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시스 더든, 『일본의 한국식민지화』

지배자의 언어, 지배자의 질서 – 알렉시드 더든, 2013, 『일본의 한국식민지화』, 홍지수, 늘품플러스. Alexis Dudden, Japan’s Colonization of Korea: Discourse and Power,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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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은 막부 개성소에서 휘튼의 『萬國公法』을 1865년에 간행한 것이고, 오른쪽은 비세링의 『萬國公法』을 니시 아마네가 1867년 출판한 것임. 오른쪽은 일본국회도서관 자료. 만국공법이 책으로 본격 소개된 것은 미국의 외교관이자 국제법학자 Henry Wheaton (惠頓元)의 책을 중국에서 활동하던 미국 선교사 William Martin (丁韙良)이 번역한 책으로이다. 조선에도 처음 들어온 근대 국제법서적이다. ‘권리’, ‘국가’, ‘주권’ 등의 출처이기도 하다. 이 책은 조선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도 퍼졌다. 결국 문제는 이 책의 활용, 일본에서는 Martin이 1864년 10월 출간하자, 1865년 구두훈점을 붙인 개성소판이, 1868년 쓰쓰미 고시시가 번역한 『만국공법 역의』가 1870년 시게노 야스쓰구가 번역한 『화역 만국공법』이 출간된다.  둘다 부분번역이다. 이와는 거의 동시에, 1862-65년까지 네덜란드 라이덴 대학으로 유학갔던 니시 아마네와 쓰다 마미치가 필기한 비세링(Simon Vissering)의 강의록은 니시 아마네가 일본으로 돌아와 강의한 것이 1866년, 출판한 것이, 1867년이다. 마루야마 마사오·가토 슈이치, 『번역과 일본의 근대』, 114-116. 『만국공법』이 조선에 전래된 것은 김용구에 따르면, 1872년 2월 이전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데, 구체적으로 누가 어떻게 전해서 퍼졌는지는 알 수 없고, 조선 외교관들에게 약간의 지식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1870년대에서 1880년대에 걸쳐 조선에서는 만국공법에 대한 저항과 비판이 확산되기도 하고 수용도 이루어진다. 김용구, 『만국공법』, 100-101, 116, 122, 149.

알렉시스 더든의 『일본의 한국식민지화』(Alexis Dudden, Japan’s Colonization of Korea: Discourse and Power). 아주 제목에서부터 푸코 냄새가 팍팍 난다. 푸코를 탈식민지 담론에 조응시켜서 활용하더니 이제 아주 식민지화에도 적용한다. 기막히다.

일본은 1854년 페리 제독에 의해 포함외교로 강제개항을 당했다. 그리고 1876년 불과 22년 만에 조선을 운요오호를 보내서 강제로 개항했다. 그리고 1910년에는 강제합병에 성공했다.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일본은 미개하고 야만적인 나라에서 문명제국이 되고, 제국주의 열강의 일원으로 식민지 경영을 열강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 물론 거기에는 군사력도, 경제력도, 정치력도 있었지만, 사람들이 잘 주목하지 않았던 또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담론 질서를 구축하는 힘이었다.

일본 근대를 다루는 드라마나 소설 혹은 만화를 보면, 한결 같이 이 시대의 일본인들은 『만국공법』, 즉 국제법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모두 『만국공법』에 대해 한 마디씩 하고, 그에 관한 책을 읽는다. 극이 나름 비약이 있다고 해도, 어딘가, 현실을 지적하는 지점이 있다. 이때 일본에는 『만국공법』 붐이 일었던 거다.

개항 후 일본은 구미 열강들과 불평등조약을 맺게 된다. 외국인에 대한 치외법권과 영사재판권 허용. 외국인에 대한 치외법권을 철폐하지 않고서는, 주권국가라고 말할 수 없다는 자각이 생긴다. 그리고 불평등 조약의 개정을 위해 노력하다가, 마침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1899년에 치외법권을 철폐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국제법 전문가를 키워내고, 그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듣고, 그들을 아시아 침략에 활용하며, 아시아 질서를 재정립하는데 활용하게 된다.

일본은 1876년 조선과 강화도 조약을 맺을 때, 바로 이 『만국공법』을 들이민다. 조선이 일본과 수교통상하지 않으면, 서양제국의 분노를 살 것이라고 위협하며, 조약을 강요하고선, 조약을 맺으려면 서로 독립된 주권국가라야 하므로,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본은 조선을 중국의 영향력으로부터 꺼내는 것. 더 크게는 중화질서를 깨뜨리고 아시아에서 일본 중심의 국제질서를 세우는 데, 『만국공법』을 활용한다.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에서 조선의 독립국임을 천명하지 못하지만, 조선은 일본과 같은 자주적이라고 말함으로써 독립의 의미를 포함시킨다. (묘하게도 7.4, 6.10, 10. 4, 세번의 남북공동성명에 자주적인 통일을 언급한다.) 결국 일본은 조선을 설득하여 독립이라는 글자를 포함시킨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협상대표는 일본 대표단에게 ‘주권’이 무엇이냐, ‘만국공법’이 무엇이냐고 묻는 형편이었다.

청일전쟁 직전에 텐진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리훙장이 교섭할 때, 이토 히로부미는 교섭 언어로 영어를 선택한다. 그는 시종일관 영어로 협상을 진행하는데, 그 이유는 한자를 써서 필담을 하게 될 경우, 그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 중화주의적 접근을 극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토 히로부미는 아예 영어를 이용하여, 국제법상 대등한 관계의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중화주의를 걷어내 버린다. 이 회담 과정에 대해서 이토 히로부티가 메이지 천황에게 “복명서”를 제출할 때도, 영어를 원본으로 해서 제출하고, 일본어 번역본을 함께 제출한다. 이때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국제질서 형성과정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게 된다.

