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또오 노리히로加藤典洋(가토 노리히로), 『사죄와 망언 사이에서: 전후 일본의 해부敗戦後論[패전후론]』, 서은혜 역, 창작과비평사講談社, 1998(1997).
가토 노리히로의 『패전후론』에 대해 한 번이라도 슬쩍 거치지 않고 넘어가는 일본 사회나 정치 또는 사상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패전후론’이라는 제목 자체가 던지는 의미가 적어도 일본 맥락에서는 의미심장한 듯. 한국인에게는 왜 묵직한지 이해가 안되겠지만. 일본에서는 통상 전후戦後 또는 전후론戦後論이라고 한다. 패전이라는 말 대신에 전쟁이 끝났다는 뜻의 종전終戦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이제 곧 끝날 아베 정권도 전후의 완성이라는 이름으로 개헌을 하려고 했었다. 결국 못했지만. 가토 노리히로는 단순한 종전이나 전후가 아닌 패전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해야만 그 이후로 갈 길이 열린다는 의미의 주장이다. 그 시도 자체는 옳지만 그걸 해결하는 방안은 좀 기이한 부분이 있는데.
「패전후론」은 1994년에 도쿄신문에 연재되던 글을 기반으로 한 것인데. 이 시점은 일본에서 오래 지속되던 자민당 지배가 끝나고 처음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시기와 맞물린다. 1993년의 호소카와 모리히로 내각이 성립되어 최초의 비자민 내각이 등장했고. 침략 인정, 그리고 1994년 자민당과의 연립인 무라야마 내각에서 식민지배 사죄 등이 이루어지던 시기이다. 1996년 다시 자민당의 하시모토 류타로를 총리로 하는 사회당과의 연립내각이었다가, 1998년 오부치 내각의 성립으로 자민당 단독 정권으로 돌아가지 전까지. 그리고 다시 10여년을 지나 2009년 하토야마 유키오를 총리로 하는 민주당 정권이 수립되어 2012년 연말에 다시 지금의 아베의 자민당 정권이 수립되기까지. 두 번의 짧은 정치적 정치적 봄날이 있었다고나 할까. 굳이 한국과 비교하면, 호소카와-무라야마-하시모토로 이어지는 과정은 혁신계가 정치에 참여하고 연정을 하는 과정에서 보수에 먹혀버리는 과정으로, 김영삼 정부에 참여하면서 들어간 민주화 인사들이 보수화하는 과정과 흡사하다. 그러나 한국은 DJP연합에 의한 김대중 정부의 연립 정권 그리고 노무현 정권의 탄생으로 연속적이면서도 점진적인 정권교체를 이룩했다면, 일본은 반복적으로 보수세력에 의해 정권교체가 짧은 실패로 끝나고 있다. 스가 요시히데 이후는 또 어떻게 될런지 모르지만. 시기적 역동성 내지 가능성에 배경을 두고 이런 논의들이 등장했다는 점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의원내각제인데다. 영국이나 독일과 달리 파벌에 의한 총리 교체가 잦아서 외부인이 그 역동성을 잘 이해하기 어렵지만.
정치만이 이 시점이 분기점이 아니다. 정치는 봄날 처럼 보였을런지도 모르지만. 1995년은 충격적인 사건이 연속해서 발생한 한 해다. 봄의 옴 진리교에 의한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사건이 발생했고, 여름에는 한신아와지 대지진으로 전후 일본 사회에 거대한 충격을 가져왔다. 게다가 미야다이 신지에 따르면, 이 때가 원조교제라는 이름의 미성년자 성매매가 극심했던 한 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1986년생 이후, 즉 1995년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와 경험한 세대가 다르다고 말하는데. 얼마나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또 한 번의 정치적 봄날인 민주당 정권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그에 뒤이은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겹쳐진다. 1994~5년, 2011년은 정치적은 물론 사회적 경제적으로도 일본의 분기점일지 모른다. 그 결과는 고이즈미와 아베의 장기집권.
가토 노리히로의 「패전후론」은 읽다보면 어떤 의미에서 ‘국민 형성nation building’을 기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일본 정치를 바깥에서 보는 사람으로서 주권자로서의 국민이 과연 일본에서 역동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인지 때론 의구심이 든다. 어찌보면 아직도 ‘일군만민’ 식의 천황과 다수 신민이 개인적인 연결을 통해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이고. 그렇다고 일본에 국민이라는 주권자가 없다는 식으로 말하려는 것은 아니고. 분명히 있는데. 잘 보이지 않을 때도 있고, 작동 방식도 외부에서 보는 것과는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간단하게 평하기는 어렵지만. 여튼 그런 의미에서 가토 노리히로는 하나의 역사적 주체를 형성하자는 주장인데. 이게 지식인들의 논의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역사적 계기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허튼 소리에 가깝지만, 그럼에도 무의미한 것은 아니고 나름의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문학에 관한 논의도 많고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한에서 간략하게 이야기해보려 한다.
