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카시오-코르테스가 며칠 전 미국 연방 하원의원 뉴욕 퀸즈의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10선의 조 크롤리를 제치고 승리했다. 그는 낸시 펠로시의 뒤를 이어 원내대표 역할을 할 사람으로도 꼽혔는데. 오카시오-코르테스는 28살 버니 샌더스 캠프에서 일했고, 바텐더 출신의 평당원. 이변이라면 이변이고. 정체성 진보에다 사회주의자. 어떤 의미에서 급진적 성공으로 보이지만 다른 의미로 미국 민주당이 트럼프와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혼란 속에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어떤 결과를 가져올런지는 모르겠지만.
마크 릴라Mark Lilla,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 정체성 정치를 넘어The Once and Future Liberal』, 전대호 역, 필로소픽, 2018(2017).
정체성 정치가 가지고 있는 종교에 특유한 근본주의적 성격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차 나오자 마자 소문이 난 이 책을 펼쳐 읽게 되었다. 그리고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한 가지는 번역어 문제이고, 다른 한 가지는 이 책의 주제인데. 중요하지 않은 번역어 문제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 보자.
역자 전대호는 liberalism을 진보주의로 progressivism을 급진진보주의로 옮긴다. 역자의 일러두기에 이미 나온다. 그리고 또 흥미롭게도 dispensation을 ‘정치적 통치 체제’라고 옮긴다.(12) 마크 릴라가 기독교 신학용어라고 하는데도 그렇게 한다. 그리고 civics는 시민학으로, 흔히 civil right를 시민권으로 옮긴다. liberalism 또는 liberal을 자유주의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진보주의라고 할 것인가는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자유주의라고 하자니 고전적 자유주의나 신자유주의와는 헷갈리기 쉽고, 진보주의라고 하자니 마르크스주의와의 관련성을 연결하기 어렵다. 그래도 역자는 과감하게 진보주의라고 옮겼는데. 이것은 liberal과 liberalism을 대표하는 미국 민주당이 차지하고 있는 정치적 입지와 지칭 그리고 한국의 더불어민주당으로 대표되는 세력을 민주진보라고 부르는 데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진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문자적이고, 종교적 의미는 포기한 셈이 된다. ‘진보’라는 단어를 신성시하던 1980년대의 후예들은 쓰기 좀 어려운 번역어이지만. 과연 내가 역자라면 자유주의라고 했을까? 아니면 리베랄이라고 음차를 했을까? 결론부터 나라면 미국자유주의나 (미국식) 자유주의라고 옮겼을 것 같다. 이걸 진보주의라고 옮긴다면, 한국에서 통용되는 진보 혹은 진보주의와는 다른 뉘앙스를 가지게 되기 때문. 물론 한국의 진보가 뭘 뜻하는지도 영 미지수다. 한국의 민주당 보다 왼쪽이라는 뜻이긴 한데. 그렇지만, 어차피 나는 번역자가 아니니 내 의견은 중요하지 않다.
dispensation을 옮기는 문제는 이 보다는 간단하다. 이 단어를 신학적으로 번역하면 그때는 ‘세대’라는 말을 써야 한다. 그런데 아마도 generation이라는 말을 세대로 번역하기 때문에 이 말을 쓰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말의 번역이 꼬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말이 마크 릴라가 지적하는 기독교 신학적으로 독특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흔히 한국어로 세대주의라고 번역되는 dispensationalism이란 창조로부터 종말까지가 7개의 dispensation(시대 또는 세대)로 구성된다고 주장하는 특정 분파의 사람들의 용어이고 이 각 dispensation 즉, 세대 또는 시대에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달라진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 세대 중 하나가 율법 시대, 은혜 시대 같은 분류이다. 그런데 이 입장은 용어와는 달리 그 내용이 의외로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데.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해도 휴거 혹은 들림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자다가 아이가 갑자기 사라지고 엄마만 남는다거나 비행기에서 기장이 갑자기 사라져서 비행기가 추락한다는 따위의 선택받은 자들의 들림 곧 휴거 사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 사람들이다. 『휴거』나 『레프트 비하인드』 같은 소설인지 공포를 유발하여 참회와 개종을 강요하는 사이비 예언서인지 알 수 없는 책들이 널리 알려져 있고, 심지어 영화나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있다. 나도 그런 책을 읽고 한동안 공포에 사로잡혔을 정도로 강렬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여하튼 시대라고 번역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그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나 차이를 살릴 수 없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 달라질 정도로 다르니까. 아니면 단순히 era와 구별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래서 마크 릴라는 루스벨트와 레이건 두 개의 dispensation을 말했고, 그걸 역자는 정치적 통치 체제라는 다소 지나치게 친절한 용어로 번역해 두었다. 뭐 틀렸다는 말은 아니다. 마치 미셸 푸코의 biopolitique를 생정치라고 하지 않고, 생명관리정치라고 하는 식이다. 역시 나라면 ‘시대’ 정도로 번역한 다음, 기독교의 세대주의에 대해 조금 긴 역주를 써두었을 것 같다. 알다시피 마크 릴라를 이해하는 데, 미국식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조금은 필요하니까. 뜬금없지만, 난 그래서 지금이라도 국한문 혼용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것들에 비하면 civics를 시민학으로 번역한 것, civil rights movement를 시민권 운동으로 번역한 것은 애교에 가깝다. civics는 옛날 말을 살려서 공민 과목 또는 어색하지만 공민학이라고 하거나 국민윤리 정도로 하면 좋았을 텐데. 시민권 운동보다는 민권운동이라는 잘알려진 표현이 낫고. 아마도 역자는 마크 릴라가 시민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그걸 살리려고 한 것일테지만. 영문 ci에는 ‘시’라는 라임을 넣어서. 또 하나는 국민이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피하려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이 책을 읽은 사람은 누구나 알겠지만, 마크 릴라가 말하는 시민이란 한국에선 결국 국민일 수밖에 없다. 여튼 이 문제에 대해선 이 글 뒷부분에 쓰려고 한다.
책 내용과 무관할 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는 번역어 이야기로 시작한 이유는 역자 전대호도 휘말린 하나의 소동 때문이다. 칸트학회가 주도하고 한길사가 발간하기로 한 칸트 전집(실제로는 선집)을 둘러싼 소동 말이다. 나는 이 일을 논쟁이라고 불러주기 좀 어렵다. 요즘 한겨레 인터넷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관련자들의 반박글이 실린다. 판을 제공한 한겨레만 트래픽을 올려서 돈을 보는게 아닐까. 이름도 쟁쟁한 철학자들이 여기 나섰다. 백종현, 김상봉, 이충진, 이종훈, 여기에 역자인 전대호도 가세한 바가 있다. 이글을 쓰다보니 이종훈이 또 글을 하나 올렸다. 철학자들이 신문의 인터넷 지면에서(분량의 제한도 없고, 발간일을 기다릴 필요도 없는) 민낯을 드러내고 맨주먹으로 싸우는 꼴을 보고 있자니, 이들의 인신공격과 비아냥 그리고 이죽거림도 학문과 고상함에 모두 가려지지 않고 끝내 드러나고 마는구나 생각하게 된다. 맨몸으로 싸우는 철학자들의 전투력에 감탄하게 되면서, 훗날 어디서 만나더라도 철학자들과는 말을 섞을 때 조심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숨겨진 전투력이 있을 게 분명하니까. 김상봉이 인터넷에 올린 글은 지워지지 않는다 했는데. 이 논쟁에 참여한 이들 모두는 훗날 그런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 같다. 이분들 논쟁하는 걸 보면 앞으로 학회에서 만나지 않는 건 고사하고, 가족의 결혼식이나 장례식에도 서로 참석하지 않을 것 같다. 앞으로 그 피해는 두 패로 갈린 그 제자들이 고스란히 보겠지만.
