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정, 『만주 모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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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와 일본을 연결하던 정기 항공편을 소개하는 포스터. 우편, 화물, 여객을 운송한다. 경유지를 보면, 도쿄, 오사카, 후쿠오카, 울산, 경성, 평양, 신의주, 다롄, 펑텐, 신징, 하얼빈으로 이어진다. 1930년대의 일이다. ⓒ워싱턴 스미소니언 박물관 소장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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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만주국의 모태인 만철(남만주철도)의 노선망이다. 설명이 필요없을 듯. 위키피디아.

한석정, 『만주 모던: 60년대 한국 개발 체제의 기원』, 문학과 지성사, 2016.

유달리 여러가지가 몰아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지난 여름. 우연히 이 책의 저작비평회 광고 포스터를 보게 되었다. 나오자 마자 구입했지만, 한동안 상자 속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책인지라, 무엇보다, 저자 한석정에게 흥미를 느껴서 모 연구소를 땀흘리며 찾아갔다. 그리고 큰 충격을 받았다. 토론자들로부터. 한 마디로 요약하면, 너 식민지 근대화론자 내지 뉴라이트가 아니냐는 식의 정체성을 에둘러 확인하는 질문에서부터. 항일운동의 성지인 동북지방(만주)을 파헤치면 어떻게 하느냐는 식의 힐난까지. 더구나 파시즘은 근대가 아니라는 주장까지 듣고 보니, 그 자리를 어서 뜨고 싶었다. 고착된 사고방식을 강담키 어려웠다. 사회자 혼자 균형을 잡기에는 무리같았다. 헌데 한석정은 놀라운 맷집으로 어이없는 질문들을 파헤쳐 갔다. 가볍게 튕겨내기도 하고, 정면으로 반박하기도 하면서, 통념들을 깨뜨렸다. 나중에 지나가는 이야기 처럼 말했지만, 그건 지난 25년 동안 꾸준히 복싱 도장에 다닌 힘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인지, 이 책에도 스포츠에 대한 이야기가 꽤 되고, 재미있다. 토론자들은 하나같이 “문서를 숭배하는 수준의 일부 역사학자들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70)라는 구절을 붙들고 매달렸다. 문서의 제한과 문서의 권력을 비판하는 어구였지만, 문서를 읽지 않았다는 말로 들렸나 보다. 오죽하면 에둘러서 박사학위 논문을 쓸때, 1년 반정도 마이크로필름으로 된 『만주국정부공보』를 보다가 눈이 상해서, 전부 보지 못했다고 말했을까. 책을 꼼꼼히 읽기는 한 걸까.

한석정에게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은 프래신짓트 두아라Prasenjit Duara의 『주권과 순수성: 만주국과 동아시아 근대』의 번역에서부터 였다. 두아라의 번역자 소개가 돋보였다. 『만주국 건국의 재해석: 괴뢰국의 국가효과 1932-1935』도 눈길을 끌었다. 게다가 다카시 후지타니Tak Fujitani 『화려한 군주: 근대 일본의 권력과 국가의례』의 번역자이기도 했다. 식민지 시대와 근대에 대한 여러 연구를 섭렵하면서, 한국 근대 국가에 영향을 미친 세 가지 요소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의 식민 국가 조선총독부, 만주국에서 길러진 군인과 기술관료, 미군정과 군사원조로 자라난 한국군. 이 세 가지가 중첩되어서 한국 근대 국가가 형성되었으리라 생각했고, 개인적으로 꼭 파헤쳐보고 싶은 연구 주제 중 하나인, 한국 근대 국가 형성에 미친 만주국의 영향이라는 주제였다. 한석정을 통한 하나의 해석을 여기서 발견한다.

