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뒤르케임, 『자살론』

한국 자살률 추이가 보여주는 것. 에밀 뒤르케임, 2008, 『자살론: 에밀 뒤르켐의』, 황보종우 역, 청아출판사. Emile Durkheim, Le suicide: étude de sociologie, 1897. (국역본 표지에 Suicide: A Study in Sociology로 표기되어 있고, 참고한 프랑스어판의 서지사항이 없는 것으로 보아, 영역본의 중역으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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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한국은 자살로 뒤덮혔고, 자살에 대한 담론들이 넘쳐나고 있다. 노무현, 수많은 연예인들, 송파세모녀의 죽음, 국정원 직원, 정치인, 기업인, 수험생, 중고생. 자살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OECD최고라고 하는데. 외국과의 비교보다 국내 추세가 더 무섭다. 통계청 자료를 살짝 살펴보면, 가장 이른 자료인 1983년 자료에서 10만명당 8.7명으로 시작된 자살률은 85년 9.7명을 기록한 후, 88년에 7.3명으로 소강상태를 보이다가, 95년 10.8명을 기록하고, 1997년 13.1명, 1998년 18.4명을 기록 외환위기의 충격을 보여준다. 다시 다소 감소하다가, 2000년 13.6명을 기록하고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여, 2003년 22.6명으로 10만명당 20명을 돌파, 지속적으로 증가하다, 2006년에 21.8명으로 잠시 낮아졌다가 다시 증가하여, 2011년에 31.7명으로 정점에 이른후 2014년 현재 다소 감소하여 27.3명에 이르고 있다. 자살자가 가장 많았던 2011년에 남자의 자살률은 10만명당 43.3명, 여자의 자살률은 20.1명이었다. 다소의 굴곡이 있으나 83년부터 2011년까지, 약 3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83년 대비 2011년은 3.6배, 최저점인 88년 대비 4.3배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추세적 증가율도 엄청난 수치이며, 98년과 2011년데 각각 꼭지점을 찍은 것으로 보아, 위기상황에서 자살률이 급증하는 반면, 2000년과 2006년에 각각 낮아져서 낮은 변곡점을 기록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 시기의 상황과 연관이 있다. 위 그림은 통계청 자료로 본 십만명당 자살률 추이이다. 한국은 남자가 여자의 2배 이상으로 자살한다. 1983년에 비해 남자 대비 여자의 자살 비율이 높아졌다.

유명인의 자살이 보도되면, 그 원인에 대한 추측 보도가 난무한다. 당사자가 유언을 남긴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으며, 때로는 유언 외의 이유를 추정하는 경우도 있어 난잡하기 그지없다. 가장 흔히 꼽히는 자살원인으로는 경제적 궁핍, 명예 유지, 정치적 박해와 그에 대한 대항수단으로서의 좌절, 몰락의 좌절, 우울증 등 각종 정신질환, 여러가지 원인으로 인한 좌절, 슬픈 가족사와 고통스러웠던 성장과정 등. 대부분 언급되는 자살 원인들은 심리적이고, 개인적 원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자살방지 대책이나 자살방지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된다. 정신겅간증진센터라는 이름으로 상담과 검사를 진행하지만, 자살률은 쉽사리 내려가지 않는다. 자살은 여전히 심각한, 아니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살의 원인을 개인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는 시각이 필요해진다.

여기서 우리가 100년 전의 에밀 뒤르케임의 『자살론』을 다시 들여다볼 이유가 생긴다. 그는 ‘자살’을 사회적 현상으로, 사회적 문제로 해석하고 설명한다. 가장 극단적이고 내밀한 선택인 자살을 어떻게 그는 사회적 현상으로 볼 수 있는가?

(여기서부터는 『자살론』에 대한 요약이다. 나로서도 다시 읽어볼 기회가 올 것 같지 않고, 이 글을 읽는 이들도 대부분 읽지 않았을 터인데다.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야기가 곤란하기 때문이다. 꼼꼼히 읽어보면, 고전은 정말 고전인 이유가 느껴지고, 이 부분을 일단 이해해야 논의 가능성이 생겨나기에 길게 요약한다. 사실 정작 하고 싶은 것은 이 책을 읽고난 후에 한국의 자살률에 관한 통계 자료를 살펴보고 발견한 점들이다. 그건 맨 아래에.)

자살률의 변화추이 연구.
뒤르케임은 자살자 자신이 그 결과를 알고서 하는 적극적 혹은 소극적 행위의 직접적 혹은 간접적 결과로 인한 모든 죽음을 자살로 정의한다.(22) 그는 먼저 사회적인 자살률의 안정적 변화추이를 살펴보면서, 자살률이 변화하는 지점을 지적하며, 자살률은 한 사회의 고유한 성격에 따라 변화한다(31)고 주장하고, 사회적인 자살률의 변화추이가 연구가치가 있는 과제임을 주장한다. 실제로 위 그림처럼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한국의 자살률 변화추이는 상당한 안정성을 보여주며, 여자의 자살률에 비해 남자의 자살률이 많게는 2.7배에서 최소 1.7배 사이에서 변화하고 있으며, 대부분 2.4배 정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독특한 특징을 드러낸다. 물론 이것은 뒤르케임이 연구대상으로 삼은 19세기 말엽 유럽의 자살자수가 여자에 비해서 남자가 통상 4배에 이르는 것보다(60-61)는 적은 수치이나, 주목할 만큼 높은 수치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제시되던 자살의 원인 반박. 개인적-병리적 원인.
반면 전통적으로 자살의 원인으로 제시되던 것들을 하나하나 논박한다. 그의 논박의 근거는 대개 통계이다. 맨처음 지적하는 것은 정신질환이다. 그는 우선 정신병으로 인한 자살은 자살의 동기를 설명할 수 없지만, 동기가 분명한 자살, 즉 정신병이 원인이 아닌 자살이 많다고 지적함으로써, 자살의 원인을 정신병으로 환원하는 태도를 지적한다.(51) 나아가 통계적으로 볼때, 자살자 수는 남자가 여자의 4배(60)이나 입원한 정신병 환자의 수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59) 종교에 따른 자살률, 종교에 따른 정신질환 비율을 비교하면서, 유대교인이 정신질환의 정도가 가장 높지만, 자살 경향은 가장 낮음을 지적하고(61), 가톨릭 교인의 정신질환 경향은 개신교인 보다 약 3/1정도가 낮을 뿐이지만, 가톨릭 교인의 자살률은 개신교인보다 훨씬 낮음도 지적한다.(62) 또 모든 나라의 자살 경향은 유년기에서 노년까지 일정하게 증가하고, 감소는 적은 양에 불과하지만, 정신질환은 성숙기 30세 전후가 가장 위험하고, 30세가 지나면 정신질환은 줄어들고 노년으로 가면 낮아지는 점을 지적하며, 자살률에 변화를 가져오는 원인과 정신적 질환에 변화를 가져오는 원인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보여준다다.(62) 정신병 환자가 적은 나라에서 자살이 높기도 하고, 백치가 많으면 자살이 방지되기도 하고, 정신병이 드문 하층사회에서 자살률이 높은 등(62-66) 정신병과 자살률은 일정한 상관관계를 보여주지 않는다. 또 흔히 자살의 원인으로 여겨지는 알콜중독의 경우도 자살률과 일정한 상관관계를 보여주지 않아, 부유층은 자살률이 높고, 하층민은 알콜중독 비율이 높으며, 프랑스는 알콜 소비량과 자살률이 반대로 움직이고, 덴마크는 알콜 소비량과 자살률이 모두 높은 등 일정한 상관성을 보여주지 못하여(68-71), 정신병, 신경증, 알콜중독 중에 어느 것도 자살의 원인으로 볼 수 없다.

전통적으로 제시되던 자살의 원인 반박, 환경적-자연적 원인.
또한 자살의 원인이라 생각되는 인종, 유전, 자연, 기후, 환경, 모방 등 어느 것도 자살의 원인이 아님을 밝히고, 자살이 사회적 사실임을 주장한다. 자살률은 인종적인 차이를 보이지 않고, 외려 민족적인 차이를 보이는 듯(80) 하나, 독일의 특정 지역에서는 게르만족과 슬라브족이 같은 사회적 환경에서 살게 되면 그들의 자살 경향은 비슷해지므로, 자살률은 인종과도 무관하다.(83) 오히려 스위스의 경우 카톨릭계 주민들의 자살은 차이가 없느나 개신교계 주민들의 자살은 프랑스계가 독일계 보다 훨씬 높고(84), 프랑스에서는 중심 문명인 북부, 특히 대도시의 자살률이 높다.(89-90) 가족 안에 대대로 나타나는 자살의 반복은 유전적인 것처럼 보이기는 해도 실제로는 정신질환과 같은 특이한 사례가 원인일 뿐이고, 더욱이 자살은 전염성이 강하다(93-95). 게다가 유전이 원인이라면 남녀차이를 설명하기도 어렵고, 대도시의 높은 자살률을 설명하기도 어렵다. 어떤 체질적 심리적 상태가 자살의 원인이라면, 노년기 자살률이 높은 것을 설명하기 어렵다. 90대가 60대만큼 또는 그 이상 자살한다.(103) 또한 흔히 다른 우주적 요인 자연, 환경, 기후 등을 들어서 자살률을 설명하는 경우가 있으나, 예를 들어 온화한 기후가 자살의 원인이라고 말하기도 했으나 같은 기후를 가진 지역에서 대도시에 자살률이 집중되고, 특히 이탈리아의 경우 1870년 이전에는 중심지이던 북부의 자살률이 높고, 그 이후 중심지가 남부로 이동하자, 남부의 자살률이 높아진 것으로 보아 기후와도 무관하다.(106-108) 기온이 자살에 영향을 미치고, 열이 자살과 같은 난폭한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이 옳으려면, 가장 더운 지방에서 자살이 가장 많아야 하나 실상은 유럽 남부의 자살률은 낮고, 북쪽인 프랑스의 자살률이 높다.(117-118) 월별 기온이나 특히 자살이 낮에 일어난다는 점을 들어 기온과 영향관계를 말하는 경우도 있으나, 프랑스에서 24시간 동안 자살변동을 살펴 본 결과 활동이 많은 아침과 오후에 자살이 많고, 활동이 중단되는 휴식시간에는 자살도 멈추며, 금요일부터 주말 동안에 자살이 줄어드는 것으로 보아(124-125) 태양이나 낮과 자살의 관계 무관함을 보여준다. 실제 프랑스 농민은 혹한기가 지나 가장 활동이 활발한 6월이나 7월에 가장 많이 자살한다.(127) 오히려 자살은 사회생활의 강도, 사회적 조건에 의존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129) 자살을 모방의 측면에서 볼때, 개인과 개인 사이에 자살의 전염은 일어나지만, 사회적 자살률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155) 프랑스의 자살률을 군단위로 조사해 보면, 중심부로부터 확산된다기 보다, 상당히 많은 도에서 주요 도시가 아닌 군이 자살률 선두를 차지했고, 이런 현상은 덴마크나 중부독일에서도 발견된다.(149-150) 자살은 동심원 구도 보다는 중심을 갖지 않고 대체로 동질적인 집단을 형성하면서 분포하고, 이는 자살을 결정하는 조건이 일반적인 성격을 띄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회적 환경의 상태가 같은 곳이라면 같은 결과가 나오며, 사회적 환경이 갑자기 달라지는 곳에서는 자살률도 갑작스럽게 아주 달라진다.(151-152) 자살은 개인으로 환원될 수 없는 사회적 사실이다.(158)

뒤르케임은 자살을 세 가지로 분류한다. 이기적 자살, 이타적 자살, 아노미적 자살.

