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환,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

출판기념강연회에 화상으로 참여한 정영환. 정영환은 화상으로 참여하고, 박유하는 옆에 서 있는 사진이 이 사건의 아이러니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 같으나, 초상권 문제 등을 우려해 게시하지 않기로 했다. 사진출처. 브런치.

정영환,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忘却のための「和解」―『帝国の慰安婦』と日本の責任), 임경화 역, 푸른역사, 2016.

무엇보다도, 정영환의 수고에 경의를 표한다. 그는 박유하가 『제국의 위안부』에서 인용한 구절들의 출처를 찾아서, 원래의 증언이나 논지를 확인하고, 박유하가 인용하지 않은 반대되는 내용을 꼼꼼히 찾아서 제시하여, 그 논지의 허술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정영환의 글을 읽으면서, 비로소 왜 『제국의 위안부』를 읽고 이해하는 과정이 그렇게 어려웠는지 알게되었다. 이 지루한 작업은 큰 성과가 있다고 믿는다. 당장의 상찬이나 업적은 되지 않을지라도 두고 두고 박유하를 비판하는 근거로 쓰일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박유하가 자신에 대한 비판에 대해 논문이나 책 혹은 글로 응답하지 않고, 기자회견의 형식을 취하는가였다. 이런 논쟁이 기자회견을 통해 이해되기 어렵지 않을까. 이런 나의 의문은 정영환의 책을 읽으면서 풀렸다.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의 주된 청중은 한국에 있지 않았다. 한국에 있는 청중은 일부일 뿐, 주된 청중은 일본에 있었다. 그렇기에 이런 기자회견의 형식을 취하는 것은 꽤나 적극적인 커뮤니케이션 방법에 속하는 셈이다. 특히 이런 대응은 주장의 엄밀성을 따지는 학술 논쟁의 장을 벗어나, 대중적인 논란의 장에서 활동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특히 그곳은 저자에게 유리한 환경이기도 하다.

세세한 주장은 책에도, 신문에도, 인터넷에도 떠돌아 넘친다. 그런데서 다루는 내용은 이 짧은 글에서 이야기하지 않겠다. 다만, 개념 사용에서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려 한다.

가장 논란이 큰 개념은 바로 ‘제국’이다. 제목에서 나올 정도로 중요한 개념이다. 그리고 이 개념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제국에서 살아 본 적도 없고, 제국이 무엇인지 실제로 몰랐기 때문이다. 지난 세기말부터 비로소 ‘제국사’라는 개념이 생겨나면서, 본국과 식민지 및 점령지를 통합해서 분석하는 ‘제국사’라는 개념이 제기되면서, 제국이라는 개념이 떠올랐지만. 그 개념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제국’은 동질적이지 않다. ‘제국’은 다양한 구성요소로 이루어지고, 그 지위가 서로 다르다. 소위 ‘대일본제국’의 경우에도 내지(일본 본토)가 있고, 대만, 조선, 만주국과 화북 점령지가 있다. 물론 박유하는 내지와 대만, 조선, 남양군도 등 영토로 편입된 지역만을 ‘제국’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내지(일본)와 반도(조선)가 달랐지만, 반도인(조선인)에게도 내지와 반도가 아닌 다른 지역으로 갔을때 상당한 정도로 동등한 지위가 있었다고 상정한다. 단정적으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지만, 이등시민이나 동지적 관계 등등의 표현이 그 점을 상정한다. 박유하는 이런 지적을 부인할지 모르지만,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읽고, 이 지점에서 위화감을 느낀다.

결국 이 문제는 소위 ‘대일본제국’내에서 ‘내지(일본)’와 ‘반도(조선)’의 지위 상의 차이, 권리와 의무 상의 차이, 통합의 차이가 얼마나 있었는가. 다른 말로 해서 얼마나 통합 혹은 동화되었는가에 대한 평가가 우선되어야 한다. 1931년부터 1945년까지의 전쟁기간에서 1905년부터 1945년까지 사실상 일본 지배하에 있던 기간 전체에 이르기까지. 박유하는 이 점에 대해서 명료하게 기술하고 있지는 않으나, 상당한 정도로 동화와 통합이 있었다고 깔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물론 차별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국의 위안부’라는 표현이 불가능하다. 동화와 통합이 전혀 없었다면, 또는 매우 약했다면, ‘제국의 위안부’란 오직 내지(일본) 출신에게만 적용되는 말이고, ‘반도(조선)’ 출신의 경우 식민지의 위안부, 반도 출신의 위안부, 조선인 위안부라고 불렀을 것이다. 실제 조선인 위안부를 비하하는 호칭이 있다.

