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달림플, 『동인도회사』.

클라이브가 샤 알람에게 디와니를 수여받는 장면.

윌리엄 달림플William Dalrymple, 『동인도회사, 제국이 된 기업The ANARCHY: The Relentless Rise of the East India Company』, 최파일 역, 생각의힘Bloomsbury, 2025(2019).

흥미로우면서도 충격적이고 서글프기까지한 동인도회사, East India Company(EIC)에 대한 이야기는 힌두스타니어 속어에서 영어에 들어온 단어 ‘루트loot’에서 시작한다.(25) 약탈이나 전리품을 뜻하는 이 단어는 영국에서 흔히 쓰이는 말이 되었다는데, 오늘날 한국에선 게임에서 아주 흔하게 쓰인다. 루팅이라는 바로 그 말이다. 세상이 얼마나 돌고도는지. 더 흥미로웠던 건 저자의 이름이었다. 달림플이라는 거의 처음 들어보는 이름은 스코틀랜드 이름이었고, 자신의 11대 조상도 EIC를 통해 인도를 들락거렸다. 책을 읽다보면 중간중간 이런저런 달림플이 등장하는데, 슬쩍슬쩍들이미는 것이 흥미롭기 그지없다. 자신도 지금은 인도에 살고 있고.

1599년에 101명의 부유한 상인들에 의해서 설립되어, 1600년 12월 31일 칙허장을 받은 이 회사의 가장 큰 특징은 처음부터 주식회사였다는 점으로, 법인이었다는 것이다. 달림플은 블랙스톤을 따라, 집합적이고 정치적 인체, 곧 법인체corporation이 되고, 개별 주주의 죽음을 초월할 모종의 집합적 불멸성과 법적 인격을 가질 것이라고,(52-53, 55) 적어도 칸토로비치의 『왕의 두 신체』의 독자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를 건넨다.

