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H. 칸토로비치, 『왕의 두 신체』(5-3).


14세기 말에 만들어진 『프랑스 대연대기』에 묘사된 전사자들. 칸토로비치는 이 전사로부터 조국을 위한 죽음에 대한 설명을 이끌어 낸다. 황금박차 전투로도 불리는데, 이 전투에서 미왕 필리프 4세의 군대가 지금의 벨기에의 플랑드르 지방의 민병대 보병에게 쿠르트레에서 크게 패배했다. 이 시기는 프랑스의 필리프 4세가 권력을 강화하던 시기로 다음 해인 1303년에는 아냐니 사건이 일어났다. EKa는 이때 한 설교자를 통해서 조국에 대한 논거를 수립하는 데, 그는 갈리아주의 사제임이 분명해 보인다. 5장은 전체적으로 교권과 왕권의 분쟁 가운데 세번째 단계인 왕권이 결정적으로 승리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비록 그 첫머리에서 보니파키우스 8세의 대칙서 Unam Sanctam으로 시작하지만. 이때 이후로 아비뇽 유수와 분열을 거치면서 교황은 프랑스 교회에 대한 통제권을 사실상 잃었다. 바로 앞의 4장의 가장 중요한 인물은 프리드리히 2세다. 그는 왕권에 대해서 가장 우위에 있었다고 하는 인노켄티우스 3세의 보호하에 자랐고, 그가 황제로 선택했다. 그럼에도 프리드리히 2세는 역대 교황들과 끊임없는 갈등 속에 4차례나 파문 당했으나, 교황과 반목하거나 자신의 방식을 관철시키기를 멈추지 않았고, 주교 한 사람을 고해사제로 두기도 했다(그도 파문). 교황이 극도로 혐오한 일 중 하나가 십자군으로 가서 술탄과 협의한 끝에 예루살렘을 되찾은 일이다. 요즘 같으면 칭송받아 마땅한 중동의 평화지만, 당시 교황은 성지 예루살렘을 피로 되찾지 않은 그를 혐오했다. 십자군은 다음번에 떠난 프랑스의 성왕 루이가 파멸적으로 몰락한 후 끝나고 만다. 자신이 황제로 있는 독일로 가고, 이탈리아 북부를 통제하기 위해, 북부 이탈리아의 교황파 도시국가들과 전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매사냥 중에 급사한 후, 교황은 프랑스 왕가의 일원인 앙주의 샤를을 끌어들여, 호엔슈타우펜 왕가를 무너뜨려버린다. 3장의 10세기 오토 왕조의 수서본 채색장식화에 대한 해설은 교황권이 커지기 이전의 일이며, 노르만 무명씨는 성직서임권 투쟁시기이기는 하나 왕권을 옹호한 인물이었다. 4장의 솔즈베리의 요한도 교속분쟁의 관점에서 논의되는 것이 아니다. 즉 3장, 4장, 5장에서 그리스도, 법, 정치체로 이어지는 논의 배경에는 교황권과 왕권의 다툼이 있지만, EKa는 이를 개략적으로 묘사하는데도 관심이 없고, 특히 교황권 부분에 대한 설명도 왕권에 관계된 부분에 한 해서만 간략히 언급할 뿐이다. 3, 4, 5장은 9세기부터 14세기까지 이어진 왕권이 교권을 뚫고 다시 드러나는 과정 속에서 사상적으로 논할 필요가 있는 부분만 선택해서 기술하고 있으며, 3장과 4장 사이에 있는 교황권 전성기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도 없다. 어쩌면 5장의 가장 중요한 배경은 프랑스 교회의 ‘갈리아주의’라는 생각이 든다.

Ernst H. Kantorowicz, The King’s Two Bodies: A Study in Mediaeval Political Theology,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57, “V. Polity-Centered Kingship: Corpus Mysticum, 3. Pro patria mori.”

제5장 정치체 중심 왕권: 신비체

3. 조국을 위한 죽음

종교적 및 법적 조국 PATRIA RELIGIOUS AND LEGAL

도덕적, 정치적 신체, 신비체나 유기체론, 단체론적 국가관념과 독립적이고 새로운 정치적 헌신의 대상이자 준-종교적 감정의 대상으로서, 조국patria으로서의 왕국이라는 관념이 등장했다. 고전 고대에 조국은 모든 정치적, 종교적, 윤리적, 도덕적 가치의 총합이었지만, 중세 봉건 시대 내내 영주와 봉신 사이의 개인적 유대가 정치 생활을 결정했던 때, 조국이라는 고대의 이념은 거의 사라졌다. 조국이라는 단어는 중세 시인이나 스콜라 학자들, 지방을 가리키는 말로 일상 언어에서도 존재했지만 정치철학적 배경은 없었다. 개인적 영주를 위한 봉건 가신의 죽음은 조국을 위해서라기 보다 영주를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조국이라는 관용어가 이전의 감정적 가치를 유지하는 영역은 교회이다. 초기 교회와 교부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인의 참된 조국은 하늘의 왕국이며, 예루살렘의 천상의 도성이다. 장례식에서 사제는 죽은 자의 영혼을 받아 낙원의 조국으로 인도하도록 천사들에게 명령해달라고 하느님에게 간청했다. 복자와 성인의 공동체는 영혼이 가입하기 원했던 천상의 조국의 시민 집회였다. 하늘에 있는 공통의 조국을 위해 순교자들은 피를 흘렸는데, 보이지 않는 정치체를 위해 자신을 내놓았고 신앙을 위해 하느님인 주 때문에 죽었던 그리스교인 순교자들은 시민적 자기-희생의 진정한 모범으로 남았다. 그리스도교 교리는 국가[政體]polis라는 정치적 관념을 다른 세계로 이전시키고 하늘의 왕국으로 확장함으로써, 고대 세계의 정치 이념을 충실하게 저장했다.(232-235)

조국patria이라는 논쟁적이면서 근대 국민국가의 수립과 국민주의, 민족주의, 내셔널리즘의 모든 것을 이루는 단어는 다시 시작될 때부터, 준-종교적이었다. 오늘날에도 내셔널리즘이 종교와 유사하듯이. 고대의 조국이라는 단어가 중세 초중기를 지나는 동안 보존된 곳은 교회였다. 교회에서 조국이라는 말은 고대적 정치이념을 담은 채로 종교의 색채를 입힌 후, 중세 후기에 다시 세속세계로 되돌려졌다.

