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H. 칸토로비치, 『왕의 두 신체』(7-1).

튜더 왕가의 가계도. 앞쪽에서는 아담과 이브로부터의 기원과 노아의 방주도 등장한다. 중간에 리처드 3세에서 단절이 있고, 그 아래로 헨리 8세가 이어진다. British Library, Kings MS 395, fols. 32v-33r.

Ernst H. Kantorowicz, The King’s Two Bodies: A Study in Mediaeval Political Theology,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57, “VII. The King Never Dies, 1. Dynastic Continuity.”

제7장 왕은 결코 죽지 않는다

인민을 결코 죽지 않는 통합체로 해석함으로써 법률학자들은 정치적 신체 전체의 영속성, 사지들만의 영속성에 도달했다. 이어진 머리의 영속화는 새로운 일련의 문제를 창출했고 새로운 의제로 이어졌다. 교회의 성직자단collegia의 경우, 고위성직자가 사망하면 그 직위는 성직위계 상의 상위자나 보편교회나 교회의 머리 즉, 그리스도나 그리스도의 대리자에게 넘어간다. 공위기간 동안 그리스도는 간왕interrex 역할을 했다. 교회재산은 영속적인 독체, 영원한 머리에 불멸하고 부재하지 않는 교회 그 자체에 넘어갔다. 현실은 이론보다 어려워서 집단적 신체의 머리의 연속성에 대한 실제적인 어려움이 생겨났다. 법률학자들과 교회법학자들은 머리, 사지 및 머리와 사지가 분리된 신체와 단체적 단위를 형성했다는 분리된 신체들corpora separata이라는 개념 같은 해결책을 결과로 도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보통법 법학자들도 머리의 연속성 문제가 해결하기 어렵고 당혹스러움을 발견했다. 1482년 노리치 시장 사건에서 시장의 죽음은 공위기를 창출했고, 이는 노리치의 정치적 신체를 불완전하게 만들어, 단체로서 법률 행위에 부적격하다고 보았다. 리틀턴 같은 법학자는 단체적 신체와 머리 사이에 근본적 구조적 차이를 강하게 느꼈다. 반면 판사들은 성당참사회 회장이나 시장이 개인으로 전임자와 계승자를 가질 수 있다고 동의했다. 이들에게 영원성, 항구성이 적용되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사람들은 결코 죽지 않는 통합체에 관한 로마법-교회법적 학설의 내용과 용어를 주저하지 않고 채택하면서, 머리는 죽을 수 있고 죽었다고 명확하게 깨달았으나, 완전한 단체의 연속성은 머리의 연속성에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연속성은 하나하나의 인격에도 계승적으로 귀속되는 것도 실감하게 되었다. 왕국의 정치적 신체 전체의 무능력화를 초래하는 불완전성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공위기의 위험을 상쇄하고 머리로서의 왕의 연속성을 확보하기 위해 도입된 구제책이 이론 보다 빨리 실제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다. 왕국의 머리의 영속성과 “결코 죽지 않는 왕rex qui nunquam moritur”이라는 개념은 왕조의 영속성, 왕관의 단체적 성격 및 왕의 존엄[위]의 불멸성이라는 세 가지 요소의 상호작용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들은 왕의 자연적 신체의 끊임없는 계통, 머리와 사지가 함께 표현되는 정치적 신체의 영구성 및 직무의 즉 머리 단독의 불멸성과 일치한다.(314-317)

통합체로서 정치적 신체 전체의 연속성과 통합체인 사지의 연속성은 확보되었으나, 머리의 연속성은 자동적으로 확보되지 않았다. 공위기는 길든 짧든 여전히 존재했으며, 국가든 도시와 같은 보다 작은 통합체든 문제는 한번에 해결되지 않았다. 실제로 죽는 왕과 죽지 않는 왕 사이의 연결은 현실적인 구제책을 통해서 확보되기 시작했다.

