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팩스턴, 『파시즘』.

미국 기독교 우파에서 십자가와 성조기의 이미지를 함께 사용한 것은 오래된 역사다. 사진은 증오의 목사Minister of Hate라고 불렸던 제럴드 L. K. 스미스가 만들었던 The Cross and the Flag에 관련된 것이다. 여기서 위로 올라가면 2차대전 참전에 반대한 반유대주의 성향의 America First Committee가 있다. 트럼프의 구호와 매우 닮은. 더 올라가면 루스벨트와 뉴딜 정책에 반대하고, 나치를 찬양한 제럴드 윈로드Gerald B. Windod가 있다. 유투브에 돌아다니는 제럴드 스미스 동영상을 틀어보면, 공산주의와 무신론자와 싸운 영웅 맥아더가 칭송된다. 태극기와 성조기 그리고 십자가가 함께 등장하는데도 나름의 유구한 역사가 있다. 정서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실 그래서 더 걱정이지만.

로버트Robert O. 팩스턴Paxton, 『파시즘: 열정과 광기의 정치혁명The Anatomy of Facism』, 손명희, 최희영 역, 교양인(Knopf), 2005(2004).

광장에 일렁이는 촛불과 사람들의 얼굴에 어린 감동을 보면서 반사적으로 파시즘을 생각한 건 내가 과민한 탓이리라. 이어져서 태극기를 흔드는 사람들의 쿠테타가 필요하다는 푯말을 보고선 파시즘이 연상되기는 커녕 코웃음이 났다. 하지만 분명 대중 정치의 시대이고, 대중 운동의 시대다. 거기 목표가 있건 없건, 정돈된 이념이 있건 없건, 준비된 조직이 있건 없건, 따를 만한 지도자가 있건 없건. 사람들은 광장으로 뛰쳐나오나 거리의 행진으로 불려나와서 움직이고 있다. 대중의 거대한 흐름을 보면서 본능적으로 힘과 장렬함을 느끼는 동시에, 걱정과 두려움을 느끼는 건 내가 먹물이고 꼰대이기 때문이리라.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고작 대통령 바꾸는 일로 끝나고, 새로운 집권 세력이 삶을 바꿔내지 못할 때. 한 번 광장에서 달궈진 군중은 어떤 선택을 할까. 불만의 겨울이 찾아올까. 파시즘을 좀 본격적으로 들여다 보아야 겠다고 생각한 건 오래 전이지만, 모임을 하면서 겨우 책을 펴들었다.

이미 70년대에 비시 정권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팩스턴은 파시즘에 대해 꽤나 그럴듯한 정의를 내린다. 그 정의는 책의 거의 끝부분에 있다.

“파시즘은 공동체의 쇠퇴와 굴욕, 희생에 대한 강박적임 두려움과 이를 상쇄하는 일체감, 에너지, 순수성의 숭배를 두드러진 특징으로 정치적 행동의 한 형태이자, 그 안에서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은 결연한 민족주의 과격파 정당이 전통적 엘리트층과 불편하지만 효과적인 협력관계를 맺고 민주주의적 자유를 포기하며 윤리적·법적인 제약 없이 폭력을 행사하여 내부 정화와 외부적 팽창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정치적 행동의 한 형태.”(487) 파시즘의 역사에 대한 긴 연구의 말미에서 제시하는 그의 정의는 제법 설득력을 갖는다. 파시즘에서 이념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이념보다는 행동에서 추론해야 한다(488)는 그의 입장은 여타의 정치적 행동 특히, 이념적 기원을 파악하기 어려운 보수적 정치행동을 이해하는 데 적잖은 도움이 되리라. 그는 이어서 파시즘이 가지고 있는 본능적 느낌이나 감정의 영역을 정리하는데, 이것 역시 이해에 큰 도움을 준다. “어떤 전통적인 해결책도 소용없는 불가항력적 위기감 / 개인의 어떤 권리보다 집단에 대한 의무를 우선시해야 하며, 개인은 집단에 복종해야 한다는 집단 우월주의 / 자신의 집단이 희생자라는 믿음. 내부의 적이건 외부의 적이건 모든 적데 대해 법률적·도적적으로 한계가 없이 어떤 행동도 정당화하는 정서 / 개인주의적 자유주의, 계급 갈등, 외부의 영향으로 공동체가 몰락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 가능하다면 동의를 구하겠지만 필요할 경우 배제적 폭력이라도 동원해, 공동체를 더 깨끗하게 긴밀히 통합해야 한다는 요구 / (예외 없이 남성인) 타고난 지도자의 권위의 요청. 공동체의 운명을 단독으로 구현할 국가 지도자에 대한 갈망 / 지도자의 본능이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이성보다 우월하다는 믿음 / 집단의 성공에 바쳐지는 폭력의 아름다움과 의지의 위력을 찬미하는 태도 / 선택된 민족이 인간의 법이건 신의 법이건 어떠한 형태의 법적 제약도 받지 않고 다른 민족을 지배할 권리. 사회진화론적 투쟁 속에서 공동체의 용맹성이라는 유일한 기준으로 결정되는 권리.”(488-489) 미국도 예외는 아니라고 일갈하는 데. 나중에 말하겠지만, 미국, 특히 미국 기독교의 파시즘 친화적 경향이나 가능성에 대한 지적이 나에겐 의미심장하게 다가왔고, 이 책에서 얻은 가장 소득이기도 하다.

흥미롭게도 팩스턴의 파시즘에 대한 논의는 엥겔스로부터 시작한다.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개정판 서문에 나오는 “선거권의 확대는 좌파에 대한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예견. 심지어 이런 예견은 지금도 행해진다. 선거연령을 낮추자는 야당과 반대하는 여당. 투표율이 올라가면, 야당이 유리하다는 일반적 주장. 엥겔스는 “보수주의자들은 사회주의 합법화가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고 말한다.(25) 좌파의 오산과 오판. 아마도 팩스턴이 이 책 첫머리에서 엥겔스를 든 것은 이를 지적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선거권의 확대와 좌파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혁명도 일어나지 않았고, 좌파가 집권하지도 못했다. 더욱이 볼셰비키 혁명의 공포는 파시즘 확산의 가장 큰 추동력이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또 한 가지가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파시즘에 대한 경박한 이해, “대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와 싸우는 데 동원한 도구”라거나, “파시즘은 노골적인 테러리즘 독재이며 금융자본 가운데 가장 반동적이고 가장 국수적이며 가장 제국주의 적인 세력”이라는 주장을 인용한다.(37) 대리자 이론Agency theogy는 파시즘의 권력 획득을 자본가들이라는 이익집단의 행동으로 축소하여 설득력이 떨어진다.(262) 너무 익숙해서 깜짝 놀랐다. 80년대말에서 90년대초반 한국사회구성체 논쟁이 한창일 시절이다. 생각해 보니 그 자료집을 엮어낸 사람은 지금 서울시 교육감인 조희연이고. 그때 당시 한국을 소위 식반론, 즉 식민지 반봉건이라고 주장하거나, 신식국독자,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 혹은 신식민지 파시즘이라고 주장할 때, 파시즘에 대한 바로 이 정의를 들었다. 노골적인 테러 독재, 반동적인 금융자본. 역사적으로 파시즘에 대한 가장 단순한 정의를 내리고, 파시즘을 가장 잘못 파악하고, 대응하지 못한 사상 혹은 세력이 좌파였는데. 뭐랄까 헛웃음이 생겼달까. 그러고 보니, 그때 수많은 이데올로기 논쟁의 구조와 사상적 기반은 정말 부족하고, 허약하고, 경박했구나. 무엇에 대응해서 싸우는 지도 몰랐는 데다가, 그 무엇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도 몰랐다는 점. 그러니까 어떤 변화를 이끌어야 하는지도 몰랐다는 점. 어쩌면 들여다보아야 하는 건 파시즘이라기 보다, 자유주의 국가 바이마르 공화국과 제 정파들의 일련의 실패일런지도 모르겠다. 그냥 좀 허탈한 생각이 든다.

파시즘fascism이란 말의 기원은 묶음이나 다발을 의미하는 단어 파쇼fascio에서 더 오래 전에 파스케스fasces라는 라틴어로, 고대 로마의 집정관이 시가 행진을 할 때에 맨 앞에 내세우던 나뭇가지 다발에 싸인 도끼를 가리키며 국가의 권위와 결속을 상징한다고 한다.(27) 프랑스 공화국의 1972년 국새와 미국의 25센트 동전에 새겨져 있을 정도.(28) 19세기 후반 이탈리아 혁명가들이 사용하기 시작해, 무솔리니가 자기 주변에 모여들던 민족주의 성향의 퇴역군인과 주전론을 내세우던 생디칼리스트 혁명론자의 분위기를 나타내기 위해 파시스모facismo라는 말을 고안해 냈고, 공식적으로 1919년 밀라노에서 탄생했다.(28) 국가사회주의가 결합된 파시즘 강령은 사유재산 공격, 민족주의 주창, 폭력주의, 반지성주의, 타협주의 비판, 기성사회 경멸 등을 내세운 무솔리니의 운동에는 참전 퇴역군인, 전쟁을 주장한 생디칼리스트, 미래파 지식인들이 초기 추종세력이었다.(31) 거대 단일조합을 꿈꾸는 국가주의 생디칼리스트들. 속도와 폭력 자유와 활기를 찬미하는 탐미적 지식인들.(32) 산세폴크로 광장에서 열린 파시즘의 발기 모임은 폭력 행위와 함께 역사 속으로 뛰어들었다.(34) 토마스 만은 “저속한 인간 쓰레기들이 대중의 열렬한 환호로 정권을 잡았다고 말했고, 베네데토 크로체는 당나귀정치라 불렀고, 프리드리히 마이네케는 “무지하고 천박한 기능공들이 자극에 굶주려있던 대중의 지지를 받아 균형 잡히고 합리적인 교양인들에게 승리를 거두는 도덕의 퇴락 속에서 나치즘이 발흥했다”고 말했지만(36-37), 이런 식으로 고상한 지식인들이 파시즘 같은 운동을 비아냥 댄 건 한 두 번이 아니지만, 그들이 파시즘이 가져올 결과를 알거나 이들을 막아내진 못했다. 백년 전부터 지금까지도 고상한 비판 아니 비아냥은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강력한 시각적 호소력을 가지는 파시즘이 독재자의 이미지로 뒤덮고 있지만, 실제 파시즘은 꽤나 복잡하다. 반유대주의라는 뒷날의 결과와 달리 초창기 무솔리니를 지원한 사람들 중엔 유대인이 상당히 많았다.(40) 권력을 잡은 파시스트당의 반자본주의는 수사일 뿐 행동에 옮겨지지 않았다.(41-42) 파시스트들은 정치적 의지를 강조했고, 국가가 시장을 대신해 경제를 주도했다. 파시즘은 공과 사의 경계를 허물어 사적인 영역을 줄였고, 당과 국가의 권력을 강화하고, 공격적 감정을 자유롭게 풀어놓았다.(43) 파시스트들의 수사와 실제 사이에는 언제나 모순이 있었다. 팩스턴은 근대화와 파시즘의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초기 파시즘 운동가들은 급속한 산업화와 세계화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 즉 근대화에서 낙오된 사람들의 반발심리를 이용했지만, 사용한 선전 양식과 기법은 극히 현대적이었다.(45) 권력을 잡은 파시즘은 산업 집중으로 생산성을 높였고, 농촌 향수는 사진 몇 장으로 남았을 뿐이다.(46) 박정희가 논두렁에서 막걸리를 마시는 사진 처럼. 파시즘의 전시 급진화는 파시즘의 대안적 근대성이 통제력을 잃고 광기를 부린 것으로 보아야 한다.(46) 파시즘이 성공하는 과정에서 보통 사람들, 인습적으로 착한 사람들의 조력이 있었고, 국가, 당, 관료 등 전통적 엘리트층의 묵인 또는 적극적 동의가 있었으며, 행정 관료, 군 장교, 사업가 등 기존 사회 주류층의 폭넓은 협력이 필요했다.(48) 개인적·제도적 묵인의 광범위한 악순환이 있었다.(50) 파시즘은 보수주의·자유주의·사회주의와 달리 대중 정치 시대에 급조된 새로운 고안물로, 세밀하게 연출된의식과 감정이 가득실린 수사를 적절히 사용하여 사람들의 정서에 주로 호소했다.(53) 그들은 지배민족과 그들에게 할당된 부당한 몫과 약소민족에 대한 지배의 정당성에 대한 대중의 정서에 기반했다. 진화론적 투쟁 속에 다른 민족들과 함께 갇힌 상황에서 선택된 인종, 민족, 핏줄의 운명이 파시즘을 통해 실현되는 한에서 파시즘은 ‘진리’이다.(54) 파시즘은 독트린의 진리성이 아닌 대중의 역사적 운명과 지도자 사이의 신비적 합일에 의존했다. 민족의 역사적 중흥이라는 낭만주의적 이상. 이성적인 논쟁을 직접적인 감각의 경험으로 교묘히 바꿔침으로써 정치를 미학으로 변형시켰고, 벤야민은 이 최종적 미학이 전쟁이 될 것이라 경고했다.(55) 무솔리니에 따르면 인민에게 필요한 것은 두체Duce의 의지와 지도력이지, 독트린이 아니다.(56) 중요한 것은 강령이 아니라 충직한 사람들의 의심 없는 열정이었다.(57) 초창기 지식인들은 계몽적 가치관에 대한 엘리트층의 애착을 약화시킴으로써 파시즘 운동이 일어날 공간을 만들었다.(58) 파시즘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창조물로서 좌파와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 맞서는 대중 운동으로 어떤 정의, 예를 들어 로저 그리핀Roger Griffin의 “파시즘은 정치 이데올로기의 일종이며, 그 이데올로기의 다양한 변형 속에 존재하는 본질적 핵심은 대중주의적 초국가주의”라는 식의 정의를 팩스턴은 거부하고 살아 움직이는 파시즘을 찾는다.(65) 자유, 평등, 우애를 추구한 자유주의는 물론 권위, 계급, 복종을 선호한 보수주의도 좌파 대신 파시스트와 손을 잡았다.(66-67)

