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미 추아, 『정치적 부족주의』.


2012년 가을 주코티 공원의 Occupy Wall Street 시위대. 에이미 추아는 이들이 하나의 정치적 부족으로 미국의 가난한 중서부 노동자들을 대표하지 못하는 힙스터들이며, 시위대의 소득수준도 상대적으로 높았다고 지적한다. 이들의 온라인 시위와 세계와 대화하는 코스모폴리터니즘이 가난한 미국인들과 동떨어져 있다는 이야기다. 이들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이들도 자신들의 문제, 자신들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을 들고 일어섰을 따름이다. 그와 동시에 이들이 미국의 가난한 이들, 고통받는 이들을 대표하는 것도 아니다. 이 책이 말하는 것은 딱 거기까지다.

에이미 추아Amy Chua, 『정치적 부족주의: 집단 본능은 어떻게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가Political Tribes, Group Instinct and the Fate of Nations』, 김승진 역, 부키, 2020(2018).

정치적 부족 또는 부족주의라는 말은 표피적이면서 자극적이다. 나의 판단이나 주장은 합리 이거나 대의 또는 적어도 이해관계에 근거한 것인 반면, 너의 판단이나 주장은 전근대적이고, 낡았으며, 몰락하는 또는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뉘앙스가 깔려 있다. 진영논리 보다 더 자극적인 이런 말을 등장시킨 당사자가 ‘타이거 마더’라는 사실에 더 놀랐다. 처음과 끝에서 말하는 미국 사례를 제외하면 내용은 평범하다. 베트남이나 아프가니스탄 또는 이라크에서 미국의 실패를 지적하는 주장이 이 정도라면 미국의 대외 정책이 왜 분쟁지역에서 족족 실패하는지 이해할 만하다. 분쟁에서의 개입 자체도 실패했지만, 그 실패에 대한 평가도 빈약했다. 그나마 살펴볼 만한 내용은 모두 미국에 대한 거였다.

일단 지적해 둘 수밖에 없는 것. 에이미 추아는 내셔널리즘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주장하고 또 희망하는 바가 그 자체로 내셔널리즘이라는 사실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이 에필로그에서 말하는 아메리칸 드림이란, 미국의 내셔널리즘의 핵심 이데올로기다. 1장에서 말하는 여러 인종과 종교를 포괄하는 강력한 집단 정체성으로서의 ‘슈퍼 집단Super-group’이 바로 미국이라는 네이션이다. 미국 만이 특별한 예외가 아니라 모든 ‘네이션-스테이트’ 즉 국민국가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그 구성이 다른 국민국가들과 다르다고 해서 미국 만이 완전히 다른 존재인 것이 아니다. 미국은 다인종적이고 다민족(또는 다종족 multiethnic)적이기에 미국 민족주의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 자체로 형용모순인 것처럼 들린다. 이것 자체가 미국이라는 네이션이 가진 이데올로기다. 그러니 아메리칸 내셔널리즘이라고 해 보자. 굳이 한국어로 옮겨야 한다면, 미국 국민주의. 에이미 추아의 주장은 미국 내셔널리즘은 다른 내셔널리즘과는 형태가 아주 다르고 특별하기에 내셔널리즘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아주 특별한 미국 예외의 ‘슈퍼 집단’의 강한 정체성이라고 말하는 동시에 다른 내셔널리즘은 내셔널리즘이라기 보다는 종족적ethnic인 부족tribes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스스로가 자신이 주장하는 바와 미국에 대해서 자기 상대화 내지 자기 객관화를 하지 못하고, 내재적 논리에 빠져서 ‘아메리칸 내셔널리즘’의 이데올로기들을 객관적 가치나 정언명령인 것처럼 언급하면서, 그에 적합하지 않은 나라들에 민주주의를 적용하려고 한 섣부른 시도들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는데. 미국인들의 자긍심은 끌어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게 미국의 대외정책이나 미국의 국내 정치에 얼마나 도움이 될런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미국 정체성은 ‘용광로Melting-pot’이고 그게 잘 안되고 있는데, 그게 잘되어야 하는데를 언급하는 정도다.