1. 왕조의 연속성 Dynastic Continuity

캘빈 사건에 관한 1609년의 재판 기록에서 에드워크 쿠크는 대관식이 왕의 장식이거나 왕위 세습의 예식거행일 뿐, 자격의 어떤 부분도 아니기 때문에, 사후에 수행되어야 할 어떤 본질적 의례나 행위 없이도, 왕은 잉글랜드의 왕국을 고유한 타고난 권리에 의해서 유지했고 왕의 혈통으로부터 세습에 의한 자격을 유지했다고 지적했다. 아직 왕관을 쓰지 않은 왕에 대해서 반역죄로 고발되지 않고서도 어떤 폭력행위도 저지를 수 있다는 의견을 공표했던 신학교 사제들은 왕의 왕위계승과 대관 사이의 시간을 다루는 공위기에 대해 왕의 죽음으로 왕의 평화가 존재하기를 중지했다고 주장했던 과거의 유물 같은 논의였는데, 성직자의 손에서 이루어지는 왕의 축성의 법적 중요성을 상기하는 것으로 보였지만, 그러한 의례 행위의 법적 내지 국헌상 가치는 감소되어 왔다. 이런 견해가 잉글랜드 성직자들의 일반적인 것도 아니었다. 1547년 에드워드 6세의 대관식에서 크랜머 대주교는 기름이 더해졌다 해도 의식에 지나지 않으며 결여되었다 해도 이미 완전한 제왕이고 하느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고 설명했다. 이는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정신과 모든 종류의 의례적 기름부음에 대한 일반적인 반감, 12-13세기 내내 전개된 교회적 대관식에 대한 법률적 평가절하와 왕조적 승계의 승리 모두를 반영했다.(317-318)

캘빈 사건 자체는 제임스 1세 시절에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연합을 통한 영국인의 권리에 대한 문제였지만, 이 재판에서 논의된 신학교 사제들 이야기는 좀 다르다. 여기서 신학교 사제Seminary Priests란 잉글랜드 종교개혁 후 예수회가 유럽 대륙 곳곳에 잉글랜에서 활동할 카톨릭 사제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신학교를 가리킨다. 사제는 본래 교구에서 나오는 것인데, 잉글랜드 본토와 떨어져서 신학교만 존재했기에 이를 신학교 사제라 부른다. 이들이 교황권 지상주의자일 가능성이 높은 것은 당연지사. 그래서 성직자에 의한 대관을 받지 않는 왕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려했던 것이다. 물론 의미없는 과거의 울림이었지만.

중세 후기 왕의 도유에 대한 평가절하는 의식수행의 신비주의가 증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직자 정치적인 원천과 법학적인 원천 모두로부터 유래했다. 원래 세례성사 및 성품성사와 비교할만한 성사였는데, 영적 권력 자체에 의해서 사제 직무의 성품성사의 숭고함과 유일함을 고양하기 위해 현저하게 낮은 품급으로 격하시켰다. 인노켄티우스 3세의 교령 “거룩한 도유에 대하여”는 왕과 주교의 직무를 주의깊게 분리했으며, 주교에게는 허락되었던 축성성유chrism를 군주에게 도유하기를 거부했다. 이는 그리스도와 유사한, 그리스도 중심 왕권이라는 이전의 관념이 완전히 역전되었음을 폭로한다. 인노켄티우스가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머리에 도유받았기 때문에 군주에게 축성성유와 머리에 도유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을 때, 그리스도 모방자로서의 왕의 본질이 위험에 빠졌다. 군주의 도유는 그리스도의 도유와 같지 않음을 강조하기 위해 팔과 어깨로 옮겨졌고, 거룩한 축성성유가 아닌 가치가 낮은 기름으로 수행되었다. 통치자의 도유는 전례적으로 하위이며, 약간 승화된 구마와 악령에 대한 봉인에 제한되었다. 성직자 정치의 학설에 따르면, 왕에 대한 도유는 더 이상 성령을 수여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대관식 의식규정은 그러한 관념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교회법학자들은 황제가 교회적인 인격이었는지 여부를 숙고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군주는 그리스도 같은 표상이라거나 주의 그리스도라는 성격을 명쾌하게 거부했다. 교황은 “세속주의”의 주요 주창자로 등장하는 데, 교황 요한 22세는 에드워드 2세에게 도유를 되풀이할 수 있지만, 혼에 어떤 표식도 남기지 않아, 어떤 성사적 가치도 없다고 말했다. 교령은 군주를 가리키는 항목에서 당시 두드러진 사고방식의 일반적인 변화를 반영했기에 중요하다. 로마 바깥에서 교황의 교령의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 호스티엔시스는 그 나라들에서 전통과 관례에 따라 왕의 머리에 대한 축성성유 도유가 계속되었다고 말했으며, 프랑스 의식의 신비주의적이고 전례적 정교함은 인노켄티누스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정점에 도달했다.(318-321)