파시즘은 지도자가 국민 또는 민족을 앞세워 대중을 이끄는 대중운동으로 시작되었다. 대중운동, 지도자, 지배민족, 이 세 가지는 다른 모든 것들의 변화 속에서도 유지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들 중 20세기의 가장 큰 현상은 대중운동 그 자체이다. “파시즘 지도자는 국민들을 한층 높은 정치 영역으로 이끌어, 그들로 하여금 정체성과 역사적 운명과 힘을 완전히 자각한 하나의 인종에 속한다는 격앙된 느낌, 거대한 집단적 창조 행위에 참여하고 있다는 흥분, 서로 공유하는 느낌의 물결 속에 푹 잠겨서 전체의 선을 위해 개인의 사소한 이해관계 따위를 잊어버리게 해주는 데 대해 감사하는 마음, 그리고 지배자가 됐다는 느낌이 일으키는 전율을 그야말로 육감적으로 경험하게 해주려고 했다.”(55) 파시즘 지도자만 제외하면, 작년 가을부터 이어지고 있는 촛불집회가 주는 경험과 너무나 흡사하다. 촛불집회가 파시즘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건 대중운동이다. 대중운동이 주는 힘과 흥분은 역사를 움직이는 중요한 추동력이 되지만, 국면이 변화하면 그 추동력을 누군가 다른 사람이 사용할 수도 있다. 하긴 그러고 보면, 소위 말하는 태극기 집회는 노인 대중 운동이다. 역사상 처음 맞이한 노인 대중 사회가 가져져온 현상인 셈이다. 초고령화가 사회란 노인이 대중으로 존재하는 사회다.

파시즘이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을 때, 유럽의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단체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1차 대전의 결과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체 후 귤라 굄비스는 반유대주의를 내세우는 전투적 민족주의적 혁신운동을 이끌었고, 32-35년 총리를 역임했다. 폰 쇠네러의 대중주의적 게르만주의에 영향을 받은 게르만 민족주의자들은 증오심으로 가득 찬 노동계급 민족주의를 내세웠다.(75-77) 1897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의 시장이 된 카를 뤼거는 반유대주의와 반부패 캠페인으로 숙련공과 소상인 등 중하층의 지지를 받아 장기집권했다. 오스트리아의 린츠의 방랑하던 미술대학 지망생 아돌프 히틀러는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SDAP과 결합했다 1918년 독일의 믿을 수 없는 패배는 대중에 기반을 둔 반사회주의적인 국가 재건 운동이 자라나기에 좋은 토양이었다.(78) 식량도 일자리도 구할 수 없던 퇴역군인들은 좌파와 우파 극단 세력이 끌어들이기 좋았다.(80) 상병 아돌프 히틀러는 민족주의 운동을 조사하라는 군 정보부의 명으로 독일노동자당DAP의 555번 당원이 되었고 곧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를 내세운 나치당NSDAP의 지도자가 되었다.(81) 파시즘 탄생의 결정적이고 집적적인 전제조건은 1차 대전이었다.(83) 4년이 넘는 기간 동안 모든 젊은 세대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대량 학살을 경험한 후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문명이 실패했다고 생각했다.(84) 전시 정부는 국민의 삶과 사상을 극한의 규율 상태로 몰아넣고, 여론 조작을 시행했다.(85) 전쟁이 끝난 후 유럽인들은 재건이 불가능한 구세계와 그들이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신세계로 분열되었다. 전쟁은 정치 분열을 심화시켰다. 폭력에 단련된 퇴역군인은 조국을 지배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86) 자유주의자들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평화 공존의 전후 세계를 재편하고 싶어했고, 보수주의자들은 군사력으로 안정되어 있던 세계로 되돌아가려고 노력 중이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사회주의 국가가 건설되어 범세계적 공산주의 건설을 바랬다.(88-89) 유럽은 승리한 강대국과 종속국 대 복수심으로 불타는 패전 국가로 분열되었고, 레닌주의는 실현되지 못했다.(89) 이런 실패로 생겨난 틈에 강자의 승리, 국민의 열정과 단결, 노동계급의 국가 통합, 외국인 제거, 전쟁을 통한 지배민족의 승리를 꿈꾸는 파시즘이 등장했다.(90) 파시즘의 지적 문화적 토양이 되는 반자유주의, 공격적인 민족주의와 인종주의 그리고 본능과 폭력에 대한 새로운 미적 태도가 유행했다. 니체, 구스타프 르 봉, 조르주 소렐, 게오르크 폰 쇠네러, 휴스턴 스튜어트 헤엄벌린, 리하르트 바그너 등이 초기 파시스트 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91) 19세기 말의 가장 주요한 지적 성과는 베르그송과 프로이트의 인간의 정신에 내재된 무의식의 실체와 힘, 그리고 인간 행동의 불합리성에 대한 발견이었고, 우생학을 고안한 프랜시스 골턴 같은 대중 작가들은 혈통, 민족, 의지, 행동 같은 주제로 사회진화론을 더 거칠고 공격적인 형태로 바꾸었다.(95) 20세기와 함께 새로운 형태의 불안이 나타났고, 파시즘은 그 불안의 해결을 약속했다.(96) 공동체 결속이 무너진다는 두려움에서 공동체의 질병을 진단하는 사회학이 나타났다.(97) 역사상 위대한 국가들이 안락과 자족으로 인해 출생률이 감소하고 생명력이 감퇴한다는 쇠락(데카당스)에 관한 불안감은 슈펭글러에게서 영웅적 전제군주제가 독일을 구원할지 모른다고 시사하게 되었다.(98) 불안의 한가운데는 ‘적’이라는 관념이 있었다. 파시스트들은 나라안팎에서 모두 적을 찾아냈다.(98) 유전의 메커니즘이 알려지자 공동체를 의학적으로 정화하려는 욕구가 특히 청교도의 북유럽에서 생겼다.(99) 파시스트들이 지지자들을 동원하기 위해서 악마화된 적이 필요했다.(101) 파시즘이 유럽문화사의 핵심이라는 슈테른헬의 주장과 달리 한나 아렌트는 나치즘은 독일과 유럽의 모든 전통이 무너진 결과로 보았다. 나치즘은 파괴의 중독에 기초하고 있다.(102) 게다가 파시즘은 이데올로기가 선택과 행동으로 만들어졌다.(105) 파시즘은 나라마다 크게 다른데 민주주의가 크게 발전한 곳과 대중의 반감과 분노가 좌파로 힘을 몰아주는 나라에서는 탄생할 공간이 거의 없었다.(105) 파시즘은 권력을 잡은 후 처음 길을 열어준 지적 흐름을 경시했고 주변화시켰으며, 심지어 폐기했다.(107) 파시즘은 일관되고 논리 정연한 철학에 연결되어 있다기 보다 파시즘적 행위를 형성한 일련의 ‘결집된 열정’에 연결되어 있다.(108) 파시즘의 필수적 전제조건은 ‘대중 정치mass politics’이며, 1848년 처음 실시된 성인 남자의 선거권이, 그 결과 루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당선된, 철길로 기능했다.(110) 파시스트들은 대중을 끌어들여 훈련시키고 활력을 불어넣었다.(112) 또 민주주의 좌파와 사회주의 좌파의 분열에서 파시즘이 싹을 틔울 수 있었다. 성숙한 사회주의 좌파가 정부에 들어가 타협을 일삼고, 전통적인 노동계급과 지식인 지지자에게 환멸을 안겨 준 상황에서 파시즘이 들어갔다.(113) 볼셰비즘이 울린 화재경보는자유주의의 세 핵심적 제도인 의회, 시장, 학교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114)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국제주의나 세계주의에 반대하여 국가가 최우선임을 주장하는 대중 운동은 파시즘의 전조였다.(116) 1880년대 블랑제가 이끌던 최초의 대중주의적 민족주의는 실패했지만 카리스마적 인물을 지지하며 모여들게 했다.(119) 반드레퓌스 운동도 반자본주의, 반유대, 과격한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다.(120) 1880년대 독일의 신교도 목사였던 아돌프 슈퇴커도 기독교 사회당 내에서 반유대주의를 활용했다.(121) 새로운 자유주의 세대도 대중 정치를 관리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반유대주의를 활용했다. 국가사회주의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프랑스의 프루동 모임이지만, 이 말을 만들어 낸 사람은 프랑스의 민족주의 작가인 모리스 바레스였다.(122) 이탈리아에서도 영웅적이고 반사회주의적 국가주의적 생디칼리즘이 나타났다.(124) 그러나 기능적으로 파시즘과 관련된 최초의 현상은 미국의 KKK, Ku Klux Klan였다. 희 가운과 모자로 이루어진 제복, 위협의 기술, 자신들의 운명을 위해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신념.(124) 퇴역군인 이외에 초기 파시스트 들은 대부분 젊은이였고 나이든 세대가 전쟁에 책임이 있다고 확신했으며, 격정적인 형제애로 이를 이끌었다. 파시즘이 중간게급 하층이 느끼는 분노를 가장 잘 구현했다고 여겨질 정도로 파시스당의 대부분은 중간계급 사람들로 채워졌다. 또한 생각보다 훨씬 더 맣이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었다.(126) 노동계급에 있는 클럽, 신문, 조합, 집회 등 사회주의의 하위문화가 더 많은 노동자의 파시스트화를 막았다.(127) 적절한 좌파 대안이 없는 지역적 환경이 파시즘으로 사람들을 이끌기도 했다.(128) 파시즘이나 나치즘을 일종의 정신 장애로 결론 내리는 것은 위험하다. 대부분의 파시즘 지도자들과 활동가들은 이성적인 관점에서 충분히 이해할 만한 과정을 통해, 그런 예외적인 권력과 책임의 자리로 떠밀린 상당히 정상적인 사람들이었다.(129) 파시즘 지도자들은 새로운 유형의 주변적인 인물들로 보헤미안이었고, 룸펜 지식인이었으며, 딜레탕트였다.(130) 그러나 사회적 기원과 교육 배경은 너무도 다양했고, 케케묵은 부르주아 정치에 대한 경멸, 좌파에 대한 반감, 열정적인 민족주의, 필요할 경우 폭력을 받아들이겠다는 생각이 이들을 결속시켰다.(131) 기원과 초기 파시즘을 통해서는 파시즘 이해의 잘못된 길로 가게 된다. 파시즘은 정착, 정권, 급진화 등에서 다른 길로 가게 된다.(132-133)