“한국의 재건 체제 형성 재료가 모두 만주국에서 온 것도 아니다. 해방 후 한국의 국가 형성은 황무지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주요한 세 가지 자원이 있었다. 첫째는 메이지 국가 직속의 식민 국가, 조선총독부의 유산이다. …… 둘째는 행방 직후 미군정의 도움이다……. 셋째 자원은 만주국이다. 거칠게 말하면 미국이 1960년대 한국 발전 국가의 틀과 환경을 규정했고, 만주국식 에토스가 내부 동력이 됐다.”(168-172)

자원이란 표현은 좀 모호하고 폭이 넓은 것 같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더 주목해야 하는 것은 ‘행위자 변수’라고 생각한다. 누가 이 발전 국가의 형성을 이끌어가는가? 누구는 왜 실패하는가? 이들이 대중을 이끌어갈때, 즉 동원할 때, 따라가는 대중은 어떤 기억을 몸에 새기고 있는가. 자원은 다시 말하면 모델이기도 하다. 어떤 모델이 있고, 이를 변용할 정도의 역량이 있는가. 물론 이 책은 줄곧 이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

“본 연구는 한국인이 지닌 신속과 근면의 뿌리를 식민 경험에서 찾고자 한다. 특히, 1960년대 한국의 ‘재건 체제’ 혹은 불도저식 증산, 안보 체제, 나아가 그 원류인 만주국(1932~45) 체제에서 그 뿌리를 찾을 것이다.”(17) 신속과 근면. 이 두 가지가 줄곧 이야기하는 만주국식 에토스다. 이것이 한석정이 ‘행위자 변수’를 설명하는 방법이다. 조건이 비슷하다해도 사람이 달랐다는 것. 만주국에서 젊은 날을 지내고 거기서 방법론을 배워온 이들이 한국의 발전 국가를 이끌었다는 주장이다. 그렇다고 값싼 박정희와 산업화 찬양론으로 흐르지 않는다. 어차피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한 법이다. 한석정은 그저 박정희 체제는 도대체 왜 그렇게 되었나에 대해, 한 가지 측면에서 담담하게 말하고 있을 따름.

이 책을 읽다보면, 노력이 많이 들어간 책임을 알 수 있다. 탈식민지 관점으로 역사서술을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문제제기가 되는 문헌들이 거의 빠짐 없이 등장하는 것 같다. 최근에 한국 학자가 쓴 책 중에 이만큼 문헌에 충실한 책을 별로 보지 못했다. 그는 프래신짓트 두아라의 “‘동아시아 모던East Asian Modern’이라는 개념을 사용해 지구적으로 순환된 근대의 실행과 담론이 19세기 말 동아시아에서 “지역적으로 조율”됐다”는 주장, “즉 적절한 수입, 융합, 번안으로 서구의 문화 요소를 번역해 들여오는 것을 포함해 지적 교류, 담론, 실행 등이 동아시아에서 확산됐다”(21)는 주장을 기반 삼아 문제를 펴나간다. 중요한 것은 수입, 융합, 번안, 다시 말해 변용이다. 변용의 능력 유무가 성패를 가른다.

변용한 것은 물론 근대다. 근대에 대한 수많은 논쟁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다음과 같은 요소를 가진다. 국민국가, 산업화, 개인성, 민족주의적 통합, 인구학적 전환.(26) 계몽과 진보.(27) 정신과 주체의 자각.(27) 타자의 발견과 차이의 재생산.(29) 속도.(30). 자연의 신속하고 지속불가능한 파괴.(31) 김윤식, 샹탈 무페, 헤겔, 프래신짓트 두아라, 린 화이트 등의 주장을 직접 인용하지만, 이들 만이 아니다. 근대란 다중적이고, 복합적인 세계이자, 19세기말 비유럽 지역이 정복에 의해 강요받았든, 풍요와 힘과 번영에 대한 갈망이든. 근대는 결국 모두의 열망이 되고 말았다. 실상 근대 논쟁에서 무엇을 바라는지 모르는채 바란다는 점이 중요하다. 동시에 사람들의 열망은 점점 더 변해가며, 서로 상대의 모습을 보면서, 바뀌어나간다. 그래서 원래 의도했던 것을 그 누구도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근대는 근대라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을 형성해 나간다.

