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노 나오키 외, 『생활 속의 식민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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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10월 21일자 경성일보에 실린 ‘황국신민체조실시요령’이다. 이 체조는 특이하게 식민지 조선에서 먼저 실시되었다가 일본으로 전파되었고, 국민(초등) 3학년 부터 실시하도록 했는데, 목검을 사용하여 군사훈련을 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뭔가 총검술 훈련 같다. 사진은 金誠, 「植民地朝鮮における皇国臣民体操の考察」, 『札幌大学総合論叢』, 第28号, 2009年 10月. 『생활 속의 식민지주의』, 102-103에도 게재됨.

미즈노 나오키 외, 『생활 속의 식민지주의(生活の中の植民地主義)』, 정선태 역, 산처럼, 2007(2004).

얼마전부터 고마고메 다케시의 책을 하나 읽고 있는데, ‘제국사(帝国史)’라는 역사 연구 분야가 생겼다는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 시대를 통합적으로 연구한다는 말이다. 앙드레 슈미드의 ‘한국 문제’의 일본판 대응이랄까. 미즈노 나오키는 이 말을 다시 풀어서 ‘식민지주의(植民地主義)’ 문제라고 지적한다. 미즈노 나오키의 서술이 훨씬 더 분명하다.

“근대 세계의 진행 과정에서 형성된 식민지주의는, 일본이 조선과 대만을 지배한 20세기 전반에 지배자 쪽인 일본사회와 피지배자 쪽에 선 조선과 대만의 사회에 뿌리를 내려서 당시의 사회와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오늘날 21세기의 초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식민지주의가 낳은 문제는 무시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중략) 식민지주의는 정치나 경제의 영역에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이상으로 문화와 사상 그리고 생활 속에 깊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그러한 식민지주의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떤 구조 속에서 만들어졌고 또 현재까지도 살아남아 있는 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한국어판 서문, 5-6).

미야타 세츠코가 조선사 연구자가 없고, 아무도 연구하지 않아 내가 연구했다고 말하듯이 미즈노 나오키도 전후 일본에서 오랫동안 식민지지배와 식민지주의가 연구과제로 중시되지 않았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고 식민지를 상실한데다, 구식민지지 지역과 관계를 갖지 않거나 경제 관계에만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식민 지배의 역사를 돌이켜보고 식민지지배의 청산이라는 과제를 인식하게 된 것은 20년 전쯤 부터 냉전의 종결과 식민지지배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보상요구로 부터였다.(19)

미즈노 나오키는 일본의 식민지주의가 구미의 식민지주의가 이중성을 다루는 방식에서 달라진다고 말한다. 구미의 식민지주의는 문명화와 차이화(야만화)의 이중성이 특징이라면, 일본의 식민지주의는 ‘동화와 배제’의 이중성을 특징으로 한다.(20) 구미의 식민지지배는 서양문명을 절대화하고, 피지배자를 ‘문명화’하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면, 일본의 ‘동화’정책은 ‘보편적인’ 문명을 기준으로하는 ‘문명화’하는 측면을 가지면서도, 그 이상으로 피지배자에게 ‘일본적인 것’을 이식하려는 측면이 강하다. 일본은 ‘동화’와 ‘문명화’를 하나로 보았을 수 있다. 그러나 피지배자가 일본에 동화했다해도, 동등한 지위와 권리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배제’의 측면이 강하다.(21) 특히 일본의 동화주의는 ‘문명화’도 있지만, 천황을 받드는 일본의 ‘국체(国体)’가 우월하다는 신앙에 의해 지탱되고 있었다. 식민지 주민은 ‘천황의 적자(赤子)’가 됨으로 행복해 질 수 있다고 강요하였다. 조선과 대반을 동화할 수 있다고 본 것은 일본과 대만은 ‘동문동종(同文同種)’, 조선과 일본은 ‘일선동조(日鮮同祖)’라는 관념 때문이기도 하다.(21)

일본은 구미와 달리 조선과 대만을 완전히 미개한 것으로 보기 곤란하자, 대만의 경우 선주민족을 ‘미개’ 또는 ‘야만’의 상징으로 주목하며, 인구의 압도적 다수인 한족계는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그리고 선주민을 동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여,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했다.(22-23) 조선에 대해서는 ‘미개’를 대신하는 것으로 ‘민족성’이라는 표시를 붙였다. ‘빈곤’, ‘불결’, ‘태타(怠惰, 게으름, 나태)’, ‘교활’ 등이 조선인의 민족성으로 강조되고, 여기에 3.1 운동 이후에는 ‘두려움’이 포함되며, 이에 대해 ‘청결’, 근면’을 일본인의 자기 이미지로 하여,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차이화 및 차별화를 도모했다. 일본인의 눈에는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이주한 조선인의 이미지를 통해, 조선인의 민족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는데, 자이니치(재일조선인)에 대한 이러한 이미지는 패전 직후 암시장에서 ‘제3국인’ 이미지를 거쳐 현재까지도 이어진다. 반면, 일본에 동화한 조선인도, ‘민족성’의 본질에 있어서 동화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다.(22-24) 이에 따라 다양한 측면에서 차이화가 이루어지는데, 일본 ‘내지’의 호적법, 조선의 호적법령(초기 민적령, 후기 조선호적령), 대만의 호구규칙의 차이를 두고, 호적, 민적, 호구 사이에 벽을 설치했고, 이름도 마찬가지 였다.(24-25))

지금까지 본 것 중에 가장 간결하고 명쾌한 ‘동화와 배제’의 이중성에 대한 설명이다. 나로서는 여기에 덧붙일 말이 없다. 미즈노 나오키는 일본 식민지주의의 또 하나의 특징으로 천황제를 들고 있다. ‘천황의 적자’ 육성, ‘황국심민화’, 식민지 주민을 천황에게 목숨바칠 각오를 한 인간으로 단련하는 일. 물론 여기서도 일본인, 조선인, 대만인의 차이가 드러난다. 일본인은 태어나면서 ‘황국정신’을 지니지만, 조선인이나 대만인은 아무리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했다해도 늘 의심받는 존재이다. 후천적으로 황국정신을 배워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식민지 주민은 ‘천황의 적자’가 되면서, 천황중심의 위계질서(Hierarchie)의 맨 아래에 놓이게되고, 여기서 빠져나오기 어렵다.(27) 천황제와 식민지주의는 지배자인 일본인에게도 영향을 미쳐, 일본인은 피지배자를 대면하는 자리에서 천황제 국가 일본을 대표하는 위치에서, ‘천황의 적자’로 모범을 보여야 했다. 식민자 일본인은 본국의 일본인 이상 천황제를 내면화하게 된다.(28)