종교에서 정치로의 변화는 십자군이 계기였다. 성지의 수호 또는 긴급사태를 위한 십자군세의 모범을 따라서, 서방 왕국에 왕국의 수호(또는 긴급사태를 위한) 과세가 도입되었다. 왕인 그리스도의 왕국, 즉 예루살렘과 성지에 좋은 것은, 시칠리아, 잉글랜드, 프랑스 왕의 왕국에 좋은 것이었다. 13세기 중엽 프랑스에서 조세는 종종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서 또는 태어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서 부과되었다. 조국이라는 단어는 교회법에서 발견되었으며, 로마법에서 매우 흔했다. 12세기 후반 이래 정당한 전쟁bellum iustum이라는 관념을 논의할 때, 교회법학자들은 불가피하고 긴급한 필요성이 있는 경우, 신앙과 교회를 수호하기 위해서 만이 아니라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서도 전쟁이 정당되었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긴급사태인 경우 황제가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새로운 조세를 부과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미왕 필리프 시대 프랑스의 경우 조국이라는 단어는 실제로 왕국 전체를 의미하게 되었고, 영토적 프랑스 군주국이 스스로를 모든 신민의 공통의 조국이라 선언하고 조국의 이름으로 예외적인 복무를 요구하기에 충분했다. 잉글랜드에서 그러한 용어법은 대체로 같은 시기의 법률 언어 만이 아니라 문학에서도 발전했고, 브랙턴은 법률 자료로부터 끌어내서 조국이라는 단어를 당연한 것으로 사용했다. 그는 봉건 영주로서 마땅한 복무와 조국을 수호하고 적을 억압하기 위해서 왕에게 속하는 복무 및 해외에서 왕에 대한 영원한 복무(성지 수호)도 인정했다. 프랑스에서 해외의 성지의 거룩한 땅과 정다운 프랑스의 거룩한 땅은 모두 감정적 가치로 가득하다. 프랑스 왕국 프랑키아는 자유인franci의 나라였음을 시사했는데, 신에 의해 신성한 프랑키아, 신으로부터 축복받은 왕국처럼 나타났다.(235-238)

십자군은 논란이 많은 주제지만, 그 중심에 교황권이 놓여있다는 것 만은 분명하다. 칸토로비치는 여기세 세 가지를 연결시킨다. 그 하나는 과세이다. 뒤에서 더 자세히 말하겠지만, 봉건시대에 과세란 상속 등의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부과되던 것이다. 십자군을 통해 서방세계에 과세가 행해진다. 그 근거는 비상사태 또는 긴급사태이고, 이러한 사태가 이루어진 성지는 모두의 조국이다. 과세-비상사태-조국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가 연결되기에 이른다. 이런 전쟁은 정당한 전쟁이다. 세 단어는 당연하게도 성지에서 영토적 또는 영역적인 군주국으로 이전된다. 이러한 이전이 성공적이려면, 신민들이 세금을 내도록 하려면, 성지를 대체하는 조국이야 말로, 준-종교적인 감동을 주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 역시나 모든 시대에 핵심은 돈이었던 것. 정기적인 세금이 없던 봉건군주가 왜 자신이 지배하는 지역을 순회하면서 궁정이 돌아다녔겠는가? 실상 돈과 권력의 결합이 배경이었다.

교회에 대한 복무에서 신의 대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 기사에게 어떤 종교적 영예를 부여하는 것은 십자군 이전부터 관례였으며, 십자군을 통해 기사로부터 대중에까지, 전투에 종사하지 않았던 계급에게도 확대되었다. 불신자에 대항해 싸우며 왕인 그리스도에 대한 복무로 성지의 대의를 위해 죽은 십자군 전사는 천상의 낙원와 순교자의 관crown을 기대했다. 교리의 적절성과 무관하게 십자군이 낙원으로 승천한다는 믿음은 모두에게 공유되었다. 단테도 자신의 전사한 조상을 화성천에서 만난다. 거룩한 대의를 수호했던 자신의 영주를 위해 스스로를 바친 봉건가신은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바쳤던 순교자와 비교되었는데, 이는 『롤랑의 노래』에도 등장했다. 카롤루스 대제의 영웅전설에서 전사들은 사라센인과 싸웠기 때문에, 십자군 전사로 여겨졌고, 특권도 향유했다. 이는 동시에 지고한 주, 카롤루스 대제, 정다운 프랑스의 황제 샤를을 위한 죽음이었으니, 이들의 순교에 국가적인 특색도 부여되었다. 『브리타니아 열왕사』를 쓴 몬머스의 제프리에게 조국은 “도서 전체의 군주국”이었는데, 색슨인들이 쳐들어왔을 때, 주교는 군인들에게 동포-주민들을 위해 경건과 조국의 용맹스러운 수호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색슨인들이 이교도였음에도 신앙을 위한 죽음은 조국을 위한, 즉, 도서 전체의 군주국을 위한 죽음이라는 관념에 덮였다. 그들의 죽음은 형제를 위한 자기희생으로 신앙 보다는 참사랑caritas의 행위로 나타났다. 예전에 십자군과 관련하여 때때로 형제애라는 울림이 있었다. 샤르트르의 이보는 『교령집』과 『파노르미아』에서 신앙의 진리와 조국의 구원 및 그리스도교도의 수호를 위해 죽은 자들에게 천상의 보상을 약속하는 항목들을 모았고, 그라티아누스의 『교령집』에 전해졌다. 하지만 참사랑이라는 그리스도교의 덕이 정치적이 된 것은 13세기이며, 정치적 조국을 위한 죽음을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신성시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더욱 활용되고 활성화되었다. 조국에 대한 사랑은 참사랑의 근원에 기초하고 있다. Amor patriae in radice charitatis fundatur. 조국에 대한 사랑의 신학적 표준이 수립된 것은 루카의 톨로메오의 고찰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의견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238-243)

