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하단의 모자이크는 6세기 네게브 사막의 키수핌Kissufim 교회 바닥에서 발견된 것이다. 귀부인 실투스Silthous가 동전을 나누어주는 모습이다.
피터 브라운Peter Brown, 『고대 후기 로마제국의 가난과 리더십Poverty and Leadership in the Late Roman Empire』, 서원모・이은혜 역, 태학사Brandeis University Press, 2012(2002).
고대 후기 연구자로 이름 높은 피터 브라운은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로 정설이었던 쇠퇴와 몰락의 시기가 아니라 창조적 전환의 시기라고 주장하며, 고대 후기라는 연구 지평을 스스로 창출했다고도 할 만한 인물이다. 내가 그에게 이전부터 관심을 가진 것은 1989년에 출간된 The Body and Society 때문이었는데, 1세기 사도들로부터 4세기 아우구스티누스에 이르는 수많은 교부들의 문헌을 독해하여, 여기서 금욕과 신체의 규율에 관한 부분들을 뽑아내어 연구한 작품이다. 그리스도교의 성스러움이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몸을 경험하는 방식, 성과 결혼에 대한 견해들에 미친 영향을 연구했다. 미셸 푸코가 70년대 후반 이후 집중해서 연구했던, 자기 배려, 자기 돌봄, 자기 테크놀로지, 파레시아 등에 대한 연구들도 보면, 초기 그리스도교의 교부들 및 교회의 회개와 참회, 속죄의 절차 및 관습에 대해 상세히 논하고 있다. 겹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둘이 연구하는 분야가 뭔가 비슷하게 어른거린달까. 푸코는 브라운의 작품을 좋아해서 즐겨 읽었다고 말하고, 피터 브라운은 80년 버클리에서의 짧은 만남을 언급하고 있으니 둘이 서로 모르는 사이는 아니었다는 정도. 다만 브라운이 푸코의 강의에 참석한 적은 없었다. 둘 사이의 연결고리라고는 할 수는 없겠지만,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였던, 고대철학 연구자 피에르 아도가 있는데, 피터 브라운은 그의 연구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아도는 푸코와 자신이 거리가 있다고 밝혔지만. 여담이지만 이 부분을 다룬 푸코의 후기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은 『주체의 해석학』을 제외하고는 아쉽게 한국어로 접근할 수 없다. 다른 짧은 강의록들이 나와있을 뿐. 마침 지난달에 일본의 치쿠마쇼보筑摩書房에서 『主体性と真理』라는 1980-81년 강의록이 출간되어, 2002년 이래 24년 만에 13권 모두가 완간되었다. 이런 걸 보면, 좀 부럽달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또 이런 식으로 겹쳐진다.
피터 브라운의 저서와 강의록들은 한국어로 5종, 6권이 출간되어 있다.(공저를 포함하면 7권) 이 중 몇 권은 절판이지만. 이번에 그의 책 몇 권을 집중적으로 읽고 있는데, 흥미롭달까, 조금은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 이 중 세 권의 번역자는 자신이 신자도 아니고 신학자도 아니라고 자처하는 이들이고, 다른 하나는 신학 배경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 연구자이며 성공회 기반에서 출간되었고, 나머지 둘은 소위 정통인 장로교 교단에 소속된 교회사 학자들에 의해 번역되었다. 신앙 배경이 없다고 해서 번역이나 독해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중립적이라 읽기 편할 때도 있다. 그럼에도 이들의 책을 읽고 있으면, 4색도 인쇄를 할 때, CYMK판이 살짝살짝 초점이 맞지 않은 느낌이 든다. 이들은 각자 인명, 지명, 작품명을 각기 달리 옮긴다. 개념어도 간혹 다르게 옮긴다. 미세하게 아주 조금씩 다르다. 이 시대를 조금 읽다보면 알게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일부에서는 아직도 어거스틴, 터툴리안, 오리겐 같은 영어 표기를 음역한 것을 고집하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대체로 라틴어를 음역해서 쓰거나, 그리스 교부들의 경우는 그리스어를 음역해서 이름의 어미를 -오스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아타나시우스나 아타나시오스냐 하는 식, 오자가 아니다. 요즘은 카톨릭 쪽에서 성인이나 교부, 교황, 신학자들의 이름을 -우스 대신 -오라는 어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일례로 어거스틴,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노가 모두 사용되고 있다. -오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이탈리아화의 결과일 것이다. 16세기 이래 교황청은 이탈리아의 교황청이니까 그렇다고 할지라도. 언제부터 언제까지 어디를 끊어야 할지 합의가 없다. 아마도 신자들의 세례명 때문일 것으로 생각되지만, 인터넷만 점령하면 된다는 듯, 위키피디아에는 -오, -오, -오가 난무한다. 가끔은 용례도 충분하지 않는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법을 찾아봐야 할 정도다. 요즘은 『교부학 인명지〮명 용례집』과 『교부 문헌 용례집』이 적잖이 도움이 되지만, 카톨릭 기반이라고 기피하는 사람도 여전히 있다. 게다가 피터 브라운의 책이 번역 출간된 시기도 30년에 걸쳐져 있기도 하고. 그래도 인명은 많이 쓰이는 경우라면 익숙한 편이지만, 지명의 경우 한결 더 까다롭다. 지명은 익숙하지 않은 터라, 한 글자, 모음 하나만 달라고 파악하기 쉽지 않으며, 지도가 첨부되어 있지 않으면 더욱 그렇다. 고대 후기 그리스 로마 지역을 연구하거나 번역하는 한국인이 그리스도교 안에, 카톨릭과 개신교에 몇이나 될까, 일반 역사학계에도 그 수가 결코 많지 않을 것이며, 이조차 각자의 영역이 쇠퇴하고 있는 판국이라 비판하기도 그렇다. 인문학계나 역사학계도 쇠락하고 있고, 그리스도교의 쇠퇴도 분명한데. 아직도 각자의 영역에 포섭되어 각기 다른 표기로 된 인쇄된 문헌들이, 초점이 맞지 않는 안경처럼, 우리를 어지럽게 한다. 하느님과 하나님을 다르게 표기하는 것은 애교로 넘어갈 정도. 알고 있으니 별문제 아니라고 하겠지만, 이런 표기들은 묘하게 신경을 거슬리면서, 주제에 대한 신경을 분산시킨다. 주의집중에도 총량이 있다. 자연스럽게 넘기면서, 주제에만 집중할 수 있으면 정말 좋겠는데. 이 책에도 특히 지명이 거슬리는 데, 구체적인 것은 언급하지 않겠다. 이건 이 분야 전체의 널리 퍼진 문제이기 때문에. 중세사도 그 문제가 별반 다르지 않다. 카롤링거, 메로빙거를 카롤루스, 메로베우스라 하자고 하기는 했다지만. 영어냐 프랑스어냐 라틴어냐는 따지는 중세에 비하면, 어미나 모음이 문제인 고대는 양반인 건가.