몇 가지 주목할 만한 특징들이 있다. 우선, 이 모험적 사업에 뛰어든 사람은 많지 않았다. 처음엔 지원자가 없어서, 뉴게이트[감옥]과 베들럼[정신병원]에서도 일부를 데려왔다. 창녀들과 방종한 고용인들에 대한 언급이 있을 정도.(60) 물론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지적했던 대로, 이 시대의 감옥과 정신병원은 반드시 범죄자와 광인을 모아둔 곳이 아니다. 노동을 거부하던 자들이 감금되던 곳이기도 했다. 처음엔 워낙 모험적이라 사람을 모으기 어려웠다. 곧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당시 인도는 인구가 1억 5000만-세계 인구의 약5분의 1-이었고 전 세계 공산품의 대략 4분의 1을 생산했다. 여러 측면에서 인도는 세계적 산업 강국이자 직물 제조업을 주도하는 곳이었다. 직조와 연관된 많은 영어 단어-친츠, 캘리코(옥양옥), 숄, 파자마, 카키, 덩거리(데님과 비슷한 면직물), 커머번드(연미복의 허리의 검은 띠), 태피터(호박단)-인도에서 유래했다. 인도는 비슷한 규모의 어느 지역보다 세계 무역에서 훨씬 큰 비중을 차지했고 인도 경제력의 영향은 인도산 옷감 때문에 직물 제조업이 ‘탈산업화’의 위기를 겪은 멕시코에까지 미쳤다. 그에 비해 잉글랜드는 인구가 인도의 5퍼센트에 못미쳤고 전 세계 공산품의 3퍼센트 이하만 생산했다. 1586년과 1605년 사이에 연간 18미터톤이라는 엄청난 양의 은이 유럽에서 무굴 심장부로 유입되었다.(61-62) 벵골 지방에 무수한 직조공이 있었는데, 다카 한 곳에만 2만 5,000명이 있어서, 엄청나게 고운 모슬린과 실크 같은 고급 직물을 생산했는데, 17세기 말에 벵골은 유럽에 가장 중요한 아시아 상품 공급원이었으며, 18세기초 네덜란드와 영국 동인도회사는 연간 약415만루피(5,400만 파운드)의 벵골 화물을 실아날랐는데, 그중 85%는 은이었다.(79)서론 부분에서 살짝 언급되는 이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현대의 용어를 빌자면, 인도와 중국은 17-18세기의 제조업 강국들이었다. 유럽은 비교도 할 수 없는 생산력을 구가했고, 오늘날 방글라데시의 다카는 직조공 2만 5천이 있었다. 하나의 도시에 직조공 2만 5천이라는 숫자는 오늘날 기준으로도 놀라운 것이다. 현대의 방글라데시가 섬유봉제산업으로 다시 평가받는 것은 어찌보면 아이러니하기까지 하다. 긴 시선으로 보면 이것은 하나의 귀환이다. 인도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수출된 것이 차, 향신료, 보석, 직물, 초석, 도자기 등으로 평가되는데, 식민지에서 생산된 원자재를 유럽국가에서 가공해서 다시 파는 구조는 상당히 후대의 것이고, 처음에는 그저 수입하기 바빴다. 인도의 수출품 중 역설적인 것이 초석인데. 이것이 바로 화약의 중요한 원료이기 때문. 잉글랜드를 포함한 유럽에서는 이를 사들이기 위해 은과 금이 끊임없이 아시아로 흘러들어갔다. 그리고 이 흐름을 끊은 것이 바로 동인도회사다. 벵골에서 디와니(조세징수권)를 획득한 것이 그 결정적 계기였다. 명과 청의 중국은 모두 은본위제였기에, 중국에서 금은비는 6:1이었고, 당시 유럽에서는 12:1, 20세기에 들어서는 100:1을 넘기도 했고, 현재는 50:1에서 80:1사이를 오간다. 중국으로 쏟아져 들어가기만 하는 은의 흐름을 끊고자 한 것이 아편무역이고, 그 결과가 아편전쟁이 아니던가. 아주 간략하게 보면 훗날의 미국을 포함해서 서유럽이 산업생산력으로 아시아를 압도했던 기간은 생각보다 아주 짧다. 150년에서 200년 사이에 불과하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이 부흥하고,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들이 등장하고, 곧이어 중국이 인도가 다시금 제조업 국가로 부상했다. 그리고 유럽과 미국에서 다시금 부가 아시아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200년 동안 무적인 줄 알았던, 북미와 서유럽의 제조와 생산기반은 생각보다 허약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군사력은 아직도 그때처럼 압도적이지만. 동아시아 국가들의 노동규율은 DNA에 새겨진 것이었고, 인도는 5세기 전에도 이미 산업국가였다. 돈은 아주 오랫동안 서방에서 동방으로 움직였다가, 18세기 중후반에서 20세기 중후반까지 서방으로 흘러가다가, 이제 다시 동방으로 흘러가고 있다. 문득 트럼프가 관세를 통해서 끊으려는 것이 바로 이 흐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주 거칠게 말하면.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뭘 제대로 알고 하는 일인지는 여전히 의심스럽지만. 얼마전 중국에서 은의 수출을 제한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청나라의 흠차대신 임칙서가 떠올랐다. 역사는 돌고돈다고나 할까.