한석정에 따르면 그 중에서 특히 한국의 발전 국가에 영향을 미친 것을 하이 모던이라고 지적한다. “모던은 자연을 지배하고 사회를 동원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보다 집착적이고 강박적인 하이 모더니즘high modernism은 계몽사상에 연원을 두는, 대략 1830년에서 제1차 세계대전까지 활발했던 “북미·유럽의 과학기술적 발전에 대한 신념”이다. 이것은 분류, 일반화, 통계적 지식의 대상으로 물화物化된 자연과 사회에 대해 완벽한 사회질서를 지향하는 디자인이다. 하이 모더니즘은 “자연의 변형, 미래 지향, 희생의 정당화, 과학기술에 대한 숭배, 발전을 향한 지도자들의 역사적 사명” 등의 면모를 지닌다. 분석상의 문제가 다소 있으나 이상적인 사회를 향한 생산의 찬미, 자연의 단순화를 가하는 강박, 신념이 그 핵심이라 할 수 있다.”(41) 북미, 유럽의 하이 모던이 나치의 유토피아주의, 소련의 집단농장,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 사회공학, 제정 이란의 근대화, 공산화 이후 베트남과 캄보디아 등을 들고 있다.(41)

하이 모던을 지향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이 모던이 추진되었는가. 한석정은 호미 바바를 인용해 “식민 지배자는 자신과 “비슷하나 꼭 같지는 않은” 인간형을 생산”한다고 말한다. “이는 분류상의 (불분명한 타자의 생산으로 인한) 혼란과 식민 권력의 복합적 전략(규제, 기율이라는 양면성을 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유럽적 사고에 고취된 토착 지식인이 생산”된다.(55) 제국주의와 식민 지배하에서 수많은 식민지 지식인이 생겨난다. 이들은 유럽을 지향하고 도쿄를 지향하지만, 그들과 완전히 같을 수 없다. 같을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면서, 토착 지식인이 택할 수 있는 길이 몇 가지 있다. 스스로를 지우고, 지배자와 동일성을 추구하면서 자기 분열에 빠지거나, 지배자와의 사이에서 차이의 구조를 인정하면서, 협조자의 길을 택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기회를 찾아나가거나.

“피식민자는 이러한 차용과 토착화를 기반으로 후일 식민자나 선두주자를 추월할 수 있다. 그것은 주로 완전한 복제형 피식민자(예컨대 지주 계급 등 토착 엘리트 출신으로 제국의 중심부에서 유학한 1류 피식민자)가 아닌 서자형 피식민자(평민 출신으로 상향 이동을 기도한 2류 피식민자)에 의해 이루어진다.”(62) 한석정에 따르면 이런 인물들 박정희, 정일권, 이선근, 신기석, 김성태 등 만주 출신이었던 이런 사람들이 재건 체제를 이끌었다.(62)

60년대 한국의 개발계획에 특히 만주국의 산업 개발 5개년 계획 같은 테크노 파시즘, 기술 제국주의가 크게 영향을 미친다.(68) 1930년대의 만주는 조선인에게 기회의 땅이었고, 만주의 각급 기관에서 공부하고, 하급 관료, 군인, 교사, 말단 관리직에서 의사까지, 조선과 달리 다야한 취업과 사회 경험을 쌓고 근대성에 노출되었던 재만 조선인들이 해방 후 각계에서 도약했다는 것이다.(68~69)

한석정의 주장을 간략히 요약하면, 이렇게 된다. 한국의 근대 국민국가이자 발전국가인 1960년대는 식민 제국 일본의 모방이자 변용인데, 이 과정을 식민지에서 형성된 식민지 지식인들이 그 중에서도 서자형 피식민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 원형적 모델은 유럽과 미국, 일본이지만, 구체적인 실행은 만주국의 모방이고, 만주국의 제도는 물론 만주국식의 에토스가 모방 변용되었다. 크게 보아 나는 이 주장에 이의가 없다.