동화 또는 통합이란 근대적 개념인 ‘국민국가’를 전제로 하는 표현이다. 모든 제국은 국민국가를 중핵으로 한다. 국민국가가 식민지를 거느릴 때, 제국이 된다. 물론 국민국가 형성 이전에 제국이 되었던 경우도 있지만, 일단 일본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국민국가를 형성한다. 일본국, 일본국민이 형성되고, 그 정점에 천황과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형성한다. 이 국민국가가 힘을 가지게 되자, 주변국과 주변 영토를 병합한다. 오키나와, 홋카이도, 가라후토(사할린), 대만, 조선, 남양군도, 만주, 화북지방, 싱가폴, 필리핀, 인도차이나 반도 등. 나중에 점령으로 전쟁기간에만 지배했던 지역을 제외하면, 내지(일본)라는 국민국가에 대만, 조선을 포함한 다수 식민지들로 ‘대일본제국’은 형성된다. 여기서 핵심논점은 1945년까지 조선이 ‘대일본제국’안에서 일본이라는 ‘국민국가’의 일부로 포함되었는가이다. 만일 포함되었다면, ‘제국의 위안부’라 불릴만하다. 그러나 포함되지 않았다면, 제한적으로 나마 그런 권리를 부여받지 않았다면. 어디까지나 ‘조선인 위안부’인 것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조선과 조선인은 일본이라는 국민국가에 포함되지도 않았으며, 일본으로서도 결코 포함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어디까지나 ‘식민지’라는 지위를 넘어서는 지위를 부여하지 않았다. 여기서 1945년 시도된 참정권 부여 시도는 논외로 하자, 어쨌거나 결국 현실화되지 못했다. 본토인과 동등하거나 유사한 지위를 부여하려 하지 않은 것은 물론 일본인들이다. 반면, 식민지의 상층 인사들은 동화와 차별없는 대우를 열망했다. 1930년대 이후 민족주의 조선인의 전향은 이런 기대와 일본의 강요 모두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자발적인 협력이라고 표현한다. 자발적 협력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지배 상층을 중심으로 자발적 협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자발적 협력이 ‘제국’에서 ‘내지’와 ‘외지’라는 구조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하지만, 제국의 지배층, 즉 내지 일본은 전쟁 막바지에 갈수록, 동화의 이데올로기, 즉 황국신민의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면서, 전쟁 동원에 여념이 없었다. 설령 그런 동원 과정에서 사람들이 ‘동화’ 내지 ‘통합’에 대해 기대를 품었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이 ‘동화’ 내지 ‘통합’된 증거라고 볼 수 없다. 이 부분이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라는 주장의 맹점이다. ‘제국의 위안부’는 많았지만, ‘제국의 장군’, ‘제국의 국회의원’, ‘제국의 귀족’, ‘제국의 수상’, ‘제국의 제독’, ‘제국의 대신’은 형식적으로 한 두 명 있거나 없었다. 설령 이들이 동화 내지 통합되었다고 해도, 피지배로서 동원으로서만 통합되었을 뿐, 권리의 주체로 동등한 지배자로 통합되지 않았다. 조선은 소위 ‘대일본제국’에 피지배층으로 흡수되었다. 이런 것을 우리가 통합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론은 모두 제국이라는 지평 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박유하가 ‘제국’의 문제를 제기한 것은 정말 바람직하다. 그렇다면, 그 제국의 구조에 대해서 따져야 한다. ‘대일본제국’의 경우, 내지와 외지(식민지), 일본, 조선, 대만의 구조적 지위와 관계에 대해서 설명하고, 그에 기반해서 논의해야 한다. 그런 설명이 결여되어 있거나, 회피하고 있기 때문에, ‘제국의 위안부’라는 호칭은 끊임없는 논쟁을 낳으면, 일본과 한국에서 서로 다른 이해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번 기회에 ‘제국’이란 무엇인가? ‘대일본제국’이란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 정리하고 넘어가는 편이 좋겠다.

합법, 불법, 탈법에 대한 수많은 논의는 바로 이 부분이 정립되지 않아서 일어난다. 한일회담은 1945년이전의 일본과 한국 사이의 모든 조약은 무효라고 선언한다. 이를 일본은 과거에는 합법적이었으나, 패전으로 무효가 되었다고 이해하고, 한국은 원래 무효라고 해석한다. 패전 이후 일본의 외교는 단 한 번도 과거의 조약이나 법적 행위를 불법이라고 인정한 적이 없다. 언제나 일본의 입장은 그것은 그 나름대로 합법적인 행위였다는 전제 하에서 논의를 전개해 나간다. 그리고 그에 대한 근거를 확립하기에 애쓴다. 이것이 1945년 이후에도 지금까지 이어지는 일본의 일관된 법에 대한 이해와 집행 관념이다.

