 프란츠 보르케나우Franz Borkenau의 연구에 큰 자극과 시사를 받았다.(60) 일본의 마르크스주의 학자가 일본사상사 분야에서 학문적 업적을 낸 것은 일본이 파멸적인 군국주의의 언덕을 달려오던 1934년 이후의 일로 나가타 히로시永田広志, 도리이 히로鳥井博郎, 사에구사 히로토三枝博音, 하니 고로羽に五郎 등은 일본의 전통사상인 유학, 국학, 신도의 연구를 통해 국민도덕론의 계보를 잇는 일본정신의 이데올로그들과 대결하여 했다. 그러나 이들은 정치적=사회적 상황에서 수세에 몰리고, 사상통제에 노출되면 될수록 과학의 보편성과 객관성의 요청을 내걸었다. 자신의 도덕적 선호에 따른 사상사 즉, 국민도덕론에서 황도皇道철학에 이르는 국체찬미론에 의한 사상사를 비판하고, 가치판단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주장을 마르크스주의 학자가 내놓고 있다.(60-61) 이상은 연구사이기도 하지만, 당시의 지적 분위기 전반을 언급한 것이다. 당시의 마르크스주의는 서유럽의 그것과 또 달랐다. 일본의 분위기가 있어서 마치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했던 역할을 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국민도덕론과 국체国体찬미론과 마루야마의 연구가 대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드러낸다. 마루야마가 발견한 일본사상에서의 근대성 논란을 일차적으로 그 맥락 속에서 평가되어야 하는 것이다.
마루야마는 사상사를 사상의 논리적 발전으로 ‘안으로부터’ 파악하는 시각과 이데올로기의 사회적 기능에 착안하는 ‘바깥으로부터’의 시각을 연결시키기 위해 칼 만하임의 ‘지식사회학’에서 말하는 시좌구조Aspektstruktur나 사고모델Denkmodellen 즉, 사회적 토대와 개개의 정치적=사회적 제 관념의 중간에 있으면서 양자를 매개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과 보편적 이데올로기 개념에서 시사를 얻게 된다.(64) 따라서 그는 1장에서 도쿠가와 초기 주자학을 주자학적 사유양식이라는 비인격적 레벨에서 파악하고, 그런 사유양식이 겪는 역사적 변질 속에서 도쿠가와 시대의 정통적 세계상의 해체과정을 추적해 보려했다. 그가 주자 철학의 특징인 규범-자연의 연속성이 분열되어가고, 그 분열이 국학 사유양식의 성숙을 준비하게 된다는 구성은 보르케나우의 연구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법과 그 제 범주의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서술에서 힌트를 얻었다.(64-65) 2장은 퇴니스, 베버, 트뢸치에게 시사를 받기는 했지만, 특정인의 영향은 받지 않았고, 원래 1장의 보론 성격이다. 1장이 유학의 철학적 범주나 국학의 비정치적 문학이론의 분석에 주안점을 두었기에, 좁은 의미의 정치적 이데올로기 고찰로 보완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에도 시대 표면의 정치적 교의에는 사회계약설이나 인민주권론은 물론 안도 쇼에키安藤昌益를 제외하고선 저항권이론 조차 발생했던 흔적이 없다. 썩어빠진 유학자의 공리공론을 비웃은 평민 사상가의 리얼리즘은 태평한 천하에 대한 긍정을 의미하는 것이고,(히라가 겐나이平賀源内, 시바 고칸司馬江漢, 가이호 세이료海保青陵) 존왕론은 전통주의자나 국체론자들이 강조하는 것만큼, 반막부적이지도 반봉건적이지도 않았다. 따라서 ‘생각지도 않은 결과’로서 근대의식이 준비되는 과정을 사상사적 레벨에서 그려내기 위해 정치적=사회적 질서에 대한 기초지움의 방식의 차이라는 2장의 관점을 설정했다.(65-66) 왜 마루야마는 ‘근대의식’의 성장에 매달렸는가. 우선 일본에서는 근대가 특수한 의미와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 특히 여기 실린 논문이 쓰여질 당시는 지적 서클에서 ‘근대의 초극’이 빈번히 논의되던 시대였다. 초극되어야 할 근대란, 넙게는 르네상스 이후의, 좁게는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 이후의 서구의 학문, 예술 등의 문화에서 기술, 산업 및 정치조직까지 포괄하는 복합적인 개념이다. 현대의 세계사는 영국・미국・프랑스 등 선진국이 담당해온 근대와 그 세계적 규모의 우월성이 무너지고 완전히 새로운 문화에 의해 대체되는 전환점에 있다는 것이 초극론자들의 시각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파시스트들이나 군국주의자들은 아니었다. 1940년대 초의 시대적 분위기에서 그런 외침은 영국・미국・프랑스 등에 의해 대표되는 시대에 뒤떨어진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를 타도하고, 군부・혁신 관료・반의회주의 정치가・좌익에서 전향한 지식인 모두, 일본・독일・이탈리아 등이 밀고나가는 ‘세계신질서’의 건설에 협력하는 것이 지식인의 사명이라는 제창에 휩쓸리고 있었다. 