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르케임, 『사회분업론』 2

도덕보다 연대가 – 뒤르케임, 『사회분업론』 2. Emile Durkheim, De La Division du Travail So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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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뒤르케임, 1893(1930), 『사회분업론』, 민문홍 역, 아카넷, 2012. Emile Durkheim, De La Division du Travail Social.

그 옛날 고등학교에는 국민윤리라는 기묘한 과목이 있었다. 뒤르케임의 이름을 처음 들었던 건, 국민윤리 수업 때였던 것 같다. 학력고사에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기계적 연대와 유기적 연대, 『사회분업론』과 『자살론』 같은 그의 유명한 저서들의 이름을 들었다. 물론 당연하게도 뒤르케임이 어떤 학자인지, 어떤 주장을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신화적 단계, 형이상학적 단계, 실증적 단계의 구분을 만든 꽁트의 뒤를 이은 인물로, 실증적 단계에서 비로소 학문이 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마르크스가 나왔는지는 모르겠고, 퇴니스의 공동사회와 이익사회, 막스 베버의 이름 정도는 들었던 것 같다. 생 시몽도 나왔었나.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화려한 인물들의 면목이고, 이들의 사상을 조금이나마 이해했었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당시 대표적인 암기과목이었던 국민윤리 수업을 들을 때, 우리는 학자의 이름, 국적, 주요저서, 주요개념, 어록이나 명문장 그리고 약간의 계보를 앵무새 외우듯 외우기만 했다. 그때 뒤르케임에 대해서 좀 잘 설명해주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가르치는 교사도, 교과서를 만든 사람들도, 이들이 말한 내용을 실제로 읽어본 적도 없고, 잘 몰랐을 것이다. 애초에 철학과 사회학 및 도덕론을 뒤범벅해 놓은 과목 자체가 누구의 발상인지 생각할 수록 기묘하기만 하다. 혹시나 해서 검색해 보니 지금은 「생활과 윤리」와 「윤리와 사상」이라는 과목이 있다. 필수인지 선택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놀랍게도 독학사 시험에 「국민윤리」가 살아있다.

뒤르케임의 『사회분업론』을 읽으면서, 뒤르케임이 이 윤리 혹은 도덕이라는 주제와 꽤 잘맞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아노미 현상에 답답함을 느끼고 새로운 사회질서나 사회통합을 모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뒤르케임에 관심을 기울일 만 하다는 사실이다. 최근 4~5년 사이에 나오는 연구서들에서 간혹 뒤르케임을 이론적 자원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나타나고 있다.

뒤르케임이 말하는 사회통합의 해결책은 무엇일까? 그것은 결국 규범이다. 달리말하면 도덕이다. 아마도 이것이 뒤르케임을 도덕적 개인주의자라고 부르는 원인일 것. 과거에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가지던 집단의식을 분업화된 사회에서 사회적 연대의식으로 변화시켜 새로운 사회적 연대를 창출해야 한다. 분업화된 사회, 분화된 사회의 도덕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법률과 도덕이 사회적 연대의 총체이다. 도덕의 기능은 인간을 사회에 연결하는 것이며, 인간은 사회 속에서 도덕적이다. 그리고 그 사회 안에서 인간은 다른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데, 이를 개인주의라고 이름한다. 분업화된 사회 속에서 개인은 사회에 종속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분업은 사회적 연대를 형성하는 즉, 도덕적 질서의 기초가 된다.

이러한 사회적 분업화, 사회의 전문화는 필연적 결과다. 그것은 사회의 밀도 때문이다. 사회의 밀도가 사회의 분업화와 전문화를 강제한다. 그리고 보다 성숙한 문명으로 이끈다. 분업화 자체는 필연적 결과다. 간혹, 연대를 가져오지 못하는, 다시 말해서 규범과 도덕을 창출하지 못하는 분업이 있다. 뒤르케임을 이를 아노미적 분업과 강요된 분업 등으로 나눈다. 그리고 아노미적 분업의 사례로 극심한 파산과 심각한 노사갈등 그리고 규범과 연대를 형성하지 못하는 지나친 분업 내지는 분산 가리킨다. 반면, 다른 계급이나 카스트에 의한 것과 같이, 강요된 분업일 때, 즉 계약의 형태로 표현되는 분업에서 계약 당사자가 외적으로 대등한 조건에 있지 못한 것이다. 즉 내적인 불평등이 가리워져 있을 뿐인 경우이다. 마지막 경우는 기능의 지나친 분화가 개인 활동에 충분한 영역을 제공해주지 못하는 경우이다.

뒤르케임의 의도는 사회의 분업화가 필연적 현상이고, 막을 수 없으며, 계속해서 전문화가 이루어질 것을 예측하면서, 그런 분업화에 대한 일정한 제동을 걸려한다. 전문화에 적절한 한계가 주어져야 하고, 필요한 만큼만 전문화를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전문화의 한계를 어떻게 정할지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그 결과를 경험에 맡긴다.

그렇다면 전문화 분업화의 한계는 무엇인가? 그것은 규범 형성을 해치지 않을 만큼이다. 뒤르케임은 이를 다소 명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지만, 분업의 결과로 사회적 연대가 더 형성되고, 강화되고,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한계이다. 그렇다면 분업화된 사회에서 어떻게 도덕이나 규범이 형성되고 유지되는가? (개인이 속한 직업집단이 제시하는) 직업윤리를 통해서 공통의 연대의식을 가지게 된다. 제2판 서문에서 그 의도가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시민혁명에 의해 해체되었던 ‘길드’를 현대적으로 재현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결점은 없애고, 장점만 남기고.