여튼 이 문제를 꺼낸 건 이 논쟁에서 이 책의 번역자인 전대호가 트란첸덴탈transzendental의 번역어로 초월적을 써야 한다고 백종현을 옹호했기 때문이다. 전대호의 백종현 옹호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의 주장을 따르면 그는 liberalism을 자유주의로 번역하고 여기에 미국식도 붙이지 않고, 음차도 해서는 안되며, 역주를 달아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progressivism이 급진자유주의라니 이는 liberalism을 진보주의라고 말하는 순간에 직면하게 된 어쩔 수 없는 선택처럼 보이지만, 너무 나간 것 아닐까. 번역어의 선택이라는 것이 자신의 인터넷 지면에서의 글과 자신의 번역에서 동일하게 일관성을 지킬 수 없을 만큼 오묘한 것이기는 하다. 여튼 이 책에서 말하는 진보주의란 그러니까 리버럴리즘이고 자유주의인 그런 진보주의다. 미국 정치의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그 진보주의이고, FDR 시대 이후 형성된 미국의 진보주의이다. 그 이전에 있었다고 하는 정치 주류에 나서지 못했던 지하운동에 가까운 세력과는 또 다르다. 그러니 여기서 진보주의라고 하는 것은 마치 한국의 민주당을 진보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그러니 한국의 민주당은 진보가 아니라 우파고 보수라고 진정한 진보는 따로 있다고 목청 높이는 사람들은 이 말이 꼭 자신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닌지 헷갈리게 된다. 물론 이 미국의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진보주의는 한국으로 치면 더불어민주당 안에 그 우산 안에 지금으로 하면 정의당이나 녹색당 또는 민중당이 당내 좌파로 포괄된 그런 모습을 말한다. 그리고 이 책을 다 읽고나면 마크 릴라가 말하는 것이 실은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의 전략에 다름 아니라는 걸 알게된다. 그래서 전대호는 진보주의라고 한 것인지. 여튼. 이 책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한국의 정의당이나 녹색당 혹은 다른 진보정당의 활동을 지칭하는 것으로 쉽게 이해하게 되는데, 그런 이해를 하게 된 것이 바로 liberalism을 진보주의로 번역한 탓이다. 이 책은 진보정당이야기가 아니고 주류 정당이야기다. 진보가 대안이 되길 바라는 소망이 담긴 발언으로 이해해야 할까. 이렇게 되면, 트란첸덴탈transzendental을 초월적으로 옮기면 바로 이런 오해, 한국어 맥락에서 초월이 가지는 의미와의 혼동이 생긴다고 말하는 김상봉이나 이종훈의 비판이 타당하다고 하는 것인가. 답이 없는 논쟁이니까 이쯤하고, 일단 책으로 들어가 보자.
“미국의 상상력 경연대회에서 진보주의자들은 기권을 선택해왔다.”(11) 결국은 마크 릴라가 말하는 것은 비전과 감정 그리고 제도권 정치와 정당 그리고 선거의 문제이다만. 미국의 좌파와 진보가 스스로 포기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자기의 글을 시작한다. “대중은 감정이 전부다”라고 한 에이브러햄 링컨의 말을 상기시키면서.(10) 미국의 진보 즉 리버럴들은 레이건 시대 즉, 레이건 통치체제 즉 디스펜세이션 때, (일본어에서는 ディスペンセーション이라고 음차하기도 한다) 정체성 정치로 돌아가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는 일에서 기권해 버렸기 때문에 몰락했다는 것.(12) 민주당 지지자들은 한때 거대한 산이었던 곳의 옆구리에 동굴을 파고 들어가 웅크려 있기 때문에 쇠퇴한다는 것.(15) 민주당 지지자들이 정체성 정치에 나서고, 실제 필요한 주 단위 선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이들을 약화시킨다고도 말한다.(16) 마크 릴라는 공화국 아메리카합중국의 권력 쟁취를 위해서 조직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주장인 셈이다.(20) 선거에 최선을 다해라가 이 책의 중요한 주제다.
그리고 한국은 연이은 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를 통해 권력을 통채로 바꿨다. 특히 마크 릴라가 말하는 지방의회와 지방자치단체장을 갈아치우고 과점하다시피한 한국의 민주당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벌써부터 정체성 정치를 앞세우는 이들은 그들이 대부분 중장년의 남성들이며 성적인 감수성도 부족하고 어떤 이들은 수구세력에 부역한 과거가 있으며, 성소수자의 여성의 난민의 정체성에 입장과 감수성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치고 있다. 선명한 정책을 실천하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식으로 폄하해 버린다. 제멋대로 한 두가지 사례를 들어서 그것이 리트머스 시험지라고 주장하면서. 물론 이 아우성은 실은 페이스북과 트위터에만 있다. 그리고 매체를 통해 흘러나오는 것이 조금. 실제 당선된 이들이 선명한 정체성을 내세우는 것은 바람직한 일도 아니고 의도할 일도 아니다. 정책을 조금씩 움직여가면서 사람들을 설득해 나가는 일이 실제로 필요하다. 적어도 이제 중앙정부 정책이 지방정부 단위에서 막힐 가능성은 적어졌으니까. 그래서 결과를 보여주어야 하는 일이 주어진 셈.
로널드 레이건의 당선과 함께 온 새로운 정치적 통치 체제dispensation이란 그와 대중을 결속한 상상에 기인한 것이었다.(26) 레이건 체제는 국가의 속박에서 풀려난 가정과 소규모 공동체, 기업이 번창하는 더 개인주의적 미국을 그렸다. 표어는 자기 신뢰, 최소 정부였다. 반정치적 체제였다.(12) 그리고 그런 변화를 낳은 물적인 토대는 2차 대전이후 미국의 주요도시의 교외지역에서 전개된 지나치게 개인적인hyperindividualistic 부르주아 사회였다.(32-33) 당사자의 권리, 개인의 권리 그리고 자기 정의를 말하는.(34) 레이건의 교리문답은 네 가지로 요약되지만, 핵심은 정부의 크기가 아니라 정부 그 자체가 문제라는 것.(36) 이 교리문답은 전통적 결속보다 자기결정이 우선이라고 말하므로 사람들은 공간 속에 뿔뿔히 흩어져 고유한 궤적을 따라 운동하는 기본입자가 된다.(36) 그리고 무엇보다 이 시기에 미국 종교는 신앙이 자유지상주의에 어느 정도까지 적응하는지 보여준 사례라고 말한다. 교외에서 형성된 새로운 복음주의 집단은 기독교 교리, 죄의식, 사회적 책무를 결여한 것이었고, 이제 미국인들은 거기도 떠나 방목 습관을 가지면서 홀로 구원받기에 이른다.(36-37) 민주당은 피해자 비난하기에 나서는 사람들을 추적했고, 백인 하위중산층 유권자들의 신뢰를 잃었다.(42) 로널드 레이건은 루스벨트 시대 이전에 이미 미국인의 상상 속에 자리잡은 오래된 비유를 동원했다. 독립적인 정착자와 자작농, 음식을 앞에 놓고 기도하는 가족, 도시생활이 위협하는 소박한 미덕, 이기적인 전문가 엘리트에게 착취당하는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 눈앞의 명백한 위험에 저항하는 강력한 군대의 이미지.(43) 레이건은 카터와 민주당과 달리 미국에도 미국인에게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44) 레이건은 정부를 무시하고 개인과 가정이 제각각 사적인 사업에 종사하면 좋은 삶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미국을 향해 약속했다.(46) 그는 자유지상주의를 너무나 잘 이해했다.