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H. 칸토로비치, 『왕의 두 신체』(7-2).

통합체로서의 왕관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1278년 에드워드 1세가 의회를 개회하는 모습인데. 좌우에 스코틀랜드와 웨일즈의 군주가 앉아있으나, 이는 상상일 뿐이다. 16세기의 그림이다.

여기서 왕관이라고 옮긴 말은 라틴어로는 corona, 영어로는 crown이다, diadem은 보관. 지금도 영국의 많은 제도에서는 crown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내가 아는 한도에서 가장 최근에 생긴 것이 1986년에 생긴 Crown Prosecution Service인데, 흔히 왕립기소청으로 옮긴다. 왕립이지만,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기소만을 담당한다. 스코틀랜드는 Crown Office and Procurator Fiscal Service라고 부른다. 이는 왕실[왕립] 및 지방기소청이라고 한다. 1986년에 잉글랜드에서 기소청이 생기기 전에는 기소 여부를 경찰이 결정했다. 경찰이 기소여부를 결정한 후, KC(King’s Counsel) 즉 법정변호사에게 공판을 의뢰하는 식이었다. 한국과는 정반대로 경찰에게 모든 권한이 독점되었기 때문에, 기소가 비교적 이른 시기에 분리되었던 스코틀랜드의 사례를 따라 기소와 수사를 분리하게 된 것. 국내 인터넷을 뒤져보면, 왕립검찰청, 스코틀랜검찰청 등으로 되어있지만, 이건 주로 검사들이 해외사례를 연구해서 국내에 보고하면서, 해당 국가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채 사용한 말들이다. 또는 검찰권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이든지. 스코틀랜드에서는 20세기 초에 기소를 담당하는 지방검사Procurator Fiscal을 공무원화해서, 기소와 수사를 분리한 바 있다. 연합왕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제도가 다르다. prosecutor가 아닌 procurator에 fiscal이 붙은 것을 보라.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국고나 재정이 국가사무를 상징하는 용어로 사용되는 것이다. COPFS는 그래서 인지, 무주물이나 매장보물도 관할한다. 앞에 Crown이 붙는 것은 형사소송법원이 사실상 왕립법정이고, 형사소송을 제기하는 주체가 왕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미국에서는 형사소송제기 주체가 people 즉 인민이다. 쓸데없이 긴 여담인데. 그렇기 때문에, 현대 영국의 제도나 문헌을 해석할 때, Crown은 흔히 왕실, 왕립, 왕위 등으로 옮기며, 드물게 국왕폐하로 옮기는 경우도 있다. 고문서를 해석할 때, Crown이 등장하면, 현대 한국어의 어감에 맞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웨스트민스터 헌장 같은 것이 대표적. 이런 것은 단지 문맥을 매끄럽게 하기 위한 해석일 뿐, 영국 또는 잉글랜드에서 왕관이 어떠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사상적으로 전개되어 왔는지를 고려하지 않은 것인데. K2B를 읽으면 알게되지만, 오랫동안 왕국 체제를 구축하고 발전시켜온 서유럽의 경우, 왕과 왕권을 가리키는 언어가 다채롭다. 고려, 조선을 지내온 한국어도 분명 그러할 텐데, 단절이 너무 커서. 그래서 여기서는 Crown을 한국어가 가져오는 어감에도 불구하고, 왕관으로 옮기는 것이다. 왕관이라는 구체적인 실체성과 여기에 연결되어 있는 왕국의 권리 및 왕국의 토지, 훗날의 영토를 포괄하는 의미로. 중세 성기와 후기에 사용되는 의미에서 Crown을 왕관이외의 다른 말로 옮길 방법은 없는 것 같다. 심지어 위의 그림이 보여주듯, 왕관은 상상의 정치적 통합체를 의미하기에 이른다. 참고로 그리스도교에서 흔히 사용하는 면류관체로서의 왕관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1278년 에드워드 1세가 의회를 개회하는 모습인데. 좌우에 스코틀랜드와 웨일즈의 군주가 앉아있으나, 이는 상상일 뿐이다. 16세기의 그림이다. 여기서 왕관이라고 옮긴 말은 라틴어로는 corona, 영어로는 crown이다, diadem은 보관. 지금도 영국의 많은 제도에서는 crown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내가 아는 한도에서 가장 최근에 생긴 것이 1986년에 생긴 Crown Prosecution Service인데, 흔히 왕립기소청으로 옮긴다. 왕립이지만,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기소만을 담당한다. 스코틀랜드는 Crown Office and Procurator Fiscal Service라고 부른다. 이는 왕실[왕립] 및 지방기소청이라고 한다. 1986년에 잉글랜드에서 기소청이 생기기 전에는 기소 여부를 경찰이 결정했다. 경찰이 기소여부를 결정한 후, KC(King’s Counsel) 즉 법정변호사에게 공판을 의뢰하는 식이었다. 한국과는 정반대로 경찰에게 모든 권한이 독점되었기 때문에, 기소가 비교적 이른 시기에 분리되었던 스코틀랜드의 사례를 따라 기소와 수사를 분리하게 된 것. 국내 인터넷을 뒤져보면, 왕립검찰청, 스코틀랜검찰청 등으로 되어있지만, 이건 주로 검사들이 해외사례를 연구해서 국내에 보고하면서, 해당 국가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채 사용한 말들이다. 또는 검찰권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이든지. 스코틀랜드에서 20세기 초에 기소를 담당하는 지방검사Procurator Fiscal을 공무원화해서, 기소와 수사를 분리한 바 있다. 연합왕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제도가 다르다. prosecutor가 아닌 procurator에 fiscal이 붙은 것을 보라.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국고나 재정이 국가사무를 상징하는 용어로 사용되는 것이다. COPFS는 그래서 인지, 무주물이나 매장보물도 관할한다. 형사소송법원이 사실상 왕립법정이고, 형사소송을 제기하는 주체가 왕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미국에서는 형사소송제기 주체가 people 즉 인민이다. 쓸데없이 긴 여담인데. 그렇기 때문에, 현대 영국의 제도나 문헌을 해석할 때, Crown은 흔히 왕실, 왕립, 왕위 등으로 옮기며, 드물게 국왕폐하로 옮기는 경우도 있다. 고문서를 해석할 때, Crown이 등장하면, 현대 한국어의 어감에 맞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웨스트민스터 헌장 같은 것이 대표적. 이런 것은 단지 문맥을 매끄럽게 하기 위한 해석일 뿐, 영국 또는 잉글랜드에서 왕관이 어떠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사상적으로 전개되어 왔는지를 고려하지 않은 것인데. K2B를 읽으면 알게되지만, 오랫동안 왕국 체제를 구축하고 발전시켜온 서유럽의 경우, 왕과 왕권을 가리키는 언어가 다채롭다. 고려, 조선을 지내온 한국어도 분명 그러할 텐데, 단절이 너무 커서. 그래서 여기서는 Crown을 한국어가 가져오는 어감에도 불구하고, 왕관으로 옮기는 것이다. 왕관이라는 구체적인 실체성과 여기에 연결되어 있는 왕국의 권리 및 왕국의 토지, 훗날의 영토를 포괄하는 의미로. 중세 성기와 후기에 사용되는 의미에서 Crown을 왕관이외의 다른 말로 옮길 방법은 없는 것 같다. 심지어 위의 그림이 보여주듯, 왕관은 상상의 정치적 통합체를 의미하기에 이른다. 참고로 그리스도교에서 흔히, 주로 개신교가 사용하는 순교자의 면류관이라는 용어는 동아시아의 황제나 국왕이 사용하던, 사각의 판에 구슬을 꿴 발을 달고 있는 바로 그 관을 가리킨다. 이런 용어들 역시도 모두 crown의 번역어이고, 공동번역에서는 일부 왕관으로 옮겼던 것을, 오늘날의 카톨릭 성경은 화관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물론 구약 번역에서 면류관도 일부 사용한다. 한국어로는 상황에 따라 비슷하지만 다른 여러가지 말을 사용하는데, 서양어로는 하나의 단어인 경우가 적지 않다. 마치 오래전 4도로 인쇄할 때, 초점이 흐트러져서 어지럽게합체로서의 왕관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1278년 에드워드 1세가 의회를 개회하는 모습인데. 좌우에 스코틀랜드와 웨일즈의 군주가 앉아있으나, 이는 상상일 뿐이다. 16세기의 그림이다. 여기서 왕관이라고 옮긴 말은 라틴어로는 corona, 영어로는 crown이다, diadem은 보관. 지금도 영국의 많은 제도에서는 crown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내가 아는 한도에서 가장 최근에 생긴 것이 1986년에 생긴 Crown Prosecution Service인데, 흔히 왕립기소청으로 옮긴다. 왕립이지만,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기소만을 담당한다. 스코틀랜드는 Crown Office and Procurator Fiscal Service라고 부른다. 이는 왕실[왕립] 및 지방기소청이라고 한다. 1986년에 잉글랜드에서 기소청이 생기기 전에는 기소 여부를 경찰이 결정했다. 경찰이 기소여부를 결정한 후, KC(King’s Counsel) 즉 법정변호사에게 공판을 의뢰하는 식이었다. 한국과는 정반대로 경찰에게 모든 권한이 독점되었기 때문에, 기소가 비교적 이른 시기에 분리되었던 스코틀랜드의 사례를 따라 기소와 수사를 분리하게 된 것. 국내 인터넷을 뒤져보면, 왕립검찰청, 스코틀랜검찰청 등으로 되어있지만, 이건 주로 검사들이 해외사례를 연구해서 국내에 보고하면서, 해당 국가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채 사용한 말들이다. 또는 검찰권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이든지. 스코틀랜드에서 20세기 초에 기소를 담당하는 지방검사Procurator Fiscal을 공무원화해서, 기소와 수사를 분리한 바 있다. 연합왕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제도가 다르다. prosecutor가 아닌 procurator에 fiscal이 붙은 것을 보라.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국고나 재정이 국가사무를 상징하는 용어로 사용되는 것이다. COPFS는 그래서 인지, 무주물이나 매장보물도 관할한다. 형사소송법원이 사실상 왕립법정이고, 형사소송을 제기하는 주체가 왕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미국에서는 형사소송제기 주체가 people 즉 인민이다. 쓸데없이 긴 여담인데. 그렇기 때문에, 현대 영국의 제도나 문헌을 해석할 때, Crown은 흔히 왕실, 왕립, 왕위 등으로 옮기며, 드물게 국왕폐하로 옮기는 경우도 있다. 고문서를 해석할 때, Crown이 등장하면, 현대 한국어의 어감에 맞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웨스트민스터 헌장 같은 것이 대표적. 이런 것은 단지 문맥을 매끄럽게 하기 위한 해석일 뿐, 영국 또는 잉글랜드에서 왕관이 어떠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사상적으로 전개되어 왔는지를 고려하지 않은 것인데. K2B를 읽으면 알게되지만, 오랫동안 왕국 체제를 구축하고 발전시켜온 서유럽의 경우, 왕과 왕권을 가리키는 언어가 다채롭다. 고려, 조선을 지내온 한국어도 분명 그러할 텐데, 단절이 너무 커서. 그래서 여기서는 Crown을 한국어가 가져오는 어감에도 불구하고, 왕관으로 옮기는 것이다. 왕관이라는 구체적인 실체성과 여기에 연결되어 있는 왕국의 권리 및 왕국의 토지, 훗날의 영토를 포괄하는 의미로. 중세 성기와 후기에 사용되는 의미에서 Crown을 왕관이외의 다른 말로 옮길 방법은 없는 것 같다. 심지어 위의 그림이 보여주듯, 왕관은 상상의 정치적 통합체를 의미하기에 이른다. 참고로 그리스도교에서 흔히 사용하는 면류관체로서의 왕관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1278년 에드워드 1세가 의회를 개회하는 모습인데. 좌우에 스코틀랜드와 웨일즈의 군주가 앉아있으나, 이는 상상일 뿐이다. 16세기의 그림이다. 여기서 왕관이라고 옮긴 말은 라틴어로는 corona, 영어로는 crown이다, diadem은 보관. 지금도 영국의 많은 제도에서는 crown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내가 아는 한도에서 가장 최근에 생긴 것이 1986년에 생긴 Crown Prosecution Service인데, 흔히 왕립기소청으로 옮긴다. 왕립이지만,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기소만을 담당한다. 스코틀랜드는 Crown Office and Procurator Fiscal Service라고 부른다. 이는 왕실[왕립] 및 지방기소청이라고 한다. 1986년에 잉글랜드에서 기소청이 생기기 전에는 기소 여부를 경찰이 결정했다. 경찰이 기소여부를 결정한 후, KC(King’s Counsel) 즉 법정변호사에게 공판을 의뢰하는 식이었다. 한국과는 정반대로 경찰에게 모든 권한이 독점되었기 때문에, 기소가 비교적 이른 시기에 분리되었던 스코틀랜드의 사례를 따라 기소와 수사를 분리하게 된 것. 국내 인터넷을 뒤져보면, 왕립검찰청, 스코틀랜검찰청 등으로 되어있지만, 이건 주로 검사들이 해외사례를 연구해서 국내에 보고하면서, 해당 국가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채 사용한 말들이다. 또는 검찰권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이든지. 스코틀랜드에서 20세기 초에 기소를 담당하는 지방검사Procurator Fiscal을 공무원화해서, 기소와 수사를 분리한 바 있다. 연합왕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제도가 다르다. prosecutor가 아닌 procurator에 fiscal이 붙은 것을 보라.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국고나 재정이 국가사무를 상징하는 용어로 사용되는 것이다. COPFS는 그래서 인지, 무주물이나 매장보물도 관할한다. 형사소송법원이 사실상 왕립법정이고, 형사소송을 제기하는 주체가 왕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미국에서는 형사소송제기 주체가 people 즉 인민이다. 쓸데없이 긴 여담인데. 그렇기 때문에, 현대 영국의 제도나 문헌을 해석할 때, Crown은 흔히 왕실, 왕립, 왕위 등으로 옮기며, 드물게 국왕폐하로 옮기는 경우도 있다. 고문서를 해석할 때, Crown이 등장하면, 현대 한국어의 어감에 맞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웨스트민스터 헌장 같은 것이 대표적. 이런 것은 단지 문맥을 매끄럽게 하기 위한 해석일 뿐, 영국 또는 잉글랜드에서 왕관이 어떠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사상적으로 전개되어 왔는지를 고려하지 않은 것인데. K2B를 읽으면 알게되지만, 오랫동안 왕국 체제를 구축하고 발전시켜온 서유럽의 경우, 왕과 왕권을 가리키는 언어가 다채롭다. 고려, 조선을 지내온 한국어도 분명 그러할 텐데, 단절이 너무 커서. 그래서 여기서는 Crown을 한국어가 가져오는 어감에도 불구하고, 왕관으로 옮기는 것이다. 왕관이라는 구체적인 실체성과 여기에 연결되어 있는 왕국의 권리 및 왕국의 토지, 훗날의 영토를 포괄하는 의미로. 중세 성기와 후기에 사용되는 의미에서 Crown을 왕관이외의 다른 말로 옮길 방법은 없는 것 같다. 심지어 위의 그림이 보여주듯, 왕관은 상상의 정치적 통합체를 의미하기에 이른다. 참고로 그리스도교에서 흔히, 주로 개신교가 사용하는 순교자의 면류관이라는 용어는 동아시아의 황제나 국왕이 사용하던, 사각의 판에 구슬을 꿴 발을 달고 있는 바로 그 관을 가리킨다. 이런 용어들 역시도 모두 crown의 번역어이고, 공동번역에서는 일부 왕관으로 옮겼던 것을, 오늘날의 카톨릭 성경은 화관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물론 구약 번역에서 면류관도 일부 사용한다. 한국어로는 상황에 따라 비슷하지만 다른 여러가지 말을 사용하는데, 서양어로는 하나의 단어인 경우가 적지 않다. 마치 인쇄할 때, 초점이 흐트러져서 이중삼중의 잔상이나 겹침이 발생하는 듯한 그런 느낌이랄까. 이게 특히 종교와 학계가 동일한 시대나 영역을 연구할 때, 발생한다. 종교는 교파별로 다르고, 주로 역사나 철학 등 학계와도 다른, 일종의 주도권 다툼이나 동물의 영역표시 같은 느낌이다. 아무튼 Crown/corona는 왕관으로.

