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고민을 잃어버린 시대 – 강상중, 『고민하는 힘』, 이경덕 역, 사계절.
막스 베버 사진은 Hulton Archive/Getty Images. 나쓰메 소세키 사진은 위키피디아.
나쓰메 소세키(1867-1916)와 막스 베버(1864-1920)는 거의 동시대를 살았다. 그리고 유라시아대륙의 양쪽 끝에서 각자 합리성과 근대적 정체성을 고민했다. 그리고 강상중은 평생 두 사람을 붙들고 읽고 있다고 한다.
나쓰메 소세키와 그의 시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전후 일본에서 파시즘을 극복하기 위해 다시 나쓰메 소세키를 읽었다는 말에 더더욱 관심이 솟구쳤다. 그래서 전문가에게 문의했더니 소개받은 책. 자이니치(在日) 강상중의 고민이 함께 녹아 있다. 그리고 그는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를 함께 읽어낸다.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는 같은 시대를 살았다. 베버가 조금 더 오래 되었을 뿐.
러일전쟁에 막 승리해서 제국주의 반열에 들어가는 일본, 신흥자본주의 국가로 성장하던 독일. 전후 일본의 자이니치. 이들 각각이 발견한 자아와 주체는 도전적이고 개척자적이기라기 보다는 포기하고 자족하면서 그저 건강이나 챙기는 사람들이었다.고민하는 자아. 흔들리는 자아. 현실 속의 자아.
강상중은 나쓰메 소세키가 말하는 ‘말류(末流)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끝부분에서 ‘영혼 없는 전문가’요 ‘마음이 없는 향락인’이라고 말한 ‘마지막 사람들(letzte Menschen)’을 잇는다. 김덕영에 의하면, 베버의 이 마지막 사람들은 실상 니체에게서 끌어온 것이다. 최후의 마지막 인간, 즉 ‘말종인간’을 가리킨다. 이들 모두는 생각하기를 그만둔 사람들이다.
생각하기를 그만둔 사람들에게 이들은 모두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 강상중은 그것을 ‘고민’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달리 말하면 그것은 ‘지성’의 회복을 말한다. ‘지성’이 실종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면서. 26년전 대학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은 미친듯이 술에 취해 거리를 내달리던 우리를 향해, 대학생이면 지성인이니 지성인 답게 행동하라는 말을 했고, 우린 그때 아무도 우리 스스로가 지성인 혹은 지식인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기능인이라고 생각했을 뿐. 지금 젊은이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요구되는 스펙이 몇 개 안되었을 뿐. 그때 우리가 늘 듣던 말 혹은 하던 말이 ‘고민’이었다. “고민해 보겠다, 고민하고 있다 고민해 보자.” 그리곤 취기에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때 고민하지 않았던 우리는 지금도 고민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 눈앞에 당장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생겼어, 그대로 하면 되기를 바랄 뿐.
나쓰메 소세키, 막스 베버 그리고 강상중이 말하는 지성은 결국 ‘생각하는 개인’에게서 도출될 뿐이다. 다시 한 번 주체의 발견, 자아와 자기 정체성 그리고 상호인정이라는 고전적이고 근대적 명제로 돌아간다. 이제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어떤 것을 발견하리라는 아무런 보장도 없고, 절대 그 어떤 것에 도달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생각하고 또 생각함으로써, 단지, 지성을 포기하지 않는 것만을 간신히 바랄 수 있는 그런 분투를.
며칠 전 볼프의 『배제와 포용』에서 흥미로운 구절을 발견했다. 합리성과 근대의 대표적인 역사가와 철학자로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역사”, “누가 같은 자료를 연구해도 동일한 결과가 나오는 역사” 기술을 추구한 랑케와 『방법서설』과 『성찰』에서 누구든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분명한 지식(명석판명한 지식)의 근거를 추구한 데카르트를 들면서, 이 두 사람의 세계에 대한 보편적 지식을 향한 방법론의 배경으로 ’30년 전쟁’을 들고 있다. 같은 성서를 다르게 해석하고, 싸워오는 카톨릭과 개신교는 보편적 지식이 가능해질 때, 평화가 가능해 질 것으로 본 것으로 볼프는 해석했다. 개신교와 카톨릭을 영주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한 베트스팔렌 조약은 일종의 절충적 타협일 뿐이다. 이런 해석을 따르면 근대의 보편과 합리성이란 말하자면 평화기획으로 읽을 수 있다. 이점은 칸트에게서 입증된다. 칸트는 자명한 인식론에 근거하여 “영원한 평화”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리고 이런 보편적 합리성의 추구를 목표로 하게 된 혼란은 교회의 분열, 즉, 종교개혁과 그것으로 인한 갈등에서도 촉발되었다. 근대가 종교를 적대시하고, 베버가 탈주술화의 완성을 추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안타깝게도 지성과 종교는 상호 적대적이다. 오랜 기간 그래왔다. 종교가 지성을 추구할 때, 종교적으로도 세속적으로도 성공적이지 못했다. 한 사람의 종교인으로서 지성인으로 남아있는 다는 것은. 그래도 지성을 붙들고 분투해야 한다.
* 강상중은 대학 시절부터 막스 베버를 붙들고, 분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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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