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미르나는 불타오르고 난민들은 구조를 바라지만, 연합국 배들은 무심하게 바라보면서 사진만 남길 뿐이다. 그들의 무심함은 헤밍웨이의 글 「스미르나의 해변에서On the Quai at Smyrna」에 잘 드러난다. 터키 군인도 그리스 장교도 무릎이 꺾어져서 물에 빠져 죽는 노새도.
로버트 거워스Robert Gerwarth, 『왜 제1차 세계대전은 끝나지 않았는가The Vanquished: Why the First World War Failed to End』, 최파일 역, 김영사, 2018(2016).
1919년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지금, 1차 세계대전의 마무리를 둘러싼 이야기를 읽으면서, 3.1운동의 국제적 맥락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3.1운동을 촉발시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뿐일까?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은?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의 공식적인 종전을 전후로 중부 유럽의 패전국들과 전후 처리 과정에서 사실상 패전국이 된 나라들에서 혁명의 불길이 치솟았다. 국왕이나 황제가 퇴위하고,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 전환하기도 하고, 급진파의 등장으로 볼셰비키 혁명이 시도되기도 하고,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이 무기를 들고 우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내전, 혁명과 반혁명, 쿠데타, 정부의 전복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이 와중에 대규모 인종학살과 소개 또는 이동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 여파는 하얼빈과 블라디보스톡에까지 미쳤으니 결코 작다 할 수 없겠다. 3.1운동을 비롯한 아시아의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에서 일어난 민족주의 운동들은 그 세계사의 흐름과 무관할 수 없다. 그 혼란은 제2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의 세계로 이어진다. 그리고 조선인 또는 한국인은 3.1운동을 통해 비로소 탄생하기 시작한다. 로버트 거워스는 시종일관 중부 유럽을 중심으로 1917년부터 1923년까지 전개되는 파괴와 폭력을 쫓아가지만, 나는 그 이면에서 지구의 반대편 조선을 읽어나간다. 그것도 이 책의 독법 중 하나일 것이다.
1922년 9월 9일 터키 군이 스미르나에 도착한다. 그리고 남아 있는 그리스인들과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한다. 이들은 복수심에 눈이 멀었다. 스미르나가 불타오르고, 사람들은 바다 위에 떠있는 그리스 군함과 연합군 군함이 자신들을 구해주기를 기대하지만, 그들은 외면한다. 「토론토 스타」의 특파원이었던 어네스트 헤밍웨이가 거기 있었다. 그는 글을 남긴다. 영국 식민성 장관 윈스턴 처칠은 ‘인류 범죄사에 유사한 사례가 없는 ‘극악 무도한 광란’이라고 규탄했다.(15-18) 스미르나는 신약성서에 나오는 서머다. 지금은 이즈미르. 그러나 우리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탈리아가 단눈치오의 피우메를 욕심내자, 영국 수상 로이드 조지는 이탈리아의 야심을 잠재우기 위해, 그리스를 부추겼다. 1919년 5월 15일 그리스 침공군이 스미르나에 상륙했고, 동부 아나톨리아로 깊숙히 들어갔다. 그리스 군대와 민병대는 터키 무슬림을 학살하면서 점령해 들어갔다. 케말 아타튀르크를 중심으로 한 항전 세력은 술탄 정부와 거리를 뒀고, 오스만 제국에게 가혹한 양보와 배상책임, 영토할양을 요구하는 세브르 조약을 거부하고, 소련과 조약을 맺는다. 반격에 나선, 터키 군대는 그리스군을 물리치면서 아르메니아와 그리스계 정교도인들을 학살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들을 스미르나에서 축출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연합국이 외면한 그리스는 큰 패배를 당하고, 그 과정에서 학살과 보복하는 대학살의 참극이 벌어진다.(301, 305-308, 313-319) 학살과 파괴는 더 말할 나위 없는 잘못이지만, 이 전쟁을 애초에 부추긴 건 영국이었다. 영국이 학살을 시킨 거야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처칠의 비난은 참 뻔뻔한 느낌이 든다. 그리스의 학살이 비난을 받고 전세가 불리하자 재빠르게 발빼는 것이 선진국이다. 언제나 그렇듯.
1,000만 명에 가까운 전사자를 낳고 2,000만 명 이상의 부상자를 낳은 분쟁에서 빠져나온 유럽의 복잡한 그림은 대전에 뒤이은 폭력적인 격변에 대한 손쉬운 범주화나 정의를 거부한다. 그러나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쓴다면 추후의 ‘유럽 내전’ 안에서 서로 구분되면서도 상호 갈등을 강화하고 흔히 중첩되는 최소한 세 가지 유형의 갈등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유럽 ‘전후’ 시기는 폴란드-소비에트 전쟁, 그리스-터키 갈등이나 루마니아의 헝가리 침공처럼 국가 간 전쟁에서 정규 군대나 이제 막 생겨나고 있던 국방군들 사이 전투의 발발을 목격했다. 대전에서 남겨진 무기를 가지고 싸운 이러한 국가 간 갈등은 합스부르크, 로마노프, 호엔촐레른, 오스만 제국의 해체가 흔히 신경질적으로 공격적인 민족국가의 등장을 위한 공간을 제공한 지정학적 지대에서 벌어진 경향이 있다. 이 신생 민족국가들은 무력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거나 공고히 하고자 했다. 둘째, 1917년과 1923년 사이 짧은 기간에, 러시아나 핀란드의 경우는 물론이고 헝가리, 아일랜드, 독일 일부 지역의 경우에서처럼 내전이 엄청나게 급증했다. 로마노프 제국의 이전 영토들에서는 상호 연결되는 각종 갈등들이 서로를 부채질했기 때문에 국가 간 정규전과 내전을 구분하기가 언제나 쉽지는 않다. 셋째, 일반적으로 이 시기 유럽을 괴롭힌 내전은 1917~1923년 시기를 지배한 독특한 형태의 정치적 폭력, 즉, 사회, 민족 혁명에 의해 촉발되었다. 만약 대전의 후반부 동안 많은 참전국들이 물자 부족과 전쟁에 대한 피로에 의해 유발된 파업과 조업 정지를 목격했다면 전쟁의 종식은 유럽의 모든 패전국에서 본격적인 혁명과 폭력적인 정권 교체를 동반했다. 1917년과 1923년 사이에 일어난 혁명들은 러시아, 헝가리, 불가리아, 독일의 경우처럼 권력과 토지, 부의 재분배를 추구한 사회-정치적 성격의 혁명으로 볼 수 있다. 아니면 패전한 합스부르크, 로마노프, 호엔촐레른, 오스만 제국의 파쇄지대shatter zone의 경우처럼 ‘민족’ 혁명일 수도 있다. 파쇄지대에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신생 국가와 재생 국가 들은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자 했다. 이 두 가지 혁명 조류의 빈번한 중첩과 동시적 발생은 1917년 1923년 사이 시기의 특이성 가운데 하나다.(25-27)