인명, 지명의 음역은 길게 언급했지만, 두드러지는 표현형식의 문제일 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어떤 교단이나 교파든 거기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학자들과 그것이 배경인 사람들 그리고 그와 무관한 사람들이 쓰는 글에서는 단어나 어법 사용에서 미묘한 차이를 뉘앙스에서 슬쩍슬쩍 다른 것을 느끼게 된다. 이건 입증이 어려운 부분이라 사례를 들어서 지적하지는 않겠지만, 서로 교차되는 영역에 대해 서술하는 저자의 번역서를 읽어보면 문득 느껴질 때가 있다. 다소 거리를 둔 냉정한 시선과 서술 대상에 대한 애정과 공경심을 감출 수 없어 때로 오글거리는 표현과 분명 저자는 같은 사람인데. 번역어로서 한국어의 다양성은 때로 무궁무진하다. 나는 그저 깔끔하고 간결한 표현을 좋아할 뿐일지도.
『가난과 리더십』은 2000년에 한 메나헴 스턴 강연록이다. 피터 브라운의 저서에는 유독 강연록이 많다. 서양 학계의 한 전통 중 하나인데, 보통은 초청을 받아 몇 개월 머물면서 강연을 준비하고, 연속해서 3, 4회의 강연을 실시한 후, 이를 모으고 보완해서 나중에 출판한다. 강연의 특징일까, 그의 책을 몇 권 읽다보면, 내용이 꽤나 겹치면서, 발전한달까, 전개되는 모습이 보인다. 『가난과 리더십』이 2002년에 출간되었기 때문에, 한국어로 된 자료 중에서는 가장 최근의 것이다. 그래서 흥미로운 구석도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는 것은 시카고대학의 하스켈 강연록인 『성인숭배The Cult of the Saints』였지만.
가난한 자를 돌보는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피터 브라운은 폴 벤느와 에블린 파틀라장Évelyne Patlagean을 언급한다. 파틀라장은 비잔티움 연구자인데, 그리스도교의 가난한 자에 대한 돌봄을 거대한 로마 사회의 구조적 변화 속에서 파악하는 이들에 주목하면서도 이들과 달리, 중세 그리스도교 사회로의 변화를 도운 그리스도교 교회의 지도자, 주교가 여러 형태의 권력 행사에 적극 참여한 단계를 추적한다. 주교가 가난한 자를 만들었고, 이를 통해 후기 로마 사회 지도자가 되었다. 주교는 자신들이 가난한 자의 필요에 대응하는 것이며, 가난한 자에 대한 사랑이라는 염료로 고대 후기 사회의 주요한 영역을 물들였다. 고대 후기는 낡은 질서의 갑작스런 붕괴로 특징지어지는 사기가 아니며, 고대 후기에서 중요했던 것은 궁핍한 이주자의 전반적인 증가가 아니라, 그리스도교 교회가 고대의 상황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이었다. 교회는 도시에 밀려들어왔던, 다수는 결코 가난하지 않았던, 주변집단을 보호해야 했으며, 이들을 어느 정도 공동체 안에 편입시킬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가난한 자’라고 불렀다.(26-31) 후기 로마 사회는 부자와 가난한 자, 탄탄한 시민과 궁핍한 자로 분명하게 정의되는 계층 사이의 뚜렷한 간극이 나타나는 그런 사회가 아니었는데, 후기 로마 사회는 구조적인 면에서 상당히 보다 더 분화된 사회였다. 후기 로마 사회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빈곤하게 될 수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였다. 그러나 고대 후기 시대에서 흥미로운 일은 우리가 항상 존재했던 그러한 동일한 가난을 보고 있지만, 이를 보다 예리한 그리스도인의 눈으로 보는 것이며, 가난한 자의 존재는 그리스-로마 세계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주교에게 고전 시대 이후의 새로운 사회에서 그 역할을 강조할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41-43)
피터 브라운에게 영향을 준 학자들 중에 프랑스 사람들이 많다. 우선 여기서는 폴 벤느와 에블린 파틀라장. 그 중에서도 비잔티움 연구자인 에블린 파틀라장이 중요하다. 피터 브라운은 파틀라장의 ‘가난한 자’에 대한 연구를 인용한다. 한국어로 번역 출간된 『사생활의 역사』 1권에서 고대 후기는 피터 브라운이 비잔티움은 에블린 파틀라장이 맡았다. 한 마디로 ‘가난한 자’란 우리가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그런 형태의 가난이나 빈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이야기하는 것은 고대 후기가 붕괴와 몰락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서는 안되며,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변화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함을 내세운다. 고대 후기에 두드러지게 된 ‘가난한 자’의 존재는 주교의 권한과 지위를 강화시켜 준 존재였으며, 이들은 공동체 외부에서 새롭게 진입해 온 이들이거나, 여러가지 이유로 지위가 약해져 가난해질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콘스탄티누스 시대까지 ‘가난한’ 자들은 지원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곤경에 처한 동료 신자가 아니라, 새롭고, 명목상 ‘가난한 자’ 였다. 