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러너, 『에른스트 칸토로비치』.

서른 무렵 코펜하겐에서의 칸토로비치.

Robert E. Lerner, Ernst Kantorowicz: A Lif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7.

이 책으로 이끈 것은 뜻밖에도 노먼 캔터Norman Cantor의 Inventing the Middle Ages였다. 나치의 쌍둥이The Nazi Twins라는 이름의 한 장이 에른스트 칸토로비치와 페르시 에른스트 슈람Percy Ernst Schramm을 다루고 있다. 독일 국방군Wehrmacht 사령부의 역사가로서 히틀러를 빈번하게 만나보고, 일기와 책까지 남긴 슈람의 나치 이력이야 부정하기 어렵겠지만, 칸토로비치에 대한 신랄한 평가는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확인하려는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책장에서 먼지만 쌓이고 있던 전기를 펼쳐 들게 했다. 마침 한 가운데 있는 피난이라는 장을 먼저 읽었는데, 내용이 너무 달랐다. 꼼꼼하게 서한과 면담 자료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러너의 전기 쪽이 훨씬 흥미로우면서 설득력이 있었고, 결국 전체를 다 읽게 되었다. 아, 근데 캔터는 너무 신뢰도가. 나중에 보니, 칸토로비치의 제자들이 뉴욕서평New York Review of Books를 통해 칸토로비치를 옹호한 기록도 있고.

우선, 이름부터. 에른스트 하르트비히 칸토로비치Ernst Hartwig Kantorowicz. 러너에 따르면, 그의 이름은 Kantor-Ovitch로 읽어야 한다.(1) 칸토ㄹ오비치 정도가 비교적 한국 발음에 가까울 것 같은데. 이글에서 한국어 표기는 칸토오비치 보다는 익숙한 칸토로비치로 하겠다. 1961년 프린스턴대 역사학과 중세사 전공 대학원생으로 칸토로비치와 처음 만났고, 생전에 그의 집을 방문해서 대화도 나눴던 그의 말이니, 어떻든 믿어보자. 그의 이름을 어떻게 읽어주어야 할지는 나는 오랫동안 결정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친구들과 학생들에게 그를 EKa로 불러달라고 했다고 한다.(6) 이 책에서도 그를 EKa로 부른다. 오래전 독일에서부터 그를 알던 이들은 그를 칸토Kanto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1895년 지금은 폴란드에 속한 포젠Posen(오늘날 폴란드의 포즈난) 출생이다. 그의 할아버지 하르트비히는 포젠에서 양조업을 하면서 부자가 된다. 이름은 가계도를 그릴 것도 아니니, 대체로 생략한다. 그의 집안은 단순히 허브와 과실즙이 첨가된 증류주인 슈납스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미국에서 캘리포니아 와인을 최초로 유럽에 수입한 회사이기도 하고, 남아프리카에서 과일 주스를 수입하기도 한다. 나름 큰 부를 형성하게 된다. 그런 집안에서 EKa는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포젠은 1793년까지는 폴란드 왕국에 속했고, 프로이센에 병합되었지만, 1848년까지는 독립, 자치, 혁명 등으로 정치적으로 복잡했다. 이 해에 프로이센의 한 주로 완전히 속하게 되었고, 1871년 비스마르크의 독일 제국이 출범한 후부터 본격적인 독일화가 진행되게 된다. 1900년에 포젠의 인구구성은 73,403이 카톨릭, 37,232가 프로테스탄트, 5,988이 모세 신앙, 즉 유대교이다. 이는 대략 폴란드인이 65,000, 독일인이 50,000 정도임을 의미한다.(14) 비스마르크가 오스트리아와 카톨릭을 얼마나 경계했는지 생각해 보자. 1870년 경에 비해 포젠의 독일인 비율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EKa가 다녔던 왕립 아우구스테-빅토리아 김나지움Königlices Auguste Victoia-Gymnasium은 제국 황후의 이름을 딴 비교적 신생학교였던 것으로 그는 이를 졸업하고, 1차 대전에 병사로 참전한다. 서부 전선의 베르됭에서 야전 포병 연대 소속으로 이병-일병-상병-병장을 거쳐서 하사관이 된다.(24) 요약하면, 그는 신흥 부르주아 출신의 유대인 젊은이다. 그는 혈통으로 귀족이 아니기 때문에 전쟁에 나섰지만, 병사로 출발한다. 그는 빠르게 진급해서, 우크라이나의 동부전선으로, 오스만 제국 즉 터키의 군사고문단의 통역으로 옮겨가게 된다. 이 사실 만으로도 그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준다.

