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확신의 중요성 –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1, Max Weber, 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18장. Public Domain.
뭐니 뭐니 해도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교리는 구원의 문제이고, 구원의 확실성이 모든 것을 가른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확실성을 도출하고, 유지하는 논리가 기독교인들 그 중에서도 개신교인들의 삶을 좌우한다. 이 평범한 사실을 막스 베버가 다시 일깨워주었다. 내가 평신도 시절 혹은 신학을 알기 이전에 교회와 신앙 문제를 전전하던 그 이유를. 신학을 좀 배우고 나니, 이제사 기독교 교리들의 다양한 측면들을 살펴보게 되지만, 언제나 사람들은 구원 문제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요구하고, 또 그 앞에서 늘 흔들린다는 사실을. 사실 구원에 관심이 없다면, 굳이 기독교를 믿을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구원의 확실성을 근거로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이 정말 쉽고,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교단과 분파들이 등장한다는 사실. 인터넷을 통해서 모든 정보가 확산되는 요즘에 더욱 사람들이 이 문제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 알게 되었다. 막스 베버가 백여년 전에 쓴 글로 나를 다시 깨우쳐 주었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읽을 수록 흥미롭다. 그는 프로테스탄트의 각 교파(칼뱅주의, 경건주의, 감리교, 재세례파)의 교리와 윤리적 금욕주의의 상관성 혹은 친화성을 연구한다. 막스 베버는 각 교파의 교리 중, 윤리적 강령과 금욕주의를 연결짓지 않는다. 그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구원의 확실성(certitudo salutis)’를 도출하는 각 교파의 교리적 특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 각 교파의 교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론이다. 깜짝 놀랐지만, 책을 읽어가면서 곧 동의하게 되었다.
칼뱅주의는 가장 이론적이고 논리적 길을 취한다. 칼뱅주의의 구원론의 핵심은 이중예정론(double predestination)이다. 구원받을 자와 버려질 자가 미리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영국 국교회와 연관있는 온건 칼뱅주의자 중 유기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 예를 들면 존 오웬(Owen)이 있기는 하지만 칼뱅주의 주류는 아니다. 구원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에게 달린 문제이고, 인간은 알 수 없으며, 심지어 성령의 장난에 의해서 버림받은 자가 선택받은 자인 것처럼 경험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 것도 알 수 없으며, 설교자도, 성례전도, 교회도, 심지어 하나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하나님이 한 번 버리기로 작정했으면, 하나님도 그걸 바꿀 수 없다는 뜻) 그렇기 때문에, 칼뱅주의 하에서 인간은 철저한 고독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나 그에게는 구원을 확인할 수 있는 어떤 내적 확증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을 자신의 삶에서 확신할 필요가 있다. 선행으로 구원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지만, 선택의 표지, 즉 구원의 확실성을 보여주는 표지로서 선행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베버는 루터주의자들의 칼뱅주의자에 대한 비판을 따라 이를 ‘행위구원주의(Werkheiligkeit)'(또는 행위구원사상)이라고 지적한다. 김덕영은 이를 한 개인이 행위를 통해 자신의 구원 상태, 즉 자신이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자들에게 속함을 내적, 외적으로 확증하는 사상이라고 설명한다.(199쪽 역주 34) 행위구원주의는 행위가 구원의 실제근거(Realgrund)가 아니라 인식근거(Erkenntnisgrund)라는 주장이다.
칼뱅주의는 논리상 개인의 구원을 확인할 길이 어디에도 없다. 구원 여부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다. 단지 사람이 모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변덕이나 사후적 평가에 달린 것도 아니고 이미 예정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예정과 선택 교리는 현장의 교회와 목회사역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교회에 모인 회중에는 선택받은 사람도 있고, 버려진 사람도 있고, 둘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어서 알 수가 없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지 않겠는가? 어차피 이미 다 결정되어 있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신자는 어떻게든 자신이 구원받은 사람임을 확인할 필요가 있고, 칼뱅주의는 집회나 초자연적 방법으로 확인할 수 없는 즉, 하나님으로부터 전적인 고독 가운데 있는 만큼, 자신의 삶에서 그것을 확인하는 길 뿐이다. 그것이 바로 선행과 금욕적 생활, 즉 성화의 길이다. 자신이 엄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자신이 구원받은 자의 표지가 된다.
