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사카 마사야스, 『쇼와 육군』.

Tojo_at_IMTFE 사진은 극동군사재판에서의 도조 히데키.

호사카 마사야스保阪正康, 『쇼와 육군: 제2차 세계대전을 주도한 일본 제국주의의 몸통昭和陸軍の研究』, 정선태 역, 글항아리朝日新聞社, 2016(1999).

이제는 무어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지 잘 모르겠는 8·15에 일본 육군을 다룬 두 권의 책이 같은 출판사 글항아리에서 출간되었다. 다른 하나는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가 쓴 『어느 하급장교가 바라본 일본제국의 육군一下級将校の見た帝国陸軍』. 딱히 하는 일 없이, 이리 저리 바쁜 나는 묵직한 책을 집중해 보기 어려워 가볍게 읽을 책을 찾았고, 마침 손에 잡혔다. 흥미롭기도 하고, 이것 저것 생각이 드는 점도 많고.

호사카 마사야스는 일본에서는 유명한 논픽션 저널리스트 라고 한다. 특히 쇼와사昭和史를 중심으로. 이 책의 역자 정선태에 의해 출세작으로 알려진 『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東條英機と天皇の時代』도 나와 있다. 우익의 발언에 대해서도 언론이 코멘트를 따는 인물로 150여 권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사관을 일컬어 ‘자성自省사관’이라고 한다. ‘자학사관’이 아니라는 뜻.

쇼와 육군을 보는 호사카 마사야스의 관점은 머리말에 나온다. “하나는 전비戰備의 소모품이 되어버린 병사(국민이라는 말로 확대할 수도 있다)의 존재다. 다른 하나는 쇼와 육군이 저지른 오류의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라는 의문이다. …… 어쩔 수 없이 ‘죽음’으로 내몰린 병사(국민)의 존재가 있다. 그 대척점에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나도 무책임하고 비인도적인 작전을 펼친 군 관료의 실제 모습이 있다.”(5-6) 호사카 마사야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병사의 관점에서 이 전쟁에 대해서 말한다. 쇼와 육군의 군사 지도자들은 ‘인간’에 대항 통찰력이 결어되어서, 병사를 단지 전시 소모품으로만 간주했다(16)는 지적도 한다. 병사는 무기질의 병기였다.

이 점은 이 책의 특장점인 동시에 가장 결정적인 한계를 드러낸다. 그에게는 피해자 관점이 없다. 아니, 병사들을 그리고 그 가족들을 피해자로 말한다. 굳이 그의 책을 읽지 않아도, 이 점은 우리가 쉽사리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점령지의 피해자는 식민지의 피해자는 어떠한가. 그리고 병사들이 가해자가 되었을 때는. 이 부분에 대해서 그는 막연하게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태도를 보이지만, 어디까지나あくまで 구체적이지 않다. 이런 한계를 감안하고 이 책을 읽을 때 많은 것이 밝혀지면서, 동시에 한계로 드러난다.

머리말에서 호사카 마사야스는 이렇게 평한다. “모든 국면에서 책임 체계가 애매모호하게 잡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지도자들에게는 ‘책임의 자각’이라는 것이 없었다. 자각이 없기 때문에 책임질 마음도 없는 것이리라. 쇼와 육군의 지도부에 속한 고위급 군인은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종종 ‘대선大善’과 ‘소선小善’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군인칙유軍人勅諭」에 따른 충성심에만 머무는 것이 ‘소선’이고, 천황을 위해 계속해서 새로운 군사적 기성사실을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대선’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두서없는 논리에 감춰져 있는 독선적 주관주의, 이것이 ‘통수권의 독립’이라는 전근대적 명분에 의해 지탱되던 조직으로서의 바로 쇼와 육군이다. 그러한 쇼와 육군의 모습을 실제 전사戰史를 통해 바라봐야 한다. 또한 쇼와 육군의 상위에 군림한 책임을 주시하는 것을 게을리해서는 독선적 주관주의를 극복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다.”(6)

여기서 언급하는 「군인칙유」는 제국주의 일본의 핵심 이데올로기, 즉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제공한 세 개의 문건 중 하나다. 나머지 둘은 「교육칙어」와 「메이지 헌법明治憲法」이다. 천황에 대한 절대 충성과 명령에 절대 복종 강조한 이 짧은 글을 일본 군인들은 모두 외우고, 몸에 새겼을 뿐 아니라, 군인들을 통해 일본 사회로 확산되게 된다. 가족주의를 통한 복종의 강요, 연대장, 대재장이 스스로 아버지를 자처하며, 가족주의에 의한 무조건 복종의 강요(42-3). 살아서 포로가 되지 말라고 강요하여, 훗날 일본군의 항복을 막고, ‘옥쇄’라는 이름의 집단 자살 내지는 무모한 자결을 강요한 「전진훈戰陳訓」도 「군인칙유」의 부산물이라고 호사카는 말한다.(682-682)