전사자-순교자 도식이 수립되는 것은 십자군을 통해서이다. 이교도 이슬람과 싸운 카롤루스 대제의 전사자와 이교도 색슨인과 싸운 아서왕의 전사자 역시, 신앙을 위한 죽음과 조국을 위한 죽음이 중첩되는 지점에 있다. 이때 이 죽음은 형제애를 넘어서서 참사랑caritas의 표현이 된다. 참사랑은 정치화되기에 이른다. 이 연결과정에서 EKa는 루카의 톨로메오에 주목하는데,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저술하던 『군주통치론』을 사후에 이어받아 저술한 인물이다. 아퀴나스와 루카의 톨로메오를 경유하여, 조국에 대한 사랑이 참사랑의 근원에 기초를 둔 것으로 인정된다.

조국에 대한 문제는, 아퀴나스의 시대 이후에 보다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아퀴나스 자신이 빈번하게 저술하는 데, 정치[공동체]의 보존을 위해 유덕한 시민이 죽음의 위협 앞에 나설 것을 요구했고, 참사랑과 거의 구별할 수 없는 경건의 덕이 부모와 조국 모두에 대한 헌신과 경외를 고무하는 힘이라 생각했다. 파리의 장엄 박사 겐트의 헨리쿠스Henry of Ghent는 그리스도교도의 아크라 퇴각과 함락을 기점으로 삼아, 군인의 희생이 사랑에 의해 명령받은 것이라면서 그 관대함을 찬미했고, 동포를 위한 군인의 희생이 참사랑과 신앙의 일임을 「아가」를 인용하여 입증했으며, 조국과 영성을 보호하기 위해 정당한 전쟁을 옹호했다. 그는 고대 저자들의 격언도 인용하는데, 베게티우스와 플라톤을 인용하며, 조국은 나의 생명 보다 더 소중하다는 키케로의 신조도 수용했다. 하지만 그는 주로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논거를 중심으로 했는데, 조국을 수호하기 위한 죽음은 참사랑의 일로 여겼고, 자신의 동포와 공동체를 위한 한 시민의 희생을 그리스도의 희생과 비교하여, 조국을 위한 죽음에 최종적 축복을 부여했다. 따라서 13세기에 순교의 관이 세속 국가의 전쟁 희생자에게 내려지기 시작했다. 겐트의 헨리쿠스의 논거에서 인문주의자의 음조도 들린다. 단테는 로마의 데키우스 가문처럼 조국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친 이들을 가장 신성한 희생자라 말했는데, 이는 조국을 위한 전투Pugna pro patria라는 표어를 가진 것으로 여겨지는 카토를 따른 것이다.(243-245)

조국에 대한 문제를 참사랑과 경건으로 연결한 아퀴나스 이후에, 13세기 말 파리에서 활동했던 겐트의 헨리쿠스는 『자유토론문제Quodlibet』의 한 곳(XV, q. 16)에서 영화로도 여러 번 묘사된 아크라 함락을 설명한다.(라틴어 Acra로 읽어야 한다. Acre를 영어로 읽으면 아커이다.) 이때 군인들의 희생을 참사랑과 신앙의 일로 옹호하게 된다. 여기서 조국을 위한 죽음이 참사랑과 연결되는 신학적 근거를 가지게 된다. 세속 국가의 전쟁 희생자가 순교자가 되는 시점이 이때이다. 헨리쿠스의 논거에서는 인문주의자들의 영향도 보이는데, 마찬가지로 단테도 데키우스 가문을 칭송했고, 이는 카토의 영향이었다. 십자군 순교와 조국을 위한 순교가 이어지는 연결고리에 참사랑caritas이라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 존재하고, 이를 보완하는 논거로 인문주의와 고전 로마가 동원되는 것이다.

