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린 감독의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한 장면이다. 타파스에서의 학살에 자신도 뛰어들어 온 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스스로 더러움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스콧 앤더슨Scott Anderson, 『아라비아의 로렌스Lawrence in Arabia: War, Deceit, Imperial Folly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Middle East』, 정태영 역, 글항아리, 2017(2013).
데이비드 린 감독의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본 기억이 어렴풋하다. 지금은 멀티 플렉스로 바뀐 대한극장이 아직 넓은 70mm 스크린을 자랑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쇠락의 기미는 이미 완연했고, 곧 헐리기로 한 탓인지, 극장 구석구석은 낡고 비좁았다. 넓은 스크린에 비추는 필름을 볼 기회는 이번이 마지막이리라고 생각하면서 보았던 기억이 난다. 우물에서 로렌스(피터 오툴)와 셰리프 알리(오마 샤리프)가 만나는 장면, 사막 끝에서 작은 먼지 같은 것이 일어나 달려와 만나던. 실은 그 장면 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어제 종일 책을 읽고서 200쪽 정도 남았을 때, 아내와 옛 영화를 다시 보았다. 이번에는 유투브. 예전에 뭘 보았나 싶었다. 아카바 전투, 데라에서 겪은 고문(스콧 앤더슨에 의하면 강간), 타파스의 학살, 다마스커스 함락과 시청의 아랍의회, 터키 군 병원 장면까지 모든 것이 생생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제국주의 영국의 영화를 상징하는 인물이니 그들에겐 익숙했겠지만, 나는 그 맥락을 이 책을 읽고 비로소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데이비드 린 감독이 데라 사건 이후의 로렌스를 전형적인 양극성 장애(조울증)와 감추어진 동성애자로 그린 것도. 『지혜의 일곱 기둥』이 다훔에게 헌정된 것도. 다시 보니 정말 걸작이었다. 내 기억엔 우물에서 만나는 장면과 다마스커스 시청의 아랍의회만 남아있었는데. 스콧 앤더슨이 종종 이 영화를 인용하는 이유도 대략은 알 것 같다. 데이비드 린이 첫 장면에서 비극적 인생의 마지막과 장례식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유도 이제 비로소 조금.
로렌스는 아무에게도 제대로 된 관심을 못 받았기 때문에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될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르느라 유럽 전역이 거대한 도살장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중동 전장의 위상은 지엽적이었다. 그 중동에서 로렌스가 간여한 아랍 반란이란, 로렌스 자신의 표현처럼 “부차적인 문제 중에서도 부차적인 문제”였다.(38) 어쩌면 여기에 이 모든 것의 해답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랍 반란과 중동이 나머지 세상 전부와 비교할 수 없는 만큼 중요해 지지만. 영국이 중동을 무시하자, 프랑스와 독일 등 열강 역시 중동을 무시했다.(39) 책은 미국의 스탠더드 오일 출신의 윌리엄 예일, 독일의 첩보원 쿠르트 프뤼퍼, 팔레스타인의 첩보 조직을 운영했던 아론 아론손을 교차하면서 이야기를 전개해 흥미를 더한다. 이런 젊은이들인이나 모험가들이 활동할 수 있었던 것도 사람들이 아라비아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석유 탓인지 조금이라도 움직임이 있으면 모두들 주목하는 땅이 되었지만.
1890년 빌헬름이 비스마르크를 축출하고 권력을 독차지하자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철의 재상 비스마르크의 통제력이 사라지고 궁정 아첨꾼과 프러시아 군부에 둘러싸이게 된 빌헬름은 피해의식과 우월주의에서 비롯된 대단히 치명적인 국가주의 신화를 바탕으로 자신과 국가의 힘을 키웠다. 역사상 독일은 다른 나라들의 술수 탓에 응당 누려야 할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으며, 이제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이와 같은 거대한 부조리를 해소할 때가 되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77) 전쟁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피해의식과 우월주의, 국가주의 신화, 부조리의 해소, 이런 몇 개의 단어들만 떼어놓고 보면, 빌헬름 2세와 아돌프 히틀러에게서 어떤 차이를 발견할 수 있을까. 그리고 또 현대는.
