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 주커먼, 『종교 없는 삶』.

오늘자 한겨레에서 가져옴. 극우와 개신교와 가짜뉴스와 이런 연결고리가 하나 뿐이랴.

필 주커먼Phil Zuckerman, 『종교 없는 삶Living the Secular Life: New Answers to Old Questions』, 박윤정 역, 판미동, 2018(2014).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건 실은 주를 다는 방법이었다. 주는 모두 미주로 처리되어 있는데 본문에도 주에도 번호가 없다. “21쪽 1950년대 미국인들 가운데-: 30%라는 수치와 관련해서는”(388). 처음엔 정말 신박한 번역이라고 생각했으나, 아무리 창의적인 번역자나 편집자라고 이런 발상을 할 수는 없겠지. 구글 북스를 뒤져보니 원래 그렇게 만들어져 있었다. 심지어, 페이지 숫자도 한국어 번역판에서 넣은 것이었다. 새삼 편집자의 수고에 감사하는 느낌도 들었다. 막연한 추측이지만, 원래 전자책이었던 건가하는 의구심이 들었다만, 진상은 알길이 없다. 나는 전자책을 보지 않아 하이퍼 텍스트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르니. 참으로 신박한 방법이며, 솔직히 동의도 잘안되는데다, 찾아보기 불편했다만, 뭐 여튼 그게 본질은 아니니까. 나는 그냥 이런 편집이 너무나 귀찮았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다음으로 눈이 간 건 번역어였다. secular는 무종교적으로, secularity는 무종교성으로 일관되게 번역하고 있다. secularism은 무종교주의와 세속주의를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다. secular에서 파생된 단어들은 대부분은 무종교로 번역되어 있다. 번역자는 secular가 흔히 ‘속물적이라는 부정적 의미로도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나름 친절하게 이유도 밝히고 있다.(23) 이걸 뭐랄까 옳거나 그르다고 말하기는 어렵겠다. 다만 무종교에는 non-religious의 번역어 이기도 하다는 점을 기억해 두어야겠다. 하나의 사물에 하나의 명사가 대응되는 것처럼 하나의 영어 단어에 하나의 한국어 번역어가 대응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니 굳이 이걸 문제 삼기도 어렵다고 본다. 그렇지만 나는 왠지 이 무종교라는 번역어가 걸린다. secular라는 말이 기독교를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뜻하는 것이라는 건 미국이나 유럽 같은 한때 기독교 국가였던 나라들에서는 아주 분명하다. 그러나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던 한국 같은 나라에서는 세속적이란 말이 다른 뉘앙스를 가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무종교’가 secular의 대응어가 될 수 있을까? 무종교는 보다 가치 중립적인 그런 말이 아닐까? 그리고 애초에 유교는 어디에 포함시켜야 하지? 여러가지 의문이 꼬리를 문다. 저자가 결론 부분에서 자기 정체성으로 표현하는 무종교적 인본주의자의 영어는 secular humanist이다. 왠지 뭐랄까 느낌이 확달라진다. 세속적 휴머니스트(인본주의자)라니 뭔가 계몽사상가 비슷하지 않은가? 반면 무종교적 인본주의자라고 말할 땐, 너무 거창해서 우주공간을 부유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김승욱 번역의 필 주커먼의 전작 『신 없는 사회Society without God』을 살펴보았다. secular는 모두 세속으로 번역되어 있었다. 이거 혹시 이 두 책을 읽는 사람은 둘이 서로 다른 개념이라고 필 주커먼의 생각이 변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지 않을까 하는 괜한 참견의 마음까지 생겨났다. 그런 생각이 들 만큼 두 권은 깊이 연결되어 있다. 이 두 권에서 주장하는 내용은 것의 같으며, 『종교 없는 삶』이 미국을 『신 없는 사회』가 덴마크와 스웨덴을 다루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재미는 『종교 없는 삶』 쪽이 더하고, 『신 없는 사회』는 구하기도 어려우니까. 시시점도 미국 사례 쪽이 한국에 더 많고.