로마법도 애국적 윤리로 풍부했는데, 『법학제요』는 국가[공유물]를 위한 전투에서 쓰러진 자는 영광으로 영원히 사는 것으로 이해된다고 명시했고, 『학설휘찬』 안에는 조국을 위해 아들은 아버지를 죽일 수 있고, 아버지는 아들을 죽일 수 있다고 말하는 법률이 있다. 중세 법학자는 이를 자기방어를 위해 경우에 한해 갸륵한 행동이라 말했지만, 인문주의자들은 때로 피에 굶주리고 과열된 탁상 애국심을 보이기도 했다. 법학자들의 취향에는 맞지 않았지만, 신이나 조국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참상은 새로운 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발두스는 군인이 조국을 위해 적을 죽이는 것은 창조주에게 희생을 바치는 신적 업무와 마찬가지라며, 이는 참사랑의 이름으로 행해졌는데, 출생의 조국을 보호하기 위한 공적 참사랑publica caritas이다. 성지의 기준은 제한된 한도 내에서만 세속 왕국에 이전될 수 있었고, 다른 기준은 로마에 의해 규정되었는데, 로마에 합당한 것은 발아기 국가적 군주국에도 합당했기 때문이고, 로마 제국의 이념형태는 프랑스, 시칠리아, 잉글랜드, 스페인 왕국에 이전되었고, 적용가능한 것이 되었다. 『학설휘찬』은 두 조국을 구별했는데,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 즉 그의 조국 또는 고유한[자기자신의] 조국과 도시 로마, 공통의 조국이다. 모든 개인은 자신의 지역적 조국을 가지고 있지만, 제국의 모든 시민은 로마를 공통의 조국으로 인정했다. 13세기 교회법학자는 모든 사람이 황제 아래가 아니라 교회 아래에 있다고 말하기도 했고, 프랑스 법률학자들은 공통의 조국으로서의 로마를 개별적 군주국으로 이전했고, 파리가 마침내 프랑스가 왕국의 왕관이 프랑스인들의 공통의 조국이 되었다. 새로운 제한된 영토적 조국, 왕관의 모든 시민들의 공통의 조국이 의제적 보편 제국의 초국가적 유대를 대신했다. 모든 군주는 자신의 조국에서 황제이다. 이러한 관념에는 조국애적 윤리적 규범도 포함되어 있다. “정의는 조국과 형제들[동포]를 수호하는 것이다. 신학, 스콜라 철학, 법의 교향곡에는 인문주의가, 조국이라는 이념형태에는 고전 문헌의 영향이 있다. 인문주의는 조국 숭배와 국가적 우월감에 영향을 미쳤고, 조국을 위해 죽어간 전사들의 영웅화는 그들의 업적이다. 로마의 조국애가 근대의 세속정신을 틀지웠다. 하지만 인문주의의 영향은 신학과 법률학의 뒤를 따른 것이다. 하나의 순교로서 조국을 위한 죽음의 준-종교적 양상은 교회의 가르침, 교회적 형태를 세속의 정치적 신체에 적응시킨 것에서 유래했으며, 특히 주도적인 정치인들이 종교적 정서의 힘을 사용하고 새로운 신비체인 영토적이며 국가적 군주국의 정치적 목표에 활용하기 시작했던 프랑스에서였다. 법학자들과 신학자들이 전에 어떤 조국에 대한 헌신과 어떤 조국을 위한 죽음에 대해 종교적이고 법적 근거를 정당화하기 위해 제안했던 논거들이 집약되고, 요약되어, 명확하게 정의된 조국, 즉 프랑스의 군가적 군주국에 복무하는 일관성있는 체계와 모순없는 이념형태로 배치죄었다.(245-249)

로마법이 신학과 십자군의 뒤를 이었다. 3장과 4장의 주제이다. 첫번째는 조국을 위한 죽음을 정당화하고 칭송하는 것으로 이는 『법학제요』에 근거를 둔다. 여기에 인문주의자도 뛰어들었지만, 발두스가 이를 공적 참사랑publica caritas라고 결론 짓는다. 참사랑이되 조국에 대한 참사랑. 두번째는 공통의 조국 로마를 군주국 프랑스로 가져오는 것으로 이는 『학설휘찬』에 근거를 둔다. 살고 있는 도시를 넘어 공통의 조국이었던 로마는 제국의 이념, 교회의 이념을 경유하여 군주국에 도달하게 된다. 프랑스가 공통의 조국이 되기에 이른 것. 이 순간 프랑스는 로마가 누렸던 특권을 향유하게 된다. 로마의 조국애는 근대 세속정신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종교적 정서, 준-종교적 양상을 활용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는 새로운 신비체인 군주국의 든든한 근거로 서게 된다. 법학과 신학의 모든 논거들이 모여서 응축되어 프랑스 군주국의 논거가 된다.

애국적 선전 PATRIOTIC PROPAGANDA

1302년 필리프 4세가 쿠르트레에서 패배한 후, 한 프랑스 성직자가 정치적 선전을 강화하는 설교를 행했다. 필리프는 모든 신민들의 조국애에 호소했고, 출생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모두에게 재정지원을 요청했다. 그때 조국이란 태어난 촌락이나 지방이 아니라 프랑스 왕국 전체를 의미했고, 노가레의 기욤은 나의 조국 프랑스 왕국을 수호하기 위해 죽을 수 있다고 반복해서 선언했으며,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자기 아버지를 죽였다해도 범죄가 아니라 공로였다고 설명했다. 프랑스 주교들은 프랑스의 모든 세력이 왕국과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동원되었을 때, 교회의 특권과 면제가 정지되는 것을 인정하는 서한을 성좌에 보냈다. 귈렐무스 두란두스는 『법률의 거울』에서 조국과 왕관을 수호하기 위해 왕이 취할 자격이 있는 예외적인 조치를 논의했다. 그 성직자는 프랑스인의 정당성과 대의명분을 입증하기 위해 설교하는데, 프랑스 왕은 신성했는데 이는 완벽하게 순수했기 때문이고 신성한 왕이 아버지이기 때문이고 기적을 행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가장 그리스도교적인 왕은 교회의 특별한 세습적 보호자였고, 왕의 질병이라는 연주창을 치유하는 왕의 기적은 프랑스 왕의 우월성과 지고성을 입증한다. 신성한 왕이 거룩한 왕을 낳았다는 주장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거룩한 왕의 대의는 정의 그 자체의 대의였다. “우리가 정의를 위해 싸우기 때문에 그들은 불의를 위해 싸우는 것이다.” 스콜라 철학적인 관념은 편리하게 플랑드르인들을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불신자들의 위치에 두었고 그 전쟁을 정의를 위한 십자군으로 만들었다.(249-253)