Ernst H. Kantorowicz, The King’s Two Bodies: A Study in Mediaeval Political Theology,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57, “VII. The King Never Dies, 2. The Crown as Fiction.”

제7장 왕은 결코 죽지 않는다

2. 의제로서의 왕관

가시적 왕관과 비가시적 왕관 CORONA VISIBILIS ET INVISIBILIS

로마제국의 전성기였던 고대에 자신의 보관으로 이루어진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왕관을 지녔던 황제는 신에 의해서 부여된 “불가시적인” 왕관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고 발두스는 전했다. 그는 로마법이 아닌 왕국의 법에 따라 생득권에 의해 아들이 아버지를 승계하는 군주국에서도 두 개의 왕관을 구별했다. 가시적이며, 물질적이고, 외견상의 황금 고리 혹은 보관이 있는데 군주는 대관에서 이를 수여받고 치장한다. 불가시적이고 비물질적 왕관, 정치적 신체의 통치를 위해 불가결한 왕의 모든 권리와 특권을 망라하는 왕관이 있는데, 이는 영속적이며 신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전해지거나 왕조적 상속의 권리에 의해 전해졌다. 불가시적 왕관에 대해서 왕관은 죽지 않는다Corona non moritur라고 말할 수 있다.(336-337)

보석 장식을 달고 있는 보물이 아니라 왕국의 권리를 의미하는 왕관의 특성을 처음 표현하는 말은 비가시성이었다.

불가시적 왕관의 항구성과 왕조 승계의 절개 없는 연속성을 확증하기 위해 발두스는 사법의 논거를 공법에 적용했다. 그는 유스티니아누스의 『법학제요』 중 상속에 대한 법률은 “아버지가 사망하자마자, 소유권은 이어진다”를 인용하는데, 아쿠르시우스는 이에 대해 “법률의 의제에 따르면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다”라고 해설했다. 아버지와 아들의 단일성, 전임자와 승계자의 동일성에 대한 복잡한 관념은 상속에 관한 법률도 기반으로 하며, 죽는 왕과 새로운 왕은 상속의 실체를 표현하는 불가시적이고 영속적인 왕관과 관련하여 하나가 되었다. 이는 인격화된 직무 또는 존엄[위]과 관련하여 계승자와 전임자가 동일한 인격으로 나타났던 “승계에 의한 단체”와 왕조를 기술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에 가깝다. 법학적으로 비물질적이고 불가시적 왕관을 인격화하는 것은, 왕관의 연속성와 세습군주정의 연속성이 연계되고, 개인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인격의 변화 없이 왕조적 연속성에 연계되어 있는 경우에 가능하다.(337-338)

출발은 사법 즉, 상속의 권리였다. 로마법이란 실제, 공법 보다는 사법 위주다. 그래서 훗날 게르만주의자들이 거부하기도 했다. 상속을 기반으로 하여, 승계에 의한 단체인 앞에서 말한 왕조가 그 상속의 실체적인 모습으로 왕관으로 드러나게 된다. 한국어에서는 아주 익숙하지 않은 표현이다. 동아시아와 조선왕조에서 이런 식으로 주고받은 것은 차라리 대보 즉 옥쇄 또는 어쇄였다. 그럼에도 어디까지나 상징일 뿐이다. 서방에서 왕관은 상징을 넘어서는데.

