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H. 칸토로비치, 『왕의 두 신체』(7-3).

1515년 왕의 인쇄업자 로베르 에티엔, 라틴명 로베르투스 스테파누스가 출판한 루이 12세의 장례행렬 목판화. 관가 위에 등신상이 보인다. 칸토로비치의 제자 랄프 기제Ralph E. Giesey의 The Royal Funeral Ceremony in Renaissance France의 1장 주49에 보다 상세한 설명이 있다. 이 목판화는 사람들을 오해하게 만들었는데, 1378년 샤를 5세의 왕비 잔 드 부르봉Jeanne de Bourbon의 장례행렬에는 등신상이 천개 아래 있었지만, 1461년 헨리 6세의 장례행렬과 그 후에는 등신상이 앞서고 천개가 뒤따랐다. 1515년에 처음 출판된 이 목판화는 1523년 복제되었고, 1547년에 표지로 다시 출간되었다. K2B에 실려 있는 그림이 이것으로, 좌우가 뒤바뀌어 있고, 사람들의 간격도 살짝 다르며, 1547이라 찍혀 있다. 후대의 목판화 둘 모두는 Catalogue of a Collection of Early French Books in the Library of C. Fairfax Murray에 실려있다. EKa가 사랑했던 제자답게 꼼꼼하게 밝혀두었다. 인쇄업자 에티엔은 이른바 전승본문 성서를 출판한 인물로, 신약성서의 장절 번호를 매겼고, 플라톤 저작 난외의 번호도 그의 판본을 따른 것이다. K2B의 도판 설명에 따르면 1515년에 출간된 팜플렛의 표지 목판화이며 랄프 기제가 제공했다고 되어있는데(511), 아마도 출판과정에서 혼동이 있었던 듯하다.

Ernst H. Kantorowicz, The King’s Two Bodies: A Study in Mediaeval Political Theology,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57, “VII. The King Never Dies, 3. Dignitas non moritur.”

제7장 왕은 결코 죽지 않는다

3. 존엄[위]은 죽지 않는다

왕의 자연적 신체의 연속성, 세습적 계승으로 왕관의 보호자로서 행동하는 개별적 왕의 연속성은 왕조적 관념에 의해 보증되었다. 왕이 머리가 되는 정치적 신체 전체의 주권적 권리의 영속은 왕관 안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두 연속의 원칙은 제3의 관념 존엄[위]과 일치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존엄[위] 없이는 왕의 두 신체에 대한 사색을 거의 이해할 수 없다. 12세기 이래 어떤 영장에서 특정 법적 소송사건이 왕관과 왕의 존엄[위]에ad coronam et Dignitatem regis 속했음을 강조하는 관습이 생겨났다. 왕들도 왕관과 왕의 존엄[위], 상속인인 잉글랜드의 왕을 손상시켰다는 혐의로 고발되었는데, 존엄[위]이라는 단어를 도덕적이거나 윤리적 성격으로 이해하는 것은 착오이다. 왕관과 존엄[위]이라는 용어는 정확함이 부족했고, 사려 깊지 않으며, 혼란스럽게 활용되었다 할지라도, 이들이 공통의 외연을 가졌고 치환가능하거나, 불필요한 중복이라고 가정하는 것도 착오이다. 왕관은 주로 왕국의 집합적 신체 전체의 주권[지고성]을 지시했던 것이고, 왕관의 무결성을 보전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관련되는 것이었지만, 존엄[위]은 왕관과 달랐는데 이는 주로 왕의 직무의 단독성을 가리켰고, 인민에 의해 왕에게 수여되었고 개별적으로 왕 혼자만에 속하는 주권[지고성]을 가리켰다. 왕의 존엄[위]은 대권과 함께 왕국 전체를 위해 유지되고 존중되어야 했기에, 존엄[위]도 사적이지 않고 공적인 본성을 가졌다. 존엄[위]은 대체로 왕의 직무officium regis와 대체로 일치했지만, 직무Officium와 존엄[위]Dignitas은 정확하게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바르톨루스나 발두스는 어떤 로마의 원로원 의원, 원임집정관, 상휘관, 휘관, 화관, 현관 등의 존엄[위]을 지닐 수 있어도, 직무는 없을 수 있음을 지적했다. 바르톨루스는 직무 자체는 존엄[위]이 아니었지만, 부가된 존엄[위]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법학자들은 교회와 교회법이 13세기 이래 발전시켜 왔던 용어법을 따라야 했는데, 거기서 직무라기 보다는 존엄[위]이 법률적 숙고의 주제가 되었고, 존엄[위]은 마침내 하나의 단체적 독립체로 떠올랐다.(383-385)

왕조, 왕관과 함께 연속성을 구성해 내는 존엄[위]. 라틴어로 Dignitas, 영어로 dignity로 표기되는 이 말을 일본어 번역에서는 위엄이라 했고, 두 개의 중국어 번역에서는 하나는 존엄[위] 다른 하나는 존영尊榮이라는 옛말을 복원해 냈다. 처음에는 간편하게 위엄威嚴을 고려했으나 lex digna를 존엄법으로 새기면서, 그와 유사하게 존엄이라는 말을 활용하되, 다소 어색한 표현인 존엄[위]를 사용하기로 한다. 꽤 오래 고심했다. 정말 서양어는 이럴 때 참고가 되지 않는다. 독일어로는 Dignität이고, 프랑스어로는 dignité이다. 이런 말에는 고위직이라는 뜻이 남아있지만, 주로 교회의 고위직을 가리키는 말로만 남아있다. 여기서 말하는 Dignitas/dignity는 많은 경우 그것은 직위나 훈작을 가리키는 말과 유사하다. 그것은 왕, 교황, 귀족, 주교, 대수도원장을 가리키기도 하고, 일종의 재임자incumbent를 필요로 하는 빈 자리이다. 그렇지만 직무는 아닌. 어쩌면 존엄[위]이라는 번역어는 꽤 멀리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여기서는 단순한 고위의 직위를 넘어서는 추상적 의미를 가지면서 Dignitas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기 때문에, 존엄[위]으로 새기도록 한다. 존엄[위]을 담당하는 자라는 뜻의 dignitary는 다소 억지스럽지만 존엄인사로 새겼다. 왕관과 존엄[위]은 혼용되는 경우가 잦았지만, 존엄[위]은 왕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왕조로 대표되는 혈통적 연속성과 다른. 앞에서 한 번 주석을 달고 가면 괜찮다고들 하지만, 사람들이 늘 글을 앞에서부터 읽는 것은 아닌지라. 존엄 만으로 충분할 듯 보이지만, 어색하게 [위]를 붙여놓은 것은 현대 한국어에서 존엄이라는 완전히 추상화된 이념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혼동은 불가피하니 정확한 이해라고 도모하는 편이 나을 듯하다. 게다가 너무 많이 등장하기도 하고. 일본어에서는 lex digna를 렉스 디그나라고 음역하면서, Dignitas를 위엄威嚴이라고 했는데. 이는 아마도 도쿠가와 시대의 쇼군의 무위武威를 드러내는 통치방식인 위광威光 또는 어위광於威光을 염두에 둔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어에서 사용한 존영尊榮도 일견 어색하기는 하지만, 중국은 물론 구한말 즉 대한제국에서도 사용하던 말이기는 하나 여기서는 채택하지 않았다. 이런 단어를 사용하면, 현대와 지나치게 분리되는 느낌이 든다. 언젠가 익숙해져서, [위]를 떼어내면 좋겠는데.

불사조 PHOENIX교회법상의 이론이 완전한 전개에 도달한 것은 개별적이고 구체적 사례에 기초한 것이었다. 교황 알렉산데르 3세 하에서 대리 판사 중 한 사람인 윈체스터 대수도원장이 사망하자 대수도원장을 새로 선출함으로써 대리 판사가 승인되었다. 13세기 초 교회법 재판절차에 관한 『재판절차대계』는 고유명에 대한 언급으로 이루어진 위임과 고유명이 생략된 위임 사이의 차이를 강조했는데, 즉 인격에 대해 이루어진 위임과 존엄[위]에 대해 이루어진 위임 사이의 차이였다. 교회법학자 다마수스는 교황 알렉산드레의 교령에 대한 주석에서 “개인은 매일 죽지만, 존엄[위]은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라는 결정적 문구를 제시했다. 그레고리우스 9세의 『교황교령집Liber extra』에 포함되었고, 교령 「대수도원장으로 인해Quoniam abbas」로 불리는데, “고유명을 표기하는 일 없이 존엄[위]에 대해 이루어진 위임은, 후계자에게 전해진다.” 1245년 파르마의 베르나르두스의 『표준 주석』은 “선임자와 후계자는 하나의 인격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며, 이는 존엄[위]은 죽지 않기 때문이다.” 존엄[위]은 죽지 않는다Dignitas non moritur는 피임명자 뿐 아니라 임명을 행하는 존엄[위]의 담지자도 가리키는 원칙이었다. 위임을 행하는 지고한 교황의 위임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자신의 인격에서 유래하는 위임은 교황의 죽음으로 종료되며, 성좌의 존엄[위]에서 유래하는 권한의 위임은 후계 교황에도 구속력을 가지는 데, 성좌 자체는 죽지 않기 때문이다. 보니파키우스 8세는 자신의 『제6서Liber Sextus』에서 성좌에 의해 고위성직자에 수여된 성직록은 취소되지 않는 한 영속적으로 지속할 것인데, 성좌는 죽지 않기 때문이라 말했다. 인가의 갱신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은 성좌의 존엄[위]으로, 교황의 직위나 존엄[위]의 재임자는 죽을 수 있지만, 교황의 직위, 존엄[위], 지배권은 영원하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법학자들은 죽지 않는 존엄[위]과 죽지 않는 복합체인 단체 사이에 팽배한 유사성에 주목해야 했다. 전임자와 잠재적 후계자 모두가 존엄[위]의 실제 재임자 안에 현존하고 그에 결합되어 있는 자들이 의제적 단일성을 유지하는 것에 의해서, 법학자들은 의제적 인격을, 즉 특정한 존엄[위]을 계속해서 부여받은 사람들 모두로 구성된 “계승에 의한 단체”를 구축했는데, 이는 맥베스의 행렬을 연상시킨다. 이 의제에 의해서 하나의 단체를 구성하는 데 필요한 인격의 다수성이 달성되었는데, 이는 시간에 의해 배타적으로 결정된 다수성이다. 근대 초기까지 우세한 이론이었다.(385-387)

존엄[위]에 대한 논의는 교회법에서 출발한다. 사전에서 dignitas를 찾아보면, 교회의 고위직을 뜻하기도 한다. 출발점에서 존엄[위]은 내용상 고위의 직위를 뜻하며, 직위에 위임하게 되면 그 일을 맡는 사람, 즉 재임자는 모두 그에 구속되는 동시에 권리를 향유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혈통 상의 연속성이 없으므로, 전임자와 재임자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후계자는 “계승에 의한 단체”를 구성하게 되며, 의제적 단일성과 의제적 인격을 확보하게 된다.