칼뱅주의의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카톨릭 수도 생활의 규칙을 적용하는 것이다. 칼뱅주의와 카톨릭적 생활 양식은 놀랄만큼 일치를 보인다. 수도원의 수도승적 생활양식은 체계적으로 합리화된 생활양식, 즉 자연 상태를 극복하고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며, 칼뱅주의는 이런 수도승적 삶, 절제, 자기통제, 금욕주의를 통해 삶 전체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다.
경건주의는 또 다르다. 경건주의는 루터파의 전통에서 이어지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보헤미아의 헤른후트 형제단을 이끈 친첸도르프 백작이다. 경건주의는 교회에 대한 깊은 불신으로 세상과 떨어진 소그룹운동, 감정적 측면을 고양하여 현세에서 구원, 즉 신과의 합일을 누리려고 한다. 경건주의는 참회투쟁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을 통해 신의 은총을 얻는다. 종교적 감정의 고양과 어린아이 같은 천진스러움, 제비뽑기 같은 반합리주의 성향을 보인다. 이들의 금욕주의는 합리적 자본주의보다는 소극적이고 공동체적 삶으로 나타난다.
감리교, 대륙경건주의의 영미판으로 구원의 확실성을 위해 생활양식을 조직적으로 체계화한다. 성화를 통해 죄 없음이라는 완전성이르며, 경건의 열매와 품행을 거듭남의 표지로 삼았다. 거듭남으로 은총의 완전성을 느끼는 것으로 회심이라는 행위가 조직적으로 유발되었다. 감정적 흥분은 열광의 성격을 띄었고, 대각성운동으로 나타났다. 완전한 삶은 금욕주의로 드러난다.
재세례파는 침례교, 메노파, 퀘이커교가 있는데, 초기 메노파의 개인적 계시, 퀘이커교도가 말하는 내면의 빛, 성령을 대망하고, 성령에 헌신하며, 성령이 베푸는 거듭남은 죄를 극복한 상태로 이끌린다. 이는 공직이 아닌 개인생활에서 세속적 금욕주의로 나타난다.
베버의 말에 따르면, 모든 교파는 종교적 은총 상태를 인간을 타락성과 세속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일종의 신분으로 보았다. 이 신분은 자연적 인간의 생활양식과 다른 품행으로 확증되며, 이로부터 개인의 삶은 합리적이고, 조직적이며 금욕주의적 삶의 방식의 동인을 얻는다.
이렇게 길게 베버의 논의를 요약한 것은 기묘함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구원의 확실성이 신자에게 중요함을 인정하자. 신학이 어떻든 신앙고백이 어떻든 보통 사람에게는 구원이 없으면 신앙생활할 이유가 없다. 이 구원을 믿음으로 얻는다고 할 때, 믿음의 형태, 고백의 형태에 대해서, 말로 하는 고백의 한계는 그냥 건너 뛰자. 구원의 획득은 믿음의 문제 이므로.
그렇다면 구원의 확실성, 즉 구원의 확신을 우리는 어떻게 얻는가? 현대의 우리(한국 장로교)는 금욕주의와 삶의 충실성 혹은 완전성에서 얻고 있지 않다. 우리는 종교적 경험과 체험 방식에서 얻고 있다. 칼뱅주의의 논리적 귀결과 하나님의 섭리는 실제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도움이 안된다. 제자훈련과 각종 교육 프로그램 교회 직분 위계제, 그리고 고지론과 성공주의는 이런 확신을 얻으려는 대체적 움직임일지도 모른다. 거기에 경건주의에서 유래한 소그룹, 참회투쟁, 제비뽑기, 천진난만성, 감리교에서 유래한 거듭남, 감정적 회심 확인, 열광주의, 대각성 집회, 재세례파에서 유래한 내면의 빛, 각종 예언 의존, 성령에의 헌신. 이 모든 것이 한데 뒤섞여 있다.
그리고 이들이 17-19세기 서구 프로테스탄트 처럼 삶의 합리화, 조직화와 금욕주의로 나가가는 지는 다소 미지수다. 금전욕과 어느 정도 연결되는 것은 확실하다.
지금까지의 결론은 미지수, 묘함, 온갖 혼합, 그리고 모르겠다는 점. 나부터 구원의 확실성이 어디에 근거하는지 모르겠다. 구원은 확실한 것 같은데, 나는 그걸 도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2015.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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