다소 억지가 있지만 한국 상황에 비추어서 상상해보자. 그는 일제에 병합된 새로운 식민지 조선 경성이나 평양에 있는 중학교를 다닌 셈이다. 혹은 대만이라도. 조선인들이 다니던 고보(고등보통학교)가 아니라, 일본인들을 위한 중학교, 경기중학이나 평양중학 같은. 이런 학교들은 인구비례와 무관하게 조선인과 일본인 비율이 반반 정도였다. 헌데 그는 비록 산업에 뛰어들어 성공한 신흥부자의 자식이기는 해도, 그는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닌 유대인, 굳이 말하면 만주인(러시아인이나 몽골인이래도 괜찮다) 정도 되는 이방인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일본인(독일인)이라고 굳게 믿는 동화된 사람이다. 문득 훗날의 만주국의 오족협화가 떠오른다. 그가 정신적으로 얼마나 복잡하면서도 얼마나 집요했겠는가.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일반 사병으로라도 전쟁에 뛰어든다. 철십자 훈장을 받을 정도로 열심히 싸웠다.

전쟁은 패전으로 끝났다. 그는 전쟁 말기부터 대학에 다니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1919년 폴란드가 독립한다. 포젠은 폴란드가 된다. 그의 집안의 사업 무대를 베를린으로 옮긴다. 그는 이제 고향을 잃었다. 폴란드인이 아닌 유대인에게 포젠은 어느 정도의 고향일까. 그는 이 시기에 세 차례 우익 자경단 또는 무장운동에 뛰어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포젠이 폴란드의 일부로 독립할 당시, 그는 포젠에 있지 않았다. 베를린에서 스파르타쿠스단과의 싸움에는 지원했지만, 명령을 기다리기만 하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뮌헨의 학생-군사 소비에트와의 싸움에는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확실히 뛰어들었다. 그는 마침 피나Fine에 대한 사랑 때문에 베를린대학에서 뮌헨대학으로 옮겨갔었다. 그리고 다시 하이델베르크대학으로 옮긴다. 그때까지만 해도 가업에 참여하기 위해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었고, 이슬람 장인 협회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학문으로 자신의 진로를 정했으며, 거기서 슈테판 게오르게Stefan George의 제자 중 하나가 된다. 러너에 따르면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말하자면 뛰어난 미국 학부생의 세미나 소논문 정도(65)였다. 아랍어도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졸업성적은 나쁘지 않았지만.

그가 신념을 가진 독일 내셔널리스트(국민주의자)였던 것은 분명하다. 학교를 졸업한 후 병사로 전쟁에 지원한 점을 봐도 그렇다. 이 당시 독일군 장교들은 융커라는 귀족의 자녀들이 대부분이었다. 귀족이긴 한데 귀족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어린 나이에 사관학교에 가서 훗날 장교가 되는. EKa은 신흥 부르주아의 자식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여러 도움을 받는데. 콘스탄티노플 대사관에 있던 자형인 아르투르 잘츠Arthur Salz의 도움으로 동부전선의 우크라이나에서 오스만 제국 군사고문단의 통역이 되지만, 리만 폰 잔더스Liman von Sanders의 정부와의 정사로 독일로 되돌려보내진다. EKa의 기나긴 연애사의 서막 같은 일이랄까. 포젠 시절 사촌과의 연애는 아버지의 반대로 불발되었으니. 그의 학업은 참전 군인들을 위한 전시학기의 도움을 받고 시작되었다.

그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옮긴다. 거기서 슈테판 게오르게Stefan George와의 만남의 시작된다. 베를린, 뮌헨, 하이델베르크를 중심으로 독일을 방랑하면서 살던 독일의 상징주의 시인 게오르게는 자신을 중심으로 젊은 독일 귀족 출신의 젊은이들을 모은다. 부유한 집안 출신이면서, 대부분 혈통으로서 귀족이고, 젊은 남성들이면서, 뛰어난 외모를 지녔다. 하지만 이들을 불러모은 것은 실상 참호 정서였다고 할 수 있다. 지독한 참호전에의 대량 살상과 참을수 없는 패배. 후방에서 일어난 좌파의 혁명 그로 인해 수립된 사회민주당 정권. 어린 시절 경험한 독일의 영광에 대한 향수. 시대의 변화와 귀족의 몰락.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독일판 잃어버린 세대의 한 부분이다. 잃어버린 세대란 미국의 전간기 세대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써야 하지만. 전간기는 유럽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패전해서 몰락하는 과거의 엘리트들의 후손들만큼 큰 영향을 받은 이들은 없지 않을까.

