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라 다케시, 『다키야마 코뮌 1974』.

하라 다케시原武史, 『다키야마 코뮌 1974: 민주적 집단 교육 공동체는 어떻게 개인을 억압하는 권력이 됐나 滝山コミューン1974』, 조승미 역, 이매진講談社, 2017(2007).

대안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면서 겪는 고민을 가끔 들었던 것이 책을 손에 잡은 동기였다. 귀족형 대안학교 말고, 혁신형? 대안학교라고 해야 하나. 교사들과 다른 학부모들과 소통도 어렵고, 때론 독선적이면서 굳어 있고, 의견을 나누기도 어렵다는 이야기들. 실은 교회도 마찬가지다. 특히 개혁을 추구하는 교회, 전통적인 교회에 반기를 들고 진보적이면서 혁신적이라고 여기저기 주로 인터넷을 통해서 널리 알려진 교회에 몸을 담았던 사람들이나 혹은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열에 아홉은 상처받은 이야기다. 그런 교회들일수록 이너서클이 견고하고, 자신들 만의 방식을 고수하며, 새로 찾아간 사람들에게 곁을 주지 않는다는 이야기. 하도 들어서 이젠 왠만한 사람에게는 권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읽어본 책은 뜻밖이었다.

위에서 인용한 사진은 당시의 학생과학잡지에 실린 「다키야마 단지 개념도」 인데. 당시 도쿄 외곽에 속속 건설되던 주택단지, 한국식으로 말하면 아파트 단지의 학교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해당 단지가 주변과는 섬처럼 고립되어 있고, 단지 내부는 매우 높은 정도로 균질화된 상태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1972년 전공투가 분쇄되고, 연합적군이 큰 충격을 준 후, 정치의 계절은 끝난 것처럼 보였지만, 새로 형성된 주택단지들에서 다른 움직임이 생겨나고 있었다. 일본 특유의 전업 주부를 중심으로 한 NGO활동이나 혁신지자체의 등장이다. 일본의 진보는 정권 획득을 사실상 포기한 채, 정권의 안정적 반대세력으로서의 지위에 안주하던 시절. 젊은 교사들과 부모들이 만들어낸 학교 혁신 운동, 장래의 민주적 주권자를 만들어내려는 교육이 가져온 참담한 실패를 하라 다케시는 애증의 눈으로 바라본다. 자신은 결코 적응할 수 없었지만, 그곳이 자신의 원점임을 밝히면서.

아이들에게 끼친 영향을 따져보면 이제부터 설명할 학급 집단 만들기가 훨씬 더 중요했다. 전국생활지도연구협의회, 곧 전생연은 1959년 일본교직원조합 교육연구회 제8차 오사카 모임에서 결성된 교육 연구 단체다. “일본교직원조합의 자주적인 교육 연구 모임에서 탄생한 교육 연구 단체라는 점이 다른 교육 연구 단체하고는 다른 특징이다. …… 전생연을 결성한 선생님들은 공교육에 관련한 위기의식을 공유했다. 헌법이나 교육기본법에 보장된 공교육의 기본 정신이 안팎의 반동 세력 때문에 위협받고 있다는 이런 논리는 대개 헌법을 옹호하는 자유주의자들이 하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전생연은 집단주의 교육을 강조했다. ‘아이들이 대중 사회에서 갖게 되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의식을 집단주의적 의식으로 변혁’하자는 대목을 읽으면 동서 냉전으로 전세계가 둘로 나뉘고 아직 사회주의가 자기만의 이상을 잃지 않던 시절의 모습이 집게 드리워진 사실을 알 수 있다. ‘개인’이나 ‘자유’는 ‘집단’ 앞에서 부정해야 하는 가치였다. 이런 집단주의 교육은 구소련의 교육학자 안톤 세묘노비치 마카렌코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마카렌코가 쓴 책은 구소련의 교육학을 연구한 교육학자 야가와 도쿠미쓰矢川徳光가 일본어로 옮겼다. 전생연의 중심인물인 오니시 주지大西忠治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일본의 집단주의 교육이 마카렌코를 베끼거나 직수입한 결과라고 보는 견해에 반대한다. 그렇지만 마카렌코가 쓴 책을 읽고 교육이 무엇인지 알았으며, 이론에서 출발하자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된 사실은 맞다.”(67-69)
