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고메 다케시, 『식민지제국 일본의 문화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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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신궁에서 신사참배하는 모습. 연도와 참여자들의 모습은 확인하지 못했다. 학생들의 교모와 가운데 선 학생의 깃발로 보아, 어느 학교인 것으로 보인다. 학생들이 정렬한 모습이나 교기 그리고 맨 앞에 선 사람 등의 모습을 볼 때, 내가 중학생 때, 검정 교복을 입고, 교기 앞에 모두 열을지어서 학교 행사를 할 때, 흔히 하던 국기에 대한 경례나 교련에서 하던 열병을 연상시킨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최경례(가장 깊숙히 허리를 숙여서 하는 경례)를 하는 것인데. 신사참배와 어진영(일본 천황의 사진)에 대한 경례, 동방요배(일본 황궁을 향해서 허리를 숙여서 절하는 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끝나고, 모두 달려가서 신사참배를 한다던가, 일본의 ‘이세신궁’ 등으로 교계 지도자들이 여행을 하면서 신사참배하는 사진 같은 것도 있지만, 실상 학교와 학생을 대상으로 한 신사참배가 신사참배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학교는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국가주의를 전파하는 장이었고, 신사참배를 가르치고, 이를 통해 사람들을 규율하던 장이었다. 어떤 점에서 기독교 역사학계에서 신사참배를 기독교 말살정책으로 이해하는 것은 해방 후 교단 분열과 갈등, 국가조찬기도회와 같은 교계 지도자들의 독재정권 지지행위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관련이 있다. 신사참배 연구는 식민지시기 교육정책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마고메 다케시(駒込武), 『식민지제국 일본의 문화통합: 조선·대만·만주·중국 점령지에서의 식민지 교육 (植民地帝国日本の文化統合)』, 오성철, 이명실, 권명희 역, 역사비평사, 2008 (1996).

처음 식민지 시기에 대해 관심을 가졌을 때만 해도, 식민지의 조선인들에 대한 관심이었다. 이는 곧 때로 꽤나 ‘자율성’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는 조선총독부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그러다가 막연하게 나마, 식민지 시기를 이해하려면, 어느 한 쪽만 보아서는 알 수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앙드레 슈미드의 문제제기에 눈을 뜨면서, 식민지 시기 ‘한국’과 제국주의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둘 모두와 이 시기에 이들과 연관을 맺고 있었던, 대만, 만주, 중국을 함께 연구해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고 고마고메 다케시를 읽기 시작했을 때, 그는 ‘제국사’라는 관점을 제시했고, 1990년대 중반 이후 일본에서도 ‘제국사’라는 관점이 제기되고 있다고 시사했다. 2001년 영국 런던의 역사연구소에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말로 너무나 유명한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출간 40주년을 맞아 심포지움이 열렸고 그 결과가 『굿바이 E. H. 카(What is History Now?)』라는 책으로 나왔다. 린다 콜리는 ‘제국사’를 제국들의 비교사와 제국과 식민지 양쪽의 목소리를 듣는 역사연구의 방향으로 제시한다. 그런 점에서 고마고메 다케시의 이 연구는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 시기 연구에서 한 전범을 보여준다.

우연한 소개로 이 책을 접했지만, 읽는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고마고메 다케시의 연구를 꽤 오래 살펴보게 될 것 같다. 만일 ‘신사참배’ 문제에 관심이 있는 연구자라면, 고마고메 다케시의 「조선에서의 신사참배 문제와 일미관계: 식민지 지배와 ‘내부의 적’ (朝鮮における神社参拝問題と日米関係), 『岩波講座アジア太平洋戦争4帝国の戦争経験』)이라는 논문을 꼭 읽어보길 권한다. 다행히 국문 번역이 『식민지 교육연구의 다변화』라는 책에 실려있다. 또 『생활 속의 식민지주의』에 실린 「식민지에서의 신사참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대만 타이난장로교중학의 신사참배에 대한 연구이다. 대만과 조선의 학교 신사참배 특히 미션 스쿨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는 서로 연결된 정도가 아니고, 하나의 연속적인 사건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 책으로 들어가보자.

