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루이치 노리토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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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이치 노리토시 (古市憲寿 ),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絶望の国の幸福な若者たち)』, 민음사 (講談社), 2014 (2011).

작년 C일보에 이 책 소개와 함께, 일본의 사토리(득도) 세대 이야기와 우리나라의 달관(사토리) 세대라고 소개하는 잘나가는 젊은이들 이야기가 실렸다. 한 마디로 행복한 줄 알고, 고마워하면서 살라는 거다, 괜히 불만 갖지 말고. 막상 책을 읽고나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 기사의 내용은 책 내용과 메시지가 전혀 달랐다. 속았다는 느낌이 들 정도. 언급한 디테일이 틀렸다기 보다 방향이 전혀 달랐다. 책 전체에 사토리의 ‘사’자도 안나오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책은 사실 세대론을 전면적으로 거부한다. 오랫 동안 반복되어 온 청년론 또는 젋은이(若者)론은 젊은이를 ‘이질적인 타자’로 보거나, ‘편리한 협력자’로 보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즉, 불만을 가진 청년을 배제하든가, 아니면 전쟁 혹은 생산에 동원하고, 사용하는 담론체계다. 청년론 또는 젊은이론은 마치 특정 세대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호도해서, 사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지금은 청년만이 행복하지만, 불안한 상태, 국가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지만, 결국은 대부분의 사람이 이런 불안한 상태에 놓일 것이라고 아니, 이미 그렇다고 말한다. 한때, 일본이 자랑했던 ‘1억총중류’를 바꾸어 ‘1억총젋은이’라고 비꼬고 있다.(309) 다시 말하면, 중간 계급(중류, 중산층)의 총체적 몰락을 가리킨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문제라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좀 다른 것도 꽤나 느낄 수 있었다. 일본의 학문 혹은 일본의 지식세계의 변화의 진동이 느껴졌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일본은 아시아를 지배했다. 대만, 조선의 순으로 식민지가 되고, 만주는 위성국가가, 중국의 화북지방은 점령당했고, 동남아시아도 점령지가 되었다. 결국 패배로 끝나기는 했지만. 보통은 일본이 근대화 과정에서 힘을 길렀다는 점에만 주목한다. 그러나 일본이 근대화 과정에서 기른 것은 힘 만이 아니었다. 일본은 아시아를 힘으로 침략하기 전에 지식으로 먼저 침략했다. 오리엔탈리즘을 일본식으로 변형시킨 ‘東洋史’와 ‘東洋學’은 일본 침략의 첨병이었다. 성공과 실패 여부를 떠나서 그렇다. 그리고 작년 연말 알라딘에서 2016년 상반기 인문학 출간 도서 목록을 제시했을 때, 세어보진 않았으나, 느낌으로는 15~20% 정도가 일본 작가의 책을 번역한 것이었다. 사실 그건 충격이었다. 후루이치 노리토시가 불과 26살에 썼다는 이 책을 읽고나니, 일본 학문과 지식생산이 가진 저력이 피부에 느껴졌다. 일본은 다시 이렇게 지식을 통해서 패권(hegemony)를 만들어 가는구나. 모든 주를 미주로 표시하는 마음에 들지 않는 방식때문에 연신 손가락을 끼워서 앞뒤를 확인했지만, 외국인 저자가 쓴 글이나 그것이 영어 혹은 다른 서양언어에서 직접 인용된 경우는 한 두 번 정도랄까. 나머지 수백권은 거의 전부 일본어로 된 일본 작가의 글이었고, 서구 작가의 글을 번역한 것은 외려 정말 드물었다. 존 다우어, 베네딕트 앤더슨, 아도르노, 악셀 호네트, 레베카 솔닛, 해리 하르투니언 정도가 눈에 띈 달까. 그외 한 두개 정도 더있을 것이다. 게다가 ‘상상의 공동체’를 인용하면서, 앤더슨이 아닌 일본 학자의 글이 인용되고, 앤더슨은 ‘원격지 내셔널리즘’에 대한 『世界』에 실린 글이, 농민 반란 등의 ‘모럴 경제’를 길게 말하면서, 제임스 스캇은 언급되지도 않았다. 나는 이런 것을 저자의 불성실이라기 보다는 일본이 나름 서구 학문을 흡수, 소화한 결과로 보았다. 책 전체와 주를 모두 읽으면 동의하게 될 것이다. 돌이켜보면, 1960~80년대까지 우리나라는 서구 학문을 일본어 번역의 중역을 통해서 겨우 흡수했다. 80년대 중반부터 점차 영어로부터 직접 번역하여 흡수하기 시작했고, 90년대를 넘어가면서 다양한 서양어로부터 직접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일본어는 제쳐두었지만, 실상 일본은 서양학문을 자기화해서 자기 방법으로 기술하고 있었다. 하세가와 히로시(長谷川宏)라는 재야의 철학자가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평이한 일본어로 풀어 번역했고, 이 책이 베스트 셀러에 오른 것이 1998년이다. 아마도 이 일이 어떤 상징이었던 듯 싶다. 올해 인문서적 출간계획을 보니, 이제 상당한 이론적 자원을 일본으로부터 끌어들이기로 결심한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실상 일본이 서구의 이론적 자원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 소화해서 새롭게 생산하고 있다는 반증이고, 그것과 우리가 매우 가깝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오늘 후루이치 노리토시의 책을 읽으면서, 그것을 절감했다. 일본어를 다시 제대로 공부해야 겠구나. 외국어로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그들의 상황이 몹시 부럽다고 할까.