앞서 말한 황금박차전투, 승리한 플랑드르인들이 프랑스 기사의 황금박차를 수천개 모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 전투의 결과와 무관하게, 정치적 선전은 강화되고, 프랑스를 위한 재정지원 즉 조세로 이어진다. 아냐니 사건을 일으킨 노가레의 기욤도 조국을 위한 죽음을 여러 차례 선언한다. 이 과정에서 갈리아주의가 강화된다. 패배한 군대를 재정비하고, 왕국의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세는 프랑스의 교회와 주교들에게도 부과되어야 했고, 교회의 특권과 면제도 정지되기에 이른다. 당연히 교황과 갈등이 있지만, 우월한 군사력으로 진압되고, 보니파키우스 8세는 충격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이어진 교회의 아비뇽 유수. 프랑스가 지배하는 교황좌. 이 과정에서 종교적 정당화를 담당하는 설교자는 프랑스 왕의 신성함과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드높인다. 마르크 블로크의 『기적을 행하는 왕』으로 잘알려진 연주창이야기다. 다시 한번 이야기는 인문주의자를 통해 베르길리우스로 이어지고, 터무니없게도 플랑드르인은 불신자의 위치에 프랑스 군인은 정의를 위한 십자군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어디까지나 프랑스에서.

설교자는 왕의 정의의 귀결인 왕의 평화가 프랑스 왕국의 평화이자 교회의 평화, 학문과 덕과 정의의 평화라고 주장했다. 왕의 평화, 너희의 평화, 왕의 구원, 너희의 구원이란 성직자를 국가화하고 프랑스의 교회를 갈리아화하는 기조였다. 설교자는 프랑스의 왕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자는 교회 전체에 대항하여, 카톨릭 교회와 교리에 대항하여, 거룩함과 정의에 대항하여 성지에 대항하는 것이다. 모든 것에 대한 어떤 것의 일반적 동일시가 이루어졌다. 왕을 위한 전쟁, 프랑스를 위한 전쟁, 문화와 교육을 위한 전쟁, 교회를 위한 전쟁,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한 전쟁. 이 세상의 거룩한 왕국을 천상의 왕국의 모형으로 저 세상에 투영하기도 했는데, 잔 다르크는 프랑스의 거룩한 왕국에 대항하여 전쟁하는 자는 왕 예수에 대해 전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253-255)

전쟁과 정의는 평화에 대한 논거로 이어진다. 이는 다시 구원, 문화, 교육으로 이어진다. 파리 대학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에서 교육은 중요한 주제였다. 이때 왕에 대항하는 전쟁은 교회에 대항하는 전쟁이 된다. 실상 미왕 필리프는 교황과 끊임없이 대립하는데. 하지만 프랑스에는 교회, 거룩한 왕국이 투영되어서 프랑스 왕을 위한 전쟁은 신앙의 이름으로, 갈리아화된 교회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훗날 잔 다르크가 보여주듯이.

설교자는 필요하다면 프랑스의 거룩한 왕을 위하여 죽임당하는 것에 대비되어 있을 것을 요구했는데, 낡은 봉건적 유대가 아닌, 자연이성과 국가의 유기체론적 관념에 근거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자연이성은 신체의 사지가 머리를 위해 스스로를 위험에 드러낼 것을 요구했다. 왕국의 머리는 왕이다. 프랑스의 정치적 신체를 싸우는 것은 거룩한 왕으로 표상되는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이다. 성인이었고 정의의 투사였던 왕이 선두에 선 정치적 신비체를 위한 전장에서의 죽음은, 공식적으로 순교가 되었다. 정의의 의장에서 국가 이성의 관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노가레의 기욤은 모든 사람은 그의 조국을 수호할 의무가 있다고 선언했다. 1214년 이후 부빈전투 이후 제3신분인 시민들이, 그에 더해 성직자들도 프랑스의 국가적 정치적 신체의 사지로 가담했고, 프랑스인들의 조국 및 갈리아의 신비체를 수호하기 위해 재정적으로 기여해야 했다. 이에 대한 1302년 필리프의 칙령의 뒤에서 유기체적-단체론적 개념이 희미하게 나타나는데, 이는 1296년 왕의 법률학자 중 한 사람의 소논문에서 자신의 신체를 지원하기 거부하는 사지는 무익하고 마비된 것이라고 선언했다. 왕의 법률학자는 프랑스의 정치적 신체에 순응하지 않는 것을 대역죄로 낙인찍었으며, 프랑스 법학자들은 프랑스의 유기체적 성격에 호소했다. 갈리아주의 성직자는 보편적 교회의 신비체 안에 있었지만, 조국의 신체의 필수적 부분으로, 프랑스의 정치적 신체의 사지로 제시되었다. 조국의 신비체는 교회의 신비체에 대립하게 되었다.(255-258)

프랑스의 왕과 신민의 관계 왕과 영주 및 기사들 간의 관계가 재정립될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도입된 언어가 유기체론이다. 유기체론에서 사지는 머리와 직접 연결된다. 영주를 경유하지 않은 채로. 정치적 신비체인 프랑스를 위해 싸는 것은 성인인 왕을 위해 싸우는 것이며, 전장에서의 죽음은 순교가 된다. 이 과정에서 국가 이성의 관념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조국을 수호할 의무가 있으며, 제3신분 만이 아니라 성직자들도 사지에 포함되어 의무를 부담했다. 유기체적-단체론이 희미하게 나타난다. 정치적 신체를 거부하는 것은 대역죄가 된다. 이는 교회의 신비체에 대립하는 조국의 신비체였다. 유기체론이 도입되면서, 국가 안에 섬처럼 있던 성직자들도 신체의 일부분이 되고, 동일한 의무를 부담하게 된다. 아직 뚜렷하지 않지만, 신비체라는 이름으로 국가 자체를 정당화하려는 국가이성의 그림자가 엿보인다.