이런 이야기부터 인용하면 이 책과 여기서 벌어진 사건에 대한 선입견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시작은 단지 학부모들의 PTA와 학교의 과외 활동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였다. 지역 유지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PTA 한국식으로는 학교운영위원회에 단지 주부들이 참여하게 된 것, 그리고 젊은 교사들이 학생 생활지도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일이었다. 문제는 그런 활동의 바탕에 집단주의 교육 이론이 깔려 있었다는 점이다. 1970년대 초반의 일이다. 지금과는 사뭇다르고.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럴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전생연은 『학급 집단 만들기 입문』을 1963년에 2판을 1971년에 낸다. 집단은 ‘물리적 힘으로 존재하는 실체’인데. 집단은 하나의 힘이 되지 못하면 ‘사회적 관계’를 깨거나 바꿀 수 없기에, 비민주적 힘에 대항하려면 집단 스스로 ‘민주적 힘’을 고양하는 방법 뿐이고, 집단은 ‘민주적 집단, 곧 ‘민주적 집중 체제’를 조직 원칙으로 삼고 단일한 목적을 향해 행동을 통일한 ‘자치 집단’이 돼야 하는데, 그러려면 목적을 깨달은 교사의 지도가 반드시 필요하며, 이때 집단을 민주적으로 만드는 주체는 ‘집단 자체’이자 ‘아이들’이다. 학급 집단 만들기는 ‘모이는 단계’에서는 학급 집단을 교사의 권위에 지배당하고, ‘전기 단계’에서는 ‘핵’이라 불리는 어린지 지도자가 성장해서 교사를 대신해 중심이 되며, ‘핵’이 중심이 돼 학급 안에서 여러 활동을 펼친 결과 학급 집단은 실질적인 민주적 자치 집단으로 커간다. 전생연이 주장한 학급 집단 만들기는 최종적으로 그 학급이 속한 초등학교 학생 전체, 그 초등학교가 자리한 지역 사회 주민 전체를 ‘민주적 집단’으로 변혁하는 수준까지 시야에 넣고 있다.(69-71) 하라 다케시는 자신이 경험한 히가시구루메시립 제7초등학교에서 1972년부터 1974년까지를 이런 과정의 실현으로 이야기한다.
문제는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전생연과 가타야마 선생이 추구한 현실적 방법론은 ‘조 만들기’와 ‘조 경쟁’이었다. 조장을 뽑고, 조장이 조원들을 선택하도록 한다. 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를 뽑는 것 같은. 반드시 탈락하는, 모두가 원하지 않는 아이들이 있게 마련이다.(74-75) 거기에서 조 경쟁을 시킨다. 특히 항상 점검조, 다른 아이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벌점을 부과하는 역할을 하는 아무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 조가 있다. 게다가 아이들의 활동은 점검조를 포함하여 조의 숫자보다 항상 하나가 적다. 다시 말해 아무 것도 맡지 않는 조가 존재한다. 꼴찌조 또는 쓰레기조라고 불리는. 아이들은 쓰레기조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나는 이런 방식을 소비에트 집단주의만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소비에트 집단주의와 일본식이 결합한 모양새다. ‘조 만들기’와 ‘조 경쟁’을 현실로 구체화하는 방식에서 일본식인들의 활동방식이 결합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어디서든 그럴 수밖에 없다. 다만 이런 이야기들 속에서 나 자신의 초등학교 생활을 어렴풋하게 기억에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1979년에서 1981년까지. 