거워스가 다루고 있는 5년이라는 혼란기는 분쟁이 끊이지 않는 시기였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 층위 또한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첫째, 정규군과 새로 생겨나는 국방군 사이의 전쟁, 새로운 국민국가의 형성에는 전쟁이 앞서나갔다. 둘째, 내전, 다양한 층위에서 벌어지는 내전은 외부세력의 잦은 개입으로 복잡해졌다. 셋째, 사회 혁명과 민족 혁명. 1917년에서 1923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전쟁의 포성이 멈춘 것은 아일랜드를 제외한 영국 뿐이었다. 태평양 건너편의 미국. 유럽의 곳곳에는 이 복합적인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전후 폭력 가운데 어느 것도 대전을 언급하지 않고 설명할 수 없음은 분명하지만 1차 세계대전은 유럽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의제를 이후 수십 년 동안 형성하게 될 사회 혁명이나 민족 혁명을 뜻하지 않게 가능하게 한 것으로 보는 게 더 적절할 듯하다.(29) 파멸적이었지만 궁극적으로 국가 간의 재래식 갈등이었던 것은 논리와 목적이 훨씬 더 위험한 일련의 상호 연결된 갈등들로 바뀌었다. 특정한 강화 조건을 받아들이게 할 목적으로 싸운 세계대전과 달리 1917~1918년 이후의 폭력은 종족적 적이든 계급적 적이든 적을 절멸하기 위해 싸운 실존적 갈등이었다. 그것은 인종 학살의 논리였다. 유럽의 이전 제국 영토에서 제대로 작동하는 국가가 부재한 가운데 다양한 정치적 신념을 지닌 민병대들이 스스로 국방군의 역할을 떠맡았고, 전투원과 민간인 사이 경계가 끔찍하게 흐릿해 졌다.(30) 중요한 것은 모스의 ‘야만화 테제’가 아니라 대전의 패전국들에게 전쟁이 어떤 방식으로 끝났는지 주목해야 한다. 전쟁은 패배, 제국의 붕괴, 혁명의 혼란으로 끝났다. (30-31) 전후 폭력의 점증에 대한 한 가지 명백한 설명은 1918년 패전 또는 불구가 된 승리의 동원력에 있다. 유럽의 승전국들은 대전에서 군사적 승리가 전시의 희생을 정당화했고, 승리한 국가의 정통성을 강화했지만, 패전국 가운데 어느 나라도 전전 수준의 국내적 안정과 내부 평화에 도달하지 못했다.(31) 유럽 육상 제국들의 급작스런 해체와 후계 국가들의 힘겨운 탄생도 1918년 후 폭력 급증의 또 다른 주요 요인이다.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는 민족국가를 추구했지만, 실제로 축소판 다민족 제국이었다.(31) 제국들의 해체가 새로운 ‘폭력의 변경지대’를 창출했고, 영토 수복은 계속해서 중요한 문제가 된다.(32) 혁명과 중부 세력의 패배, 이전에 제국들에 의해 지배되던 한 대륙의 영토 재편은 새롭고 지속적인 갈등에 안성맞춤인 조건을 창출했으며, 훨씬 더 오래된 갈등에서 기인하는 국지적인 전통과 조건들이 1차 세계대전 이후에 등장하는 폭력을 형성했다. 그럼에도 혁명, 패전, 제국의 폐허에서 민족적 ‘재생’이라는 포괄적인 요인들이 1923년까지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 지속된 무력 분쟁의 초국적 물결을 결정적으로 촉발했으며, 7월 신생 터키 공화국의 영토를 확장하고, 광범위한 강제 인구 교환을 통해 그리스의 영토적 야심을 종식시키는 로잔 조약의 체결과 함께 한시적으로 종결되었다.(32)
세 가지 형태의 분쟁에는 세 가지 원인이 교차하면서 얽혀들었다. 전쟁의 양상이 달라졌다. 적을 절멸하는 인종 학살의 논리가 전면에 등장했고, 민병대와 민간인이 전쟁 속으로 얽혀들었다. 분재의 원인은 패전의 양식 그 자체에 있는데, 그것은 패배, 혁명, 제국의 붕괴라는 세 가지 양상 속에서 복잡하게 전개되어 나간다. 오스만과 불가리아는 패전했지만, 러시아는 실제 혁명으로 강화를 체결했고, 독일 역시도 전선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내부 혁명이 일어나 전쟁을 끝내게 되었다. 로마노프 왕조의 러시아 제국,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 오스만 제국, 독일 제국 등 모두 네 제국이 붕괴되고, 분해되었다. 그 안에서 민족 자결을 주장하면서 새로운 국민국가들이 형성되었지만, 실상 작은 다민족 국가였다는 사실이다. 인종 학살과 인구 교환이라는 극단적 폭력이 자행된 후에 비로소 일시적인 안정이 찾아왔다. 여기까지만 읽는다 해도 이 책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이 책은 그 과정과 내용을 하나하나 설명해 나간다. 그리고 1917년에서 1923년에 이르는 동유럽과 발칸 그리고 아라비아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 그 역사의 흐름과 소용돌이는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는 물론, 동아시아 곳곳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것은 조선에서도 마찬가지다. 민족혁명과 사회혁명이라는 이중 혁명의 과제는 계속해서 충돌해 왔다. 민족모순(분단)과 계급모순(노동)을 내세운 NL과 PD의 오래된 갈등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가혹한 조건들에 대한 반대는 심지어 볼셰비키 진영 안에서도 강했지만 레닌은 정권의 생존이 외부적 평화-내부의 적들로부터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안전하게 지킬 시간을 벌어줄 평화-에 달려 있음을 인식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은 전쟁을 끝내겠다는 레닌의 국제적 약속을 달성함과 더불어 독일의 방대한 제국주의적 전쟁 목표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와 동시에 러시아에 갇혀 있던 중부 세력 전쟁포로들의 석방은 중유럽에서 예견되는 혁명을 가속화하는 데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레닌의 이런 가정들 대부분이 옳았음은 곧 입증될 터였다. 수십만 전쟁 포로의 석방,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 병사들의 석방은 본국에서 심각한 급진화 효과를 초래했다. 그러한 귀환 병사들 가운데에는 볼셰비키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은 이들과 중유럽과 남동부 유럽에서 훗날 좌파 지도자가 될 이들이 정말로 많았다. 바로 오스트리아 사회주의자 오토 바우어Otto Bauer, 헝가리인 벨러 쿤Bela Kun, 크로아티아 선임하사 요시프 브로즈Josip Broz-훗날 공산주의사 시절의 별호인 티토Tito로 더 잘 알려진-같은 이들이었다.(63-64)
레닌과 그 일행에게 밀봉열차를 제공한 독일 군부는 결과적으로 성공을 거둔 셈이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의 주도권을 장악한 레닌은 강화를 밀어붙였다. 러시아는 원래 협상국(협상세력the Entente Powers 영국과 프랑스)과 동맹이었다. 강화 조건은 굴욕적인 것으로 러시아는 폴란드에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 이르는 서부의 유럽 영토를 포기해야 했다. 트로츠키는 반대했지만, 외부의 전쟁으로부터 혁명을 보호해야 하는 레닌은 망설이지 않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의 체결로 동부전선이 무너지고, 제1차 세계대전의 양상은 변할 기미를 보인다. 독일은 동부의 군대를 움직여 서부전선에 집중할 기회를 얻었다.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더 큰 변화는 전쟁 포로의 석방과 귀환 병사들이었다.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 그리고 독일도 오스만도 모두 제정국가에 세습 귀족이 지배하는 전통적인 국가의 피지배층이었고, 이들은 후진국이던 러시아에서 진행되는 혁명을 목격했다. 혁명의 목격은 많은 사람을 변하게 만들었다.어떤 이는 급진파로 어떤 이는 극우파로.