흥미롭게도 이 책의 출발점은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의 일본 국가주의, 내셔널리즘, 파시즘에 대한 관점이다. “내셔널리즘은 제국주의-제국주의는 내셔널리즘의 발전임과 동시에 그것의 부정이기도 하다-및 모든 형태에서의 권력정치의 추진력 또는 대항력으로서 여전히 생명을 지속해 갈 것으로 생각한다”(『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327, 강조는 저자) 근대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인 내셔널리즘은 그 기획이 성공함과 더불어 가지게 된 힘을 외부로 투사하려는 확장성을 가지게 되고, 제국의 길로 나아간다. 내셔널리즘에 입각해서 성립된 제국주의는 제국이라는 ‘다민족’ 국가 현상 속에서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길을 찾는데, 그것은 일본의 경우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일종의 탈내셔널리즘과 보편주의 지향으로 나타났다.(22) 그리고 이 책에서 잘 지적하고 있는 대로, 외지(外地, 식민지, 괴뢰국, 점령지)에서의 보편주의적 시도는 내지(內地)에서의 내셔널리즘적 흐름 및 집착과 충돌하고 실패하게 된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말처럼 ‘빌린 옷으로 국민적 복장을 함으로써 제국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속임수(23)라는 것이다. 그래서 고마고메 다케시는 식민지제국 일본의 이민족 지배 역사 속에서 내셔널리즘의 자기 부정의 계기가 배태되고 자기 모순이 심화되는 과정을 밝힌다.(24) 그러므로 이 연구는 일본의 입장에서 기술한 일본 내셔널리즘의 자기 붕괴 과정에 대한 연구인 셈이다.

고마고메 다케시의 핵심 주장은 ‘동화’는 없었다는 것이다. 고마고메와 달리 식민지 지배를 당한 조선인의 자식인 나는 신사참배, 조선어 폐지, 창씨개명 등의 강압적 동일화 정책과 징병제, 징용 등의 기억을 이야기하지만, 고마고메는 그것이 동화였는가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다. 야마나카는 한일합방이 일종의 동화 · 융합 유형이기는 해도, 조선정체론으로 평등화 원칙이 부정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계층화 유형’이라고 평가하며(33), 식민정책학자였던 야나이하 다다오(矢內原忠雄)의 말을 따르면 노골적이지는 않았지만, 실제적인 종속정책이고, ‘식민지인에게 경제적 · 사회적 동화를 요구하는 동시에 정치적 동화의 권리를 거부하는’ 애매한 정책이었다.(35) 미야타 세쓰코는 동화· 황민화 혹은 ‘내선일체’라는 언설이 자의적으로 사용되었고, 지배자도 그것을 믿지 않았다.(37) 동화 역시 하나의 언술 담론 체계이자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고마고메는 조선 보다 먼저 대만을 식민통치하게 되었을 때, 일본은 일종의 ‘내지연장주의’를 검토했다고 한다. 그러나 길지 않은 논쟁을 거쳐 ‘헌법의 은택’은 부여하지 않고, 문명과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총독에게 ‘율령(律令) 제정권)을 주는 강력한 총독 독재체제를 수립하여 식민지의 길로 가게 된다. 이는 육삼법(六三法)과 삼일법(三一法)으로 표현된다.(53-55) ‘헌법의 은택’ 따위의 고루한 말을 듣고 있으면, 코웃음이 날지도 모르지만, 핵심은 헌법 상의 기본적 인권과 권리를 외지인에게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59) 은택이란 메이지 헌법이 천황이 내린 흠정헌법이기 때문이다. 즉, 일본의 식민지 통치는 처음부터 끝까지 의무는 있지만 권리는 없는 통치 형태로서, 상황의 변화와 필요에 따라 일부 권리를 부여하는 그 역시도 지배자의 자의성에 의존하는 구조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식민지는 내지인의 욕망을 분출하는 배출구(62)가 될 뿐이다.