호사카 마사아스가 지적하는 ‘대선’ 즉, 새로운 군사적 기성사실을 만들어내는 일이야 말로 일본을 망하게 한 것이다. 이 말 속에는 참모본부에 있던 군 관료들의 독선과 모험주의가 1930년 만주국 설립, 1937년 중일전쟁의 확대, 노몬한 사건으로 인한 소련과의 군사적 대결, 진주만 기습을 통해 태평양 전쟁으로 이루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모두 실상은 군 관료가 독자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이라는.

이 관료주의는 양성 시스템으로 만들어졌다.(15) 육군유년학교,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교로 이루어지는 엘리트 교육, 육군대학교 졸업생 상위 10%에게 하사되는 천황의 군도, 이들을 일컫는 ‘군도쿠미軍刀組’의 독단이 수많은 사람의 입을 통해서 증언된다. 이들이 메이지 유신의 공로로 군을 쥐고 있었던 ‘초슈벌長州閥'(지금의 야마구치山口현)을 실질적으로 몰아내고 군을 장악했다는 것이다. 참고로 조선총독은 대대로 초슈 출신이었다.

태평양 전쟁의 군사 지도자들은 친독일 반영미 사상에 갇혀 있었다.(16) 처음 일본 육군은 프랑스를 모델로 즉, 나폴레옹 육군을 모델로 건설하지만, 신생 프로이센에 패한 후, 독일 일색이 되었다. 호사카는 심지어 일본 군인이 독일에 가면 독일군이 장교들에게 붙여주던 메이드(하녀)’까지 언급한다. 장교들이 급속하게 친독파가 된 이유 중 하나라는 것. 영국이나 미국에서도 그런 서비스를 요구하자, 여자는 얼마든지 있으니 나가서 연애를 하라는 핀잔까지 들었다는 소문도 전한다.(1082)

호사카 마사야스에 따르면 쇼와 육군 붕괴는 즉 태평양 전쟁에서의 패배는 조직 체계, 인간 사상, 전쟁관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17) 이 정점에 40대에 총리와 내무대신, 육군대신, 참모총장을 겸임하고 전쟁을 이끌었고, 도쿄전범재판 직전 자결하려다 실패해, 사형판결을 언도받고, 시가모에서 교수형에 처해진 후 지금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는 도조 히데키가 있다.

쇼와 육군의 조직 체계의 핵심은 바로 ‘통수권’이다. 일본 육군은 황군으로 전쟁 지휘는 천황 대권으로 돌아가고, 통수권이 통치권 보다 상위에 있기 때문에, 의회는 물론, 정치와 국민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18) 이런 어이없는 군사사상 속에서 모든 군사행위는 실제 중좌, 대좌 급에 속하는 40대의 젊은 작전참모들에 의해서 기안되고 실행되었다. 군의 최고 엘리트 관료들이 참모본부에서 장기판에 말을 옮기듯 부대를 이리로 옮기고, 저리로 옮기면서 작전을 지시하고, 작전에 실패하면 현장부대의 무능을 탓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1941년 진주만을 기습하던 12월 8일 공격날짜를 도조 히데키도 11월 29일 회의에서 알았다는 이야기는 아연실색할 정도 였다. 이런 것을 묻는 것은 통수권 독립 위반이기 때문에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11월 29일 회의에서 도조 히데키 수상, 도조 시게노리 외무상, 시마다 시게타로 해군상이 군령부차장에게 대본영정부연락회의에서 들어서 알게 된다.(386) 도조 히데키가 수상, 육군상에서 마침내 1944년 2월 육군 참모총장을 겸임하여 사실상 독재라는 비판을 받는데, 이때 도조의 구실은 통수부(육군 대본영과 해군 군령부)가 뭘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일본과 미국의 태평양 전쟁의 명운을 가른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이 크게 잘못되었고, 큰 손실을 입었다는 사실을 천황에게 상주하면서 들었다는 이야기가 가장 큰 충격이었다. 도조는 참모본부와 군령부에 이를 직접 물어보지도 못하고 넌지시 확인했다는 것.(689)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는 총리였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가쓰라 타로桂太郎가 모두 군의 원로이고,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세력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개인적으로 해결했지만, 훗날에는 그렇지 못하게 된다.(38)

