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욱, 『아주 낯선 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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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오리엔탈리즘에 대하여. (김욱, 『아주 낯선 상식: ‘호남 없는 개혁’에 대하여』, 개마고원, 2015.)

이렇게 말하면 호남 사람들은 좀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난 사실 최근의 호남정치, 새정연 분당 사태, 친노 패권 등의 언술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저 표면적으로 호남은 새정연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형태의 경쟁이 벌어지는 것으로 이해했고, 분열은 심리적 불안을 가져왔다. 그러다가 김종인이 선대위원장으로 들어가면서 다시 안정되는 것을 보고 다소 안도하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정말 웃기는 일이다. 한쪽에서는 한상진이 이승만 국부론 운운하다 논란을 일으키는데, 그러나 정작 김종인은 신군부 국보위에 참여해서 자기의 정치이력을 시작한 사람이다. 그리고 민주당(일종의 보편적 명칭으로 민주당이라고 부르다)의 원형적 정치체험은 신군부에 의해 짓밟힌 5.18광주가 아니던가. 박정희 정권에 의한 김대중 탄압은 신군부로 이어졌고. 순진무구하게 역사적 순수성 따위를 운운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다들 좀 너무 뻔뻔스럽고, 게다가 너무나 무기력하지 않은가? 다들 자기 생각에 자기가 짜놓은 구도에서 이렇게 혹은 저렇게 발언하거나 행동한다면, 표가 확장되어서, 자기가 주도하는 세력이 집권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한끝에서 다른 끝까지 펼쳐져있는 유권자의 바다에서 어느 지점에 닻을 내리고, 그물을 치면 거기서 부터 다른쪽 끝까지 있는 물고기는 모두 내것이라는 주장들이다. 도대체 이런 어처구니 없는 주장들은 어디에서 등장하게 된 걸까.

그러다가 몇몇 사람의 칼럼과 논쟁에서 김욱의 『아주 낯선 상식: ‘호남 없는 개혁’에 대하여’』라는 책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책은 손에 넣기 전에 이 책을 둘러싼 논쟁들과 주장들을 먼저 접하게 되면서, 아주 많은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책이 내가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어떤 불편함, 어떤 어색함, 어떤 뻔뻔함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누구나가 당연시 하는 어떤 것이다.

‘호남 몰표’. 소위 ‘더민주’와 ‘국민의당’은 모두 호남몰표를 당연시하고, 호남몰표를 획득할 수 있는 위치를 차지하려고 한다. 그러나 동시에 호남몰표 만으로 집권할 수 없는 만큼, 그 외에 얼마나 더 많은 표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둘러싼 논리 경쟁이다. 더 많은 표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 증명할 수 있으면, 호남에서의 지지율이 올라가며, 호남몰표의 수혜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즉, 호남몰표를 둘러싼 경쟁이다. 더민주에서 국민의당으로 힘이 쏠리는 것처럼 보이더니, 더민주가 자리를 잡자 다시 더 민주로 힘이 쏠린다. 호남 입장에서 보면, 주도 세력이 친노든 안철수 든 누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누가 집권할 가능성이 있어 보이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사실 이 점은 ‘정의당’으로 대표되는 진보정당도 마찬가지이다. 정의당도 결국 지역구 당선을 위해서는 선거연대를 해야하고, 실제로 이 당의 전신은 선거연대를 통해 의석을 확보했다. 이 당은 다른지역에서의 부가되는 표를 전해 주는 대신, 확실한 호남표로 당선가능한 지역구들을 요구했고, 그것이 관악, 성남, 순천, 광주였다. 내어주는 것에 비해 혁혁한 협상성과였다. 치킨게임의 결과이기도 하고. 그리고 이 모든 곳에서 당선되었다. 이 모든 것의 기반에는 호남몰표라고 하는 ‘상수’가 있다. 이 상수를 획득하기 위해, 경쟁을 하기도 하고, 협박을 하기도 한다. 여튼 호남몰표를 얻지 못하는 한 아예 출발점에 서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유시민이 팟캐스트에 나와서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된다”, (김욱이 지적하는 노무현의 “이회창을 찍기 싫어서 나를 찍었다”, 문재인의 “부산정권” 발언 같은 것이 사실상 같은 맥락이다. 결은 조금 다르다 해도.)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출발할 수 있는 출발점, 또는 결정적 승리의 동인을 제공하는 유권자들을 존중할 줄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이 짜놓은 구도에서 움직하는 수동적인 표들일 뿐이다. 호남 유권자를 수동적인 무리로 취급하는 것은 소위 영남 친노나 안철수를 깃발로 모이려다 말았던 비노나 야권 연대라는 이름으로 몇몇 지역구를 거래하던 진보 정당도 마찬가지다. 심지어는 민주당 공천으로 호남에서 당선되던 의원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 점을 지적하려고, 김욱은 광주의 세속화나 호남 다당제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말하는 스스로도 힘이 빠져 보이지만. 호남 유권자는 선거 때마다, 호남 몰표라는 이름의 전략적 투표행위를 하고, 그 결과 정치적 소외를 맛본다. 호남의 전략적 선택은 장기판의 말이 되고, 군수창고의 역할을 할 뿐이다. 김대중 대통령 이후 호남은 정치적 주체로 등장하지 못하고 있다. 호남몰표라는 이름으로 전략적으로 활용하려는 쪽에 의해서 대상화되고 있다. 그것도 반복적으로, 그러므로 탄식의 소리가 나오는 것도, 자조의 소리가 나오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그래서 공적인 자리이든, 사적인 자리이든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된다는 식의 망발이 나오는 것이다. 이런 일이 무한히 반복될 수가 없지 않은가.

