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 샤비트, 『약속의 땅 이스라엘』.


1920년대 초 에인하롯 키부츠의 개척자들. 노동여단. 전위부대.

아리 샤비트Ari Shavit, 『약속의 땅 이스라엘: 고난에 찬 유대 민족 100년의 부흥 분투기My Promised Land: The Triumph and Tragedy of Israel』, 최로미 역, 글항아리, 2016(2013).

현대의 세속국가 이스라엘에 대한 모처럼 흥미로운 이야기.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요새말로 뇌피셜만 넘쳐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유대인 찬양과 이스라엘 찬양이 한 때 판을 쳤다. 친미 성향과 개신교 근본주의가 군불을 땐 결과다. 둘은 하나인가. 그렇지만, 또 그것만은 아닌데. 유대인 교육법에 대한 관심은 그 연원이 꽤 오래된다. 한국의 모든 근대 문물이 일제시대에 들어온 것이고, 일본과 동맹이었던 주축국 독일에 범람했던 유대인 음모론과도 관련이 있다. 그러니까 기원과 연원을 따지기는 쉽지 않지만, 반유대주의의 근거가 되는 유대인 음모론에서 등장한 유대인의 탁월성에 대한 담론이, 1948년 건국한 후 승승장구하는데다 핵까지 개발한 이스라엘이라는 작고 강한 나라에 대한 동경과 찬양으로 이어지다가, 박정희가 얼마나 부러워했겠는가, 다시 한 번 미국에서 유행하던 이스라엘에 대한 축복론으로 흘러간다. 미국 우파에 유행하는 이스라엘 회복론과 성전 재건 등으로 기이하게 개신교 신학과 유대 사상(?)이 짬뽕되기도 한다. 한때 유행하던 백 투 예루살렘 운동, 그때 교회들에선 특별헌금을 걷었고, 그 돈은 러시아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들어오는 데 쓰이기도 했다. 배달사고가 안났다면 말이다. 이 책에도 나온다. 그렇게 들어온 인구가 100만명. 그러다가 요즘에는 이스라엘 비판 목소리가 훨씬 커졌는데. 평화활동가들의 노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 깃발 들고 광장에 나오는 사람들 때문에 반감이 더 커진 것도 같고. 여기에 내가 가지고 있는 고대 근동에 대한 약간의 지식까지 뒤섞여서 도대체 갈피를 잡을 수 없던 차에 흥미로운 책이라 손에 들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간간이 이스라엘에 대한 책이 나온다. 슐로모 산드의 『유대인, 불쾌한 진실』도 나왔고, 시오니즘의 성전인 테오도르 헤르츨의 『유대국가』도 나왔고.

아리 샤비츠는 앵글로-유대인의 후손이다. 이 책의 이야기는 자신의 증조부인 영국의 부유한 유대인 허버트 벤트위치 경의 1897년 팔레스타인 방문기로부터 시작한다. 앵글로-유대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은 아주 소수에 속한다. 그리고 이 공식적으로 거주와 자유를 인정받은 서유럽의 유대인이 왜 팔레스타인의 사막을 찾았는지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알려진대로 19세기에 북미와 서유럽에서는 유대인들이 해방되었다. 이 해방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유대계 학자들이 표면으로 떠오른다. 이들은 상당수는 실상 동화된 유대인들이었다. 그리고 아리 샤비츠가 보기에 유대인 문제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익숙한 홀로코스트에 대한 서사가 출발점이 아니다. 이런 점이 이 책의 매력. 지난 1000년간 유대인의 생존을 보장 해준 거대한 두 존재는 신과 게토였다. 그러나 19세기의 100년 동안 신은 떠내려갔고, 게토의 벽은 무너졌다. 세속화와 해방이 유대인의 생존 공식을 침식해서, 이미 이 집단은 신앙의 전통을 상실하고 치명적 위험에 처해있었다.(21) 때문에 유대 민족이 살아남으려면, 디아스포라 민족에서 주권 민족으로 거듭나는 변화, 즉 혁명이 필요했고, 테오도르 헤르츨이 이끈 시온주의가 바로 이것이었다.(21) 유대인은 생존의 위험에 처해있다. 이것이 이 책의 일관된 주장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유대인이 느끼는 생존의 위험이야말로 유대인의 한 본질일 터이다.