이런 주장은 식민지 근대(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강력한 비판이 된다. 식민지 근대(성)에 대한 논의(신기욱, 마이클 로빈슨, 윤해동 등)는 ‘동화’에서 출발한다. 조선에서의 식민지 근대가 일본을 위한 식량기지, 사양산업 이전이나, 대륙진출을 위한 병참기지 혹은 군수산업이라는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즉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영역이 열렸음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공간’이 열려야 한다. 이를 윤해동은 ‘식민지 공공성’이라고 표현한다. 정치를 제외한 사회라는 영역의 전개. 그러므로 식민지 근대(성)을 말하려면, 이 공간이 얼마나 열리는지가 중요하다. 그래서 식민지 근대(성) 논의는 이 공간이 상대적으로 가장 폭넓게 열렸던 1920년대에서 1930년대 초반에 주목한다. 식민지 근대(성) 논의는 이 공간이 얼마나 제약적인가에 달려있다. 식민지라는 제약이 얼마나 심각했는가? 미야타 세쓰코나 고마고메 다케시는 지금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그 공간은 훨씬 작았으며, 그 공간은 구조적으로 제약되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동시에 이런 주장은 협력자 연구에서 큰 제약을 가하게 된다. ‘친일’과 ‘반일’이라는 식민지 시기 제국의 지배에 협력했던 조선인들은 이 상대적으로 열린 공간에서 비로소 협력하기 시작한다. 이 열린 공간에서 먼저 나서서 협력했던 사람이 있고, 위기와 전쟁으로 이 열린 공간이 닫혀가자, 이번에는 동화 이데올로기를 믿고 혹은 반신반의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따라갔던 사람들이 있고, 강압에 의해 순응했던 사람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간이 처음 구상될 때부터 기만적이었던 만큼, 협력자(collaborator)는 협력자라고 부를 수밖에 없게 된다. 알았든 몰랐든. 그 현장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개별 협력자가 구조적 제약 속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든 간에. 중립적인 협력자 또는 민족적 협력자라는 공간이 지워지거나 매우 협소해 지게 된다. 반면, 혹은 속아서 혹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협력했던 사람들이 부각되고, 협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변덕스러운 지배자의 제멋대로인 성격 때문에 고통받았던 사람들이 나타나게 된다.

‘동화’는 없었다고 말하는 고마고메 다케시의 주장은 조선에서의 상황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성격 그 자체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그래서 이 주장을 뒤집기가 매우 어렵다. 천황제 이데올로기는 히틀러의 『나의 투쟁 (Mein Kampf)』처럼 출판된 적은 없다. 이것은 ‘일본제국헌법’과 ‘교육칙어’라는 공식 문서를 통해 제시된다. ‘황종황통의 유훈’을 명징하게 한다든가. ‘만세일계’라든가. 일본인이 아니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주문처럼 외우는 것이다. 그리고 이 천황은 세속적 권력과 종교적 권위를 모두 가진 존재이며, 여기서 비로소 ‘일본’이라는 “공감의 공동체”에 대한 귀속의식이 생긴다고 말한다. 일본어를 말하고 일본문화를 내면화하는 일본인으로 이루어진 공감의 공동체는 보증하는 ‘상상적 보증자’가 천황이다.(61)

이를 내가 거칠게 이해한 대로 알기쉽게 설명해서 말하면 이렇게 된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천황이 다스린다. 그런데 이 천황은 3,000년 동안 하나의 황실이 교체되지 않은 채, 그대로 지속되고 있다.(만세일계) 이 천황가의 기원은 신이다.(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천황은 신의 후예로 신의 나라(神州) 일본을 다스리는 신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으로 나타난 신인 천황가로부터 3,000년의 은혜를 입은 일본의 백성(臣民)인 ‘일본인’은 천황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 즉, 충량(忠良)한 신민이 된다. 그것이 ‘일본’이 외세를 물리치고 번영하는 길이며, 그 과정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일본인도 번영하게 된다. 천황가가 잠시 권력을 잃거나, 쇼군에 권력을 행사하는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 신의 후예이자 신인 천황(미카도)가 다스리는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천황으로 하나되어 번영할 것이다. 천황은 일본을 일본되게 하며, 일본인을 일본인이 되게 하는 존재이다.