이기적 자살. 종교와 자살률.
유럽 어느 곳에서나 자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종교이다. 개신교의 자살률이 가장 높다. 다음은 카톨릭 교인, 그리고 유대교인이다.(176-177) 유대교와 독일에서의 카톨릭 신자는 소수 집단이다. 따라서 소수 집단의 자살률이 낮은 것으로 볼 수도 있고, 실제 개신교가 소수 집단인 지방에서는 자살률이 감소한다.(178-179) 개신교와 카톨릭 모두 자살을 금하고, 엄격하게 도덕적으로 제재하며, 사후 세계의 처벌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이들이 자살을 금하는 원천은 신의 권위이다. 그러나 자살에 미치는 두 종교의 상이한 영향은 두 종교를 차별화하는 일반적인 특징에서 나온 것이다.(180) 이 둘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개신교가 카톨릭 보다 자유로운 탐구를 허용하고, 카톨릭은 형식적 의식과 양심의 통제를 추구한다. 반면 개신교도는 신앙의 주체가 되며, 성경이 손에 쥐어질 뿐이고, 성직자의 계급도 없고, 자기의 양심 외에 다른 어떤 근원도 갖지 않는다. 그 결과 개신교는 수많은 분파가 나타났다. 개신교의 자살 경향은 이 종교의 원동력이 된 자유로운 탐구정신과 분명 관련이 있다. 자유로운 탐구에는 행복만큼이나 슬픔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전통적인 신앙이 붕괴했기 때문에 자유를 원했다. 반성은 반성을 피할 수 없을 때만 생겨난다.(181-182) 종교가 개인의 판단을 허용하면 할수록, 인간의 삶에 대한 지배력을 잃고 결속력과 지속력이 약화된다. 개신교가 높은 자살률을 보이는 것은 개신교 교회의 통합력이 카톨릭 교회보다 약하기 때문이다. 반면 유대인들은 특별한 결속력을 가지고 있다.(184) 영국은 모든 개신교 국가는 가장 자살자가 적은데, 성공회는 다른 개신교 교회보다 훨씬 강하게 통합되어 있고, 성직자의 계급제도도 있으며, 어느 개신교 국가보다 많은 성직자가 있기 때문이다.(185-186) 특히 성직자의 수는 종교의 본질로 카톨릭 성직자가 개신교 성직자 보다 많은데, 성직자는 신앙 및 전통을 담당하는 실제적 기관이다.(187) 개신교와 카톨릭의 교육열 특히 초등교육의 교육열을 살펴 본 결과 자살과 지식이 더불어 증가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인간은 종교집단의 응집력 상실 때문에 지식을 추구하게 되고 또 자살을 하기도 한다. 지식 때문에 종교가 해체되는 것이 아니고, 종교가 해체(기성관념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지식에의 욕망이 일어난다. 신앙이 이미 흔들리는 상태에서는 논증의 충격에 버틸 수 없다. 동시에 종교도 하나의 사회이기 때문에 집단적 정신상태(신실하고 전통적이며 의무적인 여러 신념과 의식)가 강할수록 종교공동체의 통합이 더욱 강해지며, 종교의 자살 예방적 가치도 커진다. 개신교 교회는 다른 교회보다 결속력(교리와 의식)이 약하기 때문에 결국 자살을 억제하는 영향력이 작다.(197-200)
cf. 이 부분은 거의 동시대의 독일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와 비교가 필요하다. 베버도 종교가 형성하는 사회적 관계의 결과로 나타나는 도덕에 관심을 가졌다. 둘의 연구 대상은 거의 같다. 그러나, 결론은 정반대이다. 베버는 개신교의 구원교리 분석을 통해, 개신교가 개인을 더 구속한다고 보았다. 흥미로운 점, 베버는 독일 북부의 개신교(루터교) 지역에 살았고, 뒤르케임은 카톨릭이 국교나 다름없는 프랑스에 살았다. 둘 다 자기 주변에서 흔히 볼수있는 종교가 개인을 과도하게 구속한다고 보았다.

이기적 자살. 결혼과 자살률.
결혼여부도 자살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미혼자와 기혼자를 단순비교하면 안된다. 동일연령 대의 미혼자와 기혼자를 비교하여, 자살면역성 혹은 자살방지계수를 구해서 비교해 보면, 몇 가지 사실이 발견된다. 첫째 너무 이른 결혼은 특히 남성의 경우에 자살률을 촉진하는 경향이 있다.(208) 둘째, 20세 이후 연령층에 있어서 기혼자는 남녀 모두 미혼자보다 자살방지계수가 높다.(210) 셋째, 미혼자와 비교해서 기혼자의 자살방지계수는 성별에 따라 다르다. 프랑스의 경우 남자가 높다.(210) 넷째, 사별한 사람들은 기혼자들보다 자살을 더 많이 하지만, 일반적으로 미혼자들보다는 적게 자살한다. 또 성별에 따라 다르며, 이는 사회마다 다르다.(211) 이런 일들의 원인은 무엇인가? 아내와 남편인가 자녀들인가? 선택과 계약으로 만들어진 부부관계인가, 자연현상이며 혈연에 따른 가족관계인가? 결혼이 자살에 미치는 영향이 적다는 증거는 19세기 초이래 결혼률은 변하지 않았는데, 자살률은 3배 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218) 자녀가 없는 기혼남자 보다 자녀가 있는 기혼남자가 덜 자살한다.(219) 자녀를 두고 있는 홀아비가 자녀 없는 기혼남자보다 자살을 덜 한다.(220) 자녀가 있기 때문에 홀아비가 삶에 더 집착하며, 자녀가 있기 때문에 홀아비가 겪어야 하는 위기가 더 커진다. 한편 프랑스의 경우 자녀없는 기혼녀는 미혼녀보다 1.5배나 더 자살한다. 아내가 남편보다 가족생활을 통한 자살 경향 방지의 이익이 적으며, 결혼생활 자체는 여자에게 불리하고 자살의 경향을 악화시킨다. 다만 자녀의 존재가 결혼의 불리한 영향을 감소시킨다.(221-223) 기혼에서 사별함으로 기혼남일 때 누리던 이점을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남자가 여자보다 더 불리해지며, 홀아비의 사망률이 과부의 사망률보다 훨씬 높다.(227) 자살은 개인의 타고난 특질 때문이 아니라, 개인을 지배하는 외부 원인 때문이다.(229) 결혼생활과 가정생활이 행복할수록 사별의 슬픔이 크며, 반대로 바람직스럽지 못했을 때 사별의 위기가 심각함을 각각의 자살률이 보여준다.(233-234) 한 사람의 죽음이 다른 사람의 자살 가능성을 증가시킨다면, 가족에 재난이 일어났기 때문에, 즉 생존자들이 겪어야 하는 충격 때문이다. 가족 사회는 종교 사회와 마찬가지로 자살을 방지하는 강력한 요인이다. 동시에 이런 면역성은 가족의 밀도, 즉 가족 수의 증가에 따라서 증가하기도 한다.(235) 또한 자살은 삶의 어려움 때문에 일어난다는 통속적인 관념은 사실이 아니며, 그와 반대로 삶의 부담이 늘어날수록 감소한다.(238) 한 집단의 공동생활의 정도, 통합 상태만이 집합생활의 밀도를 반영한다. 가족은 자살에 강력한 예방력이 있으며, 가족이 강력히 통합되어 있을수록 자살의 예방력도 커진다.(240-241)

이기적 자살. 정치적 격변.
이런 법칙은 정치사회에도 적용된다. 프랑스에서 19세기에 일어난 모든 혁명은 그 혁명이 일어날 당시 자살의 수를 감소시켰다.(241) 프랑스를 뒤흔들었던 위기가 유럽 전체로 퍼졌던 1848-1849년 사이에 모든 나에서 자살이 감소했다. 보나파르트 쿠데타도 자살률을 감소시켰다.(242) 선거 결과 등도 비슷한 것을 보여주는 데, 정치적 열정의 고조기에 자살률이 감소하고, 시간이 흐르고 권태로워지면서 조금씩 감소한다.(243-244) 정치적 소요와 마찬가지로 국가간의 전쟁도 영향을 미친다. 전시에는 자살률이 감소한다.(244) 그러나 모든 정치적, 국가적인 위기가 이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고, 대중의 열정을 자극하는 위기만이 영향을 미쳤다. 프러시아-프랑스 전쟁은 자살 경향에 강한 영향을 미치지만, 왕조 전쟁인 크림 전쟁이나 이탈리아 전쟁은 덜 영향을 미친다. 프러시아-프랑스 전쟁의 경우에도 카톨릭 지역이고 독립적인 바이에른은 전쟁에서 역할을 담당하고 전군을 동원했으나 정신적으로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살률은 적게 감소했다.(247) 사회적 사건이나 국민적인 전쟁은 집단 감정을 일으키며, 당파심과 애국심, 사회 및 국가적 신념을 자극하고, 단일한 목적을 향해 모든 활동을 집중시킴으로 적어도 일시적으로 사회의 통합을 더욱 강화시킨다.(248)