나보다 고작 7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그때 서울의 변두리 초등학교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가난한 아이들로 넘쳐났고. 하긴 서울의 동남쪽과 서북쪽은 또 크게 달랐지만. 한 반의 아이들은 세로 줄을 따라 분단으로 불렸고, 분단마다 분단장이 있었다. 반장은 형식상 투표로 뽑았지만, 사실상 교사의 지명과 부모의 활동력이었지만. 반장 선거에 지명되었다가 떨어진 나에게도 뭔가 부장을 맡겠느냐고 그러면서, 담임교사는 내게 뭔가 사와야 한다고 했었다. 내가 뭔가 하고 싶어하는 표정을 읽었던 건지. 아니면 아예 배제하기는 어려웠던 건지. 지금으로선 그때의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다. 그리고는 티자와 삼각자를 사오라고 배정되었는데. 그걸 가난한 나의 부모는 어렵게 사주었고, 몇 주 지나 재촉 후에 그걸 받은 담임교사는 심드렁해했던 걸 어렴풋이 기억한다. 나는 또 왜 그따위 요구를 받아들였던 걸까. 국민학교 시절 교사들이란 정말 싫었다. 중학교 때인가 담임교사가 가정방문을 하겠다고 해서 몇 달간 도망다닌 적이 있다. 하도 돈을 밝힌다고 해서. 하여튼. 조장을 뽑고, 조장이 조원들을 골라 활동을 하며 꼴찌를 낙인찍는 집단주의와 교사가 편의에 의해 키나 다른 요소를 기준으로 아이들을 분단으로 배정한 후, 분단장을 뽑고는 분단별로 청소를 하거나 반공포스터나 표어를 걷고 기생충 검사를 위한 채변봉투를 모으거나 가끔 도난품이 발생하면 연대책임을 지기도 하고 뭐 그런 저런 활동을 하던 나의 국민학교 시절과 어느 집단주의가 더 폭압적이었던 건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다만 옛날이나 지금이나 조별과제는 아주 싫어한다. 하는 것도 싫고, 시키고 싶지도 않고.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지금 우리가 합창하고 있는 이 노래는 내가 좋아하는 교가가 지니지 못한 어떤 힘을 넘치도록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체육관에는 20개의 깃발이 펄럭였고, 나는 끝없는 소외감에 휩싸였다. 높은 파도 같은 울림에 저항하려는 내가 무너져서 200여 명의 집단에 쏙 빨려든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고 동시에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도 집단하고 하나가 된 감각, 상쾌한 느낌을 맛봤다. 우리 2반 아이들은 물론 여태까지 갈등한 가타야마 선생님, 고바야시, 마쓰오카하고도 하나가 된 느낌이 들었다. ‘자, 가자 우리 친구들아 저 언덕을 향해’라는 구절을 네 번이나 되풀이해 부르는 사이 정말로 우리가 저 언덕을 향해 함께 걷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체육관 전체의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244)
나는 하라 다케시의 초등학생으로서의 감각을 정말 높이 사는데. 문든 사상을 다루는 사람은 태어난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그냥 그 상황을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자의식이 들었다. 노래가 가진 힘이야 이미 수많은 환경과 상황에서 겪어온 바인지라 새삼스럽진 않지만. 그럼에도 눈에 확띈 부분은 ‘도깨비 팬티’라는 노래가 전생연 기관지 《생활 지도》에서 장려한 집단 놀이였다는 점이다. 가사에 맞춘 율동도 정해져 있던. 지금 한국에서 돌아다니는 율동과도 비슷한.(200-201) 한국과 일본의 아동 교육과 문화가 얼마나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 가지게 된 충격이랄까. 아이들이 지루해하고 활기가 없을 때, 교사의 주도로 모두가 일어나서 불렀다고 하는데. 게다가 원작은 이탈리아에서 등산용 철도가 생길 때 기념 삼아 나온 노래 〈푸니쿨리 푸니쿨라〉라는데. 세상은 오래 전부터 참으로 글로벌했다.