파시즘을 본격적으로 분석한 팩스턴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파시즘에 대한 경각심과 함께 파시즘화 할 가능성은 매우 적다는 양가적 감정에 휘말게 된다. 지금까지는 아직은 두려움이 고조되는 단계이지만, 그러면서도 이런 운동이 이미 이 단계에서 실패한 경우가 많다는 점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다음 장과 그 다음 장을 통해 더 자세히 말하겠지만, 파시즘은 성공하기 매우 어려운, 특정한 역사적 상황과 지도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반대로 파시즘은 언제 어디서나 그 경향을 드러내면서 나타날 수 있다. 한국의 아스팔트 우파들의 행동이 바로 그렇다. 요즘은 줄었지만, 한 때 공공연하게 가스통을 굴려서 ‘가스통 할배’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던 그들은 요즘은 계엄과 군의 출동을 요구하고, 자신들 무리로 뛰어든 기자들에게도 공공연하게 폭력을 행사한다. 마치 이들을 정신 장애인 것처럼 비아냥 거리기는 쉽지만, 그런 비꼼이 이들의 동기를 해명하지 못한다. 이들의 좌절, 이들이 겪어온 경험, 이들이 살아온 세대. 이들의 움직임과 파시즘 운동에 있어서 단 하나 결정적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이이다. 파시즘은 젊은이들의 운동이었다. 기성세대는 전쟁과 실패에 대해 책임이 있었다. 1950년대를 거쳐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은 젊은이의 나라였다. 기성세대의 가치관은 조선 왕조의 실패와 식민지 그리고 전쟁을 거치는 기나긴 기간 동안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부정되었다. 전쟁은 기성세대의 수를 물리적으로 줄였다. 그들은 실상 어른 없는 젊은이의 시대를 만끽했고, 그와 똑같은 아니 오히려 그들 자신보다 훨씬 온건한 방식으로 그들 자신이 비판받기 시작한 1980년대 부터 오늘에 이르는 기간 동안 때로는 숨죽이면서 때로은 저항해왔다. 어제도 모여서 태극기와 함께 때로는 그보다 훨씬 큰 성조기와 십자가를 흔들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이 움직임은 젊음이 없어서, 파괴를 향한 열정이 없어서라도 파시즘화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파시즘은 지키는 운동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젊은 세대의 촛불은 파시즘의 열망이 휘젓던 시기와는 달리 지도자와 차별에 몸을 내맡기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움직이려 하고 있으니 실제 불안감이 덜해지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처럼 제도권 정치가 무력하고,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 내지 못한다면, 그때도 그럴까. 어떤 의미에서 한국의 자유주의 정치인과 정당의 무기력은 조직화를 포기하고 손을 놓고 있는데 있지 않나. 청년 대중과 노인 대중에 대한 조직화와 하위 문화를 구성하려는 시도가 안정적인 변화를 이끌어 낼 기반이 되지 않을까. 큰 파도에 휩쓸려가는 대중 만이 아니라. 혹시 태극기 집회 과정에서 노인 대중이 일방적으로 조직화되고 있는 건 아닌가. 양가적 감정에 반복적으로 휘말리게 된다.

파시즘이 뿌리내리는 과정에서 상당한 변화가 생겨났다. 몇몇 파시즘 운동은 사람들의 심각한 불만과 요구를 대행하고 정치적인 야심을 충족시킬 수 있게 되면서 정치 제도 속에 뿌리를 내리기에 이르렀다.(139) 파시스트들은 이 과정에서 긍정적이고 실제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는 확실한 정치적 공간을 찾아야 했다.(140) 실제 파시스트들의 반자본주의는 지극히 선택적이었다. 국가사회주의는 외국의 재산이나 적의 재산만을 부정하는 사회주의 였다. 파시스트들은 국가의 생산자 계층을 소중히 여겼다.(141)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실용적인 선택은 성공과 권력을 향한 그들의 야망에서 비롯되었다.(142) 나라를 지배하는 것을 운명으로 여겼다.(143) 정치판에서 주요 세력으로 부상하는 과정에서 일부 투기꾼 자본가 및 부르주아 정당 지도자들과이 결탁이 포함되었다. 그러면서 반자본주의 수사와 혁명적 아우라를 유지했다.(145) 통합의 약속, 책임지는 참여 정당, 비사회주의적 통로로 나타나자 시민들은 아웃사이더들에게 구조를 바라기 시작했다.(146) 무솔리니는 단눈치오가 피우메에서 보인 연극적 언행을 차용하였고(149) 1920년 포 계곡에서 자유주의 이탈리아에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농장주들의 요청으로 검은셔츠단은 사회주의를 공격하고, 소작농에게 일자리와 농토를 제공하여 농촌 노동시장을 독점했다. 지주들에게 기부받은 토지를 소작농에게 나누어 주어 사회주의에서 탈퇴시켰다.(151-122) 바르바토 가텔리 같은 순결주의자는 모리배들의 호위병으로 변질되었다고 비판했지만, 이들은 당을 떠나거나 밀려나고, 지주의 아들, 젊은 경찰관, 군 장교, 하급 병사 등 행동대를 지지하는 세력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우파쪽으로 기운 이들은 기성세대에 저항하는 세대의 반란이었다.(154-155) 기업가와도 종교와도 타협한 무솔리니가 말하는 파시즘 혁명이란 사회주의와 맥빠진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혁명, 이탈리아인들을 통합하고 극할 수 있는 새로운 길, 국가 공동체와 조직화된 대중의 합의의 요구에 개인의 자유를 종속시킬 권능이 있는 새로운 유형의 통치권위였다.(156) 반사회주의가 핵심이고, 급진적이고 반자본주의적 이상주의는 희석되었다.(157) 사회주의자들과 이탈리아 인민당의 지지율을 떨어트리려던 졸리티 총리는 1921년 의회선거를 준비할 때, 파시스트까지 자기의 선거연합에 끌여들였다.(158) 도시 선거에서 연거퍼 실패한 히틀러는 농촌에 눈을 돌렸고, 1932년 7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의 64%가 나치당을 지지했다. 대공황의 위기 속에서 기존 정치 지도자들과 정치 조직들에 대한 경멸감이 커져 간다는 파시즘화의 첫 번째 단계다.(160) 히틀러는 유권자마다 구애 방법을 달리했다. 그는 유권자 대중을 움직이는 방법을 잘 알았다. 끊임없는 대중집회, 제복 차림의 폭력단, 물리적 위협, 흥분한 군중, 열정적 연설, 극적인 등장 등.(161) 나치당은 모든 사람에게 각각 무엇인가를 약속했다. 이런 선거 방식에는 돈이 많이 들었다.(162) 나치가 급진화 할수록 기업가들은 돈을 대지 않았고, 낯치 자금의 상당 부분은 대중 집회의 입장료, 나치 소책자와 기념품 판매, 소규모 기부가 차지했다.(164) 1932년 무렵 모든 계층을 포괄하는 거대한 정당으로 성장했고, 직접 행동과 선거 운동은 상호보완적이었다.(164) 나치가 자유주의적 중간계급 정당을 대체하는 데 성공한 것은 이들이 독일이 전쟁 패배에서 느낀 민족적 모멸감과 세계 대공황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32년 7월 선거에서 37%로 최대 지지를 받은 후 32년 11월 나치의 지지도는 하락했고, 추진력을 잃어갔으나, 오직 총리직에 명운을 건 히틀러의 도박은 나치 당원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166) 한편 승전국들도 파시즘을 막지 못했다. 주목할 만한 프랑스의 파시즘으로 들 수 있는 프랑수아 드 라 로크 대령이 이끈 ‘불의 십자단’은 퇴직 군인 단체로 시작했고, 반유대주의를 거부하며, 반게르만주의를 고수했지만, 인민전선 정부가 준군사집단을 해산시키자 프랑스사회당PSF을 만들어 이끌었다. 그러나 비시 정부를 세운 것은 파시즘적 우익이 아닌 전통 우익 세력이었다. 이들은 보수파와 타협하지 않고, 독트린의 ‘순수성’에 집착했다.(171-173) 포 계곡의 이탈리아 파시스트 같은 녹색 셔츠단이 등장했지만, 프랑스 정부가 추수를 방해하는 행동에 대해 강력하게 대처해서 이들의 행동은 성과가 없었다.(174-176) 프랑스농민연합 같은 굳건한 보수 농민조직과 브르타뉴 지방의 랑데르노에 거점을 둔 강력한 협동조합 운동이 버티고 있어서 녹색 셔츠단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이는 별 무리 없이 기능하는 기존 정치 제도 속으로 파시즘이 쉽게 침투할 수 없음을, 국가와 기존 조직이 크게 실패하지 않는 한 새로운 세력이 성장할 기회는 생기지 않는다.(176) 헝가리의 화살십자당이 선거에서 승리했을때, 이미 호르티의 보수적 군사 독재 정권에 장악된 상태였고, 루마니아의 대천사 미카엘 군단도 지지를 얻었었다. 벨기에의 렉시스트당도 이질적인 저항세력의 표를 모았으나 순식간에 무너졌다. 비드쿤 크비슬링이 이끈 노르웨이 국가통일당은 선거에서 큰 승리를 얻지 못했다. 오스왈드 모슬리 경의 영국파시트 연합이 히틀러와 유사하고 친밀한 모습은 영국인에게 이질적으로 여겨졌다. 아일랜드의 이오인 오더피 대령의 푸른 셔츠단도 실체 없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성공을 거두려면 히틀러나 무솔리니가 겪었던 것에 필적할 만한 위기와 그들이 차지했던 것에 필적할 만한 정치 공간, 그들이 전통적 엘리트층에게서 받았던 것에 필적할 만한 협력이 필요했다.(177-182) 지성사는 파시즘 운동의 정착 단계 분석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184) 그러나 지식인은 자유주의 정권에 대한 불신, 새로운 극단적 운동을 좌파 바깥에서, 폭력을 존중할 만한 것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은 자유주의 질서의 위기였다.(185) 광범위한 자유는 1차 대전 중 사라졌다. 전면전을 수행하기 위해, 강력한 조정과 규제가 필수적이었다. 전쟁이 만들어 낸 중압감은 자유주의 정책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새로운 갈등과 긴장, 역기능을 낳았다. 위기에 처한 것은 통치의 기술이었다. 명망가의 지배 자체가 문제였다. 명망가의 지배가 대중의 국민화로 거센 압력을 받게 되었다.(186) 구세대의 정치가들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막론하고 어떻게 대중의 흥미를 끌 수 있는지 전혀 몰랐다. 파시스트들은 중도파와 보수파의 무능력을 이용해 대중 정치를 장악해 들어갔다. 결과가 불확실한 선거를 국민투표로 대체했고, 파시스트들은 대중들의 지지 행사에 참가함으로 시민의 대표자임을 직접적으로 표명했다. 위기를 보는 두 번째 방식은 후발산업국의 전환의 위기, 세 번째 방식은 사회적 관점에서 조명하는 것이다. 산업화 이전의 구세력이 낡은 사회 질서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파시즘을 지원할 가능성도 높았다. 문화적 관점에서 보면, 읽고 쓰는 능력의 보편화, 저렴한 대중매체, 낯선 문화 등르로 자유주의 지식인들이 전통적인 지적·문화적 질서를 유지하기 힘들어졌다. 이탈리아와 독일은 유럽 주요 국가 중 대중 선거와 함께 가는 법을 가장 나중에 배운 국가였다.(188-189) 파시즘이 성공을 거둔 지역은 1차 대전 패전국들이지만, 스페인은 팔랑헤의 권력 장악이 아닌 프랑코의 군사 독재로 이어졌다. 파시즘은 필연이 아니다. 파시즘을 볼셰비키 혁명을 두려워한 지역이지만, 종족 분열을 두려워한 국가에서도 번성했다.(191) 파시즘은 자유주의 위기라기 보다, 허약하거나 실패한 자유주의의 의기에서 생겨났다.(193) 민주주의, 시민권, 법치는 독일에겐 외국에서 수입된 개념이었다.(193) 1919년 이후 좌파는 더 이상 포용적이지도 독점적이지도 못했다.(196) 여기에 구심점 역할을 하는 지도자가 순수성을 거부하고, 정치적으로 비어있는 공간에 들어가기 위해 거래와 타협에 임할 수 있어야 했다.(196) 나치의 폭력은 교묘하게 계산된 메시지를 전하는 수단이었다.(197) 악마화된 내부의 적을 향한 폭력의 합법화는 파시즘의 본질을 보여준다. 파시스트의 폭력은 아름답기 까지 했다.(199) 양극화는 파시즘에 유리하게 작용했다.(200) 파시즘을 권력을 장악는 과정에서 당의 동형 기구Parallel Structures를 활용했고, 이를 국가기관과 함께 유지했다. 또한 동맹 세력과 공모 세력에 의존했다. 파시즘의 가장 큰 적은 사법 및 행정상의 엄격한 법집행이었다.(200-201)