이런 이해는 일본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과거 일본의 식민지나 피해를 입은 지역에서는 문제가 생긴다. 일본의 과거 행위는 합법적이었는가? 그때는 적어도 합법적이었는가? 아니면 원래 불법인가? 그리고 형식논리적 법 해석은 과거의 국제법적 국내법적인 모든 행위가 합법적이라는 전제하에서 법률행위를 이어나간다.

문제는 합법적이라는 말이 다양한 의미를 가지는데 있다. 단순히 법적 기정 사실에 대한 인정에서부터 시작해서, 법적 행위의 정당성에 이르기까지 그 이해의 폭이 넓다. 현대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국가에서 법적 행위와 법적 질서는 단순히 절차적 합법성을 넘어서는 도덕적 우월성까지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합법적이라는 한 마디 주장에 매우 많은 반론이 힘을 잃는다. 그리고 우리가 일본 제국주의 지배 시절에 식민지 조선에서 이루어진 수많은 법적 행위에 대해서 그건 그 나름대로 합법적이라고 말하는 순간, 마치 현대 법치국가에서 법적 행위가 가지는 정당성이나 합법성과 동등한 가치를 여기에 부여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문제다.

대일본제국의 지배자들에 의해서 조선에서 자행된 수많은 행위들이 당시에 나름의 법적 규정에 근거해서 행해졌을때, 형식적 합법성은 갖추었을런지도 모른다. 당시 법에 의해서 확립된 행위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법치국가의 합법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미셸 푸코는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에서 자유주의 국가의 법치국가로서 조건으로 두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전제국가가 아닌 이상 개인의 기본권은 법률에 의해서만 제한되어야 한다. 둘째, 대의기구인 의회를 통해서 제정되는 법률과 군주, 행정기관에 의해 규정되는 각종 명령, 규칙은 그 형식과 본질에서 동등하지 않다. 법률과 명령이 동등한 국가는 법치국가가 아닌 내치국가(행정국가, 경찰국가)이다. 형식적으로 법이 있다고 법치국가가 아니라 개인의 기본권은 법에 의해서만 제한되고, 의회에서 제정되는 법률과 다른 명령이 동등하지 않은, 각종 명령은 법률의 한계 내에서만 인정되는 것을 법치국가라고 한다. 이런 법치국가에서는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법률 규정들을 실제로 적용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유형의 행동양식이 형성되는데, 이를 질서라고 한다. 이것이 법과 질서의 기본 개념이다. 따라서 형식적으로 법률과 명령이 있다고, 이를 자의적으로 적용하고, 강제력을 동원해서 질서를 형성하는 것은 법치국가도 법질서도 아닌, 전제이자 폭정일 따름이다.

이런 개념으로 1910년 이후의 ‘대일본제국’을 보면, 한 마디로 내지 일본은 법치국가였다. 1930년대 후반에 총동원으로 들어갈 때, 일본이 내치국가적 경향, 전체주의적 경향을 띄기도 하나, 전체적으로 법치국가였다. 즉, 법적 연속성과 통일성이 인정된다.

그렇다면, 식민지 대만이나 조선은 당연히 법치국가에 해당되지 않는다. 식민지 조선이나 대만에는 의회도 없고, 의회에 의원도 보내지 못한다. 참정권도 없다. 게다가 식민지 대만과 조선에는 대일본제국의 법률도 적용되지 않았다. 조선에서는 조선총독이 공포하는 제령이 대만에서는 대만총독이 공포하는 정령이 입법형태였다. 조선과 대만의 특별입법권은 총독에게 부여되어 있었고, 이는 일본 천황에게 위임을 받은 것이다. 일본의 법률은 이를 포괄적으로 인정했다. 대일본제국은 주의 깊게 내지인 일본과 식민지인 조선과 대만의 법적 행위 들에 대한 이름을 조금씩 달리함으로써 법적 동등성을 부여하지 않고, 자의적 해석이 가능하도록했다. 그리고 이를 법치라고 하지 않는다. 법적 지배의 형식을 띈 전제적 지배일 뿐이다. 어떤 전제국가도 법적 형식을 가지고 있다. 그런 법적 형식이 보다 근대적이었을 뿐이다. 근대 국민국가의 식민지였으므로.

즉, 식민지 지배 하의 자의적 통치 기간에 벌어진 모든 법적 행위는 식민지가 해방된 이후 원칙적으로 합법성과 불법성을 재검토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이 결혼, 출생, 호적, 재산 소유 등 통상적인 것에 한하여 인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 조차는 ‘인류에 대한 범죄’라는 이름으로 언제든 재검토가 가능하다. 다만 우리는 이런 법적 재검토를 자의적으로 하지 않고, 사법제도를 통해서 제한적으로 실시하는 것 뿐이다.