가타야마 선생님이 지도한 수학여행 운영 방식을 미우라 선생님이 불편해한 이유는 전쟁 때 겪은 체험 때문이었다. 1927년에 태어난 미우라 선생님은 내가 수학여행에 간 나이하고 똑같은 11살 무렵에 야마구치 현 구마노케 군 가모세기 마을에서 국가 총동원 체제에 따라 동원됐다. 세토나이 해를 접하고 있는 이 마을에서도 말단 행정 기구인 정내회町内会나 부락회部落会가 만들어지고, 하부 조직으로 10~20세대를 단위로 하는 ‘이웃조隣組’가 꾸려졌다. 이웃조는 결코 주민들의 자발적인 창의성에 맡겨져 운영되지 안았다. 국가 당국에서 모임 개최 날짜와 시간, 장소, 출석 범위, 사회, 진행 순서까지 꼼꼼히 지도하는 획일적인 모임이었다. 또한 집단 안에서도 서로 감시했는데, 집단에 안 맞는 사람은 생활필수품을 배급할 때 배급표에 도장을 안 찍어주는 식으로 제재를 당했다. 전후 베이비붐 세대인 가타야마 선생님학고 다르게 미우라 선생님은 집단주의가 무섭다는 사실을 몸소 겪어 잘 알고 있었다. …… 미우라 선생님 세대가 전시 체제 때 한 이런 체험을 가타야마 선생님 세대에게 올바르게 전달하는 데 성공했으면 다키야마 코뮌은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우라 선생님은 수학여행 둘째 날 밤에야 가타야마 선생님에게 전쟁 시기의 집단주의 체험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그것도 회식 때 술을 마시면서 말이다. 평론가 다케우치 요시미는 이전 세대의 전쟁 체험은 ‘무시’나 ‘거부’를 당한다고 지적한 적이 있는데, 전쟁 체험을 무시하는 젊은이들이 제7초등학교 교사들은 물론 사회 전체로 봐도 다수였다. 1974년라는 사건의 시대성을 감안해야 할 듯하다.(263-264)
하라 다케시에게 의지가 되어주고, 집단주의적 활동이 아닌 자전거를 타고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면서 단지 바깥의 세계를 또 하나 알려 준 미우라 선생은 1927년생. 가타야마 선생은 1972년에 22세였으므로, 49년생이 아니면 50년생이었을 것. 전후 세대, 전쟁의 더러움이 묻지 않은 세대가 왜 하필이면 전시기의 군국주의적 집단주의를 민주주의의 실천방식으로 택한 것인지. 실은 그점이 가장 무섭다. 미야타 세쓰코는 1936년생, 1937년생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또래는 10살 무렵에 어른들의 표변을 보았다. 바로 며칠 전까지 천황 폐하 만세와 귀축 미영 격멸, 일억 옥쇄를 외치던 사람들이 며칠이 되지 않아, 미군 진주를 환영하면서 과거의 모든 것을 버리던 모습을 본 것이 자신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보다 나이가 많으면 더 군국주의에 향수를 가진다고. 그때 18살로 전쟁에 동원될 뻔 했던 미우라 선생도 위험을 알았던 집단주의를 전후 세대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무시’나 ‘거부’를 당한다고. 무슨 말한 하면 꼰대라고 ‘무시’나 ‘거부’하는 요즘이 자꾸 겹쳐진다. 어느 시대나 지나간 시대를 무시하고 거부했지만, 그 결과로 위험이나 파국을 초래하는 것은. 산업화는 되었으니 민주화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생산을 가능하게 하면서도 민주적이어야 하고 사람들이 죽지 않아야 하는 동시에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야 한다. 민주화는 되었으니 이제 젠더나 인종(미국)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젠더나 인종 문제를 민주주의 시스템 안에서 풀어내야 한다. 시간이 걸리고 답답하더라도,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가면서.

그러는 사이 머릿속이 맑아졌다. ‘이건 캔들 파이어가 아니야. 사실상 수학여행을 지휘한 지도자 가타야마 선생님 한 사람의 독무대야. 민주주의 집단이라면 한 사람 한 사람이 촛불을 들고서 평등해야 하는데. 충성도에 따라 서열을 두는 짓은 모순이야.’ 아무런 충성도 하지 않은 내가 그저 조장이라는 이유로 넷째 순서로 지목돼 칭찬받는 일이 이해가 안 됐다. 충성도를 따져 지목을 받는다면 나는 마지막 순서여야 했다. 수학여행 전에 연 총회에서 〈개구쟁이 행진〉을 합창할 때하고 다르게 캔들 파이어를 할 때는 좁은 홀에 200여 명이 그냥 있었다. 기분 나쁠 정도로 침묵하면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런데도 훨씬 더 강한 일체감이 연출됐다. 그렇지만 나는 합창을 할 때처럼 마음을 빼앗기지는 않았다.(269)