종교에 대한 전적인 헌신 때문에 생계를 위한 시간이 거의 또는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다. 바울은 자신과 같은 사도들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추정했다.(53-54) 지원을 받을 집단에는 가난해진 동료 신자, 즉 고아, 과부, 병자, 감옥에 갇힌 자 난민과 극빈자가 있었다. 이 시기 그리스도교의 구체는 철저하게 내부적 활동이었으며, 주교와 성직자는 가난한 자라는 이름으로 신자의 헌금의 일부로 지원을 받고, 남는 것이 다시 과부, 고아, 궁핍한 자에게 재분배되었는데, 일부에서는 사적인 구제가 금지되기도 했다.(56-57) 전통적 ‘시민적’ 형태의 공동체가 5세기에도 유지되었음을 보여주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곡물 분배 체계는 무상이나 저가로 도시 시민에게 분배하기 위한 거대한 식량 유통을 보여준다. 이는 가난한 자가 아닌 시민을 위한 것이다. 사적 시민의 공적 기부가 줄어들었으며, 점점 더 많은 상류층 인사가 교회에 소속되었을 때, 가난한 자와 성직자에게 주는 기부가 시민적 희사 행위와 연관된 극적 효과에 둘러싸이기를 기대했다.(62-64) 콘스탄티누스의 몇몇 교회에 대한 기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에 선사한 특권으로, 이를 통해 그리스도교의 성직자는 하나의 집단으로 광범위하나 지나친 요구를 하는 로마 국가의 관직에 속하게 되었다. 교회 소유물과 주교 이하의 성직자들은 면세 혜택을 받았다. 면세 혜택을 받는 귀족층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동료 그리스도인에게 베풀어진 자선은 공공봉사로, 즉 공적 특권의 대가로 행해지는 가난한 자에 대한 돌봄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스는 콘스탄티누스가 교회에 하사한 곡물을 시장에 내다판 혐의로 고소를 받았다.(68-72) 그리스도교 기관으로 나그네 쉼터, 병원, 구빈원이 등장했는데, 공적 후원을 보여주는 방식이었다.(77) 기근 때 카이사레아를 구제했던 바실레이오스의 행동은 자신의 교회에 베풀어진 특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신속하며 선전을 극대화한 것이었으며, 사후에 신화의 토대를 낳았다.(85-88) 감독이 될 예정이며, 아테네에서 배운 고전 수사학 기술을 통해 곤경의 때에 자신을 그리스도교 도시에 새로운 선행을 베푼 자로 제시할 수 있는 한 유능한 젊은 사제 바실레이오스는, 까다롭기로 유명하며 발칸 출신으로 교육 수준이 낮고 라틴어로 말하면서 신학적 입장이 자신과 다른 황제와 자신이 가깝게 협력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92) 바실레이오스는 아르메니아의 총대주교 네르세스 모두에게 ‘가난한 자의 돌봄’은 성직자의 자발적 주도 이상의 것으로, 눈에 띄는 새 건물과 연결된 빈민구제 체제는 국가가 교회에 제공했던 특권에 대한 대응이었다. 특권을 누리는 자들은 구체적 행동에 의해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현존을 느끼게 해야 한다는 고대적 관심은 그리스도교의 자선을 로마 사회 안에서 두드러지게 했다.(95)
가난한 자에 대한 정의가 반복된다. 우선, 가난한 자는 둘로 나뉘어지는데, 하나는 주교와 성직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고아와 과부였다. 주교와 성직자는 생계를 도외시하고 종교에 헌신하는 존재였기에 가난한 자였다. 초창기 교회의 구제활동은 철저하게 교회 내부의 신자 공동체에 제한되었는데, 이는 시민 공동체에 속한 사람만을 부조했던 고대 로마의 전통을 따른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확산되면서, 귀족이나 유력자들이 교회에 들어오고, 이들이 후견인으로서 행해왔던 기부나 증여 등이 교회가 가난한 자에게 행하던 기부로 전이되었다. 이 둘은 일종의 이념적 통합과정을 겪은 것으로 피터 브라운은 해석한다. 고위 관료나 귀족이 하루 아침에 주교가 되는 일이 이 시대에는 종종 있었다. 중세에 본격화될 성직자의 귀족화는 이때 조짐을 보였다. 콘스탄티누스에게서 교회는 여러가지 특권, 그 중에서도 면세 혜택을 받았고, 그 대가로서 자선이라는 공공봉사를 행해야 했다. 그리고 후대로 이어지는 그리스도교 자선기관의 모태가 형성되었다. 이 시기 자선에 우리는 당시 주요 그리스도교 인사들의 설교나 서한 등의 문서를 통해서 파악하지만, 피터 브라운에 따르면, 이러한 서한과 문서는 사실 자체를 기술한 것이라기 보다,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선전하기 위한 활동이라는 것이다. 교회는 면세 등의 특권을 받고, 그 대가로 빈민구제와 공공봉사를 행했다는 것. 심지어 아타나시오스라는 위대한 교부는 자선용 곡물을 내다팔았다가 고발되기까지 했다.