(47) 덜 정치적인 미국에서 영위하는 더 낫고 도덕적으로 어려울 것이 없는 삶의 이미지를 환기한 레이건은 다양한 구성요소로 분열되어 있던 공화당을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48) 대통령 선거에만 집중하는 민주당은 자당의 대디 이슈daddy issue 즉, 대통령이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서 대통령에게 불만을 품고 왼쪽에서 그를 저격하지만, 공화당 지지자들은 자신들의 생각대로 단지 문서에 서명하는 대통령이 필요할 뿐이었다. 그로버 노키스트가 말하듯 “펜을 쥐기에 충분할 만큼 멀쩡한 손가락들을 가진 공화당원”(49-50)이 필요했다. 그리고는 공화당 지지자들의 후원을 받아 정치 교육을 통해 핵심세력을 키웠다. 특히 연방주의자협회는 대학생들에게 헌법에 대한 원본주의적originalist 해석을 소개하는 젋은 법률가들의 고용을 도왔고, 미국의 법률교육과 해석을 통치되는 방식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50-51) 그리고 클린턴과 오바마를 겪으면서 공화당은 점차 급진화했다. 혁명의 실패가 혁명을 급진화하듯이.(54) 글렌 벡Glenn Beck 같은 이들의 미국 중산층이 무너진다고 외치는 메시지를 받아들인 건 트럼프였다.(56) 그는 공화당과 민주당을 모두 무찔렀다.(57) 마크 릴라는 트럼프를 과도기 대통령disjunctive president라고 말한다.(58) 그리고 게르만이 고대 로마를 점렴하고 약탈함녀서 오래된 신전과 공공건물에서 뜯어낸 기둥과 벽기둥과 문틀을 때려 맞춰 지은 조야한 건물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비아냥 댄다.(59)
마크 릴라가 반정치라는 이름으로 말하는 레이건 시대 즉 레이건 디스펜세이션에 대한 설명은 실상 간단명료하기 그지없다. 루스벨트 시대에서 30년간 미국 사회는 이미 자유지상주의, 지나치게 개인적인 부르주아 사회로 변모했다. 미국 종교도 거기에 결합했다. 그 와중에 몰락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민주당은 아직도 루스벨트에 사로잡혀서 미국 사회를 개선하고 고치겠다고 말했지만, 그런 이미지들이 미국인들에게는 정부의 음모처럼 여겨졌다.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정치적 상상으로 모아서 제시한 것이 레이건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방정부 단위에서부터 사람들을 모으로 조직하고 헌법을 연구하고 엘리트들을 교육해서 정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그 탄탄하던 정권에 균열과 문제가 발생하자 급진화하면서 분열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모든 사회적 조건을 엮어내는 정치적 상상이겠지. 찰스 테일러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이 과정은 민주당의 실패의 과정이기도 한데. 대통령 선거에만 집중하고, 특히 지방 권력을 경시했다. 클린턴과 오바마 행정부는 정책을 현실화할 수 없었다. 공화당이 승리한 과정은 실은 문재인 정부가 집권한 일련의 과정과 매우 흡사하다. 연방주의자 협회 만큼은 아니겠지만, 촛불집회와 함께 헌법을 얼마만큼 읊어댔던가. 개헌은 일단 좌절되기는 했지만. 그리고 지난 선거에서 지방권력도 장악했다. 이제 시작된 한국의 문재인 디스펜세이션 또는 노무현 디스펜세이션은 어떤 결말을 가지고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
마크 릴라는 공화당을 반정치라고 말하고는 이와 반대로 민주당의 진보주의를 사이비 정치pseudo politics라고 비판한다. 레이건 디스펜세이션 동안 미국의 진보주의자들은 제도권 바깥의 사회운동에 매혹되었고, 민중을 업신여겼다.(64) 특히 학생들은 정체성 탐구에 몰두하고 머리 바깥의 세계에 무관심하게 방치했다.(65) 이 모든일은 1960년대 신좌파가 대학으로 후퇴한 데서 비롯되었다. 오늘날 진보 및 급진진보 활동가들은 대학교에서 육성된다.(65) 그리고 이 책에서 말하는 바로 그 정체성이라는 개념으로 들어간다. 우리가 지금 흔히 알고 있는 호문쿨루스homunculus같은 정체성 개념은 1960년대 후반에 비로소 미국 정치담론에 등장했다.(66) 미국 건국의 문제는 정치적 동일시의 문제였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용어의 번역문제가 등장한다. 마크 릴라는 여기서 identity와 political identification을 가지고 언어게임을 구사한다. 그다지 대단한 것도 아니지만. 흔히 정체성으로 번역되는 identity란 실은 자기동일성이라는 말로도 번역된다. 이걸 자기동일성으로 번역한 역사도 의외로 길다. 그러다가 어느날 정체성이라는 말로 바뀌긴 했지만. 그리고 정치적 동일시political identification이란 집단적으로 자신에게 어떤 정체성을 부여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인 셈이다. 이건 동일시라고 할 수밖에 없었겠지. 문제는 미국에서는 이 동일시 문제가 유럽과 달랐다는 점이다. 정치와 종교의 이중 동일시가 가능했다는 점. 미국은 기독교도가 자신과 교회를 동일시할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자신과 국가를 동일시할 이유를 제공했다는 것. 유럽은 종교전쟁 이후에 이중 동일시가 원초적으로 불가능해 졌다.(66) 그리고 이 이중 동일시는 용광로라는 이름으로 동화를 요구했고, 그 성과는 미미했지만.(67-68) 그리고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시민권 운동(앞에서 말한 민권 운동)의 경험을 하게 된다.(69) 그리고 이에 뒤이어서 여성, 동성애자의 권리 운동이 등장하는데, 이때 시민의 지위가 사라지고 다시 말하면 시민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집단적 정체성에 대한 개인의 동일시가 사라지고, 개인의 정체성만이 거론되게 된다.(70)
마크 릴라의 주장은 미국인이라고 하는 시민적 정체성이 독립전쟁기 앵글로색슨 미국인들에게 있었고, 확대되어 갔으며,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도 시민권운동으로 존속했지만. 그 이후에는 시민 의식이 사라지고 개인적 정체성만 거론되었다는 것이다. 정체성이란 본래 집단적인 것이다. 집단의 정체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민족, 국민 등이 바로 집단적 정체성의 대표주자다. 그러나 어느날 개인의 정체성 만을 말하도록 변해갔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도 다를 바없다. 언제부터인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고등교육을 받는 과정은 나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변화했다. 너 자신이 원하는 바는 무엇이냐고 끊임없이 묻지만 나 자신 안에서 그에 대한 대답은 나오지 않는다. 원래 들어 있는게 부족하니까. 이쯤에서 실은 마크 릴라의 주장은 뒤짚은 우치다 다쓰루(타츠루)의 주장과 비슷해지고 있다. 나 자신부터도 어느날 부터 ‘우리’라는 말이 폭력적으로 느껴지면서, 이 글에서 처럼 꼭 한국이라고 쓰고, 또 우리라는 말 대신에 특정 집단을 지칭하곤 하니까. 게다가 한국인들은 이 미국인의 정체성 중 하나에 주목해야만 한다. 종교적 동일시와 정치적 동일시가 일치하는 것으로 한국에 전파된 기독교는 종교적, 정치적 이중적 동일시에다가 이것을 미국과 동일시하기에 이른다. 종교, 정치, 미국이 동일시 된다. 탄핵반대로부터 이어지는 태극기 집회에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성조기를 들고, 박근혜가 구원자인양 동일시하는 일은 그래서 끊이지 않는 것이다. 삼중적 동일시와 멀리서 오는 구원자는 한국 정치 연구의 중요한 한 과제다.