천황제 이데올로기가 이런 이데올로기라면, 일본인이 아닌 사람이 일본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대만인이나 조선인이 일본인이 될 수 있을까? 비로소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대한 약간의 이해를 하게 된 나는, 당시 일본 통치 당국에 협력하려고 애썼던 사람들의 비애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들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아무리 일본인 되려고 애쓴다고 해도, 일본에 대해 알면 알아가고, 충성하고 애쓰면 애쓸수록 자신이 일본인이 아니라는 사실에 절망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마고메 다케시는 천황제 이데올로기가 엄존하는 한 일본인이 아닌 사람이 일본인이 되는 길, ‘귀화’의 길은 없거나 있어도 매우 어려우며, 외지의 한 지역이 일본의 일부가 되어도 그 사람들이 일본인이 될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일제 말기 일본에 유학하고, 일본에 협력하고, 일본어를 쓰면서, 일본인과 결혼하고, 일본인이 되려고 했던 사람들은 결국 무엇을 느꼈을까. 문득 일본의 패전으로 인한 조선해방과 함께 철수하는 일본인을 따라서 일본으로 잠입한 사람들은 없었을까? 그들의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일자리를 찾아서 일본에 간 사람들과 구별하기 쉽지 않겠지만, 스스로 일본인으로 살려고 패전국 일본으로 넘어간 사람들(元朝鮮人)은 없었을까.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이런 성격을 가장 통렬하게 논파한 것이 아마도 마루야마 마사오의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일 것이다.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의 맨 앞에 실린 그 글은 천황이 중심이 된 일본 국가의 국가주의는 주권의 형식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내면성을 집착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국가는 특정의 조건을 지키는 것으로 국가 권력은 국가권력의 형성과 성립 과정을 설명하는 것으로 정립되어야 하지만. 일본에서 형성된 국가주의는 국가가 특정의 개인, 즉 천황에 체현되어 있었고, 그 천황은 ‘진선미(眞善美)’라는 가치를 스스로 체현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국가의 내용성과 한 사람, 한 사람의 일본인이 결합되는 이상, 형식성(자유민주주의, 입헌군주 등)은 무의미해 진다. 이런 가치와 행동형태는 기독교인들이 흔히 말하는 ‘하나님나라’의 현재적 구현 형태이다. 개별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일상적 삶에서 자기 욕망을 따라 살면서 동시에 천황의 의지와 명령을 실제에 구현하는 형태. 천황에 가까울수록 더 높은 권위를 가지는 위계적 질서. 천황제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종교이자, 종교의 대용품이었다. 그리고 메이지 시대에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 사람들은 기독교의 대용품으로 이를 생각했던 것이다. 역설적으로 천황제 이데올로기는 기독교와 같은 국민통합의 기능, 즉 식민지 피지배민들을 신의 자녀로 복속시키는 기능이 없어서, 자기 붕괴를 막지 못했다. 일본에서 기독교가 확산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도 있지 않을까.

고마고메 다케시는 대만, 조선, 만주, 화베이(華北)에서의 일본의 교육정책을 설명한다. 처음 일본이 대만을 점령한 후 내지연장을 둘러싼 논쟁이 살짝 있었으나 곧 진압되고, 일본어 교육과 유교를 빌리는(가타주의) 동화라는 정책을 택한다. 이런 정책은 서구 제국주의의 선교사를 통한 교육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일본어 교육법은 ‘구안식’ 즉, 어떤 배경도 없이 일본어로만 수업을 진행하는 방법에 의해 실시되었다. 일본어로 말하면 일본사상이 혈맥에 흐르게 된다는 발상이다.(91) 그러나 기독교와 근대문명, 자유무역주의를 통해 식민지를 지배하는 서구 세력에게 충격을 받고, 기독교의 대체물로 유교사상을 한문교육의 형태로 모색한다.(73-43) ‘역성혁명’ 사상을 전파할 수 있는 『맹자』는 곧 제외된다.(79) 혈족으로는 배제되지만 언어로는 통합하는 국가통합은 배제하되 문화통합을 해나간다는 모순 정책이었다. 그리고 이는 중화제국이라는 우주를 해체하려는 것이었다.(101-103)