가시적으로 궁핍한 자에 대한 연민을 강조하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증거의 왜곡에 이르렀는데, 그리스도교의 수사학은 최하류층에 대한 독특하고 극적인 묘사를 만들어내고, 이를 하층민 전체에게 부과함으로써 가난한 자를 궁핍하게 만드는 개념적 효과가 있었다. 후기 로마제국의 사회사가는 그리스도교 자료에 근거해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양극화와 도시 중간층과 하층민 사이에 빈곤이 증가되었다고 가정했다.(99) 후기 로마제국에 대한 고고학 조사는 대다수 대중이 무차별적 곤궁에 처한 세계가 아니라 번영하는 마을, 편안하고 수수한 농가, 활기를 잃지 않은 도시가 존재했던 풍경을 보여주며, 그리스도교 교회는 로마 사회 중간에 자리잡았다.(102-103) 하지만 후기 로마 사회의 중간 계층의 사람들은 안정되지 못한 위치 있었고, 자존감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고대 사회를 특징짓는 광범위한 피상적 가난과 불편하지만 가깝게 살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사회적 빈민으로 생각하는 세계였다. 상처받기 쉬운 중간에는 보호자가 필요했다.(105-106)
그리스도교의 수사학, 그러니까 남겨진 설교, 서신, 탄원서 등의 문서에서 구구절절하게 묘사되었던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의 처지에 대한 넘치는 기술로부터 역사학자들과 우리가 오도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추측했던 빈곤화와 양극화는 사실이 아니었다고 피터 브라운은 보았다. 그에 따르면 고대 후기는 중간 계층이 두터웠던 사회였고, 그리스도교도 여기에 자리잡았다. 물론 이 중간 계층 오늘날처럼 불안하고 언제나 빈곤층으로 떨어질 수 있었기에 교회와 주교라는 존재는 이 지점의 버팀목이었다.
그리스도교적 자선은 시골의 수도원에서, 은둔자의 주변에서, 경건한 그리스도교인 지주의 저택 별채에서 있었다.(108) 교회의 부는 조금씩 점진적으로 쌓여 6세기가 되어서야 주목할 만하게 되었는데(114) 작은 기부에 의존하는 종교적 목적을 위한 느리지만 꾸준한 부의 축적으로 특징지어졌다.(118) 과부와 고아의 범주는 이미 존재했던 궁핍의 상태로부터의 구제가 아니라, 빈곤화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느꼈던 자존감을 지닌 사람의 집단을 대표했다. 그들은 신자들 가운데 평판이 좋은 남성 교인의 부인과 자녀였다. 특권을 지닌 ‘과부의 직분’에 등록된 과부가 나타났다. 곤궁에 빠진 양가의 규수 범주에 속했다.(122-123) 이탈리아에서도 주교 주위에 ‘교회의 가난한 자’로 특권을 지니며, 정착되고, 명백하게 등록된 한 부류의 사람을 모으는 것이 고대 로마 평민의 마지막 유산을 보전하며, 그리스도교의 자선을 통해 위험스런 세계에서 로마 시민을 유시하는 것이었다. 주교의 가난한 자의 돌봄에는 노예가 없으며, 오직 자유민에 의해서 자유민을 위해서 이루어졌다.(126-127) 야만인의 약탈에서 사로잡혀간 포로(노예가 될)의 몸값을 배상하는 일은 주교가 할 수 있는 가장 영웅적 행위의 하나로 생각되었다. 노예제 문제에서 고대의 경계선은 확고하게 유지되었다.(130-131) 새로 발견된 아우구스티누스의 서신과 설교에서 발견되는 사례들은 필연적으로 궁핍한 자의 지위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이러저러한 때에 ‘교회의 가난한 자’의 일원으로 간주되었던 사람들에게 인간적 면모를 제공한다.(135) 4세기에 주교에게 빈곤하게 될 가능성이 있는 교인의 보호자로 행동할 수 있는 주교법정episcopalis audientia라는 제도가 만들어졌다. 이는 콘스탄티누스 초창기에 주교가 신자가 주교 앞에 가져온 민사 소송의 최고 중재자로 행동할 수 있는 권리로 승인되었다.(139) 고대 근동적 형태의 사회에서 ‘가난한 자’는 경제적 범주가 아니라 법률적 범주로서, 가난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는 것은 왕권의 속성이었다. 왕권의 정의에 대한 표상에서 약자 계층인 과부와 고아의 호소가 중요했다. 가난한 사람은 지위가 어떻든 겸손하지만 끈질기게 권력자의 응답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시편찬송과 주교법정에 관한 지시를 통해, 히브리어 성경의 무의식적 수용이 빈곤한 자에게 경제적인 묘사와 다른 뜻, 즉 권력자에게 요구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142-145) 전통적으로 시민 집단이 지배적 권위와 나머지로 나눠진 시민적 구조에서 분리되어, 후기 로마제국의 도시는 권력자가 가난한 자를 다스리는 도시로 자리잡았으며, 그 대가로 가난한 자는 구약성경적 사회형태에 기초하여 자신에게 베풀어져야 하는 보호를 기대했다.(148)