「패전후론」
여기서 나는 이 전후라는 시간 동안 아직도 계속되는 전자, 즉 ‘비틀림’의 측면에 관해서 생각하려 한다. 전후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것이 뒤죽박죽된 ‘거꾸로 된 세상’인데, 그것이 어느 누구의 눈에도 ‘거꾸로’라고 보이지 않게 되었을 무렵부터 우리는 그것을 ‘전후’라고 부르고 있다.(27) 우리들의 평화헌법 유지는 이 ‘강제’라는 사실에 눈을 감음으로써 이루어졌다. 우리는 이를 옹호하거나 혹은 부정하려 했지만 그 어느 쪽도 현실을 직시한 것은 아니었다. 현실은 어떠했는가. 우리는 ‘강요’당했지만 모두 일단 설득되어 그런 편이 좋아,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가지밖에 없다. 강제된 것을 지금 자발적으로 다시 한번 ‘재선택’하는 것이다.(37)
일본의 전후란 거꾸로 된 세상인데, 거꾸로라고 보지 않는 것. 패전을 슬쩍 덮어버렸다는 뜻인데. 거기서 평화헌법 문제가 등장한다. 평화헌법 즉, 교전권을 포기하고 전쟁을 금지한 일본국 헌법 9조의 성립과정을 보면, 점령군인 미국의 강제, 강요, 강압에 의해 수립된 것을 마치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고. 나도 기이하게 생각했지만, 구 메이지 헌법의 개정 절차를 걸쳐서 이 헌법을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단절이 있어야 하는데. 법률적 절차나 과정 상 단절이 없다. 그래서 가토 노리히로는 지금이라도 국민투표 절차를 걸쳐서 이 헌법을 재선택하자고 주장하는데. 물론 이는 개헌파들을 상대로 하는 주장이지만. 이미 지금까지 실용적으로든 이념적으로든 재선택되어 온 것이 아닌가. 가토 노리히로의 답답함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이른바 미노베 의견서에서 그는 헌법개정은 독립 후 국민의 손으로(예컨대 국민투표 등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그때까지 임시형태로 끌어가기가 어려워 지금 헌법을 개정해야만 한다면 항복이라는 현상을 기초로,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으로 “수정”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며 몇개 조를 예로 들고 있다. 거기서 들었던 개정헌법 제1조란 이런 것이었다. 제1조 일본제국은 연합군의 지휘를 받아 천황이 통치한다.(42) 여기에는 분명 뒷날 하야시 타쯔오[다쓰오]林達夫가 ‘아큐파이드 저팬(Occupied Japan) 문제’라고 부르게 될 문제가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하야시는 점령하게 있는 일본의 지식인이 그러한 사실에 무감각하다는 것에서 일종의 근본적인 결락을 보고 있는데 일본이 점령하에 있다는 것의 의미가 1971년, 『쯔다 소우끼찌[쓰다 소키치]의 사상사적 연구』를 쓰는 시점에서도 이에나가에게는 여전히 확실치 않았던 것이다.(47-48) “천황폐하 만세! 이 부르짖음이지. 어제까지는 이건 낡아빠진 것이었지, 하지만 오늘은 가장 새로운 자유사상이라네.”[다자이 오사무, 「판도라의 상자」](52) 여기 나타나는 ‘천황’에 대한 언급은, 이들 네 사람[다자이, 미노베, 쓰다, 나카노]이 천황신본자로 바뀌었다는 뜻이 아니라 싸움에 졌다는 사실을 기점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의 비틀림에 주목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들의 천황찬미는 추락한 우상으로서의 천황을 향한, 그 자체가 이미 ‘비틀린’ 천황찬미인 것이다. 천황은 패전 직후 매카서[맥아더] 옆에 전학온 학생처럼 직립부동의 자세로 세워져 있던 사신에 체현된, 이러한 ‘비틀림’이라는 고통의 상징이기조차도 포기한 존재라는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53)
오히려 흥미로운 것은 미노베와 다자이의 주장이었다.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는 1930년대 천황기관설과 국체명징 사건으로 귀족원에서 쫓겨났고 우익의 습격도 당했던 인물인데. 헌법개정 과정에서는 국민주권 조항에 반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메이지 시대의 인물이라는 이야기 구자유주의의 한계라는 식으로 말하기도 하는데. 가토 노리히로는 다른 면을 부각한다. 헌법 1조에 ‘연합군의 지휘를 받아’라는 구절을 넣음으로써 패전과 점령이라는 현재의 상황을 명시하자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헌법을 구성하면, 반드시 개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야시 다쓰오의 점령에 대한 무감각 주장도 흥미롭지만, 다자이의 오사무의 ‘천황폐하 만세’가 자유사상이라는 비아냥은 나름 통렬한 것이기도 하다. 어느날 한 순간 모두들 자유주의자 민주주주자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사상의 자유가 암묵적으로 억압되면서 한쪽 방향으로 몰려가고 다들 과거를 덮어버린다는 주장인데. 1960년 김수영 시인의 「김일성 만세」가 연상된다. 왠지 읽어봤을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결국은 모두가 알고 있는 패전과 점령이라는 사실을 마치 없는 듯 말하는 상황에서 등장한 패전국가의 뒤틀림에 대해서 끊임없이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인식은 지금도 일본의 비판적 지식인에게는 계속해서 나타난다.
내 생각에 전후라는 이 시대의 본질은 일본이라는 사회가 인격적으로 둘로 분열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특별히 인격적인 분열이라고 전제하는 것은, 예컨대 미국에서의 민주당과 공화당, 영국에서의 보수당과 노동당의 병립 상태를 가리켜 우리들은 국론의 이분이라고 하지만 일본에서의 보수와 혁신의 대립은 이와 같은 것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 차이를 비유적으로 전자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인격의 대립이고 후자는 하나의 인격이 분열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간단히 말하자면, 일본 사회에서 개헌파와 호헌파, 보수와 혁신이라는 대립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이른바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라는 분열된 인격의 조각난 표현양태, 바로 그것이라는 말이다.(56) 아마도 난징대학살에 관한 ‘날조’ 발언은 발언자의 진심일 것이다. 호소까와[호소카와] 정권을 이어받는 식으로 이루어진 내각의 “각료가 되었다고 해서 자신조차 호소까와 씨와 같은 부류의 인물로 간주되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강한 불안”이 이 인물로 하여금 역으로 그런 “소리를 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57-58)
앞서 이야기한 호소카와 내각 그리고 무라야마 내각에서 총리의 사죄와 그에 뒤이은 각료의 망언은 이 책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한국어판의 제목이 「사죄와 망언사이에」인 점도. 이 점을 영미는 두 개의 인격으로 일본은 하나의 인격이 분열된 것으로. 이를 지킬 박사와 하이드로 비유해서 표현한다. 그런데 실은 호소카와 내각이든 무라야마 내각이든 연립내각이다. 일본신당이든 신생당이든 사키가케든 보수 정당에서 갈려나온 이들이다. 이들이 연립내각을 구성했다고 해도 각자 다른 입장일 수 있으며, 의원내각제 제도하의 정치인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특별할 것도 없다. 이들이 하나의 인격인데 분열된 상태라는 상정 자체가 하나의 인격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을 보여주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차라리 두 개의 인격을 국민적 차원에서 구성하려는 편이 낫지 않나 싶다. 가토 노리히로의 논리를 그대로 가져다 쓴다는 전제하에서.
