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라이와 더불어 에도시대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 중 한 사람이었던 이토 진사이. 와타나베 히로시에 따르면 공맹유학을 교토 조닌의 일상언어로 재해석해서 주자학을 비판하고, 유학의 일본화를 이룬 인물이다.
와타나베 히로시渡辺浩, 『주자학과 근세일본사회近世日本社会と宋学』, 박홍규 역, 예문서원(東京大学出版会), 2007(1985).
와타나베 히로시는 최근 번역 출간된 『일본정치사상사: 17~19세기』(박홍규, 최선희 역, 고려대학교출판부)로 더 잘알려져 있을 것이다. 흔히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真男의 제자로 불리지만, 그보다는 그의 일본정치사상사 연구를 극복했다는 평가가 더 좋을 것 같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조기 퇴직 후, 도쿄대의 일본정치사상사는 그의 제자인 마쓰모토 산노스케松本三之介 뒤를 이었고, 와타나베는 그의 후임으로 도쿄대에서 일본정치사상사를 가르쳤다. 현직 카루베 타다시苅部直도 그의 제자다. 한국어도 꽤 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서술은 평이하고 매끄러우며 자기 스스로 사회사적인 연구라고 말하고 있다.(8, 저자서문) 그러나 아날 학파의 영향을 받았다기 보다는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5, 한국어판 서문)
그러나 마루야마 마사오와에 대한 학문적 대응이라는 면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저자 서문에서 그의 “『일본정치사상사연구』(1952, 실제 논문을 쓴 것은 1940-44)를 비롯한 여러 업적을 전제로 하여, 거기에서 배우고 그것들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11)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일본인의 겸양일지 문화일지, 책에서 실제 마루야마 마사오의 특정 해석을 인용해 가면서 이를 구체적으로 비판하지 않는다. 이런 점이 실은 일본정치사상 논쟁에 밝지 않은 독자에게는 독해의 어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역자 박홍규는 마루야마 마사오의 연구를 “근대 서양과 비교했을 때 중국의 정체성停滯性의 상징을 주자학에서 찾는 한편, 일본에는 근대화의 자생적인 맹아가 있었다는 것을 도쿠가와사상사에서의 주자학적 사유양식의 해체과정-도쿠가와사상사의 내재적 발전과정-을 통해 설명했다”고 말하며, 이 ‘근대화론’에 정면 대결하여 승부를 지었다고 평가한다.(14) 마루야마 마사오가 말하는 근대화의 자생적 맹아라는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소라이학徂徠学 해석에서 등장하는 성인의 ‘작위作爲’와 근대적 주체의 맹아에 설명이고, 그는 이를 파시즘과 군국주의의 기반이 되기도 했던 반동적인 국학国学의 시발인 노리나가학宣長学로 이어가면서 해석한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작위’에서 정치제도의 인위적 형성이론인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으로 슬쩍 한발 걸치고 있다. 제도의 작위는 일본적인 사회계약의 논의의 한 단초로 해석할 수 있다는 암시이다. 결코 이를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도쿠가와 정치의 전제정적인 성격을 서양의 절대주의 왕정과 슬쩍 비교한다. 알다시피 절대왕정의 한계와 붕괴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시민혁명으로 이어진다. 여기에서 패전 이후 일본에서 자유주의의 초상을 그렸다고 말하는 마루야마 마사오의 초상이 드러난다. 이런 근대화 맹아론 류의 해석이 한국에 미친 영향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요즘에는 실학에 대한 근대사상 맹아적 해석이 비판받고 있기는 하나, 이런 주장이 한 시대를 풍미한 것도 사실이다. 일본의 개입이 없었다면, 자발적으로 근대화할 수 있었다는 상상은 얼마나 매력적이고 또 달콤한다. 이런 생각에 빠지면, 유아기적 사유에서 멈춘 채 비만과 당뇨에 시달릴 뿐이지만.
와타나베 히로시는 바로 이 마루야마 마사오의 논의의 출발점에 문제를 제기한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를 요약하는데, 우선 도쿠가와시대 일본에서 유교사상, 특히 주자학이 권력과 일체가 되어 지배이데올로기로서 존재했다는 주장을 반박하고, 세습신분의 무사들이 지배했던 사회에서 유교사상이 어느 정도 수용될 수 있었던 구체적 조건과 전개과정을 밝히는 것이 자신의 목적이라고 말한다.(5) 마루야마 마사오의 논지 중세적이고 정체성의 상징인 주자학이 내부에서 해체되면서, 근대로의 길을 열었다고 말하려면, 우선 주자학이 지배 이데올로기였음을 전제해야 하는데, 와타나베 히로시는 실제 도쿠가와정치는 그렇지 않았다는 점을 차분하게 밝힌다. 전제가 허물어지는 것이다. 이 책과 『일본정치사상사: 17~19세기』를 함께 읽으면 보다 흥미롭게 이 점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일본정치사상사』의 앞부분에서 유학과 주자학을 요약하고, 어정밀御靜謐과 어위광御威光에 대한 논의를 출발점으로 삼는지 이해할 수 있다. 실제의 도쿠가와 정치사회가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부터 일본정치사회의 상황에 따른 외래사상의 수용 또는 변용이라는 와타나베 히로시의 논지가 드러난다. 이 두 책은 함께 읽으면 서로 보완이 되어 좋을 것이다. 이 책은 이미 절판이 되어 구할 수 없지만. “정치·사회제도나 정보가 전달되는 구조는 때로 사람들의 생각을 깊게 규정하지만 거꾸로 사람들의 생각이 정치·사회제도를 바꾸기도 한다.”(『일본정치사상사』, 15)는 말은 자신의 사상사관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루야마 마사오도 이런 도전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고, 1974년 『일본정치사상사연구』의 영어판을 간행하면서 꽤 긴 서문을 붙여두고 있다.(일본어 신장판에도 수록) 이 서문의 어떤 부분들은 와타나베 히로시의 논의와 함께 읽어야 이해할 수 있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영어판 저자 서문에서 논문들의 집필계기를 밝히면서, “일본 역사의 어두운 골짜기the so-called dark valley of Japanese history”를 말하면서 군국주의의 국학 해석과 대결하는 심정으로 논문을 쓴 계기를 말한다.(『일본정치사상사연구』, 김석근 역, 통나무, 1995, 51) 그러면서 자신 이전의 일본사상사 연구의 세 조류를 요약하는데, 이노우에 데츠지로井上鉄次郎의 국민도덕론, 무라오카 쓰네쓰구村岡典嗣(本居宣長 연구자, 마루야마 마사오에게 강의한 도쿄대 교수)와 와쓰지 데쓰로和辻哲郎의 문화사, 정신사로서의 사상사 연구와 쓰다 소키치의 실생활과 문화에 근거한 연구,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유물사관에 입각한 연구 등이 있었다고 간략하게 요약하면서 일종의 연구사를 밝히고 있다.(『일본정치사상연구』, 54-60) 특히 영어판 저자 서문 제5항에서 인정하고 있는 자신의 오류, 즉 주자학적 사유양식이 사회적으로 보편화된 구체적인 사실을 찾을 수 없다는 점에 대한 인정, 자신이 역사적 진화라는 사고에 사로잡혔다는 점과, 일본 주자학의 일본적인 특성을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은 모두 와타나베 히로시의 주장의 핵심이다. 와타나베 히로시가 이 책에 실은 논문들을 발표한 것은 1979년과 1981년이고, 마루야마 마사오의 오류에 대한 인정은 1974년이지만, 일본정치사상학계 내부에서(그리고 아마도 마루야마 마사오의 세미나丸山ゼミ에서) 다양한 논쟁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와타나베 히로시 혼자 해낸 성과라고는 불 수 없지만. 그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와타나베 히로시는 들어가는 글에서 도쿠가와 시대의 연대를 교호享保(1716-1735)를 기준으로 나눈다. 도쿠가와 시대를 게이초慶長 5년(1600)에서 시작해서 게이오慶應 3년(1867)에 끝난다고 할 때, 교호 18년(1733)까지를 전반기로 보고, 8대 쇼군 요시무네吉宗의 치세 18년, 오규 소라이荻生徂徠가 죽은 지 5년째에 해당한다.(19) 이 도쿠가와 전기에 대부분의 유학자들이 나타난다. 나카에 도주中江藤樹, 구마자와 반잔熊澤蕃山,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斎, 야마가 소코山鹿醑素行, 이토 진사이伊藤仁斎,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오규 소라이 등.(20) 이 당시까지 중국, 조선과 달리 일본사회에서 주자학은 어느 정도 유리한 상황을 기반으로 점차 확대되기는 했으나 많은 점에 위화감을 주는 외래사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를 동아시아의 한 섬나라에서 전개된, 외래사상의 수용을 둘러산 장대한 실험극으로 보려는 것이 이 책의 의도이다.(20-21)
도쿠가와 전기. 성행. 와타나베 히로시는 도주 이하의 주요 사상가가 모두 주자학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이 그 무렵 (1)사회 전체에서든 무사 계층에 한정해서든 주자학 나아가 더 넓게 송학이 광범위하게 보급·수용되고 있었다거나, (2)막부권력과 결합하여 ‘체제교학’이나 ‘정통이데올로기’가 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3)사상의 내용이나 구조가 도쿠가와시대 초기의 정치나 사회의 존재방식에 특별히 조응하지도 않는다(23)고 서두에서 밝히고 있다. 여기서 그는 마루야마 마사오 영역본 서문에서 주자학의 사회적 존재의의를 중시하는 자신의 주장을 수정했음을 각주로 살짝 언급하기도 한다.(23) 도쿠가와 초기인 17세기 말엽까지 주자학이 일본 사회를 뒤덮거나 깊이 침투하여 수용·보급되어 있다고 볼 수 없다. 사무라이 신분에 한정해서도 마찬가지다.(24) 이른바 도쿠가와 시대에 주자학이 성행했다는 주장에 대해 당시는 원래 유학을 배우는 사람의 수가 극히 한정되어 있었고, 책값도 비쌌으며, 유학의 교설과 그 사고방식의 사회적 통용도 역시 중국·조선은 물론 도쿠가와 후반과 비교해서도 훨씬 미흡하고 한정되어 있었다고 말한다.(26) 하극상을 통해 지위를 높여온 전국시대 다이묘들은 유학·유교사상과 거리가 멀었고, 여러 종교·교학을 절충한 ‘천도天道’라는 관념도, 천명天命, 성인聖人의 유교적 이념과 연결되지 못했다. 무예가 사무라이를 사무라이답게 하는 것이며, 상해와 살인이 그들의 삶과 정신세계의 핵심이었다.(27-28) 사무라이들은 지식 면에서도 윤리 면에서도 유학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었다.(29) 오사카 전투 이후 찾아온 태평이 250년간 지속되리라 생각하지 않고, 상시임전태세가 명목화되어가는 가운데, 우연히 전란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끊임없이 지속되는 상황에 갇히고 말았다.(29) 1663년 막부가 금지하기 까지 주군을 위한 순사도 이어졌고, 고집을 부려 싸우고 서로 죽이고 자해하는 것을 사무라이다움의 표현으로 여겼다.(30) 나카에 도주는 사람들의 비방을 피하고자 가쿠레키리시탄 처럼 밤에 사람의 눈을 피해 유학서적을 읽었으며, 학문을 좋아하면 전투에 쓸모가 없다고 보고, 이를 공가와 천황의 일로 여겼다(禁中並公家諸法度).(33) 사무라이들은 학문을 일종의 고상하고 한아한 교양으로, 일종의 문화적 스노비즘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실내장식에 쓰기도 했다.(33-34) 좀더 나아간 사람도 한시문을 써보거나 박람을 자랑하는 정도여서 삶의 윤리로 삼지 않았다.(34) 음곡명물, 렌가連歌, 하이카이俳諧, 다치바나立花, 자노유茶の湯, 바둑碁 등과 함께 유예遊藝, 계고稽古의 일종으로 여겨질 뿐이었다.(35) 도쿠가와 이에야스 처럼 일찍부터 통치에 도움을 얻기 위해서 유학 서적을 접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자도 일부에는 있었으나, 하쿠세키가 유학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천주교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회상할 정도로 널리 퍼졌다고 보기는 어렵다.(35-37) 이케다 미쓰마사池田光正, 호시나 마사유키保科正之, 도쿠가와 미쓰쿠니徳川光圀 처럼 유학을 통치에 활용하려는 다이묘도 출현했으나, 드문 경우였고, 유학에 대한 지식은 점차 확대되어 갔으나 현실정치에 적용과는 별개의 것이었다. 번학藩学이나 번교藩校도 당시에는 특이한 것이었다.(37-38) 다이묘·무사·조닌 중에서 진지하게 유학을 신봉하는 자가 있었으나 소수였고, 유학을 업으로 하는 자도 소수였다. 유학·유교의 사회적 보급도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낮고 한정되어 있었다.(39) 도쿠가와 초기인 게이초 5년(1600)에 1,200만 내지 1,000만 명이었던 인구가 교호 6년(1721)에 무사 등을 제외하고 2,600만 명에 달했는데, 이런 인구증가는 고도경제성장을 암시하며, 이는 호학의 5대 쇼군 쓰나요시綱吉의 치세가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무렵까지 주자학이 학문으로서나, 정치와 윤리에 관련한 교의 ·교설로서나, 또한 사물에 대한 사고방식으로서나, 널리 보급 수용되고 있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록 표면적이고, 상대적인 ‘성행’이 있었다고 해도.(41)
도쿠가와 시대에서도 도쿠가와 전기 즉, 17세기와 18세기 초엽으로 한정해서 보았을 때, 주자학이 영향력이 있었다고 평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도쿠가와 후기인 17세기 중반에서 18세기 중반까지는 국학과 난학 등의 다양한 사조가 등장하는 시기이므로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주자학의 세계가 안으로부터 해체되고 있었다는 주장에 가장 확실한 대응 논변은 아예 그런 세계가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그 당시의 다양한 사조들은 오히려 주자학의 일본사회에서의 변용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거대한 변화의 흐름의 출발점을 상정할 때, 앙시앙 레짐이든 중세든 정체성停滯性이든 고정된 이미지를 설정해 놓고 출발하면, 손쉽게 전개해 나갈 수 있지만, 모든 역사발전의 단계론이나 발전론 혹은 진화론은 이 출발점의 단괴적monolithic 성격이 무너질 때 설명력을 상실하게 된다. 또한 이런 논의는 한국철학사 또는 정치사상사 연구의 출발점을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시작해야 할지에 대한 여러가지 시사점과 항께 상념을 던져준다.