팩스턴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파시즘은 필연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가지 환경과 사건이 겹쳐야만 일어난다. 파시즘은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일정한 성공을 거두려면 일단 상당한 조건이 필요하다. 자유주의 국가의 위기, 특히 통치성의 위기. 대중 사회의 도래와 폭력과 대중을 활용하는 정치. 전쟁이나 크나큰 사건에 의한 좌절과 좌파에 대한 공포. 카리스마를 발휘하면서, 기득권인 자유주의나 보수주의와 신속하게 타협하는 지도자. 지금 한국에 파시즘으로 전환되거나 파시즘을 성공시킬 요소가 널려 있고, 반대로 파시즘을 성공시키지 못할 요소도 꽤 된다. 그중 하나가 강력한 공권력 행사이다. 어찌 보면, 안정성이 떨어지는 국가에서 파시즘으로 전환될 이런 요소는 항상 널려있다. 만일 지금 한국에서 파시즘적 요소가 등장할 가장 큰 원인을 꼽는다면, 그것은 자유주의 및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세력의 취약한 통치능력이다. 거기에 기성 제도권 정당은 물론 대안세력 역시도 대중 정치 능력이 취약하다는 점에 있다. 이들은 도무지 대중을 조직하지 못한다. 새롭게 등장하는 노인 대중이나 젊은 대중 모두 마찬가지다. 거대한 파도에 쓸려서 이리저리 휘말리는 어설픈 팬덤 정치의 무기력이 가장 큰 원인이다. 취약한 것은 정치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파시스트의 권력 장악 과정은 신화와 너무나 달랐다. 파시스트 행동대가 지방도시를 지나 로마로 진군했지만, 진군의 결과로 집권한 것은 아니다. 총리인 졸리티도 무솔리니도 망설이는 태도를 보여왔다. 사회주의 세력도 한 목소리를 내지 못했고, 파업을 시도했지만 곧 와해되었다. 로마로 진군하던 2만 명의 검은 셔츠단은 세 검문소에서 4백명의 경찰에 막혔고, 도보로 전진한 9천명도 우왕좌왕했다. 그러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계엄령에 서명하지 않고 망설이더니, 무솔리니에게 총리직을 제안했다. 그는 열차 침대칸에 타고 로마에 도착했다. 상황을 결정지은 것은 파시즘 세력이 아니라, 무솔리니에 맞선다면 자신들의 권력이 위험에 처하리라는 보수주의자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검은 셔츠단의 로마 행군과 유혈 사태는 무솔리니가 총리직에 오른 후였다.(205-213) 히틀러도 마찬가지였다. 무솔리니를 흉내낸 1923년의 맥주홀 반란은 무산되었다.(214-215) 대공황으로 다시 위기가 오자, 많은 독일인들이 외부의 침략과 내부의 배신의 결과라 생각한 바이마르 공화국은 양쪽에서 타들어가는 초 같았다. 1930년 3월 헤르만 뮐러 총리 정부가 무너지면서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후 독일 정부는 과반수를 구성하지 못하고,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헌법 48조에 의해 위임받은 비상대권에 의해 구성되었다. 나치당의 인기는 올라갔지만, 소수에 불과했고,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좌파를 배척했다. 사민당SPD과 공산당KPD의 수동성이 문제였다. 사민당이 보면 나치 쿠데파는 파업의 기회였고, 공산주의자들은 혁명을 기다렸다. 폰 파펜은 제1당이 된 히틀러에게 부총리를 제안했지만, 히틀러는 거부했고, 나치당은 신중하고 의도적인 폭력을 일으켰다. 1932년 나치의 지지율은 떨어져가고, 재정은 바닥나가는 상황에서 폰 파펜은 히틀러에게 총리를 자신은 부총리가 되기로 제안했고,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1933년 1월 30일 지명했다. 히틀러의 나치당은 합법적인 절차에 의해 총리가 되었다.(216-224) 독일 유권자들은 나치당에게 과반수를 준 적이 없다. 1932년 7월 31일 선거에서 37.2%의 득표율로 1당이 되었으나, 32년 11월 6일 33.1%로 락했다. 히틀러 총리 시절인 33년 3월 6일 43.9%까지 올랐을 뿐이다. “히틀러나 무솔리니 어느 누구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지 않았다. 집권 전에 무력으로 기존 정권을 위협하거나 집권 후에 무력을 동원해 정부를 독재 체제로 변환시키기는 했지만, 어느 쪽도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하지 않았다.” 권력 강탈은 정권을 잡은 후의 행동이고, 두 사람 모두 군사부문 고문과 민간부문 고문의 조언을 받으며 합법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국가원수에 의해 정부의 수장으로 ‘초대’받았다.(225) 물론 그 임명은 위기 상황에서 이루어졌고, 그 위기는 파시스트가 선동한 것이었다.(226) 대천사 미카엘 군단의 쿠데타 시도는 번번이 무산되었다.(226) 이들은 히틀러가 승인한 안토네스쿠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되었고, 친독 성향의 비파시즘 군사 독재 체제가 되었다.(228) 보수 세력은 국가에 대한 폭력은 용납하지 않았다.(228) 파시즘의 권력 장악 과정은 언제나 보수 엘리트층과의 공조를 통해 이루어졌다. 파시스트들은 위기에 처한 보수주의자들에게 힘과 지지자들을 제공할 능력이 있었다.(229) 파시즘이 무르익어 권력을 진지하게 추구하면서 이들은 기득권층과 깊이 공조하게 된다. 보수파 지도자들은 파시스트의 폭력과 좌파의 폭력에 대해 이중잣대를 적용했다.(230-231) 파시스트가 좌파를 겨냥해 휘두른 폭력에 보수파가 공모하고, 기업인들은 엄청난 정치자금을 제공하고, 새정권은 군수품 계약과 노조 파괴로 보상한다. 좌파의 권력 장악이나 군사 독재를 막기 위해 보수파와 파시스트는 협력하고 이해를 조정한다. 파시스트 정당은 이 과정에서 일부 순결주의자들을 소외시키고 다을 재정비하는 정상화를 시도한다. 히틀러는 지배를 위한 타협Herrschaftskompromiss를 결정한다. 이때가 지도자에게 위험한 순간이며, 당내의 반발을 조정해야 했다. 무솔리니와 히틀러 집권 과정에서 필연적인 요소는 아무것도 없었다.(232-236) 파시즘은 엘리트 층에게 폭넓은 대중의 지지와 의회 과반수를 구성할 수 있게 해주었다. 새로운 젊은 얼굴들과 헌신과 규율이라는 새로운 소속방식을 제공했고, 국가의 이름으로 노동자들을 마르크스주의에게서 멀어지게 했다. 파시즘 정당은 노동자들을 일부 끌어들여 분열과 정복을 시도했다. 파시즘은 또한 자신들이 만들어내기도 한 무질서를 극복했다. 보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국가를 지배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237-241) 1차 대전과 볼셰비키 혁명 이후, 좌파와 나치만 득세했고, 민주 정부는 교착상태에 빠졌으며, 파시스트들은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못하도록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244) 입각한 연립 정부에서 소수파에 불과했던 두 지도자는 곧 철저한 독재로, 무한 권력을 휘두룰 수 있는 개인 독재로 바꾸었다. 이것이 ‘권력 강탈’이다. 이제 동맹세력의 묵인만이 필요할 뿐이었다. 1933년 2월 27일 발생한 제국의회 의사당 방화사건 후 비상 대권에 따라 ‘국민과 국가 보호를 위한 법령’에 서명했고, 3월 5일 선거에서 과반수에 이르지 못했지만, 4년간 법률에 따라 의회나 대통령을 거치지 않고 히틀러가 단독으로 통치하도록 하는 수권법[정식명칭. 국민과 나라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법]을 민족주의자들과 카톨릭 진영의 도움을 받고, 공산주의 진영의 의원들을 체포한 후 통과시켰다. 이후 히틀러는 일당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수권법이 만료되는 1937년이 되자 전쟁이라는 구실이 생긴 1942년까지 통치 기간을 연장했다.(245-249) 히틀러와 나치당 사이의 충돌은 끊이지 않았고, 1934년 6월 30일 ‘긴 칼의 밤’에 나치 돌격대장 에른스트 룀을 비롯해 수백명을 희생시키며 이 문제를 해결했다.(249-250) 무솔리니의 집권 후 일으킨 혁명은 좀 더 점진적이었다. 무솔리니가 지나치게 정상화하면 파시스트 행동대는 폭력 사건을 일으켰고, 무솔리니는 이 압력을 이용했다. 이탈리아사회당PSI의 자코모 마테오티를 암살했을 때도, 보수파는 좌파의 집권을 두려워해 망설였고, 사회주의 진영은 의정 활동 거부라는 자멸적인 방법으로 교착 상태가 계속되자, 일련의 국가 방위법을 통과시키고, 시장을 임명하고, 언론을 검열하며, 사형을 부활하고, 파시스트 노동조합에 노동자 대표권을 주고, 국가파시스트당PNF 이외에 모든 정당을 해산하여 일당 독재를 확립했다. 보수 진영은 무솔리니가 일으킨안으로부터의 쿠데타를 수용했다.(250-254) 파시즘이 집권한 것은 소수이며, 파시즘 운동이 권위주의 정권의 하위 세력으로 참가한 경우 결과가 좋지 않았다.(254) 히틀러는 현실 감각을 갖춘 실용주의자였기 때문에, 노르웨이의 비드쿤 크비슬링에게 실권이 없었고, 네덜란드 프리츠 클라우센도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페탱의 비시 정부를 지지하던 보수파 인사들이 등을 돌린 후에야 마르셀 데아 같은 파시스트들이 비시 정부에서 자리를 잡았다. 루마니아의 파시즘은 붕괴시켰고, 슬로바키아와 헝가리의 권위주의는 내버려 두었다. 크로아티아에서 파시스트의 통치를 허락했을 뿐이다. 점령국의 파시즘은 패배와 협력을 통해 이전 통치 체제의 실패자들이 재등장했고, 점령당한 국민 내부의 적대와 반목의 선도 뚜렸하게 드러났으며, 국가적 위엄과 확장 정책도 구사하지 못했다.(255-261) 파시즘의 집권 성공 여부는 위기의 심각성이나 잠재적인 동맹 세력의 절박함의 정도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다.(262) 이들이 무장 군대를 동원하지 않은 이유는 폭력적인 선택이 거리의 대중과 노동계급, 계몽된 인텔리겐차를 좌파의 손에 돌려주고, 민중을 정치에서 배제하기에 너무 늦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리라. 민중의 재복종은 불가능했기에 국가와 민족의 논리로 민중을 끌어들여야 했다.(263-264) 파시즘의 성공 모델에 필요한 조건은 양극화, 교착 상태, 내·외부의 적에 대항한 대중 동원, 전통적 엘리트층과의 공모 뿐이다.(265) 선거 승리가 파시즘 정권 장악의 전제조건이 아니라 기존 자유주의 국가의 기능 마비나 붕괴가 더욱 중요했다.(266) “파시즘의 역할은 단기적으로 사회주의자를 배제한 해결책을 통해 국정의 질식 상태를 타개하는 것이고, 장기적으로는 국가적·사회적 방어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얻어 허약하고 퇴폐적이며 부패했다고 생각되는 국가를 정화하고, ‘도덕화’할 뿐 아니라 활력을 불어넣고 갱생시켜 통합하는 것이다.”(266-267) 중도파 연립정부의 형성이나 전문 관료나 비당파적 전문가에 의한 정부가 초당파적으로 위기를 해결하는 대안은 시도되지 않았다. 군은 군사 정권을 수립하지 않고 파시즘을 지지했다. 정치 엘리트들은 반사회주의적 해결책을 택했다. 어느 정도 선택의 대안 있는 과정에 그들은 파시즘을 선택했다. 이는 강력한 기득권 지도자들의 불행한 선택이었다.(268-269)