[무굴]제국은 실용주의적 관용과 힌두교도와의 동맹을 기반으로 건설되었으며, 특히 전사 집단인 라지푸트인은 무굴 군사력의 중핵을 형성했다. 그 동맹이 점차 압박을 받고 황제가 배타적인 종교적 입장으로 후퇴하면서 무굴 국가를 산산조각 내는 데 일조했고 아우랑제브가 사망하자마자 제국은 결국 군대의 근간인 라지푸트인을 상실하고 말았다. 또한 아우랑제브가 데칸고원으로 제국의 무모한 팽창을 시도하면서 시아파 무슬림 국가인 비자푸르와 골콘다를 상대로 벌인 전쟁은 제국의 자원을 고갈시켰다. 데칸 전쟁은 무굴 왕조에 새로운 적을 불러왔는데, 과거에 두 술탄국에서 복무하던 마라타 농민과 지주들이 게릴라로 전환되었다.(81-82) 그들은 왜 망했는가를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EIC와 싸웠던 수많은 군대들, 세력들은 언제나 제국의 한 부분이었고, 그들은 연합을 결성해내지 못했는데, 이는 과거의 무굴제국 식의 연합이 한계에 다달았기 때문이다. 다종교, 다민족, 다국민의 일시적이면서 가변적인 연합은 취약하기 그지없었다. 상대가 단일한 정체성을 구성하고 규율있는 군사력으로 전환했을 때,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이들은 잘게 쪼개져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 전체에 등장하는 수많은 지역과 세력의 이름을 일일이 언급할 생각이 없다. 어떤 지도자들이 아무리 매력적일지라도. 유럽 세력이 아시아로 짓쳐들어왔을 때, 대응하지 못한 것이 이들만은 아니었다.

프랑스는 숨겨져 있는 또 하나의 주역이다. 프랑스 동인도회사도 있었고, 한때 영국 동인도회사와 경쟁했다. 18세기초 총독은 뒤플렉스. 프랑스 동인도회사는 자금부족에 시달렸고, 처음부터 부분적으로 국왕 소유인데다, 귀족들이 운영했고, 귀족들은 무역보다 정치에 더 관심이 있었다.(110-111) 17세기 후반 유럽이 발전시킨 부싯돌 점화 머스킷, 소켓형 총검, 군사전술의 발전, 대포의 조절나사 등은 인도에서도 크게 성공을 거두게 된다.(116) 이런 유럽식 전술과 전쟁을 인도 아대륙에 전파하는데는 프랑스가 훨씬 더 많이 기여했다. EIC의 군대가 어디서 싸우든 대부분의 세력 뒤에는 프랑스 용병, 프랑스 장교, 프랑스 무기가 있었다. 훗날 아메리카에서, 아프리카에서, 중동에서 대결했듯, 프랑스와 영국은 인도에서도 끊임없이 대결했다. 이것은 두 제국의 전세계적 전쟁이었다. 프랑스 동인도회사는 일찌감치 없어졌지만, EIC에 대응하는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인도의 여러 세력들은 프랑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델리가 함락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프랑스 병사들은 EIC의 반대편에서 싸웠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경쟁하면서 이토록 열심히 싸우게 했을까? 경제적 부와 성공이 물론 그들에게 중요한 목표였지만, 이들의 뒤에는 프랑스 대혁명이 있었다. 공화국의 시민들이 왕정의 군대와 싸우려는 동기가 있었다. 게다가 나폴레옹이 이끈 이집트 원정과 동방으로 식민지 개척 열망이 이들을 뒷받침했다. 물론 아메리카에서의 경쟁은 부르봉 왕조 시대부터 이어졌던 것이지만. 노르망디의 윌리엄이 잉글랜드의 정복왕이 된 후, 영국과 프랑스는 대략 칠팔백년 동안 세계 곳곳에서 단속적으로 싸워왔다. 20세기에 이들이 동맹이 된 것이 신기할 정도다.