왕과 조국 REX ET PATRIA

노가레의 기욤은 몇 번이고 왕과 조국을 위해pro rege et patria 죽을 준비가 되어있다고 주장했다. 노가레는 전사로서, 기사로서, 자신의 봉건 영주를 수호하라고 의무지워져 있고, 프랑스의 정신적 신체의 지체로서 다른 프랑스인처럼 그 신체, 조국을 수호하라고 의무지워져 있었다. 왕과 조국을 위해서라는 표현은 근대까지 살아남았는데, 하나는 봉건적이고 다른 하나는 공적인 두 개의 층위가 겹쳐진 표현이다. [중세의] 왕은 왕을 위해서, 조국을 위해서 싸우고 죽을 수 있었으며, 왕조을 위해, 왕좌의 계승을 위해, 왕관과 왕의 존엄[위]을 위해 죽을 수 있었다. 싸우는 왕의 이상은 전체적으로 13세기에 의문시되지 않았다. 법학자들은 왕국의 공통선을 위해서 전쟁을 벌이는 자는 왕국의 왕관에 가장 자격있는 자라고 주장했다. 중세 후기나 르네상스 시대의 연대기에 싸우는 전사 왕들이 부족하지 않다. 실제로 조국을 위해서 생명을 바쳐야 하는 왕의 의무에 대해 철학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논의들 중 하나는 후에 교황 피우스 2세가 된 에네아 실비오 피코롤미니의 저작 『로마 제국의 기원과 권위에 대해서』에서 나타났다. 이는 이전 세기의 정치 문헌에서 유래한 것으로 국가[공동체]의 비상사태의 경우 군주는 공로가 있는 시민들의 사적 소유까지도 박탈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했다. 군주는 공적 이익에 따라 한 시민의 생명까지도 요구할 수 있다. 국가의 신비체의 머리인 군주 자신이 국가[공동체]가 요구할 때마다 자신의 생명을 희생시키도록 매여 있다. 그리스도가 자신이 이끄는 교회의 군주이자 지도자였음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가 자신을 희생했다고도 덧붙였다. 에네아 실비오는 지체들의 희생과 머리의 희생 모두를 거론했다. 국가[공동체]를 위해 자기자신을 바친 시민은 의심할 바 없이 그의 참사랑이 그리스도의 참사랑을 모방한 순교자가 되었다. 여기서 영적 신비체와 세속 신비체의 평행, 신비체의 신적 머리와 군주적 머리의 평행, 하늘의 초월적 공동체를 위한 자기희생과 지상의 도덕적 정치적 공동체를 위한 자기희생의 평행은 특정한 결론에 도달했다. 봉건적 관습은 여기서 쟁점이 되지 않았으며, 군주의 희생은 정치체 중심이었다.(259-262)

조국 곧 국가의 신비체를 위한 희생은 모두에게 적용된다. 노가레의 기욤 같은 봉건 귀족 영주에게도 왕에 대한 봉건적 가치를 위한 희생 뿐 아니라 정치적 신체에 대한 희생이 요구된다. 신민의 희생은 당연하며, 왕은 이것을 요구할 자격까지 갖추고 있었지만, 13세기에는 왕도 국가의 신비체를 위해 왕을 위해 싸울 의무가 있었고, 때로 희생되었다. 신비체를 위한 군주의 희생은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정당화되었다. 이때 군주는 그리스도의 모방자이자 순교자이며, 참사랑을 실현한다. 국가와 교회의 평행은 양자 모두에서의 자기희생으로 연결되는 데, 이때 주목할 것은 봉건적 관계와 봉건적 의무의 결여이다. 국가의 신비체 곧 정치체에 관한 논의에서 봉건적 의무와 가치는 설 자리를 잃는다.

조국을 위한 시민의 희생에 대한 정치적-법적 논의에 대해서도 왕과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위험에 노출할 것이 요구되었던 사람은 정치적 신체의 지체였다. 프랑스 법학자인 피에르 뒤부아는 전쟁이 일어난 경우 왕은 스스로를 위험에 노출하지 않고 군대에도 참가해서는 안 되며, 자신이 태어난 땅에 남아, 신의 영광을 위해 자녀의 출생과 교육, 군대의 준비에 종사해야 한다고 썼다. 평범한 시민은 조국을 위해 희생할 것으로 기대되었던 반면, 정치적 신체의 머리는 동일한 희생이 기대되지 않았다. 피에르 뒤부아의 경우 왕국의 편의성이 신적 모범 보다 높게 평가되고 있었다. 그의 관념이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다. 전쟁 중에 본국에 머물렀던 군주로는, 유스티니아누스의 모범이 권위있는 것일 수 있다. 위僞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에 대하여』에서 페르시아의 위대한 왕은 신의 하나의 대형으로 수사의 궁전에 머물면서 전세계로 권력이 뻗어나갔다. 13세기의 철학적 연애소설 『시드라크』는 왕이 싸우지 말고 군대의 배후에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싸우지 않는 왕이라는 관념은 점차 자리잡았다. 스스로를 전쟁의 위험에 노출시키지 않는 왕은 은연중에 신민들에게 일방적 희생을 요구했다. 정치적 신체의 지체의 머리를 위한 희생이라는 관념은 스콜라 철학 진영에서 극단으로 치달았다. 공인된 급진적 교황권 지상주의자인 아우구스티누스 트리움푸스의 주장에서는 머리가 신비체 전체를 삼켜버렸다. 중요한 것은 교회의 신체가 아니라 교회의 머리였고, 생명 자체와 생명의 연속성이 머리에만 의지하는 것 같다.(262-265)

왕의 희생은 곧 자취를 감추게 되고, 신민 곧 지체의 희생만 남게된다. 법학자 피에르 뒤부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위僞아리스토텔레스, 『시드라크』 등 모든 논거들은 한 가지 지점을 가리킨다. 왕은 전장에 나서서는 안 된다. 왕은 스스로를 위험에 노출시키지 않고, 상속자의 생산과 전쟁준비를 통해 왕국의 연속성에 보다 집중해야 한다. 이는 교황파 아우구스티누스 트리움푸스도 마찬가지였다.