부산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온 학자답게, 부산의 중요성이 잘 드러난다. 만주국 건국 이래 부산이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식민지에 투자하는 데 인색했던 서구 제국주의에 비해 일본 식민주의는 주변부에 막대한 투자를 하는 특성이 있다”(83)고 지적한다. 이 시기 부산은 만주와 일본을 연결하는 창구였다. 일본의 철도 투자는 비약적이어서, 1936년 탄환 열차 아카츠키曉가 부산-경성을 8시간 만에 달리기에 이른다.(89) 바야흐로 속도의 시대였다. 조선의 일본 거류민들은 제국의 브로커였다.(89) 동시에 전쟁 중에도 상대적 평온함을 누리며, 식민 행정의 충실한 동반자로 살아간다. 이 점은 아프리카의 유럽 거류민과 중요한 차이로 지적된다.(95) 한석정은 종종 일본 제국주의와 유럽 제국주의의 차이를 언급하면서, 충실히 설명하지 않는다. 구조적 차이를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점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 일본은 식민지에 투자했을까? 식민지에 대한 투자가 필요하고, 또 의미가 있었던 이유는 식민지 이전 상태와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예컨대, 투자하는 편이 더 큰 이익을 가져올 만한 사회경제적 기반을 조선과 만주는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아니면 식민지로부터 본국이 너무가 가까웠기 때문인가. 아프리카의 유럽 거류민은 식민행정과 갈등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 지배국가가 식민지를 얼마나 통제하고 있는지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더욱이 거류민들이 협조적이었다기 보다, 조선총독부의 행정은 거류민들에게 휘둘렸다는 연구도 적지 않다.

1945년경 물경 200만에 이른 것으로 알려진 조선의 만주이민은 1930년대 중반에 시작되며, 그 가장 큰 이유는 자연재해였다. 경상도를 중심으로 연속적인 가뭄과 홍수가 이를 이끌었다.(100) 그러나 동시에 한석정은 또 하나의 통념을 깨뜨리는데, 만주국에서 조선인이 2등 공민이었다는 통설은 사실이 아니다. 이는 일부 조선인의 도취나, 일본인의 조선인 배려에 따른 환상에 불과했으며, 실제로 만주국의 조선인들은 ‘미들맨’과는 거리가 먼 인구·산업 분포상 소수민에 불과했다. 조선인은 중국인과 같은 곤경을 겪었다.(111) 오히려 중요한 것은 1940년부터 조선인 공무·자유업 종사자가 증가하는데, 이를 한석정은 일본인의 배려, 징집된 일본인 관료의 공백를 메꾼 것이라고 한다.(112) 일부 조선인의 호가호위와 2등 공민론은 만주국 패망 이후 중국인들의 조선인들에 대한 피의 보복을 부르게 된다.(118) 이 시기의 조선인 화이트 칼라는 관공리를 비롯, 언론인, 학계, 의사, 교사, 군인 등 다양했다. 결국 이들이 훗날 한국의 지도적 인물들로 부상한다. 이 시기의 만주붐, 만주광 들이 등장하며, 특히 “노동을 통한 갱생”(146)은 만주 모던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피해자이자 가해자였던 조선인들”(153). 식민주의가 초래한 근대성에 노출되고 현장 경영을 체험한 일부가 탈식민 시대의 국가 형성에 합류했다.(155) 그런데 만주 출신이라 해도 관동군 장교나 일본 육사 출신, 도쿄 대학이나 교토 대학 출신은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155)

일본의 만주붐에 조선인들도 뛰어들었다. 연이은 수재가 사람들을 살 수 없게 만들었다. 조선인들은 실상 소수민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식인과 인텔리들에게 점차 기회가 왔다. 전쟁으로 일본인들이 비운 공백울 조선인들이 메웠다. 엘리트들은 적응력이 약했다. 오히려 잡초 근성이 있는 강한 상승욕구를 지닌 평민•서자들이 기회를 움켜쥐었다.

만주국이 구체적으로 남긴 것들은 무엇인가. 먼저, 남성성이다.(177) 식민지는 남성성을 거세당한다. 식민지 출신 여성과 지배국 남성의 연애를 모티브로 한 문학과 영화가 보여주는 것이 이 점이다. 한국 사회는 해방 후 무섭게 남성화되었고, 전쟁으로 60만 이상으로 팽창한 군부는 무질서한 사회를 기강의 사회로 변모시켰다.(181-182) 폭력을 독점하며, 내외의 적으로부터 가족을 지키고 먹여살리며, 보호와 생산에 진력하는 가부장 국가가 된다.(183) 이 과정에서 한국군은 근대성과 남성화를 위한 거대한 학교였다.(184) 이 한국군에서도 일본 정규 육사 출신 보다, 일본군 고문 아래 교육과 훈련 및 불리한 대우를 감수했던 만주군 출신이 미군 고문관 제도 하에서 적응력이 훨씬 뛰어났다는 이야기다.(188) 깡패를 소탕하여, 기강을 확립하고, 폭력행위자 등을 국토건설장에 투입하는 사실상의 강제 노동도 만주국에서 기원한다.(198-199) 경제발전의 계기가 된 한일국교정상화도 만주 인맥이 뒤에서 연결했고,(215) 군정지도자들의 ‘재건’이라는 모토는 만주국의 ‘건국’ 에토스였다. 건국체조와 재건체조, 경부선 고속열차인 재건호, 윤락녀 갱생기관인 재건학교에서, 폐품수집의 재건대까지.(219, 223)