경제학을 그만 두고 역사로 전공을 바꾼 EKa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게오르게였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20년대가 그에게 남긴 것이 바로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이하 KFII)였다. 그는 처음 생각대로 두번째 박사학위를 추구하지도 않았으며, 슈람이 했듯 교수자격논문Habilitationsschrift을 쓰지도 않았다. 그는 게오르게 추종자 집단George Kreis의 예를 따라 영웅 전기를 집필했다. EKa의 KFII는 1927년에 나왔지만, 프리드리히 군돌프Friedrich Gundolf의 Goethe(1916), 에른스트 베르트람Ernst Bertram의 Nietzsche(1918), 베르톨드 발렌타인Berthold Vallentein의 Napoleon(1922), 그리고 다시 군돌프의 Caesar(1924). 이들 모두는 게오르게 추종자들의 저서 출판을 전담했던 본디Bondi에서 나왔고, 그 시리즈의 이름은 ‘학문의 업적Werke der Wissenschaft’이었다.(91) 이들은 영웅 전기를 통해 독일인들을 고취시키는 것을 진정한 학문으로 보았다는 이야기다. 그 반대편에 있는 것은 종교인가. 아니면 역시 스스로를 과학(학문)이라고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인가. EKa의 KFII 초판 표지에는 만자문Swastika이 새겨져 있다. 훗날 나치당의 상징으로 쓰이며 갈고리십자가Hakenkreuz라고 불린 바로 그 문양이다. 러너의 설명을 흥미롭다. 이 문양을 먼저 사용한 것은 게으로게 크라이스의 본디Bondi 출판사이며, 그들은 이 만자문을 학문적(과학적, wissenschaftlich)를 상징하는 문양으로 사용했다. 그것은 슈테판 게오르게 시와 문학을 다루는 『예술지Blätter für die Kunst』를 보완하는 성격이었다. 러너가 굳이 문자적으로 leaves라고 번역하는. 고대 힌두교에서 상서로움을 상징하는 이 문양을 멜키오르 레히터Melchior Lechter가 본디 출판사를 위해 도안했다. 당연히 나치가 이를 채용하기 전에.(113) 당연히 시대가 먼저였다고 해프닝이라고 보는 것은 아니다.

EKa가 소위 말하는 중세 역사학자로서 제대로 된 과정을 거쳤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EKa가 처음 베를린 대학에 등록한 것은 1918년 3월로 이때는 군인을 위한 전시학기였다.(32) 1918년 여름학기가 끝나 서부전선으로 복귀했다. 부상을 당하고, 이 겨울에 포젠은 폴란드로 넘어갔다. EKa는 1918년 겨울학기에 베를린에 있다가, 1919년 2월 겨울학기가 끝나자 뮌헨대학으로 옮겼다.(38) 1919년 겨울학기가 시작되던 9월 하이델베르크대학으로 옮겼다. 그의 전공은 여전히 경제학이었다.(59) 1920년 여름학기에 아랍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으나 잘하진 못했다.(61) EKa가 이슬람 장인 협회라는 박사학위논문 주제를 결정한 것은 1919년 12월이었다.(62) 다른 대안이 없었기에 그의 박사논문 지도교수는 에버하르트 고테인Eberhard Gothein이었는데, 그는 경제학자이면서 문화종교사도 연구했기 때문이다. EKa는 그의 세미나에 참석하지도 않았고, 그는 이슬람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62-63) 논문 주제에 대한 토론에 부분적으로 도움을 준 것은 알프레드 베버였으며, 논문을 고테인에게 제출한 것은 1921년 1월 17일이고, 구두시험Rigorosum은 1921년 6월이다. 어디까지나 경제학 학위였다. 러너는 그의 논문을 낮게 평가했는데. 학위를 받기까지 등록학기가 최대로 보아도 8학기인데, 이 정도로 받은 학위를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박사로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1921년 겨울학기에 그는 전공을 바꾸어 로마사를 공부하기 위해서 철학부에 등록한다. 두번째 학위를 위한 것인 듯 하다.(65) 이때부터 그는 알프레드 폰 도마셰브스키Alfred von Domaszewski의 집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참석했다. 그에게서 비로소 방법론을 배웠다.(67) 그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로마사를 전공한 고대 역사학자였다. 얼마나 지속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KFII가 출간된 무렵에 사망) EKa는 이미 1920년 11월부터 슈테판 게오르게의 시종이었다.(74) 러너는 EKa가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전기를 쓰기로 결정한 것이 게오르게의 지시 내지는 명령이었을 것으로 본다.(91-92) 1922년 겨울학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이를 두번째 학위나 교수자격논문Habilitation으로도 고려했던 것으로 여겨지지만, 베를린, 튀빙겐 대학 등을 방문한 후에 독자적인 작업으로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이때까지도 성공적이었던 집안의 사업에도 관여하고 있었다.(93-94) 1922년 8월의 편지에서부터 KFII 프로젝트가 언급된다.(96) 1924년 5월에 KFII에 대해 게오르게와 상세히 논의한 기록이 있다. 1925년 7월에 원고 초안이 완성되었고,(98) 가을부터 몇 장씩 타자본을 만들어서 검토했으며, 1926년 7월에 4년의 작업 끝에 타자본이 완결되었고, 게오르게는 검토 후 즉각 출판을 결정했다.(99) 하지만 (너무나도 유대인임을 보여주는) 칸토로비치라는 이름 때문에 익명출판이 고려되었다가, 그의 이름으로 인쇄가 결정된 것은 1927년 1월, 2,900부를 인쇄하여 출간한 것은 1927년 3월이다.(100) 두번째 학위 내지 교수자격 같은 정규 과정을 고려했던 것도, 1년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KFII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슈테판 게오르게라고 보아야 한다. 도마셰브스키의 영향을 배제해서는 안되겠지만, 그는 고대사연구자였다. 이런 점들이 보여주는 것은, 그는 혼자서 공부해서 이룩한 천재라는 사실, 김나지움 시기부터 정규 교육과정에서 주목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KFII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거듭 인쇄되어 몇 차례만에 당시로서는 놀라운 숫자인 1만부 이상을 인쇄하게 된다. 보수적인 독일 역사학계로부터 불러온 비판은 1931년에 출간된 『보유편Ergänzungsband(Erg. Bd.)』에서 수백 쪽의 문헌 설명 및 10개의 긴 보론을 제시하여 상쇄되었다. 대중의 환호는 이미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 결과 우여곡절을 거쳐 그는 결국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교수가 된다. 그 과정은 간단치 않았다. 그는 KFII의 성공으로 1930년 가을에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무급 객원교수Honorarprofessor가 된다. 당시 베를린에 머물면서 Erg. Bd.를 마무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강의는 1931년 여름학기부터 시작되었고, 마침내 1932년 8월 프로이센 교육부로부터 프랑크푸르트 대학 정교수Oridinarius로 임명되었다. 그가 프랑크푸르트 대학 정교수로 강의한 것은 1932년 겨울학기 딱 한 번이다. 1933년 1월에 히틀러가 집권하고, 33년 봄학기에 그는 휴직한다. 이때부터 그는 강의를 하지 못한다. 33년 11월 다시 강의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힌덴부르크 대통령 사후에 요구된 히틀러에 대한 충성서약을 거부하며 34년 11월에 교수직을 사직하지만, 1차대전 참전 등에 근거해서 급여를 모두 받는 최연소 명예교수Emertius가 된다.(186) 1938년 12월에 독일을 떠날 때까지, 학문적으로 그는 자신의 집에서 세미나를 개최하고, 연구여행과 발표하지 못하는 저술로 대신한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었었는데, 1931년 7월의 은행 휴무와 제한 이후, 그해 9월 그의 어머니와 누이들 그리고 자신의 신탁재산을 관리인이 횡령한 것을 알게 된다. (148)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풍요롭게 살면서 여유롭고 넉넉하게 살았던 그는 화려한 생활방식을 평생 버리지 못한다. 이 시기부터 그와 가족들의 경제적인 곤란은 여러가지 방식으로 상당기간 지속되었다. 그는 인쇄와 판권계약 등으로 이 시기를 일단 넘겼으며, 휴직이든 명예교수든 유급인 것이 그에게는 상당히 중요했다.