T. E. 로렌스를 아주 특이한 인물로 만들어 낸 것은 그의 젊은 시절이었다.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지만, 그는 고통을 이겨내는 훈련에 익숙한 인물이었다. 데이비드 린 감독의 영화 곳곳에서 때론 매저키스트로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여러 특성들은 대부분 젊은 시절 형성된 것이었다. 카르케미시 근처의 제라블루스에서 그는 훗날 『지혜의 일곱 기둥』을 헌정하는 다훔을 만난다. 둘은 연인이라는 소문까지 나게 되는데. 그는 여기서 아랍을 이해하려는 서구인으로서의 모습을 드러낸다. “다행히 이 지역은 외국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습다. 프랑스가 얼마나 심각한 파괴를 야기하는지, 미국 역시 그에 못지않게 어떤 악영향을 미치는지 목도하셨다면 다시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실 겁니다. 유럽에 물든 아랍의 타락상은 참담하기 그지없습니다. 그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은 원래 상태의 아랍이 천배는 낫습니다. 이곳에 오면 배울게 더 많은데도 불구하고 외국인들은 언제나 가르치려듭니다.”(84-58) 스콧 앤더슨의 말대로 고고학자로선 이해할 수 없는 말이지만, 그가 자신이 살던 그곳 영국의 소수자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스콧 앤더슨은 이를 확정하지는 않지만, 그의 남다른 시선에 관심을 둔다.
아론손이 영향력 있는 인물로 부상한 것은 그가 시온주의를 토대로 추상적인 정치적·종교적 주장을 내세웠기 때문이 아니라 농업이라는 순전히 실용적이고도 일상적인 안건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당시 중동에서 가장 뛰어난 농학자로 인정받고 있던 아론손은 37년의 생애에서 31년을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았고, 초목으로 뒤덮였던 과거의 땅을 되살리겠다는 목표 아래 작물과 나무와 토양에 대해 광범위한 과학 실험을 진행했었다. 특히 시온주의 운동의 고상한 이념과 별개로,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돌아오려면 무엇보다 식량이라는 전제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아론손은 팔레스타인에서 사람들이 먹고살 방도를 알고 있었다.(109-110) 루마니아 유대인의 후손 아론 아론손은 초창기 정착한 인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기술인 농학자였다. 요즘도 생각하지만, 농학이야 말로 최첨단 학문인 동시에 가장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학문이다. 지금도 세계 인구의 대부분은 굶주리거나 굶주림을 간신힌 면한 상황에서 살아나간다. 그러나 그는 농학자 출신으로 현지에 뿌리내린 채 첩보 조직을 운용할 수 있었지만, 바로 그랬기 때문에, 시오니즘 정치가들과는 갈등하고 다른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유럽을 무대로 활동하던 차임(하임) 바이츠만과는 다른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러고 보니 바이츠만은 화학자였다.
역사를 살펴보면, 비교가 안 될 만큼 압도적인 무력을 보유한 측이 우여곡절 끝에 승리의 문턱에서 패배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현상의 원인은 대체로 세 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첫째, 오만이다. 군사적 또는 문화적 우월성에 대한 과심으로 상대방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은 것이다. 둘째는, 정치적 방해, 마지막 셋째는 캄캄한 터널 속의 조그만 점처럼 출구에만 집중하는 협소한 시야다. 특히 마지막은 군사 전략가에게서 나타는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더 많은 병력이나 화력을 동원하면 쉽게 끝날 상황에서 괴이한 해법을 내놓는 식다. 1915년초, 영국군은 이 세 가지 원인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끔찍한 패배를 맞기 위해 나아가고 있었다.(190) 스콧 앤더슨의 영국군의 선택을 이렇게 평한다. 다르다넬스 해협을 장악하기 위해 뛰어든 갈리폴리 전투는 처참한 실패로 끝난다. 카이로의 로렌스 등이 밀고 있던 알렉산드레타 상륙 작전은 전쟁 이후 시리아에서의 권리를 확보하려는 프랑스의 반대 또는 방해에 막혀 번번이 좌절된다. 이 전투의 사상자는 영국군만 25만, 터키군도 20만이 넘는데, 이 전투에서 훗날의 케말 아타튀르크, 즉 무스타파 케말 파샤가 등장한다. 그는 중령이었다. 1차 세계 대전에서 희생자를 기록할 때, 그 숫자에 놀라게 된다. 전투 하나 전역 하나에서 수십만, 수백만이 죽어나간다. 지금 같으면 도저히 수행할 수 없는 전쟁이다. 그런 전쟁터로 사람을 모아서 보낼 수 있는 국가란 어떤 존재인 걸까.