계승에 의한 단체의 본성에 대한 양상은 철학적 반성으로 생겨났을 것이다. 파르마의 베르나르두스가 Quoniam abbas에 주해를 달았을 때, 진기하고 인상적인 은유를 도입했는데, 존엄[위]은 한 인격의 고유명이 아니라 단지 한 인격을 선발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는 불사조 처럼 단수 개체를 가리키는 것이자 보통명사이기도 했다. 신화상의 새 불사조는 언제나 한 번에 단 하나만 살아있고, 500년 이상을 살고 나서, 자기 둥지를 불태우고, 불꽃 속에서 소멸한 후, 타는 듯 붉은 재로부터 새로운 불사조가 생겨난다. 미술에서 불사조는 통상 불멸성의 이념을, 영속과 유구를 의미했다. 스스로 생겨난 새는 동정[처녀성]의 모범도 되었고, 부활의 상징으로도 도움이 되었다. 법학적으로는 그 새의 단독성과 유일성이 중요했는데, 발두스는 불사조는 유일하고 가장 단독적인 새로서 거기에 유類 전체가 개체 안에 보존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에게 불사조는 개체가 동시에 실재하는 종 전체이고 그 결과 실제로 종과 개체가 일치했던 희귀한 사례였다. 종은 불멸하고, 개체는 필멸하므로 상상의 새는 이원성을 노출했는데, 불사조인 동시에 불사조-종種이었고, 개체인 동시에 집단이었는데, 종 전체가 한 번에 단 하나의 표본 만을 생산했기 때문이다.(387-390)

구체적 비유가 필요했을 때, 제시된 것이 불사조였다. 한 종에 한 번에 한 개체 뿐이며, 죽은 자리에서 다시 살아나는, 개체가 유 전체를, 종 전체를 보존하는 단 한 표본 만을 가진 흥미로운 사례.

이교 및 그리스도교 신화기록자들은 불사조가 스스로 발생했던 것을 암수한몸, 양성구유자로 해석했고, 락탄티우스는 암컷 이거나 수컷 또는 둘 다 아니거나 둘 모두라 돈호했는데, 불사조는 여신 비너스와 어떤 맹약도 맺지 않았고, 자신의 죽음에 의해 스스로 새끼를 낳았기 때문이다. 클라우디우스는 새로 태어난 불사조는 그 자신의 아비이고 그를 창조할 사람이 없는 그 자신의 아들이라 말하며, 화장용 장작더미에 의해서만 분리되는 불사조의 쌍생-생명을 강조했지만, 두 생명 사이의 경계선은 식별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오, 행복한 자, 당신 자신의 상속인,” 새는 항상 동일했고 자기 신체의 상속인이라고 암브로시우스는 강조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불사조가 죽는 날은 그의 탄생일이었다고, 다르지만 동일한 것이라 논평했다. 베로나의 제노는 불사조는 자신의 유類이고, 자신의 종말이고 시작이라 덧붙였다. 이미 오비디우스는 유일한 새 불사조는 스스로를 소생시키고 스스로 자생한다고 말했다. 고대의 신화기록자들과 호교론자들은 어떤 이원성이 불사조의 본질적 특질이었음을 인식했지만, 주로 양성구유적 성격을 생각했을 뿐이다. 만약 락탄티우스, 클라우디아누스, 암브로시우스에 따라 불사조가 자기자신에게 상속인이었다면, 상속법이 단체론적 학설 일반에 가진 중요성을 상기해야 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단일성 또는 동일성은 『법학제요』, 프리드리히 2세의 칙허장, 『칙법휘찬』, 『그라티아누스 교령집』에서 발견된다. 법의 의제는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에 의해 지지되었는데, 이들의 생물발생론적 학설에 따르면 낳는 자와 태어난 자의 형상은 동일했고, 정자의 능동적 힘은 아버지의 혼에서 유래하여 아들에게 자신을 새겨넣는 것이다. 법적 철학적 학설은 왕의 장자가 아버지가 살아있을 동안에 왕의 존엄[위]에서 아버지와 하나였기에, 아버지와 가장 동등함을 입증해야 했는데, 왕의 아들은 젊은[어린] 왕rex iuvenis이라 불렸고, 장 드 테르 루주는 장자와 독자가 거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아버지의 오른쪽에 앉아있는 한 사람은 종과 본성에서 동일했음을 입증할 수 있었는데, 그는 장자상속제의 신학 비슷한 것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들은 죽은 불사조와 살아있는 후계자의 인격적 동일성을 강조했는데, 유명한 법격언도 그런 이 비교를 강화했다. “죽은 자가 산 자의 눈을 뜨게 한다”라는 잠언은 자유가 없이[토지에 대한 자유보유권이 없이] 태어난 자는 그의 주인의 죽음으로 자유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발두스에 의해 인용되었고, 후에 프랑스 법학자 앙드레 티라쿠오에 의해 “죽은 자는 [상속재산에 관해] 산 자를 붙든다”라는 프랑스 상속법의 유명한 격언을 해명하기 위해 인용되었다. 프랑스 왕좌의 후계자는 때때로 작은 불사조라 불렸다.(390-394)

불사조는 양성구유, 암수한몸으로도 설명되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의 스스로 상속자가 된다. 중세는 상속이 가장 중요했다. 게다가 이 둘은 하나였다. 중세에는 따로 떨어진 두 장소에 동시에 존재할 수 없거나, 전쟁에 나갈 필요 때문에, 아버지는 종종 아들을 공동 왕으로 임명했다. 젊은 왕, 어린 왕으로도 불렀는데, 아주 어린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2세도 어린 아들 콘라드를 독일왕으로 하여, 독일로 보냈다가 거기서 회유된 아들의 배반이라는 쓰라린 결과를 맞이하기도 했다. 이 둘의 동일성 다시 말해, 왕위 상속의 정당한 권리는 장자상속제의 신학이 구축하게 된다. 불사조, 프랑스 왕좌의 후계자.

대수도원장, 주교, 교황, 왕의 존엄[위]은 한 번에 한 개체, 재임자만 산출하기에 불사조-같이 개체와 일하는 종種으로 나타났다. 불사조 은유의 재로부터 불멸하는 종이자 동시에 필멸하는 개체였고, 집단적 정치적 신체이자 개별적 자연적 신체였던, 단독법인이라 불렸던 유령의 원형이 생겨났다. 이탈리아 법학자들의 불사조 은유는, 결코 죽지 않고, 미성년도 아니며, 노쇠하지도 병들지도 않고, 성별이 없으며, 거룩한 영과 천사를 닮았던 기묘한 단체적 신체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양성구유나 자기-생식 같은 관념은 불사조에게도 유사한 특성을 귀속시킬 수 있을 것이다. 랍비 전통에서 이 새는 금단의 열매를 맛보기를 거부해 낙원에서의 무구 상태를 보존했기에 불멸성을 가졌고 영속하는 신체를 위해 성별은 소멸하는 것이다. 스콜락 철학에서는 종이면서 동시에 개체로 있는 것이 천사의 특수성으로 항구적 존재는 자신과 같은 종류를 생식하지 않기에, 계승하는 것은 아니지만 각각 하나의 종으로 단독 개체로 남아있다. 이는 천사, 불사조, 단체론적 신체가 외견상 공통이었던 몇몇 특징을 설명할 수 있다.(394-395)

한 번에 한 개체만 존속하는 불사조의 특징은 결국 천사적 특성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다시 항구성으로 단체론적 신체로의 해석으로 연결된다.

교황 또는 주교는 그 자체로 단체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그들은 초-개인적이고 영속적 어떤 것이, 즉 죽지 않는 존엄[위]이 부가되는 한에서 그들은 자기 종을 단독으로 표상하는 자로서 단체적인 것이다. 법학자들이 고위인사에게서 두가지 인격성의 구별에 도달했다. 피스토이아의 퀴누스가 주교의 두 가지 인격성으로 하나는 주교인 한에서 다른 하나는 개인인 한에서 라고 말했을 때, 이는 관습적인 것으로 인격에 주어진 위임과 존엄[위]에 주어진 위임 사이의 교회법적 규정의 적용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그의 논평은 권한의 위임의 이중적 양상으로부터 위임된 고위인사dignitary 뿐 아니라 위임하는 고위인사의 이중적 인격성으로, 최종적으로 성속의 모든 직무-담당자로 강조점이 이동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죽지 않는 존엄[위]으로서 성좌의 불멸성은 합리적 법학상 의제에 기초하고 있었지만, 교회법 법률가들이 불합리한 사고에 빠져 성좌의 영속까지도 초월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방지하지 못했다. 보니파키우스의 성좌 자체는 죽지 않는다를 주석했던 요하네스 안드레아는 주의 기도, 신적 힘의 발산으로, 그리스도가 죽지 않기에 교회의 항구성이 발산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와 반대로 제국은 유사한 형이상학적 이유로 항구적이라 이해되었는데, 신에 의해서 구축된 다니엘의 네번째 군주국을 보라. 이러한 논거들은 존엄[위]의 불멸성에 대한 새로운 법 이론에 의해 보완되거나 대체되었다. 트라니의 고프레두스는 Quoniam abbas 주석에서 존엄[위]은 재임자의 죽음으로 소멸되지 않기에, 제국은 영속한다고 했으며, 후의 저자들은 제국은 영원하다라는 문구가 존엄[위]을 언급했던 것이라 선언했다. 이는 오랜 관념의 세속화로, 제국의 영속은 더 이상 신과 신의 천명으로부터가 아니라, 존엄[위]이라 불리는 불멸하지만 의제적 인격화로부터, 인간의 지모에 의해 창출되었고, 마찬가지로 불멸하는 정치체, 결코 죽지 않는 통합체에 의해 군주 또는 현존 직무-당당자에게 부여되었던 존엄[위]으로부터 유래했다. 영속의 가치는 신위, 정의라는 이념, 법이 아니라 각각이 불멸하는 통합체와 존엄[위]에 중심을 두었다.(395-397)

교회법에서 시작된 교황 또는 주교의 단체적 성격은 개인과 존엄[위]의 결합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두 가지 인격을 가지게 되며, 단체론적으로 불멸성을 확보하게 되지만, 문제는 교회가 법적 의제를 고수한 것이 아니고, 손쉬운 해결책, 신앙과 신적 힘의 발산으로 넘어가 버렸다는 것이다. 반면, 제국과 정치체는 기댈 곳이 없었기 때문에, 법적 의제를 고수해야 했고, 인간이 만들어 낸 정치체, 통합체에 의해 부여되었던 존엄[위]에 중심을 두게 되었다.