막부와의 관계. 이런 상황에서 로닌浪人·의사·선승 출신이거나 그로부터 전신한 전문 유자들은 다이묘에게 고용되었으되, ‘모노요미보즈物読み坊主’란 특수기능자로 취급받아 종종 머리를 깎거나 의사와 비슷한 소하쓰総髪를 하고 있었다.(42) 사무라이사회에서 학자는 존중되기는 했어도 현실정치로부터는 격리되어 있었다. 다이묘가 유학자를 고용했다고 해도, 거기서 사상적 의의를 도출하는 데, 신중을 기해야하고, 유학자가 다이묘 가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이 유교가 체제를 지지했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43) 4대에 걸쳐 쇼군을 모신 하야시 라잔林羅山도 그의 박식함과 문필능력이 이용되고, 이야기 상대お伽衆가 되었을 뿐이다. 막부가 성리학을 채택했다고 볼 수 없다. 이는 주자학은 게이초 연간 이래 대대로 신용해 오신 것이라고 한 이른바 ‘간세이 이학의 금지寛政異学の禁(1790년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주도하에 주자학을 정학으로 하고 그 외의 이학을 쇼헤이자카학문소에서 강의하는 것을 금지한 막부의 명령)에 의해 후세에 굳어진 신화다.(44) 쇼군 쓰나요시가 유시마성당湯島聖堂을 신축하고 방문한 일도 일종의 기부행위에 불과했다.(45) 이는 하야시가의 사적인 시설로 간세이 이전에는 관에 귀속하지 않았다.(46) 1790년 간세이 이학의 금지 이전에 막부와 주자학 관계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47) 유학자 간의 경서해석에 대한 논쟁도 치료법 시비 논쟁과 같은 전문가 업계 내부의 일이라 관심 밖이었다.(47) 관학이라 해도 쇼군가의 어용일 뿐이다.(48) 간세이 이학의 금지가 획기적인 일이라 비非주자학자들이 난처한 입장에 놓이기는 했어도 유학을 통렬히 비난하던 국학 쪽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전반적인 사상통제는 없었으며, 죠닌·백성들은 데라우케寺請 제도로 형식상 불교도일 것을 강요당하고 있었다.(48) 도쿠가와 쇼군을 정점으로 하는 당시의 정치사회 체제는 본래 유학과는 그다지 관계없이 성립된 것이다. 주자학이 막번체제의 정통사상도 아니고, 정치·권력이 주자학에 결부되어 있었다고 보기도 어려우며, 주자학이 당시 체제에 친화성이 있다고고, 주자학을 비판한다고 해서 막부나 체제의 위기가 표출되었다거나 체제 비판적이라고 추론할 수도 없다.(49-50) 주자학이 당시 체제에 논리적·추상적으로 적합 내지 조응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도쿠가와 초기는 안정과는 거리가 먼 긴장감이 흘렀다. 일반적으로 주자학이 도쿠가와 체제에 적합하다고 할때, 즉 충효의 가르침이 적합하다고 할 때, 그것이 꼭 주자학일 필요도 없다.(50-51) 따라서 실제로 주자학이 한편에서 확장되고 수용되어 가는 과정에서 그에 대한 수정이나 비판도 생겨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주자학과 도쿠가와시대 전기의 일본사회의 적합성과 부적합성, 그로부터 생녀난 수용과 반발.(52)
주자학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하는 왕조가 500년간이나 지속된 사회에 살았으며, 주자학 의외의 철학은 배척했을 뿐 아니라 글만 자유롭게 써도 ‘사문난적’으로 몰리기 쉬웠던 조선이라는 나라를 그 역사적 선조로 하는 나로써는 읽어가면 읽어갈수록 기이한 상념에 빠져들게 된다. 마루야마 마사오가 주자학이 통치 이데올로기였고, 그것이 내부로부터 해체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차라리 조선정치사상사를 쓰는데 딱 어울릴 이야기다. 그러나 실은 그 이야기도 마르티나 도이힐러 등에 의해서 실제 조선 사회가 유교화된 것은 중기에서 후기의 일이라는 점이 밝혀졌고,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이며 사상적인 논변과 그에 따르는 정치세력의 등장과 부침 그리고 그 배경 또는 토대라 말할 수 있는 경제사회의 변화, 인구증가, 식량생산의 증가, 외래사상의 도입 등을 씨줄, 날줄로 엮어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실은 한 걸음도 앞으로 옮겨가기 어렵다. 마루야마 마사오와 와타나베 히로시의 주장은 조선을 사이에 두고 앞과 뒤에 놓여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무엇보다 차라리 도쿠가와 일본은 학문과 사상의 자유가 있었다. 비록 그것이 무에 의한 문의 멸시와 무력을 앞세운 승자의 권위에 의한 지배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해도. 하찮은 것이라 배척받는 입장에 놓여 꽃꽂이나 다도 등에 비견되는 학문과 사상의 자유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것은 사회의 잉여들의 놀이인가.
형식의 적용-봉건. 소수이기는 해도 주자학을 사상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정치와 행위의 규범으로 삼고, 정치와 사회의 원리로 삼고자 했던 이들이 나타났을 때, 거기에 갖가지 모순·알력·충돌이 일어났다.(53) 주자학을 배태한 정치형식적 전제는 황제에게 전국지배권이 집중되고, 황제의 관리들이 단기간의 지방관이 되는 정치제도이다. 일본은 일단 중국의 당우삼대에 있었던 봉건제에 중첩시킬 수 있다.(53) 그러나 이를 적용하려고 할 때, 천자가 문제가 된다. 천자가 토지를 나누어 제후를 세운다면, 천자는 도쿠가와 쇼군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교토의 긴리사마禁裡様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는 형식적으로 쇼군에게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이라는 칭호를 수여한다.(55-56) 나카에 도주가 효경을 들어 천자, 제후, 경대부, 사, 서인의 다섯 단계로 설명할 때, 도쿠가와 쇼군과 천황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56-57) 천황에서 쇼군으로 정권위임이나 신탁이 있었다는 것도 도쿠가와 중기 이후에 힘을 얻은 해석에 불과하다.(57) 천황과 쇼군의 관계는 유교식 용어로도 서양의 정치용어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형식상 매우 애매한 것이다. 형식적으로 천황이 쇼군의 칭호를 하사하듯, 형식상 막부는 무가와 나란히 천황과 공가에 법도를 하사하며, 무가의 관위는 공가와는 무관하다고 하고 있다. 쇼군 칭호는 조정에서 독립해 있었다.(58) 전반기 막부는 이에야스가 쇼군 칭호를 받은 1603년(게이초 8)이 아니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1600년(게이초 5)이나 오사카 전투의 승리인 1605년(게이초 20)을 분기점으로 삼았다.(59) 조선을 상대로 쇼군을 ‘일본국왕’이라 칭해야 한다는 아라이 하쿠세키의 주장도 정략이라기보다 솔직한 호칭이었을 것이다.(59-60) 물론 당시에 쇼군 가는 천자의 대리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논리였을 뿐이지만.(60) 반면 조선은 중국의 정삭正朔(연호)을 받들고 국왕이라고 칭하지만 형정刑政은 자국이 주관하는데, 이를 교토의 천황과 에도의 쇼군과 비교하면서, 국왕으로 칭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61) 현실 속의 모순이 이론투쟁이라는 형태를 취했다기 보다, 모순이 외래 사상과 현실과의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이론의 유자들이 외래 학문의 수입에 의존하지 않고, 각자의 배경에 따라 독자적으로 응용하고 수정하면서 논쟁하도록 촉구하고 언젠가 현실 쪽의 변질을 초래하는 요인이 되었다. 도쿠가와시대에 긴리사마는 무위한 존재였으나, 빛을 더해가서 마침내 의심할 여지없는 왕으로 받들어 모셔지게 되었다. 고대 이래 잔존해 온 제도가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아 간 과정이다.(62-63)
외국인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천황이라는 존재. 문제는 천황이라는 존재 그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고대로부터 그 의미와 가치가 끊임없이 변해왔다고 하는데 있다. 도쿠가와 시대의 천황은 지금의 천황과 달랐다. 물론 메이지 유신 이후의 천황과도 달랐다. 도쿠가와 시대에는 문자 그대로 천황과 쇼군의 두 왕이 있었다. 그러나 권력투쟁을 하지도 않았고, 타도의 대상이 되지도 않았다. 실질적인 힘으로 에도의 쇼군이 지배했기 때문이다. 와타나베 히로시는 이를 ‘어위광’이라고 말한다. 초월적인 존재든 교토의 천황이든 다른 외부의 디서나 이데올로기에서 권력의 정당성의 기원을 구하지 않고, 순수하게 힘으로 내리누르는 지배. 순수한 승자의 힘. 그것을 어위광이라고 표현한다. 실제 금리병공가제법도라는 천황과 조정에 대한 법을 하사하고, 특히 무가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못하도록 그 짧은 구절에 넣어둔다. 당연히 무가제법도도 존재한다. 그러나 형식적으로 연호는 천황의 것을 따르며, 이를 정삭이라고 한다, 천황에게 인정받는 형태를 취한다. 그 이유를 명확하게 밝히지도 않은채. 메이지 유신이 만들어낸 것은 실제로는 천황제라고 보아야 한다. 존왕양이론을 내세워서 실제 천황에게 모든 권력이 즉 주권이 있다고 전제하고, 위임받은 것이 아니라 힘으로 쟁취한 정권을 봉환한다. 그러나 천황의 친정은 형식적인 것이고, 실제 권력은 원로들로 구성된 내각의 손에 있었다. 내각 총리대신은 그러나 쇼군과는 다른 지위를 가진다. 천황-총리대신의 사실상의 정신적 사상적 위계구도를 형성해 낸다. 그리고 천황이 가진 상징적 힘은 계속 강화되고, 천황의 상징적 힘을 내세워서 군부가 권력을 확대해 나간다. 도조 히데키가 1940년 내각 총리대신으로, 내무대신, 육군대신, 참모총장(육군), 현역 대장을 겸임한 것은 이런 일련의 과정이 정점에 이른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몰락했다. 전쟁에서 패배한 후, 일본은 연합군사령부가 제시하는 평화헌법을 받아들여서 상징천황-총리대신 책임의 내각과 문민통제 원칙을 구성하고, 헌법전문에 국민주권의 원칙을 도입한다. 거칠게 말해서 쇼군주권-천황주권-국민주권의 세 가지 서로 다른 정치적 상상이 변화한다. 그 안에서 실제적 작동방식은 전제적이기도 하고, 과두적이기도 하고, 민주적이기도 하다. 이 모두는 실제 이중 지배 왕국의 틀의 구조 안에서 였다. 이 점은 다른 입헌군주정 국가들과도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 와타나베 히로시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사실상 왕은 둘이었으며, 그 안에서 주자학은 제자리를 잡을 수 없었다고. 아라이 하쿠세키의 유교적 개혁이 실패하고, 요시무네가 이를 모두 백지화한 교호는 도쿠가와 시대 전반의 종장에 위치한다.
사농공상. 주자학이나 양명학은 신분도덕의 사상이 아니다. 정치제도의 원리로서 세습의 여부, 즉 지배층이 되기 위한 자질이 가문인지 학문인지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63) 그는 시마다 겐지를 인용하여, 과거제도의 평등주의를 강조하고, 청말 개혁운동가들은 진·한 이후 중국에 출생에 다른 신분은 없었고 말하는 점을 들어 일본과 중국은 근대화 과정이 상이할 뿐 아니라 전근대도 질적으로 상이함을 말한다.(64) 중국의 사대부들은 통상 지주였으며 때로 상인이었다.(64) 주자학이 배경으로 삼는 고대중국은 비교적 명확한 사士와 서민庶民이 있어 병농분리 이후의 일본과 공통적으로 보인다. 유가의 특색은 민을 사농공상이라 말하는데, 일본은 공간적으로 무가 지역武家地, 조닌 지역町方, 농촌 지역在方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조닌 지역은 더 나뉘어져 있었다.(65) 일본에서 사는 사무라이, 작물을 생산하는 것을 농, 직인을 공, 장사하는 사람을 상이라고 하여, 이 셋을 서민이라고 말한 도주의 설명도 받아들이기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서 사농공상이라는 신분 및 서열은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공과 상의 신분 차이는 없다, 실제로는 무사와 백성과 조닌이란 세 신분으로 구별되고, 조닌과 백성 사이에선서는 조닌이 제도상 상인으로 취급받고 있었다.(66-67) 일본에 사농공상이란 신분제도가 있었다는 것은 후세 유자들의 눈을 통해서 본 오해이고, 이에 대한 언급도 신분차별론 보다는 분업론, 직업론으로 다루어진 경우가 많다. 신분차별의 근거로 사용될 때 세상의 현상(농민이 죠닌보다 못한 상황)을 비판하는 이상론으로 나타났다.(68)
중국과 일본의 신분제. 중국은 사농공상의 구분은 있으되 사실상의 신분제가 없는 반면, 일본은 사무라이, 죠닌, 백성의 세 신분으로 나뉜다. 사무라이 안에서도 매우 복잡하게 신분이 전개되지만, 그건 사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다음 장에서 논한다. 농공상의 순서가 아니라, 농이 가장 낮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 일본에서 부라쿠민 등 천민집단 즉 예속민이 존재하지만, 이를 상세하게 다루지는 않고 있다. 조선은 어떠한가? 조선은 양반, 상민, 노비(천민)의 세 신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양반 중 일부가 과거를 통과해서 관직을 얻고, 상공을 천시했다. 중국, 일본, 조선을 비교할 때, 조선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노비이다. 노비의 인구적 구성과 예속상태 등. 와타나베 히로시는 일본의 사농공상이 명목상의 이야기 일뿐이며, 일본은 실제, 사무라이, 죠닌, 백성의 세 신분이었다고 말한다. 도쿠가와 시대 일본 상공업의 발달은 눈부셨다. 다만 동력에 의한 기계화만 이루어지 않고 있었을 뿐.