그렇지만 책은 적어도 전반부는 꽤나 흥미롭고, 인상적이며, 뼈를 때리는 이야기로 넘쳐난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미국의 많은 지역에서 무종교를 선택한 사람들은 ‘하찮은 존재nothing’이 되며, 아이들도 따돌림을 당한다는 이야기였다.(16-17) 인종차별에 가까운 차별이 있다. 전작 『신 없는 사회』에서는 신을 믿는다는 사실을 아주 친한 친구에게 와인 몇 병 마신 채로 아주 조심스럽게 말하는 사례가 나온다. 마치 성소수자의 커밍아웃 같다. 신앙의 유무를 떠나서 사람이란 자신과 조금만 다르면 그토록 차별하고 괴롭히는 존재들인 건가. 종교적인 미국에서는 종교 없는 사람이 반대로 세속적인 덴마크에선 신앙을 가진 사람이 스스로 소수라고 느끼면서 조심스럽게 행동한다. 그러나 이들의 수는 증가하고 있다. 18세에서 29세 사이의 미국인의 1/3이 종교를 갖지 않겠다고 말한다.(22) 그리고 필 주커먼은 무종교인 즉 세속적이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활력과 의욕, 열정, 끈기를 갖고 지금 여기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여기의 삶이야말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삶이기 때문이다. 또 이 세상이 우리가 가진 전부이므로 세상을 더욱 나은 곳으로 만드는 일에 헌신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신이나 구원자보다 가족과 친구들을 더 사랑하고 선을 행하며 타인들을 올바르게 대하는 것과도 연관되어 있다.”(24-25) 이 긴 인용구의 맨 첫 구절은 달리 생각해보면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라고 말한 그 내용이기도 하다. 나는 오히려 동일한 태도와 지향을 어떨 때는 종교적이라고 말하고 어떨 때는 비종교적이라고 말한다는 사실에 더 마음이 쓰였다.

신 즉, 종교와 도덕성이라는 주제를 정면으로 제기한다. 미국에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종교가 없는 사람을 비도덕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필 주커먼은 종교가 없는 사람도 도덕적이라고 아주 간결하게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황금율에 기반하는 보다 보편적인 것이라는 주장이다.(37) 황금율은 고대로부터 비롯된 도덕이기도 하고.(38) 오히려 이들은 신을 도덕의 원천으로 삼는 것이 도덕적인 결정을 미루는 책임회피의 태도라고 말한다. 그리고 권위나 군중심리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42) 벌이나 상을 의식하는 것은 타산적이며, 진실한 도덕적인 태도라고 볼 수 없다는 것.(46)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 더 고문을 싫어하고, 인종차별주의자나 강경한 국수주의자가 될 가능성이 적고, 더 관대하다.(48-49)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의 도덕적 근거를 종교나 신에게서 출발시키지만, 그런 존재가 없이도 사람들은 도덕적일 수 있다.(62-63)

저자는 세속적인 즉 무종교를 설명하려고 하기에 종교적인 이들을 딱히 비판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은 아주 사소한 점들에서 나를 명료하게 만들었는데. 종교가 도덕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평범한 사실이다. 종교 아니 기독교(개신교)에 대해서 말하면 그렇다. 내가 아는 종교 역시 이것 뿐이니까. 초월적인 존재인 하나님의 상과 벌, 그리고 천국과 지옥의 기독교 신자들의 도덕이란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자발적이고 자기 결정적인 도덕관은 기독교 안에서도 소위 자유주의적인 분파들 보다 인본주의적인 분파들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교리적으로 보다 근본주의적이거나 개혁주의를 표방하면 할 수록 성경의 본문에서 도덕적인 근거를 발견하려고 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일들 중에 성경이 언급하고 있지 않거나, 성경이 언급하고 있는 것들이 당대의 문화를 반영해서 가부장적이거나 신분제나 계급사회를 정당화할 때가 적지 않다. 이럴 때,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은 문자로 도피하고, 어떤 사람들은 문자를 확대해석한다. 문자로 도피할 때,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부분의 악과 비도덕을 수수방관한다. 외면함으로써 비도덕을 조장한다. 때론 문자로 기록되어 있으면 학살도 수수방관한다. 문자를 확대해석하는 경우에 어떤 이들은 종교적 편집증에 걸리기도 한다. 날마다 순간순간 마다 신의 조명을 생각하다 보니 겁에 질려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삶의 순간순간을 모두 징조로 해석한다. 어떤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성경의 가부장제, 신분제, 계급사회, 지배자에 대한 복종 등을 골라내서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체제에 순응하는 수동적이고 허역한 사람들로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뒤섞여 있다. 여기에 신자와 성직자 모두를 포함한 현대 한국 기독교인들의 도덕적 혼돈이 근거하고 있다. 이들 중에는 도덕적인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다. 아니 꽤 많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 안에 있는 수많은 부도덕과 비도덕을 통제하지 못한다. 부도덕과 비도덕을 조장하면서 욕망추구를 충동질하는 사기꾼들을 통제하지도 못한다. 기독교는 도덕을 보장하지 못한다.