인노켄티우스, 프리드리히 2세를 길렀고 왕으로 선택했던 교권의 정점에 섰던 그 교황이 또 등장한다. 그는 이번에 황제의 대관식을 격하시켰다. 사제 보다 아래에 있기 때문에 기름도 보통 기름,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것도 금지했다. 사제도 부제도 아닌 차부제 정도의 위치에 두어, 영원히 왕권을 아래에 두려는 시도랄까. 물론 영향력은 없었지만. 오히려 인노켄티우스가 통치자와 그리스도 사이를 단절한 것은 훗날 왕권을 강화하는 쪽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래도 인노켄티우스를 탓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차피 왕권은 강화될 것이었다.

대관식을 덜 중요한 문제로 생각하게 된 교회법학자들은 성직자 정치적 교황의 전권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이들은 황제가 오직 도유에 의해서만 교황으로부터 물질적으로 검의 권력을 수여받았다고 생각했기에 황제의 축성을 선호했다. 또 다른 교회법학자들, 두 개의 보편 권력 사이의 균형을 선호했던 이원론자들은 황제의 권력이 선출 행위를 통해서 단지 신으로부터만 유래했다고 생각했으므로 이전 시대의 황제들은 축성이 없었을지라도 완전한 권력을 가졌다는 것이다. 왕권법을 언급하며, 대관식 이전의 선출-황제도 마로 그 선출에 의해서 검의 완전한 권력과 통치의 완전한 권한을 획득했는데, 선출에 의해 모든 권리가 위임양도되었기 때문이라 지적했다. 황제권은 교황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 아니며, 군주는 교황에 의한 축성 이전에 참된 황제이며, 로마에서의 도유는 칭호와 교황의 승인 뿐이라 결론지었다. 성직자 정치론자와 이원론자의 의견은 자주 중첩되고 변경도 있었다. 교회법학자들은 선출-황제의 유형대로 축성 이전에 권한이 제한되었던 선출-주교를 생각했던 반면, 선출된 교황은 그 순간부터 모든 권한을 행사했다고 생각했다. 오랜 시간이 걸려 군주의 황제권과 통치 기능의 행사가 실제로 로마에서의 대관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학설이 구체화되었고, 『교령집』에 대한 요하네스 테오토니쿠스의 주석에도 수록 보급되었다.(321-323)

