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토 토스카노, 『광신』.

알베르토 토스카노Alberto Toscano, 『광신: 어느 저주받은 개념의 계보학Fanaticism: On the Uses of an Idea』, 문형준 역, 후마니타스Verso, 2013(2010).

유시민이 어디선가 한 말이 있다. 모든 책을 다 읽을 필요는 없다. 좋은 책은 많으니 자신과 맞는 책을 읽으면 된다. 자신과 맞는 책을 어떻게 찾느냐? 책의 아무 곳이든 펴서, 두 세 쪽을 읽어보라, 술술 읽히면 자신과 맞는 책이니 그 책을 읽으면 되고, 잘 읽히지 않고 막히면, 그 책은 당신과 맞지 않으니 읽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학위를 위해서 또는 어떤 과정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책이 아니라면 그거 참 좋은 방법인데 라고 그때는 생각했다.

『광신: 어느 저주받은 개념의 계보학』이라는 책의 제목을 듣거나 표지를 본다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 이 책은 ‘광신’의 역사를 다루면서, 그에 대응하거나 극복할 방안에 대해 말하는 책이겠구나. 덧붙여서 ‘광신’의 일정한 효과에 대해서도 언급하겠지. 이 책을 읽자고 소개한 사람도 그랬을 것이고, 나도 이 책이 그런 내용을 다룰 줄 알았다. 마침 그때 한국에서도 그리고 전 세계를 휩쓰는 극우와 광신이 날뛰고 있던 시절이었느니까. 지금도 크게 다를 바 없지만. 이 ‘광신’의 무리에 개신교 일부가 그토록 적나라한 모습으로 뛰어들리라고는 상상해 본 바가 없었고. 그래서 이 책이 ‘광신’에 대한 일종의 해독제가 되리라고 지레 짐작하고서는 읽기 시작했다. 읽다보니 뭐랄까,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꼭 전혀 아닌 것도 아닌 책이었다. 여럿이 읽는 것이 아니었다면, 진작 접었을지도.

그렇다. 이 책은 ‘광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역사를 다루지 않는다. ‘광신’이라는 개념에 대한 이야기들을 다룬다. 구체적인 광신에 대한 역사적인 충격적인 사례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론가들, 사상가들, 역사가들이 ‘광신’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다루고 있을 뿐이다. ‘계보학’이라는 번역서의 제목도 좀 너무 나간 듯하다. ‘계보’를 충실하게 다룬다기 보다는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느낌. 그러니까,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설명은 없고, ‘광신’이라는 말이 어떤 상황에서 등장하고 어떻게 쓰였는지만 다룬다. 그러는 과정에서 ‘광신’이 혁명적 사건들에 대한 해석과 엮이는 지점들을 다룬다. 독일농민전쟁과 뮌처를 어떻게 보았는가? 프랑스 혁명과 일련의 계몽주의를 광신이나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어떻게 보았는가?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 혁명을 어떻게 보았는가?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역사적 사건을 ‘광신’이라는 관점에 비추어 평가하는 것은 저자의 목표가 아니다. 저자의 관심은 ‘광신’이라는 개념의 활용과 수용 뿐이다. 그러면서 ‘광신’이라는 개념에 대한 대응이 광신을 질병으로 보아 치료나 제거를 위한 접근으로 유도되고, 이 과정에서 열정과 변혁을 봉쇄하는 측면을 슬쩍 지적하고, 어느 정도의 변혁적 운동의 가능성을 열어두려 한다. 이 책이 소개되던 시점에 이런 가능성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고 들었다.