조선시대 후기부터 줄곧 억압 당하다. 마침내 식민 지배를 통해 거세된 남성성이 해방 공간에서 폭발적으로 되살아나고, 폭력의 독점을 통한 가부장적 국가를 형성하게 된다. 잃어버렸던 남성성의 회복은 남성성을 단련해 온 자들이, 남성성을 동경하면서, 폭력에 참여했던 자들이 주도하게 된다. 말하자면 그들은 정당한 폭력을 행사했다기 보다, 폭력적이었기에 권력을 획득하고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만주국과 발전 국가 한국은 물론 20세기에 세계를 관통하는 사상이 된 파시즘은 팍스턴Robert Paxton에 따르면 유럽의 “세기말 문화적 위기에서 자신들이 피해자라는 인식을 지닌 채 근대 사상, 즉 자유주의, 보수주의, 공산주의로 입은 상처를 치유하려는 사상이다. 더불어 새로운 인간형과 사회의 창조를 갈구하고, 아래로부터의 혁명운동을 바탕으로 하는 대중 정치 현상”이며, 페인Stanley Payne에 의하면 그 조건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조직화된 내셔널리즘, 국제정치상의 위기와 모멸감, 패전에서 비롯된 경제 위기, 점증하는 정치적 분열, 정당정치에 대한 불신, 혹은 (의회가 대변할 수 없는) 노동자·농민·프티브루주아 세력, 노동 계급으로부터의 위협, 그리고 최소한의 산업화, 의회 민주주의, 중산층의 존재”등이다.(229) 파시즘은 2차 대전을 전후하여 수많은 나라로 확산된다. 프란츠 보르케나우Franz Borkenau는 이탈리아 파시즘에 ‘개발독재developmental dictatorship’이라는(233) 너무나도 익숙한 용어를 사용한다. 파시즘은 근대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으며, 일본 근대를 통해, 만주국과 1960년대 한국으로 확산된다. “권위주의는 근대화의 추동력”이었다.(235) 만주국과 장제스의 유교적 파시즘이 한국으로 들어온다.(237) 재건국민운동의 교육 과정과 운영 방식은 만주국의 그것과 꼭 닮았으며, 파시즘 교육 과정이었다.(238)

파지즘의 남성성은 또 하나의 보조적 동기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피해자성이다. 전후 일본이 피해자를 자처하고, 베트남전쟁 패전과 911테러 이후 미국이 피해자임을 날마다 강조하는 이유이다. 피해자이기에 폭력이 정당화된다. 식민지 시대의 피해자이며, 기습남침에 의한 한국전쟁의 희생자들인 남한은 그렇게 보편적 피해자성을 획득하고, 이것이 내셔날리즘을 통해 전개되는 파시즘을 강화한다.

1960년대를 관통하는 개발욕구는 지식인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어서, 장준하, 함석헌을 비롯 김성식을 제외한 『사상계』 거의 전부가 5.16에 찬성한다.(250) 『사상계』는 스스로 근대-성장-발전의 논리를 역설한 터라 ‘개발 민족주의’를 저지하기 어려웠다.(253) 개발은 계획경제로 실현되었고, 5개년 계획의 기원은 만주국이었다. 특히 산업 전사라는 군사적 에토스와의 결합이 그랬다.(256-257) 만주국과 한국의 차이도 있어서, 한국은 관민합작 열기가 높았고, 농업 부문이 상당히 포함되었다.(259) 식량 증산을 위한 노력,(260) 재건을 위한 피눈물이 강조되며, 저축운동이 전개되었다.(269) 여기에 중국과 소비에트의 노동영웅, 덴마크와 이스라엘의 개척정신이 결합된다.(272, 276) 만주, 덴마크, 이스라엘이 연결된 것이 건국대학교와 설립자 유석창이다.(277) 이런 주장은 한국식 민족주의로 등장하는 데, 만주 출신의 이데올로그 이선근이 큰 역할을 하며 건국 이념, 한민족의 주체의식 등을 가다듬는다.(283-284) 만주 출신 이선근, 신기석, 이인기 등이 ‘국민교육헌장’의 기초 심의하게 된다. 이런 ‘싸우면서 건설하자’라는 구호의 모델이 국방국가 만주국이었다.(287) 만주국식 시민대회, 웅변대회, 반공·멸공 대회가 열리기도 한다.(291)