이러한 두 종류의 주장은 한 가지 점에서 본질적인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개헌에 의한 자주헌법 제정론, 호헌에 의한 평화원칙 견지론은 양쪽 모두 자신들이 목적으로 하는 이상이 그대로 실현될 수 있다고 간주한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고, 에또오 쥰[에토 준]과 오오에 켄자부로오[오에 겐자부로] 두 사람은 어딘가 정신적 쌍둥이를 연상케 할 만큼 결백한 신념에 대한 신앙을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다. 여기서 없는 것은 한마디로 역시 ‘비틀림’이라는 감각이다. 한발 더 들어가 말하자면 대립자까지를 포함하는 형태로 자신들을 대표하자는 발상이 양쪽 모두에게 결여되어 있다. 예컨대 미국의 양대 정당제란, 대립하는 두 개의 정당 가운데 일단 어느 한쪽이 정권을 잡으면 대립자였던 상대를 포함하는 ‘우리’를 대표하겠다는 자세 위에 성립된다. 하지만 이것은 상대와의 관계로 자기를 정의한다고나 할까, 그것과는 역방향의 대립, 요컨대 한 인격의 분열이라는 양상을 띠는 것이다.(60-61) 조국을 위해 죽어간 3백만의 사망자는 외부용 정사 속에서 확실한 위치를 부여받지 못했다. 침략당한 나라의 인민에게는 악랄한 침략자일 뿐인 자국의 사망자들을 정사에서 “되죽이”고 있는 것이다. 침략자인 죽은 자들을 “감싸안고” 그들과 더불어 국제사회 속에서 침략자라는 낙인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실은 하나의 인격으로 국제사회에서 침략전쟁 담당자로서 책임을 지는 첫걸음이라는 식으로는 이 지킬 박사의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64) 또한 이것을 천황을 신봉하는 개헌파 쪽에서 보면 기만의 기점을 이루는 것은 쇼오와[쇼와] 천황의 책임포기 문제이다. 쇼오와 천황이 선전포고 서명자로서의 책임을 패전시 아니면 점령 종결시, 그도 아니라면 또다른 시점에서의 퇴위로 명백히해야만 했다는 것은, 전후의 천황 지지자들이 어떤 궤변을 늘어놓더라도 누구의 눈에나 뻔한 일이다. 천황의 책임이란 신민에 대한 책임이며 무엇보다도 그 이름 아래 죽어간 자국 병사들에 대한 책임 바로 그것이다. 아시아의 2천만 사망자들에 대한 책임은 우리들 일본 국민에게도 돌아오지만 그와 동시에 천황은 자국의 3백만 사망자에 대한 책임의 일단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79) 거기[베를린장벽 붕괴]서 사라진 것은 더러움 없는 이상사회로의 길목에 한 줄기 현실성을 보증하던 바로 더 맑스주의의 ‘위대한 이야기’다. 우리들이 때묻지 않은 존재로서 때묻지 않은 것을 목적으로 삼는 길은 거기서 끝나버렸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더럽혀진 존재로서 더렵혀진 장소에서 ‘진짜’와 ‘좋은 것’을 찾아가는 길, ‘선에서 선을’이 아니라 ‘그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 때문에 ‘악에서 선을 만들어내야만 하는, 샛길이라고는 없는 외줄기 길이다.(84-85) 전후의 개헌파・보수진영과 호헌파・혁신진영의 대립. 금세 알 수 있듯이 여기 있는 것은 ‘정결하고 결백한’ 히노마루[일장기]]와 적기赤旗의 대립, 깨끗하고 결백한 것들끼리의 대립이며, 문자 그대로 이렇게 순수한 이념과 심정의 대립구도를 문학의 세계에서 전형적으로 체현해온 사람이, 둘 다 생애의 일정한 시기에서 오오오까[오오카 쇼헤이]와 교분이 깊었던 에또오 쥰과 오오에 켄자부로오라는 대표적 전후 문학인인 것이다.(86)
에토 준과 오에 겐자부로의 공통점을 정신적 쌍둥이로까지 표현한다. 이 둘은 어느 점에서 같은가. 그것은 양자가 서 있는 입장 자체가 ‘무구無垢’한 국민을 추구한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한쪽 편에서는 천황의 명령에 따라 전쟁에 참여해서 희생된 3백만이 ‘영령’이 되는 것이며, 아시아의 2천만 희생자들은 그들의 힘이 약해서 무력해서 생긴 문제이고. 이들은 어디까지나 일본 바깥의 문제가 된다.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이 전쟁에 참여하고 협력한 자들이 모두 잘못한 것이기 때문에 아시아의 희생자 2천만과 침략전쟁의 대상에 대한 철저한 사죄가 필요하다는 것인데. 일단 그럴 듯한 대립이기는 한데. 문제는 일본의 좌파 또는 혁신파가 그렇게 일관된 주장을 해왔는지는 다소 의심스럽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선명한 일본 좌파는 집권을 포기(?)하고 선명성을 내세우다가 집권하게 되었을 때 결국 무능함을 드러내면서 몰락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애초에 집권을 포기한 정당이나 정치세력의 존재이유라는 걸 어디서 찾아야 한단 말인지. 나는 사실 여기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여튼 여기서 논점의 핵심은 3백만 영령이고, 다시 말해 야스쿠니 신사의 문제다.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최초로 참배한 것이 1985년의 나카소네 야스히로, 그 이전에는 전쟁체험자들이 많아 가질 못했다. 물론 이 문제의 출발점은 천황이 전쟁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데 있지만. 그것 뿐일까. 가토 노리히로는 일본의 좌파와 우파 또는 보수파와 혁신파, 또는 개헌파와 호헌파가 각자 나름의 ‘무구’한 국민적 정체성을 구성하고, 일관성있는 주체를 형성하고 다른 주체를 배제하고 있다는 주장인데. 