하지만 비물질적 왕관의 개념은 법률 사상과 거의 관련 없는 층위에서 기원했다. 13세기 프랑스의 시인 리시에Richier는 랭스와 최초의 주교였던 성 레미기우스를 칭송하는 장편시에서 대성당[주교좌]의 교회보물 중 하나인 거룩향 향유가[프랑스 왕에게 도유했던] 담겨있는 작은 유리병에 대해 논하는데, 천상의 향유는 왕관을 수호하기 위해 하늘 높은 곳에서 보내졌고, 하느님이 왕과 왕관 및 왕국을 축성했으며, 프랑스인들은 성유물 보다 왕관을 사랑해야 했는데, 왕관을 수호하기 위해 살해당한 자들이 내세에 구원받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예수의 가시관의 가시 하나를 포함하여 성유물이기도 했던 프랑스 왕의 물질적 왕관을 말하는지, 추상적 정치적 왕관에 대해 말하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이 경우 물질적 왕관과 비물질적 왕관은 서로 융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헝가리의 첫번째 그리스도교 왕이었던 성 이슈트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가시적 숭배 대상과 불가시적 관념 사이의 경계선은 흐릿했다. 왕관의 수호와 왕관의 순교자에 대한 천상의 보상은 표징[왕관]을 프랑스의 조국 대신에 두게 되었다.(338-340)

언제나 그렇듯 먼저는 종교적인 정당성을 확보해야 한다. 프랑스와 헝가리에서는 왕관이 실제 성유물이기도 했다. 축성의 단계에서 아주 높은 지위에 있고. 그 과정에서 물질적 왕관에는 비물질적 가치들이 부가되게 된다.

프랑스 왕의 대관식 성당인 랭스 대성당의 성당참사회는 1179년 필리프 2세로부터 어떤 봉건 역무도 부담할 의무가 없었던 참사회원들에게 ‘짐의 머리와 함께 왕국의 왕관을 수호하기 위해서’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을 받았다. 이는 왕국 전체의 상징으로서 왕관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왕관과 왕국을 수호하기 위해서 왕에게 자신들이 군사적 역무를 부담할 의무를 인정했다. 이는 1150년 생-드니의 쉬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왕관이 국고라는 의미에서 사용되었던 대단히 많은 칙허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왕관이 일반적이라는 것에는 작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랭스의 참사회원도 쉬제도 필리프 2세도, 왕관은 왕과 왕국 둘 모두와 별개였다. 왕관은 왕과 왕국 둘 모두로부터 분리되지 않았지만 달랐고, 완전히 동일하지 않는데도 공통적인 무엇이었다. “머리와 왕관”이라는 문구에서 왕관이라는 단어는 왕의 육체적 신체에 무엇인가를 추가해, 자연적 신체 이상의 것을 의미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왕국과 왕관”은 왕국의 영토적 양상을 제거하고 조국의 정서적 가치도 포함된 정치적 성격을 강조하는 데 도움이 되었는데, “왕관과 왕국은 공통의 조국이다” 자크 드 레비니가 인용한 법학자들의 견해였다. 왕의 순수한 자연과 영토의 순수한 자연과는 대조적으로 왕관이 추가되면 왕과 왕국 모두가 공유했던 정치적 초자연이나, 정치적 신체를 나타냈다. 왕관은 영속성으로 인해 지리적인 왕국이나 육체적 왕보다 우월했고 동시에 왕조의 연속성 및 정치적 신체의 항구성과 대등한 것이었다.(340-342)

12세기 프랑스에서 왕관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심지어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주교좌 성당참사회에 군비를 다시 말해 봉건적 의무인 공세를 요구하기에 이른다. 이때 정당화의 조건으로 왕과 함께 왕관이 제시되기에 이른다. 여기서 칸토로비치는 초자연이나 정치적 신체의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한다. 성당참사회를 실제로 구성하는 인물들은 고위성직자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낼 의무가 없던 공세를 바치기에 이른다. 갈리아교회로 나아가는 과정이었던 것.

국고의 왕관 THE FISCAL CROWN

잉글랜드에서 왕관은 생-드니의 쉬제의 특징이었던 애국적인 감수성을 갖지 않았으며, 행정과 법률의 영역에 속했다. 1130년 즈음에 헨리 1세의 런던 시 칙허장에서 “왕관 소송”이라는 문구에서 등장한다. 헨리 1세 시대의 재무부 기록부는 왕관소송의 관리관까지 언급한다. 동시에 왕관이 보다 국고적 의미에서 왕령지를 언급하는 것으로 사용된다. 헨리 2세는 왕관에 속해 있던 마을, 성곽, 장원을 회복[양도철회]시켰고, 순회재판관들에게 왕과 그의 왕관에 속하는 재산을 돌보라 권고했다. 헨리 2세는 왕의 권리와 왕관의 권리의 실제적 차이를 만들지 못했지만, 그는 봉건적 종속물에 상응하는 토지로부터 별개인 행정상의 독립체로서 왕령지를 구축하여, 국고의 기초를 놓았고, 13세기에 “공통의 유익을 위한 것”으로서 왕의 인격에서 분리되었다. 왕관에 속하는 독립체로서 왕령지는 관리들로 하여금 더 주의 깊게 왕의 권리와 왕의 권리를 구별하도록 촉구했다. 1077년 『재무부 대화록』은 왕관에 속하는 것을 보유하는 직속봉신들과 제후로서 권리에 의해 왕으로부터 기사의 봉토를 보유하는 이들 사이를 구별하는데, 새로운 것도 아니었다. 왕국의 토지는 왕관에 속한 것이 되었고, 그와 함께 왕관이라는 관념은 왕에 대립하게 되었다.(342-344)

잉글랜드에서 왕관은 왕관 소송에서 등장하는 데, 왕관은 국고와 연결되고, 그런 의미에서 왕령지를 뜻하기도 한다. 왕령지는 왕의 인격에서 분리된 왕관에 속하는 독립체였다. 이렇게 되면, 왕관과 왕이 대립할 계기가 수립된다. 전임자가 양도한 토지를 회복하라는 헨리 2세의 명령도 성립될 근거가 된다. 아버지가 양도한 토지를 아들이 되찾는 길은 사오는 길밖에 없지 않은가? 하지만 국고는 그렇지 않았다.

12세기 말 왕관과 왕 사이의 구별은 법률 사상의 영향 하에서 합리화되기 시작했다. 왕이 원고가 되었던 소송들도 보다 이전의 법률집에 등재되었다. 글랜빌의 논고 『잉글랜드 왕국의 법률과 관습에 대하여』에서 왕관은 단순히 왕의 동의어가 아니었으며, 왕관은 공적 영역과 공통의 유익을 가리켰다. 그가 인용하는 교회 법정에 대한 영장은 왕관 단독에만 속하는 소송이 아니라 왕관 및 왕의 존엄[위]에 속하는 소송으로 다루고 있었다. 브랙턴도 교회 법정과 관계가 걸려있을 때, 변함없이 왕관과 왕의 존엄[위] 모두를 언급했다. 그리스도교 법정이나 세속 법정 중 어느 관할인지에 관한 모든 소송은 선험적으로 왕관의 소송이었는데, 상서성Chancery은 이런 사건이 왕의 직무 또는 왕으로서의 존엄[위], 그의 주권 또는 왕권성royalty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교황의 상서국이 성좌와 교황직 사이를 구별했던 것과 같았다.(344-345)

EKa는 고문서고를 뒤지면서 옛 문서철에 기록된 영장의 구절을 살피는데 여기서, 왕관은 다음 절에서 말할 존엄[]과 연결되어 가면서 언급된다. 왕관이라는 단어의 단독 사용에 그치지 않고, 어떤 맥락에서 어떤 단어와 결합되는지가 그의 주 관심사이다.