이것은 태초부터 전쟁을 벌여온 인류와 그들이 세운 국가가 직면해온 문제로, 보통은 끔찍한 결과를 낳곤 했다. 그동안 잃어버린 생명과 허비된 재화를 떠올릴 때 전쟁이 얼마나 헛된 짓인가라는 진실을 순순히 인정할 수 있을까? 그렇게 인정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며 현재 상황도 수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해법이란 무엇일까? 바로 확전이다.(264)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지만, 또 어처구니 없이 확인된 사실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현명하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전쟁을 회피하고 전쟁에서 발을 뺀다는 점이다. 그는 욕을 먹지만, 시리아에서, 이라크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군대를 빼내고 있다. 그러면서 뻔뻔하게 거짓말을 한다. 전쟁에서 이겼기 때문에 모든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에 명예로운 철수 운운한다. 그런 뻔한 거짓말이 통하는 것은 그렇게 해서라도 전쟁에서 빠져나오는 편이 낫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라크도 시리도 아프가니스탄도 당분간 혼란과 내전이 계속되겠지만, 내전 끝에 찾은 평화만이 유일한 평화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겠는가.
톤젠드(타운센드) 장군에게는 행복한 나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플로 압송된 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보스포루스 어느 섬에 있는 쾌적한 저택에 거주하면서 터키 해군의 요트를 마음껏 이용했고, 오스만 궁중에서 열리는 외교 연회에도 참석했다. 그가 애지중지하는 요크셔테리어 세 마리도 쿠트에서 굶어 죽을 뻔했으나 시련을 견뎌내어 콘스탄티노플에서 주인과 상봉했다. 하물며 1916년 10월 톤젠트가 영국의 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을 때 터키 정부 관료들은 축하 서신을 보냈다. 전쟁 중이었지만 제국의 지배계급 사이에 면면히 흐르는 귀족적 동질감의 한 징표였다.(306-307) 로렌스는 달갑지도 않고 불명예스런 작전에 동원된다. 티그리스 강의 바그다드와 바스라 사이의 쿠트에서 터키 군에게 포위된 톤젠드 장군과 병사들을 구하기 위해 100만 파운드의 금화를 뇌물로 가고 칼릴 파샤를 찾아간다. 교섭은 실패하고, 부상병만 교환한 채 실패로 끝난다. 이 인도 출신 병사들은 바그다드 철도 공사에 투입되서 가혹한 노예 노동을 해야했고, 겨우 3분의 1만 살아서 종전을 맞았다. 영국군의 인종주의와 터키 군의 노예 노동을 해야했던 인도 출신의 병사들.(306) 그러나 이들의 지휘관인 톤젠드 장군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손님 대접을 받고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지배 계급의 귀족적 동질성 만큼, 이 아이러니를 잘 표현하는 단어는 없겠지.