나는 국외자에 불과하지만, 여기에 동의할 수가 없다. 내가 가진 의구심은 일본의 혁신파 내지 호헌파는 ‘국민’이라는 주체 형성에 실패한 지식인으로 몰락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 물론 역사적 주체란 역사적 계기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사실 이점이 한국어판 서문에 실린 백낙청의 조심스런 비판의 요지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가토 노리히로의 주장에 의하면, 에토 준으로 대표되는 개헌파/보수파도 오에 겐자부로로 대표되는 호헌파/혁신파도 모두 자신의 ‘무구’를 근거로 반대파를 공격하는 전략적 위치를 가지려고 한다. 자신의 주장이 자신의 입장이 자신이 선 위치가 자신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무구’해야만 상대를 비판 내지는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무구’함이 큰 무기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가토 노리히로가 인용하는 백낙청의 말, 이 책에서 말하는 일본 전후의 ‘비틀림’과 같은 것이 해방 후의 한국에도 있다(4)는 주장에 대해 조금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친일’을 가장 먼저 비판한 것은 학병세대였다. 친일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인데. 그건 순전히 나이와 관련된 문제였다. 조금만 일찍 태어났으면, 제국 일본의 식민지 엘리트가 될 이들이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세력은 이승만 정권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이들이 기록한 한국전쟁사도 그렇다. 지금의 아스팔트 우파는 이승만-박정희 정권을 엮지만, 박정희는 이승만의 귀국을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민주화 세력의 군사 독재에 대한 비판. 이 모든 것들은 자신들의 ‘무구’에 근거를 둔다. 그러다보니 간간이 ‘식민지 근대화’론 같은 가토 노리히로의 더럽혀진 히노마루 같은 주장이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 식민지 근대화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양과 양태를 띈, 예를 들면 ‘개발 없는 개발’, 중층화된 차별구조의 고착 같은 실제적인 모습을 직시하지 않으면, 낭만적인 ‘아! 대한민국’의 반복이 될 뿐이라는 점. ‘무구’에 근거한 비판은 초보적이면서 때론 무책임하고 또 반대파의 공격에 취약하지만. 그것이 동시에 역사적 단절이 필요할 때, 극복하고 넘어가는 계기로 작용한다는 점 역시도. 물론 ‘무구’에 그쳐서는 안되며, ‘무구’를 날조해서도 안된다. 현실을 직시하면서, ‘무구’를 추구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여기서 말하는 ‘우리’가 약간 비틀려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우리’는 무의미한 것을 위해 동원되고 만들어진 우리이다. 만약 아무런 왜곡도 더움도 없다면 이 ‘우리’는 국민국가 단위의 근대전쟁을 수행한 ‘일본국민’으로 귀착된다. 그렇다면 그것은 조금은 ‘저 황폐함’을 이해하는 비틀린 집단이 되고 이 전기의 헌사에 있는 ‘죽은 병사들’, 레이테전을 치른 자들이라는, 특정한 때와 장소에 놓인 ‘더럽고’ ‘꾀죄죄한 히노마루’의 위치에 머문다. 그것은 그러한 더러움의 자각으로 인해 표면장력으로 휘어 있는 유리판 위의 물방울처럼 얇고 평평하게 ‘일본국민’에게로 퍼져가는 것을 스스로 억제하는, 그렇게 약한 비틀린 ‘우리’가 되어 있을 수 있는 것이다.(90) 여기서 오오오까는 과연 어떤 일을 해낸 것일까. 그는 ‘영령’이라 불리는 존재에 이 막대한 양의 지명과 인명, 부대명을 대치시킨다. 그는 죽은 자를 이름있는 병사로 살려냄으로써 이른바 ‘영령’이라는 것의 허구를 밝히는 것이다. ‘영령’이라는 관념에서 한사람 한사람 병사들의 죽음을 복원하고 있는 것이다.(92)
가토 노리히로는 『レイテ戦記레이테 전기』를 쓴 오오카 쇼헤이大岡昇平를 불러와 더러워진 ‘히노마루’를 제시한다. 오욕의 역사를 직시하고 패전의 역사를 끌어안은 일본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인데. 요즘 일본 국민이 가장 선호하는 정치인이지만 총리는 될 것 같지 않아보이는 이시바 시게루石破茂가 하는 주장하고 꽤나 흡사하다. 3백만 희생자를 끌어안아야 한다는 주장이야, 일본인으로서 능히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사람들에 대한 애도를 통해서 2천만 아시아인 희생자에게 나아간다는 말은 도무지 일본인이 아닌 나로서는 이해가 되질 않는다. 일본인들도 이해가 되질 않았던 모양인지. 그동안 간간이 나왔던 야스쿠니 신사가 아닌 전몰자 추도시설의 건립을 말하는 것인지. 나는 개인적으로 일본이 전쟁 문제, 전쟁 책임문제와 직면하는 것이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의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일본이 스스로 선택할 문제라고 본다. 평화헌법에 대한 강요가 오늘날의 일본의 문제의 근원이라면, 사죄든 반성이든 강요할 문제가 아니다. 그런 기본도 하지 않는다고 기억하고 기록할 일이기는 하지만.