일본은 조선을 지배하게 된 후, 조선과 대만의 차이(크기, 인구, 선교사의 영향력)에 주목한다.(108-109) 의욕적인 공립보통학교 체제를 도입해 한국인의 교육수준을 낮추면서 확신시킨다.(128) 약육강식의 사회진화론을 내세우면서, 문명화의 은혜를 표방하고, 충량하지는 않으나 순량(順良)한 신민으로 양성한다. 이는 동화를 거부하는 ‘교화의견서’로 표출된다. 이는 대만지배 경험의 반영이기도 하다. ‘교육칙어’를 조선에도 인정하는 ‘조선교육령’이 나오지만, 문제는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에게 천황에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보급할 것인가 였다. 이는 은혜를 베푸는 천황의 ‘인정(仁政)’이라는 유교와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교묘하게 뒤섞은 애매한 형태로 나타난다.(129-134) 이에 따라 조선인은 근대화로의 문명화를 추구하면서 실력을 키우려는 사람들과 재지양반을 중심으로 한 저항하는 층이 있었고, 그 모순은 3·1 운동으로 나타났다. 특히 안중근의 ‘인(仁)’이라는 보편주의를 기반으로 한 조선 민족주의는 문명에 유혹되지 않고 식민지 통치의 원리를 상대화하고 비판할 수 있는 ‘차별의 극복과 연대의 획득’을 지향하고 있었다.(161-164)

1919년 조선보다 늦게 대만교육령이 공포되었다. 조선처럼 교육칙어의 취지에 바탕을 두고 시세와 민도를 따른다는 것이다. 1922년 2차 교육령에서 일본인과 대만인의 공학 등 내지연장주의가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신해혁명의 영향을 막으려는 것이었고, 이는 대만의 향신층을 협력자로 하려는 일종의 ‘중층적 차별구조’를 수립한다.(167-169) 일본인, 한민족 향신층, 한민족 일반민중, 원주민의 순이다.(186) 중등교육과정을 허락해 달라는 총독부의 요청에 본국 정부는 반대했지만, 신해혁명의 영향이 향신층에 미치는 것, 향신층 자제의 중국 유학 및 일본유학으로 민족주의 사상의 전파 우려, 원주민 반란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향신층의 협력 필요성으로 인해 제한된 형태로 허용하게 된다.(176-187) 이 과정에서 대만판 교육칙어를 공포하려던 계획은 좌절되지만, 교육칙어가 식민지에서 민족 간 균열을 확대하는 점 때문에, 이를 애매하게 취급하고,(210-211) 대만의 우펑전설을 공식화하여, 자기희생의 논리를 전파한다.(232)

1919년 3·1운동은 사실상 다민족국가인 조선에서 문화통치를 실시하는 일대 전환을 가져온다.(244) 문화정치란 조선에서 뒤늦게 시행된 협력체제 구축을 모색하는 것이다.(250) 대만에서 처럼 조선판 교육칙어 또는 교육칙어 수정론이 나오지만, 이는 불경사건이 된다. 대신 대만처럼 2차 조선교육령에서 교육칙어에 대한 구절이 삭제 된다.(261-262) 조선총독부를 중심으로 생겨난 조선의회 설치론은 사이토 총독으로서는 나름 의욕적인 구상이었으나 본국 정부가 거부한다.(272) 식민지 경영에서 이익은 취하지만, 그에 따르는 모순 파급을 막고 통치제제나 천황제 가치관은 보존하겠다는 본국의 통치 논리이다.(274) 동시에 1920년대 이후 지주와 산업자본가 계층을 대상으로 어느 정도의 협력체제가 작동하기 시작하지만, 결국 10년 후에는 제자리로 되돌아갔다.(274-275) 따라서 1931년에 시작된 만주사변과 팽창정책은 식민지제국 일본에 내재하는 모순을 전가시킬 장소로 ‘만주’라는 외지가 만들어진 것이며, 카터 에커트는 일본의 만주침략에서 ‘조선인은 종속적 수익자인 동시에 종속적 가담자’였음을 강조했다. 에커트의 지적처럼 만주점령은 조선인의 ‘불평의 안전판’,이 되어 효과적으로 협력체제를 작동시킨 측면이 있다. 만주의 여러 민족을 속죄양으로 삼아 일부의 조선인을 체제 내로 흡수하는 정책이다.(279) 종속적 지배자인 조선인, 일본인처럼 으스대고 싶어하는 심정은 동화정책의 결과라기 보다 피차별 상태에서 탈출하고 싶은 소망의 표현이며, 권리 · 의무 관계와 호적(내지(일본)인, 조선인, 대만인의 국적은 모두 일본이나, 이 세 지역의 호적을 규정하는 법령도 모두 다르고, 체제도 모두 달라 서로 넘나들 수 없었음)으로 인해 언제나 ‘조선인’으로 배제되면서, 언어와 생활양식 면에서 ‘일본인’이 되라고 동일화는 강요하는 논리는 황민화 정책에서도 철폐되지 않고 강화되었다.(280-281) 일본인이 되려고 하면 할수록, 배반당하는 구조였다.(284) 이런 모순적인 정책은 팽창의 역류현상에 대한 방파제이며, 조선에 있는 일본인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다.(289-290)