오히려 성직자정치를 주장하던 사람들, 성직지상주의자들은 황제에게 제대로 축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으로써 권위를 확보하려 했던 것. 동시에 이원론자들은 어차피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권리이므로, 축성과 도유는 승인에 불과하다고 결론지었다. 이때 아직 도유받지 않은 선출-황제의 권한에 대해서는 권한을 얼마나 행사할 수 있는지 살짝 갈리지만, 권한 행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아쿠르시우스는 지배자의 통치와 재위 기간이 축성된 날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오래된 전통에 동의했으며 군주의 특권은 대관 이전에 유효하지 않은 것이라 간주했다. 이런 관념이 살아남은 이유는 그의 권위 만은 아니고, 특정한 정치적 집단의 목적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2세가 사거한 후 제국의 대공위 시대 동안, 로마에서의 대관이 60년 이상 중단되었을 때, 제국의 비독일 지방(부르고뉴와 이탈리아) 군후들은 선출된 황제, 즉 로마인의 왕rex Romanum이 대관 이전에 독일 외부에서 집행권과 재판관이 결여되어 있다는 이론을 내놓았다. 이는 그저 황제의 대군주권을 회피하려는 것이었지만, 이탈리아에서 강대했던 앙주의 카를로Charles of Anjou에게 이로웠다. 이 시기에 법학자들은 군주의 대관 이전의 권리라는 문제에 몰두했다. 교회법학자들만이 아니라 로마법학자들과 봉건법학자들도 요하네스 테오토니쿠스의 주석을 본으로 따랐다. 두란두스는 실제적 이유로 군주가 축성 이전에 완전한 권력을 향유했다고 말했는데, 그렇지 않으면 합스부르크의 루돌프의 성좌에 대한 기증이 무효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올드라두스 데 폰테는 찬반양론을 상세하게 논했다. 그의 스승 야코부스 데 아레나는 대관 이전 군주의 권력에 찬성했고, 기벨린당[황제파]인 피스토이아의 퀴누스는 이를 지지했는데, 왕권법을 통해 인민에 의해 선출된 한 사람은 대관이 없을지라도 완전한 주권자의 권리와 권력을 향유했다고 결론지었다. 결국 이원론적 교회법학자들의 학설은 반-교황절대권주의자들을 위한 표어이자, “왕은 자신의 왕국에서 황제”라는 격언을 옹호하는 표어였다. 이세르니아의 안드레아스는 “황제는 대관받기 이전에 왕이며, 대권과 국고를 가졌다”, 황제와 왕은 동등했고, 황제는 자신의 제국에서 왕이었을 뿐이라 말했다. 루카스 데 페나는 지배자가 왕조 또는 선출에 의해 전해진 칭호 만으로도 신 만으로부터 유래하는 전권을 지상에서 신의 자리에서 지녔고, 교회적 심사, 강복, 대관 없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했던 법률학자들을 언급했다. 파리의 요한은 왕은 도유없이도 왕이며, 많은 그리스도교 나라에서 도유가 전혀 실시되지 않았다고 선언했는데, 이는 반-성직자 정치론적 경향이었다. 선출에 의한 황제 권력을 주장했던 법학자들이 반드시 반-교황절대권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 이론은 1338년 최종적으로 렌세에서 독일의 선제후들이 황제의 권력과 존엄[위]은 신으로부터 직접 유래했고 군후들에 의해 합법적으로 선출된 한 사람이 황제의 모든 권력, 권리, 특권을 교황의 인가나 승인 없이 지녔다고 포고했을 때, 바이에른의 루트비히가 「독일왕 선출법」에서 선언했을 때 승리했다. 여기에는 오캄의 윌리엄과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 등도 합류했다. 1338년 제국의 공식입법은 이 쟁점을 해결했다. 바르톨루스는 명확하지 않았고, 발두스는 모순적이기도 했지만, 대관 이전의 황제는 독일 군후들이 때때로 명령권이라 불러왔던 권력들의 복합체인 일반적 통치권 만을 향유했다고 선언했으며, 로마의 대관은 약간의 광휘와 영예의 증가일 뿐, 황제의 권위의 참된 본질은 선출에서 도달한 일치에 의해서만 유래했다고 밝혔다.(324-328)