「전후후론戦後後論」
실제로는 이렇게 자국의 3백만의 무의미한 사망자들을 바로 그 무의미함 때문에 깊이 애도한다는 것이 그대로 타자인 2천만 아시아의 죽은 자들 앞에 우리를 세워놓는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죽은 자를 대하는 방식을 만들어내지 않는 한, 일본사회가 총체적으로 아시아의 죽은 자들에게 사죄한다는 형태는 논리적으로 찾아낼 수가 없다.(108) 유럽의 유대인 학살 문제, 혹은 일본에서의 갖가지 전쟁 책임의 문제는 타까하시[다카하시 데쓰야]가 말하듯이 영원히 기억되어야 한다. 담나 이러한 ‘기억하라’는 목소리 앞에 벽에서 튀어나오는 토끼처럼 ‘그런 건 몰라요’라는 훨씬 뒷세대의 ‘무구한(이노센트)’ 목소리가 막아선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이것은 말하자면 굶주린 아이 앞에서-또는 유대인의 홀로코스트 앞에서, 그리고 조선인 위안부였던 여성 앞에서- ‘논 모럴’이 권리를 지니는가 하는, 지극히 전후 이후적인 우리 고유의 문제인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논 모럴’은 권리를 지니고 있다. 인간은 그것에 관여하지 않는 한, 어떠한 문제에든 ‘나는 상관없어’라고 말할 권리가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아무리 뼈아픈 경험도 언젠가는 지워져버리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풍화를 막기 위해 ‘아무도 그럴 권리는 없다, 기억해야만 한다’고 고집을 세우면 바로 그 순간, 그 사람 속에서 기억되어야 할 그 무엇은 기억되어 마땅한 통절함의 알맹이를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109-110)
여기에 가토 노리히로의 고민이 있을 것이다. 1948년생인 가토 노리히로 역시 전후 세대이다. 그럼에도 지금의 전후 세대들인 1980년대생 1990년대생들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이들 젊은 세대들이 우리들과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말할 때, 이들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가토 노리히로에게 깔려 있다. 이 문제는 근원은 천황의 전쟁책임을 확실하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러니까 60년, 70년 전에 해결해야 했던 문제, 덮고 넘어갔던 문제들이 오랜 시간이 지나 큰 파열음을 내면서 커다란 분열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가토 노리히로는 시대착오적으로까지 느껴지는 하나의 통합적인 국민적 정체성 형성에 골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일본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통해 느껴야 하는 책임감과 개인적으로 느껴야하는 책임감은 전혀 다른 문제다. 국민이라는 상상적이면서 실체적인 정체성과 구체적인 개인 간에 적절한 거리를 형성하는 건 매우 중요하면서도 당연한 문제다. 나는 가끔은 한국에 온 개인인 일본인들이 자신들은 전쟁 참여자도 아니면서 사죄하는 걸 보고 기이하게 여기곤 한다. 그건 개인으로 할 일이 아니다. 국가가 국민이 해야할 일이지. 왜 이들이 개인적인 책임감을 느끼는가? 그것은 국가의 공식 입장이 또는 국민적 아이덴티티가 가지고 있는 입장이 어떻게든 책임을 축소하고, 모면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일부 한국인들이 개인적으로 베트남에서 참회 내지는 지원활동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니 거기서 ‘논 모럴’ 즉 책임없음을 주장하는 이들이 나오는 것도 당연. 그래서 가토 노리히로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잘 알겠지만. 아무튼.
그[다자이 오사무]와 다른 모든 전후작가들 사이의 차이를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전전과 전후 사이에 수문이 있다. 사까구찌[사카구치 안고]의 소설, 이시까와[이시카와 준]의 소설이 앞서 얘기했듯이 ‘만약 이것이 전쟁중에 씌어졌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하는 감상을 남긴다는 것은 수문을 열면 전후의 물이 전전 쪽으로 흘러든다는 것이다. 전전과 전후를 비교하면 그 수로의 수위는 전후 쪽이 전전보다 약간 더 높다. 그 높은 분량만큼이 수문을 슬쩍 열면 흘러들어와 수면이 흔들린다.(134) ‘너무나 거대해서 붙잡을 수 없는, 그리고 도저히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듯 싶지 않은 동정動靜’을 앞에 두고 사람은 일종의 맹목상태가 된다.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에는 아무런 확증도 없다. 그건 틀린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 틀릴지도 모르는 생각을 반드시, 나중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공언한다. 여기 이[요시모토 다카아키] 말은 그런 뜻이다.(151) [다자이 오사무의] 「탕탕탕トカトントン」의 목소리는 누구보다 먼저 다자이가 알아들은 전후 이후의 목소리, 논 모럴의 소리였다. 그는 전후 이후의 논 모럴에 그가 빋는 전후 모럴을 대치시킨다. 「탕탕탕」에서 나타나는 일찍이 볼 수 없던 그의 언동, 「탕탕탕」의 소리에 강한 윤리로 반응한 것은 전후의 젊은이들을 향한 답장으로 읽으면 너무 냉담하지만, 이것을 전쟁에서 죽은 이들에 대한 연대의 말로 본다면 의지적이고 역설적이면서 동시에 성실한 그의 문학윤리의 표현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문학이 이렇게 전쟁에서 죽은 이들과의 연대에 이어지는 것일 것. 그보다는 오히려 「탕탕탕」이라는 논 모럴의 감촉을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177-178)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이상을 위해 고귀한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이상을 위하여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삶을 택하려 한다는 점이다.[J. 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183) 졸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 속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회복 가능성이라고 쌜린저는 말한다. 그것은 어떤 사람 속에나 한 사람의 타자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타자를 거치지 않은 자각이 아닐까.(201) 다만 지난번 전쟁[1차대전]도 그렇고 이번 전쟁[2차대전]도 그렇고 거기서 싸우던사나이들은 일단 전쟁이 끝나면 그만 입들을 다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두번 다시 그런 이야기는 해선 안되지. 그건 모든 사람의 의무라고, 나는 진심으로 믿고 있어. 이제는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지내게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거든.([샐린저] 「마지막 휴가의 마지막 하루」) 전쟁에서 돌아온 자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이 대사의 마지막 부분은 원문에는 다음과 같다. It’s time we let the dead die in vain. 내가 읽은 어느 연구서의 저자는 이를 “전사자는 헛되이 죽게 두어 마땅하다”고 번역했다. 이리하여 우리는 마침내 마지막 말에 이르렀다. “전사자는 헛되이 죽게 두어 마땅하다.” 하지만 이것은 문학의 언어로서는 죽은 자를 부르는 진심의 소리가 아니겠는가. 문학이란 연결보다 깊은 단절의 힘인 것이다.(203-204)
내가 여기서 가토 노리히로의 다자이 오사무, 요시모토 다카아키, J. D. 샐린저에 대한 평을 논하는 것은 어림없는 짓이다. 다만 가토 노리히로가 주목한 지점만 기록해 두려한다. 다자이와 함께 무뢰파로 불리는 사카구치와 이시카와와 다자이를 구별하면서, 가토 노리히로는 다자이의 소설이 전전과 전후가 뒤섞이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말하자면, 대부분의 작가들의 전후 소설은 일종의 후일담 소설로, 전쟁 전의 혹은 전쟁 중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그들이 작품 속에서 보여주는 냉소나 비판을 실제 전쟁 중에 했었느냐는 것. 실제 전쟁 중에는 전쟁을 찬양하거나 찬성했지만, 전쟁이 끝나고 나니 갑작스레 민주주의자 자유주의자가 되어 원래 그랬던 것처럼 행동하고 글을 쓴다는 것. 적어도 다자이는 그렇지 않고, 다자이가 전쟁 중에 썼던 소설에 이미 그런 태도가 등장한다는 것. 적어도 다자이는 뒷날의 일로 앞날을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건 앞서의 「패전후론」에서 마루야마 마사오를 필두로 하는 전후 민주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그리고 진보적 사상가로 이름을 날린 요시모토 다카아키를 들고 있다.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자기자신이 전쟁 중에는 그에 찬성했었다고 자기 입장을 밝히면서 다만 그때 그랬다는 점 만은 솔직하게 기록해 두겠다고 말한다. 이 점에서 다자이와 요시모토의 공통점을 찾는 것이다. 전후의 일이나 가치기준으로 전전이나 전중의 자기자신을 뒤섞지버리지 말라는 것. 이런 태도는 전쟁으로 희생된 3백만은 자신의 입장이나 태도를 바꿀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그대로 곧 무의미한 대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전후의 ‘논 모럴’에도 여지가 생긴다고 주장한다. 뭐랄까 하나의 국민은 형성하려고 하기에, 무의미한 죽음과 전쟁 책임과 ‘논 모럴’을 하나의 인격이나 역사적 주체 안에 뒤섞으면 도대체 어떤 괴물이 나올는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거기에는 ‘니힐리즘’만 남는 것이 아닐까.