제국에 관해 타당했던 거의 모든 것이 왕국에 관해서도 타당했다. 발두스는 계약과 채권채무관계의 구속력을 논할 때, 존엄[위] 그 자체인 제국은 불멸하며, 인격으로부터 생겨난 것은 개인적 문제이고 존엄[위]으로부터 생겨난 것은 영구적이고 영원한 문제라 지적하면서 제국으로부터 왕국으로 황제로부터 황제-같은 왕으로 즉 상위자를 인정하지 않는 최고의 군주위를 가진 자로 전환했다. 왕의 맺은 계약도 존엄[위]의 이름 아래 이루어졌을 때 후계자를 구속한다. 발두스의 고찰에서 왕의 책임을 결정하는 두 요인, 통합체의 불멸성과 존엄[위]의 불멸성을 발견하며, 그에 따라 군주는 존엄[위]과 국가[공유물], 즉 항구적이라 믿는 독립체의 힘으로 행동했다고 말했다. 발두스의 정치적 체계에서 인민이라는 관념은 법률주의적인 죽을 수 없는 통합체로 변화되었고, 신도 마찬가지로 법률주의적인 죽을 수 없는 존엄[위]으로 대체되었다. 신과 국고의 병치를, 존엄[위]이 영속하기 때문에 국고와 마찬가지로 신과 대등해졌다는 것을 상기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왕의 존엄[위]은 죽지 않는다 또는 존엄[위]은 군왕의 어떤 것이며, 개인이 죽는다 해도 군왕의 자질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표어의 반복이다. 마타에우스 데 아플릭티스는 시칠리아 왕국의 칙법에 대한 주석에서 발두스를 언급하며 왕의 존엄[위]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선언했고, 발두스는 왕의 대권은 죽지 않는다라고 말했는데, 왕 안에 있는 두 인격, 인간의 실체 안에 있는 혼인 개인적 인격 곧 개인으로서의 왕과 존엄[위]이라는 의인화된 이념적 인격을 구별한다. 존엄[위]은 공위시에도 독립적이지만 공위가 아니면 지배자와 분리불가능하며, 고대 주화에 아우구스투스의 동료로 나타나는 신처럼 영구적 동료로 부가되어 있다. 존엄[위]과 국가[공유물]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계약을 준수해야 할 왕의 의무에 대해 논의할 때, 의무의 계약을 맺은 선임자인 왕은 그의 존엄[위], 그의 국가[공유물]이 죽지 않았기 때문에, 죽지 않았다. 왕(K)은 왕(k)을 넘어서 살아남으며, 죽은 군주는 존엄[위]으로써 자신의 죽음 이후에라도 의지를 행사하는 것으로 본다. 발두스에게서 왕의 두 신체들을 말한 튜더 법학자들이 들린다.(397-401)

교회와 제국이라는 보편에서 먼저 성립한 위임은 이제 왕국으로 넘어간다. 제국과 거의 동일한 것이 왕국으로 다시 국가[공유물]라는 독립체로 넘어간다. 인민, 신, 국고가 사실상 영속하는 것으로 병치된다. 왕의 존엄[위]도 왕의 대권도 죽지 않는다. 왕과 존엄[위]은 결합되어 개인이 죽은 후에라도 권한을 행사하게 된다. 존엄[위]을 이어받은 후계자에 의해서.

잉글랜드에서 단체론적 징후 CORPORATIONAL SYMPTOMS IN ENGLAND

잉글랜드 법률 언어에서 존엄[위]이 왕관과 함께 사용되었던 사례에서 존엄[위]의 단체론적 성격은 의도된 바가 아니었지만, 이탈리아 교회법학자들의 학설은 흔적을 남겼다. 1313년 커캄 소수도원장에 대한 소송에서 재판관 잉은 교회법학자들의 존엄[위]을 언급하는데, 1300년 잉글랜드 법학자들이 교회법상의 인격에 관해 선임자와 후계의 사실상 동일성과 다름없는 이념과 법률주의적 의미에서 존엄[위]이라는 이념과 친숙했다. 재판관 잉은 연속적 인격성이라는 관념이 세속 직무까지 이전되지 않았고, 영적 고위인사에게 제한되어 있었음을 가리킨다. 세속 고위인사도 단체론적 학설이라는 마법의 동그라미에 말려들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15세기에 에드워드 4세 치하에 단체론적 사고의 양상은 완전히 의식적이 되었는데, 랭커스터 공국 사례에서 드러났다. 공국은 랭커스터 가의 사적 소유로 랭커스터 왕조의 왕들은 이를 세습의 권리에 의해 보유하고 있었다. 이는 1399년 즉위한 헨리 4세가 이 토지를 신분과 존엄[위]으로 불리기 이전부터 소유했다고 말했다. 왕관에서 분리된 사유재산인 공국은 헨리 5세와 6세까지 존속하여, 플라우던이 전한 대로 랭커스터 왕가의 자연적 신체로 보유되었다. 1461년 요크 왕가의 에드워드 4세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 공국의 법적 지위가 변화했다. 그는 즉위 후 랭커스터의 전임자를 대역죄로 유죄 선고하고 사권을 박탈하고 모든 소유와 칭호를 몰수했다. 에드워드 4세는 왕관의 권리를 제외하면 공국에 대해 어떤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반역죄를 이유로 몰수당했기 때문이다. 그는 의회제정법에 의해 몰수된 공국을 법인화했으며, 의회는 에드워드 4세와 그의 상속인인 잉글랜드 왕에게 영속적으로 이 토지를 보유할 권리를 승인했다. 공국은 하나의 단체로 다른 왕관 재산에 합병되지 않은 채 왕관의 한 부분이 될 수 있었다. 공국의 모든 권리와 부속물이 손상되지 않은 채로, 일괄하여 보유하고 특별한 관리 하에 두기 위해, 의회제정법에 의해 법적 인격으로 전환되었다. [법인] 랭커스터 공국은 중앙 통치기관으로부터 면제된 지위를 가지고, 단체로서 왕관에 속할 수 있었으며, 사적인 왕이 아니라 왕(K)으로서의 왕은 세습적으로 그 법적 단체의 머리가 될 수 있었고, 수익은 그에게 속할 수 있었다.(401-404)

잉글랜드에서도 존엄[위]은 교회 영역에서 먼저 시작되었고, 영적 고위인사에게 제한되어 있었다. 획기적인 전환이 이루어진 것은 랭커스터 공국의 사례였다. 플랜태저넷 왕조가 리처드 2세로 끝나고, 랭커스터 왕가의 헨리 4세가 등장했을 때, 그는 자신의 개인적 상속재산인 랭커스터 공국을 왕관에 결합시키지 않고 별도로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당연한 생각일 듯. 그러나 랭커스터가 몰락하고, 요크가 등장했을 때, 이를 그냥 놓아둘리 없었다. 몰수되어 이미 왕관에 포함되었지만, 언젠가 다시 랭커스터의 후손에게 다시 공작령으로 수여할 가능성도 고려했던 것일까, 에드워드 6세와 의회는 법인화라는 기상천외한 방법을 생각해 낸다. 아마도 세계 최초의 법인일 듯. 심지어 이를 제정법으로 하게 되는데, 잉글랜드에서 제정법이란 왕과 의회가 함께한 법을 말한다. 고치기가 아주 어렵다는 뜻. 랭커스터 공국에는 한 인격 즉 왕으로 구성된다. 잉글랜드의 왕은 혈통과 무관하게 랭커스터 공국을 소유하는 것이다. 참고로 오늘날에도 랭커스터 공국상이라는 관직이 있으며, 심지어 내각에도 포함되어 있다. 랭커스터 공국 담당장관으로도 번역한다. 지금은 당연히 노동당 의원이다.

단체론적 사고는 최고 수준에서 국헌상 실무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의회제정법을 수단으로 한 공국 전체의 실제적 법인화는 중세 실무에서 독특한 것이었다. 이를 국가와 교회의 분리 때문에, 교회가 사적 단체를 형성하고 있는 나라에서 주교구나 수도회 관구가 법인화되는 것의 선구로 간주할 수 있다. 대주교, 주교가 단독법인이고, 수도회와 관구가 주마다 법인화된 미국이 그러하다. 당시 세속의 단체론적 법률은 교회의 지위에 소급적용되었다. 15세기 후반 단체론적 관념형태는 잉글랜드에서 확고한 기반을 획득했고, 튜더 왕조의 판사들이 왕의 두 신체에 관한 가장 인상적인 정식화를 만들어 낸, 1561년 법정에서 논의된 랭커스터 공국 사건에서 법인화는 법 사상에 지울 수 없는 표식을 남겼으며, 수많은 판사와 권위자들에 의해 인용되었기에 정치적이고 대중적 어법 속으로 침투했고 반복되었다. 튜더 왕조 법학자들의 독창성은 존엄[위]이라는 통상 사용되던 관념을 정치적 신체라는 관념으로 대체했다는 사실 및 그에 의해 양법이 제시하지 않았던 정교한 설명과 결론으로 인도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다행히 존엄[위]이 신체Corpus로 대체된 것을 예증하는 사례는 많다. 1487년 헨리 7세 때 소송에서 재판관 바바소가 대수도원장을 정치적 신체라 언급한 것, 1482년 에드워드 4세 때 재판관 페어팩스는 대수도원장이 신비체의 구성원이 아니라 자체로 신비체이며, 결코 죽지 않고, 연속성을 가진다고 언급했다. 존엄[위]이라는 단체론적 관념이 마찬가지로 단체론적인 신비체라는 관념과 혼동되고 있었거나 신비체가 다른 점에서 존엄[위]이라 불렸던 무엇과 융합되고 있었다.(404-406)

법인화라는 관념형태는 16세기 잉글랜드에서 확고한 기반을 마련했고, 이것이 결국 두 신체의 정식화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존엄[위]은 신체로 넘어가게 된다. 그러나 오해는 말자. 아직 법인 개념은 아주 분명하지 않았고, 아주 특별한 사례에만 해당되었다.