여기서 근대의 병리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모든 영역에 침윤했고, 지식인 사회가 가장 심하게 침식당하고 있다는 진단을 수반하고 있었다. 또한 일본 국내의 이데올로기적 획일화 요구도 내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근대의 초극론과 배후의 전체주의에 강한 저항감을 품은 지식인과 연구자들은 각각의 분야에서 속죄양이 되어있던 근대를 옹호하는 것을 의무로 느끼고 있었다.(66-68) 메이지 이후의 일본은 이미 충분히 근대화되어 있다, 너무나 서구 근대의 문화나 제도를 흡수한데서 오는 독소가 나오고 있다는 주장과 근대에 오염되기 이전 일본에는 고대 신앙과 유교를 비롯하여 아시아대륙에서 넘어온 동양정신이 혼연일체가 되어 아름다운 전통을 형성했고, 여기서 근대를 씻어내야 한다는 주장은 표리일체의 관계에 있다.(68) 마루야마가 도쿠가와 시대의 근대적 사고방식의 성숙과 그 정도를 헤아린다는 것은 근대의 초극론에 대항한다는 동기가 깔려있었다.(68) 간략하게 말하면 (a)일본은 그렇게까지 근대화되어 있지 않았다. 전함을 만드는 고도의 테크놀로지와 아마테라스의 신칙으로 최고통치자가 정해져 있다는 국가신화가 공존협력할 수 있다. (b)메이지 유신 이전에 전통주의자들이 미화하는 정도로 근대와 인연이 없는 동양정신이 역사적 변화로부터 벗어나 지속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을 논증하려 한 것이다.(69) 그러나 갑장스럽게 소집 영장이 날아들어 3장을 급하게 쓰고 유고처럼 남겨두고 평양으로 떠나게 된다.(70) 그는 군국주의에 협력할 수 없어 장교지원을 하지 않았다. 평양에서 각기병으로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고, 다시 징집되어 히로시마에서 근무하다 피폭까지 당하게 된다. 제국대학 조교수였던 그를 대학생이라 부르면서 괴롭히던 평양의 이등병 생활에서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육군지원병훈련소에서 철저한 황민화 교육을 받고 온 조선인 일등병이었다는 마루야마의 회상은(가루베 다다시, 『마루야마 마사오: 리버럴리스트의 초상』, 109) 실로 가볍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의 절박한 상황이 모든 것에 대한 답변은 될 수 없겠지만, 1940년대 일본의 사상계의 상황에서 그는 그 나름의 응답을 한 것이다. 이점이 그가 ‘근대’에 집착해서 소라이와 노리나가를 연결지은 하나의 맥락이 된다. 그렇기에 이 영어판 서문은 1960년대 이후 무수하게 쏟아진 비판들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다. 게다가 그의 소라이에 대한 연구도 노리나가에 대한 연구도, 근대의 맹아에 대한 해석과 한계에 대한 해석이 공존하고 있다.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발견된다.
그리고 영어판 서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에 대한 비판 중 수용할 내용을 자신의 오류라고 밝히고 있기도 하다. 첫째, 주자학적 사유양식이 사회적으로 보편화되었고, 그 보편성이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에 붕괴하고, 고학파의 대두에 의해 도전에 처한다는 생각은 역사적 진화라는 생각에 사로잡혔고, 구체적 역사적 사실에 대응하지 못했으며, 문치 정책에 의한 유교의 고전과 주석서 발간 등으로 이데올로기로서 유교 교의가 침투해 들어가는 것이 17세기 후반 이후의 일임을 인정하고 있다.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斎가 주자학을 강의하기 시작한 것은 1655년, 야마가 소코山鹿素行가 주자학에 도전한 것은 1666년, 이토 진사이가 고의古義의 초고를 마련한 것이 1663년 경으로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보급과 고학파의 도전은 거의 동시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게다가 도쿠가와 사회의 시좌구조를 이루는 유교의 근본적 제 범주는 막부 말기의 마지막 순간까지 유통성을 강인하게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주자학적 사유방식의 보급과 해체라든가 자연에서 작위로의 진화론적 도식이 실증을 감당할 수 없다고 인정한다. 다만, 이 책의 개개의 분석 소라이학의 내적 구조나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의 분기, 소라이학과 국학의 사상적 연관에서 사적 영역의 해방이 계승되었다는 성과는 앞으로도 살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72) 이미 여기서 1장과 2장의 주요한 주제들의 도식이 붕괴했음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 영어판 서문을 너댓번이나 읽었지만, 이 말의 의미를 앞에서 말한 와타나베 히로시의 책들을 읽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둘째로 이 책의 치명적 결함으로 일본주자학의 일본적인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순수하게 중국에서 직수입한 것으로 보고 있음 또한 인정하고 있다. 