J. D. 샐린저가 2차대전에 참전 했을 뿐 아니라,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중요한 전투는 모조리 거치면서 극심한 정신적 상처를 입고, 입원하기도 했었다는 이야기에서 출발해서, 그가 또 한 사람의 전쟁을 깊이 체험한 작가로서 전쟁에 대해 섣불리 평가허려고 하거나 말하지 말고 닥치라고 말한 것으로 마무리 짓는다. 다자이에서 요시모토를 거쳐 샐린저로 이어지는 흐름은 내가 평가하기는 어줍잖고, 흥미로울 따름. 가토 노리히로는 전쟁을 섣불리 팔아먹거나 이용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언급하는 데서 연결점을 찾는 것인데. 일견 동의가 되면서도, 여지가 많이 남는다.
「말투의 문제」
어떤 애국심도 그에 대한 영원한 반대세력과 비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들의 생각이 일치합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에게 그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우리 민족에 의해 저질러진 죄악은 다른 민족에 의해 저질러진 죄악 이상으로 깊이 나를 슬프게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 슬픔(grief)은, 내 생각으로는 설령 어떤 종류의 행동이나 태도의 가장 깊은 곳에 감추어진 동기가 될 수 있을지언정 결코 입밖에 내어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정치에서의 ‘마음’의 역할을 나는 전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한나 아렌트가 게르숌 숄렘에게 보낸 편지](225) 아렌트는 왜 공공성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일까? 숄렘이 보여주는 것과 같은 공동성의 사고를 어떻게든 해체하지 않으면 그녀 같은 사람은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아렌트의 사상경험이 우리들의 사상적 과제와 만나게 되는 접점을 발견한다. 나는 자국의 사자死者에 대한 애도를 ‘선행’한 타국의 사자에 대한 사죄와 애도라는 추모 방식의 창출 없이는 전후 일본의 인격분열을 극복할 수 없다고 말했는데, 이는 어떻게 하면 사자와의 공동성을 해체하고 우리들의 사자와의 관계를 공공화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전후 일본이 짊어진 미지의 과제인 것이다. 전후 일본의 인격분열 사태는 분열하는 각각의 반쪽이 공동성으로 존재하는 상황에서 비롯된다.(226-227)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쓰고나서 유대인 커뮤니티와 이스라엘로부터 거의 버림받다시피한 일은 잘 알려져 있다. 유럽의 유대인 공동체 지도자들이 다른 유대인을 살리기 위해 혹은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나치의 유대인 학살 과정에 협력한 사실을 언급하는 것은 금기였다. 또 하나는 그의 말투tone였는데. 쌀쌀맞고 경박하며 퉁명스러운 말투.(245). 게르숌 숄렘은 그의 유대인에 대한 애정없음을 비판했고, 이 편지는 숄렘에 대한 답변인 셈. 그러면서 공공성에 입각한 판단 가능성을 제기한다. 가토 노리히로가 본 한나 아렌트는 우선 공동성에 근거해 무리로 이루어진 집단을 개인으로 나눈 후에 다시 이들을 공공성에 기반하여 재구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죽은 자들과의 직접적인 연결로 이루어져 있는 일본의 공동성을 해체해야 하는 근거로 제시한다. 자국의 사자에 대한 애도를 해야만 공동성을 해체할 수 있다는 말을 솔직히 깊이 이해할 수는 없지만. 죽은 자들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말로 이해했다. 공식적인 애도의 과정을 거쳐서 국가적인 평가의 장을 마련하여 평가하고, 그 이후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그런데 그것은 이미 일본에서 야스쿠니 신사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 글이 쓰여진지 25년 동안 더더욱. 하지만, 역시 여기에 일본의 호헌파나 혁신계는 참여할 수 없는데. 일단 무조건하고 추모하는 현재의 보수적인 애도 방식은 공동성을 강화하는 방식이라는 말에 동의하지만,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될 수 있을런지는. 자기 스스로 역사를 직면하려는 자세가 없는 한 어렵지 않을까. 대안 추모시설을 만든다는 발상 역시 너무나 토건적이다.