왕의 존엄[위]으로부터 왕의 정치적 신체로의 이행이 법적 논고에서 작용하는 것은 1556/1557년 민사소송법원의 힐 대 그란지 사건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이는 헨리 8세에 의해 해산된 수도원에 속했던 토지에 대한 불법침입 소송이었다. 수석 재판관 브룩은 왕의 개인적 이름이 인용, 언급되는 경우에도 제정법령은 왕의 상속인이나 후계자에게 이익을 주거나 구속한다고 논했다. 대헌장의 ‘짐’이라는 단어가 존 왕 개인이 아닌 왕(K)으로서의 왕을 지시함을 입증하려 했는데, 왕은 정치적 신체이기 때문이며, 제정법이 왕 또는 짐이 할 때, 이는 언제나 왕(K)으로서의 왕의 인격에서, 왕의 존엄[위]에서 말해지는 것이고, 그의 직분을 향유하는 모든 사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재판관들도 헨리 8세가 이름으로 언급되었을지라도 왕(K)으로서 그에 대한 언급이라 주장했다. 왕은 제정법이 상정하듯, 인민의 머리이자 통치자로서 언제나 지속할 것인, 연속의 이름이며, 왕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판사들의 의견으로 왕의 죽음은 승하demise라 불렸는데, 왕국을 다른 사람에게 이양하고, 다른 사람이 직분을 향유하게 해주므로, 존엄[위]은 언제나 존속한다. 비록 그의 자연적 신체는 죽는다 할지라도, 왕(K)으로서의 그는 결코 죽지 않으며, 이름으로 언급되는 왕(K)은 항상 존속한다. 왕(K)이라는 단어는 에드워드 6세까지 확장된다. 왕(K)이라는 이름으로 특정한 왕이 언급되고 있을 때, 이는 그의 상속인과 후계자에게 확장되어야 한다. 이런 주장에서 존엄[위]은 죽지 않는다라는 표어를 재임자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존엄[위]의 연속성을, 선임자와 후계자의 통일성을, 존엄[위]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책무들의 구속력을, 이름을 거론하는 것과 생략하는 것의 중요성을, 그외 교령 Quoniam abbas와 관련해 3세기 이상 활용된 모든 함의를 인식하고 있다. 다만 존엄[위]이라는 관념은 정치적 신체로 대체되었다. 쿠크는 캘빈 사건에서 종으로서in genere 왕은 죽지 않지만, 개체로서in individo 죽는다고 논평했다. 왕(K)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문구가 처음 등장했던 것은 잉글랜드 법률가들의 소답절차에서였으며, 왕(K)의 불멸하는 정치적 신체와 필멸하는 자연적 신체 사이의 구별이 잘 확립되어 있어서, 오해는 불가능했다.(407-409)

왕의 존엄[위]에서 정치적 신체로의 이동 과정에서 또 하나 발견되는 것. 우선 존엄[위] 대신 보다 구체적인 것들이 존엄[위]으로 간주된다. 소송과정에서 나타나게 되는데. 먼저 ‘짐’이라는 표현이다. 동아시아에서 짐朕은 황제만 쓰는 표현이지만, 서방에서 왕은 자기 나라에서 황제인 만큼, 짐으로 표현해도 무방하다. 짐은 영어로는 We라고 쓰는 것이다. 원래 신이나 왕을 가리킬 때 복수를 사용했다. 이를 신명복수 또는 royal plural이라 한다. 우선 짐도 구체적인 한 사람이 아니라 계승자인 모든 왕, 존엄[위]이라 해석한다. 다음에는 왕의 이름을 존엄[위]으로 해석하게 된다. 잉글랜드의 문서는 왕 헨리는 왕 에드워드는 같은 식으로 쓰여져 있다. 존엄[위]은 죽지 않는다. 존엄[위]의 연속성은 통일성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며, 종적 종재로 해석된다.

왕은 죽었다… LE ROY EST MORT…

16세기 프랑스에서 유포되었던 왕은 결코 죽지 않는다(Le roi ne meurt jamais)라는 명구는 중세 교회법학자들과 로마법학자들의 낡아빠진 단체론적 학설의 또 다른 변형에 불과했다. 이런 명확한 계보가 주목받지 못했던 것은 이 법률 격언이 생-드니 수도원에서 프랑스 왕들의 매장 때 들리는, 왕은 죽었다! 왕이여 만세!(Le roi est mort! Vive le roi!)와 명백하지만 기만적인 이유로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법률주의적 연속성과 왕조적 연속성의 두 가지 구호가 하나로 결합되고 마침내 혼동된 것은 온당치 못한데, 각각은 고유한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왕은 결코 죽지 않는다가 왕조적인 것은 우연일 뿐인데다, 이 명구는 프랑스 왕의 매장식에 등장하지 않았는데, 생-드니의 장례는 전혀 다른 배경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1420년 트루아 조약으로 프랑스 왕 샤를 6세는 헨리 5세를 프랑스 왕좌의 합법적 추정 계승자로 승인했는데, 1422년 8월 헨리 5세가 뱅센에서 죽었고 아직 운구 중인 동안, 10월 샤를 6세도 죽었다. 잉글랜드 왕 헨리 6세가 프랑스 섭정 자격으로 파리도 돌아왔을 때, 파리 남쪽에서 왕태자 샤를 7세는 왕이여 만세!라는 환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헨리 6세의 권리를 보호하고 선포하기 위해, 헨리 5세가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에 매장된 나흘 후이 11월 11일 샤를 6세가 생-드니에 안치되었을 때, 가장 탁월한 군주 프랑스의 왕 샤를 6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시오라고 마친 후, 잠시 후 상급문장관은 어린 헨리 6세의 권리를 선언했고, 신의 은총으로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왕인 헨리 만세!를 외쳤다. 적수인 왕태자와 그 도당의 요구를 기선제압하기 위해 죽은 왕을 위한 기도는 새 왕에 대한 환호 및 왕의 대관 등에 있던 형식과 결합되었다. 이는 프랑스에서 관례가 되어, 죽은 왕을 위한 기도 후, 짧은 침묵(주기도문 암송할 정도), 새 왕에 대한 환호가 이어졌다. 이는 점차 단축되어, 왕은 죽었다! … 왕이여 만세!라는 간결하고 비개인화된 변형이 1515년 루이 12세의 안장에서 처음 등장했다. 1509년 잉글랜드의 헨리 7세의 죽음에 대한 장례의식은 왕들의 이름을 부르는 중간 정도의 형식으로, 1498년 샤를 8세의 장례식이 모범일 것이다. 개별적 이름의 생략에 따라 존엄[위] 자체는, 그의 구현자들로부터 절단되어, 존엄[위]의 영속은 확실히 두드러지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왕권의 영속을 강력하게 입증했던 왕은 죽었다! 왕이여 만세!라는 외침으로, 이는 왕(K)으로서 왕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격언이 법학회관에서 막 정식화되던 잉글랜드에 소개되었다.(409-412)

프랑스에서 있었던 왕은 죽지 않는다라는 말의 유래를 풀어놓았다. 존엄[위]은 죽지 않는다와 연결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프랑스 왕위를 둘러싼 투쟁과정에서 헨리 6세를 위한 선언이 점점 짧아지더니, 그 유명한 왕은 죽었다! 왕이여 만세!라는 정식으로 요약되면서, 왕권의 영속을 입증하더니, 왕은 죽지 않는다는 격언으로 정식화되어 잉글랜드에 소개된다. 시작도 잉글랜드에서 온 배드포드 공작이 한 것인데, 오랜 시간 프랑스에서 뿌리를 내리다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16세기와 17세기에 불사조를 보여주는 화폐 내지 유사한 제작물은 드물지 않았다. 이 새는 처녀성과 단독성을 의미하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문장으로서, 고독한 불사조, 유일한 불사조로 경축되고 있다. 찰스 1세가 처형된 후 1649년 잉글랜드의 왕당파에 의해 주조된 기념메달의 앞면에는 찰스 1세가 뒷면에는 찰스 2세의 초상 대신 불타는 둥지로부터 올라오는 불사조와 EX CINERIBVS[재로부터]라는 명문이 보인다. 아버지의 재, 군주정의 폐허로부터 불사조로 올라오는 왕의 아들이다. 1643년 루이 13세의 죽음과 루이 14세의 즉위를 공표하기 위한 기념주화의 도안은 태양의 광선이 비추는 가운데 산꼭대기 둥지에 있는 불사조를 보여준다. 불사조와 동일한 방법으로 왕도 기적에 의해 높은 곳에서 우리에게 주어지고, 자기 아버지의 침상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정의의 침상으로 날아오른다고 설명한다. 프랑스 왕은 즉위 거의 직후, 입법자이자 최고 판사로서 고등법원 법정에 등장했고, 정의의 침상[친림법정]를 열었다. 기념메달 도안에 있는 천개가 있는 호화롭게 장식된 왕좌 침상의자는 천개 아래에서 쉬고 있는 법과 왕Lex et Rex을 사람들이 보는, 정의의 침상이라 말해졌다. 여기로부터 지고한 법이 발한다. 왕국은 왕이 인격화되어 있는 법과 정의의 연속성 없이는 아무리 짧은 시간도 남겨져 있을 수 없으며, 새로운 불사조는 즉시 자기 아버지의 죽음의 침상으로부터 자신의 정의의 침상으로 날아올라야 했다. 정의의 관념은 항구성의 상징으로 의미를 가지게 된다.(413-415)

전임자의 죽음과 계승자의 이어받음을 가장 직접적인 연결을 통해서 묘사하는 것이 불사조다. 엘리자베스 여왕도 왕당파도 루이 14세도 이를 활용했다. 이 불사조 도안의 설명은 왕을 아버지의 침상에서 자신의 정의의 옥좌로 날아오른다고 설명한다. 새 왕이 고등법원에서 앉는 정의의 침상이 친림법정이다. 때로 왕의 자리는 침상lit이라는 단어를 쓰며, 침상 모양을 하기도 한다. 침상에 눕는 것은 왕의 특권이기도 했다. 불사조를 통해, 왕의 연속성, 정의의 연속성으로 이어진다.

왕의 장례에서 관 덮개의 네 모서리를 들 특권은 고등법원의 수석재판관들에게 속해 있었는데, 그들은 왕의 인격 및 정의의 행동을 표상하며 이는 왕관의 중요한 구성요소였다. 이들은 은유적으로 국왕 폐하의 참된 초상이자 그들의 정식 의복은 폐하들이 입고 있었던 참된 의복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재판관의 선홍색 의복은 왕의 자의를 반영하며, 어깨의 황금단추라 불린 황금리본이나 비단리본 장식은 황제의 대권의 네 표징 중 하나인 장식죔쇠의 늘어뜨린 장식에서 유래했다. 고위판사들은 왕의 신체의 부분으로 불리기도 했다. 왕의 장례에서 모든 참석자와 행렬 전체는 검은 옷을 입지만, 수석재판관들은 선홍색 법복을 입고, 상복의 착용에서 면제되었는데(1547년 프랑수아 1세의 장례식), 왕관과 정의는 결코 죽지 않기 때문이다. 고위 판사의 상복 면제는 1422년 샤를 6세의 장례와 관련하여 처음 거론되었고, 채색장식화에 보이듯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 세기 후 장 뒤 티에는 왕의 죽음에 의해 정의가 정지되지 않는다는 것을 다채로운 법복으로 입증하는 것이 이들의 의무였다고 논평했다. 그들은 “왕관과 정의는 결코 죽지 않는다”는 이유로 상중이라는 어떤 표시도 내보이지 않았다. 왕(K)으로 결코 죽지 않는 왕의 표상, 그의 신체의 부분, 결코 죽지 않는 정의의 관리자들로 그들의 임무는 결코 중단되지 않았다. 지혜서는 “실로 정의는 영속하고 불멸하다”고 말하며, 아리스토텔레스를 사용하여 발두스는 정의를 죽지 않는 습성으로, 신적이고 불멸하는 것이라 예찬했다. 개별적 왕은 죽을 수 있으나, 주권적 정의를 표상하는 최고위 판사들에 의해 대표되었던 왕(K)은 죽지 않으며, 자연적 신체가 죽었을 지라도 관리들의 매개를 통해서 재판권을 존속시켰다. “프랑스의 최고 법원인 고등법원은 축제일을 지키지 않는다”라고 로마법에 기초했던 프랑스의 법적 격언은 말한다. 이들의 붉은 법복은 왕의 죽음이 결코 죽지 않는 정의에 영향을 미치지 못함을 보여주었다. 고등법원 수석재판관들은 운구할 때 조차 “통상 재판권의 효력은 황제가 죽는 때 조차 살아있다”는 발두스의 논평을 예증하는 활인화처럼 등장했다. 죽은 황제의 존엄[위]은 그의 죽음 이후에도 의지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왕(K)이 죽지 않았는데, 재판관들이 어떻게 상복을 입을 수 있겠는가? 1498년 샤를 8세의 매장의례에서 왕은 죽었다고 외친 후 내려졌다 올라간 것은 검 만이 아니었다. 프랑스의 깃발도 왕이여 만세라는 외침에 다시 올려졌는데, 뒤르페가 설명한 대로 깃발은 결코 죽지 않기 때문이다. 왕(K)으로서의 왕이 지고한 정의 및 프랑스의 깃발과 동일시되는 한, 장례의례는 왕(K)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415-419)