또 활발해진 식민지주의 연구가 담론 분석 차원에 그치지 않고 피지배자의 생활에 입각하여 고찰할 필요가 생기며, 식민지지배 아래서 형성된 생활양식이나 생활과 관련된 규범에 식민지주의가 어떻게 투여되었는지, 그리고 해방 후에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얼마나 구속하게 되었는지도, 식민지주의 해체를 위해 중요한 과제이다.(29) 식민지주의와 생활에 대한 연구는 결국 ‘근대화’와 ‘문명화’와 관련된다.(29) 이런 근대화는 매우 한정적이고 차별적이라는 점에서 식민지적이면서, 동시에 근대적 소비물자나 미디어를 통해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도 분명하다.(30) 피지배자 쪽에서 보면, ‘전쟁’, ‘동화’, ‘근대’가 겹쳐져서 한꺼번에 강요되었다. 근대는 폭력과 함께 찾아왔다.(31) 미즈노 나오키는 조선, 대만에서의 식민지주의 만큼이나 일본에서의 식민지주의를 다루어야 하며, 이는 차별과 편견의 형성과 오늘날까지의 연속에 대한 비판적 연구에 그치지 않고, ‘근대화’, ‘문명화’, ‘동화’ 등의 이데올로기 아래 생활이나 문화 영역에서 형성된 권력관계를 해명하는 것이며, 천황제 이데올로기 문제를 재고하는 과제이기도 하다고 서론을 마무리한다.(33)

작은 책의 길지 않은 서론을 거의 옮기다시피 했지만, 그만큼 중요하다. 나는 오랫동안 ‘친일’, ‘협력’, ‘동화’ 등의 의미 차원이 때로는 미묘하게 때로는 분명하게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하고, 추적하기도 하면서 독서 중이다. 친일과 동화는 다른 개념이다. 차원도 다르고 모든 친일이 다 동화는 아닌 반면, 모든 동화가 다 친일인 것도 아니다. 식민지지배와 식민지주의, 즉 식민지 시대의 식민지 조선인에 대해서 해명하기 위해서, 위의 세 차원 뿐 아니라, ‘투항’, ‘저항’, ‘탈출’, ‘순응’, ‘적응’ 등의 다양한 행동양식이 존재하고, ‘독립’과 ‘자치’라는 요구수준의 차이도 있을 뿐더러, ‘근대’, ‘문명’, ‘반개’, ‘미개’ 등의 ‘차별’과 ‘배제’의 논리가 있다. 식민지주의 이해는 식민지주의 의미 차원을 탐색하고 모색하는 데 있다.

이 책은 교토대학 인문과학연구소 2002년 여름공개강좌의 강연을 정리하여 묶었다. 2002년도에는 그 봄에 종료한 공동연구반 ‘일본의 식민지지배-조선과 대만’ 연구참여자들의 강연을 글로 옮겼다.(17)

미즈노 나오키(水野直樹), 「조선인의 이름과 식민지 지배」.

미즈노 나오키는 『창씨개명』 연구로 잘알려져 있다. 창씨개명 연구에서는 미즈노 나오키와 미야타 세츠코를 빼고 넘어갈 수 없다. 미즈노 나오키는 이 강연에서 조선인의 이름과 일본 식민지지배의 관련성을 검토한다. 일본의 식민지지배에 의해 조선인의 이름은 어떻게 바뀐 것일까. 이 글은 창씨개명이 시작되던, 1940년 이전 1910-1940년까지 일본이 조선인의 성명을 어떻게 관리했는지, 호적문제 연구를 통해 밝히고 있다.(37) 그리고 안에 담겨 있는 ‘근대화’와 ‘식민지주의’를 검토한다.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하기 전까지 한국인의 이름은, 본관(씨족)+성+명(이름)의 구조를 가지고 있고, 여자도 아버지에게 받은 자신의 성을 유지한다.(38) 그러나 실제 족보를 갖지 못한 사람, 성을 갖지 못한 많은 노비들, 여성은 호적에 집안에서 불리는 이름이 기록되다 결혼하면 성만 남는다. 모든 사람이 성+명의 형식을 갖춘 이름이 가진 것이 아니다.(40) 그리고 꽤 많은 아명은 고유어휘를 한자로 적은 것이기도 했다.(41) 조선시대에도 물론 호적이 있었다. 그러나 서식 등의 일관성은 부족했고, 1898년부터 10년간 ‘호구조사규칙’에 따라 신식호적이 만들어졌다. 이것은 교토대학에 대량으로 실물이 남아있다.(43) 조선왕조의 호적은 친가 4대와 외가 1대를 기록하고, 본관, 성, 연령, 명을 적는다. 노비는 이름만 있고 성이 었다. 신식호적 역시 본인 포함 4대를 기록하지만, 여자는 성과 본관만, 노비는 이름만 기록하여, 큰 차이가 없다.(44-45)

1909년 사실상 일본인 경찰관료에 의해 만들어진 ‘민적법’을 통해, 경찰과 헌병이 1년간 조선 전역의 마을을 돌아다니며, ‘민적’을 만들었고, 이것이 식민지시대 호적의 기초가 된다. 1910년 한국병합 후 1923년 ‘조선호적령’이 만들어지지만, ‘민적’을 ‘호적’으로 바꾸어 읽은 것이었다.(48-49) 일본은 민적을 만들 때, 사람마다 이름을 짓게했다. 본관+성+명. 일본이 본관을 그렇게 중시했다고는 보이지 않지만, 성과 이름은 둘 다 가능한 짓게 했다.(49) 일본도 메이지 유신 때, 이름은 있지만, 성이 없는 사람들은 성을 짓게 했다. (그래서 일본에 성이 그렇게 다양한 것이다.) 동시에 근대적 계약관계를 위해 여러 개의 이름을 갖지 않고 평생 동안 이름을 바꾸지 않는 ‘일인일명의 원칙’을 요구했는데, 이 원칙은 식민지 조선에도 들어왔다.(50)