그렇지만 여기서 독일의 역사에 꼭 주목해야만 하는 점이 있다. 독일에서 왜 보수 기득권은 파시즘과 손을 잡았는가? 다시 말해 왜 좌파와 손잡기를 끝내 거부했는가? 이를 단지 이익 차원으로만 보면 안된다. 1차 대전 말기 독일은 그냥 무너졌다.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으면서, 동부전선의 전쟁은 큰 이익을 얻으면서 정리됐지만, 획득한 영토에 부대를 주둔시키는 일은 쉽지 않은 문제였다. 이 과정에서 드디어 미국이 본격적으로 참전하고, 전세가 불리해졌는데, 오스트리아가 항복한 날, 킬 군항의 해군 수병이 폭동을 일으켰고, 덩달아 노동자들은 파업을 일으켰다. 상황을 수습할 수 없었던 황제는 네덜란드로 망명하고, 그 과정에서 부랴부랴 바이마르 헌법에 의한 바이마르 공화국을 만들어 내게 된다. 이 바이마르 공화국이 지금까지 어느 나라보다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주의라는 점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배신자들이 등에 칼을 꽂았기에 이길 수 있는 전쟁에서 졌다는 사람들의 인식, 그런 대중적 인식이 크게 퍼져나갔고, 바이마르 공화국은 우왕좌왕 했다. 특히 전후 처리 과정에서 베르사유 조약이 요구하는 배상금을 수용함으로써 바이마르 공화국의 무능이 널리 확산된 상황에서 좌파란 보수 기득권층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내부의 적이나 배신자 혹은 무능력. 패전과 실패의 책임을 돌리기에 적절한 대상이 좌파였던 셈이다. 그러나 실상 그 보수 기득권층이란 입헌민주주의를 수립하자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요구를 던져버리고, 비스마르크를 중심으로 군주제를 수립하고 나선 그 군주제가 파탄난 책임을 엉뚱한 데 돌린 셈이다.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정복자의 이름으로 전해진 역사까지 더하면, 그 역사적 전개가 참으로 기묘하다고 할밖에. 그러니 그들은 자신들의 책임을 외면하고,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파시즘을 초청하고 그 결과로 파국을 맞는다.

팩스턴의 파시즘에 대한 설명 중 가장 어이없는 부분이 바로 이 권력 장악 과정이었다. 어쨌거나 합법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차지했다. 쿠데타를 일으키지도, 진군도 실패했고, 오히려 집권 엘리트의 초청을 받아 그들은 권력을 장악했다. 정권을 잡은 후 권력을 사실상 강탈했으나 과정은 형식적으로 합법적이었다. 집권한 파시스트는 정상화 즉 지배세력과의 타협을 선택했고, 지배세력은 이들과 결탁했다. 그러나 파시즘의 전파나 점령지의 파시즘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강력한 기득권 지도자들의 초청에 의한 파시즘의 권력 장악. 그리고 그 결과가 가져온 파국. 어쩌면 박사모나 탄기국을 이끄는 세력을 보수 엘리트들이 자금을 지원하고, 정당과 결합하면서 초청하고 있는 셈인가. 그렇다 해도 이들의 세력이 강화될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좌파의 집권만 막을 수 있다면, 누구와도 손잡을 수 있다는 종북의 논리는 꽤나 오래된 기원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들의 내부 쿠데타는 권력 장악을 향한 길이라기 보다는 소수의 비선들이 사적이익을 취하는 데, 그쳤으니 어찌보면 몰락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박근혜는 어떤가? 박근혜는 초청받은 정치인이다. 보수 기득권은 확산되는 대중의 반감에 대응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의 더 정확히는 그의 아버지에 대한 사람들의 향수와 일종의 팬덤을 활용할 작정으로 보수 정치권의 한 가운데로 초청되었다. 선거의 여왕이니 뭐니 하는 수식어가 붙었지만, 실제 국정을 운영하는 능력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이제 모든 사람이 보고 듣게 되었다. 박근혜 문제의 핵심은 어쩌면 무책임과 무능력일 것이다. 그리고 권력과 집권이라는 두 개의 수사 이외에 아무런 능력이 없는 박근혜를 권력의 핵심부로 불러들여 꽃가마를 태운 건 보수 기득권 세력이다. 그들이 눈여겨 본 것은 박근혜 그 자체가 아니라 박근혜가 가진 동원의 힘이다. 그의 아버지가 만들어낸 박정희의 유산으로서의 동원하는 힘. 여러 차례의 선거국면에서 박사모라는 위력을 보여준 그들은 이명박근혜 집권 기간 동안 아스팔트 우파 또는 아스팔트 할배의 면모를 여지없이 보여주었고, 이제 탄핵 국면에서 그 절정을 드러내고 있다. 박근혜를 등에 없고 권력을 누렸던 보수 기득권은 이들 아스팔트 우파와 할배들에게도 돈을 지원하고 보호하다가 이제 마지막 국면에서 아예 아스팔트로 뛰어들고 있다. 보수 기득권이 아스팔트를 끌어들였다가, 자신이 아스팔트로 끌려나가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들이 본래 아스팔트 출신도 아니었는데. 말릴 생각도 없고, 말려지지도 않을 테지만.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파괴적인 수사가 수사를 넘어서서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행동으로 전환될 때, 강력한 공권력을 발동해야 한다는 점이다. 법이 적용되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