발전 국가의 모델이었던 만주국에서 이념과 행동양식까지 거의 모두 차용하며, 이런 차용이 만주국 출신들에게서 이루어진다. 그림자의 깊이가 적지 않다. 읽으면서 끝없이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대목들이 많다. 동네에 생긴 새마을금고에 50원, 100원을 저금하고, 통장검사를 받던 일. 학교에서 하던 혼분식 검사. 무엇보다 어린 우리들을 겁주던 말, “망태 할아버지 또는 망태”는 실상 재건대원을 가리키던 말이었다. 유년의 기억은 질기고도 오래가는 법. 필시 1960년대를 이끌던 그들도 그랬을 것이다. 몸에 새겨진 것들은 단지 아련한 과거의 추억으로만 남지 않는다. 2002년 월드컵 거리응원과 탄핵 촛불시위는 두 가지의 두드러진 특징을 보여주는 데, 하나는 질서정연하게 줄을 맞추어 앉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지막까지 쓰레기를 치우는 것이다. 인정과 동의를 얻고자하는 강박 뒤로, 몸에 새겨진 기강이 슬프게 엿보인다.

만주국의 일사천리식 건설, 특히 우리에게도 익숙한 수풍댐과 펑만댐 건설에 연인원 2,500만명이 동원된 일.(299-300) 이를 아우르는 만주국의 ‘총합 개발’.(302) 롱샹 성당의 인상으로 가득한 르코르뷔지에의 하이 모더니즘과 신도시가 만주국과 한국에서 모두 꽃핀 일.(304-305) 무서운 속도로 이루어지는 건설, 매립, 자연 파괴.(306) 울산 콤비나트 역시 관계가 있다. 일제 시대 개발업자 이케다 사다오池田佐忠의 울산 임해 석유화학 공업단지 계획을 일부 참고했고, 과거에 공사가 벌어졌던 매암, 여천, 고사, 장생포 등지에서 개발이 시작된다.(310) 불량지구 정리사업,(314) 매립을 통한 농지 및 공업용지 확보,(315), 산림 개간(322)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철도의 한계를 타개하기 위한 수송 전쟁으로 나치즘 이미지가 물씬 풍기는 고속도로가 건설되기 시작한다.(328) 이 모든 과정에서 ‘공기단축’, 즉 속도는 시대정신이었다.(331) 동시에 공동체의 파괴와 무수한 저항을 낳는다.(336)

발전 국가는 몸을 일깨워 신체의 규율화를 실시한다.(341) 그 시작이 위생으로 해충박멸, 공중소독, 쓰레기통, 변소 수거구 개량, 하수구점검 등 ‘해충박멸시민운동’을 전개한다.(359) 결핵을 막기 위해 애쓰며, DDT를 살포한다. 성병관리에도 애쓴다. 세균에는 간첩의 이미지가 덧씌워졌다.(358-360) 실패하고만 쥐박멸운동도 있었다. 한국에서는 양곡을 좀먹는 쥐를 잡기 위해서 였고, 만주국에서는 해마다 반복되는 페스트를 방지하기 위해서였지만, 쥐꼬리를 모아오라는 방법은 같았다.(363) 일본의 체육진흥과 만주국의 체육진흥이 정치적이었던 것처럼(371) 1960년대 한국 정부의 엘리트 체육 진흥도 냉전과 남북대결의 일환이었다.(378) 민족주의적 전체주의적 성격의 전국체전에서는 카드섹션, 성화봉송, 매스게임 등 나치 독일과 동구권의 전체주의적 예술이 등장했다.(387)