후루이치 노리토시(古市憲寿)의 서술에서 가장 눈에 뜨이는 것은 나이다. 그는 ‘젊은이’에 대해 언급하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상황과 처지에 따라 생각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보고, 거의 모든 발언에 대해, 그 사람이 그 발언을 했을 당시의 나이와 출신지역을 괄호에 표시해 두었다. 감탄스러운 객관화 방법. 세대와 나이를 구분 기준으로 사용하는 서술에서는 발언자들의 발언시 나이를 기록하는 것은 새로운 표준으로 삼아도 좋을 것 같다. 그런데, 그는 왜 이런 전략을 택한 것일까? 나도 위에서 말했지만, 후루이치의 이 책을 소개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은 그의 나이이다. 스물여섯살에 책을 썼다고, 놀라운 반응과 함께 능력과 자격은 물론 책 내용에 대한, 일종의 의구심도 생겨난다. 그때 제대로 책을 쓸 수 있을까? 이 책을 읽는 후루이치 노시토리보다 나이든 모든 사람은 그의 나이에 일단 선입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도 이 책에서 논파하는 젊은이론의 희생이 될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의 나이를 공개하는 것은 이를 논파하는 전략이다. 모두 동일한 출발점에 세우고, 그들의 언급의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을 폭로하는 것이다. 그는 서문에서 사람들의 나이와 출신지역을 기재하는 이유로, “누군가가 ‘젊은이’에 대해 이야기를 할 경우, 자신의 나이를 염두에 둔 그 사람의 입장이 중요하다”고 판단해서(38) 라고 한다. 세대론에 대해서는 그들 각자의 나이를 폭로하는 것이다. 청년, 중년, 장년, 노년인 각자의 나이 뒤에 서 있는 각자의 이데올로기의 폭로. 그러면서, 모든 사람의 입지와 함께 자기 객관화를 시키는 방법이다. 이건 마치, 자본주의와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책을 쓰면서,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을 인용할 때, 그들의 연소득과 재산 액수를 폭로하는 것과 같다. 중립인 제3자는 어디에도 없다.

실상 젊은 세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요즘 젊은이들은 어떻다는 식의 담론이라고 한다. 이십대들은 그런 식의 규정과 담론을 폭력적이라고 받아들인다. 우리는 각자 자기 모습을 하고 있는데, 젊은이들은 이렇다는 식으로 규정한 후, 훈계도 하고, 위로도 하고, 격려도 하고, 그리고는 협력자로 삼아서 실상은 소비해버리는 것이다. 젊은이들을 편들어 주는 듯한 삼촌도 실상은 젊은이들을 호도하는 것일 뿐이다. 각자가 자기를 스스로 설명하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우선 책 내용을, 그리고 내 맘대로 중요한 점들을 조금 살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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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이치 노리토시는 2010년 ‘뉴욕타임스’의 도쿄지국장 마틴 파클러의 질문 “일본의 젊은이들은 이처럼 불행한 상황에 처해 있는데, 왜 저항하려고 하지 않는 겁니까?”라는 질문(25)에 “일본의 젊은이들은 행복하기 때문”(26)이라고 답한다. 일본에서는 적어도 “매일매일 생활을 다채롭게 해 주고 즓겁게 만들어 주는 요소들”이 있고, “돈이 많지 않아도 그럭저럭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26) 2010년 일본 20대의 70.5%가 현재에 ‘만족’하고 있는데, 이는 다른 세대 보다도높고 과거의 20대 보다도 높다. 20대의 생활만족도가 70%를 오르내리는 것은 1990년대 부터다.(27) 후루이치는 고도성장기가 행복한 시절이 아니라며, 장시간 노동, 할당량의 증가, 입시 경쟁, 교내 폭력, 관리 교육 등 생활이 풍요롭던 시절도 행복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다(28-29) 절대적 기준으로 보아도 1980년대 젊은이보다 여러가지가 값싸고, 편리한 오늘이 더 낫다는 것(32)이다.