군주의 대관 이전의 권리 문제는 실제적인 것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 사후 60년간의 대공위 기간 동안, 누군가는 실제적 통치권이 있었고, 이들은 대공위를 이용하려고 했다. 가장 대표적 인물이 교황이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불러들여서 프리드리히 2세의 자손들의 호엔슈타우펜 왕가를 무너뜨렸던 앙주의 카를로였다. 황제가 대관을 받아 등극한다면, 정당성을 잃을 수도 있었던 그의 권력과 그 배경의 교황과, 뭔가 복잡한 이야기가 생겼을 것 같다. 하지만 법학자들의 견해는 도유와 대관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쪽으로 시간을 거쳐서 모아지게 되고, 마침내 1338년 제국의 공식 입법으로 바이에른의 루트비히의 칙령으로 선출에 의한 황제의 권력과 존엄[위]을 확인하게 된다. 인노켄티우스가 부정했던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결국 황제 및 왕과 하느님을 직결시키게 된다. 언제나 그랬듯.

대관 이전 황제의 권리에 대한 공위기 교회법학자들과 로마법학자들의 논의가 유럽 왕국의 정치적 결정에 영향을 미쳤는지는 말하기 어렵지만,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왕의 치세 및 완전한 권력의 행사를 교회적 축성으로부터 절단하려 시도했을 때, 보조적으로라도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1270년 아프리카에서 성왕 루이가 사거했을 때 튀니스 해안에서 앙주의 카를로의 인도를 받고 있던 필리프 3세는 즉시 완전한 권력을 장악했고, 모든 권리와 특권을 지녔다. 그는 관례와 달리 자신의 재위기간은 축성된 날로부터가 아니라 즉위한 날로부터 산정하기 시작했다. 1272년 헨리 3세가 사거했을 때, 성지에 있었던 아들 에드워드 1세는 즉위한 그날(아버지의 매장일)에 왕의 완전한 권위와 권력으로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도 즉위한 날부터 재위기간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 모두 왕의 즉위와 대관 사이에서 생겨나는 공위기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대관의식을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중세후기의 풍부함, 국가의례의 가득찬 상징, 궁정풍이며 종교적 장관에도 불구하고, 전례적 왕권의 생생한 본질은 증발하고, 세속적인 즉 정치적이고 법적인 고려들이 우세하여 의례로부터 국헌상의 가치 대부분을 박탈했다. 새로운 왕의 통치는 신과 인민에 의해 합법화되었다.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가 말한 것처럼, 교회는 단지 표명, 증언하기만 하면 되었다. 새롭게 창설된 왕조의 기사단들은 궁정풍의 장관과 화려함을 전시하여, 대관은 새로운 추진력을 획득했다. 에드워드 쿠크가 말했던 대로, 대관식은 왕의 가계를 장엄하게 만드는 것, 즉 왕조의 준-종교적 고양을 위한, 왕조에 결부된 신적 권리의 표시를 위한 매개체로 도움이 되었다.(328-330)

그리고 이제 1270년대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왕위계승에서 실제적인 이유로, 대관없이 왕위계승이 이루어진다. 마침 왕위계승자가 둘다 잉글랜드와 프랑스르 떠나 십자군 원정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의 치세와 재위기간을 대관이 아닌, 즉위한 날로부터 시작하게 된다. 실질적인 이유가 분명하다. 성지에서 돌아오는 데, 1년은 족히 걸릴 테니, 그 동안이 문제가 아닐까. 이 과정에서 대관의 장엄함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이제 그것은 방향을 틀어 왕의 가계, 왕조의 준-종교적 고양을 위해 사용되게 된다.