베트남에서의 미국의 실패를 언급하면서 적어도 한 가지는 올바르게 지적했다. 베트남전쟁은 냉전 체제 하에서의 이데올로기 전쟁이 아니라, 베트남의 독립운동이자 민족해방전쟁이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54) 하지만 여기서 곧바로 베트남의 여러 문제를 종족ethnic간 갈등으로 환원시킨다. 그것은 베트남인들과 인구의 1%인 화교 간의 갈등이다. 이를 이야기하기 위해 중국과 베트남 간의 오랜 투쟁, 프랑스 등 서유럽 식민지 시절의 화교 자본의 성장 등 여러 요소를 언급한다. 이는 우선 당시 유행한 도미노 이론이 틀렸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한 것으로 베트남이 사회주의를 표방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중국과 결속될 것이라는 예측이 틀렸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실제로 베트남은 독립하고 통일을 이룩하자 곧바로 중국과의 국경분쟁으로 일종의 전쟁을 치렀다. 동시에 국내에서 화교 자산의 몰수와 축출도 일어났다. 그러나 베트남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인 캄보디아도 침공했다. 베트남이라는 네이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중국과의 오랜 역사, 갈등, 내부의 부유한 화교들(에이미 추아는 지배적 소수 민족이라고 표현) 문제는 하나로 연결된 것 같지만, 그렇지 만도 안다. 이들 문제는 각기 다른 원인과 결과를 가지고 있다. 동남아시아의 화인, 이미 이주한 지 수백년이 지나 토착화된 이들과 중국과의 갈등은 또 다른 문제다. 대다수 화교들이 남베트남으로 이주했고, 부패한 남베트남 정부와 화교들의 결탁이, 미국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구별하지 못한 미국의 종족맹ethnic blindness 때문에, 베트남인들 즉 농민을 주축으로 하는 베트남 민중과 남베트남 정부를 괴리를 방치하고 결국 미국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는 이야기까지 뒤섞여 있다. 이런 이야기 모두를 종족ethnic이라는 코드로 환원한다. 그런 것들이 원인들 중 하나일런지도 모르고, 민사작전이나 동맹정부를 다루는 미국의 서툰 솜씨가 문제의 일부일지도 모르지만. 중국 문제와 화교 문제는 베트남의 정체성 형성이라는 고리를 통해서만 연결된다. 이 모든 걸 종족ethnic 간의 갈등의 측면들로 보는 것은 저자가 동남아시아(필리핀)계 화교가 미국으로 이주해서 정착한 후손이라서 자기 스스로 태생적 부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렵지 않을까.

며칠 전 바이든 대통령이 9월 11일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하겠다고 발표했다. 2001년 9월 11일의 테러로부터 꼭 20년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부시 행정부에서 시작되었지만, 계속 끌고간 것은 오바마다. 오바마의 전쟁으로도 불린다. 바이든 자신이 오바마의 대외정책 결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마당에 바이든의 철군 선언은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20년간의 전쟁을 끝낸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과 나토 동맹군이 철수하게 되면, 탈레반에 의한 내전이 재발하리라고 누구나 생각하고 있다. 여기서 에이미 추아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의 성장에 대한 미국 책임을 이야기한다.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당시 파키스탄을 통해 무자헤딘을 지원했는데, 이때 선량한 미국의 지원을 파키스탄이 자국에 위협이 되는 파슈툰 족의 온건파를 억압하고 이슬람 급진파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미국의 종족맹을 이용했고 그 결과로 오사마 빈 라덴도 탈레반도 성장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파키스탄 입장에서는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양쪽의 국경 주위에 넓게 거주하는 파슈툰족의 부족 질서를 깨뜨려야 통합이든 분할 통치는 가능하게 된다. 파슈툰이 하나로 연대하여 독립하겠다고 나서지 않도록 약화시켜야 한다. 쿠르드 문제를 다루는 것과 똑같다. 아프가니스탄의 문제는 다시 한 번 파슈툰 족과 타지크의 부족 문제로. 부족 정치에 능한 파키스탄과 탈레반의 성공, 그리고 부족 정치를 이해하지 못한 미국의 실패로 귀결된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이 떠난다고 하니 이젠 중국이 평화유지군을 파견하겠다고 나선다. 아프가니스탄은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에서도 중요한 문제인 모양이다. 과연 미국에는 부족들을 잘 이해했던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없어서 아프가니스탄 개입 정책에서 실패한 것일까. 미국의 대외 정책에서 종족맹, 현지 사정과 역사에 대해 어두운 점은 확실히 큰 문제이지만, 대규모 개입에서 실패하는 원인이 그것 만이라고는. 대규모 대외 개입의 실패는 항상 제국의 중심부에 문제를 일으키는데, 역사는 늘 그렇게 말한다.