화이. 중국 중심의 화이관을 받아들이면 일본은 동이가 된다. 그러나 가라唐와 일본을 병렬적으로 국国이라 생각하는 의식도 드드물지 않아 저항감이 있었다. 더욱이 청조는 명조와 달리 이적이지 중화는 아니다. 조선과 베트남은 소중화를 주장했지만, 일본의 유교문화의 실태는 그렇지 못했다.(69-70) 초기의 대표적 유자 하야시 라잔, 나카에 도주, 구마자와 반잔, 기노시타 준안 등은 천황의 선조는 『논어』에서 지덕이라 불렀던 문왕의 백부인 오나라의 태백이라는 설에 긍정적인 관심을 보였다. 단순한 이적이 아니라 논증하려는 마음도 있었고, 조선의 기자설도 있었다. 베트남도 신농 4세인 손경양왕과 그 손자의 전설.(70-71) 화이라고 인정한 후, 문제는 현실의 도덕성 여하에 있다고 강조하는 사람도 있었다. 가르치는 쪽이 반드시 뛰어나고 배우는 쪽이 뒤떨어진다고 할 수 없다는 것으로, 중화사상의 지리개념보다 문화개념의 측면을 강조하며 보편적 규준 아래 화이 양쪽을 함께 둔다.(72) 야마가 소코는 단호하게 일본을 중화·중국이라 부른다. 중주中州 일본과 외조外朝 중국 만이 천지의 가운데 위치하고 중국의 삼황오제 등 대성大聖과 일본 고대의 신성神聖이 일치한다고 주장한다.(73) 이토 진사이는 성인의 마음에는 화이변별이 없다고 말하여, 아들인 이토 도가이東涯는 화이변별은 후대 유자의 편견으로 중국은 개화된 만이蠻夷이고 만이는 아직 개화되지 않은 중국이라고 말한다.(74) 아사미 게이사이는 안사이를 계승하여 자신이 태어난 나라가 중국이고 다른 나라가 이적이라고 주장한다. 일본을 중화로 상승시켰다. 각 나라는 평등하다.(74-75) 후기 미토학水戸学이나 국학国学에서 이러한 자국중화주의 같은 발상이 종종 보인다.(75) 이런 유자들의 논리는 화이사상으로 초래된 반발을 약화시키면서 성인의 도 자체의 진리성을 옹호하는 효과를 가진다. 이적 사회의 유자의 사상전개이다.(76) 이와 관련되는 일본유학의 독자적 사상과제로 신도神道에 대한 해석이 있다. 주자학은 배불론을 거스르기 어려웠으나 신도에 관한 가르침은 중국 서적에는 없었다.(76) 신도는 다수의 참배자를 모아 1650년 이세신궁을 향한 오카게마이리お陰参り가 생겨나 1705년(호에이 2)에 참배한 사람은 330만에서 370만에 달했다고 한다.(77) 유학의 세력이 약했던 17세기에 이른바 유가신도儒家神道가 태어났다. 예를 들면 하야시 라잔의 리당심지신도里黨心地神道가 있다.(77) 구마자와 반잔도 유도의 가르침과 신도의 전수傳授가 별개가 아니라고 본다. 그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御神를 태백이라고 한다.(78) 야마자키 안사이도 주자학을 열렬히 신봉하면서 동시에 스이카신도垂加神道를 양립시킨다. 예를 들면 마음 상태心持로서의 ツツシミ(慎み)는 경敬과 비슷하다. 이렇게 신도를 유학 체계 내에서 설명하는 유가신도는 신도문제에 대한 일본유학이 보여준 교묘한 해결이지만, 유학의 변질도 가져왔다. 신학이 역류하기도 했다.(79)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화이관의 차이이다. 명청교체를 일본에서는 흔히 화이변태華夷變態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를 반영해서 해석할 때, 오히려 자신을 중국이나 중화라고 하면서, 역전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중국에서 이민족이 정권을 장악하여, 중화가 되었으니 일본도 중화라 칭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의 다른 두 조공국이 조선과 베트남은 소중화 또는 자신이 더 중국적이면서 문화가 더 뛰어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소중화와 자국중화 사이에는 거대한 해석상의 차이가 있다. 이런 해석의 전환과는 반대로 중국에서는 명청교체기에는 화이사상이 보편적인 것으로 보이면서, 청을 중화라고 하지만, 청말이 되고, 민국을 수립할 때쯤에는 화이사상이 인종주의와 결합하는 퇴행을 보이게 된다. 중화는 한족이므로 나라를 이민족에게서 되찾아야 한다는 식의 주장이 그것이다.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화이관에 입각한 사대교린의 조공관계란 고정된 상수로 이를 중심으로 해석하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이적의 나라였던 일본이나 중국은 오히려 화이관을 뒤집었다 되돌린다. 기묘한 여운을 남긴다. 특히 조선과 베트남의 유사성이 가장 흥미롭다. 유가신도를 통해 신도를 유가 안에 포용하려는 해석도 흥미롭다. 때론 유학 사상 자체의 변질도 가져오지만, 이런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이는 모두 주자학 또는 유학이 일본에서 사상적으로 도전하는 이데올로기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주자학적 통치체제는 수립된 적이 없다는 점에 대한 역설이다. 주자학이 관학으로 정립되면 이런 류의 사문난적이 용납될리 없다.
사士. 1719년(교호 4) 조선통신사로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한 신유한은 기행문인 『海遊錄』에서 나라에 사민, 이른다 병농공상이 있다고 적었다. 근세 일본에서는 병兵이 지배자였고, 이를 사士로 여겼다. 중국의 사대부와 근세일본의 무사는 모두 전前공업화사회에서 세습적인 정치수장과 충성관계를 맺은 통치조직의 구성원, 즉 봉공인奉公人으로 민民의 위에 있는 외경의 대상이었다. 물론 중국 사대부에도 무의의 요소가 없지는 않았다.(81-82) 아라이 하쿠세키 부자가 보여주듯 무사기질과 주자학의 사는 통할 수 있다.(82) 또 평화시대가 계속되는 사이에 사무라이의 관리화가 진행되고 무자武者에서 역인役人으로 변질되어 갔다.(83) 그러나 문무의 차이는 무시할 수 없다. 무사는 개개로 취급되든 축생으로 불리든 이기는 것이 근본이다라는 전국시대의 전투속에서 의식을 형성해온 무사들이다. 무사는 무예자 ·전투자로 온갖 자질을 익히고 있었고, 문 자체, 태평 자체마더 종종 경멸하고 싫어했다.(84) 따라서 중국·조선에서 전해진 가르침의 보편타당성을 믿고 사무라이의 삶과 결합시키려 했던 사람들은 곤란에 직면했다. 주자학을 사상으로 받아들이고 실천을 지향한다면.(85) 우선 학문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게다가 과거제도가 없는 이상 출세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도 제시할 수 없다.(85) 나카에 도주는 군법·군례, 무에 대한 마음가짐, 무사의 행동양식 모두 유도의 일부로 성인이 정한 일이라고 강변했지만, 무 자체를 폄하할 수 없었다. 문무는 떨어질 수 없다고 말했을 뿐이다.(85-86) 일본의 사에 입각해서 도를 논할 때, 무사훈·무사도론·사도론으로 나타나는데, 전국시대 이후의 통념은 유학적 정치관에 반대고, 주종의식도 사대부와 천자의 군신 관념과 현저히 달랐다. 이런 차이들이 일본의 유학을 독특한 장에 두고, 외래사상으로서의 주자학을 굴절·변화시켰다. 때론 주자학을 배우는 사람을 근본적 형이상학이나 사고방법의 차원에서 반성하도록 이끌었다.(86-87)
지배층인 사무라이를 사士로 지칭했으나, 근본적인 차이를 메울 수 없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형성된 지배층이었다. 추상적인 언어들로 사무라이들의 생활양식을 유교의 언어로 뒤덮을 수 있었지만. 현실은 바꾸지 못했다. 가장 큰 차이는 엘리트 선발구조인 과거제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일본은 무과도 없었다. 전국戰國시대가 끝난 후엔 와타리 봉공인이라 불리는 주인을 바꾸는 사무라이들도 없어졌다. 이런 차이를 가볍게 여기면 큰 오해를 낳게 된다.
인정仁政. 오쿠보 다다타카에 따르면, 도쿠가와 가는 첫째로 무용, 둘둘째로 가신들에 대한 친근한 정과 말씨, 셋째로 자비, 이 세 지로 인해 지속하여 온 가문이다.(87-88) 『갑양군감甲陽軍鑑』이 자비를 중시한 것은 ‘좋은 군법’의 하나로서 이다.(88) 사무라이들이 전투를 한 것은 물론 인민을 위해서가 아니다. 인정안민仁政安民을 위해서가 아니고, 그렇게 주장하지도 않았다. 조닌·백성은 전투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기 위한 존재였다.(89) 열심히 영지를 경영한 것도 인정이 목표가 아니라 군사력 강화를 위한 기초를 견고히 하려는 것이며, 막부의 경우 군자금의 조달·관리역인 간조부교勘定奉行가 직할령의 민정을 담당했다. 이는 하늘로부터 위탁받은 인민에게 인정을 베푸는 것을 군주의 존재이유로 여기는 유교적 민본주의와 거리가 멀고, 덕치주의와는 관계가 없다.(90) 오사카 전투 이후 상시임전체제라는 표면상의 원리는 계속되고 무사의 의식은 급격한 변화를 요구당하지 않았다. 하나의 미덕을 나타내는 자비란 말이 통용되면서 유교적 정관을 함의하는 인이란 말은 저항감을 느끼게 했다.(90-91) 민정은 통치자의 주요 임무임에도 불구하고 오랬동안 경시되었다. 민정을 담당한 막부의 대관代官은 경시되었고, 하급관리인 데다이手代는 신분이 비천한 자들로 조세를 거둬들이는 일을 했다.(91)소라이도 세상은 모두 전시의 법령으로 다스려지고 있으며, 무위로서 강제하고, 무슨 일이든 간이·경직한 것을 존중하는 것을 무가의 통치라고 여기고 있다고 평한다.(92-93) 막부가 통치의 부적절함을 이유로 다이묘를 처벌했을 때도, 쇼군에 대한 불충이 문제였다.(93) 전국시대 이후 운명 또는 인과응보를 부여하는 천도天道관념이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93) 쇼군도 천도에 의해 천하의 주인이 되었다는 이해도 있었지만, 쇼군은 제천의식은 행하지 않았고, 도쿠가와 가의 시조인 도쇼구東照宮만을 제사지냈다.(94) 유교의 영향을 받고 민을 불쌍히 여기는 다이묘는 있었으나, 유교적 민본주의와 리를 이루는 인정의 관념 및 그 주체로서의 사士란 이념은 전국 시대 다이묘·무의 통념과 거리가 있었다.(94) 다만 사실상 평시가 지속되었고, 이는 무사들의 전국시대적 통치의식 및 자기규정의 변화를 재촉하며, 그 변화는 유학과 친화적이라, 자비·천도 등의 관념과 연결되어 합성된 유교적 정치관이 서서히 침투·보급되어 갔던 것 같다.(94-95) 유교의 정치관 특히 수기치인·덕치 등의 사사상은 무사들의 귀에는 요원하게 들렸고, 통치자에게 학문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해도, 유자를 실제 정치에 임하게 하는 것을 무사들은 경계하였다. 학자들은 공론가들이었다.(96) 통치실무가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기 어려운 학문이라 느꼈다.(97) 그러면서 성인의 도에 대한 막한 외경이 전면적인 부정을 어렵게 하고 있었으나, 실무에 뿌리를 둔 통치이론은 형성되지 않았고, 관습과 경험이 강조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유학 특히 주자학의 이론적 측면을 인정하면서서도 다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은 이론만으로 안된다고 주장하는 현실주의적 의식을 발생시키는 요인이 되었다.(97) 이런 상황은 서서히 유된 주자학을 독특한 장에 두고, 사상은 점차적으로 정치를 바꾸어 갔으나 사상도 그 자체로 변되어 갔다. 이는 두 가지 방향으로 하나는, 현실의 경세제민에는 실제로 중점을 두지 않고, 무사 혹은 민으로서의 각각의 수업론·마음가짐론에 집중해 가는 것이며, 도학선생의 이미지, 다른 하나는 의식적으로 주자학을 수정하고 재구성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유학을 일본의 현실정의 학문으로 만들려는 방향으로 반잔이나 소라의 학문은 그러한 시도이다.(98)
도쿠가와 시대, 특히 도쿠가와 전기의 통치 방식에서 종종 민본주의적이거나 유교적인 모습이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체계적인 사상의 발현이거나 법체계를 갖추어서 추진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유교적인 변화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본질적이라기 보다 부차적이었고, 그 와중에 유교도 변해갔다는 것. 여기서 눈에 뜨이는 것은 일본 특유의 실무론이다. 실무와 현장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일본은 그걸 아주 강조하는 편이다. 현실주의적 의식, 중간관료들의 독자성 등은 독특한 전국시대와 뒤를 이은 무사와 무가의 통치에서 나오는 것이다. 전세계 어떤 나라에서 전사집단이 260년간 관료적인 통치에 성공한 경우가 있을까? 대부분 전쟁이 끝나면 곧 문치로 돌아서는데. 일본은 달랐다.