KFII에 대해 러너는 여러 가지 면을 이야기한다. 전설, 신화, 민담, 예언, 의례의 찬가의 기록 등 지금까지 활용되지 않던 자료들을, 즉 비실증주의적 사료를 활용해서 역사적 전기를 구축한 점은 여러가지로 주목되는 지점이다. 그러나 문제점도 꽤나 발견된다. 프리드리히 2세의 초자연적 출생, 프리드리히 2세 사후에 태어난 성 프란치스코와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 등.(110) Eg. Bd.에서 설명된 것도 있지만, 끝내 무시되고 넘어간 것들도 있다. 프리드리히 2세와 13세기 이탈리아에 대한 연구서이자 학문적 전기로서의 KFII는 데이비드 아불라피아David Abulafia를 비롯한 여러 저자들의 작품에 의해 대체되었지만, 그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며, Eg. Bd.는 아직도 가치가 있다고 평가된다. 이 책은 무엇보다 당시 참호에서의 패전과 베르사이유 조약,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고통 속에 있었 독일인들에게 내셔널리즘적 환호와 신화적 희망을 주었고, 그것이 결국 그가 기대하지 않았던 나치즘의 등장에 기여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으며, 이는 그가 나중에 캘리포니아 충성 서약 사건에서도 인정했던 바다. 영어판 판권은 팔아버렸기에, 『왕의 두 신체(K2B)』가 출간된 1957년에 심지어 그에게 알리지도 않고 운가Ungar에서 다시 출간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독일어판의 재출간 요구는 계속 거절해 왔으나, 죽기 1년 전인 62년, 옛 애인의 아내가 맡아 어려움을 겪으면서 운영하면서 본디 출판사에서의 재출간을 허용한다. 나치 심볼은 빼고. 하지만 어느 독일군 장군의 환호에 넘치는 편지를 받은 후 여러 차례 되풀이해서 후회했다고 전해진다.(364) KFII에 대한 그의 입장은 아주 분명했는데, 버클리 대학에 교수로 있던 시절, 그의 추종자인 대학원생 하나가 독일에서 태어난 자신의 어머니를 한 강연에 데리고 왔는데, 독일에서 태어난 그녀는 그 책을 읽었고, 심지어 그 책을(아마도 나치 문양이 박힌) 가져와서 서명을 요청했지만 EKa는 이렇게 말하며 거절했다고 한다. “그 책을 쓴 사람은 여러 해 전에 죽었소.”(115)