일본 주자학과 중국 주자학의 괴리는 처음부터 드러나 있었고, 야마자키 안사이 만이 아니라 에도 유학의 출발점인 하야시 라잔林羅山이 이미 주자학의 수정주의적 이해 위에 서 있다는 점을 말하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그랬다면 도쿠가와 유교사 전체가 이 책과 다른 퍼스펙티브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셋째로 조선 주자학 즉 이퇴계 학문과 사상을 고찰에 넣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72-73) 실제로 일본 주자학이 중국의 주자학과 어떻게 다른 지 그리고 왜 다를 수밖에 없는지를 논구하는 것이 와타나베 히로시의 저술이다. 『주자학과 근세일본사회』 본문의 첫번째 각주에서 마루야마 마사오의 이 영어판 서문을 언급하고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자신의 맹점을 인정하는 마루야마도 그것을 지적하는 와타나베 히로시도 서로 전거를 들어서 논쟁하지는 않고 있다. 실제 와타나베 히로시 이전부터 수많은 사람들의 도전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마루야마 마사오의 입으로는 이를 분명하게 말하지 않고 있다.
이 책을 읽고나서 마지막에 다시 읽어야 하는 것은 해제가 아니고, 마루야마 마사오의 영어판 서문이다.
저자후기あとがき(1952)
저자후기는 1952년 한국전쟁이 한참 진행 중이던 시절에 이 책을 간행하면서 쓰여진 것이다. 그는 그때 군국주의와 파시즘에 관한 비판을 한참 전개하던 와중이었다. 무엇보다 전쟁에서의 패배로 일본제국주의는 해체되었다. 이것은 커다란 단층이다. 그는 우선 이 책의 여러 문제설정이나 분석의 진행방식 내지 다양한 역사적 범주의 규정 자체가 8.15 이전의 각인을 받고있으며, 그 이후 수백년에 비견할 역사적 상황의 변동의 의미를 되씹어야 하는 현재와는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78-79) 어디까지나 근대초극론을 염두에 두고 읽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일본사상사 연구는 이 책의 방법론의 확장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과 조명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79) 다만 이 책에서 시도한 분석을 폐기할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조합이나 배열속에서 기능변화를 겪어야 한다고 평하고 있다.(80) 이미 사이고 노부쓰나西郷信綱와 훗날 자신의 강의를 이어받는 마쓰모토 산노스케松本三之介의 「近世日本における国学の政治的課題とその展開」를 평가하고 있다.(80) 특히 그는 여기서 자신의 작업이 통사가 아닌 문제사라며, 당시의 의도와 주도동기Leitmotiv를 말한다. 1장과 2장은 서로 밀접하게 보완하는 관계로 봉건사회의 정통적인 세계상이 어떻게 내면적으로 붕괴해가는가에 대한 연구로 일본사회, 일본사상의 근대화의 패턴 및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갖는 특질을 규명하려 했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도쿠가와 봉건사회의 시좌구조와 유교적 세계관의 구조적 추이를 문제삼은 것이다. 이것은 근대성 정도에서 가장 낮은 레벨까지 내려가 거기서 가장 고정성이 강한 정신 영역, 가장 추상적 사고의 모형에서 내면적 붕괴를 어디까지 검색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이라고 평가한다. 다라서 정치사상에서 근대화 과정에 대한 서술은 원래 의도하지 않은 것이라고 자답한다.(81) 사상의 내재적 자기운동의 추상적 부정이 아니라 자기운동 자체를 구체적 보편인 전체 사회체계 변동의 계기로 적극적으로 파악하여 해야 사상사와 사회가적 연구가 만나게 되며, 전근대사회에서는 이데올로기와 하부구조가 서로 얽혀있다고 평한다. 루카치를 인용해 경제적 및 법률적 범주는 그 자체로 내용적으로 떼어놓을 수 없게 얽혀있다고 말한다.(82) 어떤 의미에서 훗날의 영어판 서문에서 이미 부정한 내용들을 아직까지 역설하고 있다. 특히 여기서 중국의 정체성停滯性에 대한 일본의 상대적 진보성이라는 입장을 번복하고 있다. 그러면서 괄호가 쳐진 근대를 경험한 일본과 그것에 성공하지 못했던 중국의 대중적 기반에서의 근대화를 언급한다.(83) 사실 이 구절을 여러 연구자들이 들어서 다양한 방법으로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데. 