이기적 자살. 정리.
자살은 종교 사회 / 가족 사회 / 정치 사회의 통합 정도에 반비례 한다.(249) 집단적 힘의 약화는 자살의 증가를 의미하며, 사회가 강력히 통합되어 있을 때 사회는 개인을 통제하며 지배할 수 있기 때문에 개인의 자살을 금지한다.(250) 개인이 사회에의 종속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면, 사회는 개인에 대해 지배권을 주장할 수 없고, 개인은 좋아하는 집단에 소속되었을 때, 자신의 이익보다 소중한 집단의 이익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 삶에 집착한다. 지나친 개인주의는 자살을 유발하는 원인을 촉진할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자살을 유도하는 원인이다.(251) 이것이 이기적 자살의 특징이다. 이기주의는 인간성에 배치되며 영속성을 갖기에는 너무나 불확실한 상태이다.(252) 인간행위의 고차원적 형태는 집단적 기원을 가지고, 집단적 목적을 가진다. 그런 행위는 사회에서 유래되므로 사회를 준거로 한다. 즉 이 행위들은 우리 각자 안에서 구체화되고 개별화된 사회 그 자체이다. 우리가 사회 자체에 의존하는 정도만큼 인간행위에 의존한다.(254) 확고한 신념을 가졌거나 가족 사회 또는 정치 사회에 강력하게 연결된 사람에게는 개인적 회의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255) 기독교인들은 회의를 느낄수록, 속한 종교적 공동체의 진정한 일원이라고 느끼지 않게 되어 신앙에서 멀어지고 가족이나 공동체가 낯설게 느껴질수록 자신을 이해할 수 없어, “무엇 때문에 사는가?”하는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255-256) 인간은 사회의 작품이기 때문에, 무가치하게 되었다는 느낌은 사회의 퇴락을 의미한다, 좌절과 실망의 물결은 사회 자체의 해체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시기에 새로운 도덕이 나타나 사실을 윤리로 올리고, 자살을 칭송하거나 짧은 삶을 권유하여 자살로 유도한다. 이런 도덕은 결과에 불과하며, 이런 경향은 집단적이다.(258) 자살은 어린이들 사이에서는 아주 드물로 노년층에서는 줄어드는데, 노인들은 사회에서 은퇴했기 때문에 사회가 없어도 자족적인 삶을 누릴 수 있다.(259)

이타적 (의무적) 자살. 원시부족(미개사회).
개인주의의 부족함 즉, 사회적 통합이 너무 강해서 생기는 자살.(262) 자살은 원시부족에서 매우 흔했다. 주로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늙거나 병든 남자의 자살, 남편이 사망한 여자의 자살, 족장의 죽음을 따른 부하나 시종의 자살. 이런 자살은 의무이기 때문에 하는 자살이며, 이를 수행하지 않으면, 명예를 잃을 뿐 아니라 종교적인 제재를 통해 징벌을 받는다. 노인들이 계속 생존을 고집하면 사람들의 존경을 상실하는 사례들이 있다. 그런 노인에게 장례의식을 치러 주지 않으며, 내세에 끔찍한 운명을 맞게 되기 때문에, 자살하도록 사회적 압력이 가해진다.(265) 이런 현상은 독특한 종교적인 설명을 가지고 있다. 한 가족의 수호신은 가장의 몸에 거주하며, 그 사람의 건강과 질병, 노쇠 등을 공유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노쇠는 신을 약하게 하고, 이는 집단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진다. 이런 경우 사회는 개인에게 자살을 강요한다. 이런 자살이 성립하려면, 개인의 인격이 작은 가치밖에 없어야 한다.(266) 약한 개체화의 원인은 강력한 통합이며, 이런 집단은 작은 규모이다. 개인의 가치가 작기 때문에, 스스로를 해치는 행위는 비교적 약한 제재를 받는다. 이런 자살은 부족한 개인화 때문이다.(267)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를 보면 이런 사례를 잘 알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사회에서는 사소한 모욕, 부부싸움이나, 질투 등 사소한 즉각적, 명시적 동기로 자살이 일어난다. 자살에 우호적인 이런 사회에서는 삶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도 미덕으로 간주되므로, 자살은 사회적 위신을 얻고 부추겨진다. 모욕을 벗어나기 위해, 또 존경을 얻기 위해 자살한다.(269) 미개사회의 이런 관행은 자기 부정과 극기 훈련이 되어 있어서 가능하다. 이타주의는 원시인의 도덕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270)

이타적 자살. 종교와 범신론.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등은 순교에 가까운 자살을 한다. 이런 이타적 자살은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허물을 버리는 것이다. 자살은 보통 범신론적 믿음과 공존한다.(271-3, 275) 반면 기독교는 현세를 슬픈 시험의 기간으로 보나, 개인에게 현세에서 받은 의무를 완수하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부여함으로 온건한 개인주의를 형성하여, 자살을 선호하는 경향이 없다.(274) 이런 종교적 관념들은 사회적 환경의 창조자들이라기보다는 그 산물이다. 이런 자살의 원인은 종교가 아닌 사회에서 찾아야 한다.(275-276) 이런 이타적 자살의 범주에 자신들의 학살을 자발적으로 허용한 기독교 개종자들의 행동과 몇 차례 중세의 수도원을 휩쓸었던 자살의 광풍도 분명히 종교적 열정의 과잉 때문에 발생한 자살이다. (276-277)

이타적 자살. 군대.
오늘날에도 이타적 자살이 만성적으로 일어나는 곳이 군대이다. 모든 국가에서 군인의 자살 경향은 민간인 보다 높다. 군대는 자살을 막을 수 있는 많은 요인이 있으며, 강력한 조직사회에 속한다.(278-279) 흔히들 군복무에 대한 혐오감으로 자살한다고 보지만, 적응기를 1년 정도로 보았을 때, 프랑스의 경우 10년 미만의 군 복무 기간에 자살률이 3배가 되며, 인도에 주둔한 영국 군대의 자살률은 20년간 8배로 증가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282) 게다가 장교 및 부사관의 군대생활은 병사에 비해 고생이 덜하고 자유로우나 자살률은 병사 보다 이들이 높으며, 자원자들(적응문제 없음)과 재입대자들(복무기간이 김)이 더 높은 자살률을 보인다. 자살을 가장 많이 하는 군인들은 군대생활에 가장 익숙하고 군의 필요에 가장 적합하며, 군생활의 불편과 부족함을 가장 덜 느끼는 군인들이다. 군인의 자살률이 높은 이유는 군인의 첫 번째 자질인 비인격성 때문이다. 명령에 무조건 따라야 하는 군인의 행동원리는 이타주의의 특성이며, 가장 미개 사회의 구조를 연상케 한다.(285) 따라서 복무기간이 길수록 군인들의 자기부정 경향과 비인격적 경향이 훈련으로 형성된다. 부사관들의 자살률이 높은 것은 그들의 역할이 수동적인 복종을 가장 많이 요구하기 때문이며, 장교는 개성을 가지기에 부사관 보다 자살률이 낮다.(286) 민간인의 자살 경향이 적을 수록 군인의 자살 경향은 높으며, 민간인의 자살 경향이 높으면 그 반대이다. 자살을 가장 많이 하는 덴마크의 군인들은 민간인보다 자살을 많이 하지 않으나, 민간인의 자살이 흔치 않은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미국, 영국은 군인의 자살률이 높다.(287) 유럽에서 민간인의 자살 원인은 문명 사회의 특징인 지나친 개인화이고, 군인의 자살은 그 반대의 경향, 너무 약한 개인화, 이타주의에서 발생한다. 자살 경향이 높은 집단은 가장 발전이 덜 된 사회이다.(288) 전통주의는 이기적 자살을 방지하지만, 전통주의가 정도를 넘어서면 그 자체가 자살의 원인이 된다. 군대는 전통주의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고, 군대교육의 영향은 민간인들의 생각과 감정에 일치할수록 더욱 크게 나타난다. 특히 어떠한 군대에서나 자살률은 정예부대가 더 높다. 알제리 주둔한 프랑스군 부대는 군인다움의 산실이지만, 2배의 자살률을 보인다. 정예부대의 극기정신과 군인으로서의 인내심이 원인이다.(290-291) 군대의 자살은 어디에서나 감소하고 있는데, 이는 낡은 군인정신이 쇠퇴함을 보여준다. 군인들의 수동적 복종, 절대적 순종, 비인격주의 등의 관습은 전점 더 대중의 양식과 모순되는 것으로 증명되었고, 설 자리가 없어져 간다.(291) 게다가 군인정신의 필수요소인 이타주의로 인한 자살은 사소한 좌절이나 쓸데없는 이유 등으로 쉽게 전염된다. 모방적 행동의 확산.(292) 이런 점들로 볼때, 자살은 주관적인 감정으로 정의되어서는 안된다.(294) 이타적 자살이 흔한 사회의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의 생명에도 가치를 두지 않는다. 반대로 개인의 인격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경우에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인격도 존중한다. 모든 종류의 자살은 단순히 과장되고 편향된 미덕의 형태에 불과하며, 이것이 도덕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이 이기적 자살과 이타적 자살을 구별한다.(295)