이 책에 대한 간략한 소개는 역자 해제에 맡겨두자. 본문을 읽어나갈 때의 답답함과는 무관하게 유려하게 펼쳐지는 해제는 역자의 전공을 다시금 상기하게 되었다. 이 논의에 ‘빨갱이’를 잇대려는 부분이 좀 어색하기는 했지만. 책 내용에 비추어보면, 광주민중항쟁을 언급하는 저자의 한국어판 서문도 다소 어색하다. 뭔가 맥락이 좀 다른 느낌이랄까. 여튼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역자 해제의 내용 요약부터 읽기를 권한다. 큰 줄기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본문부터 읽어내려간 나의 소감은 일단 학위논문 느낌이 난달까. 아직 자기 연구의 요체를 능수능란하게 쥐었다 풀어내지는 못하는. 학자들과 문헌들에 대한 해석과 평가로 빼곡하게 채워져서 이어져가는데. 등장하는 이름들은 뭐랄까 약간 중구난방인 느낌이다. 저자 본인은 중요성에 따라 선택한 것이겠지만, 왜 여기서 이런 사람들을 언급하는지 충분히 설득되지 않는다. 이런 문제를 오래 고민해 온, 학문적 토론자들의 무리에 속한 사람들이라면 별도의 설명이 필요없겠지만. 블로흐, 바디우, 슬로터다이크가 연달아 등장하는 데, 고개가 갸웃거려 진다. 무엇을 말해야겠길래, 이런 사람들의 명단을 채워가고 있는 것일까.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한 논의가 이어질 때, 낯익은 방식의 서술이 등장한다. 일단 이런 경우에 우선 마르크스가 직접 한 말, 그 다음에 주요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언급과 또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한 해석이 이어진다. 오래전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 『자본 I』의 한 쪽을 펼쳐들더니, 거기에 있는 각주에 나오는 한 구절을 가지고 두 세 시간 토론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런 연구방식이 정말 낯설었다. 적어도 그 내용이 포함된 장이나 절 하나는 읽고, 전체적인 의미를 파악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쓰는 논문이나 해석에서는 늘 그렇게 계보가 중요했다. 루카치 같은 이들이 어떻게 해석하고, 소련의 아카데미에서는 어떻게 해석하고, 유럽의 좌파들은 어떻게 해석하고, 미국에서는 어떻게 해석하고. 이런 문제는 2차 대전 후에 소련의 공식적 해석과 동유럽에서 자유화 운동에 대한 소련군을 동원한 탄압 이후에 소련에는 비판적이지만 마르크스의 원전을 따라가려는 해석 사이의 갈등에서 흔히 보이는 일들이었고, 그 이후 해석은 갈래가 나뉘어지며 복잡해져가는데,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런 갈래길들을 잘 따라간다. 원래의 마르크스, 현실의 사회주의, 그에 비판적인 좌파 이론가들의 해석, 그 이후의 다양한 좌파들의 해석의 갈래들이 전개되는 흔한 상황이 금새 떠올랐다.

아, 이건 마치 성서해석자들, 신학자들의 논의 같다. 성서 원문에 대한 해석이 있고, 고대 후기와 중세를 거치는 라틴과 그리스 교부들의 해석이 있고, 근대 이후의 해석이 덧붙여 진다. 19세기 이전의 주석가들은 혼자서 성서 전체를 주석하는 일이 흔했지만, 20세기에는 언감생심, 연구자들은 성서의 일부 만을 자기 전문으로 삼게 된다. 주요 출판사들이 편집하는 성서 주석의 구성을 보면, 이제 교파의 구별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개신교 목사들과 카톨릭 신부들, 그리스 정교회 신학자들이 섞여있고, 심지어 구약성서의 주석에는 유대교 랍비 신학자들까지 포함되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의 주해의 밑바닥에 자신이 속한 교파의 색채가 옅게라도 깔려있는 일이 흔하다.

마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의 글을 종교적 경전 다루듯, 성서 다루듯 하는 느낌이다. 후기작인 『자본』은 교리가 담긴 신약의 서신서 같고, 초기작인 글들은 구약의 예언서나 성문서 같은 느낌이랄까. 그러고보니 저자는 마르크스에 대해 칼 뢰비트와 한나 아렌트의 의미심장한 구절들을 인용한다. “그[마르크스]는 비록 강한 반종교적 감정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반유대적이기까지 했던 19세기의 해방된 유대인이었지만, 구약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 유대인 중 하나였다. 마르크스 유물론의 이상주의적 토대를 설명해 주었던 것은 오래된 유대 메시아주의와 예언자주의-수공업에서 대규모 산업에 이르는 2천 년 동안의 경제사로도 변하지 않았던-였으며, 절대적 정의에 대한 유대적 고집이었다.” (375, 칼 뢰비트) “디즈레일리를 수상으로 만들었던 나라에서 유대인인 칼 마르크스는 정의를 향한 광신적 열정으로, ‘선택받은 민족의 선택받은 인간’에 관한 모든 성공적 서사들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유대 전통을 실천했던 책인 『자본』을 썼다.” (376 주63, 한나 아렌트) 마르크스주의와 종교의 친연성을 논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닌데, 이런 것들이 눈에 띈다.