11월 초에 이르자 전쟁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중부 세력은 독일뿐이었다. 루덴도르프는 독일군의 항전 의지가 무너졌음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러나 루덴도르프는 그가 ‘불가피하게 임박’했다고 여긴 독일의 패배에 책임을 져야 할 자들은 군 지도부가 아니라 제국의회 내 정치적 좌파들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데 감사해야 할 분파들을 정부로 불러들이라고 폐하께 건의했다. 우리는 이제 이 신사분들이 나라의 각 부처로 입각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지금 당장 이루어져야 할 강화를 그들이 타결하게 하자. 그들이 우리 먹으라고 쑨 죽을 자신들이 먹게 하자.“ 제의된 ‘위로부터의 혁명’은 최고사령부의 패전 책임을 떠넘기게 하는 것 말고도 추가적 이점이 있었다. 윌슨 대통령은 민주적으로 승인된 베를린 정부와 협상한다면 자신의 14개조에 입각하여 강화협상을 타결할 용의가 있으리라.(89-90) 전세가 독일에 분명하게 불리해지자 민간과 군의 사기는 곤두박질쳤다. 전년도의 러시아에서처럼 군사적 참사와 전반적 전쟁 피로감은 혁명을 위한 조건을 창출했다. 패배를 야기한 것은-이후에 민족주의 진영에서 주장하게 되는 것과 달리-혁명이 아니었다. 러시아에서처럼 독일에서 혁명적 사변들은 물질적 궁핍과 산업 노동자들의 파업, 그리고 병사들 사이에서 불만으로 촉발되었다. 전쟁이 주는 중압은 제정의 정통성과 전쟁의 마지막 2년 동안 그 제정이 점차 전락해가며 취한 ‘무언의’ 군사 독재의 정당성을 약화시켰다. 그것은 민간이 겪는 곤경을 완화하지도 못하고 전쟁을 약속한 승리로 이끌지도 못하는 정권이었다. 1918년 가을 군의 붕괴와 더불어 제국에 대해 남아 있던 일체의 지지는 증발했다. 군 기강의 악화와 권위주의적 통치 체제의 붕괴, 연합국으로부터의 외적 압력(특히 윌슨에 의해 표명된 14개조)과 후방에서의 극단적인 전쟁 피로에 의한 압박, 거기에 러시아의 사례까지(이것은 1918년 후반 독일에 등장하는 노동자와 병사 평의회에 영감을 주었다) 그 모든 것이 합쳐져 압도적인 정통성 위기를 불러왔다.(92)
전쟁의 패배는 분명했다. 훗날 민족주의자들이 등장하면서 핑계를 댄, 내부의 분열이나 제5열의 존재는 분열의 원인이 아니었다. 정부는 무능력했다. 동부전선에서 불러들인 병력을 동원한 마지막 공세마저 실패한 후, 패배가 더 이상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해진 1918년 9월 말에서 10월초, 군부는 황제에게 좌파 정치인을 불러들여 조각하고 그들에게 패배의 쓴 잔을 마시도록 하자고 권한다. 전쟁을 주도하던 군인들은 전쟁이 패배로 끝날 때쯤 패배의 책임으로부터 도망친다. 패전하던 일본군도 그랬다. 그리고 거기에 깔린 또 하나의 노림수 또는 기대는 윌슨의 민족자결의 원칙이었다. 민주적인 정부가 하는 평화협상은 덜 가혹하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기대였다. 이것은 독일 만의 일이 아니고, 이 시기를 전후해서 수많은 중부와 남동부 유럽 국가들이 민주적인 정부 형태를 취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국내에서 3.1운동을 비판하던 윤치호 같은 이들은 민족자결주의가 속임수라고 말했지만, 여기에 속은 것은 순진무구한 식민지의 민중 만은 아니었다.
살 집과 농장에 대한 약속은 왜 많은 독일인들이 동부 국가들에서 복무에 자원했는지를 설명하는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어떤 이들은 발트 지역의 법과 질서의 붕괴에 이끌렸다. 길게 수염을 기르고 현지에 빌붙어 살아가는 그들은 자신들을 근대 초기의 약탈자들이나 해적에 비유하기를 즐겼고, 그 지역에 만연한 무법 상태에서 잘 살아나갔다. 어떤 이들은 군인으로서의 존재의 존속, 특히나 볼셰비즘에 맞선 싸움 속에서 그 존재의 존속을 열망했고, 라트비아에서의 군사 활동이 패전과 전후 합의의 굴욕에 복수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에 근간을 제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많은 자원 부대들이 자신들을 ‘의용군Freikorps’-프로이센이 프랑스에 당한 군사적 치욕에 자극을 받아 입대한 독일 자원병들이 나폴레옹의 종국적 패배에 많은 공헌을 했던 반反 나폴레옹 ‘해방 전쟁Wars of Liberation’(1813~1815) 동안 만들어진 이름-이라고 불렀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104)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소위 발트 국가들이 독립하기 시작했다.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독일의 패배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 무의미해지자, 러시아는 각국의 볼셰비키 소비에트를 동원해서 자그마한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우기 시작했다. 레닌의 러시아는 영토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다급해진 신생 발트 국가들은 군대를 조직했고, 모자라는 군사력은 후퇴하던 독일군을 모집해서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정착과 토지 제공에 대한 약속도 입맛을 당겼지만, 무엇보다 군인으로 남고 싶었던 이들이 많았다. 이들은 적군과 싸워서 물리치는 데 큰 힘이 되기도 했다. 이들의 폭력성은 볼셰비키들에게 향했고, 이들을 도왔을 것으로 의심되는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아무도 살려두지 않으려 했다. 살인과 강간이 만연했다. 훗날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소장을 지낸 루돌프 회스Rudolf Höss도 라트비아 자원병 출신이었다.(104) 라트비아 군대 등 현지 군대들이 철수를 거부하는 독일군을 공격했고 패퇴시켰다. 