때로는 지나치거나 부당하다고도 생각한다. 1940년의 중국은 독립된 근대 국민국가를 결성하지 못하고 일본과의 전쟁과 내전을 동시에 치르고 있으니 정체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었다. 1952년의 중국은 농민 공산혁명을 이룩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했으니 마치 대중적 근대화를 이룩한 듯 보였다. 꽤 오랜기간 마오의 중국에 대해 외부 연구자들은 환상을 가졌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 시기의 학살과 참혹의 현실 그리고 혁명의 실상에 대한 사실이 보고되고 있다. 그러니 이런 간략한 인상비평에 큰 의미를 두는 것은 지엽말단에 휘말리는 것이다. 중국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일본이 근대적이라 말할 수 있다. 물론 주자학을 매개로 논의를 전개하다보니 비교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마루야마는 여기서 도쿠가와 사회의 근대적 요소의 성숙 만이 아니라 어떤 반석 같은 체제도 자체에 붕괴의 내재적 필연성을 가진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 자체가 ‘영혼의 구원’이었다고 자평한다. 기계적 편향성에 빠졌음도 인정하지만. 그러면서 봉건적 이데올로기를 내부에서 해체하는 것이 근대의식의 징표는 아니라 해도 근대의식의 성숙을 준비하는 전제조건이라 말한다.(84) 실은 이런 견해가 1장의 말미에 아주 간략한 형태로 나타나 있다. 또한 작위 계열의 근대성에는 제약을 가하고 있고, 일군만민적인 절대주의 사상에 대해 평가가 후했지만 본질적으로 반봉건적 요소를 인정하는 것이 내심이었다고 말한다. 이 문제에는 도쿠가와 봉건제가 전형적 수봉관계가 아닌 가산적 관료제의 계기가 침투되어 절대주의화의 길이 유럽적 절대주의(관료화된 후기가산제)가 아닌 아시아적 전제로의 방향과 중첩되는 것을 탐구해야 한다고 말한다.(84-85) 실은 이런 식의 근대화로의 이행경로에 대한 연구가 사회사에서 1990년대초까지 이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동구권의 붕괴 이후 이런 관심은 시들해져 버렸지만. 남은 관심은 만민에 대한 즉 네이션 형성에 대한 것 정도랄까. 그리고 3장은 내셔널리즘 사상이 국민주의 이론으로 형성되어 국가주의로 변모해 갔는가라는 관점으로 파악하려는 의도였다고 말한다. 완성하지는 못했지만.(85) 그는 크로체의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는 말과 트뢸치의 현재적 문화 종합을 언급하면서, 국체사관의 횡행 속에서 역사의식과 위기의식의 내면적 연계성을 의식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내셔널리즘에 대한 관심은 이 원고에서 싹텄다고 말한다.(86) 실로 행간 곳곳에서 긴장감이 느껴지는 3장은 또 그 나름 읽는 맛이 있다. 도대체가 결혼한지 3개월된 사람이 돌아올 가능성을 가늠할 수 없는 소집영장을 받고 마지막으로 남은 일주일간 원고 마무리에 몰두한다는 것 자체가 한 사람의 정신의 숭고함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을 읽을 때 나는 늘 마음을 가다듬고 옷깃을 여미게 된다.
그리고 번역자의 후기가 이어진다. 이 번역이 없었더라면, 이 책을 읽을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기껏해야 영역본을 구해서 기웃거렸을 테니, 고마운 마음이 앞선다. 그렇지만 불만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무엇보다 중국어와 일본어의 표기법이 통상적이지 않다는 점이 불만이다. 출판사의 입장인지 번역자의 뜻인지는 알 수 없지만, 표기란 원음에 가깝게 하는 것보다 정보의 확인과 소통을 위한 것이라고 믿는 편이라, 이 글에서는 알아서 그냥 고쳤다. 한글이 많은 음성을 표시할 수 있다고 그게 실제 해당언어와 가까운 것도 아니고, 원음에 가깝게 표기한다고 일종의 합의로 존재하는 표기법을 뛰어넘는 데는 동의하지 않는다. 게다가 문장을 아주 친절하게 풀어 쓴 나머지, 天地自然은 하늘과 땅이 스스로 그러하다고 되어 있어서 다소 읽기 불편한 점이 없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일본어판을 펼쳐놓고 대조해 가면서 보다 어려움을 해소할 수 있었다. 그외에 사소한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그런 건 대체로 독자가 알아서 해야할 일이라 생각한다. 다만, 마루야마가 중국의 전적(논어, 맹자 등)을 인용할 때, 역자는 한문을 전재했다. 반면 마루야마는 이를 한문에 토를 달아 일본식 번역문으로 표기하고 있는 점을 지적해 두려 한다. 읽으면서 신경써야 할 부분은 중간중간에 표시해 두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보자.
2018. 12. 10.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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