그러면 늘 하던대로 흥미로운 부분들을 몇 군데만 살펴보자.

멜란히톤의 『튀링기아 반란 주동자 토마스 뮌처의 역사에 대한 매우 유익한 책』에는 뮌처의 입에서 나온 다음과 같은 열변까지 실려 있다. “내 요구대로 신이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신에게 똥을 싸겠다.”(153) 농민전쟁을 주도한 토마스 뮌처의 말이다. 알다시피 재세례파의 지도자 뮌처는 성직자이자 신학박사이고, 한때 루터의 제자였다가, 성령과 내면의 계시를 주장하다가 추방당한 인물이다. 이 글을 쓴 필리프 멜란히톤은 평생 마르틴 루터의 동료였으며, 루터의 옆에 있던 루터의 이론가였던 인물. 한때의 동료는 갈라서면 이렇게 된다만. 신성모독적 발언을 자칭 성직자들이 쏟아내는 데는 유구한 역사가 있는 것이다. 극우 개신교의 표상인 전모 목사가 “하나님 까불면 죽어”라고 말했다지 않은가. 저자는 점잖게 분변학糞便學과 종말론 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다(153)고 하더라만.

반제국주의 반란insurgencies에 대한 구하의 고찰과 마찬가지로, 저항에 대한 접근 역시 지배 이데올로기라는 왜곡된 거울을 통해 부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게 할 수 있으려면 저항은 자기 적수의 어휘를 끌어올 수밖에 없으며, 뮌처의 경우에 신학이 그런 어휘였다. 하지만 저항은 착취자들의 사유와 실천에 단순히 기생하지 않는 긍정적 자율성을 가진다. 이 자율성은 이른바 반란의 자연 발생적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177) 탈식민주의post-colonial 연구자 라나지트 구하를 불러와 저항은 지배자의 언어로 이루어진다는 오랜 도식을 불러왔다. 이런 내용은 프란츠 파농이 더 적격인데. 물론 이건 타당한 지적이다. 한국의 민주진보세력이 딱 이런 경우인데. 자신들의 언어가 아닌, 사회 전체에 통용되고 있는 언어 그것은 결국 지배세력의 언어를 사용해서 자유와 민주라는 이름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었고, 나중에는 그런 언어들을 통해서 지배엘리트와 지배동맹이 부과하는 올가미들에 얽매여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검찰과 사법 엘리트가 독점하고 있는 정의와 사법 존중 같은 것들이었는데. 정치적 중립과 도덕성 같은 것들도 그렇고. 이들이 조금씩 주류가 되어가면서, 이제 이런 언어들을 빼앗아와 전유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 대항담론을 형성하고, 이를 주도하는 대안 미디어들이 등장하고. 그만큼 운동적 역량은 애저녁에 소멸되어 버린 것도 같다만.

내면의 지각을 축적해 “자기 관찰자로서의 일기”를 만드는 일은 “쉽게 광란과 ‘광기’Wahnsinn로 이끈다.” 자신에 대한 이런 “엿듣기”는 칸트에게 있어 특히 위험한데, … 우리가 진정 합리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유일한 경험, 즉 외부의 경험을 경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요컨대 칸트에게 그런 광신적 자기관찰은 “우리의 뜻과는 상관없이 어디서 오는지도 모르게 우리 안으로 유입되는 가상의 고차원적 영감의 힘으로 생겨나는 정신의 혼돈을 거쳐, 광명주의Illuminati 혹은 심지어 테러리즘으로 향하는 가장 직접적인 길”이다.(227) 칸트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내면의 소리에 깊이 귀기울였을 것 같다. 그의 철학이 꼭 그렇지도 않은데도, 그런 선입견이 드는데. 자기 관찰, 자기 엿듣기의 위험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늘날이 자기 관찰과 자기 내면에 집중하는 시대가 아니던가. 자기를 발견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고,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찾아서 하려고 하고. 그러면 정신의 혼돈, 일루미나티, 테러리즘으로 향한다는 칸트의 말은. 실제 자기는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는 만들어가는 거고, 쌓아가는 것인데. 이만큼 살아서 겨우 알게 된 것이지만.