일부는 러시아 백군 서부군White Russian Army of the West에 합류했고, 퇴각하던 독일군은 발트 주민들이 자신들을 배반했다고 느끼고 민간인들을 학살했다.(108-109) 이들이 독일로 돌아가서 어디에 가담하고 어떤 전투를 치렀겠는가. 발트 3국은 오래된 독립국이 아니었다. 1차 대전 이후에 러시아로부터 독립해서 생겨났고, 1940년 소련의 침공으로 위성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1991년 노래혁명을 통해 다시 독립국이 되어 현재는 모두 EU 가입국으로, 러시아의 서부 국경을 틀어박고 있다. 칼리닌그라드(구, 쾨니히스베르크)는 라트비아와 폴란드로 러시아와의 연결이 끊겨있다. 이틀 발트 국가들은 오랫동안 제정러시아 또는 폴란드에 속해 있었다. 전쟁은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패전은 새로운 나라를 독립시킨다. 오랜 속령인 나라들은 1차 대전 후 독립했다가, 2차 대전 과정에서 위성국가가 되었고, 소련의 해체과정에서 다시 독립했다. 이제는 러시아가 옛 영향력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우크라이나가 가장 우선적인 목표겠지만, 발트 국가들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공포 정치의 도입이 반작용의 결과이거나 비합리적 행위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비합리적이기는 커녕 볼셰비키는 테러를 전략적인 방식으로 이용했다. 그것은 공산주의 유토피아 실현을 향한 도상에서 이중의 목표에 복무했다. 테러는 계급의 적으로 인식된 자들에게 ‘외과 수술’을 가능케 한 한편, 잠재적 적들에게 억지력을 발휘했다. 적색테러가 격화되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체카Cheka의 일원으로 고용되었다. 이후 몇 년 사이에 그 숫자는 놀라운 속도로 불어나, 1918년 중반 2,000명에서 내전이 끝날 즈음에는 14만 명 정도가 되었다. 추가로 10만 명의 변경 병사들이 ‘반혁명’ 활동을 진압하는 데 체카를 지원했다.(116) 반유대주의적 포그롬pogrom은 내전의 영향권 안에 있는 여러 지역에서, 특히 서부 국경지대 소읍과 쉬테틀shtetl에서 흔한 일이었다. 공산주의 지도부에서 유대인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사실에 부채질되어 반볼셰비키 진영은 10월 혁명을 금방 유대인 음모의 소산으로 낙인찍었다. 예를 들어 콜차크 제독은 병사들에게 ‘유대인들이 차르를 죽였다’는 계획적 제목이 붙은 팸플릿을 제공했다. 이것은 전통적인 기독교 반유대주의의 핵심에 자리잡은 서사와 통하면서 이를 강화하는 주장이었다. 바로, 유대인들이 예수의 죽음에 책임이 있고, 따라서 수 세기에 걸쳐 추적될 수 있으며 현재에까지 이르는 간악한 배반의 전통을 세웠다는 주장이다. 혁명의 중심에 유대인의 음모가 자리잡고 있다는 관념은, 그것만 아니라면 모집 신병들에게 훨씬 더 매력적인 약속(‘토지, 빵, 해방’)을 제시하고 있었던 볼셰비키에 맞서 저항 움직임을 통일적으로 전개하려 애쓰던 백군의 프로파간다의 중심이 되었다. 반유대-볼셰비키 카드는 백군에게 최소한 사람들이 동일시할 수 있는 대중적인 뭔가를 제공할 수 있었고, 이 프로파간다는 금방 로마노프 제국 전역에 반유대주의적 폭력이 터져 나오게 만들었다.(126-127) 볼셰비키 승리의 결정적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레닌의 궁극적 승리는 나라에 엄청난 희생과 함께 왔다. 두 차례 혁명과 중단 없이 이어진 7년간의 무력 갈등을 거친 1921년의 러시아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내전과 강제 추방, 이민, 그리고 기근의 결과를 통틀어, 1922년 공식적으로 소비에트 연방(소련)이 된 영토에서 인구는 1917년 대략 1억 4,200만 명에서 1922년 1억 3, 200만명으로, 총 1,000만 명 정도가 감소했다.(132)
인구감소 뿐만이 아니다. 러시아는 회복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었다. 러시아 내전의 결과는 참혹했지만, 레닌은 혁명을 지켜냈다. 이 과정에서 잔인하고 가혹한 테러가 양편에서 자행되었다. 분노한 농민은 볼셰비키의 배를 갈라 곡식을 채워서 나무에 걸어두기도 했다. 혁명 러시아는 훗날의 악명 높은 KGB가 되는 체카를 만들어서 반혁명을 테러로 분쇄했다. 그러나 한층 더 두려운 일은 백군, 즉 반볼셰비키 쪽에서 대대적으로 유대인 인종차별과 학대, 학살에 가담했다는 것이다. 볼셰비키에 반대한다는 사실 외에 뚜렸한 공통점이 없는 다양한 세력의 이합집산이었던 반볼셰비키 진영을 묶어준 것은 반유대주의였다. 많은 사람이 러시아를 떠났다. 서유럽으로 미국으로 율 브리너가 자란 하얼빈으로 그리고 팔레스타인으로 옮겨갔다. 베를린은 반볼셰비키 러시아 망명 사회 프로파간다의 온상이 되었고, 발트 지역 독일계 난민들의 동조에도 힘입은 러시아 망명자들은 레닌의 볼셰비키 운동에 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퍼뜨렸으며, 독일과 그보다 먼 지역에서 부상하던 극우세력에 새로운 에너지를 주입했다. 그 결과 볼셰비키 혁명과 과거 러시아 제국 영토에 걸쳐 벌어진 내전은 급격한 사회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변화를 갈망하는 이들에게는 희망의 횃불로서, 정치화된 대중에 의해 임박한 권력 찬탈이라는 악몽과도 같은 비전으로 더 먼 곳의 혁명과 반혁명 운동과 빠르게 상호작용했다.(135) 볼셰비키 혁명과 러시아 내전의 영향은 깊고도 깊었다. 지구를 반바퀴 넘어 조선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한반도에서 벌어진 수많은 갈등과 학살은 바로 이런 동질성을 향한 열망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 닮은 사람들은 이념과 외세로 분열되었다. 한국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도, 정규군과 민병대에 의한 학살은 반복되었다.