군신君臣. 중국의 학문을 하는 사람과 근세일본의 활·화살을 잡는 사람 사이에는 봉공의 방식, 군신관에도 차이가 있다.(98) 『갑양군감』에는 전국시대에 형성된 무사의 주종관계에 대한 기본적 성격을 보이는데, 일정한 역할·권한에서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총체적으로 상하관계로 맺어진 일종의 오야분親分·고분子分의 관계이다.(99) 그것은 개개의 구체적인 유래·사정·개성에 따라 다채로운 양상을 나타내며, 개인적·인격적 색채를 강하게 띈다. 주군을 여러차례 바꾸는 경우도 주군의 가문에 대한 충절의 색채를 띈 후다이譜代격의 가신도 있다.(100) 이 관계는 본래 전장을 누비는 두목과 부하의 인간관계이다. 총애·냉대·질투·결의가 있고, 물질적 은혜화 얽혀 조직은 그러한 인간관계의 묶음으로 존재했다. 충의 모습을 시노부코이忍恋(남몰래 하는 사랑)에 비유하기도 했다.(101) 도쿠가와 시대가 들어서자 세상은 안정되고 와타리 봉공인은 줄었다. 무사는 차례차례로 후다이, 좋거나 싫거나 주군가를 지키는 개가 되어 갔다.(102) 세 번 간하고 물러나는 것은 중국 사람의 여유 있는 생각이다. 주군에의 귀속감은 강했으며, 이른바 생전에 정해진 운명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다. 혈연관계처럼 단절될 수 없는 것으로 느꼈다.(103) 주인에 대한 배신은 선조의 수치이자 자손을 괴롭히는 것이며, 부하는 주군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일이야말로 자신의 임무라고 여겼다. 무사인 이상아무리 하찮아도 주어진 일을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겁쟁이나 불충이라고 하면 결정적인 사태를 초래했을 것이다.(104) 필기시험에서 선발된 중국의 관인과 황제 사이의 관계와 비교하여 훨씬 깊고 운명적인 성격을 자기조 있다, 자연적이고 천명으로도 느꼈을 것이다.(105) 중국 사대부의 군신관계, 주희에게 군신은 의로써 결합하는 것義合이다. 이해타산利이나 출생天에 따라서가 아니다.(105) 도를 행한다는 공동의 목적에서 성립한다. 군이 예로서 신을 대하면 신은 충으로 군을 섬긴다. 군신관계는 의합이기 때무에 부자·형제·부부와 달리 본래의 진실한 마음을 다하기 어렵다. 이는 중국의 군신관계의 이성적·규범적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부합하지 않으면 떠난다. 군자가 출사하는 것은 의를 행하는 것이다.(106-107) 녹봉에 끌려 떠나야 할 때 떠나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중국의 관인은 동시에 지주이며 상인일 수 있다. 원칙적으로 토지로부터 단절되어 성곽 주위에 모여 살며 조상 대대로 주인의 은혜에 푹 빠져 살아가는 무사와는 다르다. 주군에 대한 정서적 일체감이나 몰입감적인 태도는 전혀 없다. 도를 중시하기에 번번이 사직하려고 한다.(108) 이는 도쿠가와 시대 무사의 통념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래서 아코로시赤穂浪士에 대한 반응에서 보이듯 많은 유자들은 무사의 주종의식, 즉 충의관을 스스로 공유하고 있었다. 다소라도 유교적 군신관과 무사적 추종의식의 공존 및 가교 혹은 동일시가 시도고 있다. 예를 들면 기몬崎門(안사이 문하)의 아사미 게이사이浅見絅斎는 진지한 주자학 신봉을 무사적 주종의식과 양립시킨 예이다. 본심을 다하는 진정한 충, 군신관계를 주정情적으로 해석했다. 게이사이는 아코 사건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그는 무사에게 대의를 가르치는 것이 무사의 소학이라 말했다. 다만 무사의 주종의식이 특정한 구체적인 가문에 대해서 존재하는 것에 비해 게이사이는 일반적인 윤리원칙으로 승화시켰다.(109-111) 따라서 그는 혁명을 부정하며, 천황에 대한 반역은 단죄하고, 남조를 정통으로 삼고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를 난신적자라고 부른다.(112) 전에는 게이사이의 사상을 일본적인 것의 현현으로 보고 메이지유신으로 이어진다고도 했으나 이는 비약이고, 주자학이 그 군신관에서 변질되고 후다이화한 무사의 의식에 접근한 예라 할 것다.(112) 다만 사상과 사회의식의 관계는 상호적이라 그 변질된 외래사상은 다시 의식을 변질시키는 요인이 된다. 대의명분이라는 일본어는 마치 주자학의 대명사처럼 되어, 마침내 널리 보급되었다. 게사이에게는 군신의 대의와 결합하여 일존의 존왕론이 싹트고 있었다. 앞의 화이사상에서 탄생시킨 자국중화주의와 같이 존왕양이론의 한 원형이 여기서 성립하고, 그 기치가 무사사회를 결과적으로 붕괴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는 사상이 갖는 역설적 기능의 한 예다.(113) 유교의 혁명 사상, 그중에서도 신이 민을 위해 난폭한 군을 무력으로 방벌放伐하는 것을 정당하다는 사상은 근세일본의 후다 무사들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겉 같다.(113) 17세기 대표적인 호학 명군 호시나 마사유키保科正之와 도쿠가와 미쓰쿠니徳川光圀는 모두 방벌에 부정적이며, 문왕, 백이를 배워야 하고, 무왕은 찬탈·시역의 논란을 면하기 어렵다. 큰 것을 가지고 작은 것으로 바꾸는 잘못이라고 말한다.(113-114) 이는 당시 인정사상이 침투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며, 천명이 아니라 태양의 여신의 자손에게 지위의 기반을 둔 인정과 덕치와는 인연이 먼 천황의 존재는 더욱 혁명론에 불리했다. 언제까지나 긴리사마禁裏様를 숭경해야만 도쿠가와 시대가 장구할 것이고 주장하기도 했다. 신도가는 모두 반혁명적이었다.(114-115) 반면 주희는 원리적으로 명확하게 방벌을 긍정했다. 선양과 방벌 모두 도를 전하는 방법이다. 주자학은 여기서도 일본사회와의 부적합성에 봉착했다.(115) 이 점에서 외래사상의 정당함을 주장했던 사람도 적지 않았다. 안사이 학파 중에 사토 나오카타佐藤直方, 미야케三宅商斎가 있다. 그나 안사이, 아사미 게이사이, 와카바야시 교사이若林強斎는 분명하게 부정했는데, 이 역시 주희의 주자학으로부터의 변질이었다.(115-116) 사젠 셋케이佐善雪渓 같은 사람은 탕·무는 후다이의 신하가 아니라고 논리적 곡예를 시도했다. 이토 란텐伊藤藍田은 탕·무의 행위는 찬시簒弑였다고 단언한다. 일본은 지금까지 천자는 하나의 성性으로 명命을 바꾼 적이 없고, 탕무의 행위는 방벌이 아니라고 논한다.(116-117)
방벌은 문제삼았다는 사실 자체가 흥미롭다. 폭군방벌은 물론 유학에서 중요한 주제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강조된 주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유교사상을 현대적으로 해석할 때, 방벌론을 꺼내들어 혁명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삼거나 유교에 혁명사상이 있어 근대성의 맹아가 있는 식으로 억지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은 폭군방벌에 민감했다. 만주국이나 점령지인 중국의 화북지방의 교육과정에서 『맹자』를 뺄 정도였다. 충효를 강조하기 위해 유교를 다시들고 오면서 방벌에는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이다. 일단 한 번 회사에 들어가면, 어떤 직무가 주어지더라도 불평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인정받고 정년 때까지 근무한다는 일본 노동자에 대한 일종의 신화는 실상 도쿠가와 시대 사무라이의 군신관이자 도덕관이다. 사장이나 장관 또는 의원의 부정이 발견되면 비서는 목숨을 끊어서 이를 막는다. 그러면서 주자학의 일본적 변형에서 존왕론의 맹아를 보여준다. 조선은 평화로웠지만, 두 번이나 반정이 일어나 왕을 교체했다. 일종의 친위쿠데타인데, 일본의 도쿠가와 시대는 단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다. 천황은 바뀌지 않고, 지속되어 왔다. 왜 천황가를 없애지 않았는 지는 두고두고 남는 수수께끼다.
수기치인修己治人. 근세일본사상사에서 주자학을 논할 때, 기성의 정치 지배관계를 정당화하고 사회질서의 기초를 제공하여, 피지배자의 복종과 순종을 이끌어내기 위한 사상인 것처럼 말한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주자학은 피지배자인 인민에게 가르쳐 그들을 교화 선도하려는 사상이 아니다. 주자학은 인민을 지배하고 관인 및 관인이 되려는 계층, 사회적 엘리트가 배우는 학문이다.(118) 중세 유럽의 스콜라 철학은 민중에게 영향을 미치던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반위에서 구축되었지만, 주자학은 자기 주변에서 도교·불와 같은 잡다한 사상이 번성하는 것을 한번이라도 막아낸 적이 없다.(119) 주자학은 동요 없이 정확하게 세상사에 대처해 가는 주체를 형성하는 것이 목적이다. 즉 주적 자아의 확립에 목적이 있고, 그 공부는 자기수양을 통한 완전한 인격의 실현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주자학은 현실의 사회질서를 정당화하는 기능을 수행하기도 하지만, 주희 처엄 자신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나의 정세·정책 그리고 당국자를 엄히 비판하고 그 개혁을 촉구하는 주체의 정신적 기반도 될 수 있다. (120) 그 주체는 인민을 의미하지 않으며, 사대부만의 과제였다. 주자학은 사대부의 학문이며, 사대부의 사상이다. 주자학의 자기 수양은 실제로 통치임무를 담당하는 것을 전제로 하며, 학문을 통해 선발된 소수가 다른 사람을 통치하는 임무를 맡는 과거도의 구조와 정확하게 합치한다.(121) 주희는 지금 세상에 공자가 부활한다면 과거를 보았을 것이라 말했다.(122) 그는 종종 인간의 존재구조를 관인에 비유한다. “천명, 그것을 성性이라 부른다고 말할 때의 ‘명命’이란, 즉 황제로부터 내려온 사령다. ‘성’이란 해야할 직무이다……. ‘심’은 관인이며, ‘기질’은 관인의 성질로서 관대하기도 하고 엄격하기도 하다. ‘정情’은 관청에서 사건을 처리하는 것이다.(『朱子語類』 권4 제40조) (122) 관인인의 이상적인 모습은 인간의 일반적인 삶의 방식으로, 주자학은 주체적 인격형성의 학문이면도 실제로 관인으로서 주체적 인격형성의 학문다.(123) 주자학이 태극·리·기·천·명·성 같은 관념을 구사하는 장대한 형이상학 체계와 이를 기반으로 한 거경궁리의 수양론을 내용으로 한 것은 중국 사대부, 관료들의 직무와 삶의 실상에서 나타나는 특징 즉 장의 성질에 있다.(123) 그들은 천자에게 임명된 지방관으로 임명되면 다수의 토착서리를 이끌고 하나의 지방정부를 혼자서 주재한다. 청대 현·주의 평균인구는 20만을 넘는다. 청대 지방정부는 1인정부로서 학문적 교양을 쌓은 지식인이 한 지방의 인민의 부모, 질서와 복지의 광리로 숭상되며, 충성이나 청렴은 기대할 수 없는 다수의 하급관리를 감독하고, 사법·재정·행정의 전반을 감당하는 제도이다. 청대 현의 서리는 보통은 200~300명 많으면 1,000명에도 이르렀다.(124) 서리에게는 봉건이 있어도 관리에게는 없어 통솔이 곤란했다. 더구나 권한은 광범위했다. 주희도 사창법의 정비를 비롯하여 다방면의 성천자의 대리인으로 개인의 분석력·판단력·지도력을 발휘해야 했다.(125) 중국의 관인에게는 혈통·가문·향당으로부터 나오는 위신과 같은 의지할만한 것이 없었다. 그들은 학문에 의지했고, 문화의 담당자, 도덕의 지도자로, 지식인 정치가와 사제의 중첩이었다. 비서겪인 소수의 막우가 있었을 뿐이다.(125) 그러니 만물의 존재론을 파악하고, 올바른 수양론의 기반이 되고, 올바른 정치로 전개될 것을 믿었다. 내관·경관이 되면 황제에게 의견을 말할 수 있었다. 송대는 귀족정치가 붕괴한 후에, 이러한 학문에만 의거한 사대부, 과거관료에 의한 지배가 황제의 권위 아래 확립되었다.(126) 송대의 고매한 사풍士風이 역사적 진실이 아니더라도 이를 옳다고 말하며 칭송하는 의식은 고조되어 있었다.(127) 도쿠가와 시대 일본에서 유자라는 유학을 전문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실제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존재들이었다.(127) 대다수의 유학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은 고작 조심스럽게 정치를 평론하는 것이다.(128) 소라이는 송유를 궁핍한 서생이라 비판했지만, 소라이가 그쪽에 더 가까웠다.(128-129) 조닌이 학문에 뜻을 품어 조닌으로서 생활을 계속하려는 경우는 한층 기묘했다. 중국에서 지적 엘리트는 정치 엘리트 혹은 그 예비군으로 상승해 갔으나, 일보은 신분사회이기 때문에 피치자 신분을 지속하면서 피치자를 청중·독자로 하는 유자·학자가 존재할 수 있었다.(129) 민의 삷에 기반을 둔 유학이 성립하기 쉬웠다. 세키몬심학石門心学이나 안도 쇼에키가 그렇고, 이토 진사이도 조닌이었다.(130) 막부 말기 무사 신분의 인구비율은 ‘6~7%’라는 추계가 있다. 다섯 명에 한 명이 성인 무사라고 쳐도 1.2~1.4%에 달한다. 한 편 중국에서는 청조 말엽에 관인 수가 인구 4억 3천만 중 겨우 3~4만이었다고 한다. 0.007~0.0093%였다. 생원이상은 125만명으로 0.29%. 조선의 관직도 천여 개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이는 아전과 같은 전문직과는 구별되어 있었다. 일본 무사들은 중국으로 말하자면 환관, 서리, 아역에 해당하는 직무를 다수 포함하고 있다. 중·하의 무사들은 스스로 치안의 임무를 담당하는 사람으로 인식했다.(130-131) 소라이도 평사平士 군대에 편성대는 사졸이라 사자가 아니라고 했다.(132) 게다가 무사들은 통상 토지로부터 분되어 다이묘의 가추家中, 번藩의 조직에 긴밀하게 편성되어 세화된 하나의 역할을 맡고, 복수 교대제로 근무번에만 등성했으며, 상세한 관습·전례에 따라 손위·손아래·동료와 협조하면서 임무를 완수해야했다.(133) 무사에게는 출사와 관계없는 자신의 토지도 없고, 싫든 좋든 주군을 떠나지 못하는 후다이 였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아 자손에게 전해 주어야 할 이에家의 당주로서 이에 전체가 가추에 편입되어 편생 한 지방의 협소한 조직의 일원으로 살았다.(134) 중국의 사대부도 전국 조직의 일부이며, 세부규정이 있었고, 번국가에 비하면 현·주의 자율성은 적다. 그러나 번은 혼자가 아니며 소수도 아니라, 다수의 무사가 견고히 연결된 조직이다. 그곳에서 직장은 세분고, 당급직을 맡을 수 있는 것은 수의 고위 가문 출신자에게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니 형이상학의 의미는 의심스러울 것이다. (134-135) 도시와 촌락의 협소한 인간관계 속에서 손윗사람게 소외당하지 않고 손아랫사람에게 원망받지 않으며 동료에게 미움받지 않도록 세심한 노력을 기울여 결정적인 언쟁을 회피하면서 일생을 살아가야하는 조닌·백성에게는 한층 더 그러했을 것이다.(136) 학문은 이익이 없고 성격만 나빠지고 다른 사람의 장애가 된다.(136-137) 일본 유학의 한 특성으로 주자학적인 성에 대한 불신, 리의 철학이 주관적 억단을 정당화하여 오만함을 초래하는 것에 대한 반감이 있다.(137) 이異문화 사상을 추상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오히려 주자학을 본래의 모습 이상으로 이치(도리·사리)를 따지는 학문으로 만들어 버렸을도 모르겠다. 선불교 철학과 대결할 필요가 없었던 것도 원인이다. 주자학의 일본사회에 대한 부적합성을 리 일반이 갖고 있는 실實과의 괴리로써 해석하려는 의식이 생기기 쉬웠고, 중국과 일본의 사·학자의 삶의 방식의 차이, 각각의 삶이 요구했던 정신형태의 차이가 있었다.(138) 주자학 비판은 당시 일본의 체제사상(체제교학)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기성의 일본사회로부터 나온 외래사상에 대한 비판일 것이다.