이제 영남패권주의, 친노패권주의라는 말의 의미를 따져보자. 난 당내 사정에 밝은 사람이 아닌지라, 누가 무슨 포스트에 있고, 선거과정이 어떻고, 당내 경선과정이 어떻게, 당직 인선과정이 어떻고, 공직 후보자 선출과정이 어떻고, 그런 것은 잘 모른다. 기껏 언론을 통해 접할 뿐. 그런 것은 알 위치에 있지도 않다. 그러나 김욱의 책을 몇 줄 읽다가, 친노패권, 혹은 영남패권 등 소위 말하는 패권주의가 무엇을 지칭하는지 알게 되었다.

“더욱 결정적인 문제는 호남 정치인을 호남과 불리시키는 ‘분리 이데올로기’가 노무현 이데올로기로 변주되어 새정치민주연합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무현 이데올로기란, ‘허구적 지역주의’ 현실 속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이 대통령선거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영남에서 득표력이 있는 영남후보를 내세워 호남몰표로 뒷받침해야 하고, 그렇게 당선된 영남 대통령은 ‘민주성지’ 호남의 정신적 양해 속에서 세속적인 영남을 물질적으로 유혹해 지역주의를 구조적으로 타파해야 한다는 ‘은폐된 투항적 영남패권주의’에 입각한 위선적 정치공학이다.”(35)

어찌나 흥분했는지 주장이 과격하지만, 핵심은 단 한 가지다. 현재의 인구구조상, 영남(TK와 PK)에서는 영남패권적 투표 즉, 지역 후보에 몰표가 이루어지고, 호남에서도 그 반작용으로 호남몰표가 이루어지는 이상, 인구가 적은 호남으로서는 자기 지역 후보를 내세우면, 절대 이길 수 없다. 그러니 노무현, 문재인, 안철수 같은 영남의 개혁적 후보를 내세워서, 영남표와 수도권 개혁표를 가져오고, 호남몰표를 바탕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형태의 정치공학이다. 김욱이 이 정치공학이 위선적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이 구도 속에서 앞으로 영구히 호남 출신 정치지도자, 즉 대통령 후보는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당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호남은 인구를 늘이기 위해 자식을 많이 낳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남패권 혹은 친노패권의 본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몇몇 사람에게, 어떤 집단에게, 정당 구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패권주의를 청산하라고 요구할 때, 패권이 어디있느냐고 반론하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실상은 패권이 존재한다. 패권은 바로 “호남에서는 대통령도 대통령 후보도 나올 수 없다”는 담론 속에 있다. 이 담론 자체가 패권이다. 이 담론이 생산되는 곳은 원래는 영남과 수도권이었지만, 이제 호남에서 조차 이 담론이 재생산 되고 있다.