이제는 눈을 이라크로 돌린다. 에이미 추아는 이라크에서의 실패와 부분적인 성공을 다룬다. 이제 종족으로서의 부족은 종교로서의 부족으로 바뀐다. 저 정확히는 종파다 시아파와 순니파. 시아파가 얼마나 복잡한지, 순니파는 또 어떻게 나뉘는지. 이라크의 시아파와 이란의 시아파와의 사이는 어떤지, 그런 것은 모두 논외다. 사담 후세인은 시아파였고, 이라크는 순니파가 인구의 60%다. 이것이 전부다. 이것은 마치 이슬람 내의 종파 갈등을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종교 전쟁으로 환원한 느낌이다. 이런 상황을 모두 무시한 초창기의 정책을 비판한다. 그런데 이 정책은 2차 대전 후 미국과 독일에서 미군이 했던 정책들이다. 예를 들면 바트당 추방은 일본과 독일에서 있었던 공직 추방과 닮았다. 또한 민주화와 민주적인 선거에 책임을 묻는다. 여기서도 일본과 독일을 성공사례였다고 보고, 그 영향을 탓한다. 일본은 단일민족이었고, 독일은 비非아리아인을 절멸시켰기에(유대인을 학살했기에) 단일 민족에 가까운 국가가 되었다. 그래서 민족적, 종교적 분열이 없는 상태에서 민주화가 이루어졌다.(102) 이런 주장을 하고서도 멀쩡하게 출판된 것이 놀라웠다. 이것은 사실도 아니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은 대부분 동유럽, 지금의 과거의 프러시아 동부, 즉 지금의 폴란드에서 이루어졌다. 점령한 러시아 서부에서도 막대한 학살이 있었다. 과거 독일의 핵심이었던 프러시아의 전부는 아니지만, 거의 대부분은 소련에 의해 점령되어, 그중 상당 부분은 동유럽 국가들로 나뉘어졌고,(일종의 처벌이다) 일부만 동독으로 남았다가 통일되게 된다. 칸트와 한나 아렌트의 고향 쾨니히스베르크 즉, 칼리닌그라드는 지금도 러시아 영토다. 2차 대전 후의 서독이 비교적 안정적인 민주주의의 경로를 밟은 것은 나치 지배 이전에 이미 형성된 정치적 통일, 경제적인 성숙, 실패했던 민주주의의 경험 등이 기여한 것이고, 미국 주도의 나토에 의한 안전보장과 급속한 경제성장이 크게 작용했다. 그 공로의 아주 작은 일부라도 나치 독일에 의한 유대인 학살에 돌아가서는 안된다. 미국을 제외한 내부 갈등이 없는 국가를 단일 민족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는데, 너무 표피적이다.
에이미 추아는 또 이라크를 유고슬라비아와 비교한다. 독재자를 무너뜨리자 인종 분쟁과 학살이 재현되었던. 물론 억눌렀던 갈등이 폭발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역사는 전혀 다르다.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 사이의 발칸 반도의 민족 갈등의 역사와 이라크의 종파 갈등을 단순하게 등치하는 데는 동의하기 어렵다. 가장 큰 책임을 미국의 섣부른 민주화와 선거에 돌린다. 선거는 부족 정체성, 여기서는 종파 정체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경제가 충분히 성숙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민주주의는 분열 내지 붕괴를 가져오다는 것이다. 갑자기 역사가 한 30년에서 50년은 후퇴한 느낌이 든다. 가난한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시기상조라는 어디서 많이 듣던, 근대화론자들의 흘러간 레코드를 다시 트는 것 같다. 순진무구하게 민주주의의 이념과 도덕을 전파하는 미국 외교정책의 도덕주의를 현실주의 입장에서 비판하는 것 자체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런 입장이라면, 지금이라도 깨끗하게 빨리 손떼는 게 최선아닐까. 역량이 안되는 데, 감당할 수 없는데, 민주주의를 가져다 주었다는 데는 동의할 수 있지만, 애초에 그걸 하겠다고 시작한 전쟁이 아니었나? 그러면서 2007년에 종파 분포를 이해하고 뛰어든 민사작전의 성공을 치켜세우는데에서는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대외정책에서의 성공에 미국이 목마르다고나 할까.