노비 출신자는 민적을 작성하는 단계에서 성이 지어졌고,(51) 여성의 이름짓기는 일단 1909년 현재 기혼여성에 대한 이름짓기를 강요하지 않지만, ‘병합’ 이후 여성의 이름짓기를 장려한다.(52) 1915년에 이름이 없는 자나 이름으로 인정할 수 없는 칭호, 예를 들어 소사(召史), 성녀(姓女), 씨(氏), 작은아기(小岳伊), 작은놈이(小斤者, 小者) 등을 인정하지 않고, 이름을 기재하도록 하여, 이름짓기를 사실상 강요한다. 기존의 여자이름인 金姓女, 李氏 등이 쉽사리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1910년 이후 새로 태어난 아이들은 호적상의 이름을 등록해야만 했다.(54)

또 일본은 조선어 고유어 이름, 즉 고유어휘에 의한 아명을 금지한다. 처음 민적법을 실시할 때, 일본인 경찰 관료는 아명과 성인이 된 후 개명을 인정했으나,(55) ‘병합’ 이후 아명을 짓지 말고 바로 ‘본명’을 짓도록 했고,(56) 고유어휘의 아명을 제한했다.(57) 이때 금지당한 이름으로 ‘岳伊(아기)’, ‘愛奇’, ‘道也至(돼지)’, ‘老馬(놈아)’, ‘皆鳳(개불알)’, ‘介同(개똥)’, ‘蒙致(뭉치)’, ‘自近愛奇(작은 아기)’ 등이다.(58-59) 고유어휘 이름을 금지한 것은 조선문자 기재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민적법 시행당시만 해도 허용되었던 한글 신고서가 1923년 이후 신고서에 한글 기재는 허용하되, 이름은 한자로 쓰도록 했다. 아마도 일본은 피지배자만 알고 지배자는 이해하지 못하는 이름은 지배질서 유지에 방해가 된다고 보았던 것 같다.(61-62) 식민지 시기 민적으로 보면, 일본의 경우 ‘士族(사무라이)’ 따위를 적는 ‘족칭’란이 조선 양식에는 ‘본관’으로 되어 있을 뿐 둘이 차이가 없다.(62) 실제 민적을 보면, 고유어 이름이 꽤 오래 남아 있는 것을 보게된다.(65)

또 하나의 특징은 조선인이 일본인식의 이름-성과 명 중 어느 쪽이든-을 짓는 것이 금지되었다는 점이다. 당시 신문과 『관보』에는 ‘병합’ 직후에 조선인 순사나 총독부 경시 등이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꾼 일(천종익(千種翊)이 니시카와 유지로(西川勇次郞)로, 김대원(金大元)은 나가키요 긴자부로(永淸金三郞)로 등)이 기록되어 있고,(67-68) 이마무라 도모에(今村鞆)는 보호정치기(1905-1910) ‘서민계급’과 ‘평안도’에서 ‘이토(伊藤)’나 ‘하세가와(長谷川) 등의 성을 써서 일본인 이름으로 바꾼 자들이 많았다고 기록한다.(68-69) 그러나 1911년에 일본인식의 성명 변경을 허가제로 한다고 하면서, 이를 사실상 금지하는데, 이는 총독부 평안남도청에서 조선인 관리에게 일본인에게 제공하는 금액의 여비를 잘못 건넨 것이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70) 같은 식민지 관료라도, 일본인과 조선인은 급료와 각종 부대경비가 모두 크게 차이가 났다. 이것이 내지인에게만 제공되는 ‘가봉(加俸)’ 문제인데, 1944년에 최종적으로 금지되어 모두 같아진다.(미야타 세츠코, 『식민통치의 허상과 실상』.) 이미 이름을 바꾼 사람에게도 압력을 가해 다시 바꾸게 한 흔적이 1913년 『관보』에 나온다(나가키요 긴자부로는 다시 김대원으로 돌아간다).(72-73) 또 신생아에게도 될 수 있으면 일본인으로 혼동하기 쉬운 이름을 붙이지 않도록 한다.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얼굴 모양이나 피부색이 같고 일본어만 말하면 구별이 안되니 취한 조치일 것이다.(74-75)

그러나 일본은 ‘창씨개명’으로 정책을 전화하는 데(이 내용은 저자의 『창씨개명』에 보다 자세히 나온다), 이는 이름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조선 가족제도 전체를 바꾸려는 시도였다고 보인다. 창씨개명 2년전인 1937년 신생아에 대한 일본인 이름짓기가 허용되는 것으로 보아, 중일전쟁 시기 황민화 정책으로 이름에 대한 정책도 변경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75)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시행된 이름의 ‘근대화’를 식민지로 들여왔지만, 내용은 식민지지배 질서를 유지할 목적으로 조선인의 이름을 바꿔왔다. 즉, ‘근대화’라고 해도 식민지에서는 본국과 의미가 다르다.(76) ‘창씨개명’ 뿐 아니라 식민지로 지배한 조선에서 일본이 주민의 이름을 일정한 틀에 끼워 넣은 정책을 취했다.(77) 그리고 현재 남북한 모두에서 고유어 이름짓기가 활발해지고 있다.(77)

논문을 거의 요약하다시피 한 이유는 일단 너무나 흥미롭기 때문이다. 오늘날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 이름은 실상 ‘근대성’의 산물이고,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 시기 실시된 정책을 가지고 와서, 미성년, 여자, 노비에게 성과 이름을 만들도록 강제했다는 점. 그러나 피지배자인 조선인과 지배자인 일본인의 이름이 혼동되지 않도록, 차별구조에 혼란을 가져오지 않도록 주의했다는 점. 이름이 없거나 성이 없는 사람, 즉, 사람다움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던 사람이 전근대 사회에 너무나 많았다는 사실. 그리고 ‘민적’을 만드는 전 과정은 일본경찰관료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 따라서 경찰 호적 자료는 경찰청 창고 어딘가에서 썩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일본 경찰과 헌병이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민적을 만들었다는 점. 식민지지배는 정말 품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조선인 특유의 관성과 관행은 쉽사리 없어지지 않았다는 점. 그러나 아직 ‘병합’도 이루어지지 않은 1905-1910년까지 보호정치기에 나서서 일본식 이름(성명)으로 고친 사람들이 많았고, 특히 평안도에 많았다는 점. 평안도에는 기독교도 엄청 번성했다. 고유어 이름짓기는 일제시대에는 일종의 익명성과 신분차별, 성차별, 아동 하대의 상징이었지만, 오늘날에는 민족문화의 표현으로 간주되고 있다는 사실. 너무나도 당연한 이름짓기에도 지배, 피지배의 식민지주의가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그러고 보니 프란츠 파농의 책에서도 이런 내용을 본 것 같다.

정근식, 「식민지지배, 신체규율, ‘건강’」.

