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여성, 『함락된 도시의 여자』.


저자도 배급을 받고, 동원되곤 했던 일이다. 잔해를 치우는 일을 하던 여성을 독일어로 Trümmerfrau라고 한다. 폐허(잔해)-여성 정도의 뜻이다. 쓰레기를 골라내고, 그 안에서 사용할 수 있는 벽돌이나 철근 따위를 모아서 다시 집을 지었다. 독일 특히 베를린 곳곳에 Trümmerfrauen Denkmal이 있다. 사진은 서부의 코블렌츠.

익명의 여성Anonyma, 『함락된 도시의 여자:1945년 봄의 기록Eine Frau in Berlin』, 염정용 역, 마티, 2018.

설 연휴에 서너 권의 책을 읽었다. 마지막날 처가에 다녀오면서 가고 오는 길 내내 이 책을 잡았고, 거실의 낡은 소파에 걸터앉아서도 책장을 넘겼다. 무심하게 무심하지 않은 시간이 지나가는 동안 무심할 수 없는 이야기를 무심한 듯 적어낸 이야기를 읽었다. 부러 거리를 두고 말하는 건 아마도 살아나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책을 읽다가 문득 돌아가신 외할머니 이야기가 생각났다. 해방되었을 때, 북쪽이 있었던 이들은 로스께가 그렇게 무서웠다고 한다. 여자라면 나이를 불문하고 달려들던 로스께. 이 책에서 처럼 그렇게 시계를 빼앗아갔다고 한다. 소련군을 그들은 로스께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모두 알고 있듯이 그건 소련군 로스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미군도, 그리고.

물을 길으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 폭탄흘 피해 뛰어든 지하실에서 “오, 주여, 주님…” 2년 전 루르의 어느 도시 지하실에서 들었던 기도를 떠올린다. 어둠 속에 양초 한 자루가 켜져 있었고, 여자들이(남자들은 거의 없었다) 고통을 당하는 로사리오의 기도를 올렸다. “…우리를 대신하여 채찍질 당하신 주님…” 그리고 주기도문과 아베마리아가 반복되는데, 티베트에서 마니차를 돌리며, ‘옴마니반메훔’을 외는 느낌이 든다. 베를린에서 생각보다 자주 기도 비슷한 걸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이기도 하고, ‘오 주여, 주여’하는 신음이 새어나오기도 하지만, 본인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를 것이며, 판에 박힌 공허한 구절에 매달리고, 아무런 의미 없이 기계적으로 되뇔 뿐. 저자는 ‘궁할 땐 기도를 올리자’는 말을 ‘궁하면 구걸을 하자’는 말만큼이나 경멸한다. 좋은 시절에는 기도 따위를 생각지도 않던 자의 입에서 더듬더듬 새어 나오는 기도는 한심한 구걸 행위일 뿐. 어두운 지하실에 울리는 신음 같은 소리가 정말 기도 소리인지 아닌지 결코 밝히지 못할 것이지만, 우리의 근심과 불안이 안겨주는 압박과 고난 속에서 창피해하지 않고 쉽게 기도를 떠올리는 자는 행운아이자 은총받은 자이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아직은 할 수 없다, 아직까지는 그것을 거부한다.(46-47)

아수라를 지나온 이에 담담한 고백에 대해선 이렇게 든 저렇게 든 평가할 것이 못된다. 기록을 읽는 자들에겐 그럴 자격이 없다. 악착같이 살아냈기에 살아났을 것이다. 나는 그 마음을 이해할 것도 같다.

요즘 들어 남자에 대한 나의 감정, 아니 모든 여자의 감정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남자들이 안됐고, 너무나 비참하고 무기력해 보인다. 나약한 성性이 된 남자들. 여자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움튼 일종의 집단적인 환멸이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다. 여자들을 지배하던 남자들, 강한 남자를 찬미하는 나치 세계가 흔들리고 있다. 나아가 ‘남성’이라는 신화가 무너지고 있다. 지금까지의 모든 전쟁에서 남자들은 조국을 위해 죽고 죽일 수 있는 특권이 남자에게만 있다고 주장해왔다. 이 전쟁에서는 우리 여자들도 그 특권에 가담한다. 전쟁은 우리를 변화시켰고, 우리는 담대해졌다. 이 전쟁이 끝나면 수많은 패배들과 더불어 ‘남자들’의 패배도 찾아올 것이다.(58)

베를린에 포탄이 쏟아지고, 마지막 남은 방어선이 무너져서, 마침에 식량 저장고가 털리고, 도처에서 약탈과 혼란이 자행되던 마지막 그 순간. 아직 러시아 군이 본격적으로 삶을 지배하기 바로 그 직전의 기록이다. 이 전쟁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변화시켰을까?