부족 본능은 이런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가장 어둡게 표출될 경우, 부족주의는 탈인간화를 통해 공감과 감수성을 마비시킨다. 부족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집단이 헌신하는 목표에 유리한 방식으로 세상을 보게 만들어서 현실을 대대적으로 왜곡할 수 있다. 또 집단 정체성은 순응의 압력을 일으켜 사람들이 혼사서는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일을 하게 만든다. 개인의 책임은 집단 정체성으로 녹아들고 집단 정체성에 의해 부패한다. 그렇게 해서 잔혹하고 끔찍한 행동을 찬양하고 그런 행동에 가담하는 것이다.(143)
ISIS같은 테러 부족terror tribes에 대한 설명이다. 그런데 왠지 아주 낯익다. 1970년대와 80년대의 반공 교육을 통해서 공산당과 북한은 모두 늑대이고, 세뇌된 존재들이라고 주장하던 내용과 아주 닮았다. 괴물이 된 집단에 대해 흔히 등장한다. 고립생활을 하면서 기이한 행태를 보이는 종교적 분파나 집단 자살을 하거나 내부 살해를 하는 이들에 대한 FBI 연쇄살인전담반(크리미널 마인드) 식의 설명이랄까. 대테러전담반인가. 그렇다고 완전히 틀렸다는 건 아니다. 이 책은 곳곳에서 집단 심리학 논의를 가져와서 이를 결정론적으로 활용한다. 책의 부제에 집단 본능group instinct가 들어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책이 끊임없이 문제삼고 있는 것은 집단을 형성하는 성향과 이렇게 형성된 집단에서의 소속감과 집단 정체성이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이다. 이때 부족은 1차적인 집단이다. 물론 부족은 언어나 종족으로 형성되기도 하지만, 종교나 종파를 통해, 또는 신념과 소속감을 통해서 다시 말해 상상력을 통해 형성되기도 한다. 에이미 추아의 주장이다. 이런 부족은 어디서는 매우 작고, 어디서는 아주 크며, 어디서는 1차적이고, 어디서는 상상에 근거한다. 냉정하게 말해서 저자가 비판하고자 하는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는 집단은 모두 부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테러 부족이 이런 식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집단 심리에 의한 왜곡, 조작, 세뇌와 같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다. 편의에 의해 자신이 생각하기에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집단을 모두 부족이라고 부르면서 전통적인 부족에 섞어버리는 것은 그냥 낙인찍기에 불과하다. 자기 스스로 아무 의미가 없는 말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

베네수엘라로 가면 이제 부족은 인종을 의미한다. 이때 인종은 피부색에 따라 나뉘는 데, 저자의 주장에 의하면 피부색의 농도와 부의 분포는 비례한다. 그리고 우고 차베스는 가장 백인다운 지배층에 대항하여 자신이 하층계급에 속하는 파르도로 과두귀족의 것을 빼앗아 파르도에게 돌려주겠다는 포퓰리스트였다고 말한다. 에이미 추아는 자신이 베네수엘라의 코스모폴리탄적 백인 지배층이 경제를 지배하는 극단적 불평등 상황에서 민주주의의 한계를 비난하는 기고문을 발표하자, 베네수엘라의 지배층들이 보낸 것으로 보이는 비난 메일을 받았다는 점을 내세운다. 우고 차베스가 나름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지금 베네수엘라는 ‘파탄 국가failed state’가 되었다고 말한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에이미 추아가 우고 차베스의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는 포퓰리즘을 부족 정치라고 설명하는 점이 문제다. 편가르기와 상대방을 적이라고 부르면서 비난하는 것이 문제라면, 칼 슈미트를 불러올 것도 없이, 정치 그 자체가 문제다. 이쯤되면 부족정치라는 이름으로 비판하는 것이 인종 문제인지, 종족ethnic 문제인지, 종교나 종파문제인지, 포퓰리즘이 문제인지, 아니면 정치 그 자체가 문제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전체적으로 대부분 문제에 대해 큰 줄거리에 대해서는 동의하면서, 엘리트들이 편을 나누어서 적당히 주고받는 소위 자유주의적인 엘리트 간의 경쟁과 정기적인 투표로 편을 들어주는 것을 민주주의와 바람직한 정치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위기감을 느끼는 집단은 부족주의로 후퇴하기 마련이다. 자기들끼리 똘똘 뭉치고, 더 폐쇄적, 방어적 징벌적이되며, 더욱더 ‘우리 대 저들’의 관점으로 생각하게 된다. 오늘날 미국의 모든 집단이 적어도 어느 정도는 이런 느낌을 갖고 있다. 백인도 흑인도, 라틴계도 아시아계도, 남성도 여성도, 기독교도도 유대교도도 무슬림도, 이성애자도 동성애자도, 진보도 보수도, 다들 자기 집단이 공격받고 괴롭힘을 당하고 학대받고 차별받고 있다고 느낀다. 물론 어느 집단이 자기가 위험에 처해 있고 억압 때문에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고 느끼는 것은 종종 다른 집단의 비웃음을 산다. 너희보다 우리가 받는 박해와 차별과 억울함이 훨씬 큰데 무슨 소리냐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게 정치적 부족주의다.(18)
에이미 추아의 정치적 부족주의란 요약하면, 방어적 집단심리의 다른 이름이며, 정체성 정치가 좌우를 가리지 않고 확대되고 있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모두들 자신이 집단적으로 피해자임을 내세우면서 피해자 정치성에 입각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정치적으로 배타적으로 방어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비록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였지만, 2차대전 이후 오래 지속된 평화와 번영이 끝나가고 있는 모양이다. 미국에서 정치적 부족주의가 등장하고 있다는 말은 미국이 옛날 같지 않다는 말과 같은 말처럼 들린다. 미국의 백인 헤게모니가 흐려지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고. 아직 끝이라고 하기에는 이르지만.