여기에는 ‘독립’의 정의에 관한 의미론적 문제도 포함된다. 오늘날 독립이란 말은 명백하게 한 가지 뜻을 가리킨다. 하지만 1916년에는 전혀 달랐다. 제국주의 시대 말기, 시혜적 태도에 푹 빠진 대다수 유럽인에게 독립이란 토착민들의 자립을 의미하기보다는 좀더 온정적인 무언가를 뜻했다. 그것은 ‘백인의 부담’이 요구되는 새로운 장을 뜻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토착민이 현대적 문명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불특정한 어느 미래 시점에 그들만의 문명을 세울 수 있도록 가정교사 노릇을 (물론 이와 함께 착취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런 관점을 지닌 사람들에게 이쪽 끝에 있는 ‘독립’과 저쪽 끝에 있는 ‘위임통치’ ‘통치 구역’ ‘종주국’ 등은 그리 다른 개념이 아니었고, 모순의 골도 깊지 않았다.(314) 스콧 앤더슨이 던진 이 한 문단만 가지고, 이를 평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 문장을 읽은 나는 즉각적으로 독립과 속국을 둘러싼 논쟁을 떠올렸다. 속국과 자주. 1876년 일본과 맺은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의 1조는 조선을 ‘자주지방自主之邦’으로 기록한다. 자주국이란 뜻이다. 그러면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고 말하는데, 흥미로운 것은 일본은 자주국이나 독립국이란 설명이 없다는 점이다. 이 문장이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인한 것이고, 그래서 청나라는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주선하면서, 속국조항을 주장하고, 미국이 거부하자 별도의 조회(친서)를 보내 속국임을 밝히게 한다. 같은해 체결된 조청상민수륙통상장정은 아예 모두에 조선은 속방임을 밝혔다. 그래서 조약이라 하지 않고, 장정이라는 이름을 쓴 것. 자주나 독립이라는 말이 지금 우리가 쓰는 것과 달랐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특히 제국주의 국가 쪽에서라면. 이런 논리에서라면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는 조선의 독립을 위한 것이다. 같은 논리로 위임통치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때 조선인들이 쓰던 독립이란 말의 뜻은 어땠을까?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뜻일까? 아니면 역사적 상황을 지나 지금 이런 뜻을 가지게 되었을까? 생각해 볼 부분이 꽤 있어 보인다.
로렌스는 파이살의 진지를 잠시 방문한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카르케미시에서 아랍 문화를 탐구하던 세월까지 보고서에 녹여냈다. 그는 씨족과 부족의 동맹관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런 관계가 전장에서는 어떻게 구현되는지, 장기 목표를 위해 부족 간 결속을 다질 지도자 발굴이 얼마나 드문 일인지 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로렌스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옥스퍼드 학창 시절 내내 중세 전쟁사라는 특정 연구 영역에 심취한 사학도로서, 20세기 초 아랍인들의 전투 방식이 14세기 유럽의 전투 방식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군대를 모집하는 방법, 셰이크나 에미르가 국왕이나 왕자, 무사 등에 대응하는 지휘 체계, 전장에서 부대를 운용하는 전술 등 여러 분야에서 그 유사성을 찾을 수 있었다. 1916년의 헤자즈에서 군대가 이동하는 방식은 1356년의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필수 요소(물, 수레 끄는 가축, 식량과 사료 등)의 충족 여부에 달려 있었다. 어디로 갈지, 누구와 싸울지, 언제 싸울지의 여부가 이로부터 결정되었다. 중세 군사 전략에 관한 한 자타가 공인하는 전문가인 로렌스의 눈에 아랍의 전투 방식은 여러모로 낯익었다. 이런 측면에서라면 전문적인 군사 훈련과 나풀레옹의 전술을 습득한, 심지어 서부전선의 교훈에 정통한 현역 장교들이라 할지라도 로렌스를 능가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문화적 그리고 학구적 이해를 토대로 로렌스는 아랍 반란군을 전형적인 유럽식 군대로 바꾸려는 시도는 가능하지 않으며, 그들이 원치도 않을 것이라 해석했다.(351) 로렌스 신화가 탄생한 배경에는 이런 로렌스 만의 장점이 있었다. 중세 유럽의 전쟁과 곧바로 비교하는 그의 오리엔탈리즘적 태도에 반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현지화하지 않는 전투는 불가능한 법이다. 동시에 책을 읽어나가면서 무엇보다 로렌스의 능력은 글쓰기에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정보를 정리해서 보고서로 유통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글로 표현할 수 없었다면, 로렌스의 성격과 대인관계의 특징이 보여주는 대로, 그는 묻혔을 것이다.