어떤 특별한 제정법이나 포고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실상de facto 1270년 프랑스와 1272년 잉글랜드에서 왕위계승이 장자의 생득권이었음을 인정했고, 지배하는 제왕의 죽음 또는 매장에 의해 아들이나 적법한 상속자는 왕이 되었다. 계승에 중단도 있을 수 없었고, 법적으로 유언자와 상속자는 하나의 인격으로 간주되었으며, 철학적으로 지지되던 관점은 사법에서 공법으로 이전되었다. 짧은 공위기를 일소하고, 대 공위기의 가능성도 제거했을 때, 자연적 신체로서 왕의 연속성이 확보되었다. 왕에 대하여 시간이 흐르지 않으니, 왕조에 대해서도 또한 흐르지 않는다. 이때 이후 왕의 참된 정당성은 교회의 승인 축성이나 인민의 선출과 독립적으로 왕조적이었다. 파리의 요한은 왕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개인 내지 가문으로 왕을 선출하는 인민으로부터 나왔다고 말했는데, 왕조의 선택이 한 번 인민에 의해 이루어진 후, 선출은 중지되었다. 어떤 개인이 세습의 권리에 의해 조상의 왕좌를 계승했던 것은 신에 의해서 된 무엇이라는 11세기의 견해는 브랙턴에 의해서 자주 인용되는 오직 신 만이 상속인을 창출할 수 있다로 요약되었고, 마침내 크랜머 대주교는 인격에 신의 도유받은 이는 신에 의해서 선출되었고, 그의 영의 은사를 부여받았다고 주장했다. 선제후의 투표권 행사에 현현했던 성령은 이제 왕의 혈통 그 자체 속에, 자연과 은총에 의해서 자리잡았다. 왕의 피는 신비한 액체였다. 프리드리히 2세도 황제의 가계와 왕의 가계 전반의 고귀함을 극찬했다. 그의 주변에서 왕의 피 속에는 특정한 왕의 특성과 잠재능력이 깃들어 있어서 이것이 왕이라는 인간의 종을 창출한다는 믿음을 내포한 철학적 학설을 왕조의 관념과 결합하기 시작했다. 이를 인용한 특정한 학설이나 출처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어떻든 비합리적이면서 물질적인, 특유한 과학적 신비주의는 왕조적 정통주의라는 발아기의 관념에 사로잡혔다. 피에르 뒤부아는 프랑스 왕족이 평민 만이 아니라 다른 세습군주 보다 자연적 육체적으로 탁월함을 증명하기 위해 점성술과 풍토학적 논거를 모았다. 이 시기 프랑스 이론가들은 왕조 스콜라학의 정교한 구조를 만들어 냈는데, 카롤루스 대제의 혈통, 신성한 왕들, 그리스도에 의해 이끌려진 일족, 하느님이 천상의 기름을 수여한 거룩한 왕가, 교회조차 없는 기적적 은사를 받은 왕의 가계였다. 잉글랜드에서 이런 설명이 발견되지 않았으나, 장자에 관해 왕관에 대한 세습적 권리는 파기할 수 없는 권리이고 불문법일지라도 논의의 여지가 없는 왕국의 법률로 깊이 뿌리내렸다.(330-333)

철학적 논의가 먼저 정당화한 것은 세습과 상속의 권리였다. 선출이 아니라는 데, 주목하자. 그러니까 사법의 영역에서 먼저 실질적인 이유로 왕위세습의 정당성이 확보된 후에, 이제 공법의 영역으로 이전되게 된다. 이제 선출은 왕 한 사람이 아니라 왕가 또는 왕조를 선출한 것으로 이해되게 된다. 멀리가지 않아도 된다. 조선왕조 내내 효가 충보다 앞섰다는 사실을 기억해 보면, 이점에서 다르지 않았다. 왕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도 효였다. 왕가의 중요성은 이제 왕가의 신비화로 이러지게 된다. 흔히들 왕에게는 푸른 피가 흐른다고 하질 않던가. 프랑스의 왕가는 카롤루스 대제로, 다시 그리스도로, 당연히 노아와 아담과 이브로 이어질 판이었다. 잉글랜드도 나중에는, 위의 그림을 보라.