처음 눈에 들어온 부분은 유교는 민중에게 영향을 미치는 종교가 아니었다는 지적이었다. 중국에서도 조선에서도 유교는 종교로서 불교나 다른 종교를 압도하거나 몰아낸 적이 없었다. 다만 유학의 대상인 지배층게는 그렇지 않았다. 한때 근대화 이론의 전개 과정에서 베버 테제를 기계적으로 가져온 나머지 유교적 자본주의 같은 용어를 만들어내고, 서양의 기독교의 역할을 유교에 맡기려고 했다. 이때, 유교가 종교냐 아니냐는 논쟁이 조용하지만 있었다. 핵심은 천제(제사) 문제, 초월적인 인격신 문제, 내세관의 문제 등이었다. 그러나 와타나베 히로시는 일본과 중국의 사례를 들어서 간명하게 유교가 종교였던 적이 없다고 말한다. 조선에서 유교가 피지배층을 파고드는 종교의 역할을 했을까? 그럴 수가 없다. 불교를 배척하여 무종교적인 사회와 토착신앙의 번성을 낳았을 뿐이다. 당연히 외래종교에게도 취약했고, 지배층 만의 사상이었다는 점은 깊이 새겨볼 필요가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중국의 사대부와 일본의 사무라이의 차이다. 숫자만으로도 엄청난 차이다. 비율로 보아서 대략 백배가 넘는다. 물론 생원을 포함하면 그 열배가 되지만. 일본의 사무라이는 어찌되었든 녹봉을 받는 존재였다. 그러니까 상비군 체제를 사무라이 체제로 전환한 것다. 농민을 병사로 모집한다도 직업군인인 부사관이 있어야 한다. 바로 이런 부사관들 각종 아전과 향리를 모두 포함한 일종의 체계를 형성한 것이다. 여기서 와타나베 히로시가 명시하지는 않고 있지만, 이는 토지소유형태, 조세수취형태, 조세수취능력 모두와 연관된다. 조선은 각종 잡세와 이권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하급관리 등을 유지하는 구조였다면, 일본은 이를 번국체제로 급료를 지급하는 형태를 17세기부터 유지하고 있었다. 급료가 적었을지라도. 이 차이야 말로 근대 일본과 근대 한국의 형성에 결정적인 차이를 가져왔다. 그리고 근대 유럽의 형성과도. 문득 헬조선이 각자도생의 사회인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가家. 가는 가장 중요한 덕목인 효가 행해져야 할 장소다.(141) 근세일본의 『무가제법도』제1조에 문무·충효를 강조하고 있다. 다이묘의 조직은 오이에御家이며, 더구나 그것은 다수의 이에家로 구성되어 있다. 도시나 촌학의 구성단위도 이에였다. 사람은 대대로 이어지는 것으로 예정된 이에에서 태어나 이에의 성원으로 일하는 것이 정상적인 삶이라는 것은 관된 통념이었다. 이에의 지속과 번영은 인생 최대의 희망과 의무이며, 단절은 불행이었다.(143) 그러나 중국과 당시 일본 사이에는 ‘가家’라는 글자로 표시된 집단의 구조, 가족관계의 성질에 상당한 차이점도 존재한다. 이에는 단순히 선조와 자손을 포함한 혈연집단이라고 할 수 없으며 일종의 형식적인 기구이다. 이에는 개개인의 집합이라기 보다는 개개인을 초월하여 개개인을 그때그때의 질료로 히는 형식적이고 영속적인 기구이다. 일종의 법인의 성격을 갖는다고도 표현한다.(143) 사회적 기능家業을 가지고, 이름을 가지며家名·屋號, 자체의 명예家名·家柄를 가지고, 그 자의 상징家紋을 지니며, 그 자체의 재산家督을 소유하고, 그때그의 대표자堂主가 있었다. 대자의 교대는 이에를 잇는다고 표현한다.(143-144) 중국에서는 엄격게 부를 따라 이어진 동일한 선조를 갖는다고 말하는 종족으로서의 광의의 가家와, 그 일부분을 구성하면서 가계家計를 함께하는 생활공동체로서의 협의의 가家가 있고 모두 구체적인 개인의 집단이다. 자식 중 한 사람이 가문을 잇는다는 관념도 없고, 이에모토家元도 없다. 가산분할도 가능하고, 본가과 분가의 구별도 없다. 전쟁 전 법률 용어로도 쓰였던 가독家督 역시 일본어다.(144-145) 중국의 성은 개인의 호칭이지만, 일본의 묘지名字란 댇로 이어지는 이에의 명칭이다. 일본과 달리 중국, 조선은 결혼해도 성을 잃지 않는다.(146) 주자학은 중국의 가를 전제로 그 원리를 보편적인 것으로 가르침을 역설한다. 중국은 개인의 근로소산을 단일한 가계에 넣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생활양식同居共財이다.(148)
일본의 이에 구조에 대해서는 한국에도 적잖이 알려져 있다. 우에노 치즈코는 『근대 가족의 성립과 종언』에서 이런 이에 제도가 서민에게 자리잡은 것은 메이지 민법 이후로 본다. 그때지는 사무라이의 윤리였다는 것이다. 전통사회에 대한 연구에서 결혼, 양자 관계 등을 중시하는 것도 이점이 중국, 일본, 한국의 차이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일본의 이에 제도는 계속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는 주제이다. 사무라이 뿐 니라 죠닌 문화에서도 중요하다.
성씨姓. 중국 가의 특성에서 유래한 가장 구체적이고 명쾌한 가르침으로 동성혼과 이성양자의 금지가 있다. 중국에서 동성이란 부계로 동일 인물을 공통 조상이다. 동성이란 동일한 기의 흐름을 공유하는 사다. 동성끼리의 혼인은 도덕율에 위배되는 것이다. 일본사회는 그러한 족외혼의 규정은 없다.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서민에게는 공식적으로 성이 없다. 일본에서는 같은 문중의 결혼이나 사촌 간의 결혼을 선호한다.(148-149) 동성결혼의 금지는 반발을 가져왔고, 야마자키 안사이나, 구마자와 반잔은 애매한 자신없는 설명을 하며 정부의 처분에 맡기고 있다. 아메노모리 호슈는 동성이 결혼하지 않는 것은 주례에만 있다고 말고, 히로세 단소는 중국서만 그래야한다고 말한다.(150-151) 논거는 여러가지 지만,『예기』, 『소학』에 명문화된 가르침을 상대화하고 일본의 속俗에 근거했다. 이성양자에 대해서는 훨씬 심각했다. 중국의 양자란 가문을 계승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제 아들이 없는 사람을 계승하는 사람을 말한다. 사람은 자신의 기를 이어받은 자로부터 제사를 받으로 선조로부터 이어가는 것이므로 양자도 동일한 기를 이어받은 사람이어야 했다. 주희도 이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152-153) 그러나 근세일본에서는 이성양자나 이성인 데릴사위를 받아들이는 것은 다이묘 이하 결코 드물지 않는 관행이었다. 이에는 동일한 기의 흐름이라기보다는 형식적인 기구였기에 혈통이 다른 타인이라도 성을 바꾸어 가독·가업을 계승하면 이에가 존속되는 것도 가능했다. 절가재흥絶家再興만 아니라 명적상속名跡相續도 가능했다.(154) 가록家祿을 승계하여 대대로 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 무사 조직 즉 막부나 번의 경우 동성이 아니면 절대로 양자가 될 수 없다면 대대로 존속이 위험해졌을 것이다. 전국시대 오노데라의 가법에는 양자는 성의 존비를 가리지 않고, 그 기량의 가부를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155) 『무가제법도』는 동성을 우선시 하지만, 이는 유교적이라기 보다 계통을 중시하는 것이다, 또 데릴사위에 대해 동성혼을 장려하는 것이 된다.(156) 중국과 조선에에는 성을 바꾸는 것은 절대 해서는 안되는 일이며 상대에 대한 모욕이나, 근세일본에서 성을 바꾸는 것은 수치가 아니며, 이성양자를 확립된 관행으로 하는 사회였다. 여기에 이성양자 금지가 천리라고 주장하는 사상이 서책을 통해 유입되었다. 이에의 존속이 걸린 문제였다.(157) 반잔의 주군 이케다 미쓰마사도 소인의 인정·풍속에 대한 배려를 정치적 지혜로 정당화하고 성인의 법을 상대화했다.(158) 미우라 바이엔三浦梅園은 법이란 사람이 세운 것이고, 풍속은 그 나라의 습관이라고 말했다. 이즈모의 마쓰다이라 가를 섬기던 유자 모모 세이카도 일본은 성씨를 세우는 것을 매우 중시하며, 중화는 혈맥을 잇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159) 안사이 학파의 아토베 료켄도 일본사람이 이에를 계승하고 녹봉을 받아 그 은택으로 자신의 몸이 윤택해지고 그 이에를 위해 효심을 다했다면, 제사를 드렸을 때 (선조의 영혼이) 감응하여 찾아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제사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사토 잇사이에 따르면 고대의 성왕인 순임금도 그에게 천하를 선양한 요임금의 데릴사위에 다름아니다.(160) 히로세 단소는 이성양자가 옛날의 도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어진 자를 밀어주고 불초한 자를 물리치는 수단으로 활용하자고 한다.(161) 그러나 이성양자부정론도 많이 있다. 특히 안사이 학파는 적어도 주관적으로는 열광적인 반수정주의였다. 야마자키 안사이는 이성양자를 부정하면서도 그것을 경망스럽게 말하는 것을 제한했다. 아사미 게이사이가 이성양자를 금지한 『양자변증』저술했을 때, 조용한 설득을 변호한 미야케 쇼사이도 이성양자가 된 자가 입문하면 옛 성으로 복귀하도록 가르쳤다.(162) 와카바야시 교사이는 이성양자를 금지하면서도 이미 양자가 되었다면 교대할 때까지 대신하라고 말했다.(163) 양명학으로 전향한 미와 싯사이는 양자를 금지하면 다이묘도 천하의 주인의 이에조차도 단절될 수 있다고 말했다. 궁리를 배척하고 내부의 본심에 의거하는 양명학이 속과의 융화를 가능하게 했다.(164) 한편 일본유학의 대표라는 소라이학은 종종 중국식 사고에 매우 충실하다. 그러나 오규가는 소라이 이후 3대째 양자가 계속되었다.(165)
일본의 이에 구조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장치가 이성양자이다. 이에를 잇기 위해서라면 자유롭게 사람을 받아들인다. 필시 전국시대의 사무라이들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데릴사위를 과감하게 받아들이는 전통이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이성양자를 과감하게 받아들이는 전통을 둘러싸고 유학자들 특히 주자학들은 적지않은 논쟁을 전개했다. 상복을 입는 논쟁이나 시묘살이에 관한 논쟁보다 훨씬 절실해보인다. 이렇게 성을 쉽게 바꾸는 전통이 일본이 식민지 시대에 시도한 창씨개명도 그 영향 하에 있었다. 창씨개명을 둘러싼 일본과 한국의 격렬한 차이는 이에와 성씨를 어떻게 보느냐와 관련된 것이다.
효도孝. 가족도덕의 중심인 효는 근세일본의 유교 수용에서 주요한 회로이다. 효·효행은 일상어였다.(166) 효의 이해에 있어서도 주자학과의 마찰이 생겼다. 효라는 개념도 부모는 일기와 일를 나누어가졌기 때문이다. 서로 이어져 마음에 그리는 정이 타인과 비교할 수 없는 존재이다. 동일한 기를 가진 자손이 선조를 섬기면, 선조가 감통하고 감격한다. 사후 제사는 생전의 봉양, 사망 시의 장례와 상례와 함께 효의 세 가지 양태를 이룬다. 제사를 지내면 귀신은 행복하고, 지내주는 사람이 없으면 굶주린다. 주자학의 효란 친자관·사생관을 전제로 하여, 부모에 대한 생전이나 사후나 천리의 절문인 예에 맞게 엄숙한 공경을 구현해가려 하는 것이다.(166-167) 일본의 아비와 자식은 반드시 동일한 기는 아니었다. 가업을 잇는 것을 혈통을 잇는 것보다 우선시했다. 아버지란 소속되어 있는 이에의 현 대표자이거나 혹은 전 대표자였다. 메이지 민법의 가독家督상속에 해당하는 가장지위의 상속이란 중국 가족 제도 안에서 찾을 수 없다. 선조란 이에의 선조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을 받아서 이어주는 관리라고 말했다.(168-169) 단독 상속이 일반화됨에 따라 이런 의식은 한층 공고해졌다. 가독은 자신의 것이 아닌 선조의 것을 지키고 운영하는 입장이다. 조금도 줄거나 모자람이 없게 맡아두었다가 물려주는 것이며, 가업에 힘쓰지 않고 가산을 줄게 하며, 가명을 더럽히는 것은 불명예이자 최대의 불효였다. 무가에서는 영지를 늘리는 것을 입신이라고 한다. 『무가제법도』와 짝을 이루는 『제사법도諸士法度』도 방심함이 없이 가업에 힘쓰라고 말한다. 가업에 정진하는 것이 무사의 효이다. 부모가 없이도 가업을 훌륭하게 이어받아, 이에를 보존하고 번영시키면 그 자체가 효행이었다. 효란 실은 자신이 속한 이에에 대한 충성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말할 수 있다.(170-172) 주희도 부모의 재산을 잘 보존하고, 파탄에 이르지 않는 것이 효순이라고 말한다.(172) 중국에서도 가에서 기의 흐름은 재산의 흐름에 기반하고 있으나 그것이 효 관념의 중심은 아니고, 가업·가직의 보존·전달 그 자체는 효의 요건은 아었다. 이토베 료겐은 타성이라도 이에를 계승하고 녹봉을 받아 그 은택으로 자신의 몸이 윤택해지고 그 이에를 위해 효심을 다했다면, 제사를 드렸을 때, 선조의 영혼이 감격하는 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유학자들은 효의 가르침을 수정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172-173) 가이바라 엣켄은 선조·부모에게 효하는 도는 봉양·제례에 그치지 않고 성학을 알고 인의의 도를 행하고 자신의 가업에 힘쓰며, 이름을 드높여 부모·선조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을 효행의 도라 말했다.(173) 그는 ‘가업에 힘쓰며’를 삽입했고, 구마자와 반잔은 ‘선조’와 ‘가명家名’을 포함시켰다. 나카에 도주는 부모의 덕을 밝히고 각각의 직분에 정진하는 것이 것이 효행의 본의라 말했다.(173-174) 이토 진사이도 학문을 즐기고 선에 뜻을 두며 입신하여 이에를 일으킴으로 조업을 신장시키고 문미門楣(이에의 명성)을 드높이는 것을 효라고 말했다. 가업·가명에 대한 헌신이야말로 효의 주안점이었다.(175) 미쓰이 다카후사는 조닌은 무사의 흉내를 내면 안된다며, 신·유·불에 빠지면 이에를 파멸시킨다고 말했다.(176)
일본의 유학자들은 ‘효’도 일본적으로 변형시켰다. 부모에 대한 효는 가문에 대한 효가 되었으며, 그들이 중시하는 효행 중에는 가업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와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들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효가 목적인지 수단인지 혼동될 정도다. 중국은 물론이지만, 특히 조선의 사례를 보면, 주자학을 신봉하는 유교국가에서 ‘효’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자 이데올로기적 목표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그 효의 목적을 가업으로 바꾸어버린다.