1장은 일본의 ‘젊은이론’ 및 ‘청년론’의 총정리다. 모든 시대에서 말하는 ‘젊은이는 발칙하다’는 말이 사실은 출전이 불분명하다는 사실에 대한 지적으로 시작해서, 젊은이라는 연령 구분의 시대에 따른 차이 등을 지적하면서(41-42) 실상 청년론, 젊은이론이라는 것이 상당히 조작적이고, 허구적인 동시에 젊은이들을 전쟁에든, 소비에든 동원하려는 것임을 밝힌다. 그는 젊은이론의 변천과정을 193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정리하여 하나의 도표로 보여준다.(94) 젋은이들은 이질적인 타자, 편리한 협력자로 인식되는 동시에 문화론과 실증연구의 방법으로 연구되어 왔다. 특히 젊은이론의 백미 중 하나는 ‘편리한 협력자’론이다. ‘이해력이 좋은 어른’인양 가장하면서 “젊은이는 희망이다”라고 외치는 것은 결국 젊은이를 전쟁에 동원하려는 것이다.(59) 1990년대 거품경제가 붕괴하자, 사업가들이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다.(60) 1950년대부터 젊은이들은 ;틴에이저’라는 이름으로 고객으로 재발견된다.(66) 물론 이질적 타자로서의 젊은이들에 대한 비판도 끊이지 않는다. 후루이치는 “젋은이는 발칙하다”는 식의 젊은이를 ‘이질적인 타자’로 간주하는 지적은 젊은이가 아닌 중·장년층의 ‘자기 긍정’이자 ‘자아 찾기’의 일종”이라고 말한다.(87)

후루이치는 젊은이 세대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좀 길게 인용해 보자.
“세대론이 사회에서 유행하게 되는 때는 계급론이 현실성(reality)을 잃었을 때다, 세대론이라는 것은 본래 매우 억지스러운 이론이다. 계급, 인종, 젠더, 지역 등 모든 변수를 무시하고, 부유층도 빈곤층도, 남성도 여성도, 일본인도 재일 한국인도 그 밖의 외국인도 한데 뭉뚱그려, 그저 ‘어떤 연령’에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젊은이’라고 일괄해 명명해 버리기 때문이다. 신문을 살펴봐도,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세대’라는 말을 살용하는 빈도가 매우 증가했다. 계급이나 지역이 아니라, ‘세대’에 따라 사회를 분석하고 사람들에 대해 논하는 사고방식이 보급된 것이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국민적’이라는 표현의 의미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오늘날에는 ‘국민적 아이돌’이라고 하면 ‘세대를 초월해 인기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국민적 아이돌’이란 ‘계급을 초월해 인기가 있다’라는 의미로 언급됐다. (중략) 모든 계급이 ‘총체적으로 중산층'(필시 일본어로는 중류일 것으로 추측됨)이 되었다고 하는, 즉 ‘계급’ 소멸의 환상이 ‘1억총중류(一億総中流, 1억 명 모두가 중산층으로 번역되어 있으나 실상 의미가 살짝 변형됨)’라는 개념이다. 이러한 ‘1억총중류’의 진행과 나란히, ‘젊은이론’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중략) ‘젋은이’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전반에 걸쳐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나이 말고는, 다른 다양성은 문제가 되지 않는 균질한 집단’으로서 말이다.”(76-78)

만일 세대 내부 격차가 생긴다면, 세대 내부에 계급적 차이가 생긴다면, 절은이론은 붕괴한다. “1990년대 후반부터 중산층 붕괴론과 격차사회론이 유행”하고, ‘1억총중류’가 무의미해지고, ‘다시 말해 ‘세대 내부에 격차가 없다’는 전제가 무너지면서, ‘젊은이론’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85) ‘젊은이론’ 또 한국에서 말하는 청년세대론은 실상, 세대 내부의 계급적 차이가 없다는 가상적 상황을 상정하는데, 따지고 보면 어느 세대인들 그런 적이 있었던가. 소위 말하는 386세대의 시대에 대학진학률은 20%에 불과했다. 결론적으로 젊은이는 이렇다 혹은 저렇다는 식의 쉽사리 이루어지는 평가들이 얼마나 무의미할 수 있고, 조작적일 수 있는지에 대해 지적한다. 그렇지만, 또 오늘날 젊은이라고 말하는 20대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95)

흔히 오늘날의 젊은이들을 내향적이라고 한다, 실제 2011년 일본의 20대는 55%가 사회지향, 36.2%가 개인지향으로(102), 사회공헌 붐이라고 할만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나, 실제 사회봉사 활동 인구는 늘지 않고 있다.(107) 정치에 관심이 있다는 비중은 2008년 57,9%까지 상승했지만, 투표율은 그다지 상승하지 않아, 투표하면 커피를 쏘는 상점도 나타나고 있다.(108-110) 바깥 세상에 관심이 없다고 쉽사리 말하지만, 인구대비 비율로 보면, 유학생 수도, 해외에서 일하는 젋은이의 수도 줄고 있지 않다.(114) 1마일족이라는 말로, 현지화, 지역화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고도성장기를 고려했을때, 장기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일뿐, 지방도시의 발달로 지역을 떠나지 않게 된 것이다.(121) 또 최근 젊은이들이 소비를 하지 않는다고 흔히 주장하지만, 그것은 자동차나 대형 내구 가전제품, 해외여행에 대한 것일 뿐, 패션, 가구, 인테리어, 게임기 등 생활과 밀착된 ‘의·식·주 소비’에만 집중하고 있다.(122-123) 또 통신비 등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데 기꺼이 지불하고 있다.(125) 그는 이런 경향을 ‘미묘’하다고 말한다.(128) 이를 요약하면, 후루이치는 젊은이들에 대한 거의 모든 통념을 통계자료를 통해서 뒤집는다. 통념이나 일반적 인식은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젋은이들이 행복하다는 것이 증명된다. 2010년 20대 남성의 65.9%, 여성의 75.2%가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고 대답한다.(129) 반면 ‘생활 만족도’나 ‘행복도’는 40대, 50대가 더 낮다. 반면 불안도 수치를 보았을 때, 2008년에 67.3%에 달했다.(131) 행복하면서도 불안한 일본의 젊은이들 자국 사회에 대한 만족도가 낮아, 43.9%로 불만족도는 54.1%로 나타난다. 반면 미국의 만족도는 67.6%.(132) 이것이 격차사회, 비정규직, 세대간 격차가 심한 일본의 젊은이들의 모습이다.(133) 오사와 마사치에 따르면, 일본의 젊은이들은 앞으로 더 행복해질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현재가 행복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노인들이 행복하고 만족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반면 고도성장기나 거품경제 시기에는 젊은이들이 오늘보다 내일이 나아질 것으로 믿기 때문에 희망을 가지고, 그렇기에 생활만족도가 낮게 나타난다는 해석이다.(133-135) 일본의 젊은이들은 의식주라는 물질적 욕구가 거의 충족되어, 자기충족화(consummatory)하고 있다.(136-137) ‘중류의 꿈’이 무너져, 기업의 정식 구성원, 즉, 사축(社畜)이 되지 못한 젊은이가 증가하면서, 자기충족적인 생활만족도가 증가한다.(138)