그는 다음으로 종교적인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를 말한다. 여기서는 종교성religiosity와 무종교성secularity를 말한다. 전작 『신 없는 사회』에서 이미 예고된 대로다. 종교적인 사회는 가난하고 취약하고 폭력적이고, 세속적인 사회는 부유하고, 풍요롭고, 안정적이고 평화를 누린다. 한국은 여기에 속한다.(83) 특히 흥미로운 것은 신에 대한 믿음이 높은 10개주 루이지애나, 아칸소, 앨라배마, 미시시피, 조지아, 사우스 캐롤라이나, 노스 캐롤라이나, 켄터키, 테네시, 오클라호마와 신에 대한 믿음이 가장 낮은 10개 주 메인, 버몬트, 코네티컷, 뉴햄프셔, 로드아일랜드, 메사추세츠, 뉴욕, 알래스카, 오리건, 캘리포니아를 비교한다. 그리고 살인율, 폭력범죄율, 빈곤율, 가정내 학대율, 비만율, 교육 수준, 학교와 병원을 위한 기금, 10대 임신율, 성전염성질환율, 실업율, 가정폭력 등의 모든 척도에서 유신론을 가장 덜 믿는 주들이 실제 훨씬 잘사는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아동학대로 인한 치사율이 신을 가장 두려워하는 주들에서 눈에 띄게 높다.(95) 필 주커먼도 무종교성이 원인라고는 하지 않는다. 이건 단지 상관관계다.(96) 베버가 말한 선택적 친화성이다. 물론 필 주커먼은 세속주의가 사회적 선과 진보에 기여해 왔다(97)고 주장한다. 물론 세속주의를 강요한 전체주의와 독재국가들의 끔찍한 사례들도 빼놓지 않는다.(98)

종교적인 사회가 더 못하고, 세속적인 사회가 더 낫다. 국가 단위로도 그렇고,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주 별로도 차이가 난다. 전체를 말하는 통계가 모든 것을 설명해 주지는 못하지만, 통계가 설명해 주는 어떤 요소들도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이건 무엇보다 현대 한국 기독교에서 날마다 외쳐왔던 것과 배치된다. 한국에서 이상적이고 기독교적인 것의 기준은 항상 미국이었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모든 것을 근사하게만 보고, 그 모든 것을 부러워만하던 그 어떤 시대에 기독교적인 것과 그런 도덕은 모든 것을 설명하는 마법의 열쇠였다. 그리고 그 마법의 열쇠의 빛나던 도금이 바래면서, 그 안에 녹슬고 부러진 모습이 만천하에 드러났을 때. 그 마법의 열쇠를 손에 들도 큰 소리치면서 호가호위하고 호의호식하던 이들이, 이젠 은박지로 대충 그 열쇠를 감싸고는 자신들이 손에 쥔 것을 놓칠까봐 지금까지 해왔던 이야기를 더 열정적으로 더 큰 목소리로 강변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그 열쇠를 불에 태우고 녹여서 거기서 견디고 나오는 금속으로 새 열쇠를 만들어야만 할텐데 말이다. 새 열쇠를 찾는 사람이 있을런지조차 모르겠는데.

그리고는 무종교, 세속, 종교적 귀속성이 흐릿해지는 사람들을 다양하게 설명하다가 미국에서 왜 무신론과 불가지론 그리고 조사에서 무종교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지 말한다. 누구나 알고 있는 식상한 이야기다. 첫째로는 보수적인인 종파와 우파 정치와의 결탁, 낙태 불법화, 동성애자 권리 반대, 금욕적 성교육, 복지재정축소, 이스라엘 지원, 총기 규제 반대, 대테러전쟁 찬양 등에 정치적으로 좌경화되어 있거나 온건했던 미국인들을 소외시켰다.(123-124) 둘째 카톨릭교회 사제들의 소아성애 스캔들이 불러일으킨 정신적 환멸과 반작용이다.(124) 셋째 영국의 역사학자 캘럼 브라운Callum Brown의 연구대로 집 밖에서 일하는 여성의 증가가 종교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시들게 한다는 것읻이다. 남편과 아이들 종교로 이끈 것은 여성들이었다.(126) 여기에 동성애를 인정하는 미국인들이 늘어나면서 동성애를 비난하고 게이들의 권리에 맞서 싸우는 종교적 관점 때문에 사람들이 종교를 멀리하게 되었다.(128) 마지막으로 인터넷이다. 인터넷은 종교에 대한 비판을 손쉽게 접하게 하고, 종교를 의심하는 사람들의 네트웍을 형성시켜 주며,(128-129) 무엇보다 인터넷의 기능방식, 개인을 연결하고 심리와 신경, 문화적인 면에서 공급과 만족을 통해 종교를 대체한다.(130)