1921년의 하롯 계곡을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개척사의 시점으로 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자유주의자들의 낭만주의적 정착도,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도 모두 실패했을 때, 등장한 새로운 도전은 볼셰비키 혁명에 가까운 엄격하며, 과격한 공산주의 식민지를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1920년 노동여단이 창단되고, 1년 만에 1000명의 동지집단으로 커졌다. 이들은 혁명 엘리트 처럼 행동했다.(54) 74명의 노동여단 개척자들이 1921년 9월 하롯 계곡에 침입했다.(57) 에인하롯 공동체라 불리는 이들의 개척 캠프는 이스라엘의 근원이자 출발점이다. 신화가 된 키부츠 사회주의였다.(58) 이들은 주변의 팔레스타인과 베두인을 몰아내고, 놀랍게 개척에 성공하게 된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이들은 스스로를 고아들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스스로의 뿌리를 잘라냈고 부모에게 등을 돌렸기에, 아비어미도, 신도 없는 존재들이었다. 시온주의는 고아들의 운동, 유럽 고아들이 벌인 절박한 십자군 운동이었다. 기독교 대륙이 원치 않았던 아들딸들이 대리모의 증오로부터 달아나면서, 자신들은 혈혈단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신도, 부모도, 집도 없이 새로운 문명과 국가를 만들내야 했다.(62) 20세기 초부터 러시아에서 일어난 유대인 박해가, 이들을 먼저 불러들였다. 이들은 유럽의 고아들로 팔레스타인에서 혁명을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랬기 때문에, 다른 정착자들의 시도와 달리 성공할 수 있었다. 고전음악은 이들의 정체성 표현이었다. 1926년 야샤 하이페츠는 이곳에서 연주하게 된다.(80) 그리고 이들의 눈에는 주변의 아랍, 팔레스타인, 베두인 마들이 보이지 않았다. 유럽의 고아들이 만들어낸 이스라엘이라는 출발점을 정말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글을 쓸 때, 이 키부츠는 젊은이가 없어 무너져 가고 있다.(83) 이 점만은 세계 공통인 것인가. 1936년의 레호보트가 보여주는 오렌지 과수원의 풍요와 성공은 유대 민족이 이 곳에 와 집을 짓고 나무를 심으며 뿌리를 내릴 권리를 보여준다고 저자는 말한다.(114)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1936년 4월 15일에 첫 총성이 울렸다.(116) 1987년의 인티파다가 시작이 아니고, 1973년 욤 키푸르 전쟁도 아니고, 1967년 6일 전쟁도 아니고, 1948년의 독립전쟁도 아니었다. 분쟁은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적창한 맨 처음부터 였다. 아리 샤비트는 이스라엘의 본질 중 하나가 점령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수천년간 아랍인과 베두인들이 살던 땅에 살겠다고 돌아와 총을 들고 침략한 것이다. 분쟁은 처음부터 피할 수 없었다. 1942년 시온주의 청년지도자 슈마르아후 구트만은 마사다를 재발견한다. 그들은 마사다 계곡에서 로마 제국의 포위에 맞서 어린아이들까지 자결한 현장에서 유대를 재발견한다. 이것은 현대성과 세속주의를 초월하는 현대적, 세속적 상징, 그 자체의 인위성을 초월하는 인위적 상징이다. 히브리의 현재에 깊이 부여하여 히브리의 미래에 직면할 수 있도록,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민족주의적 목표를 달성하고자 인위적 신비주의를 불러 일으켰다.(138-139) 유럽에서 들려오는 홀로코스트의 소식에서 마사다는 유대 민족의 외로움에 대한 신화적이면서 형이상학적 암유였고, 이스라엘 땅 유대인의 절박한 전쟁에 대비시키는 일 이상이었다.(153) 외로운 사막의 요새가 시온주의의 표상이었다.(155)

1948년 여름, 신생 이스라엘 방위군은 아랍인과 공존하던 리다에서 아랍인들을 몰아낸다. 이 과정에서 사원을 포격하고 공격하면서, 250명 이상을 학살한다. 시온주의의 첫 대학살이었다.(170) 리다는 블랙박스, 시온주의의 어두운 비밀이 놓여 있는 것이며, 시온주의와 리다는 공존할 수 없다는 근본적 모순이 바로 비밀이었다.(171) 아리 샤비트는 줄곧 공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평화주의자로 살아왔던, 그의 인생과는 다소 모순되어 보이는 결론을 그는 가져온다. 그는 말년에 모든 검은 속을 드러내고 솔직하게 변신한 어둠의 마법사 같은 논의를 펼친다. 유대인들은 생존을 위해 조상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자신들의 귀환은 처음부터 점령이었다. 그리고 폭력과 전쟁으로 몰아 낸 이들과는 어차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없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처음부터 선택이었다.