젊은이들은 작은 공동체로 모이는데, ‘친구’나 ‘동료’의 존재감이 매우 커졌다.(138) 갑자기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20세기 소년』이 막 이해되는 느낌이었다. 후루이치는 만화이자 애니메이션 「원피스」로 이를 설명한다. 판매 부수 누계가 2억부를 돌파한 현대판 성서 「원피스」의 사고방식은 ‘동료를 위해서’로 요약된다. 젊은이들은 동료집단이라는 ‘섬 우주’로 들어간다.(140) 모두가 어려운 작은 세계에서는 상대적 박탈감이 없어 행복하다. 그러나 실상 1990년대에 일어난 일은 ‘섬 우주’의 출현이라기 보다는 ‘세상의 붕괴’에 가깝다. 텔레비전과 잡지라는 매스 미디어 주도해 만들어낸 ‘일본이라는 공통된 세상’의 틀이 서서히 와해되고 있다.(142) 베네딕트 앤더슨의 인쇄 자본주의에 따르면, 국민국가라는, 특히 국민(nation)이라는 상상의 공동체가 무너져 내린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봉사 활동에의 관심은 ‘비일상’에 대한 관심이며, 이때 ‘불끈하는 젊은이들이 ‘비일상’으로 뛰어들 것이다. 그러나 이도 결국은 익숙해 지면, ‘일상’이 되어 버린다.(145)

월드컵에서의 거리 축구응원 같은 것은 애국심이 아닌 단순한 ‘일본 붐’이자, ‘일본 소비’다.(186-187) 일본에서도 한국과 같이 월드컵 때가 되면, 거리가 축구를 응원하는 젊은이들로 가득찬다. 이런 열광적인 관중을 잘 살펴보면,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일부 축제파, 보도진과 블로거 등 관찰파(축제파 보다 많다), 그리고 관전파들이 있다.(153) 놀랍게도 일본이 졌는데도 불구하고 젋은이들은 한결같이 ‘수고했어’라고 말하며 헤어진다. 월드컵 동안에만, ‘기간한정’으로 나타나는 ‘일본’.(154) 후루이치는 일본을 하나의 구조 혹은 인프라로 표현한다.(156) 그렇다면 이것은 내셔널리즘인가? 후루이치는 ‘일본’과 ‘일본인’은 에도시대에 언어와 교육 및 모든 사람을 ‘일본인’으로 인식하게 하는 ‘일본의 역사’를 통해서 만들어졌다(165)고 말한다. 근사하게 말하면 상상의 공동체(167)가 된다. 실제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까지 황민화가 잘 진척되지 않았다.(169) 후루이치는 1940년대 라디오의 도시 보급률이 60%를 넘어선 시기를 ‘내셔널리즘 2.0’이라고 표현한다. 전쟁 초기의 일본은 호황을 누렸고, 사람들은 해수욕과 국내 관광을 다녔으며, 전쟁을 밝고 풍요로운 생활에 대한 높은 기대감을 가져다 주었다. 어두움 암흑의 시대는 44년 이후의 풍경일 뿐.(216) 특히 전시에 현재까지 존속하는 다양한 시스템이 고안되어, 종업원의 공동 이익을 우선시하는 ‘일본형 기업’은 38년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주주권리가 제한되었기 때문이고, 금융도 간접 금융이 중심이 되고 관료의 경제통제도 본격화되었다.(171) 이런 전쟁에서 이기겠다는 목표는 경제대국이 되자로 바뀌게 된다.(172) 그러나 내셔널리즘은 의미를 잃고, 어디에서든 일본에서 처럼 생활하며, 국가는 필요없다는 주장이 나온다.(176) 특히 호리에 다카후미는 베이직 인컴(기본소득)을 실시하여 (공공부문의) 낭비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한다.(177) 텔레비전 시청률이 떨어지는 것은 일본의 붕괴를 뜻한다. 텔레비전은 전후 ‘일본’을 만들어낸 주역이다. 문화적인 계층 차이와 세대 차이를 넘어, 공동된 방송을 송출하고, 누구나 텔레비전을 보는 것만으로, 최소한의 교양과 ‘일본인 의식’을 체득할 수 있었다. 텔레지전 내셔널리즘은 붕괴하고 있다.(180-181) 특히 인터넷은 다양한 정보를 다양한 채널을 통해 받아보게 되는데, 믹시나 아메바 뉴스 같은 채널은 해외 뉴스는 물론 일본에서 일어난 사건에 조차 무관심하게 된다.(184) 이런 일을 통계를 통해 살펴보자.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강하다는 젊은이는 2008년에 37%에 이르러 가장 높은 수치이며, 일본에서 태어나 다행이다는 수치는 2008년에 무려 98%에 달했다. 모두 일본을 좋아한다.(184-185) 일본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일본 지향’이나 ‘애국 지향’은 정치적 내셔널리즘과 다르다. 이것은 그저 ‘일본 붐’이다.(186) 전쟁이 일어나면, 국가를 위해 싸우겠다는 비율은 15.1%에 불과하며, 이는 마치 에도바쿠후 말기 민중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 월드컵 응원을 마치고, ‘수고했어!’, ‘아, 기분 좋다!’라는 말을 주고받는 것은 손님으로 참석한 기분이며, 일본을 소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환영받아야 할 상황이다.(186-187)