“빌어먹을!” 큰 소리로 욕을 하고 나서 나는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아주 빤한 결심. 다른 온갖 늑대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한 마리 늑대를 불러들여야 해, 장교를. 가능한 한 계급이 높아야겠지. 지휘관이든 장성이든, 내가 데려올 수만 있다면. 이 머리와 어설픈 외국어 실력을 어디다 쓰겠어.(84)

저자는 러시아 군인 장교를 찾아 나서게 된다. 러시아어를 조금 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구잡이로 밀어닥치는 러시아 군인들을 감당해 낼 수 없었다. 이런 살려는 몸부림을, 전장에서 피어난 동지애나 사랑이라고 애틋하게 표현할 순 없잖은가. 새삼, 『제국의 위안부』가 폭력으로 다가왔다.

요즘 나는 러시아어를 약간 할 줄 아는 것이 나에게 행운인지 불행인지 깊이 생각해보곤 한다. 다른 이들이 모르는 것을 알 수 있긴 하다. 러시아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저 거친 짐승의 소리인, 이해할 수 없는 외침이 나에겐 인간의 말로 들린다. 푸시킨과 톨스토이의 다양하고 운율이 깃든 문장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물론 끊임없이 불안하기는 하지만(아나톨을 만난 후로 약간 줄어들었다), 나는 그들과 인간 대 인간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어느 정도 괜찮은 인간을 최악의 인간과 구분하며, 무리에서 개인을 분류해내고, 일부는 충분히 이해하기도 한다. 전쟁 이후 처음으로, 내가 증인으로서 자격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 도시에는 그들과 말할 줄 아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 그들의 언어를 한 마디도 무르는 사람들은 얼마나 편할까. 이 병사들이 그저 낯설기만 할 테고, 감정은 저 깊이 묻어버린 채 인간이 아니라 단지 야수이고 짐승이라고 믿어버리면 그만일 테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그들이 우리와 같은 인간임을 알고 있다.(99-100)

저자는 1930년대에 러시아를 다녀온 적이 있다. 혁명의 기운이 넘실거리던 러시아, 아니 소련. 저자도 다른 이들처럼 사회주의를 동경했지만, 그 숨막히는 체제에서 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독일로 돌아온다. 그래서 알게 된 러시아어와 혁명에 대한 이해, 그 이해가 고통이 된다. 그들이 인간임을 부정할 수 없는 고통.

그 해병은 나에게 공손하게, 아주 천진난만하게 간청했다. 자신에게 처녀를 한 명 구해주면 좋겠다고. 단정하고 행실 바르며, 착하고 사랑스러워야 한다고 했다. 그는 그 여자에게 먹을 것도 가져다주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그 소년을 빤히 쳐다보며 웃음을 터뜨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뻔뻔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제 그들은 정복한 향락의 대상에게서 단정함과 순박함과 고귀한 성품까지 요구한다! 여자들이 그들과 동침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요건에는 이제 경찰의 신원 보증서만 남은 셈이다!(143-144)

저자가 약간의 러시아어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러시아 병사들은 그를 찾아온다. 독일 여자를 원하는 러시아 병사들. 그들 중 어떤 병사는 단정하고, 행실 바르며, 착하고, 사랑스러운 여자를 찾는다. 그리고 먹을 것을 제시한다. 실제로 저자의 러시아 군인들 덕분에 많은 사람이 먹고 살아남았다.