1957년의 주택단지는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들과 유럽에서 탈출한 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신생국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총 인구 보다 더 많은 이주민을 받아들였다. 1957년 인구는 200만에 달했는데, 100만이 이주민이었다.(244) 그러나 그 기적은 부정否定에 기반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우선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부정했다. 마을을 밀어버리고, 토지는 몰수하고, 시민권은 무효화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기억과 혼에서 팔레스타인을 지워버리고, 다른 민족은 존재하지 않단던 양, 추방한 일이 없었던 양 살았다. 난민 수용소에 있던 그들을 외면했다.(246-247) 더 놀라운 지점이 있다. 젊은 이스라엘은 20세기 유대인들의 대재앙 역시 부정했다. 홀로코스트 기념관 야드 바셈은 세워졌고, 국제사회에서 유럽 유대인의 비극을 논했지만, 이스라엘 자체 내에서 홀로코스트는 설 자리가 없었으며, 생존자들 조차 자신들의 사연을 입에 올려서는 안되었다. 이스라엘 연속체는 트라우마와 패배와 고통과 참혹한 기억을 거부했고, 개인을 위한 자리도 없었다. 이스라엘은 과거의 공포를 감당할 만큼 강하지 못했다. 팔레스타인 과거의 부정, 팔레스타인 참사의 부정, 유대 과거의 부정, 유대 대참사의 부정.(248-249) 홀로코스트의 부정은 정말 기묘한 것이다. 일견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기도 하지만. 유대인 스스로 거기에 침묵하도록, 강요받고 침묵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래서인가, 이스라엘의 지난 100년을 다루는 이 책에서 홀로코스트 서사는 부분적으로만, 주변적으로만 등장한다. 그들 모두에게 공통되기는 했으나, 그것이 핵심서사는 아니다. 이 점은 좀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1967년 이스라엘은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핵무장을 하게 된다. 네게브 사막 한 가운데 디모나에서 였다. 핵무장은 이스라엘에 현대성을 가져왔다고 말한다. 디모나는 현대성의 표현이자 현대성의 촉매였다. 이 새로운 보호막 아래서 새로운 이스라엘인들은 느긋해진 되신 동원은 잘 되지 않았으며, 디모나는 유대국이라는 집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건전하고 온전하게 살아가도록 서구 유럽인의 삶과 다른 삶을 살도록 했다고 말한다. 아리 샤비트는 핵무장을 찬양하며, 디모나가 이스라엘이 보여준 극치라고 말한다. 전망과 상상력, 냉철함, 과감성, 끈기, 정력, 자제력, 결의, 합리성, 제국주의적이지 않은 안보, 광신적이지 않은 애국주의, 독창적 외교와 세련된 지성, 겸손함, 사무적인 태도, 현실에 대한 간명한 이해와 현실을 감당해내려는 노력, 광적인 상황을 이성으로 해결하려는 시도. 디모나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45년간 상대적 안보를 유지했고, 중동은 45년간 상대적 안정을 누렸다고 평가한다.(292) 나로선 전혀 동의할 수 없지만, 아리 샤비트의 글에서 한 가지 만은 분명하게 읽을 수 있다. 중동에서 이스라엘의 패권은 핵독점에 근거한다. 이스라엘의 존립 역시 핵독점에 근거한다. 후반부에서 다소 난잡하게 펼쳐지는 이란의 핵무장에 대한 위협적인 경고들은 바로 이런 논의에 근거한다. 트럼프에 의한 이란 핵합의 변경 노력은 뿌리가 깊다.