프랑스 왕의 장례식에서 고위판사들은 상복을 입지 않고 붉은 옷을 입어, 왕은 죽었으나 정의는 죽지 않았음을 보였다. 프랑스의 최고법원인 고등법원은 축제일도 없고, 운구할 때 조차 재판권은 효력이 있었다. 왕의 장례에서도 확인되는 죽지 않는 정의는, 왕의 장례에서 죽지 않는 또 한 가지로 이어진다. 그것은 프랑스의 깃발이다. 왕(K)도, 정의도, 프랑스(국가)도 죽지 않는다.

등신상 EFFIGIES

왕(K)의 죽음에도 불구한 왕의 생존이라는 상징적 표현과 상응했던 근대에 고안된 왕의 이중화의 가장 놀라운 특질 하나가 프랑스에서 왕의 등신상에 연결된 의례였다. 알려진 등신상의 기원은 1327년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2세의 장례였는데, 매장까지 3개월의 지연이 있었다. 에드워드 2세의 장례와 함께 관 위에 왕의 등신상 또는 인물상을 두는 관습이 시작되었는데, 왕의 모습과 유사한 인물상 내지 조각상으로 나무나 가죽으로 만들었으며, 대관 의상이나 예복을 덧입혔다. 등신상은 주권의 표징을 진열하고 있다. 그때 이후 왕의 매장에서 등신상이 사용되었는데, 나무 상자안에 있는 채 납으로 만든 관에 봉함되어 있던 왕의 시신은 필멸하며 가시적인 자연적 신체의 비가시적인 안치였다면, 평소에는 비가시적인 그의 정치적 신체는 화려한 왕권의 표장을 지닌 등신상에 의해 가시적으로 진열되었다. 의제적 인격인 즉 등신상이 의제적 인격인 존엄[위]을 의인화하고 있다. 1422년 등신상이 한 번 사용된 후, 프랑스에서 매우 확고해졌다. 뱅센에서 죽었던 헨리 5세의 운구를 위해 등신상이 준비되었는데, 몇 주 후 샤를 6세도 죽었을 때, 베드포드 공작은 등신상을 준비시켰다. 잉글랜드-프랑스의 왕과 프랑스 본토인 왕이 동시에 죽었고 매장되었을 때, 왕의 장례 등신상을 전시하는 잉글랜드의 관습이 프랑스에 이식되었다.(419-421)

K2B 전체에서 가장 기이한 내용이 이 등신상이었다. 그런데 심지어 시작은 잉글랜드에서 였다. 장례가 길어지자 등장했던 등신상. 인격화된 의제적 인격으로 존엄[위]을 의인화한 것이었다. 가시적 신체는 관 속에 가려지고, 비가시적 신체인 존엄[위]은 구체적 모습을 드러냈다. 프랑스에서 한 번 선보인 등신상은 확고하게 뿌리내리게 된다.

그때 이후 왕의 등신상은 프랑스 왕의 장례식에서 문자 그대로 배역을 연기했다. 1538년 프랑스 법학자 샤를 드 그라사이유는 프랑스의 왕은 두 선한 천사를 수호자로 가졌는데, 하나는 사적 인격에 다른 하나는 왕의 존엄[위]에 근거한다고 주장했다. 장 제르송은 왕의 두 생명을 가졌다면, 두 천사를 가져야 했으며, 두 번째 천사가 등신상 주위를 맴돌고 있으리라 추측했다. 존엄[위]의 본성은 통상 궁정과 평의회에서만 설명되었던 반면, 존엄[위]을 가시적으로 만들고 화려한 행렬과 의식 속에서 눈에 드러낸 것은 프랑스인들의 특유한 기교였다. 피에르 그레구아르는 왕 자신이 존엄[위]인 것은 아니지만, 존엄[위]이라는 인물을 연기한다고 말했다. 왕관과 보관, 자의는 필멸하는 인간의 머리와 신체의 외적 장신구로서, 왕권의 표장은 존엄[위]의 신성을 가지고 있으되, 인간을 본성에서 구해내는 것은 아니었다. 신의 대권은 신민들의 유익을 위해 군주에게 외면적으로 나타났으나, 내면적으로 인간적인 것이 존속한다. 동시대인 쿠크는 필멸의 왕은 신이 만든 것이나, 불멸하는 왕(K)은 인간이 만들었다고 인상적으로 말했다. 신민의 유익을 위해 왕권의 표장에 나타난 신의 가시성은 대커리Thackeray의 풍자화를 연상시키는데, 리고의 유명한 루이 14세의 초상화를 두 구성요소, 왕의 초라한 자연적 신체와 왕권의 표장으로 치장한 인형과 병치하여 조롱하고 있다. 신민의 유익을 위해 대권도 장례 등신상에 귀속되었을 수 있으며, 왕의 인격이 겉보기에는 이중화되었으니, 살아있는 왕에서 통합되었던 두 신체들은 왕의 승하에서 가시적으로 분리되었다.(421-423)

프랑스 왕의 장례식에서 등장하는 등신상은 왕의 두 인격과 이를 수호하는 두 천사를 말하게 된다. 신기하게도 여기서 두 신체는 등장하지 않는다. 두 인격의 분리도 뚜렷하지 않다. 오히려 배역을 연기한다는 해석이 등장한다. 왕은 존엄[위]이라는 배역을 연기한다. 뒤에서 EKa가 말하지만, 잉글랜드와 프랑스 정치사상은 해석이 확실히 다르다.

16세기 장례 의례에서 왕의 등신상은 죽은 신체 그 자체의 중요성에 필적했거나 이를 능가했다. 1547년 프랑수아 1세를 위한 의례에서 완전히 전개되었던 등신상의 진열은 새로운 정치 이념들, 왕의 존엄[위]은 결코 죽지 않았다는 점과 죽은 왕의 재판권이 그의 형상 속에서 지속되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이념과 연결되어 있었다. 중세 활인화, 이탈리아의 축제 개선행렬, 고전적 원전에 대한 연구 등에 의해 강화되었는데, 새로운 개선식 요소가 의식에 포함되었다. 시신이 운반되던 관가가 등신상이 탑승했던 개선식의 이륜전차로 대체되었고, 후에는 단독으로 시신과 분리되었다. 이전의 슬퍼하는 양상에 새로운 개선식 요소가 부가되었는데, 미래에 하늘에서 왕과 그리스도의 공동통치를 예상했던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죽은 왕의 불멸하는 왕의 존엄[위], 실체는 후계자에게 전해졌지만 지배자의 등신상에 의해 가시적으로 표상되고 있었던 존엄[위]과의 공동통치를 축하하고 전시하려는 것을 의미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죽은 왕은 존엄[위]이라는 배역을 연기한다. 중세의 왕은 왕관, 왕권의 표장 및 그 복제품과 함께 매장되었으나 이제 그는 나신으로 수의로 감싼 채 초라하고 가엾은 자로 하늘로 들어가고, 왕권의 표장은 왕의 영광의 참된 담지자이자 결코 죽지 않는 존엄[위]의 상징인 등신상을 위해 남겨졌다. 프랑스 장례 의례에서 이중초점이 발전되었는데, 하나는 관 안에 있는 나신 또는 반라의 인간의 비참함을 위해 성직자들에 의해 거행된 교회의 의례이고, 다른 하나는 관 위에 드러난 등신상을 통해 불멸하는 군왕의 존엄[위]을 경축하는 국가의 의례이다. 죽음의 승리와 죽음에 대한 승리가 나란히 보여지고 있었다. 죽은 왕의 지상의 유해와 죽지 않는 존엄[위]의 연속적인 병치를 예증하기 위한 등신상과 연결된 의식적 특징이 있다. 프랑수아 1세의 장례에서 납관되어 있는 실물의 신체가 궁전 집회실에 열흘 정도 전시되었다. 그후에 각본이 변경되어, 시신이 들어있는 관은 작은 집무실에 집회실에는 왕의 실물과 똑같은 등신상이 안치되었고, 황제관이라는 왕관과, 왕홀과 법의 지팡이가 놓여있었는데 다채롭게 장식된 방에는 어떤 애도의 표시도 보이지 않았다. 영예의 침상 양편에 제단이 있고, 끊임없이 미사를 집전했으며 침상의 다리에는 성수를 담은 그릇이 있었는데, 이는 등신상 안에 있으며 수호천사를 가지고 있는 존엄[위]으로부터 악령을 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기간 동안 그 화상은 허수아비가 마치 살아있는 왕인 것처럼 시중을 받았다. 신성한 화상에 식사시중 뿐 아니라 도유, 분향, 성수예식, 세정 등의 의례예식이 베풀어졌으며, 준-종교적인 영예를 성화상으로부터 왕과 군후의 화상으로 이전하는 것은 국가 초상화가 재등장하기 시작했던 세기에, 신적 예배 형식을 아름답게 꾸미는 화상이 국가적[시민적] 규율에 귀속되는 화상들과 동등화되었던 세기에, 지배자의 화상을 법정의 방과 평의회 집회실에 전시하여서 왕의 편재를 상징했던 고대의 관습이 재생되기 위한 기초가 준비되었던 세기에 그리 낯설지 않았을 것이다.(423-427)

등신상과 왕의 시신은 분리된다. 장례행렬에서도 이 둘은 분리되어, 죽은 왕은 마지막으로 등신상을 통해 장엄하게 존엄[위]을 연기한다. 개선식 요소가 장례행렬에 포함된다. 관속의 나신의 시체를 위한 교회의 의례와 군왕의 존엄[위]을 경축하는 국가의 의례라는 두 개의 초점이 존속한다. 현대의 국가 장례에서 느꼈던 그 기묘함이랄까. 심지어 왕궁 집회실에 열흘 간 등신상을 두고, 의례를 행하고, 밥을 먹이고, 시중을 들고, 사람들의 방문을 받기에 이른다. 병풍 뒤에서는 시신이 썩어가고 있었겠지만. 이 시기에 오랫동안 잊혀졌던 고대의 국가초상화 같은 통치자의 화상이 다시 등장했다. 고대가 되돌아오는 방식도 다양했다.