특히 1960년대 후반에 유행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The personal is political”라는 구호는 미국이 실은 낭만주의의 온상임을 보여준다.(72) 자유지상주의의 시대에 사람들이 느낀 불안은 대중사회, 조직 인간, 외로운 군중, 처절한 생존경쟁, 소외된 젊은이 비행 청소년 등의 용어에서 드러나고 이는 정체성 위기로 읽혀진다.(74) 그리고 대학생들은 프랑스 실존주의자, 카프카, 사뮈엘 베케트, 외젠 이오네스코를 읽다가 대학생선교회CCC Campus Crusades for Christ나 가톨릭 성령 쇄신회Catholic Charismatic Renewal 같은 기존에 없던 종교단체에 가입하기까지 한다.(75) 더 자세히 말하지는 않지만, 이런 흐름이 미국의 보수적인 복음주의적 교회로 연결되는 것이다. 낭만주의란 본래 나는 누구인가와 우리는 무엇인가가 일치하는 세계를 꿈꾼다. 전체주의가 될 위험성도 모든 것을 뒤섞은 잡탕의 모습도 보이는 이런 낭만주의가 정치적 형태를 띈 「휴런 항 성명Port Huron Statement」는 나이든 진보주의자가 사회주의자가 보기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만물이 연결되는 젊은이들에겐 자신들의 목소리였다.(77-78) 그리고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라는 명제는 정치 활동이 정체성의 반영이라는 구호에 따라 정치활동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이라는 요인에 의한 분열을 향해 나간다.(80) 이런 힘은 개인이나 집단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인종주의적인 남부 보수파와 청렴성이 의심스러운 백인 보수파의 손에 있던 민주당 바깥의 운동 정치의 장에서 표출된다. 그것은 원심력이 강했고, 이슈 중심의 운동을 낳았다.(81) 그리고 신좌파는 민주당의 통합에도 미국인들이 공유할 진보주의적 비전도 개발하지 않았다. 정치적 비전은 밀려나고 사이비 정치가, 느끼는 자아와 그 자아의 인정 투쟁에 관한 미국적 수사법이 자리를 잡았다.(82)
이 글을 읽어나가면서 미국과 한국의 유사성에 대해 흠칫흠칫 놀라게 된다. 그런데 실은 그 유사성이 유사성이 아니다. 한국 사회는 미국 사회처럼 개인주의화되지 않았다. 이전에 비해서는 놀랄만큼 개인주의화되었지만. 그럼에도 정체성 정치는 놀랄만큼 미국을 닮아가고 있다. 마크 릴라가 말하는 것은 미국 사회의 극단적 개인주의와 자유주의화가 정체성 정치의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지만, 한국 사회는 그렇게 개인주의화 자유주의화 되지도 않았는데, 정체성 정치는 폭발하고 있다. 이것은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다만 문제의식을 통째로 빌려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진보든 보수든 모두 해결책을 미국이든 독일이든 러시아든 일본이든 어딘가에서 빌려온다. 특히 진보의 담론의존 경향이 심각하다. 그래서일까. 미국사회라면 곳곳에서 솟아나는 그래서 개인주의화되어가면서 흩어져가는 문제의식들이 한국 사회에는 아주 좁은 곳에서 그 정체성 정치의 문제의식들이 충돌하고 있다. 페미니즘과 다른 소수자 논의가 쉽게 충돌한다. 난민 문제도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한 정치적 의제는 그 논리의 판대기를 가지고 있다. 지평은 너무나 그럴듯한 말이라서 그냥 판대기라고밖에 못하겠다. 그리고 하나의 정치적 의제가 수입될 때, 그 정치적 담론의 판대기도 함께 수입된다. 하나의 개념은 개념의 연결망 위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법이니까. 그런데 실상 삶이 극단적으로 개인주의적이지도 않고, 급진적으로 자유주의적이지도 않은 일상의 삶의 공간이 오밀조밀 붙어있는 사람들이 각자 정체성이라고 하는 개념의 판대기들을 그 끝을 정교하게 마무리하지도 않은 채 거칠게 잘려진 단면을 드러내면서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그 판대기를 각자 하나 혹은 그 이상을 들고 그 안에 몸을 간직하게 되면, 서로 멀찍이 떨어지지 않는 한 충돌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대학에서 양성된 애초에 몇 안되는 진보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더 큰 상처를 입는다. 동지가 되지 못하고, 차라리 적이 된다. 이런 상황에선 마크 릴라가 앞에서 비판한 것처럼 그럴듯한 장식들만 가져다가 우스꽝스런 건축물을 만드는 것이 오히려 최선일 수 있다. 일단 비는 피하고 봐야 하니까. 토대와 상부구조의 불일치, 사회관계와 정체성 개념의 불일치가 오늘도 곳곳에서 삐걱이고 있다. 그러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대학교로 후퇴하여 대학교에서 조직화를 시도한 신좌파들이 활동한 대학, 이들이 지역에 활동해서 만들어낸 대학 도시들의 세련됨과 안락함은 기층 민중이라고는 흔적조차 노숙자 무리에서 떨어진 철저한 부르주아적 무대였다.(85) 60년대 세대가 대학생들에게 전수한 정치관은 정치활동은 자아를 위한 진정한 의미를 가져야 한다는 것과 실질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운동 정치라는 점이었다.(86) 정체성 의식의 강화는 자아에 관한 운동이라는 확신을 뿌리내리게 된다.(87)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연구는 사회주변부에 대한 다양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반대로 백인들의 미국 중심부를 간과하게 된다.(87-88) 특히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이해와 긍정 과정은 자신이 안락한 중산층이라해도 역사의 피해자의 지위가 부여되며 그의 정치적 관심은 진실되나 자기 정의의 장벽에 갇히게 된다.(89) 이렇게 정체성 정치에 빠져들수록 우리에 무관심하게 되며, 각종 스콜라철학을 연상시키는 유동성, 잡종성, 교차성 등의 용어에 파묻혀 급진적 개인주의에 지적인 멋까지 부여하기에 이른다. 삼위일체 논쟁은 정체성 논쟁의 원조이면서 모델이다.(89-91) 말하자면 페이스북 정체성 모형에 사로잡히게 된다. 자신이 선택하는 인간관계만으로 구성되는 세계.(91-92) 이에 따라 페이스북 정치 참여 모형도 힘을 얻게 된다. 오직 자아, 나의 자아에만 관심을 두는, 그에 기반한 연대는 정략결혼을 넘어서지 못하고, 합리적인 정치토론에 참여하지 않는다.(93)
정체성 정치는 자기 세계에 같히게 된다. 마크 릴라의 지적 중에서 특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자신을 피해자 입장에 위치짓고 피해자 지위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정작 지식인 중산층 전문직으로 미국 사회에서 지배자 쪽에 속하지만, 여성이고 흑인이며, 흑인이고 여성이며, 아시안이고, 또. 이렇게 자신의 모습을 그럴듯한 말로 포장한다. 그것은 마크 릴라가 말하는 바로 그대로 페이스북의 세계다. 자신들이 원하는 사람들 만으로 구성된 연결망 속에서 바로 그런 형태의 정치적 참여가 이루어진다. 주변에서 “내가 페이스북에 썼잖아”라고 하는 말을 들을 때, 난 당신의 페이스북을 읽은 적이 없다고 말하지 못하게 된다. 모든 사람이 자신들이 하는 말을 다른 사람이 듣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야기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있지 않는 세계가 페이스북의 세계이고 소셜 미디어의 세계다. 그 집중성은 트위터에서 한층 심해진다. 내가 어느날 페이스북을 비활성화시켜버린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은 간간히 들여다보지만 더 이상 거기서 발언하지 않게되었는데. 