아노미 자살. 번영.
경제 위기가 자살 경향을 악화시키는 효과를 미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빈과 프랑크푸르트의 1873년 경제위기, 1882년 파리 증권거래소의 대폭락은 자살을 증가시켰다. 파산의 수도 자살률과 관련이 있다.(296-297) 생활이 힘들어질수록 자살이 증가한다면, 삶이 수월할수록 자살은 감소해야 한다. 그러나 빈곤의 증가가 자살의 증가를 일으키기는 커녕, 국가의 번영을 증진시킨 사태도 경제 위기와 마찬가지로 자살에 영향을 미친다.(298-299) 프로이센이 부유해져도 자살자가 증가했으며, 세계박람회도 자살자 수를 증가시켰다.(301) 반면 아일랜드의 농민들이 비참한 생활을 하는데도, 칼라브리아나 스페인에서도 자살률은 낮다.(302) 자살이 증가하는 이유는 그것이 위기(고비)이기 때문이다. 즉, 집단적 질서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모든 평형상실은 그것이 수입을 증가시키고 활력을 증대시킨다 해도 자살의 자극제가 된다. 사회질서가 심각하게 재적응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갑작스러운 성장이든 예기치 않은 재난이든 사람들이 자살하기 쉽다.(303) 인간은 동물과 달리 자신이 필요하고 소모하는 양만큼만 욕구하지 않고, 개인적 차원의 욕구수준이 무한하다.(304-305) 욕망은 무한하므로 만족을 모르는 것은 정신적 이상의 증거다. 사라지지 않는 갈증은 고문이다. 그러므로 욕망의 제한, 외부적 정신적 통제력이 필요하다.오직 인간이 정당하다고 인지한 한계에 의해서만 멈출 수 있다.(306-307) 인간은 정의의 법을 존중하는 권위로부터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며, 그 권위에 대한 자발적 복종, 즉 조정 역할은 사회만이 공공의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보상수준을 정할 수 있다. 각 직업별 노동의 보상 기준은 여론에 따라 매겨지며, 상한선과 하한선이 있다.(308) 사회적 압력에 따라 개인은 자기 위치에서 막연하게 욕망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이상은 희망하지 않으며 개인은 규칙을 존중한다. 각 계급은 모두 한계 안에서 움직이며, 개인은 정당한 보상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309-310) 날 때부터 더 적게 물려받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불리한 몫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도덕적 훈련이 필요하다.(311) 규율은 사람들이 그것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만 유용하다. 그러나 봉기는 예외적이다.(312) 사회가 고통스러운 위기를 겪거나, 유익하지만 급작스런 전환을 맞이하면 갑작스러운 자살곡선의 상승이 일어난다. 이런 과정에서 낮은 지위로 떨어지게 된 이들에게 도덕적 교육이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313) 위기의 원인이 갑작스런 부의 증대인 경우, 사회적 가치는 불명확해지고, 모든 규제는 마비되며, 사람들의 욕망은 방향을 잃고 한계를모르게 되어, 일종의 이상흥분에 사로잡힌다. 가장 규제가 필요한 상황에서 욕망이 규제를 받지 못하므로 일종의 무규율 상태, 즉 아노미가 더욱 고조된다. 욕망은 만족을 모르며, 흥분은 지속되고, 경주는 경주 그 자체 외에 즐거움이 없으므로, 경쟁이 점점 더 치열해지고 고통스럽게 된다. 모든 계급의 성원은 경주에 나서며, 가장 비생산적일 때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314-315) 반면 빈곤은 그 자체가 일종의 규제이므로 자살을 방지하고, 이에 따라 빈곤한 국가에는 자살이 현저하게 적다. 많은 종교가 가난의 미덕과 자제를 가르치는 데, 종교는 자제를 가르치는 최고의 학교이다.(315-316) 아노미는 간헐적으로만 위기에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상업과 공업에서는 만성적이다. 지난 1세기 동안의 경제발전은 산업적 이해관계를 모든 구속에서 해방시켰다. 산업적 이해관계를 규제하던 종교는 이제 거의 힘을 잃었고, 정부는 경제생활을 지배하는 대신, 경제의 도구나 시녀가 되고 있다. 정통파 경제학자나 사회주의자들은 정부를 개인적 계약의 보호자로만 만들려 한다.(316-317) 욕망은 신성시되어 번영 숭배는 모든 인간의 법률 위에 올라서며, 경제적 추구를 제한하면 신성 모독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산업계 내에서 직업 집단을 통한 공리적 규제까지 지속이 어렵게 되었다.(318) 산업 사회의 흥분 상태는 사소한 실패도 견디지 못하게 하며, 과거도 미래도 지향하지 못하고, 소용 없는 끊없는 추구는 환멸과 권태감으로 남는다. 이런 정신상태가 자살 증가의 주원인이다. 일체의 제약 자체를 혐오하는 상태.(319) 불안정성을 찬양하는 무질서는 경제계에서 가장 심하여, 공업 및 상업 부분이 가장 자살자가 많고, 자유전문직 종사자가 거의 비슷하며, 고용주는 아노미의 영향을 많이 받고, 독립자산가는 높은 자살률을 보여, 가장 많이 가진 자가 가장 피해를 입으며, 종속을 강요하는 모든 요인은 아노미 상태를 희석시킨다.(320-321) 아노미성 자살은 새로운 유형으로 이기적 자살은 진정한 집단활동의 결핍으로 개인이 목적과 의미를 상실하는 경우이고, 아노미성 자살은 개인의 열망에 미치는 사회의 영향이 결핍됨으로써 개인을 제동 없이 방치하여 일어난다. 이기적 자살은 지적 직업, 즉 사색의 세계에서 아노미성 자살은 공업 및 상업의 세계에서 주로 일어난다.(322-323)
cf. 뒤르케임은 이미 경제발전으로 인해, 경제가 정부, 종교 등 모든 것을 지배한다고 주장. 신자유주의의 도래 예견?

아노미 자살. 결혼.
배우자를 사별한 위기로 인한 자살은 가정적 아노미로 인한 것이다. 이혼 및 별거자와 자살자 수가 비례한다.(323) 개신교를 믿는 주들은 이혼도 가장 많고 자살도 가장 많다, 그 다음은 종교가 섞인 주들이며, 마지막이 카톨릭 주들이다.(324) 사별한 사람보다 많은 이혼과 자살의 상관관계는 이혼의 내재적 성격, 이혼의 결과로 일어나는 정신적 물질적 생활변화가 원인이다.(324-328) 이혼은 종식된 결혼의 영향(결혼의 특성)으로 헤어진 후에도 영향을 받으며, 이혼이 보다 빈번한 나라는 자살방지계수가 낮아진다. 특히 이혼이 빈번한 사람들 사이에서 출산율이 높아 가족 밀도가 높다.(328-332) 이혼이 없는 나라에서 아내는 남편보다 불리하다. 여자들은 이혼이 보다 쉽게 이루어지는 나라에서 더 불리하다. 이혼이 인정되는 나라에서는 남편이 아내보다 보호받지 못하며, 이혼의 빈도가 증가할수록 남편은 더 불리해진다.(332-333) 이혼이 허용되지 않거나 최근에야 이혼이 법제화된 나라에서는 미혼자보다 기혼자의 자살에서 여성 비중이 더 많다. 이혼이 흔한 나라에서는 결혼으로 여자가 유리해지고 남자가 불리해진다. 이혼이 자유로울수록 자살에 관해 여자가 유리해지며, 이혼이 드물수록 여자는 더 불리하다.(334-335) 이혼이 흔한 사회에서 자살률 상승은 주로 기혼남성 때문이며, 기혼여성은 다른 곳에서보다 자살빈도가 낮다. 결혼은 남편과 아내에게 반대되는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쪽은 유리, 다른 한쪽은 불리. 이혼제도 자체가 결혼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자살의 원인이 된다.(337) 남편이 결혼에서 얻는 혜택은 정신적 균형을 만든다. 남자는 의무에 충실하고 욕구를 제한한다.(338) 미성년자는 어디서도 만족을 얻지 못한다.(338) 아노미는 이중적이다. 스스로 자신에게 확실한 것을 줄 수 없는 만큼, 자신에 대한 확실한 권리를 갖지 못해,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며, 좌절, 불안, 불만 등의 결과가 자살 가능성을 증가시킨다.(339). 이혼은 결혼 규제의 약화를 의미한다. 이혼이 허용되는 사회의 결혼은 환상에 불과한 열등한 결혼이다.(339) 사람은 언제 어디서 끊어질지 모르는 사슬로는 강하게 규제될 수 없다. 이 경우 결혼으로 얻는 이점이 상쇄되어, 자살률이 증가한다.(340) 여성의 성적 욕구는 정신적이고 자연적으로 욕구를 제한할 수 있어, 결혼은 여성에게 욕망을 제한하는데, 유용하지 않다. 이혼은 여성을 보호하며 여성들은 남자보다 이혼에 더 의지한다. 이혼이 빈번한 사회의 기혼남자 자살은 아노미적 자살이다. 결혼의 통제력이 약해진 상태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다.(341) 이혼이 허용되는 사회에서 결혼의 불안정성이 있고, 미혼자들의 자살률은 성적 감정이 가장 강렬한 시기에 가장 높지 않다. 남자의 1.5의 자살방지계수는 남자가 결혼의 통제력에 얻는 이득과 정신적 안정을 나타낸다.(343) 인생의 특정 시기에는 남자와 여자는 같은 방향으로 결혼의 영향을 받는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어서 인간이 순화되고 규율을 필요로 하는 연령에 이르면 결혼이 자살을 방지하는 효과를 보인다.(344) 여자는 결혼이 유리할 때 얻는 이득보다 불리할 때 받는 피해가 더 크며, 남자들은 결혼으로 혜택을 입고 있다. 남성이 포기하는 자유는 고통의 원천일 뿐, 여성은 자유를 포기할 필요가 없는데도, 같은 규제를 받음으로 희생하고 있다.(345)