피에르 뒤부아와 아우구스티누스 트리움푸스 모두의 배후에 머리에 부여된 연속성 문제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그럴 듯하다. 뒤부아의 경우 정치적 신체 전체를 위한 왕조의 연속성이 전쟁의 우발성에 왕이 노출되는 것보다 중요하게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 트리움푸스의 경우 연속성의 문제를 풀어내는 것이 어렵지만, 군대의 질서와 장군을 논하면서 장군 자신은 목표가 아니었고, 하느님 만이 궁극적 선으로 보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를, 교황이 대리자가 되는 유일자로 착각했는데, 그렇기에 교황이 가시적 교회의 선이라 보았다. 머리 만을 위한 순교는 신비체의 머리가 필멸하는 인간이자 하느님의 보좌의 불멸하고 영원한 고유자이기도 한 그리스도인 한에서 정당화되었다. 그리스도는 모든 시간에서 교회의 머리였지만, 필멸하는 인간인 교황은 신비체의 영원성을 주장할 수 없는 한정된 시간에서 교회의 머리였다. 유기체론적 학설이 정치적 신체 또는 신비체의 연속성을 제안했지만, 머리 혼자 만의 연속성은 아니었으며, 자연적 신체와 마찬가지로 사지는 머리를 보호하도록 속박되어 있었다.(265-267)

유기체론적 학설이 형성한 신비체에는 연속성이 중요했다. 왕은 필멸자였지만, 교회의 머리는 불멸하는 그리스도였기 때문에, 교황을 정당화하는 데는 다소간 어려움이 있었지만, 한정된 시간 속에서의 교회의 머리로 인정하는 편법으로 이를 넘어갔다. 6장에서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연속성이라는 주제가 떠오른다.

이 장을 요약하면, 첫째, 신비체의 관념이 교회론적 명칭을 사용하든 아니든 아리스토텔레스의 도덕적 정치적 신체나 정서적인 조국 같은 구체적인 어구를 선호하든 아니든 정치적 실체에 이전되어 적용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신학적, 법적, 철학적, 인문주의적 가닥들이 있었고, 로마나 제국의 이념형태가 영토적 군주국에 이전된 것도 중요했지만, 초기 단계에서 조국에 대한 공경의 주요 내용은 종교적 사상세계에서 유래된 것이며, 이러한 헌신의 동기는 역사의 어느 특정한 순간에 국가가 교회에 비교할만한 신비체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국을 위한 죽음이 의미를 가졌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한 죽음의 가치와 결과와 동등하다고 여겨졌다. 프랑스의 신체 안에 살고 있는 모든 프랑스인은 국가적 신체를 수호하기 위해 일어서야 했다. 둘째,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아닌 두 신체는 유기체적-단체론적 교회 개념에 달려있고,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의 교회는 13세기에 의미를 획득했다. 국가의 신비체가 등장했을 때, 신비체의 머리이자 신체 자체이기까지 했던, 군주는 그리스도와 평행했고, 국가[공동체]를 위해 희생해야 했다. 튜더 법학자들의 지적에 따르면 자살은 자연과 신에 대항했을 뿐 아니라, 신비체의 머리에 대항한 중죄였다. 그럼에도 그리스도 이중 신체로부터 왕의 이중 신체를 추론해서는 안된다. 국가에 대한 유기체적 개념에 기초해 왕은 정치적 신체의 머리로서 두 개의 신체를 가졌다고 표현한 관념을 찾을 수 없었다. 유기체론적 학설은 주교와 참사회의 관계와 달리, 머리와 사지를 분리하지 않았고, 봉건 대군주와 정치적 신체의 머리가 되는 왕의 두 권능은 왕의 권위의 이중양상을 시사하지만, 그리스도의 자연적 신체와 신비체의 어떤 유비도 없었다. 셋째, 의제적 인격으로서 지체를 넘어서는 추상적 의인화로서의 국가가 아퀴나스의 신비적 인격처럼 정치적 도덕적 인격으로의 이해를 가능하겠는가? 1300년경 국가는 의제적 인격이 아니라 유기적 또는 유기체적 전체였다. 국가와 지체는 별개로 존재하지 않았다. 왕국이나 조국은 인격화된 것이 아니라, 신체화된 것이다. 국가가 주로 신체로 생각될 수 있었기 때문에, 교회의 신비체와의 유비가 구성될 수 있다. 튜더 왕조의 법률가들도 왕의 두 신체에 대해 논했지, 왕의 두 인격에 대해 논하지 않았다. 이 용어법은 정치적 신체에 있는 머리와 사지의 오래된 유기적 통일성을 내버리고 이를 인격화된 국가의 추상화로 무모하게 대체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막아야 한다.(267-271)