정근식은 자신의 소록도 방문 인터뷰 경험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1996년 그가 소록도를 방문했을 때, 실명한 80대 노인과의 인터뷰에서 그가 계속 몸을 움직이고, 시선을 피하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1961년 소록도병우너의 원장도, 환자원생들이 일정거리를 유지하고, 선착장도 달리쓰고, 철조망이 구역을 나누는 현실을 발견했다.(81) 또 한국인 환자들이 사진을 찍히거나 이름을 밝히는 것을 싫어하는 것들이 한국의 한센병 환자들이 몸가짐과 관련하여 특별히 훈련되 나름의 자세와 태도, 즉 ‘신체작법(身體作法)’과 관련된 특정한 하위문하가 발달한 것이 아닌지 생각하게 되었다.(82) 식민지시기인 1917년 소록도자혜의원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을 때, 병원당국은 환자가 사는 구역인 ‘유독지대’와 직원이 사는 구역인 ‘건강지대’로 나누어 철조망이 설치되었다.(84) 직원들에게는 유독지대를 들어갔다 나올 때, 소독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일본의 ‘국립’ 한센병요양소에는 1931년 제정된 「징계검속규정」이 있고, 소록도갱생원(34년 개칭)도 「조선총독부 나용양소 환자 징계검속규정」이 있는데, 싱직지 소록도에 훨씬 세세하고 구체적인 금지규정이 있었다. 환자들의 결혼조건은 남성환자의 경우 단종수술(불임수술)이 었는데, 규칙위반자가 감금실에서 나올 때, 단종수술이 강제적으로 행해졌다.(84) 징계검속의 하위 규정으로 「환자심득(患者心得)」이 있는데, 소록도의 것이 일본의 어느 것보다 세세하여, 환자는 치료 뿐 아니라 일상 동작 등에 있어서 직원의 지시를 절대 준수하고(1조), 일과표에 따라 아침, 저녁 2회 점호가 있으며(17조), 필요할 때, 시체해부를 한다(27조)고 규정한다.(85) 이런 일상동작 규정에 직원과 말할 때의 자세, 거리, 바람방향 등의 규정이 있고, 가혹한 처벌이 따랐기에 오랜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고 내면화된 것이다. 과거의 식민지권력은 환자들의 신체에 각인되어 하나의 역사적 실체로서 존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86) 정근식은 과거의 식민지주의가 어떻게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지를 주로 1937년 이후의 신체규율과 동원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살펴본다. 식민지지배는 정신과 의식 뿐 아니라 무의식에도 영향을 미친다.(87) 신체는 그저 자연적,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것이다.(89)

인간의 신체규율을 특정한 문화적 틀에서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형성되는 실체라면, 가장 큰 변화는 근대사회 형성기에 일어났다. 일본 메이지 유신 이후 기타자와 가즈토시는 전통적 신체에 ‘양생(養生)’이라는 이름을 근대적 신체에 ‘건강’이라는 개념을 대응 시켰다. 근대에 이르러 신체 단련, 운동이 강조되었다.(90) 신체는 권력의 검사대상이 되고, 건강한 신체는 훈련에 의해 육성된다는 ‘체육’ 개념이 일반화도었다. 출발은 징병제와 병식(兵式)체조였고, 신체검사가 동반되었다.(91) 식민지 조선에서 지배권력은 학교를 통해서, 지원병제가 실시되면서, 신체검사가 실시되었고, 1920년대 제사나 방적공장의 여공의 신체 기능과 식생활에 대한 관심도 있었다.(92) 근대적 신체는 법령과 규칙에 의해 표준이 제시되고, 일상생활의 영역에서 개인의 지위에 따라 상응하는 신체작법과 행동규범이 형성되는데, 이를 일본에서는 흔히 ‘심득(心得)’으로 표현한다.(93) 식민지에서는 15년전쟁기에 이르러 인적 자원을 동원하기 위한 적극적 정책, 즉, ‘근로보국대’, ‘정신대’, ‘징용’, ‘징병’이 이루어지는 데, 이는 ‘조선적인 것’의 말살을 통해 이루어지며, 신체의 사용은 정신적으로 순치되어야 했다.(94) ‘정신’ 총동원은 민중의 복종심을 가리킨다. 식민지에서 사람은 자원, 즉 노동력과 군사력이 되며, 이를 실제로 사용하기 위해, 최소한의 지식, 언어능력, 단련된 신체가 필요하고, 장기 사용을 위한 건강, 위생, 청결이 강조되었는데, 이는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국민’의 의무였다.(95) 총동원 시기 체위 향상을 의미하는 용어는 ‘연성(鍊成)’이라는 말로, 모든 국민에게 끊임없는 ‘연성’, 즉 체력, 사상, 감정, 의지 등 인간의 모든 능력에 대한 집단주의적 방식의 연마육성이 요구되었다.(96) 식민지시기 신체단련의 중요한 수단으로 집단체조, 연합체조, 매스게임이 실시되었고,(97) 1934년부터 라디오 체조회가 확산되었다.(99) 1937년부터 ‘황국신민의 서사’와 함께 황국신민체조가 실시되었고, 이것만은 조선에서 시작되어 일본으로 흘러들어갔는데. 목검을 사용한 14종의 연속동작과 6종의 자세가 추가되어 있는데, 이를 ‘인고단련’, ‘인고지구’ 등으로 부르며, 초등 3학년부터 실시했다.(100-101) 동시에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에게 잇어서 체력은 관리 대상이었다.(105) 1939년 조선체육협회가, 1940년 총독부 학무국이 체력장제도를 실시하는 데, 검정 좀목은 100미터 달리기, 2천미터달리기, 넓이뛰기, 수류탄던지기, 운반, 턱걸이였고, 성적에 따라 초급, 중급, 상급으로 구분됐다.(106) 그러고 보니 1994년 체력장이 폐지되기 이전, 대입 체력장 종목이, 100미터, 오래달리기(1,000미터), 넓이뛰기, 공던지기(수류탄), 턱걸이였는데, 어째 식민지시기보다 체력이 후퇴한 모양이다. 1942년 18-19세 조선 청년남자에 대한 체력검사가 전국에서 실시되는 데, 검사 내용은 체격, 질병(결핵, 성병, 트라코마), 학력, 일본어 해독 능력, 결혼, 미혼의 구분이다. 뒷날의 징병제를 준비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108) 또 청년훈련소가 1929년 부터 설치되어, 1941년에는 1,830개솔 증가했고, 청년단도 적극적으로 동원되었고, 1942년에는 미취학 청년을 대상으로 조선청년특별연성령이 제정되어, 3만 명을 수용하여 훈련을 실시했는데, 훈육, 학과(일본어)에 중점을 두고 기초군사훈련을 실시했다.(109-110) 교련도 1928년부터 전문학교, 대학 예과, 대학에 시작되었고, 고보로 화산되었는데, 이는 현직 장교가 배속되어 학교를 병영화하는 것이다.(111-112) 식민지시기 일상생활로 각종 캠페인이 침투하여, 전시국민생활강조주간, 국어일, 체육일, 근로일, 반성일 등이 실시되었고, 국민복 착용, 백미식 금지, 화장 금지 등 생산, 유통, 소비의 모든 영역이 통제되었다. 또 일상생활은 ‘국민의례’로 채워졌다.(112-113)나치 독일의 영향을 받은 후생 개념에 따라 일본에 1937년 후생성이 설치되었고, 1941년 총독부에서 후생국이 설치되어, 건강을 증진하고, 건병, 건민, 건아, 건모 등을 중요한 의제로 만들었다.(114-115) 건민은 건강한 황국 민족의 약칭이다.(116) 이때 가슴에 새긴다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는 신체규율이 권력의 내면화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표현이다.(117) 이 부분은 조금 동의가 어렵다. 이 오래된 표현에 이런 의미를 담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조선의 건민운동은 “강철 같은 신체는 흥아의 초석”이라는 구호 아래, 아동건강기원제, 무료건강상담, 모자보건, 창경원 무료 입장, 아동애호마크 반포, 모자후생전람회, 우량아표창회 등이 실시되었다.(118) 우량이란 불량을 전제하는 우생학적 표현이기도 하다.(120) 건강은 식민지 국가권력 뿐 아니라 기업의 광고에 의해서도 일상생활에 침투되었다.(123) 조선의 신체동원의 귀착점은 1944년 실시된 징병제이다. 제국 일본의 경우 신체규율이 ‘징병제를 통해 확산되었다면, 식민지 조선은 ‘징병제를 향해’ 배양 되었다.(124) 당시 징병검사는 갑종, 1을종, 2을종, 3을종, 병종, 정종, 무종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지원병과 징병에 의해 징집된 조선인 청년은 15만 이상, 군속을 포함하면, 38만 명이 동원되었고, 그 중 2만 명 정도가 희생되었다.(126) 일본은 패전후 정신과 신체의 총동원 체재가 해제되었지만, 한국은 신체규율과 건강의 동원이 한국전쟁, 분단체제, 베트남전쟁에 의해 되살아나고 재생되었다. 징병제와 유신체제가 그 핵심이다. 개인은 이런 체제에 포로로 잡힌 상태였다.(127) 1987년 이후의 민주화는 식민지 총동원 체제의 해체, 신체규율의 해체로 이어지고 있다.(130)