일본을 바꾸려는 젊은이들의 사회활동은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한 활동이기도 하고, 타자의 승인을 얻기 위한, ‘마음 둘 곳’을 찾으려는 색채를 강하게 드러낸다.(231) 보수적인 집회에 사람들이 일장기를 들고 나타난다. 자신들이 넷우익(재특회 등)과는 다르다고 말하지만, 이중 일부는 가입하게 된 계기가 아사다 마오 때문이라고 한다. 김연아에 대한 보도가 너무 많아서다.(196-197) 인터넷을 통해서 모인 이들은 센카쿠 열도 영유권을 주장하며 중국대사관으로 행진하기도 한다.(198) 상당수는 축제에 참석하는 기분으로 오기도 하며,(201) 좌익 처럼, 좌익의 행동방식을 보여주기도 한다.(209) 사실 이들은 좌익이든 우익이든 무방하다.(211) 누구나 부담없이 참여할 수 있도록 다양한 이벤트 형식을 포함하는 이런 집회의 경쟁자는 디즈니랜드일지도 모른다.(215) 이들은 자신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문제에 새로운 규범이 성립할 때, 강하게 반응한다. 비실재청소년(만화, 애니메이션) 에 대한 아동 포르노 규제 반대운동 같은 것이 그렇다.(219) 누군가를 만나고 싶고, 관계로부터 충족감을 얻고 싶은 젊은이들은 ‘공공’, ‘사회’ 등 규모가 큰 것에 대한 갈망이 생겨난다. 젊은이들은 자기 충족하면서, 사회를 지향하는 작은 공동체 안으로 모여든다.(221) 젊은이들이 친밀권(작은 공동체)와 공공권(공공, 사회)를 이어줄 필요가 있다.(222) 재특회에 들어가면 동료가 생긴다.(225) 노동운동을 통해 마음둘 곳과 동료가 생긴다.(226) 후루이치는 피스보트에 승선한 젊은이들의 경우 공통성이 목적성을 냉각시킨다고 말했는데, 집단에 마음 둘 곳이 있으면, 과격한 목적성은 약해진다.(227)

동일본대지진(후쿠시마)에서 일본의 젊은이들은 움직였다. 우선 모금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235) 자원봉사자들은 피해지역으로 달려갔다.(240) 후루이치는 동일본 대지진에서 일어난 일을 월드컵에서 이어지는 ‘일본 붐’이자 대망의 ‘비일상’이라고 말한다. 일본이 캄보디아 같은 저개발국 같아졌다.(245) 원전 반대 시위의 경험은 시위가 지속되려면, 축제 처럼 조직되어야 하고, 이런 시위에 진지한 원전 중지 운동 이 결합되면, 사람들은 낯설어한다는 한계를 드러냈다.(249-251) 또 동일본 대지진은 ‘매스 미디어’는 여전히 강력하고, ‘소셜 미디어’는 유약함을 드러내었다.(256) 동일본 대지진(3.11)은 일본을 변화시켰는지에 대해서는 답하기 어렵다. 서일본은 곧 일상으로 돌아갔다.(260) 학계나 언론계의 영향은 측정하기 어렵다.(262) 충격적인 것은 보수 우익 노인들의 반응이다. 그들은 희생적이지 않았다. 이시하라 신타로는 이 지진을 천벌이라고 말했다.(264) 일부의 사람들은 재해지역에 지역 공동체가 복원되길 원하지만, 실상은 후방의 자동적 복종 시스템을 형성하고 있다. 원전이 설치되면, 교부금과 고정 자산세 등이 들어와 자치단체의 세수가 풍부해진다. 원전이 가동되면, 감가상각으로 인해 고정 자산세가 감소하고, 새로 지어진 건물을 운영하지 못하게 된다. 원자력 마을은 새로운 원전을 유치해야 한다. 이는 자동적 복종 시스템이다.(266-267) 도호쿠는 일본의 후방, 일본 경제의 후방이다. 이 지역은 일관되게 일본에 식량, 인력, 전력을 공급해 왔다. 도호쿠에 여러 인프라가 설치되어도, 균형있는 지역 발전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후방으로서의 기능은 물론, 지역공동체로서의 기능도 붕괴된 지 오래였다.(268)