1932년 3월 만주국이라는 괴뢰국가를 수립한다. 그러나 실상은 식민지이면서도 이념상으로 비연속적인 국가형태였다.(297) ‘민족협화’와 ‘왕도낙토’라는 사상이 그것이다.(300) 신해혁명 후 자리잡은 쑨원사상에 대항하기 위해, 통치이념 수립과정에서 부터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왕도사상은 동양적 동일성의 원리로 통치이념의 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하고, 황도에 자리를 내주게 되며, 그러나 실제로는 국방국가화의 길을 걷는다.(327-329) 처음에는 현지 유력자와 지식인을 포섭하여 협화회 등을 통해서 주자학적 왕도주의를 내세웠지만, 역성혁명 사상이 문제가 되고, 전쟁과 식민지 지배 때문에 결국 천황이 현인신으로 등장하게 된다.(351-356) 이념상 내부모순이 심화되는 세 층의 중층구조로 맨 아래에는 유교나 도교가 혼재하는 민간신앙, 중간층에는 주자학에 따라 해석한 왕도주의, 최상층에서는 천황제 이데올로기가 이식되었다.(357-358)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 후 일본은 내몽고에서는 관동군 지휘 아래 ‘몽강연합위원회’를 화베이(華北)에서는 북지나방면군의 지휘 하에 ‘임시정부’를 화쭝(華中)에서는 중지나파유군의 지휘 아래 ‘유신정부’를 조직하고, 동아신질서와 대공아공영권 구상을 발전시킨다.(365) 일본은 엔블록(엔화사용권)에 속했던 화베이에서 일본정신의 감화 수단으로 일본어를 선택하고 보급하려고 시도했다.(367) 배일교과서를 개정하고,(376) 일본어를 교육하고자 했으나 보통교육과 직업교육 사이에서 헤매고 있었고,(385) 결정적으로 교원이 부족했다.(388-389) 교육방침을 둘러싸고, 교과서 편찬을 맡은 본국의 문부성과 교사 양성을 맡은 현지의 흥아원이 갈등하고 있었다.(403) 결국 일본어 교육에서 번역을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 언어 내셔널리즘을 포기할 것인가의 문제로 논쟁하게 된다.(408-409) 조선과 대만은 일본이 근대적 교육제도의 설립주체였으나, 만주국과 화베이 점령지에는 이미 근대적인 교육제도가 존재했던 점이 달랐고, 연령이 높은 학생이 교육대상인 것도 문제였다.(433) 화베이는 모든 점령지 중 문화수준이 가장 높았고, 근대화가 이미 진전되고 있었으며,(425) 대표적인 고등교육 기관인 대학이 그것도 기독교 계통의 대학이 미이 있었고,(378) 성인을 위한 실용적인 언어교육은 일본어를 통한 사상전파를 좌절하게 만들었다.(429) 일본문학에서 돌파구를 찾으려고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432) 일본인은 ‘타자’로서의 중국인의 투철한 시선에 노출되면서, 자기모순에 깊이 빠져들고 좌절하게 되었다.(435) 중국공산당의 활동으로 일본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는 항일운동의 해방구가 열려있었던 점도 문제였다.(387)