캘커타의 방탕한 영국인들은 최대한 빨리 재산을 모은다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 품고 왔다. 그들은 교역에 관여하는 나라의 관습이나 모국의 사회적 예법에도 관심이 없었다. 매년 캘커타에 도착하는 회사의 직원과 병사 다수-전형적으로 지방 지주 집안의 땡전 한 푼 없는 차남과 1745년 자코바이트 봉기 때 영지나 가산(혹은 그 둘 다)를 잃은 스코틀랜드인, 이스트엔드 길거리에서 모집된 신병, 영락한 영국-아일랜드계 지주와 성직자의 아들들-는 모두 목숨을 걸고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해 물이 안 빠진 벵골의 늪지대와 푹푹 찌는 밀림이라는 견디기 힘든 기후에서 십중팔구 죽을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릎 쓸 각오를 했는데, 살아남기만 한다면 한밑천을 잡기에 세상에서 그만한 곳은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캘커타는 커다란 부를 몇 달 만에 쌓았다가 노름이나 카드놀이로 단 몇 분 만에 다 날릴 수 있는 도시였다. 질병이나 무절제한 생활습관으로 인한 사망은 다반사여서 인도로 왔던 회사 직원 가운데 3분의 2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병사들의 사정은 더 나빠서 회사 군대 소속 유럽인 병사의 25%가 매년 사망했다. 일상적인 죽음은 사람들을 무감하게 만들었다.(147-148) 이곳에 왔던 사람들은 수백년전 십자군을 떠났던 이들과 닮은 꼴이었다. 물려받을 재산도 가진 것도 없는 모험가들. 문득 생각하면 이런저런 코인에 뛰어드는 것과 어찌나 닮았던지. 성공확률은 낮고, 안정성은 떨어졌지만, 일단 성공했다하면 일확천금을 얻었다. 실제로 그런 사례들이 우리를 유혹한다. 이 시대에는 심지어 영지를 사들여 떵떵거리는 귀족도 될 수 있었다. 로버트 클라이브가 바로 그런 사례였다. 높은 사망률과 그에 못지 않은 위험은 이들이 한층 가혹한 수탈을 하도록 내몰았으리라. 오래있을 것도 아니고, 두 번 돌아볼 것도 아니었다. 가능한한 크게 한탕하고 내빼면 그만이었으니까.

1757년 1월 3일 클라이브는 회사의 이름으로 시라지 우드다울라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EIC라는 회사가 군주에게 선전포고한 역사적 사건이다.(194) 어려서부터 싸움꾼이던 그는 특유의 과감한 공격으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때 주목할 것은 벵골의 은행가와 상인들이 시라지 우드다울라에게 등을 돌리고, EIC와 손을 잡은 일이다.(206) 전장의 바깥에서 은행가가 누구이 손을 들어주느냐가 중요했다. 그를 격파한 플라시 전투로부터 회사에 의한 끝없는 약탈과 자산 수탈의 시대가 열렸다. 영국인들은 이를 “파고다나무[돈나무] 흔들기”라고 묘사했다. 이때부터 영국 무역의 성격이 바뀌어 그 세기 전반기에 600만 파운드가 인도로 보내졌지만, 1757년부터는 극히 적은 양의 은괴만 보내졌고, 이전에는 외국의 정금을 빨아들이는 수챗구명이었던 벵골은 플라시 이후 막대한 양의 부가 돌아올 기미 없이 빠져나가기만 하는 보물창고가 되었다.(225) 1757년에 흐름이 멈추고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다. 물건과 상품은 여전히 영국으로 보내졌지만, 은은 더 이상 대규모로 동방으로 흐르지 않았다. 오랜 세월의 흐름이 멈춘 것이다. 플라시 이후 규제받지 않는 영국 상인들은 1762년에 이르자 사업체 최소 33개가 벵골주 주변에 400개 이상의 신규 영국 교역소를 세우고, 세금, 통행료, 토지 무단 점유 등을 행하며, 벵골을 침식했다.(234-235) 영국인들은 고삐풀린 망아지 같았는데, 국가가 지배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통제가 불가능했다. 무굴 세계의 3개 대군이 힘을 합쳤으나 그들은 패배했다. 북사르 전투는 벵골과 해안 지방에 대한 지배를 확고하게 했고, 회사 주식은 국제 통화로 간주될 정도였으며, 회사는 부유하고 광대한 영토 제국을 지배하는 통치자로 거듭났다. 예기치 못한 우발적 사건을 통해 민간 무역상들의 법인 조직은 아시아 제후들로 구성된 내각이 되었고, 회사 국가가 탄생했다.(312-313) 1765년 마침내 클라이브는 샤 알람에게 황제의 델리 귀환을 지원한다는 막연한 약속의 대가로 벵골, 비하르, 오리사를 재정적으로 관리하는 권한을 받게 된다. 무굴의 법적 용어로 디와니, 즉 무굴 속주를 경제적으로 운영하는 권리를 받게 되었다.(320) 벵골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철저하게 가차없이 약탈당했다. 무역회사는 식민소유주임과 동시에 정부가 하는 모든 일을 합법적으로 하는 기업국가로서, 법을 통제하고 재판을 하고 조세를 사정하고 주화를 찍어내고 보호를 제공하고 처벌을 부과하고 강화를 맺고 전쟁을 벌일 수 있었다. 이 지역의 토지 세입은 회사의 총수익으로 여겨졌고, 이제 회사는 벵골의 직물, 향신료, 초석을 구매해 수출하기 위해, 중국에서 차를 구매하는 데 들어가는 돈을 포함해서, 영국에서 아무것도 실어올 필요가 없었다.(323) EIC는 사실상의 기업국가가 되었다. 무굴의 샤 알람은 그때까지도 법인 회사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영국에 누군가 귀족이나 왕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런던의 작은 건물에 있는 이사들과 수백의 직원이 전부였으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EIC는 마침내 인도에서 국가가 되었고, 주권국가로서 모든 권한을 행사했다. 그들의 움직임을 통해 드디어 서방에서 동방으로의 기나긴 금의 이동이 멈추게 되었다. 이것이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이다. 인도는 그리고 훗날의 중국은 돈나무가 되어, 오랫동안 빼앗기기만을 반복하게 된다.