미국 엘리트 계층은 자신이 ‘부족적’인 것과는 정반대라고 믿는다. 그들은 자신이 보편 인류를 찬양하고, 전 지구적, 코즈모폴리턴적 가치를 받아들인 ‘세계 시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바로 그 코즈모폴리턴주의가 얼마나 부족적인 것인지를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고학력이고 세계 여러 나라를 다녀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의 코즈모폴리턴주의는 사실 매우 배타적인 부족적 표식이다. …… 엘리트 계층이 촌스럽고 평범하고 ‘애국적’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경멸보다 더 부족적인 것은 없을 것이다. 미국 엘리트 계층은 종종 미국의 빈민보다 세계의 빈민에 더 공감하는 것처럼 보인다.(14-15) 명백한 진실은 백인 미국인들은 문화적 분열의 구도에서 자신과 반대편에 있는 또 다른 백인 미국인들을 가장 심하게 경멸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이다.(206) 이런 적대와 경멸은 상호적이다. 중서부의 트럼프 지지자들은 진보주의자들을 잘난 척하고, 엘리트주의적이며, 위선적이고, 위압적이고, 오냐오냐해 줘서 버릇이 없다고 생각한다. 또 많은 이가 ‘진보주의자들은 미국을 혐호한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 요컨대 ‘백인 미국인’은 하나의 집단이 아니라 둘로 분열되어 있다. ‘농촌/중서부/노동자 계급’인 백인과 ‘도시/연안 지역’의 백인 사이에는 상호작용도, 공통점도, 상호 간의 결혼도 너무 없어서, 이들 사이의 차이는 사회과학자들이 말하는 ‘민족적ethnic’차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다.(207) 이렇듯 미국은 전례 없이 부족적인 불안감이 만연한 시기에 들어섰다. 200년 동안 미국의 백인은 논란의 여지없이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지배적인 다수였다. 하나의 정치적 부족이 압도적으로 지배적일 대는 마음대로 남들을 박해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너그러울 수도 있다. 더 보편 지향적이고 더 계몽적이고 더 포용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224-225) 이는 오늘날 우파의 정치적 부족주의가 갖는 가장 놀라운 특징을 보여 준다. 백인 정체성 정치가 백인이 위험에 처해 있고 백인이 차별당하는 집단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조직되고 있는 것이다. 백인 정체성 정치는 백인 부족주의의 오랜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최근에 좌파로부터 막대한 자극을 받은 면도 있다. 좌파가 우파 부족주의를 끊임없이 지적하고 비난하고 창피를 줬던 것은 득보다 실이 컫는지도 모른다.(238)
이 책에서 가장 쓸만한 부분들은 미국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것도 실은 분석이라기 보다 인상에 가깝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가장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진보적 엘리트가 실은 부족이라는 비판이었다. 저자의 말을 따르면 미국에 부족 아닌 사람은 없지만, 가장 부족이 아닌 것 같은 가장 힙해 보이는 이들이 부족적이라는 말은 꽤나 뼈아프기도 할 것이다. 이 주장은 실제 미국의 백인이 둘로 나뉘어져 있다는 지적과 연결된다. 그런데 언제 미국의 백인들이 하나이기는 했을까. 다만, 과거의 미국이 백인 대 흑인의 인종이 부족으로 정치 투쟁을 한 적은 없었다. 굳이 에이미 추아의 말을 따르면 과거의 미국 정치는 두 백인 부족이 싸워서 이긴 백인 부족이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이제는 어느 백인부족도 단독으로는 정치 투쟁에서 이길 수 없는 시대가 왔다. 다른 유색인 부족들과 연대해야 한다. 이 책은 트럼프 당선 이후에 쓰여졌지만, 2020년 미국 선거의 결과는 더 시사적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도시/연안 백인 부족은 흑인/히스패닉 부족과 연대하여, 바이든을 당선시켰고, 민주당이 상하원을 지배하게 만들었다. 다른 세력과 연대하지 못한 농촌/중서부 백인 부족은 선거에서 패배했고, 그 패배감에 의사당을 점거하기에 이른다. 한편 이 선거는 히스패닉도 하나의 부족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났는데. 쿠바 등 중남미 사회주의 독재 국가 출신의 히스패닉 이민자 부족은 농촌/중서부 부족과 정체성을 연대하면서 플로리다에서 트럼프에게 승리를 안겼다. 왜 굳이 부족이라는 말을 써야했을까? 아마도 백인의 분열 정도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해서 그게 ethnic(종족 또는 민족)한 분열 수준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좌파의 정체성 정치를 우파가 배우는 것이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효과적인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전략은 언제나 표절된다. 정치에서 원래 표절은 상수다.