그게 무의미할 뿐더러, 더 심각한 것은 자신이 무엇인가 발언하고, 활동하고, 참여하고 있다는 환각과 환상에 빠지게 된다는 점이다.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고 있는 목이 구부러진 자신의 모습이 정치적으로 활동적인 모습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스마트폰이 없는자가 행복할지니. 그러니 정작 중요한 사람들은 만나지 않으며, 오늘날의 미국에서 소외된 사람들 특히 중서부의 백인 중하층 노동자들을 만나지 않는다. 한국에서 대표적으로 이렇게 소외된 사람들이라면 40대 후반에서 50대의 고등고육을 받지 못한 노동자층이나 빈곤한 자영업자층이라고 하겠다. 사상 처음으로 부모 세대 부양과 자녀 세대의 부양, 그것도 장기간 부양이라는 책임을 지면서, 경기 후퇴와 나이에 포로가 되어있고, 축적한 자산은 없고 노후는 암담하기만 한 그런 기층이 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환호에는 동참하지만 뭔가 불안한, 불안한 것은 실은 자신들의 삶이다. 젊은 세대도 어려움에 처해 있지만, 그래도 주목과 관심은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정체성 정치에서 특히 X로서 말하는데 라고하는 어법은 정체성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일종의 태곳적 종교의 세계에 머문다. 샤먼들처럼 특정 주제들에 대해 발언하는 것은 오직 승인된 정체성 지위를 가진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명제들은 참이나 거짓이라고 판정되는 것이 아니라 순결하거나 불결하다고 판정되게 되며, 급진주의자로 자부하는 좌파 정체성주의자들은 언어에 관해서 만큼은 과묵한 개신교도 여선생처럼 된다. 지금 대학생들은 마약 단속반처럼 고발에 열중한다.(94-95) 시선이 내면으로 향한 오늘날의 진보 정치는 개인들이 사회에 의해 수동적으로 구성되는 가에 의해 맞춰지게 되며, 이런 정체성 숭배를 배운 대학생들은 지갑도 채우고 양심도 만족시키게 된다. 당대의 지적인 힘들과 물질적인 힘들이 협력하여 대학생들로 하여금 자아에 몰두하게 만들고 반항적인 나르시시즘이 사업에도 좋고 정치에도 좋다고 생각하게 된다. 정체성은 좌파를 위한 레이건주의다.(99)
이런 최첨단 정치활동의 모습이 실은 태곳적 샤머니즘 종교와 다르지 않다는 점을 지적할 때, 마크 릴라는 빛이 난다. 올 상반기를 뒤엎은 미투 열풍을 보면서 한쪽 구석에서 의구심을 품게 되었지만, 감히 말문을 열지 못한 것은 바로 정치적 토론의 가능성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었다. 공론장의 형성은 가능한가 하는 의구심이었다. 다들 지금 상황에선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런 말이 또 피해자에게는 폭력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그런 말조차 쉽사리 할 수 없었다. 어떤 말을 한다해도 2차 가해가 될 수 있다. “언어에서 만큼은 과묵한 개신교도”라는 표현은 너무나 적절하다. 한국에서 정치인 특히 민주진보에 속한 정치인이라면 그 입이 성직자보다 고상해야 하며, 삶은 수도자보다 정결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말만 하다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된다. 더욱이 태생적 자격을 갖추지 못한 남자들은 여성 문제에 대해서는 아예 말을 할 자격을 상실하게 된다. 펜스 룰 처럼 비겁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공론장의 담론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의 진보를 향해 유난히 도덕에 집착한다고 했지만, 부패한 보수에 비해 도덕성을 강조해 온 것에 대한 부메랑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 종교적 순결성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리고 한국에서만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그건 정치적 후퇴와 기원의 표시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 종교적 순결성의 고운 체를 통과할 사람은 현 대통령 외에 누가 쉽사리 있을까 싶다. 이 고운 체를 조금 더 듬성듬성한 체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 마크 릴라의 주장이 아니다. 본질은 정체성 정치의 추구가 그 자체로 종교적이라는 것이다. 순결성을 한없이 추구하는 종교성. 어떤 점에서 본질을 꿰뚫는다. 게다가 이런 정체성 정치는 정치적 연대나 시민적 설득으로 직접 뛰어드는 대신에 자신의 자리에서 대부분 고소득 전문직을 유지한 채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을 마크 릴라는 지적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한국 사회에서도 발언권을 가진 사람을 자세히 보면 밥그릇도 가지고 있다. 밥그릇 없이는 발언권이 없다고는 하지 않겠지만, 밥그릇이 없으면 발언할 힘도 없고, 발언할 겨를도 없는 법이다. 밥그릇과 발언권은 생각보다 깊이 연결되어 있다.
지난 두 세대 동안 미국은 자신이 나아갈 바에 관한 정치적 비전 없이 지내왔다. 보수적 비전도 진보적 비전도 없이 기력이 쇠한 개인주의적 이데올로기 뿐이었다. 공익을 알아채고 국가를 통합할 능력이 없었다.(103) 트럼프에 대한 저항은 반응일 뿐 반트럼프주의는 정치가 아니다.(105) 선거에서 승리하여 권력을 쥐어야 하는데 자아라는 토끼굴로 기어들어가는 정체성 정치는 독선적 나르시시즘을 불러일으킬 뿐이다.(106-107) 운동보다 제도 정치가, 목표 없는 자기표현보다 민주적 설득이, 집단 정체성이나 개인 정체성보다 시민의 지위가 먼저다. 개인주의와 원자화가 심해지는 상황에서 시민 교육이 긴요하다.(108) 루스벨트 통치 체제 기간에 미국 진보주의의 양대 주제는 정의와 연대였다. 이는 전국 단위의 선거에서 이기는 것이 정치활동의 제일 목표가 되어야 한다.(109) 협의와 타협, 선거, 견제와 균형, 법의 제정과 집행 등의 극적이지 않은 정치관을 꺼리는 낭만주의자들은 정치를 제로섬 대립으로 간주한다.(111) 운동을 이상으로 삼는 조직들이 좌파를 지배했다.(112) 그러나 운동정치의 어떤 성취도 제도 정치를 통해 무효화될 수 있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철칙이다.(113) 운동은 선거운동, 법안, 협상, 법집행 감시에 나서는 시스템 정치가들과 공직자들을 필요로 한다.(113) 선거에 이겨야 한다.(114)
승리를 위한 선거연대를 만들어서 선거에 이겨야 한다. 선명한 정체성의 분열상태보다는 유권자 집단을 조직하고 설득하고, 타협을 이룩하고, 법률로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위해서 선거에서 이겨야 한다. 4년에 한 번 반짝하는 대통령 선거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주지사 선거와 주의회 선거에서 이기지 못하면, 연방정부의 정책도 무력할 뿐이다. 전국 단위 선거의 승리를 위한 조직화가 필요하다. 반복할 필요가 없는 일. 어떤 의미에서 한국의 민주당과 현 정부는 이런 문제를 아주 잘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집권 후 첫 1년 동안 지방선거 승리를 위해서 지지율 관리에 몰두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또 민주당은 지지율 80%인 대통령이 아무것도 못하는 정부 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특히 정체성 진보주의자들은 민주 정치를 외면하면서 드높은 설교단 위에서 더러운 대중에게 설교하기를 멈춰야 한다. 이미 민중으로부터의 분리는 제도화되었다. 조합원 노동자들과 공무원 대신 대통령 선거 운동에 매달리는 고학력 활동가가 자리잡았다.