대기근이 찾아오는 데, 몇 해 걸리지 않았다. 2년에 걸친 가뭄 뒤 1770년 6월에 이르자, 무르시다바드 거리에서 매일 500명이 아사했고, 캘거타에서는 7월과 9월 사이에 7만 6천명이 길거리에서 죽었다. 수치는 논란이 분분하지만 어쩌면 120만명, 벵골에서 다섯 명당 한 명꼴로 그해 기근으로 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타격이 심한 지역에서는 전체 농민의 3분의 1이 죽고, 구 무굴 귀족층의 3분의 2가 파산했고, 전체 농촌 장인의 절반이 죽었다.(331) 무굴왕조 시대의 곡식 비축, 공공사업, 기근 구호 대책 등은 작동하지 않았다.(332) 회사 행정부는 기근 구호활동에 나서지 않았고, 현금 보유고가 충분했음에도 종자, 신용, 장비를 제공하기는 커녕, 생산이 저하되고 군비 지출이 많은 시기에 수입을 유지하려 회사는 세금을 엄격하게 징수했고, 과세 산정액을 10퍼센트 높였다.(335) 이 와중에 많은 영국인들이 쌀을 사들이는 투기에 몰두했다.(336) 벵골이 기근에 시달리면서 주민이 자취를 갖추고 너른 땅이 황무지가 되어가는 사이에도 런던에서는 세수가 정상 수준으로 유지되는 것을 보고 안도하며, 주가가 디와니 이전 가격보다 두 배 이상 오른 점을 의식한 주주들은 12.5퍼센트라는 초유의 배당금을 지급하며 자축했다. 당시에는 알지 못했으나, 이때의 회사 주가가 사상 최고가였다.(339) 상업적 회사의 식민지배라는 것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이보다 더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들은 오늘날의 용어로 지속가능성 내지는 재생산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식민지를 경영하는 자들도 재생산을 고민한다. 계속해서 자원과 부를 수탈해야 하기 때문이다. 식민지 경영이 정당하다는 외피도 필요하다. EIC에게는 그런 것은 관심 밖이었다. 일단 현금흐름만 지속된다면, 본국의 이사들은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본국의 이사들이 상관하지 않는 이상, 과도한 수취든, 기근을 이용한 가증스러운 쌀 투기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들은 역사적인 배당금으로 돈 잔치를 벌였고, 그것이 정점이었다. 빠른 몰락이 찾아왔다.