미국에서 부시 정권을 탄생시킨 보수 우파와 보수적 기독교의 결탁을 한국 기독교와 보수 정치권은 고스란히 벤치마킹 했고, 노무현 정권에 대한 반대의 조직화와 그 이후 보수정권의 탄생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여파로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태극기 집회를 지지하고 찬성하면 할수록, 에스더를 앞세운 어떤 운동이 가짜 뉴스를 만들어서 뿌리면 뿌릴 수록 더 많은 사람은 종교 그 중에서도 기독교를 외면하게 될 것이다. 나이와 세대를 막론하고. 트럼프 처럼 보수적 기독교 성향을 가진 인물을 언젠가 다시 당선은 시킬 수 있을런지 모르지만. 그 동안 기독교는 그 백배는 더 크게 타격을 받을 것이다. 누구를 위해 하는 일인지 모르겠다. 한국에서 성스캔들은 개신교 목사들의 단골 메뉴다. 일하는 여성의 증가는 IMF 이후 경제구조가 재편되면서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 과거에도 가난한 사람들은 여자들도 일해야 했다. 지금의 변화는 도시 중산층 여성들도 일하지 않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전업주부란 특권계급의 다른 말이다. 그리고 특권계급에 의존하는 교회조직이 무너지는 건 너무 당연한 일다. 게다가 그렇게 많은 자원을 쏟아부은 특권계급의 여성이 사회활동을 하지 않을리가 없다. 원하는 직장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역시 특권계급이다. 게다가 10대와 20대에서 이미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동성애 혐오 발언을 날마다 쏟아내는 걸 보면 이런 변화를 느끼기는 느끼는 모양이다. 그러나 자신이 소수파이며, 그런 혐오발언은 자신의 발목을 스스로 베어낼 뿐이라는 사실 조차 모르고 있다. 그리고 뭐 목사들도 교인들도 하루종일 인터넷만 들여다 보고 있다. 심지어 인터넷에 글을 올리고 동의를 받으면서, 목회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은 형편. 이렇게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는데. 그리고 그런 문제를 깨닫지도 못하고 있는데. 몰락하지 않을 수가 없다.

뒤에 이어지는 내용들은 세속적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 가에 대한 이야기인데. 흥미롭지만, 더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놀라운 건 나온지 일주일 남짓인데. 알라딘 인문학 주간 7위라는 사실. 요새 책이 많이 팔리지 않는 다지만, 그 위는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이고 그 아래는 문유석의 『개인주의자 선언』인데. 뭔가 의미심장하다. 무엇보다 종교가 윤리와 도덕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주장이 가장 매섭다. 어떤 사람에겐 그냥 상식일런지도 모르지만.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을 근거로 여러가지 윤리적 주장을 얼마든지 현대적으로 해석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해석이 있다고 종교가 한 사람의 도덕을 보장하지도, 그 근거가 되지도 못한다. 그가 도덕적 인간이 될지 말지는 그의 선택에 달려있다. 게다가 기독교에는 용서라는 회개라는 너무나 큰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문자적 해석도 또 하나의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 두고 있다. 마치 규제의 네거티브 리스트 처럼. 엄밀하게 금지되지 않은 건 뭐든 해도 된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엄청나게 많다. 혹 실수로 그런 규정을 어겨도 용서받을 수 있고. 그 구멍을 메워서 공포정치를 한다고 문제가 해결될리도 없고. 도덕이나 윤리 같은 건 대충 얼버무리고, 의례의 영역으로 도망쳐버릴 것이 아니라면,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내세만 주장할 것이 아니라면, 해결책을 찾아야만 할터인데. 그럴 수 있을까. 게다가 이 문제는 실은 복음서에서도 말씀하는 바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개역개정, 마태복음 5:20)

2018. 9. 27.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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