(116) 입법 절차에 대한 불신과 당의 목표 성취를 위해 법원에 의존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는데, 이는 모든 의제를 협상의 여지가 없는 불가침의 정의에 관한 문제로 간주하는 습관을 심어주었다. 반대자들을 부도덕한 괴물들로 보고 있다. 사람들의 선 자리를 확인하고 설득하고 합의를 형성하지 않은 민주당 정치인들은 고위성직자 계급이라고 불릴 여지 마저 있다.(117-118) 미국인들은 설교하기를 좋아하고 설교받기를 몹시 싫어한다. 누가 그렇지 않을까. 코튼 매더Cotten Mather(청교도 목사, 세일럼 종교재판에도 관련)와 마크 트웨인으로 절반씩 이루어진 미국인의 뇌에서 트웨인 뇌가 잠들면, 매더 뇌 반구는 대각성을 겪는다. 그래서 미국인의 수사는 정치적이라기 보다 복음주의적이다. 특히 우오크woke라는 신조어, 각성되어 있다는 의미는 인종이나 젠더 문제 등 도처에서 정치적 합의가 아니라 영적 개종이 요구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캠퍼스 정체성 진보주의자들의 어리석은 행동은 미국 신앙 부흥운동의 후예이다.(118-119) 진보주의자들은 선거에 나서고 중도 노동자의 표를 얻어야 한다. 선거는 기도회가 아니다. 선거는 심치치료를 위한 상담시간도, 세미나도 아니고, 가르침이 효과를 내는 순간도 아니며, 타락한 놈들을 폭로하고 공동체에서 몰아내는 행사가 아니다. 우파로부터 미국을 되찾고 싶다면 설교단에서 내려와야 한다.(119-120) 설교단에서 내려와서 경청하는 법과 상상하는 법을 배워라 민주주의의 관건은 설득이지 자기 표현이 아니다.(120-121) 미국 민주당은 낙태 이슈 때문에 종교적인 여성주의자들이나 가톨릭 유권자, 개신교 유권자들을 몰아내고 있다.(123)
뒷부분은 사실 요약할 필요도 없는 ABC지만, 미국 정치를 종교에 비유하는 것이 아주 흥미롭다. 반대자들과의 대화를 거부하고, 설득과 협력의 정치를 시도하지 않으려는 선명한 정체성 정치는 아무런 결과를 낳지 못할 뿐 아니라 선거에서도 이기지 못한다는 것. 미국이라는 나라와 미국인들의 수사가 얼마나 종교적인지. 그리고 상대방을 개종의 대상으로 태도에 대해서도. 열성적인 진보주의자들의 행동은 종교적 행동주의자들의 양태와 너무나 닮아있다는 점. 선거는 기도회나 부흥회가 아니라는 점. 여기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미국의 진보주의를 내세우는 정체성 진보들을 종교적 분파의 용어로 종교적 활동가의 언어와 사고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해석은 현실을 아주 잘 반영한다. 상대방을 종교적 적 내지는 이단으로 보는 정통의 사고방식을 내재한 원초적이면서 종교적인 성향들이 이들에게 내재되어 있다. 역시 미국은 종교적인 국가이고 종교적인 사회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 만이 아니다. 한국에서도 이런 정체성 진보들의 행동은 종교적이다. 그것도 근본주의 종파의 형태를 띄는 경우가 너무나 흔하다. 조금 대화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설득을 포기하고, 상대방을 악마화하면서 비난하기에 일쑤다. 예를 들면 이번 상반기에 일어난 미투운동의 열풍 속에서 많은 사람이 악마가 되었다. 가해하는 당사자들 뿐 아니라 공론장에 참여하는 사람들 마저 성직자나 수도자 수준의 순결성이 요구되었다. 여자가 아니라면 섣불리 입을 뗄 수 없었다. 두 사람의 대중 정치인 중 한 사람은 나가떨어져 재기불능에 적폐가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선거에는 이겼지만, 회복할 수 있을지 모를 정도로 큰 상처를 입었다. 그들을 옹호하고 말고를 떠나서 그건 어떤 종류의 광풍이었는지 지금도 헷갈린다. 여름이 되면서 제주도에 예멘 출신의 난민들이 몰려들었고, 유럽이나 미국이 직면한 난민문제와는 실은 비교도 안되는 몇 안되는 난민들을 두고 사회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때 정체성 진보들은 냉큼 나서서 이 문제에 주저하면서 회의적인 견해를 보이는 사람들을 적으로 내몰기 시작한다. 그들을 인권도 인류의 기본 양식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하고, 혹 그들이 기독교인이면, 예수도 난민이었다는 식의 감별 원리를 내세운다. 이들을 비난하는 건 아주 쉬운 일이지만, 이들의 불안을 이해하고 이들과 대화하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다. 어제 TV에 비친 이들이 내세우는 구호가 인상적이었다. “국민이 먼저다”였다. 즉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동일시하는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 그런 구호는 실은 대화와 설득의 여지가 있음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난 처럼 손쉬운 것이 어디있겠는가. 이제 난민을 돕는 사람들에게는 다시 성직자와 수도자 수준의 순결성이 요구될 것이다. 그리고 또. 무한 반복. 나는 물론 예맨 난민 지원에 찬성한다. 자본주의의 세계화의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이 문제에 반대하는 사람에 대한 태도는 난민에 대한 태도와는 또 다른 문제다.
마크 릴라가 지적하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지점은 문제의 사법적 해결이다. 때로 법원이 입법미비를 해결할 수도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의 동성결혼에 대한 불법화를 금지하는 판결을 내린 일이 사례다. 미국 연방의회가 입법화를 할 수 없어서 혹은 입법화를 뒤로 미룬 결과다. 미국의 진보세력은 법원을 통해서 사실상의 입법 효과를 가져왔는데. 이는 미국 사법부의 정치화라는 미국 정치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한국에서도 헌법재판소의 존재는 바로 사법부의 정치화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예를 들면 엊그제 대체복무를 허용하지 않는 병역법을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린 것 같은 것. 호주제나 간통죄 같은 것도 유사한 경로를 겪어왔다. 어떤 의미에서 의회의 갈등회피 및 입법회피 경향이 낳은 결과이고. 특히 한국의 보수세력이 입법은 허용하면서 자신의 지지기반의 요구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이려는 일종의 관습적 합작이다. 일종의 합의에 의한 입법행위가 이루어지고 사법부의 판결이 생각만큼 진보적이지 않다. 그러나 판결결과가 알려지는 방식이 이해관계의 타협이 아니라 정의와 부정의라는 종교적 교리문답의 형태를 띄기 때문에 이런 판결은 정체성 진보들을 자극하게 되며, 이들은 끊임없이 문제의 사법적 해결을 시도하고. 사법적 해결이 이루어질 때까지 과도기적 타협을 거부하고, 비타협적 투쟁에 나서게 된다. 이 과정에서 민주적 입법과 행정적 변화는 정체를 겪게 되며, 가장 순결하고 극단적이고 급진적인 진보만이, 그러나 실상은 언젠가 사법적으로라도 해결될 수 있는 한계선 안에서 움직이는 정교한 정치적 계산 속에서 움직이는, 우위에 서게 된다. 때로 사법부의 판결에 의존해야 할 수도 있지만, 이런 행위가 반복되면 민주주의의 몰락을 가져온다. 지난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이루어진 사법거래를 연상시키는 일련의 행위들은 헌법재판소의 영향력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가지고 싶었던 대법원의 권력에 대한 욕망의 결과에 다름아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몰락을 가져온.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정치의 지나친 사법화는 민주주의의 사법 의존은 민주주의의 몰락을 가져올 것이라는 점이다.