“우리가 그들의 독립을 지지한 한 양측은 돈독한 친구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우리가 도와준 것을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지만, 우리가 도왔다는 이유로 나중에 무리한 요구를 받게 될 것을 걱정하고 있다. 사심 없이 돕는 것이라는 우리의 해명을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그동안 우리가 정복한 무슬림 국가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영국이 헤자즈를 점령할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인해 영국이 진지를 구축할 만큼 강력한 병력을 라베그에 상륙시킬 경우, 그들은 셰리프의 허락 여부와 관계 없이 ‘배신당했다’고 여겨 자기 고향으로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375) 로렌스는 아랍의 독립을 꿈꾸었던 모양이다. 한쪽에서 보면 아랍 반란군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으로의 일종의 거짓말의 성격을 띄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아랍의 독립을 위해서는 프랑스의 개입을 저지할 필요가 있고, 프랑스 군대의 상륙을 막을 명분도 필요했다. 프랑스는 영국에는 동맹국일지 몰라도 로렌스에겐 적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식민지와 해외영토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건 프랑스다. 프랑스의 식민지들이 가장 마지막까지 전쟁 또는 내전을 겪었다. 베트남, 알제리, 레바논, 시리아. 시리아는 아직도 전쟁 중이다.
이에 대해 부분적으로 명예에 관한 영국인의 특이한 감수성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 1917년 당시 영국을 통치하던 계층은 유럽 열강 가운데 그 어느 나라보다 ‘한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킨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영국 정부가 중동에 대해 추진하던 정책, 즉 아랍인들로 하여금 이미 깨져버린 약속을 미믿고 싸우다 죽도록 부추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외교관과 군인 중에는 대영제국의 위엄에 대한 수치스러운 모욕이라 생각한 사람도 많았다. 로렌스는 싸움과 죽음의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자국 정책의 본질을 본능적으로 파악했겠지만, 그에 대해 역겨움을 느낀 이는 로렌스만이 아니었다.(450) 로렌스는 사이크스-피코 협정의 내용을 파이살에게 폭로했다. 영국군 장교로서는 반역죄에 해당한다. 영국은 아라비아를 그리고 팔레스타인을 세 번 팔아먹었다. 1915년 후세인-맥마흔 서한에 의해 아랍 독립국에, 1916년 사이크스-피코 협정에 의해 프랑스에, 1917년 벨푸어 선언에 의해 유대인들에게, 100년을 이어가는 피의 씨앗을 뿌린 셈이다. 전쟁이 끝나자, 영국과 프랑스는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나누어가졌으니 누구에게도 약속을 지키지 않은 셈이다. 그리고 2차대전 후에 유대인 국가가 수립되게 된다. 로렌스는 이제 아랍을 분명하게 아랍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1912~1913년에 벌어진 발칸 전쟁에서도 거의 모든 전투 부대가 민간인 주민들을 강제로 몰아낸 일이 있었는데, 이때의 조치는 군사적 편의 차원이라기보다 한 세기 뒤에 ‘인종 청소’라 불리는 정책의 일환이었다.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지, 실로 끔찍한 비극이었다.(수십만 명에 이르는 터키인, 불가리아인, 마케도니아인, 그리스인 등이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땅에서 영원히 쫓겨났다.) 게다가 이 사건은 그보다 훨씬 더 잔혹하고 무시무시한 사건, 즉 1915년 아나톨리아에서 아르메니아인을 추방하는 작전의 선례가 되었다. 그 끔찍한 최근 사례를 목격한 제말 파샤는 이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1917년 초반 자신이 통치하는 시리아 땅이 위협받자 주민 추방이라는 카드를 꺼내들고 말았다.(492) 아르메니아 대학살로 불리는 2차 아르메니아 학살 또는 오스만 제국에 의한 아르메니아인 시리아로의 소개 명령은 갈리폴리 전투를 전후해 시작되었따. 그 희생자는 70만에서 100만에 이른다. 주장하는 이들에 따라서는 그 이상이다. 아나톨리아에서 이들의 흔적은 지워지고, 아르메니아인들은 대부분 유럽과 미국에 거주하고, 터키와 이란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지금의 아르메니아 공화국은 구 소련에서 독립해 있다. 히틀러의 나치만 인종청소와 대학살을 진행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계속해서 밝혀지고 있지만, 20세기의 전쟁은 왜 이토록 한결같이 슬픈지. 지금의 난민들은 또 어떤지.