자살의 종류 정리.
자살은 하나가 아닌 여러가지 형태로 원인의 차이가 결과의 차이를 만든 것이다.(346) 활동은 원심적이고 자신의 한계 밖에서는 존재가 흩어지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이타적이라고 할 수 있고, 반면 성찰은 개인이 외부세계와 떨어져 자신 속으로 은둔함으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에 개인적이고 이기적이라 할 수 있다.(348) 관념과 활동은 대립관계에 있으면 반대방향으로 진행하고 삶은 활동이다. 사고하는 만큼 인간은 삶의 포기하는 것이며, 절대적인 관념의 지배는 죽음을 의미한다.(350) 일체의 외계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치는 스토아 학파의 교리는 자살로 끝나고 만다, 이같은 정신상태의 놀리적 귀결이자 최종행동(자살)이다.(351) 행동에 대한 혐오와 기피, 우울과 고독 등은 이기적 자살의 특성인 지나친 개체화에서 나온 것이며, 개인이 스스로 고립되는 것은 자신과 타인을 연결하는 유대가 약해지거나 끊어졌기 때문이며, 사회와 그가 접촉한 부분에서 충분히 통합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 조직망 약화의 결과이며, 이기적 자살은 고도의 지식과 성찰의 지능을 필요로 한다.(352) 모든 것에 의문을 품은 정신은 자기 자신에게도 의문을 가지며, 내적 몽상의 허무에 빠진다.(353) 반대의 유형은 자신의 상황을 즐겁게 결정을 내리며, 어린아니나 동물처럼 살아가고, 욕구 자체를 단순화한다. 만일 그 유일한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될 때는 의미가 없어진 생존을 끊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이것은 에피쿠르스적 자살이다.(353) 감각적 쾌락은 인간을 삶에 연결시키기에 매우 약한 고리이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사소한 상황의 자극에도 삶을 버릴 준비를 하라고 가르쳤다. 이들의 자살은 지적인 사람보다 정열이 없고, 마지막 순간에 고통을 최소화하려 할 뿐이다. 방탕한 삶의 죽음에서 봄녀, 더 이상 안이한 삶을 계속할 수 없는 순간이 오면 평온을 느끼고 자살한다.(345) 이타적 자살은 우울한 권태나 에피쿠스르적 무관심과 같은 총체적 우울증을 특성으로, 일종의 정열의 연소를 요구하며, 의무적 자살은 양심의 명령에 의한다. 광신자, 수도승, 원시인, 군인의 자살은 아주 적극적이다.(355) 세번째 종류의 자살, 즉 아노미적 자살은 자살과 관련된 모든 감정과 분노, 노여움, 격노, 좌절감이 원인이며, 이런 분노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표현된다.(357) 통제를 벗어난 감정들이 서로 조정되지 못하고, 충족되지 못하고, 한계를 초과하여 환멸과 실망의 길을 려고, 분노는 자신을 파멸시킨 실제 또는 상상의 원인에 반감을 가진다. 자신에 분노하면 자살하며, 다른 사람에게 분노하면, 살인이나 폭발이 일어난다.(358) 사랑의 실패 때문의 자살이나, 성공에 심취한 예술가들이 한순간의 야유나 심한 비평 또는 인기의 하락으로 자살하는 경우이다.(359) 불만을 품을 상대나 상황이 없는 사람들은 자극시키기만 하는 가망 없는 노력에 지치고, 삶 자체에 불만을 품고 삶이 자신을 속였다고 비난한다.(359) 지배적인 정서는 삶에 대한 분노에 찬 경멸이다.(360) 이기적 자살과 아노미적 자살은 다 같이 무한의 병이라고 불리는 것에서 기인한다. 이기적 자살의 경우는 성찰적 지성이 무절제하게 약화되며, 아노미성 자살의 경우에는 감정이 너무 흥분해서 모든 규제를 벗어나게 된다. 이기적 자살은 사고가 자아 속으로 후퇴함에 따라 목표를 잃은 경우이고, 아노미성 자살은 한계를 모르는 열망이 목표를 잃은 경우이다. 전자는 꿈의 무한함 속에서, 그리고 후자는 욕망의 무한함 속에서 각기 길을 잃은 것이다.(361) 자살의 여러 종류는 사회적 원인이 개인의 내부로 연장된 것과 같고, 또 여러 가지 유형의 특성들이 하나의 자살에 통합되어 있는 것이다. 상이한 사회적 원인들이 한 개인에게 영향을 미쳐 복합적인 결과를 일으키기 때문이다.(361) 특히 이기주의와 아노미는 서로 친밀성을 가진다. 아노미가 덜 강한 경우에는 이기주의가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아노미는 이타주의와도 관련될 수 있다. 파산한 사람의 자살은 가난하게 살 수 없어서 이기도 하고, 불명예로부터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도 이다.(362-364)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도 그 영향이 결합될 수 있다. 사고 속에서 상상의 존재를 만들어서 모든 것에서 소외되며, 가상의 존재에 전부를 바치고, 현실과 상반되는, 현실세계에서는 개인주의자이나, 이상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이타주의자가 된다.(364) 스토아적 자살의 원인과 성격이 그렇다. 이기주의의 우울과 이타주의의 정열이 다 나타나는 이기주의와 신비주의가 혼합되어 있다.(365) 자살의 성격과 자살자가 선택한 죽음의 방법 사이에 상관관계는 없다. 각 국민들은 선호하는 자살방법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367-368) 사람은 가장 손쉽고 일상생활을 통해 익숙한 죽음의 방법을 선택한다.(369) 자살의 일반적 특성은 사회적 원인의 직접적 결과다. 이기적 자살-무관심-자기만족의 나태한 우울증, 회의적 환멸과 냉정. 이타적 자살-열정과 의지력-평온한 의무감, 신비한 열정, 평화로운 용기. 아노미성 자살-흥분-평범한 생활에 대한 심한 비난, -분노-특정한 개인에 대한 비난(타살-자살). 이기적-아노미성 자살-선동과 무관심, 행동과 공상의 혼합. 아노미성-이타적 자살-격앙된 흥분. 이기적-이타적 자살-도덕적 용기를 내포한 우울증.(370)
cf.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 수사를 피하려는 국정원 지구언과 경제인의 자살. 송파 세모녀. 노무현 등.

자살률 – 사회적 현상(실체)
사회적 자살률이란 사회학적으로만 설명될 수 있으며, 이 집단적 경향은 개인적 경향의 결과라기보다는 모든 개인적 경향의 원천이다.(378-379) 각 사회는 짧은 기간 동안에는 쉽게 변하지 않는 고유의 특성이 있으며, 그와 같은 자살 경향은 집단의 정신 상태에 근거하므로 집단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고, 각 집단의 자살 경향은 오랜 기간 일정하다.(386) 이런 공동의식의 상태는 집단적 생존에 있어서 가장 개성적이고 안정적이다.(387) 이런 집단적 경향은 개인의 의식을 지배하는 독자적 세력은 아니나 그런 성격을 가진다.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은 해마다 바뀌지만 자살자의 수는 사회 자체가 변하지 않는 한 오랫동안 일정하며, 집단생활의 전개는 잉정한 리듬을 따른다. 특정한 사회, 특정한 지역의 자살 경향을 결정하는 원인은 개인과는 무관하다.(388-389) 사람을 자살하게 만드는 정신 상태는 단순히 그대로 전승될 뿐 아니라 놀랍게도 같은 수의 사람들에게 전파되고, 그러한 상황에서 같은 행동을 유발시키는 정신 상태까지 전파한다.(390) 모든 개인적 사례를 초월하는 어떤 비개인적 원인이 영속적 작용. 집단 경향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며, 자연적 힘과 마찬가지로 종류는 다르다고 해도 실재하는 힘이다. 자연적 힘과 경로는 다르지만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며, 실체는 결과의 통일성으로 드러난다. 그 세력은 정신적인 것이어야하므로 사회적이다. 사회적 사실은 객관적이다.(391-392) 이 새로운 개념은 집단 경향과 집단 사고가 개인적 경향이나 사고와 다른 성격의 것이며, 개인적 경향이나 사고에는 없는 특성을 갖고 있음을 나타낸다.(393) 사회학이 과학이 되려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세계에 대한 연구를 해야 한다. 이 새로운 개념은 집단 경향과 집단 사고가 개인적 경향이나 개인적 사고와는 다른 성격의 것이며, 개인적 경향이나 사고에는 없는 특성을 갖고 있음을 나타낸다. 개인들이 결합되면서 새로운 종류의 정신적 존재를 형성하고, 그 자체의 지배적 사고와 감정의 방식을 갖게 된다.(393) 사회생활은 근본적으로 표상에 의해 이루어지며, 집단적 표상만이 개인적 표상과 다른 성격을 갖게 된다.(395) 종교의 기원은 지각을 갖춘 인간이 신비하고 두려운 존재에게 느끼는 공포와 경의심의 감정이고, 사회의 성격에 따라 종교도 달라진다. 즉 집단 속의 인간 만이 종교적으로 사고 할 수 있다. 사회라는 신은 인격적 형태를 갖고 있다. 종교는 사회가 그 자체를 의식하는 상징의 체계이다. 종교는 집단적 존재가 사고하는 독특한 방식이다.(396) 사회가 개인들만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회는 또한 공동생활에 기본적 역할을 수행하는 물질도 포함하고 있다. 사회적 사실은 때때로 외적세계의 요소가 될 만큼 물질화될 수 있다.(398) 어린이들의 취향, 국민성, 신앙의 교리, 고정된 법률, 심미적 정신, 도덕성 등을 검토하면서, 뒤르케임이 말하는 것은 기호가 실체라는 점이다. 위기 시에 애국적 감정이 일으키는 집단적 충동은 문자 그대로 적용된다.(401) 분노는 집단적이며, 사회적 분노는 가장 심한 보복을 요구할 정도로 강력하다.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여론이다. 우리는 개인으로서가 아니 집단의 압력 아래에서 행동한다.(402) 사회의 집단적 유형과 개인의 평균적 유형을 혼동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과오이다.(403) 종교는 도덕성을 신에게 귀속시키지만, 도덕성은 체험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사회로부터 나오므로 도덕성이란 집단의식일 수밖에 없다.(404) 한편으로는 통계적 자료의 규칙성이 다른 한편으로 상당히 많은 수의 중요한 사례는 이런 외재적 성격을 입증한다. 사회적 의식은 우리 밖의 외적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집단적 힘은 개인을 지배하려 하고, 개인적 힘은 집단적 힘의 지배를 배척하려고 한다.(404-405) 사회 현상이 모든 개인의식을 하부구조로 갖는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현상이 모든 개인적 의식이 통합되고 결합되어 형성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부구조는 부분들로 구성된 전체이므로, 구성요소들과 마찬가지로 실제이며, 개별 요소들 역시 복합체이다.(406-407) 사회가 개인들 없이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들의 결합으로 형성되는 집단은 각 개인과는 다른 종류의 실체를 갖는다는 것, 집단 안에서 그 속성으로부터 집합적 상태가 발생하며,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개인 안에 새로운 형태로 순수한 내면적 존재를 만든다는 것이다.(407)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자살의 경향은 어느 국민에게도 공존하며, 서로 상쇄하거나 자살생성적이 된다. 이때 자살의 강도는 다음 세 원인에만 의존한다.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성격, ⓑ개인들이 결합하는 방식, 즉 사회조직의 성격, ⓒ사회의 해부학적 구성을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집단생활의 기능에 혼란을 일으키는 국가 위기나 경제 위기 같은 일시적 사건들.(409) 자살률을 좌우하는 사회적 조건만이 변화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다. 자살률이 일정한 것은 자살을 일으키는 비개인적 원인과 자살을 지속시키는 비개인적 원인이 같기 때문이다. 사회단위들의 집단화나 개인과 집단의 공존성에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자살률은 각각의 집단적 개성의 특성이다.(410) 그러나 집단적 감정도 개인들이 절대적으로 원치 않을 경우에는 개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집단 경향은 예비적 성향 없이는 개인을 강제할 수 없다.(410-411) 사회가 대체적으로 개인을 형성하되, 사회의 이미지에 따라 개인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412) 신경증적 경향은 자살자가 좀더 쉽게 자살 경향에 굴복하게 할 뿐이다.(412)
*** 어찌 보면, 이 책 전체는 이 주장을 하기 위해서 쓰여졌는지도 모른다. 사회는 사회학의 연구대상이며, 사회학적 실체이다. 실제, 실체 표현이 왔다 갔다 하는데. 뒤르케임이 이를 혼동했을 리 없다. 다분 의도적일 수 있다. 다음장(요약의 아래 문단)에서는 실재로 표현하다. actual, real, substance, substantial, reality를 뒤섞어 사용했다면, 분명히 의도가 있다. 프랑스어본을 볼 능력은 안되니, 영어본이라도 확인을.
*** 게다가 그는 흥미롭게도 이 실체를 표상과 관념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단순한 사고와는 분리하고, 감정을 유발하는 것으로 본다. 사회실재론 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표상실재론? 고려해볼 사항이 너무 많다.