여기서 EKa의 사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EKa은 앞서 언급한 피나와 21년에 헤어지고 볼디Woldi와 동성애 관계를 시작한다. 그의 애정사는 동성애 관계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고, 러너는 그는 여자에 대한 사랑에서 남자에 대한 사랑으로 다시 여자에 대한 사랑으로 끊임없이 바꾸어 가며 반복했다고 한다.(54) 처음에 그의 사진들에 드러난 모습들만 보고, 또 이력만 보고, 감추어진 동성애자였을 것으로 생각한 것은 나의 편견에 불과했다. 그의 동성애는 게오르게 크라이스에서 본격적으로 발현된 것 같다. 게오르게 자신은 동성애적 관계를 만들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서로서로 연인인 경우가 많았다. 그의 제자들, 혹은 사도들은 게오르게를 위해 용모가 뛰어난 젊은이나 심지어 소년을 대학이나 심지어 길거리에서 접근하기도 했다. 나중에 EKa의 연인이 된 볼디는 여덟살일 때, 일곱살인 그의 동생과 함께 에른스트 모르비츠Ernst Morwitz에게 베를린의 티어가르텐 근처에서 걸려들었다. 당시 법학 전공 학생이었던 그는 스승 게오르게를 기쁘게 하기 위해 소년들을 찾아다녔고, 볼디를 따라가 어머니인 백작부인을 만나고, 그들의 개인교사를 자처했으며, 어머니도 게오르게와의 관련을 알고 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85-86) 범죄행위가 있었는 지는 모르겠지만, 아슬아슬하다는 생각이 든다. 흥미로운 것은 것은 그의 평생에 비교적 긴 기간 연애 관계를 지속한 여자가 세 사람이었는데. 그중 둘은 하나는 백작부인Countess였고, 다른 하나는 남작부인Baroness였다는 점이다.(157) 다른 하나는 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친척인 사촌누이의 딸이었고, 셋 모두 유부녀였다. 그중 하나는 개방결혼open marriage을 추구하는 부부였고, 다른 하나는 자기 애인의 이부 누나였다. 자신의 애인이자 가장 친한 친구와 이들 중 한 사람이 삼각관계를 형성했던 적도 있다. 그중 하나의 남편은 다발성 경화증이었지만, 그녀는 관계를 끝까지 비밀로 하면서도 자신을 두 남자를 사랑한 드문 여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뉴욕에 도착해서는 밤문화가 재미없다고 투덜댔고,(178) 버클리에서는 자신의 동성애 파트너를 찾았으며,(300) 자신이 아끼던 제자가 자신이 총애하던 여학생과 사랑에 빠지거나 결혼하면 불같이 화를 내면서 의절하려고 들었다. 그는 “학자는 결혼하지 않는다”고 외쳤다는데,(305) 자신이 총애하던 여자를 빼앗겼기 때문인지, 아끼는 제자가 학문 이외의 관심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부분적으로는 둘 다가 아니었을까. 그가 아끼고 자신의 문헌 집행인literary executer를 맡긴 제자 중 하나는 그를 호색한이라고 부르기도 했다.(305) 그는 왜 이토록 방탕하고 사치스러우면서 호색한으로서의 삶을 지속했을까? 그는 충동을 참을 수 없었던 걸까 아니면 그렇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었던 걸까?