일본의 젊은이들의 처지는 얼마나 절망적인가. 일본은 세대간 1억엔의 격차가 있다고 말한다. 60세 이상은 6,500만엔의 이익을, 20세미만은 5,200만엔의 손해를 보고 있다.또 일본의 젊은이들이 정사원이 되지 못한다.(277) 그렇다고, 단카이 세대가 될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다. 거품 경제 이전에도 대기업 정사원이 되긴 어려웠다.(282) 흥미로운 것은 세대 간 격차에 분노하고,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삼촌들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 삼촌들이 세대 간 격차 문제를 부추기는 것은 아닐까? 이를 세대 간 격차로 보는 것은 사회 문제를 세대 문제로 환원하는 오류가 아닐까?(283-284) 인구가 감소하고, 노동력 부족 현상이 생기는 것은 일본 전체의 문제다. 동시에 고령자들의 문제다. 고령 세대도 격차가 크다.(286) 고령자의 책임을 물을 수도 있다. 오늘날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은 고령자들의 투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일본은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아이를 낳아 기르는 환경에는 무관심하다.(288)

일본에서 행복의 문제는 경제적 문제와 승인의 문제다. 후루이치는 일본에서 Wii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연인이나 친구가 있는 생활 혹은 몬스터헌터를 즐길 수 있는 생활 정도가 적당하다고 본다.(290) 젊은 층 일수록 같은 세대 안에서 급여 격차는 크지 않다. 정사원이든 프리터든. 차이는 질병과 같은 일이 생겼을 때 발생한다.(291-292) 게다가 일본에서 가족복지라 부르는 가족은 강력한 최강의 인프라다.(292) 빈곤은 미래의 문제이고, 승인은 현재의 문제다. 건보료와 세금을 납부하지 않은 젊은이의 빈곤은 10년, 20년 후에 나타날 것이다. 경력 사다리에서 한 번 탈락한 사람은 다시 올라서기 어렵다. 예전에는 빈곤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모두가 정사원이 되어 대기업의 사축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은 ‘기업을 통한 복지’에 의존하기 때문에, 빈곤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294-295) 젊은이들에게는 빈곤보다 승인이 더 중요하다. 승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연인이 있으면 된다. 약 30%가 연인이 있다. 젊은이의 25% 가량은 성관계 경험이 없다. 연인은 없어도, 친구가 없다고는 말하기 어렵다.(296) 그렇기 때문에 넓은 의미의 친구를 인터넷에서 구한다. 트위터, 니코니코동영상, 페이스북 같은 도구가 사회를 바꿔준다기 보다는 개인의 승인 욕구를 손쉽게 충족시켜준다.(297-299)

후루이치는 중국의 도시에서 합법적 거주허가와 복지시스템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노예화된 농민공을 소개하면서, 젊은이들이 농민공화되었다고 설명한다.(304) 즉, 부자 혹은 넘버원을 목표로 레이스에 참여할 수 있었던 ‘근대’가 임계점에 달한 것으로 본다.(305) 일본의 근대는 민주주의 보다는 산업혁명이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전후의 파괴로부터 복구 과정에서 경제성장이 가장 중요했다. 민주주의 전통이 없는 경제성장이 일본의 문제일지도 모른다.(306-307) 특히 일본은 이민을 거부해 왔기 때문에, 여성에 이어서 젊은이들을 이등시민화했고, 꿈이나 보람이라는 말로 얼버무리는 저렴하고 해고하기 쉬운 노동력이 되었다. 일본은 느슨한 계급사회로 변하고, 이등시민은 태평하게 하루하루의 삶을 소일하는 구조가 될 것이다.(308) 지금 일본은 1억명 모두가 젊은이가 되는 시대이다. 중류의 꿈이 무너진 시대.(309) 전후 일본의 경제성장은 이 나라를 민주주의 진영에 묶어 두려는 미국의 대일 정책, 풍부한 젊은 노동력을 사용할 수 있는 인구 국가, 패전으로 인한 초기화 등의 효과였다.(310)

“돌아가야 할 ‘그때’도 없고, 눈 앞에는 처리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다. 게다가 미래에는 ‘희망’조차 없다. 하지만 현재 상황에 달리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니다. 왠지 행복하고, 왠지 불안하다. 우리들은 바로 그러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절망의 나라에 사는 행복한 ‘젊은이’로서”(316)