여기다 맨 처음부터 일본 제국의 국방방침은 공세 위주, 공격 우선 정책이었다.(46) 수차례에 걸쳐서도 이는 바뀌지 않았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중일전쟁, 만주사변, 진주만기습까지, 일본의 전쟁은 항상 선제 기습공격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들은 군사력의 차이를 이를 통해서 극복한다고 말했으며, 동시에 보병 중시의 정신 지상주의(49)를 내세운다. 실제, 전쟁 말기 황군의 정신 운운 하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장쭤린張作霖 폭살, 만주사변, 만주국 건국, 2.26사건, 장고봉 사건, 노몬한 사건, 난징대학살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무모하고, 잔혹한 도발이 이어졌고, 이모든 일은 육군의 체질, 조직 원리, 병사교육(228) 즉, 쇼와 육군의 구조 자체가 원인이었다. 게다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체면을 중시하는 군 내부의 풍조도 한 몫한다.(225) 도조 히데키도 가장 두려워 한 일이 메이지 유신 이래의 육군의 선배들이 획득한 권익을 잃고 자신들이 그것을 해체시켜 버리는 일이었다고 증언한다.(381)

“쇼와 육군에는 세 가지 하극상 사건, 이른바 군기를 따르지 않았던 전투가 있습니다. 이시와라 간지와 이타가키 세이시로의 만주사변, 쓰지 마사노부와 핫토리 다쿠시로의 노몬한 사건 그리고 도미나가 교지와 사토 겐료의 북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입니다. 이것은 쇼와 육군의 불명예 사건이며, 특히 이시와라의 만주사변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341) 이시이 아키호의 증언이다. 반복되는 하극상 사건. 왜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결국 일본 제국 육군 내부의 파벌 경쟁, 광범위하게 퍼져있던 전쟁확전파들이 일으킨 일이다. 가볍게 여기는 북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는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로 이어진다. 여기까지는 미군이 용인할 것이라고 안심하고 있었다.(347) 그러나 미국은 단호하게 보복하는테 일본군이 상륙하기도 3일 전에, 미국내 일본 자산 동결, 이어서 영국, 네덜란드령 인도차이나가 뒤를 따랐고, 네덜란드령 인도차이나가 일본에 대한 석유 공급을 중단한 후, 일주일만에 미국 정부가 일본에 대한 석유수출을 중단한다.(353) 이 일이 결국 미국과의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진다. 미국은 일본에게 동남아시아와 중국에서의 철수를 요구했고, 정상회담도 결렬되자,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하게 된다.

미국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과감한 공격의 배경에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들이 있다. 당시 어느 누구도 장기적 전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439) 미국은 자유주의자들이고 퇴폐적이기 때문에 전쟁하지 않을 것이고, 전쟁에 돌입하는 것도 늦을 것이라는 낭만적 인식도 난무했다. 이 모든 일은 총체적 정보의 부재였다. 오늘날의 일본이 보여주는 모습과는 너무나 다르지만, 일본은 이 시기 전쟁을 주관적 전망에 의해서 결정했다. 게다가 병참과 보급을 무시하고 무조건 전진만 외쳤다.(638) 여기에 더해지는 비밀주의와 작전부의 특권.(650) 일본군 피해가 가장 컸던 곳은 놀랍게도 필리핀으로 50만이 넘게 희생되었는데, 정보 없는 전쟁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742)

‘특공’ 즉, 자폭 공격에 대한 부분이 눈에 띈다. 자폭 공격에 대해서 모든 책임을 아래로 떠넘기고, 책임자를 천황으로 하지 않기 위해, 제일선의 지휘관이 독자적으로 부대를 편성하는 형식으로 진행한다.(767) 들판에 머리를 처박아 숨긴 꿩의 모양새다.

돌이켜보면, 일본이 미국과의 전쟁을 일으킨 과정도 불가사의하고 전쟁을 진행해 나가는 과정도 어처구니 없었다. 그리고 그 비밀은 대본영 작전참모들의 특권과 비밀주의,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작전실에서 장기판에 말을 옮기듯 진행된 명령에 따라 수만명, 수십만명이 죽어나갔다. 그러나 그들에게 별다른 책임이 부과되지 않았다. 그들은 패전 이후에도 잘나갔다. 훗날 이토추 상사를 이끌었고, 이토추 상사를 통해 지하철 1호선을 가져온 세지마 류조 같은 인물도 중좌(중령)급의 작전참모였다. 일본에 다녀 온 사람들이 지하철이 생긴 모양이 비슷하다. 어떤 부분은 똑같다고 하는데. 당연하다. JR 야마노테선은 도쿄의 순환선인데, 일본 지하철 지도에 초록색으로 그려져 있다.