종교 텍스트 자체의 수준에서 발생하는 판타지들을 전제로 하여 ‘무슬림’ 개인의 심리적 동요와 정치적 어려움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고 추정함으로써 무의식을 윤리화하고 문화화한다. 사회적 실천과 개인의 고통에 관한 적절한 정보들을 종교 경전을 통해 직접 얻을 수 있다고 가정하는 이 ‘텍스트주의’야 말로 에드워드 사이드가 해부한 오리엔탈리즘의 주요한 기능이다.(285) 한 마디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쿠란이나 이슬람 율법을 백날 들여다봐서는 소용이 없다는 말인데. 저자는 일관되게 종교 경전이나 신화 안으로 들어가서 이를 내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이건 아마도 다른 종교나 다른 문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일 듯. 전적으로 동의한다.

여기에 이어지는 이 책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

알랭 그로리샤르Alan Grorichard의 『술탄의 궁전The Sultan’s Court』. 그로리샤르에게 있어, 정신분석에 기반을 둔 이데올로기 비판의 대상은 타자의 (반)정치에 대한 판타지가 우리의 정치학을 구조화하는 방식, 타자가 믿는다는 것을 믿음으로써 우리가 믿지 않음을 믿게 만드는 방식이다. 판타지는 한 종교나 문화의 본질적 특징을 드러내기보다는 문화적 모순을 작동시킨다. 돌라르가 주장하듯, 판타지는 그것이 다루는 대상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거의 말해 주지 않으나 판타지의 생산자와 옹호자들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우리 자신의 무능과 모순을 멀리 있는 타자에게 투사함으로써, 우리는 권위에 대한 우리 자신의 부인된 믿음과 권력에의 굴종을 제3자에게 떠넘길 수 있는 것이다. … 후궁들의 방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 판타지는 따라서 유럽의 주체로 하여금 전제적 권력에 대한 믿음을, 그리고 타자의 쾌락에 대한 믿음을, “믿는다고 가정된 주체들”subjects supposed to believe에게 떠넘기도록 해준다. 자율적이고 회의하며 자유로운 그의 자아상은 결국 저 먼 땅에서 나타나는 미신, 광신, 절대적 예속의 장면들에 의지하고 있는 셈이다. … 판타지라는 범주를 가지고 작동하는 정신분석 비평은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판탄지가 언제나 타자의 믿음에 대한 판타지이자 사실은 타자의 판타지에 대한 판타지라는 원칙에 기초해야만 한다. … 타자의 통일된 문화나 종교라는 관념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위치 … 가 일관되고 통일되어 있다는 믿음을 품게 해주는 판타지 자체다. 정치적 판타지들에 관한 연구는 타자(그리고 타자의 부재)와의 관계가 우라의 취약한 동일시를 어떻게 구조화하는지를 드러낸다. 우리들이 일관되고 통일된 문명에 속해 있다는 그릇된 안정감을 ‘우리’(그리고 그들)에게 허락하는 것은 타자의 자기 폐쇄적 문명이라는 판타지다. 그로리샤르와 돌라르가 제기하는 판타지에 대한 관계-정치적 접근은 강력한 비판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반면, 신학적 텍스트나 신화에 관한 연구를 통해 우리가 타자의 집단적인 정치적 무의식을 통찰할 수 있다는 망상을 품게 하는 표현-문명적 모델은 그렇지 못하며, 오히려 자율과 관대함이라는 자기 충족적 정치 판타지를 단순히 강화할 뿐인 또 다른 신화들을 생산해 낼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287-288) 스위스의 루소 연구자이자 근세 프랑스사연구자인 그로리샤르의 책 『술탄의 궁정』과 이 책의 영어판 서문을 쓴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믈라덴 돌라르Mladen Dolar의 이야기다. 이 책이 다루는 주제는 이슬람에 대한 판타지가 서유럽과 북미에서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금 한참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을 박멸하고 있으며, 이란과는 전쟁이 진행 중이고, 미국은 저 정확히 트럼프는 어떤 식으로 끼어들어 과실을 챙길지 고민 중이다. 이 모든 현상과 상황에 대한 해석과 논쟁의 밑바탕에 신화와 판타지 그리고 종교 텍스트가 깔려있다는 건, 끔찍한 일이다.