요약하면, 일본은 혈족 내셔널리즘을 통한 배제와 언어 내셔널리즘을 통한 통합을 조선과 대만에서 시도했고,(440-442) 내지연장주의와 식민지주의를 혈족, 헌법적용과 호적법, 율령과 제령, 교육정책, 의회설치 반대 등을 통해서 볼 때, 마지막에 징병의 필요성에 의해 의무교육과 참정권의 제한적 인정을 시도했다고 해도, 처음부터 끝까지 외지(外地)는 식민지주의였다.(444-446) 일본식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자주주의와 현지의 사상과 형편을 활용하려는 가타주의 사이에서 방황했지만, 이런 동화주의나 새로운 문화통합의 창출은 실패했는데, 이는 이념이 실제와 괴리되었다라기 보다, 이념 자체가 본래 형해화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기 때문이다.(446-447) 문명으로서의 근대냐 사상으로서의 근대(자유, 평등, 박애, 인권)냐는 차원에서 보면 대만과 조선의 총독부는 근대화를 선택적으로 추진한 주체이며, 이상적으로 삼은 인간상은 근대적이라기보다는 전근대적인 피치자 의식을 온존시키면서 근대적 규율 훈련을 몸에 익힌 순량한 신민이었고, 일본의 협력체제 활용전략은 피지배 민족 내부에 차별과 서열화의 원리로 작동하게 되었다.(455-456) 특히 식민지는 팽창의 모순이 본국으로 역류되지 않도록 방파제 전략을 확고하게 수립하여, 조선의 모순은 만주로, 다시 화베이로 전가되었음을 보여준다.(458-459) 전후 일본은 식민지와 식민지인을 그냥 떼어내 버렸다.(463) 패전후 점령군에 의해 교육 이데올로기를 수정한 교과서 먹칠이 이루어졌지만,(467) 그 결과는 천황제라는 외투만 벗어버린, 온존된 내셔널리즘에 기반해 ‘일국의 번창’을 지향하는 가치관이었고, 도덕이나 종교, 즉 혼의 공간은 공허한 빈 공간으로 남았다.(471-472)

이 책을 읽고, 수탈론자와 민족주의자는 환호성을 지를지도 모르고, 식민지 근대(성)을 주장하던 이들은 탄식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마고메는 다른 것을 제시한다. 근대란 ‘차별’이다. 그 이전에는 신분이었지만, 이제는 인종, 능력 등 모든 것에 의해 차별이 이루어진다. 차별은 꼼꼼해지고, 차별은 복잡해지며, 차별은 중층적이 된다. 그것은 제국에서든 식민지에서든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근대는 누군가에게는 제국의 지배자로 누군가에게는 식민지의 피지배자로 다가왔으며, 양자 모두에게 식민지와 차별이라는 큰 상흔을 남기게 된다. 특히 식민지 피지배의 입장에서 보면, 이 차별은 새로운 균열로서 옛 균열을 가로지른다. 신분, 지역, 학력, 부에 따른 차별이라는 이미 있는 균열구조 위에 식민지 지배자, 협력자, 순응자, 저항자라는 새로운 형태의 균열구조가 더해지며, 마치 인두로 낙인을 새기듯 사회 위에 새겨져 있다. 이런 균열의 중층성, 차별의 중층성이야 말로 식민지 유산이다. 탈식민의 과제, 식민지 유산의 철폐는 일제 청산은 사람을 쫓아내고, 사람에게 낙인을 찍는 데 있지 않다. 충실하게 기록하고, 또 기록하고, 더 기록하며, 그 기록을 유지하고, 확산시키는 것으로 충분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낙인은 이미 서로에게 새겨져 있으며, 서로 간의 균열에 이미 새겨져 있다. 균열을 바라보면서 차별과 맞서 싸우는 일이 식민 유산을 없앨 수 있는 길이다. 내 안의 인종주의로 부터 벗어나야 한다.

2016. 3. 26.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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