불과 몇 달 지나지 않아 위기가 찾아왔다. 1772년 6월 스코틀랜드 한 은행의 파산은 유럽 전체를 휩쓸었고, 버지니아에서 속출한 자살에서, 동인도회사 회장 조지 콜브룩 경의 파산까지 전지구적 파장을 일으켰다. 인도에서 보낸 송금환어음이 엄청난 청구서로 도착했으며, 주가는 폭락했고, 고가의 차는 팔리지 않고 쌓여 있었지만, 군비 지출은 증가했다. 결국 역사상 최초의 구제금융이 실시되었다.(347-349) 회사는 국왕이 칙허장으로 보장한 특권을 누렸고, 주주들은 특권을 지키는데 집요했으며, 너무나 많은 의원이 회사 주식을 소유했고, 회사가 내는 세금은 경제에 너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서 어느 정부도 회사가 망하게 놔둘 수 없었다. 회사는 규모 때문에 구제되었는데, 영국 무역의 거의 절반을 창출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 그대로 대마불사였다.(353) 설명이 필요없이 우리 눈에 선한 일이다. 지금부터 250년 전에 금융위기가 전파되는 속도는 정말 놀랍다. 불과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금융위기는 지구를 한 바퀴 돌아 EIC를 파산위기로 몰았다. 정부는 결국 영란은행Bank of England를 통해 천문학적 금액의 구제금융을 실시하게 된다. 지금도 날마나 반복되는 일이다. 기억해 둘 일이 있다. 영란은행도 칙허장에 의해 설립된 민간회사였다. 영란은행이 국유화된 것은 2차대전 후 노동당이 집권했을 때 였다. 영국이 사실상 거의 모든 해외 식민지와 자산을 상실한 이후.