나는 자발적으로 그에게 몸을 내주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은 동정심 때문인가? 아니면 욕망 때문인가? 말도 안 된다. 욕망은 있을 수 없다. 나는 이제 남자라면 지긋지긋하다. 내 평생에 자발적으로 그런 짓을 바라게 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베이컨, 버터, 설탕, 양초, 고기 통조림을 얻기 위해 이 짓을 하는가? 어느 정도는 그렇다. 그전에는 미망인이 저장해둔 것들을 나눠 먹어야 해서 몹시 괴로웠다. 이제는 내가 소령을 통해 얻은 것을 그녀에게 나눠줄 수 있어 기쁘다. 내가 얻어 온 것들을 먹을 때는 더 홀가분하게, 죄책감 없이 먹을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소령이 좋기도 하고, 그가 남자로서 나에게 원하는 것이 적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괜찮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는 자주 원하지 않는다.(145-146)

저자는 필사적으로 자신과 자기를 분리한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으려는 것이다. 고통 속에서 자기 정신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자기객관화를 통해 숨돌릴 여유를 찾으려는 것이다. 그래서 일까. 그렇게 얻게 된 음식물을 술과 담배를 그녀는 이웃들과 거리낌 없이 나눈다. 아무 것도 남겨두지 않는다. 비축하지 않는다. 나누어 먹으면 죄책감이 덜해진다.

아내를 덮치려던 러시아 병사를 살기 띈 얼굴로 쫓아낸 남편의 이야기는 딱 한 번 등장한다. 대부분은 이성적이고 냉정하게 대응하고 어떻게든 무사히 빠져나가려고 애쓰며 여자들은 남편의 편을 들어주고, 어떤 남자도 여자를 정복자에게 내준다고 체면을 구긴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었다.(162) 독일 여자들은 러시아 병사들에게 아이를 죽인 독일군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규군인지 친위대인지 확인한다.(165) 그러나 그들은 펌프장에서 말한다. “우리 군인들도 그곳에서 아마 별반 다르지 않았을 거야.”(165)

하지만 지금 우리는 성폭력을 집단 경험으로 여긴다. 전부터 여러 차례 짐작했고 염려했던 일이다. 성폭력은 이제 사방천지에서 일어나며, 심지어 협상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 같은 집단적 강간 경험은 집단적으로 회복되는 중이다. 여자들은 자신의 강간 경험과 괴로움을 말함으로써 다른 사람도 그것을 말할 수 있게 하고,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토로하며 서로를 지지한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이 둔한 베를린 소녀보다 섬세한 여자들이 무너지지 않는다거나 남은 생애 동안 고통받지 않는다는 소리는 아니다.(181)

남자들은 물을 길으러 가야 하거나 그 외 생존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할 때 그 점을 핑계 삼는다. 여자들은 사악한 적군으로부터 남자들을 숨겨주고 보호해주려고 사력을 다한다. 적들이 여자들에게 무슨 짓을 더 벌이겠나? 여자들에게는 이미 온갖 짓을 다 했는데. 그래서 여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앞장서서 일한다. 그래, 응당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 쳐도, 역시 꺼림칙하다.(183)

전쟁과 패전 그리고 점령을 겪어나가면서도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공고하게 변하지 않는다. 남자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근거로 여자를 방패막이 삼아 피해다닌다. 심지어 여자들은 이미 모든 일을 당했다고 말하면서, 여자들도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만, 어딘가 꺼림칙하다. 그리고 그런 꺼림칙함은 여자들끼리 모였을 때의 대화 속에서 드러난다. 여자들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모두들 만나면 몇 번 당했느냐고 묻는다. 성폭행의 경험을 집단화하면서 생존의 길과 치유의 길을 모색한다. 이 대화에는 남자들이 설 자리가 없다. 전쟁이 끝나고 남자의 설 자리가 좁아지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하다.

독일 민족에게는 빨치산 기질이 없다. 우리는 영도와 명령을 필요로 한다. 종일 달리는 소련 횡단 열차에 몸을 싣고 여행 중이던 어느 날, 한 러시아인이 가볍게 농을 던졌다. “독일 동무들은 미리 입장권을 끊지 않으면 절대로 역사 안으로 돌격하지 못한다네.” 좋은 뜻으로 풀이하자면, 독일인은 불법 행위를 딱 질색한다는 것이다. 독일 남자들은 지금 잔뜩 겁을 먹었다. 우리의 이성은, 우리가 현재 정복당했음을, 조금이라도 항의하거나 반항하는 행위가 결국 괴로움만 더할 뿐이라는 현실을 알려주고 다른 감정을 억누른다.(189)