1975년 오프라에 최초의 정착촌이 시도된다. 이제는 3500곳으로 늘었다. 정착촌을 설립하는 일은 종교적 시온주의를 시온주의 서사의 주변부에서 중심으로 옮기려는 노력이었다. 오프라를 향한 갈망은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감정적이었다. 이 민족종교 집단이 스스로를 내세울 수 있는 곳은 주권국 이스라엘의 국경 밖에 있는 소유 경계가 불분명한 지역뿐이었다. 민족종교 젊은이들이 고개를 들어 세상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아리 샤리프는 오프라는 21세기에는 존재하기 어려운 방식이라고 말한다. 오프라는 자궁외임신으로 시작되었고, 국가법과 국경, 국가 통치권 밖에서 잉태되었다. 오늘날까지도 오프라는 국제법 밖에서, 국제적 맥락 없이, 국제적 친선이 전무한 상태에서 산다. 오프라는 존재함녀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341-342) 웨스트 뱅크에 설립된 정착촌은 팔레스타인 문제의 핵심 중 하나다. 아리 샤리프는 여기서 시온주의 서사의 변경을 말한다. 아리 샤리프의 눈으로 보았을 때, 1975년과 1977년은 변곡점이다. 1977년은 노동당이 정권을 잃고, 우파 리쿠트 당인 정권을 장악한 바로 그 해다. 이것은 시온주의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정체성에 대한 변경이 시도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까지의 이스라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중동의 유럽이다. 동유럽의 아쉬케나지 엘리트들이 세운 중동의 유럽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부터 고전음악에 그렇게 몰두했던 것이다.

1987년에 시작된 인티파다 이후 등장한, 1991년의 가자 해변의 수용소는 수용소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악하지 않은 사람들이 뭉쳐 어떤 식으로든 악한 행위라는 결과를 산출해내며, 악은 늘 그 부분들의 합보다 크며, 악에 기여하며 악을 수행하는 전 존재의 합보다 크다. 흐트러진 외양과 어설픔, 소시민적인 하찮은 방식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가자에서 악이며, 그 악은 교활한 악, 저절로 발생하는 악, 책임이 누구에게도 없는 악, 행위자가 없는 악.(358) 이런 설명은 마치 한나 아렌트를 연상시킨다. 오랫동안 이스라엘에서 히브리어로 한 작품도 번역되지 않았던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안의 진부성banality of evil. 그러나 동시에 불가피하다고 변명한다. 살아남기 위해 강해져야 하고, 공격당하면 대응해야 하며, 가자를 점령하려면 수용소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유대 민주국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자기 배신이다.(359) 여기서 다시 한 번 자신의 전망이 드러난다. 평화운동에 투신했던 자신 답게, 비판은 수용한다. 그러면 어디로 가게 될까.

1993년 이스라엘은 PLO와 오슬로 협정을 맺게 된다. 노동당의 이츠하크 라빈이 수상이었던 시절이다. 1995년 라빈이 암살된 후, 노동당은 아주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야당의 길을 걷게 된다. 협상파는 권력을 잃었다. 아리 샤비트는 이스라엘 좌파의 근본적 결함이 점령 문제와 평화 문제를 구별한 적이 없다는 데 있다. 점령은 틀렸다. 점령은 윤리와 인구통계, 정치적 측면 모두에서 재앙이다. 그러나 평화에 대해서는 틀렸다. 평화는 실현불가능하며, 평화의 상대방은 없다.(385-386) 인구통계적 측면에서 재앙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점령지에는 아랍인구가 많다. 아랍인구는 인구증가율도 높다. 점령지가 통합되면, 유대인은 다수파로서의 지위를 상실할 우려가 있다. 아리 샤비트가 유대는 점령지를 포기하고, 대신 팔레스타인은 유대 국가를 인정하고, 대신 귀환권은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해결책이기 때문이다.(381) 평화를 협의할 파트너가 없다는 지적은 꽤나 타당하다. 팔레스타인에게 평화란 어떤 식으로든 점령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궁극적으로는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차라리 모두의 귀환권을 인정하는 단일 민주국가를 주장하기도 한다. 이 경우에 모두 돌아오면, 아랍인이 다수가 된 국가가 되기 때문이다. 그 출발점은 좌파 고유의 도덕적 환상에 있다. 아리 샤비트는 1956년 모세 다얀의 장교의 장례식 연설을 인용한다. 모세 다얀은 우리가 그들의 눈에 침략자이기 때문에, 준비된 자세로 무장하는 길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착촌 오프라의 죄악은 훌다의 죄악을 가렸다. 그리고 훌다는 평화는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406-407) 아리 샤비트는 일관되게 이스라엘은 침략과 정복에 의해 수립된 국가라고 말하고 있다. 그걸 솔직하게 말하는 순간 어떤 흑마술에 오염되는 걸까.