그리스도교적 자선이라고 표현되는 부조와 지원이 등장하게 된다. 피터 브라운에 따르면 그 배경에는 고대 로마의 후견 관계가 존재했다. 그런 특성이 그리스도교에 의한 자선의 어떤 부분을 특징짓는다. 고대 로마는 시민을 보호했듯이,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고아와 과부란 빈곤해질 위험이 있는 사람을 가리켰다. 과부 명단에 오늘 사람이었다. 평판 좋은 남성 교인의 아내와 자식들이었다. 무엇보다 노예는 제외였다. 노예의 관리 책임은 주인에게 있었다. 그렇지만, 노예가 될 위험에 처한 약탈에서 사로잡힌 포로들을 위한 몸값은 영웅적 행위로 평가되었다. 문득 젊은 시절 사회적 구제나 자선은 교회의 일이 아니며, 교회에서는 가난한 교인만 돌보면 된다고 역설하던 어느 목사가 생각났다. 노예제에 대한 언급이 없는 신약성서의 바울 서신도 떠오르지만, 그런 것을 빌미삼아 19세기 말까지 혹은 그 이후에도 종종 노예제를 옹호하는 교회도 떠올랐다. 이건 어떤 의미에서 상당히 본질적인 것일까. 중세 후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북아프리카의 무슬림 해적에게 사로잡혀간 포로 석방에 매달렸고, 엄청난 자금을 쏟아부었는데, 역시나 어떤 전통이 있었다. 여기선 간단히 언급했지만, 20세기말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서한 29개와 설교 25개 발견되었다. 이들은 모두 피터 브라운의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1967) 출간 이후의 일로서, 결국 2000년에 증보판을 내게 되었다. 한국어로는 신기하게 둘 다 출간되어 있다. 증보판이 절판된 건 더 신기한 점이지만. 새로 발견된 서한과 설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인간적 면모와 아프리카의 주교로서 아우구스티누스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전한다. 자신도 가난한 자로서 종교에 전념하는 자로 교회의 부양을 받았으며, 교회의 고아와 과부를 돌보던 주교는 주교법정이라는 민사소송의 중재자로서의 지위를 얻게 된다. 마지막 부분이 눈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결론적으로 ‘가난한 자’란 경제적 범주가 아닌 법률적 범주였다. 지금도 이 두 범주는 뒤섞여 있다. 더욱이 이것은 왕권과 관련된 문제였다. 가난한 자는 권력자에게 요구하는 자이며, 권력자는 그러한 호소에 응답하는 자였다. 피터 브라운은 원했던 원치 않았던, 고대 말기의 정치신학의 한 단락을 구성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까지가 두 번째 강연이다. 순서대로 강연의 제목은 ‘빈자[가난한 자]를 사랑하는 자’, ‘빈자[가난한 자]를 다스리는 자[지사]’, ‘비하[condescensio, sunkatabasis,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는 것을 표현함]’이다. 여기서 주목할 지점은 피터 브라운이 지적하는 것이, 주교/교회와 빈자 사이의 관계가 종교적 자선 영역을 벗어났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종교 공동체가 자신들 안에 속하는 사람들 만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돌보았다. 고대 후기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사회 전체가 변화했다. 우선, 로마 식의 시민에게 식량을 지원하는 체계는 붕괴했다. 이주민이 늘었고, 사회구성에 변화가 생겼으므로, 다른 방식으로 더 많은 사람을 포괄해야 했는데. 그것이 빈자[가난한 자]이라는 범주였다. 이런 관계를 구성하는 요소가 모두 변했다. 말하자면, 시민이냐 아니냐로 나뉘었던 세계는 부자와 빈자[가난한 자]라고 나뉘는 세계가 되었다. 과거의 범주는 완전히 사라졌다기 보다는 때로 겹쳐졌다. 이와 함께 오랜 시간에 걸쳐서 교회가 점점 커져서, 점점 교회는 도시와 구별하기 어려워졌다. 도시 구성원이 모두 교회에 속하게 되었다. 교회가 변화했는데, 수많은 로마의 귀족과 유력자들이 교회로 들어왔고, 이들은 이전에 자신들이 영향력을 발휘하던 후견이나 기부라는 방식을 교회에서도 실시했다. 교회에 들어온 귀족들은 순식간에 주교가 되기도 했다. (암브로시우스는 세례 받은 후, 일주일 후에 주교가 되었다.) 제국은 교회에 자신들의 일을 맡기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주교는 빈자를 사랑하는 자를 넘어서서, 빈자를 다스리는 자[지사]가 되기에 이른다. 주교는 지원해야 할 빈자의 명단을 관리하고 유지했다. 마치 오늘날 지방정부가 생활보호대상자 명단을 관리하듯이. 이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기에, 교회와 주교 및 성직자들은 면세라는 특권을 받았다. 제국으로부터 빈자에게 배포할 목적으로 곡물을 지원받기도 했다. 교회/주교는 빈자를 위해 황제에게 탄원까지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주교는 주교법정이라는 민사재판을 종결할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받게 되었다. 주교를 직접 속주의 총독이나 지방관으로 임명한 것은 아니었지만, 주교가 실상 관할한 업무는 준-공식적인 지방관리의 역할이었다. 게다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여러 특권과 제도를 황제에 의해 부여받았다. 그런 의미에서 피터 브라운은 주교를 ‘가난한 자를 다스리는 자[빈자의 지사]’이라고 표기한 것이다. 부자와 빈자로 나누어진 세상에서 사실상 때로는 법률상 공적 기능을 부여받고, 이를 행사했다는 의미이다.