만일 이 관계가 상대적으로 수평적이라면, 상호신뢰적 과정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다. 호남몰표로 당선된 정치인들이, 자신들이 당선될 수 있었던 그 표의 무게 만큼 호남을 존중했었다면, 그에 상응하는 이익을 호남에 가져왔더라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호남몰표’로 당선되고, 집권한 이들은 선거가 끝나자마자, 자신들이 당선될 수 있었던 근거인 바로 그 ‘호남몰표’를 망국적 지역주의라며 매질한다. 앞서 문재인의 부산정권 발언, 노무현의 이회창이 싫어서 발언은 그냥 발언이라고 치자. 이해찬 총리의 적자 가능성으로 인한 호남고속철 철회나 노무현 정부 들어서 김대중 정부에 형성된 정부 등 여러 곳에 있는 호남 인맥의 해체.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두 개의 사건. “대북 송금 수사”와 “민주당의 분당(열린우리당의 창당)”. 이 두 개의 사건은 문자 그대로 배신이었던 셈이다. 이 두 사건의 핵심에는 호남의 정치 핵심을 부패, 무능 그리고 지역주의와 연결지은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 비하면, 정동영 후보에 대한 지원이 없었던 것은 일종의 에피소드에 가까운 일이다. 호남 몰표로 당선된 영남 대통령(부산정권)은 영남 지역주의를 깨기 위해 영남에 혜택을 주어야 한다. 자신에게 몰표를 준 호남에는 공정하게 할수 있을 뿐.

호남몰표가 기대한 만큼의 정치적 이익 혹은 경제적 이익을 가져오지도 못하고, 선거연합의 파트너에게 무시, 경멸, 배신을 반복적으로 당하면서도, 호남이 딴 생각을 해볼라치면, 분열하면, 다시 찍지 않으면 호남은 무너진다는 식의 협박을 당하고, 그래서 다시 전략적 선택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스스로 포장하면서, 몰표를 주는 구조가 바로 패권이다.

본래대로 라면, 그들은 자력으로 집권하는 데, 힘이 모자라 필요했던 집권청부사일 뿐이었는데. 이제 그들이 안방을 차지하고, 집안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셈이다.

김욱의 이야기가 다 옳다는 건 아니다. 이런 말을 써놓지 않으면, 원치 않는 논쟁을 도무지 피할 길이 없을 것 같다. 쓴다고 피할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만.

호남오리엔탈리즘, 이라는 용어로 이런 현상을 다시 말할 수 있다. 이것은 한국 내부에 자생하는 오리엔탈리즘의 변종 호남오리엔탈리즘 같은 것이다. 그것도 오리엔탈리즘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의 가장 큰 특징. 동양은 스스로를 대표할 수 없고, 스스로의 이익을 발견할 수 없고, 스스로를 규정할 수 없기 때문에, 서양이 동양을 대표해주고, 서양이 동양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것을 가져다 주며, 서양이 동양을 연구해서 동양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준다는 것. 그러므로 당연히 서양은 동양을 지배한다.

호남은 자기 스스로를 대표할 수 없다. 국회의원이라는 이름의 하위 대표자는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자기 대통령 후보는 낼 수 없다. 당선 시킬 수 있는 힘이 없으니까. 호남에게 가장 좋은 것은 수도권과 영남의 개혁 세력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수도권과 영남의 개혁 세력 중에서 특히 영남 출신의 대톨령 후보에게 자신의 운명을 의탁하고, 그에게 몰표를 던짐으로써 순수한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 그러나 그가 당선 후 과연 호남을 위해 일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건 그의 양심에 맡길 뿐이다. 다음 선거가 되어서도 또 그렇게 해야한다. 자신의 후보를 내면, 정동영 처럼 응징을 당하게 된다.

가장 우려스러운 일은 호남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호남에게 어떤 것이 좋은 것인지를 호남 외부에서 결정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선거 때만 되면, 수많은 정파들은 각자 이런 저런 해석을 제시하며, 호남에게 가장 유리한 선택지라는 각자의 계산서를 내민다. 그럼 호남은 그 중에서 하나를 골라 전략적 선택이라는 이름으로 또 몰표를 주어야 한다. 전략적 선택이나 몰표는 한국과 같은 정치지형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당장 대구경북이 매우 오랫동안 그렇게 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권력을 유지하고, 그에 따른 온갖 열매를 누리는 것에 비하면, 별반 비난도 받지 않은채 그렇게 한다. 그들이 비난받지 않는 것은 지배집단으로 지배블럭에 참여하기 때문이고, 호남이 비난받는 것은 지배를 위해 경쟁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 누구를 골라 어떤 방식으로 전략적인 선택을 하고, 몰표를 줄지가 호남의 논리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형성된 논리가 호남에 강요된다는 점이다. 전략적 선택을 강요당하고 몰표를 갖다 바친다. 이때, 호남의 중간 정치지도자들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지도자들은 일종의 소작농을 관리하는 “마름” 역할을 한다. 그들은 표를 수확해, 패권세력에 가져다가 바친다.