한편 왕관과 왕의 영향권은 명확하게 표시되지 않았는데, 순회재판Iter 같은 “혼합적 성격”의 문서에서 봉건적 권리가 군왕의 권리와 산재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지만, 다른 경우에는 왕에게 일시적으로 속하는 사물이 왕관에 영구적으로 속하는 사물과 공동으로 취급되고 있었다. 정치체를 중심으로 사고하면서 단체 개념에 정통했던 브랙턴은 무엇이 왕에게 도움이 되고, 무엇이 공적 유익과 정치체 전체를 위해 양도불가능하게 왕관에 속했던 것인지에 대한 난제를 훌륭하게 해명했다. 스티븐 왕의 혼란과 손해를 회복하려 했던 헨리 2세 치세에도 법률적 용어는 행정 실무보다 느리게 전개되고 있었고, 시효나 양도불가능성 같은 관념들은 형성되는 단계였다. 양도-불가라는 원칙이 잉글랜드에서 명료하게 정식화되고, 통치의 기본법이라 주장된 것은 1200경의 일로, 무명의 런던 시민이 『잉글랜드인의 법률』이라는 논고를 작성했는데, 이는 세습적 권리로 획득했고, 콘스탄티누스의 보관에 의해 유지되었던 “도서 전체의 군주국”이라는 이념과 관련된 아서 왕 전설의 매혹적 이상을 반영하고 있었다. 왕관의 탁월성의 권리에 의해 브리타니아는 제국이라 불려야 하며, 왕관은 광대하고 양도불가능한 권리를 가졌다. 전체이자 완전한 본토와 제도는 왕관에 속한다. 여기서 왕관은 왕국 및 국가라는 관념과 일치하기 시작하며, 왕-황제 이론과 함께 황제-같은 주권 및 제국적 기도aims라는 관념도 예감하게 한다. 이 저자의 참된 중요성은 에드워드 참회왕이 자신의 전임자가 왕국의 왕관으로부터 양도했던 모든 권리, 존엄[위], 토지를 회복하겠다고, “전체로서 왕국의 왕관의 모든 존엄[위], 권리, 자유를 준수하고 수호하는 것”이 의무라고 서약했다는 것에 있다.(345-346)

12세기까지는 모든 것이 불분명했다. 그럼에도 EKa는 행정상의 실무에서 그 근거를 찾는다. 일단 양도-불가라는 원칙이 수면하에서 꿈틀거렸고, 사람들이 말하기는 시작했다. 헨리 2세의 움직임도 있었다. 프랑스에서 그 첫 단계가 종교였다면, 잉글랜드에서는 신화였던 것일까? 몬머스의 제프리에 의한 아서 왕 전설에서 출발해, ‘도서 전체의 군주국’이라는 신화적 이념이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양도불가능성 INALIENABILITY

나라의 기본적 권리와 요구를 표상하는 비인격적 왕관이라는 관념이 신화, 법률, 국고의 중요성을 무색하게 했던 국헌상의 문제에 영향을 주고 형태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왕이 왕관의 권리와 소유를 양도하지 않겠다는 서약은 1200년경 잉글랜드 대관식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관례적인 3조 서약에, 양도-불가에 대한 네번째 조항이 성문화되지는 않았지만 1216년 헨리 3세의 대관식에서 추가되었을 것이라 믿을만한데,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가 두 차례 언급했다. 추가적 서약의 존재는 에드워드 1세 치하에서 확실한 것이 되어, 왕이 자신의 대관식에서 행한 서약에 의해 왕관의 권리를 보존하도록 구속되어 있었다고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조항은 기록에 남지 않았다. 교회법의 관행은 보다 나은 이해를 제공한다. 11세기 내내 교회령에서 확산되기 시작한 봉건법의 영향 하에서, 교회의 행정을 중앙집권화한 교황 군주제로 변형시켰던 주지의 제정화 경향의 충격 하에서, 주교의 직무 서약이 새로운 형태로 대체되었다. 11세기 교회개혁 이후 오래된 신앙 고백은 충성서약으로 변화되었고, 이는 세속 영역에도 영향을 미쳐, 왕의 대관 약속은 점차 대관 서약으로 변형되었다. 오래된 서식문은 주로 신앙과 헌신 문제에서 교회의 머리인 교황에 대한 확언을 요구했지만, 새로운 서약은 직무와 충성에 관한 행정상의 서약이었다. 새로운 서약의 가장 오래된 형식은 1073년, 라벤나의 대주교 위베르투스의 서임식에서 교황 알렉산데르 2세에게 맹세했던 것으로, 7개 조항 중 4개가 봉건적 충성 서약을 따랐다. 교황에게 충성, 반역행위 금지, 비밀준수, 로마 교황직과 성 베드로의 왕권수호를 맹세했다.(347-349)

왕이 왕관에 속한 것을 양도하지 않겠다라는 말의 출발점은 대관 서약에서 확인된다. 그럼에도 1216년의 대관의례 등에는 양도불가능의 내용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 말을 했다는 전언 만이 있을 뿐. 하지만 그보다 100년전인 11세기에 내내 교회는 오히려 충성 서약을 했다. 중앙집권화한 교황 군주제는 봉건적 서약을 직속 주교들에게 요구하게 된 것이다. 며칠 전 우연히 알고리즘을 따라 올해 서임된 한국 카톨릭 교회의 주교들이 충성서약을 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아직도 교황에게 충성 서약을 하고 있었다. 물론 내용은 봉건적인 것과는 좀 다른 듯 했으나. 그 어색함이 문득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라벤나의 위베르투스 서약은 표준 형식이 되어, 교회의 공식 법률이 되었다. 1200년경 하나의 추가조항이 발견되었는데, 교황 켈레스티누스 3세의 교령 속에 대주교는 자신의 충성 서약에 의해 성좌로부터 어떤 것도 양도하지 않도록 의무지워져 있었다. 후계자인 인노켄티우스 3세도 밀라노 대주교에게 교황의 사전 자문 새롭게 봉토를 다시 나누어주지 않도록 구속되어 있음을 상기시켰다. 양도-불가능을 포함하는 잉글랜드와의 유사성은 인상적인 것으로, 8번째 조항을 포함하고 있는 형식이 그레고리우스 9세 시대에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1234년 서임된 캔터베리 대주교 에드문도 아빙돈은 대주교좌의 식탁 재산에 속하는 재산을, 매각, 증여, 담보, 재차 봉토로 수여하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 양도불가능 조항은 부가적이었는데, 1263년 로마에서 서품받은 오슈의 대주교 아르마냑의 아마니외의 서약은 신이여 나를 도우소서라는 최종적 확증 후에 양도-불가능에 대한 약속이 나온다. 주교좌 식탁의 재산, 우리의 교회의 권리에 속하는 모든 소유물, 재산, 교회의 귀중품. 나아가 양도된 모든 권리와 재산의 회복을 약속했다. 7개조로 된 표준적인 주교의 서약에 경우에 따라 8번째 조항이 부가되었는데, 1245년경 파르마의 베르나르두스는 켈레스티누스 3세의 교령에 대해 “직접적으로 교황 아래 있는 모든 주교는 교회의 재산을 양도하지도 새롭게 봉토로 수여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그에게 맹세한다”고 논평했다. 한 세기 후에 발두스는 수도 대주교구에서 면속된 교구[교황 직속]는 교황의 자문 없이 교회재산을 양도하지 않을 것이라 맹세해야 한다고 기록되었다고 말했다. 주석학자들은 특정한 주교들이 양도-불가능에 관한 추가적 서약을 교회법 본문에 없더라도 행해야만 했는데, 이들은 수도 대주교구에서 면속된 또는 교황 직속의, 중개자 없이 직접적으로 교황 아래에 있던 주교들이었다. 늦어도 13세에 마찬가지로 중개자 없이 교황 아래에 있던 대부분의 수도 대주교들과 다른 팔리움을 수여받은 자들이 더해졌다. 교황의 직속봉신들이다. 1200년경 로마의 절차는 잉글랜드의 관행을 명확히 한다. 1216년 교황 특사로서 헨리 3세에게 서약을 시켰던 구알라 비키에리 추기경은 로마에서 준수되던 관행에서, 비인격적 주교좌를 비인격적 왕관으로 현명하게 대체했고, 잉글랜드의 왕이자 성좌의 직속봉신으로 취급되었다. 이는 국헌적 의미론 명명할 수 있는 것과 관계되어 있다. 봉건적 서약이 교회에 의해 채택, 교황 군주제 형성기에 주교의 서약 안으로 들어가 변형, 주교를 가신으로서가 아니라 직무를 맡은 자로서 구속하는 직무의 서약이, 교황 만이 아니라 추상적 제도인 교황직 및 주교직에 구속하는 직무의 서약으로 전개. 교회화되고 위-봉건적인 것이 된 서약은 왕과 그의 관리들에게 결코 죽지 않는 비인격적 기관인 왕관을 보호하도록 촉구하는 직무의 서약으로 세속국가로 돌아왔다.(349-354)

EKa는 이를 훨씬 자세하게 설명한다. 11세기와 12세기에 걸쳐 주교들의 서약 내용이 제시되는데, 재산을 양도하지 않겠다는 조항은 맨끝에 덧붙여졌다. 이를 주교의 식탁 재산이라 하는데, 표현이 흥미롭다. 교황의 직속 주교들은 이 과정을 통해 사실상의 직속봉신이 된다. 그리고 이 조항이 잉글랜드로 넘어왔다는 것이다. 잉글랜드의 고위 귀족과 교황 및 교황대사들 사이의 밀접한 연계가 낳은 결과인 듯 한데.