패배를 마무리하는 과정도 어이가 없었다. 곳곳에서 ‘옥쇄’가 이어졌다. 진격의 발걸음을 늦추었는지는 모르지만. 옥쇄란 항복을 거부하고 끝까지 항전한다는 것이다. 무기도 식량도 모두 떨어진 상황에서 맨 몸으로 총검을 들고, ‘텐노 헤이카 반자이(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면서, 미군의 기관총 혹은 전차 앞에 몸을 내던지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포로가 적었다. 특히 8월 15일의 패전 이전 포로는 매우 적었고, 포로 출신은 전우회에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전한다.(1021) 포로가 되는 것이 부끄러울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자랑스러운 긍지인가? 문제는 그런 식으로 군인들의 생각과 정신을 조작한 사람들일 것이다.

간간이 흥미로운 기록도 있다.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만주국의 핵심으로 활동했던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가 세계 최종전쟁 사상을 가졌다는 것인데. 미국과의 최종전쟁이 1980년까지 지속될 것으로 생각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민족협화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118-120) 어이없는 망상이지만, 일본의 대중 문화에서 종종 등장하고, 우익들이 간간이 이런 주장을 한다. 물론 일본도 원자탄을 만들려고 했었지만, 그 수준은 형편없었다. 우라늄 선광을 학생들을 보내서 강제노동으로 채취하는 수준이었고, 우라늄 분리는 생각도 못했다.(842) 만주에 있던 일본인 60만이 시베리아 강제 노동에 처해진 것은 스탈린이 요구한 훗카이도 분할점령을 트루먼이 강력하게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이에 대한 보상으로 60만의 전쟁포로를 강제노동에 동원한다.(899)

1945년 11월 28일 중의원 본회의에서 시모무라 육군대신은 이렇게 답변한다. “육군으로서는 육군 내 일부 군인이 군인의 정도를 넘어선 것, 특히 지도하는 위치에 있는 이의 행동이 나빴던 것, 그것이 근본 원인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이 국내외의 다양한 정세와 복잡한 인과관계를 낳았고, 혹자는 군의 힘을 배경으로 하여 혹자는 세력에 편승하여 이른바 독선적이고 횡포한 처치를 취한 자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은 군의 부당한 정치간여입니다. 이러한 것이 하나의 중대한 원인이 되어 국가에 이번과 같은 비통한 사태를 초래한 점은 누가 뭐라 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나는 육군의 최후를 담당한 자로서 의회를 통해 이 점에 관해 국민 여러분께 충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육군은 해체되었습니다만, 그 결과 과의 죄책에 대해서 우리가 함께 향후 사실에 입각하여 사죄를 할 수도, 보상도 할 수도 없게 된 것은 참으로 유감스럽습니다.” 소위 육군을 대표한 일종의 사죄 연설이었다.(943-944)

시모무라의 이 연설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어디까지나 천황의 전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노력한다. 심지어 칙령으로 ‘전범 자주 재판’을 구상하기도 한다.(946-948) 그럴 듯하지 않나? 생각해 보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 천황이 전쟁의 총책임자이며, 전범으로서도 총책임자인데, 어떻게 그의 이름으로 칙령을 내걸고 재판을 한다는 말인가. 천황의 전쟁 책임을 모면하게 하려는 경박한 술수였고, GHQ에 의해서도 제지된 사건이다.

전우회라는 조직도 의미심장하다. 한 사람이 십여개까지 가입했다고 하는 전우회, 이 전우회에 염증을 내는 사람도 많았지만, 전우회를 통해서 병사의 입장에서 기록이 나오기도 했다. 전우회는 쇼와 육군의 군사 행위 정당화, 전쟁사의 다양화에 대한 통제, 전장에서의 행위의 공동 치유, 전후 사회에서의 이해관계, ‘영령’에 대한 공양과 추도, 군인연금 지급 등의 시달 등의 기능을 했다고 본다.(1021) 전우회에서 중요한 두 가지는 통제와 치유다. 통제란 구 지휘관, 참모 등이 나타나 기억을 봉인하거나, 전쟁에 대한 다른 해석을 막는 것이다. 물론 이에 반발하여 병사들끼리 모이기도 하지만, 그 수는 많지 않다. 자신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며 전쟁에서의 기억을 치유하는 것이다. 때론 학살의 기억을 치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치유행위는 피해자가 없는 제멋대로의 치유행위다. 스스로를 희생자 삼고, 희생자에게 사죄하지 않는 일본의 패전 이후 기록이 여전히 여기를 관통한다.