1933년 여름학기(독일의 여름학기는 보통 4-5월에 시작한다, 겨울학기는 9-10월에)를 휴직한 후, EKa는 강의에 복귀하려 했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그는 교수직에 복귀하면서 11월 14일 재취임 강연을 한다. 이 강연의 제목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비밀의(감추어진) 독일Das Geheime Deutschland”이다.(“숨은 독일”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문을 올려놓은 APVD STELLIONEM이라는 블로그가 있다. 번역은 좋지만 이해는 당연히 쉽지 않다.) 게오르게 크라이스의 용어인 “비밀 독일”은 신비롭고 감추어진 것이고 현실의 독일이 아닌 혼령/혼백들의 나라, 성인들과 천사들의 나라, 영웅들의 나라, 단테가 말한 Humanitas Cilvilitas(인간사회, 인간공동체)인데.(168-169) 이것은 아주 간략하게 말하면, 결국 국민-국가로서 독일이 되어야 할 것, 지향해야 할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진정한 독일은 혈통이 아니라 상상에 있는 것이다. 상상에 꿈에 근거한다는 것이야 말로 국민-국가nation-state의 이념이다. 그러니 이보다 강력한 반-나치 선언은 없는 셈이다. 강연 후에 그의 강의실 앞은 갈색 제복을 입은 이들로 가로막혔고,(171) 그는 다시 휴직을 하게 된다. 이 강연을 준비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스승 슈테판 게오르게와 서한을 주고 받았는데,(161) 이 강연 후 곧 12월 3일 스위스의 로카르노 근처 시골 마을에서 사망한다.(171) 게오르게의 죽음 그리고 독일에서의 자신의 꿈과 학자로서의 삶의 마침표. 러너는 왜 그토록 EKa가 매달렸는지에 대해서, 충성(Treue)라고 말한다.(165) 그는 게오르게 크라이스에 대한 충성을 평생 지켜나갔다.

다시 한번, 한국 역사에 빗대어 속되게 표현해 보자, 아까 식민의 한 구석에서 태어난 식민지 출신도 아닌 한 젊은이는 내선일체, 황국 일본에 대상 이상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스스로 전쟁에도 자원해서 참석하고, 본토인 내지 일본으로 가서 여러 대학을 다니면서 공부하면서, 일본혼을 불러 일으키려는 문호의 제자가 되고, 이 과정에서 그는 황국의 역사를 크게 찬양하는 한 천황의 전기를 쓴다. 편의상 친정을 시도하고, 겐무 신정을 실시한 고다이고 천황이라고 해보자. 프리드리히 2세와 시기도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이를 통해 메이지 유신을 찬양하고, 천황 친정과 황국의 번영을 주장한다. 그래서 제국대학의 교수가 된다. 편의상 오사카나 나고야 제국대학이라고 하자. 그러나 곧 쫓겨난다. ‘국체명징’ 사건이 기억나지 않는가. 그는 결국 일본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비밀 일본”이라는 강연을 한다. 내선일체와 오족협화를 그리고 진정한 감추어진 신비로운 참된 일본을, 진정한 참된 황국의 영광을 외치는 강연이다. 그는 이때 한 번 죽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자신은 일본을 떠나 도망치고, 그의 가족과 친척과 그의 동족들은 수용소로 몰려가 죽어가게 된다. 자신이 그토록 찬양하던 일본에 의해서. 그는 얼마나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웠을까. 이때 마침 평생 겪지 않았던 경제적 어려움도 그를 덮쳐온다. EKa의 평생의 연구주제 중 하나가 국민-국가란 무엇인가(250) 였다고 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의 삶과 경험을 통해서 통렬하게 구현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속했다고 믿었던 것으로부터 추방되었다. 뿌리뽑혔다. 그리고 그는 두 번 다시 어디에도 속할 수 없었다. K2B를 통해 탁월하게 구현되는 국민국가의 이념은, 자신에게 이렇게 드러난다. 1945년에 전후 독일에 있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험 등의 완전히 편의적인 목적에서 미국 국적을 취득한 일을, “my own unreality”라고 표현한다.(286) “내 자신의 비현실성 또는 비실재성.” 독일에서라면 그 어디에서라면 real했을까? 뿌리뽑힌 존재로서의 자신을 비현실이라고 지칭했지만, 그것은 사실 국민-국가에서 국민으로서 정체성을 가진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니었을까? 없지만 있다고 믿으면서 꾸려나가는 인간의 삶이란, 있다고 믿으면서 그 위에 헌정질서라는 것을 구축하지만, 인간들의 세계를 구축하지만, 그것은 상상으로 존재하는 한으로서만 현실이며, 그러한 이념이 구축된 역사 자체가 그러하다. K2B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는 34년 7월까지 일단 영국에서 보낸다. 그의 한때의 애인이자 평생의 친구였던 모리스 보우라가 그를 도왔다. 그에 대한 흥미로운 평이 있다. 영어는 유창하지만 실수가 많고, 대부분의 프랑스어 단어들이 알맞게 발음된다면 영어에서 사용될 수 있다고 믿으면서 대담하게 즉흥적으로 변용한다. 의사를 medicine(의학)이라 하거나, ‘physicians(의사, 내과의사)’라는 의미로 ‘physicists(물리학자)’라고 말한다.(174) 사실 이런 문제는 K2B에서도 심심치않게 발견된다. 잘 사용되는 또는 잘 사용되지 않는 단어든지, 중세 라틴어로부터 연결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을 때, 라틴어의 번역어로서 해당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들이 있다. 아주 많다. 그는 11-12세에 가정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그의 집안은 이때에도 미국과 무역을 하고 있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캔터와 러너 모두 그의 노래하는 톤은 영국에서는 환영받지 못하고, 미국에서는 환영받았다고 하는데. 그는 알려지지 않은 불필요한 단어 사용으로도 악명이 높다.(354) 어쩌면 그건 이 전기의 저자 러너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EKa에게 관련된 사람들은 다 그런 모양이다. K2B를 읽다보면, 그의 놀라운 라틴어 실력이 엄청나게 녹아들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의미를 찾아가야 하는. 어쨌든 그의 이러한 영어 능력은 버클리 대학에서 자리를 찾는데, 크게 기여한다. 미국으로의 피난이 마침내 이루어지는 1938년 12월까지 그는 계속해서 글을 쓰면서 출판을 노리는데, 이는 독일 바깥 주로 미국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출판은 계속해서 실패한다. 이때 독일어로 작성한 원고가 미국에서 영어로 출판된 것이 Laudes Regiae(왕의 찬가)이다. 그는 유급 휴직으로 개인 세미나와 연구여행을 하고, 피난과 이를 위한 출판을 목표로 하면서도, 어머니의 경제적인 문제 해결에도 뛰어들어야 했으며, 영국으로 피난한 유부녀인 애인의 부양까지 책임졌는데, 이는 미국의 피난생활에서도 이어졌다.(193) 정말 대단한 사랑꾼이다.