독일의 민주적 탈바꿈은 이웃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일어난 사건과 굉장히 유사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혁명을 더 복잡하게 만든 것은 민족 혁명과 사회 혁명의 중첩이었다. 1918년 이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 해체된 이유는 주로 민족주의의 원심력이라고 흔히 주장되어왔다. 더 근래 들어 역사가들은 상이한 그림을 그린다. 비록 슬라브 민족주의가 특히 다종족 제국의 존재에 도전을 제기하기는 했지만, 제국의 궁극적 소멸 이유는 전전 소규모 민족주의 운동들에서보다는 대전 시기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혁명을 가능케 한 단기 요인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적지 않은 인구 부문, 특히 전시 오스트리아 도시 인구의 물질적 곤궁이었다.(149) 전쟁 마지막 몇 주 사이에 제국적 충성의 종말은 독일의 ‘등에 칼 꽂기’ 전설의 오스트리아 버전을 탄생시키게 된다.(150) 폭력의 가능성이 엄청나게 컸음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 혁명은-독일 혁명처럼-무력 쿠데타보다는 대중 시위를 통해 의사를 표현하면서 대단히 평화로웠다. 극좌파에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프리드리히 아들러 마저도 볼셰비키 스타일 혁명을 공개적으로 반대했다.(154)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탄생과 경제 봉쇄를 해제하지 않기로 한 연합국의 결정으로 증폭된 식량 부족 사태라는 힘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많은 오스트리아인들은 성공적인 민주정의 도입은 파리에서 강화 협상가들에게 신생 공화국에 우호적인 시각을 심어줄 거라고 기대했다. 유사한 희망이 1918년 10월 말, 정부 권력이 민주적인 연립 진영에 넘어간 헝가리에서도 표출되었다.(155) 불가리아에서는 반란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핵심 요구 사항 가운데 일부-무조건적 강화와 민주화-는 실제적 정전협정의 체결과 10월 4일, 연합국이 강화를 위해 내건 핵심 조건 중 하나였던 차르 페르디난트의 퇴위로 충족되었다.(158) 끔찍한 유산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제국의 자유주의적인 새 지배자들은 처음에는 대중의 지지(적어도 수도에서는)를 등에 업었다. 중유럽의 패전국들에처럼 이런 지지는 자비로운 강화조약을 얻어낼 수 있으리라는 헛된 희망에 근거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독일 신학자이자 철학자 에른스트 트뢸치Ernst Troeltsch가 ‘정전 시기 꿈나라’라고 불렀던 시기의 초기 낙관주의는 틀림없이 순진해 보일 테지만, 그것은 당시 유럽 패전국 전역에서 강력했던 정서다.(160) 지금 우리는 그러한 수사가 패배의 그늘 아래 순전히 도구적이거나 심지어 기회주의적 움직임이었다고 일축하기 쉽다. 그러나 패전국들, 특히 중유럽의 많은 정책 결정자들은 1848년의 연쇄적인 자유주의 혁명들이 실패했던 것을 자신들이 마침내 달성했다고 굳게 믿었다. 1919년 1월 제헌의회가 소집되었던 중부 독일 도시의 이름을 따 국호를 정한 바이마르 공화국이 1848년 혁명의 적색, 흑색, 금색 깃발을 국기로 채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편 오스트리아에서는 민주주의자들이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1848년 빈 혁명에 맞서 빈디슈그래츠 원수Windisch-Graetz가 승리한 지 거의 정확히 70년 뒤에 탄생한 역사적 일치를 축하했다. 1918년의 온건한 혁명들이 1848년 이래 잘못된 정치적 발전상을 바로잡고 있다고, 당시 탄생하지 못했던 자유민주주의가 마침내 당당하게 승리했다고.(161)
중부유럽의 패전국들이 연이어서 황제 또는 왕가가 퇴위하거나 망명하고,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적 정부를 탄생시켰다. 낭만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윌슨이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던 14개조에 기대어 자비로운 강화를 기대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것은 1848년의 혁명의 완수이기도 했다. 오랜 역사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1919년의 3.1 운동에는 이런 조류와 두 가지가 일치한다. 하나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자주국가의 설립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왕정의 퇴조다. 고종의 죽음은 우연이었겠지만, 1919년에 일어났고, 그 뒤를 이은 순종은 권위를 인정받은 적이 없다. 조선 왕조의 사실상 마지막 왕인 고종의 죽음과 함께 군주제는 끝나고, 새로운 국가는 공화국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것이 1919년 초 한반도에서 벌어진 일이다.
독일 수도에 드리운 것처럼 보이는 볼셰비즘의 위협을 끝장내기 위해 자원병을 요청하면서, 노스케는 독일 사회 구성원들 가운데 시작부터 혁명을 질색하고 반대했던 자들, 그리고 지난 두 달 동안 그 묵은 원한을 풀려고 벼르고 있던 자들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그들은 공화국을 위해서 싸우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볼셰비즘’에 맞서 싸우고 있었을 뿐이다. 의용군 안에서, 패전과 이후 일어난 혁명에 격분한 과거 일선 병사들은 전쟁의 시험을 받지 않은 장교 후보생들과 우익 학생들하고 손을 잡았는데, 이들은 흔히 급진성과 행동주의, 잔혹성 측면에서 참전 군인들을 능가함으로써 자신들의 실전 경험 부재를 상쇄했다.(167) 이전의 많은 일선 병사들은 1918년 혁명의 발발에 맹렬히 반발했고, 자신들의 희생이 후방에 의해 배신당했다고 느꼈다. 전선에서 귀환하는 부대들은 때때로, 지나가는 길에 있는 소도시들의 노동자와 병사 평의회 지지자들에 의해 무장해제 되고, 모욕을 받고, 견장을 뜯겼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오랜 부재와 그에 따른 가족 내 수입 상실의 정당성이 승리로써 입증되지 못했기 때문에 가족한테서 전혀 환영받지 못한다고 느꼈다.(169) 기존 사회질서와 위계가 폭력적으로 뒤집힌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인식이 바이에른에 우익 반동을 촉발했다. 특히 뮌헨은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가장 굳건한 민족주의, 반볼셰비키 도시가 된다. 그리고 그 바이에른의 수도가 나치즘의 탄생지로 부상하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바이에른 소비에트 공화국의 몰락 이후 세계혁명에 대한 레닌의 희망도 사그라졌다. 이 시점에서 러시아 바깥에서 유럽 유일의 공산주의 국가는 32세의 전직 변호사이자 저널리스트 벨러 쿤이 이끌던 헝가리였다.