1999년 뉴스의 한복판에 섰던 아리에 데리의 나는 고발한다로 끌고 간다. 종교 정당 샤스의 지도자로 초정통파를 대표하는 아리에 데리의 이야기에 적지 않은 서사가 숨어 있다. 그는 1959년 모로코의 메크네스 출생이다. 그게 왜 문제일까. 시온주의는 이스라엘을 동유럽 유대 민족에게 집이 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1939년과 1945년 사이, 동유럽 유대 민족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시온주의는 동쪽으로 눈을 돌렸고, 1945년 홀로코스트 이후 전 세계 유대인의 10퍼센트 만이 동방계였지만, 이스라엘에선 50퍼센트였다. 한 종족을 위해 설계된 나라가 다른 종족의 거주지가 되었다. 본래의 설계가 적합하지 않았는데도, 시온주의는 해악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며 밀어붙였고, 이 용광로는 잔혹하리만치 효율적으로 작동했다. 나라를 주조했으나, 구성원 각각의 정체성을 초토화하고 구원하기로 되어 있던 영혼에게 화상을 입혔다.(436) 더욱이 1967년 6일 전쟁 직후 지중해 연안과 아랍국가들에서 공존하던 유대인들에게 박해가 일어나고 또 수십만이 이스라엘로 들어오게 된다. 이들도 수용소와 배치라는 용광로를 거치게 된다. 물론 이 용광로는 melting pot으로 미국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은 동유럽 출신 자유주의 아쉬케나지들에 의해 구상된 국가와 사회로 이들이 구상한 디자인에 따라 새로 들어오는 모든 유대인에게 혼합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 혼합의 결과 동방계 유대인들은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인종갈등이다. 동유럽 백인과 아랍계 유색인 간의 갈등이자 정치권력을 둘러싼 투쟁이다. 1977년에 리쿠드 당이 집권하고 1981년 폭력적이며 선동적인 선거운동 후 권력이 넘어갔다.(438-439) 디아스포라를 부인하고 홀로코스트를 부인하고 팔레스타인을 부인했던 그 나라는 동방의 존재 역시 부인했다.(440) 아리에 데리 만이 아니다. 페미니즘 좌파 언온인이자 정치 토크쇼 진행자인 가비아도 아리에 데리와 동질감을 느낀다. 것은 수치감에 기원한다. 그녀는 데리가 북아프리카 유대인의 전통을 무대 중앙으로 옮겨 놓았다고 말한다. 그녀는 동방계 유대인은 독립전쟁에서도 홀로코스트에서도 피를 쏟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은 자신들의 집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용광로는 전통을 억눌렀다. 이 유럽의 요새는 아랍어를 하는 유대인이라는 지붕으로 덮었고, 시온주의는 이들의 아랍 정체성 탓에 공황에 빠지게 되었다. 그녀의 할머니는 그녀에게 공부할 것과 모로코 남자가 아닌 폴란드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 백인과 결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의 세 아이는 아쉬케나지 혼혈이다.(441-446) 동방계 유대인은 상처받고 피를 흘리며, 집도 없는 영혼이다.(448) 상상도 하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이것은 인종갈등이다. 같은 민족을 형성하고 있는 두 집단 간의 극심한 인종갈등이다. 이스라엘 정치의 근원적 균열은 좌파와 우파의 갈등도 아니고, 종교와 세속의 갈등도 아닌 인종갈등이었다. 동방계인 초정통파 유대인들은 지금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이 뒤를 이어서 개인주의화하는 이스라엘의 퇴폐와 타락, 독점기업집단의 증가와 신흥자본주의, 아랍계 이스라엘인들의 주장과 운동, 로스차일드 대로의 점거와 같은 새로운 좌파의 등장, 이란 핵문제 등으로 이야기는 어지럽게 이어진다. 특히 1990년대 이후의 자본주의적 부흥에는 소련동구의 몰락 후 이민한 구소련의 100만 유대인이 크게 기여한다. 그들은 소련의 첨단기술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증조부의 고향 영국을 방문했을 때, 홀로코스트도, 대학살도, 반유대주의도 없는 이 곳에서 유대인은 죽어간다고 말한다. 개화한 유럽도, 민주주의 미국도, 인자한 서구 문명은 비정통파 유대교를 파괴한다고 평가한다.(625) 위협받지 않는 곳에서 유대 정체성은 유지 되기 어렵다.