왕관 개념에 관한 교회법상의 영향은 잉글랜드에서 이어졌다. 헨리 3세의 대관 4년 후, 교황 호노리우스 3세는 1220년 남 헝가리의 수도 대주교구 칼로차 대주교에게 헝가리의 왕 언드라시 2세의 특정 양도에 대해, 왕국에 손해가 되고 자신의 영예에 반하며, 대관식에서 왕국의 권리와 왕관의 영예를 유지하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에 양도를 철회하라고 요구받아야 한다고 썼다. 언드라시 2세는 수년간에 걸친 유력자들 및 주교들과의 투쟁 이후 1222년에 공포한 금인칙서에서 양도-불가능에 관해 약속했고, 성좌는 대관서약을 수차 언급했다. 헝가리 왕의 실제 서약 여부 보다 주교가 주교좌에 대해 책무를 지고 있는 것과 유사하게 왕이 비인격적 왕관에 대해 일정한 책무를 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러한 관념이 아직 세속 정치사상에 침투하지 않았던 시대에도 로마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관례는 전반적인 것이다. 성좌에 대한 존 왕의 굴복과 성좌 측에서 부정확한 가정의 결과로, 다른 나라들보다 이른 시기에 잉글랜드에서 양도불가능성이라는 교회법상의 학설이 정식화되고 실제 규범이 되었다. 에드워드 1세의 시대에 왕관의 양도불가능한 권리를 확실하게 거론하는 호노리우스 3세의 교령도 효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는 왕관의 권리를 유지하고, 축소에 대항하여 왕관을 보호하며, 왕관의 상태status coronae를 보존하도록 서약에 의해 구속되어 있다고 단언했다. 에드워드 2세의 대관 선서에서도 이 교령이 인용되었다. 에드워드 2세는 그 땅의 법률과 왕관의 영지를 유지하겠다고 맹세했던 서약을 언급하기도 했다. 『군왕서』는 왕의 양도-불가능 약속에 대한 관념이 14세기 법학자들의 정신에서처럼 성직자의 정신 속에도 깊이 뿌리내렸음을 보여준다. “이 세상의 모든 왕들은 자신의 대관에서 왕국의 권리와 왕관의 영예를 보존할 것을 맹세해야 한다”고 14세기 후반에 발두스는 서술했다. 14세기 중반에 루카스 데 페나는 주교와 왕이 양도에 관한 서약에서 대등하다고 생각했다. 페트루스 데 안카라노는 왕은 왕국의 재산을 주교는 주교직의 권리를 양도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고 썼다. 14세기 말 15세기 초에 양도-불가능 조항은 잉글랜드에서 위조된 형식일지라도 기록에 남았는데, 양도-불가능 약속이 추가된 의식서 안에서 등장했다. 이 서약은 15세기 제정법령집에 출판되어 나타났고, 결국 공적 승인을 획득했다. 잉글랜드에서 양도불가능성이라는 관념과 왕이라는 인격으로부터 구별되는 왕관이라는 생각의 발전과 명확화에 교회법이 미친 영향은 분명하다.(354-358)

잉글랜드에서 점차 보다 분명한 형태로 양도불가능성이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 과정에 흥미로운 삽화는 존 왕이다. 많은 영토를 잃었다고 해서 실지왕이라 불리는 그는 대헌장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EKa는 대헌장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여기서 언급되는 것은 존이 잉글랜드 내의 교회령을 몰수했다가 파문 당한 후, 다시 교회와의 화해 과정에서 잉글랜드를 성좌 즉 교황에게 형식적으로 바친 일을 말한다. 서로 간의 오해였다고 할까. 이 일은 후대 법률가들 사이에서 간간이 논의되게 된다. 에드워드 1세와 에드워드 2세를 거치면서 왕관의 상태status coronae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상태를 가리키는 말인 라틴어 status는 영어로 estate인데, 신분을 뜻하기도 하고, 영지 내지는 소유지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현명한 왕이었던 에드워드 1세에 비해 어리석었던 에드워드 2세는 신분이 낮은 기사 피어스 개버스턴에게 홀려서 그에게 작위와 영지를 나누어주려다 유력 귀족들과의 여러 차례의 분쟁에 휘말리게 된다. 여기서는 이 일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왕관과 통합체 CROWN AND UNIVERSITAS

교회법은 왕에 의한 서약만이 아니라 왕에 대한 서약에도 영향을 미쳤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존 왕과의 교섭과정에서 랭턴 대주교와 주교들이 왕의 인격과 왕관에 대항하여 음모를 꾸미거나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것을 보증했다. 인격 또는 왕관에 대항하는 이라는 인격과 제도를 구별하는 견해는 왕과 왕관의 구별보다 더 구체적이다. 12세기 잉글랜드에서 주로 국고의 사안 및 법적 사안에 도입된 왕관의 관념이 교회법 개념의 영향 하에서 새로운 추진력을 획득하고, 새로운 국헌상 함축을 가정하기 시작했다고 인정한다. 교황의 요구에 따라 주교들이 왕관을 보호하겠다고 맹세했고, 곧이어 정치적 신체의 통치 부분을 표상하는 다른 지체들, 왕의 관리와 봉건 영주들이 뒤를 이었다. 파리의 마타에우스는 인장을 보관하던 노르만인 왕의 서기 스승 시몬이 1240년 어떤 칙허장의 내용이 왕관의 이익에 반하는 것임을 알아채고 봉인하기를 거절했다고 언급했다. 아마도 그는 왕관을 축소시키는 어떠한 행위라도 억제할 것을 맹세했을 것이다. 1307년 평의회 위원들의 서약에서 왕과 왕관의 권리를 보존, 유지, 보호, 회복하도록 할 것이며, 충실하게 왕관을 지지하도록 할 것이고, 왕관에 속하는 사항에 관해 왕이 소환되어 있는 법정이나 평의회에 참가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도록 의무를 부여하고 있었다. 왕은 왕관을 박탈당할 수 있었고, 평의회 위원들은 왕에 대항해서까지 왕관을 보호하도록 의무를 부여받고 있었다. 왕과 왕관은 더 이상 동일하지 않았다. 에드워드 1세와 유력자들이 성좌에 보낸 서한은 유력자들도 왕의 존엄[위]과 왕관을 수호하는 서약을 행했음을 드러내는데, 왕관의 권리를 보존하고 수호하도록 속박되어 있었다. 1258년 혁명적인 잉글랜드의 공동단체Communalty of England가 옥스포드에서 왕과 왕관에 대한 신의와 상호지원을 맹세했다. 왕, 평의회 위원, 관리, 성속의 봉건영주들이 왕관의 권리를 유지하겠다고 동일한 서약을 일치하여 행했기 때문에 왕관에 맹세했던 것이 왕국의 공동체였다고 인정되었으며 그들은 머리로서 왕과 함께 하나가 되어 왕국의 공동체 즉 통합체를 표상했고 그 자체였다. 그들 모두는 왕관을 자신들보다 우월한 것으로 모두가 공동으로 소유했던 것으로 보호하도록 구속되었다. 왕관에 있어서 왕관에 대한 서약에 의해서 잉글랜드의 공동단체는 적어도 왕국의 책임있는 부분을 통합했다.(358-361)

왕의 서약에서 왕관에 대한 서약으로 넘어간다. 왕관을 지키겠다고 서약한 유력귀족들은 이를 근거로 왕을 제약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1258년 잉글랜드의 공동단체Communalty가 등장하기도 했다. 일시적 반역은 곧 봉합되지만, EKa는 이를 파고들어 여러가지를 길어올린다.

1275년에 에드워드 1세가 잉글랜드의 로마에 대한 봉건적 공세 문제에 대해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에게 보낸 시사적인 서한을 이해하는 배경을 제공할 수 있다. 거기서 호노리우스 3세의 교령은 문자 그대로 왕관의 권리를 지지하기 위한 것으로 주장되고, 왕은 자신의 서약에 의해 왕관의 권리를 손상되지 않은 채 유지하도록 구속되어 있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모든 사람에게 관련되는 것Quod omnes tangit이라는 로마법-교회법 격언의 흥미로운 왜곡이 이어지는 데, 공동체의 대표라는 관념이 이에 의거하고 있다. 왕은 자신의 서약에 의해 고위성직자들과 유력자들의 조언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왕국의 보관에 손대는 어떠한 것도 행하지 않도록 구속되어 있다고 선언했다. 주교이 성당참사회의 조언없이 양도하지 않겠다고 했다면, 왕은 고위성직자들이나 유력자들의 조언 없이 로마에 조세를 납부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즉 주교직이나 왕관에 관한 문제는 단체적 신체 또는 정치적 신체 전체가 관여되어 있었던 것으로, 주교나 왕이 혼자서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것이다. 신체 전체가 모든 사람에게 중요한 행위를 승인해야 했다. 관련된 모든 사람, 즉 최고위 대표자들로 구성된 정치적 신체에 의해서 승인되어야 할 것이다. 왕관은 왕이 아니며, 적어도 왕 혼자만은 아니라는 것이 에드워드 1세에 의해서 언명되었다. 왕관은 모든 사람에게 관련되는 것이며, 공적인 것, 공통의 유익을 위한 것, 왕, 성속의 영주들, 평민들을 포함한 모두 보다 우월한 것이다.(361-362)

또 한 가지 왕관을 지키겠다는 사례가 에드워드 1세가 교황에게 보낸 공세의 거부이다.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존 왕이 형식적으로 잉글랜드를 성좌에게 바친 일이 교황 측에서 금전을 요구하는 근거가 되지 않았을까? 여하튼 여기서 에드워드 1세는 자신의 서약을 근거로 성속의 모든 귀족들이 동의하지 않는 한 돈을 낼 수 없다고 버텼다. 왕관은 그 논리적 근거가 되었다. 그렇다면 교황 쪽에도 통했다는 말이고, 그래서 통합체로 나아가는 근거가 된다.