정근식이 시종일관 지적하고 있듯이 식민지 지배가 가져온 생활규율은 고스란히 해방 이후, 권위주의 정권을 이어가면서 남았다. 이런 근대적 신체규율은 일본이 구미 근대를 이해한 방식이다. 이런 형태의 동원은 미국, 영국, 독일 등 거의 모둔 나라들에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일본을 통해, 일본에 의해 한국에 뿌리내린다. 이런 일들은 1920년대만 해도 일본에서 실시된 후 수년 혹은 십년 이상의 기간을 거쳐 식민지 조선에 적용되지만, 1940년대가 되면, 오히려 식민지 조선에서 먼저 시작되어 일본으로 넘어가는 것까지 생겨난다. 이런 점에서 ‘황국신민체조’는 하나의 정점이자, 기형의 극치다. 국민의례, 체조, 체력장, 징병검사, 신체검사, 우량아 등 내가 겪어온 수많은 것들이 식민지 시기에 형성, 이식, 정착, 내면화된 것들임이 발견되면서, 이런 것들을 단순히 일제잔재라고 부르고 해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식민지 지배를 통해 이식된 ‘규율의 근대’가 이후에도 국가권력을 통해 계속되고 강화된 것이다. 식민지 근대 혹은 근대성은 어쩌면 개인 규율의 형태로 식민지 시기가 끝난 후에도 계속해서 식민지를 지속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식민지 시기에서 근대 혹은 근대성을 떼어낼 수 없다면, 그 역으로 근대 혹은 근대성은 식민지성을 계속해서 내포하고 나아가는 것이다. 무엇보다 눈에 뜨인 것은 형식의 일관성이었다. 이름이나 구호는 바뀌었을지 모르나, 그 형식은 오래 유지된다. 선전탑을 세우고, 캠페인을 하, 체력장을 실시하고, 국민의례를 지속하고 강요하는 일. 외형적 근대의 연속성이 규율화된 내면성을 유지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테러방지법이 눈앞에 있다. 다시 한 번, 두려움을 내면화하라는 요구로서. 나는 이미 스마트폰을 버린지 오래되었지만. 내가 사용하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으니 비밀은 아무 것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나 마찬가지. 어쩌면 외형의 규율화라는 연속성 속에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사이버 공간이나 스마트폰 같은 매체는 더 이상 내면세계라기 아니라, 확장된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의 삶 속으로 국가가 침투하여, 규율하려는 것은 ‘규율적 근대’를 체화하고 실현하는 실체로서의 국가의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사회는 아직 그것을 막아낼 힘이 없고. 이러다가 드라마에서나 보는 다크넷 같은 것이 활성화되는 날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고마고메 다케시(駒込武), 「식민지에서의 신사참배」.