자살은 범죄인가?
기독교 세계에서 자살은 범죄로 정하고, 공식적으로 금지했으며, 종교적인 처벌까지 가했다. 1789년 대혁명이 일어나면서 자살은 형법상 범죄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여러나라는 오랬동안 시체훼손 등의 방법으로 자살자에 대한 처벌을 계속해 왔다. 이슬람 사회도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자살을 금지한다. 반면 고대국가인 그리스와 로마에서 자살은 국가의 허락을 받지 못한 경우에만 불법으로 간주된다.(416-420) 나라마다 자살에 관한 법률은 두 주요 시기를 거친다. 국가의 허가 없는 개인의 자살이 금지 되다가, 자살에 대한 규탄이 절대적으로 보편적이 된다. 자살은 국가의 권리에 비해 개인의 권리가 성장할 수록 더욱 엄격하게 금지된다. 인격은 침해할 수 없는 신성한 것이다. 인간은 종교적 가치를 가지는 인류의 종교가 되었다. 자살은 근본적으로 종교가 관련된 문제이다.(424-426) 자기부정을 지시하는 소리에 자발적으로 복종할 때, 근원을 외부에서 찾으며, 감각을 외부로 투사하고, 자신을 초월하는 외재적 존재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모든 종교와 도덕의 기초를 형성하는 초월성이라는 관념의 근원이다. 이런 관념이 상징하는 과정 자체는 실재한다.(428-429) 인간숭배는 이기적 개인주의와는 다르다, 인간숭배는 개인들을 하나의 목표 아래 결합시키고, 같은 일을 위해 노력하도록 한다. 인간 일반은 관념화한 이상적인 인간이다. 우리는 인류의 일반적인 이익을 위해 자신을 종속시키며, 이런 이상은 사회조차도 지배한다.(431) 자살은 범죄와 상관성이 없다. 성, 연령, 기후, 환경 등과도 무관하며,(438-452) 자살을 억제하는 전쟁도 살인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453) 자살은 도시에서 많으나, 살인은 농촌이 많고, 카톨릭은 자살 경향이 적으나 살인은 카톨릭 국가에서 많다.(455) 가족생활은 자살은 억제하나 살인은 자극한다.(456) 자살과 살인은 때로는 공존하고, 때로는 배타적이다.(457) 이기적 자살과 살인은 서로 상반되는 원인에서 발생하며, 이타적 자살과 살인은 서로 조화될 수 있다.(460) 아노미성 자살은 도덕수준에 달려있다. 도덕성이 낮은 사람은 타인을 살해한다. 문명의 중심지에서 살인과 자살이 공존하는 경우는 아노미가 심하다.(461) 일반적으로 살인과 자살은 서로 반대 경향을 보이며, 아노미성 자살은 상공업활동이 활발한 특별한 상황에서 자주 일어난다.(462) 대중의 의견이 개인에게 큰 가치를 부여하면, 우리는 그와 같은 사회적 평가를 우리 자신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적용한다. 타인들도 우리 눈에 가치 있게 보이며, 타인들 개개인의 일에도 민감해 진다. 타인의 슬픔도 참기 어려운 것이 된다. 타인에 대한 동정과 자신에 대한 감정의 확장만이 아니다,모두 하나의 원인에서 나온 다른 결과이다. 이런 정신 상태가 자신에게 적용될 때는 이기적 본능이 그런 상태를 강화하고, 타인에게 적용될 때는 이기적 본능 때문에 약화된다. 개인의 기질에 가장 깊이 관련된 감정조차 개인을 초월하는 원인에 근거를 두고 있다. 즉 이기주의까지도 상당부분 사회적 산물이다.(464-466)

자살은 병리현상인가?
현대문명에서 자살은 정상적인가 비정상적인가? 자살은 때로는 금지, 때로는 비난, 때로는 유보나 예외도 있었다. 자살은 언제나 공공의 주목을 받았다. 자살은 유럽 사회의 일반적 구성 요소이며, 사회적 구성요소이다.(469) 미개사회의 경우 집단에 대한 종속이 근본원리이다.(469) 자살은 특정한 조건에서 각각의 정신적 특성에 의해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현상이다. 모든 사회는 각각의 집단적 상태의 변화에따라 특수한 환경을 가지며, 상황에 따라 집단적 상태가 강화되기도 하고 약화되기도 한다.(471) 오늘날의 자살경향은 문명의 대가라고 불린다. 자살은 유럽에서 가장 많으며, 문명의 정도가 높을 수록 많다. 자살은 가장 발달된 지역에 많이 퍼져 있다. 지성의 발달과 자살 사이에 연관이 있다.(474-475) 로마제국의 전성기에 자살이 유행했고, 18세기까지만 해도 자살은 크게 증가하지 않았다. 오늘날 자살이 발생하는 것은 특수한 상황 때문이며, 이 상황은 정상적이 아니다. 오늘날의 발전은 병적 흥분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자살 경향의 상승은 문명이 키운 병리적 현상일 뿐, 문명 자체가 필요조건은 아니다.(476) 우리 사회조직은 자살률이 급격하게 상승할 만큼 심각한 변동을 겪었음이 분명하며, 변동이 지나치게 심각하고 급격했기 때문에, 불건전한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자살은 정상적인 진화의 결과가 아니라, 과거의 제도를 붕괴시키는 데는 성공했으나 새로운 것을 세우지 못한 병적인 상태에서 유래된다. 자살의 급증은 위기와 혼란 때문이다.(477) 이런 상황에서 비관주의 철학이나 탐미주의, 무정부주의, 신비주의, 사회주의 혁명론자들이 현존 질서에 대한 혐오와 멸시의 감정, 현실을 파괴하고 도피하려는 열망을 가진다.(478-479)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처벌은 불가능하다. 자살은 순수한 미덕에 가까우며 과장되었기 때문이다. 관용의 혜택, 동정을 받기 쉽다. 자살에 대해서는 도덕적 처벌만이 가능하나 이런 것은 2차적일 뿐으로 악의 근본을 없애지 못한다. 우리가 자살을 관용하는 것은 그런 정신상태가 일반적이기 때문에 자신을 정죄하지 않고는 자살을 정죄할 수 없다. 그만큼 자살은 만연해 있다.(479-481) 도덕의 균형이 회복되면, 의식은 어떠한 경우에도 공격에 적절하게 반응할 수 있다. 교육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교육은 사회의 표상이며 반영일 뿐이라, 사회를 축약된 형태로 모방하고 재생하는 것이지, 사회를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교육은 사람이 건강할 때만 건강할 수 있다. 감동적인 호소로도 바꿀 수 없다.(481-483) 오늘날의 병적인 증가는 이기적 자살과 아노미적 자살뿐이다. 이기적 자살은 사회가 사회 성원 전부를 모든 측면에서 통제할 만큼 충분히 통합되지 않은 상태에서 온다.(484)