지난 일주일여 문재인 대표의 인재영입이 많은 화제를 모았지만, 나는 며칠이 지나면서 곧 우려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이런 우려는 영입대상이 된 사람들의 자격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인재영입과 차기 정치인을 수혈하는 과정이 호남 외부에서 호남 외부 인사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것도 친노패권이라고 비판받는 사람에게서. 호남은 호남에게 가장 중요한 미래인 젊은 세대의 육성도 스스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호남 출신이지만, 호남 외부에서 격투해가면서 싸워서 일어선 사람들, 호남이 알아보지 못하고, 호남이 쓰지 못하던 사람들을 호남 외부인인 당대표가 발탁해서 호남에게 안겨주는 구도이다. 호남에게 좋은 것, 호남에게 중요한 것을 호남은 알지 못하니, 호남을 위해서 대신해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호남은 미성숙한 미성년이기 때문에.

여기서 호남정치라는 대안이 등장한다. 천정배가 외곽에서 젊은 세대를 수혈해서, 호남정치를 하겠다고 한다. 호남정치란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전형적인 탈식민주의 대응이다. 순수한 저항적 민족주의에 의존하는 것. 간디 식으로 비폭력적을 표방하면서, 모든 문명을 거부하고, 물레를 돌리겠다는 것. 순수한 호남으로 돌아가겠다는 전략이다. 그러나 이미 많은 것이 변한 다음이다. 당연히 난관에 봉착했다. 젊은 세대가 수혈되지 않는다. 더민주에서 부르지만, 자신이 비판하던 패권세력이다. 국민의당으로 가자니 자신이 물갈이 해야 한다던 사람들이 모여 있다.

이런 상황에서 김욱이 말하는 것은 신성광주의 세속화다. 광주는 욕망에 따라 투표할 수 있어야 한다. 민주화 성지, 시민적 성숙 따위의 구호를 접고,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가장 많은 이익을 가져다 줄 후보에게 투표해야 한다. 그것이 민주정치다. 그러나 현재 구도에서 호남이 욕망 투표를 하게된다고 해서, 영남에서 야당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도 별로 없어 보인다. 이미 영남은 오랫동안 욕망투표의 결과로 형성한 패권의 수혜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것은 자멸적 선택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김욱은 독일식 정당명부제로 도피해 버린다. 실현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그 제도로. 그 제도가 실현되려면, 지금 소수파가 다수파로 확실하게 바뀌어야 하고, 그때 과거에 소수파였던 미래의 다수파는 승자독식의 선거제도가 가져오는 이익을 확실히 누릴 것이다. 그런 그들이 왜 그것을 바꾸어야 하겠는가. 이런 제도 개편은 아주 특별한 상황에서나 이루어지는 것이다.

호남이 오리엔탈리즘을 벗어나는 길은 어쩌면 자기 스스로를 직시하는 것이다. 호남의 정치적 주체성을 확보하는 방법 뿐이다. 그것은 스스로 집권할 수 없을 때 필요한 연대 파트너를 스스로 찾는 일이다. 오직 이 한 가지를 기준으로 해서, 호남에 가장 많은 이익을 가져다 줄 파트너는 누구인가를 따라 선택해야 한다. 배신하지 않고, 상응하는 댓가를 치를 파트너를 골라야 한다. 이익정치의 균형이 가장 절실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위해서, 호남정치의 복원이 필요하다. 모든 형태의 선거연합이 호남몰표를 그 기반이자 상수로 전제하는 이상 더욱 그렇다. 호남정치의 복원이란, 정파를 막론하는 호남 정치 지도자들의 의사소통의 장인 동시에, 호남의 젊은 세대를 지역에서 정치지도자로 육성하고, 사람들의 정치의식을 깨이게 하는 시민정치교육의 확산을 통해서 가능할 것이다. 호남정치의 복원 위에서 호남을 정치적 주체로 인정하는 선거연합이 존재할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들여야 한다면, “데릴사위”를 들여야 한다.

2016.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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