정체성 진보가 추방시킨 우리 라는 단어를 잊지 않았던 것은 오바마다 ‘그래 우린 할 수 있어!Yes, we can!’와 ‘그것은 우리의 본모습이 아니다That’s not who we are’를 반복했다는 것. 그 내용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는 수사에 불과했지만.(124) 마크 릴라는 우리 모두가 미국인으로서 공유한 무엇인가에 호소하는 것이 필요하며 그것은 시민의 지위citizenship라고 말한다.(125) 미국에서 시민의 지위는 정치적 지위이며, 이는 우리가 우리 곧 미국 민중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시작된 합법적 공동 사업의 참여자라는 사실을 일깨운다고 말한다.(126) 그리고 오늘날 미국 우파는 시민의 지위라는 개념을 배제의 도구로 사용하지만 전통적으로 진보주의자들은 그 개념을 관대한 포용의 도구로 여겼다.(127) 그리고 시민의 지위는 호혜적 권리와 의무를 포함하기에, 정체성에 대한 애착을 초월한 연대를 이야기하는데 도움이 된다.(127) 레이건은 재임 중 대중에게 국내외에서 자유를 위해 희생하라고 단 한번도 요구하지 않았다.(128) 급진진보주의자들은 정체성 진보와는 달리 연대의 필요성은 이해하지만, 의무를 거론하지는 않는다.(129) 과거에는 성서가 도움이 되었지만 지금은 성서도 소용없다. 미국인들은 여전히 교회에 다니지만 특히 복음주의 교회에서 설교되는 복음은 미국인의 다른 삶과 마찬가지로 개인주의, 이기심, 피상성에 감염되어 있다. 교회에 십일조는 내도 세금이 일종의 민주주의적 십일조라는 생각을 거부하며, 자선은 팁 지불과 마찬가지로 고객의 재량이다. 자선의 동기를 제공하는 신앙이 부재하다.(130) 정체성 진보는 대다수 사람들이 나나 나와 가까운 누군가가 당할 수도 있는 고통이라고 느끼지 않는한 타인의 고통을 실감하지 못함을 깨달아야 한다. 동성애와 동성 결혼에 대한 미국인의 태도 변화는 자식들이 부모에게 눈물을 흘리며 커밍아웃하는 동안에 이루어졌다.(132) 다른 사람과 나를 동일시할 수 있는 유일하게 공유한 것은 시민의 지위다.(133) 인종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오늘날 흑인 운동가들과 달리 시민권 운동 지지자들은 정체성을 언급하지 않고 공통점에 호소하여 미국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행동에 나서게 만들었다.(134)
마크 릴라가 아주 조심스럽게 딱 한 번 밖에 쓰고 있지 않지만.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실제로는 시민citizen이나 시민의 지위citizenship(시민권이라는 좁은 표현을 넘어서기 위한 역시 매우 친절한 번역)가 아니라 미국인이다. 이 책 전체에서 쓰여진 시민이라는 단어는 21세기 한국에서 번역하면 ‘국민’이 된다. 바로 이런 번역에 한국의 진보들 세련되고 고상한 진보들은 반대할 것이다. 국민은 억압적이고 배제적인 언사라고. 그리고 새로운 표현이 필요하다고. 실제 박정희 정권이 국민이라는 단어를 독점하고 박정희의 국민을 만들어낸 이후에 대항 운동 세력에서는 다른 호명 다른 정체성 혹은 동일시의 언어가 필요했다. 영어로는 그거 people이면 될 것이지만. We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라는 미국 연방헌법 전문을 상기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건 실은 American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인데. 이 말이 우파의 말이기도 하고, 때로 배제적이기도 해서 마크 릴라는 피하려고 한 것 같다. 결국 완전히 피하는 것은 실패했지만. 처음 시도된 한국어는 ‘인민’이었다. 人民, people을 그 이상 잘 번역하는 말은 없었지만, 38선 북쪽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생기면서 영원한 금기어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민중이었다.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어느 중산층이 민중이 되고 싶어할 것인가. 민중은 정치적으로 실패했다. 그리고 내세운 것이 시민이었지만. 이 시민이라는 단어는 포괄성을 띄기는 커녕, 서울과 지방의 격차와 갈등, 도시와 농촌의 차별을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citoyen이란 고상한 프랑스어 단어와 혁명의 이념을 들이댄들 소용없었다. 그러나 현실 정치인들은 국민이라는 호명을 포기하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의 정식 명칭은 ‘국민의 정부’였다. 평민당 시절부터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을 내세웠다. 노무현 정부의 명칭은 참여 정부였으되, 첫 표어가 ‘국민이 대통령입니다’였다. 이건 실은 레이건의 언어와 매우 닮은 언어였다. 세월호 사건 후에 나타난 구호는 ‘우리도 국민이다’ 였으며, 탄핵 촛불의 구호는 ‘우리가 국민이다’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 역시 국민을 내세운다. 국민이 옳다. 국민에게 듣는다. 가장 논란거리인 국민청원까지. 박정희의 국민에게 국민을 내주고 새로운 언어를 만들려 했지만 실패한 후, 이 국민을 재정의하고 다시 가져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결국 지난 탄핵과 촛불은 ‘국민’의 재전유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이명박, 박근혜의 국민이 배제적이고, 비국민을 가르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그 국민이 포용적이라고 적어도 수사적으로는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역자 전대호가 citizenship을 뭔가 이민자나 소수인종과 관련해서 배제와 차별을 연상시키는 시민권이라는 익숙한 용어 대신, ‘시민의 지위’라는 해석적인 번역어를 선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민을 어떻게 재정의하고 국민을 어떻게 엮어서 어떻게 진보의 편으로 가져오는가에 정치의 성패, 민주주의의 성패, 진보의 성패가 달려 있다.
시민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며, 때로는 역사적인 힘들이 시민을 만든다. 시민적 원리가 행동을 유발하려면, 우리가 타고 나지 않은 감정 속에 그 원리가 뿌리를 내려야 한다.(136) 시민적 감정의 유지가 어렵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엔트로피의 지배를 받는다. 미국 역사는 이런 고전적 엔트로피를 피해가는 행운을 누렸지만, 지난 40년의 미국 역사를 돌아볼 때 시민 없애기를 부추기고 심지어 찬양하는 두 가지 이데올로기, 공익의 존재를 의문시하고 의무를 부정하는 이데올로기와 개인적 집단적 애착과 자아에 몰두하고 민주적 우리를 의심하는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이었다.(137-138) 트럼프와 그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이 하는 대로 판을 뒤흔드고 그렇게 뒤흔들리는 상태로 놔두는 것은 민주주의적 충동이 아니라 선동가들의 독재적 충동이다.(139) 이민자가 귀화 시민이 되려면 이민자는 시민학 시험civics test를 통과해야 한다. 이런 시험이 가져다 주는 국가에 대한 애착은 자녀 세대에 연결되지 않는다. 시장경제, 학교, 교회, 대중문화는 연대감을 심어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많은 젊은이들은 타인에 대한 연대감을 발달시킨다.(140-141) 진보는 시민적 연대를 강화하는 교육을 해야 한다. 정체적 중심의 교육은 자멸적이다. 미국의 교육은 바닥부터 최상층까지 진보주의자들에 의해 운영되며, 이 진보주의적 교육은 탈정치화를 일으킨다. 우리를 약화하고, 시민을 만들기보다 없애고 있다.(142) 역설적으로 단조롭고 관습적이었던 1950년대화 1960년대 초반의 학교와 대학교가 건국이래 가장 급진적인 한 세대의 미국 시민을 낳았다. 바깥세상의 잘못에 격분한 젊은이들. 우리 시대의 대학교들은 자신의 개인적 정체성과 캠퍼스 사이비정치에 매달리는 대학생들을 육성할 뿐, 커다란 바깥세상에 훨씬 덜 관심을 두고, 덜 참여한다.(143) 60년대 세대들은 상상에 대한 논쟁을 권하고 강정적 강인함과 지적 확신을 발달시키는 환경 속에서 비교적 비당파적인 대학 교육을 받았다.(144-145) 오직 시민이 있을 때만, 우리는 그들이 진보적 시민으로 되는 것을 바랄 수 있다. 그리고 오직 진보적 시민이 있을 때만, 우리느 ㄴ미국을 더 나은 궤도에 진입시키는 것을 바랄 수 있다.(146)
한국의 21세기의 국민은 실제로 만들어졌다. 그것은 기나긴 역사적 과정 속에서 였는데. 그 탄생의 격렬한 아픔을 가진 출발점은 1980년 5월 광주였고, 1987년 6월 항쟁의 기간 동안에 분출했다. 그리고 오랜 과정을 걸쳐 2016년 그 겨울 탄핵의 촛불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이 국민은 오래된 그릇에 열정을 담았음에도 그에 합당하고 어울리는 새로운 내용을 충분히 갖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시민권과 인권에 대한 교육이 부족하고,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한 구체적인 개념도 모자라며, 여성과 소수자의 인권에 대한 감수성도 모자란다. 난민을 보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할 뿐이다. 그리고 이 세대는 전교조라는 이름으로 싸워가면서 교육의 공고한 진영을 탈환하기 시작했는데. 2018년 지방선거에서는 전국 17곳 중 14곳에서 진보교육감이 당선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 결과 어떤 교육을 하고 있는지는 솔직하게 모르겠다. 그들이 미국식 진보 교육을 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미국 이론을 가져다가 교육과 실험을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을 가져올런지는 솔직히 등골이 서늘할 때가 많다. 젊은이들을 만날 때, 대화의 단절을 경험하면서, 내 자신이 꼰대임을 확인하면서 입을 다물지만. 나는 이들과 어떤 국민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어떤 국민을 만들어 내야할까. 출발점과 경로는 다르지만, 도착한 파국은 의외로 닮을 수 있다. 빠져나오는 길은 폐허에서 새로 만들어나가는 길은 어떨까.