아리 샤비트가 보는 히브리 정체성은 혁명성이었다. 이 정체성은 자기 자신을 유대교와 유대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소극적 실존에 맞서는 반란이라 정의했다. 히브리 땅과, 히브리 언어와, 히브인의 미래에 대한 확신에서 자기 모습을 찾고, 성서를 숭상하되, 성서 시대 이후의 유대인의 역사와 전통은 무시했고, 진보와 행동과 삶에 대한 태도를 가지고,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와 자유유주의적 민주주의를 지향했다.(661-662) 그가 본 이스아엘의 절정기는 1950년대 였다.(663) 아리 샤비트는 3차 중동전쟁 그러니까 1967년 6일 전쟁 이전의 영토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점령지를 포기하고, 그러나 아랍계의 귀환권도 인정하지 말고, 팔레스타인과의 평화 공존도 기대하지 말고, 요새 국가 이스라엘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복고적 전망이 가능할까. 이스라엘은 변해버렸는데.

이스라엘의 시온주의가 변화하기 시작한 1975년을 기점을 이스라엘은 점점 더 종교적인 국가로 변하고 있다. 그 이전 이스라엘은 세속적 사회주의적 국가였다. 그리고 지금은 아주 세속적이면서도 종교적인 사회로 변모하고 있다. 그러나 외부인으로서는 그들이 말하는 초정통주의(하레디파)나 종교성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많은 투쟁과 이민을 받아들이면서 다른 국가로 변한 이스라엘은 이미 점령지를 포기할 수 없는 국가다. 아리 샤비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평화적인 길을 택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웨스트 뱅크(요르단강 서안)에서 정착촌을 철수하거나 유지하느냐의 문제는 오직 현실적인 필요와 유효성에 의해서만 결정될 것이다.

아리 샤비트는 점령과 위협이라는 두 가지 사실에서 출발해서 요새국가를 지키자는 주장으로 귀결한다. 점령국가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여기서 이렇게 살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동시에 우리를 인정할리도 없으니 싸우면서 살아야 한다는 주장은 어딘가 복잡한 마음을 남긴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붕괴를 노출하는 것이다. 그나마 앵글로-유대인이나 아쉬케나지의 입장은 영어로 쓰여진 글을 통해 접할 수 있다. 세파라디, 정통파나 초정통파(하레디), 동방계 유대인의 목소리가 실제 어떻게 구성되고 어떤 서사를 구성하는지 알기 어렵다. 현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는 아버지는 바르샤바 출신의 아쉬케나지고 어머니는 오토만 예루살렘 출신으로 세파라디로 볼 수 있다. 그는 세속 유대인. 그의 정치적 파트너는 모로코 출생의 아리에 마클루프 데리는 동방계. 그는 초정통파 즉, 하레디. 출생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존재 자체가 현재 이스라엘의 현상을 보여준다. 그래서일까. 1970년대까지에 대한 아리 샤비트의 서술은 힘이 있지만, 그 이후는 지리멸렬하다. 이스라엘을 보는 단추구멍 하나쯤의 역할은 한다고 할까. 현대 이스라엘에 대한 판단을 쉽게 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사족이지만, 글항아리의 걸작 논픽션 시리즈는 빠지는 책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흥미로운 건, 영어판 발간이 2013년인데, 정작 마지막 장들에는 2016년 이야기들이 나온다는 점. 아마도 저자가 보내준 것이겠지만, 설명이 없다. 번역에는 대체로 불만은 없다. 흔히 쓰이지 않는 농업용어들은 사전을 보면 된다.

2019. 1. 28.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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