왕관의 상태status coronae의 보존은 왕국의 상태status regni를 보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왕관은 정치적 신체 및 개별적으로 변화하는 구성요소들과 별개가 아니었다. 1337년 엑서터의 주교 그랜디슨의 존이 왕관의 본질적 성격은 머리로서의 왕과 지체들로서의 귀족들의 인격에서 발견된다고 선언했을 때 명확했다. 왕관의 복합적 성격과 단체적 양상은 왕국의 정치적 신체 또는 신비체를 기술하는 머리와 사지의 오래된 심상과 연결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1436년 바스 앤 웰스의 주교는 우화적으로 왕관이 정치체와 주권 모두의 상징임을 보여주었다. 중세 후기에 왕관 안에 정치적 신체 전체가 왕, 영주, 평민, 최하위 봉신까지 현존하고 있다는 관념이 통용되고 있었다. 통합체는 의회에 의해서 또는 왕(K)으로서의 왕(k)에 의해서 표상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왕관에 단체적 성격을 귀속시킬 가능성이다. 왕관과 왕국의 신비체는 모두 단독으로 추상적으로 구성요소들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비교할만했다. 왕관은 공동체 전체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속하는 대권과 주권을 보다 강력하게 표현했던 반면, 신비체는 전체 인민의 단체적 본성과 연속성을 보다 강조하는 것처럼 보였다. 왕관이란 머리로서의 왕과 사지로서의 유력자들 모두가 없이는 불완전했을 것이며, 양자가 함께할 때 의회의 기사들과 자치도시의 시민들에 의해서 보충되어서, 왕관의 단체적 신체를 형성했기에, 이는 근대의 언어로 주권을 의미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왕은 의회의 머리이고, 시작이자 끝이라 할 수 있다. 1275년의 에드워드 1세는 왕관의 본성과 기능에 대한 기술로부터 잉글랜드의 주권 개념인, 의외 안에서의 평의회 안에서의 왕에 직선으로 도달하고 있다.(362-364)

왕관의 상태와 왕국의 상태는 연결된다. 왕관은 그 자체로 유기체론적 비유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법률가들과 주교들의 논의는 왕관에 정치적 신체가 담겨있음을 보여준다. 왕관은 통합체를 표현하는 것이다. 잉글랜드에서 그 통합체는 왕, 유력귀족, 의회, 평민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튜더의 법률가들의 이야기는 이런 경로를 따라 형성되었다.

왕과 왕관 THE KING AND THE CROWN

왕관을 왕으로부터 단절된 어떤 것으로 세우려는 유혹은 강렬했던 것에 틀림없다. 왕과 왕관이 동일하지 않다고 해서 분해되거나 서로 간의 대결을 내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는 유력자들이 에드워드 2세의 총신들을 제거하고 왕을 제약하기 위해 1308년의 선언을 내놓았을 때 초래되었던 위험이었다. 충성의 서약과 신종의 서약은 왕의 인격이 아니라 왕관을 이유로 한 것으로, 인격이 아니라 왕관에 속박되어 있다고 전제하고, 왕이 오류를 교정하려 하지 않고, 왕관에 유해하고 인민에게 비난을 면할 수 없는 것을 제거하려고 하지 않을 때, 그 오류는 강제에 의해 제거되어야 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제후들은 왕관과 왕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양자택일 상황에 직면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 같지만 처음부터 잘못된 상황이었는데, 왕이 없는 왕관은 불완전하고 무능했기 때문이다. 후대에 프란시스 베이컨은 이 선언에 대해 “사물을 구별되게 하는 것과 분리가능하게 하는 것은 별개이기 때문’이라며, 왕의 인격과 왕관은 구별되기는 하지만 분리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제후들은 왕(K)으로서의 왕과 사적 인격으로서의 왕 사이의 구별을 표현하기 원했을 것이지만, 그들이 실제로 행했던 것은 사적 인격으로서 만이 아니라 왕(K)으로서의 왕을 단체적 왕관에 대립시키고 왕관을 위해서 왕(K)으로서의 왕까지도 던져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의 정치철학은 미래가 없었고, 제후들이 이를 거부한 후에 잊혀졌지만, 법정에서 쿠크와 베이컨에 의해 위험하고 유해한 것으로 격렬하게 거부되었다.(364-366)

에드워드 2세와 귀족들 사이의 갈등은 제후들 쪽에서 잠깐 등장했다가 사라졌던 하나의 논리를 보여준다. 왕관과 인격을 대립되는 것으로 보고, 인격을 제거할 수도 있다고 한 것. 폭군방벌론과 비슷한. 사실 이것과 1장에서 나오는 훗날 찰스 1세의 처형의 논리는 미묘하게 다르지만, 그 차이를 잡아내기는 쉽지 않다. 그걸 파악하는 EKa가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그 차이로 가기 위해 철학을 먼저 경유한다. 여기서 문제는 분리에 있었다.

앞선 제후의 왕(K)으로서의 왕과 사적 개인으로서의 왕 사이의 구별은, 휴 데스펜서 부자를 보면 철학적 증거가 있을 듯 한데,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아퀴나스의 주석이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군주가 자신의 관리들과 벗들 사이에 수많은 눈귀, 손발을 가지고 실제로 공동통치자 역할을 한다고 말했는데, 아퀴나스와 그를 이은 오베르뉴의 페트루스의 주석은 이들이 군주의 벗이 아니라 아니라 군주위principate의 벗이며, 군주위의 이익에만 유념할 것이고, 군주의 벗이라면 군주위의 이익을 유념하지 않을 것이기에, 공동통치자들은 군주와 군주위 양자 모두의 이익을 유념해야 한다고 말했다. 군주의 이익은 군주위의 이익을 향한다고 말하여, 군주위와 군주와 균열을 회피했다. 그러므로 군주를 군주(P)로 사랑하는 자만이 군주위를 사랑하는 것이다. 통치하는 자는 그가 군주(P)로 또는 개별적 인간으로 고찰될 수 있다. 주석가는 지배자의 두 능력, 군주(P)로서의 군주(P)와 사적 개인으로서의 군주(P)의 능력을 구별했고, 군주의 능력과 군주위는 동심적이었다. 하지만 제후는 군주위와 군주(P)의 대립 만으로 작동했고, 두 독립체들을 이심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왕의 직무, 곧 왕의 신분status regis로부터 개별적 인간만 분리하는 대신, 왕관으로부터 왕(K)을 단절시켰던 것이 그들의 결점이었다. 그들은 왕의 신분으로부터 인격을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왕관의 상태status coronae로부터 왕의 신분status regis을 단절시킨 것이다. 그들이 왕의 인격과 왕(K)을 번갈아 왕관과 대결시켰기에 그들은 실패했다. 인격에 대한 충성의 중요성을 최소화하는 그들의 신조는 왕(K)으로서의 왕의 권위를 침해하는 결과에 이르렀다. 연대기 작가들은 이를 지체가 머리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키는 것이라 말했다. 1322년 에드워드 2세가 유력자들의 명령을 철회시켰을 때 의회는 동의했고, 왕의 신분과 왕관의 상태 사이의 구별을 유지했으며, 두 가지 독립체들을 하나의 공통항으로 되돌렸지만, 이를 전체 통합체, 유명한 왕국의 공동단체의 관심사로 취급했다.(366-368)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 대한 주석을 마치지 못하고 죽었는데, 이를 이어받은 것은 오베르뉴의 페트루스였다. 그는 군주와 군주위를 구별했다. 왕과 왕위를 구별하듯이. 군주로서의 군주와 사적 개인으로서의 군주를 구별하지만, 이 둘은 동심적이라는 것이 핵심이다. 군주로서의 군주와 사적 개인으로서의 군주는 실상 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적 개인을 분리할 때, 군주로서의 군주를 유지시키는 방법을 확보하지 않는 한, 사적 개인 만이 아닌 군주로서의 군주까지 무너진다는 것이다. 찰스 1세의 경우, 일단 왕을 옥스포드에 유폐시켜놓고, 그림 속의 군주로 존속시키면서 통합체를 유지시킨 것과 비교할 수 있을까? 인격을 분리하려고 하는 순간, 왕(K)으로서의 왕도 분리되게 된다. 구별은 하되 분리하지 않아야 한다. 이건 사실 아주 어려운 주제이고, 두 차례의 대통령 탄핵과정에서 어떤 식으로 관철된 것인지 생각해 볼 이야기가 많은 주제이다.