파시즘 통치의 성격, 파시즘 독재 체제가 단일하지도 고정되지도 않다는 사실은 이제 상식이다. 전후 독일과 이탈리아 엘리트층의 자신들이 파시즘 부역자가 아니라 희생자라는 변명과도 일맥 상통한다.(273) 어디서 많이 들어본 지금도 듣고 있는 그런 이야기다. 그러나 홀로 군림하는 독재자란 없으며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군, 경찰, 사법기관 등 통치에 중대한 역할을 하는 기구와 강력한 사회·경제적 세력의 협조 내지는 묵인을 얻어야 한다. 기존 보수와의 권력 공유 이점이 파시즘과 스탈린 독재를 가르는 지점이기도 하다.(273) 이데올로기적으로 순수한 파시즘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파시즘 정권은 당과 강력한 보수 세력 사이에 맺어진 모종의 협약이나 동맹관계에 의지했다. 프란츠 노이만의 『베헤모스Behemoth』는 당, 기업, 군, 고위 공직자의 연합을 보며 이들이 경제적 이익, 권력, 특권, 특히 두려움에 의해 한데 뭉쳤다고 말했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붕괴』의 저자 칼 디트리히 브라허Karl Dietrich Bracher)는 권위주의적 보수 세력, 전문가 집단, 민족주의자들, 혁명적 독재 세력이 연합할 수 있는 상황에서 권력을 장악했다고 했다. 『히틀러 국가』의 마르틴 브로샤트Martin Broszat에 따르면 히틀러 내각의 보수파들이 민족주의자들을 히틀러의 제휴 세력이라 불렀다. 한스 몸젠Hans Mommsen은 상승세를 타던 파시스트 엘리트들과 기존 지도층의 구성원들이 다수당 정부를 무너뜨리고 강력한 정부를 재수립하여 마르크스주의를 타도한다는 공동의 목표 아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단단히 결합하여 이룬 연합이라고 묘사했다.(274) 이탈리아의 경우 가에타노 살베미니는 두체와 왕의 이중 독재라고 말하고, 볼프강 시더와 옌스 페테르센은 반대 세력과 균형 세력을, 에밀리오 젠틸레Emilio Gentile는 무솔리니의 개인적 권력욕이 항구적인 긴장 속에서 기존 세력들과 골수 파시스트를 모두 상대하는 투쟁이며, 분파 사이의 물밑 갈등sorda lotta을 겪었던 복합적 현실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274-276) 파시즘 체제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갈등과 긴장으로 점철되어 있다. 보수주의자는 전통적 권위주의로 후퇴하는 경향이 있고, 파시스트들은 역동적이고 단순한 인민주의적 독재, 부국강성과 국민 정화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독재로 나가려 한다. 당은 보수층의 권력 기반을 무력화하기 위해 동형 기구pararell structure를 사용한다. 독일은 당이 전권을 휘두르는 급진적 방향으로 나아간다.(276) 에른스트 프랭켈Ernst Fraenkel은 나치 독일을 ‘이중 국가dual state’라 표현한다. 합법적으로 구성된 정부 당국과 기존의 관료조직으로 구성된 표준 국가norminative state가 당의 동형 기구로 만들어진 특권 국가prerogative state와 권력 다툼을 벌였다. 표준국가는 법절차와 관료주의를 특권적 영역에서 지배자의 변덕, 활동가에 대한 보상, 선택된 민족의 운명에 따랐다. 관료주의적 형식주의와 독단적 폭력의 혼합된 기묘한 형태였다. 히틀러는 바이마르 헌법을 공식적으로 폐지하지도, 표준 국가를 해체하지도 않았다. 특권국가는 표준 국가의 영역을 침해하고 기능을 방해했다.(277-278) 무솔리니는 표준국가의 영역에 훨씬 더 큰 권력을 허용했고, 정당을 국가에 종속시켰다. 이탈리아의 파시즘도 특권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고, 참전으로 강화되었다.(279-280) 국가는 시민사회를 장악하려 했고, 특히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국가사회주의 정신을 담은 교리를 강제하려고 시도할 정도였으나, 프리드리히와 브레진스키에 따르면 카톨릭교구 같은 단절의 섬이 남았다. 히틀러는 평준화 혹은 동등화Gleichschaltung를 통해 단절의 섬을 정복해 나갔다. 이탈리아에서는 결국 실패했다.(280-282) 파시즘 독재는 파시즘 지도자, 파시즘 정당, 국가기구, 시민사회의 네요소 간의 경쟁으로 이루어져, 긴장은 항구적이 된다. 누구도 경쟁자를 제거하지 못했다.(283) 파시즘 지도자에게 동형조직은 유용한 수단으로 이탈리아에서는 여가 활동에 나치당은 준군사조직, 재판소, 경찰조직, 청년단은 물론 외무부서까지 있었다. 당 동형 조직에 의한 기존의 권력 기구 복제는 파시즘 체제 특유의 무정형성과 지휘 계통상의 혼선을 낳은 주요한 원인이다.(285-286) 당에 기회주의자들이 대거 입당한 것도 혼란의 원인이었고, 이 와중에 파시즘 지도자는 동맹 세력에게 원치 않는 정책을 강요하기도 하고, 반발을 달래느라 부심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파시즘 지도자는 일종의 지배권을 만끽했고, 정통성은 선거나 정복이 아닌 카리스마에 있었다. 카리스마의 기본은 자기가 인민의 의지의 체현이자 인민의 운명을 짊어진 존재라는 특별하고 초자연적 지위를 주장하는 것이다.(287) 파시즘은 특히나 카리스마에 의존하고, 그래서인지 권력이 계승된 예가 없다. 애드리언 리들턴Adrian Lyttelton의 지적처럼 카리스마적 지도자는 국민에게 역사와의 특권적 관계를 약속하고 동시에 더욱 급속히 몰락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또한 파시즘 권력행사는 파시즘 체제의 끝없는 긴장, 지도자와 정당과 국가와 기존의 사회·경제·정치·문화적 세력들 간의 항구적 긴장을 살펴보아야 한다. 마르틴 브로샤트로부터 파시즘 통치를 ‘폴리크라시polycracy’ 개념을 끌어온다.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여러 세력이 권력 중심을 이루어 항구적인 경쟁과 긴장관계 속에서 협력하는 통치 형태라고 보는 해석이다. 여기서 ‘영도자 원리’가 정치· 사회적 피라미드를 내려가며 만인이 만인에 투쟁하는 홉스적 체계에서 작은 총통과 두체들을 양산한다.(289) 팩스턴은 의도주의자의 해석과 구조주의자나 기능주의자의 해석을 모두 비판한다. 의도주의는 대외정책과 군사정책을 설명하지만, 히틀러의 통치방식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게으른 보헤미안적 딜레탕트를 한스 몸젠은 허약한 독재자라 불렀고, 나치 정권이 관료주의적 효율성이라는 합리적 원칙으로 조직되지는 않았다. 팩스턴은 2권으로 된『히틀러』를 쓴 이안 커쇼Ian Kershaw의 견해를 받아들여 “지도자의 은밀한 소망을 미리 예측해서 그 소망을 향해 ‘내달리는’ 중간층 지도부 내부의 경쟁이 합당한 위치를 부여받는 동시에, 목표를 설정하거나 한계를 제거하고 열성적인 측근들에게 상을 주는 지도자의 역할이 불가결한 요소로 인정받게 되었다”고 정리한다.(290-292) 보수파와 공산주의자들 모두 히틀러는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지만, 히틀러는 순식간에 자신만의 권위를 확립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담성과 추진력, 전술적 수완, 공산주의라는 임박한 공포를 벗어나려면 적법 절차와 법의 지배를 포기해야 한다는 선동, 살인도 불사한다는 의지.(293) 히틀러는 자신을 견제하려는 보수파들에 먼저 긴 칼의 밤에 폰 파펜의 측근들을 살해했고, 고령의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사망했으며, 38년에 다시 저항하려는 군사령관들을 동성애자라는 누명을 씌워 제거하고, 군을 장악했다.(294-295) 독일 보수 세력들은 나치와 대립하는 듯 하면서도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순간이 되면 공동의 이익을 쫓았다.(296) 무솔리니는 당을 전권을 쥔 국가에 종속시키려고 노력했다.(296) 지도자와 당 사이에 항구적 긴장관계가 있었으며, 지도자는 동맹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급진파들을 실망시켰다.히틀러는 1933년 혁명의 끝을 선언했지만, 나치 급진파를 전쟁과 유대인 학살이라는 분출구로 해소했다. 무솔리니는 히틀러보다 끈질긴 도전에 시달렸다.(299-300) 당내 강경파들은 전문 관료를 쓸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 이들은 특별한 어려움 없이 공공 업무 분야를 장악했다. 핵심은 경찰 기구인데, 독일 경찰은 표준 국가에서 신속히 제거되어 나치 친위대SS라는 형태로 나치당의 통제 아래 놓였다. 이탈리아 경찰은 일반 공무원이 이끌었다. 사법부도 당의 특별법정과 인민법정이 전문 영역을 침해하는 정도를 줄인다는 조건으로 사법기관을 나치 조직에 복속시켰고, 의료인들은 열성을 보이며 나치에 협조했다. 나치 의학은 광범위한 공공보건 연구를 실시했다.(302-305) 파시즘 정권은 대중과도 상호작용했다. 테러는 선택적이었으며, 정권에 대한 국민의 지지와 협조 수준이 높았다. 독일인들은 폭력을 만족스럽게 여겼다. 이들의 폭력은 국가의 적을 선택적으로 겨냥했다. 열성적인 고발이 많았기에 경찰 기구의 규모는 작았다. 팀 메이슨Tim Mason에 따르면 제3제국은 공포, 분열, 약간의 이권, 여가활동 단체Kraft durch Freude를 통해 독일 노동자들을 봉쇄했다. 저항하는 노동자들에게는 공포를 사용했다. 최초로 강제수용소에 수감된 삶들은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정당의 간부들이었다. 노동자들의 분열을 유도하고, 개인으로 보고 접근해 원자화 시켰다. 노동자들에게 어느 정도의 이원도 주었다. 공식 노조는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유일한 조직으로 세를 누렸다. 실제로는 기업가들이 조합 조직을 운영했다. 다양한 단체들을 통해 사회를 통제했다. 무솔리니는 라테란 협정을 통해, 카톨릭 교회의 지지를 얻었고, 에티오피아에서의 승리로 인기를 얻었다. 완전고용과 무혈 대외정책의 장기 지속으로 나치 정권은 독일 국민의 열성적 지지를 얻었다. 파시즘 정권은 특히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보수적인 여성들은 파시즘 정권을 지지했다. 파시즘은 지식인들의 동조도 얻었다. 나치 독일에서 대부분의 지식인은 선택, 타협, 동조, 침묵을 택했다. 국민들은 대부분 주어진 상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였다. 나치즘은 소극적 동조를 용인하여, 민족주의자 및 보수 세력의 광범위한 지지를 유지했다.(307-320) 파시즘이 혁명이라 생각했겠지만, 실제로 소유의 분배 방식과 경제·사회적 계급은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결과적으로 기존의 사회계급을 강화한 셈이 되었다. 파시즘이 뿌리를 내리고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급진파들이 제거되었기에 변화의 범위는 한정되었다. 나치는 소농과 숙련공에게 한 약속을 깨뜨리고 도시화와 공업생산을 옹호하였다. 파시스트들이 원한 혁명은 ‘영혼의 혁명’, 조국을 강대국으로 만들고 민족을 통합해 힘과 활기를 불어넣으려 했다. 파시스트가 내세운 민족의 강화 및 정화라는 사명은 개인을 공동체에 종속시키고, 개인의 공정한 대우는 적법 절차의 원칙과 더불어 사라졌다. 파시즘 정권은 시민이 대표자를 뽑거나 정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절차를 없애버렸다. 의회는 힘을 잃었고, 선거는 가부만을 결정하는 국민투표와 지지행사로 대체되었으며, 지도자들은 거의 무제한의 권력을 휘둘렀다. 국가정 행동을 위해 공동체를 단합시켜야 하며, 설득, 조직화, 강제력을 동원해야 했다. 파시즘 정권은 새로운 남성과 새로운 여성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고,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은 당 조직에서 자라났다. 사적 영역은 거의 사라져 나치 국가에서 유일한 사적 개인은 잠든 사람 뿐이라 했다. 각종 조합과 사회주의 정당을 무력화하고, 문화를 통제했다.(321-327) 파시즘 초기의 공약과 실제가 가장 다른 부분은 경제정책으로 히틀러와 무솔리니 모두 보수파에 가장 많이 양보했던 영역이다. 경제정책은 전쟁 준비나 수행의 필요성에 다라 조정되었고, 정치가 경제를 좌우했다. 기업가들은 다른 대안 보다 파시즘이 낫다고 파시즘 정권의 수립을 묵인했으며, 협력 체제에 잘 적응해갔다. 피터 헤이스Peter Hayes는 나치 정권과 기업이 서로 수렴했지만, 이익은 달랐다고 말한다.(328-329) 파시즘 경제 체제는 전후 유럽은 커녕 1914년 이전 유럽의 성장율에도 필적하지 못했고, 민주주의 국가의 전쟁물자 동원량에도 미치지 못했다.(332) 파시즘 정권들은 마치 하나의 분자구조물 같았다. 파시즘 세력과 보수적 질서라는 두 가지의 완전히 다른 물질이 자유주의와 좌파에 대한 적대감, 적으로 규정한 대상을 파괴하기 위해 어떠한 일도 서슴지 않겠다는 의지라는 두 가지 공통점을 매개로 결합하여 탄생한 합성물이 파시즘 정권이었다.(333)

김학이는 마르틴 브로샤트의 『히틀러 국가Der Staat Hitlers』의 역자 후기에서 이 책을 혹독하게 비판한다. 새로울 것도 없고, 브로샤트의 입장을 비판하면서도 브로샤트에 의존하고 있고, 브로샤트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지적은 실상 타당해 보인다. 새로운 점이 없고, 밑줄을 그을 것도 없다는 비판은 나같은 파시즘에 대한 문외한에겐 해당되지 않지만, 기술이 반복되고, 간결성이 떨어지며, 지적하고자 하는 입장이 선명하지 않아보이는 점만은 실상 분명한 것 같다. 팩스턴을 읽어갈수록 브로샤트의 중요성이 눈에 띈다. 여기서는 『나치스 민족공동체와 노동계급』을 쓴 팀 메이슨의 해석도 중요하게 인용된다. 모두 파시즘 이해에서는 뺄 수 없는 작가들. 게다가 의도주의, 기능주의, 구조주의를 아우르는 결론은 『히틀러Hitler』를 쓴 이안 커쇼Ian Kershaw의 것. 어떤 의미에서 혼자 새로운 점을 발견하거나 역사를 재구성하기는 어렵겠지만, 팩스턴은 생각보다 많은 학자들의 해석과 주장을 인용하면서 엮어나간다. 그 점은 큰 장점이지만, 자기 해석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점은 좀 약점이다.