고대 후기 시대는 가난한 자가 거의 보이지 않았던 사회 형태에서 가난한 자가 생생한 창의적 역할을 하게 되는 사회 형태로의 전환이 일어났다. 그리스도교 교회가 모든 계층의 이방인을 위해 도시 안에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한 장소로부터 다른 장소로 사람들의 영속적 ‘브라운 운동’이 모든 세기에 걸쳐 고대 지중해 지역을 특징지었다. 도시에서는 항상 이방인들이 있었으며, 그리스도교 교회는 모든 도시에서 이전에는 아무데도 갈 곳이 없었던 수많은 사람들을 소속시킬 수 있었다. 궁핍하고 몰락한 이주자는 수도원, 수녀원, 성직자로 받아들여졌지만, 이것이 고대 후기 도시의 인구과잉이나 시골에서 궁핍한 자의 유입이라는 인구학적 위기를 겪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구학적 위기는 천년 뒤인 근대 초기에 일어났고, 16/17세기에 가난한 자의 돌봄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인의 저술이 새로운 인문주의적 사회 질서 이념을 지지하기 위해 인쇄/번역되었다. 이는 과거에서 온 유령이었다.(152-154) 고대 후기 시대에 변화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회적 유대 관계에 대한 정의였다. 전통적 핵심인 ‘시민층’을 넘어서, 잘 정의되지 않지만 상징으로 가득한 ‘가난한 자’의 집단을 포함하는 새로운 사회적 연결망이 만들어졌다.(155-156) 부는 상류사회의 계급 밑으로 흘러내리도록 장려되었다.(156)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집단에서 개별적 신자가 불규칙하게 가난한 자에게 주는 꾸준한 이슬비 같은 소액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주요 도시의 주교는 수천명이 기록된 ‘빈민 명부’를 갖고 있었다. 가난한 자의 돌봄과 연관된 주교의 후견과 보호라는 그물망의 하향 확장이 중요했다. 고대 후기 도시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일’은 새로운 형태로 억압과 빈곤에 대해 도시 주민을 보호했던 고대의 보호수단의 유지와 병합되었다.(158-160)
고대 후기는 단순한 몰락과 쇠퇴의 시기가 아니라, 변화와 이동의 시기였다. ‘가난한 자’라는 범주는 이와 관련된 것이다. 피터 브라운은 다소 암시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고대 후기에 대한 오해는 근대 초기 16/17세기에 형성된 것이다. 이 시기의 인구폭발로 인한 위기와 가난한 자에 대한 공적 부조 체계의 형성,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교도의 문서가 발굴되고 인쇄되면서 생겨난 오해가 서로 겹쳐졌다. 고대 문서 속의 가난은 16/17세기의 가난과 인구과잉과 겹쳐졌고, 자신들의 시대 상황에 따라서 고대 후기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대 후기에 생겨난 변화는 새로운 사회관계망의 형성으로 시민에서 가난한 자로의 확장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둘은 결합되게 된다.
요약하면, ‘가난한 자[빈자]의 지사[governor, 知事]’로 그리스도교 주교가 자리 잡으며 새로운 형태의 지도력이 생겨났고, 가난한 자의 돌봄을 확대하여 중간 계층의 많은 수를 포함시켜 보호하고, 사회의 정상, 황제와 관료에게 탄원하는 새로운 길을 열었다. 4/5세기에 황제와 신민의 관계 및 사회의 여러 계층 간의 관계가 그리스도교 교회 안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정념pathos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가난한 자의 ‘울부짖음’을 듣는 것은 권력자의 의무였으며, ‘가난한 자’의 대변인인 4/5세기의 감독은 이러한 ‘주인 이미지’를 공적 담론에 도입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는데, 주교는 ‘요구의 언어’를 활용했다.(160-162) 로마 후기의 탄원 안에 포함되어 있는 극적이며 장황한 불만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과거와 같이 후기 제국에 대해 오해하게 된다. 황제는 비난과 탄원을 이끌어내어 매우 특이한 ‘비판의 문화’를 만들어냈으며, 불만 표현은 제국의 감시 장치로 장려되었는데, 이는 분리하여 통치하는 정책의 일부였다. 주교가 이용한 ‘권리 주장의 혁명’은 위와 아래가 소통을 유지하려 노력했던 광대하고 고도로 중앙집권적 행정기구의 존재에 의해 만들어진 특유한 긴장에 의해 생겨났다. 여기에 참여한 주교, 성직자, 성자들은 자신들이 필요를 대표하는 사람들을 포괄적 용어로 ‘가난한 자’라고 말했으며, 종교적 언어를 사용했다.(166-168) 4-6세기에 부자에 대한 가난한 자의 성서적 주장이라는 관점에서 보호와 구호를 찾는 탄원의 언어가 발전되었지만, 그것이 후기 로마 사회 전체를 압도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참된 ‘가난한 자를 사랑하는 자’라는 명성은 황제라는 멀리 떨어진 인물로 투사되었다. 그리스도교적 주인에 대한 묘사는 약한 자의 보호자인 주교와 성자가 선호하는 언어였다.(175-177)
주교는 가난한 자의 지사governor로서 탄원하고 요구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여기서 탄원하고 요구하는 수사학의 새로운 정념pathos으로서 울부짖음이 등장하게 되었다. 지금 우리에게 남겨진 문서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문서의 구구절절함은 오랜 시간 동안 교회/주교와 사회의 특성을 오해하게 만들었다. 주교와 교회가 훗날의 감성을 따라 해석된 대로 단지 가난한 자들을 옹호하고 돌보려 했던 것이 아니다. 수사학의 이면을 읽어야 한다. 이것은 황제와 신민 간의 하나의 정치적 소통 방식이며, 여기서 가난한 자들은 종교적 언어, 성서적 언어를 사용했다. 따라서 가난한 자의 목소리를 듣는 황제는 하느님의 대리자,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지상에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주교/교회는 이를 전달하는 것이다. 다시금 정치신학적 해석이 깔려 있다.