평소 신사에 다니지 않는 사람도 정착되어 있는 의식이자 관행인 일본의 하쓰모데(初詣), 즉 새해 첫날 신사를 참배하는 일은 생각보다 오래지 않았다고 한다.(133) 대략 청일전쟁을 거치면서 하쓰모데가 관습으로 정착되어 가기 시작했지만, 1907년의 기사에도 관폐사(궁내성이 관리)가 아닌 에호마이리(정초에 길한 방향에 있는 신사나 절을 찾아 복을 비는 일)이 구별되지 않았다.(135) “어른은 시 의사당에서, 아이는 학교에서”라는 하쓰모데의 관습은 “창출된 전통”이라고 다카기 히로시는 지적하며, 이 과정에서 학교가 큰 역할을 담당했다. 전전에는 ‘기원절(진무천황즉위일)’, ‘천장절(메이지천황 탄생일’, ‘1월 1일’에 학교의식으로 기념했다.(136) 축제일의 학교의식으로는 ‘어진영(천황사진)’에 대한 최경례(최상의 경례), ‘교육칙어’ 봉독, 교장 훈화, 노래 제창, 희고 붉은 색깔의 떡을 나누어주었다고 한다.(137) 1월 1일의 하쓰모데는 학교를 통해 관습이 정착되면서, 천황 숭배의 질서 속에 자리매김됐다. 현대 일본에서는 명확하게 의식하고 있지 않으나, 헤이안신궁 홈페이지를 보면, ‘원단제’를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138-139) 이를 통해 우리들은 ‘일본인’이라는 공동의 의식이 만들어지고, 에비스신을 중심으로 한 민간신앙은 잊혀져 간다. 일본에서 하쓰모데는 어느 시기부터 당연한 일로 특별히 의식하지 않게된 상황이다. 그러나 ‘식민지에서의 신사참배’라는 문맥에서 ‘신사참배’의 의미는 하쓰모데와 확연이 달라진다.(140)

대만의 타이난장로교중학(臺南長老敎中學)은 영국인 선교사, 일본인 교감과 교사, 교련선생, 대만인 교사가 함께하는 여러 민족이 활동하는 곳이다.(141) 1885년 영국인 선교사가 세운 미션 스쿨로, 일본 통치시기 대만인에 의한 학교 설립 요구가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아, 대만인들은 이 학교를 대만인을 위한 학교로 생각하여 다니려 애썼고, 학교의 규모가 커지자, 일본인 교사를 채용하라는 압력을 받아 세 민족의 교원이 존재하게 됐다. 그럼에도, 이 학교는 식민지지배 아래서 ‘민족학교’라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142) 식민지 지배하 대만은 일본인은 소학교, 대만인은 공학교에 다녔고, 중학교와 고등여학교는 함께 다녔지만, 중학교의 경우 교육은 모두 일본어로 진행되었다.(142-143) 타이난장로교중학은 교장은 영국인 선교사, 대만인에 의한 후원회가 결성되어 있고, 학생이 거의 모두 대만인이며, 대만어 교과목과 대만어로 성서를 가르치는 ‘사립각종학교’였다. 오늘날 일본의 조선학교, 한국학교, 중화학교 등 민족학교와 같은.(143) 타이난장로교중학의 중심은 린마오성(林茂生)으로 이 학교 졸업 후, 일본에 유학 도시샤중학과 제3고등학교를 거쳐, 도쿄제국대학 문과대학을 졸업한 대만인 최초의 ‘문학사’였다. 도쿄제대를 졸업한 대만인은 과료가 된 사람도 있지만, 린마오성은 모교로 돌아온다.(144) 1921년 대만문화협회에 가입한 린마오성은 타이난장로교중학의 후원회장으로 정규 중학교의 지위를 획득하기 위한 10만엔의 기금 마련에 성공한다. 1929년 콜럼비아대학에 유학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다시 대만으로 돌아와 모교의 이사장으로 일한다.(145) ‘대만인의, 대만인에 의한, 대만인을 위한학교’를 목표로 정식 중학교로 인가받으려 하자, 총독부는 학교 전체가 신사참배할 것을 조건으로 요구한다.(146-147) 전전에 신사참배는 종교적으로 애매했다. 정부는 신사가 종교적인 시설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메이지 정부는 신도를 유일한 국교로 확산시키려 했였다.(147) 신사의 종교성을 탈각하기 위해 신관의 ‘장례식’ 집행을 금지했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보기에 종교가 아닐 수 없다.이것은 에도시대 후미에(踏み絵,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의 목판화, 신자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밟게한 것)의 재판이다. 특히 대만인, 대만인 기독교도에게는 대만을 굴복시킨 요시히사 친왕을 모시는 신사이기에 더 곤란했다.(148) 게다가 퓨리타니즘(청교도주의)에 영향을 받은 장로교파 기독교였다. 그러나 동시에 학교 인정을 강력히 원했기 때문에, 대만인과 선교사 또 대만인들 사이에 대립과 내부분열이 생겨났다.(150) 1934년 이 신사참배가 사회문제가 된다. 발단은 일본인 교감 우에무라의 해직이었는데, 우에무라가 자신이 신사참배 추진파라서 면직되었다고 주장하고, 일본인 교사 7명 전원이 사직하자, 비국민을 양성하는 학교라 비난하는 맹렬한 캠페인이 전개되고, 린마오성은 신사참배를 한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그러나 일본인은 린마오성의 해임, 교장을 일본인으로, 이사에 일본인을 포함, 성서 강의 및 조석(朝夕) 예배를 일본어로 할 것을 요구했다. 총독부 보조금은 받지 않고, 자신들이 모은 기본 재산에 영국에서 선교사에게 보내오는 돈으로 운영되는 학교에 이런 요구를 한 것이다.(151-152) 학교가 국체의 존엄을 모독하는 비국민이라는 등의 비난을 받자, 영국인 교장 번드가 대만인을 배제하고 총독부 요구를 모두 받아들였다. 일본인 교장이 취임했고, 린마오성은 이 학교와 관계를 끊었고, 물론 신사참배도 실시되고, 참배 후 참가하지 않은 학생을 조사하는 등 강제성을 띄게 되었다.(153-154) 이 학교의 대만인 교사 황시밍도 대만어로 성서를 가르치다 학교에서 추방되었다.(154) 두 사람이 떠난 후 학교의 교육 목적에서 기독교주의라는 말이 빠지고, 학생들도 전쟁에 지원병에 나서는 등, 타이난장로교중학도 ‘황민화교육’을 위한 시스템의 하나가 되었다.(157)

현대 일본에서 전통이라고 말할 때, 청일전쟁을 경계로 하여 만들어진 전통과 그 이전부터 있었던 전통이 있으며,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고, 구미를 추월하라는 구호 속에서 많은 전통이 파괴되었다. 또 정월의 축하행사인 ‘신사참배’와 식민지에서 폭력적으로 시행된 ‘신사참배’는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일본인은 하쓰모데의 신사참배를 괜찮지 않은가라고 생각하지만, 대만에서는 대만 사람들의 소망을 ‘비국민’이라는 말로 짓누른 행위였다.(159) 오늘날 일본에서 되살아나는 ‘히노마루’와 ‘기미가요’는 기존의 사회질서에 충실한지 여부를 시험하기 위한 “후미에(踏み絵)”역할을 담당하고 있다.(161) 일본인들이 신사에서 흔히 보는 ‘가내안전’, ‘장사번성’, ‘학업성취’를 넘어선 소망이나 기원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161) 고마고메가 2002년 타이난장로교중학에서 동창생인 연배의 사람을 앞에두고 이야기했는데, 동창생 중 몇몇이 당시 신사참배 찬성, 반대 여부를 두고 지금도 언성을 높였다는 것이다. 일본인은 그것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지만, 신사참배를 요구받고 대립을 겪은 족은 지금도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162)