(180) 국제적 후원이 부재하고 국내적 지지는 줄어드는 상황에서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의 미래는 암울해 보였다. 쿤 정권이 급진적 의제를 실행하고 그것을 무력으로 강제하려 하면서 최소 7명의 사제를 살해하고 교회 재산을 세속화하려는 공산당의 계획에 기겁한 가톨릭교도부터 검열과 자의적 체포, 비밀경찰에 장악한 자유주의자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헝가리 국민이 정권으로부터 멀어졌다. 여론은 무엇보다도 인플레이션과 식량부족에 대처하지 못한 무능과 부패를 두고 정권을 규탄했다. 이제는 전전의 특권적 지위를 상실한 젠트리 계층 다수가 농민들과 있을 법하지 않은 동맹을 형성하게 되었으니, 농민들은 농민들대로 부다페스트의 소비에트 정권이 자신들에게 토지를 재분배해주지 않는 데 안달이 났고 격분했다. 반反도시, 반反근대적 젠트리-농민 동맹은 국민 전체를 대변한다고 주장하면서 붉은 부다페스트의 메트로폴리턴적 엘리트 계층에 경멸을 쏟아냈다.(185-186) 국가에서 내부의 적들을 ‘청소’하는 전후 프로젝트는 국가적 재탄생을 위한 필수적 선행 조건, 패전과 혁명에도 불구하고 전쟁 당시 치른 희생들을 정당화할 폭력적인 재생의 한 형태로 여겨졌다. 어떤 의미에서 제국의 폐허에서 국가적 재탄생을 꿈꾸는 이런 추상적인 희망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고도로 이질적인 준군사 조직들을 하나로 묶는 유일한 것이었다.(190) 혁명을 공통적으로 반대하고, 민족적 부활에 대한 희망을 공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익 준군사 활동에 관여한 활동가들이 반드시 동일하 이데올로기적 목표와 야심을 품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왕당파를 옆으로 제쳐두더라도 중유럽의 급진 우파 사이에 미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관해 합의된 것은 없었다. 그들이 서로 동의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무엇과 맞서고 있느냐는 것이었다.(191-192) 계몽과 인간주의, 자연권 이념들과의 비판적 투쟁, 개인주의, 경제에 대한 부르주아적 관점, 의회주의, 근대 민주주의에 대한 반대. 타국의 민족주의적 적들보다 더 위험한 것은 국제주의적 적들이었다. ‘붉은 인터내셔널’, ‘검은 인터내셔널’(정치적인 가톨릭주의), 그리고 ‘무엇보다 독일 민족을 지배할 속셈을 품고 있는 유대 민족’.(192) 널리 퍼진 그 같은 정서를 고려할 때, 당연하게도 중유럽 유대인들은-비록 오스트리아-헝가리 인구의 5퍼센트 이하에 불과한 소수파였지만-대전 이후 우익 준군사조직의 폭력을 가장 심하게 겪었다. 극우가 멸시하는 모든 것을 대변한다고 하는 유대인들은 기독교 중유럽의 전통적 질서를 위협하는 ‘동방’에서 온 범슬라브 혁명 위협의 구현으로, 모스크바의 ‘붉은 첩자들’로 그려지면서, 그와 동시에 (또 역설적으로) 불분명한 자본주의 ‘황금 인터내셔널’이자 서구 민주화 세력으로 그려질 수 있었다. 이러한 비난들에 공통으로 담긴 것은, 유대인이 민족국가와 그들이 기대어 살아가는 ‘주인host 민족들’한테 ‘타고난’ 국제적인 증오를 품고 있다는 전제였다.(195)
혁명의 급진화, 즉 볼셰비키화가 일어났다. 베를린에서 로자 룩셈부르크가 간여한 바로 그 봉기가, 바이에른 소비에트 공화국이, 헝가리에서 소비에트 공화국이 수립되었지만, 곧 몰락했다. 그리고 그 자리를 견고한 반혁명의 물결이 채우게 된다. 이런 반혁명과 우경화를 이끈 것은 견고한 귀환 병사들의 정서였다. 귀환병사들은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전역에서 파시즘의 강력한 병사가 된다. 이들의 중요한 특징은 반대를 위한 연합이었고, 그들의 증오의 핵심에는 유대인들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볼셰비즘의 전파자들인 동시에 자본주의와 민주화의 첨병이었다.
무솔리니의 이중적 전략-의회와 사회 엘리트층의 지지를 얻어냄과 동시에 국가를 상대로 한 스콰드리스티 폭력을 후원한-은 분명하게 통했다. 그에 따라 국왕은 무솔리니를 불러들여 파시스트, 자유주의자, 민족주의자, 가톨릭민중당 인사로 구성된 연립내각을 구성하라고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무솔리니는 레닌과 볼셰비키한테서 아마 본인이 인정하고 싶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특히 의회 내 다수파라는 지위는 반대파에게 두려움을 주입하고 기회가 왔을 때 가차 없이 행동할 능력과 결연한 의지보다 훨씬 덜 중요하다는 교훈을 얻었다. 1918년 민주적으로 선출된 러시아 의회를 해산한 레닌에 뒤이어, 무솔리니의 총리 임명은 지난 5년 사이에 폭력적 수단을 통해 권위를 부여받은 민병대 정당의 수장에게 권력이 넘어간 두 번째 경우였다.(220)
합법과 불법의 결합, 폭력과 의회 민주제에 대한 동시 공략,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만연한 우려는 파시즘 정부의 합법적 수립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파시스트 정부는 적어도 어느 정도의 절차를 따라서 정권을 획득했다. 물론 그들은 곧 그들의 권력을 독재화했다. 1925년의 일이다. 이것이 경로다. 나치즘도 마찬가지였다. 합법적으로 집권한 히틀러는 수권법을 통과시켰다. 박정희도 마찬가지다. 1961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으나, 1962년 헌법을 국민투표로 통과시켰고, 1963년, 1967년, 1971년 직선제 선거에서 연거퍼 당선됐다. 그리고 1972년 유신체제를 구축하면서 종신집권을 꾀한다. 이승만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베르사유(그리고 특별히 배상 문제와 적대 행위 발발의 유일한 책임을 베를린에 돌린 ‘전쟁 책임’ 조항)에 대한 초점은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좁혀왔고, 가장 많은 것이 걸려 있던 당시의 최대의 쟁점을 다소간 주변화해왔다. 최대 쟁점이란 이전까지 육상 제국들에 의해 지배되어온 하나의 대륙 전체를 다수의 ‘민족국가들’로 구성된 대륙으로 전환시키는 일이었다. 이 쟁점은 갈등의 최종 국면에 가서야 비로소 1차 세계대전의 중심이 되었다. 영국이나 프랑스 어느 쪽도 1914년에 ‘국가들의 유럽Europe of nations’을 창출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전쟁에 나서지는 않았으며, 1918년 초부터 비로소 육상제국들의 해체가 명시적 전쟁 목표가 되었다.(233-234)
전쟁의 끝은 유럽의 육상 제국들의 해체였다. 유서깊은 왕조가 다스려온 오스만 제국, 합스부르크 제국, 로마노프 제국은 이도 상에서 사라졌다. 독일 제국은 영토가 크게 축소되고, 해외 식민지들을 박탈당했다.(234) 문제는 이런 제국의 해체가 전쟁 이전에 계획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전쟁이 막바지에 달하자 이런 문제들이 눈앞에 다가왔다. 해체는 분명했다. 일부 제국들은 전쟁 중에 이미 해체되고 있었다. 문제는 전승국들이 원래 제국을 해체할 생각으로 시작한게 아니라는 점이다. 전쟁을 어떻게 끝낼지, 전후 질서는 어떻게 수립할지, 오리무중이었다.