***

후루이치가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행복하다. 그 행복은 불안을 동반하는 데, 희망이 없기 때문에 생겨난 행복이다. 세대론이란 허구다. 세대론이란 계급론이 설명론이 없을 때, 성립한다. 즉, 1억총중류가 성립할 때, 젊은이론이 성립하며, 반대로 중류가 무너지면 젊은이도 붕괴한다. 젊은이들 안에 세대 내 격차가 일어나고 있다.
젊은이들은 내향적이 되고, 소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기 충족적 소비를 한다. 젊은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친구나 동료다. 월드컵 응원과 같은 것은 일본 붐이나 일본 소비이지 애국심은 아니다. 젊은이의 사회활동은 타자의 승인, 즉 마음 둘 곳을 찾는 일이다. 동일본대지진은 일종의 일본 내에서 나타난 거대한 비일상이었다.
젊은 세대 문제라고 하는 격차나 일자리, 저출산의 문제는 사실 일본의 문제다. 사회 문제를 세대 문제로 환원시켜서는 안된다. 젊은이들의 행복의 문제는 승인의 문제와 빈곤의 문제가 있다. 빈곤의 문제는 뒤로 미루어져 있고, 가족에 감추어져 있다. 승인의 문제는 연인, 친구, 소셜 미디어(트위터, 페이스북 등)을 통한 손쉬운 승인으로 대체된다.
젊은이들은 계급화, 노예화되고 있다. 1억총중류가 무너지면서, 1억의 일본인 전체가 젊은이화, 즉 빈곤화되고 있다. 이 문제는 민주주의의 문제다.

후루이치의 문제제기를 결론적으로 요약하면, 그것은 일본식 근대의 실패다. 그는 그것을 맨마지막에서 민주주의 없는 경제발전의 실패라고 말한다. 이 문제는 한국에서도 고스란히 문제로 제기된다. 형식적 민주주의, 절차적 민주주의의 성취에 환호작약하다, 어느새 사회 전체게 불평등의 기운이 깊게 드리내렸다. 지난 대선에서 여야 양당의 슬로건이 모두 경제민주화였지만, 지금도 경제민주화로의 진전은 요원하다. 야당 선대위원장을 경제민주화의 상징적 인물로 영입한 것도, 경제민주화가 얼마나 중요한 화두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경제발전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후루이치가 말하는 근대의 실패는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그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상상의 공동체의 실패이다. 굳이 베네딕트 앤더슨의 인쇄자본주의를 언급하지는 않지만, 근대 사회가 형성되면서, 공동체의 상상, 즉 동일한 매스 미디어를 소비할 때, 동일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상상하는 일이 결국 일본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신문과 잡지, 다음에는 라디오, 그 다음에는 텔레비전의 순으로 일본에서 매스 미디어는 하나의 통일적 이미지의 ‘일본인’을 형성해 내고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미디어인 인터넷의 등장과 소셜 미디어의 확산 과정에서 바로 이 ‘일본인’을 유지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후루이치가 이 논리를 연결지어 가는 고리는 승인이다. 소셜 미디어, 즉 트위터, 페이스북, 동영상 사이트들은 모두 손쉬운 승인을 추구하는 기제들이다. 그 이전에는 현실에서 연인을 만들거나, 친구가 필요했다. 그런 친구 혹은 ‘마음 둘 곳’을 찾아, 우익 혹은 좌익의 집회에 나서고, 사회참여나 재난현장에 봉사활동을 하러 뛰어들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승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중사회에서 승인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대중사회에서의 승인, 근대사회에서의 승인에 대해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것은 공통의 매스 미디어의 사용을 통해서 형성된 동일한 문화, 동일한 교양, 즉, 표준적이고 평균적인 일본인으로서의 의식을 통해서일 것이다. 후루이치는 어떻게 승인이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만 논의하고 있지만, 출발점은 좀 달라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말 필요한 출발점은 왜 승인이 필요해졌는가가 아닐까? 승인은 결국 전통사회의 해체, 가족의 해체, 공동체의 해체로 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