프랑스 왕의 장례 등신상에 대한 숭배는 교회적 기원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헤로디아누스의 『로마사』에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신격화를 기술할 때, 죽은 지배자의 등신상에 베풀어졌던 예식도 기술되었는데, 등신상은 병든 사람처럼 취급되어 7일 동안 의술을 베푼다. 이 책의 프랑스어 판본은 1541년에 처음, 제2판이 1546년에 나왔는데, 프랑수아 1세의 죽음과 매장 1년 전이었다. 프랑수아 1세의 장례에 참여했던 장 뒤 티에는 이에 대한 설명과 함께 콘스탄티누스의 사후 통치에 대한 에우세비우스의 보고와 다른 고대 저자들의 몇몇 구절을 언급한다. 프랑스인의 관습이 고대 로마로부터 존속했다고 믿고 싶었던 프랑스인의 상상력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의식은 왕의 장례의 형태와 의례를 독립적으로 발전시켰는데, 등신상은 잉글랜드의 모범을 따라 도입된 것이며, 그후 화상에 대한 의식은 고대 로마의 유형을 따라 확대되고 장식되었을 것이다. 등신상과 결코 죽지 않는 법률주의적인 존엄[위] 사이의 관계는 동시대 법학자와 정치사상가의 범위 안에 있던 특징의 강조로 이어졌다. 프랑수아 1세의 후계자인 프랑스 왕 앙리 2세가 아버지의 신체에 성수를 뿌리러 왔을 때, 등신상이 아닌 실제 시신이었는데, 새 왕이 화상을 방문할 수 없었던 것은 화상이 존엄[위] 속에서 살아있는 왕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인 듯한데, 승하한 왕이든 살아있는 왕이든 둘 중 단 하나만이 불멸의 존엄[위]을 표상해야 했던 듯하다. 15세기 이후 시신과 등신상 모두가 장려한 장례 행렬에서 행진했을 때, 후계자인 왕은 거기에서 완전히 떨어져 있어야 했고, 상주의 직무는 혈통을 이어받은 군후들 중 하나에게 맡겨야 했으며, 새 왕은 상복을 입는 동시에 입지 않을 수 없고, 존엄[위]이라는 배역을 연기하면서 이를 선임자의 등신상에 허용할 수도 없었으므로, 떨어져 있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장례 행렬 자체는 두 가지 이질적 관념들의, 죽음의 승리와 죽음에 대한 승리의 동시발생을 매우 명료하게 입증했다. 죽은 왕의 신체와 영혼에 결부된 장례와 돌봄에 관한 교회 의례와, 등신상에 의해 상징되고 항구적 영광에 결부된 개선식 같은 국가 의식이 있었다. 1498년 샤를 8세의 장례에서, 그가 죽었던 앙부아즈에서 파리까지 가는 시신만 실은 행렬은 슬퍼하는 외양을 가지고 있었지만, 파리에 입성하자 등신상이 관 위에 위치하고, 뽑은 검이 왕권의 표장과 왕의 표징으로 꾸며진 화상에 앞서고, 결코 죽지 않는 프랑스의 깃발이 펼쳐져 등신상을 따랐으며, 펼쳐진 왕기들이 나란히 행진했고, 왕의 진홍빛 법복을 입은 고등법원의 수석재판관들이 인물상이 놓인 금실로 짠 천의 네 모서리를 가지고 갔는데, 요컨대, 결코 죽지 않는 존엄[위]을 표상하는 등신상이 파리에 입성했는데, 애도의 행렬이라기 보다는 개선식의 강림이었다. 화상과 시신이 분리되어 이송될 때, 애도하는 모든 요소는 관 속의 시체에 개선식적인 화려함은 등신상 주위에 모으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근대의 영구차는 이러한 지적풍토에서 유래했던 듯하며, 르네상스 취향에 의해 해석된 고전고대의 모범으로부터 재도입된 것이다. 1559년 황제 카를 5세의 장례에서 개선식 적인 관념은 황제의 승리를 상기시키는 장식 수레가 장례 행렬에서 행진할 정도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이는 르네상스의 축제 개선행렬과 중세 활인화의 혼합물이었다.(427-431)

프랑스 장례 등신상은 마치 로마를 계승한 것처럼 보이고, 그런 문헌도 마침 출간됐지만 실은 잉글랜드에서 기원한 것이다. 그럼에도 프랑스에서의 발전은 고대 로마를 따랐다. 흥미로운 것은 계승자이자 아들인 후임 왕이 죽은 왕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일단 존엄[위]의 등신상과 죽은 시신의 둘로 존재하는 전임자의 시신에만 제한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을 뿐, 등신상에는 가까이 갈 수 없었는데, 두 존엄[위]이 충돌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례식이란 죽음이 승리하고, 죽음에 대해 승리하는 것인데. 죽음이 승리하는 이 부분에 결코 죽을 수 없는 왕이 접근할 수 없다. 파리로 입성한 개선행렬 같은 왕의 장례에 대한 묘사는 흥미롭지만, 그 이후의 전개는 살짝 소름이 끼치기도 한다.

슬퍼하는 것과 개선식적인 것, 죽은 왕에 대한 애도와 등신상에 대한 고양의 병치는 중세 후기 및 르네상스의 깊은 감정에 반응했던 것임에 틀림없는데, 이는 그 시대 묘소기념물들이 유사한 관념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루이 12세(1515년 사망) 이래 생-드니에 있는 프랑스 왕들의 무덤 기념물은 왕 또는 왕 부처를 생전인 것처럼 진열하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기념물 꼭대기 기도대에 제왕의 의복을 입고 무릎꿇고 있지만, 주랑현관 안에는 죽은 왕이 벌거벗고 눈을 감은 채 인간으로서 비참하게 누워있다. 르네상스 이념의 확산과 함께 벌거벗음이 영웅적 나신이 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는 다른 문제로 15세기 초 고딕 성기의 감성을 지배했던 관념은 아니었다. 적어도 12세기 후반 고인의 누워있는 등신상, 횡와상이 그때까지 관례였던 죽은 사람이 직립한 자세로 서 있는 것을 조각한 석판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고인이 죽은 인간이자 생전의 사회적 지위에 따른 복장 둘 모두로 나타나는 이중 기념물이 13세기 후반과 14세기 동안 산발적으로 발견된다. 최종적으로 14세기 마지막에 해골이나 송장이 중세 미술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고딕 성기 미술의 이 기분 나쁜 주제는 횡와상과 죽은 자의 이중 표상 둘 모두의 묘소적 표상과 결합되었다. 그 결과 부패되어가는 해골 같은 시신으로 누워 있는 죽은 자, 무덤 위에 겹쳐진 횡와상은 종종 무릎 꿇는 또는 앉아있는 인물상으로 변형되었다. 스스로를 송장으로 표현한 최초는 1393년에 죽은 샤를 6세의 시의였던 아르시니였고, 그 보다 약간 이른 라 사라 공 프랑수아 1세의 무덤이 있다. 아르시니의 무덤 10년 후, 1402년 아비뇽에서 라그랑주 추기경의 묘소 기념물이 뒤따랐다. 벌거벗은 해골-같은 시신 및 존엄[위]의 모든 화려함과 표장으로 치장된 추기경 양자 모두의 표상이 중요한 특징이다.(431-433)

유럽 여행이라는 것의 상당수가 성당을 방문하는 것이고 성당에는 수많은 무덤이 있다. 그런 무덤들 중에서 이런 묘소기념물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장례행렬에서 앞-뒤로 배치되던 등신상과 죽은 시신은 묘소기념물에 이번에는 위-아래로 배치된다. 정말 화려한 묘소기념물을 보고 있자면, 묘한 생각이 든다. 그 아래에 있는 피골이 상접한 가련한 모습도 마찬가지이고. 굳이 일부러 동정이나 자비를 얻으려 그려낸 것일까. 신앙의 표상일까.

1443년까지 잉글랜드의 수좌대주교였던 헨리 치첼레는 1424년부터 무덤을 짓기 시작했는데, 벌거벗고 뼈와 가죽 뿐인 초라한 시체와 꼭대기에 장대하게 차려입은 횡와상이 있다. 치첼레는 램버스에서 죽었는데 그의 유해는 200의 준귀족에 의해 호위되는 장엄한 행렬로 캔터베리로 운반되었는데, 관가 위에 주교의 정장과 직무의 모든 표징으로 치장한 등신상이 있었다. 주교 등신상의 진열은 16세기 잉글랜드에서 쇠퇴했지만, 15세기 장례에서 교회 고위인사의 죽은 시체가 화상과 함께 행진했던 것은 흔한 관습이었다. 치첼레 대주교의 묘소기념물은 현실의 자연주의적 표상으로 장례행렬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교 장례에서 등신상이 행진하는 것은 관례였으므로, 이를 따른 더 많은 주교의 무덤을 발견할 수 있다. 무덤 안의 벌거벗은 시신과 무덤 꼭대기의 주교의 정장을 착용한 등신상의 강렬한 대비는 교회의 군후들에게만 제한되었던 것은 아니다. 아룬델의 제7대 백작 존 피츠앨런, 왕 에드워드 4세도 마찬가지다. 무덤 안의 늙어 빠졌고 썩어가는 자연적 신체는, 그 위에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정치적 신체로부터 분리된 채로, 중세 법학자들에 의해서 반복되어 설명된 학설에 대한 예증처럼 나타난다. “존엄[위]을 지고 있는 자는 부패할 수 있다, 그렇지만 존엄[위] 자체는 영원하며, 죽지 않는다.”(433-436)

묘소기념물은 왕의 전유물이 아니었고, 등신상도 마찬가지다. 잉글랜드의 주교들 상당수가 이를 행했다. 대주교가 된 후 10년 정도가 지나면서 죽기 20년 전에 자기 무덤을 지었던 대주교이야기는. 하긴 프리드리히 2세도 보라색 대리석 관을 미리 만들어 두었으니.  사람은 죽어도 존엄[위]은 남는다.