당연한 말이지만, 사실 관계는 중요치 않았다. 전시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만드는 그 내용이 곧 ‘진실’이다. 제말 파샤는 적들에게 사실을 밝혔지만, 중동 역사를 뒤바꾼 것은 ‘진실’이었다. 국 1917년 야파를 무대로 삼았던 허구는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 공동체가 무슬림 치하에서 안전하지 않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서는 자기들만의 국가 필요하는 주장의 모태 신화로 자리 잡게 되었다.(505) 영국군의 가자 공격 실패 이후 야파 공격에 대비해 제말 파샤가 거주자들을 소개하자, 유대계는 영국에서 국제 언론을 통해 유대인 학살설을 퍼뜨린다. 아론손과 사이크스의 합작이었다. 독일과 터키가 뒤늦게 대응에 나섰고, 국제조사단도 나섰짐지만 이미 늦었다. 정작 영국군은 가자에서의 실패를 회복하느라 공격해 오지 않았고. 거짓은 진실이 되어 사실을 파괴해 버렸다. 가짜뉴스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다.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고자 한다면 무력을 동원해야만 합니다. 그 나라를 지키는 것 역시 무력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입니다. 압도적 다수의 인구가 그들에게 적대적이기 때문입니다.”(692) 유대인 국가가 수립되면 아랍이 수용할 것이라는 마크 사이크스 같은 이들의 장밋빛 전망을 배척한 것이지만, 로렌스의 통찰력은 어나다. 그는 영국이 시온주의자들을 지원한 다면, 아랍 민족주의가 몰락할 것을 우려했다. 벨푸어 선언은 미국의 참전과 전세계 유대인 공동체의 지지를 이끌어 내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 결과는 참혹했다. 그러나 유대인 공화국 역시 피없이 건설되지는 않았다. 1930년대부터 정착촌 내외부에 투쟁이 있었고, 1948년 이후 피를 흘려서 건국 한데다. 오늘날까지 이스라엘을 지키는 것은 그들의 무장력 뿐다. 핵을 포함해서.
하지만 예일이 보기에 진짜 결정적인 요인은 아랍인들 사이에 싹튼 친미적 성향었다. 확실히 윌슨의 14개조 안에 담긴 약속이 기폭제가 되었겠지만, 이런 경향은 향후 이 지역에 난무하게 될 온갖 요구를 고려할 때 대단히 합리적인 결과이기도 했다.(729) 아랍은 분명 친미적이었다. 이들 만이 니라 파이살까지 프랑스 보다는 차라리 미국의 보호령이 되길 바랬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국을 겪어내기 전까지만다. 스콧 앤더슨에게 동의할 수 없는 딱 한 가지 지점은 바로 이 친미 성향이다. 프랑스와 영국의 속임수와 압제를 경험한 아랍이 20세기 후반 미국을 경험하고 나서 내린 결론이 무엇인지는 이제 분명하다. 그때 소코니Standard Oil Company of New York의 행태만으론 몰라본 것이다.