호사카 마사야스는 양심적 지식인으로 일본의 만행이나, 난징대학살 등에 대해서 언급하고, 사죄와 배상을 주장한다. 그는 반복해서 천황의 전쟁책임을 말하며, 전쟁지도부의 전쟁 책임이 더욱 분명하게 규명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도 한 가지에 대해서는 유보적이다. 그것은 바로 이 책이 나올 때쯤 불거진 위안부 문제다. 그는 위안부 문제가 매우 고통스러운 문제라고 언급하나(616) 이를 어디까지나 일본군 장병에게 폭력적으로 성적 위안을 제공할 것으로 강요받은 조선, 중국, 동남아시아의 여성들에게 일본군의 책임과 일본 정부의 사죄를 요구해야 한다는 데 멈출 뿐(1082) 전쟁이 내포한 젠더 문제를 시대의 한계라면서 무시한다.(1081) 물론 일본 정부에게 조사를 촉구한다.(1083) 전쟁터의 군인에게도 일상이 있다며, 전쟁 후에 몇 개월씩 휴가를 주어 성문제를 해결하게 하는 미군과 달리, 일본군은 병사를 배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는 조직적이 아니라고 말한다. 위안소는 처음 군이 만들기는 했으나, 곧 민간업자들이 뒤따랐고, 위안소의 군대 관리는 성병 확산을 막으려는 것이다. 사령부, 연대본부, 대대본부 차원에서 벌어진 일이고, 당시의 공창제를 인정하는 상황에서 시행되었다는 것이다.(1088-1092) 그리고 자신의 이런 해석은 쇼와 육군의 조직 체계를 옹호해서가 아니라 그와 같은 성 관리 시스템을 구축한다는 발상이 없었음을 지적하고, 이 문제를 이 세대에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1093-1094) 어쩌면 지난 12월 28일의 합의 그의 뜻이 이루어진 것일까.

굳이 이론을 들이대지 않는다고 해도 호사카 마사야스의 위안부와 위안소에 대한 해석은 그의 ‘특공’에 대한 해석과 모순된다. 특공부대를 만들어 자살공격을 하면서, 천황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개별 부대가 알아서 한 일로 처리하는 것과 위안부와 위안소를 운영하면서, 각지의 부대가 현실적 필요에 있어서 알아서 한 것으로 보는 것이 뭐가 다를까. 왜 특공에 대해서는 쇼와 육군의 구조적 문제로 해석하면서, 위안소와 위안부 문제는 쇼와 육군의 구조적 문제로 보지 않는가. 그가 일본 내에서는 탁월한 비판적 지식인일지 모르나, 일본 밖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견해는 많은 사람의 입장을 가르는 지점이다.

‘쇼와 육군’의 검토가 왜 중요할까? 그것은 근대 일본인, 즉 국민을 만들어낸 것이 군대이기 때문이다. 호사카 마사야스는 농촌의 ‘지주-소작 관계’에서 종속적이고 복종적인 농민의 태도를 강화시킨 것이 ‘쇼와 육군’이라고 한다.(1091) 이런 교육과 태도가 20세기 일본인들에게 미친 영향은 어떤 것일까? 이런 태도가 일본군 교육을 받은 한국군 지도자들에게,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한국군을 통해서 한국인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한 장, 한 장 읽어내려갈때마다, 과거의 식민지의 고통을 생각했다기 보다, 외려 현대 한국군의 망령을 보는 느낌이 종종 들었다. 병사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때도, 며칠 전에도 전시도 아닌데. 부사관 한 명이 복막염 수술을 제때 못해서 죽었다. 21세기 한국군에서 벌어진 일이다. 육군 우선 주의와 무작정 반복되는 정신 승리의 논리. 복종에 대한 강요. 적에 대한 증오를 강조하는 태도도. 전시 행동에서도 항복에 대한 부분은 들어보지 못한 것 같다. 군인이 정치에 간섭한다든가. 정보가 형편없다던가. 병참을 중시하지 않는다든가. 그런 건 말할 필요도 없는 것같다. 물론 한국군이 쇼와 육군을 그대로 계승한 건 아니다. 한국군 형성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외려 주한미군사고문단과 미군이다. 그럼에도, 초기 군의 지도부들이 대부분 쇼와 육군 출신이라는데서 어지러운 경험 속에서 어두운 그림자들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군대를 통과한 나 자신에게는 어떤 유산으로 남았을까.

2016. 9. 3.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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