장례의식, 등신상 및 묘소기념물에 대한 여담은 잉글랜드의 왕들을 위해 거행된 의례와 직접적 관련은 없지만, 그럼에도 “두 신체”라는 문제에 대해 적어도 하나의 새로운 양상, 인간적 배경을 밝혀냈다. 이런 후기 고딕 세기들 외에는 육체의 덧없음과 그 육체가 표상한다고 상정했던 존엄[위]의 불멸하는 광채 사이의 불일치를 서방의 정신이 그토록 예민하게 의식한 적이 없었다. 법학자들은 존엄[위]의 불멸성을 발견했지만, 바로 이 발견에 의해서 그들은 필멸하는 재임자의 하루살이 같은 본성을 더욱더 유형의 것으로 만들었다. 묘소의 기념물처럼 썩어가는 시신과 불멸하는 존엄[위]의 기분 나쁜 병치가, 시신을 둘러싼 슬퍼하는 장례수행원들과 등신상의 개선식 장식수레의 날카로운 이분법이, 왕의 두 신체에 관한 법률상 신조들이 최종적 정식화를 이루었던 곳에서, 동일한 토양에서 삼림을 이루었고, 동일한 사상과 감정의 체계에서 비롯되었으며, 동일한 지적 풍토에서 진화되었다. 두 사례 모두, 신이 만든 것으로 본성과 우유성으로부터 말미암은 모든 허약함에 복종하는 필멸하는 신체와 인간이 만든 것으로 불멸하는 유아기와 노년기 및 다른 결함과 우둔함이 전적으로 결여된 또 다른 신체가 대립한다. 요약하면 의제적 불멸성과 인간의 진정한 필멸성의 강렬한 대조에, 르네상스의 개인을 불멸하게 만들려는 욕망을 통해 강화했던 대조에 사람들은 골몰했는데, 지상의 유구aevum에 대한 자랑스런 재정복에는 반대되는 면이 있었다. 동시에 통속화된 불멸성은 자신의 절대적 가치 내지 상상의 가치조차 상실하려 했는데, 새로운 필멸하는 육화를 통해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드러냈던 것이 아닌 한, 실제로 불멸성이기를 중지했기 때문이다. 불멸성에 대한 의제들이 붕괴되면 안되므로, 왕(K)은 죽을 수 없었으며, 죽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왕들은 죽을 지라도, 왕(K)으로서는 결코 죽지 않았다라는 말을 들으며 위로를 받았다. 의제적이고 불멸하는 인격에 대한 신화를 구축하기 위해 너무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법학자들은 자신의 피조물의 약함을 합리화했고 불멸하는 존엄[위]과 그것의 필멸하는 재임자 사이의 외과수술적 구별을 정교하게 설명하고 또 두 개의 신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인격화된 불멸의 존엄[위]은 그 존엄[위]을 담지하고 있었으며 그러면서도 먼지로 돌아가게 될 필멸하는 인간의 쇠약함 없이 행동하거나, 일하거나, 의지를 가지거나, 결정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사람들이 했던 것은, 의제적 불멸성이 그것의 현세적 육화로서의 현실의 필멸하는 인간을 통해서 투명해졌고, 그에 반하여 필멸하는 인간이 만든 새로운 의제적 불멸성을 통해서 다른 세상의 영원한 생명의 것도 아니고 신성의 것도 아닌 참으로 지상적인 정치 제도의 불멸성을 통해서 투명해졌다고 하는 어떤 철학을 구축한 것이다.(436-437)

장례의식, 등신상, 묘소기념물 같은 다소 기괴한 사례들은 존엄[위]을 통해서 불멸과 필멸을 대조시키던 시대적 분위기, 영속과 부패의 끊임없는 대조를 토양으로 하는 시대를 보여주기 위한 설명이다. 존엄[위]으로 불멸성을 말하고 있지만, 이 불멸성은 단독으로 존속할 수 없었다. 필멸자와 결합되어야만 행위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 불멸과 필멸, 존엄[위]과 인격은 날카롭게 분리되지만, 그 현실태는 둘의 결합이다. 두 인격도, 두 신체도 단독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학자들이 관념 속에서 구현해낸 불멸은 현실의 연약한 필멸자를 통해서만 작동하는 것이다. 필멸하는 연약한 인간은 영속하는 불멸을, 정치적 신체를 구축해내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의제적 불멸은 필멸하는 구체적 인간 없이는 무력하고 무의미한 것이다. 이것이 EKa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아닐까.

존엄[위]의 도구인 왕 REX INSTRUMENTUM DIGNITATIS

인간과 그의 존엄[위] 사이를 구별하고 서로를 분리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웠다. 법학자들이 두 신체의 단일성, 즉 불멸하는 것 안에 있는 필멸하는 것, 또 필멸하는 것 안에 있는 불멸하는 것을 과감히 설명할 수 있도록 하는 수단을 산출했던 것은 교회법이자 신학이었다. 왕(K)으로서의 왕은 그의 신민들과 합체되어 있고, 그들은 그와 합체되어 있다는 것은 합체되었다는 불길한 단어에도 불구하고, 유기체론적 개념이나 세속화된 형태의 신비체라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근거로부터 법학자들이 용이하게 도달할 수 있었던 말이었고, 머리로서의 왕과 사지로서의 신민이 함께 왕국의 정치적 신체를 형성했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은유의 한계 안에서는 그럴 듯했던, 복합 신체의 ‘함께’가 머리와 사지로부터 머리만으로 이전되었을 때, 복합적 성격이 왕 만으로, 그의 두 신체로 환원되었을 때, 그것은 다른 문제였다. 랭커스터 공국 사건의 경우 자연적 신체와 정치적 신체는 불리불가능했고, 하나의 인격으로 합체되어 있다. 왕 자신과 존엄[위]과 정치적 신체와의 합체를 의미했던 일원론적 표현형식이 만들어지자 베이컨에 의해서도 자연스럽게 인용되었다. 자연적 신체 안에 단체적 신체가 있고, 단체적 신체 안에 자연적 신체가 있다. 서로 합체되어 있는 함께 왕국의 정치적 신체를 형성하고 있는 신민에 더한 왕(K)은 이제 왕의 자연적 신체와 합체되어 있었던 왕(K)의 정치적 신체에 의해 대체되었다.(437-439)

인간과 존엄[위]을 구별하는 방법이 필요했다. 정치적 신체를 형성하는 머리와 신민은 합체되어 있고, 정치적 신체와 자연적 신체도 분리 불가능한 하나의 인격으로 합체되어 있었다. 이러한 일원론적 표현형식이 만연하게 된다. 인간과 존엄[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매우 오랜 신학적 표현형식의 역사는 극도로 공상적인 잉글랜드 법학자들의 격언에서 최고조에 달했을 것이다. 성직서임권 투쟁이 시작된 1062년 페트루스 다미아니는 로마 교황 안에 있는 왕이, 왕 안에 있는 로마 교황이 발견된다고 주장했다. 두 권력 모두의 신적 모형인 그리스도 안에서 왕권과 사제직이 지위가 하나였고, 두 보편 권력이 상호 합체되었다고 제시하는 우주적 발언이었다. 16세기 프랑스 법률학자들에게 끊임없이 인용되던 마타에우스 데 아플릭티스는 “군주는 국가[공유물] 안에 있고, 국가[공유물]는 군주 안에 있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14세기 루카스 데 페나, 1300년경 이세르니아의 안드레아스를 반복했을 뿐이다. 교회가 고위성직자 안에, 고위성직자가 교회 안에, 군주는 국가 안에, 국가는 군주 안에 있다. 그라티아누스 『교령집』이 받아썼던 3세기 키프리아누스의 서한은 “군주적 주교직”의 정초석인데, 주교는 교회 안에 있고, 교회는 주교 안에 있다고 선언했다. 이런 도치법은 제4복음서에도 등장하며, 아타나시우스로도 거슬러 올라간다. 16세기 잉글랜드의 판사들이 분리시켰던 것을 다시 결합시키려 시도했고, 정치적 신체와 자연적 신체가 서로 합체되어 있었을 때, 교회법 사상 만이 아니라 신학적이며 그리스도론적 언어도 적용했다. 키프리아누스의 군주적 주교직에 관한 학설은 왕이 주교 같이 되었던 성숙기 절대주의 군주정을 위한 모형으로서 나름 적합했다.(439-441)

인간과 존엄[위]의 구별, 군주와 국가의 구별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먼저 용법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그것은 3세기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누스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는 군주적 주교직의 정초를 놓았다고 하는데, 주교는 교회 안에, 교회는 주교 안에, 군주는 국가 안에, 국가는 군주 안에라는 정식을 제시한다. 페트루스 다미아니는 이걸 합치기도 하고. 키프리아누스의 정식은 프랑스에서 끊임없이 인용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프랑스 적인 형태 성숙기 절대주의 군주정으로 이어지게 된다.

잉글랜드 법학자들이 즐겼던 연설화법은 신학적 사상의 또 다른 층위를 시사한다. 법정에서 두 신체의 통합을 논하고, 서로 나눌 수 없는 하나의 인격 안에 두 신체 같은 문구를 사용했을 때, 신조의 언어, 그리스도론적 정의를 위해 유보된 구별을 가져왔다. 12세기 이후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가 실제로 하나의 인격 뿐이지만 두 개의 신체, 즉 자연적 신체와 자신이 머리로 있던 신비한 집단적 신체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설명했다. 두 신체론의 논거와 두 본성론의 논거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았지만 서로 적용가능했으며, 왕의 두 신체를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14세기 발두스는 『조언집』에서 대권과 대권을 담당한 인격 사이를 구별했고, 대권 또는 존엄[위]을 개별적인 왕의 인격에서 구별된 어떤 것으로 논의하면서, 존엄[위]을 주요한 것으로 인격을 도구적인 것으로 인지하고 있으므로, 왕의 행위의 기초는 영속하는 존엄[위]이다 라고 논평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도구에 정통해진 아퀴나스는 다마스쿠스의 요한이라는 매개를 통해 그리스도는 신격의 도구, 인성은 신성의 도구라는 신조에 정통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구원의 경제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획득하여, 아퀴나스는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의 도구이다. 스스로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고 작용을 받기만 하는 생명 없는 도구로서가 아니라 이성적인 혼으로 살아있는 도구로서, 작용을 받는 것이 행위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육화된 그리스도는 자신의 신성divinity이 포함되어 있는 하느님Deity의 생명있는 도구로서 행위한다. 아퀴나스는 세 가지 등급을 구별할 수 있는데, 하느님은 주요 원인[능동인], 필멸하는 인간이 된 그리스도는 결합된 도구였으며 교회의 성사들은 분리된 도구로 타났다. 아퀴나스는 유사한 방식으로 주교 또는 사제를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결합된 도구, 주교는 하느님의 생명있는 도구이자 대리, 성사는 분리된 도구로 나타났다.(441-443)

잉글랜드 법학자들이 두 신체의 통합을 논했을 때, 이는 구별을 전제하는 것이고, 이 구별은 그리스도론적 구별이었다. 두 신체론과 두 본성은 혼용된 느낌도 있다. 발두스가 대권과 인격 사이를 구별하면서, 주요한 것과 도구적인 것, 주된 원인과 도구적 원인에서 가져온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다마스쿠스의 요한, 아퀴나스로 이어지며,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의 도구이며, 생명있는 도구이다. 성사는 분리된 도구로 설명된다.