가난한 자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은 자신이 곧 하느님의 현존(나사렛 예수) 앞에 서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182) 성육신의 역설에 암시된 우주와 사회의 긴장감 높은 묘사는 이 시대 사람을 매혹시켰다. 하늘의 황제인 그리스도는 인간이 됨으로 인간 육신의 극도의 ‘가난’에 자신을 결합시켜,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에 이용될 수 있었다.(비하, sunkatabasis).(185) 가난한 자에게 주는 기부는 그리스도에게 주는 예물로 신자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해줄 것이다.(188) 이 언어는 집단 결속의 언어로 작용하기 위해 수평적으로 적용될 수도 있었다.(189) 5세기 중엽에 이러한 방법으로 그리스도교 교회의 지도자는 결속에 대한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냈다. 5/6세기 동방 로마제국의 중앙집권적 구조에 의해 이루어진 유례없는 동일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191)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우주의 꼭대기인 ‘황제’가 우주의 밑바닥인 인간의 육신이라는 ‘거지’와 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과 신의 결합은 우주의 궁극적 결속에 대한 핵심적 진술이며, 하느님 편에서의 ‘비하’라는 강력한 행동으로 확보되었다. 꼭대기에 있는 사람은 이러한 유대를 존중하도록 배우고 낮춰야 한다.(192) 황궁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물렀던 시대에 에페소스 공의회(431년)와 칼케돈 공의회(451년)의 그리스도론 논쟁의 격렬함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 논쟁은 나사렛 예수의 인격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결합의 정도와 성격에 과도하게 집중되었다. 황제는 신민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인식과 가깝다는 인식을 결합시키는 방식을 만들어야 했으며, 위엄과 접근 가능이라는 교차적 방식을 채택했는데, 그리스도교의 예식과 그리스도교의 경건은 황제의 인격 안에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신비스런 결합을 표현할 새로운 상징 형식을 제공했다. 이는 그리스도론의 유비이며, 황제의 신과 닮은 공적 인격과 인간적 본성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였다.(193) 제국의 의전 예법은 그리스도교 예식과 감성을 활용하여 황제의 인격 안에서 ‘신과 같은 것’과 ‘인간적인’ 것 사이를 오가는 진자운동을 강조했다.(195) 황제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로 임명된 안티오키아 출신의 네스토리오스는 왕과 신민 사이와 유사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넘어설 수 없는 분리에 대한 인식이 있었고, 동정 마리아에 대해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라는 표현을 인정하기 꺼려했다. 네스토리오스의 실수는 주변 세계에 통용되는 사회정치적 관계 유형을 지나치게 정확히 모방한 것으로 보이는 종교 제도에 관련된 실수였다. 황제가 분리되는 것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일상적 규범이었으나, 황제의 신민들은 헤아릴 수 없는 어떤 것, 결속의 신비함과 연대감에 기초하여 황제/권력자와 가깝다는 느낌을 원했다.(199-201) 유능한 정치가였던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는 이 지점을 공략했다. 네스토리오스는 ‘페르시아의 군주’처럼 하느님을 인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만들었다고. 키릴로스가 네스토리오스에 맞서 제안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유한 인격에서 이루어진 신성과 인성 사이에 자연적 본성적 결속에 기초한 하느님과 인간의 결합이었다. 우선은 하느님과 인류, 황제와 신민, 부자와 가난한 자의 결속의 형상이 되었다.(203-205) 네스토리오스의 예수는 경외감을 일으키는 시리아의 성자를 위해 적절한 모델이었다.(206) 초기 비잔티움인들은 예수를 그의 어머니를 연결시킨 육신의 결합으로부터(이는 자신들과 예수의 연결로 이어지며)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결속에 대한 보증을(네스토리우스의 의지보다 더 깊은) 원했다. 5/6세기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로 공경하는 예식이 성장했다. 예수에게 젖을 먹임으로 마리아는 하느님을 인간으로 만들었다.(207) 그러므로 그리스도론 논쟁이 동방제국에서 뇌우처럼 발생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며, 대체로 키릴로스의 관점이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네스토리오스 방향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 ‘단성론파’로 하여금 칼케돈에서 제안된 타협적 신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키릴로스에 대한 충성심에서 반대했다.(209) 피터 브라운은 5/6세기 동방제국을 괴롭힌 그리스도론 논쟁에 대해 ‘사회적’ 설명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이러한 논쟁에서 동방제국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삶으로부터 끌어낸 이미지가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각기 상대방에게서 하느님과 인간의 분리를 보았다.(210-211) 안티오키아에서는 신자들에게 하느님이 재앙의 때(지진)에 기도로 그분에게 의지하는 사람들과 함께 인간적 고통을 나누었다는 것을 하느님이 명백한 말로 기억하시도록 해야할 때가 있었다.(213) 안티오키아의 단성론자 세베로스에게 성육신은 돌이킬 수 없도록 하느님을 사람에게 결합시켰으며, 이집트는 가장 비타협적 형태, 키릴로스의 가르침을 주장했던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에 대한 충성에서 단성론파로 정해져 있었다. 6세기 한 콥트어 문집에서 익명의 저자는 왜 하느님은 인간이 되셨는가에 대한 키릴로스의 대답으로 성육신은 최후의 심판의 공정한 집행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남겼다.(214-216)