무용과 정치의 만남은 만주는 물론 최승희와 남한에서는 그의 제자이자 동서인 김백봉을 통해 전개된다.(402) 건전가요와 국민가요의 광범위한 활용 역시,(404) 그 영향하에 있고, 남북한은 대중예술의 세계에서도 격하게 대립했다.(411) 이 시기에 영화 역시 재건을 위해 복무하는데, 그 모델도 만주국이다. 만영滿映의 이사장 아마카스 마사히코甘粕正彦가 시도한 기록영화, 국책영화, 스튜디오 체제가 고스란히 재현된다.(424-425) 이런 시기를 보여주는 기묘한 장르가 ‘만주 웨스턴’으로 불리는 독특한 오락영화다. 독립군 군자금, 학생, 방랑, 여성의 희생, 북만주의 삭풍, 남성간의 의미, 여자를 두고 떠나는 남성주의 등은 만주를 통해 남성성을 재현하려는 시도였다.(434)

읽으면 읽을 수록 흥미진진하다. 건설, 위생, 스포츠, 무용, 대중음악, 영화에 이르기까지 만주국, 중국, 소련, 일존, 한국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만주국과 1960년대 한국은 끊임없이 교차하며 변주한다. 데자뷔. 단순 반복과 미묘한 은유를 수단으로 두 세계는 마치 중첩되는 듯 보인다.

이런 한석정의 주장을 요약하면 어떤 의미에서 미셸 푸코가 말하는 통치성 혹은 통치가능성으로 연결된다. 일본 군부 소장 강경파들의 2.26사건을 흠모하며 흉내낸, 5.16이 결과적으로 성공하게 된 것은 이들이 어느 정도의 통치능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모델도, 어깨넘어로 본 경험도, 바다 건너 일본의 조언자들도 있었다. 그래서 거듭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전략의 한계로 인해 실패와 질곡 그리고 수많은 한계와 부정적 유산 마저 남겼다. 그럼에도 내년에 탄생 100년이 되는 이 사람은 이미 근대 발전 국가의 신으로 숭배받고 있다. 그 딸은 그 자리에 오르지 못할 것 같지만. 세속화돤 일신교에 여러 신이 있을 수 없는 법.

이만큼 이론과 역사적 사실 탐구가 서로 교차하며, 녹아있는 연구는 매우 드물고, 특히 한국 연구에서 국내 연구자의 경우 둘 중 하나에, 특히 사료와 그 해석에 치우치기 마련인데, 역사사회학자인 한석정의 이 작업은 놀라운 성과다. 나 스스로 이 분야 연구를 이제 막 맛보기 시작한 지라, 무어라 쉽사리 평하기가 어렵다. 그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분야인 것만 분명하다. 한국 근대 국가 형성에 관한 연구는 이제 걸음마를 띤 정도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조선총독부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 식민지 경찰에 대한 연구도 일본 연구 뿐이고. 미군정, 특히 군사원조 및 미국의 정책이 한국 국가 형성기에 미친 영향도 종합적이면서, 비교 역사적으로 역사 사회학적으로 연구되어야 하고. 그 바탕에 국내 정치세력 및 지형에 대한 연구를 통해, 정립되어야 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만주국의 종교, 만주 기독교에 대한 언급이 전무하다는 점이 꽤나 아쉽다. 기회의 땅 만주를 향해 달려간 것은 목사들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해방 후 한국 보수 신학계의 두 거물인 박형룡과 박윤선은 나란히 만주신학원 교수를 지냈다. 만주신학원은 만주국의 강제에 의해 이루어진 기독교 통합 교단(일본 조합교회, 장로교회, 감리교회 등)의 공식 신학교였고, 만주국에서 종교 역시 국가시책에 적극협력했다. 만주 기독교의 활동 상황이나, 국가에 대한 협력 및 주요 메시지를 파악하고, 한국 기독교와 비교해 보면, 지금까지 풀리지 않은 꽤많은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 것이다.

오래 공부하려면, 운동을 해야겠다.

2016. 9. 25.

* 괄호 안의 숫자는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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