국가国家. 중국의 가는 끊임없이 가지를 치고, 재산이나 구성원의 사회적 지위 부단히 상하로 변동하면서도, 동일한 기의 흐름으로 이어져 간다. 근세중국에서 혈통은 강인하게 연속된다.(176) 근세일본에서 저변까지 확산되어 간 이에家란 흐름이라기 보다는 상자箱 내지는 과거로부터 미래로 이어지는 통筒이었다. 이광규는 일본의 이에를 통나무에 비교한다. 내부는 텅비어 있으며 마디와 나뭇결이 매우 튼튼하게 이어져 있다. 도쿠가와 가를 정점으로 각각의 이에들은 가업·가명·가격·가산을 가지고 그 안에서 특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닌의 이에는 빈번하게 승강과 교대를 반복하였다. 농촌 마을을 구성하는 백성의 이에도 점차 각각 가부株로서 고정되어 갔고, 다이묘 가도 조세를 확보하기 위해 이를 환영했다. 각 이에가 이에임으로 인해, 즉 각각의 가업을 영위하는 가운데 정치사회가 성립고 있었다. 직분국가職分國家라도 연가성국聯家成國이라고도 하고, 가연합국가家聯合國家라고도 할 수 있다. 와타나베 가잔은 천하라고 하는 커다란 상자, 제후라고 하는 작은 상자, 무사라고 하는 내부의 칸막이라고 말했고, 후쿠자와 유키치는 도쿠가와 치세를 보면 일본 소속의 수천만의 사람은 각각 수천만 개의 상자 안에 수천만 개의 장벽으로 격리되어 있는 것 같아서 라고 회고했다.(176-178) 송대 이후 중국에서 가는 상자가 아니었고 정치권력은 인민 중에서 개인으로 상승해 간 학자들이 신臣으로 담당하고 있었다. 도쿠가와 체제에서 인민의 신으로의 상승은 불가능하며, 민은 곧 신이다. 가직국가에서는 가직을 영위하는 것 자체가 국가의 한 기능을 담당한다. 미쓰이 다카후사는 천하의 사민은 사농공상으로 나뉘어 각각 그 직분에 힘쓰고 그 업을 계승하여 이에가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누구나 하늘로부터 부여 받은 각자의 업이 있다. 통속 도덕서에 자주 등장한다.(179) 상인의 매매는 나라 안의 자유(편리함)를 실현해야 할 담당자에게 천도로부터 주어진 것이라 말했다. 이시다 바이간도 사민을 다스리는 것은 군주의 직무이고, 군주를 돕는 것은 사민의 직분이라며, 맹자의 시정지신 市井之臣, 초망지신草莽之臣을 원용하며, 각자의 가업이 군주를 도우니 그런 의미에서 각자는 신하라고 설명하는 것이다.(180) 중국에서 민이란 존재는 자기목적이다. 민은 역할이 아니라 사실이이다. 군주와 신는 민을 지배하며 의존한다. 그러나 민은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고, 의존의 대상이 되며 통치의 대상이 된다. 원리상 민을 돌보기 위해 군신이 있는 것이다.(181) 소라이도 온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인군이 인민의 부모가 되도록 도와주는 역인이라 말했다. 가업을 가진 모든 사람은 역인이다. 군주는 민의 부모다. 민은 목적이면서 수단이다. 소라이는 민을 구제하려는 태도는 의외로 부족했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세상의 곤궁·나라의 곤궁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우선 풍요롭게 하는 것이 통치의 근본이라 체제유지 자체가 목적이다. 선왕의 도는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것이고, 도란 천하국가를 다스리는 방법이고, 예악형정 등이 모두 도이다. 이는 정치체제가 존재하는 목적을 생각지 않고, 단지 안정적인 존속 자체만을 목적으로 한다. 그를 위한 수단체계으로 도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체제 내에서의 만민은 그러한 목적을 위한 협력자라는 위상을 부여받고 있다고 이상할 것이 없다.(183) 유학으로서는 이색적이지만 가연합의 가직국가와는 는 기막히게 짝을 이루고 있다. 소라이학 이란 고대중국의 정치학이 아니라 도쿠가와 시대 일본에서의 정치학이고자 했다.(183-184) 이런 국가의 구조는 효와 충의 관계에 대해서도 독특한 이데올로기적 귀결을 낳는다. 민은 가업에 힘씀으로써 군주에게 충성하며, 가업에 정진하는 것은 효의 내용이다. 가업을 통해 충과 효는 일치한다. 민은 이미 신민이었다.(184) 무사의 경우 가업은 주군에 봉공하는 것 충에 힘쓰는 것이 그대로 효이며, 효행이란 충의다.(185) 효는 충에 부되는 것이고, 같은 것이다.(185) 충효일치론은 중국에도 많지만, 근세일본의 충효일치는 다르다. 그것은 충과 효란 가업으로서 행하는 한 가지 행위의 양면임을 말하고 있다. 후기 미토학은 국학을 계승하여, 고대일본에서는 각 씨족이 역대 천황에게 대대로 충성을 다했다고 주장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민이 천황의 후다이였다. 충과 효는 하나서 나온다. 『국체의 본의』에는 천황에 대한 충성은 선조의 유풍을 현양하는 것이니 부모·선조에게 효하는 것이며, 충효일본이라 말하고 있다.
가직국가라는 개념은 와타나베 히로시의 『일본정치사상사』에 한층 간결하게 정리되어 있다. 이는 메이지 유신 후 일본 근대국가에도 고스란히 연결된다. 보다 강화된 형태로. 일본사회를 상자곽이 겹친 상태로 표현한 후쿠자와 유키치의 표현도 흥미롭지만, 이광규가 한중일의 가족구조를 비교해서 대나무라고 말했다는 것은 더욱 흥미롭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민본주의는 없는 것이다. 민은 대상이자 수단이다. 그런데, 가업과 충성을 통해 목적이 된다. 소라이가 만들어낸 것은 유학인지 일본 체제 정당화론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특히 여기서 충효일치론이 등장하며, 이는 가업을 통해 연결된다. 주자학은 물론 유교 전반은 효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이며, 효에 충이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충과 효를 가업을 통해 일체화하고 있다. 아마도 이것이 권위주의 시절 한국의 중등교육기관에서 강조하던 충효교육의 실체일 것이다. 그 방식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예禮. 주희는 예를 천리天理의 절문節文, 인사人事의 의칙儀則 즉, 모든 사물의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모습이 구체적으로 분절되어 그에 어울리는 문체를 띤 형태가 바로 인간사회의 제도·의식·규범이라는 뜻이다. 도품절制度品節이며, 절문도수節文度數의 상세함이 있는 것이다. 사람 마음에는 바른 제도·의식·규범에 따르려는 본성이 태어나면서 갖춰져 있는 것이며, 세상의 질서도 예에 의하여 성립한다.(189) 주자학은 이러한 구체적 실천을 매우 중시하며, 주희가 『가례』를 저술했다.(190) 도쿠가와 전기 일본에도 전쟁이 종식된 후, 신분별로 여러 격식이 빠르게 고정되어 갔고, 의식과 행위는 엄숙하게 감독되었으며, 전반적으로 예 관념에 친화적인 사회였다고 볼 수 있다. 주자학을 중심으로 하는 도래 유학이 수용기반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중화 예학의 모델로부터 보자면 너무나 다른 모습이고, 너무나 야비하였다. 궁정의례는 무가의 규범과 전국시대의 유습이 뒤섞인 것이었다. 관혼상제는 불교·신도·제민속이 불가사의게 절충되어 있었다. 조닌·백성의 행사나 행위규범은 더욱 이적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190-191)
유교는 예로서 실천을 드러낸다. 구체적으로 백성을 교화하는 방식이 바로 예이다. 그러나 일본에는 이 예가 없었다. 다리 말해 중국식 혹은 유교직 예, 즉 관혼상제가 깊이 침투하지 못했다. 단적으로 현대 일본에서 가장 보편적인 양식은 자녀가 태어나면, 신사에서 축하예식을 하고 결혼식은 신도식과 불교식, 그리스도교식이 혼용되나, 드레스를 입기 위해 예식장 한쪽에 지어진 교회나 성당에서 기독교식 예식을 하고, 장례를 불교식으로 한다. 특히 불교식 장례는 숨은 천주교인을 적발하기 위한 사청제도로 인해, 보편화되었다. 메이지 유신 초기 신도식 장례를 도입하려다 결국은 신사비종교론과 함께 신도식 장례가 뒤로 물러나게 된다. 일본인이 종교가 없다고 흔히 말해지는 이유가 이런 데 있다.
가례家禮.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죽은 사람에 대한 예, 즉 장제葬祭였다. 일본에서 유교식 장례는 종종 부모의 의향에 반하는 것이라 부모의 유지를 거역하고 강행하는 것을 효행이라 말하기 어렵다. 나 데라우케寺請 제도에 의해 장제의례는 사원의 공인된 전권사항이었다.(192) 야마자키 안사이는 간곡하게 설명하면 될 것이라고 낙관했지만, 구마자와 반잔은 지인 노나카 겐잔이 문공가례에 따라 아내의 장사를 치렀을 때, 장제의 모습이 천주교 신자라는 풍문을 불러 일으켜 에도서 변명해야 했다. 다자이 슌다이는 어진 효자라도 상례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193-194) 큰 도에서는 매장도 절에서 할 수밖밖에 없었다. 하야시 가처럼 자신의 묘를 갖고 유교식 장례를 한 예는 있다. 야마가 소코도 많은 경우에 불교의 설에 따라도 괜찮다고 말했다.(194-195) 한편 구마자와 반잔은 경우에 따라 수토水土의 차이를 이유로 장례를 상대화할 것을 주장했다. 야마자키 안사도 마쓰리(제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상대화를 인정했다. 아사미 이사도 속례를 인정했다.(195-196) 이때 문제는 무엇이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원리이며 어디까지나 변통할 수 있는 세칙인가를 밝히는 데 있다.(197) 예를 들면 부모의 3년상에 대해 막부는 부모를 한 기는 50일 복은 13개월로 정하고 있다. 야마가 소코는 50일 이후에는 집에 돌아오면 상복을 입고 술과 고기를 멀리하며 상례를 행하자고 관공서와 가정을 분리 대응하자고 말했다. 사람들의 눈을 한 은밀한 의례, 유교도들은 가레키리시탄 같았다. 삼년상의 기한을 단축하는 것을 긍정해 버린 사람도 많다.(197-198) 원리를 지키기 위해 몸과 마음을 나누어 사용한다. 가이바라 엣켄은 마음으로는 옛 도를 몸의 언행은 지금 세상의 풍속을 따른다. 와카바야시 교사이도 불교를 통박하면서 독경을 듣고 법사에 참례하는 유자의 생활을 했다. 표면과 내면을 분리하면 된다.(200) 주자학자가 의식적인 연기를 주장하는 것은 곤혹스런 타협이었다. 장제의 예에 대해 끈질게 개혁을 요구했던 유자도 있다. 다자이 슌다이 등의 성과는 신장神葬 운동과 비교해도 빈약했다. 유교식 장례는 애당초 올바른 것이라고 인정받지도 못했다.(201-202) 불교를 비판하면서도 대체로 자신만의 장제의 예를 갖추지 못한 유학이 일본의 유학이었다. 죽어서 귀신이 된 선조를 성의와 공경을 다해 제사하고, 그 내격來格을 제명성복齊命盛服하고 기다리는 종교적인 경험을 결여한 유교였다. 근세일본의 유학에는 귀신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202) 아메노모리 호슈도 귀신에 관한 것을 소홀히 한다 했고, 후쿠자와 유키치도 귀신유명 鬼神幽冥의 망설을 논하지 않았다고 했다.(203) 주희는 기로 귀신을 설명하지만, 귀신에 대한 사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한다.(203) 이토 진사이는 귀신을 논하는 것을 단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성왕의 귀신과 복무卜巫를 숭배하고 믿은 것은 인민에게 맞추었던 것이고, 공자의 유언일리 없다고 말했다. 아라이 하쿠세키는 『귀신론』서 요괴·도깨비불·환몽·덴구에 이르기까지 합리적으로 설명한다. 노골적으로 회의적 태도를 드러낸다.(204-205) 소라이는 귀신 숭경을 인정했으나 이는 선왕이 인민의 인정에 맞춘 것으로 신들에게 지하는 루소의 입법자도 유사하게 통치수단으로 귀신을 이용하는 것다.(205-206)
일본에 결국 유교식 장례는 정착하지 못했다. 사무라이도 죠닌도 백성도 관습을 이기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유학자들은 표면과 내면의 분리라고 하는 주자학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대응을 하기도 했다. 간혹 유교적인 장례를 행한다고 해도 종교적인 경험이 없었다. 그렇지만 유교적인 장례를 실행한다고 해서 유교적 장례가 귀신 혹은 사후세계에 대한 위안과 종교적인 경험을 제공할 수 있을까? 와타나베 히로시는 조선과 중국의 유교적 장례는 일종의 유교적 종교적 체험을 한다고 하는데, 이는 단순히 책과 논리에 의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실제 귀신에 대한 관념이 한국 유교에 있었는지는 어려운 논란을 가진 주제이다. 조선의 사대부가 유교를 통해 종교적 경험을 했는지 여부는 쉽사리 단언할 수 없다. 조선의 주자학자가 종교적 체험을 하지 못했다면, 어떤 유교에서 종교적 경험이 가능한가. 와타나베 히로시는 중국과 조선에서 유교가 다른 종교의 유행을 막지 못했다고 하는데, 실은 지배층이 사대부도 이를 막을 수 있었는지 의심이 든다. 무엇보다 장례와 귀신을 연결해서 종교적 경험으로 해석하는데 적지않은 의문이 있다. 과연 조선의 유교도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 이 논리는 어쩌면 religion의 충격을 설명하기 위한 그의 포석이 아닐까.