왕과 왕관 사이의 구별은 소멸하지 않았고, 왕들은 왕관을 손상시켰다고 손쉽게 고발될 수 있었다. 리처드 2세 사건에서 왕관에 대항하는 범죄들은 넘쳐났다. 리처드는 몰락하기 전해(1398) 반역에 관한 법률을 확대하여 왕의 물리적 신체를 해하려는 시도가 왕관에 대항하는 대역죄라고 선언했다. 일년 후 그가 잉글랜드의 왕관의 자유를 위태롭게 했고, 왕관의 재산을 낭비했으며, 왕관의 상속권을 빼앗았다고 고발되었을 때, 그는 개인적 과시, 허영, 자만심을 위해서 행동해왔다고 고발되었는데, 이는 왕의 사적 인격을 그의 직무와 직무상 능력과 다른 것으로 가려내려는 노력이었다. 왕의 신분과 왕관의 상태 사이의 구별은 되풀이 되었으나 비인격적 왕관에 대한 충성을 위해 인격적 왕에 대한 충성을 배제하려는 시도는 반복되지 않았다. 능력에 관한 학설은 견실하게 지반을 획득했다. 이는 헨리 4세가 왕관의 재산에 합병하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사적 소유로 보유했던 랭커스터 공국의 사례에서 명료했다. 이는 1405년 왕관에 속하는 물건과 다른 인격으로서의 왕에게 속하는 물건 사이의 차이를 명료하게 정식화하도록 이끌었고, 후자는 튜더 시대에 왕의 자연적 신체라 불린 것의 훌륭한 선례였다. 헨리 5세 치하에서 의회는 왕이 유언에 의해 자신의 재산을 남길 수는 있어도 왕국을 유언으로 증여할 수 없다고 결의했는데, 이는 오래된 양도불가능 조항의 재정식화에 지나지 않았지만, 콘스탄티누스 기증이나 존 왕이 왕국을 성좌에 복속시킨 행동의 허용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법정에서는 왕의 개인적 행동이나 그의 대권에 의한 행동이 왕관의 이익과 충돌했고, 그에 따라 왕국의 공동체의 이익과 충돌했던 사건이 생겨났다. 헨리 7세 치하에서 법학자들은 왕관의 권리에서 왕이 토지를 압류당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왕의 능력을 구별하는 데서 헨리 7세 치하의 1495년의 사실상 법령도 흥미롭다. 에드워드 4세와 헨리 6세가 서로 왕위를 빼앗았을 때, 빼앗긴 자는 각각 찬탈자이자 사실상의 왕으로 등장했다. 또한 그 시대의 법정에서 왕의 승하[붕어, 서거]를 왕의 죽음이 아니라 권력으로부터의 이탈의 의미로 의논하기도 했는데, 죽었거나 왕의 존엄[위]에서 떨어진 자연적 신체로부터 또다른 자연적 신체로 정치적 신체가 옮겨진다는 것 안에 두 신체의 분리가 표현되어 있다. 사실상 법령의 목적은 불쾌한 결과를 제거하려는 것으로, 어떤 신민도 대립-왕의 어느 편이든 그들의 참된 의무와 충성의 봉사를 행한 것을 이유로 어떤 것도 상실하거나 몰수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왕관이 무력화되더라도, 정치적 신체나 왕(K)으로서의 왕에 대한 참되고 성실한 충성은 사권박탈로 이어질 수 없다는 것. 이 법령은 과거에 두 대립왕들의 공존 및 두 자연적 신체들의 공존을 시인했지만, 하나의 왕관, 하나의 정치적 신체 만을 시인했기에, 신민의 잘못된 선택은 처벌할 수 없었다.(369-372)

왕과 왕관의 구별은 다채로운 사건들 속에서 이해된다. 왕이 왕관에 손해를 입혔다고 제기되는 소송들. 이런 소송은 어디까지나 왕의 법정에서 이루어진다. 왕(K)에 대한 충성은 사라지지 않고, 왕(K)으로서의 왕은 존속해야 하는 것. 나중에 설명이 나오지만, 랭커스터 공국도 흥미롭다. 요크 왕가에게서 왕위를 가져온 헨리 4세는 자신의 세습재산인 랭커스터 공국을 잉글랜드의 왕관에 합병하기를 거부하고, 별개로 유지한다. 정치적 신체와 자연적 신체의 존속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할까. 튜더 왕가가 등장하면서 어떻게 되었겠는가? 기묘한 방법으로 왕의 재산이 된다. 왕이 왕관의 영지를 유언으로 기증할 수 없다는 내용은 존 왕과도 연결된다. 사실상의 법도 흥미롭다. 에드워드 4세와 헨리 6세가 왕위를 다투던 시절, 엎치락뒤치락하는 과정에서 양측을 편들었던 어떤 귀족이나 평민도 모두 사실상의 왕이든 법률상의 왕이든 왕에게 충성한 것이므로 그들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법이다. 모두가 정치적 신체로서의 왕(K)을 근거로 한다.

미성년자인 왕관 THE CROWN AS A MINOR

왕관과 왕(K)으로서의 왕과 분리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모든 사람에 관련되는 무엇을 표상하고 정치적 신체 전체를 상징하는 왕관을 인격화하는 가능성이 남아 있었고, 왕관과 관련하여 명확한 기능과 알맞게 잘 정의된 역할을 왕(K)으로서의 왕에게 돌리는 것도 가능해졌다. 리처드 2세에게 제기된 고발 중에는 잉글랜드 왕관의 상속권을 폐제disherison했다는 것도 하나였는데, 상속권 폐제는 자연인이든 단체든 오직 인격에게만 적용가능한 관념이다. 이런 고발은 헨리 3세, 에드워드 1세, 에드워드 2세 치하에도 있었다. 이는 분명히 상속법으로부터 유래했는데, 어떤 사람이 상속인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했음을 의미했다. 상속법이 왕관의 영속성 및 연속적인 계승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을 상기할 수 있는데, 소유권이 이전되듯, 왕관은 계승되었다. 왕관은 공적 상속재산, 튜더 왕조의 한 저자는 왕(K)은 왕의 상속인이 아니라 왕국의 상속인이라 표현했고, 프랑스의 국헌론자 테르 루주는 왕관의 계승자는 전임자의 상속인이 아니라 물건의 관리에 대한 상속인일 뿐이라 지적했다. 따라서 왕관의 상속권 폐제라는 범죄는 통상적 박탈의 문제가 아니라 법률 언어로 미성년자의 상속권 박탈을 의미했다.(372-374)

리처드 2세에게 제기된 고발 중 하나가 잉글랜드의 상속권을 폐제했다는 것이데, 피상속자의 권리를 빼앗았다는 이야기다. 왕관은 공적 상속재산이므로 상속권을 빼앗을 수 없다. 그래서 왕을 왕의 상속인이 아닌 왕국의 상속인이라 표현하는 것이다. 아직 상속받지 못한 후임왕의 권리를 미리 빼앗은 범죄를 지적하는 것이니 법논리적으로 왕관은 미성년으로 취급되게 된다.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의 법률은 국가[공유물]가 미성년자의 권리를 자기 자신에 적용했고, 원상회복을 청구할 수 있다고 선언했으며, 주석학자들은 국가[공동체]와 교회가 이점에서 동일한 지위에 있다고 설명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 로마의 법학자 라베오는 어느 고시가 광인, 자녀, 도시에 대해 타당하다고 말했는데, 이 셋 모두 제정신인 성인 자연인인 후견인을 통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사무를 관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13세기 단체에 대한 학설이 발전되었을 때, 도시라는 관념은 통합체 또는 단체적 신체로 이전되었고, 통합체는 후견인을 필요로 했기에 언제나 아동이고 미성년자였다고 말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법학자는 주교를 교회의 개인교사나 보호자로 그렸고, 교회는 미성년자였다. 언제나 미성년자였던 단체적 신체는 미성년인 사람의 모든 특권을 향유하게 되었는데, 어떤 시효도 성립하지 않았고, 피후견인의 재산과 부는 양도되거나 축소될 수 없고, 보호자는 재산을 손상시키지 않을 책임이 있으며, 양도불가능한 것으로, 사기에 대해서는 원상회복으로 보호되었다. 주교와 자기교회의 관계에서 주교 또는 주교의 존엄[위]은 영속적인 후견인이고 피후견인의 재산의 용익권을 통상적 후견과 달리 영속적으로 향유했다. 법적 인격juristic person이나 단체가 미성년자의 특권을 가졌고 미성년자처럼 취급된다는 규칙의 일반적 수용을 방지할 수 없었다. 잉글랜드에서 브랙턴은 교회가 미성년자이기에, 주임사제가 죽는다 해도 보호자가 죽은 미성년자 처럼 교회의 권리는 몰수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메이틀랜드는 자연인을 보호자로 하는 법적 인격인 교회가 있고, 보호자를 점검하는 후원자와 주교가 있다고 말했다. 1294년의 소송 사건에서 후견인의 태만이 피후견인의 상속권 폐제로 이르러서는 안 되며, 주임사제의 태만이 교회의 상속권 폐제로 이르러서도 안 되고, 미성년자는 상속권 폐제가 철회되도록 법정에서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라 언명했다.(374-376)

공유재산을 미성년으로 보는 역사는 결코 짧지 않다. 로마 시대로부터 시작되었고, 심지어는 도시를 광인에 비유한 적도 있다. 후견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도시는 통합체이므로 통합체는 후견인이 필요한 미성년자이며, 교회도 후견인이 필요한 미성년자이다. 미성년의 재산은 손상되지 않고, 원상회복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는 후견인들이 해먹기도 하던데. 후견인의 태만은 법정에서 시비를 가를 기회를 가지게 된다.

그 무렵 교회와 국가[공유물]의 영원한 미성년에 관한 학설은 왕관으로 이전되었으며, 왕관의 권리 또는 왕관의 재산의 양도불가능성에 관한 복잡한 관념 및 왕에 대하여 시간는 흐르지 않는다 라는 법격언과 융합되었다. 13세기 말 왕관의 상속권 폐제가 논의되었던 사례들이 법정에서 심리되었고, 양법 소송절차의 관례였던 단체가 미성년이라는 어휘가 왕과 왕관에 적용되었던 것을 왕관이 어느 교회에 대해 성직 추천권을 요구했던 성직 천거권 방해 배제 영장의 소송 사건에서 발견한다.(왕 대 라티머 사건, 에드워드 2세 10년) 같은 해 민사소송법원의 재판관 스크로프는 왕 대 워크솝 소수도원장 사건에서 왕관은 미성년이라 했지만, 라티머 사건에서는 왕이 미성년이라 하기도 했는데, 왕관과 왕 사이의 차이는 흐릿해졌고, 비판하는 다른 재판관이 동일한 함정에 빠지기도 했다. 법학자들의 둘러대기는 세부를 보여준다. 왕관과 교회는 단체로 취급되고, 영속적 미성년은 단체적 성격의 표현이다. 판사가 왕이 미성년이라고 선언했을 때, 앙묵적으로 왕에게 단체적 성격을 부여했음을 발견한다. 재판관 베레포드는 미성년자의 행위의 효력은 제한적이라고 이의를 제기했는데, 미성년자일 때 행한 양도는 왕이 성년이 되었을 때 확인이 필요했다. 이는 왕(K)으로서의 왕, 정치적 신체로서의 왕은 미성년도 노쇠하지도 않는다는 튜더 법학자들의 간결한 신조로 가는 발걸음이었다. 동일한 단체론적 전제로부터 두가지 정반대로 대립하는 의견, 항상 미성년인 왕 대 결코 미성년이지 않은 왕이 비롯될 수 있었다. 어느 경우든 왕과 그의 권리, 왕관과 공유했던 영속을 강조하려는 것이 의도였다. 튜더 왕조의 법률가들이 어느 정도 정치적 신체인 왕(K)과 왕관의 완전한 융합에 도달했던 반면, 베이컨은 왕관의 정치적 신체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법에 있어서의 왕은 결코 성년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고 했는데, 그들의 중세 선구자들은 왕의 아직 분할되지 않은 권능들을 단체론적 왕관과 혼동하기에 이르렀다. 1300년경의 판사들의 논의는 기묘하게 비논리적인 데, 영속적 미성년인 왕관에는 왕관처럼 결코 죽지 않으며 결코 미성년이 아니며 결코 병들지도 노쇠하지도 않는 보호자로 영속적으로 성인인 왕이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미성년 이론은 왕관의 보호자로서의 왕의 의무에 의해 무효화되었는데, 정의상 보호자는 성년이어야 했기 때문이다.(376-379)