교회의 신비체가 국가의 신비체로 이전되면서 준-종교적인 조국이 재등장했다. 그리스도의 두 신체라 할만한 것이 나타났는데. 아주 간략하게 결론만 말하면, 결국 교황권이 강화되고 성직위계제가 강화되면서 교회의 신비체는 정치체적 특성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EKa는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지만, 정치가 신비체를 먹어치운 셈이다. 그래서 교회개념에서도 유기체적-단체론이 나타나고, 조국이라는 이름의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단체는 훗날에는 법인격의 특성들도 가지게 되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의제적 인격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두 인격도, 인격의 이중화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 단체는 유기체적 전체였기 때문이다. 이 책의 주제가 ‘왕의 두 신체’임이 다시 한 번 강조된다.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 그리스도의 두 신체들이라는 개념은 국가의 신비체의 머리로 이전될 수 없었는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간의 문제였다. 교회의 신비체의 머리는 영원했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하느님이자 인간이기 때문이며, 그의 영원성은 신비체에도 영원성 또는 무시간성을 부여했다. 반대로 정치적 신체의 머리로서 왕은 필멸자였기에, 불멸성의 가치를 획득해야 했는데, 어떤 영원성이 왕에게 생겨나야 했다. 영원성 없이 천사적 성격을 가질 수 없었다. 정의와 법 만이 아니라 은총도 영원성의 가치로 존속하여, 새로운 군주국의 연속성을 구축하는 데 협조적이었는데, 신의 은총에 의한 지배권이라는 관념이 왕조의 이념형태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고, 결코 죽지 않는 정의의 연속성이 왕관의 연속성과 관련하여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정치체 중심 지배권이 번창할 수 있는 불멸성의 또는 연속성의 가치는 결코 죽지 않는 통합체에, 불멸하는 인민, 정치체 또는 조국의 영속에 부여되었고, 개별적인 왕은 그로부터 용이하게 분리될 수도 있지만, 왕조, 왕관 및 왕의 존엄[위]은 그렇지 않다.(271-272)

마지막에 말하는 것은 실상 6장 이하의 주제다. 연속성은 이제 시간의 문제가 되며, 영원의 시간과 천사적 시간을 왕에게 부여할 필요가 생겼다. 군주국 곧 국가의 연속성 문제가 생겨나게 되며, 왕조, 왕관, 존엄[위]에 대한 논의로 이어지게 된다.

EKa는 교황권에 대해서, 교권과 왕권의 충돌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가 신학과 교권을 정당화하는 논의에 대해서 간간이 언급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설명하려는 왕권과 왕에 대한 설명에 필요할 때에 한해서다. 9세기에서 14세기까지 이어지는 역사적 전개는 각자가 스스로 이해해야 한다. 그 과정과 국면들에서 한 장면, 한 장면을 캐내어서 왕권-신학의 수립과정을 논한다. 그에 필요하다면, 어떤 논의도 가리지 않고 문서고의 구석에서 먼지를 털고 꺼내서 독자에게 들이민다. 서양중세사에 대해서 과문한 나는 이 책 저 책을 뒤지고, 인터넷을 꾸준히 검색하면서 사건의 흔적과 영향을 헤매는 수밖에 없다. 프리드리히 2세가 그렇다. 중요한 인물인데도 삽화는 등장시키지 않으며, 자신의 저서도 언급하지 않는다. 더욱이 한국어로는 시오노 나나미의 책만 있는데, 재미있지만 찬양일변도라. 그래도 그거라도 읽어야만 따라갈 수 있다. 맥락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EKa가 여기서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조금이나마 파악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중세 구석구석에서 찾아내는 신학자들과 법학자들에 대해선 감탄만 나올 뿐이다.

여러가지가 흥미롭지만, 5장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인격화된 국가의 추상화로 직진하는 것을 막는 언급도 아주 흥미롭다. 이 책을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을 설명하는 것으로, 법인격으로서의 국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손쉽게 단순화해서, 모든 것이 왕의 두 신체를 통한 추상적 국가로 단선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요약하고 싶어하지만, 실상 가는 길은 꼬여있고, 겹쳐있고, 때로는 끊어졌다 이어지기도 한다. 결국 그렇게 된다고 해도 과거의 어떤 특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국민주의라고 옮겨지기도 하는 내셔널리즘이 만들어진 것이라서 허위의식이라는 주장과 실체라는 믿음 속에서 사람들을 종교 처럼 동원한다는 주장이 여전히 병존한다. 물론 18세기부터 20세기에 벌어진 일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이것이 얼마되지 않는 시간 동안 만들어진 것이고, 어떤 실체도 발견하기 어렵지만, 사람들이 정말 헌법이라는 추상적 구성물만 믿는다면, 그것을 위해서 그렇게 많은 피를 흘렸겠는가. 오늘날에도 지구상 어딘가에서는 국가의 이름으로 피를 흘리고 있고. 국가의 이름 조차 얻지 못한 정치공동체들은 그 이름을 얻기 위해 그토록 분투하고 있는데. 듣기 만해도 음험한 결말로 이어질 듯한 국가 실체론 내지 단체론적 실체론을 옹호하거나 주장할 생각은 손톱 만큼도 없지만, 추상화된 의제, 허구, 가상의 법인격이라는 유식자들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주제로만 한정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24년 12월 3일의 그밤 피흘릴 것도 각오하고 담장을 넘고 여의도에 모였던 대표자들과 시민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헌정질서 수호가 136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헌법이라는 문서 위에 추상적으로 구성된 의제적 정치체 만이었겠는가? 아니면 흘려온 피와 그 위에 쌓아올린 삶을 지키려는 것이었을까? 삶이 세련된 몇 마디 말처럼 단순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2025. 12. 24.

* 괄호 안의 숫자는 책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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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H. 칸토로비치, 『왕의 두 신체』(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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