자살은 병리현상인가? 치료(사회통합)수단으로서의 직업집단.
병을 치유하는 방법은 사회집단이 충분히 통합되어, 개인은 집단적 존재와의 유대를 강하게 느겨야 한다.(484) 정치 사회는 소속감과 연대감을 무한하게 제공하지 않는다. 정치사회는 너무 멀리 있다. 중요한 문제가 닥칠 때만, 정치 체제에 의존한다. 국가적, 정치적 위기 같은 비상 상황에서만 조국의 관념은 1차적 중요성을 갖게 되며, 행동의 주도적 동기가 된다. 그러므로 개인들은 자신의 활동의 목적을 일시적으로가 아니라 계속해서 느껴야 하며, 단순하고 규모가 작으며, 개인을 친밀하게 포용하고, 보다 직접적인 목표를 제공하는 사회적 환경이 필요하다.(484-485) 종교 사회 역시 그와 같은 역할에 적합하지 않다. 종교는 개인을 밀접하게 장악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할 때만 자살을 방지할 수 있다. 개인생활을 파고들어가 교리와 관행을 부여하는 카톨릭이 그렇다. 종교는 사람들의 자유로운 사고를 막을 수 있는 한도 내에서만 자살 경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인간정신의 역사는 자유로운 사상의 진보의 역사다. 옛날의 자그마한 사회집단으로 돌아가지 않는 한 종교는 우리의 의식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종교의 면역성은 종교가 개인들에게 어느 정도 신비한 내세의 관념을 넣어주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행사하는 강력하고 세밀한 규제에서 온다.(485-487) 한마디로 말해서 사회화를 통해서만 이기적 자살을 방지할 수 있다.(488) 가족 자체의 성격이 변했기 때문에 가족은 종전과 같은 자살 방지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집단적 존재로서의 가족이 사라지고 있다.(489-490) 집단이 자살 억제력을 갖는 이유는 그들이 모두 사회이기 때문이고 응집력을 갖기 때문이다. 같은 부류의 모든 노동자들이 협동하고 같은 기능으로 협동하는 직업 집단, 조합이 있다. 같은 과업에 종사하는 개인들고, 연대하고 결속된 이해관계를 가지므로 사회적 관념과 감정을 발전시킨다.(491-492) 직업 집단이 영향력을 가지려면, 법적으로는 허용되나 정치적으로 무시되는 사적 집단에 머무르지 않고 공공생활의 한 기관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사회적 역할을 하게 구성되어야 하며, 명확안 기능을 부여해야 한다. 오늘날 유럽사회는 직업생활을 규제하지 않고 방임거나 개입하여 규제하거나 양자택일을 해야하는 데 중재의 역할을 할 기관이 없어 정부의 활동은 억압적이며, 평균적이다.(492-493) 국가의 통제는 받지만, 국가의 외부에 여러 집단적 힘의 집합체를 만들어 보다 큰 다양성을 갖춘 규제를 행사해야 한다. 이 조건에 가장 잘 맞는 것은 조합이다. 분쟁 조정, 계약의 조건이 공정하게 조정, 공공의 이익을 위해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착취하지 못하게 보호.(494) 사회의 모든 직업이 이런 조직을 요구하고 만들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사회 조직망은 다시 치밀해 질 것이다. 이런 집단이 국가 속의 국가가 되게 했던 과도한 자율성은 유지될 수 없고, 이런 집단이 연대와 체계는 관료주의의 횡포나 직업적 이기주의를 제한할 수 있을 것이다.(495-496) 이런 조건 하에서만 공공복지에 대한 인식이 항상 개인의 의식 속에 살아있게 된다.(497) 아노미성 자살도 같은 방법으로 치료할 수 있다. 아노미는 부분적으로 이기적 경향을 생성시키는 해체상태에서 나온 결과이다. 조합은 성원에게 높은 위치에서 불가피한 희생과 양보를 욕하고 명령을 내릴 권위를 가지며, 새로운 종류의 도덕적 규율을 확립할 수 있다.(498) 종교가 요구하는 소극적 금욕은 오늘날 집단생활의 세속적 이해관계가 차지한 위상과 조화될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규율은 욕망을 중요성에 맞게 조직하는 것이다. 타락의 원인은 종교가 이제는 무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499) 도덕의 힘 외에는 어떤 것도 인간을 규제할 수 없다. 직업집단은 개인의 탐욕을 규제하며, 개인들의 욕구에 공감할 만큼 개인들의 삶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국가만이 각 조합집단의 특수성에 맞서 유기적 균형의 필요와 일반적 효용성의 요구를 대변할 수 있다.(500) 이런 것도 결혼의 아노미로 인한 자살은 제지할 수 없다. 여성의 심미적 기능을 통해 더 독자성을 갖고 적극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여, 남편과 아내의 차이가 줄어들 때, 결혼이 한 성에게만 유리함을 벗어날 수 있다.(500-502) 자살을 통제하는 방법은 생존 경쟁을 덜 어렵게 하고 삶을 덜 쉽게하는 것이 될 수 없다.(503) 자살은 경제적 빈곤의 증가가 아니라 정신적 빈곤 때문이다.(504) 정신적 특질의 변화는 사회구조의 심각한 변동, 사회구조의 개조를 요구한다.(506) 앙시앙 레짐의 해체로 인한 평준화의 결과, 나은 것은 국가뿐이나 국가는 무능하다.(507) 개인은 소속집단이 없으면 이기주의와 무정부상태에 빠진다. 이는 개인의 방치이자 개인의 혼란이다. 진정한 효력을 갖는 유일한 분권화는 사회적 에너지의 강력한 집중화를 달성할 수 있어야 한다.(508) 국가의 통합을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공동생활의 중심을 증대시킬 수 있는 유일한 분권화는 소위 ‘직업집단의 분권화’이다.(509) 선거구는 지역이 아닌 조합 단위별로 하는 등 직업 집단은 정치조직의 기초가 되어야 하고, 자체의 관습과 전통, 권리와 의무와 통합성을 갖는 집단적 인격을 갖춘 확고한 제도가 되어야 하며, 정신적 자주성을 가져야 한다.(510) 집단적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과거로부터 새로운 생활 형태의 싹을 찾아서 성장을 촉진해야 한다.(511)

(여기까지가 일단 요약)

에밀 뒤르케임의 『자살론』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자살률은 사회통합 정도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이다. 개인이 사회에 너무 지나치게 매이는 전통사회의 자살(군대에서 흔히 많은)은 일단 논외로 둘 때, 현대(근대)의 자살은 전통사회는 해체되었고,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나는 아노미 자살이 큰 비중을 차지하며, 이는 사회가 분업화, 해체, 현대화, 번영을 이루는 과정에서 자살률이 급격하게 상승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외에 정치적, 경제적 위기도 자살률에 영향을 미친다. 군대와 같이 강한 통합이 자살률을 높이는 경우도 존재한다.

자살률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뒤르케임은 사회를 하나의 실체로 등장시킨다. 그는 상당히 조심스럽게 접근하지만, 사회에 일종의 실체를 부여한다. 그 실체는 그러나 상당부분 표상으로서의 실체, 기호로서의 실체이다. 기호로서의 실체인 사회는 종교가 영향력을 상실해가는 사회에서 새로운 ‘신’으로 등장한다. 사회는 개인을 만들고, 사회는 종교를 만든다. 사회는 사람들의 자살경향도 높인다. 이 모든 것은 사회의 특성이므로, 사회는 개인의 삶과 죽음에 영향을 미친다. 종교가 그동안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영향을 미쳤던 것은 종교가 사람들의 생활을 규제했기 때문이지, 내세 지향적 교리 때문이 아니었다. 솔직히 책을 읽다보면 정신이 없다.

그러므로 이제 사회는 사회학적 연구 대상이 된다. 사회는 개인의 총합을 넘어서는 그 이상의 실재가 된다. 단지 기표로 존재하기만 한다해도 말이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실망스럽다. 그리고 실패한 대안들이었다. 개인의 자살률이 이기적 자살과 아노미성 자살에서 개인화와 현대화를 문제로 삼은 만큼 그의 해결책은 복고적이다. 이 해결책은 『사회분업론』에서도 제시되었던 해결책이다. 국가와 개인 사이의 중간 집단으로서 “직업 집단”의 조직화, 즉 조합이다. 이런 조합이 노동조합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나 사회주의 운동은 거부한다. 조합운동은 어디까지나 사회에 중간 수준의 질서와 통합을 부여하기 위한 행동이다. 이런 조합은 반드시 작업장 단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역 단위로 이루어진다. 자영업자들도 조합을 이루고, 모든 종류의 직업은 집단을 형성한다. 사실 뒤르케임이 말하는 직업 집단에 가장 가까운 형태는, 변호사협회이고, 다음이 의사협회다. 사회를 이런 조합들의 연계망으로 구성하자는 것이다.

뒤르케임의 후예들은 그래서 조합주의자들로 불렸고, 실제 이런 사회를 구현하려고 시도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패했다. 국가론에서 흔히 등장하는 ‘조합주의 국가론’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필립 C. 슈미터의 사회조합주의와 국가조합주의. 뉴코포라티즘. 사회조합주의 모델이 바로 뒤르케임의 사회구성 모델이다. 그러나 이런 조합은 계속해서 해체에 해체를 거듭하고 있다. 당시 국가조합주의 모델로 한국의 독점 자본주의 개발정책을 설명하려고 시도했지만, 그다지 설득력이 있지는 않았다. 실제로 유럽 사회는 중간집단인 조합을 통해서 조정되기는 커녕, 점점 더 개인화와 국가 앞에서 개인의 균등화를 향해서 나아가게 된다. 이는 비단 유럽사회 뿐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성장과 성숙, 근대 문명의 확대는 개인을 점점 더 개인으로 만들어낸다. 그가 주체임을 스스로 자각하든 아니든. 각성하든 아니든 개인으로 사회 속에 던져지고 있다. 중간 집단과 조합은 특수한 직역에서 생겨나는 듯 해도 점점 해체되고 만다. 미국과 유럽의 낮은 노조조직률을 보면, 다른 형태의 조합의 형성 가능성 자체가 의심스럽다. 그나마 미국에 남아 있는 조합들은 실상 가장 대표적인 ‘이익집단(interest group)’이 되어 사회의 공공성을 해치고 있다. 미국에서 보다 안정적인 의료(건강)보험제도의 형성을 가장 반대하는 것이 의사들인 AMA(American Medical Association)이고, 총기 규제를 반대하는 전미총기협회(NRA, National Rifle Association)을 보면, 직업집단의 의한 조합형성이 뒤르케임이 바라던, 공공성이나 도덕성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곳으로 어떻게 흘러가는 지를 보여준다.

그는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낙관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분석은 치밀했으며, 번득이는 영감을 우리에게 남겨주었지만, 그의 해결책과 대안은 허무한 신고전주의에 불과했다. 그는 근대를 두려워하고, 근대적 해결책 대신, 전통과 근대의 절충을 통한 시대 역행적인 해결책을 제시한 셈이다. 그의 해결책은 그럴 듯해 보였으나, 무용했다. 근대사회의 근대성과 근대를 움직이는 자본주의 힘을 통제할 수 있다는 낙관주의에 빠져 있었다.