승전한 서유럽 제국들도 전쟁의 파국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일랜드는 1916년에 일어난 민족주의 봉기가 수포로 돌아갔지만, 결국 1922년에 영국군을 상대로 피비린내 나는 게릴라 전쟁을 벌인 뒤 독립을 쟁취했다. 다른 곳에서는 인도부터 이집트까지, 막 모습을 드러내기 위한 민족주의 운동들이 우드로 윌슨과 러시아 볼셰비키들의 지도자 레닌에 의해 (서로 매우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장려된 ‘자율적 발전’과 ‘민족자결’에 관한 공개적 담론에 고무되었다. 시오니스트와 아르메니아인, 아랍인들을 비롯해 국가 수립 권리를 인정받고자 하는 이들의 대변자들은 자신들의 ‘자결권’을 주장하기 위해 파리까지 왔다. 최초의 범아프리카 회의 같은 새로운 행위자들도 동일한 권리를 주장한 한편, 파리 리츠 호텔의 부주방장인 베트남 청년 응우옌 신 꿍(훗날 가명 호찌민으로 더 잘 알려진)은 우드로 윌슨에게 조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편지를 썼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비유럽의 작은 탈식민 운동 진영은 파리강화회의 결과들에 실망하게 될 운명이었으니, ‘민족자결권’이 연합국들이 선호한 중유럽의 일부 후계 국가들에게만 허용되고, 여타 지역들에는 부정되었기 때문이다. 실망은 곧 폭력적 행동주의로 탈바꿈했다.(235)
로버트 거워스는 한국은 언급하지 않는다. 한국의 3.1운동은 베트남과 함께 다루어진 셈이다. 베트남을 지배하던 프랑스는 물론 전승국이고, 조선을 지배하던 일본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국과 러시아 양쪽에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고무된 민족자결이나 독립의 흐름은 중유럽 국가들, 다시 말해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에 익숙한 지역이 아니면 해당사항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레닌의 볼셰비키 러시아는 서방을 내부로부터 흔들기 위해 자율적 발전의 논리를 꺼내들었다. 식민지들은 파리강화회의 결과에 실망하고, 폭력적 행동주의, 즉 무장투쟁으로 전환하게 된다. 바로 여기에 3.1운동을 위치시켜야 한다. 그 의미를 과대평가할 것도 없지만, 과소평가할 것도 없다. 이 시기에는 비폭력적이고, 민주주의적이며, 자유주의적인 운동이 대세였다. 그게 모두들 시도하던 방식이었다. 실패하고 나서 대부분 방향은 바뀌었지만. 그러니까 동시에 3.1운동이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을 촉발시켰다는 거짓 또는 과장은 멈추도록 하자. 그때는 모두가 그러던 시절이었다.
연합국의 시각에서 볼 때, 비록 중동부 유럽 못지않게 종족적, 종교적 구성이 복잡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제국의 경우에는 문제가 다소 더 명확해 보였다. 서방 외교관들과 정치가들에 의해 ‘유럽의 병자’이자 기독교 소수민족들의 압제자로 오래전에 낙인찍힌 오스만 제국이 중부 세력 편으로 참전하고,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대한 인종 학살적 정책을 취한 것은 (로이드 조지같이) 오스만 제국을 해체하려고 결심한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굳혔다. 문화적, 종교적 이해관계와 더불어 지정학적, 경제적 이해관계도 오스만 제국에 대한 태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제국의 아랍 영토는 모술과 여타 지역들에 대규모 석유 매장지를 포함하고 있었고, 보스포루스 해협과 수에즈 운하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해상과 육상으로 인도로 가는 안전한 통로를 확보하고 싶어 하는 영국에는 특히 그렇게 여겨졌다. 더욱이 시리아와 레바논에 대한 프랑스의 영유권 주장은 그 지역 기독교도 소수집단들에 대한 보호자라는 프랑스의 자기 인식과 ‘지중해’ 프랑스Mediterranean France라는 꿈과 크게 상관이 있었다.(243)
전승국들이 가장 탐낸 것이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다.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그들의 전리품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발칸 영토는 이미 독립이나 분할이 분명했다. 1차, 2차 발칸 전쟁의 결과도 있었고, 나름의 권력이 수립되고 있었다. 아나톨리아 반도의 경우, 콘스탄티노플을 통제하면서, 다르다넬스 해협과 보스포러스 해협을 관리하면 되었다. 동쪽에서는 물론 러시아가 압박해 왔다. 그리고 오스만의 아랍영토가 문제였다. 이 지역을 나눠먹는 것은 전승국의 운명이었다. 석유에, 인도로 가는 길에, 지중해 프랑스에. 1915년 후세인-맥마흔 서한, 1916년의 사이크스-피코 협정, 1917년의 밸푸어 선언들로 뒤섞인 중동에 100년간 피가 흐르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인 셈이다.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활약하던 그곳이다.
1918년 민주주의의 도래를 반겼던 그토록 많은 독일인들의 열광은 강화 조약 앞에서 1년도 못 되어 철저한 배신감과 원한으로 바뀌었다. 독일 국민의 상당수는 베르사유 조약을 1918년 혁명과 혁명이 가져온 결과인 바이마르 공화국과 연결했다. 혹자들, 특히 극우 진영의 사람들은 베르사유 조약을 바이마르의 ‘진짜 헌법’이라고 불렀다. 그들에게 바이마르 공화국은 외부적으로 강요된 ‘비독일적인’ 국가 형태, 그 유일한 목적은 독일인을 대대로 예속시키는 것인 나라였다.(272) 신생 민족 국가(폴란드,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인 왕국,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내 대규모 소수민족들은 ‘민족자결’권이 협상 세력의 맹방으로 간주된 민족들에만 부여되고, 그들의 전시 적국들에는 적용되지 않았음을 매우 분명하게 드러냈다. 연합국은 비유럽인한테도 ‘민족자결’권을 적용할 의향이 없었다. 식민지의 민족주의자들이 자치권을 요구하면서 파리강화회의에서 로비를 했지만 우드로 윌슨은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적 야심을 제지하지 못하여 그들의 높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국제적 맥락에서 봤을 때, 윌슨은 한 공동체가 자결권을 누릴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할 때 (당대 대다수의 서양인들과 마찬가지로) 분명 인종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윌슨이 각별히 애정을 쏟은 프로젝트, 바로 국제 연맹 규약은 파리강화회의에서 도출된 다섯 개 조약의 전문으로 발표되었는데 승전 제국들의 식민지인들을 결코 언급하지 않았다.(287)
패전을 처리하는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을 좌절하게 만들었다. 다른 육상제국들은 없어졌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은 독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 가혹한 조약을 바이마르의 진짜 헌법이라고 까지 불렀다. 협상단이 라인란트 할양을 막아낸 것 따윈 고려하지 않았다. 나치즘은 여기서 싹텄다. 반면, 민족자결이란 유럽적인 것, 유럽인만의 것이었다. 게다가 유럽 내 소수민족의 자결권도 협상 세력의 맹방에게만 적용될 뿐 그들의 적국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민족자결은 그후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관철되지 않은 지역이 많다. 아직도 세계의 곳곳에서 싸우고 있다. 그렇기에 윌슨의 민족자결은 냉정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터키 쪽이 제기한 그리스 쪽의 만행을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는 터키 쪽보다 그리스 쪽에 더 많은 책임을 돌려서 그리스 군사 개입에 대한 국제적 지지를 깎아내렸다. 그와 동시에 소아시아에서 그리스 쪽의 만행은 그때까지 단편적이고 국지적인 터키 쪽의 저항에 힘을 불어넣고 하나로 뭉치게 했으며, 항전 세력은 국민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콘스탄티노플의 술탄 정부와는 갈수록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아나톨리아 연안을 군사적으로 보호할 생각과 능력이 없어 보이는 정부는 이름난 민족주의자 장교들에게 군인으로 복귀할 이유를 제공했다. 에게해 연안을 따라 그리스군과 싸우는 일은 새로 태어난 ‘무슬림과 터키인’ 국가의 이름으로 이번 무력 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괴로운 패전의 기억을 극복할 기회를 제공했다.(308) 로잔 조약은 그것이 명목상으로 적용된 그리스와 터키의 맥락을 한참 넘어서는 중요성을 띠었다. 조약은 국가 정부가 ‘타자성’에 근거하여 자국 시민을 대량 추방할 수 있는 합법적 권리를 실질적으로 확립했다. 그것을 갈망하는 하나의 이상이자 유럽 육상 제국들 내의 대다수 사람들이-그들의 온갖 다툼에도 불구하고-수 세기 동안 퍽 잘 대처해왔던 현실로서의 문화적, 종교적, 종족적 다원성을 치명적으로 약화시켰다. 로잔은 소수집단 조약을 통해서 취약한 소수집단을 보호하기로 한 서방의 약속이 운명적으로 뒤집혔음을 알렸다. 만약 1919년에 종족적 공존이 여전히 보호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면, 미래는 이제 민족국가들이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한 일종의 선결 조건으로서 종족적 동질성에 속한 것으로 보였다.(325-326)
영국의 로이드 조지가 이탈리아를 막으려고 그리스를 충동질해서 일으킨 아나톨리아에서의 군사행동은 결과적으로 터키 공화국을 건설하는 토대가 되었고, 오스만 제국의 후예가 전쟁의 패배감으로부터 벗어나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리고 특히 그 전쟁을 마무리하는 로잔 조약은 대규모의 인구 이동을 정당화했다.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온 이민으로 그리스의 인구는 4분의 1이 늘었을 정도였다. 이제는 종족적이든 종교적이든 동질성을 정당화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소개, 대량학살이나 박해가 주된 방법이었다면 합법적인 인구 교환이라는 대규모의 공식적 인구이동으로 통해서라도 민족적 동질성은 확보해야 하는 가치가 되었다. 다양성을 유지해 온 제국의 가치는 설 자리가 없어졌다.