다시 의문이 생긴다. 뒤르케임을 흔히 ‘도덕적 개인주의’라고 한다. 규범과 도덕을 중시하되, 기본 단위를 개인으로 삼고, 개인 가에 서로에 대한 존중을 기본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곳곳에서 다른 모습들이 보인다. 뒤르케임은 개인의식은 사회 속에서 형성된다고 한다. 개인은 사회 안에서 존재 의미를 가진다. 개인의식은 집단의식으로 부터 탄생한다. 게다가 사회적 연대를 형성하는 규범, 도덕은 모두 집단에 의해서 개인에게 부여되는 것이다. 이 집단이 과거의 한 사회 전체의 동질적 집단이 아니라, 단순히 분절화된 집단이 아니라, 사회 분업화를 통해서 전문화된 각 직업 집단의 직업윤리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개인을 기본 구성단위로 하지만, 전문화된 직업집단과 여러 중간집단의 도덕과 규범으로 유지되는 연대를 통해 사회 전체가 보다 강력한 유기적 연대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집단, 중간집단의 형성과 중간집단의 부재는 한국을 연구한 수많은 사람에게서 반복적으로 지적된 내용이다. 그 중에서도, 그레고리 핸더슨의 『소용돌이의 한국 정치』는 이 문제를 정면으로 지적한다. 그 외에도, 정당, 시민사회의 형성, 노동조합의 형성 등 사회갈등을 적절하게 조정할 수 있는 중간집단의 필요성은 여러 차례에 걸쳐 지적된 바 있다. 문제는 어떻게 만들어 내는가일 뿐.

제일 먼저 제기된 질문은 뒤르케임은 너무 낙관적이 아니냐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누가 어떻게 도덕 혹은 규범을 형성할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가 제시하는 것은 직업 집단 정도다 이 문제를 넘어서서 구체적인 추동력과 주체를 꼬집어서 말하지 않는다. 분업화가 되면 마치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처럼 보인다. 뒤르케임은 이것을 어떻게 수행할지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는데, 자신이 교육 관련 공직을 맡고, 교육에 대한 책을 쓰는 등 교육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고 해결하려고 했다. 물론 교육으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리그 그는 이 일에 너무 마음을 많이 쏟은 탓인지 일찍 죽고 말았다. 정말 국민윤리스럽다.

2015년의 한국은 사회 전체에서 규범이 붕괴한 것처럼 보인다. 예전에는 조금이라도 있던 양보, 자제 이런 것이 거의 사라져 버렸다. 양보나 자제를 먼저 포기한 것은 지배하는 쪽이다. 2015년의 한국 자본주의의 지배세력은 형식적 민주주의나 민주적 제도 혹은 절차를 위한 기본적 양보마저 할 여유가 없다는 태도를 보이고, 굴복을 요구하고 있다. 자산은 부동산 소유자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임대료라는 이름의 렌트(rent)를 통해서 이익은 자산보유자로 끊임없이 흘러가고, 사람들은 점점 더 파산하고, 무너져간다. 어떤 의미에서는 원시적인 집단의식이나 집단 도덕이 있긴 있다. 그것은 각자도생이다. 모두가 각자 스스로 알아서 살아야 하고, 그렇다는 전제하에서, 어느 정도의 규범 위반이나, 도덕 무시, 연대 포기는 인정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규범과 도덕이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오히려 뒤르케임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법적 공정성이다. 계약에 관한 기본적 법률이 계약의 쌍방의 이익을 공정하게 보존할 때, 그 때에 사회적 연대의 형성 가능성이 생겨난다. 그것은 공정한 법질서를 유지시키고, 규범과 도덕으로 그 사회의 안정성을 강화하려는 노력이다. 반면, 법적 공정성이 없고, 계약에 관한 법률이 한쪽을 일방적으로 편들때, 그런 법과 제도를 유지하고 존속할 필요를 사람들이 느끼지 않는다. 법적 공정성이 없는 상황에서 누가 어떤 방식으로 법적 공정성을 창출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결국 사회 계급 간의 정치적인 집단 간의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법적 균형이 사회적 갈등을 반영하도록 강제해야 한다. 그것은 어느 정도 아노미의 지속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법적 균형이나 공정성이 없는 상황에서 무엇을 통해 사회 안정의 기반이 되는 도덕과 규범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개인간의 연대를 통해서 가능할 수밖에 없다. 사회에 흩뿌려진 개인들 간의 연대를 통해서 새로운 도덕과 규범과 법을 만들어 내야 한다. 삶의 공간을 창출해 내야 한다. 무엇이 우선이냐고 묻는다면, 연대가 우선이라고 답해야 겠다. 연대할 때, 규범이나 도덕이 창출될 수 있다고. 그리고 그 연대는 삶의 현장에서 오는 것이라고.

뒤르케임이 다시금 일깨워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전망이다.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으로 이어지는 기간 동안 그때는 전망이라는 것이 있었다. 물론 그 전망들이라는 게 몹시 비현실적이고, 이론에 얽매인 것일 뿐 아니라, 실현 가능성 따윈 고민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건 자유민주주의에서 혁명까지 넓은 스펙트럼 속에 퍼져 있었다. 그때는 그런 전망을 놓고 개똥철학을 외치면서, 술로 마셨다. 그런데, 지금은 대부분 전망이라는 것을 아예 하지 않는다. 예측은 하고, 점은 친다. 비관적일 것이라고 말하면서, 모두들 투표결과에만 관심이 있다. 20년 혹은 30년 전이 좋았다고 꼰대질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전망을 할 수 없는 사회의 위험성과 전망하지 않는 절망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전망은 혼자서 할 수 없다. 전망을 하려거든 연대가 필요하다.

2015.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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