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르케임, 『사회분업론』 1

고대적인 섬, 한국 기독교 – 뒤르케임, 『사회분업론』 1. Emile Durkheim, De La Division du Travail Social.

1024px-Tora_JMW

1830년 경 독일의 유대인 사용하던 토라. 고대 종교법의 형법조항과 거기에 매인 한국교회. 위키피디아.

에밀 뒤르케임, 1893(1930), 『사회분업론』, 민문홍 역, 아카넷, 2012. Emile Durkheim, De La Division du Travail Social.

에밀 뒤르케임(Durkheim)을 짬짬이 읽고 있다. 요즘은 『사회분업론』. 한 삼분의 일쯤 보았는데. 정말로 많은 생각이 든다. 사회와 종교에 대해서. 읽기 전엔 몰랐는데. 법과 도덕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책이었다. 본인이 하려고 하는 이야기의 핵심은 1902년의 제2판 서문의 앞부분에 대략 정리되어 있다.

“이제까지는 경제적 기능들이 비록 2차적 역할을 해왔지만 오늘날에는 첫 번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 기능들이 경멸의 대상으로 여겨져왔던 열등한 계급들의 손에 맡겨져 있던 시절은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갔다. 경제적 기능들 앞에서 군사적, 행정적, 종교적 기능들이 축소되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단지 과학적 기능만이 경제적 기능과 수위를 다투고 있다. 그러나 과학도 그것이 실제로 큰 부분에 있어서 경제적 직업활동에 기여하는 한에서만 간신히 위세를 가질 뿐이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현대사회가 이미 본질적으로 산업사회이거나 혹은 산업사회가 되어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는 근거가 없는 표현이 아니다. 따라서 사회생활 전체에 그렇게 커다란 위치를 차지한 활동이 명백히 규제되지 않는 상태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매우 심각한 혼란을 가져올 것이다. 이는 분명히 일반적인 도덕적 문란의 원천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경제적 기능들은 가장 많은 수의 시민들에게 작용하고 있으며 수많은 개인들은 거의 전체가 산업이나 상업 분야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으로부터 산업과 상업 분야에는 도덕성이 거의 발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개인들 삶의 가장 큰 부분은 도덕적 행동과 거의 상관없이 이루어진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이 그 감정을 영속적으로 일깨워주어야만 한다.” (19-20)

중세사회를 규율하던 길드(동업조합)이나 다른 집단적 규제장치들은 개별 직업집단에 의무와 도덕을 부여하면서, 사회 질서를 유지해왔다. 대혁명이후 중세적 질서가 해체된 후, 사회관계는 경제적 관계가 압도적이 되었는데. 이 경제적 관계를 규제하는 어떤 도덕도 없는 아노미 상태가 전개되고 있다. 개인과 집단 모든 곳에서 무제한의 경쟁과 무질서가 발견된다. 그리고 이를 규제하기 위해, 사회 분업에 근거한 직업집단(중간집단)의 의무와 도덕을 장려하고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이유에서 뒤르케임을 도덕적 개인주의라고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뒤르케임은 개인의 도덕적 선택으로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중간집단을 통해서, 도덕과 의무를 강제하는 구조를 만들어 낼 것을 제안한다. 여기까지 읽고서, 왜들 다시 뒤르케임에 주목하는 지 알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딱 백년전 프랑스 같은 아노미 상태에 있구나, 모든 사람이 적나라한 경제관계에 거대한 국가와 자본 앞에 초라한 개인으로 던져져 있는데, 이런 방식으로는 개인의 보호를 이룰 수 없겠구나. 연대의 구체적 방식을 탐색하느라 뒤르케임을 뒤적이는 모양이다.