1917년 러시아 2월혁명의 새로운 특징 가운데 하나는 전쟁의 압력이 이 시스템의 첫 주요 균열로 이어지고 이내 그 완전한 내파가 뒤따랐다는 점이다. 1914년 이전 사회적, 정치적 갈등을 특징지었던 상대적인 제약이 사라진 채 새로운 행위자들의 폭력적인 권력 다툼을 가능케 한 것은 대전에서의 패배 그리고 전전 시스템의 붕괴였다. 이 시절의 첫 번째 숙명적 유산은 국제 갈등과 국내 갈등에 스며들어 결국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동부전선의 전쟁에서 절정에 달하는 새로운 폭력의 논리에 있었다. 1941년 개시된 나치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의 목적은 더 이상 상대편 군대에 군사적 패배를 안기고 패배한 소련에 가혹한 강화조건을 부과하는 데 있지 않았다. 그보다는 그 과정 속에서 정권을 파괴하고 상당한 비율의 민간인 인구를 말살하는 데 있었다. 중유럽과 동유럽의 모든 나라들에서 인종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겨지던 자들이 제거될 터였다.(336) 적의 비인간화와 범죄자화는 외부적 상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것은 다양한 모습의 내부의 적에게도 적용되었다. ‘적성 민간인enemy civilians’을 향한 이러한 새로운 태도에서 중심적인 것은, 유토피아적 신사회가 들어설 수 있기 전에 공동체에서 ‘이질적’ 분자들을 깨끗이 제거해야 하고, 공동체의 균형에 해가 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자들은 박멸해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는 것이다.(337) 대전의 패전국들에서 횡행한 내부 폭력의 방향과 목적은, 전쟁의 승패는 1918년까지 확정적이지 않았고 중부 세력의 패배는 오로지 후방전선의 배신의 결과일 뿐이라는 널리 퍼진 믿음으로 유도되었다. 이 ‘배신’과 ‘마무리되지 않은 일’에 대한 언급은 흔했다.(338) 상실한 영토와 인구를 ‘수복’하려는 욕망으로 추동되는 바로 이런 조약 수정주의가 종전 직후 시기로부터 길이 지속된 두 번째 유산이다.(342) 1939년에 시작되어 2년 뒤 지구적으로 확대된 유럽 전쟁의 중심에는 그러므로 양립 불가능한 정치 체제들 간의 무력 충돌 뿐 아니라, 상실한 영토와 1918년 이후 ‘외세의 지배’하에 살아가던 소수집단들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히틀러와 나치에게 이 소수집단들의 반환은 지상 과제였고, 이는 부다페스트와 소피아 정부에도 마찬가지 였다. 일본의 경우에 주도적인 사업가 집단과 군부는 식민화와 경제 착취를 위한 안정적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북중국에서 영토 정복을 주창해왔다.(346) 북중국에서 일본의 무력 팽창과 북아프리카와 지중해에서 무솔리니의 스파치오 비탈레spazio vitale의 꿈은 중동부 유럽에서 레벤스라움Lebensraum을 개척하려는 히틀러의 야심과 기능상 동일했다. 독일 민족을 위해 바르샤바와 우랄산맥 사이 영토에 ‘종족 청소된’ 생활공간을 창출하고자 한 히틀러의 제국 프로젝트는 1차 세계대전 이전으로 거슬러 가는 뿌리를 갖고 있었다.(347) 인종주의는 추축국 세 나라의 팽창주의와 제국 건설의 핵심에 위치했는데, 바로 그것이 ‘열등’ 인종-그들이 슬라브인이든 중국인이든 아니면 아프리카인이든-이 사는 영토 정복과 적 민간인의 살상이나 강간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대동아 ‘공영권’을 창출하겠다는 수사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권은 병사들이 한국과 중국 민간인들을 집단 학살하고 도 성적으로 학대하는 것을 허용했다.(348) 히틀러는 연설과 상징적 제스처를 통해 거듭하여 ‘전후’ 시절을 돌이키며 행동의 전거로 삼았다. 총통은 대전이 끝난 뒤 독일에 가해진 역사적 불의를 바로잡고 있다는 것이었다.(351)
로버트 거워스는 국내와 국제 안팍으로 전개되는 새로운 폭력의 논리와 영토와 인구를 수복하려는 조약 수정주의를 1차 대전 전후의 유산으로 삼는다. 그리고 여기에 깊이 깔린 이를 정당화하는 인종주의. 역사적 불의를 바로잡겠다고 노력하던 히틀러. 복잡한 심경이 든다. 아베 총리를 필두로 일본은 역사를 수정하고 바로잡으려 하고 있다. 한국이 바뀐 것보다 일본이 변화한 그 진폭이 훨씬 크다.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 센가쿠 열도, 북방 4개 도서에 대한 반환 주장 역시, 그 밑바탕에는 수정주의가 깔려 있다. 그리고 한반도의 남과 북, 두 개의 나라는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이 부과한 거대한 틀을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그 틀의 변경은 전쟁을 하지않고서 이루어져야 한다. 새로운 발상의 전면적 전환이 요구된다. 그런 일을 감당할 상상력과 힘이 있을까 두렵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인 것이다. 하지 않으면, 현상유지일 뿐이다. 그리고 그 현상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점차 부식되고, 내파되어 간다. 바꿀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 뿐이다.
2019. 3. 3.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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