게다가 판타지는 다른 방식으로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다. 21세기는 판타지의 시대다. 어느 시대고 판타지가 없었겠느냐만,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 거대한 영상물로 등장한 것이 21세기다. 여러해 동안 전세계를 흔든 『왕좌의 게임』 시리즈 이후, 전 세계의 모든 형태의 대중문화에서 판타지가 흘러넘치고 있다. 이런 판타지들은 스낵 컬처라고 불리는 100원으로 결제하는 웹소설과 웹툰에서부터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모든 세대와 모든 성별과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판타지에 몰두하고 있다. 리얼리즘의 시대는 끝난 지 오래다. 판타지가 리얼리즘인 세상이다. 이런 다양한 차원과 장르를 넘나드는 판타지는 결국 자신과 타자 그리고 세계의 규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을 따름이다. 돌라르가 말한 판타지는 생산자와 옹호자에 대해 말해줄 뿐이라는 이야기를 깊이 새겨야 한다. 판타지는 그런 판타지를 소비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의 일부가 이번 대선에서 한 가지 결과로 나타났다. 기호4번 후보의 득표율이 가장 높았던 곳을 투표구 단위로, 즉 동 단위로 선택하면, 입학 성적이 높은 상위권 대학들, 이들이 선호하는 블라인드에 이름을 걸고 등장하는 대기업 직원들의 밀집지역들이 즐비했다. 대부분 남성이 더 많은. 단순히 2030 젊은 남성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 중에서도 나름 자신이 이 사회의 규칙을 따라 성취했다고 생각하는,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을 획득한 이들이 이제 자신들이 획득한 권리의 유지와 존속을 희구하는 것이다. 그 단초가 인천국제공항공사 공채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과정에서 발생한 갈등이었다. 공사의 공채 정규직이 연속적인 시험을 통해 획득한 하나의 신분으로 인식되고 인식하고 있는 상황의 반영이었던 셈. 그래서 나는 이걸 계급이라는 오래된 용어로 표현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판타지의 생산자와 옹호자 그리고 소비자에 대한 해석이 요구되는 시기다. 판타지 별로. 누가 이 책 번역 좀 해주면 좋겠는데.

이런 상황은 인간 해방의 기획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를 슬럼화된 지구 – “20세기 초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의 공간과 유사한 사회적 공간을 인민주의적 이슬람교와 오순절파 기독교(그리고 봄베이에서는 시바지Shivaji에 대한 컬트)가 점거해 버린” 21세기판 “파국적 근대성의 재마법화”를 가능케 하는 촉매 – 에 거주하는 잉여 인간들의 극빈화와 잔혹상이 대체하는 오늘날의 상황 속에서 더 악화되었다.(300) 슬럼이 된 지구에 대한 이야기는 마이크 데이비스Mike Davis의 인용이다. 근대성과 근대화를 탈주술화로 본 막스 베버를 뒤집어서 재주술화[재마법화re-enchantment]되고 있다는 해석은 그렇게 새롭지는 않지만, 그 핵심으로 인민주의 이슬람과 오순절파 기독교가 지목되는 것은 흥미롭다. 오순절파, 성령파는 이를 성령쇄신운동이라고 부르는 카톨릭에서도 세력이 작지 않다. 한국에서 보다는 남미에서 그리고 이민자들을 따라 북미에서도. 종교의 시대가 끝났다고, 세속화되었다고 한 선언들은 성급했고, 지나친 낙관주의에 함몰된 것이었음이 연일 입증되고 있다.