그는 1938년 이탈리아 등의 연구여행을 마치고 영국에서 돌아왔을 때, 여권을 압수당했다. 그리고 이를 마침내 되찾은 것은 그해 10월 29일이었다. 비자를 준비해서 바로 독일을 떠나려고 했지만, 11월 9일 유대인 상점을 파괴하고 저명한 유대인들을 폭행한 “수정의 밤”이 도래했다. 그는 며칠간 피신했다가, 준비를 마치고, 12월 3일 베를린을 떠나 네덜란드를 거쳐 12월 4일 옥스포드에 도착했다. 이 무렵 그는 돈이 거의 없었다. 1939년 1월 28일에 그는 뉴욕에 도착했다.(201, 212-213) 38년 내내 여권을 되돌려받는 일은 험난했고, 뜻하지 않게 방해한 것은 헤르만 괴링의 아래 있었던 아내가 유대인이었던 독일 공군 원수 에르하르트 밀히였다.(208) 나치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주데텐 합병, 체엄벌린 주도의 뮌헨협정 등으로 정세는 어지럽고, 유대인들의 목을 조여오던 마지막 순간이었다.

미국에서의 삶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1939년 가을 학기에 어렵사리 버클리에서 오라는 연락을 받았는데, 총장인 로버트 스프라울은 그와의 계약을 언제나 마지막까지 미루었고, 그는 자신의 급여를 위한 기금의 절반을 비상위원회 등으로부터 직접 조달해야 했으며, 이는 항상 마지막 순간에 이루어졌고, 급여도 점점 줄어들었다. 43-44 학년에는 마침내 자리가 없어졌지만, 버클리에서 있었던 ASTP(독일에서의 군정을 담당할 군인을 위한 교육) 강의를 통해 한 해를 모면했다. 44-45년 강의는 은퇴하는 석좌교수와 근대에 전념하려는 다른 교수의 강의를 넘겨받았고, 45년 여름부터 석좌로 지명되는 것이 명확했는데도, 스프라울은 마지막까지 1년짜리 임시직임을 고집했다. 그는 언제나 마지막 순간까지 결정을 미루었고, 여러 위원회에 의견을 돌렸으며, 최종적인 결정권을 자신이 가지려 고집했다.(252, 258, 263-266) 그는 자리를 얻기 위해 저술을 출판할 필요가 있었고, 독일어로 작성한 원고가 영어로 준비되었던 것은 1940년으로 41년 1월에 출판부는 허가했지만, 예산부족과 교수가 아니라는 이유로 이유로 출판이 46년까지 미루어졌다.(242) 버클리에서 그의 처지는 독일에서 유대인의 처지와 다르면서도 비슷했다. 그는 비용 문제 때문에 언제나 우선순위에서 가장 끝으로 밀려나는 언제든지 무시될 수 있는 임시직 외국인 노동자의 처지였다. 누군가가 일자리를 잃는다면, 그가 명단 맨 앞에 있음이 분명했다. 그에게 제시되었던 자리들은 차례차례 미국인으로 채워졌다. 그가 마침내 1945년 5월 비교적 이르게 정교수로 지명되는데, 그때 마침 시카고 대학에서 EKa의 임용하려고 버클리를 방문했기 때문이다.(267) 이제 EKa가 버클리에 남는 지 여부는 스프라울 본인의 문제가 되었고, 그는 곧 결정했다. 어떤 의미에서 스프라울은 EKa가 자신의 제자 벤슨에게 쓴 고상한 표현, inveterate procrastinator(고질적으로/상습적으로 일을 지연시키는 사람, 304)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EKa는 버클리에서 행복했다고 한다. 이를 스스로 “Hyperborean”(상춘국)으로 표현했는데(268), 이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북쪽의 바람이 불지 않고 언제나 햇살이 비치는 나라를 뜻한다.