일본에서의 신사참배가 근대의 것이라는 사실 적지 않은 충격이다. 이전부터 완전히 없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게다가 지금의 일본인들은 신사참배라고 해도, 하쓰모데 정도의 이미지 만을 떠올린다는 것. 이것을 안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큰 수확이었다. 일본인들에게 식민지지배와 관련된 어떤 문제를 제기할 때, 그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은 그런 일에 해당하는 현재의 일본인들이 알고 있는 일들이 대수롭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어서 일수도 있다. 일본인은 어디까지 얼마나 알고 있는가? 식민지에서 행해진 일은 비교적 관점을 가지고 객관화해서 볼 수 있는가 생각해보면, 보통의 일본인에게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음을 알게 된다. 일본은 대만의 한 미션 스쿨이자 민족학교에서 ‘황민화교육’을 관철하기 위해, 대만인들의 소망인 정규 중학교 인정을 무기로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그 결과 학교 전체에 대립과 분열이 발생하고, 일본은 목적을 성취했다. 대만에서 이런 일은 1934년에 폭발했다. 식민지조선에서는 1935년 신사참배가 이전과 달리 강요되자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격렬한 찬반논쟁이 일어났고, 1938년 숭실학교 자진폐교, 평양장로회신학교는 폐쇄되었다. 하지만 같은해 장로교 총회는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달려가서 신사참배를 하게 된다. 신사참배가 일으킨 대립과 분열은 해방 이후 교단 분열과 끊이지 않는 친일논쟁으로 이어진다. 고마고메 다케시의 『식민지제국 일본의 문화통합』 한국어판 서문을 보면, 대만에서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할 당시 문교국장이었던 야스타케 다다오(安武直夫)는 1935년 조선의 평안남도 지사로 이동하여 신사참배 문제에 불을 당겼고, 대만의 영국인 선교사와 조선의 미국인 선교사는 서로 연락을 주고 받으며, 야스타케의 행동에 대한 정보도 입수하고 있었다. 대만의 신사참배와 조선의 신사참배는 단지 동시대적인 것이 아니라, 연쇄적으로 발생한 것이라고 고마고메는 말하고 있다. 신사참배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대만과 조선을 함께 살펴보아야 하고, 그것이 선교사와 현지인(조선인, 대만인) 또 현지인 내부에 분열과 대립을 획책하려는 의도로 또 성공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동시에 가해한 쪽은 잊어버리고, 당한 쪽은 아직도 상흔이 되어 남았다. 신사참배는 식미지 시기 “후미에(踏み絵)” 였다. 그러니 일본인들은 기억도 못하고 의미도 못느끼는 근대에 창출된 전통이 식민지에서 만들어낸 상처는, 식민지 근대로 들어가는 일종의 ‘입문의례’가 남긴 평생의 절단의 상처로 남았고, 또 남을 것 같다. 3.1절을 앞두고 연일 아파트 안내방송으로 태극기 게양을 독려하고, 마침내, 2월 29일에는 동사무소 직원이 가가호호 방문해서 태극기를 나누어주는 이 시대에 태극기를 또 하나의 “후미에”인 것인가. 나는 입씨름이 싫어서 문도 안열어줬다.

마쓰다 요시로(松田吉郞), 「대만 선주민과 일본어 교육: 아리산 초우족의 전전과 전후」.

대만의 아리산 초우족, 대만 중앙부의 아리산(阿里山) 서쪽에 살고 있는 10개의 선주민 종족의 하나. 아리산 노송나무는 야스쿠니신사의 도리이(신사 입구의 세운 두 기둥의 문)에 쓰였다고 한다.(167) 선주민(원주민)들은 예전에 말레이 · 폴리네시아어족으로 알려진 아우스트로네시아어족으로 기본적으로 문자가 없다.(170) 선주민들은 일본통치시대 일본어 교육을 받고 일본어를 공통어로 하고 있었다. 현재도 60세 이상의 사람들은 선주민의 언어와 일본어를, 60세 이하는 베이징어를 공통어로 사용한다.(171) 일본은 조선에서와 달리 대만의 한족에게는 강제적인 성명 개정을 시행하지 않았고, 한족의 경우 성명을 바꾼 사람도 10%도 되지 않았을 것이지만, 선주민인 초우족은 60세 이상의 거의 100%가 성명 개정을 경험한 사람들로, 발음상 유사한 일본명이 부여되었다. 아리산은 상사사(上四社)와 하사사(下四社)로 나뉘어 있고, 초우족은 토후야사(社)와 탓판사(社) 두 계통의 마을로 구성된다.(173) 각가의 사를 통솔하는 ‘페욘시(여왕벌)’라 부르는 ‘두목’이 있다. 최대 축제는 8월의 수확제. 대가족제로 한 집에 40-50명이 살고 있다. 이들 대가족 연장자를 총괄하는 역할을 두목이 담당했다.(174) 초우족은 토지의 사유 개념이 없고, 남자는 수렵을 여자는 농경을 담당한다.(175) 선주민의 전설에서 홍수시기에 초우족과 ‘마야’는 갈라졌는데, ‘마야’는 동방으로 갔다. 1985년 이래 대만으로 건너온 일본인을 ‘마야’라고 부르며, 네덜란드인과 일본인과는 친근감을 땅을 빼앗은 한족에 대해서는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초우족을 비롯한 선주민은 일본인을 형제라고 생각하는 데 일본인 통치자는 이 사실을 이용했다.(177)