구제금융에 대한 대가로 규제법이 통과되고, 총명하고 노련하며 검소하고 학구적이며 성실하고 금욕적이며 무엇보다 인도를 잘 아는 워런 헤이스팅스가 1772년에 총독으로 임명되어 부임했고, 그의 업무를 감독하기 위한 집행위원회 위원 셋이 임명되어 2년 반 후에 도착했는데, 그중 하나가 명석하고 박식하지만 악의적고 앙심이 많으며 야심이 끝없는 필립 프랜시스였다. 둘은 협력하지 못했다. 프랜시스는 헤이스팅스가 소환되게 만들어 자신이 벵골의 통치자가 되려는 야심을 품었다.(354) 헤이스팅스는 인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행정서비스를 고려하며 회사를 개혁하려 했고, 프랜시스는 이와 반대로 무식하고 개화되지 않은 벵골 원주민들을 멸시했으며, 클라이브의 노선을 지속하려 했다.(360, 363) 둘의 대립은 어떤 의사결정도 막았고(총독에게는 집행위원회에 대한 거부권이 없었다), 회사의 모든 시도는 지속적으로 실패했다. 그것은 인도의 정치적 마비를 가져왔다.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364) 1779년 푸네에서 회사 군대가 첫 대패를 당한 다음해 1780년 8월 15일 필립 프랜시스는 워런 헤이스팅스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결투는 헤이스팅스의 승리로 끝나고, 프랜시스는 크지 않은 부상으로 목숨을 건졌다.(373, 376) 이해 회사는 폴릴뢰르 전투에서 또 한 번 패배했으며, 1780년 미국에서 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나, EIC의 차가 버려졌고, 이 일은 미국독립전쟁으로 이어져서 영국은 아메리카에서도 중요한 패배를 당했다.(386-387) 부상당한 프랜시스는 영국으로 돌아갔고, 인도에서 모은 재산으로 5년에 걸친 여론과 의회에 대한 공작 끝에 에드먼드 버크와 함께 1787년 의회에서 탄핵 재판을 벌였다.(462) 이 탄핵재판은 엄청난 인기와 관심을 끌었다. 버크가 웅변조로 지적한 대로, 벵골의 지배자는 하나의 회사, 즉 기업이었기 때문에, 경제와 균형이 작동하지 않았고, 그들의 약탈과 착취는 눈 뜨고 볼 수 없었다.(457) 헤이스팅스는 물론 천사가 아니었으며, 구태의연하고, 유사군주정적이며, 전제적이기까지 했지만,(462) 반면 회사가 그때까지 인도에 파견한 간부 중에 가장 책임감있고 인도에 동정적인 사람이었다.(463) 회사와 영국인들이 인도에서 벌인 온갖 만행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검토한 탄핵 재판의 기소 내용은 엉망진창이었다. 수백년 전의 일이나 상상으로 그려진 일로 가득했다. 기나긴 탄핵 재판 후 7년 뒤 1795년 4월 23일 헤이스팅스가 결국 모든 혐의를 벗었지만, 그의 인생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464) 한때 로버트 클라이브를 변호했고 무자비한 약탈꾼인 그에게 면죄부를 주는 데 일조했던 버크는 워런 헤이스팅스를 상대로 뛰어난 웅변술을 발휘했다. 당시 휘그파의 떠오르는 별이자, 인도에는 가본 적이 없었지만, 집안 중 일부가 EIC 주식에 투자했다 파산했던 버크는 프랜시스와 함께 헤이스팅스를 기소하는 데 열정적으로 나섰다.(461) 정파적인 문제였든 명성에 목말랐든 자기도취였든 버크라는 인물에 대해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점잖케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을 보수주의 정치사상가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 기이한 재판은 영국과 EIC의 인도에서의 여러 실패 중 한 가지를 보여준다. 저자는 이 재판이 영국에 그토록 커다란 부를 가져다 준 인도라는 아대륙에 대한 그토록 철저한 무지를 보여준다고 일갈한다. 프랜시스 필립의 사건은 앙심을 품은 자가 원한을 가지고 악의에 차 행동하게 될 때, 가져오는 결과를 보여준다. 이런 재난은 도무지 피할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인도는 비워둘 수 없었기에, 그를 대신하여 찰스 콘월리스가 파견된다. 그는 요크타운 전투에서 미국-프랑스 연합군에 항복하고, 영제국의 아메리카 13개 식민지를 조지 워싱턴에서 내준 인물이기도 하다.(465) 그는 남부의 티푸와 치른 영국-마이소르 전쟁에서 승리한 후, 개혁에 착수했다. 아메리카에서 영국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아니라 유럽 정착민의 후손에게 식민지를 상실했다. 인도에서도 정착 식민 계급이 부상하여 영국 지배 기반을 약화시키는 일이 없게 하겠다고 그는 결심했고, 이는 인종차별적 입법으로 이어졌다. 인도인 아내에게서 태어난 영국-인도계를 회사 직원 채용에서 배제한 후, 영국인 병사를 아버지로 둔 영국-인도계 고아들에게 회사 군대 복무 자격을 빼앗았고, 이는 회사 소속 선박의 고급 선원들에게 확대되었으며, 영국-인도계 혼혈은 토지도 소유할 수 없었다. 취업기회에서 배제된 영국-인도계는 사회계층의 사다리에서 빠르게 하락하여, 한 세기 후 하급 사무원, 우체부, 철도기관사의 공동체로 전락하게 된다.(483-484) 아마도 이것이 가장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을 것이다. 그는 아메리카 대륙에서처럼 크레올이 등장하는 것은 인도에서 결정적으로 막아섰다. 그가 가져온 1793년의 영구처분법은 회사가 정한 토지세를 내는 조건으로 자민다르 지주에게 절대적 권리를 부여했지만, 가혹한 과세가 수십년에 걸쳐 이어지면서, 대토지는 쪼개지고, 구 지주 계급은 다수 파산했으며, 고도로 불평등한 농업사회가 생겨났지만, 회사 측에서 보면, 토지 세입은 안정적으로 엄청나게 증가했다.(485) 콘월리스의 정책이 인도 식민화의 결정적인 한 정점이다. 요크타운에서의 패배가 평생 그를 괴롭혔을 것이다. 영국인을 아버지로 둔, 영국-인도계에 대한 철저한 차별정책은 따로 평가하고, 그 영향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지만 모두 옮길 수는 없다. 오늘날 뭄바이로 불리는 봄베이는 1661년 찰스 2세가 포르투갈 왕녀 브라간사의 캐서린과 결혼했을 때, 받은 지참금이었다. 그때 받은 또 하나가 지브로올터 해협의 탕헤르항이다.(73) 왕관에 속한 영지는 양도할 수 없지만, 해외 식민지는 가능했던 모양이다. 그걸 가져오는데도, 몇 년이 소요되었다.