물론 그것은 타까하시[다카하시 데쓰야]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른바 일본 전후의 ‘양심적’ 지식인들이 종종 취해왔고 지금도 타까하시를 비롯해 많은 강단파 젊은 지식인들이 취하기 시작하고 있는 말투[반석같이 강건한 말투, 공동적인 말투]이다. 그러나 이러한 말투로 말하는 한, 뭐라고 말하든 전후 일본의 저 인격분열은 결코 극복되지 않을 것이다.(229) 왜 말투냐라고 한다면, 숄렘으로 대표되는 공동성의 사상을 타파하는 데는, 여기에다 개인성을 대치시켜도 안되고 공공성을 대치시켜도 안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나는 민족을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더라도 숄렘은 ‘당신은 유대민족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친구밖에 사랑하지 않는다니 이 얼마나 유감인가’하고 탄식할 뿐일 것이다. 거기에 있지 않았으므로 판결할 수 없다면 ‘아무도 재판관이나 역사가가 될 수 없다’고 말해도 숄렘은 당신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은 ‘마음’이라고 한숨만 쉬면 되는 것이다. 공동성을 깨기 위해서는 공동성의 단위인 ‘나’라는 위치에서 뒤에 숨은 그림자로서의 ‘나’로 옮아가 말할 수밖에 없다. 내가 말하는 언어란 무엇인가? 사성私性은 쁘리베privé, 세계로부터 박탈당한 존재 바로 그것이다. 나는 말을 박탈당하였다.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은 말투인 것이다.(244) 구호헌파는 2천만 타국의 사자들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워하고 책임을 잊지 않는다’고 말하고 구개헌파는 자국의 3백만 사자를 애도하기 위해 침략전쟁을 침략전쟁이 아닌 의로운 전쟁이라고 뻗대며 ‘국가 국민은 오욕을 버리고 영광을 찾아 나아간다’고 말했다. 그 말투가 서로 닮은 것은 공동적이기 때문이며 그것이 공동적이라는 것은 사자와의 관계에서 둘 다 공동적이라는 뜻이다. 양자가 다 공동적이라는 것이 그들을 한 나라 안에서 분열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전에는 사자에 대해 공동적이라는 것, 그것이 국민국가에 기초를 제공하고 그들을 하나의 유대로 이어주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사자의 공유 경험에 다름 아닌 패전이, 피히테나 르낭과 같은 국민론의 계기가 되지 않았는가? 달라진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세계전쟁이 이 공동성의 틀을 파괴했다는 것이다. 이후 슬픔은 우리를 하나로 만들지 않는다. 슬퍼하면 오히려 그로써 우리가 분열되는 것이다.(246)
죽은 자들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태도. 거리를 두면서 냉소적이고 경박하고 퉁명스러울 것이란 꽤나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모든 면에서 우리는 엄숙과 경건을 요구받고 있다. 오늘 방대본의 코로나 일일 브리핑에서 지난 주말의 질병관리청장 임명식을 두고, 코로나19로 영업을 제한당해 고통받는 자영업자들을 배려하지 않은 태도라는 지적에 대해 방역수칙은 지켰지만 송구하다고 답한 정은경 청장을 보면서, 기묘한 비틀림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망월동에서도 세월호 앞에서도 서해교전 전사자들 앞에서도 무구한 희생자들 앞에서 모두들 엄숙하게 옷깃을 여미며 얼굴색을 굳히고 엄숙한 태도를 보인다. 마음 속이 어떻든 적어도 그렇게 보이지 않으면 경박하고 부도덕한 사람으로 보여질 것 같아 두려움이 생긴다. 사람들은 스스로 검열하고, 터지는 카메라는 혹시 누가 불경스러운 태도나 자세를 보이지는 않았는지 감시감독하기 바쁘다. 비극과 슬픔으로 기록된 모든 집단적인 죽음은 공동체로 직결되고 있다. 사람들은 매번 죽음을 소환하면서, 죽은 자들과의 자기동일화를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자기자신에게 권력과 힘 그리고 투쟁의 정당성을 확보하기에 바쁘다. 진영의 어느 편이라도 마찬가지. 공적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 공동성을 해체하는 일이 되지 못하고, 통일성과 연결 그리고 재현을 반복한다면, 사람들은 각자의 공동성 안에 갇혀서 분열될 것이고. 공적 공간은 형성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애초에 공적 공간은 형성될 수 있는 것일까. 가토 노리히로의 이 마지막 코멘트는 나름의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나갈 수 있을는지. 그렇게 하면 될 것인지, 전적으로 미지의 영역에 있다.
「후기」
이데올로기적 국민 비판이란 국민을 우선 이데올로기로 파악하여 그 이데올로기로서의 국민에 대한 비판의 입장에서, 소위 탑다운(top-down, 상의하달-옮긴이) 식으로 갖가지 일들에 대처해가는 방식을 가리킨다. “국민을 단위로 하는 사고방식은 구조적으로 내셔널한 것에 대한 숭배를 그 내부에 감추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사고의 틀에 사로잡혀 있는 한 최종적으로는 내셔널한 전전戦前의 국민관国民観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이런 형태가 내가 말하는 탑다운 식의 사고방식인데 이데올로기적 비판은 어김없이 이러한 조감하는 듯한 시점과 시간의 선취라는 이중의 선험적 구조를 지니며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국민이라는 개념 그 자체는 역사적으로나 지역적으로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다. 이데올로기적 국민 비판은 경우에 따라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는 국민이라는 개념을 오로지 악으로만 파악하여 거기서 판단을 이끌어낸다. 그런 까닭에 반드시, 아니, 국민이란 좋은 것이야라는 식의, 마찬가지로 선험적이며 오로지 국민 찬양에 그치는 이데올로기를 대항적으로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254-255)
일본의 비판적 지식인들의 국민 비판에 대한 한 답변이다. 메이지 유신에 의한 국민형성이 전체 국민을 패전과 몰락으로 가져갔던 일에 대해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경계로 가득한 일본의 지식인들이 국민 또는 민족이라는 단어에 꽤나 경기를 일으키는 일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군사독재 시절 국민이라는 말로 양육받은 한국인들도 한동안 국민이라는 말을 버리려 노력했고, 그래서 시민이든 민중이든 대안적 이데올로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냉전의 끝과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국민 따위는 무의미한 언급처럼 여겨지고 세계화로 지구화로 달려가기도 했었지만. 다시금 대결구도가 등장하는 세계에서 국가과 국민은 되살아나고 있다. 기후변화로 인한 기상이변과 코로나19로 인한 전세계적 감염위기 속에서 국가의 역량은 다시금 시험대에 놓이고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는 호명으로서의 국민national을 벗어버리려 했다면, 집단 또는 공동체로서의 국민nation은 되살아나고 있다. 오히려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진다. 이데올로기적 비판은 실패한다는 가토 노리히로의 지적은 정말 타당하고, 오오카 쇼헤이 처럼 한 사람 한 사람에 주목해야 한다는 말도 백번 옳다만. 오늘과 같은 국가와 국민의 복귀를 가토 노리히로가 살아있다면 어떻게 볼는지 모르겠다.