문제가 되는 것은 연속성의 원리이다. 중세 초기 공위기 동안 왕국의 연속성은 교회의 지도를 따르며, 그리스도가 간왕interrex으로 들어갔다. 이를 그리스도가 통치할 때로 표현했다. 통치하는 왕이 없는 한 그리스도가 통치한다. 참된 통치는 하느님에게 양도되었고, 왕국은 새로운 왕이 취임하기까지 최고의 신적인 주에게 귀속되었다. 최종적으로 1528년 피렌체 공화국이 의지하고 있었던 이상한 관념은 위험성이 있었다. 교황이 초월적인 간왕의 권리를 스스로 주장하고 공위기 시대 세속적 지배에 대한 대군주의 지위를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떠맡기 시작했을 때, 그리스도에게 왕국을 귀속시키는 것은 정치적으로 위협적인 현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그레고리우스 7세 치하에, 하인리히 4세가 파문당한 후, ‘우리의 주 교황 그레고리우스가 로마 제국을 차지할 때’라고 날짜를 나타내는 문서를 발견한다. 인노켄티우스 3세도 공위기간 동안 제국에 대한 황제의 권리를 태연하게 주장했고, 인노켄티우스 4세는 제국이 지상에서 그것의 참된 주인, 그리스도의 대리자에게 되돌아갔다는 성직자 정치적 결론을 도출했으며, 최종적으로 호스티엔시스는 공위기간 동안 교황의 대리권 이론을 확고하게 수립했다. 14세기에 이러한 이론은 정치적 편의를 위해 성좌가 단지 공위라고 간주했지만 실제로는 정규 지배자가 있었던 영토에까지 적용되었다. 바이에른의 루트비히가 잉글랜드의 왕에게 부여했던 에드워드 3세의 제국 대리직은, 그것이 교황직의 권리를 침해했기 때문에 교황 베네딕투스에 의해 반대되었다. 유사한 교황의 주장은 왕조적 승계의 연속성의 결과 공위기간이 완전히 존재하기를 그쳤던 왕국에서 자연스럽게 그 기반을 상실했다. 왕의 치세는 전임자의 서거나 그 익일에 시작되었다. 그때 이후 세습적 승계는 이론적으로 중단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결과 왕조적 연속성을 이유로 정치적 신체의 머리인 왕의 자연적 신체는 결코 죽지 않았다고 주장될 수도 있었을 것인데, 왕조, 즉 가문은 결코 죽지 않았던 통합체와 비교할만한 초-개인적 독립체와 유사했다.(334-336)

연속성의 원리가 가장 중요했다. 처음에는 왕의 공위기에 그리스도가 통치한다고 선언했다. 신앙의 표현이며, 왕권과 그리스도의 연결을 생각한 것이었다. 문제는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를 자처하면서, 간왕interrex를 맡아 통치권과 권위를 주장하면서 부터다. 후임 왕을 선택할 권리를 가지려고 하고, 서로 다른 파벌에게 뇌물도 받고, 유력 귀족이 후임 왕의 선출을 지연시키려고도 하고, 그토록 수많은 왕위계승전쟁 마다 교황이 빠지지 않았던 것을 기억해 보시라. 그레고리우스 7세가 하인리히 4세를 파문했던 시기를 자신의 치세라고 선언한 것을 보라. 교황이 끼어들어서 실제 문제를 발생시키고, 그와 결탁한 누군가가 국가에 혼란을 가져오는 이상, 이제 공위란 인정되어서는 안 되는 문제가 되었다. 사극에 흔히 나오는 말로 ‘나라에는 하루도 주인이 없어서는 안 되는.’ 이를 해결할 방법은 자연스러운 세습 뿐이었다. 왕조적 연속성은 정치적 신체의 머리의 자연적 신체가 왕조를 통해서 결코 죽지 않게 만들게 되었다. 그것은 왕관의 항구성으로 이어진다.

2025. 12. 27.

* 괄호 안의 숫자는 책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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