잘 알다시피 뒤르케임은 동질적 사회에서 기계적 연대를, 분업화된 사회에서 유기적 연대를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원시적이고 동질적인 사회의 연대 방식이다. 기계적 연대라는 것은 일종의 모든 사람의 감정이 동일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한 방향으로 전개되어 가는 사회를 말한다. 어떤 사회가 기계적인지, 어떤 사회가 유기적인지를 보려면, 그 사회의 법전을 보면 된다. 기계적인 사회는 법에서 형법조항이 다수를 이룬다. 형법으로 이루어지는 판결과 처벌이란, 집단 감정에 가져온 손상을 보상하려는 집단의 행위라는 것이다. 동질적 사회, 집단감정, 형법, 기계적 연대. 그리고 사회가 분업화할수록 사회는 보다 유기적인 모습을 띄는데, 이것은 마치 고등동물의 머리와 사지, 오장육부의 기능이 다르듯, 사회에서 모든 사람의 기능이 달라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강한 연대를 이루게 되고, 이것을 유기적 연대라고 한다. 이런 사회의 연대는 기계적 연대보다 오히려 강력하기도 한데. 분업화된 사회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대체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의 법은 계약법과 행정법이 발달한다. 과거에 형법에서 관할하던 것은 점차 줄어든다. 제재법 보다는 보상법 위주로 법률생활이 전개되는 데. 이런 법들은 “계약법의 비계약적 요소”에 의해 보호된다. 사적 계약이란, 단지 양자간의 합의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약법의 보호를 받는데, 이러한 계약법이란, 계약쌍방을 보호하기 위한 관례와 균형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흔히 계약서에 “이 계약서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일반 상관례에 따른다”와 같이 부기하는 것을 말한다. 프랑스 민법이나 상법은 우리 법보다 계약 당사자를 더 보호해 주는 것 같았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사회과학 연구방법, 즉 비교방법을 사용하는 과정이었다. 그는 형법조항을 비교하면서, 히브리인들의 구약 모세오경의 법, 그리스 아테네 도시국가의 법, 로마의 12표법, 중세 프랑크 왕국의 법, 근대법을 비교하고 있었다. 이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종교법이었다. 종교에 관한 형법에는 적극적 조항과 소극적 조항으로 나뉘어지는데. 적극적 조항이란 신을 섬기는 행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말하고, 소극적 조항이란, 특정 제사나 예배 형식을 어긴 것에 대한 처벌을 말한다. 종교에 관한 형법으로 적극적 신성모독 등 다양한 부분에 대해 처벌을 하는 것은 오직 유대교 히브리 법 뿐이었다. 아테네 도시국가의 법에서부터 소극적 위반에 대한 처벌, 즉 반드시 지켜야 하는 몇몇 절차를 어긴 것에 대한 처벌만 남고, 이 마저도 근대로 오면,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 어떤 처벌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모였던 몇몇은 여기에서 충격과 한계에 봉착했다. 도대체 현대 기독교에서 모세5경에 대해 설교하거나 QT하거나 할 때, 우리는 어떤 것 혹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런 조항들은 전근대도 아닌 고대사회에서나 사람들을 처벌하던 규정들이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생활은 고도로 분화된 산업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교회에서는 여전히 고대의 법조문을 들어서 지금 우리가 이런 것을 형사적으로 처벌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 이 모든 것을 현대적으로 해석해서 지키려고 노력해야 하며, 그에 대한 처벌도 하나님과 직접 대면해서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와 선지자들의 예언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 그런 설명을 강화하고 있다.

어쩌면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교회와 세상으로 자기 삶을 나누어서, 일요일의 교회와 나머지 날들의 세상에서 각기 다른 기준을 적용해서 이원론적 삶을 사는 것은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일요일의 교회를 통해서 제시되는 고대적이고, 동질적인 사회에서 통용되던 법 조항, 그것도 형법적으로 형벌적으로 제시되는 법 조항을 지키는 것이 어려운 점은 일단 제쳐놓자. 일상 생활은 실제 배상을 목적으로 하는 수많은 민법, 계약법, 행정법이 규율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법 체계가 지배하는 복잡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고작, 정직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법을 지키라는 것 뿐이다. 그 법이 무엇을 어떻게 규율하는 지에 대해서도 자세히 말하지 못하면서. 고대적이고 동질적인 삶의 방식과 현대적이면서 분업화된 산업사회의 삶의 방식이 한 사람의 몸과 정신 안에서 날마다 충돌한다. 그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삶을 두 개로 나누고 이원론적 삶을 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더 묘한 것은 교회는 현실에서 기계적 연대를 추구하는 동질적인 사회를 지향한다는 점이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방식, 다양한 대화, 다양한 의지의 수용과 다양성의 용인에 매우 취약하다. 현장의 교회는 동질적이기를 추구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모이며, 모인 사람들인 만족감과 안도감을 얻는다. 이 점이 진짜 미스테리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생각의 자유와 결정의 자유를 부담스러워하고, 앞에서 누군가가 결정해 주면, 성실하게 따를 것을 약속한다. 그리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한다. 교회에 모이고, 안모이고를 떠나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 많으며, 그런 자유를 주면 다른 곳으로 가기도 한다. 사회가 너무나 분화되었기 때문에, 교회에서 만큼은 결정의 책임을 벗어던지고, 타인의 결정을 따르면서 안도감을 느끼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하나의 동질적인 사회에서 다른 동질적인 사회로 이동한다. 메가처치는 실상 고대적인 섬들이다.

나는 성서의 형법 구절들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2015. 11. 10.

* 이 글의 저작권은 ⓒFELIVIEW.COM에 있습니다.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FELIVIEW
FELIVIEW
felixwon.lee@gmail.com

Must Read

에른스트 H. 칸토로비치, 『왕의 두 신체』(7-1).

0
튜더 왕가의 가계도. 앞쪽에서는 아담과 이브로부터의 기원과 노아의 방주도 등장한다. 중간에 리처드 3세에서 단절이 있고, 그 아래로 헨리 8세가 이어진다. British Library, Kings MS 395, fols. 32v-33r. Ernst 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