1758년의 블랙홀 사건도 기억해야 한다. 저자의 직계 조상을 포함해서 64명이 좁은 감방에 들어가 21명이 살아남았다고 최근의 연구는 결론짓지만, 당시에는 145명이 처넣어져서 123명이 죽었다고 과장되었고, 숫자가 얼마든 인도 내 영국인에게 공분을 자아냈고, 150년 이후까지 영국 학교에서 인도인의 본질적 야만성을 입증하고 영국의 인도 지배가 왜 필요한지 입증하는 사례로 가르쳤다.(186) 자신들이 인도에서 저지른 학살과 초래한 기근에는 관심조차 없이 말이다. 오늘날 OTT든 영화든 TV든 어디에서든 쏟아져나오는 영상물에서 보여주는 공통점 중 하나가 백인인 유럽인이나 미국인이 죽을 때는 슬로우 모션으로 한 사람의 죽음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동료들 모두가 슬퍼하면서 복수를 위해 결의를 다지지만, 그들이 그에 대한 복수라는 이름의 정의를 실현할 때, 수십, 수백 때로는 수천명이 죽더라도 마치 지푸라기나 성냥개비가 쓰러지듯 무감각하게 카메라가 지나간다. 죽음의 불평등은 기원이 아주 깊다.

매력적이었지만 무기력했던 황제, 마치 전국 시대와 막부시대를 살아갔던 일본 천황의 이야기와 흡사했던 샤 알람의 이야기도, 인도를 구해보려했던 수많은 이들의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이미 사그라진 이야기에 불과하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고 했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의 유명한 문장이 떠오른다. 그들 모두는 각자 저마다의 이유로 실패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전환에 실패했고, 정치 공동체를 구축해내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가장 놀라운 일은 워런 헤이스팅스 탄핵 사건이었지만, 가장 깊이 기억에 남은 것은 크레올인 영국-인도계를 철저하게 배제했던 콘월리스였다. 현대 인도에 이르기까지 가장 깊은 상처를 남긴 것은 그의 인종차별주의였을 것이다. EIC는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아참, 일본도 EIC를 흉내내려 했다. 동척東拓이라 불렸던, 동양척식주식회사. 이때 척식拓植이란 식민지를 개척한다는 말이다. 1909년 명목상의 대한제국과 공동으로 수립했지만, 곧 일본이 전유하게 되었다. 차이라면, 일본은 정부가 들어왔고, 회사라는 형식만 취했다는 점이다. EIC는 회사가 그들의 정체성이었고, 회사가 국가가 되었다는 점이지.

2026. 1. 16.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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