발두스는 아퀴나스를 염두에 두고 불멸하는 존엄[위]을 주요한 것으로 개별적 지배자를 도구적인 것으로 기술했고, 영속하는 것이었던 존엄[위]은 왕의 행위의 기초(동자, 움직이는 자)였다고 선언했다. 발두스는 왕과 존엄[위] 사이의 관계에 도구성이라는 관념을 시종일관 적용했다. 육화된 그리스도의 도구성에 관련된 발두스에 의한 토마스 학설의 가르침은 명확하고 직접적이다. 개별적 인격과 존엄[위]이, 비록 물체적으로는 아니지만 신비스럽게 영원히 지속하는 지성적인 무엇인 존엄[위]이, 왕 안에서 겹쳐진다. 왕의 인격은 지적이고 공적인 다른 인격의 기관이고 수단이다. 행위를 일으키는 것은 지적이고 공적인 인격 즉 존엄[위]이다. 발두스의 사상에서 하느님과 존엄[위]은 서로 대체할 수 있을 정도이다. 아퀴나스의 신성은 마찬가지로 불멸하는 존엄[위]에 의해 대체되었고, 그리스도의 인성은 필멸하는 왕에 의해 대체되었다. 예전에 신의 손가락이라 불렸던 왕은 법학적으로는 존엄[위]의 손가락이었고, 주교는 하느님의 생명있는 도구라 일컬어졌지만, 왕은 존엄[위]이라 불렸던 의제적이므로 불멸하는 인격의 생명있는 도구로 나타났다. 인성은 존엄[위]의 도구이며, 육화된 왕은 존엄[위]의 또는 왕(K)의 도구이다. 왕의 두 신체의 분리와 결합 모두는 정치적 육화라는 교의, 존엄[위] 또는 정치적 신체의 순수지성적 육화라는 교의, 제1 및 제2의 위격의, 존엄[위]과 왕의 위격적 결합의 세속화된 변형을 산출했다. 이런 일반적 층위로부터 활용할 언어를 차용하여 잉글랜드 법학자들은 자연적 신체와 정치적 신체를 서로 분리할 수 없다거나 두 신체이지만 한 인격일 뿐이라 주장했다. 그러므로 16세기 잉글랜드 왕관의 법학자들이 아타나시우스의 신조와 나란히 놓을 지라도 부끄럽지 않을 왕권성의 신조를 구축하고 있다고 메리틀랜드가 말했을 때, 그는 정확했던 것이다. 실제 법학자들이 확립했던 것은 왕의 그리스도론이었고, 이는 그들이 개별적 왕과 불멸하는 존엄[위] 사이의 관계를 두 신체라는 은유를 수단으로 해서 일관되게 해석하기 시작했을 때 확립되었다.(443-446)

이 도구성 개념은 존엄[위]에 적용된다. 왕은 존엄[위]의 손가락이고, 불멸하는 인격의 생명있는 도구가 된다. 존엄[위]과 인격의 관계는 아퀴나스의 주요 원인과 도구적 원인의 구별을 따라서 철학적 근거를 얻게 되고, 신학의 세속화된 변형을 통해 설명을 이루게 된다. 잉글랜드 법학자들이 구축한 것은 왕의 그리스도론이었다. 그 배경에는 신학이 든든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모든 유럽 국가들에게 역사적으로 공통적이었던 요인들로부터, 왕의 두 신체에 대한 일관된 정치적 법적 이론은 잉글랜드에서만 발전했다. 단독법인이 순수하게 잉글랜드의 고안물이었던 것처럼. 프랑스는 개별적 왕과 불멸하는 존엄[위]이 서로 다르게 명시되는 것을 인식했지만, 개인적 양상과 초개인적 양상 사이의 구별을 흐릿하게 하는 방식으로 절대주의 통치권을 해석했고, 헝가리는 신비적 왕관과 육체적 왕 사이의 구별을 세련되게 수행했지만, 왕이 초-신체로 성장하는 것을 성유물이었던 성 이슈트반 왕관이 막았고, 국헌상의 조건이 가장 불명료하고 복잡했던 독일에서 최종적으로 로마법적-교회법적 존엄[위]이라는 관념을 삼켜버린 것은 인격화된 국가였고, 독일의 군주가 스스로를 적응시켜야만 했던 것은 추상적인 국가였다. 왕의 두 신체에 대한 이론은 대륙에서 결여되어 있었고, 군주 안의 두 인격에 대한 법적 이론을 최초로 발전시킨 이탈리아인 조차 추구하지 않았다. 잉글랜드에서 이 관념은 중세에서 근대 정치사상으로의 과도기에 중요한 발견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왕의 두 신체라는 관념은 잉글랜드 국헌 사상과 실천에서 의회의 가장 이른 시기의 발전과 지속하는 추진력으로부터 절단될 수 없다. 의회는 대표에 의해서 왕국의 살아있는 정치적 신체였다. 잉글랜드의 의회는 의제적 인격이나 표상된 인격이 아니라, 언제나 아주 실제적으로 대표하는 신체였다. 왕국의 정치적 신체는 잉글랜드에서 구체적 의미를 지녔으며, 인위적 추상화, 의제적 인격으로의 변형, 신비적 인격이나 정치적 인격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현세에서 잉글랜드의 정치적 신체의 절대적 현실성, 구체성 및 명백한 가시성 때문에, 머리인 왕과 사지인 영주, 기사, 시민이 의회로 구성되었을 때, 정치적 신체의 육체적 존재와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자기현시 때문에, 머리와 사지라는 유기체론적 은유가 잉글랜드에서 오래 살아남았다. 왕국의 정치적 신체라는 관념은 오래 살아남았다.(446-448)

배경과 여건은 모든 유럽국가에서 동일했지만, 왕의 두 신체라는 정치적 법적 이론은 오직 잉글랜드에서만 발전되었다. 잉글래드에서 이 관념은 중세와 근대 사이의 과도기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프랑스, 헝가리, 독일, 이탈리아 모두와 달리 잉글랜드에서만 존재했던 것은 의회였다. 구체적 의미를 가지고 설명할 필요가 없었던 의회의 절대적 현실성과 그 구성이 잉글랜드에서 정치적 신체라는 관념을 형성시켰다.

신비체라는 오래된 이념은 모든 함의와 함께 수장령(1534)이후 잉글랜드에서 정치적 신체의 몇 가지 국면을 계속해서 결정했다. 의회가 허약했던 시대에 정치적 신체라는 관념은 왕 혼자 만을, 전체를 위한 부분으로 지시하도록 되어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의 신비체와 교회의 신비체가 교회적 영역에서, 왕관, 왕국, 왕(K)으로서의 왕, 정치적 신체 같은 관념은 세속적 영역에서 교체할 수 있게 사용되었다. 왕이 실제로 잉글랜드 국교회라는 신비체의 머리가 되었다는 사실이 이러한 애매모호함을 증가시켰고, 이는 왕의 두 신체를 강조하는 용어법의 특수성에 뿌리가 되었다. 보다 기술적 의미에서 왕관과 존엄[위]의 융합이 단체로서의 왕 또는 단독법인으로서의 왕이라는 법적 의제의 기저에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중세 잉글랜드에서 왕관은 자주 복합적 신체로 해석되었다. 동일한 의회의 신분들은 왕국의 정치적 신체 및 신비체, 국가적[시민적] 신체 및 신비체를 형성했다. 왕관과 왕국의 정치적 신체는 빈번하게 주요 구성요소들을 공통으로 소유하고 있었다. 왕관과 정치적 신체의 유기체적-단체론적 개념과 함께, 존엄[위]의 개념이, 계승에 의한 단체의 개념이 간섭했다. 왕관은 정치적 신체의 모든 구성원을 포괄했기에 단체적인 것으로 나타날 수 있었지만, 존엄[위]은 왕관의 현재의 담당자 안에서 유類적 전체, 즉 왕의 존엄[위]의 과거와 미래의 재임자를 포괄하는 불사조 같은 한 사람으로 된 단체였다. 잉글랜드 법학자들은 왕관의 단체적 신체와 존엄[위]의 초-개인적 인격성 사이에 뚜렷한 구별을 이루지 못했고, 왕관과 왕의 존엄[위]이라는 표현형식에 유혹되어 각각을 정치적 신체와 동등하게 여겼다. 말하자면, 단체론적 학설의 두 가지 다른 개념을, 유기체적이고 계승적인 것을 융합했으며, 이로부터 왕의 정치적 신체와 단독법인으로서의 왕 이 둘 모두가 비롯되었다. 이는 메이틀랜드가 교구주임사제parson이라는 인격의 모범으로 잉글랜드의 단독법인을 도출했을 때와 모순되지 않는다. 그가 주임사제화personified되어 있던 왕에 대해 농담했을 때, 문제의 근원과 마주했는데, 주임사제parson와 왕의 공통기초는 존엄[위]이었을 것이다. 왕과 자신의 정치적 신체의 결합은 대수도원장 및 주교와 비견할만 했다. 쿠크가 왕의 정치적 신체를 설명하기 위해 대수도원장의 신비체를 언급했을 때, 신비체와 존엄[위] 사이의 혼동을 언급했을 뿐이다. 블랙스톤이 로마인들로부터 이끌어 낸 법인이라는 이념이 잉글랜드 국민의 천재성에 따라 세련되게 개선되었다는 것과 그것이 로마의 법률가들은 알지 못했던 단독법인이었다는 자랑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448-450)

수장령과 함께 왕이 신비체의 머리가 되면서, 왕의 두 신체를 더욱 강조하게 되었다. 교회의 신비체와 왕국의 신비체가 서로 교차하게 되면서 잉글랜드에서 두 신체에 대한 설명이 더 간명해지게 된다. 이중적 설명이 필요없다. 이것이 단독법인으로서의 왕이라는 후일에 분명해지는 관념을 형성하게 되었다. 잉글랜드에서는 성속의 머리가 하나였기에 가능했을는지 모른다. 훗날의 메이틀랜드가 말했던 주임사제화, 블랙스톤이 말하는 잉글랜드인의 천재성이 모두 이를 가리킨다. 왕의 두 신체는 잉글랜드의 독창적인 발명품이었다.

2025. 12. 29.

* 괄호 안의 숫자는 책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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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H. 칸토로비치, 『왕의 두 신체』(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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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체로서의 왕관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1278년 에드워드 1세가 의회를 개회하는 모습인데. 좌우에 스코틀랜드와 웨일즈의 군주가 앉아있으나, 이는 상상일 뿐이다. 16세기의 그림이다. 여기서 왕관이라고 옮긴 말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