그리고 이 글이 번역에 대한 이야기도 꽤 많이 담고 있으니 칸트 이야기로 마무리를 해보려고 한다. 먼저 밝혀두면, 나 개인적으로는 ‘초월론적’이 좋다고 생각한다. 일본에서도 선험적과 초월론적을 사용한다. 어제 한겨레에 올린 이종훈은 한전숙을 인용하여 안호상이 정험적定驗的이란 번역을 시도했다고 하던데.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 나치를 찬양한 독일 유학파 파시스트는 그 개념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 그러나 나는 역시 역자 전대호 처럼 초월이라는 단어를 살려두는 게 좋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생각을 바꾸지는 않겠다. 마크 릴라의 책에서도 드러나듯이 근대서양철학이나 정치는 종교와 신학으로부터 한방에 자유로워진 것이 아니고 부단히 싸워왔다는 사실 그리고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혀있는 것이라 양자 모두가 깨끗하고 위생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싸움이 과연 초월적, 선험적의 다툼 때문일까에 대해 나는 의심한다. 이것은 결국 돈과 권력 그리고 권력과 돈의 싸움이 아닌가. 그리고 그 결정판인 명예. 칸트의 3대 비판서라면 무릇 공부 좀 한다거나 책 좀 읽었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서재에 갖추어 두어야 하는 법이다. 책을 읽고 안읽고를 떠나서. 박영사판 최재희 역의 『순수이성비판』이 1972년이고 최재희 역의 『실천이성비판』과 이석윤 역의 『판단력비판』이 1974년에 번역되었다. 이후 여러번의 개정을 거쳤고, 다른 번역본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박영사 판을 넘어설 책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백종현이 『실천이성비판』을 2002년에 『순수이성비판』을 2006년에 『판단력 비판』을 2009년에 내게 된다. 30년에서 35년만에 다시 인정받는 번역본이 나온 셈이다. 당시는 물론 1990년대까지 최재희와 이석윤의 번역의 용어선택과 가독성에 대한 비판이 지금 백종현 번역의 가독성과 용어선택에 대한 비판보다 결코 작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나 이 책을 욕하면서 읽었다. 그나마 이해라도 했으면 다행. 내가 칸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된 것은 백종현이 1992년에 번역한 F. 카울바하의 『칸트 비판철학의 형성과정과 체계』를 읽고나서 였다. 내가 초월이라는 말에 애착을 느끼는 건 그러니까 백종현에게 느끼는 고마움과 종교와 신학과의 관련성에 대한 끊임없는 상기 이 두 가지 때문이기도 하겠지. 그래도 나는 ‘초월론적’이다. 여튼 어느새 칸트 3대 비판서의 번역서를 가지고 있는 것은 권력이기도 하고, 그다지 크지는 않겠지만 돈이 되기도 하고, 또 명예가 되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칸트학회가 뒤늦게 한국연구재단에서 6억원을 받고 이 선집의 번역에 나서게 된다. 16권에 6억원이면 적지 않지만 그렇게 많은 금액도 아니다. 물론 고전의 번역은 하면 할수록 좋은 것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34명이 투입되어서 3년만에 번역하고, 2년만에 출간한다는 건 좀. 빨리 나와서 좋기는 하다만. 물론 연구재단 탓을 하겠지만. 그게 과연 연구재단 때문만 일까 싶다. 최재희와 이석윤의 기존 박영사 판에 대한 번역용어와 가독성에 대한 비판이 쏟아진게 얼마인데, 본격적으로 번역에 나선 사람이 30년 만에 백종현 한 사람 뿐이었다. 물론 다른 번역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리고는 10년 만에 백종현 번역에 대해 비판을 쏟아내면서 학회판 한길사판이라고 전집을 낸다는 소문 끝에 얼마전 2권 『비판기 이전 저작』, 5권 『학문으로 등장할 수 있는 미래의 모든 형이상학을 위한 서설,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 7권 『도덕형이상학』이 출간되었다. 일단 환영한다. 물론 구입한다. 나머지도 곧 낸다고 하니 기다리고 있다. 그렇지만, 책을 세권 내고는, 인터넷으로 된 지면 상에서는 사생결단하듯 논쟁이 쏟아지고 있다. 1차분 3권의 출판 후, 출판사가 일단 정본이네, 이전 번역에는 번역어와 가독성 문제가 있네하고 공격을 시작하면서 난장판이 벌어졌다.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서 이렇게 싸우려면, 논쟁의 핵심인 『순수이성비판』이라도 내놓고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 정도로 싸운다는 건 하세가와 히로시長谷川宏의 헤겔 『정신현상학』번역 정도는 될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그러니까 이제 우리가 내는 책이 나올테니, 그때까지 사지 말고 기다리라는 건가. 언제 나올런지도 모르는데. 곧 나온다고? 워낙 시장이 작다보니 선점효과를 누리는 아카넷에게 후발주자인 한길사가 대항하는 방법이겠지만. 임마누엘 칸트와 3대비판서라는 이름에 그 나름의 돈과 권력과 명예가 뒤얽혀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있다. 학자들이 하는 싸움인지라 체면상 학술용어의 정립에 대한 논쟁이라고 그럴듯하게 덧붙이고 있다만, 신문지면에서 벌어지는 정도의 이야기라면 이미 논문으로든 사석에서든 다들 하던 이야기가 아닌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후문에 의하면 실제 용어를 바꾸는 것 이외에 큰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는 의구심 얽힌 이야기들이 떠도는데. 혹시 차이가 별로 없어서, 아니면 하세가와 히로시처럼 모국어로 완전한 바꾼 번역을 낼 수 없어서 미리 엉뚱한 것으로 싸우는 것은 아닌지 의심마저 된다. 책이라도 내놓고 싸우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그래야 비교라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누구 말이 옳은지. 1999년부터 2006년까지 일본의 이와나미서점에서 총 23권으로 칸트전집을 새로 완간했는데. 차라리 그걸 볼까 싶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이 다툼에 가장 신경이 쓰이는 건 한길사판 『순수이성비판』의 역자일지도 모르겠다. 누가 하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2018. 7. 1.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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