사람들은 얼마든지 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부족이 될 수 있다. 방어적 집단 심리학의 역동성을 따라서 움직일 수 있다. 코로나19같은 팬데믹에서도 그렇고, 나눌 자원이 부족해지거나 없어지는 경제적 위기 상황에서도 그렇다. 부족한 자원을 나눌 우리편을 우리 사람을 찾게 마련이다. 자원이 부족해서 부족인 모양이다. 또 하나는 이 책에서 말하듯 강화된 정체성 정치와 공격 그리고 조롱이 낳는 결과이기도 하다. ‘기레기’라는 비난과 공격이 미디어를 방어적으로 부족화시켰다면, 진보 엘리트들의 공격이 꼰대들을 점점 더 방어적으로 만들고 있다. 반대로 대중들의 공격에 방어적으로 변한 엘리트들도 부족화된 모양이다. 서로 계속 두드리다 보면, 부서질지 더 단단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부족이라는 용어를 쓰고 싶지 않다. 그러나 방어적 집단 심리에 의한 자기 정체성 강화가 다수 집단과 소수 집단 양쪽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보편을 주장하면서 공격하는 쪽도 집단 심리학의 포로이기는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손쉽게 양비론에 기대려는 것이 아니다. 변화가 있었다. 변화는 실은 대중 쪽에 있었다. 과거에는 미디어든 엘리트든 스피커를 가진 이들이 떠드는 대로, 그들이 말하는 것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한다고, 그들 다수가 말하는 대로 대중은 따랐다. 어느 순간 더 이상 전통적인 엘리트나 미디어라고 할 수 없는 이들이 대중 속에서 대중의 생각과 호흡하면서 형성되고 자라났다. 엘리트들은 이 새롭게 등장한 목소리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한다고 여긴다. 대중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 엘리트는 죽은 존재다. 엘리트는 대중에게 의존하고 있다. 기득권을 타파하겠다고 일어난 목소리를 구 기득권이 너희가 새로운 기득권이라고 비난하는 혈투가 벌어지고 있다. 확실한 것은 과거처럼 엘리트들의 가르침에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가르쳐주신 길을 따르겠다고 나서는 대중이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 대중도 하나가 아니다. 세대와 사는 곳과 경제적 지위, 젠더, 교육, 하는 일과 직장에 따라 분화되고 또 결합하면서 움직인다. 그 다툼이 토론일 때는 그나마 들어줄 수 있지만, 검열과 사냥일 때는 도무지, 귀를 덮고 씼어버리고만 싶다.

이 책에서 건진 것은 딱 하나다. 누군가에게 손가락을 들어 부족이라고 가리키며 비난하는 그 자신이 바로 부족이라는 점.

2021. 4. 18.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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