개인적으로 이 마지막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다. 칸토로비치가 이 시기의 정치신학을 전개했다면 꼭 썼을 만한 내용들이다. 신학논쟁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지만, 실로 논리는 간단하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는 하느님의 대리인이자 그리스도의 대리인으로서 가난한 자의 탄원을 듣는 자로서 자신의 신민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왕권을 구축하는 사상으로서의 정치신학은 왕권에 대한 다른 직접적인 설명이 없는 이상, 그리스도에 대한 논의와 직결되어 있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인가 인간인가? 그 둘 모두라면 어떻게 그러한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단순히 신학적 질문에 대한 응답일 뿐 아니라, 황제/왕은 어떤 존재이고, 어떤 존재여야만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이 정치신학이다. 훗날 이단으로 정죄되어 축출되어 그의 추종자들이 중국으로 옮겨갔던 네스토리오스는 당시 황제가 임명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였는데, 그는 황제가 신민으로부터 분리된 모습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분리라는 신학적 기술로 전개했다. 그에 반해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는 바로 이 분리를 공략했는데, 그가 영향을 미치던 지역의 신민들은 지진과 같은 재앙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십자가에 달려 인간의 고통을 함께하는 곧 결합된 예수 그리스도라는 형상이 이들에게 절실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저 멀리 콘스탄티노플의 화려한 궁전에 있는 황제가 아니라 고통받는 자신들과 결속된 황제의 형상을 원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입장이 이집트, 시리아 등의 교회가 칼케돈 공의회 이후에도 ‘단성론자’라는 이름으로 교회에서 분리된 이유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 결합되어 하나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단성론자’가 신학적 입장의 차이를 넘어서 이단이라는 정죄를 감내하면서까지 별개의 교회로 분리되는 배경에는 이러한 정치적/사회적 상황이 놓여있었다는 것이다. 피터 브라운이 주목하는 지점은 하나의 본성이라는 단성 보다, 분리할 수 없는 결합/결속이라는 측면이다. 물론 피터 브라운은 이런 배경을 넌지시 전할 뿐, 사회적 인자로부터의 어떤 인과론적 설명까지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런 해석은 또 하나의 환원론을 낳을 뿐이니까. 그러면서, 5세기 그리스도론을 둘러싼 논쟁이 동로마, 비잔티움에만 있었던 점을 넌지시 지적한다. 서로마에는 황제가 없었기에, 그리스도론을 둘러싼 신학 논쟁도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정도가 피터 브라운이 구사하는 정치신학이라고나 할까. 단성론이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피터 브라운의 글을 읽을 때, 일부러라도 객관적 시선과 냉정함이 요구된다. 피터 브라운이 다루고 있는 지점, 특히 고대 후기의 부와 빈곤의 문제를 다룰 때, 그리스도교인들이나 신학에 배경을 둔 사람들, 즉 이런 책에 관심을 두고 읽을 사람들은, 이미 마음이 뜨겁고 감동할 준비가 되어있다. 자신을 희생하면서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돌본 이들의 미담과 위대함 앞에 이미 엎드러진 상태이며, 그런 해석에 익숙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런 독해로 이끌리게 된다. 그런 면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피터 브라운도 때로는 다소 완곡하게 서술하기도 하고. 고대로부터 이어진 그러한 수사에 익숙하기도 하다. 이야기가 전해질 때도 그렇게 둥글게 된다. 전승본문이 넘어오듯이. 신자나 신학 배경이 없는 사람이 번역한 것들이 오히려 명료했던 이유는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피터 브라운도 나중에야 새로운 자료의 발견과 함께 이런 수사를 보다 더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다고 말한다. 8/90년대가 그에게 중요한 전환점이었던 것 같다. 출세작인 The World of Late Antiquity (1971, 1989)의 개정판이 나왔고, 그후 초기 작품에 대한 개정판으로 Augustine of Hippo (1967, 2000)과 The Rise of Western Christendom (1996, 2003)을 출간했다. 한국어로 출간된 것 중에서 Poverty and Leadership (2002)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좀 더 멀리 떨어진 시선으로 읽을 필요가 있긴 하지만. 말년의 주요저작인 Through the Eye of a Needle: Wealth, the Fall of Rome, and the Making of Christianity in the West, 350-550 AD (2012)는 물론이고, 강연집인 The Ransom of the Soul (2015)와 Treasure in Heaven (2016) 모두, 부와 가난 및 이를 다루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오늘날은 빈부격차가 가장 크게 벌어진 시대이고, 교회 조차 소수를 제외하고는 빈부격차 문제를 외면하는 시대이니, 아일랜드 남부 개신교인으로 자라서 언제나 사회적 맥락 속에서 종교를 생각해온 그로서는, 더욱 이 문제에 관심이 가는 걸까. 사람들이 격차에라도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는데, 요즘은 아예 가난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 같아, 그게 더 걱정이다. 가난이라는 게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닌데.
2026. 1. 24.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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