「해설」 – 이순애
한반도와 관련해서는, 제2의 전후에 했어야 할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희생자들에 대한 사죄와 보상이 ‘많은 사람들이 전후에 몇번씩이나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사까모또 요시까즈 坂本義和) 실현되지 못한 현실을 직시한다면 ‘사회를 조금씩이라도 착실히 개혁해나가는’(와다 하루끼, 「토론 : 전후 혁신」, 『세까이』 94년 4월 임시증간호) 축적으로의 어프로치라는 문제가 이 이상 피할 수 없는, 아니 피해서는 안되는 과제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의회에서의 다수파 형성이라는 전략이 빠져 있었던”(야마구찌 지로오, 「전후 평화론의 유산」)것에 대한 착안이며 “권력이나 제도를 거부하고 운동만이 청결한 것이라 여기는 것은 때로는 정치적 태만에 빠질 염려가 있다. … 시민운동이 시민의 사회, 룰, 법, 제도, 그리고 정부를 만든다는 과제에 정면으로 덤비지 못했다.”(사까모또 요시까즈)는 데 대한 “나의 자성”[와다 하루끼]이라 이야기되기도 한다.(267)
어찌보면 가토 노리히로의 「패전후론」이 나왔던 시기도, 와다 하루키나 사카모토 요시카즈의 언급이 있었던 시기는 희망이 있었던 시기일런지도 모른다. 사회당이 처음으로 정권에 참여해서 제도를 바꿀 희망을 가지고, 침략 전쟁에 대한 책임을 언급했던 시기이기도 하고. 그러나 결과는 오래지 않아 사회당의 해체와 몰락으로 다가왔다. 국회내 선명한 야당이자 운동세력에 충실해 왔던 혁신파는 정권 운영에서 연거퍼 실패했다. 그 결과는 고이즈미 극장과 기나긴 아베 정권의 지속 아래서 무력해진 야당의 모습 뿐. 다시 일본이 어떻게 시민사회를 구축하고, 정권 교체를 진정한 의미에서 실현할 수 있을지 아니면 없을지. 지금으로선 기대가 어렵지만. 그럼에도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니까 희망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고.
(재일조선인이) 일본인을 ‘그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한국인이나 미국인이 그렇게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후자는 자신들의 ‘우리’에 입각하여 남들을 ‘그들’이라고 만다. 하지만 재일 조선・한국인은 단지 ‘나’라는 위치에서 그렇게 말한다. 그때의 ‘나’는 근대국가를 부정하는 ‘나’가 아니라 근대국가로부터 버림받은 ‘나’, 말하자면 그야말로 진정한 ‘나’인 것이다. … 그러한 존재양식을 지켜보면서,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예컨대 나라면, 내가 일본인인 채로 있으면서 이러한 ‘재일’ 한국・조선인의 ‘나’에 걸맞은 ‘나’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나의 대답은, 그러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를, 일본인성性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패전후론과 아이덴티티」)(291-292)
가토 노리히로가 여러 차례 언급하는 재일 조선인 2세 문예평론가 타께다 세이지武田青嗣의 글이다. ‘우리’에 입각하여 ‘나’라는 위치에서 ‘그들’을 부른다. 버림받은 철저한 개인. 내가 속하는 ‘우리’도 그들을 버린 공범이다. 동정이나 연민없이 만나서 어떻게 부르고 어떻게 대화해야 할런지는 숙제지만. 많은 재일 조선・한국인들에게 내가 배우고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
태평양전쟁 개시가 자살행위였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면 전사한 국민의 죽음은 다수가 자살이었다. … 지배자를 향한 비판과 일상생활에 대한 애착이 온몸 가득 차 있었지만 그걸 입밖에 냈다가는 감방에 들어가게 된다. 말하자면 살고 싶어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으로 그런 비판을 입에 담은 것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내 목숨이 아까운 것이 아니다. 목숨을 버리는 경우에조차 그에 관해 아무런 발언권이 없다’는 것에 분개했던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죽어 보이는 수밖에 없었다. 죽어서야 비로소 비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살 속에 비판과 해방, 구제 그리고 구체적 생명을 넘어서는 추상적 권리의 자각이 깃들여 있다. 국가의 운명을 한몸에 받아안은 자살 속에서 우리나라 국민적 사상사에서 처음으로 초월적 자각이 생겼다는 사실을 주목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들의 죽음을 배웅한 이들은 그 마지막 정신 속에서 빛나고 있는 한 줄기의 광채를 결코 잊지 못한다. (후지따 쇼오조오, 『천황제국가의 지배원리』)(304-305)
비판은 목숨을 구하는 행동이 되며, 죽어서야 비판할 수 있어서 일종의 자살을 행한 것이라는 후지타 쇼조의 평가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음미할 구석이 없지 않다. 무의미한 3백만의 죽음에 대한 어떤 대답이기도 하고.
이 책에서 인명쓰는 법을 보면서 격세지감을 느낀다. 지금도 많은 연구자와 번역자들이 자신들의 표기가 옳다면서 외국인 저자의 인명을 각자 자신에 귀에 들린 것에 가장 가까운 대로 표기하려고 애쓴다. 일본, 영미, 독일의 경우는 대부분 외래어표기법에 따르지만, 다른 나라들은 번역하는 사람마다 제각각인 경우가 많다. 인명, 지명 등의 고유명사에 대한 한글 표기가 표음문자로 음역transliterate해야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표기법은 표기법일 뿐인데. 책에는 당시 통용되던 표기를 사용했지만, 여기서는 모두 외래어표기법에 따라 바꾸었다. 토오꾜오 같은 표기를 보면 뭔가 그리운 느낌이 없는 건 아니지만. 懐かしいなぁ。
2020. 9. 14.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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