결정적으로 청일전쟁의 전개 과정에서 일본은 독일에서 공부한 아라가라는 국제법 학자를 육군에, 다카하시라는 국제법 학자를 해군에 파견하여, 사령부에서부터 하위 장교에 이르기까지 정당한 전쟁에서 지켜야할 국제법을 준수하게 한다. 그러나 뤼순에서 민간인 학살은 발생했다. 전쟁이 끝나자 아라가는 일본이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야만적인 청나라를 문명국 일본이 어떻게 전쟁법을 지켜가면서 다루었는지를 책으로 써서 프랑스어로 써서 프랑스에서 출판하고, 다카하시는 영어로 써서 영국에서 출판하게 된다. 구미 각국은 청일전쟁에 대한 과정과 결과를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방법으로 받아들고, 일본은 문명국이고, 주권국가이며, 제국의 자격을 갖추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과거로 1870년대초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정한론이 일었을 때, 세계 순방 중이던 이와쿠라가 급거 귀국하여, 정한론을 저지한 이유도, 구미 제국을 돌아보니, 지금 상태에서 조선과 전쟁을 일으키게 되면, 이 전쟁의 정당성에 대해, 구미 제국으로부터 인정받기 어렵기 때문에, 여러나라가 식민지 획득 경쟁에 뛰어들게 되고, 조선을 확보하지 못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헤이그에 이상설, 이준 등을 밀사로 보냈지만, 이 회의를 개최하는 구미열강들은 참가 자격이나 발언권을 주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이들이 왔다간 기록까지 삭제하기로 한다. 1905년의 을사조약으로 한국(대한제국)의 외교권은 일본이 가져간 상황에서 한국은 국제회의에 참가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그들의 판단이었다. 거꾸로 헤이그만국평화회의는 조선이 독립국으로 존속할 자격이 없음에 대해 구미제국이 동의한 회의가 되었다. 이후 어느나라도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화에 제동을 걸지 않았다. 주권국가가 주권국가로 인정받는 것은 다른 주권국가가 인정해줌을 통해서 이다. 일본은 그 주권국가들의 리그, 제국주의 국가들의 리그에 참가해서 자격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이때에 독립할 수 있는 주권국가란 식민지를 가질 수 있는 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일본이 1907년 이후 조선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제일 먼저 시도한 것이 사법제도의 개혁이었다. 판사와 검사를 일본에서 보내고, 한국인들을 임용하고, 교도소를 8곳 세운다. 이를 통해 일본은 한국의 전근대적인 재판제도, 태형이나 효수 같은 끔찍한 일들이 없어져서, 일본의 사법제도를 통해서도 문명사회의 적절한 형벌이 외국인에게도 집행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으며, 105인 사건 때, 미국인 선교사들에 대한 취조에 대해 항의하러 온 미국인들에게 심문 중에 변호사가 배석하도록 하는 절차를 수용하고, 재판과정을 공개하고 보여줌으로써,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진다는 입증을 받아낸다. 그리고 105인 사건 이후, 구미 제국은 조선에서 치외법권을 공식적으로 포기하게 된다.<

일본이 들이댄 것은 “계몽적 착취”라는 명제였다. 문명국인 제국이 미개한 나라를 계몽하기 위해, 식민지로 삼아 통치와 개발을 하면서, 여기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과 이익을 착취해갈 권리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국가들 사이에 공식적으로 존재하는 노예제도였다. 이 주장은 단지 일본의 주장이 아니고, 이전 반세기 동안 구미 각국의 식민지 개척과 제국주의적 확장의 핵심 담론이었으며, 일본은 그 담론을 그대로 받아들여, 한국에 적용한 것 뿐이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일본이 그럴 자격이 있느냐는 것인데. 일본은 두 번의 전쟁을 거치면서,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자격을 입증하고 만들어낸 것이다. 일본은 이 과정에서 서구의 국제법과 국제질서라는 담론을 받아들여, 내면화하고, 동아시아에 이 담론질서를 적용하여, 중화주의적 접근을 깨뜨리고, 스스로 제국이 되어 조선을 식민지로 경영하게 되었다.

국제법에 근거한 동아시아 질서를 수립하고, 이 질서의 창설자이자, 유지세력으로 이 국제법 질서를 통해 일본의 권리를 주장하고,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일본의 태도는 전후에도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이나 한일국교정상화, 그리고 그 이후의 한일간의 계속되는 교섭에서 일본은 매우 일관된 국제법적 질서의 관철을 주장하면, 그 안에서 독도영유권과 위안부 문제에 대한 자기 입장을 주장하고 있다. 얼마전 한국을 다녀간 아베까지도.

*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각주의 영어, 일어 문헌의 제목을 모두 한글로 번역하여, 달고 있다는 점이다. 동시에 출판사, 출판지 등도 발음법으로 표기하여, 일본책과 도서의 경우 가끔 헷갈리기도 한다. 아쉬운 점은 책 제목이 한글이라고 해도, 번역서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 번역서가 있는 경우에도, 책 제목을 단순히 번역한 것이라, 번역서명과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대부분은 번역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참고문헌은 없다.

** 필요한 경우 번역서의 쪽수를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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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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