파지즘 정권은 권력을 장악한 후, 지도자가 국민에게 약속한 ‘역사와의 특권적인 관계’를 실현해야 한다. 공동체를 통합하고 정화하고 활기차게 만든다. 부르주아 물질주의의 무기력함, 민주주의 정치의 혼란과 부패, 외국인과 외국 문화로 인한 오염으로부터 공동체를 구한다. 좌파가 주장한 소유의 혁명을 회피하고 가치의 혁명으로 대체한다. 타락과 쇠퇴로부터 사회를 구한다 등의 공약을 실현하기 위해 내부와 외부의 적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고, 개인을 완전히 공동체에 귀속시키고, 혈통과 문화를 정화하며, 군비 재무장과 팽창주의 전쟁을 시도한다. 파시즘 정권은 질주하는 힘, ‘영구 혁명’의 인상, 무모하고 사나운 돌격, 소용돌이를 만들어야 했다.(337) 반대로 파시즘이라고 여겨지던 정권은 정상화한 결과 권위주의 정권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카우디요를 자칭한 프랑코는 질서와 안정을 원했고, 당에 동형기구도 입법권이나 행정권을 주지 않았다. 프랑코의 스페인은 파시즘 색채가 없는 군과 정부 관리, 기업가, 지주, 교회가 권력을 장악한 권위주의 정권이었다. 포르투칼을 장악한 카톨릭 은자 성향의 경제학 교수 살라자르는 비파시즘적이고, 자발적으로 비전체주의적이었다.(338-342) 팩스턴은 급진화의 추진력을 당, 열성당원, 대중운동 등 당의 급진파들 즉, 아래로부터 나타났다는 구조주의적 해석, 파시즘 통치의 카오스적 본성에 대한 지적 즉, 국가 권력이 여럿으로 쪼개져서 경쟁하는 현상 등과 함께 가장 확실한 급진화 원동력으로 전쟁을 지적한다. 전쟁을 통한 선순환, 전쟁 도발은 파시즘 체제의 단결과 규율과 폭발적 위력에 불가결하면서, 전쟁이 시작되면 더 극단적 조치가 필요하다는 동의를 대중에게서 얻는다. 히틀러도 무솔리니도 전쟁에 뛰어들었고, 급진화되지 않았던 권위주의 정권도 군사적 측면을 찬미했으나 실제 전쟁을 벌이지는 않았다. 파시즘 치하의 전시 정부는 광기를 마음대로 표출했고, 마침내 통치의 파편화와 원자화가 이루어졌다.(347-358) 급진화가 극에 달한 것이 홀로코스트인데, 이는 히틀러의 강박적 증오 뿐 아니라 이를 도운 수천 명의 하급자 역시 탐구해야 하며, 홀로코스트가 소극적인 행동에서 출발해 점점 광포해졌다. 처음 격리에서 다음에는 추방으로, 추방이 어려워지고, 마다가스카르 계획이 실패하자, 학살이 시작된다. 이때 예행연습으로 일종의 열등한 인간의 제거를 위한 안락사가 먼저 시작되고, 다음에는 아인자츠그루펜이라고 하는 기동학살 부대의 운영, 수백만 소련 전쟁포로의 사망 조장 등을 거치며, 게토를 운영하다가, 마침내 최종 해법Endlösung이 등장한다. 총살, 가스차Gaswagen, 마침내 강제수용소까지.(359-371) 이탈리아의 급진화는 히틀러 독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식민지에서의 인종차별로, 카톨릭 교회가 유대인에게 가지는 모호한 태도로 인해 강화되었다.(376-377) 팩스턴은 그러나 파시즘의 대중 동원이 민주 국가의 대중 동원에 미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378) 이탈리아 파시즘이 급진화한 것은 독일 특공대에 의해 구출된 무솔리니의 살로 공화국에서 였고, 결국 무솔리니는 처형당했다.(381-382) 마지막까지 급진화 한 것은 나치 뿐이었다. 그 핵심은 팽창주의 전쟁이었다. 이런 것이 가능한 것은 국가 공무원들과 사회 주요 권력층 간의 지속적 연대 덕분이었다. 파시스트들은 최후의 광기 속에서 패배를 인정하는 대신 조국까지 포함한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리는 편을 선택했다.(384-386)

개인적으로 가장 실망스러웠던 부분이다. 홀로코스트의 전개 과정에 대해 살펴보려면, 라울 힐쉬베르거의 『유럽 유대인의 파괴 1,2』를 보면 된다. 이 만큼 충실한 내용을 담고 있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책은 없다. 그리고 아인자츠그루펜에 대해서는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의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 있다. 이런 중요한 책들이 언급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방점이 주어져 있지 않다. 이런 연구들은 조심스럽게 살펴보면 사람들을 보여준다. 사실 바로 여기에 팩스턴 연구의 한계 내지는 약점이 보인다. 팩스턴의 연구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더 정확히는 독일인들과 이탈리아인들이 보이지 않는다. 협력자들 그리고 소수일지라도 저항한 사람들, 그리고 방관자들 역시 보이지 않는다. 이 부분 연구가 실상 가장 어렵다고 한다. 데틀레프 포이케르트의 『나치 시대의 일상사』나 밀턴 마이어의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같은 책을 보면 훨씬 도움이 된다. 팩스턴의 파시즘 연구는 어느 지점을 지나면, 대중은 단순한 동원 대상이 되고, 나치에 대한 적극적 협력자도 사실상 수천명으로 줄어들어 버리는 식이다. 의도주의를 비판하면서, 구조주의 혹은 기능주의 쪽으로 방향을 틀지만, 방황하다가 다시 의도주의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바로 앞에 이어지는 정권 장악 과정에서의 타협과 급진화과정과 대학살 즉 홀로코스트에 대한 팩스턴의 서술이 밋밋한 이유는 그가 모더니티와 파시즘의 관계를 명확하게 정리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파시즘은 근대화와 산업화로 인해 소외되고, 낙오하던 사람들의 편을 들고 그들에게 그들의 몫을 주겠다고 거짓말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실상 이 거짓말을 실현시켜려고 고수한 사람들은 실패했고, 이 거짓말을 내던져 버리고 모더니티를 받아들인 사람들 자본과 기득권과 타협한 사람들은 성공을 거두었다. 파시즘은 반근대적이고 때로 매우 낭만주의를 구가하지만, 실상 작동원리와 작동방식은 꽤나 모던하다. 파시즘의 모더니티가 가장 충실하게 구현된 장이 바로 홀로코스트의 장이다. 파시즘은 낭만주의자들에게 근대성이라는 무기가 손에 쥐어지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낭만적 근대성romantic modernity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팩스턴은 다른 시대, 다른 장소의 파시즘 혹은 2차 대전 이후의 파시즘을 다루는 장으로 그의 연구를 마무리 한다. 흔히 수사적으로 파시즘으로 불렸지만, 실상 파시즘이라고 보기 어려웠던 체제들을 하나하나 지적하면서, 비판한다. 1945년으로 파시즘은 사라졌다는 많은 사람의 평가, 파시즘이 1890년대의 문화적 염세주의, 대중의 국민화, 1차 대전의 압박, 전후 처리과정의 자유주의적 민주 국가의 무능력, 볼셰비키 혁명의 산물이라고 보며, 무엇보다 파시즘에 대한 대중의 반감이 파시즘 부활의 가장 큰 장애이고, 1990년대 이후로는 풍요, 경제의 세계화 개인주의적 소비주의, 핵 개발 등이 파시즘을 막는다고 한다. 그러나 파편화된 극우 소집단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게다가 대부분 자신들이 파시즘임을 부인하고.(392-394) 그럼에도 대중 동원을 통해 위기에 처한 집단의 재단결과 정화와 부흥이라는 목적을 위해 자유주의 제도를 포기하려는 운동은 파시즘의 위험을 가지고 있다.(395) 예를 들어 미국에서라면 파시즘은 종교적이고,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배제하면서 반 이슬람적일 가능성이 크다.(396) 1945년 이후 독일에서 극우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의미 있는 집단이 되지 못했고, 이탈리아 사회운동당도 취약하다. 프랑스는 알제리 상실 후, 많은 사람이 프랑스로 이주하고, 국민전선이 형성되어 꽤 큰 세력으로 성장했다. 영국의 국민전선은 취약하다. 1973년을 기점으로 유럽이 구조적 장기 실업 사태에 직면하고 이중 사회로 바뀌면서 이민자에 대한 반대가 커지고, 이민 구성이 변화하면서, 극우세력의 활동이 커졌다. 스킨헤드 현상이 대표적이다. 프랑스의 르펜의 국민전선이 꽤 뿌리내린 편에 속한다.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의 극우정당은 주류 야당이 부재한 상황을 이용해서 정권에 참여했다.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이끈 정부에는 파시즘 정당의 후예인 이탈리아사회운동당이 참여했다. 네덜란드의 핌 포르투완도. 그럼에도 파시즘이나 네오파시즘이라고 부를 근거는 없다. 영국 극우파는 대처의 우경화로 자리를 잃었다. 그리고 대부분 이런 정당은 이민을 돌려보내고 이민 범죄를 소탕하자는 단일 쟁점 운동에 전념한다. 고전적 파시즘의 주제인 시장 자유와 경제적 개인주의에 대한 공격이나, 민주 헌법 체제와 법의 지배에 대한 공격은 없다. 전쟁을 추구하지도 않는다.(398-420) 동유럽의 경우 우선 러시아의 옐친이나 특히 푸틴 권위주의 정권이다.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에 의한 인종청소는 세르비아인들이 그를 버림으로 끝났고, 이 내전에서 크로아티아 쪽의 보복도 작지 않았다.(423-429) 비유럽지역의 경우 남아프리카공화국 칼빈주의자들의 남아프리카기독교국가사회주의운동, 포장마차 파수대 등이 아파르트헤이트의 기원이 되었으나 결국 사라졌다.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 브라질의 살가두와 바르가스는 현대화된 독재라 볼 수 있다.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이 가장 파시즘에 가깝지만, 사유재산제를 위협한 적도 없고, 프롤레타리아적 성격도 강했다. 페론을 파시스트라고 부른 건 실상 미국이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독재 정권들은 파시스트의 외양을 갖춘 민족주의적 인민주의 개발 독재에 불과했다.(430-442) 제국주의 일본도 일본학자들은 위로부터의 파시즘이라고 부르지만, 실상 천황 자신이 기타 잇키 류의 ‘아래로부터의 파시즘’에 종지부를 찍은 데다, 국가가 선택적 혁명을 통해 대중을 통제한, 대중 정당이나 대중 정치가 없는, 국가가 지원하는 상당 수준의 대중 동원을 가미한 팽창주의적 군부 독재로 보아야 한다.(443-449) 또 예속 파시즘, 대리 파시즘, 식민지 파시즘 등으로 불린 칠레의 피노체트나 자이르 등은 외부 지원을 받는 전통적 독재 혹은 폭정으로 보아야 한다.(448-450) 한국의 박정희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은 꽤 아쉬웠다.