촛불의식은 그러고 보면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치면서 늘 하던 일이었다. 나는 특히 교회에서 그런 경험이 많았고. 하라 다케시가 인용하는 대로, 나치의 행진, 군중의 동작, 불꽂, 조명 효과, 연설을 언급한 조지 모스(269)를 들지 않는다고 해도, 아주 익숙하다. 촛불집회를 정권을 바꾼 경험이 아직도 생생하니까. 집회 현장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동시에 이질감을 느끼는 것은 사상을 공부하는 이의 생리인 모양이다. 하라 다케시의 지적처럼 그것은 지도자의 독무대였다. 가타야마 선생에게는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을지라도. 그는 지금도 그것이 자기만의 무대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소회의실에 들어가자 대표어린이위원회 임원과 각종 위원회의 위원장, 4학년 이상인 학급위원들이 미리 짜맞추기라도 한 듯 모두 앉아 있었다. 가타야마 선생님이나 나카무라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먼저 아사쿠라가 내가 저지른 잘못들을 줄줄이 소리 내어 읽었다. “9월 대표어린이위원회에서 가을 대운동회 기획안을 비판하면서 민주적인 집단에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다음 문장도 또랑또랑하게 말했다. “따라서 이 자리에서 정확히 자아비판을 해야 한다.” …… 놀랍게도 전생연은 자아비판을 적극적으로 인정했다. …… 오니시는 집단 활동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학생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밝힌다. 그리고는 성적에만 관심을 두거나 소풍 때 결석한 점을 들어 반에서 가장 문제 있는 학생이라며 비판을 퍼붓는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자아비판이 학교 현장에서 얼마나 실행됐는지는 의심스럽다. …… 자아비판을 실천하려 애쓴 사람은 전생연 회원인 교사들 뿐이었다. 제7초등학교에서 나를 둘러싸고 벌어진 사건은 교사가 아니라 어린이들이 스스로 자아비판을 실천한 드문 사례에 속한다. 어린이가 어린이에게 자아비판을 강요한 점에서 전공투식 자아비판보다는 연합적군파의 ‘총괄’하고 비슷하다. 나는 자아비판을 하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대표어린이위원회와 위원들이 번갈아 자아비판을 강요하자 나는 소회의실 문을 열고 도망쳤다. 아사쿠라를 비롯해 다른 몇 명이 뒤를 쫓아왔다. …… 나는 이 사건을 미우라 담임 선생님에게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학교에서 4학년 학급위원들이 내게 돌을 던질 때는 무척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학교 전체를 적으로 돌려버린 느낌이었다.(295)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나 자아비판 요구. 북한이 아니다. 위에서부터 내려온 시스템이 강요한 일이 아니란 말이다. 이걸 단순히 소비에트 식 집단주의라고만 생각하는 건 오해라고 본다. 소비에트 집단주의와 여기서 겹쳐진 것은 일본의 무라하치부村八分다. 에도시대에 존재하던 촌락 공동체의 규율을 어긴 사람에게하는 제재행위가 현대판으로 등장한 것이다. 시체가 썩어서 전염병이 돌 수 있는 장례 절차와 불이 옮겨붙을 수 있는 진화활동 외에는 마을에서 일체의 국외자로 살아가야하는. 소비에트 집단주의와 일본이 뒤섞여서 벌어진 일들이었다.

역사학자 히가시시마 마코토는 지적한다. “중세 일본에 생긴 공계公界 같은 자치 조직이 기성 공권력에 맞서는 형태로 되살아 났지만, 결국 상부의 권력하고 똑같은 공공성을 만들어냈을 뿐이다.” 다키야마 코뮌도 어쩌면 중세의 공계 같은 숙명을 겪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다키야마 코뮌은 다키야마라는 특정한 지역에 제한된 현상이기는 해도, 그동안 나타난 공공성하고는 다른 차원에서 공공성(공공권公共圏)을 역사의 수면 위로 부각시키려 했다. 따라서 귀중한 역사의 현장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324)
하라 다케시는 다키야마 코뮌은 그 자체로 붕괴하지만, 이미 그곳을 떠난 상태였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문에 주말마다 중학교 입시학원을 다니면서, 그곳을 오가는 과정에서 숨통을 열게 된다. 갈아타는 역의 423번 열차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학원에서 친구들을 만들면서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 다른 세계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유로울 수 있었다. 하라 다케시는 게이오대학에서 운영하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지만, 대학은 또 와세다로 간다. 속칭 에스컬레이터식 학교에서 스스로 갈아탔달까.
위험은 항상 있다. 어떤 토대도 안전하지 않다. 그렇다고 그런 시도가 모두 무의미한 것도 아니고. 그럼에도 위험을 인지하는 예민한 감각이 꼭 필요하다. 그리고 이 네크워크로 복잡하게 연결된 세상에서 위험은 또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 건지.

2020. 11. 20.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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