게다가 한일회담에서도 식민지 시기의 조선에서의 법적 행위의 지위에 대해서 한일간에 의견의 일치를 이룬 것이 아니다. 한일회담 자체에도 허점이 있다. 박유하는 배상금 혹은 보상금이라고 말하는 청구권 자금을 일본에서는 독립축하금으로 해석하고 있음도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게다가 위안부 문제는 한일회담에서 언급하지 않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일본이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와 무관하게 주장할 수 있고, 또 주장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현재로서 일본은 지금까지의 자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박유하를 비롯해 섵부른 화해를 바라는 사람들은 지금 일본이 조금이라도 유화적일 때, 이거라도 받자고 사람들을 설득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화해하자고. 재판을 한 없이 질질 끌면서, 합의서를 종용하고 있는 셈이다. 일단 합의서에 서명하고 나면, 그때는 끝이다. 그것이 바로 지난 한일외무장관 회담의 최종적이고, 불가역적 결정의 의미다. 그리고 합의서에 도장을 찍지 않으면, 백년 혹은 이백년 후에라도 끊임없이 문제라도 제기할 수 있다. 당사자가 모두 없어도, 재심이라도 청구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대협과 위안부 피해자를 중심으로 이 합의를 수용하지 않고, 끝까지 수요집회를 이어나가는 것이 큰 의미가 있다. 이분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것은 한국 정부와 시민들의 책임이기도 하다.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불편을 감수하는 일이다. 한국의 지일파 지식인들, 일본의 지한파 지식인들. 원하든 원치않든 화해와 교류의 책임을 떠맡게 된 사람들이 이 문제로 가장 고통과 어려움을 겪었고, 어설픈 해결책들을 제시하고 있다. 섵부른 화해 보다, 갈등의 직시가 더 바람직해 보인다. 불편한 대로도 충분히 교류할 수 있다.

어떤 점에서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 혹은 리버랄들의 ‘퇴락’이라는 표현은 타당하면서도 조금 지나쳐 보인다. 내가 지나치다는 것은 기대가 지나쳤다는 의미에서 이다. 리버랄의 활동의 한계는 사회 전체의 한계 속에서 정해진다. 일본의 변화와 함께 리버랄들의 활동 지형이 좁아졌다. 그냥 그것 뿐이다. 리버랄들은 계급과 민족과 환경을 넘어서서 자유로워서 리버랄이 아니다. 리버랄은 자유주의 지배체제 위에서 존립 가능하고, 자유주의 지배 체제의 정당화 기능과 함께 보완 기능을 하지만, 자유주의 지배체제를 넘어서지 못한다. 일본의 리버랄은 일본이라는 한계 속에 있다.

그리고 이 모든 문제는 일본의 천황제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미국이 일본 천황에게 전쟁 책임을 묻지 않고, 천황이 아직도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남아 일종의 유사 신적 지위(상징이라는)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식민지 지배와 전쟁 책임에 대한 기탄 없는 논의가 이루어지려면, 천황의 전쟁 책임이 인정되어야 한다. 천황이 전쟁 책임을 인정해야만, 그의 이름으로 전쟁과 학살, 식민지배 및 잔혹행위에 참여했던 모든 개인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 그렇다고 천황에게 사죄의 무릎을 꿇으라는 것이 아니다. 천황은 이미 지난 도호쿠 대지진(후쿠시마) 때, 이재민들을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위로했다. 그런 형식적인 무릎 꿇음이나 사죄의 고개 숙임 따윈 없어도 된다. 그저, 지난 식민지배와 전쟁의 잘못과 책임이 소위 ‘대일본제국’의 지배자이자, 개인인 선대 천황들, 즉 메이지, 다이쇼, 히로히토에게 있었음을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 한일간의 갈등이 정말 해결되고, 화해가 이루어지려면, 천황의 개인적 전쟁 책임 인정이 있어야 한다. 이제와 전범재판을 할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래야만, 천황의 이름으로 전쟁에 참여한 다른 모든 이들도 이를 인정하게 된다. 일본에 정말 필요한 것은 천황의 개인화이자 민주화이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선택이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강요할 생각도 없다. 나는 다만 일본이 정말 화해를 원한다면, 그렇게 해야 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해 두려는 것 뿐이다. 달리 말하면, 일본의 전쟁 무책임론, 피해자론 자체가 문제라는 말이다.

자이니치在日 정영환이 조선적을 유지한 채, 한국 땅을 밟는 날이 하루 속히 오길 바란다. 그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2016.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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