게다가 뒤르케임은 당시의 정치적 혼란에 지나치게 염증을 느낀 나머지 정치를 지나치게 무시했다. 그는 정당을 경시했으며, 중간 집단으로서의 성장 가능성이 가장 높은 노동조합 등 강력한 집단에 대해서는 그 파괴적인 힘을 두려워하며 외면한다. 근대화, 즉 개인화와 아노미 아래를 흐르는 자본주의에 맞서서 저항하고, 완화된 수정된 자본주의를 모색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 될 수 있는 정당과 노동조합을 간과한 그의 해결책은 무기력함 그 자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르케임의 자살률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은 우리 시대를 비추어주는 또 하나의 좋은 창이 된다. 『자살론』을 읽고 난 후, 통계청 자료들을 이리 저리 뒤적이면서 몇 가지 눈에 뜨이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 사실을 여기 적어두고자 한다. 아래 그래프는 1983년부터 2014년까지의 자살율을 연령별로 비교한 것이다. 전체는 푸른색이고, 15-64세는 노란색이다. 이 둘은 거의 같은 궤적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65세 이상과 80세 이상 그룹을 분리해서 그 차이를 비교해 보면, 놀라운 차이가 나타난다. 65세 이상에서 그리고 80세 이상에서 자살률이 놀랄만한 정도로 급등했다가 다시 급감하는 그래프를 볼 수 있다. 다음 그래프를 보자. 다소 충격적이다. 노년 자살률이 높다고 해도 이 정도의 격차가 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래 첨부된 데이터에는 전년도 대비 증감율을 기록해 두었다. 전체적으로 자살율이 급등한 것은 1998년이다. 외환위기(IMF경제위기)가 한국사회에 큰 충격을 가져온 것을 알 수 있다. 1999년에 떨어졌다가, 2002년, 2003년에 상승하고, 또 2009년에 크게 상승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차이들이 연령별 자살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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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연령대별 격차를 보려면 다른 수치가 필요하다. 그래서 에밀 뒤르케임이 했던 것처럼 자살계수를 뽑아보기로 했다. 전체 자살률이 급등한 시점인 1998년에 자살계수 즉, 상대적 자살수치는 오히려 낮아진다. 즉 비율상 격차가 줄어든다. 1999년 부터 시작해서, 전체 자살률과 노령층 자살률의 격차가 커지기 시작한다. 특히 80대 이상 자살률의 경우 극단적 차이를 보이면서 변화하기 시작한다. 80대 이상 자살률은 1998년 전체 자살률의 2.761배에서 2002년 5.374배로 급증한다. 2002년의 전체 자살률은 10만명당 17.9명으로 이전해의 14.4명, 다음해의 22.6명의 중간에 위치한다. 이 시기는 자살률이 급등하던 시기이지만, 특히 80세 이상의 자살계수가 5.374배에 이르러 전체 국민 보다 80대 이상이 5배 이상 자살하는 경향을 보였다. 아래 자살률 변화추이를 보면, 2006년까지 80대 이상의 자살률은 계속 5배 이상을 유지하며, 65세 이상의 자살률도 2002년부터 2007년까지 3배 이상을 유지한다.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우리나라의 노인 자살률은 지금까지 어느때보다 높았다. 이 기간은 노무현 정부 시절이었다. 그러나 전체 자살률은 계속해서 상승하던 시절이다. 전체 자살률은 2011년에 정점을 찍는데, 이 점이 또 하나의 변곡점이 된다. 전체 자살률은 2012년부터 감소한다. 2008년부터 2012년까지 80대 이상의 자살계수는 전체의 4.3배에서 3.7배까지 유지되고, 65세 이상의 자살계수는 전체의 2.7배에서 2.4배까지 변화한다. 이 기간은 이명박 정부 시절이다. 2011년에 전체 자살률은 10만명당 31.7명으로 정점을 찍은 후, 그 이후 감소하여, 2014년에 27.3명에 이르고 있다. 지난해 통계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더 감소했다고 하는데. 확인이 필요하다. 이 3년간 자살계수도 변화하여, 80세 이상 자살계수는 3.71배에서 2.8배까지, 즉 1995년과 1996년 사이 수준으로 감소했고, 65세 이상의 자살계수는 2.48배에서 2.03배로 감소하여, 1992년 수준을 형성하고 있다. 비록 전체 자살률은 2008년에서 2009년 사이를 형성하고 있지만,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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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런 충격적인 수치를 앞에 두고 무엇을 유추하고, 무엇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손이 떨린다. 그러나 우선 에밀 뒤르케임을 따라 자살률은 사회통합의 정도, 사회 해체의 지표를 보여주는 정도로 읽어보자.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에도 서서히 움직이면서, 오르내리던 자살률이 급등한 것은 2002년이다. 한일월드컵으로 나라가 들끓었고,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이 있었다. 사회에는 엄청난 충격이 찾아왔다. 이후 (이기적 자살과 아노미 자살의 병행으로 보이는) 상승하는 자살률, 특히 노인 자살률의 증가는 이 5년간 사회에 남아 있던 전통사회적 특성, 전통적 권위구조가 과감하게 해체된 시기임을 보여준다. 고령자의 높은 자살률은, 새로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특히 고령자들이 자신의 소속과 사회와의 연계를 확보하지 못함을 보여준다. 고령자층은 경제성장과 번영의 결과, 상공업의 성장과 확산의 결과인 개인화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낯선 것이 눈앞에 다가오자,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고있었다. 집단주의를 자신의 도덕으로 삼아 살아온 삶이었다. 갑작스런 가치관 변화를 수용할 힘은 없었다. 그러나 배려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사회, 탈권위사회, 민주화되어가는 사회에서 자신들이 가치관은 쓸모 없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자신들은 더 이상 사회를 주도하는 위치도, 이 사회를 지탱해온 위치에도 서지 못했다. 높은 자살률은 이 세대가 사회 속에서 연계의 고리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전체 자살률도 큰 차이는 없지만 계속 증가하는 것으로 보아, 사회 전체적으로 뒤르케임이 말하는 새로운 규범이나 새로운 질서는 확립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2008년을 기점으로 고령자층의 자살계수는 다소 변화한다. 정점을 찍고 다소 낮아지나, 80대 이상은 아직도 4배 이상의 높은 자살계수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오히려 전체 자살률은 2011년에 10만명당 31.7명으로 정점을 찍는다. 이명박 정부를 통해서도 새로운 규범이나 질서는 제시되거나 확립되지 못했고, 사회의 개인화는 계속해서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80대 이상의 자살계수도 감소하고, 65세 이상의 자살계수는 꽤 낮아지는 것으로 보아, 노령세대는 이 시기의 사회에 보다 자신이 통합되고, 자신을 통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경제성장, 낙수효과를 외치는 근대화 시대의 옛 구호는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준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여전히 다소 앞으로 나아가는 불안한 사회였고, 사회 전체의 개인화와 탈규범화를 지속하여 사회 전체의 자살률은 2011년을 기준으로 정점에 이르게 된다.

2011년부터, 또는 2012년부터 상황은 변화한다. 전체 자살률도 완만하나마 감소한다. 특히 80세 이상과 65세 이상의 자살계수는 눈에 뜨이게 감소하여, 90년대 중반 수준을 회복한다. 지난 4년간 고령 세대는 이전보다 한층 더 자신들이 사회에 통합되어 있으며, 사회로부터 소외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사회를 주도할 수도 있다. 적어도 무시받지 않고 있다. 자신들의 경험과 살아온 과거는 아직도 쓸모가 있으며, 자신들의 삶이 사회에도 도움이 된다. 이 사회는 젊은 세대의 것만은 아니다. 노령세대의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은퇴를 거두어들이고 사회로 복귀했다. 이것이 지난 4년간의 자살률 변화 추이와 자살계수가 보여주는 사실이다.

뒤르케임은 자살률의 급격한 변화의 요인으로 위기와 전쟁 등을 들고 있다. 프러시아-프랑스 전쟁 기간 동안, 프러시아(독일)의 자살률은 감소했다. 그러나 독일 남부 바이에른의 자살률은 감소하지 않았다. 카톨릭 신자가 주를 이루고 있는 이 지역에서 북부 독일이 주도하는 전쟁과 독일 통일에 군인과 물자는 보낼지언정, 정서적으로 통합과 흥분을 겪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자살률은 변하지 않았다.

지난 4년간 고령자층은 전에 없는 정도로 사회에 통합되어 있다. 사실 사회의 움직이는 방향을 주도하고 있다. 현 정부는 바로 이런 흐름을 주도하고 이런 흐름 위에 올라타있다. 대통령 자신이 과거 세대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그는 기호이고 표상이다. 그는 박정희 전대통령과 그의 시대를 상징하며, 이런 상징을 통해, 고령자층과 현 정부는 강력하게 결속되어 있다. 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를 비교해 볼때, 이런 차이가 두드러진다. 이명박 정부는 상대적 합리성 내지 시장 보수라고 불릴 만한 흐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정부에 대해, 고령 세대는 자기동일시를 충분히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현 정부는 고령자층 세대 자신이며, 자신을 표상하는 정부이다. 그러므로 고령자층이 이 정부를 지지하기 위해 결속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며칠 전 유시민 전 장관이 TV 토론 현장에서 “현 정부가 나라를 팔아먹는다고 해도 35%의 고정 지지층이 있다”고 말했다지만, 그는 포인트를 잘못 집은 것이다. 현 정부를 무작정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현 정부가 자신을 표상하기 때문에 지지하는 것이다. 현 정부가 무슨 짓을 해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세대의 경험과 신념에 걸맞게 행동하고, 익숙한 구호와 행동을 표출하기 때문에 지지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현 정부는 고령 세대의 논리와 사고방식대로, 다시 말하면 때로는 비합리적으로 행동함으로써 그 지지를 유지한다. 대통령은 국회에 와서 야당과 협상하면 안된다. 야당의 잘못을 야단치고 호통쳐야 한다. 그들이 나라를 망치고 있기 때문이다. 법안의 통과로 야당은 굴복해야 한다. 대통령은 합리적 보수를 표방하면서, 보수의 잘못을 고치고,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면 안된다. 그것은 지지자들에 대한 부정이며, 고령자 지지층에 대한 부정이다. 현 정부는 자신의 현재의 입장을 유지하면서 지지를 극대화할 수 있다. 이제와 타협과 통합에 나서면, 지지율은 떨어지고, 응집력은 해체될 것이다. 그리고 다른 누구로 대체할 수도 없다. 오직 현 대통령 만이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가 그의 딸이며, 그 시대를 다스리며 살았기 때문이다.

2011년이 지나면서 우리는 몇 가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지하철을 비롯한 대중교통기관에서 커진 노령자층의 목소리와 권리 주장, 때로 발생하는 물리적 충돌, 투표에서의 응집력, 그리고 어버이연합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이름의 보수단체로 거리로 쏟아져나오는 고령자들. 현 정부를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해서는 때로 오명을 뒤집어 쓰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그들은 스스로 전쟁 중인지도 모른다. 그들 스스로 세대 간의 이념 전쟁에 자신을 투신한 노병들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느 곳에서나 울려퍼지는 종편 채널. 종편은 2011년 12월에 첫방송을 시작했다. 2012년 부터 고령자 자살계수와 자살률은 눈에 뜨이게 감소하기 시작했다. 자기 세대의 목소리를 발하는 확성기는 이들 세대를 더욱 결속시키게 되었다. 그리고 고령자들의 결속은 다른 세대의 결속과 연대를 가져오고 촉발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자살률은 조금이나마 전체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자살률의 감소는 반가운 일이나, 그것이 세대 간의 대결적 연대와 결속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은 안타깝기 그지 없다.

2016.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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