순탄한 적이 없었던 그의 인생은 다시 한 번 격랑에 휘말린다. 매카시즘 열풍에 휘말린 캘리포니아에서 일어나 충성서약을 요구한 사건으로,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공산당원이 아닐 것을 요구하는 서약이었다. EKa는 이미 독일에서 나치당에 대한 충성서약을 거부한 적이 있었다. 우익 인사요 한때 무장 투쟁에도 가담했던 이 저명인사는 이제 학문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 나섰다. 그는 이것이 학문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라고 보았기에, 1년간 이 일에 몰두하면서, 자비로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는 선언과 서한들을 모아서 Fundemental Issue라는 이름으로 출간하기에 이른다. 그는 여기서 학계의 중추, 즉 양심을 부러뜨려서 대학을 구할 수 없으며, 그를 학자로 만드는 바로 그 양심 때문에 학자가 해고되었다고 말했다.(325) 그는 비서명자의 한 사람으로 1950년 7월 해고되었다.

이번에는 새로운 자리를 잡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는 덤바턴 오크스에서 하반기를 보낸 후 프린스턴에 있는 고등연구소에 임용된다. 여기서 그는 강의의 부담도 덜고,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왕의 두 신체(K2B)』를 저술한다. 53년에 프린스턴대 출판부에서 원고를 승인했지만, 원고는 계속 확대되었고, 출판부의 조바심 속에서도 EKa는 단테에 대한 원고를 마무리하는데 집중했다. 단테의 Monarchia(제정론)은 그가 오래 전부터 여러 차례 반복해서 세미나 하던 주제였다. 그는 마침내 완성된 원고의 부제를 중세정치신학으로 이름했는데, 이는 지배권의 신학Theology of Rulership을 의미한다.(347) K2B에 대해서는 따로 이야기하기로 하자.

그의 인생에도 황혼이 찾아온다. 1957년 가을에 발견된 그의 문제는 왼쪽 신장을 수술로 제거해야 했다. 1957년 봄에 출간하기로 한 K2B는 작업의 어려움으로 계속 미루어지고 있었고, 9월에 검사를 받으면서도 봄에 만들기 시작한 색인을 교정보고 있었다고 한다. 가을에 책이 출간되었다.(360-361) 선천적인 문제였다고 하는 그의 신장 문제가 몸에서 잠자고 있다 튀어나온 것은 아마도 K2B가 다 끝나가고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자기 스스로도 프린스턴으로 온 이후 12개의 글 중 4이 Festschrift(기념논문집)는 Pestschrift라고 투덜대기도 했다. 1962년 가을 간호사였던 애인이 그의 대동맥류를 발견한다. 수술해 보았지만, 너무 위험해서 다시 닫았고, 그는 1년이 못되게 남았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지막까지 그답게 살다가(카리브해의 세인트 존스로 떠난 아마도 마지막이 될 여행에서 그는 처음에는 G-string을 입다가 마지막에는 나체로 돌아다녔다고 한다) 63년 9월 대동맥류 파열로 급사했다.(376) 마이클 체르니아프스키와 랄프 기제가 편집한 그의 Selected Studies(J. J. Augustin, 1965)는 사망 몇 달 전부터 준비된 것이다. 마침 이 전기의 저자 로버트 러너Robert E. Lerner가 편집한 미출간 원고를 모은 Radiances: Unpublished Essays on Gods, Kingship and Images of the States가 지난 달 Cornell University Press에서 출간되기도 했다.

옮기지 않은 이야기가 너무 많다. 읽을수록 희대의 천재이자 희대의 방탕아이며, 뿌리뽑힌 존재로 평생을 떠돌면서 살아야 했던 그의 삶에 깊은 상처와 슬픔이 나를 잠식한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에게는 좋은 스승이었다. 엄격했지만, 모든 것을 함께하며 돌봐주는, 그에게 스승이었던 스테판 게오르게도 그렇지 못했을 텐데. 그는 정말 충성스런, 신의있는 또는 의리있는 인물이었는데, 스페인 내전에 참여했던 좌파였다는 이름으로 해고된 제자 한 사람을 위해 끝까지 노력했다.(380-381) 왕년의 우익인사는 이제 학문과 양심의 자유의 횃불을 들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유로웠으며, 장례식도 마다하고, 유골은 카리브해에 뿌려달라고 했으니. 뛰어난 요리사였던 그가 제공한 만찬을 즐기고, 밤늦도록 와인을 함께 마시면서 이야기하고 즐거워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2025. 8. 4.

* 괄호 안의 숫자는 책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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