종합하면, 타파스와 데라서 벌어진 사건들은 ‘로렌스 신화’의 온전한 진실을 파악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심어 신화의 여러 단면 가운데 가장 신빙성 있는 사실을 집어는 것조차 힘들다. 예리한 독자라면 로렌스가 『일곱 기둥』에 묘사한 타파스 사건에서 그대로 믿기 어려운, 다소 영화 같은 구석을 몇 군데 발견했을 것이다. 예컨대 탈랄이 함성을 지르며 적진으로 돌격하다가 총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 적군의 총검에 두 팔이 잘려 죽어가던 아랍 전사를 로렌스가 목격하는 장면 등은 로렌스가 공식 보고서에 언급하지 않은 내용이었다. 예리한 시선으로 소름 끼치도록 세밀히 묘사한 것도 불편하다. 1년 전의 ‘데라의 고초’를 묘사하는 세밀함을 떠올리게 하는, ‘전쟁 포르노그래피’의 외설적 경향마저 보인다. 1918년 9월 총공세 당시 로렌스와 함께 했던 영국군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정작 로렌스 본인은 회고록과 공식 보고서에서 명백히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렌스가 이미 붙잡은 포로들을 처형하라고 지시하기는 커녕 “포로로 삼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적도 없다고 한사코 부인했다는 사실이다.(764) 데이비드 린의 영화의 한 장면에서 보이는 그의 모습은 광기 그 자체다. 영화에서 그들은 No Prisoners!를 외친다. ‘포로로 삼지 말라’ 보다는 ‘한 놈도 살려두지 말고’ 정도가 되겠다. 그들은 부상당해 패주하는 이들에게 돌진해 참혹한 살인극을 버린다.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너무도 끔찍해서 어떻게 손쓸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 희망을 완전히 잃은 사람들이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영역 밖에 존재하는 지옥 같은 곳에서, 그들은 커피를 마고 있었다.”(771) 다마스쿠스를 점령한 후, 터키군은 병영을 임시 군인병원으로 전환한 채 달아났고, 아랍군은 비적 떼처럼 노략질을 했고, 거기서 그들은 참혹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위에서 인용한 한 구절은 예일의 말이다. 로렌스도 곧 도착했고, 더 참혹한 묘사를 남긴다. 내 눈길을 끈 건 그런 상황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간호사 겸 잡역부들이었다. 로렌스는 시체를 묻는 등 비상조치를 하고, 근처의 호주군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그들은 거절한다. 다음날 병원을 다시 찾은 로렌스에게 한 호주군 소령 “이 살인마 개자식”이라며 뺨을 후려친다. 이것은 로렌스의 기록다. 예일은 이 슬픔이 유럽 열강의 제국주의 탓이라고 말했지만, 로렌스는 달랐다. 그는 뺨을 맞고 부끄러움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가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압제자에 맞서서 약자들의 혁명을 성공시키고자 분투한 사람이라면, 신을 깨끗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의 타락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로렌스는 그 뒤로 평생토록 전쟁 기간에 목격하고 행동한 것으로 인해 자신이 더렵혀졌다는 인식 속에서 살았다. 그래서 스스로 저지른 죄악을 용서받고 다시 “깨끗하게 만들기 위한” 투쟁의 일환으로, 소령의 따귀보다 훨씬 더 심한 폭력과 희생으로 자신을 가혹하게 채찍질 곤 했다.(774-775)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이 과정에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만일 네가 괴물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도 네 안으로 들어가 너를 들여다본다”는 니체를 굳이 인용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이 모든 고통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시점에 치러진 끔찍한 결정들 탓으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 대단히 치명적인 씨앗을 심은 것만은 분명하다. 이후로 아랍권은 ‘열망’이 아닌 ‘저항’이라는 정체성을 규정해왔다. 그 대상은 물론 식민주의, 시온주의, 서구 제국주의였다. 이와 같은 ‘저항의 문화’는 아랍 독재들이 누대에 걸쳐서 교묘하게 조작하거나 맹렬히 조장해오고 있는 것이다. 내치의 오류를 겨냥한 민중의 분노를 ‘거대한 사탄’이나 ‘시온주의자들의 불법 점유’나 카이로 거리에 나도는 서구 음악 같은 외적 위협으로 방향을 돌리기 위해서 였다.(797)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든다. “니가 할 소린 아니지.” 적어도 미국인이 할 소린 아니란 이야기다. 저항이라는 정체성, 저항이라는 문화는 자신들을 손쉽게 뭉치게 하고, 지치지 않고 싸우게 할 수는 있지만, 만들어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스콧 앤더슨은 소위 재스민 혁명 또는 아랍의 봄을 기대하며 말하고 있지만, 그 결과는 ISIS의 등장과 테러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시리아의 내전은 미군의 철수와 손을 뗀다는 소식 속에 아사드 정권이 다시 등장할 조짐이다. 이제 정말 어디로 갈 것인가. 그들은 시 무엇에 기대어 어떻게 만들어 나가야 할까.
2019. 2. 18.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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