어찌 보면 팩스턴의 이 책이 거둔 가장 큰 성과는 비교라는 방법을 채택한 것이다. 비교를 시도하기 위해, 파시즘이라고 확인 된 몇몇 체제만 연구하지 않고, 파시즘과 유사한 경향을 띄는 거의 모든 정치체제의 흥망성쇠를 간략하게 다루면서, 이를 독일의 나치와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유일하게 급진화된 두 사례와 비교하고 있다. 이런 연구방법은 비교사 혹은 역사사회학의 비교 방법론에 가깝고, 정치학에서 체제를 비교하는 비교정치의 방법과 흡사하다. 다만, 조작적 정의를 통해서 비교하기에는 책의 말미에서 제시하는 정의가 상대적으로 너무 기술적descriptive이다. 그럼에도 논의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후안 린츠Juan Linz의 권위주의에 대한 정의를 가져와 이를 파시즘과 비교한다거나 전체주의에 대한 언급을 한나 아렌트만이 아니고, 프리드리히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의 정의를 가져 온 점은 높이 사야 한다. 비록 독재에 대한 언급이 다른 개념들에 비해 허술하고, 중첩적이긴 했으나, 시도 자체를 폄하할 일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팩스턴의 파시즘 연구는 파시즘이나 나치즘에 대한 특별하고 새로운 통찰을 제시해 준다기 보다, 파시즘의 경계를 그려주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흥미를 끈 부분은 미국과 정치 종교에 대한 이야기였다. 서두에서 드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를 인용하면서 “독립적 사회 엘리트층이 없는 상태의 민주주의에서 다수의 힘이 사회적 압력을 행사하고, 개인의 순응을 강요”하는 점에 우려를 표명하는데, 미국 역시 파시즘의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1845년의 토착아메리카당, 1850년대의 순아메리카당 이래 반민주적 외국인 혐오 운동이 있었고, 1930년대 프로테스탄트 복음 전도사 였던 제럴드 B. 윈로드Gerald B. Winrod가 이끌고 공공연히 히틀러를 지지한 ‘기독교 신앙 수호자들Defenders of the Christian Faith’와 그 휘하의 흑색 군단Black Legion, 윌리엄 더들리 펠리William Dudley Pelley의 은색 셔츠단Silver Shirts, 퇴역군인 중심의 카키색 셔츠단Khaki Shirts 등이 있다. 아메리카나치당의 조지 링컨 록웰George Lincoln Rockwell. 1920년대 부활한 KKK단. 1930년대 찰스 E. 커플린 목사가 공산주의, 증권과 금융시장 반대, 현금 사용 반유대주의 라디오 방송으로 4천만의 청취자가 있었고, 1936년 잠시나마 그의 연합당 후보인 윌리엄 렘케William Lemke가 루스벨트를 이길 것처럼 보였다. 부자를 조롱한 휴이 롱Huey Long 루이지애나 주지사. 근본주의 기독교 전도사로 커플린과 롱을 위해 일한 제럴드 L. K. 스미스는 유대-공산주의 음모론을 주장했고, 강력한 미국적 신앙심과 토착주의에 뿌리를 둔 증오 정치는 내부의 적에게 폭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퇴역군인의 활동은 크지 않지만, 911테러 이후 애국적 전쟁은 시민적 자유를 축소시켰다. 미국 파시즘의 상징은 스와스티카가 아니라 성조기와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 그리고 국기에 대한 맹세이다. 이들은 수정헌법 1조, 정교 분리, 총기 소지 제한, 국기 모독 행위, 동화되지 않는 소수 집단, 예술의 자유를 포함한 이단적이고 유별난 행위를 겨냥할 것이다. 미국의 일부 흑인 민족주의자 중에 파시즘 경향도 보인다.(450-453) 문제는 종교가 파시즘의 기능적 등가물 역할을 할 것인가? 미국에서 기독교 근본주의가, 힌두교 근본주의나 이슬람 근본주의는? 물론 성직자에게 한계가 있기에, 페인Stanley G. Payne은 세속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유럽의 경우 반교권주의 성향이었지만, 일부에선 종교에 기반을 둔 파시즈도 있었다. 특히 종교적 정체성이 국가적 정체성 보다 강한 문화권도 있다. 여기서 극단적인 종교 근본주의는 국가 근본주의를 대체한다. 그러나 이들을 파시즘이라 부르지 않는 건, 자유주의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이스라엘에서 종교 파시즘이 형성될 가능성도 있다.(454-456)

어쩌면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다. 미국 파시즘의 성격. 미국에서 파시즘적 극우적 경향의 기원 혹은 흐름. 그리고 이 흐름은 미국의 역사에 새겨진 인종차별주의와 기독교에 뿌리밖고 있다. 그것은 서부 개척시대의 프론티어 정신을 이끌었던, 그리고 미국의 선교 열풍을 이끌었던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라는 것이, 파시즘 지도자들이 말하는 역사와의 특권적 관계와 매우 닮았다는 것. 이런 사고방식이 국내로 들어오면 한국적 선민사상으로 변화한다. 게다가 역사 오늘날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트럼프를 지지하듯이. 이때 미국에서는 파시즘적 경향을 보여주는 상징이 성조기와 십자가로 드러날 것이라고 한다. 실제 팩스턴이 예견한 파시즘적 경향이 공격할 미국적 가치 대부분은 트럼프가 건드리겠다고 공언한 바로 그 부분이다. 미국의 극우파와 종교적 친화성에 대해서 그리고 그 상징체계에 대해서 침투와 변화과정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로버트 퍼트남이 『아메리칸 그레이스American Grace』에서 교파에 따라서 교회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자기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서 이를 강화하는 교회 혹은 교파를 선택한다는 해석을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제 교회는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유지하고 강화시키는 도구이자 수단으로 기능한다. 게다가 2차대전 후 참전군인들의 대학 진학과 중간 계급의 형성 그리고 보수화가 기독교의 한 세대를 유지시켰다는 주장에도 주목해야 한다. 바로 여기서 한국 기독교의 정치적 보수성과의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겨난다. 선교사들의 보수성과 전쟁의 경험, 기독교인의 대거 월남, 원조와 미군 등 해방과 전쟁을 겪은 세대에게서 나타나던 한국 기독교의 정치적 보수성은 그 이후 세대에서 다른 방식으로 미국과 연계되면서 강화된다. 기독교의 주요 세대별로 동시대의 미국의 보수 우파적 기독교와 교류하면서 보수성을 강화시켜 왔다. 이는 어쩌면 결과적 이거나 선택적 친화성일지도 모르겠다. 보수적 기독교가 들어와서 기독교를 통해 보수를 전파시켰다기 보다.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의 주류가 보수였는데, 그게 한국 사회 전체적인 기조와 맞았다고 할까. 식민지와 전쟁을 통해 형성된 극우적이면서 반동적인 냉전 국가의 국민에게 전세계 그 어디보다 군사화된 사회에 보수적, 극우적, 때로는 군사화된 기독교가 쉽사리 확산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종교적 회심만 하면 되지, 경제적, 사회적 회심까지 필요하진 않다. 게다가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진보적일 것처럼 생각되는 대학생 혹은 청년 선교단체가 실상 매우 보수적이고, 위계적이며, 규율적이고, 성차별적인 것은 이들에게 전파되던 미국적 시스템도 보수적이고 규율적이었는데, 이를 받아들이는 한국 사회의 환경도 보수적이고 규율적이었다는 데 있다. 거기서 보수적이고, 규율적이며, 때로 극우적인 기독교가 동태적으로 형성된다. 게다가 여기에 촛대가 서진한다는 그래서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여기까지 왔다는 새로운 선민사상과 결합된 ‘공산주의와 싸우고 하나님 잘 믿어서 복받았다’는 한국 특유의 축복론 까지. 어찌보면 그 결과가 지금 광장에서 보이는 태극기와 성조기, 목사 가운과 십자가의 기묘한 결합이 아닐까. 그리고 그 핵심에는 한국 사회의 군사화 혹은 군대화라는 1970년대 적어도 1980년대까지 이어진 기조와 기독교가 아주 유사하게 움직였다는 점이다. 군대에는 주적이 있고, 기독교에는 사탄과 적그리스도가 있다. 이 둘은 여러가지 면에서 형태적 구조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기독교에 젊은 세대가 공급되지 않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1990년대 이후 아직까지는 모자라지만 사회가 이전 보다 훨씬 탈군사화, 탈군대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부족하지만. 어쩌면 일베의 존재야 말로 사회의 탈군사화 및 탈군대화에 저항하는 군대 혹은 군사 지향의 게토인지 모르겠다.

결론적으로 파시즘이란 하나의 합성물이다. 단순한 자본주의 도구라기 보다 기업과 파시즘은 상호 이득을 찾는 동반자였다. 파시즘을 정신분석으로 해석하기도 곤란하다. 파슨스는 파시즘이 경제사회적 불균등 발전이 만들어낸 극심한 상실과 긴장이 원원이라고 보았고, 에른스트 블로흐는 비동시성의 이론을 제시했다. 도시화와 산업화가 만들어낸 원자화된 대중사회가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고, 강제 저축과 노동력 통제를 통한 개발 독재로 보기도 한다. 립셋은 옛 중간 계급의 분노에 근거한 중간계급의 극단주의라 말했다. 파시즘을 전체주의의 아종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독일에서는 여전히 그런 견해가 있다. 전체주의로 이해하는 과정에서 스탈린과 히틀러의 차이가 때로 두드러져 극복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특히 히틀러의 무질서를 이해하기 어렵다.(464-477) 정치 종교라는 오래된 개념은 파시즘이 신도를 끌어들이고 흥분시키는 과정을 보여주고, 사회와 윤리의 세속화가 빚어낸 진공 상태를 파시즘이 채웠다고도 설명한다. 종교와 파시즘은 화해불가능해 보여도, 때론 협력했고, 나치 독일은 기독교의 파괴적 모방이기도 했다.(477-478) 파시즘과 다른 것들을 나누는 경계는 파시즘이 민주주의 실패에서 내정 정화와 외적 팽창이라는 목표를 향해 국민적 단결을 강화했다는 점이다. 파시즘이 군사주의를 고취했으나 대중의 열광을 끌어낸 그들은 군사 독재자는 아니었다. 더욱이 사적 영역을 허용하는 권위주의와도 다르다.(482-484)

마지막까지 오는 과정에서 여러번 망설였지만, 역시 나름 정리해 둘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지금까지의 파시즘 연구를 집대성하진 못해도, 끌어모아두기는 했기 때문이고, 꽤나 효과적인 정의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정의의 엄격성 때문에 파시즘에 속하는 것은 매우 적지만. 비교라는 관점을 제시하는 것도 꼭 기억해 둘 부분이다. 다소 모호한 부분이 없지 않으나.

어떤 의미에서 마지막에 슬쩍 언급하는 정치종교political religion이라는 아직 학계에선 뜨거운 주제에 대해서도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길게보면 1세기 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정치와 종교의 언어는 끊임없이 교차해 왔다. 정치와 종교는 서로 다투고, 서로 닮으면서 자기 정당화의 논리를 펼쳐왔고 지배를 강화해 왔다. 특히 수많은 정치학의 개념들의 기원은 놀랍게도 신학적이다. 아타나시우스 신경에서 직접 끌어오거나 초기 삼위일체 논쟁의 구조를 그대로 옮겨서 왕권 강화에 활용하기도 한다. 아마도 현대에 이 점을 가장 적나라하게 지적한 것은 미셸 푸코의 ‘사목 권력’일테지만. 파시즘의 정치종교적 특성이란, 결국 파시즘이 가장 적나라하게 정치의 종교성을 드러내고 스스로 기독교를 파괴적으로 모방했기에 그 숨겨진 특성이 드러났을 뿐이다. 우리 히틀러에게 바치는 기도문도 있었으니. 그러나 이런 속성은 종교에 늘 있는 엄연한 한계이고 특성이다. 나는 점점 기독교가 원래 극우나 파시즘과 친화적이지 않은가 하는 느낌이 들어서 이 부분을 들여다 보기 겁이난다. 요즘 내 심정은 딱 이렇다. 그런데, 진짜 그러면 어쩌지? 당분간 이 부분을 좀 더 들여다 보려 한다.

2017. 2. 16.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 이 글의 저작권은 ⓒFELIVIEW.COM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FELIVIEW
FELIVIEW
felixwon.lee@gmail.com

Must Read

에른스트 H. 칸토로비치, 『왕의 두 신체』(7-1).

0
튜더 왕가의 가계도. 앞쪽에서는 아담과 이브로부터의 기원과 노아의 방주도 등장한다. 중간에 리처드 3세에서 단절이 있고, 그 아래로 헨리 8세가 이어진다. British Library, Kings MS 395, fols. 32v-33r. Ernst 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