국가와 교회가 미성년이라는 관념은 단체가 미성년이라는 관념으로 다시 왕관이 미성년이라는 관념으로 넘어오게 되는데, 이것이 잉글랜드의 법정에서 왕관이 미성년이라는 말과 왕이 미성년이라는 말이 혼동되게 된다. 여러 판사들이 혼동했고, 왕이 미성년이라고 했을 때는 왕에게 단체적 성격을 부여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왕이 미성년일 수는 없는 일이다. 왕과 그의 권리의 영속을 강조하려는 것이기는 했으나. 이는 왕의 정치적 신체와 자연적 신체의 능력을 충분히 분할하지 못한 채로 단체론적 왕관과 혼동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시적 혼란이었다.

1300년경 판사들은 단체의 영속적 미성년에 관한 새로운 이론, 국가[공유물]와 교회로부터 왕관으로 무심하게 이전시켰던 이론을 왕의 직무와 인격에 조화를 이루는 것이 어렵다는 점을 발견했다. 매우 많은 점에서 왕의 권력 및 존엄[위]과 일치하는 왕관이라는 분명하지 않고 막연한 관념은 그들로 길을 잃게 했다. 에드워드 2세 치하의 판사들은 유력자들의 혼란과 유사한 혼란에 도달했는데, 그들은 유아인 왕관을 성인인 보호자로부터 절단했지만, 실제 의도했던 바는 개인을 그의 보호자 직무로부터 절단하려는 것이었다. 판사들이 단체론적 미성년 이론을 복합 신체였던 왕관에 적용했을 때, 그들은 실수했던 것이다. 그러나 왕을 왕관과 혼동하는 것에 의해서, 영속적인 미성년자라는 단체론적 성격을 왕에게 귀속시키는 것에 의해서 법학자들은 이제 막 단독법인corporation sole, 즉 미성년인 왕을 창출하려 했다. 비논리적 사고는 사라졌고, 법정은 왕이 단지 왕관의 보호자일 뿐이었다고 지적했고, 왕관의 미성년에 관한 논의 전체가 사라졌다. 그럼에도 우리는 왕이 단독으로 하나의 단체였다는 결론에 사람들이 얼마나 용이하게 도달할 수 있는지 깨닫는다. 진실로 왕관이라는 단체는 왕국 내의 다른 모든 단체와 다르다. 여기서 왕조의 연속성이라는 관념이 왕관이 세습적으로 계승되는 것과 왕조가 왕관의 세습적 보호자 직무를 가지고 있음을 함의하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개별적으로 지배하는 대표자에게 왕조란 영속적 왕관의 영속적인 보호자였거나 동등자들이 사지로 있는 보호자의 신체의 영속적인 머리였다. 왕 만이 자신의 왕권, 왕의 신분, 자신의 상속인에 대해 이야기할 자격이 있었다. 통상적인 단체적 신체의 경우, 14세기 법률가들은 상속인을 후계자로 대체할 수 있었다. 이 구별은 후에 베이컨에게 교회적-단체론적 평행현상이 왕관에 적용될 가능성을 부정할 기회를 제공했다. 중세 후기 잉글랜드 정치 이론에서 수많은 애매모홈함들과 불일치들을 설명하는 것은 실로 통치하는 왕의 인격 안에서 자연적 신체의 왕조적 연속성과 정치적 신체로서의 왕관의 연속성의 융합이었다.(379-381)

일단 왕관에 대해서 단체의 영속적 미성년에 관한 이론을 전개하기는 했으나 왕의 직무와 인격과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길을 잃었다. 여기서 직접적으로 단독법인인 미성년인 왕이 창출되었으면, 튜더 법학자들에 의한 전개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혼란은 반대로 미성년이라는 논의의 불합리함을 깨닫게 했고, 이 논의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왕관은 단체로 남았다. 왕은 왕관의 보호자였고. 왕조의 연속성이 왕관의 세습적 계승과 연결된다. 왕관이라는 단체는 왕이 상속한다. 왕관이 아닌 단체는 상속이 아닌 계승에 의해 후계자에게 연결되게 된다. EKa는 잉글랜드 정치사상에 만연했던 혼동의 원인으로 자연적 신체의 왕조적 연속성과 정치적 신체로서의 왕관의 연속성이 통치하는 왕의 인격 안에서 융합된 것이라 설명한다. 왕조와 왕관이라는 두 개의 영속적 연속성을 확보하기는 했으되, 이를 정리하지 못하고 섞였던 것이다.

요약하면 모두가 어떻게든 왕관이라는 관념에 수렴하고, 교차하고, 중첩되며, 모순적인 정치사상의 가닥들이 뒤얽혀 있는 것에 관여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왕관의 관념에는 셀수 없이 많은 양상들이 있었으며, 사람들은 사려없이 안이하게 모든 종류의 능력과 권한에 적용했으니, 판사, 유력귀족, 왕 자신이 명교하고 애매하지 않게 왕관이 무엇이었는지 정의하는 데 실패했다고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왕관은 살아있는 개념으로, 생명체 같은 복잡성 탓에 본질을 애매하지 않은 용어로 파악하려는 모든 노력에 저항했고, 한 측면에서는 정확한 것이 다른 측면에서는 오류로 느껴졌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왕과 왕관은 구별될지라도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왕관이 인격화되는 것은 드물었지만, 신체화되는 것은 매우 자주였다. 신비체와 비교할만한 왕관은 복합신체이자, 머리로서의 왕이라는 구성원으로부터도 사지로서 왕관의 상태에 공동으로 책임이 있는 사람들로부터도 분리되지 않았던 정치적 신체였다. 통치에 대한 중세의 유기체론적 개념이 잉글랜드에서 놀랍게도 오래 존속했던 것은 거기서 왕국의 도덕적이고 정치적 신체가 실제로 살아있었고 가시적이 되었던 의회라는 표상적 신체의 존재에 의해서였다. 왕관은 항상 개별적으로 왕안에서 현존하고 있었지만, 왕관은 과세, 재판권, 행정의 목적 때문에, 임시로 유사-단체적인 것이 될 수 있었다. 헨리 8세의 말대로 의회의 개최 시에 왕이 실제로 왕권의 표징을 지녔을 때, 단체로서의 왕관이 가시적이 되었다. 중세 후기 잉글랜드에서 왕관은 의제적 인격이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튜더 왕조의 법률가들이 왕의 자연적 신체와 왕의 정치적 신체를 구별하기 시작했고, 천사 내지 다른 초자연적 존재의 모든 특징과 속성을 지녔던 정치적 신체를 왕관의 정치적 신체와 대부분 동일시하기 시작했을 때, 잉글랜드에서도 의제 또는 의제성의 특질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도로 추상적인 이러한 특징은 전부 양법으로부터 유래했고, 양법이 구축했고 존엄[위]이라는 말로 기술했던 유일한 일인단체를 특징짓는 데 도움이 되었다. 잉글랜드 법률가들은 관념의 본질을 채택하되, 관념을 의제적 인격의 의미에서 거의 사용하지 않고서도, 교묘하게 그것의 모든 특징을 잉글랜드의 조건에 적합하게 했고, 그 구성요소를 가장 탁월한 직무, 왕의 직무, 직무의 상징인 왕관으로 이전했다.(381-383)

수많은 논의들이 왕관으로 수렴되었다. 왕관이란 정말 많은 논의들의 결합지점이었다. 동아시아에는 이런 식으로 왕관에 상응하는 말이 없다. 왕관에 대한 많은 정의들은 실패했다. 왕관은 살아있는 어떤 것이었다. 그런데 왕관은 인격화되는 대신에, 신체화되기에 이른다. 여기서 법인으로 직결되는 길이 막히게 된다. 우회로가 필요했다. 왕관은 복합신체로 여겨졌고, 의회와 왕의 결합으로 단체로 가시적이 되기도 했다. 중세 후기 잉글랜드에서 왕관은 의제적 인격이 아니었다. 정치적 신체와 자연적 신체가 구별되면서 의제라는 특징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왕조와 왕관이 의제로 가는 길에 다음 절에서 묘사하는 존엄[위]이 있다. 이는 아직 단독법인이 되기 이전의 일인단체로서 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2025. 12. 28.

* 괄호 안의 숫자는 책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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