후루이치에 따르면, 근대의 실패는 또, ‘1억총중류’의 실패로도 나타난다. 1억총중류라는 근대의 소망은 결국 무너졌다. 아니 원래 ‘1억총중류’란 계급적 불평등을 감추고 있던 슬로건에 불과했다. ‘젊은이들’이라는 세대담론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세대 내 균질성 및 세대 내부 격차가 없어야 했다. 그러나 실상은 세대 내부 격차가 없었던 적이 있었던가. 패전으로 모든 것이 초기화된 사회에서도, 엘리트와 대중의 차이는 여전히 있었다. 대학진학률은 여전히 낮았고, 대학을 졸업해서 대기업 정규직을 얻는 비중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극심한 격차사회의 등장은 대학진학률이 높아지고, 대학졸업생이 늘었기 때문이 아닌가. 자리는 적고, 지원자는 많고, 자리를 늘일만큼 잉여가 충분하지 않고, 그래서 비정규직으로 수용해야하고, 이것은 격차사회로 드러난다. 과거의 세대담론이나 중류층 담론도 결국 그 아래에 불평등을 깔고 있었던 셈이다. 세대론과 계급론의 관계에 대한 후루이치의 지적은 통렬한 데가 있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빈곤상태에서 행복하지 않다. 분노하고 때론 폭발하지만, 또 적지 않게, 희망을 버리고 현재 상황에서 자기충족적으로 방어적으로 대응하려는 태도도 보이고 있다. 아직은 모든 반응이 복잡하다. 그리고 다른 세대와 사람들에 대한 분노도 폭발 중이다. 한국에서도 역시 세대론이 허구라는 점이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사회문제를 세대 문제로 전환시키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386은 취업이 쉬웠던 꿀세대라는 지적이다. 실제 20년 전에는 취업이 손쉬웠다. 그때는 대학 진학률이 낮았다. 고등학교 졸업생의 20%만이 진학했다. 어찌보면 이 부모 세대 혹은 삼촌 세대의 “더 노력하라”는 꼰대짓이 이런 반응을 가져오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권력은 세대 간의 일자리 전쟁을 통해, 세대 갈등을 통해 분배라는 사회 문제를 감추려 한다. 중산층이 될 수 없는 사회, 중간 계급이 붕괴하면서, 젊은이들 뿐 아니라, 다른 세대까지 더 많은 세대가 젊은이화, 즉 빈곤화되고 있다. 그러니 실상은 이것이 세대 문제가 아니라 사회 문제이며, 분배와 민주주의 문제이다.

일본의 젊은이들 처럼, 한국의 젊은이들 역시 동료가 중요하며, 타자의 승인이 중요하다. 트위터, 페이스북은 물론이고, DC, 일베, 오유 등 특정 커뮤니티에서의 활동이 매우 활발하다. 이런 곳에서의 승인과 인정을 위해, 때론 과격하고 법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탈도 벌어진다. 종종 사법처리의 대상이 되는 모욕행위도 판을 친다. 그러나 동료의 승인을 위해서라면, 탈법을 때로는 감수한다. 때론 범법자가 되더라도 중요한 것은 동료의 승인이다.

2002년 전국의 거리와 스타디움을 뒤덮었던 월드컵 응원은 한때 내셔널리즘 처럼 보였다.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애국심과 국가에 대한 자긍심으로 보였지만, 그것이 국가나 사회에 대한 충성으로 전환되는 것은 아니었다. 후루이치는 일본의 2006년 2010년 월드컵 응원을 분석하면서 이것을 일종의 일본 붐 혹은 일본 소비라는 관점으로 설명하는데, 매우 설득력이 있다. 한국은 다소 내셔널리즘 성향이 강해 보이지만, 그러나 국기를 이용한 다양한 활용 등을 볼 때, ‘한국 붐’과 ‘한국 소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그러나 한국에서 국가 붐과 국가 소비는 내셔널리즘과 결탁하여 움직인다.

일본에서처럼 국내적 비일상(재해)이 발생하면, 모두가 격렬하게 반응한다. 동일본 대지진 때, 일본에도 많은 성금을 보냈고, 참여하려고 애썼다. 사실 후쿠시마 원전에 관한 설명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부분이 고정자산세에 관한 부분이었다. 원전이 지어지면, 고정자산세가 높았다가, 점차 낮아져서 새로운 원전유치를 할수밖에 없다는. 더 말할 수 없이 사악한 정책이다. 작년 세월호 사건이라는 비일상이 벌어졌을 때 사회 전체가 격렬하게 반응했고, 젊은이들은 더했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사람들은 너무나 안타까워했고, 분향소 같은 곳에서라도 자원봉사를 하기 원했다. 리본을 달았고, 공감을 표했으며, 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분노가 폭발했다. 이 분노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후루이치가 이야기하는 모든 주제와 모든 문제가 얼마나 입증되고, 설득력을 지니는 지는 엄밀하게 하나하나 따져볼 문제지만, 탁월한 것은 그의 아이디어다. 통계자료를 통해서 젊은 세대의 행복, 불안, 자기 충족성, 소비를 해석하는 것은 탁월하다. 게다가 월드컵을 일본 붐 내지 일본 소비로 보는 것은 탁월한 관점이다. 소셜 미디어(트위터, 페이스북 등)이 소비된다는 평가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들은 개인의 승인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일시적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민주주의 문제로 보는 것도 뛰어난 관점이다.

일본과 한국이 다른 것은 젊은이들의 불만, 그리고 불행하다는 인식이 가득해서 폭발지경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식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때로 분노가 폭발한다. 젊은이들의 불만과 불행에 대한 인식이 자기 충족적으로 승인활동으로 소비되지 않아야 민주적 욕구로 사회변화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상황이 절박한 만큼 더 나설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민주주의 문제다. 민주주의를 유보한 문제.

그러고 보니 그가 일본식 근대의 실패를 말한 것은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 균형을 이루는 서구적 근대에 대한 또 다른 동경인가? 그리고 세대로서의 집합적 총체로서의 ‘젊은이들’이 아닌, 개인을 발견하고 싶은 것인가? 문득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다시 근대로 돌아가려는 모더니티 프로젝트는 설마 아니겠지.

2016.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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