보통의 심리학적 이해로는 파악하기 힘든 축적에의 충동에 사로잡힌 자본가의 주체성을 보여 주기 위해서, 마르크스는 외양상 자율적인 관념에 의해 사회적 삶과 그것의 실재적 관계가 지배받는다는 관점으로 『자본』에서 광신 개념을 수용한다. “그가 인격화된 자본인 한, 그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힘은 사용가치의 취득과 향유가 아니라 교환가치의 취득과 증대이다. 그는 가치의 증식에 광신적으로 전념하며, 그 결과 인류가 생산을 위해 생산하도록 가혹하게 강제한다.” 마르크스에게 이런 광신은 스스로를 극복할 조건을 창출하는 것이므로 “존중할 만하다.” 그러나 이 광신은 근본적으로 체계적 광신, 곧 축적을 위한 관념적이면서도 강력한 필요의 결과 발생한 광신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적 광신은 개인의 정신을 넘어 “자본주의적 생산의 내재율” 속에 놓여 있다. 도덕적 선택보다는 강박적 의식의 문제라는 점에서 이것은 유사 종교적인 관심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334) 요즘에는 모두들 이를 욕망이라고 말하면서, 당연한 듯 추구해야 하는 것으로 말하지 않나. 모두가 투자해야 하는 그런 시대에서. 혹시나 투자하지 않는 사람, 투자에 눈뜨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봐, 정부는 개인들에게 투자에 대한 관심을 강요한다. 퇴직금을 관리하는 IRP 계좌가 그것이다. DC형이라고 하나. 미국401K의 한국판인 DC형은 모든 사람을 투자자로 이끈다. 어느 정도까지의 기본 연금은 국민연금처럼 국가가 관리하고, 추가부분만 개인이 하도록 하는 편이 나을텐데. 그게 사람들이 더 사회에 관심을 가지도록 만들지 않을까. 아무튼 전형적으로 마르크스 다운 자본가의 광신에 대한 논의는 그의 사위 폴 라파르그의 『자본의 종교』로, 그리고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 테제」에서 “종교로서의 자본주의”로, 그리고 이를 옹호하는 지젝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골자.(335)

신화, 믿음, 종교에 비판은 따라서 새로운, 하지만 더욱 위험한, 신화들을 위한 틈을 여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369) 이런 일이 너무나 많아서. 그렇다고 신화, 믿음, 종교를 내버려 둘 수도 없고.

슈미트Carl Schmitt는 물론 국가와 종교를 넘어선 보편을 주장하는 공산주의에 철저히 반대하는 입장이다. 자유주의와 더불어 공산주의를 병적으로 관념적인 정치 인식으로 취급하는 슈미트는, 비록 정치 종교 테제의 근간에 놓인 역사철학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공산주의를 하나의 메시아주의로 바라본다 … “나는 그런 진보적이고, 다가치적plurivalent이며, 진화하는 사회는 그 체제에 내재하는, 따라서 또한 진보적이고 다가치적인 종말론만을 허용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종말론은 그러므로 오직 ‘인간이 인간에 대해 인간인’homo-homini-homo 종말론일 수밖에 없다. 기껏해야 이런 종말론은 희망의 원리에 바탕을 둔 유토피아이며, 그것의 내용은 자신을 생산하고 나아가 자기 자신의 가능성을 위한 조건을 생산하는 ‘숨어 있는 인간’homo absconditus이다.” 교회와 국가의 초월성이라는 밧줄에서 풀려한 현대적 메시아주의는 숨어 있는 신에서 숨어 있는 인간으로 이동한다. … (이로부터 슈미트의 금언이 탄생한다. “인간이라는 곧 짐승이라는 것”Humanität, Bestialität).(386-387) 숨어있는 인간이라니 책장에 있는 『정치신학 2』를 펼쳐보아야 하는 건가. 역시 이 반동적인 문제적 인간은 글을 흥미롭게 쓴단 말이지.

책을 읽는 건 좀 까다로웠다. 문장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번역자의 고민도 이해되었다. 영어와 한국어의 어순이나 문장 구조의 차이가 낳는 극심한 혼란이랄까. 주어, 서술어, 목적어가 잇달아 나오고 그에 대한 수식 또는 한정 어구가 붙는 영어에서는 비교적 문장의 주요 부분이 파악하기 쉽지만, 우리말은 그렇지 않다. 주어 다음에 목적어가 나오는 데, 이들에 대한 한정어구가 그 앞으로 가야한다. 마지막에 서술어. 목적어가 둘 또는 셋이기만 하면 훨씬 더 복잡해진다. 주어, 목적어, 서술어에 밑줄을 그을 수도 없고. 이걸 단문으로 끊으면, 해석은 명확해지지만, 저자의 의도와는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저자는 수많은 한정을 통해 의미를 제한하고 있는 것인데. 그래서, 한 문장으로 하면서, 주요부분을 앞으로 모은 후, 접속어나 부가어를 넣어서 이를 설명하면, 구어체 문장처럼 지저분해진다. 경험적으로 그렇다. 그럼 딱 일본어처럼 변해 버린다. 이걸 벗어나기 참 어려운데. 역시나 본문 번역은 그런 한계가 역력했고. 헌데, 역자 해제는 매우 수려해서 깜짝 놀랐다. 아니, 글을 잘쓰는 사람이었군.

2025. 6. 20.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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