인간이란 자기 존재를 어떻게 해서든 설명해내려는 존재다. 패배와 무기력을 설명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물이 나온다는 소식에 덧붙일 말이 하나 있다. 주민 공동체, 건물과 방공호에 모여 지내던 사람들 간의 유대는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이제는 예전처럼 고상한 대도시 스타일로 돌아가, 각자 자기 집에 틀어박혀 사귈 사람들을 신중하게 고를 수 있게 된 것이다.(243)

약간의 물과 조금의 배급식량 만으로도 공동체는 해체되어 버린다. 그들 스스로 건물공동체(210)라 부른지 꼭 일주일 만이다. ‘절대공동체’가 해체되는 것도 너무나 당연하다. 애초에 그런 공동체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말했다. “제 처지가 어떤지 알게 되어 차라리 다행이에요. 오래전부터 이 집에서 음식을 한 입만 먹어도 속이 편하지 않았어요. 지난주에는 내가 러시아 병사들에게서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어서 기뻤죠.” …… 고아는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다. 홀로 지내는 여자의 삶이 가장 쓰라릴 때는 가족처럼 지내다가도 내 존재가 방해가 되고 부담이 되고, 한쪽의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다른 쪽의 불만을 사서 결국에는 그들의 알량한 평온을 위해 내쫓길 때이다. 아무리 익히 알고 있다 해도, 지금 이 글을 적고 있는 페이지는 눈물로 얼룩진다.(281)

러시아 군인이 저자에게 음식물과 술과 담배를 가져다 줄 때는 함께 배불리 먹고 흥청거리다가도 이제 그럴 가능성이 없어지자, 썩은 감자 한 알도 아끼게 된다. 불과 일주일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러시아 군인과 놀아났다고 도덕적인 비난을 퍼붓지 않은 것만으로도 한국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일이 한국에서 였다면 분명. 정조가 어떻고, 도덕이 어떻게 외쳐댔겠지. 감자 한 알, 고구마 한 조각에 목을 매면서. 새삼 인간의 얄팍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저자의 애인 게르트가 돌아왔다. 약간의 식량을 가지고. 그동안 함께 지내던 미망인과의 대화는 그를 소외시켰다. 성폭행을 희화화시켜서 하는 말들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기름진 음식을 먹자 몸이 달아올랐고 기분도 좋아졌지만, 밤이 되자 게르트의 팔에 안긴 몸이 얼음처럼 차가워졌고, 그가 놓아주었을 땐 기쁘기까지 했다. 남자를 받아들일 마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낮 생활은 불규칙했고, 밤 생활은 불안했다. 둘의 사이에는 끊임없이 갈등이 생겼다. 저자 말없이 앉아있으면 게르트는 소리를 질렀다. 최근 몇 주 동안 겪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자 언쟁이 벌어졌다. “너희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암캐로 변해버렸어, 이 건물의 모두가 말이야. 정말 모르는 거야?” 그는 역겨워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너희와 어울리는 게 끔찍해. 너희는 그 모든 가치 기준을 잃어버렸어.”(321) 게르트에게 이 책의 원고인 일기장을 보여주었지만, 그는 읽으려 들지 않았다. Schdg.라는 약어를 가리키며 무슨 뜻인지 묻는다. 저자는 웃으면서 답한다. “뭐, 당연히 겁탈Schädung을 뜻하는 거지.“ 그는 제 정신이 아니라는 듯 쳐다보다가 말을 잊지 않았고 결국 떠나갔다.(322-323)

그 누구도 비난하고 싶지 않다. 만일 이들이 만나지 못했다면, 애틋하고 아름다운 추억의 사랑이야기로 남았을 런지 모른다. 세번째는 아니 만나는 것이 좋았을 인연일지도. 그러나 차라리 만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결국 게르트의 입에서 암캐와 가치 기준이라는 말이 나왔고. 저자는 예의 그 무심한 희화화로 대답했다. 그렇게 답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테니까. 접점이 없는 건 어찌보면 당연하다.

기 드 모파상의 소설 「비곗덩어리」가 떠오른다. 그때는 프러시아(독일)에 프랑스가 패했을 때, 비곗덩어리에게 음식을 구걸하던 이들, 그들의 강요에 못이겨 프러시아군 장교와 자고 온 그녀에게 쏟아지던 경멸과 비난. 소설은 풍자가 아니라 현실이었고, 인간은 참혹하다.

2019. 2. 7.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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