어떤 선주민도 초우족 처럼 친일적이지 않았다.(177) 19896년 선주민 통치기관으로 무간서(撫墾署)가 설치되어 일본어와 예의작법을, 1898년 총독부는 무간서를 폐지하고 변무서(辨務署) 제3과를 두어 선주민 통치와 일본어교육을, 1901년에 이를 대신해 경찰본서가 선주민을 통치한다.(178) 촌락마다 주재소가 설치되고, 교육소를 설치하여 순사가 아동의 일본어 교육을 담당하기도 한다.(179) 1943년 의무교육이 되기까지 선주민의 자녀 쪽이 한족의 자녀보다 취학율이 높았다. 타이중 사범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우서(霧社, 1930년 일본군경에 멸시에 항거한 원주민이 일으킨 봉기, 항쟁을 일으킨 사디크족에 대한 대량학살로 종결) 사건을 일으키자, 초우족은 여기 참가하지 않았지만, 일본통치자에게는 원주민을 교육하면 반항한다는 의식이 있어서, 진학시키지 않고 일년제 농업강습소를 만들어 인물을 길러냈다.(180-182)

1933년에 만들어진 라라우야 등의 교육소에서 교육을 쌓고, 고사족 청년단과 의용대에 참가했으며, 최종적으로 정식 병사가 되어 종전을 맞이하고 전후를 살아온 초우족 사람들 그 중에서도 1923년 생 이우스무 무키나나(일본명, 무키노 세이이치(向野政一), 중국명, 武義德)의 이야기다.(182) 1933년 라라우야 교육소 제1기생으로 일본어와 일본문화, ‘교육칙어’, ‘3종의 신기’ 등을 가르쳤고, 장개석에 대한 적개심도 알게 되었다. 노인에게는 ‘야학’에서 일본어를 배웠고, 일본어가 우수하면, 국어가정, 국어장의 칭호를 주고 내지 여행을 하기도 했다.(186-187) 무키노는 교육소를 나온 후 아리산 측후소에서 기상을 관측했고, 여기서 일본어가 능숙해져, ‘고사족 청년단’에 들어갔다가, 1941년 지원병에 응모했으나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당시에는 당연한 분위기였다고 한다.(188) 무키노는 대신 청년단에 입단 군사훈련과 구타를 당했고, 농업 일손을 도왔다. 1942년 고사의용대에 들어갔는데, 일본어를 말하고, 3종의 신기를 알고, 군인칙유와 교육칙어를 아는지가 입대조건이었다고 한다. 무키노는 바탄반도로 가서 혼마 마사하루 중장의 ‘바탄의 죽음의 행진’ 작전에 참가했다. 1회 고사의용대는 일본이 이겼지만, 그 이후에는 지기만 했고, 대만 남부 팡랴오(枋寮)에서 상륙에 대비했으나 싸워보지 못하고 종전을 맞이했다.(189-190)

일본통치자는 두목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일본어 교육을 받은 자조회장, 청년단장 등으로 마을의 통치를 대신하게 했다. 마을 연장자가 담당하던 청년 교육이 청년단 조직과 조회가 생기면서 약화되었고, 종래 지도자의 권한도 약화됐다. 가족제도도 일본통치자가 우사사건의 원인을 반성하면서, 분호제(핵가족)으로 바뀌었다.(192) 농사방법도 이동휴경 밭경작에서 수전정지경작으로 바뀌어 사유지가 형성되었다. 이에 따라 서로 돕는 정신이 사라졌고, 마을 사람도 흩어졌다. 평등사회에서 빈부의 차이가 있는 사회로 변화했다.(194-195)

전후 아리산향(阿里山鄕)은 오봉향(吳鳳鄕)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오봉은 초우족을 속이는 악한이다. 초우족의 반대로 다시 아리산향이 부활한다. 1947년 2월 28일 본성인이 외성인에게 반항하는 2.28사건이 발생하고 아리산 초우족도 참가한다. 지휘부가 분열되어 초우족도 돌아오지만, 1950년 무렵부터 2.28사건 참가자 체포가 시작된다. 국민당은 국민소학 교원을 파견하고, 그는 2.28사건 가담자를 색출해 거의 전원이 체포됐다. 이때 교육소를 나와 상급학교에 진학했거나 자조회장이 된 인물들은 총살을 당했고, 무키노는 교육소만 나왔기에 무기징역형을 받아 복역하다. 1975년 장카이섹(장개석)의 사망과 함께 가석방으로 출소했다.(194-196) 전전 일본어 교육은 아리산 초우족의 자립심을 형성하여, 우사사건에 참가할 의사를 가진 사람도, 국민당 지배에 반항한 사람도 나왔다. 초우족은 일본의 교육이 좋았다고 회고하며, ‘정직’을 배운 것이 좋았다고 한다. 다만 일본통치자가 아리산 초우족 특유의 축제나 문화, 언어를 억압, 제압한 것은 불만을 품고 있다.(197-198) “나는 일본인이었다”고 말하는 60세 이상의 대만인이 많다고 한다. 일본통치시대 대만인이 일본인으로 간주되긴 했으나, 내지인, 한족계 주민, 선주민 사이에 차이가 있고, 대만인 자체가 이등국민, 이등신민으로 불렸다.(198)

아리산 초우족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다. 대만 선주민에게 ‘근대’를 가져다 준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집요하게 이들을 차별하고, 전통적 구조를 해체했지만, 이들에게 일본어 교육을 받은, 근대화 교육을 받은 이들은 의용대로 나가 싸우기도 하고, 친일적이 되었고, 일본이 심어놓은 것인지는 알수 없으나 국민당에 대한 봉기에도 참여한다. 2.28 사건 참가자를 색출해서 검거했을 때, 사형을 받은 자와 면한 자는 교육받은 정도의 차이였다. 그리고 일본에 대한 호의는 아직도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다.

딱히 서평이라기보다 짧은 책이지만, 무척이나 재밌었고, 내용이 아주 흥미로웠다. 사실 눈길을 끈 건 미즈노 나오키와 고마고메 다케시 두 사람이었지만. 남아 있는 식민지성과 근대성에 대해서 여전히 쉽사리 어떤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많은 생각을 반복하고만 있다. 생각은 계속해서 사고의 테두리를 맴돌고만 있다.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식민지 대만에 대한 이해, 제국 일본에 대한 이해가 동시적으로 또 연계를 지으면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 점을 다시 확인한 점이 성과라면 성과다.

식민지 시기에 대해, 식민지주의에 대해, 식민지지배에 대해, 아직도 남아 있는 식민지성에 대해 많은 의문이 남는다.

그러고 보니 마침 192시간 26분의 무제한토론이 끝났다. 대학시절 ‘미국정치론’ 교과서에나 나오던 이야기를 현실에서 보게 될 줄은. 오늘의 이 일은 무엇을 남겼고, 남기게 될까. 그리고 테러방지법은 또 어떤 규율의 내면화를 가져오게 될런지. 건강하게 오래살아야 겠다.

2016. 3. 2.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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