왕례王禮. 예란 본래 성인인 왕이 작위하여 제작한 것이다. 사젠 셋케이는 예제는 천자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쇼군 가로부터 나와야 한다고 말했는데, 쇼군은 그것을 하지 않았다. 막부와 가까웠던 유자들이 쇼군에게 예의 제작을 기대하는 것은 당했다. 예를 제작하자는 하쿠세키의 주장은 어느 정도 수용되었다. 쇼군의 명호가 일본국왕임을 명확히 하고, 사루가쿠猿楽가 아닌 아악을 의식에 사용하는 등 다양한 개혁이 피나는 노력에 의해 실현되었다. 그러나 이에노부家宣는 3년만에 죽었고, 막부의 신하들은 하쿠세키를 오니鬼라 부르며 꺼려했으며, 그는 고립되었다. 요시무네吉宗는 하쿠세키의 개혁을 뒤집어 원상태로 복귀시켰다.(206-210) 이때 오규 소라이는 성인이 예악형정을 제작했다고 주장하며, 주희가 교라 부른 예악형정을 도道라고 말했다. 예악형정의 의의와 제작의 필요성을 최대한 주장한 것이다. 그도 당시의 세상을 그 상태 그대로 융성하고 문채나는 중화의 고전문명이라고 간주할 수는 없었다.(211-212) 에도의 왕은 예를 제작하지 않았고, 무사의 풍속은 조야하고 살벌했다. 유학자의 관심은 교토의 옛 왕에게로 향했다. 하쿠세키는 천황의 즉위의식·원복의식을 참관했다.(213) 다자이 슌다이도 공가는 예악을 사용한며 막부의 의식용 악樂도 노能와 교겐狂言을 폐지하고 교토의 아악雅樂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토의 예악은 존왕론을 낳은 원인이기도 했다. 사무이들은 여전히 야만적인 이적풍이어서 교토의 예악에 대한 동경을 막부에 대한 반감으로 연결시키는 사람도 나타났다.(214-215) 그의 재전재자 야마가타 다이니山県大貮는 성왕의 예악을 도로 여겼고, 예가 없는 막부의 방벌까지 암시했다.(215-216) 한편 소라이의 제자 핫토리 난카쿠服部南郭는 일본은 예악없이 다스려지는 것이 중국인보다 성품이 좋다고 말했고, 예악이 없는 채로 태평은 더욱 지속되었다.(217)
예는 궁극적으로 지배자에 의해 실행되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도 국가 행사의 프로토콜은 엄격하면서도 웅장함을 드러낸다. 메이지 일본의 근대 천황지배 의식도 천황의 지방 순행과 도쿄에서의 행렬, 퍼레이드 등을 통해 확산시켰다. 도쿠가와 일본의 참근교대도 지배를 확인하는 하나의 예 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의식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면서 아악이 없거나 문화적 부족한 부분만 강조한다. 교토의 예가 근왕론, 존왕론의 기반이 되었다는 주장은 사적 해석에 가깝다. 예가 원인은 아니었다. 연극적 정치 즉 극장국가는 어디에나 존재했다. 다만 그것을 설명논리로 활용했다는 점에 있다. 막부 통치가 예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막부 통치의 예가 더이상 힘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더욱 대담한 해석들이 등장한다. 예악없이도 중국인보다 낫다는 것이다. 유학자들의 변형된 일본제일주의, 일본특수주의의 원형이 곳곳에서 등장하게 된다. 지금도 일본사회 곳곳에 숨어있다. 한국으로도 넘어와서 근거없는 한국 제일론이 종종 등장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 근거없는 바람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유학사의 한 해석. 세키가하라 전투, 오사카 전를 거쳐 확립된 정치체제는 정통교학은 없었지만 체제의 안정도가 높았고, 그 제도를 정당하고 당연한 혹은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는 의식이 상당히 광범하게 존재했다. 전국시대의 투쟁이 최종적 종결된 상태이자, 상시임전태세라는 인식의 공유 속에서 비종교적인 조닌문화가 발흥했다.(219) 당시 중국·조선에서 주류가 되어 있던 유학을 기본적인 진리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등장했고, 새로운 여러 사상적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어긋남·모순·알력·충돌을 거쳐 의식적·무의식적 주자학의 수정·변용을 거쳤다. 따라서 도쿠가와 시대의 유학사는 체제의 정통사상인 주자학이 붕괴되어 간 과정과 같은 것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 외래사상과 기존 사상(사회제도와 결합된) 사이에 존재하는 친화성을 기초로 하여, 다른 면에서 그 사이의 비친화성·부적합성을 해소하고 해결하기 위해 차례로 시도된 과정이다. 소라이학의 폭발적인 유행 이후 국학·양학을 비록한 다채로운 사상이 전개되었다. 도쿠가와시대 전기의 유학란 고대·중세와는 다른 상황에서 새로이 유학의 이식이 시도고 정착이 진행되어 18세기 중반 이후의 다종다양한 사상의 전개를 준비했던 과정이라라 볼 수 있다.(220-221) 우선 세키하라 이부터 대략 덴나天和(1681-1684) 무렵까지 제1기, 이식기라 부를 수 있다. 여전히 무풍이 감도는 세상에 불교나 신도와 나히 주자학 계통의 서책이 퍼지며, 개성을 가진 유학자가 등장했다. 제각기 자기류의 유학을 전개한 시기로 하야시 라잔, 마쓰나가 세키고, 나카에 도주, 구마자와 반잔, 야마자키 안사이, 기노시타 준안, 야마가 소코, 노나카 겐잔 등다.(221-222) 겐로쿠元錄·호에이宝永·쇼토쿠正徳·교호享保 무렵이 제2기, 정착기다. 현저한 경제발전을 바탕으로 문화가 개화한 반면, 인구는 보합국면으로 바뀌었다. 쓰나요시·이에노부·요시네가 쇼군이었다. 진사이학, 소라이학이 출현하여 유학계를 석권하고 세키몬심학도 나타나 유학의 사회적 침투도 심화되어 간다. 아라이 하쿠세키, 무로 규소, 가이바라 엣켄 등이 있다. 이 시기는 유교경전 자체의 권위는 인정하면서 그에 대한 주자학적 해석을 잘못이라 하여 주자학을 체계적으로 비판하고, 당시 일본사회에 적합한 유학을 형성하려는 시도가 영향력을 끼쳤다.(222-224) 엔쿄延享·간엔寛延 무렵 이후부터 소라이학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유학의 틀을 벗어나는 다채로운 사상이 꽃을 피웠다. 가모노 마부치, 모토오리 노리나가, 미우라 바이엔, 스기타 겐파쿠, 히라가 겐나이, 야마가타 반초, 가이호 세이료 등이다. 소라이학을 다양하게 수정한 절충학의 면명으는 가타야마 겐잔, 이노우에 긴가, 도시마 호슈, 가메이 난메이, 쓰카다 다이호, 미나가와 기엔 등이다. 전개기라고 부를 수 있다.(224-225)
하야시 라잔林羅山(天正 11, 1583~明曆3, 1657)은 젊은 시절의 몇몇 시도를 제외하면 가한 것도 불가한 것도 없는 무난한 주자학의 조술祖述이다. 이는 도쿠가시대 초두에 주자학이 우선 충실히 수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해석되어 왔으나, 라잔은 주자학이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규율하는 사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학문과 처세를 구분여 사용한 인물은 아닐까? 박학을 위해 노력했으나 진심으로 삶을 사상에 따라 영위하려 하지 않거나 할 수 없었을 것이며, 그래서 현실 사회와 생활로부터 단절된 주자학의 우등생적인 조술이 가능했고, 사상가로서는 평범했다. 라잔은 그 지위로 유명하고 일본 주자학의 시조로 불렸으나 사상가로서 특별한 영향력이 있었다고 볼 수 없다. 직수입한 논의가 설득력이 없었다. 이의 학자는 라잔의 저작을 통해 주자학을 배운 것이 아니라 중국 유학자의 서적을 통해 직접 접했다.(225-227)
나카에 도주中江藤樹(慶長 13, 1608년~慶安, 1648)는 시문·박학을 위해가 아니라 진정한 삶을 위해서 도를 진지하게 추구했다. 그는 사서를 읽고 성인의 전법과 격식을 수용하여 간직하려 마음먹었은으나 실천궁행하려는 의욕이 강한 만큼 반복적으로 시세·인정과의 알력에 직면했다. 그는 세상에 살아 있는 도를 모색하기 위해 전력을 투구했다. 그의 양명학에 대한 관심은 주자학의 개념을 역이용하여 무한히 고양된 자기 면에 의거하여 벗어버고 극복하려는 시도였던 중국과 달리, 자기 내면의 마음음을 중시하는 주관주의인 만큼, 학문과 시세·양립시키기 쉬웠을 것이다.(227-229)
구마자와 반잔(도주의 문하생, 元和5, 1619-元錄4, 1691)은 도주의 한 면을 밀고 나가 유학의 응용을 도여, 주자학을 배우면서도 실정에 입각한 경세론·도덕론을 도출하고자 했다. 한 지방의 국정에 관여했던 그도 주자학 수정의 필요성을 느끼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 더욱 기회주의적 색채를 띄었다. 그도 히젠의 국정과 유학의 안정적 결합은 달성할 수 없었다.(230)
야마자키 안사이(元和4, 1618~天和2, 1682)는 일체 후세의 입장에서 수정하는 것을 배척하고, 주자학의 정통적이고 직접적인 계승을 주장했다. 그의 저서도 주희 등의 서적을 발췌편집한 것으로 주자학은 삶 전체에 관련된 사상이 되었다. 안사이학의 비밀은 강렬한 정통의식에 입각하여 자신의 위상을 높이는 데, 당시의 무사적 가치감정에 입각하여 주자학을 이해했던 것이 아닐까. 박학 혐오, 군주에 대한 충성, 혁명론에 불만, 경에 대한 강조 등. 『하가쿠레』와 유사한 충성온을 주장한 아사미 게이사이가 그의 문다. 안사이 학파내 절교 선호, 다툼의 신속하함 등도 후다이 같은 충신이고자 했던 그들의 초사무라적 심정에 기인는지 모른다. 무사적 심정과의 적합성. 안사는 신도도 포섭했다.(231-232)
야마가 소코(元和8, 1622~貞享2, 1685)는 주자학을을 공공연하게 비판하고 경전의 본래 뜻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사상을 제시했던 근세일본 최초의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성학聖學은 방법성·체계성에서 진사이의 고의학, 소라이의 고문사학에 미지 못하며, 일관된 경서 해석이 없는 과도기적 인물이다. 인간에게 생득적 본연지성은 없고, 성인의 도는 일용사물에 있니 격물, 즉 사물의 리를 계속 추구하는 것이 학문이다. 코의 격물주의는 도주를 이끈 양명학과 그 방향성성이 반대로 외부에 집중하지만, 실은 둘 모두 세상과 학문의 합치를 모색한다. 소코는 유학을 무사의 생활에 활용하려 한다. 무사를 인민을 위한 도덕적 모범으로 규정하며 무사의 유교화를 초래한다. 경계를 늦추지 않고, 인륜을을 어기는 자는 신속히 처하고, 자기의 직분을 안다는 것 등이다. 어떤 면에서 주자학을 유연화하고 학문과 세상을 밀착시키려 했던 시도다.(232-234)
이토 진사이(寬永4, 1627~寶永2, 1705)와 아들 도가이(寬文10, 1670~元文3, 1738)는 『논어』와 『맹자』의 권위는 주자학자 이상으로 강조하면서, 주자학적 해석을 전면적·계통적으로 개정하고 말았다. 고의古義의 재발견이란 형태로, 경서에 기초하면서 동시에 자신과 자신이 사는 세상에 딱 맞는 가르침으로 유학을 변환시킨다는 어려운 일을 성취한 것이다. 유학은 교묘하게 일본되었고, 일본에서 사상의 유학화가 진전되었다. 진사이는 처음에 주자학에 몰입하고, 은자처럼 살다가 다시 세상과 교류하게 된다. 그에 따르면 도는 비근한 일상적인 것이며, 현실의 인정과 풍속에 입각한 것이다. 성선설이 아닌 정情선설이며, 당시의 일상어 나사케情け나 기리義理와 닌조人情의 의미다. 인간이란 태어나면서 나사케를 가지고 있고, 나사케에 입각한 인간관계 속에 도道도 있다. 인仁도 나사케로 가득찬 따뜻하고 관유한 사람 이의 관계방식이다. 이는 중국 사대부 보다 오히려 근세일본의 가훈·통속교훈서·소설·연극서 보이는 조닌의 그것과 가깝다. 진사이의 고전한문도 상당한 정도는 당시의 일상적인 일본어, 나아서 교토의 조닌 말로 환원하여 읽어야 한다. 진사이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근세일본사상을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린 선도자가 되었다.(235-238)
오규 소라이(寬文6, 1666~享保13, 1728) 새로운 경서 해석체계를 기초로 유학을 정치에 불가한 것으로 인식시키고자 했던 사례가 아닐까. 하쿠세키는 고립어 개혁도 중단되었다. 소는 유학이 직접 정치에 도움이 되는 현실적인 학문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로잡힌 것이 아닐까. 소라이의 정치이론이 안민安民을 강조하면서도 실은 교묘하게 인민을 통치하고 왕조를 영속시킬 것인가에 목표를 둔다. 성인의 도는 천하국가를 다스리는 도이다. 덕으로 다스려지지 않으므로 도가 건립된 것이다. 소라이는 사람을 알고, 사람을 쓰는 개성을 존중하는 인재등용론을 강조한다. 소라이는 사무라이들이 정치·군사투쟁에 웠던 실천적인 정치의 지혜를 새롭게 유학의 가르침으로 제시했고, 통치자의 정책에 신비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천天·조종祖宗·귀신을 강조한다고 말한다. 전국시대의 투쟁을 폭력적으로 종결시키고 천명론 같은 정통성의 확보를 시하지 않는 도쿠가와 정치체제에 도쇼구를 권위를 활용한 예의 수립을 강조한다. 주자학을 개조하여 당시의 정치체계에 입각한 정치학이고자 했던 장대한 기획이다. 또 시문의 습득도 강조한다.(239-243)
진사이학·소라학 모두 훌륭한 사상적 성취이며, 그 영향도 컸지만, 둘 다 일종의 자기모순을 가지고 있다. 진사이학이 강조한 통속적인 가르침은 조닌들에겐 차라리 세키몬심학이 좋았을 것이고, 소라이학은 위로부터 통치의 학문인 이상 채택되지 않으면 실효성이 없다.(243) 한편으로 소이 학은 정치와 거리를 두고 자기 한 몸을 수양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논가 없어, 문인화되고 감소했다. 진사이학나 소라이학은 한 시대를 만들었고, 그로 인해 외래사상의 부적합성을 주동력으로 하는 유학사의 진행은 일단락되었다. 소라이학의 확산이후 외국사상을 소화하는 것 이외에 여러 가지 내적 요인과 동기에 기초한 다양한 사상들이 전개되고, 다양다종의 사상이 경합한다.(243-244) 도쿠가와 시대 전기의 유학사에서 개개인의 유학자를 넘어서는 몇 가지 일반적 경향이 드러난다. 초월적 리보다 실(현실, 사실, 실정)에 입각하려는 경향이나 상황의 수성에 착목하여 보편적이어야할 규범을 상대화하는 경향, 당시 일본의 한 모습을 외국 사상을 역용하여 정당화하며 자기주장하는 경향다. 도미나가 나카모토富永仲基는 그 극점으로 도쿠가와 시대 전기 사상사의 최후를 알리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지금 여기의 현실을 넘어서지 않는 태도를 일본의 국민성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상황에 따른 반응일 뿐이다.(244-246)
마지막 결론 장은 와타나베 히로시의 의도를 분명히 드러낸다. 그는 마루마야 마사오를 분명히 지칭하지는 않지만, 주자학이 통치체제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구축되었다가 내면적으로 붕괴해갔고, 그 과정에서 근대 사상의 맹아가 있었다는 그의 논의를 철저하게 반증한다. 주자학은 한 번도 주류 이데올로기였던 적이 없다. 힘이 있었던 적도 없다. 일본의 주자학자 넓게 보아 유학자들은 유학과 주자학의 저변을 일본에서 넓히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들이고, 그 과정에서 주자학과 경서에 대한 과감한 재해석도 마다하지 않았고, 그 결과 진사이학과 소라이학이라는 독창적인 학문이 등장했다는 것다. 실제 다산 정약용도 그의 책들을 구해보고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답이 아닌 문제의 해소는 한층 고민을 깊게할 뿐이다. 한국의 사상도 마루야마 마사오는 보이지 않지만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가 말한 주자학 통치체제가 실제로 존속했던 유일한 나라인 조선사상에 대한 해석은 어떤 실마리로 풀어가는 것이 좋을까.
부록: 이토 부자의 주자학 비판과 ‘고의학’
진사이의 사상은 주자학 비판으로 성립한다. 근세유학사는 표면적으로 주자학의 성행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지배이데올로기도, 관학官學이나 정학正學으로 장려한 적은 없다. 막부체제는 주자학으로 정통성을 확보한 것도 아니다. 주자학의 내용이나 형식이 초기 도쿠가와사회에 적합했거나 조응한 것도 아니다. 전국시대 천도라는 말의 사용, 중국 성인의 가르침에 대한 외경심, 호학하는 군주, 무사의 문치관리화 등이 제도와 현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교적인 것의 영향력은 있었다.(251-252) 전쟁이 발발하지 않는 오랜 기간동안 전투를 위한 규율과 조직형를 고정시켜 유지하려 할때, 현학적인 교양과 수양체계가 쉽사리 자신의 것으로 수용되었을리 없다. 사무라가 학문을 하면 비방을 받았고, 번교도 얼마없었으며, 유학자도 특수기능자였을 뿐이다.(253) 무사 이하의 신분에도 유학은 하나의 취미나 교양이며, 현실의 일상생활에서 유리되어 있었다. 조닌의 이에에서 태어난 소년이 유자가 되려면 맹렬한 반대를 무릅써야 했다.(254-255) 따라서 주자학 체에 대한 비판이 정치나 사회에 대한 비판을 의미한다고 당시의 일본에서는 볼 수 없다.(255) 진사이는 자신을 둘러싼 기존 질서나 일상생활에 대해 수용적이었다. 청대의 대진戴震이 천리·인욕이라는 사상이 잔혹하게 사람을 억압한다는 주자학에 대한 반발과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256)
진사이에 따르면 주자학은 노장·불교와 마찬가지로 고상하고 원대한 것에 편향되고 너무 어려워서 도를 잃게 되었다. 진사는 자신의 입장을 일관되게 고高에 비하여 비卑, 원遠에 대하여 근近, 신기新奇에 대하여 상常, 허虛에 대하여 실實의 측면에 두고, 노불 및 자작을 일괄적으로 거절·배척하는 것이다.(257) 도道란 알쉽고, 행하기 쉬운, 평정平正하고 심절深切한 것이며, 인륜에 있는 데 주희 등이 형이상학적인 것理에 기초를 세워 일상적인 현실의 덕행을 소홀히 했다고 본다.(258) 도를 개인에 내재하는 리理, 성性과 연결하여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침잠해 있는 본성이 밖으로 방사·전되는 것으로 이해한느 점을 비판하며, 도를 삼라만상의 모든 사물에 편재하는 리와 동일시 하는 것에 대한 부정다. 형이상학적 인성론과 존재론 쌍방이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유해무익한 주관적 지성을 휘두른 독지獨智에 불과하며, 덕행을 소홀히 한다.(259) 진사이의 평이하고 실질적인 도란 사람과 교제하는 방식으로, 성인의 제작으로도 개인의 계약으로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도란 본래 스로 존재하는 것이며, 자연히 그러할 뿐이다. 어디까지나 사람이 왕래하는 통로라는 한자 본연의 이미지를 유지며, 개개의 인간 사이에 서로를 매개하는 구체적 인간관계의 방식으로 저절로 존재한다. 모두 사람으로 인해 나타나며, 승려처럼 탈속하지 않는 한 도를 떠나 생활할 수 없다.(261) 불나 노장처럼 천하 모든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강요하지도 따를 수 없는 것을 가르치지도 말아야 한다. 진사이는 도를 보편적으로 사람이 실행해야만 할 당위·규범이라 하는데, 그지 않고, 누구나 현실 속에서 따르고 있는 보편적인 사실이라 생각하고 있다. 잠시도 떨엊어질 수 없는 도이다. 것은 일종의 보편주의이며, 규범성을 주어진 현실 속에 대폭 희석시키는 대가를 치르고 있다. 사실상의 일반성을 보편적 타당성과 동일시고, 사실상의 고립을 주관적 허망함과 동일시하고, 도는 존엄성이 칭송되는 동시에 사실 속으로 끌려가 버리고 만다.(262-264) 진사이는 일반 사람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현실의 인정에 도가 본래적으로 입각하고 있다. 정情이란 사람에게 공통되는 성이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이는 바를 포착해서 말하는 것다. 인정이란 천하고금에 한결같이 그렇다고 하는 바이며, 성인이라 해도 다를바 없다.(264-265) 물론 주자학자인 미야케 쇼사이 등은 찬성하지 않으며, 대진 역시 정과 욕에 공공성을 부여하기 위해 지를 들고 있다. 진사이의 말은 마키아벨리나 홉스를 참조지 않더라도 인간성에 대한 너무나 낙관적인 관찰로 인다. 정선설을 평면화한 것이다.(265-266) 정은 근세일본의 일상어인 나사케情け나 중기 이후 일반화된 닌조人情에 의미상 접근하고 있다. 인정을 제외하고 은애恩愛를 멀리하면서 도를 추구하는 것은 이단이라고 말한다.(266) 진사이의 고전한문으로 쓰인 명제들은 실은 어느 정도 당시의 구어(교토방언)로 환원시켜 가며 읽어야 할 것이다.(267) 교토의 지카마쓰 몬자에몬은 도가이가 말하는 남녀·부자 사이의 나사케를 인간의 진실한 마음으로 현한 작품을 통해 청중의 눈물과 갈채를 받고 있다. 가이 만년에는 이미 모토오리 노리나가가 태어나 있었고, 노리나가는 꾸밈이 없는 태어난 그대로의 마음을 고도론의 기축으로 삼으니 둘 사이의 정은 서로 다르해도 공통성은 있다. 진사이는 인정과 함께 풍속에 어긋나는 가르침을 도의 적으로 주한다. 풍속·습관을 의미하는 속俗은 중국에서 주자학이 등장한 송대 히우 나쁜 의미 경멸적 함의를 갖게 되었으나 진사이는 도란 민중의 마음이 귀착하는, 속이 이루어지는 곳이라 말한다. 속이 도이다. 진사이의 도덕론은 현실의 인정이 통용되고 있는 실재 세상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268-269) 주는 인을 마음의 덕이며 사랑의 리라고 정의하지만 진사이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상대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하고 사람의 과오도 그 나름의 이유를 이해하고, 넉넉하고 평온하게, 모든 일에 관유하도록 힘써 각박하게 대지 않게 된다고 말한다. 그에게는 각자가 주어진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인간관를 맺을 때 상대에게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가 최우선 주제이다. 독선적으로 상대를 책망하거나 상처주지 말고 진지한 배려에 넘친 따뜻한 태도로 대하면 그 인간관계는 모두 잘 유지되고, 일도 저절로 잘 진행된다는 것.(270-271) 주로 기성의 구체적 개개인의 인간관계에 대하여, 이쪽이 배려로 가득 찬 관유하고 온유한 태도로 접하면 상대도 일단은 응해줄 것이란 정도를 의미한다. 인은 이상과 같은 의에서 필경 애愛이다. 도-인정-애-인-선은 둥글게 원을 형성한다. 그러니 세상에 영합하고 다정하고 상냥하게 대하는 것일 뿐이란 비판도 받았다.(272-273) 왕도王道란 천하·국가를 가家와 동일시하여 군왕과 인민의 관계를 군왕이란 개인과 일체로서의 인민 사이의 인간관계로 파악하고, 왕도란 도가 왕의 입장에 적용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군왕의 입장에 있는 자가 현재 있는 그대로의 인민을 대는 관계에 있어 자식을 대하는 부모처럼 배려로 가득찬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274) 진사이는 수신·제가·국·평천하 쪽은 왕도를 논하는 데 있어 거의 무시한다. 치도란 개인수양이 라 인민과 호오를 같이하면 그것으로 좋다. 진퇴와 상벌을 나라 사람들의 마음에 의거해서 시행한다면 그것이 인민의 부모다. 인민도 군주를 부모처럼 받들어 공감의 순환이 성립한다.(275-276) 왕도는 인정·풍속에 어긋나지 않는다. 성인은 천하를 변역하기를 원치 않는다. 천하를 가지고 천하를 다스린다. 구체적 제도론은 중요하지 않고, 지금의 속에 따라 지금의 법을 사용하며, 세금의 경감과 형벌의 완화면 충분하다.(276) 왕도가 실현된 낙토는 현실의 정월 설날의 습과 같다.(277) 그러나 그는 근세일본의 유자 가운데 가장 단정적으르 폭군의 방벌을 도로 인정한 사람 중 하나다. 요순의 선양도 탕무의 걸주 방벌도 민중의 마음衆心에 따른 것, 속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는 천하의 공공이 한결같이 그렇다고 여기는 것으로 천하가 방벌한 것이며 올바른 도의 실천다. 정치권력이나 정책을 원리적 정통성이나 초월적 기준으로 재단하지 않지만 변혁이 대세가 되면 간단히 추인된다. 이와 유사게 정부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고도古道라며 지배에 대한 절대적 순종을 권유하는데, 이는 어느 명령에도 원리적 정통성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278-279) 진사이는 방벌의 현실적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로 인해 사실상의 일반성을 보편타당한 와 동일시하는 부단한 경향을 가진다.(280) 진사이의 주자학 비판은 이데올로기를 폭로하거나 인간의 위선을 조롱하는 국학과는 다르다. 희는 인간의 존재구조를 지방 관리에 비유하며, 리에 의거하여 바르게 응접·처리해 간다는 윤리론이 여기 대응한다.(280-281) 진사이의 도덕론을 실제생활에 적용하면, 남과 다투지 않고 양보, 절검, 남을 책망지 않고, 어긋남이 없고, 남에 대한 사랑, 사람의 과실은 친척·동료의 영향 때문 등으로, 인간이란 처음부터 긴밀한 인간관의 그물에 엃혀 있어, 모든 방면에서 화기에 넘치는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사대부기 보다 조닌 가의 주인에 가까운 모습이다. 상인 가문의 가훈이나 통속훈서에 진사이를 상기시키는 논의가 적잖게 나온다. 효도 사랑을 근본으로 하여 부모의 마음을 거역하지 않는 것이 근본취지다.(281-283) 그가 논하는 것은 천하의 대도, 군자의 덕이다. 그가 중국 고전으로부터 발견한 바람직한 인륜의 모습은 근세일본의 조닌 가의 주인들 서민적 교훈과 공통적이다.(285) 학문·선禪 등이 독선적으로 이치를 휘둘러서 세상으로부터 기피당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는 지적은 도쿠가와시대에 상당히 일반적이다. 학문을 하지 않은 사람이 국가를 잘 다스리리고 사람들도 따른다는 등 상당히 일반적인 반응은 진사이가 주자학(및 노장과 불교)의 도덕설을 리理라는 초월적인 원리에서 이 세상을 경멸함으로써 결국 이 세상을 등져버리는 것이라고 세상의 입장서 비판하면서 사실로서의 인정·풍속에 입각한 공감적인 인간관계로 도道 관념을 재구성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는 지난 날을 회상하면서 속俗 이외에 도道가 없고 도 이에 속이 없다고 말한다.(286-287) 진사이학이란 적지 않은 저항감을 주면서 일본에 정착화를 기도하고 있던 주자학적 유학을 비판하고, 그것을 교토의 조닌 로 귀화한 자신에게 딱맞는 것으로 개조함으로 유학의 일본화를 성취했던 것이다. 진사이의 古義學은 근세 일본에서 유학을 자기 것으로 수용려는 시도 중 최초의 성공예로 보아야 한다. 일본에서 사상의 교화가 한걸음 전진한 것이다. 다만 내용의 통속화는 외국의 고문헌을 경유하여 배우는 의의가 엷어진다는 딜레마가 있어, 소라이학 이후 약화되었고, 세키몬심학처럼 광범위한 청중을 얻지 못했다.(288)
이 책의 본문에 해당하는 논문은 1981년에 부록은 1979년에 발표되었다. 부록과 본문이 상호보완관계를 이루면서 다소 겹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내용은 주자학의 주요 구성방식에 따라 진사이를 정리하면서 이토 진사이는 주자학의 자기 해체가 아니라 교토의 조닌 가문의 후예가 유학을 자기 언어로 자기 것으로 수용하려는 시도라는 것으로 일본 사상의 유교화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뒤에 이어지는 논의는 『일본정치사상사』에서 정리된다. 여러가지 생각할 거리를 얻어간다. 한국정치사상사를 아니 한국사상사를 사회사적으로 풀되 견강부회하지 않을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근대를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무엇을 볼런지도 역시 숙제다. 특히 마음에 걸리는 것은 종교와 반란의 문제다. 마루야마 마사오를 다시 읽고 정리해 두어야 겠다.
2018. 11. 1.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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